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선생의 기행문을 읽고
전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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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우리 주위에는 정년퇴직을 한 후에 문단에 들어와 붓을 잡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한 분이 있다. 그가 바로 최상운 선생이다. 원래 학생시절로부터 문학작품을 즐겨 읽었고 초급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열심히 책을 읽었 으며 그러다가 차츰 글을 쓸 의욕이 생겨 처음에 주로 통신보도문을 쓰면서 연변일보 와 연변방송국의 통신원으로 되기도 하였다가 1965년에 연변일보 문예부간에 벽소설 을 등보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소년아동잡지에 이라는 아동소설을 발표시키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었는데 이러저러한 여건으로 인하여 수십년간 필을 들지 못하다가 나이 륙십이 되면서 다시 필을 들고 글을 쓴다 는 분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이 쓴 글들을 다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이 이미 두 권의 수필집을 출간했고 요지음은 한 권의 기행문집을 비롯하여 또 한 권의 수필집과 소설집을 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실로 석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창작열정에 머리를 숙여 탄복하게 된다.
더구나 사람들을 탄복하게 하는 것은 문학창작에 매진하기 위한 선생의 남다른 자세와 노력, 그리고 그 행적이다. 지금 나의 컴퓨터 안에는 선생이 퇴직한 후 십수년 간 려행을 다니면서 써놓은 기행문 묶음이 들어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21개 나라 와 대만, 그리고 110곳도 넘는 려행지에 대한 려행상황이 기록되여 있고 또 매개 려행지마다에 적게는 6~7점, 많게는 20여점 넘어되는 관광명소에 대한 상세한 상황이 기록되여 있다. 선생이 참관한 그 관광명소들을 모두 통계를 한다면 네자리수에서 오르내려야 할 엄청난 수자에 이를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선생이 무슨 마음, 무슨 여건, 무슨 열정으로 이처럼 많은 관광명소들 을 찾아 려행을 하면서 관광을 하였을가?
이에 대한 해답은 선생 스스로 하고 있다. 선생은 자신이 지금까지 써놓은 몇십 만자에 달하는 기행문들로 한 권의 책을 묶으려고 준비하면서 그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어릴 때 작가로 되려는 것은 나의 꿈이였다. 그런데 그 꿈을 이러저러한 여건 으로 인해 실현 못하고 지나왔다. 그러다 60세가 되던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3년 석달을 체류해 있었다. 체류해 있는 동안 한국에 대하여 뭔가 쓰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우리민족의 뿌리를 찾고싶고 조선민족의 력사를 알고 싶었다. 나는 휴일날에는 가방을 메고 력사유적지 답사를 떠났다. …한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나는 15만자에 달하는 한국기행을 썼다. …귀국한후 나는 인츰 조선관광을 하였다. 조선관광을 통하여 고구려의 력사와 고려의 력사에 대하여 심층 알게 되였다. 나는 조선관광을 한 후 조선에대한 기행문을 썼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다. ‘세상은 넓고 크고 인생은 짧다. 빨리 려행을 떠나라.’ 나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나는 먼저 동남아 나라 싱가포르, 말레아시아, 타이 관광을 하였다. 그후 일본, 대만,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를 관광을 하였으며 관광에서 재미를 얻어 서유럽의 독일, 이딸리아, 프랑스, 스위스, 룩셈부르그, 빠띠노시국을 관광하였다. 연후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를 관광하였으며 미국, 카나다, 멕시코, 하와이주, 이집트, 아랍추장국 련방, 영국관광을 하였다. 세계 21개 나라와 대만지구를 관광하고 나니 나는 시야가 넓어지며 지식이 풍부해짐을 느끼였다."
상술한 글에서 보다싶이 분명 선생은 려행을 자기의 시야와 학식을 넓히는 방법 으로 알고 있었고 자기의 문학수업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선생은 "나는 14년간 꾸준히 문학이란 터밭에서 글농사를 지었다. 처음에 기행문을 쓰기 시작하여 후에 시, 가사, 수필, 소설을 썼다."고 고백을 하였다.
려행이 문학수업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선생의 상황에서는 납득이 가는 말이다. 마치 김창걸 선생이 작가로 되는데는 세가지 조건 "첫번째는 가난이고 두번째는 글 공부와 문학공부이며 세번째는 인생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사(士), 농(农), 공(工), 상(商)을 체험하면서 많은 조대를 겪었고 많은 일들을 체험했기에 작가로 될 수 있겠다고 자신했던 것 처럼 작가의 꿈을 품은 최상운 선생도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보면 농촌에서 농민으로 있었던 체험도 있고 도시에서 로동자로 있었던 체험도 있으며 일반 군중으로, 기층당조직의 책임일군으로 있었던 체험들이 모두 있는데 다만 “가방끈이 짧다.”, “지식이 짧다”는 그것에 대한 보완책이 바로 려행과 관광이 아니였나 싶다. 분명 선생의 려행과 관광은 작가의 꿈과 밀접히 관련되여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비추어 필자는 이 글에서 선생이 써놓은 기행문들을 놓고 몇마디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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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선생은 려행과 관광을 일종“가방끈이 짧다.”, “지식이 짧다” 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 삼았다. 하였기에 선생은 어느곳에 대한 관광을 시작할 때면 사전에 그곳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꼼꼼히 읽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관광 과정에서는 "말타고 꽃구경" 하듯이 대충대충 보아 넘긴 것이 아니라 상세히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 선생은 많은 지식을 쌓았는데 그 지식의 내용에는 력사적 인 것과 지리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종교적인 것, 생활 습관과 풍토 인정 등에 관한 많은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관광을 하다보면 관광하는 것은 학문과 같은 것이며 려행을 많이 하다보면 아는 것도 많아지고 지식도 소리없이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다.
선생은 이러한 지식 습득과 지식 탐구의 자세로 려행과 관광을 진행하였기에 한국의 서울에 대한 기록에서만 보아도 그저 그 규모와 외형에 대한 고찰과 기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력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연지리적으로 많은 지식을 파고들면서 기록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서울이 515년동안이나 "한성"으로 불리우다가 일제 강점 기에 이르러서는 "경성"이라 불리웠고 광복후에는 한국에서 새나라 수도를 "서울"이 라 부르자고 하여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서울"이라 부르고 있다는 기록이며 "서울" 이란 "서라벌" 혹은 새벌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뜻인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된다는 기록 등이 그러하다.
이밖에도 선생은 서울을 기록하면서 경복궁, 도봉산,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서대문형무소, 장충단공원 등에 대하여서도 자세하게 기록하였는데 그러한 기록들에 는 모두 깊은 문화와 력사 사화들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기타 지방에 대한 선생의 려행기록에서도 보면 물론 태안, 만리포, 천리포, 산두리사구, 속초, 설악산, 부산의 해운대와 오륙도 등 경치가 수려한 명승지를 찾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개가 우리 민족의 유규한 력사가 담겨져 있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담겨져 있는 곳들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그러한 명승지 들에서도 애써 문화적인 요소들을 찾아 기록하였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선생은 한국에서 주로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찾아 공부 를 하기 위해 려행을 하였고 관광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 주변의 도봉산 유람이 그러하고 금현리 지석묘 참관이 그러하며 동구릉과 광릉, 옛신라 수도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옛백제 마지막 수도 부여의 백마강과 락화암, 제주도와 한라산, 강화도 등 모두가 그러하다.
선생은 한국에서 돌아오자 곧 조선을 다녀오고 또 기행문들을 썼는데 역시 수도 평양을 두고 력사, 지리, 문화적으로 고찰하여 기록하였는 바 아래에 그 한대목만 보아도 그러하다.
력사를 훝어보면 평양은 일찍 고조선시기에 수도였다. 기원전 30세기초 단군은 조선의 첫 고대국가 고조선을 세웠다. 시조왕 단군은 “맑은 아침의 나라” 라는 의미에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짓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로서 3000년간 존재하면서 여러가지 우회곡절을 겪으면서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였다. 국가정권의 형성을 알리는 징표로 되는 성곽들이 평양시 중심으로부터 대성구역 장암동 등지에 100여리를 사이 두고 축성배치되여 있었다.
그리고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며 보현사며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당에 대한 기록, 개성과 분단상황에 대한 기록, 선죽교에 대한 기록 등 조선려행에 대한 기록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
이처럼 선생은 조선반도의 려행과 관광에서 그 어느 한 곳을 두고도 대충 보아 넘긴 것이 아니라 그곳에 관계되는 많은 지식들을 파내고 기억하고 배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기행문들에서 보면 조선반도를 두고 력사적으로는 고조선으로부터 현재의 남북 분단에 이르기까지, 지리적으로는 제주도의 한라산으로부터 평양성과 그 주변의 자연지리상황에 이르기까지를 그토록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이 집필한 이 기행문집은 조선반도의 력사와 지리에 대한 집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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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미 말하두었지만 선생의 려행과 관광은 조선반도에만 멈취진 것이 아니 였다. 물론 한국에서의 려행과 관광은 선생의 말 그대로 "한국에서 3년 석달을 체류해 있"는 기간에 계획을 세우고 자의로 시간을 조절하면서 진행한 것이였다. 하지만 선생은 귀국하자 곧 조선에 대한 관광을 시작하였는데 그로부터 진행한 많은 나라와 지역에 대한 려행과 관광은 모두 려행사들에 의탁하여 진행한 것이였다고 사료된다.
주지하다싶이 기행문이란 일정한 곳을 찾아 려행이나 관광을 하면서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나 체험한 것들을 쓰는 서사적 작품의 한 형태이다. 여기에는 소개에 중점을 두는 것도 있고 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도 있으며 작자의 감상을 주로 표현하는 것도 있다.
최상운 선생의 기행문들도 역시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기행문들에는 대상에 대한 소개에 중점을 둔 것도 있고 대상에 대한 묘사에 중점을 둔 것도 있으며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것도 있다. 그러면서도 선생의 많은 기행문들은 그 한편한편에서 상술한 요소들을 거의 함께 체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특기해야 할 것은 선생은 한 나라, 한 지역, 한 명소에 대하여 기술할 때면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것을 내세워 묘사를 곁들면서 보는듯이 소개를 하였다는 그것이다. 이를테면 오스트랄리아를 려행하면서 “…그때야 진짜 우리가 살고 있는 북방부와는 완전히 상반된 계절을 갖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나는 땀을 훔치면서 공항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다 한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가 짧은 샤쯔에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녀자애들은 미니스카트치마를 입고있었다. 그날 멜버른시의 기온은 섭씨30도였다. …멜버른시에서는 아직도 100년전에 건설한 궤도전차를 사용하고 있었다. 빨간색을 칠한 100년이 넘는 제일대의 전차와 화려하게 꾸민 신형의 전차가 어울리면서 도시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이 가관이였다. …멜버론시의 높은 곳에서 멜버른시를 내려다 보면 멜버른시의 도시 중심을 내놓고는 멀리까지 보이는 것은 끝없는 나무숲이였다. 그 나무숲속에 낮다란 지붕이 뿔룩뿔룩 보이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도시라기보다. 나무숲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것 같았다.”고 기술하였거나 이집트를 려행하면서 “카이로시를 보면 수도인데도 눈에 확 뛰우는 건축물과 수림이 보이지 않았다. 나일강을 도시 중심에 끼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매마른 상태로 있었다. 강변과 중심거리에만 나무가 무성하고 기타 곳은 나무가 드문드문 있을 뿐이였다. 주민구에는 나무가 적고 늘크무레한 색갈을 띤 성냥갑과 같은 네모난 집들이 질서없이 있었다. 지붕을 보면 아직 마무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철근이 로출되여 있었다. 어찌하여 지붕 마무리를 하지 않고, 마무리를 하지 않은 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이 몇년간 이집트에서는 정권이 여러번 교체되면서 정부는 사실상 제 역활을 하지 못하고 무정부상태에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정부의 규제가 없는 틈을타 자기 맘대로 집을 지었다 한다. 집을 다 지으면 재산세를 내야 하므로 사람들은 집을 마무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시민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했다.”는 기술, 미국을 려행하면서 “워싱톤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수림이였다. 첫 인상이 워싱톤은 도시라기보다도 공원이라는 감이 들었다. 수림속에 집들이 보이였다. 도시중심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무숲에 가려진 1-2층으로 된 단독가옥들이였다.”는 기술, 영국을 려행하면서 “옥스퍼드시 교외의 건물들은 보통 2층으로 된 단독건물들이 많았다. 시내 안의 건물들은 보통4층건물이였다. 건물들을 보면 지붕을 뽀족하고 가파롭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룡마루에 굴뚝이 여러개 있었다. 어떤 집은 굴뚝이 십여개나 있었다. 알고보니 영국사람들은 추울 때에는 뻬치카를 리용하여 온도 조절을 하고 있었다. 칸칸마다 뻬치카가 있으므로 칸수에 따라 굴뚝이 많거나 적었다.”는 등의 많은 기술이 그러하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필자는 선생의 기행문들을 읽으면서 선생이 다녀왔던 나라 와 도시, 그리고 관광지들을 눈앞에 떠올릴 수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꼈고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시야를 넓혔다. 실로 세계 각국을 리해하는 한 권의 세계지식 참고자료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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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필자는 선생의 기행문들에서 다방면으로 토로되는 그 감수, 그 느낌 들에 대하여 많이 공명을 하고 탄복을 하였다. 선생의 그러한 감수, 그러한 느낌들은 대개 선생의 정치적 정감에 의한 자아발로로, 신비한 자연과 력사의 맥락에 의한 감탄으로, 이색적인 것에 대한 깨닳음으로, 중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으로, 또 상술한 요소들의 복합으로 이루어지는 등 아주 많은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들은 또한 아주 진솔하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토로되였다.
아래에 그것을 떠올려보자.
처음 서울을 볼때 초대형 도시라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중국의 북경처럼 거대하게 터를 잡지못하고 협소하다는 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개구를 지나면 산이있고 그산을 넘으면 또 새로운 구가 있어서 도대체 서울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울의 지형을 두고 한 선생의 감수이고 느낌이다. 필자가 1991년 11월에 처음으로 서울에 갔다가 받았던 감수와 너무도 꼭같아 혀끝을 차게 된다.
대만에 다녀오고보니 예전에 내가 머리속에 있던 대만에 대한 견해는 180도로 바뀌였다. …대만이 이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감을 느끼게 했다. 등소평주석의 내놓은 “한나라 두가지 제도”는 실천중에서 정확함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번에 대만에서 느낀 바에 따르면 해안 량안의 정치가들도 조국통일의 대업을 위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고 민중과 국가의 리익을 위하여 신뢰의 물고를 터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난날 다른 리념으로 원쑤로 여겨왔던 사람들이 지금은 웃으며 반기고 있다. 수십년간 쌓여왔던 리산의 슬픔이 냇가의 얼음이 풀리듯 슬슬 풀리고 있었다. 이제야 중화민족의 대가정이란 함의를 알것 같다.
대만성을 다녀오면서 한 산생의 느낌이다. 선생의 정치적 정감에 의하여 발로된 감수이고 느낌이다.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한가!
…나는 애급의 고대문물을 보면서 침략이란 무엇인가를 알 것 같았다. 한세기 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렬강들은 강대한 군사력으로 애급과 같은 세계의 많은 야속국가들을 침입하여 그 나라의 보귀한 문물들을 훔쳐다 자기들의 소유로 하였다. 빼앗은 문물을 박물관에 버젓히 전시해 놓고 자신들의 강대함을 과시하였다.
선생이 뉴욕중앙박물관을 참관하면서 쓴 한 대목이다. 정치적으로와 력사적으로 발로되는 감수와 느낌을 토로한 대목인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이아가라협곡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자연은 어찌하여 딱 미국과 카나다 국경 에다 인류가 창조할 수 없는 거대한 협곡을 만들었을가? 생각할수록 자연의 유능에 탐복하였다.
선생이 카나다를 려행하면서 미국과 카나다 사이에 놓여있는 나이아가라협곡을 보고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한 감수와 느낌이다. 짧은 구절에 사람들의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중국인음식점 주인을 보면서 참으로 중국인들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만리 먼 타국에서 음식점을 꾸려 부지런히 재부를 모으는 음식점 주인이 대견스러웠다. 중국인들은 총명하고 근로한 사람들이다. 서유럽의 도시를 관광하면서 서유럽의 도시마다에는 중국인이 꾸린 음식점이 씨앗처럼 꼭꼭 박혀있었다.
선생이 프랑스려행을 하면서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느낀 감수를 쓴 대목이다.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선생의 정감세계가 구김 없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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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기행문들에서 이러한 대목들을 찾자면 너무도 많고 필자 또한 이런 식 으로 이 글을 써내려간다면 그 끝이 보이지 않겠기에 아쉽지만 여기서 줄이려 한다.
아무튼 자신의 아름다운 문학의 꿈을 키우면서 “가방끈이 짧다.”거나 “지식이 짧다”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 이루어 졌다고 사료되는 선생의 다년간의 세계려행과 관광, 또 그 려행과 관광의 기록으로 이루어진 이 기행문집은 선생이 그 려행과 관광 을 위하여 사전에 많은 자료들을 찾아 꼼꼼히 읽으면서 공부를 하였고 또 애써 필력을 키우면서 씌여진 것이였기에 그 자료적 가치와 흔상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 기행문집을 접하는 독자들도 이 기행문집을 읽고 필자처럼 중국의 대만성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상황에 대하여 그 특점을 눈앞에 보는 듯이 접수하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필자는 자신의 능력 제한으로 선생의 이 한 권의 기행문집이 이룩하고 있는 그 성취들에 대하여 충분히 긍정하지 못함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선생의 이 한권의 기행문집의 출간을 축하한다.
2018년 1월 20일 (전성호선생님은 연변민속문화연구소에서 근무하시다가퇴직한 문학박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