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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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방순애 두번째 시집 서언 / 최흔 댓글:  조회:545  추천:0  2019-04-22
방순애 두번째 시집 서언 / 최흔     필자는 저으기 격동된 심정으로 방순애 두번째시집의 서언을 쓴다. 중국조선족문림에서 첫하이퍼시집 를 출간한지 일년남짓한테 두번째로 을 출간하게 되니 가히 경하할 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령혼이 뼈를 녹이는 노력으로 이룩한 성취이다. 필자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는 탐구이며 새것이며,시인은 초행길만 걷는자이다. 황금률하이퍼시!! 아마 이런 시가 고금중외에 없는것으로 알고있다.그러니까 시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였다고 하겠다. 우리 시에는 3장6구로 된 시조가 있었고 자유시가 있었고 민조시가 있었고 가로세로 시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시 황금률이라는 시가 있다. 황금률이라 는 것이 어떤것인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방시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생명 선률   점 문턱 밟고간 바다의 언어   동해의 물결을 타고 이그러진 얼굴에 시간을 뿌리고 미역을 감던 돌 자연의 소용돌이에서 사랑에 물들어     2. 려명직전   어둠 빛과 리별 짝짓는 금시간 허리띠를 푼 둥근 달자궁 영원히 잦아들지 않는 빈들판의 돌담들           흐느끼는 노을을 잠재우고 지평선에 떳던 소리의 다리를   3. 악수   긴호흡 팔벌리는 심장 쿵당 방아를 찢는 목젖  대야안에서 큰 진주를 걸러내는 하루 귀벽을 후치던 말소리 튕겨나와 파다닥 거리는 가슴팍사이 골짜기에서 경련을 일으키다 주눅들어 울고있는 파란 자존심 바람에 졸린 여운으로 빳빳해지다   시 1에서는 첫행을 한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시2에서는 두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고 시3에서는 석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들은 다 1.2.3.5…의 비율을 지키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방순애의 황금율시는 자유시가 아니고 율시이다. 황금 율에 맞게 시문을 배렬하면서 쓴 시이다. 이것은 방순애시 인만 의 발견이며 창조이다. 우리 시림으로 말하면 하이퍼시가 새로 운 형태로 대두되고 있는데 거기다 황금율이란 새로운 아이디 어를 제안하고 일정한 율에 의하여  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다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금율시는 방순애 시인의 시법이고 방순애시인의 시법은 황금율하이퍼시이다. 한 시인이 한 시법 을 가진다는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경하드릴 일이 라고 하였고 저으기 격동된다고 하였다..   2   시간과 세상은 사라짐과 탄생의 그라프를 그리고있다. 한쪽 으로 태여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은 법칙이라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방순애시인의 황금율하이퍼시가 바로 이런 법칙에 기대여 시를 다루어지고 있다.      아침차 검은 안경을 낀 도시를 꿰뚫어 달린다 자신을 잃는 동안 늘어나는 둥근 시줄 입마다 벌리고 합창하는 이슬꽃들 새의 노래를 두려워할까 얼음도 햇님이 다가오면 굳어진 몸 푸는데 서서히 뻗어가는 세월이파리는 단풍에 물들지않을가 산맥을 타고 대렬을 지은 집들은 빨간 노을 모자를 쓰고 구름은 황금빛을 반죽하여 여기저기 걸어놓아 골짜기 따라 굽이치는 안개는 산촌의 머리를 쓸어준다   시 의 전문이다. 차의 움직임은 에 의하여 밀려나있고 은 >에 의하여 밀려나 있으며 그것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 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왜 이 런가? 한사물에 가리워져있었거나 파묻혀있던 사물들이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튀여나온다. 튀여나온 사물들은 원래있던 사물 들과 이렇게 말한다. 한다. 구불어온 돌이 백인돌을 빼버리는 격이다. 그러면 원사물은 튀여나온 사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실은 밀려나기이며 사라지기다. 다시 말해서 한 이미지가 밀려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고 움직 이고있는 것으로써 무쌍한 변화를 일으킨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의 조화이며 생명체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하이퍼시는 이렇다. 한사물의 이미지가 시의 시종에 관통되는것이 아니라 제약을 받으며 밀려나게 되며 새로운 사물의 이미지가 나타나서 운동하게 된다.  그래서 횡적구성이며 다선구조이다. 그래서 주제가 하나인것이 아니라 다주 제이다. 방순애시인은 주어진 사물을 현실그대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변형시키면서 원초적인것을 파보고있다. , , , , 등등은 다 변형이며 그 변형들은 원초적인것을 파내여보려는 시인의 시각에 의하여 부각된다. 방순애의 황금율하이퍼시는 이질적인 이미지집합으로서 이미저리를 이룬다. 이런 이미저리들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의경(意境)을 이룬다. 그 의경은 시인의 상상의 산물로서 꿈의 재현이고 나름대로 추구하는 자연의 아름답고 황홀한 극치로서 시인의 유토피아이다.   3.   한수의 시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자신의 모양새가 있다. 필자는 그것을 형태이미지라고 에서 밝힌적이 있다. 방순애시인은 에서 시의 형태이미지를 가꾸기 위하여 많은 공력을 들이였다. 가로행의 시도 있을뿐만아니라 세로행의 시도 있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층층계를 련상시키는가 하면  산을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려 명직전, 눈, 차향 등등), 초모자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새의 천국, 쉼터. 운 등등),   공작새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내안에. 가락, 건배 등등)  수양버드나무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 (연, 오랜 세월)…   형태이미지의 다종다양함은 시각의 새로움을 추구한것은 물론이고 시의 새로운 분위기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시의 제목과는 다른 형태이미지가 설정되여서 곰곰히 새겨보면 상큼하고 신선한 맛이 짙다. 이러한 형태이미지들의 조화가 신비롭기만 하다. 방순애시인의 는 새로움의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는 시문림에 새로운 황금빛을 눈부시게 발산하고 있다고 하겠다.                            2014년 10월29-30
12    동일한 제재 동일한 수법 부동한 얼굴 / 최흔 댓글:  조회:349  추천:0  2019-04-15
동일한 제재 동일한 수법 부동한 얼굴 / 최흔   여기 동일한 제재 동일한 수법으로 시를 쓴 동양과 서양의 시인이 있다. 동양의 시인은 중국시인이고 서양의 시인은 스웨덴의 시인이다. 중국의 시인은 한유이고 스웨덴의 시인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이하 트뢰메르로 약칭)이다. 한유는 기원 768ㅡ824년을 살다간 사람이고 트뢰메르는 1931년에 태여난 사람이다. 한유는 중국의 고대의 시인이고 이라는 책을 남기였고 트뢰메르는 13권의 시집이 있다. 한유는 벼슬을 하다가 두번이나 떨어졌다가 재기한 사람이고 트뢰메르는 20011년에 노벨문학상으로 21세기 별로 떠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두 시인이 제재가 같은 시를 썼다는것이다. 아래에 그들이 쓴 시부터 읽어보자.   영스님의 거문고소리를 듣고       한유 속삭이는 련인들의 귀속말인가 사랑사랑 정이 넘쳐 애틋도 하다 한번 긋자 가락소리 우렁차더니 장사가 적진에 돌진하는듯 흩날리는 버들꽃 떠도는 구름이라 드넓은 우주에서 자유로이 날아라. 백천마리 뭇새들이 지저귀는가 갑자기 들려오는 봉황새소리 더는더는 가락이 높아질수 없을 때 구천에서 떨어져 지심에 잦아드네. 어허, 나에게는 두귀가 있어도 음악의 묘리에 캄캄했건만 영스님 거문고 뜯는 소리에 일어나 한옆에 다가가 앉았네. 쭉 밀고 갑자기 줄을 놓으니 쏟아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음률에 조예깊은 저 영스님아 이렇듯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하느뇨.       느린 음악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오늘은 건물을 열지 않는 날. 태양빛이 창유리로 밀려들어 책상표면을 덮힌다. 인간의 운명을 지킬수 있을만큼 튼튼한 책상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 길고 널직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해빛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은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걸음 한걸음 뒷걸음쳐 여기에 와 있다.   한유와 트뢰메르는 다 같은 제재를 다루고있다겠다. 한유는 거문고소리를 듣고있고 트뢰메르는 피아노소리를 듣고있다겠다. 물론 거문고와 피아노는 다른 사물이지만 악기라는 면에서는 동일하다고 할수 있다. 한유와 트뢰메르는 다 같은 시수법을 쓰고있다. 한유도 변형을 중심으로 시를 써내려가고 트뢰메르도 변형을 중심으로 시를 써내려가고 있다. 한유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심상을 떠올리고 트뢰메르는 피아노소리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심상을 떠올린다. 그들이 떠올리는 심상은 직접적인 련계를 가지고 있는 사물들인것이 아니다. 그래서 심상과 심상사이에 거리가 있으며 뛰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다 같은 하이퍼시수법을 쓰고있다. 두 시인의 다른 점도 있다. 한유는 마지막부분에서 나를 떠올리며 심정을 드러내지만  트뢰메르는 마지막에 나를 떠올리기는 하지만 심정을 드러내 지 않고 자기의 심정을 철저히 사물에 의탁하고 있다. 5000년전의 중국의 에 성인은 뜻을 상으로 표현한다고 하였다. 이 자대로 대여보면 한유의 시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여 옥에 티를 가지고 있다고 할수 있고 트뢰메르의 시는 순 옥으로 된 감을 느끼게 된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려는 주요한 의도는 상기한것이 아니다.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형이란 시수법은 서양것인것이 아니라 동양적인것이며 중국적인것이다. 서양의 현대시나 하이퍼시 수법은 서양에서부터 시작된것이 아니라 중국의 아득한 고대에도 있었던것이다. 어쩌면 서양은 중국의것을 부활시켜 화려하게 가꾸고있는지도 모른다. 중국고전을 펼쳐보면 기원 689ㅡ840년으로 살다가 간 맹호연으로부터 변형의 수법도 있고 속성이 다른 사물들 집합이 한수의 시에 나타났음을 볼수 있다. 그후 이런 시수법 이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는것을 알수 있게 된다. 더 깊이 들어가 파보면 중국의 의 문자들이 죄다 변형으로 되였으며 64괘는 두가지 사물들의 화합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국의 일부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쩍하면 우리가 서양을 따르다가 전통을 잃어버렸소 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실은 그들이 전통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할수 밖에 없다.  
인제 모방이 아니라 변형이다 2015 김파시에 대한 단상 최흔                                                                   가 잘하는 같다. 이색적인 시를 출간하기에 류의하고 있다. 2015년의 1기부터 색갈이 다른 김파시를 련재함으로써 이채를 돋구고있다. 남들은 하이퍼시라하면 머리를 돌리는데 만은 여러가지 시형태를 존중하고 백화제방을 하고있으니 말이다. 이번2기에도 김파의 하이퍼시를 7수나 실었다. 7수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필을 들었다.               ************** 계절의 숲에서 봄을 쪼아먹고/ 내 가슴에  보금 튼 사랑에/알속 에는 하늘과 태양/ 옹근 우주를 포개넣었다/ 까낳은것이 자유를 나르고/돛단배 바람따라 파도 가르는/ 갈피에 끼인 시간의 비늘들이 /부서져 반짝이는 소리에/웬 사내가 해일 안고/세월의 잔등우로 걸어올 때/다윈이 여름을 부채질하면서/나에게 진화를 한잔 권한다.                 ㅡ의 전문   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련속적으로 묘사되는것이 아니라 2행이 멀다하게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서 운동한다. 처음에는 사랑새가 태여나서 하늘과 태양과 옹근 우주를 포개넣은 알을 낳는다. 그담에는 자유를 나르는 깃이 나오고, 그담에는 바람을 따라서 파도를 가르는 돛단배가 나오고, 그담에는 파도의 갈피에 끼인 시간의 비늘들이 나오고, 그담에는 해일을 안은 사내애가 세월의 잔등위로 걸어가고, 그담에는 여름을 부채질하는 다윈이 나와서 진화를 한잔 권한다. 2기의 김파시는 이러한 수법이 관통되여있다,가 더 강렬하겠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우리의 적지 않는 사람들은 문학을 모방으로만 보았다. 모방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지만 변형은사물의 형태나 모양을 변화시킨다.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변화시키면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게 된다. 김파시 를 읽으면 문학이 모방으로부터 변형으로 넘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는 제목을 달아본다. 모방과 변형은 완연히 다른 개념이다. 모방은 사물의 재현을 추구하고 변형은 사물의 생성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모방은 어떤 의식의 해설이고 변형은어떤 사물의 생성으로써 사물리면에 가리워졌던 사물을 독자앞에 나타나게 한다. 모방은 의식의 의식적인 산물이고 변형은 무의식의 사물생산이다. 모방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제한을 받지만 변형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이다. 변형과 무의식은 친형제간인것 같다. 변형도 새로운 사물을 낳고 무의식도 새로운 사물을 낳는다. 변형이란 말은 아리스 토텔레스 으로부터 나왔고, 중국의 류협은  사물과 사물을 비긴다고 하였는데 실은 이 말이 변형의 범주에 속하는 말이겠다. 무의식이란 언어는 프로이드로부터 나왔고 변형은 조루즈 뒤메질에 의하여 (69쪽)이 각광을 받은 언어로서 현실문학의 주요한수법으로 되였다고 한다. 사물의 모양이나 형태를 변화 시키는 변형이나, 사물의 생성되는 장소인 무의식은 다가 상징에 도착하려는 것을 종지로 삼는다. 변형이나 무의식은 둘다  을 깨끗이 쓸어버리는것을 전제로 한다. 시인의 상상속에서 모든 윤리는 제로상태 즉 영의 상태여야한다. 김파시인의  에서처럼 언어가 언어를넘어서면서 한사물에 서 그와 성질이  다른 사물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오늘의 주요 한 시작법인 것같다. 그래서 지금의 시는 모방이 아니라 변형 이라고 생각된다.                       2015.5.10.   인제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체이다. 3기 김파시에 대한 단상             짧은 시는 수백년동안 절대 대부분 한수의 시에 하나의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단일체시였다고 할수 있다.. 3기에 실린 김파의 시 를 보노라니 이제 한수의 시에 여러가지 주제를 담은 다양체시가 있다는것을  읽게 된다. 그중 첫 수를 살펴보자   드럼북장단   김파     바위돌 쪼개여 바이올린 선률 뽑아내고 밭이랑 쥐여짜 막걸레 마신다   대지를 침대로하고 산을 베고 하늘을 덮고 잠든다   말씀을 발효시켜 마시면 령혼의 가지에 꽃이 핀다   죽어간 세월을 메스로 가르면 부활된 증조부가 걸어나온다   밤을 달빛에 하얗게 빨아 태양의 바줄에 널면 한낮이 된다   바람을 걷어다 체로 쳐내면 무지개빛갈이 떡가루로 쌓인다.   시는 모두 6개련으로 되였다.시는 일반적인 시와 다르게 종적구성인것이 아니라 횡적구성이다. 각련의 이미지들은 독립성이 있으며 이미지마다 자기의 주제를따로 내포하고있어서 어느 련도 다른 련에 종속되기도 되지  않고 어느 련도 다른 련의 원인으로 되지 않 고 어는 련도 다른 련의 결과로도 되지 않는다.이러한것을 다양체라고 필자는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련은 두가지이미지로 되였고, 그 이미지들은 각각 독립성을 가진다.2 련,서로 련결된 하나의 이미지라고 할수 있고,3,4,5,6련은 한사물이 운동하면 새로운사물이 생성되여 나오는 이미지라고 할수 있다. 파생적인 이러한 의미지들은 그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생성되는 이미지라고 하겠다. 이상스러운 감이 드는 이러한 사물운동이 독자들을 놀라게 하며 떨리게도 한다. 이런 다양체에 대하여 한국의 심상운은 다선구조라고 하였고, 독일의 후고.프리드리히는 파편문체라고 하였고, 프랑스의 질 들뢰즈와펠릭스 가타리는 다양체라고 하였다. 다양체란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구개이상의 련결접속을 말 한다.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다양체란 말은 리좀이란 말과 련계 되는데 일본의 우노 쿠나이치교수의해석에 의하면 . 관심있는 독자라면 한국의 새물결출판사에서 출간한 을 연찬하기 바란다. 20세기까지 우리 시들은 거개가 단일체였다고 할수 있고,21세기 시는 인제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체로 전의되고 있는 같다.다양체의이미지는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와 결이 따로 없다. 기자 결이고 결이자 기다. 이것이 특점이기에 행을 대상으로 한 이미지라면 행 을 마음대로 바꾸어놓아도 되고  련을 대상으로 한이미지라면 련을  마음대로 바꾸어놓아도 문제되지 않을 같다.                             2015.5.15.
0. 들어가며 아르튀르 랭보(Arthur Jean Nicolas Rimbaud·1854~1891). 짧은 37년간의 생애를 지상에 머물다간 천재. 소년의 나이에 시작해서 4년 후에 중단되는 창작활동. 나머지 생애 동안의 문학적으로 완벽한 침묵, 근동지역과 중앙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니며 다 양한 직업에 종사했던 것, 시작한 지 2년만에 원래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이후 이루어질 문학적 전통마저 돌파해 버리고 오늘날까지도 현대시의 원조로 남아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 그 짧은 창작기간 동안의 광적인 발전 속도는 내재된 천재적 광기의 폭발이었으리. 이것이 랭보의 간략하게 뭉뚱그린 객관적 프로필이다.   랭보의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핵심어는 ‘폭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正格 시구로 시작해서 탈격 자유시구로 넘어가며 거기에서 「일루미네이션」과 「지옥에서 보낸 한 철」같은 불규칙적 리듬을 가진 산문시들로 이르게 된다. 랭보의 시는 무엇보다 보들레르의 이론적인 구상들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랭보의 시는 철저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테마들은 서로 간에 간혹 막연하게 연관될 뿐, 과도할 정보로 많은 단절들을 드러낸 채 대개는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시작법의 핵심은 테마와는 거의 상관없이 끓어오르는 흥분이다.   1. 방향상실 1920년 리비에르(J. Riviere)는 랭보의 시에 대해 “그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 라고 논평했다. 랭보의 비실재적 혼돈은 조여드는 현실로부터의 구출 시도였다. 랭보의 시들은 가혹한 타격으로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극도로 마술적인 음률을 자아내는 언어로 이루어진 만큼, 더욱 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랭보는 때로는 초지상적인 축복 속에서 거닐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황홀경에 빠져 빛을 바라면서 저 너머의 세계로부터 도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협화적인 작품은 랭보에 대한 지극히 모순적인 평가를 초래하기도 한다.   2. 견자의 편지-공허한 초월, 비규범성의 추구, 불협화음의 리듬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 도달함’이며, 달리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보들레르로부터 나온 것이며, 공허한 초월을 의미한다. 랭보는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식하여야 할 목표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비일상성, 그리고 비현실성, 전혀 다른 것 등으로 표기되기는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랭보의 시들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그의 시들의 현실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돌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폭발적인 욕구 자체의 방출이며, 그 결과 현실을 탈형상화시켜서 비실재적이긴 하지만 진정한 초월의 표지라고는 할 수 없는 형상들에 도달하게 된다.   랭보의 견자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편지에서 “시인은 미지의 것에 도달한다.비록 자기 자신이 환영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직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꾼들이 나타나서 그 자신이 좌초해버린 저 지평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인 존재는 미지의 곳으로 탈주하여 거기에서 좌절하게 되는 강력한 상상력을 무기로 세계 폭발에 참여하는 일꾼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3. 전통과의 단절 랭보의 시들은 당대와 19세기 초기의 작가들의 영향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선배들의 영향이 아닌 랭보 자신의 목소리 또한 뚜렷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전래의 문학적 자산을 랭보는 과도하게 가열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냉각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빗대어 말하자면, 그에게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니, 원형 불변의 법칙, 만유 인력의 원리 등등의 아주 기본적인 물리학의 원칙들이 지극히 무의미한 셈이다.   랭보의 특성은 그가 읽은 작품에 가하는 강력한 변형, 그리고 전통과의 단절을 원하면서 전통에 대한 증오를 강화시키는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와 시대로부터의 과격한 분리가 철저하게 시행되어 과거로부터 분리라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사적인 것이다. 진정한 연속의식의 소멸, 그리고 그 대신으로 나타난 역사중의와 박물관적인 수집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과거는 19세기의 몇몇 정신적 지도자들에게 반대 방향의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과거를 청산토록 했다. 그의 시구들은 고대가 희화화 되어 언급된다. 신화는 비천한 것과의 결합에 의해 고유의 품위를 상실하고 만다.   4. 현대성과 도회시 현대성에 대한 랭보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물질적인 진보와 과학적인 계몽이란 점에서는 현대성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취한다. 반면 현대성의 가혹함과 암흑성이 차갑고 어두운 시를 쓰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경험을 주는 범주에 있어서만큼은 현대성을 수용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입장에서 랭보의 도회시가 생겨난다. 일를테면 「일루미네이션」 이 그 좋은 본보기 작품이다. 자극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작된 형상들의 시공을 초월한 혼돈은 대도시적인 현대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 주술적으로 작용하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개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으나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있는 직관의 표지이다.   5. 기독교 유산의 강요에 대한 저항, 「지옥에서 보낸 한철」 랭보의 시들은 기독교에의 반란을 시도하긴 하지만 결국 기독교 유산의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에서 오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랭보의 저항은 자신이 맞서고 있는 바로 그 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마는 역설적인 것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에는 그러한 자각이 표현되어 있다.   “이교도의 피가 끊어오른다, 복음은 지나가 버리고, 나는 유럽을 떠나 떠돌며, 풀을 뜯고, 사냥하며, 끓어오르는 금속처럼 독한 즙을 마시리라, 구원받은 자여.” “나는 열망으로 신을 기다리노라……. 나는 결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노래했던 그런 종족에 속했을 뿐” “나는 지옥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유산에 의한 강요를 지옥이라고 하고 있고, 그 해명할 수 없는 정신적 실존의 긴장 앞에 항복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던 시인은 그 미지 세계의 정체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었고, 그 자신이 폭파시켜 버렸던 세계 앞에 침묵하면서, 내면의 죽음을 감내한다. 그에게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은 기독교 유산이었다. 기독교 유산은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다른 모든 지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협소하게 보였다. 모든 현실과 상상 속에 불을 붙여 폭파시킴으로써 랭보는 기독교마저 찢어놓았던 것이다.   6. 인공적 자아-탈인간화 랭보의 시들에서 말을 하는 자아는 「악의 꽃」의 자아와는 달리, 작가의 인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랭보의 자아는 앞에서 언급했던 조작적인 자기 변신, 요컨대 그의 시들의 형상 내용들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바로 상상적 문체의 산물이다. 이 자아는 어떤 가면도 쓸 수 있으며, 모든 존재 방식, 시대와 민족들로 확대될 수도 있다.   랭보는 자신의 정신적 운명을 현대성의 초개인적 상황으로부터 해석한다. “정신의 투쟁은 사나이들의 살육전처럼 잔인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더 깊이 빠져들어감으로써 더 먼 곳을 보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부드러움 속에서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몰락자가 되어야 할 시인의 운명을 옹호한다. 시인은 “이 기이한 고통이 불안정을 초래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을 느껴야 한다.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그래 인간의 갈채로부터, 저속한 추구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날아서…….” 이것은 단순한 강령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 자체가 탈인간화 된다.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고 독백하면서, 청자들의 이목을 붙잡아 둘 한 마디 말도 없이, 시는 그것을 담아줄 어떠한 그릇도 존재하지 않는, 더군다나 상상적으로 구성된 자아조차도 그 주체가 없는 진술 앞에서 비켜가버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7. 극한으로의 몰입 상상의 아득한 영역으로 밀치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점차적으로 랭보 시의 주체 자리에 들어선다. ‘미지의 영역’으로 강제적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그는 보들레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늘빛 심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패배의 심연이며 아울러 “바다와 전설들이 서로 만나는 불의 샘”인 저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득한 곳을 묘사하여 가까운 곳을 부각시키는 이러한 기법은 랭보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식이다. 그것은 점점 더 빨라져서 때로는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이루어 지기도 한다. 흥분은 열광에 도달한다.    “나는 탑과 탑을 밧줄로, 창과 창을 화환으로, 별과 별을 황금의 사슬로 엮었다네, 그래 이제 나는 춤추노라.” 이것은 보들레르의 「일곱 늙은이들」의 마지막 시구에서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목적 없는 자들의 혼란스런 춤이다. 광막함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파괴된다. 파괴되어 흩어지는 맨 마지막 지점에 랭보의 눈물겨운 영혼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상처 없는영혼이 어딘들 있으랴!   8. 취한 배 「취한 배」는 랭보의 시 중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시 속에 나타나는 이국의 바다와 지방은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다. 시는 그 어떠한 실제 사실들과도 연관을 맺지 않는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상력은 드넓게 소용돌이치며 확장되는 비실재적 공간들의 열광에 찬 환영을 만들어낸다.   사건의 진행자는 한 척의 배이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명백한 사실은 사건의 경과와 동시에 시의 주체의 진행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상 내용들에는 매우 격렬한 힘이 부여되어 있어서 배와 인간 사이의 상징적인 동일화의 전체의 운동성을 고려할 때만 가능하다.   ‘취한 배’는 유례없는 팽창 활동이다. 일시적인 머뭇거림들이 삽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에 팽창은 다시 격렬하게 진행되며, 몇군데에서는 혼돈의 폭발에 다다른다. 폭발은 문장 구성에서가 아니라 관념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념들 자체는 시연에서 시연에 걸쳐서뿐 아니라, 시행에서 시행에 걸쳐, 심지어 한 시행 안에서 요원한 것과 거친 것, 아니 거침과 요원함 위에 쌓아올리는 상상력의 홍염들이다.   9. 파괴된 현실성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태도와 ‘미지의 것’은 그 공허함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 충격을 가하는-보들레르의 경우보다 더욱 강력한-긴장의 극이다. 현실은 그 불충분성으로 인해 공허한 초월과 대비되어 경험되기 때문에, 초월을 향한 열정은 현실성에 대한 무목적적인 파괴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파괴된 현실성은 이제 현실 전체의 불충분성과 아울러 ‘미지의 것’으로의 도달 불가능성에 대한 혼돈의 표지가 된다.   랭보 시에 나타나는 구체적 세계의 원소들에는 물과 바람이 포함된다. 이 원소들은 초기 시들에서는 통제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노호와 폭풍우, 대홍수의 무시무시한 힘이 되어 솟아오르고, 이 좌중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들은 파괴되며, “평원, 황야, 수평선은 뇌우의 붉은 옷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대상들과 사물들을 총괄해보면 그가 얼마나 불안정하게 더 넓고, 더 높고, 더 깊게 팔다리를 뻗으며,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10. 추화 추는 랭보가 그의 시구에 내포된 현실의 잔재물에 각인시킨 정신의 집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미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에는 형상에서는 아니면 언어의 가락에 있어서든 정말 ‘아름다운’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이것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추한’ 구절들과 인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와 추는 대립적인 가치들이 아니라 자극의 변이체들이다. 이들 사이의 객관적 차이는 진실과 허위의 차이처럼 제거된다. 미와 추의 밀접한 접근은 모든 요소들을 좌우하는 대비의 역동성을 산출한다. 이러한 대비의 역동성은 그러나 추 자체로부터도 산출될 수 있다.   11. 감각의 초현실성 직관 가능한 형상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으며, 언어에 내재한 은유의 근원적인 힘들로 인해 예전부터 시의 특권이었던 무한 자유를 넘나든다. ‘거리의 두 번 구운 과자’, ‘자신의 배위에 서 있는 왕’, ‘하늘빛의 콧물’. 이러한 형상들은 현실 자체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때로는 더욱 예리하게 드러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 기본 방향은 현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의 역동성에 있다. 이는 형상 경계들을 혼란시키고 극단적인 것들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현실성 자체를 감각적으로 자극받고 자극하는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2. 전제적 상상력 전제적 상상력은 인지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무제한의 창조적인 자유로서 작용한다. 자신의 내용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창출하려는 주체의 명령에 따라 현실 세계는 조각이 난다. 전제적 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예를 들면, 마차들은 하늘 위에서 달린다. 호수의 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대양이 출렁거린다. 철도 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 위로 달린다. 그러나 상상력은 또한  인간과 사물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결려 있다”. 상상력은 가장 연관이 먼 것, 구체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강제로 결합시킨다. “아침 우유의 중얼거림, 지난 세기 밤의 중얼거림 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상상력은 실제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더 낯설게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한다. 랭보는 불온한 세상을 이렇듯 행복을 살다 그렇게 불행하게 간 것이다.   13. 일루미네이션 제목부터가 ‘염색’과 ‘조명’을 암시하는 등 특기할 만큼 다의적이다. 작품의 내용 해석이 불가능하다. 수수께끼같은 형상들과 사건들이 지나간다. 어조는 도취와 냉혹한 단절, 단조롭게 제기되는 반복과 근거없는 말의 연결들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 방출의 뇌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진원지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게다가 이 시는 자아가 없는 텍스트이다. 왜냐하면 몇몇 작품에서 등장하는 자아는 견자의 편지에서 구상되었던 바의 저 인공적이고 낯선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 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14. 혼효의 기법 랭보는 이제 형식 언어마저도 그의 해체적인 상상력에 부합시킨다. 그래서 그는 형식 언어를 그의 산문시와 매우 유사한 비대칭적 시구 형태로 바꾸어버린다. 이로써 랭보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보들레르를 넘어서는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은빛 그리고 구리빛 마차들 강철의 그리고 은빛의 뱃머리가 거품을 때리고, 가시덤불의 그루터기를 일으켜 세운다. 황야의 강들, 그리고 거대한 썰물의 흔적이 선회하면서 동쪽을 향하여, 숲의 기둥을 향하여, 부두의 방파제를 향하여 줄지어 지나간다. 그 모서리에 빛의 소용돌이가 부딪친다.   -「바다풍경」, 전문   이 시에는 두 가지 영역이 등장한다. 바다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그러나 이 두 영역은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 뒤섞여 나타나고, 모든 일상적 구분이 제거됨으로써 서로 교차되고 잇다. 바다 풍경은 또한 동시에 육지 풍경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 시는 개별적인 단어군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동사들이 두 영역을 한꺼번에 지칭함으로써, 이러한 추측 가능한 발상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은유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은유가 아니라 상이한 사물들의 절대적인 동일시이다. 더 나아가서 텍스트는 바다가 아니라 거품과 썰물에 대해서, 배가 아니라 뱃머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 대신에 부분들을 지칭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기법은 랭보에게서 더욱 확연하게 들어난다. 거의 언제나 사물의 부분들만을 지칭하면서 그는 파괴를 끌어들이고,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차분하고 간결한 짧은 시는 프랑스에서 자유시구의 결정적인 일보 전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탈현실화와 감각적 비실재성의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현대적인 혼효기법을 보여주는 첫번째 범례이다.   15. 추상시 「일루미네이션」의 전제적인 상상력은 부조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대홍수 이후」를 그 예로 들어 보자. 클로버밭의 토끼 한 마리가 거미줄을 통하여 그의 기도를 무지개에게 말한다. 마님은 피아노를 알프스 산에 세워 놓는다……. 상상력은 ‘술 던 깬 아침’에서와 같이 현란한 이미지 조작들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추상이라는 핵심어로 의도했던 것이다. 이 핵심어는 선과 움직임이 탈사물화한(추상적인) 직조물이 되어 형상들 위에 위치하고 잇는 랭보의 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물들은 순수한 움직임과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단순화 된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비실재적이지만, 종결부의 절멸에 의해 그것은 더욱 더 비실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랭보는 털끝만큼의 열정도 없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초기시들을 낯섦으로 몰아넣었던 저항적인 탈주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낯섦 그 안에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16. 독백시 1871년 이래로 랭보의 시는 점차로 독백이 된다. 문장들은 서로 간에 더욱 밀착되고, 에피세트들은 더욱 과감하게 생략되며, 기이한 단어군들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의 독백적인 모호함은 되는 대로 쏟아낸 배설물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따른 예술성의 산물이며, ‘미지’를 향한 채울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기지의 것을 파헤지고 낯설게 만드는 방식만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시의 산물이다.   랭보는 후기의 한 글에서 회고하며 “나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기록했고, 소용돌이를 움켜쥐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몇 페이지 뒤에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서로 배치되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랭보의 모호한 시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아직 진술되지 않은 것의 모호함, 그리고 더 이상 진술할 수 없는 것의 모호함, 이 둘은 침묵의 경계선에 인접하고 있다. 천재가 천재임이 확인되기 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17. 동역학과 언어마술 랭보 시의 긴장의 직조물은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의 에너지로부터 성립된다. 이때 음악과의 유사성은 그 음향 형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강도로 진행되는 음조, 상승과 하강의 절대운동, 집적과 방출의 교체라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부터 모호하고, 마치 허공에 말을 건네는 듯한 랭보 시의 고유한 매력이 시작된다.   그러한 동역학의 진행 방식은 산문시 「신비주의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활기찬 움직임, 그후 텍스트의 중간 지점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상승, 여기서부터는 진동하다가 정지되면서 침강하는 폭넓은 만곡선, 그러다가 앞의 문장과 분리된 ‘저 밑에서’라는 짧은 말의 만곡선을 갑작스럽게 급강하시킴으로써 종착점에 도달한다.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들이 시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이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랭보는 ‘말의 연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모든 자음들의 형상과 운동에 염두를 두었고, 언어에 내재된 리듬을 사용하여 조만간에 모든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 시적인 시원어를 창안하려고 생각했다.”   랭보의 마지막 작품에 들어있는 이러한 문장들은 그 어떤 극복된 단계를 암시하려고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작품 속에서도 언어 마술적인 창작 방식을 다양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시 편편들마다 그것을 소리내어 읽게 되면 모음들의 음영, 자음들 사이의 친화력이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음향 자체의 의지가 너무도 지배적이 되어서 시구나 문장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부조리하나마 그 어떤 의미만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도 더욱 명백하게 입증된다.   0. 나오며 랭보의 위대함은 ‘미지의 것’ 앞에서 좌절한 고로, ‘미지의 것’에 대신하여 불러내었던 혼돈을 불가사의한 완벽의 언어로 전이시키는데 있다. 이른바 예술적 승화로 현실과의 불화를 극복한 것이다. 그는 보들레르처럼 용기 있게 미래를 예지하면서 그 자신이 천명했던 바대로, 또한 그의 세기의 운명이었던 ‘처절한 정신의 투쟁’을 수행했다.   세계와 자아를 동시에 탈형상화시키는 그의 시가 스스로를 파괴시키기 시작하는 경계에 도달했을 때, 이제 19살의 랭보는 지조 있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침묵 또한 시인 존재로서의 행위이다. 종래의 시 안에서의 극단적인 자유는 이제 시로부터의 자유가 되었다. 랭보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었던 많은 후대인들은 요컨대 침묵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도 있었을 터이다.   [출처] [스크랩 ] 아름답게 미친 천재, 이미지로 조합하면 見者? - A. 랭보 / 글쓴이(mathmania)|작성자 옥토끼  
9    동시 "첫눈"에 대한 평론 묶음 댓글:  조회:760  추천:5  2017-10-14
동시 "첫눈"에 대한 평론 묶음 과 다차원  한설매                                                                                       하이퍼 동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벌써 첫 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하이퍼 동시를 배우면서 동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되였다. 그것은 동시는 전통동시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동시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퍼동시도 있다는 깨침이였다. 며칠전 우연히 읽어보게된 권오삼의 “꾸준히 실험시를 써보라” 문장 중에 “내가 쓴 시 중에도 순전히 내 문학적 욕심으로 쓴게 있어요. 실험시라고 할수 있는건데 독자를 위해 쓴게 아니라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서 쓴거지요. 성인시에서는 실험시가 많이 나오잖아요. 동시도 필요하다고 봐요.” 라는 구절이 있다. 정말 큰 계발을 주는 말이다. 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상적으로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란다. 쓴단다. 독자를 위하지않고 동시문학을 위한다는 말의 차이는 엄청 큰것 같다. 독자를 위해쓴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문학을 한다는 말이고 남을 교육하기 위해 쓴다는 말일 것이고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 쓴다는 것은 문학을 예술로 생각하고 심미관념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우리가 쓰고 있는 하이퍼 동시는 어떤것인가? 먼저 하이퍼 시란 무엇인가 알아보자. 하이퍼 시란 무의식으로 쓴 시이다. 무의식으로 쓰게 되면 차원이 다른 이미지가 술술 나오게 된다. 이미지들이 차원이 다르기에 원인과 결과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가 독립성을 띠고, 련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게 된다. 그리하여 한수의 시에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종적구성의 시인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여러개의 이미지로 구성된 횡적구성으로 된 시가 태여나게 된다.   아래에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 문학상 동시상 수상한 황희숙 동시을 보자     떨어진다 쬐꼬만 은빛 보석이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의 전문이다. 전형적인 하이퍼 동시이다. 첫째: 동시 “첫눈”은 다차원구조이다. 매련마다 다른 이미지들 움직임이 다. 1련, 2련, 3련서로 련관성이 없는 사물이 한수의 시를 구성하였다. 둘째: 횡적 배렬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매련마다 서로 순서를 바꾸어 놓아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로 구성되던 종적구성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이다. 셋째: 하이퍼시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인 링크 도 있다.   다시 더 자세하게 하나하나 살펴보자   1련에서 여기서 작자는 첫눈 오는 날 빤짝이며 떨어지는 눈꽃을 은빛 보석에 비유하고 있다. 매번 첫눈이 내릴 때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다 그 깨끗하고 아름다은 눈꽃에 마음을 빼앗기군 한다. 길가에서 첫눈이 내릴 때 두 손을 들고 눈을 귀중한 보석이라도 받아 가질 듯 서로 앞다투어 달려가 떨어지는 눈꽃을 받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눈처럼 깨끗하고 맑은 어린아이들의 마음도 눈꽃이 되여 반짝이는것 같다. 2련에서  그물이라면 실이나 노끈, 철사 따위로 구멍이 나게 얽은 물건이다. 여기서 작자는 말하는 은 무엇일가? 정말 우리가 흔히 보는 무언가 잡기 위해 무언가 묶기 위해 만든 그물일가? 아니다 작가기 말하는 그물은 은어이다. 작자는 첫눈이 내릴 때 산에 들에 길......등 대지에 눈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마치 온 대지 전체가 그물이 되여 내리는 눈을 받는다고 상상하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먼 하늘에서 내리는 이 아파할가 대지가 그물이 되여 살짝 받아 안는다고 상상해보니 마치 엄마가 달려오는 아이가 넘어질가 두팔 벌려 안아주는것 같다. 정말 따뜻한 마음이 담긴 변형이다. 작자의 사유는 누구든지 정확하게 맞추기 어렵다. 필자만의 생각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착상이다. 추은 겨울날 눈내리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표현할수 있다는 것은 동시인만이 갖고있는 동심적 상상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3련에서 . 작자는 정말 대단한 발견을 하였다.  땅거미는 언어적 해석을 하면 해가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의 어스름 할 때를 말한다. 그럼 이건 시간적 환경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땅거미는 입도 다리도 몸둥이도 따로 없다. 작자는 를입도 있고 발도 있는 우리 주위에 흔히 볼수 있는 거미로변형시켰다. 그럼 반찬은 무엇을 말하는걸가? 거미는 메뚜기, 나비, 모기,파리등 곤충을 잡아먹고 산다. 그럼 땅은 거미가 친 거미줄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거미가 줄에 걸린 메뚜기, 나비 모기, 파리 등 먹이감인것이다. 필자는 눈꽃이 땅에 떨어져 녹아 사라지는 순간을 땅거미가 먹어버렸다고 상상한것이다. 즉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먹이감을 먹어치운것과 같은 말이되겠다.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혹자는 눈이 어떻게 반찬이 되는가고 의문스러워 할수도 있다. 언어의 자유결합 기능에 의하여 산생된 이란 말이 처음으로 동시에 올랐으니깐. 언어의 기능에 의하여 산생되는 새로운 조어가 맞는가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조금은 언어 수양이 약한 표현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의 작자들은 이런 현상이 이라고 하였다. ( 천개의 고원 784쪽)   동시 에서 매련마다 링크 작용을 하는 “떨어진다”는 동적 이미지로서 독자들에게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구수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황희숙 동시 “첫눈”은 다차원 기능을 적용한 동시이다.  도표로 그려본다면 즉 문학적으로 말하면 “첫눈”에서 , , 등 성질이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므로 다차원을 형성하고있다. 다차원이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다양함을 말한다. 우리는 다차원속에 살고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수림이라고 하면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돌도 있고, 시내물도 있다. 이것이 자연의 다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더 말하자면 우리 집안에는 걸상도 있고, 책장도 있고, 밥상도 있고, 텔레비죤도 있고, 핸드폰... 등 있다. 우리 이 모든 사물과 긴밀하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한가지라도 없으면 더 불편할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동시들은 자연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속 모든 사물들은 땅우에 공존하고있다. 즉 땅이란 한 선에 놓여져있다. 나무있기 때문에 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돌이 있기 때문에 시내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 평등한 선우에 있다. 이것이 다차원이자 하이퍼이다. 그러니 우리 쓰는 한수의 동시에 많은 이미지들 (이미지들은 자연과 우리 주위 사물에서 오는것이다.) 이 공존할수 있다. 아래에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3회 윤동주 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김봉순 동시 “양배추”를 보자   해살을 꽁꽁 싸먹는다   바람을 꽁꽁 싸먹는다   새소리 꽁꽁 싸먹는다   어느새 동글동글 배 뚱뚱이 됐네   “양배추”의 전문이다. 양배추는 우리 일상생활에 먹는 일종의 채소이다. 시장에 가면 사시장철 흔하게 보고 먹는 채소가 작자의 손에 의하여 깜직하고 귀여운 동시로 다시 탄생하였다. 동시 “양배추” 전반시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공력을 들이였다.   1련: . 여기서 해살은 해에서 뿜겨나오는 빛을 말한다. 볼수 있고 느낄수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다. 이런 해살을 양배추 이파리가 겹쳐있는 특성을 살려 해살을 싸먹는다고 하였다. 이련을 읽어보면서 필자는 따뜻한 해살을 먹는 양배추 입은 뜨거웠지 않았을가 하고 걱정도 해보았다. 2련:  바람은 우리가 볼수도 만질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바람으로 인해 다른 사물의 흔들림에서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느낄수 있다. 작자의 필끝에서 바람도 양배추가 꽁꽁 싸서 먹을수 있는 반찬으로 되였다. 바람맛은 무슨 맛일가? 양배추만 알고 있을 것이다. 3련:  새소리는 새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작자는 청각적 현상을 시각화하여 우리한테 보여주었다. 4련:  마지막 련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의 3개련의 종결이라고 생각하고이 시는 현대동시고 하이퍼 동시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하이퍼 동시를 쓸줄 아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말을 하지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는 3개련이 종결도 되고 독립적 이미지도 되기 때문이다. 4련을 어떠한 위치에 놓아도 이 동시는 어색하지 않다. 하이퍼 동시의 횡적배렬 특성에 맞으니깐. 다시 말하면 동시 를 1련,2련,3련.4련 순서로 배렬할수 있고, 4련,1련, 2련,3련 순서로도 배렬할수 있다. 또 4련,2련.련 1련, 혹 2련,3련,1련,4련,  3련,1련,2련,4련 이렇게 배렬하여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동시에서 작자는 손도 발도 눈도 입도 없는 채소 양배추를 배 뚱뚱이로 이인화 하였다. 필자는 이 동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흔히 먹는 보쌈이 떠올랐다. 보쌈집에 가서 보쌈을 먹을 때면 쌈을 싸먹을 소고기, 삼겹살, 족발 그리고 마늘 고추, 양념장... 등 다양한 반찬들이 밥상에 오른다.그럼 여기서 은 소고기이고 , 은 고기 먹을 때 같이 먹는 마늘 고추이고, 맛을 더 해 주는 양념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확한 해설은 작자만이 알것이다. 너무나도 귀여운 동시이다. 가 . , 를 꽁꽁 싸서 먹는 모습이 마치 배뚱뚱한 아이가 소고기 쌈에 마늘도 놓고 양념장도 넣어 야무지게 쌈을 싸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동시 “양배추”에서 1련 . 2련 , 3련 , 4련 는 어느 한 이미지도 직접 련계를 가지고 있지않고 어느 한 사물도 다른 사물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매련의 이미지들은 독립성을 가지고있다. 이 독립성을 가진 이미지들이 한수의 시를구성하였다. 다시 말해서 다차원 기능을 적용한 동시이다. 도표로 그려보다면   이것이 바로 하이퍼동시의 핵심인 이미지와 이미지사이가 단절되여 있고 서로 련계성이 없다는 특성을 구비한 하이퍼 동시다.     우에 두수의 동시를 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쓴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나모양, 성질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물로 만들었다. 어떤 규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물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 ㅡ 아무런 제한성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으로 부각된 표현들이다. 두수의 시를 학습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성인시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동시도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하지 않을가. 한 격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되지 않을가. 꾸준히 새로운 실험시를 써보는것이 좋지 않을가. 선자리 걸음을 하면 안되지 않을가. 우리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가.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가 배우면서 실험하고  있는 동시 ㅡ 하이퍼 동시가 꾸준히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된다.                                                       2017년 9월 20일 하이퍼동시 에 대한 단상                     윤옥자                      황희숙 동시인의 에 대하여 말해 보고저 필을 들었다. 우선 그의 이 어떤시인지 읽어보자         첫눈   황희숙   떨어 진다 쬐꼼한 은빛 보석이   떨어 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 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제목이이니깐 시인은을 맞는 기쁨으로 에 대한 시야를 남달리 한것 같다. 이 시를 보면 제목이 인데 시문에는 첫눈이란 말이 없다 이 떨어진다 하였고 이라 했다. 시인은 떨어지는 을 보면서 상상을 뛰여넘어 환상속에서 이질적인 이미지 을 보았다.      쟈크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라고 했다. 이 어록을 살펴보면 사물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 질때 재현의 여러통로란 다선이란 뜻으로 풀이되고 무의식 공간에서 생소한 이미지로 된 사물 즉 리좀이 만들어 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 무엇인가 빠져나가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들리지 않는 이것이 응사라 했는데 이런 응시가 하이퍼시가 아닌가 싶다. 하이퍼시에서 리좀으로 된 이미지는 무의식 공간에서 환상속을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갈래로 접속될수 있는 복잡한 련관성의 지도를 만들어 가는, 깨여지고, 부서지며 재생하는 것으로 령토화 되고 재령토화 되며 절편된다. 또 숨겨져있는 그 무엇이 많고도 많다. 쟈크라캉은 또 라고 했다. 응시가 왜곡된 상이란 말은 변형된 사물이란 말이다, 하이퍼시가 환상속에서 얻어지는 허상도 응시라 할수있다. 응시는 하이퍼시고 하이퍼시는 판도라 상자라 말하고싶다. 쟈크 라캉의 어록에서 라 했는데 우의 시에서 시각을 통해 을 보았고 재현의 여러통로란 상상을 뛰여넘은 환상속에서 이미지로 된 이 배열 되였으며 빠져나가고 사라진다 했는데 자리에 이 자리를 차지하고 이 빠져 나가고 자리를 또 그물이 차지하고 은빛 보석은 빠져 나가고 이렇게 단계별로 전달 되였다.  시 첫련에 쬐꼼한  라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황홀하게 빛나는이 떨어지는 것으로 이미지화 했다. 이은 시인의 의도된 생각이 아니다. 무의식 공간에서 상상으로 얻어진 이미지며 리좀이며 령토다 여기에서 이미지란 탈과념 된 사물을 말하는데 그것이  은빛 보석이다. 이 은빛보석이 바로 하나의 응시라고 할수 있겠다. 리좀이란 끊임없이 련결되고 도약하며 일탈하는 련쇄라 했다. 리좀자리에 있는 은빛 보석은 돌과도 련결될수 있고 꽃과도 련결되였다가 도약하여 일탈하는 련쇄이다. 령토란 련결되였다가 도약하며 차지한 자리를 말한다.   두번째 련에서는  이번에는 그물로 이미지화 했다.  삼련에서는  라 한다. 시인은 시를 쓸때 몇십분의 일초, 몇백분의 일초의 것을 쓴다고 한다. 많이 오지 않는 첫눈이 녹으면서 어둠이 깃들때 시인은 어둠속에 사라지는 눈을 보고 환상속에서 땅거미 반찬으로 이미지화 했다. 시는 이미지로 말하고 이미지의 움직임으로 보여 준다 했다. 쟈크 라캉이 말했듯이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게 되는 경험이겠다. 시인은 을 응시하면서환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고 훌륭한 하이퍼 동시 을 썼다 .   깜찍한 아이들 언어로  횡적구성으로 되여있다. 횡적구성이란 한수의 시에서 성질이 다른 이미지가 함께 생성되여있는것을 말한다. 이란 시에는 도있고 도 있고도 있다.이런 것들은 모두 성질이 다른 것들인데 한수의 에서 공생한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련과 련을 바꾸어 놓아도 될수있고 독자가 참여하여 더 내리 써도 무방하다.  이런식으로 말이다. 시인은, 쟈크 라캉이 말했듯이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는 떨어지는  첫눈을 보면서 환상속에서 이란 사물을 떠 올리게 되였다. 은 에 의하여 빠져 나가고 사라지였다. 은 다음련에 의하여 산생된 에 의하여 빠져나가 사라지고 만 남았다. 은 또 에 의하여 빠져 나가고 사라지였고 만남았다. 은 을 대체 하였고 은 을 대체하였고 은 을 대체 하였다. 마치 파도가 솟구쳤다가 물앉고 하는 것처럼, 산봉우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 또 각 련마다 같은 말이 있을 때는 링크로 되고 없을 때는 초링크로 되는데 이 시에서는 각 련마다 가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링크로된 하이퍼동시에 해당된다   이상 에 대한 단상을 마친다.                               2017.    9.  21.                         다선적인 동시 “첫눈” 에 대한 단평                                                                 강려     필자는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도 모르고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황희숙선생님의 동시 “첫눈”에 대한 필자만의 단평을 감히 몇자 적어본다. “떨어진다 /쬐꼬한 / 은빛 보석이 // 떨어진다 / 커다란 / 그물에 // 떨어진다 / 땅거미 / 반찬으로 // ” 이번 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황선생님의 “첫눈’의 전문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속에 “은빛 보석”, “커다란 그물” “땅거미의 반찬” 등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함께 공존한다고 하겠다 . 즉 동시가 단선이 아닌 다선으로 되여있는 실험적인 동시라 하겠다. 그럼 단선은 무엇이고 다선이란 무엇인가? 단선이란 줄이 한가닥 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 즉 외줄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다선이란  줄이 여러가닥이란 말이라 하겠다. “숙제 기계, 오 숙제 기계 / 여태껏 본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한 발명품 / 숙제를 넣고 은화 하나를 집어넣으세요 / 그러곤 스위치를 탁 누르면 단 십 초 안에 / 숙제가 끝나서 나옵니다 대단히 빠르고 말끔하게 / 자, 여기 나왔습니다 9 더하기 4의 답은 3입니다 / 3이라고? / 어이쿠 / 생각했던 것만큼 / 완전한 건 아닌 모양이군 //” 미국의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시인, 음악가로 폭넓은 예술활동을 했다는 쉘 실버스타인의 단선적인 동시 ”숙제기계” 전문인데 전반동시가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다. 즉 숙제기계가 대신해준 수학숙제의 답이 틀리게 나왔다는 것만 쓰고 있다.  즉 단선구조인것이다 근데 “첫눈”은 “숙제기계” 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갖고 쓰는 종적구성이 아닌 여러개의 이미지로 구성된 횡적구성으로 된 동시라 하겠다 . 1련에서 시적화자는 첫눈이 “은빛보석”으로 떨어지고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누가 떨군 은빛보석일까는 어린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고 하겠다 . 2련에서 시적화자는 그물에 떨어지는 첫눈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즉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아이가 상할가봐 산 들 길 나무 등이 이쁜 그물이 되여 떨어지는 첫눈을 받아준다는 사랑의 그림이라 하겠다. 3련에서 시적화자는 땅거미의 반찬으로 떨어지는 첫눈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어쩜 어둠이 맨 이밥만 먹는게 안쓰러워 구름이 소고기반찬이며 달알채며  준다는 따뜻한 그림이라 하겠다 필자는 1련, 2련, 3련이 차원이 다른 이미지로 씌여졌기에 련과 련을 서로 바꿔도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작과 끝이 따로 없기에 읽는 독자가 더 써내려갈수도 있는것이다. 종적구성이 아닌 횡적구성으로 된 동시이니까 총적으로 황쌤의 동시 “첫눈”은 동심의 크레용이라 할수있는  “은빛보석 “  “그물’’ 반찬”으로 첫눈 오는 날의 정경을 3장의 이쁜 그림으로 우리한테 펼쳐보여주고 있다. 시적화자는 혼자가 아닌 어울림의 미학을 깨닫고 있다. 복잡한듯 매련마다 링크인 “떨어진다” 는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단순한 연결을 하고 있어 어린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언젠가 한국 권오삼동시인님의 “여러빛갈의 동시 읽기”란 평론에   라는 단락을 읽은적 있다 . 그러면  황선생님의 동시 “첫눈”은 동심의 눈높이에서 어린 독자를 배려하고 쓴 우리한테 본보기를 보여준 그 여러빛갈의 동시들중의 가히 실험동시라 할수있는 다선적인 동시라고 본다 필자는 황희숙선생님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한다.   2017-09-22 도주하는          김봉순     문학창작이란 새로운 예술작품을 쓰는것인 만큼 하이퍼시 10대 촉구중 도주를 갖고 하이퍼동시 “첫눈”에 대한 짧은 소견을 말해보려 한다 하이퍼시 창작론 84페지엔 “ 하이퍼시는 고정이 아니라 도주를 촉구한다. 시간은 도 주를 하고있다…사람도 도주 하고 식물도 도주하고 … 시간의 도주를 따라 모든 사물 들도 따라서 도주한다. 도주를 통하여 ” (210페지)…”라는 단락이 있다 도주란 피하거나 쫓기여 달아난다는것인데 그러면 시적인 도주는 어떤것일가 ? 하나 의 물질에서 그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사물들의 도주로 하여 하이퍼시가 태여난다고 할수 있다. 도주는 행과 행사이 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련과 련사이에서도 벌어지기도 하고 한행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아래 시로서 설명해보자.   떨어진다 쬐고만 은빛 보석이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진다 당거미 반찬으로   동북아 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 수상한 황희숙 동시 의 전문이다. 이 동시는 전형적인 하이퍼동시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매 련마다 사물들이 얼굴을 내 밀었다가 사라지는 경상이다.  한마디로 귀여운 도주이다. 첫눈이 1련에서   으로, 2련에서 로, 3련에서 도주하였다. 이들은 서로 아무런 인연도 련계도 없다.이렇게 련계도 안되는 물질들의 움직임의 련속을 도주라 한다. 이 도주는 련과 련사이에서의 도주라고 할수 있다.   도주를 나누는 기준은 내용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는 세가지 내용으로 도주했다. 도주가 형성되는 경우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실에서 초월로 도약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에서 초월로 이어지는 경우라 하겠다. 의 경우는 련과 련사이에서 초월에서 초월로 이어지는 경우라 할수 있다. 하이퍼시는 여러번의 도주를 집성하여 시를 만들게 되는데 모든 도주는  동시 에서   , , 처럼 새로운 사물을 낳게 된다. 도주는 운동이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는 운동이다. 하이퍼시는 모순속에서 새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항상 새로운 모순이 나타나는것은 도주의 조건이고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것은 도주의 완성이며 결실이다. 완성과 결실은 또다시 새로운 도주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도주는 끝이 없다. 에서의 , , 은 앞의 사물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련계도 없이 자유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자유로운 등장이 바로 도주의 표징이며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뛰여가기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떠한 기준도 없다. 동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자유롭고 귀여운 도주만이 있을뿐이다. 또한 도주에는 링크(련결)가 알리는 도주와 링크가 알리지 않는 도주가 있다. 에서는 링크가 알리는 도주이다.     아래에  더 자세히 이 동시를 살펴보자.   떨어진다 쬐꼬만  은빛 보석이   1련에서 눈꽃을 은빛 보석이라고 비유하면서 도주하였다. 눈이 내릴 때 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마치 하늘에서 은빛 보석이 떨어지는것 같다고 한다. 만약 은빛보석이 떨어진다면 얼마나 희한하랴. 아이들도 어른들도 두 팔을 쫙 벌리고 은빛 보석을 한알이라도 더 많이 받아가지려 할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눈처럼 깨끗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의 세계도 엿볼수 있다. 이라고 한것은 아이들의 상상을 나타내는 기발한 착상인것 같다.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2련에서 그물로 도주하였다. 아마 작자는 산, 나무, 길, 강을 얼기설기 엮어진 그물로 상상하고 그물 용도에 의하여 하늘에서 모래무치, 버들치, 쫑개들이 내려와 그물에 걸린다고 상상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도주는 시의 공간확장에 속한다. 2련에서 로 도주하여 1련보다 차원이 다르기에  공간이 넓어졌다 할수 있다. 대단한 착상이다.    떨어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3련에서는 .도주하였다. 땅거미는 해가 넘어가면서 땅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것을 말한다.어둠이 시작되면 밤이 온다. 밤은 모든 사물을 삼켜버린다.   땅거미가 입이 없어도 반찬을 먹는다고 말한것은 어둠에 의하여 내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기발한 착상이다.   이렇게 하이퍼시 사물은 각이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가지 도주의 경로를 거치면서 차원이 다른 다양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도주는 하이퍼시의 중요한 명제같다.     2017년 10월 9일
8    글쓰기의 0도 (동문선) 댓글:  조회:1209  추천:0  2016-06-03
글쓰기의 0도 (동문선) 롤랑 바르트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으로 그 만듬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있는것이다. 10   언어체는 한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것이며, 이원을 벗어날 때 비로소 밀도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때문이다. 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이며 위압갑을 준다 23   지식인의 이런 글쓰기들은 불안정하며 여전히 문학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무력하게 참여에 대한 강박에 의해서만 정치적이 기때문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윤리적 글쓰기들이며, 그속 에서 필자(우리는 더이상 감히 작가라고 말할수 없다)의 의식은 집단적구원의 안심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30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 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글쓰기가 수행하는것은 그 반대이다. 35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있기때문이다. 38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있는 잠재적산문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 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42)… 시적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자체가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시는 자신의 기교적배치에 필요한 사유만을 지닌다. 그 반대로 근대적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연속체를 생산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잡힌다. 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기회는 시적시간을 상정하는데, 이 시간은 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예술과 대립되며, 이 두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의도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 43   고전주의적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 들은 차안된것같은 개인적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압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 고전주의적인 기교적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44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준비를 하고있다. 고정된 관계가 무너짐으로써 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 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만을 제안하는 주변없는 행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언어의 모든 잠재적가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갈망은 모든 근대적시에 공통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 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지나치게 풍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 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46-47   근대적시는 언어의 관계를 파괴했고, 담화를 낱말들의 정거장으 로 규결시켰다. 이런 현상은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전복을 함축한다. 새로운 시적언어의 불연속체는 덩어리들로서만 드러나는 어떤 불연속적 대자연을 확립한다. 기능들의 후퇴가 세계의 관계들에 대해 어둠을 드리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상은 담화에서 높아진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적관계들만 있기때 문이다. 아무도 그것들을 위해 어떤 특권적의미나 사용 혹은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에 어떤 계층체계를 감지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을 정신적행동이나 의도의 의미, 작용, 다시말해 요컨대 어떤 애정의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언어의 파렬은 절대적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채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직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뿐이다. 낱말들 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 그것들이 파렬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 이 폭ㄹㅕㄱㅇㅣ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만 곧바로 소멸한다. 이런이 시점에서 시적인 글쓰기에 대해 나갈수 있다는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중요성을 파괴해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 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 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 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감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것 역시 쓸데 없다. 48-49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기호들 (단순 과거,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62   공산주의작가들은 부르주아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 주아적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 자들이 된다.6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것이다. 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78   근대적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하는 노력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 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 언어가 더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 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때문이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다. 79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 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상으로 광경적이며-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이다. 85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것과 감추어진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97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98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 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시는 예시의 교육적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 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격성, 거래의 화려함, 이것이 백과전서적대상의 이중적체제이다. 109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 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 116   당신이 재현하는것은 분석적정신의 여정이다. 세계는  당신에게 통상적인것, 분명한것(이것은 생활의 장면이다)을 제시한다. 백과전서파와 함께 당신은 점진적으로 원인들, 물질들, 원요소들로 내려가며, 체험적인것으로부터 인과적인것으로 가고, 대상을 지적으로 만든다.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여있기때문이다.117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118   백과전서적인 시적세계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성(‘현실’)의 엄격한 요구에 토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타자는 모든 신비의 기호이다)이 끊임없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적작품이 되는것이 의 계획이다. 121   객관적으로 이야기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 122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123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 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 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인 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128   은유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는것이라 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두성분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 문자적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쳐들려지며, 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 내맡겨지는 문자적요소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준비도 없이 폭력적인 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것은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오늘날 은유는 (시적자유에서와는 달리) 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련되는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 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것 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 반향을 증식시키는것처럼 나타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것처럼 남겨두고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 133-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   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필연성)으로 대체 한다135   근대의 작가는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이 아니다. 그는 도덕을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속에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그는 환원불가능한것을 가지고 일반적인것을 만들어야 하고, 언어의 도덕적인 일반성을 통해서 자기존재의 부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것은 이와같은 위험을 감수한 통과이다. 138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있지만 모든 투사적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이퍼의미성현상의 대가 –혹은 날쁜점-이다. 이 현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146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수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수 있고, 확장할수 있으며, 그것의 의소적골격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수 있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 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 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는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150                         프로베르보다 훨씬 전에 작가는 문체의 혹독한 작업, 끊임없는 수정의 피곤함, 미미한 수확을 얻기위한 과도한 시간의 슬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표현했다… 플로베르에게는 문체는 절대적인 아픔이고, 무한한 아픔이며, 불필요한 아픔이다. 집필은 터무니없게 완만하다(‘일주일에 네페지’ ’한페지를 쓰는데 닷새’ ’두줄을 쓰는데 이틀’) 그것은 “삶과의 돌이킬수 없는 고별” 무자비한 자기 감금을 요구한다.157   수직적축에는 대체 낱말들이(이것들은 정정들이나 낱말들이다) 기입된다. 수평적축에는 통합체들의 삭제들이나 첨가들 (이것 들은 개정들)이 기입된다.160                       2015.1.2.  
7    하이퍼텍스트 3.0 댓글:  조회:1023  추천:0  2015-09-17
전번에 우리가 보는 책들의 목록을 올렸는데 100여명이 클릭하였다. 클릭한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많은 책들중에서 조지p란도가 쓴 의 어록들을 올린다.  수준제한으로 잘못 선택하였을수도 있고 철자틀린 곳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께서  량해하기 바란다.  《하이퍼텍스트3.0>> (커무니케이선북스)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노드;사이트를 구성하는 기본단위. 책에선 페지와 같음)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 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 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 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 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地图)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 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 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 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 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 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 품질에 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륭한,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 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 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
6    방순애 황금률하이퍼시 서언 댓글:  조회:1194  추천:2  2015-09-09
서언   최흔   필자는 저으기 격동된 심정으로 방순애 두번째시집의 서언을 쓴다. 중국조선족문림에서 첫하이퍼시집 를 출간한지 일년남짓한테 두번째로 을 출간하게 되니 가히 경하할 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령혼이 뼈를 녹이는 노력으로 이룩한 성취이다. 필자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는 탐구이며 새것이며,시인은 초행길만 걷는자이다. 황금률하이퍼시!! 아마 이런 시가 고금중외에 없는것으로 알고있다.그러니까 시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였다고 하겠다. 우리 시에는 3장6구로 된 시조가 있었고 자유시가 있었고 민조시가 있었고 가로세로 시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시 황금률이라는 시가 있다. 황금률이라 는것이 어떤것인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방시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생명 선률   점 문턱 밟고간 바다의 언어   동해의 물결을 타고 이그러진 얼굴에 시간을 뿌리고 미역을 감던 돌 자연의 소용돌이에서 사랑에 물들어     2. 려명직전   어둠 빛과 리별 짝짓는 금시간 허리띠를 푼 둥근 달자궁 영원히 잦아들지 않는 빈들판의 돌담들            흐느끼는 노을을 잠재우고 지평선에 떳던 소리의 다리를   3. 악수   긴호흡 팔벌리는 심장 쿵당 방아를 찢는 목젖  대야안에서 큰 진주를 걸러내는 하루 귀벽을 후치던 말소리 튕겨나와 파다닥 거리는 가슴팍사이 골짜기에서 경련을 일으키다 주눅들어 울고있는 파란 자존심 바람에 졸린 여운으로 빳빳해지다   시 1에서는 첫행을 한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시2에서는 두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고 시3에서는 석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들은 다 1.2.3.5…의 비율을 지키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방순애의 황금율시는 자유시가 아니고 율시이다. 황금율에 맞게 시문을 배렬하면서 쓴 시이다. 이것은 방순애시 인만의 발견이며 창조이다. 우리 시림으로 말하면 하이퍼시가 새로운 형태로 대두되고 있는데 거기다 황금율이란 새로운 아이 디어를 제안하고 일정한 율에 의하여  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다는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금율시는 방순애 시인의 시법이고 방순애시인의 시법은 황금율하이퍼시이다. 한시인이 한 시법 을 가진다는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경하드릴 일이라고 하였고 저으기 격동된다고 하였다..   2   시간과 세상은 사라짐과 탄생의 그라프를 그리고있다. 한쪽 으로 태여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것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은 법칙이라해도 틀리지 않을것이다. 방순애시인의 황금율하이퍼시가 바로 이런 법칙에 기대여 시를 다루어지고 있다.      아침차 검은 안경을 낀 도시를 꿰뚫어 달린다 자신을 잃는 동안 늘어나는 둥근 시줄 입마다 벌리고 합창하는 이슬꽃들 새의 노래를 두려워할까 얼음도 햇님이 다가오면 굳어진 몸 푸는데 서서히 뻗어가는 세월이파리는 단풍에 물들지않을가 산맥을 타고 대렬을 지은 집들은 빨간 노을 모자를 쓰고 구름은 황금빛을 반죽하여 여기저기 걸어놓아 골짜기 따라 굽이치는 안개는 산촌의 머리를 쓸어준다   시 의 전문이다. 차의 움직임은 에 의하여 밀려나있고 은 >에 의하여 밀려나 있으며 그것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 은 또 에 의하여 밀려나고...왜 이런가? 한사물에 가리워져있었거나 파묻혀있던 사물들이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튀여나온다. 튀여나온 사물들은 원래있던 사물들과 이렇게 말한다. 한다. 구불어온 돌이 백인돌을 빼버리는 격이다. 그러면 원사물은 튀여나온 사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실은 밀려나기이며 사라지기다. 다시 말해서 한 이미지가 밀려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고 움직 이고있는것으로써 무쌍한 변화를 일으킨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의 조화이며 생명체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하이 퍼시는 이렇다. 한사물의 이미지가 시의 시종에 관통되는것이 아니라 제약을 받으며 밀려나게 되며 새로운 사물의 이미지가 나타나서 운동하게 된다.  그래서 횡적구성이며 다선구조이다. 그래서 주제가 하나인것이 아니라 다주 제이다. 방순애시인은 주어진 사물을 현실그대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변형시키면서 원초적인것을 파보고있다. , , , , 등등은 다 변형이며 그 변형들은 원초적인것을 파내여보려는 시인의 시각에 의하여 부각된다. 방순애의 황금율하이퍼시는 이질적인 이미지집합으로서 이미저리를 이룬다. 이런 이미저리들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의경(意境)을 이룬다. 그 의경은 시인의 상상의 산물로서 꿈의 재현이고 나름대로 추구하는 자연의 아름답고 황홀한 극치로서 시인의 유토피아 이다.   3.   한수의 시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자신의 모양새가 있다. 필자는 그것을 형태이미지라고 에서 밝힌적이 있다. 방순애시인은 에서 시의 형태이미지를 가꾸기 위하여 많은 공력을 들이였다. 가로행의 시도 있을뿐만아니라 세로행의 시도 있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층층계를 련상시키는가 하면  산을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려 명직전, 눈, 차향 등등), 초모자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새의 천국, 쉼터. 운 등등),   공작새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내안에. 가락, 건배 등등)  수양버드나무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 (연, 오랜 세월)…   형태이미지의 다종다양함은 시각의 새로움을 추구한것은 물론이고 시의 새로운 분위기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시의 제목과는 다른 형태이미지가 설정되여서 곰곰히 새겨보면 상큼하고 신선한 맛이 짙다. 이러한 형태이미지들의 조화가 신비롭기만 하다.   방순애시인의 는 새로움의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는 시문림에 새로운 황금빛을 눈부시게 발산하고 있다고 하겠다.                             2014년 10월 29-30      
5    한춘시인의 3년제를 맞으며 고인의 령전에 드리는 시평 댓글:  조회:1101  추천:2  2015-06-16
한춘시평 한춘시의 사물에 대한 리해 ㅡ의 소평               최흔   한춘시인은 개혁개방후에 는 기발을 들고 우리 시단의 앞장에서 현대시의 혈로를 줄기차게 달려온 선두주자다. 그는 열렬한 현대시의 창작자였고 열렬한 현장평론 가였다.(아래는 까치둥지로 략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집이다.   . 1.   한춘시의 기둥수법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 그아래에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나절 나비 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   이 시는 세한도(2)에 실린 2010년 9월 16일 작이다.시속에서 사물들이 강렬하게 태여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애기, 꽃망울, 바줄, 코스모스, 길, 기발, 영어단어, 나비, 돛배, 서리, 달빛, 밤, 기러기 등 시각적인 사물이 있는가 하면, 첫울음,  음절 등 청각적인 사물도 있다. 시는 한행이 길어서344음보로 된 11행이다.(한춘시는 대부분 이런 시행이다) 이 짧은 시에 행마다에 새로운 사물들이 태여나고있으며 태여난 사물들은 변형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한춘의 시는 거이다가 이런 시기교로 씌여진 시들이다.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이 없는 세상은 없다. 시속에서의 물질은 바로 이미지인것이다. 시인의 상상속에서는 이 이 되고, 놓친이되고, 이 되고, 길에는  이 세워져있고,    는 >, .  이러한 되기는 한사물이 그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로의 이동이며 한물질이 그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되기이며,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도주한 행선지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시의 핵심적인 수법인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라고 하겠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짝을 짓는것을 시적상관물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되기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라는 저서 112쪽에서 지적한것처럼 한춘시인은 자기의 시를 이라고 하면서 (세한도1)고 하였다. 시인의 는 는 한수의 시에 속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또 있다. 왜 이렇게 맘대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이다. 자유로운 상상은 외계의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시인만의 상상인것이다. 기성론리도, 도덕도, 그어떤 진리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생각하고 상상할 권한이 있는것이다. 그 상상은 한계가 없으며 한계를 가질 필요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지구우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우주속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기일뿐이다. 지구나 우주가 사물들이 변할수 있는 공분모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가 하는 물음은 임신한 녀자가 왜 아이를 낳는가고 묻는것처럼 소용없는 일이라겠다. 물질과 물질의 변형은 한춘의 시기법의 기둥수법이라고 할것 같다. 한춘은 이런 기법으로 자신이 개척한 현대시의 길을 총화하고있는 하고있는것 같다. 시인이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것은 한사물의 리면에 있는 새로운 사물을 찾아서 보여주는것으로써 원초적인 사물을 들여다 보기라고 할수 있다. 인류는 원초적인것을 숭상한다. 시인도 원초적인것에 접근하려고 시를 쓰는것이다. 때묻지 않는 그 원초적인 순수를 시인이 꿈꾸고있는것은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기때문일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시들   에는 좋은 시들이 많은데 필자가 특별히 즐기는 시는 과 이다. 이 두편의 시들은 언어가 새롭고 의미가 깊어 흔상할 가치가 많은 시들이다. 그중 (아래는 3으로 략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망가진 용드레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시인은 천둥소리를 기다린다   주추돌에 깨여지는 비방울 두손으로 받아들고 지난겨울 찬 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또다시 꼼꼼히 검색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었다 2010.9.16.   우선 내용이 제목과 이질적이여서 좋다. 세한도란 추운겨울 지도라고 말할수 있는데 시인은 추운 겨울철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물을 긷는것을 말하고 있다. 시는 항상 제목과 내용이 분리되거나 내용이 제목에서 일탈되는것이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물이란 무엇인가? 물이란 시다. 물도 마르고 룡드레도 망가졌으니 물을 길을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시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는것이다. 달가닥거리는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물은 한방울도 길어올릴수 없는 답답함과 근심걱정이 속을 다 말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기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소나기 오면 우물에 물을 길어올릴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천둥소리는 령혼에 갑자기 솟구치는 령감이며 시인것이다. 는 시를 짓는 시인의 욕망이 좌절되는것을 표현한 언어로서 가히 언어속에 새로운 언어가 있음을 암시하는것이라겠다. 이것이 3의 내용인것 같아서 음미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3의 2련은 가련한 시인이 시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고대하던 비는 내리지만 시인한테는 비방울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부서진 비방울을 손에 받아들었다. 시인은 그 부서진 비방울속에서 지난 겨울에 찬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꼼꼼히 검색한다.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를 떠올린것이다. 한사물에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물을 떠올리는것이 시가 아닌가. 부서진 비방울이 잣나무의 노래로 둔갑된다는것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직선적으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직선을 떠나서 씌여지는것으로서 탈직선화라고 말할수 있다. 진짜 .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라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창출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련도 이채롭다. 우의 내용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려있다.   물과도,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비와도, 잣나무노래와도 관계없는 하늘로 비껴가는 새, 부리에 화석 한점이 물려있는새, 와>의 출현은 불연속이며 원인과 결과와는 관계없는것이다.  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상징물로서 시라고 말해도 되고 희망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은 또 무엇인가? 화석이란 단단한 돌이다. 이 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미의 가치가 있는 사물로서 각자나름의 판단을 허용하는 화석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화석은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춤이며 에둘러 말하는것으로써 1500년전에 류협이 >에서 말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의탁하고있다고 하겠다. 한춘시인의 이 시는 그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습적으로 돌발적으로 아무런 련계도 없이 집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재래의 현대시구성을 넘어서는 신선한 구성이다. 이 시는 조지p 란도가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이며 다양체이다.  련과 련사이의 이미지들은 물론 2련의 과 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련결인것이 아니라 분리이며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되여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들은 서로 인과관계인것이 아니라 대등한 독립성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춘시인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가 있었던 시인이였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에는 이런 시들이 여러수 있다.    3.언어의 특성   까치는 나무가지를 물어다 집을 만들고 한춘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를 만들었다. 에는 여러가지 언어표현수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아래와 같은 두가지 방면으로 살펴보고저한다.   1)    낯선 언어 만들기   낯설기란 말은 지난 세기20-30년대에 쏘련의 포르마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낯설기란 언어자체의 의미 그대로 보지 않았던 생소한, 처음으로 보는 언어를 말하는것이다. 한춘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여 낯설기를 하고있다.  (3쪽), (17쪽), (20쪽),(24쪽) (28쪽)…. 앞머리만 대충 훑어보아도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모두 말이 되는 말인것이 아니라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런 언어들의 조합을 폭력적조합 혹은 강압적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시가 이렇게 말을 조작할수 있는것은 시어는 언어의 기능에 기대여 조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이란 우리 조선어로 말할 때 자음과 모음이 자유로이 어울려 글자를 만들고 단어를 만드는 일면도 있지만 또 중요한것은 시속의 사물은 상상속의 사물이지 현실속의 사물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영상을 떠올릴뿐이지 어느한 사물이 되는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사물과 언어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실질이며 본능이다.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조합의 궤도를 벗어나서 생산될 때야라만이 시적언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작 83쪽)   2)    언어의 몽롱성;   는 몽롱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에 많이도 산재하여 있다. 필자가 좋다고 말한  의 제1련을 아래에 적어본다.   지난 모든 일들을 작두날로 다 잘라버리고 모든 소란스런 말들을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리고 모든  내던진 돌맹이를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이고   3개의 짝이 있는데 현실과 초월이 결합된 시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다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수 있다. 작두날이란 무엇을 지칭하며 작두날로 잘라버렸다는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렸다는 소란스런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인 돌맹이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돌맹이를 거둬들일수 있기나 하는가…제2련도 1년처럼 모를 말들이다.   그래도 적들은 쳐들어온다 모든 벽을 다 허물고 모든 괴물을 다 격파하고 모든 기관을 다 폭파가하고 손녀가 가지고 놀던 사기인형은 다 깨지고   여기서 말하는 적들이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벽, 괴물, 기관, 사기인형이란 무엇을 표현한것인가… 적들이란 잠이 들지 못하게 하는 엉킨 삼오리뭉치같은 잡념이고, 벽이요 괴물이요 기관이요 사기인형이요 하는것들은 잠을 잘 오게 하는 환경물인것 같다.  필자도 이런 언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는 모른다. 시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는 심리를 쓰고있다. 잠은 밥과 함께 인간의 일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욕망이다.시인은 잠이라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는 애모쁨을 쓰고있는것이다. 최저의 욕망도 실현하기 어렵게 살아가는것이 인간이 아닐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특성이 있다. 시인의 상상을 밑바닥까지 알이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시인은 왜 맞지도 않는 이런 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여기에 시의 본색이 있는것이다. 시는 몽롱해야 하는것이다. 몽롱한것은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 흘러가는 내물처럼 밑바닥 모래알이 다보이는 시가 아니라 강이깊숙하여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 그래서 시는 음미하게 된다. 시는 의사를 전달하는 산문이 아니라 시인의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물질로 즉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시는 리성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감각을 중시하게 된다. 종래로 리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많았다. 밀턴과 단테는 과 을 쓴다음에 자신들의 시는 100년후에야 알아볼것이라고 하였고, 1500년전의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으리라. 좋은 시는 독해를 요구하지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서 시는  매혹을 잃지 않게 되며 독자나름의 해석을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도 리상의 시를 각자가 나름대로 리해하는것도 이때문이다 .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련속적으로 그것도 아주 빠르게 번쩍번쩍 령혼속으로 온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고려할사이가 없이 시를 써내려가게 된다. 한수의 단시를 쓰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하다. 쓴 다음 두었다가 언어를 다듬어 놓으면 된다.  1996년의 노벨문학상수상자 비스가와 쉼보르스카는  (450쪽) 라고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개혁개방초기에 한춘시인은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현대시를 위하여 몸을 던진 시인이였다. 는 그의 시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작품집이라도 할수 있다. 시행이 344조 한격식이여서 딱딱한 감도 없지 않지만 는 우리 시단에서 현대시의 한 본보기로 되기에는 손색이 없다. 한춘시인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2015.5.15.  
4    찬란히 터져오르는 이미지 댓글:  조회:2642  추천:7  2014-05-20
찬란히  터져오르는  이미지   --김파시인의 열번째시집 《태양의 언어》에 부쳐                          최흔    김파시인의 열번째 시집을 보았다.  립체시라는 일로를 줄기차게 걸어오던 김파시인이 오늘은 라는 디지털 하이퍼시라는 작탄을 터지웠다.  이미지들은 야밤의 폭죽불꽃처럼 찬란하다. 폭죽은 순간의 황홀을 보이고 사그러지지만 는 그런 순간을 영원으로 고착시키는 황홀경을 이룬다고 하겠다. 무의식, 하이퍼특점, 언어들의 독특성을 이 론문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무의식사유의 결실   김파의 열번째 시집 의 시들은 무의식에 절어있다. 사람들이 시를 쓰는 의식은 대개 세가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현실의식이고, 둘째는 잠재의식이고, 세째는 무의식이라겠다. 어떤 의식으로 시를 쓰는가는 시인마다 다르다. 현실의식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현실의식과 잠재의식을 혼합시켜 시를 쓰기도 하고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혼합시켜 시를 쓰기도 한다. 김파시인은 이런 류형의  사유로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무의식으로 시를 편집하고 있는같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의식이란 현실사물의 현상을 종합하고 처리하는 시를 말하고 잠재의식이란 한사물의 어느 한 현실로부터 시작하여 그 사물의 력사거나 시인의 기억을 더듬어 시를 작성하는것이라 하고, 무의식이란 말그대로 현실의식을 묵살해버리고 새로운 의식으로, 환상적으로 시를 시작하고 발전시키고 마무리하는 시라고 하겠다. 현실사물에 대한 모든 기성관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관념으로 시를 쓰기에 무의식이라고 할수 있다. 때문에 시에 나타나는 제재들은 현실적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과 환각에 의하여 재구성된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이란 오직 시인에게만 있는 새로운 의식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없으면서도 있는 의식! 이제 김파시인의 시의 서두로써 이야기해 보자.     세월의 틈서리에 산란하는 말씀들 벼루기의 집장고도 --《무제》서두에서     시간의 얼마나 흘렀는가 고요가 사글어 곰팡이 낀다 고민이 쌓여 발요되는 열기 정감의 세포가 분해되고있다 --《무언의 대화》에서   태양이 늪얼음을 깁던날 치마자락으로 부채질하는 바람 바위살같에 소름이 돋힌다 녹 쓴 기억 닦아내고 윤활유 바르는 온도계 스케트날이 시간의 잔등 스친다. ---《기다리는 마음》   손톱끝에 지는 피방울 시간을 껍질벗긴다 후리드입술 콩나물 내뱉고 ---《예감에 찔리여》   우산 든 겨울 벌거 벗은 바위 --《서리낀 말씀》   다섯수의 시의 서두를 례로 들었다. 다섯수의 시의 서두는 김파시인의 시의 서두의 보편적인 표현이라고 할수 있다. 에서 와 에서 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우리앞에 낯선 세계를 펼쳐주고 있다. 이 두시구는 현실관념이라고 할수 있지만 다음줄에 나오는 시구들과 련계시키면 그렇다고만 할수도 없다. 이말은 시간이 고요에 곰팡이 끼게 한다는것이다. 여기에서 제일 주목되는 언어는 와 이다. 구상물에 곰팡이가 낀다면 말이 되지만 고요라는 추상물에 곰팡이 낀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시적으로 통하는가? 무의식으로 쓰는 시는 생활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상상에 의하여 다시 조직되여 그려지는 허상이기때문이다. 재조직된 허상이 아닌 시는 무의식으로 쓴 시가 아니라고 하겠다. 무의식으로 쓴 시는 있는것을 없게 하고 없는것을 있게 하기라고 말할수 있겠다. 의 서두도 마찬가지이다. 하는데 시간이란 껍질이 있고 속이 있는 사물이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고 한다. 무엇이 시간을  껍질벗기는가 시인의 말대로 하면 이다. 피방울이 껍질을 벗기는 도구로 씌였으니까 피방울이 표현하는것은 피방울이 아니라 예리한 칼끝과 같은 은어의 표현으로 되고있다. 현실적인 의식이 슴배인것 같은 시행들이 실제는 아래에 오는 변형에 의하여 원뜻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의식에 동화되여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사물로 다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이 새로운 탄생은 시인의 시적사유의 사물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적사물이 아니다. 그래서 싸르트르는 이미지의 핵심을 허상이라고 했을것이다. 현실의식이 작용하는 사물들이 허상의 영향아래 언어자체의 본뜻을 거세당하고 새로운 뜻으로 전이하게 된다. 그러니 워낙 새로운 사물의 운동으로 시작된 나머지 례들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그런 시행들은 100프로 환각된 사물의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어느 시구나 다 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낸것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 여기서도 현실로 통하는것이 아니라 환각으로 통하는것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  이 의 서두도 허상적이거나 환상적이기는 위의 례들과 다를바 없다.
3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른 시의 불길 댓글:  조회:1418  추천:14  2014-05-18
 새로운 천지에서 타오른 시의 불길                  방산옥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보고                                  최흔   방산옥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보았습니다. 이 시집을 말하면 [새로운 천지에 타오른 시의 불길]이라고 함이 좋을것 같아서 시평이름을 달았습니다. 방산옥시인은 2년동안의 학습과 창작에서 동시 200여수를 습작하였고 그중에서   88수를 추려서 [바람도 빼똘빼돌]이란 동시집[비매품]을 묶어보았고, 현대시 200여 여수를 습작하였고 하이퍼시 200여수를 습작하였습니다. 하이퍼시 200여수중에서 92수를 선택하여 오늘의 하이퍼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를 정식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아래에 두가지 방면으로 방산옥하이퍼시집을 이야기하고저 합니다. 하나는 시의 령역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 이미지문제입니다. 이 방면에서 방산옥시인은 새로운 추구를 보여주었다고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1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한 시   시의 제재령역을 어떻게 탐구할것인가 하는것은 시창작에서 주요한 부분의 하나 라고 생각됩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로 남영전시인이 개척한 토템시가 있고 , 김파시인이 개척한 고구려 력사를 쓴 장편서사시 [고구려] 상중하 3권이 있고 최룡관의 련작시, 녀인의 누드를 시로 쓴 [금단의 열매]가 있습니다. 또 형식적인 것을 추구한 박운호의 가로세로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인이 그 령역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탐구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시적기교를 장악하고 운용하여 시로 만들어내야 하는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령역과 시의 제휴가 이루어져야 할뿐만 아니라 량자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하는것으로서 이런 일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방산옥시인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에서 시적제재의 새로운 돌파를 가져왔습니다. 주역과 의학을 생활과 결합시켜 시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집에는 주역으로만 시로 만든것이 12수나 되는데 아래와 같은것들입니다. [봉선화], [8괘 합창단],  [자궁을 랭동시킨다-축도], [별들이 만든 새태양-인] , [3월이 분만한다 – 진토], [산중도사의 혀는 57자-간] [바람이 비몽둥이에 맞아-손2], [흙물에 짓는 련꽃집-태],[물의 별곡-감] , [폭포는 바람의 날개를 붙잡고-손1], [우뢰가 우주의 귀뺨을 친다-진], [버들과 련꽃형제-손] 이러한 작품들은 주역을 시화한 작품들입니다. 그외에도 많은 작품속에서 주역성격을 띤 이미지들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역을 쓴 시들의 제목을 보아도 범상치 않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시집의 첫수 [봉선화]는 봉선화가 여물면 알이 터져나오는것으로부터 착안하여 주역을 끌어내였는데 씨앗들이 튕겨나오면서 하늘이라 부릅니다. 바람이라 부릅니다 진동이라 부릅니다…. 하면서 건, 손, 진 하고 자기의 성을 소개합니다. 시에서의 의인화수법이 자연스럽고도 감칠맛 있게 표현되고 있다고 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자궁을 랭동시킨다-축도], [별들이 만든 새태양-인]에서는 언어조합의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고 [산중도사의 혀는 57자-간]에서는 유모아와 풍자, 그리고 해학적인 이미지로서의 개성에 매도되고, [바람이 비몽둥이에 맞아-손2]와 [폭포는 바람의 날개를 붙잡고-손1], [우뢰가 우주의 귀뺨을 친가-진]들은 참신한 이미지를 우리앞에 던지고 있으며 그 이미지들은 돌발적인것들로서 우리를 느닷없이 기습하고 있습니다. [흙물에 짓는 련꽃집-태], [버들과 련꽃형제-손] [물의 별곡-감]등 테마들은 옹골차서 믿음을 주는 제목들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주역을 중심으로 썼지만 제목들 이미지가 여러가지 표현으로 되여 과히 딱딱하지 않고 엉뚱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손색이 없다는것을 느끼게 되겠습니다. 주역뿐만 아리라 의사로서 의학적(특히 성)인것들에 대한 이미지도 직접 혹은 쐐기를 박는 식으로 쓰고있는데 방산옥시집의 주요한 제재의 하나로 리용되고 있습니다. [옥문], [용천혈], [침모내기], [감초], [청진기], [처방전1], [처방전2], [캡슐], [백내장1], [백내장2], [골반염] 등등 시들이 의학적인것을 이미지로 해설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방시인은 의사로서 성에 관한 박사라고 할수 있습니다. 방시인의 시집에는 성에 대한 시들과 시어들이 점철되여있습니다. 시인은 성을 아름다운것으로 신성한것으로 보고있으며 여러가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근 한가지 표현만 보더라도 자라가 빼드는 목이다가. 물구나무이다가, 비몽둥이다가, 날개를 드리운 꿩이다가, 옹이다가, 태양이다가, 갓 쓴 기둥이다가, 구렁이다가, 노젓는 동북범이다가, .지렁이 다가, 도화산 낚시대다가, 시퍼런 검이다가, 대포이다가…..    실로 여러가지 표현이여서 이루다 렬거할수 없습니다. 방시인은 한사물을 여러가지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공력을 들였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이 모든 시들에 주역적인 이미지들과 의학적인 이미지들이 시집의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시집은 세가지 골격을 이루었다고 생각됩니다. 한가지는 주역이고 두번째는 의학이고 세번째는 우리의 현실생활입니다. 주역도 그렇고 의학도 그렇고 현실생활도 다가 이미지창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때론 각자존재형식이고 때론 혼연 일체를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많은 시들에서는 이 세가지가 각기 하나의 단위로서 하이퍼시를 구성하고 있다하겠습니다. 그럼 주역이나 의학을 제재로 한 시들은 하이 퍼경향이 없는가? 그런것이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그러한 제재의 시들도 하이퍼텍스 트에 속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하이퍼시란 주지하다시피 중심이 없는, 다선구조로 된 시라고 간략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커트를 [방산옥하이퍼시집] 이라고 달았습니다..   2   다음은 시의 이미지문제에 대하여 말하고저 합니다. 시집에서는 새로운 이미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해야 할것 같습니다.마치도 가마속에서 물이 설설 끓어번지 듯이 말입니다. 이미지들은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미지를 밀어버리며 자리를 차지 하는데 마치도 물결이 세차게 흘러가는것 같습니다. 이미지 설정에서 시인은 마구잡이와 상상성 두가지 방법을 령활하게 응용하고 있습니다. 제1장에 오른 시들의 정채로운 이미지를 한번 살펴보는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1장에는 모두 16편의 시가 실려있는데 새로운 이미지가 콸콸 넘쳐흐르는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대개 아래와 같습니다.   1, 우뢰가 우주의 뺨을 치다 2, 재목나무 타고 별과 대화하던 룡을 /벼락이 간을 뽑아 구름우에 심는다 3, 서쪽에서 해가 뜨고/ 기차가 하늘로 달린다 4, 장백산천지는 구름우에 옮겨졌고/ 폭포는 화성에 쏟아진다. 5, 닭알이 벼랑에 떨어져/ 뼈가 부서집니다 6, 우체통으로 날아가는 기차/벌벌 기여가는 비행기/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는 군함들     7, 지구층을 절단하다     8, 호랑이 심장으로 기차 만들고 / 창자로 기차길을 닦았습니다.     9, 다람쥐는 발걸음 소리로/땀을 모아 금붕어 키우고 10, 코구멍에 펌프가 고장났는가를/ 식도가 컴퓨터화면으로 감시를 한다.     11, 산새들이 산소통을 /등에 업고 날아내리다     12, 메추리가 벼잎군함을 타고 항행한다     13, 바람이 찢기는 한끝에 / 새들이 부딧쳐 떨어진다     14, 바위돌들은 지렁이/골받이에 가루가 되여     15, 바위눈에는 등불이 켜져있고     16, 글자가 삐뚤삐뚤 길을 닦고/ 길은 모양을 조각하며/ 소리를 낳는다     17, 안개가 … 아가기저귀가 된다.     18, 산을 뒤흔들던 계곡의 메아리가지에 / 새들이 앉아 노래부른다     19, 심장이 열리는 대뇌-추최에 스며들어/ 옹이를 박는다     20, 산새들이 주문을 외우고/ 주문의 마디마디가 /푸른 잎에서 쫑쫑 뛰여내린다.     이외에도 [우주핸들] [노란 폭우]같은 새로운 명사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시는 언어이며 언어의 새로움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시가 새로운가 새롭지 못한가. 시에 창의가 있는가 없는가는 하는것은 시속에 새로운 언어들이 나와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하는가 못하는가에 그 중요한 기준이 있다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일상적인 언어를 어떻게 새로운 언어의 흐름으로 다듬는가 안 다듬는가는 시의 생명력이 강한가 약한가를 가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방산옥시인의 시언어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계발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곰곰히 다시 읽어보아도 새말이 아니라고 할수 없는 언어의 창출과 이미지창출인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1500년전에 중국최초의 문학개론에서 류협은  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수(秀)는 한 작품안에서 여타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아움을 획득한다].. (문심조룡 155쪽에서) 방산옥시인의 상기한 언어조합과 이미지는 바로 [작품안에서 두드러진 말]이고 [한 작품안에서 여타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되는것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방산옥시인은 2년 남짓한 동안 시를 배우고 익힌 시인으로서 초학자라면 초학자이고  시인이라면 시인이겠습니다. 초학자라는것은 경력이 짧아서이고 시인이란것은 방산옥씨가 확실이 시를 썼고 쓰고있으며 앞으로도 쓸것이라고 생각되기때문입니다. 방산옥시인은 문학으로 발하면 이방인입니다. 의학자가 시를 하니까요.  방시인은 자기 나름대로 그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시의 기교에 기대여 언어를 조합하고 이미지를 만드는데 공력을 들인 같습니다. 그래서 범무서운줄 모르는 하루강아지 역을 담당하였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고 방시인은 시의 본연에 들어가 시적기교로 언어를 다듬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본연은 바로 이질적인 언어의 폭력조합과 이질적인 이미지 폭력조합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저는 이 말을 상투 적으로 써서 미안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또 씁니다) 우에 라렬한 이미지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수법은 현대시의 기본기교입니다. 때론 어떤 근사성을 고려하고 하는수도 있고 때론 아무런 근사성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물과 사물이나 언어와 언어를 약혼시키고 결혼시킬 때도 있습니다. 마구잡이가 되는 조합들은 얼핏보면 란장판같지만 기실은 따지고 보면 그 련계가 간접적으로 멀리에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물들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상호의 련계속에서 존재하게 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련계가 직접 보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시인은 바로 그 잘 보이지 않는것을 추구하는 언어의 마술사라 하겠습니다. 세상사물이 변하는것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것은 상대적일뿐입니다. 방시인은 변한다는 절대성에 의거하고 주역오행설에 의거하고있는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한두가지만 보도록 합시다. 방시인은 [침모내기]란 언어와 [우주핸들] 이라는 언어를 창출하였습니다. [침모대기]란 언어는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언어입니다. [침]과 [모내기]합성어인데 이렇게 맞지 않는 언어를 조합하는것이 폭력적 조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어떤것을 근거로 이런 언어를 창출하였는가가 문제입니다. 사람의 몸에 침을 꽂으면 한대한대를 꽂는자체가 모내기와 비슷한것 입니다. 침여러대를 놓았습니다. 우리는 침이 꽂힌 모양을 본다고 합시다. 그 모양이 모를 낸것과 비슷하다는것을 얼핏 알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폭력적언어조합이 성립된다고 해야 할것입니다. 다음 [우주핸들]은 상기한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라고 보아집니다. [우주]와 [핸들]은 아무런 련계성도 없는 단어라고 해야할것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의 명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상적인 사유로는 맞지도 않는다고 할수 있습니다. 자동차핸들하면 달리는 차의 방향을 잡아주는 방향판인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속에는 핸들이 있지만 [우주핸들]이란것은 없는겁니다. 두사물사이의 어떤 련계성도 찾아보기 힘들고 또는 찾아볼수도 없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습적이고 돌연적인 단어에 놀라지 않을수 없기도 합니다. 그리고 난삽하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왜 허용되는가가 문제로 나선다고 생각됩니다. 필자는 이런 견해가 있습니다. 시는 생활의 진실이 아니라 예술의 진실입니다. [우주핸들]이란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인것이 아니라 시인이 만들어낸 허사입니다. 이런 허사가 시에서 존재하게 되는것은 시가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실물인것이 아니라 허상이기때문입니다. 시는 어찌보면 허상의 창조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우주핸들]이란것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상징물이며 우주질서를 물화한 상징이라고 보아집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한것이라고 말입니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 즉 이미지라고 할 때 추상적인 사유나 추상적인 언어들을 구상화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구핸들]이 란 언어가 시에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우에서 례를 든 중에서 이미지폭력적조합에 대한것을 하나 살펴보는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산을 뒤흔들던 계곡의 메아리가지에 / 새들이 앉아 노래부른다]는 시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계곡의 메아리가지에/ 새들이 앉아 노래부른다]고 합니다. 메아리와 가지의 어울림이 맞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런 사물이 없습니다. 없는 빈 곳에  [새들이 앉아 노래부른다] 고 합니다. 이런것을 이미지폭력조합이라고 필자는 말합니다. 없는 사물에 어떻게 새가 앉아 노래부르겠습니까. 그런데 가지에 새는 앉아 노래부른다고 할수 있습니다. 메아리가지는 우에서 근거없는 언어조합에 속하는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며 또 시에서는 막부득이한 경우를 내놓고는 추상적인 언어사용을 극도로 절제하여야 하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을 똑똑히 밝혀야 하는것이 상례이기에. 메아리는 보이지 않는 청각이미지로서 그것을 시각화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어 [메아리]뒤에 구상어 [가지]라는것을 붙임으로써 보이지 않던 메아리가 보이게 되는것입니다. 이런것은 공감각의 일종인데 청각을 시각화한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질이 다른 사물이나 성질이 다른 언어를 련결해 놓으면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게 마련인것입니다. 여기서 언어의 탄력이 생기게 되며 언어의 밀도가 빽빽하게 되는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의 탄력에 대한 추구, 언어의 밀도에 대한 추구는 시인들이 모름지기 장악하여야 할 기교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구는 시적창의가 절로 생성되게 되는 계기이며 도경이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여기서 사물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는 언어입니다. 언어란것은 사물의 상징일뿐이지 원 사물은 아닙니다. 물과 불이 끌어안았다 하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물과 불이라는 사물을 직접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상징하는 언어를 조합시킨것이 되겠습니다. 해석하 자면 긴데 본 텍스트가 방산옥시인의 시집에 대한 평이므로 명제만 제기하고 략합니다. 방산옥시인은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하이퍼시집을 5개장으로 나우어 92수의 시를 실었는데 나머지장들에도 이런 멋진 언어조합과 멋진 이미지조합들이 수두룩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봐주기를 기대합니다. 방산옥시인의 시집 [련꽃에 달의 집을 짓다]는 연변에서 두번째로 출간되는 하이퍼시집으로서 방순애의 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와 함께 연변시단에서 하이퍼시의 쌍벽을 이룬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시평을 마치면서 방산옥시인에게 도마디만은 하여야 할것같습니다. 아직도 시언어 다듬에서 더 윤활하고 더 깐지고 더 깨끗하고 더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시는 언어의 관을 넘는것이 근본인데 이 근본을 넘는데는 열두고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몇 고개를 넘었는가 자체로 더듬어보고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기를 바랍니다. [찢겨진 바람], [달을 뜯어먹다] 등 이미지들이 별로 구별이 없는 이미지들로서 중복되는데 앞으로 창작에서 이런 중복이미지들에 대하여  크게 중시하여야겠습니다.                                2014년2월 중순에.                
2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 댓글:  조회:1260  추천:0  2014-02-26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             -방순애의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보고                        최흔   들어가는 말   필자는 흥분된 심정으로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본다. 연변의 첫 하이퍼시집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중국조선족시단에서 하이퍼시가 싹이 트기 시작한것은 아마 2006년이라고 생각된다. 그후 려순희 황정인 심예란 허옥진 박장길 김견등 시인들이 하이퍼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하겠다. 하지만 하이퍼시를 써서 시집을 낸 시인들은 아직 없었다. 하이퍼시, 다선구조로 된 이시는 지금 유령마냥 일부시인들의 시상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하겠다. 다시점, 다초점, 다주제를 가지고 있는 하퍼시가 방순애의 머리를 삼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끼까지 방시인은 간고한 려정을 거쳐 [시간은 원이 되여]를 완성하였다고 하겠다. 시인은 동시 240여수를 썼고 현대시60여수를 썼고 하이퍼시 170여수를 썼다. 오늘 시인은 하퍼시 170여수중에서 88수를 선재하여 시집을 내놓았다. 한수의 시가 그녀의 한방울의 피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88방울의 피가 오늘 독자들과 대면하게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새로운 도전이며 혁신이다. 하이퍼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묶은 [시간은 원이 되여]를 어떻게 읽을것인가에 대하여 필자는 나름대로 말하려고 한다     도약하는 이미지   방순애시인의 하이퍼시는 도약하는 이미지를 창출해낸것이 하나의 특점이라고 할수 있겠다. 도약을 통하여 이미지들은 분렬도 조성하고 집성도 조성하면서 한수의 시를 이룩한다고 하겠다. 시인의 시는 산문적인 필치와 운문적인 필치 두가지 형태로 쓰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산문적인 필치로 쓴 시 한수를 보자    어떤 바위 스님되여 앉아있다 얼굴부터 새겨진 법글이 쭉 내려오고 몸의 구석진 곳들은  전설쪼각이다 마음속에서 지줄대는 이야기는 강을 따라 흘러가고 무성한 이파리 매달려있는 줄거리들 줄줄 타래진다  구름이 펜을 들고 쉬고있다 눈아래 서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입은 닫겨있다  무거운 입술을 열면 하늘중심에서 우는 천둥이 지심까지 들썩인다 작은 귀뿌리는 점점 커진다 열쇠를 가지고 떠나는 사람들 갇히운 마음을 연다 진펄에 빠지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이 시는 시집의 첫수이다.  보는바와 같이 1련은 스님에 대하여 쓰고 2련에서는 구름에 대하여 쓰고 3련에서는 귀뿌리에 대하여 쓰고있다. 스님에서 구름에로 도약하고 구름에서 귀뿌리로 도약하면서 시는 마무리를 짓고있다. 련과 련사이가 큰 도약을 이룩하였을뿐만 아니라 한개련에서도 도약이 진행되고 있다. 1련에서 스님은 전설쪼각이 되는가 하면 이야기가 강물처럼 흘러가는가 하면 무성한 이파리와 줄거리가 나온다. 2련에서는 구름이 의인화되면서 여러가지 사실이 나오고 있고 3련에서는 작은 귀뿌리, 열쇠가진 사람들이 나오는가 하면 진펄에서 헤매는 발걸음이 나오고 있다. 어찌보면 시가 대잡탕으로 이루어진 감이 난다. 이미지들이 아래와 같은 특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각련의 이미지와 이미지가 련결이 되는것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고 이미지들이 각자 존재를 한다. 어느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의 결과이거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들은 중심에 의하여 조직된것이 아니라 중심을 떠나고 있어서 탈중심, 무중심을 이룩하고 있다. 이미지들은 또 현실적인 사실인것이 아니라 픽션으로 되여있는 허구이며 가상현실이라고 말할수 있다. 운문으로 된 시 한수를 더보기로 하자        상아의 노래   재빛나는 바다의 아침 상아는 검은색 옷을 입고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입술에 노래를 담고있다   멍청한 후렴은 고해의 값을 벌거벗은 자연에 치르고 현기증나는 우수를 넓은 가슴에 대고 바순다   천개의 북이 물의 정적을 깨뜨리고 하늘속의 기류 바다의 조류를 률동키안에 주어담는다   [상아의 노래]전문이다. 의인화된 상아가 검은 옷을 입고 요트놀이를 한다[1련] 2련은 일년과는 관계없는 멍청한 후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3련은 천개의 북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가는것을 가히 도약이라고 하거나 뜀질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오던 시의 구성이랄가 구조랄가 하는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수백년동안 써온 시는 단선구조이다. 단선구조는 하나의 사실을 중심으로 썼다. 하지만 이시에서는 상아, 멍청한 후렴 그리고 천개의 북이 나오고 있다. 이 세가지 이미지는 종적구성을 이를수 없는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등장하는 횡적구성을 이루면서 병렬적으로 배렬되고 있다. 시인의 시적사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유의 공간이 확장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어느한 초점에 매여있는 시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절대적인 자유로운 상상의 산물의 태여남이며 움짐임으로써 시적상상의 자유분방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수 없을것이다. 하이퍼시가 다시점 다초점으로 된다는것을 이러한 수법으로 쓴 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가 하고 짚어보게 된다. 시인은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 공간 혹은 간격을 주어서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는데 (. 167쪽)는 조지p.란도의 말이 떠오르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겠다.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   재래로 시를 쓴다면 시적계기요 서두요 발전이요 결말이요 조응이요 하는 말들을 잘 살펴보아야 했던것이다. 오늘 시의 현주소도 그런 시가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방순애시인이 쓴 시는 이런 언어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있다. 또 기, 승, 전, 결이라는 언어로 방순애시의 시를 살펴본다는것은 아마 통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방시인의 시는 이런 용어들과는 무관하다. 방시인의 시는 어떤 시인가? 방시인의 시는 대가리도 꼬리도 없는 시라고 함이 타당할것 같다. [시간은 원이 되여]하는 시집의 시들은  이미지 토막과 토막의 배렬로서 그토막과 토막들은 시작이자 결말이고 결말이자 시작이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것처럼 (동상 96쪽)     원이 되여 굴러간다 원에 붙어 달리는 다리 그리고 원을 꺼꾸로 돌리는 개미들 보송보송한 구름이 땅에 내려올 때 갈고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방랑자들 모래위에 집을 짓고 텅빈 갑옷만 입고 너덜거린다 한치도 안되는 삶의 공간은 무대위에서 졸고있다 어두운 밤 잠자는 눈을 움직여본다 문자 없는 필기장에 글을 갈겨본다 환히 밝아진 벽빛을 남의 눈에 주지 말고 나에게 비춰보라 그러면 찌그러졌던 얼굴이 보름달로 변해간다 들끊는 대기는 게으른 손을 잡아준다 활기찬 발걸음은 앞을 재촉한다                                -전문   이 시는 이미지 집성으로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토막들의 모임이다. 시인은 어떤 고정된 감정으로 시를 쓰고 있는것이 아니라 열린 상상으로 이미지를 편집하고 있다겠다. 시간,원, 다리, 개미, 구름, 갈고리,방랑자, 집, 갑옷, 무대, 구름, 필기장, 벽빛, 얼굴, 손, 발걸음 등등 사물들이 독자적인 이미지로 되여 한시속에서 움직인다 한수의 시라기보다는 한수의 환상곡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런 이미지들은 다 자기의 독립적인 토막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문덕수시인은 토막을 단위라고 함] 이 토막들은 또 시인의 배렬처럼 요렇게만 놓이는것이 없다, 누구든 자신의 상상에 의하여 바꾸어놓아도 별문제이다. 어느것이 시작 인지 어느것이 결말인지 분명치가 않다. 사실 제일 마지막행을 앞에 가져다 놓아도 무리가 아니다. 줄글로 된 2련시인데 2련을 1련으로 만들어도 무방하다.어느한 이미지나 다 앞에 있어도 되고 뒤에 있어도 되고 중간에 있어도 된다.우리가 대 사막의 가운데 서있다고 하자. 어디가 사막의 시작이고 어디가 사막이 끝인지 보이지 않을것이다. 마찬가지로 배를 타고 바다속에 서있다고 하자 사면은 수평선이다 어디가 시작 이고  어디가 끝인지 누가 알랴. 하지만 사막은 사막대로 넘치고 바다는 바다대로 넘친다. 사막에 섰다면 선자리가 사막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되고, 바다에 섰다면 선자리가 바다의 끝이고 시작이라고 해도 된다. 우에서 이미 언급되였지만 하이퍼시의 이미지들은 독립적인 각자 존재이면서 한시에 집합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이러한 시를 이미지덩어리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련계없이 절대적인 고립으로만 존재하는것이 하나도 없다. 어떠한 사물이나 한가지 성분으로만 구성된 사물도 없다. 하이퍼시구성은 자연과 문화와 우리의 사유에 부합될뿐만 아니라 오늘의 글로벌시대와 컴퓨터시대에 부응하 는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시문학력사를 소급해보면 1960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시인 SJ 생종페르스의 시도 이런 수법이였고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도 이러한 수법이였다. 21세기에 와서 한국의 시인들인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 김규화 등 한국시단을 리드하고 있는 전위적인 많은 시인들의 시들도 이러하다. 그러니까 방순애시인은 로 우리시와 세계의 시 흐름을  접목시키고 있다겠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완전완미하다고 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폭력적 조합으로 된 이미지의  산재   방순애시의 이미지창출은 예측불가능이다. 한이미지로부터 파생되여 나오는 이미지도 그러하거니와 이미지와 이미지 링크도 느닷없이 새롭게도 돌발적으로  기이하고도 괴상하게 산출되고 있다겠다 하이퍼시의 언어로 명명해 본다면 알렉스이다.     여기서   돌은 하늘이 버렸을 때 침묵의 깃발을 든다 갈대숲은 겨울의 어둠속에서 하얀불을 지펴 자기를 지킨다 울창한 숲과 새들 그리고 나의 집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달은 구름속으로 숨어버린다 창백한 손은 이곳에서 떠다니는 거품을 거둬내고 무지개의 현에 맞춰 밤의 찬가를 부른다 날개가 없고 얼굴이 없어도 심연의 사색은 새벽 입김위에 가는 발자취를 한뜸한뜸 수놓는다   는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는 마지막 시의 첫구다. 모순되는 언어들의 집합이다. 의미가 심장하다. 하늘이 언제는 돌을 품고있었는데 버렸다는것이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증명할 어떠한 과학가도 고대학자도 없을것이다. 시인이 창출한 이미 지는  그로데스크하여 기이하고 괴상한  발상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이 말을 풀이해 보면 하늘이 돌을 버렸다는것이다. 이 허구는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고 할수있 다 .하지만 너무 폭력적으로 조합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아래 시구도 그렇다 갈대숲이 하얀 불을 켜고 겨울이면 자기를 지킨다고 한다. 갈대꽃을 불로 전의시켰음이 확연하다. 그런데 이 불은 불이 아니다. 불이면 갈대가 다 타버릴것이 아닌가. 모순 어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창백한 손은 , 등등 이러한 이미지조합들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일상적인 사유로서는 맞지도 않는 말들의 조합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압적으로 억지로 주어맞춘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이야 말로 시구를 새롭게 하고 시를 새롭게 하는 현대시의 데크놀로지 이 다..    다시는 펴지지 않는 잔디들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이 놓여있다 세상 파도는 닫혀진 막을 열고 깊은 곳에 닻을 내린다 새로운 고뇌보따리는 새끼를 꼬고 밤거리 모퉁이를 지나 차도를 넘어 등에 착 달라붙는다                          에서   심장이 톡톡거리며 멈출줄 모른다 대굴대굴 굴러가며 돌아가는 빛은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달빛에 용해된 몸은 도시로 들어간다 가고있는 발길에 말랑말랑한 물방울이 달린다                       에서    파란 하늘에 둥둥 달려있는 커다란 바위덩이위에 번화한 도시가 앉아있다        읽혀지는바와 같은 폭력적으로 창조된 이런 이미지들은 방순애시의 도처에 심심찮게 산재해 있다. .(에서) (에서) ()   선형적인 언어에 대한 일탈과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창조로 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언어의 흐름을 새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문법을 파괴하는 빛이 찬란하다고 해야 하리라. 시는 언제나 낡은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떠올리는 언어의 화살을 날림일것 이다. 이런 새로운 언어화살을 날리는것이 없다면 시의 창의성을 무엇으로 말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언어로 된 이미지 창출이 많을수록 읽어보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계 를 보여줄수 있는것이다. 시인만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가 없는 시들은 왕가물속의 풀잎처럼 나부라져 맥을 추지 못할것이다. 이러한것들은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언어의 폭력적조합이나 이미지의 폭력적조합은 현대시의 문턱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문턱을 넘어서야 현대시에 입문했다고 할수 있으며 하이퍼시에 도착할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이 문턱은 높다면 높고 낮다면 낮다. 언어연금술을 장악하면 이 문턱은 낮은것이요 언어연금술을 장악 하지 못하면 이 문턱은 높아지는것이다. 이 문턱은 다리가 길어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고 키가 커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고 시를 오래 썼다하여 절로 넘어가는 문턱도 아니다. 시적예술에 대한 피타는 노력과 새로운 탐구만이 이 문턱을 넘어서게 할것이다.  방순애시인은 이 문턱을 넘은것 같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창의성이 강하고 다채롭고 상상이 포만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시인은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며 자유롭게 풀의 세포속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고 우주의 해나 달속으로도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행운아일것이다.         나오는 말     우리가 걸어온 시문학의 길은 대개 이러하다고 할수 있겠다. 해방이 되여서부터 문화혁명까지 대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고, 개혁개방후에는 자아를 내세우는 시를 썼다겠다.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으며 우리의 시인들중 현실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시인들이 무아의 시문학을 추구하고 있다. 무아의 시를 추구하는것은 지금은 시내물처럼 조잘대지만 앞으로는 대하로 굽이 칠것이다 시내물처럼 조잘대고 있는 시가 하이퍼시가 아닐가. 방순애의 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는 하이퍼시로서  우리 시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는 시의 다선구조로 단선구조를 대체하였고, 객관이미지로 시인의 독백을 대체하였고,  사물을 변형 시키고 변현물의 움직임으로 설명과 해설을 대체하였고,  이미지의 편집자 자격으로 시에서의 자아를 축출하였다. 고정된 관념에서 일탈하여 무한한 상상을 펼치는 방순애의 시는 읽고 생각하던 시로부터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의 전의를 꾀한것 같다 애기가 금방 태여나면 눈도 뜨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나날이 자라고 커가면서 어른으로 되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지금은 갓 태 여난 한 아기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 아기는 눈눈을 뜰것이며 말을 할것이며 힘차게 달아다닐것이며 싱싱한 어른으로 자라날것이다. 방순애시인에게 아직도 과제가 없는것은 아니다. 시e는 추상성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때가 간혹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령혼에서 맛 보고(나비) 내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피부에 입력한다(마음의 그림) 몽상도 좋고 환상도 좋다 (감초의 그림자) 가는 가을날 잡고/가슴에 남은 말을 건네려고 하는데/그리움만 우두커니 세워놓고(서쪽달) 이러한 시구들은 형상성보다 추상성이 짙어서 머리에 영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희미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극복할바라고 생각한다. 시구는 사물운동의 세부를 섬세하게 그릴수록 그 힘이 더 강해진다. 추상적언어라렬의 멋진 말은 시에 손색을 주기가 일수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에 류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빈퉁재는 소리는 잘 나지만 속에 든것이 없는것과 같다. 쌀이 골독한 퉁재를 두드리면 소리는 잘 나지 않지만 속에는 쌀알이 가득 차있어 좋은것이다. 방순애시인은 또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더 다채롭게 쓰겠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며 그 연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방순애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하면서.                                     2013년 5월 8일 서재에서      
1    유치환<수>(首)는 수(秀)작이다 댓글:  조회:2435  추천:0  2012-09-19
한국제5회 청마문학연구상수상작 청마 유치환의 시 (首)는 수(秀)작이다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청마유치환시를 제일 처음으로 접촉한것은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우리 작가협회에 많은 책을 보내왔는데 그속에는 홍윤기선생이 집필한 이란 책도 있었다. 거기에 실린 청마유치환의 시 이 인상이 깊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며 하는 시구들과 처음으로 표대 끝에 기발을 단 이가 누구인가고 질문하는 종결구는 필자를 진동시키고도 남은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리상규씨가 찍어낸 제6집에서 유치환의 시 룰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6집에 실린 시가 죄다 친일시라는 모자를 씌운 작품들이였다. 를 찬찬히 읽어보고 필자는 어리둥절하였다. 이 시는 친일시 같지 않는데 아니, 친일시가 아닌데 왜 친일시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날 친일문학을 연구편집한 연변의 최삼룡선배님과 이런 말을 했다. 최형은 한국에서 친일시로 이미 정평이 난지가 오래다는것이였다. 그후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필자의 졸견도 한번 내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념원을 품었댔는데 오늘 기회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왜 필자는 청마의 시 를 친일시로 보지 않는가를 아래에 설명해 보려한다. 1. 시 의 층차 시 의 전문을 먼저 읽어보자. 首 유치환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 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쓴 시이다. 이 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가고 생각하니 폴 발레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 242쪽. 민음사출판)현대시란 이런것이 아닐가. 외연속에 외연과 다른 내연이 잠재해 있는 시가 현대시일것이다. 시 가 말하는 외연속에는 어떤 내함이 잠재해있을가? 이미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가? 이러한것을 알자면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해보아야 할것이다 . 청마의 시 는 세 개층차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첫층차는 처음부터 까지이고, 두 번째층차는 로부터 까지이고, 로부터 마지막까지 세 번째층차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2. 첫번째층차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상기한 것이 의 첫층차로서 시의 서두라고 할수 있겠다. 청마는 시적대상의 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적대상을 어떤한 것이란것을 떠올리고 있다. 어떤 환경인가? 다. 시인은 점층적인 방법으로 큰 것으로부너 작은 것에로 환경을 이동시킨다. 12월의 북만으로부터 흑룡강, 흑룡강으로부터 다시 가성네거리로 초첨을 맞추고있다. 하는데 12월의 북만은 눈의 계절이여서 눈이 안올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눈도 안오고 하였겠는가? 필경 눈은 왔겠는데 시인은 왜 눈도 안오고 하였는가? 북만에 눈이 안 왔다는 것은 북만이 자연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바로 청마의 의도가 슴배여 있다고 할수 있다. 청마가 북만에 있을 때는 그곳이 일제침략자의 구두발에 짓밟혀 황량한 고장이 되었을 때다. 사람이 살곳이 못되는 고장이다. 그래서 청마는 눈도 오지 않은 곳이라고 했을것이다. 일제가 통치하는 고장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설정은 일제에 대한 청마의 타매이고 야유이며 조소이다. 로 시적환경을 마무리짓고 있는데 이것은 눈이 와야 할 곳에 눈이 오지 않는 원인을 밝힌 것이라고 할수 있다. 오직 만물에 대한 가혹과 혹독만으로 넘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흑룡강 또는 가성 네거리다. 그러니 하늘도 노여워서 12월이 되었건만 눈도 보내지 않는 고장이다. 이 고장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대답하지 않아도 불보기처럼 뻔하다. 일제침략자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로선이 빚어낸 것이라고 삼척동자라도 말할수 있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이런 악렬하고 암흑한 고장에서 의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내결려있는데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서 소년같이 작다. 반쯤 뜬 눈은 저물어가는 차디찬 하늘과 삭북의 산하를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년에 은 누구였던가? 민족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사람들이 이였다. 다시 말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항일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을 잡아 릉지처참을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서 머리를 베여 네거리에 높이 걸어놓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왕도락토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만행인 효수였다. 효수자체가 극악무도한 짓인 것이다. 청마는 아주 대담하게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겠다. 이따위 망년된 짓으로 민중을 억눌러 식민통치를 보호유지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 이런 짓을 하루이틀에 벌린것이 아니라 검푸른 얼굴이 말라서 소년같이 적게 될 때까지 장시간으로 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보다못해 노하여 12월의 북만에 눈도 보내주지 않았으리라. 시구는 청마의 마음을 한결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반이라도 눈을 뜨고 있다는 자체가 이라는 죄명에 대한 불복과 원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세상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이다. 여기서 고 하였는데 흑룡강의 삭북에는 만백성이 우러러보던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이 있었다. 우리의 많은 항일용사들은 쏘베트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몸을 던져 항일하였던 것은 당년의 현실이였다. 일제의 압박과 착취와 략탈이 없는 사회가 들의 추구였고 리상이였던 것이다. 시인청마유치환은 시 에서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켜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의 두 번째층차 두 번째 층차를 고찰하기 전에 당년에 청마유치환시인이 어떠한 사상으로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째층차의 분석에 유리한 길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서려명박사가 쓴 를 론한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청마는 김좌진의 희생에 대하여 (15쪽) 청마유치환은 김좌진 장군의 희생을 이라고 명백하게 밝히였다. 이 이란 말은 청마의 당년의 사상을 말해준다. 청마유치환이 당년에 항일을 옹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옥같은 말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그런데 청마는 두 번째층차를 이렇게 쓰고있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의 동북까지 강점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악착스러운 정체를 변호하기 위하여 애쓰던 당년의 선전구들과 일맥상통하다. 아마 이 단락의 내용이 있어서 박태일교수가 를 친일시라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왜 이 시에 이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차용하였는가이다. 을 내세웠던 청마가 이 시구들로 일제의 침략을 변호하거나 효수를 당연지사라고 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혹자는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어떻게 눈을 감고 야웅하는가를 표현한것이다. 중국에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이 있다. 청마는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피는 피로 값는다는 수법으로 두 번째 층차를 쓴 것이다. 원쑤의 말로 원쑤의 론리로 원쑤의 악랄함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인정된다. 1련에서 12월에도 북만에 눈이 오지 않았다는 그 원인을 사회적인 각도에서 다시 한번 해명해 본 것이기도 하다. 바로 네놈들이 효수까지 하면서 이런 지껄이를 하고있으니 12월이 되어도 눈이 오지 않는 다고 증언을 하고 있는것이다. 앞에서는 자연환경을 빌어서, 효수라는 문명치 못한 수작을 부리는 사실을 빌어서 원인을 까밝히였다면, 여기서는 일제침략자들이 괴까리는 유론으로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억지공사인가? 아니다. 청마는 일제침략자의 이런 황당한 유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를 보면 을 그리는 내용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효수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제침략자가 자신의 통치를 변호하는 제2층차의 말이다. 제2층차의 말이 효수를 비호하고 있는 일제의 더러운 낯짝을 드러낸것이며 식민통지를 합법화하려는 본질을 드러낸것이다. 청마는 일제의 말을 빌어 일제의 뺨을 치며, 일제의 허울을 효수로써 벗겨버리여 만천하에 그 죄악을 밝아놓고 질책하고 있다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표현속에 시인의 예리한 마음이 숨겨져있다고 하겠다. 이런것을 두고 (문심조룡 557쪽. 연변인민출판사.)라고 하였으리라. 사실 시에서 이런 수법을 쓴다는것은 용의한 일이 아니다. 독을 독으로 치는 수법은 일상적으로 말하면 어떤 비평문장이나 서사작품에서 쓰는 수법이지 정서를 읊는 시의 수법이 아니다. 청마는 간이 크게 다른 장르에서 쓰는 수법을 운문인 시에 도입하였다. 이런 수법을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든 흔치 않는 사례이다. 언어마다 시구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조소의 운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제2층차라 하겠다. 중국의 에 이런 말이 있다. (문심조룡 389쪽. ) 제2층차의 시구들은 왜놈들 말이였지만 표현으로써 청마의 가 되게 한것이다. 이 층차는 청마유치환시인의 시적재능이 발휘된것으로서 시의 을 획득시키며 시인 풍격의 을 현시하고 있으며, 학식이 있고 하면서도 신랄하다는 결론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여기서 청마는 풍자와 조소로,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한 층차를 구사함으로써 시의 기이함과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겠다. 4.의 세 번째 층차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것이 세 번째 층차이다. 이 마지막 층차를 따져보면 두가지 내용으로 나뉘여져 있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여기까지 하나의 내용이라고 하겠다. 풍요로운 거리가 아닌 각박한 거리를 지나가면서 시적 자아는 생명의 위험함과 그 결의를 깨닫는다.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을 청마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눈을 뜨고 죽은 자를 눈감기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할수 있는 일이 아니고 친근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니 하는 일이다. 눈을 감으란것은 효수된 자에 대한 련민과 동정과 사랑을 보여주는것이며, 효수된 자에 대한 명복을 비는 주정토로이며 호소이다. 여기서 시인의 애증이 더욱 분명하고도 명랑하게 드러난다. 아아 불모한 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는 아아 탄식하면서 이라고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 이 시구는 전반시의 핵심이고 주제이며 당년의 사회에 대한 청마의 개괄이며 효수에 대한 청마의 태도이다. 청마는 도리도 시비도 통하지 않는 불모지라고 당년을 못밖는다. 그러니 어찌 12월이 온들 눈이 내릴 수 있었으랴.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인이 웨친 마지막 시구이다, 이 시구는 청마의 마지막 바람을 보여준다. 속에서는 그어떤 구도도 구할수 없으므로 시인은 자기의 소원을 하늘에 대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내려달라고 빈다. 눈이 내리면 겨울도 겨울 다와지고, 12월도 12월 다와지고, 북만도 북만 다와지고, 가성네거리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될것이다. 눈이 내리면 그 의 머리도 눈에 파묻치게 되어 다른것으로도 보일수 있는것이고, 눈이 내리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효수를 없애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 마지막 한마디 시구는 말그대로 천만냥이 싸다. 효수당한 자에 대한 청마의 련민과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각인시켰다고 하겠다. 하는 호곡소리를 가슴에 담노라면 를 평할 때 서려명 비평가가 청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또다시 떠오른다. 유치환은 1940년대 초기의 할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바가 있다. ( 6쪽) (동상 10쪽) 청마유치환의 이런 말씀들은 당년의 그의 심정의 고백으로써 청마는 극한의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오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부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인데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 효수를 하고있는 가성네거리, 식민지유설로 백성을 유린하는 세상, 량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 누구인들 허무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랴. 일제치하의 백색공포속에서 허무를 초극할수 없는 청마, 그래서 를 부르짖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청마가 아니였으랴. 시인은 허무에 빠졌을 때 자연스럽게 고독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분노하게 되고 심장으로 부르짖게 된다. 그 부르짖음을 가슴속으로부터 토해놓은 것이 시 가 아니랴! 나오는 말 이 백번지당한 말은 얀 무카로브스키가 에서 한 말이다. ( 44쪽) 시적언어의 기능으로 하여 시언어는 일상어와 다르다. 시언어는 일상어보다 다른 내포를 가지고 있다. 즉 시인은 일상어로 시를 쓰지만 일상어속에다 다른 함의를 부여하게 되는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시인은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다른 함의를 부여하여 언어를 다시 깨우고 새롭게 하며 그로인하여 시의 새로운 창의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게 되고 언어의 연금사라고 하게 된다. 청마의 시 를 읽을 때 우리는 청마가 쓴 시어의 새로운 함의에 모름지기 류의하여야 한다. 이나 과 같은 반어에 대하여 잘 리해하여야 이 시의 진실한 맛을 볼수있다. 시의 이미지는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상적일지라도 ) 그런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깨침을 주려는데 있다. 우리 눈앞으로 흘러가는 시의 이미지 밑바닥에는 언제나 새로운 함의가 용해되여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은 직설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사물에 의탁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감수를 받는것이 시의 기쁨인것이다. 청마의 시에서 나 같은 이미지들은 말밖에 말이 있는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음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청마의 시 를 헛 읽게 되며 시의 진미를 감수할 수 없게 될것이다. 독을 독으로 치는 청마의 표현력은 뛰여난 표현력이다. 이 장치를 수용한 청마의 스찔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올바른 리해를 가져와야지 텍스트에 나타난 그대로 수용한다면 오독을 초래하게 된다. 수박 겉 핥기를 하지 말고 수박을 깨여서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보아야지 타매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청마의 시 는 친일로 표현된 시인 것이 아니라 일제침략자에 대한 반발이며 공소이며 단죄이며 이다. 는 친일시가 아니라 는 반일 수작秀作이다. 문화시대 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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