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녕성 무순시에서 해방전쟁시기 전투영웅 리형선 로인을 만나 취재중인 김광현.
출판기념모임에서《백년실록》교육편의 주필인 허청선 교수와 담소하고 있는 김창석.
(지난 기에 이어) 김광현과 김창석은 아예 우리 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부터 취재를 시작하기로 기획을 하고 일시불로 동영상카메라 4대를 샀다. 그들은 해남도로부터 광주, 심수, 상해, 항주를 거쳐오면서 동영상구술 취재를 시작했다. 하루에 적어도 3, 4명 취재를 해야 했는데 사람당 취재가 2시간 정도 소요되였다. 점심은 거의 택시에서 빵으로 떼웠다. 늘 시간이 모자라 누구한테 쫓겨다니는 기분으로 한사람 취재를 끝내면 다음 취재대상을 찾아 달리군 했다.
취재를 끝내고 한밤중에 집에 돌아오고나면 김광현은 그 동영상자료를 대용량 디스크에 넘겨야 했고 또 래일의 취재를 위해 충전까지 점검해놓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김창혁이 일어나보면 김광현은 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채 또 전투에 림하군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옹근 3년을 견지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의 구술채록을 어찌 정리해낸겁니까?”
필자는 궁금한 것을 직방배기로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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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문제였지요. 결국 취재는 저의 몫으로 돌리고 김광현 주임은 돌아가서 그 동영상데이터를 정리하는 정리팀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자료수집에 몰두했지요.
그 많은 자료를 프린트하고 분류했는데 한주일이면 분류된 자료더미가 수십박스씩 되였습니다. 잉크를 갈아주는 사람이 하루 건너 와야 했는데 나중에는 김 주임이 직접 잉크를 갈아대면서 찍어냈지요.”
그후부터 김창석은 북경, 천진, 청도, 연태, 위해, 대련, 심양, 무순, 단동, 본계, 환인, 할빈… 등 지역의 취재를 다니고 김광현은 이미 세분화된 자료를 번역하고 틀을 짰다. 이 일은 누가 해봤던 경험이 있어서 그 방식을 따라 할 수도 없었지만 김광현은 항상 긍정적인 사유를 가지고 견지했다.
한번은 대련 출장 예정이였는데 김광현의89세 고령의 아버지가 병세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그래도 김광현은 취재를 지체할 수 없다면서 대련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련에 갓 도착했는데 비보가 날아왔다. 결국 대련에는 김창석이 남고 김광현은 그자리로 돌아섰다. 그리고 장례를 치른지 삼일째 되는 날 다시 대련으로 떠났다.
“3년 내내 우리 둘은 따뜻한 차물을 거의 마셔보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차물이나 커피를 따라다 놓고 일에 몰두하다보니 그냥 식어버려 그대로 마시군 했습니다. 주정무중심 357호 방의 불은 꺼질줄 몰랐지요.”
《백년실록》의 자료수집작업은 회억록이나 구술로 된 사료를 대량으로 수집, 정리해야 했다. 김창석은 프린트한 자료들을 아예 가위를 들고 필요한 부분만 스크랩해서 모아두었다.
김광현은 “《백년실록》 취재건으로 적어도 수백명은 만났을 겁니다. 어떤 인물을 만나든 반시간이면 쓸개까지 다 뽑아냈습니다. 그 중에는 로케트연구, 미사일 원격조종 연구, 비행기 제조, 어뢰 제조…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됐죠.”
김창석은 중국어를 잘 하는 편이 아니였지만 취재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북경에 한달간 머무는 사이 80여명을 취재했는데 한사람 당 약 2시간씩 어떤 날에는 하루에 5명을 취재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지하철이 끊긴 시각까지 취재를 하고 주숙지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한번은 둘이 왕부정의 서점에 갔는데 2~3시간만에 그 큰 서점을 한바퀴 훑고 나온 것입니다. 그 수천수만권의 책더미속에서 어느 잡지에 발표된 〈남룡과 중국축구계의 스캔들〉이라는 자료를 들고 나왔더라고요. 이처럼 김창석이 저를 놀라게 한 일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천방 야담’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싶었지만 김광현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지라 아쉬운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력사는 항상 공정하다. 이 두 공로자의 로고는 두툼한 《백년실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뿌리깊은 나무로 각인 될 것이다.
장진숙/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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