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14](한룡길편5)
전통적인 민속놀이에서 농악놀이와 탈놀이는 쌍벽을 이룹니다. 탈놀이를 예인들이 일정한 구성과 이야기거리를 가지고 연행하는 격식화된 표현형식이라고 한다면 농악놀이는 민간에서 연행되는 대중적인 장끼놀이 형식으로서 일정한 격식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행되는 자기적인 대동놀이입니다. 그래서 살길을 찾아 중국에 이주한 이주민들에게는 농악이 먼저 전승됩니다.
농악놀이의 전승과정을 보면 비록 구전으로 전승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제일 초기 농악은 왕청 영벽촌농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단지 연변에만 농악놀이가 전승된 것이 아니라 료녕성 환인 완도촌에도 걸립농악이라는 형식이 전승되여 지금 국가급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습니다. 또한 1938년도에 경상도에서 강제이주로 안도 신촌에 정착한 집단이주민들에 의하여서도 농악놀이가 전승이 되였습니다.
1951년 연변예술축전에서 걸립무표현을 하고 있는 화룡시 농악대.
특히 신촌농악은 당시 약 10여명의 이민들이 농악대를 조직하여 신경(장춘)에 가서 농악놀이를 표현함으로써 아주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로 보아 농악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느 한갈래로 전승이 된 것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여러 지역의 농악들이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곳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례를 들면 목단강, 해림, 길림의 반석, 심양의 완도 그리고 연변의 여러 지역에 전승되고 연행되였습니다.
농악놀이는 전통적으로 기원농악, 연예농악, 두레농악, 걸립농악 등 4개 부류로 류전되였는데 이런 여러 가지 부류의 형식들이 기본상 대체적으로 다 전수되였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화룡 투도에는 걸립농악이 있는데 맹경호라는 분이‘공기조합'이라는 단체를 무었습니다. 즉 공동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로 농기구수리도 하고 집수리도 하고 농사도 짓고 하는 이런 재간있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여기서 겨울이면 할 일이 별로 없으니 마을을 돌아다니며 농악을 놀면서 농기구 수리도 해주고 비용도 받고 하는 걸립농악식으로 연행하였습니다.
1957년 장춘영화촬영소 일군들이 연길현 팔도구에서 농악무를 촬영하고 있는 장면.
그 다음 팔도농악은 민간예인 우상학이라는 분이 팔도에서 농악대를 조직한 것입니다. 지금 보면 표현을 위주로 하는 연예농악형식입니다. 그리고 안도 신촌농악은 샘물제, 산신제도 지내고 지신밟기도 하는 기원농악형식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농악형태들이 기본상 중국에 모두 전승되였습니다.
광복후 동북지역은 일찍 해방되면서 토지개혁을 하게 됩니다. 농민들이 토지를 분배받고 기분이 좋으니 농사를 짓고 징구량을 바칠 때는 농악을 울렸고 이러면서 농악이 점차적으로 축제형식으로 되여갑니다. 이러다가 1950년도 연변가무단이 서면서 안무가 조득현선생이 맹경호라든가 우상학이라든가 하태익선생을 초빙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다 자기 장끼를 표현하였는데 거기에서 조득현선생이 하태익선생을 보아내고 그와 합작하여 농악무라는 것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조득현선생은 하태익선생에게서 많은 요소를 보아내고 농악을 연구하여 두레농악의 집단정신, 연예농악의 장끼 이런 요소들을 집성하여 상모를 돌리는 장끼를 중심으로 장고춤, 북춤, 소고춤 등의 춤형태를 넣어 조무형식으로 묶었습니다. 조무형식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원래는 농악에 구정놀이라는 다양한 인물들의 놀이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정놀이는 기실은 부동한 인물들의 장끼표현입니다. 농악대에는 기수와 상쇠잡이가 앞에 서고 그 뒤에 따르는 인물들은 각 지방마다 서로 다릅니다. 포수, 스님, 로인, 부녀 등 가지 각색의 인물들로 분장한 사람들이 자기 장끼를 표현합니다.
1951년 연변가무단 농악무공연에서 손에 꽹과리를 들고 앉은 자세로 장끼표현을 하고 있는 하태익선생(河兑益,장고꾼과 마주한 배우).
조득현선생은 이 형식을 조무의 형식으로 소고춤, 장고춤, 상모놀이 등 여러 가지 표현들을 묶어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농악놀이에는 녀성들이 못 참가합니다. 만약 녀성들이 농악놀이대에 참여한다면 꼭 남자복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조득현선생은 그 전통적인 불필요한 관념을 타파하고 녀성무용수들을 무대에 올립니다. 조득현선생에 의하여 새롭게 창작된‘농악무'는 전통을 재창조하는 새로운 예술창조방식이였습니다.
후기에 새롭게 수집정리하고 무대에 올린 농악무중의 무용들이 모두 도구를 리용한 도구무용들입니다. 이 도구들이 다 생존과 관련됩니다. 례를 들어 물동이, 쪽지게, 방치라든가 다 생존도구들입니다. 지금 와서 분석해 보면 우리 중국조선족들의 생명의식, 생존방식 즉 생명사상이 여기에 슴배여 있지 않았겠는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조득현선생의 뒤를 이어 많은 농악무대무용이 창작되였는데 창작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생깁니다. 례를 들어 전통농악에서는 삼색띠를 띱니다. 하지만 조득현선생은 농악무창작과정에서 농경문화의식을 토대로 소의 멍에를 본따서 보기 좋고 간편하게 복샘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상모의 짓도 (20세기) 70년대 말까지 원래는 창호지였는데 그걸 몇번 돌리면 끊어집니다. 그래서 거기에 풀을 바르고 재봉기로 박아서 든든하게 하지만 어째든 몇번 돌리면 끊어지니까 (20세기) 80년대 초로부터 금속 은지를 대용했습니다. 그걸 대용하면서 잇달아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등 3색으로 전통적인 3색문화요소들을 나타내게 되였습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상모춤의 국가급 전승인 김명춘(金明春).
상모는 장상모, 중상모, 소상모, 부포라고 하는 털상모 이렇게 네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상모에 짓을 련결하는 꼭도리는 징좌라고 하며 옛날부터 상모징좌는 워낙 한층인데 연변가무단의 한세호선생은 상모표현의 수요로부터 징좌를 두층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웃층에는 소상모를 달고 아래층에는 장상모를 달았습니다. 장상모는 보통 12발 상모라고 종이짓이 한 10여메터씩 됩니다. 그런데 소상모는 약 한메터 정도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와서 소상모를 돌리고 장상모는 깃을 거두어 허리에 찹니다. 소상모를 돌리다가 마지막에 허리의 장상모짓을 빼서 돌립니다. 그러면 소상모와 장상모가 같이 돌아가면서 화려한 큰 무늬를 이룹니다. 이것은 중국조선족농악무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지금까지도 조선반도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기초하여 후기에는 소상모짓에다가 중상모짓을 련결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조하여 더욱 편리하고 간편하게 개변하고 더욱 기능화하면서 농악무가 예술적으로 현저히 발전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편면적인 무대화에로 발전하다보니 농악놀이속에 잠재된 전통적인 문화요소들이 점점 소실되여 가고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이리하여 1978년도에 김정훈선생이 집성사업을 시작하면서 (자치주 창립) 30주년(1982년)에 신촌농악을 재발굴하여 연길인민체육장에서 크게 놀이판을 벌렸습니다.
농경문화를 재현하는 농악무의 한장면.
이를 기초로 하여 1988년도에 군중예술관의 강상범선생이 광장농악무라는 새로운 쟝르를 만들어냅니다. 농악놀이는 마당에서 자유스럽게 노는 것이고 무대농악은 무대에서 아주 짜인 구조대로 놀아가는 것입니다. 강상범선생의 광장무는 큰 마당에서 마당놀이와 무대예술농악을 결합하여 농경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표현형식을 만들어냅니다. 즉 농경문화를 기초로 하여 광장무를 만들었는데 1988년도 전국 제1차광장무용콩쿠르에서 1등상을 탔습니다.
광장무용이 형성된 것을 전통마당놀이의 승화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2006년도에 국가급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2008년도에 세계급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할 때 여기서 전환이 생깁니다. 이 임무를 맡은 분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사업했던 서봉학선생인데 이 분이 총감독을 맡고 연변가무단의 안무가 송미라선생을 초빙하여 무용감독을 맡기고 왕청에 가 벼밭을 사서 벼를 깔고 거기서 농악을 놀았습니다.
서봉학선생은 농악무에 동방인의 전통적인‘음양오행설'과‘천, 지, 인’철학사상을 부여하는데 모를 박고 전통농악놀이의 생태적인 문화특징들을 새롭게 재생시키면서 3일 사이에 풍년을 기원하는 놀이형식을 소재로 약 10분 되는 영상프로를 제작하여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신청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 전국적으로 경쟁이 아주 심했습니다. 전국에서 근 400여개 작품을 신청하였는데 평의심시위원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격찬 속에 우리들의 영상프로가 중국의 유일한 무용종목으로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였습니다.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 농악무의 촬영현장을 지휘하는 총감독 서봉학(오른쪽 첫 사람).
이를 계기로 중국조선족농악창작이 기형적인 발전에서 해탈하여 농악놀이의 문화적 요소 발굴에 중시를 일으키게 되였습니다.
1980년대 초에 전국문화사업자회의를 연변에서 하게 되면서 그 때 왕청현 배초구에서 처음으로 농민들을 조직하여 200명이 배초구중학교 마당에서 아주 굉장하게 상모표현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온 문화사업자들이 모두 감탄하였고 그 때 왕청배초구가 ‘중국조선족농악무의 고향'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농악무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습니다. 세계무형문화유산의 전승인으로 된 김명춘선생의 노력하에 2012년도에 왕청현에서 사회 종업원과 주민들이 동원되여 1000명이 상모놀이를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세계기네스기록에도 올랐고 지금까지도 1000명 상모를 초과하는 놀이가 있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이는 우리 중국조선족농악무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2년 왕청현 1000인 농악무표현 세계기네스기록에 올라.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는 2012년부터 2년을 주기로 ‘중국조선족농악무콩쿠르'를 진행합니다. 지금까지 3기가 진행되였는데 매번 콩쿠르마다 현저한 발전과 변화가 생깁니다. 제1차에는 연예농악풍격이 위주였습니다. 예술적으로 포장하고 표현하고 춤을 추고 하는 것들로 되였고 제2차부터는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풍부해졌습니다. 낟가리도 나오고 감주놀이도 나오고 하면서 생활적인 생태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가첨되였습니다.
2018년의 콩쿠르는 룡정체육장에서 하게 되였는데 연길시문화관에서 120명이 동원된 걸립농악을 아주 굉장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때 길림, 목단강 등 산재지역에서도 한 2000명 모여왔습니다. 1차, 2차, 3차를 돌이켜 보면 점점 농악의 민속적인 문화요소들이 더욱 풍부해지면서 현저하게 발전하여 지금으 중국조선족농악무의 발전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2017년에 연길시조선족문화관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5돐에 대형광장농악무를 헌례하기 위하여 농악무창작소조를 결성하고 여러 차례 토론회를 하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농악놀이는 우리 중국조선족민속놀이문화의 원조인데 이걸 그릇이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이 그릇에다 중국조선족의 생존문화를 담아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 방안이 채택되면서 1300명이 출연하여 중국조선족의 생활모습과 지향을 표현한 대형광장농악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과 완성 과정에 송미라선생이 총감독을 맡았습니다. 연길 모드모아 리성일 회장님이 이 소식을 알고 50만원을 투자하여 모드모아민속촌에 약 2500평방메터 되는 농악무전용광장을 구축하였습니다. 광장중심에다 10평방메터 되는 전통정자를 만들고 주위에 5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관중석을 만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구전한 민속놀이 전용광장일겁니다.
2017년 연길 모드모아민속광장에서 펼친 대형광장농악무.
작품을 보면 제일 처음 새납소리로부터 시작됩니다. 날이 밝아 오는데 흰 두루마기를 입은 로인이 젊은 판소리가수를 이끌고 나와 소리를 합니다.“날이 밝는다 해가 솟는다”하며 기원농악의 제례형식을 전통적인 판소리 형식으로 대체합니다. 잇달아 붉은 부채를 든 40여명의 무용수들이 등장하여 선창에 어울리는 무속적인 무용장면을 펼칩니다. 그리고 남성들에 의하여 방대한 대북과 모듬북 표현이 펼쳐집니다.
잇달아 강동마을, 강서마을, 강남마을, 강북마을로 설정한 네곳 입구에서 농악대가 등장합니다. 남성들은 가대기를 끌고 녀성들은 함지를 이고 출연하는 두레농악, 씨를 뿌리고 기음을 매고 뒤이어 지게춤, 도리깨춤이 펼쳐지면서 풍작을 안아오는 로작농악, 마지막에는 남녀로소 전체가 등장하여 북을 두드리고 상모를 돌리는 방대한 장면이 펼쳐지는데 네개의 입구로부터 삼색테프가 정자로 쫙 날아듭니다. 이는 복을 기원하는 무속적인 전통액막이 이미지를 나타내지요. 그 화면은 아주 화려하고 격정적이였습니다.
이는 중국조선족농악무발전의 새로운 리정비이자 또한 우리 중국조선족의 민속생태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걸작이라 생각됩니다. 놀이마당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전용놀이마당이지만 더우기는 1300명이 출연하였다는 점에서 그 류례를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그 속에 중국조선족의 생존의식과 미래지향이 돋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예술적인 시각으로 보면 예술대걸작이고 문화적인 시각으로 보면 우리 삶이 슴배여 있는 민속문화대작으로서 중국조선족민속문화의 대표적인 명함장이자 또한 중국조선족농악무발전의 빛나는 리정표라고 생각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