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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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구들과학 7세기에 이미 기록이 댓글:  조회:7524  추천:86  2005-12-26
구들의 과학은 서양보다 500년 이상을 앞선 발명 우리네 구들에 관한 첫 기록은 7세기 중엽에 나온 ,[구당서(舊唐書)]의 다음 내용이다.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살며, 지붕은 띠로 덮였다. 겨울에는 긴 구들을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지펴서 방을 덥힌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들은 오늘날과 달리, 방 한쪽에만 깔려서 걸터앉거나 잘 때에만 이용하였고 중국 사람들이 긴구들 이란 뜻으로 장캉(長?)이라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아주 신기한 발명품으로 여겨진 구들은 중국으로 펴져 나갔으며, 저들은 이를 [캉]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동북쪽의 민가를 답사하다보면 어느 집에나 구들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산간지대의 농민들 조차도 이것이 한국에서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니 이는 반갑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의 구들은 방 앞쪽(창쪽)에 놓은 '쪽구들'과 방의 반 넓이에 시설한 '반구들' 두 가지 뿐으로, 우리네와 같은 통구들(온구들)은 없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처럼 앉지 않고 서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을 신고 집안을 다니는 문화이기에 구들이 더 이상 발달하지 않고 부분구들형태로만 명맥을 유지 하고 있는 것이다. 그ㅡ러나 우리민족은 계속적으로 구들을 발전시켰다. 궁궐이나 집의 구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놀라운 과학적 발명품들을 발견하게 된다. 고도의 물리학과 유체역학을 알지 못하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형태의 구들을 우리 네 조상은 이미 수 천 년 전 전에 발명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구들용 자재는 물리?화학적으로 안전한 자연물질이고 마모되어 못 쓰게되지 아니하므로 구들은 하자발생이 없는 영구시설이다. 구들돌(燃火石, 깻목돌등)이 아닌 청석 또는 마사지돌등은 불을 먹으면 튀어서 깨지거나 부서지는 경우 또는 고임돌을 잘못고여 구들장이 노는 경우에도 누구나 손쉽게 놀거나 깨진 구들장만 갈거나 고이면 된다. 여러해 동안 불을 때면 고래나 개자리 등에 재가 차서 고래가 메워지게 되고 불이 내면서 따뜻하지가 못하다. 이런 때는 부넹기와 구새 불맞이돌 사이에 대나무대로 된 긴 타래를 관통시켜서 고래의 재를 구들개자리와 고래개자리에 흩어내서 퍼내면 따뜻하게 된다. 또 굴뚝자리에서도 고래의 재를 쑤셔낼 수 있다. 불이 너무 드려서 나무를 많이 때어야하게 되면 부넹기에 돌을 얹어 부넹기를 좁게하면 연료가 절약되고 구들이 더디어 식게 된다. 또 열기가 너무 빨리 빠져나갈 때는 방밖의 굴뚝을 덮은 구들장을 들고 적절히 좁힌다. 아궁이에 찬공기가 너무 빨리 들어가면 구들이 쉬 식으므로 구들장으로 아궁이를 가린다. 이 종구배 및 횡구배는 포물선형 곡면을 형성하여 하나의 불 주머니 역할을 하여 열이 오랫동안 머물어 구들장과의 열 교환으로 구들장이 많은 열을 저장할 수 있게 한다. 새로 구들을 놓았거나 구들이 침수되어 불이 들이지 아니하여 구들을 건조시키지 못할 경우는 구새에 있는 불맞이돌을 빼고 굴뚝개자리에서 신문지 같은 것으로 불을 많이 피우면 아궁이의 불이 잘 들인다. 열기의 흐름이 아궁이에서부터 구새갓까지 각 단계의 구조에 따른 온도차 및 기압차에 의하여 자연적인 흐름으로 되어 있고, 아궁이 부넹기, 굴뚝불맞이돌 등을 이용하여 열기의 흐름을 적적히 조절할 수 있다. 한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 온기를 지속했다는 우리 조상의 작품인 아자방(亞字房)을 우리는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이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의미를 새로이 새길 시점에 왔다.
12    (론문) 독특한 구들 난방의 문화적 가치 댓글:  조회:7470  추천:70  2005-12-19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 구들 우리 문화의 독특하고도 독창적인 문화는 불의 문화이며, 구들문화이다. 낮에는 태양 빛으로 몸을 녹이고 밤에는 불을 피워 몸의 일부를 따뜻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구들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방식인 돌에 열을 저축하는 즉, 축열하는 방법이다. 축열된 돌을 품에 품거나, 불 피운 자리에 않거나 누워서 취난(取煖)할 수 있게 되어 구들이 발명되었다. 처음 원시시대에 춥고, 바람이 강한 산악지대로서 나무가 마찰되어 산화가 일어날 수 있어 산불에서 불을 얻어 모닥불로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며, 화산 등에서도 불씨를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모닥불 씨를 지피우면 강한 바람에 불이 꺼지기 쉬우므로 바람막이 돌을 세워 놓게 되고, 그 돌이 축열 되면 몸에 품거나 또는 불탄 자리의 땅도 축열 되므로 몸을 따뜻하게 할 수가 있어 동사(凍死)하지 않고 생존할 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들 문명이 동굴이나 땅굴 생활하는 원시인을 땅 위로 돌아오게 하여, 땅 위에 움막집, 귀틀집을 지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초가로, 또 민족의 독특한 건축 양식인 기와를 얹은 한옥이 되었다. 한옥은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이며 쾌적한 주거이다. 우리 민족은 집 속에서 불을 피우는 구들 문화를 발상시켜 ‘한옥은 구들을 보호하고, 집은 사람을 살게하여’ 민족문화의 발상이 발달로 이어지면서 구들은 발전되어 왔다. 우리는 원시시대부터 ‘불’과 ‘구들’이 생활에 밀착되어 계승되었고 독창적이며 독자적인 우수한 민족성이 형성되어 구들에서 생활하면서 따뜻한 정서로 가족제도가 만들어져 독특한 의식주(衣食住)의 문화가 이룩되었다. 우리는 앉는 문화이고 발보다는 손을 많이 사용하는 문화이다. 입식생활을 하는 다른 민족에 비해 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춤을 보면 대부분 손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발은 앉아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의 춤의 비해 덜 사용했다. 독특한 구들 난방 문화적 가치 한국 사람은 아랫목에서 태어나 자라서 늙어 병들면 아랫목에서 치료하다가 죽으면 아랫목을 떠났다가 제사상이나 차례상도 아랫목으로 다시 돌아와 받는 곳임으로 살아있거나 죽은 후에도 아랫목과 밀착된 인생이다. 아랫목에는 늘 차렵이불을 깔아 늘 따뜻하게 하고 손님이 오거나 밖에 나갔던 식구가 들어오면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고 밖에 나간 식구의 밥도 이브자리 속에 묻어 늘 따뜻한 식사를 하게 했다. 길쌈, 바느질, 다듬이질, 반찬거리 다듬기 등도 이 아랫목에서 하는 등 아랫목은 안주인의 몫이었다. 집안 식구의 의식주나 예의범절 등 모든 것을 잘 간수하여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주인의 자리였다. 중국 연변의 옛날 집들을 보면 모두 구들에서 생활하고 활동한다. 우리들의 오늘날 집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침대가 들어서고 책상과 의자가 들어와도 역시 밥상은 좌식이 편하다. 집은 구들을 보호하고 구들은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절묘한 구조로 되어있어 한옥은 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는 구들이 바닥에 있다. 장마철의 습기는 진흙이 흡수했다가 건조하면 방출하여 방의 습도를 조절해 준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구들 고래가 막아주고 겨울에는 지열을 고래가 저장해 준다. 창호는 미닫이와 여닫이에 덧문의 삼중구조이며 창호지로 공기를 적절히 환기시켜주고 문풍지로 급격한 한기(寒氣)의 유입을 막아준다. 참으로 과학적이며 훌륭한 살아있는 주거문화이다. 한민족은 앉은 자세가 꼬아 앉는 독특한 좌위(座位)이다. 이 좌위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다. 중국 사람은 의자에 좌위(座位)하고 침상(寢床)에서 잔다. 일본사람은 다다미 위에 꿇어앉는다. 높은 사람은 한국식 좌위를 한다. 앉는 자세에서 한국 사람이 낮아 있을 때는 몸이 가장 많이 구들에 닿는다. 이는 구들이 따뜻하기 때문에 최대로 구들과 몸의 부분이 접촉되는 자세이다. 즉 앉는 자세부터 우리는 다른 종족이나 민족과는 독특하며, 안정적인 자세이다. 이는 구들문화의 영향이다. 구들이 몸에 닿아 따뜻함을 주는 그 쾌감은 다른 난방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으며, 서양 난방은 천장만 따뜻하게 가열하는 비과학적?비경제적인 난방인 반면 사람의 몸은 항상 천장이 아니라 추운 바닥에 있게 되어 의자 침대 등 땅에서 떠있는 불안한 상태에 있고 페치카(pechka)나 난로 등이 인체의 한쪽부분만을 데우게 된다. 우리가 요를 깔고 누우면 구들의 열을 요에 축열을 하여 혈액순환이 불량한 등, 허리, 다리 등 몸의 많은 부분은 직접 따뜻하게 해주고 이불은 더 넓어 구들에서 나는 열을 모아서 축열하여 바닥에 닿지 않는 가슴, 배, 무릎, 발 등 몸의 대부분을 따뜻하게 한다. 그래서 자는 동안에도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 우리 한민족은 불을 잘 다루어 하늘로 올라가는 불을 고래 속을 기어 들어가게 하여 결국 불을 밟고 서고, 불을 깔고 앉고, 불을 베고 잘 수 있는 구들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또 아궁이에서 구새(굴뚝)까지 불(열)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구들구조로 열이 오랫동안 구들에 머물게 하여 구들을 달궈 불을 넣지 않는 시간에도 구들을 늘 따뜻하게 하는 축열 기술과 방열 기술로 인체의 하부에서 인체의 온도를 유지시키는 가장 과학적이며 위생적인 난방을 한다. 이런 두한족열(頭寒足熱)이 체온의 이상적인 상태로 추운 곳에서 방으로 들어와 손과 발을 아랫목 따뜻한 이불 속에 담그면 따뜻한 쾌감은 말할 수 없이 좋다. 한방에서도 이런 상태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 환자의 치료 시 이용하고 있다. 이런 따뜻함이 따스한 마음씨를 만들고 그것이 민족의 우수한 자질을 갖게 하고 우수한 민족 문화로 꽃피우게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아랫목은 구들의 가장 중요한 자리로서 집안 주인의 바느질, 다리미질 등은 물론 아기를 기르는 자리이고, 식구들이 감기나 배가 아플 때 찜질하는 자리이고, 밥그릇을 놓고 차렵이불로 감싸 음식이 식지 않도록 해주는 중요한 곳이다. 아궁이에 앉아 불을 넣게 되면 인체의 복부에 원적외선이 복사되어 암이나 냉이 치료되며 숯불로 된장찌개 끓이기, 밤,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의 구이를 할 수 있고, 숯불을 화로에 담아 방을 따뜻이 하며 불씨를 잘 보존하는 등 쓰임새가 많다. 우리네 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후에도 부뚜막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습관 때문에 산후조리를 몇 달씩하지 않아도 금방 정상적인 생활에 복귀하여, 회복시간이 아주 짧았다. 이는 아궁이에서 불을 땔 때 장작의 원적외선과 부뚜막의 황토 흙에서 나오는 각종 좋은 열선들이 우리네 어머니의 자궁부위를 소독하고 회복시키는 중요한 치료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11    (논문) 우리 민족 최고의 발명품인 구들 댓글:  조회:7312  추천:77  2005-12-16
우리말에 ‘드러눕다’는 말이 있다. 이는 풀어서 말하면 ‘들어가서 눕는다’는 의미이다. 일단 들어가면 눕는(앉는)문화이기에 그냥 눕는다고 하지 않고 ‘드러눕는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일어나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그냥 '일어서다'라고 말하지 않고 '일어나다'라고 말하는 것을 풀어보면, '일어서면 나간다'는 의미이다. 과거 원시시절에 생긴 말로 동굴생활 시절 지붕이 낮은 좌식생활 이었기에 일어서면 나가야 했기에 '일어나다'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좌식생활을 해 왔고 좌식생활의 필수 요소인 바닥난방(구들)의 발견과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중국 동북지역의 아파트를 다녀보면 우리 민족들은 어김없이 온돌방에서 생활하고 있고 중국 한족(漢族)들 조차도 온돌방의 매력에 매료되어 있어 온돌방을 선호하고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수도인 북경과 여러 도시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닥 난방의 시공이 붐을 이루고 있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대영백과사전’에는 온돌은 ‘ONDOL’로 표기되고, 구들 역시 고유명사이기에 다른 표현은 아직 없고 ‘GUDLE’로 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구들이나 온돌이 하이퍼코스트(hypocaust)로 표기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우리의 전통 난방기술을 계승?발전?전파시키지 못한 동안에 아주 원시적은 온돌 구조인 하찮은 서양식의 하이퍼코스트에 비교되어 표기되고 있다. 하이퍼코스트는 서양 로마시대에 원시적 바닥 난방 형태인, 그것도 단지 로마시대에만 목욕탕 용으로 잠깐 사용되었던 우리 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단순한 구조이다. 마루바닥에 수로(水路) 형태로 뜨거운 물을 흘려서 바닥을 데웠던 시설인데, 우리의 전통구들처럼 축열이나 취사 겸용 등의 복잡한 구조도 없고 불기를 직접 보내지도 않은 아주 원시적인 구조이다. 이런 하이퍼코스트를 우리 고유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첨단화된 구들과 비교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 옛날 어렸을 적에 감기에 들어서 온몸에 오한이 나서 으스스 떨리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따끈따끈 한 방바닥'이다. 감기가 아니더라도, 몸이 찌뿌듯한 것이 어깨가 무겁고 허리가 뻐근할 때 '뜨거운 구들 방바닥에 두어 시간 지지고 땀을 흠뻑 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구들문화는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불의 이용으로 발생되고 오랜 시대에 걸쳐 발달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우리의 유산으로 구들은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우리 민족이 구들을 전승 받아 사용하고 있음으로 우리 민족에 의해 발생?발달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네 구들은 신석기 시대의 움집 화덕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는데, 이에 관한 가장 오랜 자취는 두만강 유역의 서기 전 5천 년에서 4천 년 사이의 서포항 집터에서 발견되었다. 한 줄로 마련된 5개의 화덕 가운데 양끝의 두 개에는 냇돌을 둘렀으나, 가운데 3개에는 자갈만 깔아놓았다. 이것은 양끝에서 불을 지폈다가 잉걸불을 가운데 화덕쪽으로 모아 놓은 자국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때의 화덕은 집안을 덮이거나 밝히고 음식을 끓이는 따위의 여러 가지 구실을 함께 한 셈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벽화와 발해의 왕궁터에 구들의 발전된 모습이 보여지는 바, 최초의 우리 구들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이전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문헌상의 구들이 구조와 과학적 기능인 현존 구들로 발전하는데, 약 수 백년 이상이 걸렸다고 보아 최초 원시인이 불을 획득하고, 불을 이용하여 구들을 만드는 데는 보다 수십 배의 시대가 소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면, 구들은 구석기 시대에 발상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청도기 시대로 접어들어, 농사를 짓고 붙박이로 살면서 화덕의 구실은 취사와 난방의 두 갈래로 나뉘었고, 이때부터 난방용 화덕을 집 한 귀퉁이에 붙이고, 엉성하게나마 굴뚝을 세워 연기를 밖으로 뽑았다. 이 화덕은 철기 시대에 기역자꼴 구들로 발전하였다. 평안 북도 노남리의 집 한 자리에서 나온 것이 그것이다. 동쪽의 것은 너비 30센티미터, 깊이 30센티미터이고, 남북으로 놓인 것은 너비와 굴뚝이 딸려 있었다. 방의 일부만 데우는 이 기역자꼴 구들은, 고구려 시대(서기 전 37~668)에도 이어졌다. 4세기에 만든 황해도 안악 제3호 무덤 부엌 그림에, 음식을 끓이는 부뚜막과 난방용 아궁이를 따로 낸 것이 보인다. 따라서 이때에도 구들은 방 일부에만 놓았음이 분명하다. 이후 우리네 구들이 통구들(온방 전체가 구들로 되어있는 경우)로 바뀌어, 방 어디에나 앉고 눕게 된 것은 고려 시대 중기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시대 초기가 되어서야, 중부 이남에까지 퍼져 나갔다. '온돌'이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도 이 무렵[조선 왕조 실록], 세종 실록 7년 을미 7월 병진]이며, 바닥에 장판을 깐 것도 이때부터 이다. 어째든 우리의 주거문화는 구들이 발명되어 가족을 이루고, 부족이 모이고, 민족이 형성되어 국가가 성립되었으니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구들이 모든 민족 문화의 원류이며, 원천적 역할을 하였음으로 더 없이 귀중한 것이다. 위대한 민족 문화 유산을 전승 받은 우리가 잘 가꾸지 못하고 등한시하여 멸실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로 석빙고와 더불어 유네스코의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 나아가 구들을 현대화 시켜 기술을 개발하여 세계화해 나가면서 바닥난방시장 수요에 주도적인 나라로 거듭 태어나서 구들문화를 세계로 수출하는 일을 서둘러야만 한다. 김준봉--------국제온돌(구들)학회 회장/동북아도시주거환경연구소장 북경공업대학 건축과교수/연세대 객원교수
10    이 중국을 떠날 수 없는 이유 댓글:  조회:4573  추천:55  2005-08-01
♡ 이 중국을 떠날 수 없는 이유 ♡ 이 땅 중국에는 따뜻한 사랑이 넘칩니다. 이 땅 중국에는 다정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마음이 가난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아픔을 치유받기를 원하는 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주님의 향기가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사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인류의 미래가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중보할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위로와 격려가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뜨거운 눈물도 있습니다. 이 땅 중국에는 사랑할 대상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래서 나는 이 중국을 떠날 수가 없어 머뭅니다.
9    중국인과 한국인의 꽌시(關系)관의 차이 댓글:  조회:4524  추천:85  2005-04-24
중국인과 한국인의 꽌시(關系)관의 차이김준봉 중국인들의 관계(꽌시)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복잡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나라(한국)와 마찬가지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참으로 그 거리가 크지만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우리와는 달리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관계를 맺기는 일반적으로 아는 이의 간단한 소개만 받으면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특히 중국인 시장이나 군수 등 고위 관리의 환대와 접대를 받는 것은 아주 수월한 일이다. 물론 그들과의 관계를 진행하기가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쉽고 빠르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와는 달라 한번 관계가 무너지면 회복하기는 정말 힘들다. 왜냐하면 중국은 어떤 사람과 싸워서 헤어지면서 “ 난 이제 저 친구 다시는 안 봐!” 하고 결심하면 넉넉히 평생 그 친구를 안보고도 잘 살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도 많고 지역도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한국)는 그와는 달리 아무리 미운 친구라도 다시는 보지 않겠노라 결심해도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고 다시 안보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 특히 같은 업종이면 피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문화이다. 그래서 한번 헤어진 친구를 다시 만나 회복하기는 아주 어렵고 차라리 다른 새 친구를 사귀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은 중국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할까? 필자도 조그마한 실수로 친한 친구와 오해가 생겼는데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무척 노력 했지만 아직까지 회복할 기회를 못 얻고 있다. 그 친구 역시 나 외에 다른 친구로 그 자리를 대신 했기에 나를 더 이상 찾거나 회복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 찍어대는 스타일이지만 중국에서는 그것이 잘 안 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나무에 열 번 찍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나무를 돌아가며 열 번 찍으면 그 중에 열 번째까지 가기도 전에 분명히 잘 찍히는 것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것을 선택하면 된다고 할까? 그래서 한번 싫다고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다시 찾을 생각도 않고 계속 회복을 구걸해도 거의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한번 채이면 얼른 다른 사람을 찾아야지 계속 쫓아 다니는 것은 무모하고 큰 낭비이다. 물론 중국에 사는 이들은 모두 이런 진리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생존 방식이니까. 그래서 헤어진 애인을 다시는 안 찾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우리는 아쉬움에 헤어진 옛 애인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_^김준봉-------공학박사.국제 구들학회 회장 북경공업대학 건축성시학원교수연세대학교 건축도시공학부 객원교수
8    중국인이 미움 받는 14가지 이유 - 추악한 중국인 댓글:  조회:5390  추천:86  2005-04-15
중국인이 미움 받는 14가지 이유 - 추악한 중국인김준봉 이 글은 을 쓴 백양(伯楊)의 글과 의 저자인 대만 사학자 황문웅의 글을 토대로 하였습니다.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을 중국인으로서 살펴본 글을 기초로 저의 경험을 가미해서 생각한 글입니다. 혹 이글을 읽으시는 분이 중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분이라면 기분이 좀 나쁠 수도 있지만 이 글을 쓴 원저자나 필자역시 중국을 사랑하고 이해하기에 쓰는 것이니 큰 아량으로 널리 이해하시고 지금의 중국은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기에 많이 고치고 있고 지난 사스이후 상당부분 달라져 있음을 밝힙니다.아마 2008년 북경 올림픽과 2010 상해 세계박람회를 거치면 당연히 더 달라지겠지요? 물론 지금의 중국인들과는 꼭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고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구성을 가진 중국인을 한쪽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은 선입견입니다.하지만 중국을 이해하고 그들과 일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중국은 미국과 같이 합중국으로 여러 민족이고 땅도 넓기에 미국보다는 전혀 다른 합중국입니다. 사실 중국에서 잘 살아 가려면 흔히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물론 옳은 얘기지요. 하지만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으로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요원할 것입니다. 필자는 좋은 사람은 만난다기 보다는 만들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도록 먼저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한 때입니다. 좋은 중국인을 많이 많이 만드시길 기대하며... 1. 더럽고 지저분하다. 중국에 사스(SARS) 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전혀 이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공공의 부문에서는 대대적으로 이 문제를 고치고 있으나 아직도 개인적인 부분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위생상태는 거의 엉망이다. 내가 아는 한족 친구 역시 목욕을 자주 않거나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고 머리를 감지 않아 까치집을 짓고 다니는 중국인들은 보통이고 얼굴은 예쁜데 입 냄새가 진동하고 비듬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 소름이 오싹할 정도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음식을 조리할 때 기름에 튀기거나 데치는 등 거의 기름으로 요리를 하는데 그 사용되는 기름들이 고급의 식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재생에 재생을 하는 것들이고 아마 중국 음식점의 주방을 가면 정말로 밥맛이 싹 달아날 지경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한국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거리에서 파는 튀김류는 기름이 거의 쓰레기이니 제발 사먹지 말라고 간청할 정도이니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내가 연변에서 살던 아파트 복도 역시 계단은 먼지 때문에 난간을 손으로 잡을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도 손잡이를 잡기에 거북하긴 마찬가지이고 음식점의 접시와 컵 역시 냅킨으로 닦아야 하니 예외일 수 없다. 미국에 사는 친구는 어떤 마을로 중국인이 이사를 오면 주위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버린다고 할 정도라니 가히 그 지저분함은 대단하다고나 할까?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맛있어도 지저분하고 더러우면 그 가치는 반감하는 건 외국인만의 느낌일까? 2. 지독한 자기중심 중국은 예로부터 자기 이외는 인간이 아닌 걸로 생각하고 남만(南蠻) 동이(東夷) 북적(北狄) 서융(西戎)이라고 중국의 모든 주변 지역을 모두 오랑케 부류로 여겼다. 물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중국인에게는 이 자기중심이 국민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규모로 확대되어 자국중심주의가 된다. '중국(中國)'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 결정적 증거이다. 객관적으로 봐서 이 둥근 지구에 중심이 되는 지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세계)의 중심을 의미하는 '중국'은 지리상의 중심점이 아니라 정신적인 중심을 가르킨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신이 세계의 중심, 문화의 중심이라는 강한 망상인 것이다. 이 정신적인 중심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 중화문명 지상주의이다. 중화문화가 가장 뛰어나며 주변에 그것을 전하여 그 은혜를 전파하고 있다고 하는 동심원적인 관념이 중화사상의 기본적 정신적 구조이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주변국을 경시해왔다. 이 관점은 그들의 문화가 다른 사람을 사람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 우월의식은 과거 남아공의 인종차별주의 그 이상이다. 그 증거로 중국인이외는 모두 짐승으로 여기어 주변 민족 이름엔 짐승 수자나 벌레 충자를 넣어서 불렀다. 아편전쟁종결후인 1842년 외국인을 夷狄로 여기는 청국에 대하여 영국은 남경조약제17조에서 일부러 영국을 '英夷'라 부르지 말 것이라는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계속 그것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천진조약 체결시 제차 문서화하였다. 청조 말기에 중국인과 접촉한 외국인은 대부분 그 오만함에 질려서 영국통상 특사로 북경에 파견된 매커토니는 거꾸로 중국인을 반야만인이라 불렀다. 영국의 홍콩총독 데비스 중국문명을 반 문명으로 칭하였고 초대 총세무서장 레이 에이르러서는 아시아의 야만인으로 부르며 경멸하였다. 이 정도가 되면 영국인과 중국인의 에고이즘 경쟁이다. 3.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줄서지 않는 중국인 중국은 지금 전국토가 공사장이다. 그런데 그 공사 중인 건물들을 보면 짓고 있는 건지 부수고 있는 건지 언 듯 봐서는 모를 정도이다. 교차로에서 보면 어느쪽으로 신호등이 켜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전거 사람 우마차 자동차가 섞여서 다닌다. 물론 신호 체계가 거의 좌회전이 동시 신호체계이나 안내원이 없으면 사람들은 신호등이 엄연히 있는데도 신호를 무시하긴 마찬가지이고 혹 기차표라도 살 요량으로 역전에 가보면 거의 환상적(?)이다. 물론 지금은 큰 역전에는 외국인 전용 창구도 있는 곳이 있고 경찰들이나 정부 측에서 대대적으로 질서문제를 고치고 있지만 아직도 질서에 있어서는 거의 후진국 수준임은 피할 수 없다. 상해를 가도 건물도 좋고 겉은 번지르르 한다. 그러나 화장실 찾기는 힘들고 공중화장실 역시 난잡하기는 마찬가지다. 4. 자기중심인 사람은 자기 멋대로 행동을 한다. 지멋대로 주의- 자기 중신적인 이 지멋대로 주의가 그 사람에겐 보편적인 것이 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이나 생각은 다음 다음의 다음 정도로 애초에 고려사항이 아니다. 가차에서 내복차림으로 다니는 건 예삿일이다. 중국 침대기차는 ‘워프’라고 하는데 롼워 잉워등 두 가지인데 4명 혹은 5명이 2층이나 3층 침대로 타고 다니게 되어 있다. 이곳 침대칸 기차 내에서 열차 복도를 다닐 때 스타킹차림이나 내복차림으로 활보하고 젊은 여성들이 다니는 걸 처음 보면 외국인들은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이미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멋대로만 하는 중국인을 누가 미워하지 않겠는가? 5. 중국인 그들은 떠들썩하고 시끄럽다. 시끄러운 중국- 시끄러움에 대해서는 중국인은 참으로 이기적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나라 사람보다 높다. 물론 언어 구조상 성조가 있는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광동사람이나 동북사람들의 목소리는 가히 가공할 만하다. 두 사람의 광동사람이 큰소리로 말하고 있으므로 옆에서 지켜보던 미국인이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줄 생각하여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경관이 달려와서 그들에게 묻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우리는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요...’ 정말로 그들은 주위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맛있고 가격이 저렴한 식당을 찾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조용한 식당을 찾는 건 정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6. 독선적인 중국인 (현실정치와 관련되였기에 삭제) 7. 파벌투쟁과 내부충돌을 일삼는 중국인 중국인의 생존력은 정말 대단하다. ‘일본인은 한사람씩은 돼지이고 세 사람이면 용이지만 중국인은 한사람씩은 용이고 셋이 모이면 금방 벌레처럼 되어 파벌투쟁을 한다’고 중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추악한 중국인을 묘사한 바이양은 말했다. 중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한사람의 스님이 있으면 두통의 물을 짊어지고 온다. 두 사람의 스님이 있으면 두 사람이 한통의 물을 짊어지고 온다. 세 사람의 스님이 있으면,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얻을 수 없다.’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내부 충돌이 일어난다. 중국인의 몸에는 단결이라는 세포가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이 스포츠 강국 임에도 유독 남자 축구에서는 거의 맥을 못 추는 국가이다. 축구는 어느 구기운동보다도 팀웍(Team Work, 단결력)이 요구되는 운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인을 박해하는 건 언제나 중국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국인들이 불법거류신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누군가가 고발했다면 그가 누구 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 주변에 있는 그들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같은 중국인이다. 8. 책임지지 않는 중국인 책임전가의 귀재-옛 부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고 처녀가 애기를 가져도 핑계는 있다고 했다지만 중국인의 핑계는 나쁜 것은 전부 남이고 성과는 자기 때문이라는 책임전가와 독선의식이 중화사상의 뼈대이다. 대만에서 자란 바이양은 얘기하기를 ‘어릴 때에는 근대 중국이 빈곤했던 것은 열강의 침략과 청조의 부패, 군벌들의 내전에 원인이 있었다고 배웠다. 대만과 대립관계인 중공(현재의 중국)에서는 그것이 모두다 국민당정부의 책임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문화혁명이 끝나자 동란의 10년의 책임은 전부 4인조의 몫이 되고 모택동의 잘못엔 전혀 언급 없이 그와 같은 대혼란의 책임을 전부 4명의 정치지도자에 전가시켰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중국인의 파렴치한 무책임의식의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상 개혁개방정책이 되자 급격한 경제개발로 강도살인, 도박, 마약밀매, 매춘, 인신매매, 사기 등등 6해, 7해등으로 불리는 흉악범죄가 횡횡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무질서는 중국의 본래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은 국민성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정신오염이라고 칭하여, 사회주의 신문명을 창조하라고 결의하고 있다. 결국에는 서구문명의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친 후의 중국인의 불행, 낙후는 모두 서구열강 탓이 되었다. 근대 중국은 몰락은 아편전쟁이후 모두 열강의 침략의 결과로 귀속되어, 중국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는 일이 매우 드물다. 이런 책임전가는 중국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고착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9. 계약을 지키지 않는 중국인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장사꾼은 유태인과 중국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사를 하다보면 그중에서 유태인이 가장 흥정하기 힘들고 계약을 성사시키기가 가장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장사하다보면 흥정이나 계약이 유태인 보다는 수월하다고 하는데 실제 계속 거래하기가 유태인을 능가하고 힘이 더 든다고 한다. 이는 유태인은 흥정이 힘들어도 일단 계약을 하면 변함없이 계약대로 약속을 지킨다. 그러나 중국인은 흥정이 끝나 계약을 하고 나서도 또 흥정을 하는 습성이 있다. 아니 계약이 끝났는데 무슨 흥정을 또 한단 말인가? 의아해하지만 당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일단 계약금액이 결정되어 송금하기로 되어 있어도 현금으로 하느냐? 지표(수표의 일종)로 하느냐? 인민폐로 하느냐? 딸라로 하느냐? 누구 이름으로 하느냐? 계속 흥정을 해오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친구하나도 공장을 중국에 설립하는데 분명히 계약상에 시방서 공사기간 금액 모두 명시하고 공사를 지연할 경우 지체보상금까지 다 명시를 하였지만 결국은 제 시간에 공기를 맞추지 못하고 공사비만 계속 추가로 올라가고 아직도 지지부진 끌려 다니다가.... 지체보상금은 물론 받지 못한 건 당연하고 천재지변 때문이라나? 사스도 천재지변, 불이 나도 천재지변(물론 이 불은 미리 소방차를 대기하고 일부러 불을 낸거라고하니...), 비가 많이 와도 천재지변, 결국 계약이상의 많은 추가 공사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10. 인간불신(둘이 우물을 들여다보지 말라) 중국인은 국가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도 사람도 신용하지 않는다. 자기 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이나 형제조차도 믿지 못할 정도이다. 모택동의 극좌정책 시대에는 부모보다 주석님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이 중국사회에서 유행하였다. 당시는 가족조차도 계급의 적으로 간주되어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劉少奇, 林彪 등은 정적이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 밀고 당해 한 사람은 옥사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도망가는 도중에 죽었다. 중국 속담에 둘이 같이 우물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둘이 같이 들여다보면 상대방이 우물 안으로 빠뜨릴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불신 사회에서는 살아남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병법이 발달하게 된다. 손자는 전쟁은 사기이다고 해석하였다. 중국인 기질의 최대 특색은 이 사기에 있다. 중국인은 사기의 국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남에게 속지말라고 교육하며 항상 그것을 상기시킨다. 세계도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중국의 가짜 상품들이다. 지적소유권의 도난은 별도로, 약, 담배, 술, 식품 등 잘못하면 사람의 생명에도 지장이 있는 물건들의 불량복제품들이 넘쳐나며 중국정부는 打假運動이라하여 이에 대해 대대적 단속을 하지만 효과는 지지부진하다. 현재의 중국은 공금횡령, 사기,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으며 가짜 상품의 천국이다. 이런 거짓이 판을 치는 인간불신의 사회에서 중국인은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서로 속이고 있다. 민중은 온갖 거짓말로 국가예산을 타먹는다. 중국사회에서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가짜가 범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중국은 사기치고 도망가면 거의 잡을 길이 없고 아예 잡을 생각도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11. 중국인은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아량이 없다 사과하지 않는 중국인-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데 정말 중국인은 핑계는 거의 가공할 만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숙제를 검사하다보면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핑계를 대는 데는 선수급이다. 지각을 해도 핑계는 항상 있다. 밤새 놀다가 늦어도 아파서 늦은 거다. 친구가 외지로 나가 송별하느라고 공항 나가느라고 수업에 빠지는 것도 이유로 생각한다. 늦잠자서 늦은 것도 본인이 잘 못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서 예를 들면 가족의 중대사나 학교 행사등 때문에 수업을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더라도 성적과 평가를 위해 시험은 봐야하고 숙제를 제출해야 한다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당연히 그 정도는 충분한 이유가 되니 감안해서 성적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거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분명 본인의 과실로 늦어도 그날 따라 차가 막히거나 날씨가 영향을 주면 용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12. 도적이 많은 중국? 최근 수년간 일본에서는 중국인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외국인 범죄의 반수 이상이 중국인에 의한 것이다. 어떤 자위대 대원은 일본 경찰서에 수용된 중국인에 제공하는 식사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대도시가 중국인 밀입국자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도 중국인 밀입국자는 연간 50만 명에 이른다는 믿기지 않는 데이터도 있다. 중국인이 해외에 유출되면 그들이 모인 곳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대만에서의 생활환경의 변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만에서는 2차대전 이전에는 열쇠를 잠그지 않고 외출하여도 물건이 도둑 맞는 일이 없었다. 일본인이 물러가고 대륙으로부터 200만 명의 중국인이 유입되자 대만은 금새 도둑놈의 나라가 되었다. 도둑이 많기 때문에 초고층빌딩의 최상층도 자물쇠를 굳게 잠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중국본토인을 보면 도둑이라 생각하라고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청나라 때 영국통상대표 매카토니는 중국엔 거지와 도적만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하였다. 중화민국초기에는 도적이 없는 산과 호수는 없다고 말하여질 정도로 그 수는 약 2000만명, 군인보다 많았다. 당시의 상해나 만주의 공공버스에는 무장병사가 항상 두명 동승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여러 곳에서는 차량도둑에 주의하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걸려져 있으며 도적떼들과의 총격전으로 순직한 경찰은 매년 2000명이 넘는다. 왜 그렇게 도둑들이 많은가? 왕조말기에는 생활수단을 잃어버린 백성이 도적떼가 되어 그것이 역성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역성혁명은 바로 도적을 정당화하는 중국의 역사적 원리이기도 하다. 급증하는 밀입국자로 인하여 중국인 범죄가 세계에 퍼짐에 따라 옛날 백인들이 두려워했던 황화론이 '화화론'이 되어 더욱더 혐중감정이 증폭되어질 것이다. 13.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중국인 중국에 다니는 사업가들이 처음에 느끼는 것은 공통적으로 현지 중국인들의 접대에 놀란다. 엄청나게 호화로운 식사, 국빈을 맞이하는 듯한 화려한 영접 등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입장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일 따름이며 마음을 다한 대접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그러한 대접을 하도 자주하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어째든 그들은 자기 입장에서의 접대 문화가 팽배하다. 특히 동북쪽의 사람들의 술 문화는 가히 압권이다. 주로 자기입장의 봉사인데 먹기 싫은 술도 먹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혹 잘 술을 먹지 않으면 금방 자리가 험악한 분위기로 변하면서 자기들의 기본적인 호의를 무시하고 무슨 사업을 하느냐고 면박을 주고 강권한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변하고는 있지만 자기 중심적이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기본 틀은 당분간은 지속 될 것 같다. 14. 중국인은 ‘위험한 우호’ 로 상대방을 유혹한다. 친선, 호의를 의미하는 우호라는 말은 본래 좋은 말이다. 그러나 중국인의 우호는 약간 다르다. 중국을 상대하는 나라에 대해서 중국이 강조하는 우호처럼 희한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호의 해석권이 전적으로 중국 측에 있어서 중국이 정한 우호의 범주에 얌전하게 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역사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우리역시 미국과의 의리를 지키면서 중국과의 장사를 계속해야함은 물론이다. 그들이 이득 보는 만큼 우리에게 이득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러시아나 일본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의 주변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할 때라고 본다. 아무튼 좋은 사람은 만나는 것이 아니고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될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7    한국인이 중국에서 미움받는 14가지 이유 댓글:  조회:4713  추천:63  2005-04-12
중국에서 한국인이 미움받는 14가지 이유 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객원교수 이번 글은 주로 조선족 사이트와 필자가 같이 근무하는 중국사람들과 대화하며 정리한 글입니다. 사실은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이고 조금은 편협적인 부분도 많지만 그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고 중국유학이나 사업에 참고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혹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에 해당하지 않으니 노여워 마시길...단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일부이려니 하고 넓게 생각하시고 부담없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한국인은 자기관점으로만 타인을 평가한다."중국은 자원이 풍부하며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런 중국인 앞에서 중국은 이렇게 저렇게 한국보다 못하다,나쁘다 이런말을 하게 된다면, 중국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안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회사원 S, 북경)중국인은 일반적으로 애국교욱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중국이 좋은 나라이며 그래서 아주 어린 유치원 시절부터(중국은 2-3세만되어도 유치원을 다닌다) 물론 타국생활의 애로에서 오는 불평이라든가 한국에 대한 사랑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수 있고 또 그 말이 어느정도는 옳은 말 일지라도 중국인 앞에서 자주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미움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일단은 그 자리에서는 그들은 긍정하나 필경은 그와의 관계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2.한국인은 항상 말이 앞선다-한국인은 변덕스럽다(反复无常)"한국사람들과 일하기 싫다. 왜냐하면 큰 소리만 쳐 놓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일이 어려워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법적 규정을 찾기보다는 한국사장들은 고위인사를 찾으려고 하며 고위인사를 통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한다. 항상 말이 앞서는 한국인을 보면 정말 한국의 발전이 의심이 간다."(회사원 K, 심양)일부이기는 하지만 사전에 중국에 대한 이해가 없이 중국에 몇 번 다녀와 보고는 중국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며 중국에서의 모든 일 처리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필자 역시 정말 답답할 뿐이다. 중국에 한달 오면 박사이고, 6개월 있으면 석사가되고, 1년 있으면 학사가 된다고 한다. 말이 앞서기보다는 진지하게 행동하는 한국인이 되기를 기대한다.3.한국인은 일이 발생하면 침묵이다." 한국인은 잘못을 하고도 승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터진 후에 문제를 수습하려니까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된다. "(회사원 C,꽝조우)꽌시는 평소에 다져 놓을때 힘이 있다. 예방이 사업 성공의 지름길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존경을 받아야 가능하다.4.잰체하다(装腔作势)혹은(装模作样)"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장님이 뻔히 알고 있는데 그것을 감추려하고 거짓 형상을 만들다. 정말 답답하다."(회사원 J, 청도)삶의 눈은 다 같습니다. 그들의 눈에도 비치는 것이 있겠지요? 솔직하고 진지하게 접근하는 마음이 아쉽습니다.5. 한국인은 자기보다 조금만 못해도 아주 무시한다.-한국인은 중국사람을 신임하지 않는다."한국인들은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게 되면 진지하게 교류를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는 점에서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는 가겠지만 중국인은 외국인과 교류를 확실히 하여 외국인을 친구로 만들려 하기때문에 여러번 그런 일을 겪게되면 이사람이 나와 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나중에 미움 받는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석사연구생 C, 북경)피차 마찬가지 이지만 이곳은 필경 중국 땅이기에 중국쪽의 시각을 이해하는 것이 외국인으로 살아가기에 필요하겠지요. 누가 왕따를 시키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로 왕따를 시키는 분위기 인데 결국 손해보는 쪽은 외국인 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조금은 모른척하고 그쪽 편을 들어주는 지혜와 아량이 필요하다6. 한국인은 거만하다 한국인은 중국사람보다 월등감을 자주 가지곤 합니다. 그냥 중국인이면 더럽고 어수선하며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전혀없는 건아니지만 -아니 아주 많다하더라도-그런 감정이 중국인에게 전달되면서 중국인도 자연히 한국인을 싫어하게 되고 그 결과 손해는 고스란히 외국인의 몫이 되겠지요.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거의 병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분명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정치적·경제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다. 미국인이나 일본인조차 중국인을 무시하지 못하는데, 한국인만 유달리 중국을 업신여긴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우월감에 가소롭게도 교만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독일계 기업 회사원 Z, 북경) 사실 필자가 봐도 한국사람들은 중국이란 나라는 대단한 나라로 생각하면서도 중국사람은 대단하게 보지않을 려는 속성이 많은 것 같다 중국인은 한국과는 반대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대단치않게 생각하면서도 한국인에대해서는 여러가지 장점을 들어 대단하고 우수하게 여긴다. 실적인 중국인의 사고라 할 수 있다. 실사구시라고 할까?『내가 근무하는 백화점에는 가끔씩 한국인 손님이 온다. 헌데 "한국은 이러치 않은데 여기는 어떻게 이러냐" 등등 불평을 자주 한다. 한껏 거만한 그들의 고압적 자세에 우리 회사 직원들이 질색이다. 손님은 분명 왕이긴 하지만, 한국인의 태도는 심한 거부감을 자아낸다.』(백화점 판매원 P, 상해) 7. 한국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허베이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인들은 갑자기 무리지어 몰려와서 당장이라도 공장을 설립하고 장사를 크게 할 듯이 떠벌리다가도 떠나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가 아쉬운 중국에 한국의 투자는 환영이다. 하지만 지키지도 못할 말은 내뱉어 놓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관리들이 신물을 내고 있다.』(대학교수 S, 서안) 일반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간에는 의사 소통이 어렵다. 우리는 협상중에 상대방을 고려하여 완곡한 거절을 잘 한다 예를 들면 '생각해보고 다음에 봅시다' 라고하면 거절의 의미가 거의 들어가 있는데 통역하는 이가 그냥 문자 그대로 통역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인사치례의 말도 마찬가지다. 해어질때 보통'꼭 번 한국에 방문하라. 언제든지 환영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고는 작 한국에 가서 연락하면 대부분 바빠서 연락해도 만나기도 어렵고 스케쥴이 이미 꽉 있다. 본의 아니게 못지키기 때문에 빈말이나 약속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그리고 사후 관리나 연락에 충실해야한다."한국 회사에서 아마 긴급한 사항이 생긴 듯 하다. 하지만 상담에 대한 무슨 통보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떤 소식도 없다. 그를 믿고 일을 벌인 내 입장이 지금 난처해졌다."(국유기업 회사원 L, 심양) 자기들은 시간을 더 안지키면서 외국인이 시간을 안지키는 것을 의야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 적이다. 자기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외모를 중시하지 않지만 외국인이 허름하면 무시하거나 상대를 안하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8. 한국인은 변태적인 색광이다 "내가 맡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에게 소개를 하면 중계료를 받을 수 있지만, 한국인은 수요가 너무 많아 힘이 든다. 베이징에 있는 수많은 가라오케들이 주로 조선족을 고용하고 있다면, 콜걸의 경우 한족이 대부분이라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가이드 W, 북경) 딱히 이부분은 뭐라 할 말이 없지만 대게 독일 이나 일본사람들 모두 외국에 나가면 익명성과 환경 때문에 그리 되는 것 같다. 다만 항상 우리모두 주의 해야할 사항이다. 인류 역사이래 회자하는 얘기이고 요사이 성매매 특별법때문에 한국은 더 난리인 듯하다. "외국 손님은 단연 한국인이 많다. 그들은 술버릇이 고약한데, '폭탄주'라는 이상한 방식으로 술을 마신다. 점잖다가도 술을 한 번 들이키며 다들 개가 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를 원하고, 오럴섹스를 좋아한다. 한국인의 성생활은 폐쇄적이면서 퇴폐적이며 변태적인것 같다."(호스티스 H, 심천) 9. 한국인은 멍청하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기업 치고 손실을 안 보는 기업이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은 많이 한다 하지만 제대로 투자를 못해 날리는 돈이 많으니, 참 한심하다"(대만계 기업 회사원 Y, 중경) 정말 필자가 봐도 한국인은 답답하다. '아생한 연후에 살타'고했다.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 중국은 그리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시장은 넓지만 경쟁자는 더 많이 더 넓게 분포하고 있다.'한국 유학생들과 접촉을 하다보면 참 딱할 때가 많다. 못하는 영어도 그렇지만, 자신이 유학하는 나라의 언어조차 제대로 구사를 못한다. 또한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다. 중국인이 외국으로 유학가면 죽기 살기로 공부하고 생활한다. 헌데 한국인은 멍청해서인지 몰라도 자신이 유학하는 나라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것 같다."(대학생 C, 북경) A씨는 하이커우에 살고 있는 한국인 B씨가 “건설중인 하이커우 신공항 사업장 임대권을 한화 30억원에 따냈다.”며 투자를 권하자 3억원을 B씨에게 주고 가게 자리를 받았다. A씨가 실내장식까지 마쳤을 때, 시 정부로부터 임대료를 내라는 통보를 받고서 B씨를 찾았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곳의 한 교포는 “XXX사 건설현장”이라는 한글 간판만 보고 전 재산을 맡기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며 ”최소한 정부 토지과에 확인하는 기본적 절차는 거쳤어야 하지 않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사기범뿐만 아니라 중국 현지 실정도 모르면서 허술하게 사업을 시작하는 이러한 멍청한 한국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유학생들을 중국 학생들이 보면 자선사업가 정도로 본다고들 하니까. 등록금 아무리 비싸도 잘 내고 수업은 잘 빠지고 비록 학생이라도 중국 학생들이 상상하기에도 비싼 -한달 용돈이상되는 -술집등도 서슴없이 다니는 한국인이 당연히 멍청하다고 보는 것이다.10. 한국인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이다 "드라마 를 보고 놀랬다. 한국의 남자들은 모두 남성우월주의자들인가? 정말로 집에서 손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가? 그런 나라에서 사는 한국 여자들이 불쌍하다."(가정주부 M, 성도) 사실 요즈음의 한국 남성들은 불쌍하기까지 한데 아직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다. TV 나 영화의 영향이 큰것 같다. 정계 진출이나 사회활동은 아직 세계적 수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게다. 한국 여성들의 약진을 기대한다."어릴 적 주변에 살던 조선족 가정에서 아버지가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헌데 최근 접촉하는 한국인들도 별 차이가 없다. 한 사람은 "나는 죽어도 아내를 밖에서 일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여성이 경제적 자주권이 있어야 집안 내에서도 지위가 있는 것 아닌가?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경제기관 연구원 Y, 북경) 11. 한국인은 독자적인 문화가 없는 민족이다 "작년 한국에 갔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수많은 영어 간판이었다. 게다가 일본어로 쓰여진 간판도 눈에 띄었다. 한국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는데, 현지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내 눈에 비친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온갖 잡탕이 뒤섞인 추잡스러운 몰골이었다."(정부관리 D, 북경)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종대왕이 이 상황을 보면 어쩔까? 내것이 있어야 남의 것도 제대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연변보다도 한국어 간판이 적은 한국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를 아는 것이 남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한국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자신의 문화가 없는 것 같다. 과거에는 중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에 있었고, 반세기 전에는 일본에 지금은 미국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흡수하기 바쁜 것 같다. 주변에는 만날 수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들만의 특징을 전혀 찾을 수 없다.그들은 미국의 식민통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국유기업 회사원 G, 천진) 먼저 우가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잃어버린 우리문화들을 하루속히 회복해야지만이 그들이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을 인식할 것이다.12. 한국인은 노동자를 학대한다 "한국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가 한국인에게 착취와 학대를 받는다는 보도를 수없이 접했다. 정말로 한국인은 못사는 나라의 노동자를 업신여기나? 한국인이 뭐 날게 있다고 중국인을 무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노동자 고용환경이 가장 열악한데, 한국이라는 나라 참 못됐다.나는 한국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택시기사 W, 북경) 아마 일부의 일을 그리 보는 것 같다. 외국 근로자들에 대한 시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으나 아직도 개선해야할 점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중국언론에 자주 관련보도가 있어서 더 그렇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심한 한국기업의 억압적인 노무관리는 제고가 있어야 한다. 중국의 현실을 존중하면서, 중국인을 얕잡아 보거나 체벌과 같은 중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변호사 J, 중경) 13. 한국인은 너무 급하다."한국인들은 자기사정만있고 남의 사정은 보아주지 않는다. 여기는 중국인데도 중국습관을 따르지 않고 한국식으로만 하려고 한다. 나는 이런 한국인이 정말 싫다."(정부관리 J, 장춘)중국인이 보는 한국인은 정말 양은 냄비같다고 생각한다 금방이라도 간 쓸개 다 빼줄것처럼 행동하다가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그래서 일부러 중국인들은 한국인과 거래할때 더 만만디로 시간을 두고한국인을 관찰하는 것 같다. 중국의 비단장사에게 아라비아 상인들도 다 녹아났다는 걸 명심해야한다.14. 한국인은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며 계급의식이 너무 심하다.중국 남방 한국기업체의 한 사장이 “중국인들 무릎 끓어라”고 고함질러 CCTV에 심심찮게 오른 적도 있다. 중국이 발전한 다른 나라에 비해 낙후한 건 세인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국에 온 유럽, 일본, 미국인들은 모두 그런가 하고 잠자코 있는데 유독 한국인들만이 이런 것을 말끝에 달고 다닌다. 자부심이 특별히 강한 한국인들은 중국의 상황이 자기 나라와 다른데도 자기들의 습관적인 사유방식대로 중국사회를 관찰하다보니 합작대상의 진실한 정황을 알 길이 없다. 내 것에 대해 똑바로 알고 남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그들을 알아가야만 세계무대에서 우리가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 받을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 중국동포나 다른 외국 노동자들의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질 때, 비로서 그들도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와 함께 지구촌을 더 복된 삶의 터전으로 만드는데 서로가 힘을 합할 것이다.종국적으로 한국인이 미움받지 않으려면 중국인을 한국 사람과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는게 제일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보다 못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중국인을 인정하고 대우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손해나는 건 누구인가? 그들도 그들만의 아픔과 장점이 있다. 좋은 사람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먼저 우리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그리고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노력해야 할 것이다.
6    중국의 미래 그리고 한국 댓글:  조회:4103  추천:70  2005-04-05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5)중국의 미래 그리고 한국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건축과 객좌교수한국과 중국을 비교할 경우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볼 때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좋은 환경에 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우호적으로 본다. 그렇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실상 나라로도 안 친다. "왁" 하고 기침만 하면 없어질 나라로 본다. 하지만 한국이 중국을 보는 시각은 반대다. 중국인은 지저분하고 비위생적이고 사기 치고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한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훨씬 실제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거다. 한국에 가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중국에 대한 자기 인상을 한마디씩 던지며 확인을 구하는 사람들을 대한다. ‘중국 사람들은 지저분하지 않느냐’ ‘중국에서는 한국 돈이 통하더라’ ‘중국제 물건은 싸기만 하고 쓸만한 게 없더라’ 등이 한국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중국 인상’이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그 저변에 깔린 우리의 ‘국민소득(GNP) 차별주의’(1인당 소득이 낮은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월감)를 엿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저개발 지역이나 관광지의 저소득층 중국인들을 만나보곤 중국인 전체가 지저분하다고 평한다거나 한국인들이 대부분인 관광지의 중국 상인이 한국 돈을 받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는 한국 돈이 통용된다고 지레짐작하는 태도 속에는 중국에 대한 우월감이 숨어 있다. 상해나 심천등 발달한 남방의 도시를 보라 이미 그들은 우리를 앞질러 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중국은 비디오 문화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사느냐? 그들은 CD밖에 없다. DVD나 VCD 등. 비디오 테이프 문화가 들어가기 전에 CD가 들어간다. 비디오는 CD에 비하면 아주 불편하다고 할 수 있다. 조작도 불편하고 들고 다니기 무겁고. 비디오 쓰는 사람이 없고, 시장 자체가 없다. 경제가 발전하면 따라간다고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그만큼 빠르다. CD 문화가 그렇듯 휴대폰 문화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 휴대폰이 500만 대 할 때 중국은 100만 대밖에 안 되었다. 우리가 1,000만 대 할 때 200만 대, 2,000만 대 할 때도 500만 대였다. 그런데 우리가 3,000만 대일 때 그들이 1억 5천 만 대를 돌파했고, 우리가 3천5백 만 대 할 때 중국은 2억 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국의 깊은 시골엔 유선 전화기가 없다. 휴대폰밖에 안 쓰니까. 그들은 우리보다 인공위성을 훨씬 많이 쓴다.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근세까지 약 15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세계 경제대국의 자리를 지켜 온 나라다. 13억 인구의 중국은 최근 10여년 사이 옛날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듯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이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 싸구려 제품만 생산하는 줄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미 중국 기업들은 자체 브랜드로 미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머지않아 저가 브랜드뿐 아니라 고급 브랜드로도 한국 시장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기술력이 우리보다 한참 뒤진다고 생각했던 중국이 얼마 전 자체 기술로 개발한 유인 우주선을 띄우는 것은 이제 놀랄 일이 아니다.우리는 과거 중국을 우러러봤으나 지금은 무시한다. 이제 그들이 강대국이 되면 또다시 눈치를 보는 악순환을 계속할 것인가? 중국 성장의 잠재력은 가히 가공할 만하다.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경쟁력이 없어야 하는데, 경쟁력이 없는 부분에서는 자본주의를 다 도입한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드웨어가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가장 기본적인 게 건물과 땅이다. 우리 나라는 도로를 내려면 땅을 매입해서 길을 내는데, 땅 매입비가 90퍼센트고 공사비는 고작 10퍼센트다. 그러나 중국은 거꾸로다. 땅 매입비가 10퍼센트고, 공사비가 90퍼센트다. 그러니까 중국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우리보다 10분의 1밖에 안 들어간다. 그나마도 우리 나라는 데모하고, 땅 안 팔고 그러는데, 중국은 땅이 모두 국가 소유다. 그럴 문제가 없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다. LG 같은 경우도 중국에서 공장을 하고 있지만, 중국인들은 LG를 한국 제품이 아닌, 중국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 사람이, 중국 땅에서, 중국 재료를 가지고, 중국 자본으로 생산하는데, 그게 중국 제품이지 한국 제품이겠는가. LG의 자본 비율도 중국이 50퍼센트 넘게 차지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 우리 나라에 들어오는 "메이드 인 차이나"가 나쁘다고들 얘기하는데, 싼 거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는가. 싼 거는 상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싼 것도 상품 가치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싼 걸 쓰지 비싼 걸 쓰겠는가.맺는 말중국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중국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경제적으로 조금 더 잘 산다고 우리가 우월하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나와 상대의 진면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의 것을 존중하려는 자세다.중국과 중국 동포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꾸 우리 잣대로 중국을 보려는 습관은 빨리 버려야 한다.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는 중국을 잴 수가 없다. 중국의 잣대 혹은 일반적인 잣대로 봐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항상 바깥을 볼 때 우리의 잣대로만 본다. 중국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 꽃게에 납이 들어갔다, 중국인은 목욕도 안 한다더라 하는 것은 중국을 전혀 모르는 시각이다. 우리 나라도 외제차를 두 대 정도 가지면 부자라고 하는데, 약 2∼3퍼센트 정도 된다고 본다. 중국도 그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데, 3퍼센트 정도 된다고 한다. 4,500만 명이다. 우리 나라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부를 독점하고 있다. 중국의 인구에 대해, 땅에 대해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중국 사람과 교류하면서 이상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실속이 없다. 중국 사람 중에서도 깨끗하고, 합리적이고, 명석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도 한국에 있는 조선족과는 달리 중국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과 중국에서 온 우리 동포들에 대한 애정을 새롭게 하여 그들과 교류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를 기대한다. China-corean.com은 이러한 일을 솔선해서 하는 단체이고 연변의 두레마을이나 연변과학기술대학 그리고 많은 해외 동포들을 위한 단체들이 그 일을 해나가고 있다. 최근들어 조선족엘리트들이 모여 연우포럼(ckywf.com)을 결성하여 과 로 조선족건강사회만들기에 나서고 있는데 역시 우리 모두 그들의 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한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에 1주일 왔다가 간 한국인은 중국 박사, 1년을 산 사람은 중국 석사, 2년을 산 사람은 중국 학사라는 말이 있다. 짧은 중국 방문을 통해 얻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중국에 대해 통달했다는 식의 분석을 쏟아내는 한국 사람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말이다. 백두산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와서 기분으로 하는 이런 피상적인 분석과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평가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내 것에 대해 똑바로 알고 남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그들을 알아가야만 세계무대에서 우리가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 받을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 중국동포나 다른 외국 노동자들의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질 때, 비로서 그들도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와 함께 지구촌을 더 복된 삶의 터전으로 만드는데 서로가 힘을 합할 것이다.
5    내가 본 조선족의 역사 댓글:  조회:4263  추천:64  2005-04-03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2) 내가 본 조선족의 역사 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객좌교수(한국인)조선족이 오늘날 연변지역의 대부분을 일컫는 간도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조선족 거주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130여년 전이다. 1677년 청정부는 만주, 특히 연변지역을 선조 발상의 신성한 땅으로 보고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 500㎞2지구를 봉금구로 정하여 한족이나 그 밖의 비만주족이 유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후기(1860년대)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은 10년간의 걸친 흉년으로 가난과 기아를 이기지 못하고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비교적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땅이 비옥한 만주(간도) 지역으로 이주 하였다.처음에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러 오는 형태로 간헐적이었으나 , 차차 중국 청나라의 규제가 완화됨에 따라 조선족의 이주는 물론 다른 지방의 한족들 가운데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도 늘어났다. 청나라 정부는 1875년에 조선족의 정착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민 관리처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조선족의 본격적인 정착 이주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1860년에서 1909년에 이르는 약 반세기 동안 인구는 2배로 늘어났지만, 인구증가의 절반은 자연증가에 의한 것이므로, 만주로의 인구 이동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시기인 1910~1940년 사이의 조선족 인구의 증가는 엄청나다. 이 시기의 인구이동 규모는 이주의 기본 동기, 일본의 농업ㆍ노동 및 이주정책,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과 맞물려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주시기별로 분류하여보면 첫째시기는 19세기중엽부터 1909년까지의 자연경작이민시기로서 이 시기에는 주로 개별 흉년을 피해 경작이민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이 함경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둘째시기는 자유망명이민으로 주로 정치적으로 일본의 압제를 피하고 자유를 위해 망명한 이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점 직후(1910~1920년),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 정치적인 이주는 당시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였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 실시 결과로 나타난 조선 농민의 소작화와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에 의해 전개된 조선인농민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착취와 궁핍 때문이었다. 1920년대에는 인구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지는데, 그 원인은 1920년대 조선인농민의 이동 목표지가 일본과 국내 도시로 바뀌었고, 그래서 만주로의 이주자는 이전에 비해 급격한 감소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시기는 1930년대 초반에서 해방이전까지의 강제개척이민시기로서 주로 일본의 집단이민정책에 의해 이주해온 사람들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전반기와 후반기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만주사변이후 후반기에 인구가 급증하게 된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만주의 침략과 조선의 파산농민의 처리를 위하여 조선 농민을 대량으로 만주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32년 9ㆍ18 만주사변 이후 조선족이 항일과 반일의 선봉으로 간주되면서 치안 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민이 제지되었다. 그리고 만주에서는 각종 치안조치와 함께 조선족에 대해 거주와 이동에 통제를 실시하는데, 즉 항일 무장투쟁 세력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 ‘집단부락’과 ‘안전농촌’을 만들게 된다. 이들 대부분이 한반도 남부지방을 기원지로 하며 출신지역별로 조선족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정착 당시 그들의 주거를 건축할만한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땅굴막» 혹은 출신지역의 민가와 유사한 형태의 집을 급조하였으며 그래서 주거의 질은 매우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후 1936년 만주의 치안이 안정됨에 따라 그 동안 침체되었던 만주의 농업발전을 위해 조선족 집단이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그래서 1937년 처음으로 대규모적인 집단이주가 이루어졌고, 이 때부터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즉 1930년대 후반기의 만주지방의 조선족 인구의 급증은 이와 같은 정책적 배경에 의해 설명된다. 그러나 조선족 대규모 유입의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농업의 파탄과 농민의 궁핍화였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이민 이라기보다는 고국에서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서 착취에 시달리다 못해 조국을 떠나 유랑하는 유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연변의 경우 집단 이주자들은 주로 인구가 적고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던 왕청과 안도에 배치되었고, 주로 조선의 남쪽 농업지역(특히 경상도)을 기원지로 하는 이들 후기 이민은 이미 조선족, 특히 함경도 출신으로 포화 상태인 간도보다는 다른 지역인 보다 북쪽 지방인 흑룡강성으로 향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연변과 조선, 연변과 그 외 중국 동북지방으로의 인구 이동이 더욱 빈번해지게 되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이민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즉 일본은 엄청난 조선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으로 파견한 것이다. 그 결과 만주로의 이주 규모는 크게 줄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만주 조선족들은 대규모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해방 직후 만주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은 총 인구의 40%에 달하며, 귀환자의 비율은 이주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간도 지방보다는 다른 만주지역에서 훨씬 더 높았다. 이는 이주의 역사가 짧은 지역에서는 아직 정착의 기반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대규모로 조선족의 귀환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 중국 성립(1949년) 당시 연변의 조선족 비율은 63.4%로 압도적으로 지역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족의 인구유입은 계속되는데 반해 조선족은 한국동란 기간에 북한 지역으로 인구가 유출되고, 조선으로부터의 유입이 단절되면서 한족이 차지하는 인구비율은 점점 높아지게 된다. 위와 같이 중국에 사는 조선민족은 이주, 재이주, 재재이주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중 연변의 조선민족은 대부분 함경도지방출신으로서 두만강을 거쳐 육로로 이주해왔으며 대부분이 조선족마을에서 생활하며 이민족과 함께 사는 경우에도 조선족은 일반적으로 특정지역에 모여 산다. 연길시와 같은 도시에서도 한족과 조선족의 거주지역은 확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조선족의 집거 현상이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시키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조선민족주거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출발부터가 일본이나 미국의 동포와는 다르게 중국에 올 때부터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으로 언젠가는 돌아갈 꿈을 꾸고 이주하였기에 민족의 동질성을 잃지 않고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을 생각하며 조선말과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먼저 결혼 문화 습관 등 모든 면에서 조선민족 특유의 전통과 문화를 간직하고있다. 그래서 지금도 민가 답사를 위해 산골이나 깊은 농촌에 가면 중국어를 못하는 조선족 할아버지 할머니를 흔히 만날 수 있다.중국의 조선민족은 고향을 그리다가 사무친 그리고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황량한 만주벌판에 서전서숙등 민족학교를 세우고 우리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갈 준비만하다가 중국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된 아직도 호적상으로 한국인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고 부모들인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으로 간 우리의 선조들은 그곳 나라에 적응하려고 부단히 애써 그곳에서 동화하고 정착에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어 금의환양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중국의 우리민족은 6.25민족내부전쟁과 외세의 앞력으로 그려진 38선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그 땅에 살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장황한 조선족 이주사에 대한 설명은 출발부터 중국의 우리 동포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한국인은 한민족이지만 북한사람도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사람도 아니다. 엄연히 한국 사람이듯이 조선족은 분명 한민족으로 조선민족이나 그들은 엄연한 중국인이다. 한민족이면 무조건 다 한국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한민족이면서 북한 사람도 되고 러시아(고려)인도 되고 중국(조선)인이 될 수 있다. 대개의 중국의 우리 동포는 민족관이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인보다 투철하지만 국가관은 더욱더 투철하다. 우리는 대개 민족관이나 국가관이 투철하기는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엄연히 국가와 민족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를 꿈꾸기 보다는 민족공동체로서 경제공동체를 생각하고 꿈꾸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하회에는 간단히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과의 차이를 보고 서로간에 잘 적응하고 화합하는 방법을 적어 보겠다.
4    한국인이 조선족과 화합하여 일하는 10가지방법 댓글:  조회:4206  추천:68  2005-04-03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4)한국인이 조선족과 잘 화합하여 일하는 10가지방법 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건축과 객좌교수 어느 사업이나 성공한 뒤에는 그 원인이 있다. 외국의 기업들이 중국에 들어가면 외국기업이라는 것 만으로 불평등한 취급 받는 데다 자국과는 다른 사업 환경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중국인들끼리는 저렴하게 거래를 해도 외국인한테는 더 비싸야 된다는 사고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외국인은 자기들보다 돈도 많고 잘살기에 당연이 좀더 내야 자기네들 한테는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다.예를 들면 똑 같은 제품도 자국민들 보다 외국인이 가면 더 비싸게 팔고, 똑같이 일하는 노동자도 외국회사에 가면 돈을 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원가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현지인을 내 세우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같은 제품을 가지고 내국인에게 받는 금액과 외국인에게 파는 금액이 달라야 상대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 우리생각 같으면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중국에서 정가나 원가의 개념은 외국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대부분의 중국제품은 권장 소비자 가격이 표시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지역과 환경에 따라 같은 제품이라도 가격이 달라야 된다고 생각하지 같은 물건이면 같은 가격으로 생각하는 것을 더 이상스럽게 생각한다비결 1. 중국 직원의 사고를 파악하라. 자기나라에서는 교육환경이나 생활 배경이 비슷하여 사장이 직원들의 생각을 비교적 쉽게 예측,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각 지역마다 교육, 생활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사고 방식도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따라서 사장은 직원들의 심리 파악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국에서의 출신 지역의 상황은 외국으로 따지면 어느 국가의 출신의 사람을 선택하느냐 만큼에 버금가는 차이가 있다. 같은 중국인이지만 전혀 다른 나라사람처럼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중국의 발전하는 도시 대부분은 중국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저마다 차이가 심하다. 따라서 내 생각과 업무 스타일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직원들의 사고 논리와 업무 능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일을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게 된다. 비결 2. 중국 직원을 앞세우라 예를 들면 중국 본토인들이 운영하는 점포도 많다. 그러나 본토인들도 외국인인 우리와 똑같은 직원관리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업하는 사장들은 이러한 직원관리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전 직원을 한 지역 사람들만 채용하는 방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한 지역 사람들만 써서 내부의 분파 갈등을 없애고 단결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직업의 성격상 가능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는 정말 어려운 얘기다. 또는 중국 현지인을 이용하여 현지인을 관리하도록 한다. 현지인 중에서 설득력과 공신력이 우수한 사람을 골라 리더로 내세워 현지인들을 관리하도록 한다. 사장은 리더만 상대하면 되므로 불필요한 어려움들을 피해 나갈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현지인에게 모든 것을 맡겨 현지인이 모든 것을 처리하면 결국 현지인의 회사가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따라서 현지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히든카드로 가지고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비결 3. 우리 동포와 눈높이를 맞추라…중국 동포는 우리 민족이나 결국은 중국인이다. 중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우리가 한국을 사랑하듯이 중국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고향은 한국이 아니라 연변이고 흑룡강이고 심양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생각한다면 그들은 분명 당신을 아버지처럼 따를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한국이 좋다고 우리가 얘기해도 결국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우리가 고향을 좋아하고 그리는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고향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비결 4.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라.중국인은 좋은 물건은 감춰두고 나쁜 물건을 전시한다. 단골손님이 오면 좋은 물건을 속에서 꺼내어 보여준다. 한국은 이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물건만 보이고 나쁜 물건을 슬그머니 놓고 오기도 한다.중국 상인들 중국에서는 정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는 것 같다. 흥정을 좋아하고 흥정을 또한 즐긴다. 중국 문화를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에 푹 빠져 즐기는 자세로 일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한다.중국인들의 명함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거의 이력서를 방불케 할 만큼 명함의 내용이 복잡하다. 중국은 나라도 넓고 사람도 많기 때문에 서로를 알려면 그냥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기에 명함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한국은 명함이 복잡하면 그와는 반대로 이름만 요란하고 실속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는 명함이 간단하면 그야말로 별로 하는 일없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한국은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러 사람을 거쳐도 전혀 그 사람과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않다. 그래서 물건을 사고 팔 때도 항상 오른손에 물건을 주면 왼손으로 돈을 직방 거래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중국은 어딜 가나 보증금 문화가 만연해있다. 호텔에 들더라도 하루방값만 가지고 있으면 하루를 잘 수 없다. 최소한 이틀치를 보관(deposit)해야만 하루를 잘 수 있다. 이는 문화가 그런 것이지 상대방을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한국은 한번 거래한 사람을 다시 안 보려 해도 또 만나게 되는 문화권이다. 워낙 바닥이 좁아 같은 분야면 언젠가 반드시 부딪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은 그와는 다르다. ‘저 친구와 평생 안보고 살꺼야!!’ 하고 그 자리를 뜨면 정말로 죽을 때 까지 그 친구와 안보고도 살 수 있는 나라이다. 우리 나라는 어디 그런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나라이다.비결 5. 너그러운 아량을 가져라.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했다. 아직 우리가 받는 처지가 아니고 주는 처지에 놓여 있음을 감사하자. 언젠가는 이전에 오랜 기간 그래왔듯이 중국에다 우리가 손 벌릴 때가 올 수도 있다. 있을 때 잘하라고 그러지 않았던가? 없는 사람 심정은 없어 봐야지 안다고 했다. 황량한 중국 땅에서 한족과 또 다른 여러 민족과 부대끼며 만주사변, 6.25, 문화혁명을 거치며 어렵게 살아온 그들을 형님이 아우를 대하듯 먼저 이해하자. 사실 조선족 중에서도 중국 사회에 잘 정착하고 중국의 지도자 급에 있는 조선족은 한국에 잘 오지 않는다.사실 우리보다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 쪽이 훨씬 더 실속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족의 10%정도만이 우리 한국 땅에 온다, 그들은 대개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는 평생 벌기 힘든 큰 돈을 빌려 청운의 꿈을 안고 우리 한국 땅에 찾아,온 어찌 보면 안쓰러운 우리의 자화상이고 형제고 이웃이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우리 동포를 대하듯 만 한다면 지금보다 문제는 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같이 부대끼다 보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가진 자가 스스로 넓은 마음으로 먼저 이해하고 손 내밀 때 비로소 갖지 않은 자도 나아올 여지가 생긴다.비결 6. 장기적으로 투자하라.아무리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중국의 우리 동포는 먼 이국 땅에서 살다 온 국적이 다른 엄연한 타국인이다. 쉽게 친해지거나 처음부터 깊이 마음이 열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는 듯하나 대개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이 보통이고 당연한 거다. 국가와 이념이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사실 같은 게 이상한 거다. 외국인을 대하듯 진솔하고 꾸준히 그들을 대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같은 민족의 장점을 살려 낼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국의 마이다스라는 기업도 장기적으로 조선족을 발굴하여 투자하고 그들을 한국 직원 이상으로 대하고 대우해준 결과 북경의 지사에서 첫해부터 높은 이윤을 남기는 쾌거를 이루고 있다. 충분히 오랜 기간 교육하고 배려해준 결과이다. 말이 통한다고 해서 적게 투자해서 빠른 기간에 많은 이득을 한꺼번에 이루려는 발상을 버리자. 비결 7. 먼저 우리 동포를 돈 벌게 해주자. 그러면 자연히 돈을 벌게 해준 만큼 이상으로 되돌아 온다. 그들을 혹사시켜서 돈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돈 버는 일과는 멀어진다. 그들이 먼저 돈을 벌지 않으면 내 주머니에도 돈이 쌓이지 않음을 명심하자.비결 8. 자존심을 심하게 상하게 하는 말을 삼가자.우리 옛날 속담에도‘말 한마디로 천냥 빛을 갚는 다’고 하지 않았던가?. 북한 사람이나 한국에 온 중국 동포들이나 마지막 남은 거는 자존심이다. 우리 무심코 내 뱉은 말이 그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정말로 가진 자 답지 못한 소인배적인 행동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어려움과 시름을 씻은듯이 날려 보낼 것이다.비결 9. 조선족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중국의 우리 동포는 다문화, 다언어권에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대부분 기본적으로 중국어와 한국어, 일본어등 2-3개 국어는 능통하다. 이 얼마나 고급인력인가? 그리고 대부분 부지런하고 총명하며 굳은 일도 묵묵히 처리해나가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이러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은 당연하다. 비결 10. 왠만하면 용서하고 믿어주자.우리가 다 장발짠같은 너그러운 신부까지는 못되더라도 한국에 편법으로 머무르는 약점을 이용하는 밀고자는 되지 말자. 우리는 생활의 문제이지만 그들은 생존의 문제를 안고 한국에 왔다. 사실 필자 본인도 중국에 10년 넘게 있으면서도 이것들을 온전히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형님된 심정으로 그들을 너그러이 본다면 굳이 못할 일도 아니다. 이제부터는 심기일전하여 위의 열 가지를 지켜보도록 다짐하자. 그러면 미래는 반드시 열릴것이다. 동북아 민족 공동체의 꿈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다.
3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 댓글:  조회:4166  추천:61  2005-04-03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1)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건축과 객좌교수(한국인) 들어가는 말 한국과 중국은 이제 수교 12년을 넘겼다. 이제 지금은 곰곰히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중국의 200만 명에 달하는 우리 동포에 대하여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그들의 발생학적인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과 우리가 상생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 비공식 통계지만 한국에 중국인이 30만 명이 살고 중국에 한국인이 30만 명 이상 장기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중국 거주 한국인은 한선족(韓鮮族)이라고 부른다. 난 그냥 2000년대 조선족이라 부른다. 1900년대 한인동포(조선족)을 대비하면 당시 그들도 중국의 조선족이 되려고 오지 않았다. 지금 한국인도 조선족이 되려고 중국에 온 거는 아니나, 필경은 앞으로 지금의 중국에 있는 한국인도 중국의 또 다른 2000년대 조선족으로 살 것이다. 한국인이 이렇게 무섭게 중국에 정착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현재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조선족은 중국에서 13번째의 인구를 가진 소수민족이다-들 때문이다. 이들은 재미 교포나 재일동포와는 달리 지금은 3-4세대가 흘렀지만 아직도 한국 말을 할 수 있고 중국 정부로부터 차별도 받지 않는다. 정책상으로 보면 자녀문제 등으로 해서 차라리 우대를 받고 있다. 한족은 1가구 1자녀인데 소수 민족인 조선족은 1가구 2자녀이고 자녀를 낳으면 각종혜택을 준다. 중국 조선족을 같은 동포인 한민족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히 중국인인 외국인이다 이점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한민족이면 꼭 한국 사람일 수는 없다. 북한에 살면 북조선사람이요 러시아에 있으면 고려인 중국에 있으면 조선족 미국에 있으면 재미동포 일본에 있으면 재일동포 일 수 있다. 중국은 한국으로 놓고 보면 최대 수입국이자 최대 수출국이다. 아무래도 아편전쟁의 기억과 서구 열강들의 침탈을 기억하기 싫어하고 남경대학살의 장본인인 일본을 좋아할 리 없다. 그래도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우호의 나라이고 특히 북한과의 관계는 항미원조전쟁(6.25를 중국인이나 북한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북한을 도와 미국에 대항해서 싸운 전쟁이란 뜻’이다)을 같이 참여한 혈맹의 나라이다. 중국과는 50년 의 수교 역사를 가진 미국을 제치고 불과 수교 12년 만에 최대의 교역국이 된 것은 중국과 한국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 5년만 빨리 중국과 수교했더라면 과연 우리는 벌써 IMF도 없이 국민소득 2만 불을 도달할 수 있었지 않을까…?한국인과 조선족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중국에서 우리 조선족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졸업 후 다들 중국 회사를 간다고 한다. 선배들한테 한국회사의 나쁜 소식을 많이 듣고 또 한국회사에 가면 자존심도 상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 싫어서 란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졸업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대우가 좋은 한국 회사로 다들 간다. 허나 인간적 모멸감을 참지 못하거나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지 못한 채 한국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다시는 한국회사를 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를 만나면 여전히 또 한국 회사의 사원으로 다시 근무하고 있다. 한국회사도 마찬가지다. 조선족 직원은 믿지 못하겠고 금방 다른 데로 옮긴다고 다시는 안 쓰겠다고 하고 한족을 쓰다가도 다시 한국말과 정서가 그래도 통하는 조선족이 금방 궁해지거나 그래도 낫다 싶어 다시 조선족을 쓴다. 서로 욕하며 서로 공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지금 중국의 한민족은 조선족으로 불리고 있지만 중국을 구성하는 주요 민족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쓰는 말을 중국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한어라고 한다 왜냐하면 중국어는 56개 민족의 언어가 다 중국어 이기 때문이다. 이러듯이 중국의 성립을 주도한 조선족은 중국 공민으로서 의리와 민족자존심으로 중국의 한족(漢族) 틈에서 생존한 저력이 있다. 자존심을 살려주며 상생하는 방안을 생각하라. 이중 언어와 이중 문화에 정통한 인력은 고급 인력인데 대부분의 조선족은 삼중언어와 문화를 체험한 고급 인력이다. 활용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는 전적으로 오너의 책임일 뿐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최소한 한족( 漢族 )을 대하는 듯한 노력과 태도로만 접근하면 충분히 한족보다는 월등히 우수한 인력이다.
2    조선족이 한국회사에 잘 적응하는 10가지 방법 댓글:  조회:4121  추천:56  2005-04-03
중국사회에서 조선족과 한국인의 올바른 관계조명(3)조선족이 한국회사에 잘 적응하는 10가지 방법 김준봉ㅣ북경공업대학 객좌교수 비결 1. 사장이 되려는 각오를 가지라 성공할 수 있는 요소는 적지만 실패할 수 있는 요인은 너무나 많다. 성공의 길이 보이지만 실패로 돌아갈 길은 너무도 많고 또한 전혀 예측하기도 힘들거나 그 길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패 요인의 90 % 이상은 창업자 본인이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사장이 되려면 직원식 사고방식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직원은 항상 자기가 회사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회사가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한다. 직원식 사고는 항상 자기의 노력보다 더 많은 대가를 기대한다. 그러나 사장은 이러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사장은 고정된 휴식 시간이 없고 어떠한 복지도 없다. 어떠한 직무나 업무의 한계도 없다. 사장이 되려면 우선 직원식 사고부터 바꿔야만 한다. 일단 직원들이 사장과 동거동락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할 만큼 단결하도록 만든다면 당신은 어떤 사업을 해도 성공할 것이다. 비결 2. 자기를 버리고 모욕을 참아야 한다중국은 땅도 넓고 민족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다. 하지만 한국은 땅도 좁고 한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틀리고 일하는 방식이 달라 결과도 달라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주변과 충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폭 넓게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의 성질을 죽이고 자존심을 접을 줄 모르면 감정이 상한 고객이 왜곡된 사실을 사방에 퍼뜨려 당신의 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업을 잘하려면 좋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좋은 사람은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비결 3. 10분 일찍 출근해서 10분 늦게 퇴근하라. 할 수만 있다면 사장보다 일찍 출근해서 사장보다 늦게 퇴근하라. 아주 쉬운 일인데 막상 지키려 하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근무한 만큼 월급을 받는다 생각하기 보다는 월급 받는 것 이상으로 근무하려는 마음가짐이면 필연코 인정 받아 성공할 수밖에 없다. 너무 이해 타산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면 소탐대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큰 것을 놓칠 수 밖에 없다. 좀 손해 보는 듯 하더라도 크게 생각하면 별거 아니다. 10분 일찍 출근하는 것이 10분을 손해 보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비결 4. 잘못을 속히 시인하라. 안 되는 이유는 많다. 그러나 되는 방법도 그 이상 더 많다. 전래의 중국사회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면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습관이 생기는 사람이 적지않다. 잘못을 시인하면 벌을 받게 되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벌이 면제되기 때문에 항상 이유를 잘 대하는 문화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문화는 겸양의 유교 문화라서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를 먼저 빌면 거의 용서가 되는 문화이다. 중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정말 이해되기 힘든 문화이다.비결5. 시킨 일은 항상 복창하라. 상사의 말을 확인하고 되묻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한국인이 조선족이 아닌 외국인을 데리고 있으면 일을 시킬 때 충분히 설명하고 조금 잘못한 일이 있어도 잘 못 알아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혹 야단을 치더라도 그 외국인은 내가 외국인이니까 잘 못 알아 들었나 보다 하고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중국 동포인 경우는 그와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한국 사장이 시키면 금방 알아듣는 것 같아 ‘네’하고만 대답하고 일 했다가는 그 일을 그르치기 일수다. 그래서 더 오해가 생기는데 한국인은 금방 알아 듣는다고 하고선 엉뚱하게 일 처리 했다고 야단치고 우리동포는 기껏 일 시켜서 그대로 했더니 나중에 딴소리를 하네 하고 더 화가 나게 마련이다.일이 이쯤 되면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출발한 일자리도 금방 팽개치게 될 수 밖에 없다.시키면 첫번에 알아 들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일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복창(반복하여 되묻기)하면 그 시행착오를 훨씬 더 줄일 수 있다. 비결 6. 서로 말이 통한다고 의사소통이 된다고 믿지 마라 한국어와 중국에서 쓰는 조선어는 엄연히 다르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적 습관과 관습도 다르다. 그래서 같은 언어도 다른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면 우리는 거래를 흥정하다가 거절하기 미안하면 ‘그럼 생각해서 다음에 다시 봅시다’ 라고 완곡하게 거절을 표시하고 만다. 하지만 중국의 우리동포가 이 말을 들으면 거절로 듣지 않고 ‘생각해서 다시 꼭 보자’는 긍정의 의미로 듣게 되어 있다. 결국 돌아간 한국 사람은 중국에 다시 오지 않고 중국의 우리동포는 다시 온다는 말만 믿고 이것저것 다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전화도 받지 않고 안 오는 한국 사람을 거짓말하는 사기꾼으로 밖에 볼 수 없게 된다. 물론 한국 사람은 그때 분명이 거절했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조선족 상대방이 "돌아온다고 하여 내내 기다렸다"고 하면 깜짝 놀랄 뿐이다. 의미를 완전히 알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물어보는 습관을 기르자.비결7. 칭찬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라. 한국사람은 일반 적으로 칭찬에 인색하다. 대개는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표현을 잘 못한다는 얘기다. 중국 동포도 이 에서는 거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칭찬이 없다고 반드시 잘 못한 것은 아니다. 아무 말이 없으면 그게 곧 칭찬이라 생각하면 된다. 침묵은 칭찬이다.,,^^;비결8 참으라. 참을 인자 세 개면 무슨 일이고 한다고 했다. 참고 묵묵히 일하면 반드시 빛을 볼 날이 돌아 온다. 직원들은 자기가 사장이 안보는 데서 하는 일들은 사장이 잘 모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대개의 사장들은 직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명기하라. 비결 9. 먼저 선물하고 먼저 감사하라. 상대방이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 자기의 뜻을 전해야 한다. 먼저 양보하고 먼저 인사하면 마음의 문은 반드시 열리게 되어있다. 중국은 땅도 넓고 마음도 넓은 대국이 아니던가?비결 10. 노력, 그리고 또 노력 성실 또 성실일에 있어 가장 큰 정직은 성실에서 출발한다. 노력과 성실은 값을 매기기전에 먼저 드러난다. 너무 이해 타산에 급급하지 말고 성실과 근면으로 상대방을 감화 시켜야 한다. 작은 이익에 급급하지 말고 큰 이익을 바라보자. 바둑에서도 ‘소탐대실’하면 결코 승부에서는 이길 수 없다. 작은 것에 눈이 어두워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생소한 외지에 가서 일하게 되면 반드시 자기지방보다 생소한 습관, 더 많은 규제, 더 비싼 원가, 더 무거운 압력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대외관계도 당연이 남보다 떨어진다. 따라서 생소한 타국에 가서 일을 하려면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어려움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외의 다른 외국인에 비해 한민족으로서 더 우호적이고 더 경쟁력이 있지 않은가?
1    김준봉 프로필 댓글:  조회:5123  추천:106  2005-04-01
김준봉한국 연세대 건축공학과 졸.동 대학원 건축공학석사학위와 경희대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중국동북지역민가(民家)연구"로 박사학위 취득.공영토건(주)을 거쳐 한건미준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와 미준건설(주)과 위가건축(주)대표이사 역임.연변과학기술대학 건축과 교수,북경청화대학 방문학자,북경건축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1993년부터 10여년간 매월 1,2회씩 많게는 월 3~4회씩 100여회이상을 중국과 한국을 오가고 있다.)현재중국북경공업대학 초빙교수 겸 석사연구생 지도교수.한국연세대 객원교수이며 동북아 도시주거환경연구소 소장.국제구들(炕)학회 회장.중국세계문화유산보호연구센터 특별초빙고문.(주)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중국대표.저서: 다시 중국이다역서: 중국 경제성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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