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11](한룡길편2)
1940년대 중반부터 조선족 무용이 예술무용으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확실하게 형성되기는 연변문공단이 성립된 1946년도, 그러니까 조선의용군 5지대와 7지대가 합병해서 연변전원공서 문공단이 지방단체로 전이되면서 중국조선족의 예술무용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창작된 작품들을 보면 지게춤이라든가 빨래춤 특히 이 때 벌써 소형무극이 창작되기도 하였습니다.
빨래춤.
주덕해동지가 연변에 오시면서 3지대 문예선전대를 연변가무단에 소속시켰는데 이 때 조득현이라는 분이 옵니다. 이분은 발레를 전공한 분인데 1946년도에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조선의용군 선전대 무용교원으로 있으면서 무용창작도 하였습니다. 이 때로부터 조득현을 골간으로 하여 연변가무단에 무용창작대오가 형성됩니다. 연변가무단에서 조득현은 1950년도에 제일 첫 작품으로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라는 단막소형무극을 창작하였고 또 〈분노한 화살〉이라는 남녀쌍무를 창작합니다.
소형무극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와 같은 작품은 항미원조전쟁을 소재로 한 것인데 어느 한 마을에서 청춘남녀 두쌍이 결혼식을 합니다. 그런 환락적인 분위기 속에 미군비행기가 이 마을을 폭격합니다. 그래서 혼례장이 완전히 불바다가 됩니다. 여기에서 두 신랑은 자기 고향을 보위하기 위해 혼례장에서 직접 참군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여 혼례식이 참군식으로 바뀌게 되고 마을사람들이 이분들을 환송하면서 농사를 더 잘 지어 전선을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여기에서부터 사실주의 랑만주의 창작방법이 형성됩니다.
무용 〈분노한 화살〉.
그리고 그해 조득현이 창작한 쌍무 〈분노한 화살〉, 이 작품 역시 조선전쟁을 배경으로 했지만 력사적인 이야기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랍누이가 전쟁터에 나가 말을 타고 침략자들과 싸우는데 오빠가 화살을 다 쏘고 없으니 동생이 돌을 주어 오빠에게 섬겨 돌로 적들을 까부십니다. 이 때 대방의 화살이 오빠에게로 날아옵니다. 녀동생은 선뜻 자신의 가슴으로 화살을 막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전사하는데 오빠는 동생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아 활시위에 메우고 적진에로 돌격하는 이런 영용무쌍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여기에 반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이 중국조선족 예술무용창작의 시원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때 당시 아주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예술무용의 창작경향이 사실주의 랑만주의 창작방법을 토대로 발전합니다.
이 시기에 당시 자치주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제1임주장 주덕해동지가 행정업무를 봤는데 이분이 빨리 우리 민족 문화를 발굴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우리 문예일군들에게 “소방대 대원이 불을 끄러 가는 속도로 우리 민족 문화를 빨리 발굴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연변가무단에서 1951년도에 동북지역에 있는 많은 민간예인들 즉 연길에 거주하는 농악놀이군 하태익이라든가 또한 화룡투도구의 맹경호, 팔도의 우상학 등 민간예인들을 가무단에 모셔다 민간예술표현활동을 전개합니다.
하태익을 위수로 하는 농악대가 영화촬영을 마치고 스탭들과 함께(1952년).
여기에서 하태익이라는 분이 중국조선족 농악 전승과 농악놀이를 무대 농악무로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신 인물인데 이 분이 조득현과 만나게 됩니다. 하여 조득현선생은 하태익 민간예인과 합작하여 처음으로 농악무를 만듭니다. 그 전에는 농악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창작한 농악무는 농악형식을 종합적으로 리용하면서 예술화, 무대화한 것입니다.
농악무 창작과정에서 조득현은 전통적인 농악놀이에서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해버리고 소고춤, 장고춤, 쌍무, 군무, 남자무용, 녀자무용 등 다양한 춤형식들을 여러 파트로 나누어서 조무형식으로 농악무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 당시 농악무를 만들 수 있는 시대적, 문화적인 환경으로 보면 토지개혁을 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땅을 분배받은 기쁨에 따르는 생산열조, 항미원조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참군하는 사회적인 축제분위기를 작품의 정서적인 주제로 조득현선생은 하태익선생과 합작하여 이런 농악무를 만듭니다. 이러면서 농악무가 사회의 축제분위기를 이끌어 갑니다. 이리하여 동북 3성 콩쿠르에서 우수창작상을 타게 됩니다.
중국조선족 저명한 무용예술가 조득현선생.
여기서 특히 인정할 점은 농악무 창작이 중국조선족 무용사에서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전통무용을 재창조하는 창작방법이 여기서 형성됩니다. 그래서 후기에 많은 무용예술인들이 조득현선생이 창작한 이 농악무를 보고 “민속놀이를 가져다 예술무용으로 할 수 있구나.”하면서 민간에 내려가 민속무용을 수집정리 합니다. 그 때 당시 수집정리한 민속무용들이 한 30여종이 됩니다. 이 과정에 수건춤, 학춤, 칼춤, 탈춤, 거부기춤 등 많은 민속무용들을 예술무용으로 재창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조득현선생의 농악무 창조가 우리 중국조선족 전통무용의 재창조방식을 창조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이 예술무대가 더 풍부해지고 더 활발해짐에 따라 조선족 전통무용은 새로운 차원에로 발전합니다. 당시 우리 무용예술인들이 민간에 신입하여 수집한 무용형식 및 소재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반도로부터 전승해온 전통무용도 있지만 특히는 우리들의 삶에 잠재해 있는 민속, 그러니까 조선반도에 없는 그런 춤들을 만들어 낸 겁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물동이춤은 조선반도에 없습니다. 물론 조선에도 물동이춤이 있기는 하지만 조선의 물동이춤에서 물동이는 생활도구역할을 하지만 우리의 물동이춤에서는 녀성들의 도고하면서도 기예적인 무용표현도구로 쓰입니다. 이 물동이춤은 리인숙이라는 분이 창작하였는데 이분이 무용창작소재를 찾으려고 시골에 내려 갔을 당시 농촌 마을마다에서는 강물이나 샘물, 우물을 떠다가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족 아주머니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다듬어 이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물길러 갑니다. 새벽에 제일 먼저 가야 깨끗한 물을 길을 수 있으니까. 거기 우물가에서 부녀자들이 서로 동네방네 이야기들을 주고 받고 하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아침의 상쾌한 분위기에 묻혀 물을 동이에 담아 이고 신바람나게 집으로 돌아가는 이 형상을 리인숙 무용가가 딱 잡았습니다.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내성적인 아름다움, 정말 자기 가정을 위해, 자기 자식을 위해 맑은 물을 담아오는 이런 현상을 포착하여 〈물동이 춤〉을 만들었습니다.
물동이춤.
출연자들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기교적으로 돌아가거나 처음부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와서 마지막 끝날 때까지 물동이를 한번도 다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발밑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손으로 훔쳐서 뿌리친다든가 하는 형상적인 생활에피소드들을 첨부하여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예술적인 매력으로 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1988년도에 연변예술학교에서 공연팀을 무어 가지고 미국에 가서 공연하였는데 관중들이 우리의 〈물동이 춤〉을 보고 민족의 얼이 살아 있는 무용예술이 중국조선족에게 있다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또 6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게춤〉이라든가〈방치춤〉이라든가〈접시춤〉이라든가 이런 조선반도에 없는 많은 민속무용들이 조득현선생이 창도한 전통무용의 재창조방법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면서 중국조선족무용문화의 든든한 버팀돌이 되였습니다.
호미춤.
〈방치춤〉은 연변가무단에서 은퇴한 리승숙 안무가가 창작했는데 그 창작과정을 보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이 분이 지방에 조사를 내려 갔을 때 하루는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집 할머니가 방치돌에다 빨래를 한 마른 옷을 놓고 방치질을 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아주 정교롭게 들려왔답니다. 방치질이 힘드니까 흥얼흥얼 코노래도 부르고 또 어떤 때는 “뚝딱 따따딱 뚝딱 따따닥” 하며 리듬을 만듭니다. 후에 또 그 마을의 분들이 한자리에 마주 앉아 같이 방치질 하는데 서로 재미있게 리듬을 엮어가면서 장끼를 겨루는 것을 보고 리승숙 안무가는 이것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민속무용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게춤〉도 제일 먼저 (지난 세기) 50년대초에 지금의 화룡현 비암촌농민들이 농민공연대회에서 자체로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그 때 〈적비가〉라는 노래가 류행되였는데 거기에 맞춰 지게를 메고 춤을 췄습니다. 후에 연변가무단의 마문호선생이 농촌에 하향을 갔다가 로인독보조분들이 생산열조가 높아 쪽지게를 지고 농가비료를 밭에 내가는것을 보게 되였습니다. 이것을 소재로 이분이 많은 조사를 하였습니다.
무용〈지게춤〉(1949년).
농촌에서 보면 농민들이 벼모철에 벼모를 지게에 담아 메고 논두렁을 걸을 때면 무거우니 꼭 상하관성을 리용하면서 률동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무거운 벼모를 논판에 부리우고 돌아올 때는 아주 흥겹거든요. 그러면 지팽이로 지게를 툭툭 치면서 즉흥적으로 절주를 뽑아내는 현상들을 보게 됩니다. 하여 이분이 〈독보조로인〉이라는 지게춤을 만들어 냅니다. 이 작품도 전국과외예술콩쿠르에서 우수상을 탔습니다.
총적으로 (지난 세기) 50년대로부터 60년대까지 우리의 예술무용창작이 조득현선생의 사실주의 랑만주의 창작방법과 전통무용 재창작방법을 예술무용창작방법론으로 하여 많은 무용을 창작합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반도에 없는 우리 춤, 우리 생활을 반영한, 우리 사람들의 흥겨운 정서를 반영한 이런 춤들, 〈물동이춤〉, 〈지게춤〉, 〈방치춤〉, 〈접시춤〉, 〈양산춤〉과 같은 춤들이 10여가지나 있는데 이런 춤들이 우리 중국조선족 무용의 든든한 토대로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후기에 〈양산춤〉과 같은 춤은 기본상 소실되고 없으나 사실 저는 어릴적에 본 아름다운 인상으로 하여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채색누비포대기에 애기를 둘러업고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고 양산으로 애기에게 해볕을 막아주는 형상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조선족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정다운 형상미, 그 아름다운 심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화려한 무용이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용 속에 우리 식의 생활방식으로 우리 특색의 생존문화를 구축하여 우리의 무용예술이 발전하는 과정을 안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 무용의 특색이 전승, 보존, 발전된다고 봅니다.
소고춤.
새롭게 형성되고 발전하던 우리의 무용은 문화대혁명기간 민족혈통론으로 비참하게 탄압을 받으면서 농악무를 비롯한 많은 민속무용들이 페지되고 연변예술학교도 건교 12년만인 1969년에‘수정주의 싹을 키우는 요람'이라는 죄명을 쓰고 문을 닫았습니다. 연변가무단도 자치주혁명위원회선전소로 되면서 민족적인 것이 다 페지되여 자기 민속무용을 하지 못하고 ‘혁명본보기극'이나 발레무용을 하였습니다.
하여 이 시기에는 많은 무용예술가들이 농촌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였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로동개조과정에서도 기층에서 대중문예활동들에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서 연변예술학교의 박용원선생이라든가 안도문공단에 있다가 도문문공단에 간 홍수천선생이라든가 연변가무단에 있던 박종규선생이라든가 이런 분들의 활약이 후기 조선족예술무용의 재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박용원선생같은 분은 남편이 연변대학교 부총장이였는데 남편을 따라 룡정 동성공사 해란촌에 하향갑니다. 그 당시 룡정1중의 학생공청단공작을 하던 로동문선생이 연변대학졸업생인데 그분이 해란마을 태생이였습니다. 그가 집에 갔다가 연변대학 부총장이 마을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집에 찾아가니 총장님의 부인이 바로 저명한 조선족 무용교육가 박용원선생이였습니다. 로동문선생은 사모님이 최승희의 직접 제자이고 중국조선족 무용의 선구자이며 무용교육창시자라는 것을 알고 생산대지도부와 협상하여 룡정1중에 모셔옵니다. 이리하여 박용원선생은 거기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합니다.
저명한 무용 예술가, 교육가 박용원선생(중).
저도 그 때 취주악대에 있었는데 박용원선생이 창작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박용원선생은 학생들을 거느리고 항일내용을 형상한 5장무극 〈아마니(阿妈妮)〉와 〈신 한짝〉이라는 전통교육작품, 모내기 춤 등을 창작하여 지도하였으며 학생써클대를 이끌고 전 주 순회공연까지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여기에서 많은 무용인재들 즉 연변대학예술학원의 김민극교수님이라든가 연변가무단 무대에서 활약하던 김호일선생이라든가 연변주군중예술관의 김정일선생 등 이런 분들이 모두 그 때 룡정1중 학생써클조에서 양성되고 후에 예술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무용가로 컸습니다.
홍수천선생은 연변가무단에 있다가 안도현에 하향했는데 그 사이에 안도문공단에 초빙되여 무용지도를 했습니다. 그 때 창작도 많이 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시 안도문공단에 있었던 배우들이 지금 우리 연변무용계에서 중견력량으로 활약했던 안무가 송미라, 지정선, 김복순 및 군중문화사업지도자들인 강상범, 김득권, 강득수 등 이런 분들이 홍수천선생이 있었기에 무용에 입문했고 무용예술가로 자라서 후에 중국조선족 무용계의 제3대 골간들로 큰 활약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용가 홍수천선생.
박종규선생은 연변가무단의 배우였는데 이분은 민간예인 하태익선생에게서 직접 농악을 배운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왕청현 서위자촌에 하향을 하였는데 거기서부터 왕청농악을 재복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1969년도에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고 부대에 참군했다가 왕청문화관에 간 한동국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왕청문화관에 있으면서 소식을 듣고 박종규선생한테 찾아가 상모도 배우고 다시 상모를 전승하고 보급하는 면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실 문화대혁명 때 많은 예술단체가 해체되고 혁명본보기극을 공연하고 하였지만 기층에 내려간 분들이 예술적 량심이 있으니까 가는 곳마다에서 자기 량심으로 민족예술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던 것입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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