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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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수>(首)는 수(秀)작이다
2012년 09월 19일 07시 22분  조회:2436  추천:0  작성자: 최룡관
한국제5회 청마문학연구상수상작

청마 유치환의 시
<수>(首)는 수(秀)작이다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청마유치환시를 제일 처음으로 접촉한것은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후의 일이다. 한국에서 우리 작가협회에 많은 책을 보내왔는데 그속에는 홍윤기선생이 집필한 <<현대시해설>>이란 책도 있었다. 거기에 실린 청마유치환의 시 <<기발>>이 인상이 깊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며 하는 시구들과 처음으로 표대 끝에 기발을 단 이가 누구인가고 질문하는 종결구는 필자를 진동시키고도 남은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의 리상규씨가 찍어낸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6집에서 유치환의 시 <<수>>룰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6집에 실린 시가 죄다 친일시라는 모자를 씌운 작품들이였다. <<수>>를 찬찬히 읽어보고 필자는 어리둥절하였다. 이 시는 친일시 같지 않는데 아니, 친일시가 아닌데 왜 친일시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날 친일문학을 연구편집한 연변의 최삼룡선배님과 이런 말을 했다. <<형님, 청마의 시 <수>가 제가 보건대는 친일시가 아니던데요.>> 최형은 한국에서 친일시로 이미 정평이 난지가 오래다는것이였다. 그후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필자의 졸견도 한번 내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하는 념원을 품었댔는데 오늘 기회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왜 필자는 청마의 시 <<首>>를 친일시로 보지 않는가를 아래에 설명해 보려한다.


1. 시 <<수>>의 층차


시 <<수>>의 전문을 먼저 읽어보자.


유치환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 <<수>>는 현대적인 기법으로 쓴 시이다. 이 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가고 생각하니 폴 발레리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242쪽. 민음사출판)현대시란 이런것이 아닐가. 외연속에 외연과 다른 내연이 잠재해 있는 시가 현대시일것이다. 시 <수>가 말하는 외연속에는 어떤 내함이 잠재해있을가? 이미지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가? 이러한것을 알자면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을 해보아야 할것이다
.
청마의 시 <<수>>는 세 개층차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첫층차는 처음부터 <<산하를 바라보고있도다>>까지이고, 두 번째층차는 <<너의 죽어>>로부터 <<피의 법도로다>>까지이고,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로부터 마지막까지 세 번째층차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2. 첫번째층차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상기한 것이 <<수>>의 첫층차로서 시의 서두라고 할수 있겠다. 청마는 시적대상의 환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적대상을 어떤한 것이란것을 떠올리고 있다. 어떤 환경인가?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이 적은 가성 네거리>>다. 시인은 점층적인 방법으로 큰 것으로부너 작은 것에로 환경을 이동시킨다. 12월의 북만으로부터 흑룡강, 흑룡강으로부터 다시 가성네거리로 초첨을 맞추고있다.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하는데 12월의 북만은 눈의 계절이여서 눈이 안올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눈도 안오고 하였겠는가? 필경 눈은 왔겠는데 시인은 왜 눈도 안오고 하였는가? 북만에 눈이 안 왔다는 것은 북만이 자연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바로 청마의 의도가 슴배여 있다고 할수 있다. 청마가 북만에 있을 때는 그곳이 일제침략자의 구두발에 짓밟혀 황량한 고장이 되었을 때다. 사람이 살곳이 못되는 고장이다. 그래서 청마는 눈도 오지 않은 곳이라고 했을것이다. 일제가 통치하는 고장은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설정은 일제에 대한 청마의 타매이고 야유이며 조소이다.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로 시적환경을 마무리짓고 있는데 이것은 눈이 와야 할 곳에 눈이 오지 않는 원인을 밝힌 것이라고 할수 있다. 오직 만물에 대한 가혹과 혹독만으로 넘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흑룡강 또는 가성 네거리다. 그러니 하늘도 노여워서 12월이 되었건만 눈도 보내지 않는 고장이다. 이 고장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대답하지 않아도 불보기처럼 뻔하다. 일제침략자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로선이 빚어낸 것이라고 삼척동자라도 말할수 있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이런 악렬하고 암흑한 고장에서 <<수>>의 사건은 벌어지고 있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비적의 머리 두 개 내결려있는데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서 소년같이 작다. 반쯤 뜬 눈은 저물어가는 차디찬 하늘과 삭북의 산하를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년에 <<비적>>은 누구였던가? 민족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일제와 싸운 사람들이 <<비적>>이였다. 다시 말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항일하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을 잡아 릉지처참을 만들고도 성차지 않아서 머리를 베여 네거리에 높이 걸어놓고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왕도락토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만행인 효수였다. 효수자체가 극악무도한 짓인 것이다. 청마는 아주 대담하게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검푸른 얼굴이 말라 소년같이 적고>>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겠다. 이따위 망년된 짓으로 민중을 억눌러 식민통치를 보호유지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 이런 짓을 하루이틀에 벌린것이 아니라 검푸른 얼굴이 말라서 소년같이 적게 될 때까지 장시간으로 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보다못해 노하여 12월의 북만에 눈도 보내주지 않았으리라.
<<반쯤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시구는 청마의 마음을 한결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직도 반이라도 눈을 뜨고 있다는 자체가 <<비적>>이라는 죄명에 대한 불복과 원한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세상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는것이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여기서 <<삭북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고 하였는데 흑룡강의 삭북에는 만백성이 우러러보던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이 있었다. 우리의 많은 항일용사들은 쏘베트처럼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몸을 던져 항일하였던 것은 당년의 현실이였다. 일제의 압박과 착취와 략탈이 없는 사회가 <<비적>>들의 추구였고 리상이였던 것이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시인청마유치환은 시 <<수>>에서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켜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수>>의 두 번째층차


두 번째 층차를 고찰하기 전에 당년에 청마유치환시인이 어떠한 사상으로 살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두 번째층차의 분석에 유리한 길을 닦아주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서려명박사가 쓴 <<청마유치환의 북만 기행시>>를 론한 문장에 이런 단락이 있다. 청마는 김좌진의 희생에 대하여 <<백야 김좌진 장군이 간첩의 흉탄에 쓰러져 그의 붉은 의혈의 물든 절치切齒의 땅도 바로 이 부근이다.>> (15쪽) 청마유치환은 김좌진 장군의 희생을 <<붉은 의혈>>이라고 명백하게 밝히였다. 이 <<붉은 의혈>>이란 말은 청마의 당년의 사상을 말해준다. 청마유치환이 당년에 항일을 옹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옥같은 말이라고 아니 할수 없다. 그런데 청마는 두 번째층차를 이렇게 쓰고있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의 동북까지 강점하고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악착스러운 정체를 변호하기 위하여 애쓰던 당년의 선전구들과 일맥상통하다. 아마 이 단락의 내용이 있어서 박태일교수가 <<수>>를 친일시라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왜 이 시에 이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차용하였는가이다. <<붉은 의혈>>을 내세웠던 청마가 이 시구들로 일제의 침략을 변호하거나 효수를 당연지사라고 한 증거가 아닌가 하고 혹자는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이 시구들은 일제침략자가 어떻게 눈을 감고 야웅하는가를 표현한것이다.
중국에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이 있다. 청마는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피는 피로 값는다는 수법으로 두 번째 층차를 쓴 것이다. 원쑤의 말로 원쑤의 론리로 원쑤의 악랄함을 백일하에 드러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인정된다. 1련에서 12월에도 북만에 눈이 오지 않았다는 그 원인을 사회적인 각도에서 다시 한번 해명해 본 것이기도 하다. 바로 네놈들이 효수까지 하면서 이런 지껄이를 하고있으니 12월이 되어도 눈이 오지 않는 다고 증언을 하고 있는것이다.
앞에서는 자연환경을 빌어서, 효수라는 문명치 못한 수작을 부리는 사실을 빌어서 원인을 까밝히였다면, 여기서는 일제침략자들이 괴까리는 유론으로 한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억지공사인가? 아니다. 청마는 일제침략자의 이런 황당한 유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불모한 사변의 풍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를 보면 <<불모한 사변의 풍경>>을 그리는 내용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효수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제침략자가 자신의 통치를 변호하는 제2층차의 말이다. 제2층차의 말이 효수를 비호하고 있는 일제의 더러운 낯짝을 드러낸것이며 식민통지를 합법화하려는 본질을 드러낸것이다. 청마는 일제의 말을 빌어 일제의 뺨을 치며, 일제의 허울을 효수로써 벗겨버리여 만천하에 그 죄악을 밝아놓고 질책하고 있다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어표현속에 시인의 예리한 마음이 숨겨져있다고 하겠다. 이런것을 두고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속에서 드러나게 되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문심조룡 557쪽. 연변인민출판사.)라고 하였으리라.
사실 시에서 이런 수법을 쓴다는것은 용의한 일이 아니다. 독을 독으로 치는 수법은 일상적으로 말하면 어떤 비평문장이나 서사작품에서 쓰는 수법이지 정서를 읊는 시의 수법이 아니다. 청마는 간이 크게 다른 장르에서 쓰는 수법을 운문인 시에 도입하였다. 이런 수법을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든 흔치 않는 사례이다. 언어마다 시구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풍자와 조소의 운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제2층차라 하겠다.

중국의 <문심조룡>에 이런 말이 있다. <<문학작품들은 뜬 구름처럼 변화가 무쌍하기 마련이고, 예술작품들은 파도처럼 다양함이 로정되기 마련이다. 문장과 론리상의 평범함과 특출함은 그 사람의 재능과 분리될 수 없고, 풍경과 취미상의 강건함과 유약함은 그 사람의 기질과 구별될 수 없으며, 작품안에 인용된 것과 진술된 것의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의 학식과 별개일 수 없고, 작품의 체제상의 방정하고 우아함과 비속함은 그 사람의 습관과 상반될수 없다. 그렇듯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개성에 따라 창작을 하는 것이기에 작품들의 독특함은 마치 사람의 얼굴모양이 저마다 다른 것과도 같다>>(문심조룡 389쪽. )

제2층차의 시구들은 왜놈들 말이였지만 <<뜬 구름처럼 변화가 무쌍한>> 표현으로써 청마의 <<수>>가 <<파도처럼 다양하게 로정>>되게 한것이다. 이 층차는 청마유치환시인의 시적재능이 발휘된것으로서 시의 <<독특함과 특출함>>을 획득시키며 시인 풍격의 <<강건함>>을 현시하고 있으며, 학식이 있고 <<체제가 방정>>하면서도 신랄하다는 결론을 우리들에게 시사한다. 여기서 청마는 풍자와 조소로, 독은 독으로 친다는 수법으로 한 층차를 구사함으로써 시의 기이함과 신선도를 높이고 있다겠다.


4.<수>의 세 번째 층차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것이 세 번째 층차이다. 이 마지막 층차를 따져보면 두가지 내용으로 나뉘여져 있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여기까지 하나의 내용이라고 하겠다. 풍요로운 거리가 아닌 각박한 거리를 지나가면서 시적 자아는 생명의 위험함과 그 결의를 깨닫는다.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을 청마는 눈을 감으라고 한다. 눈을 뜨고 죽은 자를 눈감기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할수 있는 일이 아니고 친근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니 하는 일이다. 눈을 감으란것은 효수된 자에 대한 련민과 동정과 사랑을 보여주는것이며, 효수된 자에 대한 명복을 비는 주정토로이며 호소이다. 여기서 시인의 애증이 더욱 분명하고도 명랑하게 드러난다.


아아 불모한 사변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는 아아 탄식하면서 <<불모한 사변의 풍경>>이라고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 이 시구는 전반시의 핵심이고 주제이며 당년의 사회에 대한 청마의 개괄이며 효수에 대한 청마의 태도이다. 청마는 도리도 시비도 통하지 않는 불모지라고 당년을 못밖는다. 그러니 어찌 12월이 온들 눈이 내릴 수 있었으랴.

하늘이여 사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시인이 웨친 마지막 시구이다, 이 시구는 청마의 마지막 바람을 보여준다. <<불모한 사변의 풍경>>속에서는 그어떤 구도도 구할수 없으므로 시인은 자기의 소원을 하늘에 대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눈이라도 함빡 >> 내려달라고 빈다. 눈이 내리면 겨울도 겨울 다와지고, 12월도 12월 다와지고, 북만도 북만 다와지고, 가성네거리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될것이다. 눈이 내리면 그 <<비적>>의 머리도 눈에 파묻치게 되어 다른것으로도 보일수 있는것이고, 눈이 내리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효수를 없애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 마지막 한마디 시구는 말그대로 천만냥이 싸다. 효수당한 자에 대한 청마의 련민과 사랑의 감정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각인시켰다고 하겠다.
<<하늘이여>> 하는 호곡소리를 가슴에 담노라면 <<청마유치환의 북만기행시>>를 평할 때 서려명 비평가가 청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또다시 떠오른다.
유치환은 1940년대 초기의 할빈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바가 있다. <<암울한 계절의 이 하늘 아래를 나는 그저 집시처럼 방황하여 지향할 곳을 몰랐던 것입니다.>>(<<청마유치환의 북만기행시>> 6쪽)
<<이때 내자신을 스스로가 주체 못하는 밑 없는 절망속에서 아프게도 나를 불러 손짓하고 또한 내 스스로 그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망향의 먼 향수는 어쩌면 현실의 나의 고향이나 조국에 대한 그것이 아니라 령혼이 돌아가 의지할 그러한 정신의 안주지가 아니였던지 모릅니다.>>(동상 10쪽)
청마유치환의 이런 말씀들은 당년의 그의 심정의 고백으로써 청마는 극한의 상황에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무주의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오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부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인데도 눈이 오지 않는 북만, 효수를 하고있는 가성네거리, 식민지유설로 백성을 유린하는 세상, 량심이 있는 지성인이라면 그 누구인들 허무속에서 몸부림치지 않으랴. 일제치하의 백색공포속에서 허무를 초극할수 없는 청마, 그래서 <<하늘이여>>를 부르짖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청마가 아니였으랴. 시인은 허무에 빠졌을 때 자연스럽게 고독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며 분노하게 되고 심장으로 부르짖게 된다. 그 부르짖음을 가슴속으로부터 토해놓은 것이 시 <<수>>가 아니랴!


나오는 말


<<시적언어는 기능에 의해서만 영속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기능이란 속성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현상의 속성들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백번지당한 말은 얀 무카로브스키가 <<시적언어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다. (<시의 리해> 44쪽) 시적언어의 기능으로 하여 시언어는 일상어와 다르다. 시언어는 일상어보다 다른 내포를 가지고 있다. 즉 시인은 일상어로 시를 쓰지만 일상어속에다 다른 함의를 부여하게 되는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시인은 언어를 재구성함으로써 다른 함의를 부여하여 언어를 다시 깨우고 새롭게 하며 그로인하여 시의 새로운 창의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게 되고 언어의 연금사라고 하게 된다.
청마의 시 <<수>>를 읽을 때 우리는 청마가 쓴 시어의 새로운 함의에 모름지기 류의하여야 한다. <<비적>>이나 <<무뢰한 넋>>과 같은 반어에 대하여 잘 리해하여야 이 시의 진실한 맛을 볼수있다.
시의 이미지는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상적일지라도 ) 그런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깨침을 주려는데 있다. 우리 눈앞으로 흘러가는 시의 이미지 밑바닥에는 언제나 새로운 함의가 용해되여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은 직설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사물에 의탁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하여 새로운 감수를 받는것이 시의 기쁨인것이다. 청마의 시에서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나 <<불모한 사변의 풍경>>같은 이미지들은 말밖에 말이 있는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음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청마의 시 <<수>>를 헛 읽게 되며 시의 진미를 감수할 수 없게 될것이다.
독을 독으로 치는 청마의 표현력은 뛰여난 표현력이다. 이 장치를 수용한 청마의 스찔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올바른 리해를 가져와야지 텍스트에 나타난 그대로 수용한다면 오독을 초래하게 된다. 수박 겉 핥기를 하지 말고 수박을 깨여서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보아야지 타매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청마의 시 <<수>>는 친일로 표현된 시인 것이 아니라 일제침략자에 대한 반발이며 공소이며 단죄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수>>는 친일시가 아니라 <<수>>는 반일 수작秀作이다.

문화시대 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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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2 ]

12   작성자 : 한심
날자:2013-05-14 12:43:05
연변의 최고의 이름있는 시인-최룡관 씨의 손 끝에서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평론이 나오리라고 정말로 상상 밖이 입니다.
물론 천명의 독자가 있으면 천명의 햄리트가 있다는 수용미학적인 견지에서 한 말도 있습니다만, 유치환의 친일시-[수]를 보고 이렇게 외곡할수 있는 최룡관씨는 수평이 없다고 할가 아니면 돈을 위해서는 량심과 민족의 자존도 버릴수 있는 극악 무치한 사람이라 할가 갈피가 서지 않네요.
어디를 봐서 [수] 저항시입니까!
저 먼 하늘 나라에서 양정우 장군님이 굽어보십니다.

이미 1932년도 9.18사변 직전의 일본신문들을 보면 공산당을 비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효시된 두 머리는 비적- 공상당을 가르킵니다.

물론 일본놈들이거나 김문학 그리고 최룡관 씨와 같은 친일에 미친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자 양정우 장군 같은 분들이 비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인 사람이라면 친일분자들이 먹다 남긴 턱주거리를 주어먹고 그같은 망녕은 죄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와 민족 앞에 머리숙여 사죄를 하십시오.
11   작성자 : 용관이보라
날자:2013-05-08 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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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필요한남북한开城초신조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한다※ 댓글
대학교수?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교수같은소리 하고있네 조선족의 범죄율은 외국인범죄의 중추세력으로 이미 자리잡았음 범죄의종류도 다양함. 살인,강도는 기본이고 마약, 사기(보이스피싱),도박, 인신매매,매춘, 서류위조(입국서류),성범죄,납치, 폭행,절도,도둑질,....이루 헤아릴 수 조차없음 외국인 범죄의 60%에 근접할정도로 중국인(대부분 조선족)의 범죄율은 상상초월 아마 인구대비 조선족의 범죄율은 세계최강일듯...올해 2만건 돌파할걸로 기대 ㅋㅋㅋㅋ 과거 한국을 침공한적도있는 조선족을...그래도 불쌍하다고 어렵사리 중국당국과 협의하여 돈벌게 방문하도록 허가까지 해주었으면 고마워서라도 조용히 살다가기는 커녕, 남의나라에와서 이렇게까지 무자비하고 지독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중국에 체류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100만명정도 된다며? 그렇게 많은 한국인이 중국에 살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중국인을 살인.강도질 하는것 봤냐? 기껏해야 교통범죄가 주류겠지...가끔 마약사범이 있다는건 인정 죄질이 틀리고 범죄의 유형과 잔인성 그리고 범죄율 자체가 아예 비교가 안되지? 제발 조선족이여 동포라는 말좀 하지마라 제발 중국인으로 살아줘............. 부탁이다.남북한은 이미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북한이 원하는 대화란 대화에서 한국으로부터 돈과 식량을 받아내 북한 특권층이 먹고 살고 김씨왕조 유지를 위한 자금으로 쓰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선군정치 속성상 한국이 돈과 식량을 주는데 상관없이 끈임없이 한국에 도발을 하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한국 국민 대부분도 북한 지원을 원하고 있지 않으며 북한에 이제는 관심도 없다. 조선족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북한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감상적으로 북한을 이해하고 동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는 조선족들은 잔혹한 북한 독재정권을 쉽게 받아들이며 독재정권과의 대화를 부담없이 받아들이는데 민주주의 체재하의 한국인들은 이를 배격한다. 정서상 맞지 않아 북한에 멀미를 느끼는 한국인이 많다. 탈북자 고령층 지식인의 말로는 정규군과 지원 세력을 합해서 도합 10여만명의 조선족이 6-25 남침의 선봉부대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중 수많은 조선족들이 전사했다. 현재 조선족 대부분의 가족이 6-25 참전 조선족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막상 피해를 입은 한국은 이를 용서하고 조선족들을 한국에 받아들이고 있으나 6-25 때 한국을 침략한 조선족의 자손들은 아직도 친북성향과 반한인사들이 많다. 이런 현상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가족적 역사적 뿌리 때문에 조선족과 북한의 관계는 깊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북한이 도발만 안한다면 북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정말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평생의 좌우명으로 하겠습니다.자식들에게도 잘 들려주고요.정말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평생의 좌우명으로 하겠습니다.자식들에게도 잘 들려주고요.<< 5월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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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했던 일본
2012년 09월 01일 19시 24분 조회:250 추천:0 작성자: kiruu
이것이 일본인 들의 실체 입니다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

하드니 그래도 모자라

다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점령 할려고 합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끔찍한 사진이 많으니 심장이 약한분은 주의가 필요 합니다.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
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뒷편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독립군 병사를 작두로 목을 짤라 공중 높이 매달아 놓았다.
추운 겨울 날씨로 오랫동안 매달아 경각심을 주기위해 인간이 할수 없는
최악의 형벌을 자행 했었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일본인의 입가에 미소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
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
좔영 하였다.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을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 야산 공동
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군인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10   작성자 : 이 늙은개야!
날자:2013-05-05 21:46:55
9 작성자:화이팅날자:2013-05-03 15:31:13최룡관선생닌게 알리지요. 때가된것같은데 평론수평 대단한 선생이 이제는 어디한번 '남경대도살'도 '이제는 불식할때'가됏다고하게끔 평론을해보시지요.그런다면 일본의극우세력들의 비위에들어맞을수있길래 상을많이줄겝니다.틀림없슨니다.돈벌려면야 챤스를 잘봐요지요.기회놓칮말고 남결대도살이란 말도안된다고 들고나오세요."수"를 수작이라하듯이말입니다. 선생의 탁월한발견에 정말정말 탄복이 가는군요! 화이팅! 이 늙은개야!
9   작성자 : 반역자처단
날자:2013-04-30 11:55:59
작성자 : 반역무리처단날자:2013-04-29 00:57:10청파문학상 유치는 연변문인들의 수치 입니다.왜서 문인 이라는 자들이 글이나 쓰고 살일이지
장사꾼들이 하는 이벤트를 앞장서서 고집하는지요, 진실을 말하고 인민들을 탄압하는 국가기간이나 관리자놈들을 질타하고 사는게 작가들의 본분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추잡하고 구린나는 협하회 간부의 치졸한 시를 가지고 반일시라고 목구멍으로 외치는것은 정신병자입니다.코흘리게 돈을 주어 먹어도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문인 이라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최룡관 아바이는 정신 나가서 했다치고 최룡관이가 얻어온 똥구멍의 코딱지라도 얻어 먹을까 그밑에 붙어서 청파문학상을 함께 뛰는 젊은놈의 문인들은 도끼로 대가리를 빠개고 싶습니다.최룡관이 한간이라면 그밑에서 살랑 거리는 할일 없는 젊은놈들은 한간만도 못한 더러운 개종자들입니다. 그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씹으면 룡관이도 더는 못할겁니다. 지 혼자 상만들고 지혼자 어떻게 수상을 하겠습니까.시같지도 않는 소학교 수준의 시들을 청파문학상이라고 수상하고 수상자들의 시가 수준되지 않은 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연변에 문인이 어디 있습니까.연변작가협회 그들이 문인인가요.정치꾼들인가요.공산당은 글쓰지 않아도 밥주고 놀아도 평생 먹여 줍니다. 왜 글을 쓰겠습니까. 공산당의 개들이지요. 밥주는 공산당의 말을 잘들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글에 저항성도 없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할일없이 행사나 만들고 술처먹다가 여자들 허벅지 한번 만지는 것가지 사랑이나 쓰는게 시입니까 소설입니까. 그자들의 주업무는 브로커들입니다. 아무놈이나 호주머니 털어서 행사 만들고 외국 손님이오면 가방이나 들어주고 밥처묵고 술처 먹으면서 이벤트 행사나 꾸리는게 연변 작가협회고,문인들의 짓거리입니다. 그래서 맨날 서로 물고 뜯고하고 돈만 보이면 화해하고 혼란 스러운 존재들입니다.문학 한다는 대학교수놈들도 마찬 가집니다. 최룡관이와 함께 술처 먹고 함께 떡고물을 먹은적이있는 놈들은 최룡관의 못된짓을 꾸짓지 못하고 시대의 양심 죽송 선생님만 입이 아프게 꾸짓습니다.죽송 선생이 못된짓을 그렇게 꾸짓어도 문학 한다는 인간놈들 단 한사람도 지이름 밝히고 최룡관이 올은길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연변문인들의 수준이고 그놈이 그놈입니다. 최룡관 더럽고도 치사한 인간아. 너는 죽을날이 얼마되지 않는다고 리 손자같은 코풀리게 아이들에게 청파문학상이라고 이름붙여 수상하면 그것을 모르고 받았던 아이들은 평생 가슴에 피멍이든단다. 돈이 아쉬우면 리 졸개들과 함께 연변작가협회를 까부수고 작가협회 주석이되든,출근해 노임을 받든 그속에서 장사해라. 그길은 간단하다 썩어빠진 작가협회 몇명만 그비리를 꼬장질하면 너를 중용해줄꺼다. 늙어서 더럽고 치사하게 왜 친일파놈의 문학상을 제정해서 날리치나,제발 글이나 쓰고 쓸때없는일에 설치지 말아라 잘못하다 넘어지면 내진탕이다. 한족들이나 일본,한국놈들이 이난리판을 알면 얼마나 웃겠느냐. 시를 쓴다는 원로가 왜 그모양이냐. 제발 나이값좀하고 유치하게 살지말고 유치환이 곁으로 빨리가서. 하는나라에서 유치환이와 행복 하게 살길 바란다.
8   작성자 : 분석
날자:2012-09-23 11:28:01
2 작성자:首를 평해 본다날자:2012-09-20 20:40:41首
유치환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네거리에
비적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에寒天에 모호의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보고 있도다
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无賴한 넋이여 명목하라
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 시를 보니 처음은 겨울을 비롯해서 환경묘사를 하고 그 다음에 비적의 두 머리가 시내 한복판에 내 걸려 있다며 죽은 이의 형상을 간단히 묘사했다 즉 죽은이의 마른 작은 얼굴, 반쯤 뜬 눈이 추위에 살벌한 북방산하를 바라본다고 했다.그러면서 이들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가 죽음을 초래했다면서(너희 죽어 률의 차단이 어떠함을 알았느뇨)일제의 법에 어긋난다면 짐승과 같은 죽음을 면치못한다고 했다(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또한 이들의 사는 방식이 나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힘 있는 일제에 의해 이들이 제거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죽음은 아주 당연한 리치로 된다는 것이라했다(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 먼 시원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이어서 이들의 죽음을 통해 생명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면서(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이들은 다스릴수 없는 무뢰한이며 치렬한 옳고 그름의 리념대립속에서 하늘이 잘 알아서 처리할것이라 했다(아아 이 불모不毛한 사변思辨의 풍경위에 하늘이여 사혜思惠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필자는 대략 이렇게 이 시를 해독해보았다. 첫머리에 12월의 북만은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시내 한복판이라 했는데 눈은 안 온다는건 아마 순리대로 되지 않는 세월에 대한 묘사 인 같다,그래서 좀 아주 스산한 네거리라 하면서 비적의 머리가 내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시의 핵심부분은 바로 일제의 법에 어긋난다면 짐승과 같은 죽음을 면치못한다고 한것이다(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존하려면 인명도 계구鷄狗와 같을수 있도다) 이 말인즉 뭔가? 일제에 반항하지 말라는것과 같다. 이들이 일제와 맞설길래 개죽음을 면치못했다는것이다. 때문에 독자들에게 반항하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호소한것이라 하겠다. 그들처럼 이런 허무한 죽음을 당하지 말라고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生命의 험열險熱함과 그 決意를 깨닫노니) 에둘러 말한것이다.
이만하면 이 시가 친일적인것이 확연히 드러났다고 본다.

그리고 이 시가 수작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선 이시에서 그 어떤 독특한 형상을 통해서 어떤 이미지를 력설한것이 아니라 본다. 다아 일반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형상이미지들을 거들어서 표현했을 뿐이다.그 어떤 놀라운 발견이란 어느 대목에서나 찾아볼래야 찾아 볼수 없다.예술 형상은 아주 수수하다. 때문에 이 시를 우수작으로 평하기보다 친일내용에 무게를 둔 정치에 치우친 론설문형식이나 다름없다고 보아진다.
7   작성자 : 공정한
날자:2012-09-23 05:14:35
청마 자신만이 알지어다!!! ㅎㅎㅎㅎㅎㅎ 백사람의 평론가 다 제각기 제 소리만 하고 백사람의 독자가 다 제각기 제 상상만 하니 말이다!!!!! ㅎㅎㅎㅎㅎㅎㅎㅎ
6   작성자 : 해몽
날자:2012-09-22 08:28:06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ㅎㅎ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다.
해석 한번 조오타~
5   작성자 : 恩科
날자:2012-09-21 17:56:11
청마 유치환 시인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다.
그의 시 <首>는 명시이다.
친일시요 항일시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상황에서 이 시를 먼저 접했는데
읽으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겼다.
일제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귀신이 날치는 그 사악한 나날에 시인이 서 있는 살벌한 땅을 보는 것 같았다.
시인의 울분과 분노와 괴함을 느꼈다.
그런데 후에 이 시를 친일시라고 하니 어딘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최룡관 선생님은 이 시를 아주 과학적으로 잘 분석했다.
우수한 시인을 위하여 좋은 글을 써주셨다.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최룡관 시인님 화이팅!
4   작성자 : 참고하세요
날자:2012-09-20 22:23:08
문학은 언제든지 문학범주에 있습니다.청마 유치환의 시의 제반은 문학영역에서 참고로 할 수 있다고 봅니다.다만 이 신성한 문학의 진지를 이용해 정치적인 논리로 글을 쓰는 인간들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청마 유치환이 바로 이런 특정된 정치적인 시대에 수많은 시를 낳았습니다.청마 유치환의 시 수가 지금 찬반양론이 있는데 이 사람이 친일행각으로 시를 지었다는 것은 학계 혹은 문학계에서 부인안합니다.그런데 엉뚱하게 최룡관 시인이 그걸 반일시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뭘 얘기하는지 퍼그나 고민 스럽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서 파생되는 영감을 시에 담는 것이고 인간은 인간의 흐름 섭리에서 시를 담는 것이 정론인데 이른바 유치환이 인간의 섭리를 떠나서 제국의 논리를 지은 시를 이미 친일행각이 있다고 단정하는 실정에서 그걸 반일시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를까요?
참고하세요 푸른 말 네티즌
3   작성자 : 푸른 말
날자:2012-09-20 13:04:36
최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니 일리가 있다고 나름대로 생각됩니다. 저는 유치환의 많은 시들을 애착하는데 그중에 친일시가 있다고 하니깐 너무나 아쉬운 마음이였는데 오늘 최룡관시인님의 분석을 접하니 마음에서 큰 돌덩이가 내려앉는것 같습니다.
저도 현대시를 좀 써봤는데 최선생님의 분석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선생님의 탐구에 박수를 보냅니다. 건강하세요...
2   작성자 : 청솔
날자:2012-09-19 12:59:00
비적은 항일군"...유치환 친일시 증거 찾아

일본 현지서 만주 항일군 토벌•효수 기록 등 발굴

전갑생(koje70)




▲ 관동군 사령부에서 발행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 전갑생 관련사진보기


유치환의 시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몇 년째 친일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또한 내년 유치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 통영시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은 통영시가 친일작가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과연 그가 친일문인인지 아닌지, 다시금 '수'를 통해 따져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비적' 기록을 찾아서 일본을 가다


▲ 유치환은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친일문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필자는 2004년 10월 5일 <오마이뉴스>에 "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라는 글을 통하여 '비적'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항일독립군(이하 항일군)이라고 역설하였다. 그 이후 통영시와 보수적인 문인단체인 문인협회 등에서는 '비적은 단순한 도둑떼일 뿐이다'라고 본질을 왜곡하였다.

또한 유치환을 옹호하는 문인단체와 소속 일부 회원들이 '정말 가성네거리에 효수된 사람이 독립군인지 밝혀내라'고 역공을 펼쳤다. 비적이 항일군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세우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필자는 '비적'이 항일군임을 밝히고자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일본의 방위성 방위연구소, 국립국회도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직접 방문하여 사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는 고 임종국 선생이 주장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고, 약 3년간 필자가 주장한 대로 '비적'이 항일군이었음이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찾아냈다.


▲ 항일군 장조인. 1940년 3월 1일 항일군 장조인이 하얼빈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하얼빈헌병대의 <합헌고 제271호 사상대책월보에 관한 건 보고 '통첩'> 보고서.
ⓒ 방위연구소 관련사진보기


유치환 거주지는 동북항일연군의 무대

도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에 소재한 방위성 방위연구소는 한말부터 해방될 때까지 육•해군 문서 약 15만책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만주 일대에서 항일군들을 토벌한 관동군사령부의 보고서와 사료들을 발굴했다. 이 사료는 유치환이 거주한 빈강성 연수현을 비롯한 하얼빈, 동흥현 등지의 '비적'이 항일군임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또 '수(首)'에 나오는 '가성네거리에 내걸린'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짐작케 한다.

첫 발굴한 자료는 관동헌병대 하얼빈헌병대장 가토가 작성한 보고서이다(1940. 4. 14, 합헌고 제271호 사상대책월보에 관한 건 보고 '통첩').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3월 1일 오전 6시경 항일군인 장조인(莊祚人) 외 수십 명이 하얼빈 곽후기팔리촌 입기비구 화요둔에 만주군을 공격하고자 도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주군경 30명이 즉각 출동하여 오후 1시에 장조인 부대와 8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항일군 2명이 사살당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두 번째 자료는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동북항일연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하얼빈에서 벌어진 내용이다. 1940년 10월 11일 오후 1시 10분 빈강성 서부인 경원동남방(慶源東南方) 송화강(松花江) 인근 오목대(敖木臺)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제12지대 한옥서(韓玉書, 제3로군 정치주임) 등 100여명이 대규모 연합 작전을 펼쳤다.

이날 일본군 제4군관구 교도보병 제4단, 만주경찰, 일본군본부 부대 등 202명과 항일군 100여명이 혈전을 벌였다. 결국 항일군은 지휘관 한옥서, 부관 매서개(買西介), 36대대장 관수마(關秀烏), 35대대 유격대장 쌍협(双俠)를 비롯하여 소대장 4명이 사살당하고 대원 34명이 전사했다(<만주일보>, 1940. 10. 16, 치안부참모사 발행 <철심(鐵心)>, 1940. 10월호).

또한 10월 25일 만주국 대신이 참전한 부대에 상금 7천원을 주었으며, 만주군 기관지와 <만주신문> 등에 '성공적인' 전투임을 선전했다.


▲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확대(좌). 이 지도에는 조선인 독립군 박길송과 동북항일연군의 이동과 전투사항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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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확대(우). 유치환이 거주한 연수현에도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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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발굴한 자료는 1941년 5월 31일 관동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匪賊情報月報 第4號)'라는 채색지도로 조선인 항일군에 관한 내용이다. 이 지도는 이 시기 만주 전역에 1360명의 '비적'(항일군)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일성 부대가 간도성을 비롯해 하얼빈 인근까지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 따르면, 1941년 5월 25일 밤 8시경 빈강성 동흥현 후삼택 동쪽 약 3km 지점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2지대장 박길송(朴吉松) 부대원 40명, 장광적(張光迪) 부대원 20명 등 총 120명이 전투를 벌였고, 유치환이 거주한 연수현에서도 20명의 만주군과 혈전을 벌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이 시기 하얼빈과 연수현 등지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적'으로 불렸던 그들은 무장항일독립군임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 동북항일연군. 1940년 10월 11일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1지대 한옥서 정치주임 등 100여 명이 하얼빈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간부들은 일만군에 사살됐다. 사진은 치안부 참모사에서 발행한 <철심> 1940년 10월호.
ⓒ 일본 국회도서관 관련사진보기


항일군, 사살당하고 효수되다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항일군일까. 바로 그들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항일군일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사살된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은 총살되거나 전사할 경우 일본군에 의해 목이 잘려 나무에 걸었다는 게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 사례를 찾아보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장 양정우(楊靖宇, 중국인)는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일본토벌군에 포위되어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가 잘려 몽강현에 걸려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1998, 226쪽).

또한 경북 선산군 출신인 허형식(許亨植)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3군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2년 8월 3일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만주국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사살되었다(김인식,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2001, 역사비평). 그 이후 일본군에 의해 양정우처럼 효수되어 나무에 걸렸다.

따라서 동북항일연군 12지대 지휘관 한옥서를 비롯한 간부급도 허형식처럼 효수되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음이 자명하다.

특히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방위성 방위연구소 등에서 만주와 관련된 <육만밀대일기(陸満密大日記)> <육만기밀대일기(陸満機密大日記)> <육만진대일기(満普大日記)> 1940년~1945년까지, 육군일반사료 중 만주와 관련된 자료 등 총 440책을 살펴 본 결과, 일반 도둑이 항일군처럼 효수된 뒤 나무에 걸려 선전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관동군 사령부의 각 부대에서 편찬한 <진중일지(陣中日誌)>, 각종 보고서를 직접 찾아봐도 일반 도둑이 효수되었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유치환의 '수'에 나오는 '비적'이 일반 도둑이 아닌 항일군임을 방증한다.


▲ 일만군 토벌기사 만주에서 발간된 <만주신문> 1940년 10월 16일자에 나온 기사. 이 신문은 일만군이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다고 보도했다.
ⓒ 전갑생 관련사진보기


'수', 친일시로 재평가 받아야

유치환의 시 '수'는 항일군을 조소하는 마음을 담은 '친일시'다. 일부에서 '비적'을 두고 하는 말처럼 "글자 그대로 떼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가 아니라, 유치환의 거주지에서 만주 전역까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 투쟁한 항일군의 총칭이라고 하겠다.

일본•만주군경은 '비적'을 '사상비(思想匪)'와 '토비(土匪)'로 나누었다. '사상비'는 '공산비(共産匪)'와 '항일비(抗日匪)'로 각각 나누어 불렀다. 그들이 '작은 가성네거리'에 효수되어 내걸린 것이다.

또한 1939년부터 협화회에 소속된 조선인들은 동북항일연군 등을 토벌하는 데 선무공작대원으로서 산악을 누비고 다녔다. <선문반원명부(宣撫班員名簿>(1939. 3. 10 현재)에서는 협화회 소속 조선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3년 하얼빈협화회에 근무한 유치환도 선무공작에 직접 나섰을 것이라 추측된다.
유치환의 '수(首)'란
청마 유치환(1908~1967)은 1939년 만주 봉천(奉天)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1945년 해방 2개월을 앞두고 귀향했다. 그는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1943년 하얼빈 협화회에서 근무했다.

또한 '수'는 1942년 3월 <국민문학>을 통해 발표됐다. 고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라는 책에서 그의 시 '수'가 "거짓 평가를 받고 있다"며 친일시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 통영시, 거제시, 문학단체 등에서 '수'에 나오는 '비적'은 "일반 도둑"이라며 친일시가 아니라고 줄곧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치환은 '수'를 비롯한 3편의 친일시를 친일잡지에 게재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에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일문인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 통영시장은 "유치환의 시 중에서 제일 좋은 시가 '수'"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으며, 그의 형 유치진까지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다시 유치환을 옹호하고 기념사업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가 만주에 있으면서 항일시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항일독립군의 효수된 머리를 보고 조소했던 인물을,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파' 시인으로 영원토록 기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청마 유치환 친일 산문 첫 발견


시인 청마 유치환이 지난 1942년 2월6일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성향의 조.석간 한국어 일간신문인 만선일보에 쓴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청마의 친일 산문으로는 첫 발견이어서 그를 둘러싼 친일논란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마산/연합뉴스
만선일보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의 친일성이 강한 산문(散文)이 발견돼 그를 둘러싼 친일논란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지금까지 청마의 작품 가운데 시 '들녘', '전야', '북두성' 등에 대한 친일성 논란을 빚은 적이 있었지만 산문 형식의 친일 글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는 19일 "지난 1942년 2월6일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으로 실린 청마의 산문은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글"이라며 당시 신문에 실린 글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박 교수가 찾아낸 청마의 친일 산문은 네단락으로 이뤄진 짧은 글이다.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중략)..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만선일보는 1937년 만주에서 발행된 친일성향의 조.석간 한국어 일간신문으로 1945년 광복때까지 만주지방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신문으로 발행됐다.
박 교수는 이 같은 청마의 친일성 산문 등을 중심으로 오는 27~28일 영남대에서 열리는 2007년도 한국어문학회 전국학술대회에서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통영 출향과 만주국, 부왜시문'을 주제로 발표하게 된다.

박 교수는 "이미 오래전 청마의 친일문학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 글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친일성이 드러난 것"이라며 "대표적인 부왜(附倭)문인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형 유치진과 함께 청마도 친일문학인이 분명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마산=연합뉴스)
1   작성자 : 명목
날자:2012-09-19 10:57:15
이 글을 보신다면 故 유치환 시인도 명목하시겠네요. 최선생님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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