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을 절감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하긴 인생 오십 지천명이라고 했으니 바야흐로 천기를 알 법도 하겠다.
사십을 불혹의 나이요, 경험 사십대라고도 하였으니깐 그만큼 인생공부도 착실히 한 것이다. 이쯤에 와서는 반백이요, 흰서리요 하는 수식어들이 별로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 그냥 문학공부를 할 때는 그것이 유식함을 나타내서 좋았던 것 같은데 인제 그것이 자기 인생을 확인하는 실용어가 되었음에 세월의 무상함을 체감하였기 때문이리라. 바다를 즐겁게 바라보는 사치한 소비의 여행자와 하루의 무사평안을 기원하면서 생존을 위해 공포의 출항을 하는 바다사람의 마음의 차이랄까.
언제부터였던가 일기를 쓰던 걸 절필하였다. 그리고 이미 쓴 일기들을 몽땅 태워버렸다. 그 속에는 소학교, 중학교시절에 썼던 학습 심득필기도 여러 권 들어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원초적인 생명원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유와 박애를 인간성의 원색적인 질료로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의 추한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념의 노봇이었고 투쟁의 무기였다. 일기는 달력처럼 고스란히 그런 흔적을 남겨두고 쓰라린 추억에 가슴만 아프게 하였다. 그래서 처방을 뗀 것이 망각의 미학이다. 지나간 일, 지나간 인생, 지나간 세월을 영영 망각의 뒤안길에 던져버리려는 것이다. 한 장 한 장 찢어버리는 일력처럼.
그러나 사람의 몸에는 영혼과 함께 하는 영원한 달력이 있다. 생각하는 인간은 오늘을 살고 내일을 동경하면서 지난 인생의 경험이든 교훈이든 때때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흔히는 무의식적으로 열리는 추억의 쪽대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사유하는 특수한 동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인 것 같다. 자연은 삶을 연습할 수 없는 인간에게 한번쯤 뒤돌아보는 여유를 베풀어준 것이다. 판단의 한계로 늘 실수를 하게 되는 인간은 그런 실수를 기억할 수 있어 ‘동어반복’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다.
인간은 즐거웠던 괴로웠던 지나온 인생 여로에 흘린 발자국과 추억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는 없다.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에서 오늘 현재는 영원히 중간 시점이다. 오늘의 선택과 미래의 그림은 그 발자국과 추억의 끝에서 시작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지나온 길은 선형적이지만 뒤돌아보면 거기에도 무수한 갈림길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가야할 길은 언제나 갈림길이다. 과거에 무수한 갈림길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길을 선택했던 경험은 오늘 내일의 길을 선택하는 밑그림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기록된 달력보다 기억된 달력은 영혼에 더 가까이 하고 있고 결국 영혼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만큼 기억의 달력은 영혼이란 여과기를 달고 있고 영혼의 정화에 의하여 기억을 걸러냄으로써 내용이 선택될 수밖에 없다. 더는 기억되지 않는 과거, 더는 추억으로 떠오르지 않는 사건은 내 인생에 무의미한 것이거나 승화된 영혼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간혹 부끄럽던 일, 힘들었던 일, 괴로웠던 일, 안타까웠던 일, 괘씸했던 일, 격분했던 일들이 기억의 달력에 남아있더라도 이미 자각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오늘과 내일을 바르게 선택하도록 영혼의 거울이 비춰주는 계시임에 다름 아니다.
기억의 달력에 영혼의 선택을 받은 내용이 풍성할수록 오늘과 내일의 인생도 더 충실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기억의 달력은 영혼에 여과되는 마음의 달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는 달리기에 앞서고 늙은이는 경험에 앞선다고 하지 않을까.
늙은이 타령까지 부르고 보니 아직까지 늦깎이 인생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좀은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가끔씩 학생증을 손에 들고 보노라면 대학의 젊은 시절이 눈에 삼삼하여 즐겁기만 하다.
서박의 일력 달력에 대한 글을 보고 생각을 몇 자 적다가 문뜩 작가(서박)의 일화 하나가 떠올라 아래에 이 글하고 크게 관련 없이 뱀 발처럼 그려 넣는다. 그래도 서박의 순진하고 천진하고 깜찍했던 대입 초의 생활모습이라 본인의 기억달력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으면 이제 즐거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직 손바닥만한 연변 땅도 두루 다 밟아보지 못한 촌놈이 갑자기 10억 인민의 마음의 ‘심장’ 베이징에 가게 되니 그냥 격동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였다. 억만이 동경하는 수도에서 공부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마냥 부풀었다. 그러면서도 대도시에 대한 촌놈의 격세지감도 그만큼 크고 강렬하였다. 당연히 이제 함께 생활하게 될 새로운 가족에 대한 호기심도 약간은 떨리는 방어심리를 동반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심리적인 과잉반응은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초기부터 물가의 모래탑처럼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너무나 순수하고 편안하고 꾸밈없는 동기들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천진하면서도 꾸밈없는 모습을 보인 동기가 북극에서 온 ‘꼬마맹장’ 서영빈이었다. ‘꼬마맹장’이라고 하는 건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의 전투적 형상을 떠올려 하는 말이 아니라 너무도 여리고 앳된 모습에 군복을 입고 있었던 영빈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꼼수의 포장이나 계산된 반응이 없이 서영빈이란 원형질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듯 했다. 그런데 그 꾸밈없음에 못지않게 천진함도 둘째가라면 첫째가 없을 정도였다.
첫 방학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새벽, 뭐 과음한 기억은 없는데 아무튼 배가 부담스러워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화장실 가려고 이층침대를 내리는데 얼핏 눈길에 영빈의 침대가 비어있었다. 나의 소란에 깨어난 춘식이하고 영빈이 어디 갔냐고 물으니깐 모르겠다고 한다. 그때 무엇인가 아래쪽에서 시선을 끌어당기는 ‘전극’이 있어 내려다보던 둘은 그만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때는 한창 젊은이들이라 이층침대를 오르내릴 때도 침대에 장치한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침대 옆의 턱을 뛰어넘어 책상에 내려서곤 하였다. 그러니깐 책상 위에 내려서는 순간 침대와 책상 사이는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쩜. 글쎄 영빈이가 이불 반은 깔고 반은 감아서 몸에 덮은 대로 침대와 책상 사이의 바닥에서 행복하게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입가에는 어머니 품속에서 시름없이 달콤히 자는 어린애 같은 웃음꽃을 피우면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후에 영빈이하고 물으니깐 그때 고향집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랬을 테지.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다를 바 없으니깐.
이것저것 잡동사니들마저 버릴 수 없는 달력 같은 일기를 폐기처분한 오늘에도 동기들에 대한 기억들은 마냥 인정과 우정과 사랑과 함께 추억의 쪽대문을 열고 삭막한 세계에 갈증을 타는 나의 마음을 적셔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