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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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중언어능력은 글로벌시대 최대의 자원 댓글:  조회:1479  추천:1  2015-07-21
◇ 글로벌시대의 다중언어능력 1990년대 중엽 코리안드림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족 사회의 인구이동은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훨씬 넘어섰다. 글로벌 인구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이주지에서 태어난 '조선족 2세'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자녀들의 민족문화와 언어 계승이 커다란 난제로 떠오르고 있다. 조선족 집거지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조선족 2세'들에게 있어서 태어나서 자란 지방이 그들의 고향이며 그 지역문화에 익숙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와 반대로 조선족문화나 우리 말은 부모나 친척들로부터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는 멀고도 먼 존재가 되어버렸다. 세대간 차이가 흔히 거론되고 있지만 조선족 집거지 이외 지역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부모 자식간에는 세대간 차이 뿐만 아니라 커다란 문화적 차이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자식들의 경우 부모 양쪽의 언어를 모두 능숙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는 부모들이 자식들과의 교류에서 각자의 모어를 사용함으로써 자녀들이 자연적으로 부모의 언어를 장악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족의 경우 자녀들이 거주지의 언어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 있으면 한어, 한국에 있으면 한국어, 일본에 있으면 일본어 등 단일언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조선족 2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언어적 환경 요소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들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족 부모들의 경우 어느 지역에 살면 그 지역 언어를 현지인들과 똑같이 잘 하기를 희망하며, 그 다음에 여건이 되면 우리 말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자식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부모 세대가 언어적 한계로 인하여 겪었던 난관을 자식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식의 표출이기도 하다. 한어나 기타 언어는 물론 민족어인 조선어 조차도 한국어와 조금 다르다 보니 언어소통에서 늘 어디선가 부족함과 한계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즉 다중언어를 비교적 능숙하게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도 원어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많게든 적게든 조선족들에게 공유되어 있다. 조선족 집거지에서 드문드문 보게 되는 '조선어 무용론(无用论)'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자식들에게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식이 '조선족 2세'들의 단일언어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어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현지언어가 우선이다보니 민족어는 순위에서 밀려나게 되고 자녀들이 어느 정도 크게 되면 우리 말을 배워주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하게 된다. 또한 민족언어환경이 결여된 상황에서 자식들에게 무조건 우리 말을 배워야 된다고 설득할 만한 그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족이니 꼭 우리 말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족 2세'들을 설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제적인 교육은 별로 효과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글로벌 시각에서 볼 때 조선족이 장악하고 있는 이중언어는 자녀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이다. 가령 한국과 아무런 거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 말은 자녀들에게 앞으로의 경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우세는 다원문화와 다중언어이다. 한국과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가 급속히 글로벌 물결을 타고 세계 각지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다양한 문화를 접촉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한어와 한국어 나아가서 일본어, 영어 등 다중언어를 장악함으로 하여 조선족 사회의 글로벌 진출을 용이하게 하여 주었다.   ◇ 조선족의 언어능력   필자가 일본에 있을 때 조선족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던 평가가 어학능력에 대한 찬사였다. 즉 조선족들은 일본어를 정말 잘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족이나 한국인들보다 발음이 표준적일 뿐만 아니라 어학 종합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아마 재일 조선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 본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통역에 있어서 능란한 순간적 언어전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서의 언어전환을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코드 스위칭(code switching, 语码转换), 즉 언어 코드 변환이다. 한 가지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꾸어 말하기 위해서는 두뇌에서 두 가지 언어의 변환 작업이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어로 이야기하다가 영어로 말하려면 잠시 머리 속에서 영어로 어떻게 말하여야 되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일언어만 구사하는 사람일 수록 언어 코드 변환이 어려우며 변환하는 데 시간이 소요된다. 다중언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할 경우 이러한 코드 스위칭은 거의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조선족의 경우 어릴 적부터 언어체계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하여 왔다. 즉 우리는 알타이어족(阿尔泰语系)에 가까운 조선어와 중국티베트어족(汉藏语系)인 한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문법체계, 어순 등이 완전히 다른 두 언어를 동시에 장악하고 일상적으로 전환해 사용함으로써 조선족들은 어려서부터 코드 스위칭을 자연스럽게 익혀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문적인 훈련이 없이도 언어 코드 변환을 잘 할 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에 일본어, 영어 등 기타 언어를 추가로 학습하면서 언어능력을 보다 보완하고 강화하였다.   ◇ 화인네트워크와 한인네트워크의 이용   해외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기타 이주민들보다 많은 우월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즉 세계 최대 네트워크에 속하는 화인(华人)네트워크와 한인네트워크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조선족들은 이중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함으로 하여 새로운 이주지에서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현지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 두 네트워크 자원을 번갈아 이용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네트워크들을 잘 활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와 자원들을 공유하게 되고 새로운 이주지에서의 정착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의 이용에는 언어능력에 의한 자연적인 차이가 보여진다. 즉 한어가 보다 능숙하면 화인네트워크를, 한국어에 능숙하면 한인네트워크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면 한인네트워크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유럽 등 타 지역 조선족 사회에서 특히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중언어의 장악은 단지 중국과 한국이라는 범주에서만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해외 화인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급속한 경제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고 한국 또한 해외 한인네트워크의 활용을 적극 도모하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가 최대의 인적자원이 되고 있는 오늘날 이중언어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조선족 사회 또한 중요한 인적 자원의 일부를 잃게 된다. 이는 치열한 경쟁시대를 살아나가야 할 '조선족 2세'들에게도 자신의 우세를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다원적 문화에 대한 신속한 이해와 적응   글로벌시대에 들어서면서 자본, 정보, 인구, 민족, 문화를 포함한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글로벌화는 다양한 문화가 다양성 속에서 서로 융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과거의 단일한 전통문화에 입각한 정체성이나 국적범위를 훨씬 초월하고 있는바 다원문화의 교류 속에서 전통문화와 국적을 초월한 초문화적인 정체성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초문화화(transculturation)'는 근래에 제기되고 있는 일방적인 문화동화가 아니라 새로운 문화환경에 적응하면서 원유의 문화도 보류하는 공생의 개념이다. 조선족 사회가 글로벌 흐름을 적극적으로 포착하고 글로벌 이동의 앞장에 서서 세계 각지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원 문화에 대한 신속한 이해와 강한 적응성이 구비되어있기 때문이다. 조선족 사회의 경우 글로벌시대 이전부터 이미 이러한 초문화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조선족 사회는 중국 이주 초기부터 이미 다원문화적 환경에 처하여 있었다. 조선족마을과 벼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가면서 한반도의 기초문화를 중심으로 일본문화의 일부분, 중국 여러 민족의 문화를 흡수하고 융합하여 조선족 특색 문화로 발전시켜왔다. 조선족 사회가 1990년대 초반부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세계 각지로 과감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코 경제적인 요인만은 아니었다. 개혁개방 초기 조선족 사회가 외국나들이 붐에 휩싸여 있을 때 동북지역 기타 민족들은 경제상황이 조선족과 비슷하였지만 외국나들이에 대하여 부러워 하면서도 관망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초기의 대(对) 러시아 무역은 거의 조선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일본으로의 유학, 노무 송출도 조선족이 앞장서 나갔다. 이는 조선족 사회의 초문화적 요소로 인하여 미지의 세계에 적응하여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변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교류와 융합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미지의 세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문화이해와 적응력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융합능력은 다양한 문화와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이중, 삼중, 심지어 사중 언어우세를 이용하여 다양한 교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현재 '조선족 2세'들의 단일언어화와 문화의 현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족 2세'들은 생활하고 있는 현지 문화에만 익숙하여져 있고 조선족문화 자체에 대하여 생소감마저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현실로 된다면 조선족 사회의 글로벌 진출에 큰 도움이 되었던 초문화적 요소들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단일언어를 구사하는 '조선족 2세'들은 조선족만의 우세를 버린 채 현지인들과 같은 선에서 글로벌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글로벌시대에 있어서 영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지만 결코 영어만 잘하여서 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를 잘 하는 인재는 주변에 넘쳐난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모두 글로벌시대를 잘 이겨나가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정보, 자본, 민족, 문화가 다양하게 교류되고 있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 정보에 대한 이해와 포착능력이 필요하다. 이중, 삼중언어의 구사와 언어를 통한 문화이해능력은 글로벌시대의 흐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어느 나라나 지역에서 살든 우리 말과 한어 이중언어의 계승은 '조선족 2세'들이 글로벌경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2세'의 경우는 우리 말, 한국에 있는 '조선족 2세'의 경우는 한어, 기타 지역에 있는 '조선족 2세'의 경우는 한중 이중언어의 구비가 조선족정체성의 유지와 함께 자녀들의 생애 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다중언어를 자녀에게 전승하여 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 언어환경이 결여되어 있고 부모 자식 사이에 교류할 시간마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또한 학업이 과중하여 학업부담을 줄여야 하는 마당에 언어 한 가지를 더 배우게 하려는 것은 부모들의 욕심이고 자녀에게 너무하지 않을까 하는 측은지심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자녀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이 또한 너무나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엘리트 교육으로 생각하고 이중언어를 자녀들에게 장악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일이란 하기에 달려있고 자식들의 언어교육도 부모에게 달려있다. 유럽, 싱가포르 등 나라의 경우 다중언어는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 있으며 단일어밖에 구사할 줄 모른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다중언어 교육에 있어서 자식들에게 원어민 수준으로 모든 언어를 잘 배우게 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부모로서의 책임은 현지어, 영어라는 학업과 관련된 언어를 잘 배우는 전제 하에서 우리 말과 한어(지역사정에 맞추어)를 어느 정도라도 알아 들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끔 기초를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들이 대학교에 진학한 후 언어습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자주적으로 배울 수 있고 우리 말 기초가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빠른 시일 내에 잘 배워 활용할 수 있다. 일본의 사립화교학교들은 근래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화교자녀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까지도 자녀들을 화교학교에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입학희망자가 폭주하여 입학생 선별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동북지역에서도 근래에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한족 학생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다중언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근래 중국 도시의 경우 주말학교 등을 통한 우리 말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중국어, 혹은 이중언어를 자녀들에게 배워주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집거지 이외 지역의 조선족 사회가 우리 말과 민족문화의 전수에 커다란 노력을 들이고 있음을 설명하며 커다란 성과가 기대된다. 글로벌시대 다중언어의 습득은 과거의 방식대로 민족학교에만 의뢰할 수는 없다. 시대적 상황이 많이 바뀐 상황에서 주말학교, 민족학급, 외국어학원, 가정교육 등 현실 조건에 알맞은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서로 결합하여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는 몇몇 민족지성인의 열정만으로는 실현하기 어렵다. 지성인, 지역 조선족 사회네트워크, 학부모가 유기적으로 협조하고 연대를 꾸며 나가야만 가능하다. 이 가운데서도 관건은 조선족 부모들의 의지와 태도에 달려 있다. 자녀들의 학업을 위하여 부모들은 현지인들과 똑같거나 우월한 교육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학업을 위하여 우리의 최대의 우세이고 소중한 자원인 다중언어와 다원문화 이해를 무시하거나 희생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차별화된 교육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똑 같은 교육을 진행하여서는 자녀가 특별히 뛰어나지 않는 한 '조선족 2세'들이 우세를 가질 수 없다. 글로벌시대는 다원문화시대이고 다중언어시대이다. 조선족들이 지닌 이중언어능력은 현재까지 사회생활에서 우세였고 글로벌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자원이었다. 자녀들에게 조선족 최대 자원이고 소중한 유산인 다원문화에 대한 이해력과 다중언어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조선족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아닐까! (지행자, 흑룡강신문에 이미 게재되었음)
3    “타자”의 시각에서 본 조선족과 한국인 댓글:  조회:2686  추천:6  2015-05-05
  조선족사회가 한국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하여서도 이젠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980년대의 동포애에 휩싸인 감동으로부터 가짜 한약재로 인한 불신, 그리고 뒤이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서로간의 불신과 저촉적인 감정은 1990년대 후반기에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호간의 이해가 깊어지고 상호간의 신뢰와 교류만이 두 사회의 양호한 발전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이는 또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가 함께 노력하여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형사사건은 다시 한번 조선족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다. 중국에서 모범민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조선족사회가 왜 한국사회에서 늘 마이너스적인 이미지를 굳히고 있을까?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은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아직도 융합되기 어려운 거리가 있는 존재이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어디선가 거리감과 차이를 느끼는 것은 왜서일까?   문화적 측면으로 볼 때 우리는 분명 전통문화의 기초를 공유하고 있고 같은 민족이다. 김치, 된장 등 음식문화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연중행사, 언어문자 등 거의 모든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무형의 두꺼운 장벽이 있고 이로 인하여 조선족사회가 늘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다. 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나(조선족)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으므로 기인된 현상이며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국민국가의 사이에 끼어 사는 월경민족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이해하려면 국민국가라는 근대국가모식과 이러한 맥락에서의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며 국민의 동질성과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시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유럽의 국민국가 이념을 도입하였으며 한 개 나라, 한 개 민족이라는 이념으로 국민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단일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므로 일본=일본인=대화민족이라는 국민성과 민족성이 고도로 일치되는 국민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국민국가의 건설은 국민의 동질성을 강요하지만 이러한 동질성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구별되는(혹은 대조되는) “타자”(他者)가 필요하였다. 즉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민을 만들기에는 이와 구별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북방의 아이누족, 오키나와사람들, 그리고 재일교포들이 야마토 민족과는 구별되는 “타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은 제2차세계대전이후 반일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하에 한국=한국인=한민족이라는 국민국가의 길을 걸어왔다. 즉 한민족과 한국인 한국국민이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수요에 맞추어 국악, 국어 등 개념을 창출하였고 국민들의 동질성과 배타적인 문화체제를 수립하여 왔다. 국민들의 동질성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구별되는 “타자”가 필요하다. 한민족이 절대 다수인 한국에서 화교가 이러한 “타자”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일본과 비교하여 볼 때 “타자”가 양적으로 너무 부족하였으므로 내부에서도 계층에 따른 “타자”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와 “타자”의 구별은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새로운 “타자”로 분류되었다.   중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다민족국가로서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이념이 양계초 등에 의하여 도입된 후 다민족 국가라는 현실에서 중화민족이라는 상상의 민족공동체가 구상되었다. 중화민족아래에 56개 민족을 둠으로써 중국=중화민족=중국인이라는 국민문화를 형성하여 가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적 요인으로 인하여 중국문화는 역사적으로 배타성보다는 포용력이 강하였고 보다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였다. “우리”와 “타자”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개개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지는 않았다. 다민족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민족을 통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타자”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이루어 졌다.   조선족의 경우, 주로 조선족 마을에서 생활하였고 주변에 한족 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들과 어울려 살았으므로 “우리”는 조선족 자체였고 “타자”는 주변의 기타 민족이었다. 1980년대까지 조선족사회에서 조선족보다 조선사람이라는 말이 더욱 일반적이었다. 조선사람은 조선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융합력이 강한 중국에서 민족의 얼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였다. 조선족사회는 중국에서 살아나가면서 늘 “타자”를 의식하면서 생활하였다. 조선족마을들은 기타 민족 마을들 보다 깨끗하다. 이는 조선족마을들이 “타자”인 기타 민족 마을들과 구별하는 선명한 특징의 하나로 되었다. 백의민족으로서 예로부터 위생습관을 잘 지켜왔다는 해석도 되지만 “우리”와 “타자”의 시각으로 볼 때 “타자”와 구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마을 내부에서조차 어느 집의 솥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가 비기는 습관은 이러한 타자의식의 내부침투라고 볼 수 있다. 노래와 춤은 동북에서 조선족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되었고 이를 통하여 “타자”인 기타 민족과 구별하고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타자”의 시각은 교육열정 징구량 초과납부 농토건설, 마을건설 등 여러 분야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조선족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늘 한족 등 기타 민족과의 비교를 통하여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과 자호감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은 다민족국가 중국이라는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우리”와 “타자”가 공존하면서 이를 통합하는 형식으로 중화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조선족사회도 이 과정에 중국 국민국가의 건설에 동조하게 되었고 조선사람으로부터 조선족으로의 호칭전환과 국민정체성도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족의 “우리”와 “타자” 의식이 힘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타자”는 중국의 기타 민족이었고 한반도의 주민들은 똑 같은 “우리”였다. 하지만 조선족사회는 이미 중국의 국민국가건설과정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조선족, 즉 중국의 국민이라는 인식이 정착되게 되었다. 한민족이면서도 중국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국인들도 한민족=한국인이라는 동질적 국민의식을 확립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엽부터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가 40년 분단 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 같은 “우리”라는 동포애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내용은 이미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중국을 우리 나라라고 하는 조선족들의 인식은 충격이었고 조선족은 같은 “우리”이니 한국인이니 아닌가 고 반문하게 되었다. 조선족 사회 또한 같은 “우리”라고 확신하였던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를 감수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초기의 교류에서 조선족들이 느끼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조선족사회의 농경문화배경과 한국의 산업문화배경으로 인한 차이에서 기인되는 부분이 많다. 또한 같은 민족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두 국민국가 문화간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서로가 상대방을 “우리”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아닌 “타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실망과 배신감이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사이의 수많은 모순과 불신을 초래하게 하였던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은 중국인 즉 “타자”이면서도 재외동포라는 이중적인 인식이 병존하고 있다. 즉 재외동포로서 포용하면서도 때로는 외국인 즉 “타자”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이는 재한 조선족사회가 20여년간 한국에서 점차 정착하면서도 친하면서도 소외감을 느끼고 뛰어 넘을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을 감지하는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기타 외국인에 비하여 완전히 “타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와 “타자” 사이에 위치하는 동포로서 경우에 따라 완전히 “우리”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주류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한 조선족엘리트계층도 이미 많이 성장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정도 “우리”로 융합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한민족으로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시대의 발전흐름에 맞는 것이며 조선족과 한국사회의 발전에 서로 유익하다.   조선족사회의 정체성 혼란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기원하였다. 여태껏 간직하여 왔던 “우리”라는 동질감이 한국과의 교류가운데서 힘없이 무너져버리게 되었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은 “우리”가 아니라 “타자”로 인식되었을 때 “우리”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수단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한족 등 타민족과의 “타자” 구별에서 활용되었던 언어 예의범절 생활습관 등 수단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국과 한국의 직접적 교류가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족으로서의 존재감조차 무력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즉 조선족이란 누구인가라는 “우리”를 확정할 수 없음으로 인한 고민이었다. 사실 조선족, 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족문화가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면서 형성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문화를 기반으로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문화적 요소 그리고 현대한국문화요소들을 융합하면서 글로벌시대의 발전에 걸맞은 복합적 문화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이래 서구에서 유입된 국민국가 민족이란 개념이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면서 조선족과 한국인은 같은 “우리”이면서도 외국인으로서의 “타자”라는 모순된 사이가 되었다. 글로벌시대는 문화의 다양성과 상호문화에 대한 포용과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 지나친 “타자”의식은 서로간의 교류와 발전을 가로막는 거침목이 되고 있다. 상호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면서 보다 열린 자세로 상대방을 포용하여야만 서로의 발전에 유리하다. 이제는 국민국가와 “타자”의식에서 벗어나 글로벌시대 발전에 걸맞은 보다 끈끈한 한민족네트워크를 구축 강화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    벼농사와 조선족 댓글:  조회:1804  추천:0  2015-04-20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하여 조선족의 정체성, 문화성격 등 문제를 둘러싸고 중한일 삼국 학계에서 장기적의 탐색과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조선족 문화론에 대한 토론을 볼 때 정판룡 교수의 “며느리론”, 허명철 교수의 “사과배”비유, 황유복 교수의 조선족문화 독립성에 대한 논술, 김강일 교수의 조선족 “변연문화계통론”, 유경재 교수의 “다중문화론”등 감성적인 차원에서 이론적 차원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에서 조선족 문화의 함의와 성격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조선족 문화 성격에 대한 논의는 인구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족 문화를 재구축하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선족문화에 대하여 의논할 때 먼저 이 문화가 일조일석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는 가운데 형성된 생활지혜의 집합체라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운동회는 만주국시기 일본인들이 식민지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였으며 조선족들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운동회는 지연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계승되었고 조선족마을들의 중요한 연중행사가 되었다. 현재 북경, 청도, 상해 이우 심지어 일본 조선족 사회에서도 조선족 운동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도심에 산재되어 있는 조선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청도 조선족 운동회의 경우, 해림, 녕안, 오상, 연길 등 지역별로 팀을 선발하여 경기를 진행하고 있는바 운동회를 통하여 지연네트워크가 재조합, 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 유입된 운동회라는 형태의 모임이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활용되었고 조선족 특유의 형식으로 글로벌시대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조선족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1980년대까지 조선족사회의 정신, 문화, 경제, 교육의 기반으로 존재하였던 조선족 마을 문화, 특히 벼농사와 농경문화가 어떠한 문화였으며 조선족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살펴보려 한다.   조선족 마을의 형성 우리 조상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모여서 살면서 조선족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이주초기 마을들은 지금처럼 집중되어 있은 것은 아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그 근처에 집을 지어 살다 보니 3,4호 혹은 5,6호가 모여 사는 자그마한 자연마을들이 일반적이었다. 이보중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1922년 심양 근처에 조선족 마을이 60개 있었는데 1~5호가 7개, 6~10호가 10개, 11~15호가 8개, 16~20호가 12개, 21~30호가 11개, 31~40호가 5개, 51~60호가 3개, 71~80호가 3개, 105호가 1개였다. 이는 조선족 마을들이 이주민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산재한 자연마을이 위주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주초기의 마을주민들은 지연 혹은 혈연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었고 한반도 출신지역의 풍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안전마을을 건설하면서 자연마을들이 강제적으로 철거되고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전쟁피난민들의 안식처 마련으로 시작된 안전마을건설이 항일무장과의 연결 차단, 식민지통치 등에 유리하게 되자 대규모적인 집단부락건설이 1940년대초까지 추진되었다. 집단부락 건설은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조선족들을 강제적을 한 곳에 집중시켜 거주하게 함으로써 조선족의 전통적인 거주지역, 거주형태, 이웃관계 등을 개변시켰다. 이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은 혈연(血緣)이 아닌 지연(地緣)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집단부락이 해체되었으며 조선족 마을들은 토비들의 집중습격대상이 되었다. 식민통치에서의 해방으로 인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붐과 토비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한 이민으로 인하여 동북 조선족사회는 커다란 인구이동을 겪게 되었다. 특히 토비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도시나 비교적 큰 마을, 연변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연변지역의 경우, 1940년대말에 인구의 절반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연변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의 반수 정도가 한반도로 돌아가고 연변 이외 지역에서의 인구유입이 빈 자리를 보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산재지역의 경우, 규모가 크지 않은 일부 조선족 마을들은 1940년대에 아예 사라지게 되었고 규모가 좀 큰 마을들은 원 주민들과 각지에서 피난하여 온 피난민들이 자위단을 형성하여 마을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으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은 또 한번 사회공동체의 해체와 재 구축을 겪게 되었다. 필자의 고증과 현지 조사에 의하면 1940년대 말 여러 조선족 마을들은 사실 조선반도 여러 지역 출신 조선족 농민들의 집합체였다. 한 마을 안에서도 조선반도 같은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격동하는 1940년대 후반에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족 마을들에 모여들어 살게 되었지만 지역습관 경제형태 등이 다름으로 하여 같은 출신지역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족의 한반도 출신을 보면 함경도, 평안도와 경산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간간히 북도치, 북선사람, 남도치, 남선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북선(北鲜), 남선(南鲜)이란 일본식민통치자들이 조선족에 대한 멸칭으로 한반도 북부와 남부출신들을 구별하여 부른 것이다. 조선족들도 처음에는 북선, 남선이라고 부르다가 북도치(함경도, 혹 연변지역), 남도치(경상도, 혹 연변이외 지역)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족들에게 남 북부 출신으로 인한 차이는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남 북부 출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북부 출신의 경우, 한반도 북부에 산간지대가 많으므로 말미암아 화전민 출신이 대다수였으며 주로 한전농사를 많이 하였다. 가령 벼농사를 하더라도 주로 육도(陸稻)를 재배하였다. 남부출신(일부 평안도 평야지대 출신 포함)의 경우, 한반도에서도 주로 벼농사를 하였기에 한전보다는 수전에 익숙하였다. 중국에 이주하여서도 주로 벼농사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방언, 경제수익, 음식습관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즉 남부출신의 경우, 벼농사에 능하고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며 경제수입이 상대적으로 높고 경상도 등 남부방언을 사용하였다. 북부출신의 경우, 한전농사에 능하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였으며 경제수입이 벼농사에 비하여 적었고 함경도 등 북부방언을 사용하였다. 특히 방언의 경우, 1940년대말까지만 하여도 함경도와 경상도 방언은 서로 잘 알아듣지 못하고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많았다. 이러한 선명한 지역적 차이로 말미암아 195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한 마을 안에서도 같은 지역출신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다. 1950년대초까지 조선족마을들은 인구유동이 빈번하였고 안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초기의 조선족 마을은 출신지역, 경제형태, 거주형태, 생활습관, 언어가 모두 다른 조선족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역출신의 차이와 경제수익의 차이를 해소하고 마을을 하나의 조선족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벼농사의 보급과 발전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벼농사와 조선족 198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벼농사라는 이미지는 이미 중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인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선족들이 이주초기부터 모두 벼농사에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족 마을 내부에서 조차 벼농사기술 보급이 진행되었고 1980년초 토지도급제를 실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벼농사 기술을 배워가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지역별 경제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의 동북지역 수전개발은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걸쳐 1875년에 이르러서야 벼재배에 성공하였고 중국 동북지역 벼농사의 주력이 되었다. 1920년대에 국제 쌀 가격 상승으로 동북지역에도 수전개발 붐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도전공사(稻田公司)들이 조선족을 고용하여 벼농사를 하였다. 1930년대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강제적으로 집단부락정책을 강행하였고 여러 지역의 조선족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집중시켜 군사화된 관리를 실시하였다. 1937년부터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 대규모적인 집단이민을 실시하여 주로 능숙한 벼농사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반도 남부지역 농민들을 모집하여 중국 동북지역 각지에서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수전을 개발하였다. 만선탁식회사는 1933년부터 1940년에 이르는 7년사이에 도합 2626000엔을 수전개발에 투입하였다. 1940년대까지의 수전개발에 있어서 동북지역 모든 조선족들이 수전농사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한족지주나 일본식민통치자들은 주로 남부출신으로 수전농사 경험이 있는 조선족들을 모집하여 벼농사를 하게 하였다. 이는 1930년대 이후 대규모 집단이민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부 지역 출신으로 한전에 능한 조선족들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한전농사에 종사하였다. 1940년대말까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조선족은 한정되어 있었다. 같은 조선족 마을 내부에 있어서도 경상도 등 남부 출신 주민을 위주로 벼농사를 진행하였다. 농약, 비료 등 현대적 농업방식이 도입되기 전에 벼농사는 산출, 수입 등 여러 면에서 한전 작물을 훨씬 초과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전 수전경작에 의한 경제적 차이도 컸으며 지역출신간의 격차도 커지게 되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신분차별화 정책으로 조선족과 타민족간의 민족갈등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내부에서도 남 북부 출신을 차별화 함으로써 내부의 갈등을 부추겼다. 이로써 식민지통치에 대한 시선을 내부 갈등으로 분산시켰다. 1945년말에 중국 동북지역의 대다수 수리시설들은 전란과 타민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1946년 수전면적이 대대적으로 감소되었다. 수리시설의 복구와 유지, 벼농사의 보급 등에는 모두 집체로동이 필요하였다. 초기의 수리시설 복구는 주로 벼농사를 하려고 하는 남부출신 조선족들에 의하여 힘겹게 진행되었으며 벼재배 면적도 한정되어 있었다. 수리시설의 복구, 벼농사의 대규모적인 보급은 토지개혁 이후에 시작된 농업 집체화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집체화 시기 정부와 조선족 간부들의 주도하에 진행된 대대적인 수리시설의 건설과 대규모적인 노동력 투입은 과거에 개간할 수 없었던 많은 황무지들을 수전으로 개간할 수 있었다. 농업기술원 제도 도입으로 인하여 작업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벼농사 경험이 없는 농민들도 기술원의 지도하에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대규모재배가 가능하였다. 1940년대말기 이래 중국 농촌지역에서 진행된 농업집체화 운동은 조선족 마을 공동체의 형성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조선족 마을 주위에 한족 등 기타 민족들과 잡거하고 있어 조선족 마을은 상대적으로 봉페된 환경에 처하여 있었다. 이 가운데서 여러 지역 출신들로 모인 조선족 마을 구성원들은 토지의 집체소유, 생산대의 집체로동을 기초로 하고 벼농사 수리 체계를 핵심으로 하는 마을 내부의 지연 네트워크와 상호 협조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경작지 면적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족 마을들의 경제상황이 진일보 개선되었고 경제수익, 생활습관, 언어 등 지역차이도 점차 축소되었다. 집체로동을 전제로 하는 벼농사의 보급은 마을 내부 성원들 사이의 차이를 줄이고 마을 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며 연대를 강화시켰다. 사유재산이 손해 받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공동로동과 이익을 공유하는 집체화 체제는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새로 이사온 이주민들도 재빨리 마을 공동체 속으로 융합되어 갈수 있었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역사적 특점으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재 구성 재 조합되면서도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경제형식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었다. 벼농사를 기초로 한 풍속습관, 윤리도덕,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마을을 단위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족의 전통문화는 마을 공동체 성원들의 공동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벼집공예로부터 농경무 등 집체무용에 이르기까지 의식주행에는 벼 문화의 요소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인구의 대규모적인 이동이 있기 전에 조선족 마을들에서 보통 해마다 혹은 2년에 한번씩 한가한 여름철에 운동회를 조직하였다. 마을 운동회는 모든 촌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큰 행사로서 마을 성원들의 응집력을 제고하고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중요한 형식이 되였다. 그네, 널뛰기, 씨름 등 전통항목 경기 활동들은 조선족 전통을 이어가는 동시에 마을 성원들 사이, 그리고 촌민과 마을 사이의 응집력을 제고시킬 수 있었다. 운동회에서 진행되는 집체무용 등 또한 민간예술을 전승하는 동시에 성원들 사이의 조직 협조능력을 제고시키었다. 이는 벼농사 과정에서의 집체로동, 조직협조성과 일정한 내재적 관계가 있다.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한전문화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족마을마다 한전들이 보존되어 콩, 감자, 배추, 무 등 생활에 필요한 한전 작물의 재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부의 한전문화와 남부의 수전문화가 점차 융합되면서 독특한 마을문화를 발전시켜 조선족사회의 문화, 경제, 교육, 정신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문화의 융합적 기능을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융합은 우선 먼저 조선족 사회가 한반도 여러 지역의 문화를 잘 소화하고 융합하여 독특한 마을문화를 생성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이 외부의 타 문화 접수와 융합을 용이하게 하였고 조선족 문화를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벼농사의 보급과 민족관계의 개선 벼농사의 보급은 조선족 마을 구성원들을 단합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타민족과의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의 민족이간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족과 타민족의 관계는 악화의 일로를 겪고 있었다. 일본통치자들은 일본인은 일등국민, 조선인은 이등국민, 한족 등은 삼등국민으로 취급하였을 뿐 만 아니라 수전개발을 함에 있어서 한족 등 타민족으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강제적으로 수탈하여 벼농사를 짓게 조선족들에게 대여하거나 팔았다. 이로 인하여 한족 등 타민족들은 조선족이 와서 자신들의 토지가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조선족들을 “얼구이즈”라고 욕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당시 가장 처리하기 어려웠던 공유지 문제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후 한족 등 타민족들은 빼앗겼던 토지를 되 찾으려 했고 조선족들은 모두 한반도로 돌아가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조선족들이 돌아가게 되면 벼농사에 사용되던 수리시설들도 필요 없다고 하여 고의적으로 파괴하였던 것이다. 조선족들이 토비들의 집중공격대상이 되게 된 것도 이러한 민족관계의 악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족들은 일본 식민통치의 가혹한 수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의 희생양이 되었고 기타 민족에게는 가해자로 오해 받게 되었으며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1946~48년에 걸쳐 진행된 토지개혁은 토지소유관계를 잘 처리함으로써 민족관계를 개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민족평등 정책 등 제도적인 조치가 실시되면서 1950년대 초에 이르러 민족관계는 상당히 완화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겨진 민족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간의 저촉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조선족과 주변 기타 민족들과의 관계개선에 있어서 벼농사의 보급이 또 한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전역에서 지속적인 식량부족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도시농촌 이원호구제도, 양식의 통일구입과 통일분배(징구량) 등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동북지역에서는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생산량이 한전의 두 배인 수전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게 되었다. 수전개발 조건이 구비된 타민족 마을들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전 개발에 들어갔으나 수전농사 경험이 있는 기술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술지도는 조선족 마을에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 마을들에서는 자체 마을의 기술원과 노동력이 부족한 정황 하에서 기술원들을 파견하여 무상으로 장기적인 기술지원을 하였다.  한족 등 기타 민족들은 찬물에 맨 발을 넣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동북지역의 4월은 얼음이 금방 녹은 시기여서 매우 차지만 써레 파종 등은 이 시기를 놓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추운 봄날 한족 등 기타 민족들이 기피하는 춘경은 조선족 기술원들이 맨 발로 논밭에 들어가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1963년에 고무장화가 나와서야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었다. 장기적이고 무상으로 이루어진 기술지원은 조선족과 주변 기타 민족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였다. 벼농사 기술교류, 수리시설의 공동운영, 물 자원 조절 등 수리시스템을 통한 지역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고 상호 신뢰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국가의 민족평등정책과 서민차원에서의 벼농사를 통한 상호교류, 상호의존관계가 있었으므로 하여 조선족들은 타 민족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모범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조선족 문화는 벼농사를 기초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풍부하게 수용하여 융합하면서 발전시켜왔다. 조선족 인구의 대규모적인 이동과 함께 대다수 사람들이 벼농사를 그만두었으며 조선족사회도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 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벼문화를 기본 특징으로 하는 조선족사회의 공동성은 사람들의 이동과 산업화에 따라 소실되지 않았다. 이는 지연네트워크에 의한 인간관계중시와 집단적 모임을 중시하는 문화로서 사람들은 모임에서의 신체적 교류를 통하여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벼농사 포기로 인한 조선족 사회 해체 위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집체로동으로 인한 구성원사이의 연대감 강화와 공동체로의 융합기능이 약화되면서 조선족 사회가 또다시 1940년대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는냐 하는 우려감도 없지는 않다. 지역네트워크가 중시되지만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에서 여러 지역 지연네트워크를 융합할 수 있는 기능은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족 사회가 장기간 중국문화와 한국문화(한반도문화)사이에서 나는 누가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여 왔다. 과거 중국이라는 울타리안에서는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자체로만 동질성 확인이 가능하였다. 이는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하면서 벼문화에 기초한 지연네트워크를 통하여 문화공동성, 동질성을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지역 한민족과의 접촉이 일상화 되어 있는 글로벌 시대에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이 오히려 어려워졌다. 공동한 언어, 기초음식문화, 예의범절을 공유하면서도 기타 지역 한민족과 동질성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중국국민이면서도 한족 등 기타 민족과 다른 독립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외부로부터의 요인이 강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부적 시각으로 볼 때 조선족 문화가 인구이동과 집단적인 벼농사라는 틀에서 지연적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고, 글로벌 인구이동과 함께 지연적 네트워크를 다시 융합할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음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알맞은 여러 지역 출신 조선족들을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의 창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지행자 2015년 4.1,4.3일자에 첫 게재)
1    국내해방전쟁시기의 조선족사회 댓글:  조회:2736  추천:5  2011-11-08
1. 들어가며   국내해방전쟁시기 중국 조선족사회는 적극적으로 국내혁명에 참가하여 라는 제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중국 국내해방전쟁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배달민족으로서 중국에서의 주인공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공헌이라는 측면에서 대서특필 되여 왔으며 또한 중국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력사로서 조선족사회의 자부심의 근원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배달민족으로서의 조선족사회가 무었때문에 기타 민족들마저 놀랄 정도로 중국 국내해방전쟁에 지대한 열정을 보일수 있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공헌의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무었때문에 조선족 사회의 혁명에 대한 열정의 동기에 대한 연구가 적었다고 말할수 있다. 사실 해방직후 한편으로는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으로의 귀국행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여러 혁명군에로의 가입이 이루어 지는 등 조선족 사회는 여러가지 양상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양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중국 혁명에 대한 공헌 이라는 부분만이 강조되였고 기타 부분에 대하여 조심스레 피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열정을 리해하려면 해방직후 조선족사회가 처한 사회상황에 대한 분석과 리해가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상황 분석도 이미 가능하게 되였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조선족사회가 처한 상황, 내전상태에 처한 국공량당의 조선족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당시 조선족사회의 현황을 분석하려고 한다. 2. 해방후의 조선족사회 위만주국 시기의 집단이주 정책으로 인하여 중국 동북부의 조선족인구는 급속히 늘어나 1945년에는 2,163,115명에 달하였다 . 일본의 패전 항복으로 인해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부는 기나긴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희열을 느끼기도 전에 참혹한 현실이 조선족 앞에 놓여 있게 되였다. 집단이주 등 원인으로 중국으로 이주하게 된 대다수 조선족들은 고향에로의 귀국을 원하였으며 귀국붐이 일어나게 되였다. 특히 해방직후부터 1947년전후에 약85만명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였으며 1951년의 통계시에는 1,068, 893명이 중국 동북부에 남아있게 되였다. 현재의 조선족은 이 100만여명으로부터 발전되여 왔다 고 볼수 있다. 중국 동북부 조선족 인구의 절반이상이 고향으로 귀국한것이다. 이러한 인구의 대 이동은 쉽게 이루어 진 것만은 아니다. 해방후 조선족을 둘러싼 사회환경은 험악이라는 두 글짜로 표현할수가 있다. 위만주국 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동북에서 입쌀을 얻어내기 위하여 조선반도에서 많은 조선족을 집단이주시켰으며 량질의 토지를 한족으로부터 헐값으로 빼았아 조선족에게 임대하여 수전을 경영하게 하였다. 광복후 공유지문제가 첨예한 사회문제로 된 것도 당시의 토지정책으로 기인한 부분이 많았다 .또한 신분차별제도를 실시하여 일본인은 일등국민 조선인은 이등국민 한족 만족은 삼등국민으로 규정하였다. 일부 조선족들이 만주국 정부기관에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기타 민족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였다. 이로 인하여 기타 민족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선이 그다지 우호적이 아니였으며 조선족이 이주하여 왔기에 토지를 빼았겼다는 인식, 조선족은 일본인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였고 중국인은 삼등국민이니까 라는 보복심리가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 해방되였으니 조선족은 당연히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이였으며 조선족을 배척하는 풍조가 사적에서 일어나게 되였다. 이러한 사조와 함께 당시 동북 각지에서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무장한 토비들이 지역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조선족사회가 토비들의 공격대상이 되여 많은 참안을 빚어내게 되였다. 1945년말 시점에서 북만지역의 3분의 2의 현성이 토비들에 의해 장악되였으며 동만지역에도 12,000명정도의 토비들이 활동하였으며 남만지역에서는 통화를 중심으로 토비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동북 전역에 10만명 이상의 토비들이 활동하면서 조선족사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특히 조선족만 공격하는 학살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1945년12월 토비두목 손방우가 국민당에 귀순하면서 일으킨 벌리사건에서 조선족 집거구인 복순거리가 제일 큰 타격을 받았고, 1946년5.16동안참화에서는 하루사이에 수백명의 조선족이 학살당하게 되였으며, 1947년 1월 길림 아라디마을은 토지습격에 재물이 몽땅 수탈당하였다. 해방직후 조선족 사회를 둘러싼 험악한 상황으로 인하여 수확을 눈앞에 두고 가을도 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큰 조선족 마을로, 시내로의 이주가 줄지었으며 이로 인한 도시지역의 조선족의 빈곤화를 초래하게 되였다. 또한 매하구시 승평마을, 할빈시의 추원창마을과 같이 조선족 마을 주민 전체가 타지역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없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사회치안의 악화로 귀국행이 줄지어 일어났지만 조선반도에로의 귀국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제일 편한 교통도구인 철도가 마비상태에 빠졌고 각지에 토비가 욱실하는 가운데 보행 또는 자동차를 리용하여 귀국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경제적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귀국하게 되였다. .  보행으로 귀국하려면 적어도 한달간의 양식을 준비하여야 하고 또한 로비도 어느 정도 준비하여야 했다. 또한 준비가 되였다고 하더라도 귀국할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필자의 1세대에 대한 인터뷰조사에 의하면 한 가정에서는 세번이나 귀국을 시도했으나 번마다 중도에서 양식을 뺴앗기게 되여 중국에 물러 앉을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귀국할수 없는 조선족들은 부득불 현지의 형세에 따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으로 이사하거나 그 자리에 물러앉을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남은 조선족은 대체로 귀국하여도 생활기반이 없는 빈곤층을 중심으로 생활기반이 중국에 있는 사람들이나 자식을 기다리느라 떠날수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 귀국하기 힘들고 부득불 중국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조선족들은 동북아 지역 형세의 급격한 변화를 이겨나가지 않으면 않되였다 조선반도에서 소련과 미국이 38선을 경계로 군사점령하여 남북분단이 가속화 되고 중국 동북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의 부대가 진입하여 분단상태에 처하게 된것이다. 서로 다른 두가지 체제가 진입되고 있는 가운데 각종 정치세력 들이 란립하게 되였으며 이는 조선족 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령 같은 조선족 조직이라 할지라도 국공 량당의 세력이 빈번이 교차되는 지역에서는 부득불 공산당이 오면 조선인동맹 간판을, 국민당이 오면 한인회 간판을 내 걸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일반 조선족들은 서울이냐 평양이냐,국민당이냐 공산당이냐 하는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해방은 각자를 십자로에 내세워 국공량당에 대한 정치적태도를 강요하였다. 조선족은 국공량당의 조선족문제에 대한 태도와 민족내부에로의 반영을 국공량당의 이라는 정세속에서 각자가 자기의 전도를 판단하지 않으면 않되였다 . 국내해방전쟁시기 남아있는 조선족사회에서의 공산당에 대한 옹호와 참군열정은 이러한 시대배경속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조선족정책에서의 선명한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아래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 변화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3.국민당의 조선족정책과 조선족사회 1945년12월 국민당정부는 을 설치하고 조선족을 관리하는 전문기관으로 하였다.국민당정부는 동북의 주권을 인수함과 동시에 한교사무처를 설치하여 조선인을 관리하는 전문기관으로 삼았다. 한교사무소는 국민당 지배지역의 조선족사회 상황을 파악 료해하고 조선족 사회단체를 관리하고 대한민국 림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제안을 접수하는 등 조선족사회에 관한 일체 사무를 처리하였다. 국민당정부는 조선족을 기본적으로 중국 최대의 외국인집단으로 간주하고 중시하였지만 강제적인 구환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워낙 동북 조선족 인구가 많고 이주력사도 길기 때문에 기타 지역과는 다르게 농업지원, 빈민구제 등 정책을 실시하였다. 산해관 이남지역의 조선족을 모집 집중관리하여 조선반도 남부로 귀환시킴과 동시에 동북에서도 조선족 구제의 일환으로 빈민을 모집하여 귀환시키였다. 제1차귀환은 1946년12월에 이루어 지어 2492명이 배로 조선반도 남부로 귀환하였다. 그후 정세의 변화로 귀환작업은 계획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비록 중국에 남아 있는 조선족에 대한 체류를 허용하였지만 조선족 사회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였다. 조선족의 중국 거주에 대하여 고 규정하였다. 주화대표단과 한인회에 조선족사회의 인구변화 등을 보고하게끔 규정하고 각지 지방정부 경찰국과 협조하여 조선족에 대한 보갑제도 호적신고제도를 실시하여 면밀한 통제망을 구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재산을 박탈하는 산업제도를 실시하였다.1946년7월10일 을 공포하고 조선족의 공영사업기구 및 공유재산 조선족 개인이 소지하고 있는 산업을 먼저 접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 이 규정의 집행으로 인해 동북보안장관사령부가차압 몰수한 조선족의 안건이1946년4월3일부터 동년9월30일까지1516건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족의 학교 등 공유재산과 개인사업이 사실상 모두 차압당하게 되였으며 도시에서의 조선족의 생활기반이 송두리채로 흔들리게 되였다. 당시 국민당지배지역 조선족의 87%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6년3월11일에 실시된 제2조에서 고 규정하였다 . 1947년 봄 외교부동북특파원공서에서는 을 발표하여 조선족농민을 보호하였는데 제1조에 고 규정하였다. 1947년4월에는 주화대표단의 요청의 응하여 동북의 조선족 농민에 대하여 당시 화페인 류통권3억원의 농업융자를 하였다. 국민당 정부가 이처럼 조선족 농민을 중시한것은 조선족에 대한 특별한 대우라고 하기보다는 군량확보를 위한 수단이라고 볼수 있다. 동북으로 진출한 국민당군의 대다수가 남방출신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기 떄문에 현지에서 유일하게 수전농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농민을 안정시켜야만 쌀을 확보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는 그후 국민당정부의 조선족농민에 대한 토지정책에서 엿볼수 있다. 1947년2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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