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본글짓기응모] 아버지 생각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9일 11시09분    조회:128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 글 / 김미란 -

 

 

  (흑룡강신문=도쿄) 오늘도 예전처럼 일 끝내고 집에 와서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고 작은 아들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무의식에 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아들한테 물었다.

  "이 반찬 누가 제일로 좋아하지?"

  "할아버지..."

  "어떻게 알아???"

  "엄마가 이 반찬 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제일로 좋아하는거라고 몇번이고 말해서 나도 알아요!"

  아들이 나를 힐끔거리면서 대답했다.

  "너 할아버지 얼굴이 기억나니?"

  "글쎄...조금...하지만 엄마한테서 자주 들어서인지 어떤분이셨다는건 알것 같아요. "

  순간 지나온 일들이 필림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딸 사랑은 아버지라고 나는 아버지한테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배였던것 같다. 내가 출가하는 날 밤에 그렇게 오래 우셨다는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일본에 처음 오신때는 내가 일본에 온지 5년에. 곧 작은애를 출산하게 되여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엄청 큰 트렁크 두개에 또 비행기에 채 부치지 못한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의 앞에 나타나셨다. 내가 떡 종류를 좋아한다고 찹쌀을 가루내여 잔뜩 지고 오셨던것이다. 그렇게 꼿꼿하시던 아버지의 어깨가 좀 휘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하여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는시장을 돌아다니시면서 어디에는 채소가 싸고 어디에는 일용품이 싸더라고. 나보다 동네를 더 잘 파악하고 계셨다. 어느새 우리집 시장을 보는 일은 아버지가 도맡게 되였다. 내가 무의식중에 뭐가 먹고싶다고 하면 언제 슬그머니 나가셔서는 손에 들고 오셨다. 항상 얼굴에는 환한 미소 지으시면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것은 우유병을 약물로 소독하는데 필요한 맞춤한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사러 나가신 아버지. 그것도 훗날에 어머니한테서 듣고 알게 된 일이였지만 마땅한 용기를 고르느라 적어서 다섯번은 사고 물리고를 반복하셨다는것이다. 예전엔 그런분이 아니셨는데... 나는 억이 막혀 저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일본어를 전혀 못하시는 아버지가 어떻게 해내셨을가는 지금도 상상이 가지를 않는다.

  이렇게 하루 이틀... 석달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두분이 중국으로 돌아가신후 혼자서 아침에는 큰애 챙겨서 학교 보내고 작은애 끌고 시장 다녀오고 애들 먹이고 씻기고 하면 그냥 하루하루가 기진맥진이였다. 정말이지 첫 한달은 너무나 적응이 안되여 힘들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났다. 좀더 계시지...

  일본이 물가가 비싸서 일본에 계시면 우리한테 오히려 부담이 된다시면서 비자연장을 하지 않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아버지가 두번째로 일본에 오신것은 작은애 첫돐생일 때였다.

  첫번째와 별 다름없이 또 많은 짐을 어깨에 지고 오셨다. 몇달전보다 어깨가 더 휘신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반가움보다 짜증이 났다. "아버지두 참. 일본에도 다 있는데 뭘 이렇게 무겁게 들고 다니십니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일본에서 굶고 사는가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정성보다 아버지가 힘드셨던거보다 체면이 깎일가봐 싫다는 나의 이 말에 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가는듯 하더니 인차 어색한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이렇게 일본에서의 두번째 대면에도 아버지께 따뜻한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 드리고 말았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이 하는 말. "아버지 얼굴 기색도 많이 못해지셨구려. 래일 우에노 아메요코시장에 가서 자라 한마리 사다가 몸 보신 시켜드렸으면 좋겠소. "

  이튿날. 아침 일찍 아버지를 모시고 우에노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딸과 같이 길 떠나는게 얼마만이냐며 어린애들 마냥 기뻐하셨다. 시장에 가서 곧장 자라 파는곳으로 찾아갔다. 자라 한마리를 사면 그 자리에서 피를 뽑아 술에 타서 마시게 한다던 남편의 말대로 아버지께 몸에 좋으니 마시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애를 어머니께 혼자 맡기고 온것이 불안하여 인차 돌아섰다. 돌아오는 전차안에서 아버지가 흥분하신 말투로 나한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얘야. 아까 마신게 진짜 좋기는 좋은것 같다. 지금 가슴에서부터 온 몸이 훈훈해나면서 막 하늘로 솟아오를것만 같은 기분이다야!"

  "아버지두 참. 거기에 술이 들어가서 술기운에 그럴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전차안에서 소리 낮추어 말해야 합니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냥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계셨다.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께 오늘 좋은걸 마셨으니 장생불로 할거요 하시면서 하루종일 같은 얘기를 자꾸 곱씹는것이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저렇게 기뻐하시니 이제부터라도 좋은걸 많이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이 좀 더 크면 아버지를 모시고 려행도 함께 다니고 몸 보신도 시켜드리고 해야지...) 머리속에서 여러가지 계획이 맴돌아쳤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출근하게 되였다.

  애를 완전히 아버지 어머니께 맡기고 밖에서 하루종일 보내니 홀가분하고 되려 신나기만 하였다. 아침은 대수 챙겨먹고 회사 나갔다가 퇴근하여 집에 오면 애 속옷까지 깨끗하게 빨아놓은 상태였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상만은 잘 차려야 겠다는 생각에 저녁거리는 내가 사오는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회사근처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전차에서 내리니 아버지가 마중나와 계셨다. 내 손에 들었던 짐을 채여가듯 들더니 (이렇게 무거운걸 들고 오느라 힘들었겠네...)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어정쩡하게 짐을 맡기고 앞에서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등뒤를 보니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였다. (그렇게 웅장하시던 아버지가 언제부터 저렇게 야위였을가...어깨도 점점 구부정하고....) 나는 인츰 달려가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허리에 힘 좀 주시고 어깨를 더 쭉~펴고 걸으세요." 아버지는 멋적게 웃으시기만 하셨다.

  그 이튿날도 아버지는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전날과 다르게 려행용 멜가방을 들고 나오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내 손에서 짐을 빼앗아 가방에 넣더니 어깨에 짊어지는것이였다. 그리고는 힘들었겠다고 한마디 하시고는 내 앞에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이렇게 내가 출근하는 날마다 몇개월동안 아버지는 나의 마중을 나오셨고 앞의 광경이 반복되였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돌아가시기 두주일전까지 ... ...

  그날은 8월초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 였다. 나는 휴일이라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네 내외가 도맡아 하려고 준비중인 가게로 일손 도우러 갔다. 이것 저것 씻고 닦고 하다가 아버지를 보니 구석진곳에 쭈크리고 앉아 계셨다. 여느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 나는 인츰 아버지한테 달려가 물었다. "아버지.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더니 어디 아프신것 아니예요?"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시는 아버지. 황급히 아버지 이마를 짚어보니 불덩이 같았다. "안되겠어요. 병원에 갑시다. " 인차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뒤지니 걸어서 5분거리에 종합병원이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오전 11시까지 접수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다행히 십분가량 시간이 있었다... ...

  싫다는 아버지를 끌다싶이 해서 밖에 나왔다. 병원 방향을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멀리서 따라오시는 것이였다. 아버지한테 도로 뛰여가서 말했다. "좀 더 빨리 걸으실수 없겠습니까? 늦으면 병원이 문을 닫습니다." 아버지를 재촉하고나서 또 혼자서 급한 마음에 종종걸음을 쳤다. 좀 지나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또 멀리 뒤떨어져 계셨다. "아버지. 저기 보이는게 병원입니다. 제가 먼저 갈테니 빨리 따라오세요." 멀리서 이렇게 소리지르고 나는 병원에 뛰여들어갔다. 다행히 접수신청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를 마중하여 병원에 들어와 걸상에 주저 앉았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버지를 바라보니 아버지도 땀벌창이 되여 계셨다. 인차 손수건으로 아버지 얼굴의 땀을 닦아드리려고 하니 아버지는 너도 땀투성이라며 나부터 닦으라고 하시는것이였다. 이렇게 한참을 서로 땀을 닦아주다가 시원한 물 사러 갔다오니 아버지는 걸상에 쪼그리고 누워계셨다. 어쩐지 마음이 쓰려났다.

  한참을 지나 간호사가 와서 묻는것이였다. 의료보험증은 없냐고. 나는 아버지는 중국에서 친척방문비자로 오셨고 이제 열흘뒤면 비자가 끝나서 중국으로 돌아가신다고 알렸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그럼 혈액검사와 CT만 하자고 하였다. 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이 내게 하는 말 "간이 많이 나쁘네요. 소염제와 해열제 그리고 진통제를 처방할테니 드시게 하고 중국에 돌아가면 인차 전면검사 받게 하세요."

  병원을 나서는데 마음이 좀 놓였다. 약도 받아놓았으니 인츰 나으실테지... 아버지가 간염이 있으신것은 꽤 오래된 일이고 우리 가족이 다 알고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 ...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우시는것이였다. 약과 물을 챙겨가지고 아버지 한테로 가져가는데 아버지가 힘겨운 목소리로 어머니한테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아까 아파서 쟤를 따라 병원에 가는데 걷기가 힘들어 죽는줄 알았소. 5분거리라고 하더니만 십리는 더 되는것 같습데..."

  순간 뭔가가 내 머리를 무겁게 내리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왜 그때 택시라도 탈 생각을 못했을까? 걸어서 5분거리라니까 쉽게만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정말로 많이 아프셨나 보구나. 정말 아직도 이렇게 생각이 짧으니까 참... ...)이렇게 처음으로 아버지께 큰 잘못을 한것 같아 후회가 되였다.

  하지만!

  나는 더 큰 후회를 하게 될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약을 드시고 며칠 쉬니까 아버지는 열도 내리고 몸이 거의 좋아진듯 싶었다. 날자가 되여 중국으로 돌아가시는 날이 돌아왔다. "이젠 다 나았으니 근심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내 마음을 헤아리는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나도 좀 시름이 놓이는것 같았다. 그러자 머리속은 아버지 어머니가 가신뒤 또 혼자서 애들 뒤치닥거리 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어머니께 잊지않고 당부하였다. 중국에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를 인차 전면검사 받게 하시라고.

  며칠뒤 저녁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렸던 전화라 다급히 물었다.

  "아버지 전면검사 받으셨습니까? 어떻습니까? 괜찮지 예???"

  나의 조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조금은 떨리는듯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오자마자 니가 시키는대로 병원에 갔다왔다. 아버지는 너희들하고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자식이니까 알려야 할것 같아서 전화한다. 아버지 간암이란다. .........그것도 말기........."

  어머니는 뒷말을 잇지 못하셨고 나는 순간 머리에 된 방망이를 맞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소리. 그럴수 없습니다. 제대로 검사 받았습니까?"

  "오. 전번날 지방병원에서 진단받고 오늘 연변병원에 가서도 재차 검사했다. 남은 수명이 반년정도라네... 흑...흑..."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청천벽력이...

  눈앞에는 역까지 마중나와 내 짐을 가로채여 멜가방에 지고 앞서 걸어가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힘드셨을가?! 아마도 손에 들기보다 어깨에 지면 덜 힘들어서 그렇게 메고 다니셨구나. 내가 얼마든지 들고 갈수 있는 짐이였는데 ...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아무 생각없이 받기만 하였구나. 아버지께 아무것도 해드린게 없고 계획만 가득 한들 이제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그만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을때도 아버지께 속옷 한벌 사드린적 없고 남편따라 일본에 올 때에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큰 애를 아버지 어머니께 맡겼었고... 외국에서 산다는 구실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을뿐만 아니라 일본구경 시킨다고 일본에 모셔온것도 오직 내가 필요해서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내가 사드린 긴 외투가 너무나 맘에 드신다며 돌아가실때는 꼭 그옷을 입혀서 보내달라고 어머니께 당부하시더란다.

  아버지...아버지...

  항상 저한테 그러셨지요.

  좋은 일이나 행복한 일은 남과 나누면 배로 되여 돌아오는 법이니 꼭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거라. 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것은 제 몫이니 절로 이겨내고 절로 마음을 다스리는게 어른이 되는거란다. 네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어떤이한테는 아무일도 아닐수 있기에 힘들다 고통스럽다 라는것들은 자기 생각하기 나름이니 그런것들을 느낄새도 없게 항상 많은 사람들과 좋은것만 나누면서 살거라. 모든 일이 무른땅에 말뚝박기와 같이 쉬운 일은 아니니 하고자 하는 일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거라. 또 세상엔 우연이란 없고 모든일이 필연적이니 후회없는 삶을 살도록 항상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느니라.

  저에게 생명을 주시고 인생관까지 심어주신 아버지. 오래오래 저의 옆에 계실줄로만 알았던 제 자신이 너무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이튿날. 대충 주변을 정리하고 나는 큰애는 남편한테 맡기고 작은애만 데리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더는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그날로부터 일년반후에 아버지는 영영 나의 곁을 떠나셨다.

  "엄마. 또 울어요? 밥은 안 먹어요?"

  작은애가 소리질렀다.

  "오. 너 혼자 먼저 먹어라. 엄마는 할머니께 전화드리고 먹을께."

  나는 전화기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었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려야지.

흑룡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백성이야기65]  대련리공대학 부속고급중학교 김종식 특급교사의 성장이야기     수학교육연구에서 최고상인 ‘소보청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대련리공대학 부속중학교 김종식   락제생으로부터 수학교육연구분야에서 최고상인 ‘소보청(苏步青)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김종식(5...
  • 2017-12-01
  • 한 10년쯤전에는 고향의 지인들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듣군 했었다. “일본에서는 밥 값을 제각기 낸다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인정머리 없어? 니들은 그러지 말라…” 물론, 우리도 아주 오래동안은 그것을 접수하지 못하고 고향친구들 모임에서 와리깡(割勘),즉 터치페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무사...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7) ◇김홍련(장춘) 장가계에서 려행 친구들 함께(앞사람이 필자 김홍련) 2011년 10월 25일, 열네살 천진란만하던 소녀시절에 만난 우리 동창생들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배낭을 메고 연길에서 떠나 천애지각 해남도까지 바라고 려행을 시작했다. 퇴직비로 생활하는 우...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6) ◇허인범(룡정)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서 평강벌을 내려다보며       /사진 신승우 찍음 9월 3일, 자치주 창립 65돐 경축의 기쁨을 안고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벼파도 설레이는 아득한 황금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가...
  • 2017-11-27
  • 일본 지진에서 맺어진 고마운 인연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발생한 일본 동북지방의 태평양 해역 지진은 그 후에 일어난 쓰나미, 그리고 빈번한 여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을 구축해왔던 기반시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우선 교통기관이 중단되였고 일부 지방의 통신이 차단되였으며 정전으로 모든 시설이 혼란상태에 빠졌...
  • 2017-11-24
  •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기억 속에서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조금 늦어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는 식사하는 손님들과 커피타임중의 손님들로 법석하였다. 오후 2시 40분 쯤 (후에 14시 46분으로 밝혀 졌음)되였을 때, 레스토랑 건물이 상하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 2017-11-24
  •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의 '김치' 수업. 19일 아침, 스테인리스(不锈钢) 소재로 꾸며진 은빛 주방에 오미자, 둥굴레 등 약재와 고운 빛갈을 자랑하는 매실 효소, 사과 효소 등이 담겨진 유리병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다. 이곳은 바로 연길시 북산가두 단산사회구역에 위치한 사랑난로 약선료리공방. 료리와 사...
  • 2017-11-23
  •     ▲ 사진, 동포언론사 및 동포단체 대표들이 17일 오후 포항시청을 직접 방문해 ‘포항지진 피해 사랑나눔 성금 접수처’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재한동포문인협회 류재순 회장, 한중포커스신문 문현택 대표,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정룡 편집장, 포항시청 성금접수처 관계자, 중국동포한마음...
  • 2017-11-23
  •    (흑룡강신문=하얼빈)심양은 동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리 나라 중심도시중 하나이다. 이 고유한 큰 도회지의 한 모퉁이에 조선족이 한데 모여사는 서탑거리가 있다.   나는 늙으막에 다병하고 고적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자식 따라 심양에 와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딸집 이웃에 집을 잡다보니 동릉의...
  • 2017-11-21
  • 상가들이 빼곡이 들어선 일본 도쿄의 한 상업거리(자료사진) 일본에서의 서비스업은 “손님은 왕이다”를 넘어 “손님은 신(神)이다” 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매일 오픈전의 미팅에서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 2017-11-17
  • 이 글은 현재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있는 한 조선족녀성(필명: 小葵-작은 해바라기)이 자신의 위챗계정에 중문으로 올린 글이다. 우리는 그녀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한단락 경력을 빌어 우리들 인생의 깨우침을 공유하고저 이 글을 편역해 독자들에게 소...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3) ◇최선자(연길) 1987년 7월 22일 입당선서를 마치고 입당소개인 두분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당지부서기 경신성(한족), 필자 최선자, 교장 백경인(조선족). 1983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학교 령도로부터 절육수술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아연해졌다. &ldquo...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2) ◇박명규(연길) 할아버지를 모시던 세월의 필자 박명규와 태봉선 부부의 모습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이것은 44년 전 내가 북경병원으로 확진하러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한 말이였다. 어쩌면 엉클어진, 엉망이 된 가문의 뿌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 2017-11-14
  • 주로 중국음식과 한국음식 정도 밖에 몰랐던 나는 일본인들의 폭 넓은 음식 취향에 놀랐다. 호이꼬로(回鍋肉), 칭죠로스(青椒肉丝), 마보도후(麻婆豆腐) 등 중화료리의 료리명을 어린애들까지 술술 말하는 정도였고 처음 만나는 경우 교자(餃子)가 맛있다는 말로 수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 중국음식을 싫어하는 일본인...
  • 2017-11-13
  • 소학교졸업식에서 마츠시마선생님과 함께 아들애가 태여나서 여덟달만에 탁아소 생활을 시작했던 연유로 일본에 오자마자 집단생활에 제법 적응한 아들애 덕분에 엄마인 나의 일본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오늘날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아들애가 부모의 노력외에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고마운 일본인들과의 소중한 ...
  • 2017-11-13
  • 지도에 우리 민족 성씨로 명명된 행정촌이 있다는 사실에 언녕부터 호기심이 부쩍 동했는데 필자는 얼마전  박씨 두분 -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 룡정시 모 광고공사 박청수경리와 함께 말타고 꽃구경식으로나마 박씨 성으로 이름진 박씨 마을-료녕성본계만족자치현소시(小市)진의 박보(...
  • 2017-11-13
  • 1990년대에 일본에 류학온 중국류학생들이라면 한두번쯤은 겪었을 일이 있다. 국제교류협회에서 조직한 만찬회에서 만난, 매사에 적극적인 류학생과 친절한 일본인이 근 두시간 정도에 걸친 이야기 끝에 작별인사를 하면서 일본인이 말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 집에 꼭 놀러 오세요.” 너무 기뻤던 류학생...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1) ◇리정화(연길) 필자 리정화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흰보라 날리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눈부신 꽃세례 속에서 어린애들이 오구작작 웃고 떠들며 학교를 간다. 오리털 잠바에 털목도리, 털장갑, 따뜻한 신발… 추위를 막아주는 전신무장을 하고 아빠 엄마...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0) ◇박철원(연길) 필자 박철원 부부 오늘도 당교에서 함께 ‘충전’하며 나란히 1973년 28살에 결혼한 나는 올해 73세로 45년 혼인생활 남들의 부러움 속에서 오누이를 출세시키며 ‘잉꼬’라 불릴 만치 탄탄한 혼인생활을 이어왔다. 우리가 변치 않는 ...
  • 2017-11-07
  • 일본의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되여있는 고우반 일본에 와 본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오면 편리한 점이라 할가, 친절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바로 우리가 한자대국에서 왔기때문이다. 거리에 나서면 한자로 된 간판들이 보여서 생소한 감이 어느 정도...
  • 2017-11-02
‹처음  이전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