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녀자애가 있었어. 시장에서 식품 매대를 하는 엄마가 있다 보니 남들보다 시장에 훨씬 많이 가는 편이였지. 엄마 매대 주변의 아주머니들이 “고븐 아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른다며?”라고 슬슬 띄워주면 서슴없이 목청을 뽑아 노래를 부르곤 했어. 그 정도면 세상물정을 알 만한 나이였을 텐데 오고 가는 뭇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았나봐.
그 녀자애에게 가끔 시장에 가기 싫은 리유가 두가지가 있었어. 하나는 늘 시장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살짝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보이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애 때문이였어. 한번은 녀자애가 시장에 갔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퍽 치길래 돌아보니 그 남자애가 그 날도 해여진 진한 파란색 옷을 입고 떼꾼한 두 눈을 치켜뜨고 녀자애를 지켜보는거야. 녀자애는 기겁할 번했지. 그 뒤로 그 남자애를 만날가 봐 시장에 가는 게 조금 무서워졌어. “얘는 부모가 없나? 집이 없나? 무슨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된 걸까?” 무서운 와중에 많이 궁금하기도 하다가 그 남자애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다른 하나의 리유는 시장 문 앞에서 여름이면 옥수수, 다른 계절엔 강냉이를 파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때문이였어. 휘다 못해 공처럼 볼록해진 할머니의 등 그리고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 피여난 얼굴과 손을 보면 가슴이 아리곤 했지. 특히 밖에 있기만 해도 저절로 발이 동동 굴러지는 겨울이면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너무 안스러웠어. 할머니가 빨리 집에 갈 수 있게 돈만 있으면 그 강냉이 전부를 사주고 싶을 정도였지. 그래서 매번 할머니를 만날 때면 강냉이를 한봉지씩 사곤 했는데 집에 채 먹지도 못한 강냉이를 잔뜩 두고 련속 사들여서 엄마한테 크게 욕먹었어. 그 뒤로 강냉이를 사지 않고 시장 문 앞을 지날 때면 할머니와 눈길이 마주칠가 봐 속 한켠 어딘가가 늘 불편했지.
녀자애가 몇살 되던 해였던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한여름날 늦은 오후였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간 흔적들이 시장 앞에 앉아있는 장사군들의 모습에 그대로 남아있었지. 얼굴은 익지 않았을가 싶을 정도로 벌겋고 머리카락과 옷들은 땀으로 후줄근했어. 할머니의 모습도 그랬어. 갑자기 멀리서 여럿 되는 젊은 남자들이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더니 장사군들이 팔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거둬가는거야. 하얀 작은‘마대'에 들어있는 옥수수며, 짚으로 짠 광주리에 들어있는 왜지며 참외며…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가릴 것 없이 와락와락.
“할머니만은 내버려둬!” 속으로 그렇게 간절히 웨쳐댔지만 그들은 할머니한테로 다가가고 있었어. 가슴 한켠이 내려앉는 것 같았어. 어떡하지? 뛰여가서 내가 막기라도 해볼가? “안돼요! 할머니꺼만은 놔두세요! 제발 가져가지 마세요!”라고 애원을 하면 그들이 눈 감아주고 가버릴 것 같기도 했어. 벌렁거리는 가슴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데 발걸음은 그 자리에 굳어진 채로 떨어지지 않는거야.“얼른 가서 막아!”“아, 못하겠어!” 녀자애의 가슴과 머리는 커다란 두 파도가 되여 싸우고 있었지. 그러는 사이, 할머니의 옥수수는 이미 그 남자들의 손에 들려져 있었어. 할머니의 애원과 절망이 뒤엉킨 그 뿌연 눈빛은 그날 밤 실면했던 녀자애의 가슴속에 짙은 락인이 되여 박혀버렸어.
그 락인은 “너는 어쩜 이렇게 용기가 없니!”라는 말을 건네며 꽤 오랜 시간을 녀자애를 괴롭혔지. 얼마 만큼한 시간을 괴롭혔냐면 바로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족히 이십년을 말이야. 그래, 우의 이야기 속 녀자애가 바로 나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파란 옷의 남자애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궁금하고, 그 할머니의 옥수수를 막아서지 못했던 것이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퍽이나 싱거운 사람인 나의 이야기였어. 결국 그 남자애의 이야기를 알아낸들 그 애의 상황을 바꿔줄 수도 없었을 것임을, 그날 할머니의 옥수수를 가져가지 말라고 용기를 내서 막아선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임을 분명 알면서도 지워내지 못하는 걸 보면 나는 태여나길 ‘오지랖'의 유전자를 갖고 태여났나봐.‘오지랖'이란 그런거잖아. 딱히 그럴 만한 리유도 없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한 것.
나이를 들면서 오지라퍼인 내가 그 락인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들이 있어. 가슴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고 놓쳐버릴 경우, 꽤 오랜 시간 어쩌면 평생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가슴이 시키는 일이란 게 뭘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통해서 처음 가슴이 시키는 일을 경험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왕왕 가슴이 시키는 일은 머리가 나서서 막을 때가 많기도 하지. 가슴은 이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데 머리는 수많은 조건을 따지면서 이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리유를 찾아. 그래서 사랑을 놓쳐버릴 때 사람들은 가장 큰 후회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사랑을 하면서 가슴이 시키는 일의 참뜻을 알게 될 즈음, 나는 가슴이 시키는 일중에 글쓰기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어릴 적에도 기억에 깊이 남거나 강한 느낌을 줬던 일들은 글로 끄적이곤 했는데 사랑을 하면서 글을 쓰는 빈도가 더 높아졌지. 행복해도 글을 썼고, 아프면 더욱 글을 썼어. 지금 보면 쓴 게 아니라 씌여졌다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아. 씌여진 글들은 알고 보니‘시'라고 부르는 것이였어.‘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시를 썼던거야. 행복해서 글을 쓰니까 어느샌가 행복은 더 커지고, 아파서 시를 쓰니까 어느샌가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 지금도 마음이 아플 때면 전에 썼던 시들을 꺼내 읽곤 해. 그러면 아픔이 가라앉고 마음이 잔잔해지곤 하지.
글쓰기를 사랑한 내게 주변에서 전해오는 말들이 있었어.“돈도 안되는 글을 왜 써요? 젊었을 때는 돈이나 많이 벌고 글은 나중에 나이든 후에 써도 돼요.” 그런 말에 흔들릴 내가 아니지. 난 원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야 속이 편한 오지라퍼니까. 오지랖도 모자라서 한 삐딱까지 하는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받아치기도 했지. “돈이 되는 글을 쓰면 되잖아요.” 물론 그건 아직까지 꿈 속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일이겠지만, 꿈은 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꼭 이루어진다고 했잖아. 난 그 말을 믿어.
그 뒤로 가슴이 더 한심한 일을 시켰어. 돈이 안된다는 글 중에서도 제일 돈이 안된다는 시로 시집을 내라고 말이야. “아이고, 뭐하러 시집을 내요? 연변에서 시집을 내면 다섯부도 안 팔리는데.” 그래서 연변에서 내지 않고 해외에서 출판하기로 했어. 책이 훨씬 더 세련되고 예쁘게 나올 테고, 훨씬 더 많은 독자들과 대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념두에 뒀던거야.
그런데 그 와중에도 머리는 하지 말아야 할 리유를 찾고 있었어. 출간을 했다가 팔리지 않으면 비용 그대로 모두 날리는 거 아니야? 뭐 이딴 수준으로 시집을 냈다라고 독자들이 비난하지 않을가? 시간이 썩 오래 흐른 뒤에 보면 스스로도 부끄러운 책이 되지 않을가?… 그때 그 락인이 말을 건네왔어.“용기를 내! 이십년을 후회할래?” 그렇게 《그대 시가 내가 되여 내게로 올 때》라는 시집을 냈고 거짓말 같이 500여부를 팔았어. 물론 그 판매부수가 랭정한 독자들의 수요가 결정했다기보다는 내 꿈을 지지하는 지인들의 응원이 만들어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시집 출간을 통해 우리 조선족 작가들도 틀을 깨고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면 사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해외의 어느 한 블로그에서 이름 모를 독자가 쓴 내 시집에 대한 후기를 보고 시집을 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새삼 했지. 이런 감성과 글귀는 어떻게 나오는거냐며, 가을이라는 계절에 읽기 딱 좋은 시집이라면서 진심어린 추천을 하는거야. 내 글로 누군가의 시간에, 계절에, 삶에 빛을 더할 수 있다는 것, 글쓰는 이의 가장 큰 소원이자 행복이 아닐가. 오지라퍼의 꿈이 놀라운 기능을 수행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였어.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나의 이 오지랖은 스스로의 글쓰기 령역을 벗어나 슬슬 우리 민족 문화에로 뻗치기 시작했어. 타지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 문화가 소실되여가고 민족정체성이 흔들리는 현상에 또 가슴이 아팠던거야. 어린 시절 시장에서 그 할머니의 모습을 봤을 때처럼. 주제 넘게 내가 하는 일들로 뭔가를 바꿔보리라 결심했어. “돈도 안되는 일을 굳이 왜?” 두번째로 나를 따라다니는 질문이야. 그럼에도 “용기를 내! 후회할래?”라고 말을 건네는 락인 덕분에 가슴이 시키는 일을 또한번 주체없이 저질렀어. 그 일을 시작한 지도 이제 2년이 거의 되여가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기로 할 게.
이제 어른으로 커버린 녀자애에겐 작은 소망이 있어. 메말라가는 세상, 외로운 삶에 그래도, 더우기 그래서 꿈꾸는 오지라퍼들이 많았으면 정말 좋겠어. 오지라퍼들이 만들어가는 더 좋은 세상을 녀자애는 오늘도 꿈꿔.
김수연(金稣延)
1983년 화룡 출생. 화동사범대학 사회학과 졸업
문화계정 ‘글이 숨 쉬는 밤에’ 운영. 시집 《그대 시가 되여 내게로 올 때》 출간
《도라지》 2019년 제2호/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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