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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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 댓글:  조회:3160  추천:78  2008-09-01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중에서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 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 20세기는, 인간의 천성이 악하기 때문에 국가 간의 관계는 무정부상태가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갈등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국제질서에 대한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을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20세기 역사가 전쟁의 시대로 명명될 만큼 크고 작은 전쟁으로 점철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 세기 갖가지 형태의 갈등이 역사를 얼룩지게 한 현실을 직시하면 국제사회를 무정부상태로 인식하며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세기는 또한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시작된,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국가 간에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국경을 설정하여 정치적 단절을 추구해온 국제관계가 인류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였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국제정치의 행위자는 국가이다. 국제정치의 유일한 행위자로서 국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행위자를 경쟁적 관계 혹은 적대적 관계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국가안보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 따라서 각 국가는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체 무력을 강화하거나 자국의 안전을 지켜줄 국가들과의 연대를 꾀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냉전체제하에서 세계를 자유민주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으로 양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21세기 탈냉전적 상황은 인간을 보다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낼 수 있기에 국가 간에도 대화를 통한 타협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존 로크 (John Locke)의 인간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그 전통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시각이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세계화에 따른 보편적 가치의 확산 및 교통과 통신의 발달 등으로 국제사회가 유무상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 다양한 행위의 주체가 등장하게 됨에 따라 국제질서의 행위자는 더 이상 국가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게 됐다.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s), 다국적기업, 심지어 테러단체 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국제정치의 행위 주체가 등장하게 됐다.국제정치 이론으로 새롭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구성주의적 시각도 21세기의 변화된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 기존의 이론이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상호작용과 힘의 배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구성주의는 주권국가와 국제체제의 역사적․사회적 성격을 밝혀내고 국가의 행위를 규칙, 규범, 설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파악한다. 접근방식에서 기존의 이론과 다르다. 한반도통일과 함께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구성주의적 시각은 유용할 것이다. 최근 연성권력(soft power)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조지프 나이, 2004) 미국 하버드대의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교수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에 주목하며 대표적인 연성권력 국가의 하나로 지칭한다. 즉,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에 비추어 볼 때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사회문화적 잠재력이 새롭게 평가받을 만 하다는 것이다.국제정치에서 행위의 주체가 다양해지면서 국가의 목표도 달라졌다. 특히 주된 국가목표로서 안보에 대한 관심은 크게 변했다. 20세기의 안보개념은 다른 국가로부터의 침략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21세기에는 외부로부터의 침략 못지않게 체제내부로부터 초래되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어 안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체제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을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국한했던 것에서 벗어나 환경문제나 마약, 빈곤, 인권 등 삶의 질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로 그 영역이 확대된 것이다. 안보 개념의 이 같은 변화는 필연적으로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무력을 통한 보장보다 지역국가 간 협력을 통해 안보를 담보하는 등 이른바 포괄적 협력안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 간 연대를 강화하여 상호의존관계를 높여가고 나아가서 역내 안보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안보위협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냉전의 최전선을 형성했던 동북아시아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규범적으로 여전히 전쟁상태에 있는 남북한은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하며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냉전시대에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중요한 외교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북한은 제국주의 제1, 2의 원흉이라고 주장해온 미국 및 일본과 관계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동안 동북아시아 안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북한핵문제도 해결국면을 맞고 있어 북한과 이 두 나라 간의 관계가 정상화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질서가 정립되면 현실주의적 시각이 가장 적합하였던 이 지역을 관찰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 즉 자유주의나 구성주의 시각이 보다 적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20세기 전반기에만 두 차례 세계전쟁을 치르며 전쟁의 역사를 만들었던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인 20세기 후반기에도 세계전쟁을 이어갔다. 미국과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여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세계를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해 대립한 이른바 냉전체제가 전개된 것이다. 결국 인류는 20세기 내내 국가 간에는 물론 적과 동지로 편을 갈라 상대에 대해 문을 걸어 닫음으로써 극단적인 단절의 시대를 만들어 왔다.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단절의 역사는 중세이후 자신의 영토를 구획하여 이를 국경으로 중시하면서 구체화됐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무정부상태 하에서 갈등의 관계로 인식하며 그 기원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찾는 것도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 그 단절의 역사가 20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것이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소통의 역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1990년대의 탈냉전적 상황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현재화된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원리를 토대로 대체적으로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2002년 중국의 가입으로 명실상부한 세계경제의 사령탑으로 자리잡은 세계무역기구(WTO)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본과 인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글로벌 경제시대에 국가 간 소통을 가로막는 국경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인류의 노력은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려는 인간 욕구의 발로이다. 그것은 신화화된 국사를 토대로 역사와 영토에 대한 자국 중심의 해석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국가 간 단절을 정당화해온 데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소통의 시대가 열리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토 및 역사 해석을 둘러싼 역내국가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소통의 시대를 열어나가는 데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인터넷세상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나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사람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새로운 미래로 나가도록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물결은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남은 고도인 북한에서도 넘실대고 있다.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북한에도 인터넷이 중요한 정보전달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고 나아가서 변화의 흐름을 타게 되면 동북아시아에서도 명실상부한 소통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21세기 국제질서는 20세기와 확연히 다르다. 20세기가 전쟁의 역사였다면 21세기는 평화와 화해의 역사가 될 것이다. 혹자는 박애의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21세기가 이와 같이 긍정적 의미로 자리매김 할 것인지에 대해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같은 정의 속에는 새로운 시대에 즈음한 인간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하지만 21세기 국제질서는 이념을 뛰어 넘어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개인은 물론 개별 국가의 입장이 존중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데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핵심 종주국을 두고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양극체제에 의한 냉전적 질서는 여러 국가들로 힘이 분산되는 이른바 다극체제로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여전히 유일초강대국으로서 세계질서의 관리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이러한 상황은 또한 국가를 구분짓는 경계를 훨씬 느슨하게 만들 것이며 이에 따라 국가의 역할 또한 약화될 것이다. 혹자는 18세기 경찰국가와 같이 국가는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역할만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제질서의 유일한 행위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그 빈자리는 다양한 새로운 행위주체들이 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 국제질서의 핵심적 갈등요인이었던 이념문제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질서에서는 경제적 요인과 함께 민족과 종교 그리고 문화로 대체됐다. 일본계 미국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그의 역저 <역사의 종말>에서 20세기를 지배했던 이념적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할 것임을 예견하며 대신 민족과 종교가 새로운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것임을 설파한 바 있다.(프랜시스 후쿠야마, 1992) <문명의 충돌>을 집필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억눌려 역사 흐름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문명 간의 갈등이 탈냉전시대 세계질서의 기본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새뮤얼 헌팅톤, 1998) 헌팅톤의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이 시대의 중요한 갈등요인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민족과 종교는 후쿠야마의 예견대로 탈냉전 이후 국가 간 분쟁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갈등요인들에 대한 지적이 반드시 미래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지적은 이를 뛰어 넘으려는 다양한 노력들을 추동함으로써 오히려 희망적인 미래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석학 조너선 색스 (Jonathan Sacks)는 문명 간 충돌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해법은 다른 문화와 종교가 어떤 방법으로 인종이나 피부색, 신앙 등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조너선 색스, 2002) 자신과 심각한 충돌을 빚을 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똘레랑스를 통해 너와 네가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학자 하랄트 뮬러 (Harald Muller)는 아예 문명의 충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인류역사를 ‘우리’와 ‘그들’과 같은 이분법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 조야한 퍼즐에 불과하며 패권주의의 야욕에 사로잡힌 미국정부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한다.(하랄트 뮬러, 2000) 뮬러는 오히려 21세기의 새로운 문명, 즉 세계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원거리 이동통신을 매개로 한 세계화의 추세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세계화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단절된 채 대립정책을 펼 수 없도록 경제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킴으로써 문명충돌이 아니라 문명 간 대화와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21세기 세계정치의 화두는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의 공존, 폐쇄가 아니라 개방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명의 공존을 위해서라도 개방을 통한 소통의 시대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1세기 문화는 레고문화로 불린다. 오늘날의 문화적 경향이, 어린이들이 장난감 레고를 짜 맞추듯이 개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문화를 선택하여 수용함으로써 문화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보다는 여러 가지 문화를 조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유목문화로도 불린다. 유목인들이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풀과 물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자유분방함이 오늘날의 시대적 트렌드와 부합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레고문화와 유목문화의 특성은 일견 무질서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시대에 적합하다. 집단적 문화보다 개개인의 창의성이나 독창성을 중시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는 인종과 종교 그리고 관습의 차이를 인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똘레랑스를 실천하게 한다. 좋음과 나쁨, 옳음과 그름의 문제가 정형화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그 다른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본질적으로 차이를 없애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다.이러한 문화적 경향은 세계화를 촉진시킬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에도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문화적 소통은 궁극적으로 정치‧경제 분야에서의 소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한류 붐이 일고 있는 것도 레고문화의 확산과 무관치 않다. 21세기를 평화와 화해의 시대, 나아가서 박애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여 한다. 이는 20세기가 남긴 역사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글 싣는 순서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0. 동북아시아에 대한 이해- 동북아시아의 개념- 동북아시아와 한국- 동북아시아와 연변0. 동북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 연대의 범위와 수준- 당면과제0. 관련국들의 입장- 한국의 입장- 북한의 입장- 일본의 입장- 중국의 입장
6    [1-3] 무엇을 생각하나 댓글:  조회:2756  추천:57  2008-08-31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3. 무엇을 생각하나 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역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관통한다. 어느 한 시점에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게도 유사한 형태로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실도 과거사로 치부하거나 나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되풀이될 수 있는 보편적 사건일 뿐이다. 이른바 역사의 ‘동시성’의 문제이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기, 우리 민족은 서구화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조상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또는 먹고살 길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연변은 우리 선조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구어낸 땅이다. 조선족 동포들은 그들의 피를 이어받아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질곡의 세월을 버텨온 인간승리의 장본인들이다.그러나 그들이 견뎌야 했던 혹독한 세월이 쌓아놓은 삶의 무게는 여전히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식민시대에는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爲國)’이라는 붉은 구호 아래 의용군의 이름으로 북한을 도와 남한과 싸워야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 시기에는 소수민족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으며 눈부신 발전을 꾀하며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개혁개방 시대에도 그들은 중국 동북지역에 위치한 변방의 한계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잘사는 모국이 있어 기뻐하며 그곳에서 부족한 것을 채워 지난 세월의 설움을 한방에 날려 보내려 하나 이것 역시 그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이 되고 있다. 모국이 있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피를 나눈 형제들이 있어도 따뜻하게 반겨주지 않으니 마음에 병이 도지고 있는 것이다.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과거에 겪었던 슬픈 역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업보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같은 동포인 우리들마저 여전히 그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책임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다. 연변과 조선족동포의 역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함께 우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처럼, 21세기의 희망찬 미래 또한 그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한다. 그 일은 모국에서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고단함을 삭여주고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역사의 동시성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아픔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새로운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재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앞에 항상 겸허해야 하며 남이 겪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그 연원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민족 모두의 문제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혹은 살길을 찾아 불가피하게 선택한 결과였기에 우리민족 모두가 함께 극복해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오늘 우리가 그곳에 사는 그들을 외면하고, 우리 다음세대에서 다시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옥토를 일구어 낼 수 있을까. 그들이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참담한 세월을 당당하게 버텨 낼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희망이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며 가치 없는 일은 그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일본 동경대학의 강상중 교수는 탈냉전적 상황과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현상 속에서 세계는 필연적으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를 겪게 되고 이는 다시 지정학적 혼란을 거쳐 재영역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강상중‧이경덕, 2002) 즉 경제적‧이데올로기적 탈영역화와 국가 간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공간의 세 가지 요소인 주권국가, 영토적 통합, 공동체적 동일성에서 안정성이 흔들리게 됨으로써 ‘지정학적 혼란’이 야기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재영역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강교수는 또 재영역화 과정은 탈영역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한다. 탈영역화는 분열된 구질서의 신조나 관습, 실천이나 이야기의 단편을 활용하여 질서의 재영역화를 위한 조건을 생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면서 이른바 재영역화라는 형태로 새로운 관계맺기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재영역화는 구질서에서 경험한 다양한 조건들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강상중교수의 주장을 빌리면 연변은 현재 탈영역화의 도정에 있다. 냉전체제하에서 철저하게 사회주의진영 내의 중국 영역에 갇혀 있었던 연변이 탈냉전에 따른 한중수교 등 이 지역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짐에 따라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족동포들도 다시 민족적 감정을 되살려 모국에 있는 친지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넘나들고 있다.연변의 이러한 탈영역화는 연변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 한국과 연변,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 간에 특별한 관계를 상상하는 성급한 기대마저 낳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탈영역화가 탈 중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연변에서의 탈영역화가 경제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변에서의 변화를 지나치게 한국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연변의 탈 중국화가 반드시 우리 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재영역화 과정에서 핵심적 사안은 조선족이 어떤 정체성을 갖느냐가 될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국민으로서의 현실적‧정치적 정체성을 선호할 것인가 아니면 같은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에 더 많은 의미를 둘 것인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과 조선족사회 간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판단할 때 상황은 결코 한국에게 유리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탈영역화에 이어 재영역화를 추구하며 관계를 넓혀 갈 때 우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한국과의 관계는 물론 동북아시아공동체를 형성하는데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조선족사회가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설 수 있도록 재영역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야 한다. 21세기의 트렌드를 감안할 때 재영역화가 이루어질 경우 냉전시대와 같이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결과가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 이다. 그러한 바램은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의 감정적 교류가 원활히 이루어질 때만 유효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가 보다 보편적 질서를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북아시아공동체라는 새로운 질서 형성에 순기능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트렌드는 소통의 시대를 형성하는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은 치열한 기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변과 조선족이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느 쪽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과 한국이 모두 조선족에 대해 한가지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이 연변과 조선족을 공동의 이익을 위한 연결고리로 인식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즉, 한국과 중국이 이 문제를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라 넌 제로섬(non zero-sum)게임의 차원에서 동북아시아지역의 공존공영을 위한 상생의 무대 및 행위자로 인식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변지역의 재영역화는 그러한 과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민족주의와 세계화는 병존할 수 없는가.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이 논리들이 오늘날 동북아시아를 짓누르고 있다. 탈냉전적 상황에서 각국은 한편으로는 21세기의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치를 드높이고 있다. 탈냉전체제하에서 소통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그러나 양자가 꼭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를 확장한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불이사상(不二思想)도 하나의 대안이다. 불이사상이란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또 이것과 저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즉 세상만사 모든 것이 어느 하나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중용의 도(道)이다. 이에 따르면 민족주의와 세계화가 결코 상반된 둘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상충되어 보이는 논리들도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병존이 가능하다. 따라서 민족문제를 고민하면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말하는 것의 부조화를 불이사상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민족주의자이며 동시에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동포주의)의 입장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불이사상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민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인류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며 21세기 역사가 그러한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기에 세계동포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동북아시아 공존공영의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할 과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족문제로서 연변과 조선족동포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의 한 방편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역 간 연대의 형태로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또한 여기서 민족문제를 말하는 것은 지난 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온전히 털어냄으로써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성숙된 조건을 만들기 위함이다. 우리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참담한 20세기를 살아왔다. 그리고 세계적인 탈냉전적 화해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반목과 갈등의 세월을 살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남북한 간의 갈등은 남남갈등으로 이어지고 외국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까지도 편 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다. 20세기 우리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슬픈 역사가 아직까지 우리민족을 억누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민족 내부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단순히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과제이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가고 나아가 세계동포주의를 앞장서 실천하기 위해 당장은 우리민족 모두 민족주의자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나가고 세계동포주의를 실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당장은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비치지만 이는 더 큰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 해결을 위해 민족적 차원의 주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대상황에 배치하는 것일까. 최근 한국사회에서 민족문화적 현상을 민족주의로 표현하며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볼 때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가 표출된 적이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일부 논자들은 한국민족주의의 태동을 동학혁명에서 찾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할 때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 사회내부에서 일어난 변혁운동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판단은 엇갈릴 수 있다. 또 작금에 우리사회에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성향을 지적하며 이를 폐쇄적 민족주의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민족주의로 평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는 민족주의라기 보다는 단일민족의 오랜 전통을 강조해온 관성에 따른, 이른바 ‘우리의식’을 강조하거나 민족우월의식을 표현하려는 문화적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폐쇄적 민족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우리 민족은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다른 민족은 경험하지도 못한 복잡하고도 어려운 민족문제로 끙끙거리며 지난 세기를 달려왔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민족 스스로 당면한 민족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민족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타민족을 배척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의 상흔으로부터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끌어안고 이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려는 차원에서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여야 한다. 우리민족의 문제를 다른 민족이 해결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민족주의를 시대상황에 적합지 않은,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현실적으로 동북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족주의 이념을 사회발전의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민족만이 민족주의를 터부시해서도 곤란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배타적 차원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를 문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와 세계화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할 수 있는, 나아가서 서로 상통하여야 하는 가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민족주의를 외면할 수 없고 또 인류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면 양자관계를 배타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화합할 수 있는 논리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다. 조화와 원융의 세계를 추구하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민족문제는 영토문제와 함께 근대 국민국가 간에 이루어진 갈등의 핵심 요소이다. 국제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기본적으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중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들어 각 국가들이 패권을 추구하며 전쟁을 불사했던 것도 민족 또는 국민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생각이 가져온 결과다. 오늘날 중국의 새로운 역사해석이나 동북아시아국가들 간의 역사갈등 및 영토갈등 역시 이러한 20세기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이 이와 같은 20세기적 사고를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주목하는 것도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심 고리로서 이들이 지닌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지역으로서 연변지역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중국과 한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조선족동포들이야말로 지정학적 및 지문화적 차원에서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을 위한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한국과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공존공영의 미래를 기대한다면 연변지역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미래 공간으로 만들고 조선족동포들을 그 공간의 주역으로 삼아야 한다.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미래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조선족동포들이 우리와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조선족동포들은 중국국민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얘기하는 것은 결코 민족주의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글 싣는 순서『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1. 무엇을 왜 쓰는가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0. 연변에 대한 연민0.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3. 무엇을 생각하나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 공존공영
5    [1-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 댓글:  조회:3014  추천:94  2008-08-07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생각할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한민족과의 역사적 인연에서 비롯된 연변에 대한 그리움과 누구보다도 힘든 세월을 살아온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연민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올바로 평가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전자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개인적 감상이라고 해도 좋다. 연변지역이 점점 동포사회로부터 외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많은 조선족동포들이 현실의 벽에 갇혀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대한 연민이다. 그러나 후자는 차원이 좀 다르다.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와 함께 다가오고 있는 동북아시아시대에 대비해야 하며 그런 시대가 도래 할 때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는 크게 빛을 발할 것이라는 나름의 역사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은 20세기 우리 역사가 남긴 상흔을 아직도 털어버리지 못한 민족적 아픔을 되새기며 새로운 시대를 맞아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이다.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생활은 훨씬 편리해졌지만 마음은 그에 비례하여 더욱 각박해 지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지는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도 줄어들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이런 경향을 염려하며 21세기의 성패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세상사에 얼마나 많이 자리잡게 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려는 여유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심한다면 세상은 이기적이고 삭막한 일들로 넘쳐나 살맛나지 않는 쓸쓸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인간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 모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런 일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연변과 조선족도 그런 대상의 하나이다. 특히 연변과 조선족 문제는 한민족의 미래 운명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연변에 대한 연민21세기에 즈음해 인류는 냉전체제라는 20세기의 암울한 유산을 털어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21세기를 살되 여전히 20세기 역사가 만든 굴레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한반도는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의 현장으로, 세계적인 탈냉전적 현상과는 무관하게 냉전과 탈냉전 이라는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는 갈등의 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희망의 시대에 유독 우리 민족만이 암울한 20세기 역사의 유산을 온전히 정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사회주의체제를 견지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이 함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에도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에 덧씌워진 20세기의 굴레는 남북한 간의 이념적 갈등이 전부는 아니다.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디아스포라 문제 역시 20세기 우리 역사가 남긴 아픈 상흔 중의 하나이다. 세계화시대에 즈음해 디아스포라는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큰 자산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 정부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재외동포들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시혜적인 정책만으로 디아스포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부의 정책은 물론 모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그들을 같은 동포로서 동등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연변 조선족동포들에 대해서는 더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연변에 대한 우월감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욕하면서 배운다던가. 서양 사람들이 동양 또는 동양 사람들을 깔보면 속상하고 그래서 그들의 오만함을 질타하곤 했었다. 서양의 동양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같은 동포들에게 조차 우쭐하여 우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을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리고 있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지금 우리사회가 비아냥거리는 조선족동포들의 일상적 모습은 우리의 어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일부의 사안은 2, 30년의 시차가 있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들이 살아가던 모습 그대로이다. 경제적으로 약자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우리에게서 홀대받을 이유는 없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으tm대는 것은 전형적인 소인배의 행태다. 우리가 피를 나누고 역사를 같이한 동포라면 진정으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가진 것을 나누어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한다. 또한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헤아리며 그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연변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선조들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연변과 조선족 동포들을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된다. 조선족 동포들은 13억 중국국민들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오롯이 지켜온 것만으로도 모국에 대해 그리고 모국에서 잘 살고 있는 동포들에 대해 당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천덕꾸러기인양 취급되는 것은 분명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21세기의 화두는 탈냉전과 세계화 그리고 정보화이다. 탈냉전은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갈등의 시대가 종식되고 공존공영을 위한 상생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세계화는 탈냉전에 의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인류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의 질서를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정보화는 인터넷 세상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신 및 IT기술의 급속한 발달을 토대로 4차원의 세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기술적 기반이다. 21세기의 이러한 특징은 인류가 바야흐로 20세기를 지배했던 극단적 단절의 시대를 넘어 다시금 유무상통하는 소통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20세기의 불행한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말미암아 21세기의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진영의 민주화 도미노현상에 따라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게 되면서 국제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국제질서를 결정짓는 패러다임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국가 간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국제사회가 새로운 소통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4차원의 공간에서 인간의 사고를 무한하게 확대해 나가는 인터넷세상이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세상에서 인간의 사고는 어떤 장벽도 없고 어떤 단절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 자유로움은 기존의 도식적이고 정형화된 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으로써 현실의 세계에서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또 탈냉전이후 세계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각 국가는 이러한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지역 내 국가들 간에 연대를 꾀하고 있다. 탈냉전시대에 유일한 냉전의 고도로 남아있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지역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아직 문제제기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 권역을 경제공동체 혹은 안보공동체로, 나아가서 동북아시아공동체로 만들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 국가들이 연대를 통해 경제 및 안보에 대한 상호 이익을 도모하려는 지역국가 형성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트렌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점에서 동북아시아에서의 움직임 역시 향후 북핵문제의 해결 등 지역정세가 변할 경우 급진전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공동체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국제질서 변화속도를 감안할 때 그 시기는 의외로 빨라질 수도 있다. 독일통일이 이루어지기 불과 몇 달 전까지 어떤 정치학자도 그 역사적 사건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동북아시아의 개념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국가적 차원에서는 남북한과 중국 일본 몽골 러시아 등을, 지리적 측면에서는 동남아시아에 대한 대척 개념으로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지역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을 토대로 할 때 동북아시아의 핵심지역은 한반도와 연변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3성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이 될 것이다. 연변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위쪽 중국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변방지역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연변은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중심이란 모든 것의 출발점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의 종착점이다. 당연히 동북아시아시대에는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가 새롭게 부각될 것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연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은 그 지문화적 가치로 인해 동북아시아공동체 형성과정 그리고 형성이후에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안타깝게도 동북아시아 질서의 전면적 재편을 가져올 역사적 전환을 앞둔 시기에 우리는 그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시아공동체가 이루어질 경우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시아공동체가 현실화될 것을 상상하면, 연변지역을 터전으로 하여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크나큰 행운이다. 19세기 말 이후 우리민족이 감내해야 했던 질곡의 역사는 어쩌면 21세기 새로운 소통의 시대가 도래 할 경우를 대비해 절대자가 예비해 놓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생각하기에 따라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따라서 지금부터라도 그러한 시대가 도래할 것에 대비해 우리의 관심과 애정을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게 쏟아야 한다. 그것은 작게는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며 크게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장정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변의 미래는 한반도와 우리민족은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미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은 한민족과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글 싣는 순서『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1. 무엇을 왜 쓰는가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0. 연변에 대한 연민0.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3. 무엇을 생각하나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 공존공영
4    [1-1] 무엇을 왜 쓰는가 댓글:  조회:2900  추천:100  2008-07-27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 중에서 1. 무엇을 왜 쓰는가 역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동북아시아 질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예상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민족은 어떻게 20세기에 겪었던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새로운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물론 이 같은 생각의 중심에는 연변과 조선족동포가 자리 잡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에서의 급격한 정세변화는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20세기에 겪었던 슬픈 역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서세동점의 변혁의 시기, 우리민족은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또 애써 외면했다. 당연히 그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결국 10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우리민족의 질곡의 역사는 역사적 트렌드를 감지하지 못한 우둔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는 준비된 자의 편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만들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와 함께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될 새로운 질서를 헤아리는 것은 당면한 과제의 하나이다. 변혁의 시대에 우리민족이 어떻게 지난 세기의 슬픈 역사를 치유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에게 지워진 사명이다.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 및 동북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직시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주목하려 한다. 첫째, 미래의 세상은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점점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다. 냉전시대였던 20세기 국제사회는 국가 간 단절을 기정사실화하는 가운데 세력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다. 국가차원의 철의 장막이나 죽의 장막은 물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간 대립으로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21세기의 국제사회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가 종말을 고함으로써 세계화를 구가하게 되었으며 국가 간 관계에서도 점점 소통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다. 바야흐로 국경을 통해 국가를 구획하던 단절의 시대를 벗어나 소통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소통의 시대에 즈음해 동북아시아국가들 간 공존공영을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을 향한 움직임이 구체화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역내 국가 간 갈등으로 인해 중동지역과 함께 20세기 가장 불안정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여러 가지 갈등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하지만 탈냉전적 국제질서 하에서 동북아시아지역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동북아시아정세의 가장 큰 불안정 요인이었던 북한핵문제가 해결의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하면서 주변 국가들이 지역공동체 형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에 따른 지역 간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역내 국가 간 협력문제가 동북아시아에서도 적극 모색되고 있다.  셋째, 연변과 조선족은 지정학적 및 지경학적 그리고 지문화적 측면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추동되고 있는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과정은 물론 건설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연변과 조선족은 동북아시아 역내에서 특수한 위치에 있다. 연변은 중국의 변방이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중심지역이다. 이에 따라 연변은 동북아시아공동체가 구현되는 과정에서 지정학적으로 주변 국가들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지경학적 측면에서 역내 국가 간 경제교류의 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연변은 또 한민족과 중국의 한족을 아우를 수 있는 조선족의 주된 생활터전이다. 따라서 조선족동포들은 지문화적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의 협력을 촉진할 중재자이다. 중국국민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법과 제도를 따르고 있지만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정서적으로는 한국과 가깝기 때문이다. 연변과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변경문화적 요소는 21세기 동북아시아국가들이 소통의 시대를 열어갈 때 새롭게 빛을 발할 것이다.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 질서의 예상되는 변화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는 20세기 우리민족이 겪었던 민족적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들을 통해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문제를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 민족이 지난 질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로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아시아 질서가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감정적으로 멀어져 가고 있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온전히 치유하고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해 우리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시아 국가 간 공존공영을 적극 모색하여야 한다. 민족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동북아시아시대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해 준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는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제 두 사회 간의 감정의 골을 메우고 동포애에 기반을 둔 공생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적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관심은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동북아시아공동체 건설을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연변과 조선족은 이중적 관찰의 대상이다. 그리움의 대상인 동시에 계륵과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편한 존재라는 것이다.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의가 없다. 문제는 왜 계륵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가 하는 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양자 간의 인식의 차이/ 서로에 대한 기대심리의 불일치/ 상대방에 대한 실망감/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리움이 식은 것(사랑의 감정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시든다) 등등.... 중요한 것은 정보화시대에 변화의 내용과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획기적이고 빠르기 때문에 눈앞의 문제에 집착할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보다 멀리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동북아시아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의 이해관계에 연연해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계륵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당면한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서라도 그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만 한다. 따라서 동북아시아시대를 내다보며 지정학적 및 지문화적 측면에서 연변과 조선족사회의 중요성을 살펴보고 나아가서 한국사회와 조선족사회가 멀어져가고 있는 이유를 조선족사회의 현실을 통해 진단해 보고자 한다.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은 우리가 연변 및 조선족사회와 함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준거가 될 것이다. 또한 이 같은 현실진단을 바탕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평가할 것이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를 확장할 경우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이 주로 살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니까 연변은 중국의 조선족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지역을 포괄한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연변을 하나의 독립되고 단절된 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는 주변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축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동북아시아공동체가 형성될 때 연변이 한반도와 중국은 물론 주변 국가들을 잇는 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도 맞닿아 있다. 연변과 조선족을 분리할 수 없음은 바로 연변이 조선족동포들의 소통의 공간일 뿐 아니라 조선족동포들의 미래를 담보하는 중심축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민족 모두를 대상으로 쓰여 졌다.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가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서 연변과 조선족사회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생적 관계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한국사회가 똘레랑스의 실천자가 되어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을 포용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 싣는 순서『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제1장 프롤로그 1. 무엇을 왜 쓰는가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0. 연변에 대한 연민0.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3. 무엇을 생각하나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 공존공영
3    차 례 댓글:  조회:2563  추천:95  2008-07-26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차   례 글을 시작하며 제1장 프롤로그 1. 무엇을 왜 쓰는가2. 왜 연변과 조선족인가0. 연변에 대한 연민0. 연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3. 무엇을 생각하나0. 민족문제와 역사의 동시성0. 연변의 탈영역화에 이은 재영역화0.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시아 공존공영 제2장 새로운 국제질서와 동북아시아 1. 21세기 국제정치의 새로운 트렌드0. 현실주의에서 자유주의로0. 단절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0. 문명의 공존을 향하여0. 문화적 다양성을 위하여2. 동북아시아공동체에 대한 비전0. 동북아시아에 대한 이해- 동북아시아의 개념- 동북아시아와 한국- 동북아시아와 연변0. 동북아시아공동체는 가능한가- 상상력과 창의적 아이디어- 연대의 범위와 수준- 당면과제0. 관련국들의 입장- 한국의 입장- 북한의 입장- 일본의 입장- 중국의 입장 제3장 연변‧조선족의 역사와 전략적 가치 1.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서 연변0. 연변지역에 대한 이해- 연변의 유래와 지역적 범위- 자연지리적 환경- 사회문화적 환경0. 동북아시아역사를 통해 본 연변- 주변국들의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 청의 봉금정책과 봉금지대에 대한 해석- 백두산정계비의 진실- 일본의 개입과 간도협약- 북․중 간 국경조약0. 연변의 지정학적 가치- 역사 속에서 보는 지정학적 가치- 한민족 인적교류의 무대- 북한을 향하는 새로운 통로- 변경지대로서 월경협력의 장2. 변경문화의 체현자로서 조선족0. 한민족의 연변이주- 조선족 명칭의 유래 및 현재적 의미- 해방 후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 한민족 연변이주에 대한 인식0. 조선족의 위상과 역할- 북한변화의 촉매자- 남북관계의 매개자- 한중협력의 중재자- 동북아시아 미래 안내자 제4장 연변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실진단 1. 정치적 측면0. 중국의 정치민주화와 연변0. 조선족동포의 정치의식0. 조선족자치주의 미래2. 경제적 측면0. 연변경제 현실- 개혁개방과 연변- 산업별 동향- 연변경제와 한국- 연변경제의 미래0. 주민생활과 소비- 주민생활 수준- 조선족의 소비행태0. 연변경제의 문제점- 지역 및 계층 간 부의 불균형- 관광 및 소비향락 산업 편향성- 한국 의존 심화3. 사회문화적 측면0. 인구 문제0. 사회적 일탈 문제0. 민족교육 문제0. 정체성 문제0. 가치관 문제 제5장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시각 1. 한국의 재외동포정책과 조선족정책0. 재외동포정책 추진과정0. 재외동포정책의 내용과 특징0. 조선족정책과 문제점2. 한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인식0. 조선족에 대한 이해와 편견0. 문화적 우월성과 한국중심주의0. 한국사회를 보는 조선족의 시각0. 조선족사회의 대응- 연변으로부터의 부메랑- 탈 한국화에서 친 중국화로3. 조선족동포를 위한 변론0. 왜 멀어져 가나0. 무엇이 문제인가0. 왜 돈을 쫒나0. 왜 중국국민인가0. 왜 위장결혼하나0.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나 제6장 공존을 위한 미래전략 1.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0. 상상하고 또 상상하자- 20년 후의 세상- 연변의 미래 상상하기- 오마이 겐이치 상상력0. 인연의 끈을 이어가자- 비익조와 연리지- 연기론에서 본 인연의 의미0. 중국을 미래의 파트너로 삼자- 중국의 부상과 한중관계- 새로운 대중국전략 모색2. 전략적 접근0. 전략적 접근의 필요성0. 똘레랑스와 불이사상: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조선족 포용의 논리로서 똘레랑스- 중국 설득의 논리로서 불이사상0. 민족문화의 원형 복원: 조선족 끌어안기- 한민족 민족문제의 이중성- 민족문화적 접근의 필요성0. 미래공간 만들기: 중국과의 파트너십- 미래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연변활용론과 중국의 기대이익- 월경협력을 통한 공존 모색3. 연변의 미래를 위한 현실적 대안0. 건강한 조선족사회 만들기0. 부강한 연변 만들기0. 주요 성공모델들  에필로그 글을 마치며
2    글을 시작하며 댓글:  조회:2714  추천:98  2008-07-26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글을 시작하며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꺼이 도울게. 무엇이 필요하니?”그러나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조차 필요할 때 제대로 돕지 못합니다.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며 때로는 그가 원치도 않는 도움을 줍니다.우리는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그렇다고 해도 우린 사랑할 수 있습니다.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 중에서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아립니다. 산천은 우리의 그것과 다름없어 친근하고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처럼 다정한데도 왜 그럴까요. 그것은 연변과 조선족동포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탓인 듯합니다. 연변과 조선족동포를 나와 일체화 시키면서 내 마음속에 가둬놓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 그들과의 인연에 갇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왜 이렇듯 연변과 조선족동포들과의 인연에 갇혀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연변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연민에 사무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일까요. 나의 이런 행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낱 짝사랑에 불과한 것일까요. 연변은 역사의 땅입니다. 그곳은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쳐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사의 우여곡절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고중세사는 물론 근현대사에 이르기 까지 우리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연변에 대한 그리움은 연변의 역사성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연변은 지독히 고독한 땅입니다. 한 때는 주인 없는 땅으로 내팽겨진 채 방치됐다가도 어느 때는 서로 주인임을 주장하는 주변 국가들의 틈새에서 아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우리와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오랜 인연을 맺고 있으면서도 시기마다 역사적 단절을 경험했으며 지금도 그로 인한 다툼의 와중에서 속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와 맞닿아 있지만 남북으로 두 동강 난 반도의 어느 쪽과도 이어지지 못한 채 외롭게 버티고 서 있습니다. 조선족은 슬픈 족속입니다. 그들은 지난 세월 우리 근현대사에 각인된 어두운 그림자를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식민시대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냉전시대에는 이념의 한계에 갇혀 북한만을 조국으로 생각하였다가 탈냉전시대인 오늘에는 돈줄을 쫒아 남한을 향해 목을 길게 늘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쫒아 이쪽저쪽을 살피면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고독한 탓일까요. 연변은 조선족동포들의 삶의 터전이면서도 그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으며, 조선족동포들 또한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만큼 마음을 잡지 못해 점점 중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시골마을의 적막함은 연길시내의 화려함에 가려 있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힘 있고 여유로운 사람들 등 뒤에서 더욱 초라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족동포들에게 있어서 연변은 이제 백수십년동안 의지하고 살아온 삶의 터전이기 보다 그냥 어쩔 수 없어 움켜쥐고 있는 낡은 동아줄과도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연길시내의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는 한숨과 시름이 겹겹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연변과 조선족사회에는 세가지가 없었습니다. 발전을 위한 축적된 자본과 자원이 없고, 미래를 꿈꾸며 그것을 디자인할 사람이 없으며, 그래서 미래를 열어갈 비전도 없었습니다.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자리잡고 있는 연변은 개혁개방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인적 물적 자원이 빈약하여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조선족 동포 지식인들은 21세기의 도도한 역사가 빚어낼 변화의 물결에 맞서 연변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데 큰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스스로의 미래를 밝힐 비전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즐기며 사느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미래는 없고 단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만 있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물결은 조선족동포들에게도 고향의 푸근함에만 안주하게 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실리를 쫒아 해변을 따라 늘어선 개방도시로, 나아가서는 한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뛰쳐나가도록 등이 떠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동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기는커녕 소중히 간직해온 삶의 기본적인 가치마저 잃어버리고 체념의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국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아니라 한낱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킬 시장에 불과한 형이하학적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점점 모국에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연변을 그렇게 방치해도 될까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가 어떻다는 등 고대 및 중세의 역사를 끌어들여 새삼 역사논쟁에 불을 붙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먼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연변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 온 삶의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변은 193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동포들의 마음의 고향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 절반에 가까운 동포들의 주된 삶의 터전이니까요.더욱 중요한 것은, 연변이 남북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과 북을 함께 보듬어 안는 제3의 지대로 역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냉전의 세계사적 쾌거에도 불구하?우리민족은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이라는 슬픈 역사를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훈장처럼 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려야 하나요. 이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우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야 합니다. 연변과 조선족동포는 우리가 남북분단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취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이며 매개자입니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그런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통일이후에는 남북한 통합의 가교로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남북분단의 극복은 동북아시아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동북아시아시대는 궁극적으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국가와 민족이 너와 나를 가르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소통의 시대를 지향합니다. 이른바 동북아시아공동체가 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연변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문화적 측면에서 이 지역의 미래를 위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한국과 중국을 두루 이해할 수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변과 조선족은 앞으로 도래할 동북아시아시대에, 동북아시아공동체가 추구될 시대에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발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변은 역사의 땅일 뿐 아니라 미래의 땅입니다. 연변은 단순히 현재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기회의 땅입니다. 당장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저개발의 낙후된 모습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지만 오히려 온갖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청정지역으로서 훗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연변은 또한 근현대 동북아시아 갈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갈등의 역사를 치유할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 약속의 땅이기도 합니다. 조선족동포들은 역사의 땅이자 미래의 땅인 연변의 가치를 현재화(顯在化)할 수 있는 중추적인 행위자들입니다. 희망은 고통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연변과 조선족동포가 겪고 있는 고통은 희망을 낳기 위한 산통일 런지도 모릅니다. 연변과 조선족사회가 산모라면 우리는 산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잉태하고 있는 희망을 순산하기 위해서는 산모인 그들보다도 산파인 우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연변은, 그리고 조선족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바램이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일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순산하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만 합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결코 엉뚱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연변의 산천도, 조선족 동포들의 때로는 냉소적이며 허풍스런 모습도 모두 사랑하려 합니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도 체험 속에서 나온 나름의 생존방식이기에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스스로를 연변과 조선족동포들과의 인연에 가둬두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가치는 단순히 현재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투영되어 있는 슬픈 역사와 함께 우리가 그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희망찬 미래를 가늠하며 재평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려 합니다.                                                                     2007년 12월                                                                      곽   승   지*주: [...]부분은 편자가 삭제한 것입니다.-편집자
1    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출간에 즈음하여 댓글:  조회:2644  추천:72  2008-07-26
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 출간에 즈음하여 곽승지 한국 연합뉴스 기자졸저 <동북아시아시대의 연변과 조선족>이 나왔습니다. 오랜 동안 머릿속에 그리며 고민해 온 것을 글로 엮은 것이지만 집필을 마무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꼬박 1년 동안 공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앞에 내놓으려니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 두려움을 견디며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은 연변과 조선족에 대한 저의 어줍지 않은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과 교감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겁니다. 한국사회는 감정적으로는 연변과 조선족동포들에 깊은 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책임을 논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조선족동포들을 탓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 누구를 탓하기보다 그들을 포용하며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역사적 트렌드와 동북아시아 질서의 급격한 변화 양상을 볼 때 잘잘못을 따질 시간적 여유도 없습니다. 또한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한국사회의 몫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삼스레 책 출간에 대해 알리는 것은 두 가지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인들에게 제가 요즘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에 대해 알리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그동안 직업으로서 북한 문제를 다루어오는 가운데 북한연구자로서 연구 활동도 겸해 왔습니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관심의 지평을 민족문제 전반으로 확대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에 출간하는 책은 그 첫 결실인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선족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문제에 대해 한국사회가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미래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에 기인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20세기에 우리민족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온전히 치유하고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정치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짬을 내어 졸저를 읽어보시고 많은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아울러 저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있다면 주변에도 일독을 권해 더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동포들과 함께 한민족의 미래를 열어 가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요. 앞으로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지인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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