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10] 집체호, 내 인생의 감로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9일 00시00분    조회:170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8)

▩김민철(연길)

 

하향 50주년 기념모임에서 수기 〈첫걸음〉을 발표하는 필자 김민철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첫걸음을 걷는다. 그러나 긴 세월 속에서 줄곧 기억에 생생하고 평생에 득이 되는 뜻깊은 첫걸음은 몇번 안된다.

 

1968년 8월 9일, 사회진출의 첫걸음은 내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 날 우리 16명 동창들은 앞가슴 넘치는 붉은꽃을 달고 연변탄광 지도자들과 부모형제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광활한 천지로 달려갔다. 이는 우리의 인생궤도를 바꿔놓는 첫걸음이였다. 그 때로부터 우리의 야들야들한 손에는 연필 대신 굵직한 호미자루가 쥐여졌고 섬약한 어깨에는 책가방 대신 묵직한 낟알마대가 자리매김했으며 앞에 놓인 길은 더는 평탄하고 널직한 등교길이 아닌 무수한 걸림돌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험준한 산악길이였다.

우리를 실은 해방표 자동차는 마치 미지의 앞날에 신비감을 더해주려는듯 뽀얀 먼지를 날리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차 우는 벌써 흥분에 넘친 18, 19세 철부지들의 오락판이다. ‘인기’가수 방응록과 김학석의 〈논물관리원〉,〈범진령〉 등 건드러진 노래가락이 련속 터지자 학교 선전대 활약분자들이였던 김명철, 장덕선, 리경자의 멋진 춤이 따른다. 환락의 도가니였다.

우리가 웃고 떠들며 도착한 곳은 화룡현 룡수공사 화수 7대였다. 30여호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화수골안 막바지에 자리잡은 두메산골이다. 우리를 바래여 따라왔던 몇몇 부모님들은 회칠도 하지 않은 초라한 초가집이며 누더기 걸치고 담배조리하는 초췌한 농촌아낙네들, 이곳저곳에 마구 널린 소똥무지를 보고는 상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래도 우린 좋았다. 웃고 떠들며 주위의 환경에는 누구도 그닥 관심이 없었다. 저녁무렵 촌사에서 처음이라는 성대한 환영의식을 가졌다. 온 동네 남녀로소가 모여 벌린 술판, 춤판이 또 한번 우리를 격동시켰다.

그런데 저녁 내가 류숙하기로 된 로대장 리윤수 아바이 집에 들어서며 나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전기가 없는 것이였다. 리아바이 말에 의하면 전기 외선은 이미 마을 앞까지 늘였지만 생산대의 자금난으로 집집의 전기를 이어놓지 못했단다. 순간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이곳은 내가 대표로 되여 선정한 곳이니깐. 당시는 하향운동의 초기여서 룡수공사에는 이곳을 제외하고 16명이나 되는 대부대를 받겠다는 생산대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을 정했지만 전기가 없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것이였다.

그 날 밤 우리는 희미한 석유등잔 아래서 늦도록 이야기하다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석유연기에 그을린 우리의 코구멍은 석탄굴을 방불케 하였다.

우리가 시작한 처음 일은 녀자애들은 담배잎 따기, 남자애들은 집체호 짓기 토역일이였다. 생산대에서는 우리의 안치비용을 절약하려고 초가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우선 기둥을 세우고 수수대로 외를 엮은 다음 흙을 이겨 벽을 바르면 되였다. 시간 단축을 위하여 우리를 포함한 생산대의 중로동력이 총동원되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다그쳤다.

집체호 식구들이 투도에 영화구경을 갔다가 남긴 기념사진(앞 오른쪽 첫 사람 필자)

고된 로동에 시달려 우리는 저녁만 되면 잠자리 찾기가 바쁜데 그 때는 무슨 놈의 회의가 그렇게도 많은지 거의 매일이다 싶이 밤중까지 회의였다. 번마다 졸려서 꺼덕꺼덕하다 나니 무슨 내용이였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우리의 손바닥은 누구나 없이 물집투성이였고 어떤 애들은 지쳐 앓아눕기까지 했다. 다행히 탄광에서 자란 우리는 집에서도 일을 적잖게 했던 덕에 용케도 견뎌냈다. 그래도 난 친구들의 지친 모양에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집체호 짓기가 마무리될 무렵 대대 안호은 주임의 제의로 안주임, 김희철 대장, 나까지 셋이서 전기문제를 해결하려고 연변탄광당위 김룡운 서기를 찾아갔다. 형편을 듣고난 김서기는 우리 광산의 자식들을 까막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면서 며칠 안으로 생산대의 전기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답복했다. 전기가 들어오던 날 지식청년들 덕분에 생산대에서 돈 한푼 팔지 않고 전기를 들여왔다며 기뻐 야단이던 김대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약 한달 남짓한 분투 끝에 200여평방 되는 집체호가 마을 중심에 덩실 솟았다. 이 때로부터 우리 16명은 한집식구가 되여 본격적인 살림살이를 하게 되였다.

처음 경험이 없는 우리는 밥 짓는 일을 당연히 녀자애들 몫으로 여겨 주방일은 녀자애들에게 도맡겼다. 그런데 생산대 일도 할라니 밥도 지을라니 녀자애들은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더우기 키가 부엌높이 만한 똘똘이 구순복씨는 멜대로 물을 길을라 치면 설상가상이였다. 앞뒤 물통이 번갈아 땅에 부딪치며 물을 흘려 집에 오면 반통도 남지 않았다.

 

당시 집체호의 다섯처녀 

이를 지켜보던 빈하중농 호장 리윤수 아바이가 이렇게 나가다는 다섯 밖에 없는 보석 같은 계집애들을 지쳐죽인다면서 새 방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의 방안 대로 녀자애 한명에 남자 둘씩 한소조로 무어 한주일에 한번씩 륜번하기로 하고 당번인 녀자애는 생산대일을 탈리해 밥만 짓고 그들의 보수는 모두가 평균 부담하기로 했다. 속담에 “남녀가 합치면 일하기 쉽다”더니 당번인 남자애들은 앞다투어 부지런히 물을 긷고 나무를 패고 불을 때주며 녀자애들의 부담을 크게 덜었다.

 

밥 짓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먹거리가 큰 난제였다. 비록 하향 첫해에 나라에서 식량을 공급하기에 쌀은 문제가 아니였지만 채소가 큰 문제였다. 가끔 공사마을에서 채소를 사오고 일부 인심 좋은 동네분들이 종종 터밭 채소를 가져다주지만 역부족이였다.

하여 우리는 누가 간혹 집에 다녀오면 밑반찬을 가져오기로 했다. 아마 집에서 막내인 류성렬이가 제일 많이 가져온 것 같다. 근데 그는 갖고 온 먹거리를 단번에 내놓지 않고 때마다 조금씩 내놓는다. 하지만 이틀도 안돼 누가 훔쳤는지 고추장이며 썩두부들이 통채로 밥상에 버젓이 올라 삽시간에 거덜난다. 억이 막힌 성렬이는 또 누가 자기의 궤를 토벌했다고 투덜댄다. 썩 후에 알았지만 그 때 성렬이는 엿도 가져왔단다. 근데 그건 녀자애들 몫이고 남자애들은 구경도 못했다. 그래도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 때 맛들인 썩두부는 난 지금도 즐겨먹는다.

가을이 가고 초겨울이 잡아들자 우리의 채소는 더욱 문제였다. 반찬이란 다만 소금물에 삶은 멀건 무우국, 배추국이다. 이 때 동네에서 맏며느리감이라 소문이 자자한 최계순, 최량순, 김옥산 세 녀자애가 나를 보고 된장도 담그고 버려지는 쌀뜨물이 아까운데 돼지도 키우잔다. 너희들이 장을 담글 줄 아냐는 나의 물음에 그들은 장이 아니라 서슬만 있으면 두부도 앗을 자신이 있단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손수 만든 천하일미 두부를 배터지게 먹은 적도 있다.

장을 담그는 날 온 집체호가 총동원되여 콩을 삶고 호미로 짓뭉개서는 메주를 빚어 새끼줄로 묶어 대들보에 달아맸다. 여기에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설을 쇠자 5명의 상해지식청년들이 우리 집체호에 내려왔다. 첫날 대들보에 매달린 메주를 보고 호기심이 동한 그 애들이 이것이 뭔가 묻는다. 난 문득 메주를 한어로 뭐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아 “콩지뢰”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폭발하냐고 또 묻는다. 난 머리에 떨어져 폭발하면 너희들은 끝장이라 했더니 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앉는다.

우리가 키운 돼지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 어느새 중돼지가 됐다. 이듬해 어느 봄날 두마리의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와 집체호 터밭을 마구 뚜져댄다. 남자애들이 총동원되여 한놈은 쉽게 붙잡아 가두었지만 다른 한놈은 어찌도 역빠른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뽈차개 태종수가 쏜살같이 뒤다리를 덥석 잡았지만 돼지가 죽기로 용 쓰는 탓에 돼지의 뒤다리가 뚝 부러졌다. 종수는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어쩔 바를 모른다. 이 때 김대장이 언제 왔는지 “잘됐어. 온 동네가 군을 떼게 됐다.”며 즉시로 공사에 사람을 띄워 도살비준을 받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돼지고기 한사발씩 게눈 감추듯 맛나게 먹었다. 별미였다!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화수골에는 메돼지도 많았다. 어느 하루 나와 허영일이가 나무하러 산에 올랐다. 중간쉼을 하는데 약 30메터 앞에서 메돼지 한마리가 슬렁슬렁 오더니 가둑나무 아래에 벌렁 누워 잠자면서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영일이가 귀속말로 자기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소는 범과 싸워도 이긴다면서 소를 내몰아 메돼지를 잡잔다.

그 말을 곧이들은 나는 소고삐를 잡고 영일이는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 메돼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근데 메돼지와 10여메터 가까이에 이르자 소는 떡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아무리 밀어도 씩씩거리며 꼼짝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소를 돌리는 순간 영일이가 돌멩이를 던졌다. 놀란 메돼지는 벌떡 일어서더니 우리 코앞으로 쏜살같이 도망갔다.

그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을 체험했다. 그래도 영일이는 씁쓸해서 우리 아버지도 거짓말할 줄 아는구나 한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믿을 놈이 과연 없는 것 같았다.

당시 지식청년들에게는 ‘족제비’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즉 닭 훔치는 족제비 맞잡이라는 데서다. 그러나 모범집체호인 우리는 실수로 닭을 잡아먹은 적은 있어도 훔친 일은 한번도 없다.

어느 날 저녁 뜨락에서 몇이 한담하는데 리철원이가 낮에 소방목하다가 닭무리가 귀찮게 굴어 무심히 돌멩이를 뿌렸는데 닭 한마리가 맞아죽어 겁 먹고 숲속에 감춰놨단다. 이게 웬 떡이냐? 난 당장 찾아오라고 했다. 이윽고 철원이가 마대에 닭을 둘둘 감고 왔다. 다른 애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몇이서 닭을 끓이고 ‘백계연’을 벌렸다.

공교롭게도 이 때 생산대 청년 리정수가 집체호 앞을 지나다 구수한 냄새를 맡고 문을 뚝 떼고 불쑥 들어왔다. 방법없이 함께 먹어야 했다. 그리고 남과 말하면 안된다고 재삼 당부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정수가 하는 말이 어제 먹은 닭이 자기 집 거란다. 아침에 엄마가 수탉 한마리가 잃어졌다고 부산 떠는데 우리가 먹었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족제비가 먹었겠다고 말했단다. 다행이다. 모범집체호의 체면도 세웠고 닭도 공짜로 먹었으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이다.

세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남긴 하향 50주년 기념 집체사진

1969년 6월 20일 화수골에는 꿩알 만큼한 우박을 동반한 특대 폭우가 반시간 가량 쏟아졌다. 삽시에 집채 같은 산홍수는 아름드리 나무를 송두리채 뽑았고 모내기를 갓 마친 논밭은 평지로 변했으며 한전의 곡식들은 앙상한 줄거리만 남았다. 농사가 거덜난 판이다.

이 홍수로 1대에서는 공소사 영업원 양금월 등 4명의 처녀애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 7대의 일년농사는 겨우 3, 4개월 민식을 해결할 정도였다. 하향 1주년이 넘은 우리도 나라식량 공급이 끊기자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반소량(返销粮)을 먹어야 했다. 구제량은 곰팡이가 낀 통옥수수였다. 이런 옥수수로 밥을 지어서는 뜬 냄새가 지독하여 당초 먹을 수가 없었다. 하여 녀자애들은 옥수수를 물에 하루씩 담그어 곰팡이 냄새를 얼마간 제거한 후 촌의 발방아로 가루를 내여 옥수수떡을 만들었다. 당시 소다까지 긴장한 때라 떡은 돌멩이 마냥 굳었다.

녀자애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의 식욕을 돋구려 애썼다. 떡은 손가락 두께 만큼 저미여 마치 맛나는 빵처럼 그릇에 곱게 쌓았다. 시각상의 미감으로 식욕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너무도 감격한 일이라 남자애들은 먹기 바쁜 대로 한두점씩 억지로 더 먹군 했다. 그 애들의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지은 밥을 한번 더 먹고 싶은 생각도 가끔 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틈틈이 오락판도 벌렸다. 오락이 시작되면 활보인 명철이가 대야에 물을 반 쯤 붓고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장단이고 예술에는 문외한인데 곡만은 어물쩍하게 넘기는 성렬이의 하모니카는 피아노도 무색하며 덕일, 영일, 철원이가 제멋대로 뽑아내는 노래는 가무단 가수의 화성 3인창도 울고 간다. 과연 철부지 때가 좋았다. 우리에게는 고생타령은 잠간이고 쾌락만은 영원한 것이였다.

1970년대 중반 우리 연변탄광에서는 로동자 모집이 시작되여 몇번에 걸쳐 9명의 남자애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리성종이만 남았다. 너무도 조용하고 고독했다.

그 해 10월 또 한차례의 로동자 모집이 있었다. 고독에 시달리던 나는 대대 손서기의 극구 만류도 마다하고 떠나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먼저번 모집에서 체중 부족으로 불합격인 성종이가 걱정이였다. 신체검사 하는 날 나는 미리 체중 측정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체중검사는 옷을 입은 채로 앉은뱅이 큰 저울로 측정하였다.

수가 생겼다고 나는 다짜고짜로 성종이를 이끌고 룡수역으로 달려가 철길 밑 받침용 철판 두개를 주어 혁띠와 신끈으로 성종이의 배와 허리에 꽁꽁 동여매고 웃옷을 입히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검사는 무사히 통과됐다. 그의 체중은 백근을 금방 넘겼다.

여전히 시름놓을 수 없는 그는 만약 이번에도 합격을 못하면 자기 혼자 어떻게 집체호에 남는가며 고민이였다. 난 이런 성종이가 안스러워 만약 네가 합격 못하면 나도 안 가겠다고 했더니 그도 시름을 좀 놓았다. 한달 후 합격통지서가 왔다. 그 날 둘은 거나하게 술도 많이 마셨다.

우리가 떠나는 날 남아있는 녀자애들과 상해애들이 동구밖까지 따라나왔다. 나의 손을 꼭 잡고 잘 가라고 인사하는 상해애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나의 눈시울도 뜨거웠다. 그 애들의 눈물에는 리별의 설음도 있지만 자신들의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과 슬픔이 더 많았을 것이다. 순간 나는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도주병’인 느낌에 기쁨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나의 3년간 집체호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많은 무형재산을 물려받았다. 구수한 흙냄새에서 거짓 모르는 땅의 진실을 배웠고 역경 속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했으며 농민들의 소박한 품성에서 참된 인간의 진맛을 깨달았다. 자랑스러운 것은 찌는듯한 뙤약볕에 벗겨진 한벌 또 한벌의 껍질을 영원한 밑거름으로 제2의 고향땅에 남겼고 하나 또 하나의 저수지에 뿌린 땀방울은 오늘도 생명수에 희석되여 고향의 땅을 적셔준다.

어느덧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기간 슬프고 유감스런 일이라면 함께 붉은꽃 달고 푸른 꿈을 키우려고 농촌으로 달려갔던 16명 형제자매중 7명이나 저세상 사람으로 되였고 살아있는 우리도 별로 해놓은 일 없이 인생의 가을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꿈은 여전하다. 해마다 이맘때 가을이 오면 고향산천에는 꿈의 상징인 들국화가 만발한다. 파아란 들국화로 단장된 저 언덕은 내 마음의 안식처이다. 우리의 꿈을 담은 저 들국화는 올해도 래년에도 곱게곱게 피여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길림신문

하향 50주년 기념모임에서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흰눈이 포근히 덮인 시골집 굴뚝에서 보기좋게 연기가 솟아오른다. 12월21일, 연길시 춘흥촌 신광5대 김종학대장의 집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넘쳐났다. 전통명절 동지를 맞으며 팥죽잔치가 펼쳐졌다. 마을 지키는 노인들에 인근부락의 노인들도 청해와 신광의 입쌀, 찹쌀과 팥으로 동지 팥죽을 두가마 가득 지었다. ...
  • 2015-12-22
  • 지난12월 20일, 개원호텔에서 후사모(후대사랑협회) 송년회가 있었다.   송년회는 리경호 회장의 축사와 함께 시작되였다. 후사모는 올 한해 정말 많은 좋은 일들을 하였다. 120여명의 회원들로 이루어진 후사모는 매주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장학생들을 선정하여 지원하고있다.   후사모는 올 한해 총10회의 ...
  • 2015-12-21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헌 특약기자 = 일전 중앙문명판공실과 중국문명넷에서 공포한 '중국의 좋은 사람(中国好人)'추천,평의결과에 한 조선족가정이 '중국의 좋은 사람'에 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화제의 조선족가정이 바로 목단강시 서안구 목단조선족가도 서장안사구의 주민 리봉구(李峰九,51세), ...
  • 2015-12-21
  • 17岁的叶石云是云和县崇头镇梅竹村人。   2009年秋,母亲石明秀和父亲叶明松在49天内先后因病去世,留下11岁的他和81岁的爷爷相依为命。   母亲去世前已生病多年,父亲为此欠下了总计3万元的债务——这些债务没有一张借条,但11岁的叶石云决定替父还债。   捡废品、干零活,6年来,叶石云共计挣到22800元。...
  • 2015-12-20
  • 민간기부단체인 '고사모(회장 한설화)'에서는 19일, 연길 천년웨딩홀에서 총화모임을 갖고 한해를 뒤돌아보고 새해를 기약하는 소중한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회단체가 참 많다 고사모도 그중의 한개 한체이다. 비록 설립된지 1년도 채 안되지만 그들이 불우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 여느...
  • 2015-12-19
  • 어릴때부터 선생님이 되고싶다는 꿈을 가진 연길시 의란진 금성촌의 주설매(23살)는 연변대학사범분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유치원의 선생님이 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주설매의 가정에는 잇달아 불운이 닥쳤다. 지난해 9월, 몸이 불편해 병원을 찾은 주설매의 어머니는 자궁내막암이라는 확진을...
  • 2015-12-17
  • 사진기를  메고  산과 들을  넘나들며          리해숙할머니. “인생에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이는 76세부터 회화에 전념하여 80세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미국 녀류화가 모지스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일깨워준 도리이다. 대기만성한 모지스 할머니...
  • 2015-12-15
  • 고향을 다시 찾은 박금숙 김창복 로인 내외분. 옛 인터뷰를 회고하면   《중국민족》잡지 2013년 2기에는 필자의 “하면 된다는 말을 팔순이 돼서야 실감하고 있어요” 란 제목으로 박금숙, 김창복 부부를 취재해 쓴 기사를 실은적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993년 정년퇴직을 맞은 박금숙, 김창복 부부...
  • 2015-12-08
  • 李相富事迹简介       李相富,男,朝鲜族,1948年8月生,中共党员,延吉市灵通按摩院院长。       李相富是河南街道白玉社区居民,30年来,他独自撑起家庭重担,不离不弃、悉心照顾患病妻子,善行义举感动街坊四邻,成为一段佳话广为传颂。     &...
  • 2015-12-08
  • 영국아기 '호프 리'의 모습 세상의 빛을 본지 1시간밖에 안된 아기가 최년소로 장기기증을 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1일(현지시간) 가디언 등 영국언론에 따르면 아기엄마인 에마 리와 아빠인 드루 리는 지난주 태여나 74분만에 숨을 거둔 딸아이 '호프'(Hope)의 신장과 간세포를 성인환자에게 기증했다. ...
  • 2015-12-03
  •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길림성 왕청현 신화사회구역 남산소구역에 살고있는 올해 102세에 나는 손춘영로인은 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손춘영과 남편 서위희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자식들은 모두 효성스러웠다. 딸들이 시집가고 아...
  • 2015-12-01
  • 이주민의 경험이 우리 사회에 준 선물 이해응 (서울시 외국인명예부시장.조선족) “고향이 어디에요?” 정체성 고민이 시작되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에 한 한국인 유학생이 나한테 던진 질문 한마디 때문이었던것 같다. “고향이 어디에요? 중국 고향 말고...
  • 2015-12-01
  •   길림대학 연변항공승무학교(교장 최옥금)에서는 학교 설립 10주년을 맞으며 11월 26일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1만5천여원 쾌척하는 등 뜻깊은 행사를 개최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비상애심봉사단'을 내오고 사랑의 모금행사를 펼쳐 5천여원을 모금했다. 학생들의 사랑의 마음이 담...
  • 2015-11-26
  • 길림성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에서는 20명의 사회구역공작인원들과 주민지원자들을 조직하여 중국 중앙방송국 CCTV-13프로그램 촬영에 참여하였다. 이른 아침, 20명의 지원자들은  홍보영상 촬영을 위해 조선...
  • 2015-11-26
  • 애심천사원에 대한 연변무역인협회의 사랑은 오늘도 이어지고있다. 11월 26일 오전,  연변무역인협회(회장 허재룡)에서는 연길 발전에 위치해있는 '애심천사원'에 따뜻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사랑의 모금행사'를 펼쳤다.  무역협회에서는 2틀전부터 모금행사를 진행, 짧은 시간내에 양말, 피자...
  • 2015-11-26
  •         11월 19일 이른 아침, 연길시 건공가두 청산소구역의 한 할아버지는 살을 에워싸는 추위에도 꿋꿋이 홀로 눈을 치우신다.    올해 74세의 로당원이신 유영식 할아버지는 매번 눈이 내리는 날이면 주동적으로 눈을 치우시곤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구역내의 쌓인눈을 보시고는...
  • 2015-11-25
  •  11월19일 연길시에는 큰 눈이 내렸다.찬바람과 급강한 기온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운겨울이 왔음을느끼게 해주었다.연길시 구조관리잠 사업일꾼들은 거리를 순찰하면서 구조활동을 펼치였다.  당일 8시쯤 시구조관리잠 사업일꾼들은 수상시장,서시장등 류랑구걸인이 비교적 집중된곳에 도착해 그들을 찾아나섰다...
  • 2015-11-24
  • 남돕는 즐거움을 보약으로 매일마다 짬만나면 지역사회를 돌아보며 이웃의 환자나 독거로인들을 살펴보는 백발로인이 있다.그가 바로 연길시 건공가두 장림지역사회의 72세 최복주이다. 일찍 연길시연남소학교에서 당지부서기로 사업하다 퇴직한 최선생은 퇴직하자 바람으로 자기를 지역사회에 맡기였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 2015-11-23
  • 11월18일 30여명의 독거로인들의 즐거운 모임이 연길시 공원가도 원월사회구역(园月社区) 양로활동실에서 열렸다.민족불문,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情暖夕阳红”을 주제로 한 이번 모임은 한 시간 정도 진행하였으며 사회구역...
  • 2015-11-23
  •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 봉사자들은 2011년“三帮扶”활동을 전개한 이래 줄곧 로인들을 보살핌의 대상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문전방문하여 각종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18일 오전,길림성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 "칠색무지개봉사센터" 봉사자들은 거동이 불편한 70세 고령의 독거로인 리숙...
  • 2015-11-20
‹처음  이전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