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 시 앓기
김기택
1
꼬집어 어디가 아프다고 할만한 곳도 없는데, 누워있는 것이 힘들고 답답하다. 자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여러 번 자세를 고쳐 눕는다. 예민한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거린다. 가까스로 쌓아온 잠이 작은 뒤척거림으로 금방 무너진다.
오줌이 마려운 걸 참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쌀 것 같다. 오줌은 뜨거운데 변기에 떨어지는 양은 많지 않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낯은 익은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 얼굴들, 끊임없이 숫자를 대입해도 정답이 굳게 닫혀져 있는 수학공식들이 계속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감기에 걸린 것인가 생각해 본다. 저혈압이라는데, 혹시 피가 모자라 어지러운 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병! 내가 아는 이름이 나오자 우선 마음이 편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의 이상한 쾌감, 조금은 불안한 안락함,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급우들이 떠들고 있는 듯한 다소 혼란스러운 고요함, 이런 추억들이 내 열과 불안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나는 내 몸에 들어온 병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놈이 내 몸에 들어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숨죽이고 지켜본다. 잔 물비늘 같은 떨림이 온몸을 흔들며 지나간다. 내 몸에 돋은 닭살들이 갈대처럼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 즈음에서 나는 약한 잠에 빠져든다.
2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졸시 「바늘구멍 속의 폭풍」 중에서
3
매일 불행하고 슬픈 일들이 일어난다. 그 슬픔과 불행이 왜 일어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자기가 생긴 대로 열심히 살다가 생긴 일일뿐이다.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탈이 나서 배가 아프다고 대장균을 탓하겠는가? 그 미생물들이 할 일은 저들이 타고난 생김새와 성질 그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생김새와 성질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의 잘못이 없는데도 언제나 적과 죄인은 있고, 계속 생겨나고 있다. 적과 죄인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분노와 적개심을 받아줄 대상이 필요한 자들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무언가 잘못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이 그렇게 생긴 것이 바로 그들의 잘못이어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한 체계를 갖추어 시비를 가려내기 위한 법이 생겨난다. 불행과 슬픔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비례하여 불행과 슬픔도 늘어나고 있다. 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지고 충실해졌지만, 불행과 슬픔이 늘어난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불완전하고 빈약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적인가? 나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 사람인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게 폭력이 되고 있다. 나는 적이 필요한 사람과 내 행동이 단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매일 누구에겐가 적이 되고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퇴근이 한참이나 지난 내 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그날의 일용할 폭력을 견뎌내느라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다. 그 폭력을 견뎌내기 위하여 내 몸은 상처와 병을 필요로 한다. 상처는 폭력이 몸에 들어와 몸이 된 것을 말한다. 폭력이 몸이 되는 동안 몸은 뜨거워진다. 폭력이 몸이 되려고 뜨거워지는 것, 떨리는 것, 그것이 병이다. 병은 폭력을 껴안는다. 몸 안에서 폭력과 병은 서로 하나가 된다. 서로 싸우다가 다정해진다. 어느 순간, 폭력과 병은 폭력도 아니고 병도 아닌, 내 몸이 된다.
4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무거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졸시 「소가죽 구두」
5
몸살! 몸은 뜨거운데, 나는 춥다. 지금은 내 병이 내 몸 속의 폭력을 치료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경우, 앓는 동안 나는 내가 앓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병은 내밀하게 진행된다. 나는 둔하지만, 몸은 예민하다. 나는 단지 말이 없어지거나, 갑자기 화를 내거나, 술이 먹고 싶어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거나, 갑자기 어떤 대상이 떠올라 적개심이 일어나거나, 몹시 피곤해지거나 하기는 하지만, 병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기약을 사 먹어야 할 만큼 병이 두드러지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나에게 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든가 갑자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은 폭력의 긴 육체화 과정이 잠시 멈추고 병이 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 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인력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졸시 「우주인」중에서
7
매일, 매순간, 앓는다. 병은 내 눈이고 코이고 입이다.
서정이 살아있는 시 쓰기
"시는 영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스런 것"이라든지 "천형의 고난을 감내할 용기로 써야 한다"는 시인의 경험담을 가끔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쓴 시의 진정성에는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시인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사람살이에 시가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도록 써보자는 것이고 시를 쓰거나 읽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시 쓰기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 말은 시에서 고통이나 눈물을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시의 궁극적 목표인 삶의 카타르시스, 담담하되 감동이 배어나오는 시의 열쇠를 찾자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으로 돌아가자'라는 시 운동과도 연관된다.
그렇다, 오늘이 그날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슬퍼하고
눈물짓는 그날이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축복 받는 그날이다
오늘이 어저께의 어깨를 뛰어넘고
내일의 문앞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꿈만 꾸었었다
오늘이 그날임을 알지 못했다
나를 거둬가는 그날인 줄은
내 낟알을 털어 골라두는 그날인 줄을
나를 넣고 물을 부어 밥솥에 끓이는 그날인 줄을
나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씹는
그날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소리내어 울고
어떤 이는 술을 마시며 욕질하고
어떤 이는 무릎꿇고 연도하는 그날인 줄을
언제 우리가 오늘 이외의 다른 날을 살았더냐
어째서 없는 내일을 보려고 하였더냐
어제는 오늘의 껍질이요 내일은 오늘의 오늘이다
모든 것이 오늘 함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오늘이 그날이다
-김종철, 전문
1998년 지리산 시인학교에서 였다. 문학수첩을 운영하던 김종철 시인이 필자의 [지리산시인학교]의 특강 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는데 미소를 머금은 초롱하던 큰 눈망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라는 시집으로 '못의 시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때였는데 그는 "시에서 감동이 없는 시는 죽은 시다"고 말했다. 서정적인 시 쓰기에 열변을 토했던 그는 한국시인협회장 시절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하셨지만 필자는 서글서글하고 선이 굵은 그의 시들을 지금도 즐겨 읽고 있다.
위의 시도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서정시다. 설명이 필요없는 내용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타성, 익숙한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작업이다. 시인은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것에 지각과 감수성을 동원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했거나 삶의 진정성만으로 시를 쓰겠다는 태도는 곧 시의 소재가 바닥나거나 시 쓰기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경험의 진실성을 따지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체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 상상적 체험이 있다. 그러나 시가 직,간접의 체험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직,간접의 체험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상상적 체험을 묘사하고 진술하는 장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선험적(先驗的)으로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자기가 직접 체험했던 것만 시를 쓰면 시의 한계에 스스로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화자의 정서를 솔직 담백하되 신선하고 내밀하게 표현해야 한다. 또한 시에는 화자(話者)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나 사물이 등장한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철저한 의미망(意味網)으로 화자와 연결해야 한다. 즉 타자나 사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화자와의 관계를 돌려서 말하는 방법을 연마해야 더욱 깊은 맛이 나는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
- 이어산
쉬운 시 쓰기와 시적 대상 찾기
시를 쓰다보면 절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도무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거나 싱크홀 같은데 빠진 것 같이 허우적 거리다가 시 쓰기를 그만 둘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시인치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는 "약간의 노력으로 좋은 시의 열매를 맛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2천5백 년 전에 이미 설파 했는데 그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지점을 읽어내는 일이 곧 시 쓰기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질곡을 새롭게 진단하여 세상에 보고하는 일이 시 쓰기인데 신이 아닌 이상 노력 없이 되겠는가?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시 쓰기의 성공이란 사실 없다. 다만 좋은 시 쓰기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대 사상가 루쉰(魯迅)의 말처럼, “길이 없던 곳도 자꾸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이고, “파도를 겁내지 않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고기를 잡는다”는 말과도 같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변화하는 세상을 읽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면 성공하기 힘들게 되고, 세상의 속도만큼 나도 같이 뛰면 현상유지는 되는 것이며,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관심이 없고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면서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시를 쓴다면 시가 진부한 넋두리인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주목받는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어보란 이야기다. 주의할 것은 초보 시인일 때는 남의 시를 모방하여 쓰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계속 기성 시인의 흉내나 내는데 머물면 시인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좀 서툴고 거칠어도 반드시 자기만의 색이 드러나도록 써야 새로운 시인의 탄생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새로운 시인과 시인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생겨났나보다.
그리고 시 쓰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를 쓰지 말자는 입장이다. 좋은 시와 어려운 시는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된 말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하는데 이것이 잘 결합된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뜻이 깊고 읽을수록 맛이 나는 좋은 시다. 그렇지만 몇 번을 읽어도 뜻이 잡히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된다. 세 번 정도 정독을 해도 시인도 이해하지 못할 시라면 일반 독자들은 머리가 아파서 시를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꼽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즐기든말든 나는 서정이 살아있는 시의 깃발 아래로 나가려고 한다. 나의 이 강의가 어려운 시론을 짜집기하여 유식한척 폼이나 잡는 것으로 읽힌다면 이 글 읽기를 중단하라. 유식한 시론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느껴져야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될 수만 있다면 회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깊이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강좌가 학위를 따기위해 마련된 것도 아니요 다만 시를 쓰는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임을 유념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은 시적 대상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서 세 편의 시를 보자.
물론 시적 대상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선택한 소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시인들이 이미 발표한 흔한 소재로 시를 쓴다면 여간해서는 주목받기 힘들다. 어차피 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의 문학인데 여기저기에서 봤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처음 시를 쓸 때,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 소재는 수대에 걸쳐서 동서양의 시인들이 너무나 많이 다뤘고 훌륭한 시도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여간 잘 쓴 것이 아니라면 자연에 관한 소재로 시를 써서 좋은 시로 주목 받기 어렵다. 자연을 매개로 시를 쓸 작정이라면 누구나 느꼈을법한 내용은 멀리하고 새롭게 형상화 된 내용, 즉 자기만의 특질화 된 시각의 시를 쓰기 바란다.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폐차장엔
벌써 10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폐차장 무쇠더미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대고 살면서도
쇠와 섞이지 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 최문자, 1연
위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인데 시인은 생명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파괴된 풍광을 비판, 고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진술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시인'으로 불리는 최문자 시인(계간 시와편견 편집고문)의 시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중략)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중략)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가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 배한봉, 중에서
그 뻔한 풍광도 시집이 되고, 그 시집은 새도 읽고 나비도 읽고 거름을 져다 나르는 시인도 읽는데 결국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을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로까지 진행되어서 서술+묘사+진술+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제각각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졌다. 눈여겨보라. 배한봉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것들은 역할이 명징하기로 유명하다. 시 쓰기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다.
대흥사 입구의 마늘밭
마늘잎들이 누렇게 때깔을 쓰고 있다
마늘이야 마른 생각들 버석거려도 머리통 가득
매운맛을 가두겠지만
수확이 가까울수록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어
머리 뿌리 온통 깨달음으로 채워넣으려는
저 독한 마음을 읽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증을 견뎌야 하는
메마른 5월이다. 누가 내 몸을 캐서
불알 두 쪽 갈라본들
거기 통속의 향기 드러나겠는가
- 김명인, 부분
위 시는 '마늘'이라는 대상을 선택하여 마늘의 수확이 가까워질수록 거추장스러운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고 마늘의 특성인 매운맛을 가득 머금고 여물어져 가고 있는 것과 통속의 향기(通俗의 香氣)인 마늘의 특질을 시인에게로 치환(置換)시켜서 오롯이 제 맛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담백 하지만 사물의 특질과 연결된 자신만의 사람살이의 해석이 시를 쓰는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인 것이다. 김명인 시인의 시는 서정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어 볼 일이다.
- 이어산
그리고…… 그 병의 부산물로 시가 얻어진다.
시와 이미지
심재휘 (시인, 대진대 문창과 교수)
1.
심상(心象)으로 풀이되는 이미지(Image)는 리듬과 함께 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시를 읽거나 혹은 쓸 때, 이 문학적 용어가 담당하는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안다. 그러나 또 이미지라는 말의 뜻을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 역시 쉽지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직관적이라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미지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가령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고 그것을 ‘충격적인 이미지’라고 말한다거나,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사람의 이미지는 따뜻하다’라는 말처럼, 중첩된 느낌을 표현할 때에도 이 용어를 쓴다. 일상어의 일부가 된 이 말은 따지고 보면 결국 ‘인상(印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이 경험자의 마음에 특정한 감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란 말은 감각경험의 상태에 대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다면 문학용어로서는 어떤가.
헤겔이 ‘절대정신의 감각적 드러냄’으로 예술 미학을 설명할 때, 우리는 ‘정신(Geist)’이라는 헤겔적인 개념의 철학성보다는 ‘감각적 드러냄’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예술적 표현의 어떤 특성을 고려한 말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이성에 호소하는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 가 닿고 또 의도한 감흥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행위일 것이며 그 노력의 정체는 바로 ‘감각적 드러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감각(感覺)이란 눈․귀․코․혀․살갗 등 신체의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느낌을 뜻한다. 결국, ‘감각적 드러냄’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을 받는 것과 유사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또는 그 의도를 포괄하는 말이 된다. 마치 보고 듣는 것처럼 혹은 냄새가 나는 듯, 촉감이 느껴지는 듯 생생하게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 창조적 예술의 공통된 과제가 되는 셈이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2.
시의 경우 ‘감각적 드러냄’은 이미지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미지는 그만큼 감각적 인식의 산물이며 시의 장르적 속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다. 문학이론서의 고전인 에는 이미지가 ‘감각의 잔류를 표상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lewis), ‘감각체험의 재현으로서 감각의 어떤 것에 호소하는 것’(C.Brooks & R.P.Warren) 등, 여타의 언급들도 이미지의 핵심적인 성질로서 감각적 자질을 거론한다. 이는 다분히 시의 비유적인 속성을 전제로 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군중 속에 있는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역에서」, 전문
위의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그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라는 시이다. 그는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현대사회의 황폐와 삭막을 표현하였다. ‘축축한’, ‘검은’ 등의 감각적인 느낌이 ‘가지’와 만나면서 선명한 배경을 만들고 거기에 ‘꽃잎들’이 연결되면서 지하철 역의 군중들의 모습이 특정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된다. 수사법 상으로 보자면 위의 시에서 이미지는 비유에 의해 발생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병치시킨 은유가 그것이다. 비유어가 곧 이미지가 된 셈인데 그렇다면 비유어와 이미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가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지와 비유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비유어는 수사법 상의 언어 기능을 지칭하는 것인데 반해, 이미지는 그 비유어가 환기하는 느낌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비유어는 언어적인 것이고 이미지는 감각적인 것이므로 개념의 차이가 있다. 비유어와 이미지가 간혹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실상 비유어보다 이미지의 개념은 더 광범위하다.
문학용어 사전에 의하면 이미지는 몇가지 층위로 나누어 정의된다. 좁은 뜻으로 이미지는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描寫)’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은유나 직유처럼 일종의 매개어(媒介語)에 의한 비유언어(Figurative Language)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미지의 의미가 포괄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단히 애매한 용어가 되기도 한다. 시의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心象(mental picture)의 뜻에서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를 담당하는 용어에 이르도록 그것이 관장하는 의미의 영역은 상당히 넓다.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이나 특질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호함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지를 문학적인 자질로서만 인정한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에서는 이미지의 의미를 단순히 감각 경험의 표출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감각상의 혹은 지각상의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것, 즉 기억(memory)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개념을 설정한다. 이 언급은 시를 읽는 과정 혹은 창작하는 현장을 상정할 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미지를 기억의 일종이라고 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감각경험이 단순히 생리적인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감각경험은 경험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런데 감각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추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경험자의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인상적이었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印象的’이라는 말은 단순히 외부 자극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험자가 경험에서 얻은 인상적인 느낌에 특징적인 코드를 부여한다는 뜻과도 같다. 기억에는 그래서 수많은 코드가 저장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 기억이 시적 상상력을 표현하게 될 때 코드화된 이미지로 재생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녁 무렵, 일과를 마치고 접어드는 동네 어귀의 익숙하지만 특징적인 풍경, 혹은 독특한 냄새는 사람에게 어떤 인상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가령 그것이 편안함이라는 느낌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고 하자. 시를 읽을 때 동일한 표현이나 상황을 접한다면 독자에게 그 이미지는 편안함을 상기시켜주는 코드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시를 창작할 때 편안함, 혹은 귀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하자면 인상적인 느낌의 코드로 입력된 특정한 이미지가 그 추상성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귀가의 편안함은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담장을 타고 흘러나오는 된장국 냄새로 형상화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미지가 기억의 일종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 이성복 「봄 밤」, 부분
이 시는 봄밤에 느끼는 어떤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봄밤에 대해 생각하는 관습적인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봄날 밤의 정취는 시인에게 그리 부드럽거나 포근한 무엇이 아니라 황당하고 황망하며 절망적이고 치욕스럽게 인식된다. 그것은 시인이 어떠한 연유에 의해 얻게된 절실한 고민의 발로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봄밤의 감회는 비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고 그 느낌은 다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 , , 넘어진 , , , 등으로 구체화된다. 동원된 소재들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특정한 느낌, 나아가 주제적인 정황을 형성해나간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환기하는 어떤 분위기는 그 소재들에 대한 시인의 기억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서 에 이르는 시인의 감각경험이 하나의 이미지 코드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에 대한 이미지가, 달빛이 내리는 봄밤의 과 에 대한 이미지가 하나의 느낌을 이루며 이렇게 개성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미지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확인된다. 이미지의 기능은 단연 관념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시의 주제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현상해내는 일을 이미지가 담당한다. 시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혹은 의미를 환기하고 있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독자에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이미지가 제대로 기능할 때, 그 시는 높은 감응력을 발휘한다. 김준오는 이미지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의 이미지는 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지의 정의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되는 중요한 장치다. 시인은 전달하고 싶은 관념이나 실제 경험 또는 상상적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그리고 호소력 있는 형태로 형상화시킬 수단을 찾는다. 이 수단이 이미지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독자든 시인이든 시를 잘 읽거나 잘 쓰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을 얼마나 풍부하게 저장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한다. 이는 평소에 주변의 사물과 상황에 대해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사물과 상황이 특정한 느낌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면 시를 읽거나 창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되겠다. 절실한 고민과 구체적인 느낌은 이미지라는 훌륭한 도구를 통해 효과적으로 다가오거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부한 감성의 시들을 구별하게 해주고 학습된 느낌과 상투적인 이미지가 마치 내 것인 양 남발하는 시 쓰기의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다.
3.
이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현대시로 올수록 ‘감각적 드러냄’, 즉 ‘이미지’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백운 소설」에서 ’무릇 시에서는 뜻이 주가 된다. 뜻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렵고 표현하는 일은 다음이다‘(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라고 말한 것에 비하면 현대시에서 ’감각적 드러냄‘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뜻을 세우는 일’을 능가한다고 하겠다. 물론, 현대시에서도 감각적인 특질과 사유적인 특질은 시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는 과거의 시작법처럼 보이기도 하는, ( 유치환, 「바위」)와 같이 감각을 대동하지 않는 도저한 관념의 표출이 있는 반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북치는 소년」, 전문
과 같이 오직 감각적인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에서 감각과 사유는 가장 효과적인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현대시가 사유의 무거움보다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의 추구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에서 리듬감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현상에서도 그 사실은 입증된다. 현대시는 집단이 공유하는 노래로서가 아니라 내밀하고 사사로운 느낌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그 장르적 속성이 변해가고 있다. 이제 시의 언어는 감각적 느낌을 제공하는 단서로서 그것에서 파생되는 시적 환기력에 의해 그 성패가 가늠된다.
현대시가 리듬감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에 의한 구성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단 무의식의 발로로서 시가 지녔던 주술성, 혹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 현대시의 언어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다. 근대적인 시의 개념은 리듬과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되는데 동시대로 오면 올수록 리듬감은 현저히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갈수록 다양하고 개별화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드러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향유하기에는 집단적 성격의 음악적 자질보다는 미세하게 분화된 감각적 이미지가 더욱 적합해진 것이다. 개성적인 비유, 혹은 새로운 이미지로의 경도는 어쩌면 현대적 삶의 양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 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 최하림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전문
일상적인 풍경으로 드러나는 이 시는 사실 대단히 무거운, 관념적인 주제를 안고 있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대비를 통해 생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런 주제는 대체로 고통스러운 포즈의 진술에 의해 표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는 표현 외에는 어디에도 무거운 진술은 없다. 특별히 두드러지는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무와 새와 바람의 모습을 동원하여 일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 혹은 화자로부터 멀어져 가는 생의 의미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벼운 일상의 풍경 속에 생의 가장 비극적인 무거움이 깃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주제적 사유도 사유지만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 감각적 이미지로 환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에서 주제의 무거움이 가벼운 이미지의 놀라운 운용에 의해 어떻게 환기되는지를 즐긴다. 이와 같이, 형상화가 주제에 대한 고려보다 더 우세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현상은 요즘의 시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시에는 당연히 주제적인 전략과 형상화 전략이 공존한다. 이규보의 시대에 비해 본다면, 주제적 전략과 형상화 전략은 훨씬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직까지 기존의 대다수 시들은 세상을 통찰하는 생각의 힘을 궁극적으로 우위에 둔다. 그러나 새롭게 부각하는 시의 창작경향,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시창작의 유형은 더욱 다른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사물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기존의 시작법보다 제시의 기능이 강한, 즉 형상화의 측면을 즐기는 시작법이 우세해질 것이다. 더구나 시에 있어서 비유와 묘사에 국한되던 기존의 이미지의 개념에는 점차 ‘관념의 조성’이라는 세련된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과거에는 상승․하강, 폐쇄․개방, 어둠․밝음 등과 같은 관념적 이미지들이 주제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면 이제는 특정 관념을 육화해내는 이미지의 공정,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이미지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가 곧 이미지다라는 고전적 정의의 패러다임은 질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변하고 있고 변했다.
4.
80년대 서정의 대표적 얼굴이었던 이성복의 시들은 이미지의 운용에서 80년대적이었다. 이미지 활용의 기존 관습을 극복한 그의 시들은 이미지가 전체성보다 파편성에 지배받도록 한다. 그의 시 쓰기는 비유적 이미지의 작법이 치환의 시대에서 병치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유의 방법으로서 치환이 동일성에 대한 단순한 욕구에 근거한다면 병치는 이질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자유로움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물론 치환방식과 병치방식은 근본적으로 자아의 동일성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맥락을 약화시키고 이질적인 것들의 중첩을 통한 직관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병치는 좀더 현대적이다. 이성복의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이미지군과 군 사이의 고리가 대체로 느슨하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자족적인 성격을 지닌 채 다른 이미지들과 소원하다. 이전의 시들이 시의 구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였던 것에 비해 이성복의 시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겠다. 이 무책임함은 최근 시 쓰기에 이르러 하나의 강력한 목표가 된 듯한데 이점에서 이성복은 선구자였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 나무는
채 꽃이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니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이성복 「1959」, 전문
「1959 년」은 으로 변명되는 절망을 매우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시인은 절망의 현장이 지니는 불모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몇 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아주 작은 열매만을 맺는 복숭아나무’, ‘시들어가는 불임의 살구나무’,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는 소년들의 성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예시한 존재들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생산이 불가능한 것들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들 소재들은 의미의 어떠한 맥락도 없이, 즉 인과관계 없이 전후로 연결되어 있다. 연계성이 없으므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병치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유사한 느낌을 환기한다. 이질적이고 파편적인 소재들이지만 일정한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따로 또같이’의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아프리카로 이민을 떠난 의사’, ‘유학을 가는 친구들’에서 파생된 이미지는 치유 능력의 부재를 적극적으로 환기하는데 그것의 중첩은 더욱 깊은 절망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도 그 절망의 현장에 방치된 존재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우울한 선언은 이미지들의 힘을 바탕으로 높은 가청도를 확보한다. 그런데 시의 앞 부분에서 제시된 불모의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의사’와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연계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들은 자유롭고 무책임하다. 기존의 독법에 의존하면 이미지 사이의 맥락은 상식적이지 않다. 독자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 의 주위에 모여드는 새로우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받는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동일한 느낌의 이미지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다면성과 동일성이 동시에 구현된다. ‘오지 않는 봄’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감옥’의 현실을 이성복 식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으로서 이미지의 활달한 활용은 80년대 시의 실험이자 성과였다.
이러한 이미지 활용은 다음 세대인 기형도의 시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만 이성복의 시적 상상력이 여전히 정치적인 국면에 토대를 두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기형도의 것은 정치적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거나 이미 벗어나 있다. 그런 면에서 기형도 시의 이미지는 90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상처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들은 그의 시 세계를 특징짓는 아이콘이 되었다. 가령 그가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부분)라고 노래했을 때, 이 시에 사용된 어둠과 황량함과 처량함은 더 이상 사회 공동체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열된 이미지들,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는 마른 나무’, ‘천천히 노트를 덮는 나’, ‘검은 구름이 멎어있는 저녁의 정거장’, ‘군데군데 쓰러져 처량한 눈을 껌벅이는 개’ 등은 이성복 시의 방식처럼 인과관계보다 독립성에 의존한다.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태도는 더욱 발전한다. 이미지들은 일정한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독자들의 정서 안에서 자유롭게 진동한다. 하 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일탈의 의미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는, 때로는 발랄하고 때로는 엽기적인 상상력들이 대동하는 이미지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곤혹스럽다. 이러한 현상은 조짐이 아니라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된 듯하다.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전문
시 읽는 즐거움
ㅡ 펌 글
「새로운 시는 전방위(全方位)의 '소외'를 야기해 '드높은 곳의 고향'으로 인도한다. 그 '공작(工作)'의 본질은 수학적 의미에서의 분석가가 기지의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시 창작은 테마상으로 우연에 의존하며, 방법상으로는 '과도한 명료성'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일상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동화(童話)의 추상화 작용과 일맥상통하는 대수학적 추상성에 의존한다.
정감이 아니라 중성적인 내면성, 현실이 아닌 상상력, 세계의 통일성이 아닌 세계의 파편,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과 언어 마술에 의한 매혹,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수학에 비견할 만한 냉철한 공작, 이러한 것들이 보들레르의 시론, 랭보, 말라르메와 현대인들의 시의 토대를 이루는 바로 그 구조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에서.
1. 시는 왜 불편을 말하는가
최근 시의 수사학은 다양한 변이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몽타주의 구성-인과율에 따른 진행(A-B-C-D)에서 최근 시에는 각각의 장면을 잇는 인과적인 사슬이 없는 경우도 있다. 치환 가능한 상태로 주체의 의도나 심리를 기술하기도 한다(a-a-a-a). 또한 확장된 현실법(現實法)-과거시제로 적힐 부분에 현재시제를 적용함으로써 생생한 묘출(描出)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쓰이기도 한다. 또한 의사(擬似) '인유'와 '명명법'-통상적으로 인유(引喩)와 명명(命名)이 대상과의 일치를 의도하면 인용과 정체성 호명(呼名)으로 전화하고, 대상과의 불일치를 의도하면 패러디와 정체성의 분열로 진화한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무대 또한 그 의도가 언중(言衆)의 통념을 배반하기에 시의 표면만 따라 읽으면 작위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또한 육체 언어로서의 '위악어법'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기인, 김이듬, 김민정 등의 시에서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최치언이나 김행숙 등에게서는 블랙유머도 읽을 수 있다. 이장욱의 경우는 '좀비 산책'에서 반 잠언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재연의 '오 분간'도 그렇다. 김경주의 경우, 비문을 통해 어감을 바꾸고, 의미를 더하고, 시에 육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신영배나 장승리의 일부 시는 시선의 변화, 감정의 사물화를 통한 비례의 왜곡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급락법(急落法)-숭고에서 경박으로, 고양에서 해학으로 급반전되는 어조의 변화, 연쇄법(連鎖法)-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전환들, 또한 육하원칙의 의도적인 배제를 통해 진공의 시공간 속에서 진술하기, 등 이것들은 전대 미학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승계이며, 미학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개성적인 노력들이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항목으로 정리하는 것은 학자의 몫일 것이나, 시의 표현 양상이나 진술의 진행 방향은 자꾸만 변화하고 발전한다. 독자로서는 텍스트를 읽으면 그만이지만, 내적인 의도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동반된 전술적인 방향으로의 진행이 시의 전략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런 시의 양상들이 불편하다.
또한 이 세계나 우주가 완벽한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면, 미학은 설 자리가 없다. 불편함이 없다면, 찬송이나 찬양 밖에는, 늘 즐겁고 행복한 소리밖에는 없을 것이다. 시의 태도는 긍정과 부정에 묶이지 않고, 시인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또는 무질서를 재편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 한다. 그러니 시는 선미든 추미든 궁극적으로는 미에 닿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의 결과로 우리는 재편된 질서를 느끼고 미적 즐거움을 얻는다.
불편과 불행은 좋은 시를 위한 씨앗이 된다.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나 오르가슴이나, 어떤 지적인 쾌락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시라는 두레박은 아무래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독자에게 시원한 찬물을 건네는 방식으로 존재할 때 더 서늘하다.
나는 불편에서 발생한 시의 힘이 더 끈질기고 끈끈하며 더 나은 경계로의 확장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일 것이나, 시의 비수가 우리가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베고, 또 그 속살을 보여줄 때 더 풍부한 독서의 즐거움을 가질지 모른다. 모든 미학을 좇는 자들은 두더지가 땅굴을 파서 숨통을 열어놓듯이, 밑바닥으로 숨길을 여는 존재들은 아닌가 싶다. 쉬운 위로보다, 처절한 위로가 불편하지만 오히려 득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더러 시를 읽는 것도 시가 보여주는 세계도 불편할 때가 있다.
2. 시는 왜 해방을 말하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의 가역반응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공간을 제공하고 역반응으로 그 삶의 목줄을 당긴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을 사는 유한자이므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러나 삶의 톱니바퀴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 자식, 성공, 연애, 생존, 등등 추상적인 구호들을 다 젖힌다 하더라도 존재가 앓는 다양한 결핍과 후유증과 통증과 그 증상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쪽에 문학과 예술은 있다. 삶의 기표나 기율들이 우리를 제한하고자 할 때, 그늘을 찾든지, 도식화된 질서를 벗어나든지. 늘 일상이 여행 같은 것일 테지만, 그 여행은 대부분 단막극이다. 쓸쓸한 생활로의 귀환을 강요한다.
시는 진실을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느 밤의 통성 기도로 얻는 방언과도 다르다. 그저 외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가진 속성 안에서 모순과 결핍과 부작위와 틀과 관습과 관념 등과의 길항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딱 맞는 기성복인지, 꼭 그것을 착의하고 살아야 하는지 질문한다.
그래서 시인은 설교자나 양치기나 깊은 숲에 은거하는 도사가 아니다. 생활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낮은 자이다. 가장 낮게 보고 서럽게 짖어대는 짐승인지도 모른다. 그런 절규가 시인을 인간과 신의 중간자로 둔다. 그것은 허공의 메아리를 담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기며, 신음을 드러내 우리를 정면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며 의지이며 시는 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절대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 똥간을, 퇴비를, 더러운 흙을 갈엎어 숨 쉬는 땅으로 만드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에 가깝다.
시인은 마천루 꼭대기에 올라 설교하는 자가 아니라, 빌딩과 빌딩 사이에 줄을 걸고 맨몸으로 건너는 자와 같이 위험하고, 도전적이며, 또 외로운 자들이다.
예전의 미학은 시인 스스로가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고, 글자를 가지고 울고짜고, 감성 풍부, 울먹울먹 감상주의(感傷主義)가 우리를 위로한 때도 있었다. 그 공과는 과거의 것이지만, 일부는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한다. 상한 감정도 위로가 될 때가 많으니까 그렇다.
점차 우리는 과거 시가 가진 울음과 시인 스스로, 진지를 잃은 언표들의 장난에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언어와 시인의 분리는 당연하지만, 글자로써 우리를 감격이나 감탄이나, 감성의 자극은 한 줄 카피보다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부정과 개척을 통해 깨달았다. 과거를 전복해서 얻은 언어의 견고한 자태가 있다는 새로운 경험이 자꾸만 등장한다. 그래서 언어는 사막의 모래알을 삼키며 건조해지고, 독자는 그 사막의 기후를 마시며 더 풍요롭게 쓸쓸해지고, 깊어지고, 또 언어의 맛, 시가 드러내는 묘미 또다른 오아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언어가, 감정을 억제하고, 감각으로 간 이유와 성과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아주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실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충실한 사람이라면 내부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없다. 다 채워져 있다면, 기체 고체 액체로의 상태 변화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시인은 세상을 완벽한 유토피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보내는 한철',로 본다. 그런 인지와 인식이 타자를 위로의 대상, 해방의 대상, 자유를 말하는 대상으로 놓아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관념은 살인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조 관념이 그 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온갖 잡질을 다 하면서도, 열녀비를 세우고, 여성의 정조만을 강요했다. 그것을 잃으면, 당산나무에 목을 거는 것으로, 그들의 교만하고 야만적인 잔치는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이 가진 천박한, 속성이다. 춘화의 태도가 그렇듯, 아름다운 유교에 라는 것에는 이런 비인간적인 불균형이 많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프로테스크 침대에 눕히고 자기 식으로 몸을 절단한 방식과 그 야만성이 동일하다.
아름다운 종교란, 삶을 진실로 위로하는 것이지, 말씀을 팔아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어대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흔히 회당에서는 수천년 말씀을 아름답게 전하고 모두, 일제히 한 마디 아멘을 강요하면서, 돈주머니를 내민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낮은 사람 소외된 사람을 위한 것일 테지만, 일부는 자본주의 성장 궤도와 같이 양치기와 그 그룹을 살찌우는 것으로, 그 혁혁한 공과는 사실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우리 앞의 종교가, 자본주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 미쳐가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한다.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겠지만, 맹목적인 신앙이 갖는 이상한 결과물은 곳곳에 존재한다. 신은 이런 믿음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종교도 예술도, 그 기만의 속성을 모르면, 맹목적인 노래나 불어야 즐겁겠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위선이다.
언어가, 포장을 위한 포장일 때, 겉으로 위로하는 척하며 야만을 떨 때, 마치 세상은 요들송처럼 그렇다 말할 때, 싸구려 위로로 진실을 가공할 때, 우리는 슬프다. 그 거짓말의 상자 안에는 조화보다도 못한 얄팍한 속임수가 들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질서나 규율이나, 본능이나, 이성이나, 생이나, 시나, 비시나, 질문과 파괴 혹은 생성의 대상이 된다.
사탕발림을 아름답다, 하는 얄팍한 눈으로는 시가 말하는 그 속내를 알아채기 어렵다. 그것은 문자를 놓고 자위를 하는 것처럼 허랑하고 쓸쓸한 짓이다.
그렇다면 요지는 무엇인가.
요지는, 시를 쓴다면, 자신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무엇을 위해 쓰고, 무엇을 위로하고자 하는지, 갇힌 새를 놓아주고, 억압된 마음과 우리에서 풀어주고, 기만적인, 교조나 신념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를.
우리에게 우상이란, 아름다운 척하는 가짜다. 함부로 진실을 말하는 자를 믿을 수 없듯이, 우리는 조심스럽게, 왜 인간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반문하며, 어둠을 소모하며, 몇 글자를 적는다.
사탕과 풍선이 아니라, 그 안에 든 헬륨 가스가 아니라,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 기계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 줄이라도 읽고 유쾌해지기를 원한다.
기표에 속아, 기의의 발랄함을 잃으면 시를 읽을 이유가 없다. 그것보다는 음담패설이나 싸구려 농담이 더 유쾌하다. 그런 것 또한 시가 품고 있는 표현법이겠지만, 아무것도, 시를 쓰는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 시는 가장 가난한 노동이고, 값어치 있는 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를 쓰며 우상이 되려 하는 모순은 시의 편이 아닐 것이므로, 시는 자본이나 성공이나 화려함이나, 멋진 거짓말 등의 바깥을 배회하는 부랑아라고 믿는다.
시를 읽는 것은 내 인식과 감각의 몽리면적을 확장하는 즐거움이다.
「문학은 경제생활의 안정에 전념하는 사회와 대립했고, 과학적인 세계 해명과 공공 사회의 범속성를 비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전통과의 예리한 단절이 생겨났고, 문학은 치유가 아니라 섬세한 말을 추구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선회하는 고통의 언어를 자처했다. 그리고 이제 시가 문학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요컨대 시는 여타 문학과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준엄한 상상력, 무의식으로 확대된 내면성 그리고 공허한 초월성과의 유희가 부여해 주었던 모든 것을 무제한적으로 가차 없이 말하는 자유를 자기 것으로 했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에서.
이장욱의 시에서 선행 이미지는 의미상으로 전혀 뒤이은 이미지로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간다. 끝말 잇기 놀이의 방식을 시에 차용하는데 어휘 대신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끝말 잇기에서 앞 말과 뒷말이 소리 이외의 어떤 연관도 없는 것처럼 이미지들도 기억이나 시선에 의해 매개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와 당신’, ‘당신과 어떤 거리의 침묵’, ‘침묵과 한일병원의 어떤 사내’, ‘사내와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와 하늘’, ‘하늘과 구름’ 등 이미지들의 연쇄는 오히려 무관한 것들의 무의미한 연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시의 가장 큰 형식적 전략이다. 그 전략에 의하면 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고립된 객체들이자 지극히 우연하게 한 공간에 놓여진 일 뿐이다. 그것은 무관하게 연계된 이미지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감각적으로 입증된다. 결국 이 시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들은 전체성이나 동일성을 파괴하기 위해 의도된 아귀 맞지 않는 퍼즐조각들이다.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객관적인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는 일단의 사유는 무관한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완성된다. 이 시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힘은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관계방식에 있다.
이처럼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미가 되기를 원하는 않는 기표들,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로만 남기를 원하는 시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제 현대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무의식에 근거한 듯한 자동기술들은 급진적으로 교란된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전문
주어와 술어, 그리고 목적어가 제 위치에 있다고만 해서 통사구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의 시는 너무나 리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는 바쁘고 어머니는 예쁘다’라는 문장은 통사구조상 정상적인 것 같지만 의미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문장이 된다. 사람들은 문장의 반을 듣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음에 무엇이, 최소한 어떤 맥락의 표현이 등장할 것인지를 안다. 그러한 상식은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참하게 파괴당한다.(이 시는 그의 시집에서 다소 온순한 편에 속한다) 필연성이나 합리성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듯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 구문과 구문의 조합, 문장과 문장의 연결은 예측할 수 없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질서와 규범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검은 바지의 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의 코드는 부재, 분열, 해체이다. 이 시의 슬픔은 이기 때문이다. 는 죽었고 , 들도 목을 잃었다. 생명을 잃기는 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와 , 역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호명하는 것들은 모두 없는 것들이다.
한편, ‘부재하는 것들의 세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분열된 신체에 관한 것이다. 의문과 회한의 어조를 동시에 겨냥한 라는 표현은 적절한 위치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한다. 그것은 듣고 보고 생산하는 신체의 기관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의 주체가 파편으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재와 균열, 분열과 단절, 그 이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쩌면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해체의 노력은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경험으로 수납될 것이다.
정상적인 이해의 파괴를 대동한 이 난해한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해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전혀 연계되지가 않고 열심히 배타적이다. 이성복과 기형도 시의 자족적인 이미지들도 궁극적으로 일정한 정서를 지향하였던 것에 비해 보면 환상과 모호함으로 무장한 일군의 시들은 궁극적인 지향, 즉 동일성이나 전체성 자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곧 의미와 형식의 해체이고 질서와 규범의 파괴이다. 이미지들은 해체와 파괴, 이탈과 모호함을 위해 창조된다.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저항정신과 실험의지는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다. 전통은 늘 닫혀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은 완전하게 열려 있는 텍스트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형상화 전략들이 전략을 위한 전략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의 근간은 정직이다. 정직은 절실함으로 이어지고 오래 절실하다보면 단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언어와 형식을 얻게 될 것인데 전략에 치우치다 보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진짜인 척 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사실 그것은 모든 시의 숙제이다.
심재휘
1963년 강릉.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1997년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시 쓰기의 실패자들
시를 쓰다보면 절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도무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거나 '시'의 싱크홀 같은데 빠져서 허우적 거리다가 그만 자포자기하여 시 쓰기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인치고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480~406)는 "약간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2천5백 년 전부터 오늘도 유효하게 세상의 시인들을 향해 일갈하고 있는바, 시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 쓰기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을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새기게 된다. 실패를 하지 않고 시 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시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지점을 읽어내는 일이 곧 시 쓰기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질곡을 진단하여 희망의 손수건을 세상을 향해 흔드는 일이 시인의 일인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희망이란, 루쉰(魯迅, 중국의 사상가)의 진단처럼, 길이 없던 곳도 자꾸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이고, 파도를 겁내지 않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고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시를 쓰다가 막히거나 실패를 거듭해도 또다시 도전하는 사람이 시의 길을 만드는 사람이기에 시인으로 인정받는 반열에 오를 수 있거나 최소한 시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자라도 되는 것이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의 고집대로 그 자리에 안주하면 성공하기 힘들게 되고, 세상의 속도만큼 나도 같이 뛰면 현상유지는 되는 것이며,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관심이 없거나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는 채로 내 고집에 사로잡혀 시를 쓰면 내 시가 진부한 넋두리인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게 되어서 시가 성공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시류에 편승하여 기성 시인의 흉내나 낸다면 그런 시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있으나 마나 한 시가 된다. 그러나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실패를 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 결국 좋은 시를 쓰게 될 확율이 가장 높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시와 어려운 시는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된 말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하는데 이런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뜻이 깊고 읽을수록 맛이 나는 좋은 시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몇 번을 읽어도 뜻이 잡히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된다. 시를 좋아하는 보통의 독자가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는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꼽는 사람들끼리 보고 놀면 된다. 나의 이 강의도 어줍잖은 지식을 뽐내려 한다거나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은 어려운 시론을 짜집기하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면 읽을 필요도 없다. 될 수 있으면 회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를 사랑하는 보통의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여 노력하지만 사실 쉽게 설명 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도 이런 말을 했다.
"나 역시 아무나 읽지 못하는 어려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지만 대중이 알아 먹도록 써야한다"
오늘은 시적 대상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서 세 편의 시를 보자.
물론 시적 대상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선택한 소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시인들이 이미 발표한 흔한 소재로 시를 쓴다면 여간해서는 주목받기 힘들다. 어차피 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의 문학인데 여기저기에서 들었던 내용을 다시 듣는다는 생각이 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처음 시를 쓸 때,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소재는 수대에 걸쳐서 동서양의 시인들이 너무나 많이 써왔고 훌륭한 시도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여간 잘 쓴 것이 아니라면 자연에 관한 소재로 시를 써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자연을 매개로 시를 쓸 작정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꼈을법한 내용은 멀리하고 새롭게 형상화 된 내용, 즉 자기만의 특질화 된 시각의 시를 쓰기 바란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소재로 했을 땐 조금만 방심해도 진부하거나 재미없는 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자연은 아직도 나만의 시각으로 해석할 공간을 수도 없이 제공하고 있기에 소재가 빈곤하다고 탓 할 일은 더욱 아니다.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폐차장엔
벌써 10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폐차장 무쇠더미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대고 살면서도
쇠와 섞이지 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 최문자, 1연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인데 시인은 생명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파괴된 풍광을 비판, 고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진술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시인'으로 불리는 최문자 시인의 시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중략)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중략)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가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 배한봉, 중에서
그 뻔한 풍광도 시집이 되고, 그 시집은 새도 읽고 나비도 읽고 거름을 져다 나르는 시인도 읽는데 결국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을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로까지 진행되어서 서술+진술+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단단하고 제각각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졌다. 눈여겨 보라. 배한봉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것들은 역할이 명징하기로 유명하다. 시 쓰기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다.
그 여자 이름을 잊었다
용정에서 혜란강 가는 길
선구자 한 소절 부르고 싶어 철없이
일송정 찾아가는 길
조선족이야요 천 원에 다섯 개야요
따가운 땡볕 오가며 젖먹이를 업은 채
삶은 옥수수를 팔던 여자
황토먼지 푸석이는 버스 창가에
다투어 맨발로 뛰어오던 머룻빛 눈매가 서늘했던 여자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윤동주를 안다고 하던
그래서 은빛 맑은 물가에 손을 함께 씻었던
가물가물한 그 이름을 까맣게 잊었다
한국돈 이천 원 받아쥐고 돌아서며
설핏 눈시울이 붉어졌던 조선족 여자
그 뒷모습은 잊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버스 차창 너머
연변 맑은 강바람 속으로 멀어져가던
- 나종영, 전문
위 시는 인물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슬픈 우리의 근현대 역사와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찡하기도 한 시다. '인물 시'는 그 인물의 특징적 면모가 실감 있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의 역할이 확실하지 않은 시는 영 재미 없는, 방향 잃은 시가 되므로 꼭 시의 주인공을 잘 챙겨야 한다.
이 외에도 특정물을 대상으로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는데 한 편만 더 소개 한다.
대흥사 입구의 마늘밭
마늘잎들이 누렇게 때깔을 쓰고 있다
마늘이야 마른 생각들 버석거려도 머리통 가득
매운맛을 가두겠지만
수확이 가까울수록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어
머리 뿌리 온통 깨달음으로 채워넣으려는
저 독한 마음을 읽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증을 견뎌야 하는
메마른 5월이다. 누가 내 몸을 캐서
불알 두 쪽 갈라본들
거기 통속의 향기 드러나겠는가
- 김명인, 부분
위 시는 '마늘'이라는 대상을 선택하여 마늘의 수확이 가까워질수록 거추장스러운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고 마늘의 특성인 매운맛을 가득 머금고 여물어져 가고 있는 것과 통속의 향기(通俗의 香氣)인 마늘의 특질을 시인에게로 치환(置換)시켜서 오롯이 제 맛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담백 하지만 사물의 특질과 연결된 자신만의 사람살이의 해석이 시를 쓰는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인 것이다.
오는 10월에 시상식을 갖게 될 수상자로 김명인 시인이 선정 되었다. 와 "식당 의자"가 그의 시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현대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명인 시인의 시를 서정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어 볼 일이다.
- 이어산
현대시를 이루는 중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시의 의미성"이다. 한 편의 시 속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깊은 속뜻이 내포되어 있는 시가 시다운 것이다. 너무 드러나 버리면 산문이 된다. 시 전체에 담겨있는 정서와 사상을 직접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배후에 숨어있는 이미지가 암시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떠오르도록 하는 표현 방법이 오랜 세월 가장 시다운 것으로 합일 되었기에 이 부분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시를 이루는 요소 가운데서 기초중의 기초가 "수사법"이다.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집을 짓는 목수가 기둥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거나 지붕을 덮을 능력이 안되어서 바람에 넘어지거나 비가 줄줄 새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을 지은 것과 같다. 그래서 어설픈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초보일 때는 차라리 담백하고 정직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좋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수사법에 대해서 물어보면 중,고등학교에서 배웠기에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시에 반영시키는 방법이 서툰 경우를 많이 본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제대로 반영시킬 수만 있다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데 오히려 그 중요성에 둔감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수사법 중 맨 앞자리에 놓이는 것이 직유법(直喩法/simple)이다. 비유법 중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형식으로 두 개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같다' '~인양' '~같은' '~처럼' '~듯이'등의 표현 형식이다.
밤새 자애로운 봄비의 다스림에
태초의 첫날처럼 반짝 깨어난 아침
발돋움하고 빨래 너는 안해의 모습도 어여쁘고
마을 위 고목 가지에 깍깍이는 까치소리도 기름져
흠뻑 물오른 검은 가지, 엄지 같은 움
하늘엔 자양한 햇발이 우유처럼 자욱하다
- 유치환, 전문
위 시에서처럼 A와 B, 두 사물간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직접 연결하는 기법인데 우리에게 좀더 확실히 알려진 것과 덜 알려진 것의 비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성이나 사물과 연관되는 정신(사상 또는 관념)이 너무 둥떨어지면 이 비유법을 쓰지 않은 것보다 못할 수가 있으므로 적절하고 적확(的確)하게 사용하기 바란다.
직유법과 대조되는 수사법으론 은유법(隱喩法/metaphor)이 있다.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을 동일시 다루는 것인데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감춰진 이미지다. 즉 '내마음은 호수요' '소리없는 아우성' '책상다리' '바늘 귀' '저울 눈'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 방법이다. 현대시를 말할 때 "시란 은유다"라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수사법이다. 은유법에는 치환은유(置換隱喩)와 병치은유(竝置隱喩), 대유(代喩)등의 갈래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것은 다음에 다시 소개하도록 하고 오늘은 널리 알려진 치환은유의 활용이 돋보이는 유치환 님의 시 한 편을 더 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전문
시를 쓸 때 은유만 잘 활용해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깃발'이라는 말이 한 번도 본문 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이라는 말로 대치 하였고 2행 부터는 '이것은'이라는 말도 생략해 버렸다. 다만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 '이념의 푯대' 등의 보조관념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모두는 깃발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처럼 원관념이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 있거나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이해하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은 두 사물간의 동일성이나 보편적 상상력이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고 유추과정이 복잡하지 않은 치환은유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음에 기인하고 있다.
오늘은 간단하게 시 작법의 중요 요소를 살펴봤는데 소개한 것 외에도 수사법의 갈래는 마흔 가지 쯤 된다. 다 익히면 더욱 좋겠지만 시를 쓰는데 이용하거나 참고 하여 더 좋은 시적 표현을 하라는 것일 뿐 그 법칙의 테두리에 갇혀서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거니와 시는 우리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며 그 노래에 부표를 찍고 음과 리듬을 살리는 것이다. 또한 시쓰기란 사물을 사랑하는 사랑싸움에 도전하는 일이기에 시적 대상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랑의 싸움을 잘하여 승리하기 바란다. 그런 적극성을 가진 사람이 시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고 시인의 깃발을 올릴 수 있다.
- 이어산
■ '누가 글을 쓰는가' / 김이듬
파브르는 평전에 이렇게 쓴다. “나는 꿈에 잠길 때마다 단 몇 분만이라도 우리 집 개의 뇌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세상의 사물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것인가?” 사람의 굳어진 사고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시선으로 최초의 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문득 겹눈이 생겨난다든가 겨드랑이가 가려워진다면, 작가 이상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다시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알다시피 파브르는 곤충작자였고 이상은 건축학도였다. 인문계를 나왔다거나 유명한 문예창작학과를 다닌 바도 없다.
며칠 전에 나는 이런 사연이 든 메일을 받았다. “저는 이제 막 취업하게 된 27세 사회초년생입니다. 저는 문과출신인데, 어쩌다보니 ‘공대 비율 90%’에 육박하는 회사에 들어왔네요. 사실 ‘될까?’싶었는데,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매일매일 제 빈틈을 들킬까 두려워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상사 분들은 저에게 ‘문과적인 논리와 상상력’을 기대하며 저를 뽑았다고 하세요. 하지만 저에겐 그런 게 없는 것 같고, 동기들이 당연히 아는 기본 개념을 모를 때도 많고요. 부여받는 업무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단계를 늘 넘어서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힘들고 늘 경직되어 있어요. 이런 저,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젊은 여성에게 책을 읽고 짬짬이 글을 써보시라고 했다. 하다못해 단상 메모나 짧은 일기라도 적어보기를 권했다. 연필로 간신히 쓰는 미음, 이응 하나가 어쩌면 자신과 타인을 침착하게 응시하는 가장 큰 창문이 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조언을 하며 몇 권의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이 문장은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대화이다.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작가의 질문들이 무척 신선했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책을 그녀(사회초년생)에게 권했다. 김초엽은 공대 출신의 20대 여성 작가인데 묘하게도 과학과 문학이 결합된 멋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져 적응하기 어려운 이나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과이기 때문에, 혈액형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등 뭉뚱그리는 잣대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녀가 회사 구석에서 와락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그려졌다. 새롭고 낯선 직장에서 실수를 할까봐 두려움에 떨며 업무에 자신이 없다면,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에세이 ‘랩 걸’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고 했다. 호프는 “과학자라서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과학의 세계에서 솔직하게 고백적인 에세이를 쓰는 실험실의 여자, 호프는 과학논문이 아니라 그 책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여성 과학자로서 엄마로서 겪은 편견과 차별에 관해서도 쉬운 문장으로 털어놓으며 타인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문과적인 논리와 상상력을 기대하는’ 상사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바심과 불안에 떨기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면 된다. 세상 모든 이에게는 논리와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 발현하는 방법 중에는 읽고 쓰기가 있다. 지금부터 그것을 키워볼까? 모든 씨앗은 대담하니까.
미국의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을 보면 버스 운전 기사인 패터슨은 어두운 불빛 아래 책을 읽고 틈날 때마다 시를 쓴다. 그는 반복적이며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빗방울이 만드는 파문의 둥근 차이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연일 비바람 불어닥쳐도 그칠 날이 있다는 걸 인식하는 버스기사이자 시인이다.
노점상에게도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독서할 여유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우리들을 과속과 추월, 사고로 몰아가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버스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떠오르는 시 구절 하나 메모하는 패터슨이 나오려면 일한만큼 최소한의 휴식과 임금은 보장되어야 한다.
(국제신문/ 시인·책방이듬 대표)
어떻게 써야 할까
시는 운문으로 노래이기도 하지만, 정제된 언어로 그린 그림이며, 사물과 관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코 사랑타령이나 넋두리, 푸념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구체어와 추상어
구체어는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특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특히 시각적으로 관찰되며, 공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모두 구체어이다. 따라서 ‘산, 강, 바위’와 같은 자연물과 ‘의자, 라디오, 집’과 같은 인공물들은 구체어이다.
추상어는 어떤 대상의 ‘특성’을 가리킨다. ‘사과’라는 대상은 ‘빨갛다, 달다, 둥글다’와 같은 여러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성은 종류가 같거나 종류가 다른 대상과도 공통성이 있는 성질들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물리적으로 어떤 대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의 사고에 의해 인식되고 구별된다.
이 외에 인간의 정서 상태를 가리키는 ‘슬픔, 기쁨’과 같은 단어, 상태를 나타내는 ‘잔잔하다, 평화롭다’와 같은 단어도 추상어이다. 흔히 추상어가 의미하는 것을 ‘관념’이라고 한다.
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①생각, 견해 ②관찰하고 생각함.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③사고(思考)의 대상으로 되는 의식의 내용. 심적 형상(形象)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등으로 나와 있다. 이 세 가지 풀이에는 모두 ‘생각’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관념은 곧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 시를 쓸 때, 관념어 사용은 피하는 게 좋다. 평소 관념어를 이미지를 활용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꾸준히 연습하면 극복이 가능하다.
예문) 임종 : 낮잠을 즐기시려는 게지 / 악몽을 꾸고 계신 건지도 몰라 / 봉숭아 붉은 꽃잎이 해불쭉한 오후 / 나비 한 마리 해거름을 쫓아 날아간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 안도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