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0)
▩렴순옥(연길)
필자 렴순옥의 외할머니 고하순 그리고 어머니 리정숙과 아버지 렴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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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 백자동인 나의 아버지 렴응철은 4촌형 렴흥철을 따라 룡정에 와서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이들 4촌형제는 지하당원인 나의 작은외할아버지 고하경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는 학생 당원이였다.
역시 대성중학교에서 공부하던 나의 어머니 리정숙은 작은 외할아버지를 통하여 아버지 렴응철을 알게 되였고 혁명투쟁중에서 서로 사랑이 싹터 1933년에 결혼했다.
그 후 아버지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조선에 가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일본놈들에게 체포되여 감방에서 갖은 혹형 속에서도 동요없이 투쟁을 견지하다가 1935년 5월에 병사하였다.(아버지 렴응철렬사는 지금 조선에서 공화국 렬사로 추인받고 있다.)
어머니 리정숙은 결혼 후 더 열성적으로 공산당원의 사명을 지니고 반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왜놈들에게 체포되였는데 연길 일본령사분관에서 갖은 비인간적인 고문과 악형을 받으면서도 지하당의 비밀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임신한 몸이였던 어머니가 각일각 분만기가 다가오자 놈들은 볼썽모양인 어머니를 가석방하고 비밀리에 외할머니 집을 감시했다. 어머니는 1935년 5월 29일 나를 낳았지만 장기적인 혹독한 고문에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진 데서 젖이 없어 나에게 단 한모금도 먹여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좁쌀죽물을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1936년 2월 18일, 꽃나이 24세로 한 많은 세상을 뜨셨다.
나의 외할머니 고하순은 항일투사인 딸과 사위는 물론, 오빠와 여러 친인들의 항일투쟁에 동참하여 암암리에 싸워온 위대한 분이시다. 성격이 온순하고 순박한, 외유내강의 보통농민부녀인 외할머니는 내 목숨을 건져주고 보호해주고 키워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이며 친인이시다.
보다 싶이 나는 유복자로 태여나서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위대한 당과 국가의 은혜로운 배양을 거쳐 아버지 어머니의 유지를 계승하면서 한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새 중국의 공민이며 위대한 중국공산당의 당원이다. 그리고 전투영웅 우정석(룡정시문화국에서 사업)의 안해였으며 자식 삼남매(모두 대학 졸업)를 둔, 인젠 산수나이(84세)를 넘은 렬사의 딸 렴순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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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사망된 후 할머니는 각종 풋돈벌이도 유일한 호구지책으로 간주하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부지런히 일하였다.
1943년 내가 여덟살 나던 해에 외할머니는 굶더라도 부모 없는 외손녀를 꼭 공부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나의 성을 외가집 리씨로 고쳐 〈민적등본〉에 올리고 당시 일본놈들이 꾸린 연길시 대화국민우급학교에 입학시켰다.
외할머니는 나를 공부시키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연길시에서 경찰서의 강제로동을 하는 외에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나의 학비를 대기 위해 고추가루장사도 하고 부르하통하 강바닥에서 자갈치기도 하고 길닦이도 하면서 어쨌든 돈이 나오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였다. 할머니는 실로 나 때문에 천신만고를 겪은 분이시다.
1945년 8월 광복 후 나는 연길시 중앙소학교에서 계속해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성도 다시 렴씨를 찾았다. 그러던 6학년 때는 장질부사에 걸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948년 12월 연길시중앙소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듬해 3월 연길시제2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는 내가 고아라고 1등 학생조학금을 발급했다.
나는 정부의 관심과 모주석의 은혜로운 사랑에 최대의 감사를 드렸으며 장차 커서 나라를 위하여 잘 복무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였다. 하기에 3학년 때 앞다투어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51년 3월에는 연변룡정고급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집이 연길이여서 룡정에 가 하숙집을 잡고 반드시 6두미를 내야 했다.
외할머니가 근근히 벌어서 나의 생활비를 대는 형편에서 6두미란 실로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여서 나는 단연히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할머니는 “내가 아무리 괴롭고 굶더라도 네 공부만은 꼭 시키련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끝끝내 6두미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1년 반 동안 견지하다가 드디여 렬사의 자식이고 고아였기에 1등 인민조학금을 향수하면서 룡정고중 학생숙사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였다.
이때에도 나는 조국과 공산당의 따사로운 사랑을 몸으로 느끼면서 이 은혜에 보답하리라 다짐하며 배움에 더욱 진력했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여있는 부모의 유상 앞에서 딸 렴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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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7월에 나는 룡정고중을 졸업하게 되였다. 나는 외할머니가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하는 것이 가슴에 걸려서 대학시험을 치지 않고 사회에 나가서 할머니를 돌보리라 작심하였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기어코 대학시험을 치라고 강요했다. 사회상에서도 그 해의 고중졸업생이 너무 적어 모두 대학시험을 쳐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였다.
이리하여 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학 가운데서도 학제가 가장 짧은 2년제 대학인 연변대학 농전과 농학 전업에 1지망을 쓰고 입학을 바라지도 않았다.
1954년 9월 나는 연변대학 농전과농학전업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나누웠다.
외할머니는 정색하여 나를 꾸짖으면서 “너는 꼭 공부를 잘하여 어머니의 혁명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한생의 소망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할머니를 끌어안고 울면서 “나도 인젠 돈을 벌어서 할머니의 고생을 덜어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울부짖었다.
할머니는 버럭 성을 내면서 “대학공부를 하는 것이 네가 좋으라고 하는 줄 아느냐? 네가 잘되는 것이 이 할미의 소원이고 혁명렬사인 네 어미의 바람이다. 그러니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지 말고 네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나를 도와도 늦지 않다.”고 하면서 기어이 대학에 가야 한다고 훈계하였다.
나는 할머니의 간곡한 백당부 속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후, 농전과는 본과로 승격하면서 학제가 바뀐 데서 1958년 8월에 나는 농학원 농학전업을 졸업하게 되였다. 나는 학원의 식물학교연실에 배치되여 조교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 때에야 할머니는 내가 기어이 장한 일을 해냈다며 반가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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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봄, 나는 룡정에 세집을 잡고 연길에서 외할머니를 모셔왔다. 이로써 드디여 우리 집 구조에는 변화가 생겨 내가 호주가 되여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나를 살려주고 키워주고 밀어주면서 사회인으로 지식분자로 출세시켜준 할머니를 모시게 되였다.
외할머니는 로년에 백내장으로 두눈이 실명되여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되였다. 그러나 수십년래 산전수전 다 겪어온 이 강인한 안로인은 완강한 의지력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당시 어린 나의 큰딸 우영란(현재 연태에서 대학교수로 있음)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는데 증손녀는 할머니를 모시고 위생실에 드나들고 거리에 소풍도 다니고 하면서 로할머니의 눈이 되고 친구가 되여주었다.
어느 날, 누운 석에 있던 할머니가 나의 손을 꼭 쥐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여운 내 사랑 순옥아, 네가 건실하게 자라서 대학공부도 마치고 대학선생까지 하구, 좋은 남편을 만나서 기뻐하며 잘사는 모습을 보니 나는 인젠 더는 여한이 없다! …저세상에 있는 네 에미에게 소원을 풀어줬다는 할 말이 있게 됐구나!”
1969년 외할머니는 세상을 뜨셨다. 나는 실로 하늘땅이 뒤번져지는 느낌이였다. 할머니는 평온하고도 미소 어린 얼굴로 우리와 영결하셨다.
나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나의 외할머니 만큼 위대한 분은 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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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에 용신공사에 하방단련을 내려갔던 나와 남편은 1973년도부터 용신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어 오매불망 바라고 기다리던 부모님의 렬사증도 내려왔다.
1976년 11월 20일 나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기 앞에서 선서하였다. 그 날 밤 나는 남편과 함께 이 영광을 우선 고인으로 된 할머니께 아뢰였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옛 사진(연변박물관에 전시되였음)을 보면서 이 딸도 인젠 부모님과 같은 투사로, 동지로 되였으니 기뻐하시라며 회보를 올리기도 하였다.
나의 생명의 은인이시며 내 인생의 버팀목이신 외할머님 명복을 충심으로 길이길이 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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