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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81]연변대학 발전의 동력(박문일편4)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2월22일 08시33분    조회: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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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81](박문일편4)

연변대학교 발전의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의 배려입니다. 1949년 3월에 연변대학교가 세워진 것도 바로 민족정책의 결과로서 민족정책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리고 1962년 6월 22일에 국무원 주은래 총리께서 등영초동지와 함께 연변대학교를 시찰오셨습니다. 학교를 시찰하고나서 돌아가시면서 학교문을 나가기 전에 “연변대학교의 학생기숙사가 어느곳에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원래 학교와 주당위에서 계획한 로선은 학교를 돌아보신 후 직접 빈관에 돌아가시도록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총리께서 불쑥 묻자 안내원은 길 남쪽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총리께서는 우선 학생기숙사에 먼저 들어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에 들어가셔서 학생들의 이불이랑 기타 생활용품들을 다 검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식당이 어데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점심준비를 할 때였지요. 학생식당에 들어가 이곳 저곳 살피다가 밥가마 뚜껑을 열어보시는 것이였습니다. 밥을 많이 하는 큰 가마의 나무뚜껑을 열어보시더니 뚜껑이 아주 깨끗하다고 하시면서 “학생들이 무슨 음식을 먹는가?”고 물어보셨습니다. 그 때는 곤난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교를 떠나 돌아가셨습니다. 이날 연변의학원을 시찰하시고 다음날 연변농학원을 시찰하셨습니다.

1962년 연변대학을 시찰하는 주은래 총리.

1964년 7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덕 위원장과 중화인민공화국 동필무 부주석께서 함께 오셔서 학교를 시찰했습니다. 그 때 주덕 위원장이 “모택동사상을 힘써 학습하고 사회주의 계승자를 양성하자(学习毛泽东思想,培养社会主义接班人)”는 제사를 써주시였습니다. 연변대학 학교간판에 “연변대학”이라는 글은 주덕 위원장의 글씨체입니다. 그 때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도 시찰하셨습니다.

1964년 연변대학에 오신 주덕 위원장과 동필무 부주석.

1984년 5월에는 중공중앙 호요방 총서기께서 연변대학을 시찰하셨습니다. 호요방 총서기는 조선에 방문갔다가 돌아오실 때 도문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오시다가 연길에 내리셨습니다. 그 때 호요방 총서기가 학교에 오셔서 “노력하여 민족인재를 양성하자”(努力培养民族人才)는 제사를 써주시였습니다. 학교의 민족인재 양성방향을 명확히 제출해주시였습니다.

1956년도에 연변대학을 시찰오신 당시 공청단중앙 총서기 호요방

호요방 총서기는 사실 공청단중앙 총서기로 있을 때부터 연변대학 학생들을 관심했습니다. 1952년 9월에 연변대학교 제1기졸업생들이 졸업할 때 학교에서 모두 북경참관을 갔습니다. 당시 공청단중앙 총서기로 계시던 호요방이 우리가 북경에 간걸 알고 전화를 걸어 졸업생가운데서 공청단사업을 하던 단간부 몇사람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 리원백 등 7명이 호요방 총서기를 찾아갔는 데 호요방 총서기는 우리에게 고무격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다음 쏘련에서 전세계적인 모임이 있어서 중국의 몇개 대학에서 학생대표를 보내게 되였는데 그 때 또 연변대학을 빼놓지 말라고 해서 몇사람 안가는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연변대학에서 김용협이 참가하게 되였습니다. 호요방 총서기는 이처럼 연변대학을 머리 속에 간직하고 선후로 3차례나 지극한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1991년 1월, 연변대학을 시찰오신 강택민 총서기.

1991년 1월 7일에 강택민 총서기가 연변대학에 오시였습니다. 이곳은 1월 7일이면 엄동설한이지요. 그 때 제가 모자도 안쓰고 빈머리로 밖에 나가 영접했습니다. 총서기를 영접해 모시고 들어 오는데 강택민 총서기가 저를 보고 “귀가 얼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면서 걱정해주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이런 추위에 습관돼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제가 사무실에 모시려고 하니 “대학교의 실험실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실험실에 모시고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강택민 총서기는 원래 자연기술과학에 대해 익숙한 분이지요. 실험실의 실험의기 설비들을 보시고는 “이런 설비들을 어디에서 구해왔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는 당과 국가, 교육부에서 우리들에게 설비를 무장시켜준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 때 교육부에서 돈을 줘서 실험실의 설비들을 사온 것이였습니다. 강택민 총서기께서는 이와같이 실험실을 직접 보고난 후 사무실에 들어가서 회보를 들으시고 “연변대학교를 잘 꾸려 4개현대화건설의 인재를 양성하자”(办好延边大学 培养四化建设人才)라는 내용의 제사를 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들이 19명이나 연변대학에 다녀가셨습니다. 그리고 곽말약 중국과학원 원장이 연변대학이 건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 4월 18일에 연변대학 전교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편지에는 “당의 령도밑에서 쏘련의 방조가 좀 있으니 오직 우리들이 집체적으로 노력하고 실사구시하고 큰 발걸음을 내디디면 우리는 반드시 과학보루를 공략하여 과학기술로 하여금 12년내로 세계선진수준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학생들을 고무하는 부탁의 내용이 적혀있었지요.

당시 중국과학원 원장이였던 곽말약이 연변대학 사생들에게 보내온 편지.

국가 지도일군들 뿐만 아니라 기층에서도 연변대학을 이렇게 관심하였다는 겁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우리 연변대학교 발전의 기본적인 동력으로 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여론이 되여있는 것입니다. 저는 선후로 16년간을 교장사업을 하였는데 그 동안 많은 외국손님들을 만났습니다. 만나는 가운데 인상이 가장 깊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구동성의 말씀들이였습니다.

즉 “중국에 와 보니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성공된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특히 연변과 연변대학교에 와 보니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이 실로 좋은 정책이라는 것이 똑똑히 알립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박총장님, 제가 알건대 민족리론은 레닌이 만들었다는데 쓰딸린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택동이 건너가서 레닌의 민족리론을 가져다가 중국의 민족리론으로 만들었다.”고 말을 건네면서 레닌의 민족리론이 중국에서 꽃을 피운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당의 정확한 민족리론과 그 사상은 력사적으로 우리 학교 사생원공들의 머리 속에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학교 건교초기에 선생님들이 모두 57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분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국가규정에 따라 일본분들은 귀국을 하셨는데 그 가운데 나까무라라는 교수가 계셨습니다. 이 분이 지금은 97세 고령인데 사모님과 자식들을 데리고 연변대학에 오셨습니다. 화학을 하는 분이신데 연변대학에 대한 감상이 머리를 찌른다는 것입니다. 항상 잊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말로만이 아니라 집 식구들을 데리고 와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한 민족정책문제에 대한 감정이 대단히 깊다는 것입니다.

연변대학의 슬로건.

두번째는 연변대학교의 력대 어르신님들의 전통적인 정신에 의해 이렇게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정신이라는 것은 우에서 이미 이야기한 8가지 글자입니다. 그리고 1949년 4월, 연변대학교가 세워진 한달 후 학교에서 학생들에 대한 규정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무엇이라고 썼는가 하면 제목이 “학생지도와 규정”인데 학생들을 교육해서 “자각성과 혁신성”을 양성해야 한다고 했는데 제가 찾아본 자료로는 전국에서 혁신적인 인재양성을 제일 먼저 제출한 대학이 바로 연변대학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니까 우리의 은사님들이 여기의 모범으로 되였다는 말이 됩니다.

50년대 과학대회에서 연설하는 림민호 부교장.

우리 림민호 부교장은 보통분이 아닙니다. 이 분은 일을 어떻게 하나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서 특별한 규정을 지은 것이 있습니다. 즉 학교 지도일군들이 특수한 사정을 제외하고 회의를 낮에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낮시간, 출근한 시간에는 모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도간부들의 회의는 밤에 한다는 것입니다. 밤에 하는데 그 때 학교 지도일군들이 거개가 한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림민호 부교장은 회의할 일이 있으면 밤에 자기집에서 하군 했습니다. 당위 서기 김문보도 좋고, 박규찬 교장은 좀 앞에 나가 살고 있었습니다만 선전부장, 조직부장 할 것 없이 모두 림민호 부교장네 집에 와서 회의를 했습니다. 저도 일찌기 지도일군 그룹에 들었는데 항상 저녁에 회의를 하군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2004년에 세워진 림민호동상 제막식.

그 다음 공과 사의(公私)계선이 엄격했습니다. 학교의 사무실 사무용지를 집에서 절대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림민호 부교장은 학교를 위해 농장을 두개 꾸렸습니다. 하나는 와룡산에 농장 하나 꾸렸고 동쪽산에 가서 농장을 하나 또 꾸렸습니다. 그 다음 학교울안이 농장이였습니다. 기음을 매도 자기가 앞장서서 맸는데 림교장과 함께 기음을 맬 때 림교장앞에 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연변대학 학교울안에 나무들이 매우 많은데 이는 모두 림민호 부교장과 박규찬 교장이 학교 지도일군으로 사업하실 때 심은 것들입니다. 연길공원 뒤쪽의 나무들도 연변대학에서 많이 심었습니다. 그래서 학교가 완전히 수림속에 잠겨있게 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로지도일군인 박규찬 교장, 김문보 서기, 리희일 서기 등은 연변대학 모든 선생님들과 직원들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진 어르신들입니다.

리희일 서기, 김문보 서기, 박규찬 교장(왼쪽으로부터).

“연변대학력사를 회고한다”는 제목으로 된 책이 있는데 여기에 한족들이 쓴 문장이 많습니다. 한족들이 림민호부교장이라든가 박규찬 교장님에 대해 쓴 문장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쓴 것들입니다. 림민호 부교장은 한족녀교원이 임신해서 출산기에 거의 들어 오는걸 먼저 다 조사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하고 련계도 없이 직접 교장사무실에 분부하여 자기차로 병원에 태워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출산시간도 다 조사를 하고 출생한 후 즉시 다시 집에 모셔왔습니다. 이 같은 처사는 정말 조련치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직원들의 헐망한 집 수리도 살펴보고  직접 수리에도 참가했습니다.

나는 늘쌍 얘기하는데 우리 학교의 앞으로의 희망이라고 하면 특색과 우세가 있는 대학으로 어떻게든 꾸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우리 학교를 이렇게 꾸리는데 또 외부의 지원도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외부에서 지원을 자꾸 이렇게 하는 걸가요? 바로 여기에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에 그 분들이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이렇게 자꾸 지원을 하는 것이지요.

몇가지만 더 이야기한다면 연변대학에서 외국류학생으로 적지 않게 일본으로 갔는데 한국의 두분이 우리가 부탁한 일도 없는데 저를 찾아와 가지고 “박총장,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냅시다. 경비를 다 부담하겠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그중 한분은 동훈선생님인데 지난해 이미 사망했고 다른 한분은 조양록 목사라고 하는 분인데 이 두분은 물론 재벌이 아닙니다. 사처로 돌아 다니시면서 돈을 모아서 선후로 두차례 20여명을 일본에 류학시켰습니다. 이들은 일본에 가지고 있던 헌집을 내서 재일본연변대학류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양성된 류학생들이 모두 연변대학 각 학과의 골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민족정책의 꽃향기를 받고 활짝 피여난 연변대학.

그 다음 다른 하나 놀라운 일은 미국국제문화재단의 리사장 곽정환이란 분이 중국의 민족정책에 감동되여 연변대학을 꾸리는데 자기도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86년 3월, 연변대학에 와서 저를 찾은 일입니다. 그는 저를 보고 “박총장, 중국의 민족정책이 대단합니다. 정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협조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해마다 50만딸라씩, 5년동안에 250만딸라를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1986년도에 이렇게 돈을 보낸다는게 대단하지요. 또 미국에 가는 류학생경비를 다 그들이 대주겠다고 했습니다. 후에 이들이 보낸 250만딸라가 다 건너왔습니다.

연변대학의 력사를 회고할 때 이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연변대학의수많은 학생들을 외국에 가서 류학하도록 지원해준 것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꽃향기를 받고 이에 감동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안상근

사진 동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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