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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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유례가 본 대륙 댓글:  조회:639  추천:0  2022-08-03
                                        하유례가 본 대륙       개혁개방 후 나는 20여개 나라와 국내의 이름난 명승지들을 유람하였다. 유람을 하고 나니 머리가 명석해지며 시야가 넓어지였다.     유람후의 소감을 말하라고 한다면 철학자 아우구스타가 말한 “세계는 한권의 책이며 려행자들은 그 책의 한폐지를 읽었을 뿐이다.”라고 한 말과 같이 나는 세계라는 책속의 한페지만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려행을 떠나기전에 한 선배님이 나한테 이런말을 했다.  “세상은 넓고 크고 인생은 짧다.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말고 빨리 려행을 떠나라” 나는 그말에 힘을 얻어 륙십넘어 려행길에 올랐다.      친구들은 나한테 세계유람을 하였으니 세상에서 제일 살기좋은 나라가 어느나라인가 물었다. 나먼저 세계 려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오스트랄리아와 카나다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백성이 제일 살기좋은 나라는 중국이라고 말할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제일 살기좋은 고장이 어딘가고 묻는다면 두말없이 연길이라 말할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가 중국이고 중국내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이 연길이라고 말할수 있는 리유는 세계관광을 하면서 내가 접촉한 많은 외국인들과 화인들이 중국에 대하여 우호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중국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다름아닌 대만 사람 하유례何維禮라는 젊은이였다. 나는 하유례가 대륙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자호감을 쁘듯이 느끼였다.     2014년 7월8일 우리 길림성대만유람팀 팀원들은 제시간에 장춘룡가공항을 떠나 광주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에 대북으로 향하는 전용기를 타고 대북송산국제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     공항출구에서 이마가 벗겨지고 뚱뚱한 40대의 사나이가 우리려행단을 반겨 맞어주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대만국제 려행사에서 파견한 가이드 하유례였다.     하씨는 우리려행단 성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하씨는 나를 보고 대륙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길림성연길시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하씨는 잠간 머리를 굴리더니 이런말을 했다. 자신은 몇년전에 연길시로 갔다온적이 있다고 하면서 연길시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연길로 갔을때 인상깊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자기가 연길로 갔을때는 눈내리는 겨울철이라 했다. 연길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사이 차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은세계로 변한 연길이 아름다운 모습이였다고 했다. 사시장철 나무잎이 푸르고 꽃이피는 대만의 경치도 좋지만 사계절의 분명한 연길의 가을의 단풍도 보기좋지만, 눈내리는 겨울철의 연길 모습이 더 보기좋았다고 했다. 밖은 눈보라라 휘몰아치는데 집안에 들어서니 훗근훗근하여 전혀 겨울철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여름철이 라는 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족의 전통음식인 랭면, 비빕밥, 김치, 찰떡이 맛이 있더라고 했다. 나는 그말을 들으면서 저도 몰래 어깨가 으쓱해났다.      어느날 하씨는 이런말을 했다. 자기는 대만에서 태여 났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복건성 하문시의 어느 농촌이라고 하였다. 하씨의 아버지는 국민당 장교였는데 대륙에서 쫓기여 대만으로 갈때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한 채 홀로 대만으로  갔다고 했다. 대만에서 당지의 녀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그 녀인한테서 낳은 자식이 자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피속에는 대륙과 대만이 동족의 피가 흐른다고 하였다.     해협량안에서 서로 래왕이 시작되던 해 하씨의 아버지는 수십년만에 고향을 찾았다고 했다. 고향에 있는 친척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금가락지를 여러개 사가지고 갔다고 했다. 친척들에게 금가락지를 선물로 드리자 받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하였다고 했다.     그당시 대륙의 농민 가정의 일년 분배액이 많아야 몇 천원이였는데 대만에서 온 친인한테서 천원짜리 금가락지를 선물로 받고 보니 감동을 받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러차례 아버지의 고향과 대륙의 곳곳을 방문하게 되였다고 했다. 그가 처음 대륙을 방문할때 대륙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20년이 되는 때라고 하였다. 연해지구를 포함한 많은 곳에서 개방이 봄 물결이 일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향마을에서도 새집 짓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후20년이 지나 다시 대륙을 방문하였을때 급속도로 발전한 대륙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향마을을 찾아가니 가가호호마다 3-4층짜리 단독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대륙을 방문하였을 때만하여도 금 가락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을 부유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20년후에 갔을 때에는 금가락지와 보석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아주 보편화였다고 했다. 한시기 대륙에서는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이 류행이였다면 지금은 오토바이를 대신하여 자가용차를 갖고 있는것이 류행이라고 말하였다.      하씨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대만관광을 오는 유람객 대닷수는 대륙에서 온 유람객이라 했다. 대만을 찾는 유람객이 많아 지자 대만의 경제는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대륙에서 오는 유람객이 너무 많아 대만에서는 유람객을 접대할 서비스 설비가 부족하여 하루 유람객을 5000명으로 제한 한다고 했다.      나는 세계의 여러나라를 돌아보니 어느곳이나 중국유람객이 많이 보였다. 중국관광객이 많다는 것은 중국의 경제가 높은 수준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문화소질이 제고 되였음을 의미하며, 또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수 있는 중산계층이 많아졌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대만 유람을 통하여 하유례를 비롯한 많은 대만 사람들이 대륙을 방문  한후 객관적 시각으로 공정하고 현실적으로 대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쁘듯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대만의 집권자들은 무엇때문에 대만독립을 주장하는지 리해가 안간다. 하나의 중국이라고 승인해놓고 괴변을 부리는  미국에 빌붙지 말고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바란다.  
8    안타가웠던 생각 댓글:  조회:2180  추천:0  2022-07-27
                                            안타가웠던 생각         요즘 조글로에 “엉뚱한 생각”이란 짧은 글을 올리였다. 뜻밖에 많은 독자들이 내 작품을 구독하고 좋은 평가를 하시여 마음이 둥둥 뜬다.    오늘 길을 걷다가 “안타가웠던 생각”이란 글감이 떠 올라 필을 들었다.    “안타가웠던 생각”이라는 글을 쓰려고 보니 어떤 내용을 쓸가 사색하게 되였다. 반복적으로 사색하다가 결국은 우리 조선족에 관한 내 견해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조선족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라 보아왔다. 그리고 “소를팔아 자식공부 시킨다.”는 정신으로 교육을 중시한 민족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어쩌면 우리 조선족이 너무나 내부 갈등이 심하지 않았냐 하는 생각을 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살고 있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민족은 소수민족이라 한다. 력사적 원인으로 인하여 한족은 연해지구와 장강류역과 황하류역에 많이 분포되여 있고 소수민족들은 장성이북의 변방지대에 많이 살고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196만명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조선족을 “도강민족” 혹은 “이주민족”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도 조선족을 도강민족이나 이주민족이라하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조선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력사는 근2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집단적으로 많이 이주한 시기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라 한다.    1905년 11월17일, 일본은 강제로 대한제국과 을사조약을 맺었다. 을사조약이란 “대한제국은 일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을 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궁궐에 일본인 통감을 두어 외교 활동을 전담한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등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담긴 조약이였다.     을사조약 이 후 많은 반일투사들과 난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조선이주민이  가장많이 집결하여 있는 곳은 연변이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위만주국을 회유하여  연변지구를 땅이라 하였고 룡정에다 령사관을 설치 하였다. 조선 이민이 많이 사는 곳에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일제는 조선이민을 보호한다고 하였지만 기실은 조선이민을 통제하고 간도땅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혹한 통치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 이민들은 일본침략자와 위만주국의 가혹한 이중 통치를 받아야 했다.  가혹한 통치를 받게된 조선이민은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였다. 조선 이민은 중국인과 련합하여 일본 침략자와 싸워 중국땅에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냈다. 항일 투쟁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조선이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으로 인정받었다.    중국 조선족들은 항일 투쟁에서 앞장을 섰으며 중국해방전쟁에서 위훈을 떨치였고 조선전쟁에서 많은 피와 목숨을 바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 반우파 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시기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높은 정치열정이 때로는 엄중한 실책을 빛어 내기도 하였다. 특히 “반우파 투쟁”시 우리 조선족들은 함께 적들과 싸웠던 동지들을 정치판에 몰아넣어 “우파” “민족주의 분자” "반혁명분자"로 분리해 놓아 그들에게 치명적이 타격을 가해 왔다. 대약진 시기에는 과장된 허위보고를 하는데 열을 올리여 연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을 초래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시기에 두개파로 갈라져 싸워야 하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의 겪었던 력사 사실을 보면서 무엇때문에 우리 조선족이 이런 과오들을 빛어 냈을가? 생각할수록 안타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히 심사숙고해 보니 그 안타갑다고 생각했던 문제에 대한 답이 나왔다. 중국에 사는 우리조선족은 이주민족으로서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정착하고 있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헌신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 헌신정신이 있었기에 우리 조선족은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되였다고 생각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안타갑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스스로 해소되였다.  
7    공자가 로자를 찾아가다 (후편) 댓글:  조회:1597  추천:0  2019-06-30
                                  3       여기서 남궁경숙에 대한 말은 끊기로 하고 로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로자(老子)는 어떤 사람인가?    로자의 출생은 신비스럽다 할수 있다 지금까지 로자의 출생 일을 누구도 모르고 있다. 사마천은 로자의 신분을 이렇게 서술했다.    “로자의 성은 리(李)씨이고 이름은 이(耳)다. 로자는 초나라 고현(苦縣)의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서 자는 백양(伯陽)이며 시호는 담(聃)이라 하였다. 그는 주나라 수장실의 사(士)로 한때 있었다.”    로자에 대해서 진(晋)나라 사람인 갈홍(葛洪)은 자신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이란 책에서 로자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로자는 이름이 중이(重耳)이고 자는 백양(伯陽)이며,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다. 로자의 어머니는 대류성(大流星) 의 느낌을 받고 임신을 했다고 한다. 비록 천연(天然)의 기운을 받어 임신을 했지만 리씨집안에서 태여났기 때문에 그대로 리씨 성을 따랐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로자는 하늘과 땅보다도 앞서출생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늘이 정백(精魄)으로서 신령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이는 로자의 어머니가 임신한 72년 만에 출생했는데 탄생할적에 어머니 왼편 겨드랑이를 째고 나왔고 나면서부터 머리가 희였기에 로자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어떤 이는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에 로자는 어머니 집안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로자의 어머니가 마침 오걋나무 밑을 지나다가 로자를 낳았는데 나면서부터 말을 할줄 알았고 그 오얏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로 나의 성을 삼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갈홍은 로자의 생김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로자는 신장이 9척이고 누런 얼굴에 새까만 입. 높은 코와 긴 눈섭을 갖고 있었다. 눈썹 깊이는 5치였고, 귀이 길이는 7치였다. 이마에는 3가지의 무늬가 있었는데 위아래로 련결되여 있었으며, 발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었고 신귀를 걸상으로 삼았다. 금과 옥으로 된 집에 백은으로 섬돌을 만드고 살았으며 오색의 구름으로 옷을 삼고 , 중첩의 관을 쓰고, 봉연의 칼을 찼다. 황동(黃童)120명을 거느리고, 왼편에는 12마리의 청룡, 오른쪽에는 26마리의 백호, 앞에는 24마리의 주작, 뒤에는 72마리의 현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앞에서는 열두 궁기(窮奇)가 길을 인도하고 뒤에는 36피사가 시종하였다. 위에서는 우뢰와 번개가 번쩍번쩍하였다”    갈홍은 로자를 인간으로서 도저히 누릴수 없는 신선으로 지나치게 묘사했다.    훗 날 로자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를 로자의 ”도덕경”에 두었으며 세월과 더불어 갈수록 로자의 생애를 신비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자는 신비한 인물로 되여 출생일이 똑똑히 알려지지 않았다.    후한 시기 장릉(張陵)이란 사람에 의하여 로자의 도교(道敎)가 완정하게 창시되고 로자를 도교의 종주로 삼게 되였다. 로자의 지지자들은 을 그들의 기본경전으로 삼아 신도들에게 이를 외우도록 설파 하였다.    로자의 출생일은 정확히 알수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로자는 태여날 때부터 머리가 백발이 되였다 하여 이름도 로자(늙은 자식)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로자는 실존 인물임이 분명했다.    사마천의 에 의하면 로자는 확실히 실존인물이였음을 알수있다. 로자가 실존 인물 이였지만 로자를 따르는 신도들이 로자를 신과 같은 인물로 과장하였 을 뿐이다.    공자와 로자는 동일한 시대에 활약하던 사람이지만 로자가 공자보다 나이가20-30세가 더 많았다고 한다. 짐작하건대 공자가 로자를 만날 때 로자 나이는 이미 80에 가가운 로인이였을것으로 추정된다.    공자는 젊어서부터 자기의 사상체계인 “유가”를 형성하여 서당을 꾸리여 제자를 키우거나 학문을 가르쳤지만 로자는 단 한번 수장실의 말단 직원인 “사(史)>로 있었을 뿐 그후로는 벼슬이나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운둔 생활을 하여왔다. 비록 로자는 운둔 생활을 하였지만 사람들은 로자를 “신”이라 불리울 만큼 받들었으며 그의 사상체계를 따랐다. 어떤면에서 로자의 사상체계는 공자보다 오히려 광범위하게  민간신앙을 움직이는 사상적 기초를 닦게 했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로자는 도교를 창시한 사람이며 도덕경(道德經)의 저자임을 증명했다.       독일의 철학자 혜컬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도가사상을 강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로자의 저서(도덕경)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빈에서 출판된것으로서 나 자신도 그것을 읽은 일이있다. “도덕경”에는 특히 자주 인용되는 말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무명(無名)의 도는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유명(有名)의 도는 우주(만물)의 시작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만물이 근원이 되는 가장 고귀한 것은 곧 무(無이며, 허(虛)이며, 전혀 불확정하고 ,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또한 도(道)라고 불려왔다”    중국철학, 그중에서도 특히 로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혜컬은 로자의 도가사상을 서양철학을 낳은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절대적인 것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그것은 지상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데 반하여 로자는 유일한 긍정적인 형식으로서 부정할 수 있는 오직 추상적인 무만을 얘기하여왔다. “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혜켈의 관념철학은 로자의 무 사상에서 사유방법이나 사상체게를 받아들여 완성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법은 야스퍼스로 이어져 야스퍼스는 “공자와 로자”라는 저서를 통해 주관과 객관의 한계를 초월하고 절대적 원리로서 도를 추구하는 로자의 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보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특히 로자의 사상은 키르캐고르와 니체로 이어지는 실존철학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류 사상 최고의 저서는 “성경”이라고 하지만 두번째로 될만한 책은 로자가 지은 “도덕경”이라 말하고 있다    공자 자신도 당대의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를 존경하였지만 로자를 각별히 존경하였다.    고금중외의 위인들을 보면 모두 열심히 책을 읽고 책속에서 진리를 터득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창조한 것이 공통점이라고 할수 있다.    에 의하면 로자는 젊은 시절 주나라의 수장실(守藏室)의 기록관인 (史)로 있었다. 수장실이란 왕실 서고를 말하는데, 로자는 그 수장실에서 많은 책을 읽고 거기에서 계발과 뉘우침을 받아 웅대하고 심오한 사상 체계를 같게 했을 것이다.                                      4       우에서 로자에 대한 말을 하였으니 아래에 공자와 로자의 극적인 만남을 이야기 하자.     청나라 건륭(乾隆)연간, 프랑스 고고학자의 발굴에 의하여 무광석실이 발견되였다. 무광석실 사당에서 2천년전의 화상석과 그림화석이 발견되였다 한다. 발견된 사당에는 전국시대의 문물과 고사, 명문, 그림을 새긴 돌쪼각들이 있었는 그돌에는 간단하고도 생생하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다. 발견된 그 그림중에서 로자와 공자가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새긴 화상석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그림이 사람들의 주목을 밭게 한것은 로자를 만나고 있는 공자가 품속에서 새를 꺼내는 장면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새는 비둘기(鳩)로서 공자가 로자를 예방할 때 선물로 준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무렵 중국인들 속에는 현명한 로인이나 스승를 만날 때면 으레 비둘기를 례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다 한다. 나라에서는 공로가 있는 늙은 신하에게 구장(鳩杖이란 지팡이를 하사하였는데 지팡이 머리에 비둘기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지팡이 뿐만 아니라 로인들이 쓰는 젓가락 머리에도 비둘기 형상을 그려 놓았다 한다. 젓가락에 머리에 비둘기를 새긴 의미는 비둘기가 모이를 먹을 때 목이 메지 않기때문에 로인도 목이메지 않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다.     고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비둘기를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고 있다.      공자는 로나라라를 떠나면서 미리 한쌍의 비둘기를 레물로 준비 하였다.    공자는 로나라를 출발한 후 송나라를 지나 위나라의 국경을 거쳐 조나라를 통과하였다. 빨리 가기위해 주로 제수(齊水)를 따라 가다가 다시 정나라를 지나 진나라를 거친 후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주나라의 락읍에 도착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후국들의 국경을 통과하는 동안 공자는 많은 어려움과 위기에 봉착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과 로자의 도가사상이 어떻게 창조되고 형성되였나, 분석하여 보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지리적 환경에 의하여 창조되고 배출되였다고 생각된다. 대체적으로 보면 유가사상은 중국의 북방(황하류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 한다면, 도가사상은 중국의 남방(장강류역)의 기질을 대표한 사상이라고 할 수있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이 산생될수 있는 객관조건은 공자와 로자의 출생지의 환경이 다른데 있었다. 공자는 중국의 북방인 로나라 출신이였고 로자는 남방의 초나라에서 출생하였다.     중국의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생물이 잘 자라고 농산물이 붕부하여 사람들이 별 걱정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해 나갈수 있다면, 반면에 북방은 날씨가 차갑고 자연조건이 거칠고 메말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연과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북방 사람들은 투쟁적이 것이 현실적이라 한다면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라 할수 있겠다. 이런 대조적인 지리적 특색은 두가지 같지 않은 대조적인 문화와 사상을 낳게 하였을 것이다.    각기 다른 지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에서 자란 공자와 로자는 같지않은 사상체계를 같게 하였으며 서로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견지하여 왔다. 넓은 흉금을 가진, 현명한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대방을 비난하지 않았다 한다.    력사를 도리켜보면 무룻 성인들의 종교나 철학을 전파할 때, 꼭 탁월한 제자가 필연적으로 존재 하여 왔다. 중국에는 “공맹사상(孔孟思想)”이란 말과 로장사상(老莊思想)이란 말이 있다. 그 말뜻은 맹자가 있었기에 공자의 유교사상은 맥을 이어 갈수 있었고, 장자가 있어기에 노자의 도교는 맥을 이어갈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장자가 없어더라면 로자는 다만 수수거끼의 인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사마천은 에서 공자와 로자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로자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수천리의 려정을 거쳐 주나라의 락읍으로 간 공자는 마침내 로자를 만나게 되였다. 로자도 공자를 만나기 위해서 소를 타고 와서 공자를 맞아주었다. 만날 곳에 도착하자 공자는 마차에서 내려 로나라에서 가지고 온 비둘기 2마리를 선물로 로자에게 받쳐 올렸다    공자는 로자를 만나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드리됐다.    “선생님게서 례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공자의 말을 들은 로자는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례에 대해서라면 더구나 나는 할 말이 없네.”    “그렇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할 말이 없으시다니요.”    “잠깐만 기다려보게나. 딱 한 가지 얘기해줄 말이 있기는 있네만.”    “어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대가 우러러 보는 옛 성인들은 이미 살도 썩어지고 뼈마저 삭아 없어졌겠지.”    “그렇지만 말씀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하자 로자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글쎄, 그것이 공언(空言)이란 말이오. 들어보게 군자라는 작자도 때를 잘 만나면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그 위에서 건들거리는 몸이 되지만 때를 잘못 만나면 어지러운 바람에 흩날리는 산 쑥대 같은 떠돌이 신세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내가 아는 자로서는 례를 아는 군자는 때를 잘 만나고 못 만나는 문제가 아니란 말일세.”    “그렇다면 례란 무엇인지요?”    “내가 알기로는 이런 것일세.”    로자는 비로서 자신의 핵심 사상을 꺼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로 제발 례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한방 맞은 공자는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끝가지 례에 대해 물었다.    “그것이 례입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그것일세”   며칠간 로자와 이야기를 나눈 공자는 그곳을 떠나려 했다. 떠나려고 하는 공자를 배웅하면서 로자는 이런 말을 했다.    “부귀한 사람은 손님을 보낼 때에 재물로 전송하고 어진 사람은 손님을 보낼때에 좋은 말로 전별한다고 하오. 나는 부귀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진 사람의 이름을 빌려 그대에게 말로써 전별할가 하오. 총명하여 사리를 깊이 살필 줄 알면서도 죽을 고비를 겪는 사람은 원래 남을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능변이면서 넓고 크게 아는 것이 많은데도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원래 남의 악행을 폭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사람의 자식된 자는 모름지기 자신을 버리고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사람의 신하된 자는 역시 자신을 버려 임금을 섬겨야 하는 법이오.”    우에서 말 했다싶이 로자와 공자의 이 문답은 마치 인류가 낳은 성인이자 대 사상가인 두 사람이 벌이는 이중창을 보는듯 싶다. 전혀 두 사람의 화음이 맞지 않아보였으나 기묘한 군형을  이루고 있음을 감수할수 있다. 혹 사람들은 그 장면을 그려 보면서 혹 로자의 승리로 여길수도 있고 공자의 패배라고 분석할수도 있다. 하지만 승패를 나눌수없는 대결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공자는 오히려 자기와 차원이 다른 로자의 사상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사고 방식대로 타인이 따라 주기를 바라는 소위 지식인들의 몸배인 습성을 떠나 공자는 겸험하게 로자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추구하는 례에 대해 끝까지 묻고 또 묻었다.    이번 연기에서 로자도 슬기롭게 연기해 나갔다. 로자는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보면 빈 것처럼 보이는 장사군들, 휼륭하고 또 많은 덕을 갖푸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군자”야 말로 참군자라고 역설함을로서 무위(無爲)의 도를 강조하고 있었고 반면에 공자는 계속 여섯번 례란 무엇인가를 묻고 물은것을 보아 공자도 유위(有爲)를 강조하였다 로자는 또 공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북방의 현인이라는 소문을 진작부터 듣고 있었소. 당신은 진정한 도를 체득하였는가?”    공자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아직 체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에서 도를 구했는가?|   “저는 도를 수리(數理)에서 구하고자 애썼습니다만, 5년이나 지나도 체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밖에 또 무엇에서 도를 구하려 했는가?”   “저는 또 음양의 리치 속에서 그것을 구했습니다만 2년이나 지나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럴 테지, 도를 무슨 물건처럼 가져다 바칠 수 있다면 사람치고 그것을 자기 임금에게 가져다 바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네. 도를 가져다 드릴 수 있다면 사람치고 누가 그 부모에게 가져다 드리지 않겠는가, 또 누가 남에게 말해서 리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면 사람치고 자기 형제에게 일러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며, 도가 물건처럼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치고 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별다른리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도라는 것은 자기 속에 주체성이 확립되여 있지 안으면 멈춰 있지 않고 밖으로 그것에 어울리는 바른 행위가 없고 보면 그사람에게 와주지 않는다 네. 마음속에서 끌어내여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밖에서 받을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도를 나타내 보이지 않으며, 또 밖에서 가르쳐주려 해도 받는 측에 주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 하지 않는 것일 거네. 언어는 천하의 공(公器)이니 너무 이것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며 인의(仁義)는 옛날 성왕(聖王)들이 묵던 주막이니 하룻밤쯤 자는 것은 몰라도 언제가지나 거기에 묵으려 들어서는 안되는 걸세. 만약 길에 묵노라면 여러사람 눈에 띄어서 비난이 돌아올 것이네. 옛날의 지인(至人)들은 인(仁)을 일시적 방편으로 빌리고 하루밤을 의(義)에서 자고 간 것뿐이다.”     로자는 계속 공자를 향해 말했다.    “부(富)를 긍정하는 자는 재물을 남에게 양보해주지 못한다오. 명예를 긍정하는 자는 명성을 남에게 양보해주지 못하네. 권세를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남에게 양보해주지 못하지. 그런 사람들은 일단 그런 것들이 손에 들어오면 오직 잃을가 그것만을 근심하고 있으며 항상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지. 무엇 하나 진실에 눈을 돌리는 일이 없고 쉴 틈도 없이 리익만을 엿보는 자들 그런사람은 천벌을 받을 사람일거네.     원한과 은혜를 갚는 것, 빼는 것과 주는 것, 간하는 것과 가르침,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이 여덟가지는 천하를 바르게 하는 통치하는 수단이네. 그러나 만물의 변화에 순응해서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만이 이것을 쓸 수가 있을거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라고 하였네. 마음으로부터 이 리치를 수긍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도(道)로 들어가는 문이 열맂 않을 거이네.”    로자의 말을 경청한 공자는 이번에는 인의(仁義)에 관한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로자가 인의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였다.    “겨를 뿌려 사람의 눈에 들어가게 하면 천지 사방의 방향 감각이 없어지며 모기나 등에가 살을 쏘면 하루밤 내내 잠을 못 이루는 법이지. 그대의 인의에는 더한 독이 깃들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니 세상을 이 이상 어리럽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대가 만약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순박함을 잃지 않게 하려고 한다면 그대 자신이 바람처럼 자연스레 움직여서 무위의 덕을 지켜가는 것이 좋겠네. 구태여 북을 두둘기면서 잃은 자식을 찾는 것처럼 떠들어댈 필요가 없다 네. 백조는 매일 목욕하는 것도 아니건만 언제나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칠을 하는 것도 아니건만 언제나 검지 않소. 자연으로 정해진 흑백과 선악은 아무리 논해본대도 바꿔지지 않을 것이네. 인의를 가지고 만들어낸 명예 같은 것은 어차피 대단한 것일 수는 없지 않은가, 샘물이 마르자 고기들이 육지에 모여 서로 습한 숨을 불어 물거품으로 적셔 주고 있는 광경은 기특하다 할수 있지. 그러나 그런 잔재주를 부리는 것이 어찌 망망한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상대의 존재를 잊은 채 유유히 노니는 것만큼 하겠는가?”    공자는 로자의 말을 들을면들을수록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말마다 뜻이 담겨있고 도의 사상체계가 환히 보이는듯 싶었다. 공자는 로자를 만나고 돌아와서는 사흘이나 말이 없었다 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것이 하도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로자를 만나 셨겠는데 그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제자의 질문에 공자는 긴 한숨을 쉬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진짜 룡을 보았다. 룡운 기운을 한곳으로 집중하면 훌륭한 체구를 이루고, 기운을 분산시키면 천변만화하는 무늬를 이룬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무심히 날며 만물의 근원인 음양을 따라 자기를 기르는 것, 그것이 용이다. 하늘로 날아가는 진짜 룡과도 같은 로자를 내 주제에 어떻게 가르친단 말이냐.”    제자 자공이 그말을 듣고서  묘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본래 몸은 시체같이 고요히 지지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룡처럼 무한히 변화하고, 깊은 못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 소리는 우레처럼 울려 펴지며 일단 움직이면 천지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로자라는 겠군요.” 공자는 자공의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공자와 로자의 그번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견만을 확인한 후 짧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한다. 두 성인은 짧은 만남을 통해 극단적인 각자가 추구하는 두 길로 가게 되였다. 공자는 더욱 세상밖으로 나가게 되였으며 로자는 세상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게 되였다. 공자가 로나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 하였으며 반대로 로자는 공자를 만나후 무위의 도를 한층 더 닦게 되여 세상 속으로 숨을 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한다.    로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의 도로 압축된다.    로자가 쓴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의 첫 구절이
6    공자가 로자를 찾아가다 (전편) 댓글:  조회:1519  추천:0  2019-06-28
   력사이야기                                                                               공자가 로자를 찾아가다.  (전편)                                                      1       중국력사상에서 가장 뛰여난 성인을 꼽으라 하면  공자라 할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공자보다 로자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공자와 로자는 춘추전국시기의 사람들로서 성인(聖人)이 될만한 학식과 남다른 사상, 철학을 같고있었다.      공자는 로나라에서 살았고 로자는 주나라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대방이 이름난 학자이며 사상가인줄 알면서도 서로 만나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공자가 불혹이 나이 47세가 되던해  만나보았다.    기원전 506년 공자는 로나라에 태여나서 두번째로 되는 출국려행길에 올랐다.    공자가 이번에 려행가는 나라는 주(周) 나라였다. 주나라는 중화민족의 발원지라 할수있는 종주국 나라로서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다. 공자가 이번에 주나라로 려행을 가게된 동기는 주나라의 발전한 문화와 주나라의 고전 례법을 배우려는데도 있지만 더 중요한것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숭배하는 선생인 로자를 만나자는데 있었다.    공자는 이번 려행길에 남궁경숙(南宮敬淑)과 같이 려행을 떠났다. 공자는 많은 제자를 두고있었지만 이번 려행길에는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려행을 떠나지 않고  제자의 명록부에도 기록되지 않은 남궁경숙이란 사람과 같이 려행길에 올랐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의하면 공자에게는 근 3천명에 달하는 제자와 현인으로 불리울만한 70명의 유명한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70명 제자 명단 중에는 남궁경숙이란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공씨집안에서 전해온 문서에도 남궁경숙에 대한 기록들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궁격숙은 어떤 사람일가? 에 대한 의문은 잠시 미루고 먼저 공자의 가족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고대 중국에서는 세 발로 만든 청동 솥(鼎)이 귀중한 보물이였다. 세 발로 만든 청동 솥은 원래 천자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청동 솥은 재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신성한 재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력사상 최초의 청동 솥은 구정(九鼎)이라 하여 고대 순임금 때 주조되였다 한다. 청동 솥을 가진 나라는 정통적으로 천자가 계승하고 있다는 상징물로 신성시되여왔다. 따라서 하(夏) , 은(殷), 전국시대의 종주국이였던 주왕조는 대대로 이 솥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 당시  로(魯)나라에도 유명한 보물인 솥이 있었다. 그 솥은 천자를 상징하는 구정이 아니라 정고부(正考父)보란 재상의 명문을 새긴 솥이였던 것이다. 정고부는 송나라의 제10대 대공(戴公)에서 시작하여 11대 무공(武公), 12대 선공(宣公) 등 3대에 걸쳐 임금을 보좌한 현인이였다. 그 청동 솥에는 정고부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 명문은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임명을 받고는 윗몸을 굽히고, 두 번째 임명을 받고는 허리를 굽히고, 세 번째 임명을 받고는 엎드리다시피 하여, 담을 의지하여 길을 다니지만 아무도 나를 업신여기지 아니한다. 여기에 범벅이라도 좋고 죽을 쑤어도 좋다. 내 입에는 풀칠만 하면 그만이다.”    로나라는 대대로 이 청동솥에 새긴 정보부의 명문을 공직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사료(史料)로 삼고 있었다. 3대에 걸쳐 주군을 섬길 만큼 뛰여난 정치가였으면서도 특히 라고 기록한 정고부의 명문은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겸손과 청렴의 기준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대대로 로나라에서는 새로운 벼슬아치들이 등용될 때에는 이 청동솥 앞에서 마음다짐을 하는  의식을 진행 했다.    공자의 가족 계보를 따지고 보면 공자가 바로 정고부의 후손이였던 것이다. 공자는 로나라에서 태여났지만 그의 조상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 주왕(紂王)의 무리서(庶兄)이였다. 그 시대의 어진 신하로 알려진 미자계(微子啓) 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의 계보는 은나라의 왕들을  지나 탕(湯)임금에 이르고, 송나라의 왕실로 다시 이어져 줄곧 왕실의 적자로 내려오다가 불부하(弗父何)에 이르러서 왕계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불보하가 임금의 자리를 다투지 아니하고 스스로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온둔 생활을 하게 되자 왕계로부터 갈라진 불보하의 후손은 왕계를 이어 받지 못하였으나 솥에 명문을 새긴 정고부를 거쳐 그의 아들인 공부가에 이르기 까지 상당한 명분을 가진 대부들이였다.    공부가는 송나라의 장군격인 “사마의”란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한다. 그 아름다운 부인으로 인하여 공부가는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권신 화부독(華父督)이 길거리에서 공부가의 부인을 보고 반해버렸다. 화부독은 공부가의 부인을 빼앗기위해 음모를 꾸민 뒤에 군대를 동원하여 공부가를 죽이고 그 부인을 빼앗았다. 공부가의 아들 자목금부(子木金父) 는 화부독의 보복이 두려워 송나라를 떠나 로나라로 도망쳐 살게 되였다. 그는 로나라로 온후 아버지의 자(字)인 공부(孔父)에서 공(孔) 자만 따서 정식으로 성을 공씨(孔氏)로 하였다 한다.    공씨 가문의 내력을 보면 이러 하였다. 자목금부의 뒤를 이어 하숙(夏叔)이 대를 이었고 그후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을 거쳐 공자에 이르게 되였다. 공씨의 계보에 의하면 공씨의 시조는 주나라의 주왕의 서형이라고 적혀있었다. 서형으로 부터 시작하여  공자에 이르게 되였다고 상세히 기록하였다.    사마천도 에서 공자를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서 공방숙(孔防叔)이라 하였다.”   사마천이 이렇게 기록한것을 보아 공자의 조상은 명문가족임이 분명했다. 당시 로나라 사람들도 공자를 송나라의 명재상 정고부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건장하고 힘이센  장사였다. 제나라가 로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숙량흘은 3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치렬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고을을 수비하는 전공을 세운 뛰여난 무사였다고 한다.    숙량흘은 본시 로나라의 시(施)씨 집안에 장가들어 자식 아홉 명을 낳았는데 아홉명 다 딸이였다. 첩을 삼았는데 첩 한테서 맹피(盟皮)라는 다리불구인 아들을 낳았다. 그뒤 숙량흘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위해60세의 나이로 안씨 집안의 딸인 안징재(顔徵在)와 정을 통하여 공자를 낳았다 한다.     “공자가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숙량흘이 안씨 집안에 청혼을 하자 딸가진 아버지는 딸들을 모아 놓고 “숙량흘은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집안이 좋고 건장하고 힘이 세다.” 라고 하면서 딸들에게 출가할 의사가 있는가 물었다 한다. 첫째 딸과 둘째딸은 늙은 숙량흘에게 출가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섯째 딸 안징재만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숙량흘에게 시집가는 것에 동이하였다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출생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숙량흘과 안진재가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    사마천이 말한 야합이란 말을 해석해 보면 문자 그대로 집이 아닌 “들판에서 통정을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야합이란 혼인법으로 볼때 정식으로 결혼 절차를 밟지 않은 두 남녀가 부적절하게 정을 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수 있다. 어떤 사람은 숙량흘이 안징재를 유혹하여 들판에서 정을 나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극단적인 해석일 뿐이다. 여하턴 공자는 60세가 넘은 로인과 20세도 되지 않은  처녀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로 태여났음은 분명한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양공22년) 로나라  지금의 산동성 곡부  추현(鄒縣)에서 태여났다. 공자의 탄생일은 기원전 551년 음력8월27일(양력9월28일)라 한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임신하자 니구산(尼丘山)에서 기도를 드리였다 한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가 중니(仲尼)라는 것도 이 니구산과 관계되여 있다고 한다.    공자가 세살되던 해 아버지 숙량흘은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머니 안씨와 형 팽피를 따라 곡부로 이사를 갔다. 공자는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 뿐만 아니라 가난까지 겹친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공자는 가난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학업을 구만두고 숙손(叔孫)의 소를 방목했다. 숙손의 집에는 장서가 많았는데 공자는 그 집의 책들을 빌려다 보곤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점차 학문이 높아져갔고 이에 따라 명성도 높아졌다.    공자가 스무 살일 때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 그 소식을 들은 로나라의 소공(昭公)은 잉어 한마리를 보내여 득남을 축하했다고 한다. 소공이 잉어를 보낸 일로 인하여 공자의 명성은 온 곡부에 널리 알려졌다. 이에 계평자(季平子)가 공자를 생육을 관리하는 관리로 임명하였다. 공자는 부임해서 생육에 대한 다섯가지 조치를 행했다. 그러자 로나라 사람들은 너나 없이 기뻐했으며 외지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이사를 와서 로나라의 인구가 빠른속도로 증하했다고 한다.    공자는 서른살 전에 음악, 활쏘기, 마차술, 서예, 수학에 능통했으며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등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 밝았다. 이렇게 공자는 당대에 가장 뛰여난 학자가 되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한다. 공자는 서당을 꾸리고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신분의 귀천 없이 무릇 배우겠다는 사람은 모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의 교육방침을 내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에게서 학문과 례를 배운 제자들이 3천명에 달하며 제자중 70명이 현인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공자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도리켜보면 어쩜 인류 사상 가장 유명한 성인 들인 공자, 로자, 예수의 출생과 성장과정이 비슷하다는 감이든다. 세 사람의 태여난 나라와 시대는 달랐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존재를 모르는 운명으로 세상에 태여나 어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남들이 겪지 못할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하였다는 점이 일치하다고 할수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청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는 젊어서 미천했기 때문에 비천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게되였다.”    공자가 태여났을 적에는 공자의 집안은 보잘것 없어 사회에서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에 속하는 계급이였다. 이 계급은 위로는 귀족 대부들이 있고, 아래로는 서민과 공상계급이 있는 중간계층이였다. 사는 자기의 관직을 유지하고 살아나가자면 반드시 정치를 맡고 있는 공경귀족들에게 빌붙어 작은 벼슬이나마 유지해 나가야 했다.    공자 대에 이르러 가문은 더욱 몰락하여 공자는 부득불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제사를 돌봐주는 유(儒)의 신분으로 입에 풀칠할 수 밖에 없었다.    사마천은 에서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놀 때에는 항상 예기(禮器)를 진렬해 놓고 놀아  예에 바른 태도는 선천적인 듯 보였다.”고 묘사하였다.    공자는 성인이 될때까지 아버지의 묘소를 모르고 지났다 한다. 사마천의 에 의하면 공자의 어머니는 숙량흘이 죽자 곡부의 동쪽에 있는 방(防)땅에 장사를 지어놓고도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공자의 어머니는 죽으면서도 아들에게 아비의 무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한다. 공자 어머니가 자식에게 아버지의 묘지를 알려주지 않은데는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을 것이다. 추측하여 보면 그 당시 공자의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운 것도 있지만 공자의 출생이 사생아였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 추적된다.    공자는 어머니가 사망된  훗 날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찾고저 했던 아버지의 묘소를 발견하였다. 공자의 어머니의 시체를 운송했던 상여꾼이 공자에게 공자 아버지 묘소는 다름아닌 어머니가 장사를 지어놓고 가만히 제를 지냈던 묘지가 곧 바로 아버지의 묘지라고 알려주었다 한다. 공자는 늦게나마 아버지 묘지를 알게 되였으며 부모님을 합장하게 되였다    공자는 비록 60세가 넘은 아버지와 20세가 안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지만 아버지의 건장한 체격을 닮아 키가 크고 용모가 특이 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용모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     “공자의 키가 9척6촌(210쎈치메터)이어서 사람들은 모두 공자를 키다리라 부르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공자는 태여나면서부터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구(丘)라 하였다.”    정나라 사람들은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묘사했다.    “동문 밖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의 키는 9척6촌이고, 눈두덩이 평평하고, 눈꼬리가 긴 눈과 광대뼈가 뛰여 나왔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위대한 성인들은 어릴때 어려움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며  그 어려움을 뚫고 나가면서 인생을 잘 총화한 사람들이였다.                                                 2      공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잠간 뒤로 밀우고 남궁경숙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 간다.    로나라 대부 맹희자(孟僖子)가 병으로 임종하면서 자신의 대를 이를 아들, 의자(懿子)에게 엄숙히 이런 말을 했다.    “공구는 성인의 후손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로나라로 온 것뿐이다. 그의 조상 불보하는 처음에 송나라의 군주로 즉위할 신분이였으나 아우 여공(勵公)에게 양보한 분이다. 정고부 대에 와서는 송의, 대공, 무공, 선공을 보좌해 상경이 되였다.”    맹희자는 공구와 공씨가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나서 청동 솥과 청동솥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설명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성인의 후손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리에 통달한 현인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지금 공구는 비록 나이는 젋지만 례를 좋아하니 필시 그는 사리에 통달한 현인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섬기거라”    이 말을 하고 맹희자가 죽자 아들 의자는 아우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공자에게 가서 례를 배웠던 것이다. 그 무렵 공자의 나이는 불과 17세로 아직 가르침을 펼칠때가 아니였다. 추적해 보면, 공자가 정식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 때에는 남궁경숙은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직위가 상당히 높은 권신이였을 것이다. 그러니 나이를 보나 직위를 보아 남궁경숙이 공자의 제자들속에 끼치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사실 공자와 같이 려행을 떠날 시기 남궁경숙은 이미 상당한 직위를 가지고 있는 관료 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젊은 백면서생에게서 례를 배울지언정 제자노릇은 차마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비록 남궁경숙은 사회적 지위와 년령때문에 공자의 제자 명록에 끼여들지 않았지만 공자에게 든든한 후원자로 정신적, 물질적 지원자로 되였다.    공자가 47세에 주나라로 두번째 려행을 가려고 하자 남궁경숙은 선뜻 따라나서 동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로나라 군주인 정공에게 상소하여 출국 려행 동의를 받아 냈으며 교통의 편의까지 받게 되였다. 로나라 군주는 려행을 떠나는 그들에게 승용거 한 대와 말 두 필을 하사하였으며 종자 한 사람을 딸려주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남궁경숙은 이미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수있다.    마침내 공자는 로나라 군주가 하사한 말이 이끄는 수례를 남궁경숙과 나란히 타고 종자를 앞세워 로나라를 떠나 주나라로 가게 되였다.    이 무렵 주나라의 도성은 락읍이였다.  로나라에서 주나라 의 락읍으로 가는 길은 수천리에 달하였고 도중에 진나라와 조나라, 정나라와 같은 여러 제후국들을 지나야 했으므로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려정이기도 했다.    무엇때문에 공자가 이 험난한 길을 가기로 하였을가? 공자는 주나라의 옛 례법을 배우려는 의도는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신”으로 불리울만큼 신비스러운 인물인 로자를 만나 보기위해서였다. 후세 사람들은 공자와 로자의 그번 만남을 “신과 신의” 만남이라고 까지 평가하였다.     고마운 독자분들: 하회를 보십시오.  
5    눈의 설음 댓글:  조회:1560  추천:0  2018-11-23
                                  눈의 설음         나는 매일마다 새로 닦은 환성로 길로 걷기운동을한다. 새로 닦은 환성로 길은 넓고 평탄하여 운동하기 좋다.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걷는 사람, 달리기를 하는 사람, 뒤로 걷는 사람들로 운동형식이 저마다 달랐다.     나는 걷기운동을 하면서 걷기운동이 내 신체 소질과 제일 잘 어울리는 운동이라 여기고 매일과 같이 걷기운동을 견지하여 왔다. 운동형식은 각자의 신체 소질에 의하여 선택할수 있지만 뒤로 걷는 운동만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 원인은 사람의 신체구조가 앞으로 걷도록 만들어 졌는데 뒤로 걷는다면 그것은 신체의 구조를 떠난 역행위이고 잘못하면 사고를 빚어 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귀구멍이 넓어졌다. 젊은 축들은 누가 어떤 좋은 직장으로 출근한다거나 어떤 친구는 어떠 어떻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함께 투자를 하지 않겠는가 하는데 대하여 솔귓해하며 나이 많은 사람들은 어느 의사가 용하다거나 어느 약이 좋다는데 대하여 신경을 쓴다. 신체가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는 운동에 대하여 중시한다. 어느 누가 “뒤로 걷는 운동이 앞으로 걷는 것보다. 더 좋다”는 가설을 내놓자 소수의 사람들이 그말을 믿고 뒤로 걷기를 하는것이였다. 나는 뒤로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서 두 눈을 펀히 뜨고도 뒤로 걷는지? 머리를 젓게된다.       내가 뒤로 걷는 운동을 마당치 않게 보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 뒤로 걷는 운동을 부정하는 내 견해를 증명이라도 한것처럼 일이 발생했다.    내가 과학기술대학으로 향하여 걷고 있을때였다. 내가 걷고 있는 길 옆으로 남녀 두사람이 뒤로 걷고 있었다. 남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녀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걷는것이였다. 내가 그들을 스쳐 지나 십여 발자국 떼였을 때였다.     “아이고!”    하는 비명소리가 뒤에서 들리였다. 뒤 돌아보니 뒤로 걷던 그 두사람이 쓰러진채로 머리를 쏴쥐고 울상이 되여있었다. 참 묘하게도 그 두사람은 그 넓은 길에서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련습을 많이 한것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뒤로 부딧쳤던 것이다. 길가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입을 싸쥐고 웃고 있었다. 나도 례외가 아니였다. 조금지나자 그 두 사람은 털고 일어나 서로 미안하다고 하고선 뒤로 걷지않고 정면으로 걸어갔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고집쟁이... 내가 그렇게 뒤로 걷지말라고 당부 했건만 듣지 않더니 …”     그녀를 아침운동을 하면서 알게되였다. 어느날이였다. 내가 아침 걷기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데 마주 오던 한 녀자가 나를 향하여 말을 건너였다.     “저, 선생님이 최상운 작가님의 아니십니까?”     “네, 최상운이 옳습니다. 저를 어떻게?”     “선생님의 쓰신 책을 보았습니다. 책에서 선생님의 사진과 프로필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사진과 똑 같습니다.”     “저를 알아봐주어 감사합니다.”     그날 이 후 우리는 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였다. 만나면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그녀의 성격은 콸콸해보이는 한편 좀 고집스럽다는 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정면으로 걷던 그가 어느날인가 뒤로 걷는 것이였다. 나는 여러번 그녀를 보고 뒤로 걸는 운동은 위험하니 뒤로 걷지 않는게 좋다고 했다. 그녀는 내말을 들은척도 하지않고 고집스럽게 여전히 뒤로 걷는 것이였다. 내가 뒤로 걷지말라고 말하자 그녀는  뒤로 걷기운동을 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다고 하는 친구가 말하기를 뒤로 걸으면 정면으로 걷기 운동보다 더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면서 변명하는 것이 였다.     뒤로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얼림수에 잘 말려드는 귀구멍이 너른 사람들에게 충고 한마디 하고 싶다.    일체 사물은 모두 움직인다. 규칙적으로 한 방향으로 돈다.    눈은 보라고 생기였다. 앞으로 걷지않고 뒤로 걷는다면 눈은 얼마나 서러워 할가…
4    최상운 선생의 기행문을 읽고 댓글:  조회:1425  추천:0  2018-08-09
                                       최상운 선생의 기행문을 읽고                                                                                                             전성호                                                             1     근래에 우리 주위에는 정년퇴직을 한 후에 문단에 들어와 붓을 잡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한 분이 있다. 그가 바로 최상운 선생이다. 원래 학생시절로부터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고 초급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 으며 그러다가 차츰 글을 쓸 의욕이 생겨 처음에 주로 통신보도문을 쓰면서 연변일보 와 연변방송국의 통신원으로 되기도 하였다가 1965년에 연변일보 문예부간에 벽소설 을 등보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소년아동잡지에 이라는 아동소설을 발표시키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었는데 이러저러한 여건으로 인하여 수십년간 필을 들지 못하다가 나이 륙십이 되면서 다시 필을 들고 글을 쓴다 는 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이 쓴 글들을 다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이 이미 두 권의 수필집을 출간했고 요지음은 한 권의 기행문집을 비롯하여 또 한 권의 수필집과 소설집을 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실로 석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창작열정에 머리를 숙여 탄복하게 된다.     더구나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는 것은 문학창작에 매진하기 위한 선생의 남다른 자세와 노력, 그리고 그 행적이다. 지금 나의 컴퓨터 안에는 선생이 퇴직한 후 십수년 간 려행을 다니면서 써놓은 기행문 묶음이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21개 나라 와 대만, 그리고 110곳도 넘는 려행지에 대한 려행상황이 기록되여 있고 또 매개 려행지마다에 적게는 6~7점, 많게는 20여점 넘어되는 관광명소에 대한 상세한 상황이 기록되여 있다. 선생이 참관한 그 관광명소들을 모두 통계를 한다면 네자리수에서 오르내려야 할 엄청난 수자에 이를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선생이 무슨 마음, 무슨 여건, 무슨 열정으로 이처럼 많은 관광명소들 을 찾아 려행을 하면서 관광을 하였을가?     이에 대한 해답은 선생 스스로 하고 있다. 선생은 자신이 지금까지 써놓은 몇십 만자에 달하는 기행문들로 한 권의 책을 묶으려고 준비하면서 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어릴 때 작가로 되려는 것은 나의 꿈이였다. 그런데 그 꿈을 이러저러한 여건 으로 인해 실현 못하고 지나왔다. 그러다 60세가 되던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3년 석달을 체류해 있었다. 체류해 있는 동안 한국에 대하여 뭔가 쓰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우리민족의 뿌리를 찾고싶고 조선민족의 력사를 알고 싶었다. 나는 휴일날에는 가방을 메고 력사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한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나는 15만자에 달하는 한국기행을 썼다. …귀국한후 나는 인츰 조선관광을 하였다. 조선관광을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고려의 력사에 대하여 심층 알게 되였다. 나는 조선관광을 한 후 조선에대한 기행문을 썼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다. ‘세상은 넓고 크고 인생은 짧다. 빨리 려행을 떠나라.’ 나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나는 먼저 동남아 나라 싱가포르, 말레아시아, 타이 관광을 하였다. 그후 일본, 대만,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를 관광을 하였으며 관광에서 재미를 얻어 서유럽의 독일, 이딸리아, 프랑스, 스위스, 룩셈부르그, 빠띠노시국을 관광하였다. 연후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를 관광하였으며 미국, 카나다, 멕시코, 하와이주, 이집트, 아랍추장국 련방, 영국관광을 하였다. 세계 21개 나라와 대만지구를 관광하고 나니 나는 시야가 넓어지며 지식이 풍부해짐을 느끼였다."     상술한 글에서 보다싶이 분명 선생은 려행을 자기의 시야와 학식을 넓히는 방법 으로 알고 있었고 자기의 문학수업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선생은 "나는 14년간 꾸준히 문학이란 터밭에서 글농사를 지었다. 처음에 기행문을 쓰기 시작하여 후에 시, 가사, 수필, 소설을 썼다."고 고백을 하였다.     려행이 문학수업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선생의 상황에서는 납득이 가는 말이다. 마치 김창걸 선생이 작가로 되는데는 세가지 조건 "첫번째는 가난이고 두번째는 글 공부와 문학공부이며 세번째는 인생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사(士), 농(农), 공(工), 상(商)을 체험하면서 많은 조대를 겪었고 많은 일들을 체험했기에 작가로 될 수 있겠다고 자신했던 것 처럼 작가의 꿈을 품은 최상운 선생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보면 농촌에서 농민으로 있었던 체험도 있고 도시에서 로동자로 있었던 체험도 있으며 일반 군중으로, 기층당조직의 책임일군으로 있었던 체험들이 모두 있는데 다만 “가방끈이 짧다.”, “지식이 짧다”는 그것에 대한 보완책이 바로 려행과 관광이 아니였나 싶다. 분명 선생의 려행과 관광은 작가의 꿈과 밀접히 관련되여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비추어 필자는 이 글에서 선생이 써놓은 기행문들을 놓고 몇마디 적어본다.                                                             2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선생은 려행과 관광을 일종“가방끈이 짧다.”, “지식이 짧다” 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 삼았다. 하였기에 선생은 어느곳에 대한 관광을 시작할 때면 사전에 그곳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꼼꼼히 읽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관광 과정에서는 "말타고 꽃구경" 하듯이 대충대충 보아 넘긴 것이 아니라 상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 선생은 많은 지식을 쌓았는데 그 지식의 내용에는 력사적 인 것과 지리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종교적인 것, 생활 습관과 풍토 인정 등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관광을 하다보면 관광하는 것은 학문과 같은 것이며 려행을 많이 하다보면 아는 것도 많아지고 지식도 소리없이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선생은 이러한 지식 습득과 지식 탐구의 자세로 려행과 관광을 진행하였기에 한국의 서울에 대한 기록에서만 보아도 그저 그 규모와 외형에 대한 고찰과 기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력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연지리적으로 많은 지식을 파고들면서 기록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서울이 515년동안이나 "한성"으로 불리우다가 일제 강점 기에 이르러서는 "경성"이라 불리웠고 광복후에는 한국에서 새나라 수도를 "서울"이 라 부르자고 하여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서울"이라 부르고 있다는 기록이며 "서울" 이란 "서라벌" 혹은 새벌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뜻인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된다는 기록 등이 그러하다.     이밖에도 선생은 서울을 기록하면서 경복궁, 도봉산,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서대문형무소, 장충단공원 등에 대하여서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그러한 기록들에 는 모두 깊은 문화와 력사 사화들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기타 지방에 대한 선생의 려행기록에서도 보면 물론 태안, 만리포, 천리포, 산두리사구, 속초, 설악산, 부산의 해운대와 오륙도 등 경치가 수려한 명승지를 찾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개가 우리 민족의 유규한 력사가 담겨져 있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담겨져 있는 곳들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그러한 명승지 들에서도 애써 문화적인 요소들을 찾아 기록하였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선생은 한국에서 주로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찾아 공부 를 하기 위해 려행을 하였고 관광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 주변의 도봉산 유람이 그러하고 금현리 지석묘 참관이 그러하며 동구릉과 광릉, 옛신라 수도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옛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의 백마강과 락화암, 제주도와 한라산, 강화도 등 모두가 그러하다.     선생은 한국에서 돌아오자 곧 조선을 다녀오고 또 기행문들을 썼는데 역시 수도 평양을 두고 력사, 지리, 문화적으로 고찰하여 기록하였는 바 아래에 그 한대목만 보아도 그러하다.      력사를 훝어보면 평양은 일찍 고조선시기에 수도였다. 기원전 30세기초 단군은 조선의 첫 고대국가 고조선을 세웠다. 시조왕 단군은 “맑은 아침의 나라” 라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짓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로서 3000년간 존재하면서 여러가지 우회곡절을 겪으면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였다. 국가정권의 형성을 알리는 징표로 되는 성곽들이 평양시 중심으로부터 대성구역 장암동 등지에 100여리를 사이 두고 축성배치되여 있었다.      그리고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며 보현사며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당에 대한 기록, 개성과 분단상황에 대한 기록, 선죽교에 대한 기록 등 조선려행에 대한 기록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     이처럼 선생은 조선반도의 려행과 관광에서 그 어느 한 곳을 두고도 대충 보아 넘긴 것이 아니라 그곳에 관계되는 많은 지식들을 파내고 기억하고 배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기행문들에서 보면 조선반도를 두고 력사적으로는 고조선으로부터 현재의 남북 분단에 이르기까지, 지리적으로는 제주도의 한라산으로부터 평양성과 그 주변의 자연지리상황에 이르기까지를 그토록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이 집필한 이 기행문집은 조선반도의 력사와 지리에 대한 집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앞에서 이미 말하두었지만 선생의 려행과 관광은 조선반도에만 멈취진 것이 아니 였다. 물론 한국에서의 려행과 관광은 선생의 말 그대로 "한국에서 3년 석달을 체류해 있"는 기간에 계획을 세우고 자의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진행한 것이였다.  하지만 선생은 귀국하자 곧 조선에 대한 관광을 시작하였는데 그로부터 진행한 많은 나라와 지역에 대한 려행과 관광은 모두 려행사들에 의탁하여 진행한 것이였다고 사료된다.     주지하다싶이 기행문이란 일정한 곳을 찾아 려행이나 관광을 하면서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나 체험한 것들을 쓰는 서사적 작품의 한 형태이다. 여기에는 소개에 중점을 두는 것도 있고 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도 있으며 작자의 감상을 주로 표현하는 것도 있다.     최상운 선생의 기행문들도 역시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기행문들에는 대상에 대한 소개에 중점을 둔 것도 있고 대상에 대한 묘사에 중점을 둔 것도 있으며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선생의 많은 기행문들은 그 한편한편에서 상술한 요소들을 거의 함께 체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특기해야 할 것은 선생은 한 나라, 한 지역, 한 명소에 대하여 기술할 때면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것을 내세워 묘사를 곁들면서 보는듯이 소개를 하였다는 그것이다. 이를테면 오스트랄리아를 려행하면서 “…그때야 진짜 우리가 살고 있는 북방부와는 완전히 상반된 계절을 갖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나는 땀을 훔치면서 공항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다 한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가 짧은 샤쯔에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녀자애들은 미니스카트치마를 입고있었다. 그날 멜버른시의 기온은 섭씨30도였다. …멜버른시에서는 아직도 100년전에 건설한 궤도전차를 사용하고 있었다. 빨간색을 칠한 100년이 넘는 제일대의 전차와 화려하게 꾸민 신형의 전차가 어울리면서 도시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이 가관이였다. …멜버론시의 높은 곳에서 멜버른시를 내려다 보면 멜버른시의 도시 중심을 내놓고는 멀리까지 보이는 것은 끝없는 나무숲이였다. 그 나무숲속에 낮다란 지붕이 뿔룩뿔룩 보이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도시라기보다. 나무숲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것 같았다.”고 기술하였거나 이집트를 려행하면서 “카이로시를 보면 수도인데도 눈에 확 뛰우는 건축물과 수림이 보이지 않았다. 나일강을 도시 중심에 끼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매마른 상태로 있었다. 강변과 중심거리에만 나무가 무성하고 기타 곳은 나무가 드문드문 있을 뿐이였다. 주민구에는 나무가 적고 늘크무레한 색갈을 띤 성냥갑과 같은 네모난 집들이 질서없이 있었다. 지붕을 보면 아직 마무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철근이 로출되여 있었다. 어찌하여 지붕 마무리를 하지 않고, 마무리를 하지 않은 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이 몇년간 이집트에서는 정권이 여러번 교체되면서 정부는 사실상 제 역활을 하지 못하고 무정부상태에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정부의 규제가 없는 틈을타 자기 맘대로 집을 지었다 한다. 집을 다 지으면 재산세를 내야 하므로 사람들은 집을 마무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시민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했다.”는 기술, 미국을 려행하면서 “워싱톤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수림이였다. 첫 인상이 워싱톤은 도시라기보다도 공원이라는 감이 들었다. 수림속에 집들이 보이였다. 도시중심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무숲에 가려진 1-2층으로 된 단독가옥들이였다.”는 기술, 영국을 려행하면서 “옥스퍼드시 교외의 건물들은 보통 2층으로 된 단독건물들이 많았다. 시내 안의 건물들은 보통4층건물이였다. 건물들을 보면 지붕을 뽀족하고 가파롭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룡마루에 굴뚝이 여러개 있었다. 어떤 집은 굴뚝이 십여개나 있었다. 알고보니 영국사람들은 추울 때에는 뻬치카를 리용하여 온도 조절을 하고 있었다. 칸칸마다 뻬치카가 있으므로 칸수에 따라 굴뚝이 많거나 적었다.”는 등의 많은 기술이 그러하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필자는 선생의 기행문들을 읽으면서 선생이 다녀왔던 나라 와 도시, 그리고 관광지들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고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시야를 넓혔다. 실로 세계 각국을 리해하는 한 권의 세계지식 참고자료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4        그러면서도 필자는 선생의 기행문들에서 다방면으로 토로되는 그 감수, 그 느낌 들에 대하여 많이 공명을 하고 탄복을 하였다. 선생의 그러한 감수, 그러한 느낌들은 대개 선생의 정치적 정감에 의한 자아발로로, 신비한 자연과 력사의 맥락에 의한 감탄으로, 이색적인 것에 대한 깨닳음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으로, 또 상술한 요소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지는 등 아주 많은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들은 또한 아주 진솔하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토로되였다.     아래에 그것을 떠올려보자.      처음 서울을 볼때 초대형 도시라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중국의 북경처럼 거대하게 터를 잡지못하고  협소하다는 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개구를 지나면 산이있고 그산을 넘으면 또  새로운 구가 있어서 도대체 서울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울의 지형을 두고 한 선생의 감수이고 느낌이다. 필자가 1991년 11월에 처음으로 서울에 갔다가 받았던 감수와 너무도 꼭같아 혀끝을 차게 된다.      대만에 다녀오고보니 예전에 내가 머리속에 있던 대만에 대한 견해는 180도로 바뀌였다. …대만이 이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감을 느끼게 했다. 등소평주석의 내놓은 “한나라 두가지 제도”는 실천중에서 정확함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번에 대만에서 느낀 바에 따르면 해안 량안의 정치가들도 조국통일의 대업을 위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고 민중과 국가의 리익을 위하여 신뢰의 물고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날 다른 리념으로 원쑤로 여겨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웃으며 반기고 있다. 수십년간 쌓여왔던 리산의 슬픔이 냇가의 얼음이 풀리듯 슬슬 풀리고 있었다. 이제야 중화민족의 대가정이란 함의를 알것 같다.      대만성을 다녀오면서 한 산생의 느낌이다. 선생의 정치적 정감에 의하여 발로된 감수이고 느낌이다.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한가!   …나는 애급의 고대문물을 보면서 침략이란 무엇인가를 알 것 같았다. 한세기 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렬강들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애급과 같은 세계의 많은 야속국가들을 침입하여 그 나라의 보귀한 문물들을 훔쳐다 자기들의 소유로 하였다. 빼앗은 문물을 박물관에 버젓히 전시해 놓고 자신들의 강대함을 과시하였다.     선생이 뉴욕중앙박물관을 참관하면서 쓴 한 대목이다. 정치적으로와 력사적으로 발로되는 감수와 느낌을 토로한 대목인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이아가라협곡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자연은 어찌하여 딱 미국과 카나다 국경 에다 인류가 창조할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을가? 생각할수록 자연의 유능에 탐복하였다.      선생이 카나다를 려행하면서 미국과 카나다 사이에 놓여있는 나이아가라협곡을 보고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한 감수와 느낌이다. 짧은 구절에 사람들의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중국인음식점 주인을 보면서 참으로 중국인들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만리 먼 타국에서 음식점을 꾸려 부지런히 재부를 모으는 음식점 주인이 대견스러웠다. 중국인들은 총명하고 근로한 사람들이다. 서유럽의 도시를 관광하면서 서유럽의 도시마다에는  중국인이 꾸린 음식점이 씨앗처럼 꼭꼭 박혀있었다.     선생이 프랑스려행을 하면서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느낀 감수를 쓴 대목이다.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생의 정감세계가 구김 없이 드러나고 있다.                                                          5       선생의 기행문들에서 이러한 대목들을 찾자면 너무도 많고 필자 또한 이런 식 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면 그 끝이 보이지 않겠기에 아쉽지만 여기서 줄이려 한다.     아무튼 자신의 아름다운 문학의 꿈을 키우면서 “가방끈이 짧다.”거나 “지식이 짧다”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루어 졌다고 사료되는 선생의 다년간의 세계려행과 관광, 또 그 려행과 관광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이 기행문집은 선생이 그 려행과 관광 을 위하여 사전에 많은 자료들을 찾아 꼼꼼히 읽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또 애써 필력을 키우면서 씌여진 것이였기에 그 자료적 가치와 흔상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기행문집을 접하는 독자들도 이 기행문집을 읽고 필자처럼 중국의 대만성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상황에 대하여 그 특점을 눈앞에 보는 듯이 접수하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필자는 자신의 능력 제한으로 선생의 이 한 권의 기행문집이 이룩하고 있는 그 성취들에 대하여 충분히 긍정하지 못함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선생의 이 한권의 기행문집의 출간을 축하한다.                                                                                                                                            2018년 1월 20일 (전성호선생님은 연변민속문화연구소에서 근무하시다가퇴직한  문학박사임)    
3    룡두사미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1686  추천:0  2017-03-21
                                              “룡두사미”에 대한 단상          나는 글을 쓰면서 자주 우리말 성구사전을 펼쳐본다.  오늘도 우리말 성구사전을 펼쳐보다가 (룡두사미龍頭蛇尾)란 성구에 시선을  뭠추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룡두사미는 룡이 머리에 뱀이 꼬리란 말이다. 룡의 머리에 뱀이꼬리라? 룡두사미를 어떤뜻으로 해석을 했을가? 흥미를 가지고 해설문을 보았다. 룡두사미란? 무슨일을 시작할때는 굉장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흐지부지하게 되여 버리는 모양을 풍자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보면 각자가 사는 모습이 천차만별이다. 한날 한시에 같이 태여난 손가락도 길고 짧음이 있듯이 우리의 삶도 부동하다. 평생 부유하게 사는 사람과 평생 가난의 멍에에서 벗어 못나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젊었을때는 저마다의 푸른 꿈을 꾸었을것이다. 상상속의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좋은 계획을 세우고 그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였을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조화라 할가? 어떤 사람은 순리롭게 그 꿈을 실현할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꿈꾸어온 아름다운 계획들이 하루 아침사이에 물거품이 되는 참사도 겪는 이도 있었다. 사람사는 사회에서 빈부차이가 존재하며 사업에서 성공과 실패를 겪고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겪는것이 인생이다.      나는 룡두사미란 성구를 보면서 숙고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몇해전에 내가 목격했던 일이 떠 올라 적어본다. 몇해전 어느날 나는 문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날 모임은 한 민간의사의 주도하에 연길에서 제일 범위가 큰 민간문화예술협회를 창설하는 대회였다. 내가 회의장소에갔을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이름있는 작가와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축사를 하였다. 대회에서는 협회의 조직구성과 협회의 취지를 선포하고 결의를 지었다. 그번 모임을 주도한 그 민간의사는 총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나는 문화방면의 전문가가 아닌 민간의사가 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자 좀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총협회 산하에는 소설, 산문, 시, 구연, 미술, 서법 분과를 구성하였는데 조직기구가 방대하여 단박이라도 큰일을 해낼듯한 기세가 대단했다. 그날 대회에서 래빈들의 축사가 있었는데 맨마지막에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정령퇴직한 김교수가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시였다. 김교수님은 대회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하고서 앞으로  이협회가 룡두사미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했다. 나는 김교수가 한 그 룡두사미란 말이 매우 의이가 있는 말이다고 생각했다. 후에 보니 그 민간 단체는 자금난과 기타원인으로 흐지부지하다가 협회가 소리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결국은 그 협회는 룡두사미로 되였다.         방금 우에서 언급한것처럼 사업을 하다가 룡두사미로 되는일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존재하는 비일비재(非一非再)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보건대 우리가 사업을 하다가 룡두사미로 되는 주요한 원인은 객관적 요인도 있지만 주요하게는 본인의 판단과 노력이 부족함에서 나타났다고 본다. 객관적 요인을 말하려면 한사람의 타고난 운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성인 공자는 론어에서 “사생유명 부귀재천(死生有命富貴在天)이라는 말씀을하시였다. 그 말을 풀이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목숨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고 부자가 되는 것이나 귀하게 되는 것도, 신분이 낮고 가난하게 되는 것 모두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억지로 구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수없다. 또 부모를 선택할수도 없다. 부모가 준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 다같은 사람인데도 어떤사람은 좋은 부모를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좋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부모의 덕택을 받지못하고 평생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옛 사람들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였다.     사람사는 사회를 보면 어떤 사람은 인생 초기에 모든 일들이 흥성하고 사업의 성공률이 높다가도 후기에 들어서서는 흐지부지 하다가 부도를 당하여 인생의 고배를 맞보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생 초기와 중기에 고생을 많이하다가 후기에 좋은 복이 찾아오는 사람도있다. 나도 아마 후자에 속하는것 같다.      베이콘은 이렇게 말했다 “성공을 할려면 남에게 떠밀리지 말고 제힘을 가늠해서 무리하지 말고 자기가 뜻한 일을 한눈도 팔지 말고 묵묵히 해나가야한다. 평범하지만 이것이 성공이 튀여나오는 요술주머니이다.” 우리는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타고난 운명으로 론할것이 아니라 베이콘의 말처럼 남에게 떠밀리지 말고 제힘을 가늠해서 무리하지 말고 자기가 뜻한 일을 하눈도 팔지말고 묵묵히 해나가면된다. 우리가 사업하고 있는일이, 꿈꾸어오던 일이 비록 작고 평범하지만 꾸준히 노력한다면 성공이 튀여나올수 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했다. “만약 천재와 노력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노력을 택할것이다. 노력은 세상 모든 성과의(조산원)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천재와 노력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노력을 선책할것이라는 주장에 찬성하고 싶다. 나의 인생 전반기는 좋은편이 아니였다.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여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초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살 나이에 농업에 종사하였다. 직업도, 학력도, 재력도, 뒤심도 없는 초토에 뭍쳐사는 농사군이였다. 초토에 뭍쳐사는 나에게도 꿈이 있었다. 앞으로 책을 열심히 읽고 글을 쓴다면 이름난 작가는 못되여도 작가로 될수있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생각하면 농사를 짓는 촌놈이 뜨르르한 대학을 나온 문인들도 힘들다고 머리를 내젓는 글농사를  짖겠다고 나서섰으니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는 격이였다.      옛 사람들은 “만권의 책을 읽으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였다. 나는 문화자질을 높이기 위하여 목마른 사람이 물마이듯이 열심히 책을 읽었다. 책을 많이 읽다보니 자연 지식의 축적되고 글쓰는 의향이 생기게 되고 부지런히 글을 쓰다보면 좋은 글들을 쓰게되였다. 륙십에 전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8년만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되였으며 책 두권을 출간하였다. 칠십고개에 올라섰건만 여전히 왕성한 의력으로 글을 쓰면서 만년을 근심걱정없이 보내고 있다.       나는 젊었을때 많은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읽은 책속에서 제일 감미롭게 읽었던 책은 “청년생활통신”이란 책이라고 생각된다. “청년생활통신”은 한어를 조선어로 번역된 책이였는데 산문집이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오늘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은  “창업(創業)과 수업(守業)업에 관한 론문이였다. 학자들은 창업과 수업에 대하여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분들의 내놓은 견해를 보면 대체적으로 창업이 중요하다는 관점과 창업이 중요하지만 창업보다도 수업이 더 중요하다는 견해였다. 창업이 중요한가? 수업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 게속 론의할 문제라 생각된다.      내 짧은 소견에서 볼때 큰일을 론한다면 나라를 창건하는 것과 나라를 수호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느 하나도 홀시할수 없는 문제다. 작은 일을 론한다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창업한다는 자체가 어려운일이다. 내가 보건대 창업하는것도 어렵지만 창업한것을 장시기 유지하며 사업효과를 나타내다는 자체가 힘든일이다.      과학자 파라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숭고한 목표하에서 끊임없이 분투한다면 비록 늦을지라도 꼭 성공할것이다.” 우리는 사업에 성공하려면, 이미 이룩한 사업을 “룡두사미”로 되지 않게하려면 숭고한 목표하에 끊임없이 분투하며 도전한다면 이미 쌓아놓은 성과를 오래동안 수호 할것이다.      
2    조국 그리고 고국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1997  추천:0  2015-03-06
                                      조국 그리고 고국에 대한 단상             사람마다 조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국에 대한 함의는 다르게 해석한다. 나는 나의 조국을 중국이라 한다. 나는 중국땅에서 태여나 70여년을 살아왔고 중국 국적을 가진 공민이다. 어디로 가나 떳떳한 중국공민이라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우리를 한국계 중국인이라 한다. 또 동포2세라한다. 일본에서는 재일동포라 하고 러시아, 미국에 가면 코리아인이라 한다. 우리 조선족들은 중국 국민이지만 조국과 고국을 가지고있는 특수한 민족이다.          력사적원인으로 하여 우리선조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정착하고 황무지였던 연변을 개척하여 후손만대의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개척한 삶의 터전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희망을 품고있었지만 일제침략의 만행과 부패무능한 만청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눈물겨운 고난의 력사를 엮어야만 하였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민족은 심한 압박을 받았으므로 혁명성이 강하였다. 항일투쟁에서 앞장섰고 국내해방전쟁에서 위훈을 떨쳤으며 항미원조에서 많은 목숨과 피를 흘리였다. 항일전쟁시기와 동북해방전쟁시기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곳은 혁명근거지로 되여 혁명승리에 기여하였다. 대가도 많이 치렀다. 조선족이 살고있는 마을마다에는 혁명렬사비가 있다.         해방후 중국공산당의 인도하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신앙을 갖고있는 우리 조선족, 공산당의 령도아래 56개 민족과 함께 하나의 대가정을 이루고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되였다. 우리조선족은 중국땅에서 자기의 력사를 근300년을 쌓아가고 있다.           조상들이 살던 곳 조선과 한국, 우리는 그곳을 고국이라 부른다.         나는 자기의 조국이 있지만 항상 고국을 생각하며 고국의 일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고국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나는 어느때든 고국을 찾아가 보리라 생각했다.         나이 륙순이 되던해에 고국을 가보려던 숙망을 실현하였다. 먼저 한국땅을 밟게 되였다. 한국땅을 밟으며 이런 감회가 들었다. 과거 중국과 한국은 정치적 갈등으로 담을 쌓고 지내였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적대적 나라로부터 상호 호혜의 원칙을 지키는 이웃나라로 되여 상호간 국민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고있다.         한국을 방문한 연후 조선 관광을 하였다. 평양, 개성, 판문점, 원산, 라진선봉과 금강산 모향산을 돌아보면서 감수가 깊었다. 근로용감한 우리민족은 어디로 가나 열심히 일하며 자기의 조국을 건설하고 있음을 보았다. 조선과 한국의 국민들은 모두다 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조국은 우리를 잘 살도록 생존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면 고국은 우리를 부유해지도록 도와주고있다. 우리는 조국이 있어 힘이 있고 고국이 있어 시야를 넓히게 되여 세계를 알게 되였다.         나는 물론 고국도 사랑하지만 조국인 중국을 더 사랑한다. 나서 자란 조국땅, 인정도 풍속도 교육도 리념도 모두 중국화로 된 우리조선족들,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도 중국에 와 살려는 조선족들, 조국이 있고 고국이 있어 우리는 안정되고 평화스럽게 행복한 생활을 하고있다         나는 고국을 그리고있지만 조국을 한없이 사랑한다. 
1    잠간만 댓글:  조회:1890  추천:0  2014-12-17
                                  잠간만                 “잠간만” 참아 주세요,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이말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말을 사용하면서도 의미를 종종 망각 할때가있다. “잠간만” 이 말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무게있는 엄숙한 말이며 남들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평소 우리는 잠간 아주잠간만 참으면 모든 사고를 피면할수있다. 례를들면 교통사고의 경우 다수의 운전수들은 순간을 참지 못해 음주운전을 하거나 과속운전을 하게된다.            “문명도시 문명시민”걸맞지않게 마구잡이로 차를 모는 자동차 운전수들의 자질의 낮은것도 있겠지만 더욱 안타가운것은 교툥규칙을 지키지않은 시민들의이다. 횡단로에서 지시등을 보지 않거나 붉은등이 켜져 있어도 마구 건늠길을 건느는 사람들을 흔히보게된다. 가끔은 자신도 건늠길을 건늘 때 붉은신호등이 켜지면 기다렸다가 건늘가 생각도 했지만 때론 신호등을 무시하는 시민들속에 끼여있다보니 무작정 따라나설 때가 있다. 속으로는 나부터 교통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부르짓지만 인간속에 어울려살다보니 자연히 그들을 따라가게 되니 누구를 어떻다 말할수 있겠는가? 그렇다보니 교통질서는 더욱 혼란해 질수 밖에 없다.                                                           로씨야 울라지보스또스크시에 가보니 시민들은 횡단로에서 달리는 차량이 없어도 절대로 길을 건너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가 푸른 신호등이 켜져야만 가던 길을 재촉했다. 횡단로에서의 기다림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잛은 시간을 참지 못해 빚어진  후과는 짧은시간으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로 승화한다.             “잠간만”에는 잠간 사이라고 하는 의미와 잠간사이 참아 달라는 함의를 같고 있다.             일본은 경제가 발달한 나라이다.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자살률이 높다고 한다. 자살률이 높은 원인은 일본사람들의 성격과 사회적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화산이 자주 화산이 폭팔하는데 이로인해 화산구덩이가 곳곳에 생겼다고 한다. 자살할려는 사람들은 그 구덩이에 뛰여들어 자살하는것이 많다고 한다. 화산구덩이에 뛰여들어 자살하는 행위를 막기위하여 화산 구덩이앞에 “잠간만”이라는 패말을 꽂아두었다. 자살 시도자들은 그 “잠간만”이란 글을보고 잠간동안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게 된다고 했다. 잠간 사이에 걸음을 멈추고 생과 사중에서 생을 택하개 된다. 죽음의 변두리에서 사람을 구하는 이 “잠간만”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구해주는 현명한 “구명묘약”인가를 알수있으며 또 일본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 “잠간만”을 홀시해서는 안된다. 자존심이 강하고 쉽게 격동되기에 순간일지라도 참기 어려워 한다. 내가 아는 한 젊은이는 술김에 말다툼을 벌이다가 술병으로 친구의 머리를 내리쳐  중상입혔다. 이번 실수로 친구는 8년이란 옥살이를 했다. 짧은 한순간에 저지는 대가가 바로 8년 옥살이이니 얼마나 가슴 아픈일인가? 피해자는 종신불구로 되였으니 평생 원망할거고… 잠시만 참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간동안이라도 참을성 있게, 잠간동안이라도 기달릴줄 아는 인내심을 키우며 다같이 화목하개 살아야한다. 떠 잠간동안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존중하며 그런 부탁을 내심 들어주어야 할것이다.           “잠간만”은 짧은 순간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 무수한 생명이 태여나고 무수한 생명들의 명을 바친다. 또 그 짧은 순간에 무수한재부를 창조한다. “잠간만” 잘생각하고 일을 처리한다면 많은 어려운 일도 해결할수 있고 인류에게 보다 많은 재부를 창조하고 사랑을 나눌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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