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김성숙(장춘)
앞줄 왼쪽부터 필자의 올케, 어머니, 오빠. 뒤줄 왼쪽부터 필자의 동생부부, 언니, 필자 김성숙.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네 형제자매를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기에 힘썼다. 후에 아들을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은 후에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기에 더욱 정력을 기울였다.
올케는 우리 한마을 사람이자 오빠의 송아지친구로 인물도 고왔다. 감장눈에 웃을 때면 눈부터 웃음을 지어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던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18살에 시집을 와 우리 집안 며느리로 되면서 올케는 시집살이에 근심이 태산 같았다. 옛날 민요에도 일렀듯이 “백두산이 높다 한들 시아버지처럼 높으랴, 배추잎이 푸르다 한들 시어머니처럼 푸르랴, 외나무다리 어렵다 한들 시형처럼 어려우랴.”가 아니였던가. 또 속담에도 “때리는 이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도 있다. 모두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형용한 말들이렷다.
더우기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매와 괄괄한 성격은 올케에게 더욱 근심걱정을 불러왔다.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춰갈 수 있을는지? 두 시누이의 성질은 어떠한지?’ 올케의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어머니가 새며느리의 심정을 알아맞히고 그에게 정심환(定心丸)을 주었다.
“나라에는 나라 법이 있고 가정에는 가정 규정이 있어야 한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고부사이, 올케와 시누이 사이에 말썽이 없어야 한다. 말 많은 집에 장맛이 쓰네라. 금후 어떤 일이 있어도 앞에서 툭 털고. 무슨 좋은 물건이 생길 때면 우선 너들 올케에게. 너희들이 시집을 간 후 친정에 왔다가 무엇을 좀 가져가려 해도 꼭 올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여 올케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또 올케의 유력한 뒤심이 되였다.
어느 날 천장사를 하는 외숙모가 고운 치마감 한몫을 가져왔다. 연분홍 바탕에 하얀 꽃이 박힌 그 천은 언니와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옛다, 이것은 네 거다.” 어머니가 그 천을 올케 앞에 밀었다.
“큰시누이에게 주세요. 나는 치마가 많은데.” 올케가 그 천을 도루 어머니 앞으로 밀었다.
“내 말대로 하거라. 곱게 입고 마실을 다니거라.” 우리는 어머니 리치 있는 처리를 달갑게 받아들임에 이미 습관이 되였다.
하루는 올케가 장판을 닦다가 농밑에 웅켜놓은 어머니 속옷을 발견하고 인츰 씻어 빨래줄에 널었다. 밖에서 들어오던 어머니가 이것을 보고 어색해하시면서 “내가 저녁에 씻으려고 했는데… 내 속옷까지는 씻지 말어. 내가 지금은 손발을 움질일 수 있으니.”라고 했다.
언니와 나는 다 교원이다. 방학이면 꼭 친정으로 오는데 언니는 몸이 허약한지라 올케는 번마다 어김없이 언니에게 닭곰, 장수탕을 하여 몸보신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제 집으로 돌아갈 때면 우리들이 달라는 말이 없어도 올케는 우리들 보자기에 이것저것 쑤셔넣는다.
서로 돕고 가고 오는 정으로 고부간, 그리고 올케와 우리 사이는 자연 더 친근해졌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올케는 잉태를 못하였다. 한번은 오빠의 친구들이 술좌석에서 올케가 버드나무에 핀 꽃이라 열매를 못 맺으니 리혼을 하라며 쑥덕대자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겠으면 당장 우리 집을 나가라며 호되게 소리쳤다.
어는 날, 어머니는 친척방문을 가시고 오빠는 출차하였다. 저녁때 쯤 만삭이 된 한 녀인이 우리 집을 찾아와 배속에 든 아이가 이 집 아이라고 하는 것이였다. 올케는 불에 덴 사람처럼 와뜰 놀랐다. 그러나 잠간 후에는 ‘내가 잉태를 못하니 차라리 잘됐다.’라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저녁밥상을 차려주고 밤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밤 늦게야 돌아온 어머니가 방안에 낯선 사람이 누운 것을 보자 웬 일인가 물었고 올케는 사실대로 알렸다. 어머니는 당장에 화를 내며 그녀를 깨웠다. “솔직히 말해. 만약 우리 애라면 여기서 낳은 후 너는 돌아가. 애는 우리가 키울 테니. 만약 네가 거짓말을 할 때면 내게 혼날 줄 알아. 너의 배부터 보겠으니 옷을 벗어!” 그녀는 당황해하면서 대뜸 두손으로 배를 가리웠다.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의 옷을 벗겼다. 배우에 두터운 물건을 얹고 끈으로 몇바퀴 동여맨 것이 드러났다. 어머니는 노발대발하며 그녀의 머리를 틀어쥐고 귀쌈을 몇개 갈겼다. “쌍년, 협잡군 년! 어서 물러가!” 어머니는 그녀의 옷과 보자기를 문어구에 내던졌다. 그녀는 옷을 들고 고스란히 문을 나섰다.
어머니는 올케를 앞에 앉히고 조용히 말했다. “네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니 속이 많이 탄다는 것을 잘 알겠다. 그렇다고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남의 말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네가 잉태를 못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절에 간 색시처럼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고 너의 생각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기를 펴고 살아가거라.” 올케의 량볼에 두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무겁던 머리 속이 시원한 바람에 씻긴듯 개운해지는듯 싶었다.
어머니의 바다와 같은 흉금에 하느님도 감동되여서인지 2년 후 올케는 잉태를 하여 귀여운 딸을 보았다.
어머니가 며느리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집안에 싸움소리 없다고 동네사람들이 칭찬할 때면 어머니는 “아들이 고우면 며느리도 곱고 딸이 고우면 사위도 곱지. 하물며 우리 며느리는 중국에 그림자 밖에 없는데 내가 관심하지 않으면 그가 누구를 믿고 살겠소? 제 살이 아프면 남의 살이 아픈 줄도 알아야지!” 하고 말씀하시군 했다.
가정을 화목하게 꾸리는 것도 한가지 예술이다.
나는 두 딸을 키워 시집을 보냈다. 이따금 그들에게 어머니와 올케의 이야기를 하며 며느리의 직책을 잘 감당하라고 타이르군 했다.
“고함소리 나는 문으로는 불행이 들어가고 웃음소리 나는 문으로는 행복이 들어간다.”
마음을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고 가정을 잘 꾸리려고 마음을 잘 먹고 서로 돕고 서로 포섭한다면 화목한 가정은 꼭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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