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01]개암 세알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12일 00시00분    조회:143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9)

▩김룡운(교하)

학교 열람실에서 필자 김룡운선생님

나는 산에 오르내리기를 좋아한다. 왜냐 하면 나는 동년을 산골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아버지가 그 좋은 장춘 도회지를 버리고 우리 자식들을 이밥이라도 실컷 먹이겠다며 하향하여 두메산골에 가서 짐을 부리웠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산골애로 되였고 산골은 나의 제2고향으로 되였다.

나에게 동년은 금쪽같이 귀한 시절이였다. 나는 늘 산골의 오솔길을 걸으며 희망을 길러왔었다. 푸르르고 싱싱한 대자연, 산골짜기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또 멀리 들판에서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오곡의 물결…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 좋아했다.어머니께서 밭으로 가시면 밭으로,고사리 꺾으러 가시면 고사리밭으로, 고무신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께 엉덩이가 벌겋게 부어나도록 맞고도 따라나섰다.그리고 아버지께서 개암밭으로 가셔도 버릇 대로 조르르 따라나선다.그러면 아버지는 “거긴 애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야. 벌레도 있고 뱀도 있어…”라고 타일렀으나 막무가내였다.막내 귀염둥이라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나의 손목을 잡으신다.

지렁이 기여간듯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에 이르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강냉이밭이 펼쳐진다.강냉이밭 아래쪽에는 억새로 이은 자그마한 농막이 있는데 그 농막 주인이 바로 아버지이다.아버지께서는 팔뚝 같은 강냉이 한이삭을 따서 불에 구워 나의 손에 쥐여주고는 배낭을 지고 개암밭으로 사라지신다.나는 그 강냉이를 들고 하모니카 불듯 이쪽 저쪽 입을 옮겨 뜯어먹으며 농막에서 시간을 보낸다.강냉이 반이삭을 채 먹기도 전에 초가을의 따뜻한 해살에 정복되여 평화로운 잠에 곯아빠진다.

문득 무엇인가 바지가랭이 속으로 써늘하게 기여드는 느낌에 화뜰 놀라 잠을 깨여보니 커다란 구렁이였다. 기겁한 나는 “으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농막 밑으로 굴러떨어져 곤두박혔다.그 때 다친 상처는 지금도 오른쪽 정강이에 흉터로 남아있다.구렁이는 그래도 내가 애라서 그런지 물지는 않았었다.

아버지께서 한짐 지여오신 개암을 쏟아놓으면 한마당이 된다.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납죽한 돌 하나씩 차지하고는 개암을 깨여먹는다.흰 런닝 앞자락이 퍼렇게 물들도록 깨여먹고는 강가로 나가 물오리가 된다.

시간이 썩 흘러 차츰 철이 들고 어른이 된 내가 개암밭을 주름잡아 한짐씩 지고 오면 나의 애들이 욱 몰려와서 개암을 맛있게 먹어댔다. 당년의 나와 너무 흡사하다. 인젠 자식들도 커서 사회로 진출했다. 벌써 난 손자를 보았으니 다 산 셈이다. 작년에 한국에 있는 딸애가 아기를 업고 놀러 왔었다. 발발 기여다니는 손자애를 데리고 놀기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락이였다. 기여와서는 나의 품에 팍 안기는 그 모양에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군 했다. 손자애는 발발 기여가 광주리에 듬뿍 담긴 개암을 한줌 쥐고 와서는 내 손에 놓는다. “할배, 머어.” 보니 세알이다. 손에 넘치도록 쥔 것이 세알이다. 나는 개암을 데구르르 굴려놓았다. 손자놈은 또다시 쥐고 와서 내 손에 놓는다. 아, 개암 세알. 나는 추억 속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농짝에서 책을 뒤지다가 궤짝 시렁에서 흰 손수건에 싸인 개암 세알을 발견했다.

“여보, 이 손수건에 싸인 개암 세알은 뭐요?”

“바로 몇십년 전 당신의 추억이래요.”

안해는 곱게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아,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1986년 8월 25일 이날은 나의 평생에서 지울 수 없는 날이다. 개학 교수안 준비를 마친 나는 오후에 행장을 차리고는 애들이 잘 먹는 개암을 따러 나섰다. 헌데 뒤에 따르는 이가 있어 돌아다보니 한직장에서 근무하는 두 녀선생이였다.

“김선생님이 산발을 잘 타는데 우리 둘을 데리고 가세요, 네?” 남들의 우격다짐에는 겁내지 않지만 녀성들의 감언리설에는 꼼짝 못하는 나인지라 하는 수 없이 응낙하였다. 원래 나 혼자 가면 앞산 기슭에서 짐을 채울 수 있었으나 셋의 짐을 채우려면 좀 먼산에 가야 했다. 우리는 ‘검은 산’ 쪽으로 향했다. ‘검은 산’은 나무숲이 울창하고 항상 검푸르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였다.

날은 찌뿌드드하고 곧 비가 내릴 상 싶었다. 반짐 쯤 차자 나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녀성들이란 그렇지 않았다. 온 바 하고는 꼭 짐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데리고 ‘3형제유리산’에 들어섰다. 3형제유리산은 세 산의 모양이 비슷하고 투명한 차돌이 난다고 하여 3형제유리산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이 산에 들어서지 않는다. 왜냐 하면 둘레로 서있는 이 3형제유리산은 모양이 비슷하여 방향 잃기가 일쑤이기 때문이였다. 이곳에서는 자칫하면 돈화 땅에 떨어지고 자칫하면 무인지경 남골에 떨어지고 또 자칫하면 이치강자 탄산자골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 세갈래가 다 집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단 한갈래의 길이 집으로 통하는 길인데 종잡기가 쉽지 않다.

한참 따다가 보니 비가 구질구질 내리기 시작했다. 해라도 있으면 방향을 잡을 수 있겠지만 검은 장막에 안개까지 뒤덮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산등성이에 오른 우리는 더는 갈 수가 없었다. 땅거미가 지며 밤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장밤을 산등성이에서 지새워야 했다. 구질구질 내리는 비는 밤새껏 틈을 주지 않고 줄곧 퍼부었다.

하느님 맙소서, 오늘 다행히도 이 구질구질한 밤을 셋이 같이 지새우니 말이지 만약 이중에 어느 한 녀성과만 지낸다면 이 몸을 한강에 던지더라도 내 사타구니에 붙은 흙만은 깨끗이 씻어낼 수가 없게 될 것이였다…

비바람이 기승을 부리던 지루한 밤은 끝내 물러가고 동녘하늘이 희붐해지며 비는 멎고 차츰 붉은 해가 동산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해살은 부채살처럼 골짜기를 비추었다. 나는 부지중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급해 말고 물곬을 따라 내려야 한다. 물곬을 따라 내리느라면 내도 나타나고 강도 나타나고 차츰 동네도 나타날 것이네라.”

우리는 물곬을 따라 내렸다. 과연 멀지 않은 곳에서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소몰이군을 만나 그가 구워준 강냉이를 게 눈 감추듯하였다. 소몰이군은 우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과연 타동네인 탄산자 골짜기에 떨어진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간밤에 동네에는 란리판이 났었다. 밤새껏 확성기에다 불어대고 동네 사람들이 동원되여 온 산판을 헤매였다고 한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동네사람들이 고맙기만 하다. 태원이, 홍식이, 상철이, 춘택이 그리고…

“할배—”

손자의 부름소리에 나는 사색에서 깨여났다. 손자의 손에 쥐여있는 개암 세알, 나의 영원한 추억-개암 세알. 나는 다시금 개암 세알을 흰 손수건에 꼬옥 싸서는 농 속에 넣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활상황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설을 쇨 때에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음력설기간 기자는 외지에서 사업하고 학습하는 안도현의 4명 귀향인원을 만나 이들이 고향에 대한 기대와 정감을 느껴보았다.   시민 마우붕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후...
  • 2018-02-27
  • [백성이야기71]수집인생의 “화분”으로 빚어내는 “황금꿀” 연변장백산우취협회 리사 김영일선생의 수집인생 이야기 들어본다 모아왔던 수집품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일선생 “언제든지 시간 나면 놀러오슈…” 매주 주말이면 장이 서는 연길의 한 골동품...
  • 2018-02-26
  •       음력설을 맞아 위챗 채팅그룹마다 따뜻한 새해덕담과 명절인사로 가득찼다. 이 가운데 16일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자체 채팅그룹에서 ‘온정’을 주제로한 사진교류활동을 벌렸다. 회원들이 채팅그룹에 적극 공유한 가족사진, 설날밥상사진을 투표에 따라 1, 2, 3등을 ...
  • 2018-02-24
  • 북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일본회사에서 8년간 일하다가 작은 집도 사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 생활에 대한 격정과 자극이 없었고 더 발전이 없을것 같은 따분한 현재가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을 선택한것이 바로 일본류학이였다.   일본 도쿄...
  • 2018-02-23
  •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 2018-02-22
  •      ‘미(美)+청(青)’ 사진관 4년만에 9개 가맹점 거느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김개강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정명자 기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했던 90년대, 스튜디오이자 사진 현상소(照片冲洗店)였던 사진관은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었다.   하지...
  • 2018-02-12
  • 일본에 온 지 어느덧 17년, 내 인생의 거의 절반, 그것도 제일 찬란한 20대와 30대를 일본에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힘든 적도 있었고 슬픈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거같다. 누구나 다 있는 20대와 30대를 많은 이야기로 수놓았으니 지나온 날들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연변대학...
  • 2018-02-09
  •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일본에 살아서 참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외로운데, 서러울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그러나 끝내는 무거운 미소로 묵인하고 만다.  “그래, 나 너무 좋아. 찢어지게 가난하던 촌년이 일본에 와서 출세했으니...
  • 2018-02-05
  • 남영권씨 가족 “세월이 류수”라는 말이 지금은 리해가 간다. 일본에 온지 벌써 20년이 되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바로 그 시기를 나는 일본땅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덕분에 사이타마켄(埼玉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나는 부모님이 챙겨준 일...
  • 2018-02-05
  •     (흑룡강신문=하얼빈)1932년 4월 조상봉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 나는 다섯살때 어머니를 잃고 12살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마저 급성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동년시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주의 머슴질도 해보고 학도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나는 조직의 배양으로 1952년 10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입당을 하...
  • 2018-02-05
  •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
  • 2018-02-01
  • 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 2018-02-01
  • "기층 당지부서기로서 군중과 한마음이 되여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련다." 이는 촌에 내려가 제1서기 직무를 맡고 있는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당지부서기 박선렬의 심중 고백이다. 금년에 39살에 나는 박선렬은 지난해 5월, 현 조직부문의 배치에 따라 십사도구진 망천아신촌에 내려가 촌당지부 제1서기 직무...
  • 2018-01-22
  •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에 들어서는 길목은 버드나무로 즐비하다. 마을 입구에서 우정국까지 나무가 500-600미터쯤 줄지어선 모습은 동불사회구역로인협회 회원들이 '마을가꾸기'의 일환으로 일궈낸 풍경이다.   그들이 마을을 ...
  • 2018-01-1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
  • 2018-01-17
  • 섬나라 사람들인 일본인들은 나무 한그루, 벌레 한마리에도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힐링의 명소로 찾는 일본정원, 늪을 중심으로 정원석과 자연의 나무, 풀로 꾸며진 그 곳에 가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 자연을 가까이에 하려는 일본...
  • 2018-01-17
  • 한국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지월아,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우리 딸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엄마는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서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가장 필...
  • 2018-01-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
  • 2018-01-0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9) ◇리송규(훈춘) 학생시절 대련 바다가에서의 필자 소중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 할가? 그것도 내가 가장 즐기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물 몇살 젊은 시절 장춘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대...
  • 2018-01-09
‹처음  이전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