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림생(44살)은 1998 프랑스월드컵 조별리그 벨지끄전에서 붕대투혼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중앙수비수다. 하지만 리림생은 한국대표팀 뿐만아니라 K리그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3센치메터에 80킬로그람의 탄탄한 체격을 가진 리림생은 공중뽈과 대인방어에서 강점을 보였고 K리그 력사상 4백 수비라인을 가장 잘 리해하는 센터백으로 유명했다.
부평동중 재학시절 무명에 가까왔던 리림생은 부평고과 고려대를 거치며 기량이 만개했고 1990년 인도네시아 아시아 U-19 선수권 우승과 1991년 남북 단일팀의 일원으로 뽀르뚜갈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해 8강을 이끌며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됐고 그해 10월 21일 아랍추장국련방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A매치 데뷔전을 치르며 자신의 주가를 계속 끌어올렸다.
1994년 고려대 졸업과 함께 리림생은 유공(현 제주)에 입단했다. 데뷔 첫해 유공의 아디다스컵과 정규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화제를 뿌렸고 1995년 발레리 니폼니시감독이 유공 사령탑에 부임하면서 그의 기량은 한층 발전했다. 특히 니폼니시감독의 지도아래 4백의 달인으로 거듭났고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을 앞두고 와일드카드로 지명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메히꼬와의 2차전에서 왼쪽발목 부상을 당하면서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리림생의 이름 석자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통해 재조명 받았다. 비록 메히꼬와 화란전에 결장했지만 벨지끄와의 3차전에서 후반 시작과 함께 교체 투입됐다. 조별리그 2련패후 차범근감독이 중도 경질되는 아픔속에서 리림생은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에도 붕대투혼을 발휘했다. 비록 1대1 무승부로 끝났지만 리림생의 붕대투혼은 승리 그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
이후 리림생은 2003년 9년간 정들었던 부천을 떠나 부산으로 이적했다. 한 시즌만 뛴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차범근감독의 부름을 받아 수원 트레이너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코치와 수석코치를 거쳐 2009년말 싱가포르 명문 홈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아 4시즌째 팀을 이끌었고 지난해 중국 갑급리그 심수우항팀의 지휘봉을 잡았었다. “지도자” 리림생은 주위의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 항상 노력하고 연구하는 지도자라는것이 지배적인 평가이다.
연변일보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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