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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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기행
2016년 12월 04일 13시 58분  조회:7471  추천:0  작성자: 최상운
                                    이집트(埃及) 기행
 
 
                                 1. 카이로로 가다
 
       나는 지난 11월19일에 고대문명국인 이집트와 신흥의 국가 아랍추장국련방 관광을 떠났다. 북경공항에서 우리 려행단 팀원들이 집결하였다. 모이고 보니 4개 성시에서 온 11명의 팀원들이였다. 팀의 인솔자는 신주관광국에서 파견한 리남이란 젊은이였다. 후리후리한 키골에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진 젊은이였다.
       저녁21시30분이 되자 북경 – 아부다비행 비행기가 서서히 북경 공항을 떠났다. 항공기는12시간 날아 아랍추장국련방의 수도에 있는 아부다비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찜통더위가 덮쳐와 얼굴이 확근해 났다. 11월말이라 연길은 눈 내리는 매서운 겨울철에 들어섰건만. 아랍추장국련방도 겨울철이라 하지만 여전히 여름철의 더운 기온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아랍지역의 중동 나라들은 대부분 지역이 사계절이 아니고 겨울과 여름 두 계절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아랍추장국련방도 겨울철과 여름철 두 계절만 있다고 한다. 겨울철이라 하지만 기온이 령하권으로 내려가지 않고 섭씨 10도가 제일 낮은 기온이라 한다. 오늘 아부다비의 낮 기온은 섭씨 29도였다.
       우리는 아부다비 공항에서 3시간 휴식 한후 다시 아부다비공항에서 이집트로 가는 아부다비 – 카이로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4시간의 비행을 거처 카이로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집트해관은 다른 나라의 해관보다 검사가 심하지 않고 절차가 간단하였다. 나는 여러개 나라를 다니였지만 이번 려행처럼 수속이 간편하기는 처음이였다. 이집트와 아랍추장국련방 려행수속은 대사관이나 령사관으로 서류를 가지고 가서 비자를 맞지않고 컴퓨터로 수속하였으므로 매우 편리하였다.
       이집트와 북경 시간은 여섯시간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에 와서는 시계를 북경시간보다 6섯시간을 늦추어 놓으면 된다.
       카이로 공항출구에서 얼굴색이 검고 키가 껑충한 젊은 남자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류창힌 중국어로 자신은 이집트 국제 려행사에서 파견한 가이드인데 이름은 모함메드라 했다. 모함메드란 이름은 아랍국가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름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중국어로  왕도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모함메드라 부르지않고 왕도라 불렀다.
       왕도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먼저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시를  가기로 하였다. 왕도의 해설에 의하면 이집트의 국토 면적은 160만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9,000만명이 된다고 했다. 이집트의 주민들의 90프로가 나일강 주변에서 살고 있으며 수도 카이로에는 근 2,0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집트는 종교의 나라로서 국민의 90프로의 사람들이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를 신앙하고 있다고 했다. 이슬람교에도 구 이슬람교와 신 이슬람교가 있으며 무슬림파와 시니파로 갈라저 있다고 했다.
      이집트는 고대 문명국이며 피라미드, 스핑크스, 신전과 같은 많은 문화 유적과 문물이 남아 있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5천년이 문명사를 갖고 있는 이집트의 곳곳에 력사유적과 문물이 있어 이집트를 로천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왕도의 말을 듣고보니 이집트의 고대 유적과 문물을 보고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였다.
       이집트는 력사적으로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종교간, 교파간, 민족간, 이웃 나라간의 갈등과 불심으로 싸움이 그칠새 없었다 한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수없는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고 했다. 다행히 이 몇년간은 전쟁을 하지 않아 다소 안정된 상태로 돌아섰지만 아직도 내부 갈등으로 여전히 경제는 침제 상태에 있다고 했다.
      왕도는 지금 많은 이집트의 젊은이들이 경제 현황이 좋은 사우디아라비야로 로무수출을 가고 있다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야는 이집트와 매우 우호적인 나라라 했다.
       카이로시에는 옛 카이로구역과 신 카이로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리는 먼저 옛 카이로구역을 돌아보았다. 도로 량켠에는 고전 건축물들이 보이였다. 오랜 건물들이여서 문화적 가치는 있으련만 겉 모양과 주위환경이 좋지않아 스산해 보였다.
       이집트는 일년에 비가 몇번 내리지 않는 건조한 곳이다. 산들을 보면 산에는 나무 한대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였다. 강렬한 햇빛과 강한 바람으로 인하여 산의 바위들은 붕괴되여 자갈과 모래로 되여 휘날리면서 이집트 전체가 사막화로 되여가고 있었다. 마치 사람과 사막이 생사결투를 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이로시를 보면 수도인데도 눈에 확 뛰우는 건축물과 수림이 보이지 않았다. 나일강을 도시 중심에 끼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메마른 상태로 있었다. 강변과 중심 거리에만 나무가 무성하고 기타 곳은 나무가 드문드문 있을뿐이였다.  주민구에는 나무가 적고 눌그무레한 색갈을 띤 성냥갑과 같은 네모난 집들이 질서 없이 있었다. 지붕을 보면 아직 마무리를 하지 않은 상태로 철근이 로출되여 있었다. 어찌하여 지붕 마무리를 하지않고, 마무리를 하지않은 집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이드 한테 물었더니 가이드가 하는 말이 이 몇년간 이집트에서는 정권이 여러번 교체되면서 정부는 사실상 제 역활을 하지못하고 무정부 상태에 있다고 했다. 시민들은 정부의 규제가 없는 틈을타 자기 맘대로 집을 지었다 한다. 집을 다 지으면 재산세를 내야 하므로 사람들은 집을 마무리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정부와 시민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카이로에 몰려드는 바람에 카이로는 거주환경이 막심해 졌다고 했다. 카이로의 많은 서민들은 비좁고 환경조건이 영악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옛 구역을 지나 이집트국립박물관으로갔다. 이집트 국립박물관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일정표에는 래일 국립 박물관을 관람하기로 일정의 잡혔는데 불세로 래일 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광장에서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려행사에서는 급히 일정을 변동하여 국립박물관 관람을 오늘로 하기로 변동하였다.
       이집트의 공휴일은 참 신기했다. 세계적 범위에서 볼때 공휴일을 일반적으로 토요일과 일요일로 하는데 이집트에서는 금요일과 토요일을 공휴일로 정하였다.
      이집트중앙박물관은 3층으로 되였는데 1층은 “미라” 전람실이고 2층은 고대 석조예술품 전람실이고 3층은 이집트의 력사를 알리는 왕실 문물들이 전시되여 있었다. 화려하고 정밀하게 꾸려진 박물관에는 이집트의 5천년력사를  재현시켜주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 안에 소장되여 있는 “미라”로 된 왕의 시체를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3천년전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3천여년동안 보존한 이집트 사람들의 지혜에 감탄이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왕의 시체를 오래동안 보존하기 위하여 죽은자의 시체속의 내장을 다 뽑아내고 건조한 피라미드속에 묻어 마른 시체가 되여 “미라”로 되도록 하였으며 미생물이 활동하지 않게 방부처리를 하였다 한다. 박물관에서 왕의 사용하였던 침대와 의자를 보면 매우 작았다. 왕의 사용하였던 문물이라면 응당 크고 화려 했으련만 그렇지 않아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고대의 왕이키는 160cm도 안되였다고 했다. 왕의 시체를 보관했던 관은 큰편이 아니였어도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3000년전에도 이집트 사람들은 동과 금을 제련할줄알았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대문밖으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책, 그림, 골동품을 사라고 유람객들에게 몰려들었다. 우리는 너무도 시끄러워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내가 뻐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이집트 사람이 나한테로 다가오면서 서툰 중국어로 “니호우”하는것이였다. 내가 “호우”히며 머리를 끄덕이자 그 사람은 나한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차이나 호우”하는것이였다. 나는 중국이 좋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사람을 보고 “아메리카 쩌머양”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튀 하고 춤을 뱃는것이였다. 우리둘 사이에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손짓을 해가며 의사 소통을 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중국에 대하여 우호적이며 중국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대신 미국에 대하여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미국의  이스라엘을 지지 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 중국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를 “쑈르번”이라 욕하듯이 이스라엘을 “쑈 이스라엘”이라 욕하였다.
       카이로시의 옛 구역과 이집트 국립박물관을 돌아보고나니 저녁때가 되였다. 저녁은 중국음식을 만들줄 아는 이집트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자시였다. 
 
                                    2. 고대 이집트왕의 무덤
 
       우리는 저녁을 자신후 피라미드(금자탑)에서 멀지않은 한 호텔에 주숙을 정하였다.
       이튼날 차를 타고 피라미드를 보려고 떠났다. 피라미드는 카이로 시교에서 멀지않은 사막지대에 있었다. 황금색을 띤 사막에 산처럼 웅장한 금(金)자 모양이 피라미드 세개가 보이였다. 피라미드는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사각형은 동서남북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일강 하류에는 근 80개의 피라미드가 있다고 한다. 그 피라미드중 60여개가 이곳에 집중되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호프시대의 왕의 가족의 무덤군이라 할수 있겠다.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는 “파라오”라고 부르는 피라미드이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왕의 무덤이다.) 세개의 큰 피라미드중에서 제일 큰 피라미드는 “파라오”왕의 무덤이고 두번째 큰 피라미드는 “파라오” 왕의 아들이 무덤이고 세번째 피라미드는 “파라오” 왕의 손자의 무덤이라 한다. 세개의 큰 피라미드외에 수십개의 작은 피라미드들이 있었다. 어떤 피라미드는 이미 모래속에 묻쳐 자취를 감추었다.
       세개의 큰 피라미드 중에서 3.400년전에 건축하였다는 제일 큰 “파라오” 피라미드 속을 관람객들이 들어가 볼수있도로 개방하였다.
      거대한 피라미드속, 어느위치에 왕의 시체가 묻쳐있을가? 어떻게 정확하게 그 위치를 측정하고 발굴할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고고학자들은 많은 연구와 분석을 통하여 정확하게 무덤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한다. 후에 많은 품을 들여 왕의 무덤으로 들어갈수있는 통로를 개척하였다 한다.  
       나는 피라미드 안이 어떤지 알고 싶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갔다. 왕의 무덤 자리로 들어 갈수 있는 통로는 두사람이 겨우 스처 지나 갈수있게끔 닦아져 있었다. 길 바닥은 두터운 널판자를 깔고 그우에 미끄지 않에 나무 걸턱을 만들어 놓았다. 길 량쪽에 안전대를 설치해 놓았고 전등도 가설해 놓았다. 가파로운 언덕길을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했다. 15분간 헐덕거리며 올라 가니 꽤나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중심에 큼직한 돌관이 있었다. 돌관 안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여 있었다. “미라”로 된 왕의 시체는 이미 도굴자에 의하여 무덤을 떠났다고 한다. 듣는 말에 의하면 “미라”로 된 왕의 시체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다고 한다. 나는 무덤 자리에서 잠간 휴식한후 내려왔다. 올리막길은 올라 갈때 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들다. 15분간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걷고 나니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힘들어도 피라미드속의 “파라오”왕의 무덤자리를 보고나니 다소 기분이 좋았다.
        “파라오”피라미드는 높이가 146.5m이고 기반의 각 변의 길이가 약 230m이며 230만개의 큰 돌을 쌓아 만든것이다. 돌 한개의 평군무게는약 2.500킬로그람이 된다. 이 돌들은 천리밖의 아라비야 땅에서 채굴해 왔다고 한다. 30만 사람들이 20년동안 만든것이라 한다. 나는 피라미드를 보면서 인가가 희소하고 제작업이 아직 갖추어 지지 않은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큰 공정을 완수할수 있었겠는가? 나로서는 해석할수없는 불가사한 일로 여겨졌다.
        “파라오” 피라미드에서 350메터 아래로 내려오면 국왕의 권력과 존엄을 상징하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우뚝서있다. 스핑크스도 역시 왕이무덤이다. 이 무덤의 임자는 스핑크스로서 원래의 이름은 흐르-엠 가케트이다. 스핑크스는 조각상인데 천연의 거석으로 조각하였다. 스핑크스의  길이는 73메터이고, 높이는 22메터이고, 귀의 크기만 하여도 2메터나된다. 사람의 머리를 가진 사자의 거대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스핑크스를 보면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정말로 슬기롭고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나왔다. 스핑크스는 좀 낮은 지대에 만들어 졌는데 수천년동안 모래바람에 묻쳐있다가 다시 원상복구하였다. 하지만 얼굴의 일부분은 바람에 의해 풍화되였고, 일부분은 옛 이집트 기병들이 대포로 표적에 사격하듯이 연습하여 파괴되였다 한다.
       우리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고나서 차를 타고 또 다른 왕이 무덤으로 찾아갔다.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자신들을 신의 자식이며 신이 만든 존재라고 선전하였다. 처음에는 피라미드와 같은 땅우에 도드라진 릉을 건설하여 위용을 날렸다면 후세의 왕들은 전세의 왕들의 전처를 따르지 않고 몰래 비밀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시체를 감추려고 하였다.
       카이로 교외에서 북쪽으로 멀지않은 곳으로 가면 테베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는 수많은 계곡들이 펼쳐저 있다. 그 계곡속에 “비반엘-물루크왕무덤”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계곡이 있었다. 피득 볼봐엔 아므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으슥하며 조용한 계곡이다. 옛날에는 바위가 많은 깊은 계곡 사이에 고립된 좁은 계곡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고 모든 매혹적인 신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신비스런 비밀무덤이 생기게된 력사의 시작은 장례식 신전과 그의 무덤을 분리한 토오트–모시스 1세 파라오의 예측못한 결심으로 시작되였다 한다. 그는 그의 몸을 매장하는데 있어서 전기의 왕들처럼 화려한 릉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밀스런 장소를 원했기였다. 왕의 릉을 아무리 잘 건축하고 견고하게 만들어도 도굴자들이 략탈을 막을수 없었기에 그런 결심을 내렸을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네니라고 하는 건축가가 왕의 뜻을 리해하고 이 계곡을 선택하였다 한다. 왕의 묘를 만드는데 매우 심중하고 극 비밀로 진행하였다 한다. 왕의 묘를 만들때 고립된 계곡안에 동굴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고 입구를 만든다음 절벽을 잘라 덮어 원상태를 알리지않게 교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든 무덤들은 점차 늘어 났는데 지금까지 이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은 63개가 된다. 왕족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무덤을 건축한 사람들을 살해 하였다 한다. 세상엔 비밀이란 없다. 그렇게 치박한곳에, 그렇게 비밀적으로 만들었지만 도적의 눈을 피할수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왕의 묘에 대한 비밀이 새여 나가면서 많은 도둑과 략탈자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밤마다 도굴을 시작하였다 한다. 도굴자간에는 이 계곡이 불꽃팅기는 략탈이 장소로 되였다 한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횡재할 기회를 얻었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도적들이 략탈하여온 왕들이 소지품과 관을 헐값으로 사들였다가 다시 외국 도매상들에게 고가로 팔아 넘겨 횡재를 하였다 한다. 이렇게 소리없이 비밀리에 보귀한 왕의 무덤속에 있었던 왕의 시체와 왕의 소지품들은 외국으로 흘러 갔다고 한다
       지금63개의 무덤중에서 5개 무덤만 관람객들이 구경할수 있도록 하였다. 무덤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도굴자들이 이미 파갔기 때문이다. 이집트정부에서는 뒤늦게나마 발굴되지 않은 무덤들을 보호하고 무덤속에 남아 있는 문물들을 중앙박물관에 소장하였다 한다. 무덤안으로 들어가니 들어가는 입구는 상당히 너르게 만들었다. 입구 벽체에는 많은 그림과 조각상들이 붙어있었다. 그림 전체가 신에대한 그림이였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악어신, 사자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무덤이 안치된곳은 널직한 공간인데 공간 중심에 시체를 안장할수 있는 돌관이 있었다. 왕의 돌관 옆에는 왕후와 왕비들의 돌관도 있었다.
       벽화와 조각상을 보면 많은것이 손상을 받었다. 왜서 이렇게 손상이 많을가? 내가 궁금하여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가이드가 말하기를 이집트에는 여러가지 종교와 파별이 있는데 이슬람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런 그림과 조각을 파괴하였다고 했다.  
 
                                                3. 나일강에서
 
        우리는 카이로와 그 주변에서 이집트의 고대 력사유적지와 문물을 감상하면서 좋은 기분을 가졌다.
        두번째 행선지로는 나일강 유람이였다.  카이로시 중심에서 멀지 않은곳에 유람선을 탈수있는 선착장이 있었다. 우리는 뻐스를 타고 나일강  선착장으로 갔다 선착장에는  호화로운 대형 유람선 여러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5층으로 된 “메카호”유람선에 올랐다. 이 유람선에서 3일동안 체류 하면서 나일강 유람을 하게 되였다. 이 유람선은 지상의 호텔과 같이 넓고 호화로웠다. 려객선 안에는 음식점, 객방, 커피점이 있었고 배 옥상에는 작은 수영장도 있으며 해빛쪼임 침대와 음료를 마실수 있는 카페도 있었다.
        려객선을 타고 나일강변을 보니 카이로에서 보던때와는 완전히 다른감이들었다. 나일강 강변에는 이름모를 고목들과 수많은 아카시야나무, 이집트에서만 볼수있는 무화과 나무들, 울창한 야생 야자수, 그리고 수많은 수생식물들을 볼수있었다. 띠염 띠염 숲속에 가려진 작은 어촌 마을과. 강가에서 작은 배를 타고 그물을 느리는 어부들도 보이였다. 나일강은 어찌도 넓은지 강물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지도를 보면서 배가 상류로 달리고 있다고 짐작할수 있었다.
       나일강에 왔으니 나일강에 대해하여 잠간 언급 하여야 할것 같다. 아프리카의 중부에 있는 나라 우간다에는 거대한 호수 빅토리아 호수가 있다. 여러갈래의 강물들이 이 호수에 몰려들었다가 나일강을 거처 지중해로 흘러간다. 이 호수가 곧 바로 나일강이 발원지로 되였다. 나일강은 북으로 흘러가는 사이에 다른 강의 지류와 합하여 흐른다. 나일강은 수단과 이집트를 지나 북쪽으로 약 6.695킬로메터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나일강은 세계에서 제일긴 강이다.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4월과 6월사이에 홍수가 지면서 수단과 이집트의 계곡에 몰려든다. 10월이되면 계곡에서 흘러나온 진흙층으로 다시 덮혀진다. 정기적인 홍수가 몰고온 감탕이  나일강변과 나일강 하류의 삼각지대를 비옥한 토지로 만들었다. 그 비옥한 땅은 수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나일강 류역은 기후의 변화와 인이적인 개발로 인하여 이지역에 살던 많은 야생동물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실상 이지대에서 서식하며 살고 있던 사자, 표범, 치타와 같은 거대한 고양이과 동물들이 더 이상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게 되였다. 하마는 16세기말경에 증기 기선의 출현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폭포의 악어들도 모두 숨저 버렸다. 기후 변화로 인하여 지금 나일강물은 많이 줄어들었고, 모든 이집트 계곡은 버림받는 불모의 땅이 되여가고 있다. 하지만 나일강은 여전히 이집트의 생명의 강이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3일간 위로 올라가면서 보니 나일강 류역에 여러개 작은 도시들이 있으며 그 도시마다 이름난 신전들이 있는것이 보이였다.
       이슬람교가 창시되기전 고대 이집트사람들은 신을 숭상했다. 해와 달. 동물신을 숭상 하였으며 왕을 신으로 여기며 숭상하였다. 하여 많은곳에 신전을 만들어 신을 숭배하는 예배를 올렸다. 나일강변에 여러곳이 이름난 신전들이 있지만 우리 려행단은 시간의 제한을 받아 일이리 들려보지않고 범위가 크고 대표성을띤 신전  두 곳을 관람하였다.
        나일강 류역에 룩소르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다. 이곳은 오랜 력사가 숨겨있는 도시로서 옛날의 모습을 잘 보수하고 있는 도시였다. 옛날에는 이 도시를 “보물이 많은 부자들이 모여사는 도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였다. 이 도시는 신의 도시라 할만큼 거대한 신전들이 있었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신전을 관리하고 보수하면서 유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음식업을 꾸리고 숙박시설을 경영하는등 서비스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룩소르에는 이집트사람들이 말하는 “아몬의남부 하렘”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신전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3 천년전에 세웠던 신전의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천연석을 정밀하게 가공하여  신전을 건축하였다. 높이 십여메터에 달하는 웅장한 돌기둥, 정밀하게 다듬은 동물모양의 조각품, 생동하게 그려진 벽화는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게 하였다.
        다른 유명한 신전은 룩소르의 신전에서 약 3km떨어진 곳에 있는 카르낙신전이다. 카르낙신전은 “아몬의 남부 하렘”신전보다 범위가 더 넓었고 건축물들도 더 방대하였다. 신전입구로 들어가는데 길 량켠에는 양의 모양을 한 커다란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신전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이 치솟은 돌기둥과 천정을 보면서 유람객들은 저마다 아! 감탄이 소리를 련발했다.
       이슬람교가 전파되기전에 건축한 이 신전은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외면 당하여 오랜동안 모래속에 뭍쳐 있었다. 근래에 이집트 정부에서는 자금을 들여 모래를 제거하고 원 생태를 회복하고 개방하였다. 나는 카르낙신전을 돌아보면서 카르낙신전이야말로 이집트인들의 예술적 기량을 제대로 발휘한 슬기로운 걸작이구나 하는 느낌이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계 고대 문물중에서 예술성이 강하다고 각광을 받고 있는 이딸리아의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대비해 보게 되였다. 내 판단으로 보면 카르낙신전이 로마의 고대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다는 감을 느끼였다.
       카르낙신전을 돌아보고 려객선으로 돌아오니 늦은 저녁이였다. 나는 바삐 저녁을 자신후 옥상으로 올라 갔다. 옥상에 올라서니 밝은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밝은 달은 창공에서 웃음을 머금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밝은 달을 보니 어쩐지 고향에서 달을 보았던 옛 일이 떠 올랐다. 내가 본 고향의 달은 이집트의 달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한달에 한번씩 보게되는 고향의 보름달을 제대로 본적이 많지 않았다. 고향의 하늘은 늘 구름이 떠있었다. 언제나 내가 아름다운 보름달을 보려고 할적마다 얄미운 구름이 달을 가리워놓아 제대로 볼수없었다. 그런데 오늘 이집트의 달은 유난히도 밝고 둥글게 보이였다. 왜서 그럴가? 다같은 달인데도? 이집트의 하늘은 늘 맑다. 구름한점없는 맑은 하늘이여서 유난히도 달이 밝아보인것이였다. 나는 달을 보다가 나일강 강물을 굽어 보았다. 푸른 나일강 강물에 둥군달이 비끼여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만약 달을 좋아했던 리태백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시 몇수 지었을 것이였다.
       나일강에서 3일동안 보내는 사이 나일강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강변에 있는 력사유적들을 감명깊게 보았다면 또 다른 감명깊은 것을 보았다. 나일강가에는 많은 장사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작은 배를 타고 려객선 주위를 맴돌면서 탄자, 보자기, 골동품을 려객들에게 팔고 있었는데 참 신기했다. 그들은 쪽배우에서서 려객선을 향하여 자기들이 팔 물건을 선보였다. 려개선의 려객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들면 값을 흥정한다. 흥정이되면 쪽배의 장사군이 요구하는 그 물품을 비닐로 잘 감싸 려개선우에 던진다. 물건을 받은 그 사람은 돈을 주머니어 넣어 아래로 던진다. 이렇게 장사를 하는것이 인상적이였다.
 
 
                                         4. 아스완시와 홍해
 
      우리는 카르낙신전을 돌아본후 이튼날에는 려객선에서 내려 아스완시로 갔다.  아스완시 시교에는 나일강물을 막아 전기를 생산하는 거대한 수력발전소가 있었다.
       아스완시정부에서는 수력발전소땜 주변의 독특한 환경과 아스완시가 내륙에서 홍해로 갈수있는 지름길에 놓여있다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개방의 문을 열어 국내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금 많은 외국 자본들이 아스완시에 투자하고 있었다. 세계의 여러나라 중에서 아스완시에 대한 투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로씨야였다.
        우리가 주숙할 곳은 아스완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k 호텔이였다. 이 호텔은 로시야의 한 투자자가 자금을 투자하여 지은 건축물인데 5성급 호텔이였다. 내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본 호텔중에서 이 호텔의 환경, 외관, 실내장식이 최상급이라 보아졌다.
       이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분이 확 바끼였다. 사막으로 둘러 싸여있는 불모지의땅, 이런 곳에 신기한 오아시스같은 호텔이 나타나자 내눈은 대번에 환해졌다. 물이 금처럼 귀한 이곳에 새파란물이 반짝이는 커다한 수영장이 있었다. 수영장을 중심에 두고 호텔 건물들있어 환경의 아름다웠다. 수영장에는 여러가지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여 있었고 수영장주위에 해빛을 쪼이는 야전 침대가 놓여 있고 휴식하면서 음료를 마시는 멋진 탁상도 있었다. 호텔 주위에는 이름모를 열대 나무들과 꽃나무가 있었다. 만개한 꽃에서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색적인 산듯한 호텔건물, 껑충한 키에 잎사귀가 특별히 큰 열대 나무들, 활짝핀 꽃, 푸른 잔디, 맑은 수영장, 오색찬란한 빛을 뿜는 카라오케방이 조화를 너무나도 잘 이루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것 같았다.
        가이드의 말에의하면 이 호텔에 주숙하는 손님 대부분 외국인이라 했다. 그중에서 로씨야 손님이 제일 많다고 했다. 말과 같이 이 호텔에 주숙한 손님 다수가 로씨야인이였다. 호텔의 주인이 로씨야 인이 였기에 모든 시설들의 로씨야 식으로 꾸며졌다. 객실방은 널직하고 호화로웠다.  호텔에 안장된 텔레비죤에서도 로씨야어와 아랍어로 방송하고 있었다. 호텔과 호텔에 주숙한 로씨야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이 호텔이 단순한 호텔이 아닌 로씨야의 어느 고급휴양소가 아닐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모든것이 로씨야 식으로 하였지만 유감스러운것이 하나 있었다. 로씨야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으며 술도 좋아하는데 이곳에서는 술을 마이는것을 언급하며 돼지고기를 먹을수 없었다. 아마 이슬람교 나라에서 이슬람교리를 따른랐을것이다. 나는 돼지고기를 즐겨먹는다. 이집트땅을 밟아서 한번도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못하였다. 로씨야인이 꾸린 식당이니 돼지고기를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없었다. 돼지고기를 먹지못해 썰썰해 났건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집트는 아랍권 나라에 속하므로 이슬람교를 주체교로 삼고 있다. 코란경에따라 이집트 사람들은 술과 돼지고기를 먹는것을 엄금하고 있었다. 돼지고기 대신 닭고기와 닭알을 많이 먹었다. 소고기도 가끔 먹어보았다.
       우리는 K 호텔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 뻐스를 타고 홍해로 갔다. 아스완시에서 서쪽으로 2시간 달리자 홍해가에 있는 B부두에 이르렀다. 이 부두에는 여러가지 류형의 배들이 있었다. 사람의 인수에 따라 큰 배와 작은배를 선택할수 있었다. 우리는 20명의 탈수있는 배를 탔다. 배가 한시간 바다를 달리다가 풍경이 아름다운 한 해수욕장에 뭠춰섰다. 길다란 해수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한패가 해수욕을 하고 가면 다른 한패가 온다. 해수욕장은 마치 북적거리는 장터같았다. 나는 맑은 바다물에서 몸을 담그어 보기도 하며 마음껏 헤염을 쳤다.
       오늘 해수욕장을 찾은 유람객들을 보면 유럽인들이 많았다. 유럽 사람들은 백인인데도 검은 피부를 만들려고 바다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햇빛 쪼임을 하거나 뜨거운 모래에 몸을 파뭇기도 했다.
       우리는 한시간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다시 배를 타고 깊은 바다로 왔다. 이번에는 잠수복을 입고 잠수하는 놀이였다. 잠수복을 입고 신나게 바다에서 혜염을 치기도 하며  바다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서로 오래 헤염치기와 바다물속에 오래 있는 내기를 했다. 가이드 왕도와 산동성 제남시에서 온 리씨네 부부가 멋진 표현을 하였다.
       잠수하는 놀이가 끝나자 이번에는 바다 낚시질을 하였다. 바다 낚시질은 낚시대를 사용하지않고 낚시줄을 감고 푸는 작은 판자를 가지고 하였다. 우리는 낚지 기술자의 지도대로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가지고 바다물에 던지였다. 바다 낚시질도 요령이 있어야 했다. 고기들의 특성을 알고 낚시줄의 깊이를 조절해야 했다. 나는 부지런히 낚시질을 햇건만 한마리도 낚지 못했는데 우리팀의 팀장은 기술자의 지도를 받아 세마리나 낚았다. 배를 타고 낚시질을 하는것도 일종의 재미였다.
        우리는 한시간 낚시질을 하고 귀항하였다. 늦은 점심을 배안에서 먹었다. 점심을 자신후 우리는 차를 타고 아스완시로 돌아왔다. 나는 호텔에 도착하자 호실로 들어가지 않고 고추 수영장으로 갔다. 시원하고 맑은 수영장에서 수영하고나니 기분이 좋았다. 바다에서 수영할때와 민물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멋이 달랐다.
        이튼날 우리는 아스완시를 돌아보았다. 이스완시는 옛것과 현대를 결합한 도시였다. 아스완시에도 여러개 신전이 있었다만 나는 신전을 여러곳을 보고나니 실증이 나는지라 상세히 보지않았다. 우리는 신전을 대충 돌아본후 아스완시의 종합시장으로 갔다. 종합시장에는 이집트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물품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우리팀원들은 이집트의 민족복장과 산품에 대하여 별로 흥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틀밤을 아스완시에서 보내고 3일되던날 아침 6시에 아스완시를 떠나 카이로로 향하였다. 아스완시에서 카이로로 오는 시간은 무려7시간이 걸린다. 아스완시에서 카이로로 가는 길은 홍해를 차창으로 보며서 달릴수있는 해변가 길이였다. 차창으로 내다 보이는 홍해는 아름다웠다. 홍해의 바다물은 세가지 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까운데서 보이는 바다물은 노란색을. 띠고 바다의 중심은 하늘색으로 띠였고 먼바다는 검푸른색을 나타냈다.
       홍해라는 이름은 옛적에 홍해바다에 붉은 산호가 많았다고 하여 홍해라 불렀다 한다.
       카이로로 가는 공로 왼쪽에는 무연히 펼처진 사막이 보이였다. 이집트에서는 사막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막을 평평하게 만들고 그 우에 모래가 날리지 않게 골타르 같은, 점착할수있는 물체를 덮어 놓았다. 사막에는 가끔씩 송유관이 보이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송유관은 바다가에 있는 정유소에 련결되여 있었다. 정유소가 있는곳에는 마을들이 있고 부두와 공장이 있었다.
       카이로와 가까워 질수록 해변가 풍경은 변하고 있었다. 일망무제한 사막은 없어지고 아름다운 바다가에 나무숲이 우거진 무릉도원같은 산듯한 마을들이 보이였다. 아마 이곳은 카이로시에서 새로 개발하는 특구인것 같았다. 앞에는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어 모래 바람을 막을수 있는 천애지 지역이였다.
        우리는 특구를 지나 신 카이로 구역으로 갔다. 신 카이로 구역에 들어서니 거리가 넓고 거리량켠에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카이로시의 옛 구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였다. 신 카이로 구역에 이집트 정부기관들이 집중되여 있다고 한다.
       우리는 카이로시 중심에 있는 종합무역센터로 갔다. 인솔자의 뒤를 따라 가보니 향료를 파는 상점이였다. 소개에 의하면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천연 향료를 구입해 간다고 했다. 이집트의 나일강류역에는 천연향료를 만들수있는 꽃 나무가 많다고 한다. 꽃의 즙을 뽑아 정제하면 좋은 향료로 된다고 한다. 우리팀의 젊은이들은 이집트의 향료를 믿을만 하다면서 많이 삿다.
      이집트로 떠날 때에는 이집트에가면 전쟁의 공포속에 잠기지 않을가? 근심했는데 와보니 그렇지않았다. 평화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고대이집트의 력사유적지와 문물을 보고나니 다시 한번 세계 고대 력사를 배웠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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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ㅁㅁㅁㅇ
날자:2017-12-06 14:27:14
최작가님 !
동창 길룡이가 대글을 쓰는바람에 저도 등달아 이 글을 씁니다 .
맞아요 . 최작가는 조선족의 본보기이고 자랑입니다 .
애급려행은 아주 희소하고 적게 다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
문제는 평화롭지 않은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왕이 미라로된 시체를 보았을것입니다 .
그것이 애급의 전통적인 특점일것입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간사합니다
2   작성자 : 김문철
날자:2016-12-08 15:29:13
최작가님 !
동창 길룡이가 대글을 쓰는바람에 저도 등달아 이 글을 씁니다 .
맞아요 . 최작가는 조선족의 본보기이고 자랑입니다 .
애급려행은 아주 희소하고 적게 다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
문제는 평화롭지 않은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왕이 미라로된 시체를 보았을것입니다 .
그것이 애급의 전통적인 특점일것입니다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간사합니다
1   작성자 : 정길룡
날자:2016-12-08 15:15:28
최부자님 ! 최작가님 ! 부자님답고 작가님 답습니다 . 아주 대견하게 애급 려행을 선정한 자체가 의지력이있고 힘들고 어려움을 감안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
애급은 어렵고 평온하지않는 사막 지대이지요 . 근데 피라미드안에 들어가 146,5메터로 높이인 가파로운곳을 올라갔다가 내려 오셨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되요 .
작가님이란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세월의 세파속에서 단련을 겪어야만이 생동하고 구체적이며 생명력이 있는 작품을 출현할수있다고 봅니다 .
최부자님 ! 최작가님 !
존경스럽습니다 . 우리 조선족들의 본보기이며 자랑입니다 .
중앙조선말 방송에 최작가님의 작품을 전 우주에 소리 전파로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
금후에도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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