조글로로고
꿈을 향해 달려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2월26일 08시26분    조회:107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김태욱

 

‘아름다운 추억’수기 응모작품(73)

                                김태욱

사람이 잠자는 동안 깨여있을 때처럼 움직이며 활동하는 심리적 현상의 련속을 꿈이란다. 그런데 나이 팔십을 먹고 련속 사흘이나 비슷한 꿈을 꾸게 되여 며칠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버렸다.

‘늙어서 신체기관이 로쇠해지는 징조가 아닌고?’

첫날밤에는 이리뒤척 저리뒤척하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신기하게도 고향마을 앞산에 있는 하얀 배꽃이 만발한 과수원에서 전지하는 꿈을 꾸었고 이튿날에는 림업과학연구소에서 사업하는 6촌 동생과 함께 파릇파릇 움 트는 묘포장을 거닐던 꿈을 꾸었고 사흗날에는 시찰을 내려온 많은 령도들앞에서 연구성과를 회보하던 꿈을 꾸었다.

소학교 5학년이던 1952년 9월, 학교에서는 ‘소미츄린’으로 유명했던 최일선과수원 견학을 조직하였다. 크고 달콤하고 시원한 사과배와 각종 과일들이 무르익어가는 과수원은 실로 별다른 세상이였다. 석쉼한 목소리지만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최일선선생은 너무나 멋있었다.“나도 저 아바이처럼 과수원예사가 되리라. 맛나는 과일도 실컷 먹고 자기자랑도 신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의 꿈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왕복 40리를 걸어다니던 화룡시 서성중학교 시절은 너무도 힘겨웠다. 그중 2년은 자연재해가 들어 영양실조로 등교 못할 때가 많았고 고중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가 <신경쇠약> 이라는 허무맹랑한 병에 덜컥 걸려 끝내 농촌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후 2년간 고향마을에서 농사일을 하였는데 인민공사에서 <원예대학> 을 만들자 나는 그 학교를 7개월가량 다니다가 그 학교가 페교되자 인민공사 문화관 과외극단 창작원 겸 배우로 활약하였다.

과외극단에서 하는 일이란 낮에는 공사 묘포장에서 일하고 저녁과 여가시간을 리용하여 공연종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면부족과 과로가 겹치니 신체가 매우 쇠약해졌다. 배우고 싶은 과수기술이고 문학창작이지만 신체 때문에 2년만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나의 병명은 <관심병>과 <폐결핵6형>이였다. 그 병을 치료하자면 <마이신>이 있어야 했다.

그때 나는 정말 절망에 빠졌다. 대기근시기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어데 가서 마이신을 얻고 맞는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서 나의 꿈을 꽃피워야 한다.’고 이를 옥물었다. 고향마을인 서성향 장항대대는 산좋고 물 맑은 고장이였다. 나는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산에서 곰취와 더덕을 캤으며 가을이면 머루와 오미자와 돌배를 뜯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나니 가파른 산에 올라도 숨이 차지 않고 백여근되는 산나물을 메여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토록 짜증이 나던 병이 쥐도 새도 모르게 깜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1961년 봄, 마을에서 10년간의 시간을 들여 8헥타르의 과수원을 건설하고 관리하던 친척집 아저씨가 우리 집에 찾아와 “저 둘째 조카를 나에게 맡기오.” 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그것이 내가 과수원예사의 꿈을 마음껏 피워갈 수 있게 된 계기다. 23살의 피끓는 나이에 나는 과수재배기술을 배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수재배 관련 서적을 읽었고 도시락을 싸들고 과수기술원들을 찾아다녔다. 독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전경험이 많은 기술원들한테서 요령을 배워내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4년간의 노력을 거쳐 나는 1965년부터 독자적으로 과수원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원으로 되였다.

문화대혁명시기는 연변과수재배 력사에서 준엄한 시련을 겪은 시기였다. 20년내지 30년생 사과배나무의 키는 전선대 같아 사다리가 없으면 배를 따기 어려웠고 큰 가지가 빼곡하여 꽃이 펴도 결과가 적고 품질이 떨어졌다. 시골과수원의 이름없는 내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사과배나무의 수형개조에 달려 든 것은 바로 그 시기였다.

기술개혁이란 낡은 체계를 새로운 체계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하려는 개혁의 중점은 나무의 키를 낮추고 큰 가지를 적게 남기고 새로운 곁가지를 키우는 것이였다.

1970년 3월중순의 어느날 내가 나의 구상대로 전지를 하고 있는데 현 농업국에서 사업하는 기술원 윤동무가 우리 과수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나와 한마디 인사도 없이 엄숙한 어조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전지는 사과배나무의 생장발육을 억제하는 행위요. 이 나무는 조만간에 죽을 것이요.”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집체재산 파괴분자가 된다. 쩍하면 모자를 들씌우던 시대라 나는 외국과 선조들의 배 재배 방식을 설명하면서 진땀을 빼야 했다. 그날 우리는 밤늦게까지 얼굴을 붉혔고 그후 2년간 나는 현과수회의때마다 지명비판을 받았다.

4년후인 1974년 봄에 주에서 소집한 사과배 전지시범 표현대회에서 나의 기술개혁 타당성이 인정받았다. 나를 지지리 눌렀던 <과수파괴분자> 루명도 벗겨졌다. 윤동무도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오늘까지 과수연구 지기로 되였다.

내가 40살 나던 해에 서성진당위와 정부에서는 거의 망해가는 3헥타르의 과수원을 회수하여 나에게 도급을 주었다. 조건은 35년생 사과배나무를 베여내고 포도를 심으라는 것. 과수원을 둘러본 나는 나무를 베기는 쉬워도 키우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배나무를 살릴 것을 주장했다. 나는 갱신전지와 토양관리 비료관리로 3년만에 이 과수원을 전 주 일류과수원으로 변모시켰다.

1982년초, 길림성 특산국 장국장이 우리 과수원을 찾아왔다. 외국류학을 다녀온 장국장은 연변식 한어로 하는 나의 사업회보를 듣더니 매우 만족해하면서 “잘 했습니다. 화룡시 과수관리수준은 길림성 1류입니다.”고 높은 평가를 주었다. 그가 “왜 과수원에 콩을 심는가?”하고 묻자 나는 “콩으로 장도 담그고 쌀과 바꿔 식량으로 하며 콩뿌리는 한쌍당 200근의 순질소비료를 땅에 저장한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1990년 초 주원예학회 년회가 룡정의 주농업과학연구소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의 주요의제는 늙은 사과배나무의 수형전지였는데 내가 발표한 론문은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과농대표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번 회의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지시범을 보여주었고 회의총화문에는‘연변주내 사과배나무 정형전지는 반드시 화룡현 서성진의 김태욱 전지방법대로 해야한다.’는 문구까지 들어갔다.

집마당에 심은 고추를 말리면서(2012.9)

나의 지명도가 올라가니 힘들 때도 많았다. 1990년대초의 봄과 여름에는 전주 과농들이 수없이 찾아왔는데 어떤 날에는 2, 3백명씩 오기도 하였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주외에도 있었다. 길림성 과수연구소와 중국농업부, 한국 국가과수연구소, 대만 대중시 농업대학 과수계, 조선 자강도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보잘 것 없는 시골에 찾아와 과수재배에 대해 의견을 교류하였다.

그런데 <화와 복은 쌍으로 닥친다>더니 몇년간 고생한 보람으로 사과배산량이 해마다 증산되고 과일품질이 좋아 수입이 하늘로 치달을 때 나의 가정에는 불행이 들이닥쳤다. 딸애의 결혼을 20일 앞두고 28살에 나는 외동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3년후에는 5살배기 손자마저 요절했다. 매일마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던 세월이였다.

그러던 어느해 봄 전지철에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후둘후둘 떨려 드러누운 것이 넉달동안이나 사경에서 헤맸다. 그때의 나의 처지는 바람앞에 등잔불이였다. 관심병에 심근염으로 심장이 부어나 걸을 수도 없었고 머리도 천근무게였다.

예로부터 아홉고개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마침 59세였다. 60세도 못 살고 죽는다는 것이 너무 억울했고 2년전에 심양에 가서 각종 사과 품종을 가져다 시험재배를 시작했는데 그 결과를 못 보는 것도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는 살아야 한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하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병을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강한 사업욕망과 의력을 동력으로 현대의학과 결부하여 치료를 견지하였더니 안해와 딸의 도움을 받으며 걸을수 있게 되였다.

해볕이 자글자글 쏟아지는 그해 7월의 어느날 지팽이를 짚고 간신히 어린 사과나무의 가지를 다듬고 있는데 이웃 아낙네와 한담을 나누던 딸애가 이렇게 말한다.“울 아버지를 보세요. 엊그제까지 누워서 앓음소리를 내던 분이 일어나자 마자 과일나무부터 어루만지네요.”

노력끝에는 주렁진 열매가 열리기 마련이다. 시험품종 사과나무엔 4년만에 탐스러운 붉은 사과가 열렸고 사과배산량도 최고기록을 올렸다.

주내 여러 매체들에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나와 나의 과수원을 소개했고 현, 주, 성 유관 부문에서는 10여차나 각종 증서와 묵직한 상품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렇게 과수원예면에서 전지가위와 톱으로 독특한 업적을 쌓은 동시에 영원히 녹쓸지 않은 붓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성적도 올렸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과배나무의 전지는 이렇게>,<한부사과나무의 시험재배> 등 론문을 《동북과학기술신문》에 련재하였고 길림성에서 출판한 《과수 소채》장원대왕 소개에 나의 문장이 실렸다.

안해와 함께 복분자를 따고 있는 저자.(2010.7)

근 40년의 시간을 들여 나는 소년시절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최일선선생처럼 위대한 원예사는 되지 못했지만 연변의 과수재배에 남들이 할 수 없었던 공헌을 하였으니 말이다. 환갑나이가 되자 나는 사과배과수원을 원 임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3000평방메터되는 집옆의 땅을 유상양도받아 각종 새로운 과일품종을 시험재배하면서 업여로 화룡시작가협회 활동에 참가하여 청년시절 꿈꾸었던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나는 여러 장르의 작품 수십편을 주내외 여러 신문간행물에 발표하였으며 74살나던 해에 연변 작가협회에 가입하였다. 과수원예사의 꿈과 작가의 꿈은 나의 인생 전반에 거쳐 멀리멀리 이어진 인생궤적이였다.

추억속에서 벅찼던 지난날을 그려보면서 나는 아름답게 다듬어진 나의 정원의 과일나무를 지켜본다. 나의 눈에는 미끈하게 자란 과일나무가 어느 조각가의 섬세한 손길로 다듬어진 예술품으로 보인다. 오동통한 꽃눈은 하나의 아름다운 시구요, 커다란 가지묶음은 아름다운 문장이 아닌가.

봄에 땅이 녹으면 우리 지방에 없는 야생다래 시험재배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 결실을 보려면 적어도 2, 3년은 걸릴 것이다. 이것이 또한 나의 새로운 꿈이고 나는 그 꿈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인생에 80년은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요즘 꿈에서나마 젊은 시절로 돌아가 어려서 품었던 꿈을 위해 종주먹을 쥐고 달려온 나자신을 돌이켜보노라면 항상 마음은 젊어지기만 한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어여쁘던 새색시의 머리엔 서리가 앉았고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령감은 먼저 떠나고 어느새인가 혼자가 되여버렸다. 60여년만에 황혼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 홀로&nb...
  • 2017-05-15
  • 따스한 가족애로 동심에 꽃을 피우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것도 아닌데 추억속 학교교실의 풍경처럼 너도나도 도시락 꺼내기에 바쁘다. 도시락의 모양도 가지가지. 사각형, 원형, 납작한것이 보이는가 하면 키가 큰것도 눈에 띈다. 반찬도 다양하고 먹음직스러운데 더욱 눈길을 끄는것은 도시락을 만...
  • 2017-05-15
  • 길림신문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9) ◇최돈걸(장춘)   올해 7월이면 내가 고중을 졸업한 지 꼬박 60주년이 된다. 80을 바라보는 나의 평생에서 3년이란 세월이 그닥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항시 고중시절을 잊을 수 없다.   연변4고중(훈춘고중)은 1954년에 설립되였는데 당시 1, 2기...
  • 2017-05-13
  • 작업중에 있는 박태동씨. 연길시 중심에서 부르하통하가 조용히 누워있는 강변도로를 따라 동으로 가다보면 “일송정”이라고 쓴 나무간판이 발목을 잡는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그 단면을 부착해 만든...
  • 2017-05-11
  • 2016년 2월, 시름시름 앓던 나는 골수종양이란 진단을 받게 되였다. 하늘이 무더지는듯한 정신적 충격과 순간마다 겪어야 하는 뼈를 깍는듯한 육체적 고통은 내 삶의 희망도 즐거움도 용기도 송두리채 앗아갔다. 육십 평생 파란만장한 인생, 기구한 운명에도 꿋꿋이 버티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누구에게 악한 일을 한적 없건...
  • 2017-05-11
  • 연길 건공가두 장청사회구역 “어머니절”활동 벌려   10일,연길시 건공가두 장청사회구역에서는“따뜻한 5월,어머니사랑에 보답하자”는것을 주제로 한“어머니절”활동을 벌리였다.   이날 장청사회구역의 사업일군과 대리자녀들 그리고 연변농촌상업은행의 자원봉사자들은 가화...
  • 2017-05-11
  •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했던 한 조선족 교포가 검단탑병원의 무료 수술을 받고 최근 완치됐다.   한국 검단탑병원은 지난 3월 31일 교통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내원한 중국 국적의 손(52)모씨가 3번에 걸친 대수술과 중환자실 집중치료를 통해 기적적으로 소생해 10일 퇴원했다고 밝혔다. 내원 당시 ...
  • 2017-05-11
  • 리창률 김옥자부부 길림성 백산시 혼강구 칠도강진 선명촌에 가면 완강한 의력으로 악한 병을 이겨내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억센사나이 리창률(55세)씨와 그의 안해 김옥자(54세)녀성에 대한 이야기가 동네방네에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리창률, 김옥자부부는 결혼해서 줄곧 농사일에 종사해왔다. 그들은 서로 아끼고...
  • 2017-05-10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8) ◇강춘만(구태) “당신은 평생 어머님 곁에서 살아야겠어요.” 이는 안해가 밥상머리에서 늘 롱담 반,‘불만’반으로 해오던 말이였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다. 사실 다섯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나는 신통히도 어머님의 입맛을 똑 떼닮아 어머...
  • 2017-05-08
  • 백혈병 앓고 있는 김령학생 가정에 사랑의 성금 전달 상해 조인봉사단 24명 회원들 포함, 연길 대련 광주 장백 등지에서 사랑의 손길 줄 이어 최창남(오른쪽)기자가 길령학생의 가정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기자가 쓴 “백혈병을 앓고 있는 조선족중학생 김령이를 도웁시다”란 보도기사가 지면과 인...
  • 2017-05-08
  • 주방벽에 로친의 사진을 붙혀 놓고 보면서 감사하다는 90대 김수철 옹 4월 23일, 연변농학원 농학계의 “3인방”이라고 불린 김수철(93)옹, 황영수(85)옹,김륜범(82)옹이 조양천진 김수철댁에서 한자리를 하였다. 이날의 만남은 룡정의 황영수 옹과 김륜범 옹이 필자가 김수철 옹을 만나려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 2017-05-08
  •   지난 4월 29일, 기자는 청도 취재차에 이 도시 조선족층에서 각광 받고있는, 규모가 가장 큰 즉묵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을 찾았다.   청도 즉묵시의 소구역내에 위치한 이 양로원은 4층짜리 아담한 단독 건물로 이뤄졌다. 봉페식 관리로 운영되고있는 이 양로원은 경비원이 일일이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대문...
  • 2017-05-05
  • [백성이야기54] 색바랜 사진을 따라 찾은 옛 이야기  림춘애: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제일 큰 소원은 모주석을 만나는 거였지요.”   1957년 주중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의 연회에 참석한 중앙민족학원 소수민족학생들, 첫줄 왼쪽 첫번째 학생이 림춘애. 지난 력사의 한 장면은 문뜩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
  • 2017-05-05
  • 치료중인 김령학생 “백혈병으로 앓고있는 조선족중학생 김령이를 구합시다”이는 4월21일, 백산시조선족로인협회에서 협회회원 김경웅(75세), 김영수(73세) 로인부부의 친손녀 김령이를 살리기 위해 창의한 발기문이다. 금년에 17세에 나는 김령(金灵,2000도생)이는 백산시 제9중학교 초중3학년 학생이다. 얼마...
  • 2017-04-28
  • 인생은 언제나 초보                  정련 [서울=동북아신문] 이해한다고 안다고 함부로 말했던 모든 상대에게 사과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겪고 화를 내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른 건지, 요즘 초보로서 새로이 겪는 모든 것들 때문에 세삼스럽게 배...
  • 2017-04-27
  •                (흑룡강신문=하얼빈) 피금련 특약기자=4월 26일,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건교 70주년에 즈음하여 중국 조선족 저명한 서예대가 최원택선생이 모교인 밀산시조선족소학교를 방문했다.   전교 사생과 어울린 축제의 한마당에서 최원택선생은 자신의 혼과 열정이 새겨...
  • 2017-04-27
  • 침구치료중인 김춘복 원장. “아이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싶어 30대 중반에 의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자와 마주앉아 여느때와 진배없이 담담하게 터놓는 일본 긴자(银座) 중국중의병원의 김춘복(43세)원장, 손풍...
  • 2017-04-27
  • 사람들은 가끔 하늘을 보며 “나도 저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 어디든 가고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자유로이 산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새가 부러워졌을거다. 오늘은 새처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분을 쫓아가보자.   >" /> ▲아부다비 황궁  두바이 려행이 성행되...
  • 2017-04-27
  •   김경숙부부 귀향해 창업 인생의 성취감 맛본다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위치한 삼림토닭사육장의 경리인 김경숙(34살), 김경운(40살)은 고향에 돌아와 창업의 꿈을 펼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이겨나가면서 현재 인생의 성취감을 맛보고있다.   “부모님들도 이젠 년로하여 보살핌이 필요한데다 ...
  • 2017-04-26
  • '고향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3만 1000여원의 사랑의 물품을 전달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지난 2015년에 고향 연길에 돌아와 창업의 꿈을 무르익히고있는 연변창의미의료기계유한회사 마성혁(38살)총경리의 소망은 고향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과 즐거움을 선물하고픈것이다.   마성혁총경리...
  • 2017-04-20
‹처음  이전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