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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응모글짓기] 내가 걷는 이쁜 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31일 13시26분    조회: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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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토요일이라 애들이 작문배우러 오는 날이여서 여느때보다 일찍이 일어나서 아침 먹고 이쁘게 화장을 하고는 반시간 앞두고 림시로 빌려쓰고 있는 로인대학2층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몇몇 애들이 벌써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본 애들은 쫑그르 달려와서 저마다 나한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받자 손태홍이 내 가방을 받아드는 것이였다. 애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2층으로 향해 올라갔다. 걸음마다 가벼웠고 가슴은 저 바다처럼 설레이기만 했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애들이 찾아와주고 또 존경을 받는 선생님이 되였단 말인가!

  나의 가슴에는 저도몰래 문학이란 이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신비함과 즐거움이 동반된 길을 선택해왔던 추억들이 봄풀처럼 새파랗게 돋아나면서 나를 감미로운 추억속에 빠지게 했다.

  네살에 다리가 장애로 된 그날부터 나의 동년은 향기잃었고 가슴에는 검은 그림자가 자리틀고 앉아있었다.

  소학교와 중학교까지 공부했지만 그러나 다리가 불편한 탓으로 쩍하면 결석했고 또 다리치료를 하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시절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마음의 달래임이란 아버지께서 사주신 책들을 읽는 것이였다. 책을 읽고 또 읽고하는 사이에 어느새 작문쓰는 수준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성인이 된후에는 생활속에서 아름다운 색갈을 골라 황홀한 인생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어떤 때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며, 어떤 때에는 감동이었으며, 어떤 때에는 무지개같은 아름다움이었으며, 또 어떤 때에는 무거운 부담이였고, 또 어떤 때에는 밑지는 일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세상 취미중에서 아마도 글쓰기 취미가 제일 아름다운것 같았다. 중학교 수준밖에 안되는 나에게 있어서 문학의 길은 정말 어렵기가 말이 아니였다. 다른 문우들은 작가양성반에서 많이 배웠지만 나는 그럴 상황도 못 되여 단지 책을 많이 읽은 기초상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말 그대로 무거워나는 삶이였다. 고됨의 시작, 실패의 아픔속에서 해가 뜨고 질때마다 가슴에 새겨넣는 한마디-힘을 내여 다시한번 성공을 위해! 바로 이런 야무진 결심이 날 그냥 이 길을 걷게 했던것이 아닐가!

  난 그 어느때면 어찌보면 좀 이악스런 여자가 아닌가 싶다. 30대에 함께 문학의 길을 선택한 여자친구 넷이 있었는데 후에 모두 포기했지만 나만은 그냥 고집을 꺾지않았다. 끝없는 동경, 무수한 기다림속에서 글들이 한편 또 한편 실리는 그때의 그 기분은 무엇으로 형용할수 없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때론 화가 복으로 전환되고 잃음이 얻음으로 바뀔때가 있나부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나의 심령을 세척시킬줄 알았고 아무리 세찬 파도도 이겨내고 오직 웃을수 있는 여인으로 될수 있었다. 그 수확이 너무나도 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까지 애들에게 작문을 가르칠수 있는 기초로 된것이기도했다.나는 나의 삶을 살아오면서 글만 쓸것이 아니라 차세대들에게 우리문화와 전통을 알게하는것을 사명감으로 느끼고 2002년도에 소학교학생들에게 작문지도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내가 소학교교원인 황순자선생을 찾아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더니 대번에 찬성이였다.

  “참 좋은 생각이예요. 그러잖아도 지금 각 반의 담임교원들이 학생들의 작문수준이 너무 차해 골치 아파하거든요. 지금 애들은 이상할만치 조선어작문보다 한어작문을 더 좋아하고 있어요. 학교에 작문양성반이 따로 없어 애들이 과외로 지도받으면 좋지요.”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글을 쓸 사람 많이 배양하는것이 인제부터의 나의 삶이구나.)나는 이렇게 마음을 굳혔다. 나는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 날인 토요일와 일요일을 리용하여 작문을 배워주기로하고 그해 3월 16일에 첫 시간을 시작했다. 그날 안도현 제일 실험소학교 4학년의 열명의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인 이현자씨의 인솔하에 우리 집에 왔다. 귀엽게 생긴 애들을 보는 나는 책임감과 민족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날 작문을 씌여보니 들은바와 같이 습작능력이 차한 애들이 대부분이였다. 틀린 글자가 수두룩했고 사투리도 많았다. <<친구>>를 <<동미>>, <<고추>>를 <<고치>>, <<무우>>를 <<무끼>>, 거기에다 전기밥가마, 텔레비전, 냉장고, 아파트, 빵과 같은 명사는 조선말로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또 어떤 단어는 한어말 발음대로 쓰기도했다.

  “우린 무슨 민족입니까?”내가 묻자 애들이 일제히 “조선족입니다.”하고 소리높이 대답했다.

  “그런데 왜서 표준적인 조선말을 몰라요?”

  “아버지 엄마도 그렇게 말해서 배웠지요.뭐”

  “이제부터 작문에다 한어말을 쓰면 안돼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자요”나의 말이 떨어지자 몇몇 아이들이 조선어작문보다 한어작문을 쓰기가 더 쉽다고했다. 천진하고 거짓없는 애들을 나는 리해할수 있었다. 한족이 80%비률을 차지하는 이곳에서 한어말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은것은 사실이다. 특히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한어시간을 보고 집에 가면 즐겨보는 동화이야기도 한어말로 시청하다보니 한어능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주어진 환경만 탓할때가 아니다. 최대한으로 우리글을 중시하는것을 기반으로하여 하나의 운행의 축을 이루어야한다.

  나는 애들에게 미래와 결부시켜 표현이 풍부한 아름다운 우리 언어와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례의, 도덕 문제도 홀시하지않았다. 훌륭한 사람으로 되자면 수선 도덕수양을 갖추어야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남을 양보하고 리해하고 사랑함이 너무차하다.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할줄도 모른다. 나는 애들에게 부모님께 감사를 표시하기, 문안드리기, 공공장소에서 지켜야할 도덕, 불우이웃돕기 등 아름다운 마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매번 작문시간마다 애들에게 인성교육을 시키는것을 홀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에는 싹이 트고 꽃이피더니 날로 열매 맺어갔다.

  “선생님, 요즘 우리 애가 종래로 하지않던 아침인사를 엄마아빠한테 하고 있어요.” “제 밖에 모르던 우리애가 마음이 후해졌어요 선생님이 가르쳤다 했어요”

  "우리애는워낙내가만든음식이면늘맛없다고투정질했는데작문반에다닌후부터그습관이고쳐졌습니다."

  학부형들이 무척 좋아했다. 나는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한테 도덕 품질 교육 또한 중요한 과제란 것을 깊이 느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처음에는 한참 모지름써야 작문을 쓰던 애들이 시간이 흐르자 눈에띄우게 진보했다. 박소옥이라는 애는 처음에 작문한편을 쓰면 틀린글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일년이되자 제법 잘 써 학교에서 진행하는 어느 활동에서글을 잘 쓴다고 반급을 대표하여 발언고까지 썼다.

  2003년 3월 16일 우리집에 온 애들이 나를 밖으로 나가란다. 무슨 감투끈인지도 모르고 나는 <<쫓기워>>나갔다. 한참후 애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선생님 들어오십시요"조심스레 문을 연 나는 그만눈앞의 정경에 멍해졌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고무풍선들이 드리워있었고 벽은 색종이로 만든 꽃들로 장식되였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가 작문을 배운지 꼭 일년이 되는 날입니다. 원래는 모레 축하파티 열자고 하다가 그날 우리는 작문을 써야 하기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오늘 미리 엽니다. 그간 선생님 수고 많았습니다. 선생님 사랑해요.”조직자인 공련희가 이렇게 말하며 색종이로 만든 모자를 나의 머리에 씌워주자 와그르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다음 애들은 자기가 가져온 음료와 과자를 나의 품에 안겨주었다. 순간 나는 눈시을이 젖어듬을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우리 애들은 우리글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길래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가! (좀 더 힘을 내야겠다 )그날 애들의 소행은 한줄기의 감로수로 되여 나의 가슴속에 찰랑대며 흘러들었다. 2013년 11월 나는 의외의 사고로 다리가 골절되였다. 석달동안 일어설 수 없는 형편이여서 작문반을 잠시 더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전화가 왔다.

  "우리애가 한창 작문에 취미를 두고 있는데 안하면 애가 취미를 잃을가봐 걱정이 되여서 어쩌죠?"

  "이거 정말 큰 일 났군요. 우리집 애가 그냥 중국말만 하다가 작문반에 다닌 후부터 우리하고 조선말하고 있는데 작문반에 안 가면  또 그 버릇이 도질 것 같아요"

  나는 정말 딱한 처지였다. 이런 기회에 정말 한동안 푹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학부형들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작문반을 그냥 하기로 마음먹고는 애들한테 다리에 한 깁스를 안 보이기 위해 포대기를 다리에 덮고 애들을 맞이했다. 처음에 오는 애는 남편이 문 열어준다. 그 다음 남편이 출근한다. 그 다음부터 먼저 온 애가 후에 온 애들한테 문을 열어주기를 하면서 석달동안 쉬지 않고 가르쳤다. 어떤 애들은 내가 일어서지 못한다고 장난을 쓰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 애들이 내 아픈 마을을 헤아려 주었다. 작문 쓰다가도 일어서지 못하는 날 보고 물 마시겠는가고 묻는 애도 있었도 집에서 맛나는 간식도 가져 와서는 내입에 넣어주는 애도 있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끝내 일어설 수 있는 석달동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었지만 그러나 애들한테는 수확이 컸으리라.

  애들의 적극성과 신심을 불러일으키기위해 나는 애들의 좋은 글들을 여러간 행믈에 추천해서 발표되였고 여러 응모작에 추천했는데 큰 상으로는 대상, 다음은 금상, 은상, 동상 등에 선정된 작문들이 많다. 제일 가슴 뿌듯한 것은  kbs방송에 많은 애들의 글이 방송된 것이다. 아나운서의 이쁜 목소리로 자기가 쓴 글을 방송 듣는 애들의 얼굴마다 꽃물결이 출렁댔다.

  특히 2016년도 6월 16일에 방송된 노건우 학생이 쓴 작문 "고모님의 사랑"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그 글을 녹음한 걸 노건우 고모한테 보내주었는데 노건우 고모는 물론 그와 절친하게 지내는 열두 명 친구들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런 사연을 들었을 때 나도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우리 글을 쓰기 싫어하던 노건우가 작문반에 와서 우리글을 사랑하면서부터 쓴 작문이 이렇게까지 큰 감동을 일으켰기때문이다.

  매번 작문 배우러 와서는 들어서기 바쁘게 우리말로 된 책을 펼치는 애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서로간에 표준적인 우리말로 대화하는 걸 볼 때면 내가 애써 온 결실이 보인다.

  2005년 여름에 안도현텔레비에 내가 애들을 가르치는 사적이 방송되자 안도현 교육국 새일대 관심협회의 유관책임자가 날 부르더니 여름방학에 진행되는 <안도현의 감동인물> 대면하기 활동에 참여해 달라고 청들엇다. 그래서 나는 그해 방학간 안도현 제일실험소학교와 제3소학교 그리고 5중 등 학교를 다니면서 학생들앞에 나서서 자신이 걸어온 작가길을 소개하게 되였다. 매번마다 백 여 명되는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나는 그때 얼마나 행복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애들과 만나고 헤여지고 또 만나고 이렇게 반복되는 삶속에서 애들같은 순진하고 천진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성을 시로 써보기도했는데 2016년도에는 동시집<<꿈나무 사랑나무>>도 출간했다. 그 책을 출판할 때 박민정이란 학생이 자기가 모아 둔 세배돈 8천6백원을 보태 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진짜 눈물 흘리고야 말았다. 애들에게 자그만한 사랑을 베풀었을뿐인데 이같이 큰 사랑을 베풀려고하는 그 학생, 내가 하는 글 쓰는 일과 애들을 가르치는 일은 진정 보람이 컸다.내가 선택한 길은꽃무지개 활짝 펼쳐진 이쁜길이다. 그래서 내일도 더 먼 훗날에도 이 길을 걸을 것이다. 드팀없이 변함없이...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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