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80년대, 젊음을 불태웠던 청춘들 가운데서 문학소년소녀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10년 동란이 끝나고 사람마다 정신적허기에 시달리고있던 당시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있어 우리 글로 된 잡지들은 누구나 다퉈가며 읽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보풀이 일 정도로 읽혀졌으며 한번쯤 잡지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군 했다. 심지어 문학에 뜻을 둔 남자가 녀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상대로 꼽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중에는 단연 《연변문학》의 역할을 빼놓을수 없다.
1951년에 창간한 《연변문학》은 연변 내지는 중국문학잡지 가운데서도 가장 최장수 문학지로, 가장 대표성적인 우리 말 순수 문학지로 꼽힌다.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며 《연변문학》은 창간이래 중국조선족문단의 수많은 별들을 발굴했으며 우리 민족문학의 발전력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견증인과도 같은 존재이다.
창간호《연변문예》에 이어 1957년에는《아리랑》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59년에는 《연변문학》으로, 1961년에는《연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7년 6개월 동안을 휴간하였으나 1974년에 다시 복간되여 《연변문예》로 새롭게 이름을 바꿨으며 1985년에는《천지》로, 1998년에 다시 《연변문학》으로 거듭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있다. 현재까지 연변문학은 도합 660호의 잡지들을 펴냈으며 연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문인들은 이루 다 헬수 없다. 특히 1980년부터 설치된 문학상은 우리 문단의 기성작가들을 격려하고 신진들을 발굴하고 이끌어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에 와서 한때의 “문학성세”는 이미 때지난 옛말에 불과하다. 아날로그식 독서보다는 화려한 시청각매체들의 자극에 눈길이 끌리며 그래서 책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있다. 문학창작 역시 매한가지이다. 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작가군체와 독자들을 마주하고 잡지의 운영은 날로 어려워지기만 한다. 발행부수의 감소가 그중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다.
하여 채운산주필은 설계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개혁을 시도했다. 지난해《연변문학》은 원유의 32절판지로부터 16절판지로 바꾸었다. 이러한 시도와 더불어 잡지 운영에 있서 짊어져야 할 부분이 더 커졌다. 잡지의 인쇄성본이 높아진것은 물론 내용도 더욱 풍부히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편집진 3명으로 감당하기엔 벅찬 구석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기대 그 이상이였다.
채운산주필은 또 잡지의 생명은 원고라고 말했다. 가장 신선한 소재들로 알심들여 꾸린 잡지라야만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다는것이다. 따라서 《연변문학》은 로작가, 중견작가, 청년작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을 고루 섭렵하면서 이왕의 전통문학잡지의 형상에서 새롭게 탈바꿈하여 좀더 생활에 근접하고 독자들의 취향을 고려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특히 청년작가들의 활발한 창작을 이끌어주기 위해 지난해부터는 《연변문학》상 신인상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북경민족대학 조문학부와 같은 우리 민족 문학도들을 키워내는 학부들과 손을 잡고 다양한 교류활동을 벌임으로써 신진작가대오의 양성에 힘썼다.
우리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되는 잡지는 무려 만종이 넘지만 그중 창간력사가 60년을 넘기는 잡지는 몇 안된다. 그중에서 《연변문학》은 당당히 자신만의 문화브랜드를 구축하면서 해내외에서 독자들이 중국조선족의 현황과 문학수준을 료해할수 있는 창구 역할을 충실하게 해왔다.
채운산주필은 지나온 성취와 력사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계속 걸어나가야 할 미래가 더욱 아름다와야 한다며 편집진 모두 열성을 바쳐 더 새롭고 의미깊은 우리 말 순수문학지로 거듭나겠다며 뜻을 밝혔다.
연변일보 박진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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