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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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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작후기]상처의 터전에 희망을 심어 -홍예화 댓글:  조회:223  추천:0  2019-07-18
 홍예화   상처의 터전에 희망을 심어   중편소설 는 창작과정이 다소 특이하다. 소설을 시작했던 시점은 십년전이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인생 새내기였다. 류학을 준비하면서 일년 가까이 외국인 쌍둥이 형제한테 과외를 했었다. 외동으로 자랐던 나한테 10세 쌍둥이형제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똑같게 생긴 두 아이의 닮은 듯 닮지 않은 행동들, 자신을 내세우려고 미묘하게 또는 치렬하게 투닥거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렵사리 쌍둥이의 정체성이란 화두를 꺼내들게 되였다. 나는 쌍둥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꼼꼼히 기록했고 그 기록이 멈출 무렵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의욕만 앞설 뿐이지 소설을 완성시킬 수 있는 년륜과 실력이 안되였다. 얼마 후 류학을 떠나면서 소설은 유야무야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난해 년말 나는 우연하게 컴퓨터에서 오래된 소설파일을 발견하였다. 소설의 형체를 갖추지 못한, 어수선한 초고상태였다. 먼지가 앉아도 켜켜이 앉았을 법한 오래된 문서에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니다.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싶어 몸부림치다가 이 소설을 잡았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 것이다. 이때의 나는 더이상 십년전의 어린 녀학생이 아니였다. 용감하고 겁없던 젊은이는 세월 속에 씻겨지고, 세상의 만만찮음에 겁을 먹기 시작한 중년이 남았다. 이제는 자신의 아이가 있을 법한 나이가 되여버렸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아이를 배 속에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20대초에 작성해놓은 쌍둥이형제의 임신부터 출산, 양육에 이르는 이야기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내가 이런 글을 썼다는 사실이 낯설었고 어색했고 이상했다. 그때의 나는 감수성이 풍부했던 모양이고 수많은 기록을 해놓은 것을 보면 부지런했던 모양이다. 나는 낯선 사람이 써놓은 글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과거의 내 글을 읽었다. 새롭게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행했던 작업은 초고의 주인공 ‘나’한테서 보여지던 10년전 내 모습을 털어내는 작업이였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가끔은 상큼하다가 가끔은 어두운 모습을 보이고, 가끔은 철없어 보일 정도로 유아하다가 가끔은 인생을 다 살아낸 늙은이처럼 매가리 없다. 그러한 복합성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있는 다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허위적이고, 사실은 10년이라는 템을 가지고 변화된 나의 모습이 본의 아니게 투영된 결과인 듯하다. 한편의 소설을 창작함에 있어 십년을 우습게 뛰여넘는 템이 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특이한 창작경험임에 틀림없다. 그 십년을 살아내면서 작가는 나이를 먹었고 바람직하다면 그 먹은 나이만큼 성장을 했을 것이다. 초고에서 내가 가장 지워버리고 싶었고 지우려고 애썼던 부분은 과거의 주인공 ‘나’의 생명에 대한 교만함이였다. 주인공은 자신이 임신한 것에 지나칠 정도로 거부반응을 보인다. 물론 주인공을 20대초중반의 나이로 설정했으니 성공에 대한 야망이 큰 그 나이의 녀성이라면 당연히 있을 수도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아이를 간절히 기다리는 처지여서 그랬을 것이다. 거슬리는 것들을 꼼꼼히 찾아내서 입맛에 맞게 고쳐 가면서 나는 이런 고민을 했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도저히 읽지도 써내지도 못한다면 제대로 된 작가라고 할 수 있을가. 프로작가는 자신 따위는 버리고 작품만을 살리는 것일가.) 작품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작품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주인공을 만들었다. 그래서 소설을 쓴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엄마’라고 생각한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이를 ‘한꺼번에 두명씩’이나 얻게 되면서 환희와 슬픔, 상처와 치유를 거듭하며 성장하는 주인공 엄마를, ‘아이에 대해서 생각조차 못해본 어린 엄마’가 상상만으로 초고를 작성하고, ‘아이를 잃은 나이 든 엄마’가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완성시켰다. 수많은 고민과 깊은 사고를 거듭해서 완성시킨 글이고, 좋은 의미를 많이 담으려고 노력했던 글이고 나한테 있어 이 작품은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준 따뜻한 작품이다.     
3    [중편소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홍예화 댓글:  조회:227  추천:0  2019-07-15
홍예화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1   일도네 유치원선생님이 전화를 할 무렵 나는 한창 고장 난 복사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돼먹은 건지 그놈의 기계는 허구헌 날 종이를 씹어삼키군 했다. 보조용 테이블우에 일감은 무더기로 쌓여가는데 기계는 돌아갈 념을 하지 않는다. 조바심에 욱-- 하고 짜증까지 치밀어 기계 틈에 끼인 종이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 서슬에 기어이 기계가 멈춰서고 말았다. 사용하는 시간보다 고장 나서 수리를 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긴 그놈의 중고품을 아예 18층 사무실 창 밖으로 확 내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절박한 순간에 일도네 담임선생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일도가 사고를 쳤으니 당장 유치원에 다녀가라는 호출이였다. “사고요? 어떤 사고 말입니까?” 나는 자지러지게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레 억누르면서 숨이 넘어가 듯 다그쳐물었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고란 말만 들어도 지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다리마저 남의 것처럼 후들거렸다. 선생님은 일도가 다른 아이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한껏 위축되였던 숨을 조금씩 뿜어냈다. 상대방 어린이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더 큰 사고가 아니여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허비고 허비우고 상처자리를 훈장처럼 새겨가면서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안도의 숨소리를 금세 눈치챈 것인지 전화선 너머에서 선생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쫓아왔다. “피해를 입은 어린이의 부모가 지금 단단히 화가 나 있어요. 지금 교무실에서 일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세요! 일도 아버님도 될 수 있으면 함께 오시고요.”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당장 내 멱살을 잡아채는 듯한 완력이 느껴졌다. 순간 횡격막이 접히는 듯한 당황스러움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동안 거친 숨만 뽑아냈다. 얼굴 전체로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 같은 뜨끈뜨끈함이 확 솟구쳐올랐다. 내 아이가 잘못을 했으니 부모인 내가 죄인이긴 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유치원 꼬마들의 싸움에 부모들까지 끼여들어서 판을 키우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전화를 끊고도 나는 한참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당장 유치원으로 달려갈 상황이 아니였다. 다음날 아침에 있을 회의까지는 무조건 완성하기로 한 설계도면인데 고장 난 복사기 때문에 시작부터 애를 먹고 있는 중이였다. 사실 프린팅이나 복사 따위의 시시껄렁한 일들은 내 담당이 아니다. ‘본 이태리’ 인테리어 작업실에 들어온지는 비록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손색없는 디자이너였다. 나는 주거인테리어 쪽을 맡아 일하고 있었는데, 비록 사무실 인테리어나 상업용 인테리어보다는 수입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나는 내 일을 사랑했고 무척이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야망은 없고 욕심만 앞서는 사무실 실장이 인건비를 절약하려고 항상 적은 스탭으로 무리하게 많은 일을 시키는 바람에 디자이너들도 어쩔수없이 사무실의 잡다한 뒤치닥거리를 해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짙은 회의감에 빠지군 한다. 더욱이 오늘처럼 최종 도면 교부일이 닥쳐와도 자기 일에 매진할 수가 없을 때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일도가 사고를 쳐서 선생님 호출까지 있다. 왜 되는 일이 없는지… 심란하고 초조했다. 차라리 회사밖에 나가 돈 주고 복사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서 무더기 자료를 상자에 처넣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경란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학 땐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였었는데 나란히 한 도시에서 살게 되다 보니 어쩌구 저쩌구 가끔씩 련락도 했고 알게 모르게 서로 의지도 많이 하는 처지다. “어쩐 일이니? 이 시간에?” 내 목소리가 다소 퉁명스러웠던 모양이다. 경란이가 단통 부르튼 소리를 했다. “너 왜 반갑지 않은 목소리다?” 친구라도 이럴 때는 귀찮다. 평소라면 그럭저럭 경란의 비위를 맞추면서 인내심 있게 들어주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녀의 수다를 들어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머리 속에는 설계도면에 대한 걱정과 유치원에서 사고를 쳤다는 일도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있다. 경란이는 오늘도 길게 수다를 떨 잡도리였다. “나, 너무 힘들어서 죽겠어. 육아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 완전 돌아버리겠다.” 나는 수화기를 귀와 어깨사이에 끼우고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한편으로는 설계자료를 정리하였다. “어떡하든 좀 재워볼려고 억지로 옆에 끼고 누우면 제가 도리여 엄마가 잠들기만을 기다린다. 하루는 내가 자장가를 불러주다가 그만 깜빡 잠들었지 뭐야. 한참 코를 골다가 놀라서 깨여나보니 이놈이 한창 신이 나서 흰 벽에다가 벽화를 그리고 있더라. 흰 벽을 아예 검은색으로 도배를 할가 지금 고민중이야!” 경란이네 둘째 녀석은 특히 유난스러운 것 같았다. 쩍하면 지 엄마 팬티나 브라자 따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동네에 나가군 하는데 그게 마치 자기만의 트레이드마크라도 되는 듯 시뚝해했다. 게다가 지 아빠가 해외에서 수입해 애지중지 키우는 귀족 강아지는 아예 말처럼 타고 다니면서 구박을 했다. 뿐만이 아니다. 아이가 얼마나 살찬지 손에 닿는 것이면 성한 것이 없었다. 아무리 혼내도 그때 뿐이란다. 오죽하면 경란이네가 세들어 사는 아빠트 집주인이 웃돈 얹어주면서 기한 전에 집 빼달라고 했겠는가. 경란이의 수다를 듣다보니 가뜩이나 짜증스럽던 내 마음이 더욱 어수선해졌다. 만사 제쳐놓고 우선 일도네 선생님을 찾아뵈야 한다. 한번 만나뵈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니 결국 선생님의 호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아이한테 얼마나 등한했으면 선생님이 호출을 다 하실가? 웬지 자격미달의 에미가 된듯 싶어 불쾌하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하루였다.        2   결혼하자 바람으로 애가 들어서서 자기 인생을 초 쳤다고 만날 때마다 두덜거리던 경란이의 권고로 나는 신혼초부터 피임을 계획했었다. 너무 일찍 아이를 가져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꿈을 포기하는 일은 나 역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에 꼼꼼하지 못한 편인데다가 그쯤해서 회사에서 신경 쓸 일이 부쩍 늘어나는 바람에 자연히 피임약 복용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나같이 분주한 사람은 아무래도 좀 더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해 여름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그런데 모처럼 찾아간 산부인과의 의사가 하필이면 생기발랄한 젊은 남자였다. 뭔가 뻘쭉한 기분에 도로 나가버릴가 말가 주춤주춤하는 사이에 남자의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피임… 하려구요.” 의사는 가임기 녀성이라면 피임 시술전에 임신 테스트를 권장하는 것이 순서라고 대답했다. 의료차트에 내 이름을 적으면서 마감생리를 물어왔는데 그 말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생리가 올 날자가 한참 지났다는 사실에 갑자기 긴장되였다.   뭔가 거창하고 번거로울 거라 짐작했던 임신 검사는 싱겁게도 십여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 소변 검사결과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입귀를 묘하게 말아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의사는 친절한 얼굴로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웃는 것이 아니였다. 임신한 것도 모르고 피임하러 온 한심한 녀자라고 비웃는 듯했다. 나는 쑥스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진찰실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신 계획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피임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임신 소식을 접하게 됐으니 말이다. 꿈 많고 짱짱한 내가 이제 임신으로 발목이 잡히게 되는 건가! 내 인생의 봄날은 영영 가버리는 것인가! 저도 모르게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갈마들기 시작했다. 두렵고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녀자의 타고난 모성 때문일가. 전혀 계획 밖의 일이였지만 나는 금세 의욕적인 예비엄마 모드로 진입했다. 인터넷이든 서적이든 임신 관련 정보를 찾아서 닥치는 대로 섭렵했고 최선을 다해 따라했다.   얼마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축하합니다. 쌍둥이입니다.” 지난번 진료했던 남자의사가 더욱 쌩쌩해진 얼굴로 나를 축하해주었다. 나는 충격에 다운될 지경이였다.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의 충격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였는데, 쌍둥이라니. 나는 내 몸 속에 쌍둥이가 들어앉아있다는 사실에 신기한 마음도 컸지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하나도 아니고 둘을 어떻게 키우지? 차곡차곡 준비를 해온 경력 있는 예비엄마라면 몰라도, 나처럼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20대초반의 왕초짜한테 쌍둥이가 생길 줄이야. 내가 쌍둥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친정이나 시댁 모두 축제의 분위기였다. 그들은 축하가 아니라 위로를 받고 싶은 나의 심정을 외면한 채 ‘따불로 온 축복’에 감동해서 하루가 멀다하게 술자리를 만들어 자신들만의 축하연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안 래력에는 쌍둥이가 태여난 전례가 없다. 평소에 형식적인 인사와 례의만 오가던 량가가 아직 태여나지도 않은 배 속의 쌍둥이 덕분에 급속도로 친해져 매일마다 서로 안부를 물어가는 사이가 되였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은 경쟁이라도 붙은 듯 거의 매일이다 싶이 아기용품을 사다 날랐다. 년로하신 외할머니마저 참으로 오랜만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생겼다 싶었는지 매일 외손녀의 신혼집을 찾아오셨다. 심지어 쌍둥이를 출산하면 당신이 손수 봐줄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하셨다. 고령의 로인이라 길에서 혹시 사고라도 날가봐 신혼집에 오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외할머니의 의지는 의외로 강해서 그 누구도 말려낼 방도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공로라고 믿고 계셨다. 결혼한 첫달에 외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끓여준 삼계탕은 사실은 비둘기탕이였다. 예로부터 비둘기를 먹으면 오누이 쌍둥이를 낳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외할머니의 말씀이 별로 믿기지는 않았지만 하도 우기셔서 믿는 척했더니, 그것을 계기로 외할머니는 임신부터 출산까지 시종일관 엄격한 감독관을 자처하셨다. 나는 여든 고령의 외할머니의 가끔은 말도 안되는 비법과 인터넷에서 닥치는 대로 스크랩한 정보들로 자신을 무장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출산의 날이 다가왔다.   3    드디여 태여난 쌍둥이는 어찌나 똑같은지 그야말로 이마빡에 번호를 써붙여야 가려볼 수 있을 지경이였다. 탄생의 신비가 새삼스럽게 경이로왔다. 임신기간에조차 가끔은 철없어 보이던 동갑내기 남편도 태여난 쌍둥이 형제를 정작 눈앞에 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피부로 느껴지는 모양이였다. 전에 없이 긴장하고 허둥대면서도 침착하려고 애쓰는게 보였다. 그런 남편이 가장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은 쌍둥이 형과 동생이 바뀌지 않게 돌보는 것이였다. 단 5분차로 태여났지만 엄연히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란 것이 남편 생각이였고 가족 친지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애를 오른쪽에, 다른 한 애를 왼쪽에 품었다. 갑자기 날개 달린 천사가 된 기분이였다. 쌍둥이 엄마가 아니라면 평생을 가도 느끼지 못할 기쁨을 나 홀로 만끽하면서 산모용 침대에서 나는 다짐을 했다. 앞으로 쌍둥이를 키우면서 남보다 두배로 어렵더라도 현명하게 잘 이겨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두배의 어려움은 굳이 ‘앞으로’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미처 병원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당장 눈앞에서 시작됐다. 남보다 두배로 많은 우유병처럼, 산더미처럼 무져놓은 기저귀처럼, 정확하게 2배 플라스 알파의 강도로 말이다. 둥이는 무얼 해도 꼭 함께 하군 했다. 울어도 같이 울고 똥을 싸도 꼭 같이 쌌으며 한 애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면 다른 애도 덩달아 보챘다. 그러는 쌍둥이를 따라 야단법석을 떨다보면 경란이의 말대로 육아 스트레스에 꼭지가 돌아버릴 지경이였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도대체 어느 놈이 젖을 먹었던지, 어느 놈이 똥을 쌌던지 금세 헷갈려버리군 했다. 보채는 애한테 젖을 주다보면 한 애는 배가 불러서 울고 다른 애는 배가 고파서 기함을 쓰고 울어댈 때도 있었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쌍둥이여도 엄마가 돼가지고 어찌 자기 자식을 헷갈리냐고 하면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은 없지만, 초보 엄마는 애들 울음소리에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라 그런지 그놈이 그놈 같아보이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애기들 이마빡에 스티커를 붙여주는것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똥을 싼 놈한테는 똥무지 스티커를, 우유 먹은 놈한테는 우유병 스티커를, 기저귀 간 놈한테는 기저귀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하루가 안돼서 애기들 이마에는 스티커들이 여라문개 붙었고 남편한테서 제 자식 돼지취급을 하는 무식한 엄마라고 나무람을 들었다. 하지만 그러고나서부턴 무척 편해졌다. 물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애기들 보살피는데 요령이 생겼고 그후론 필요가 없게 되였다. 태여나서 한주일 만에 아이들한테 이름이 생겼다. 이름은 아이와 일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이름대로 산다는 말도 있어 아이들 이름을 어떤 것으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나에게나 남편에게나 모두 중요한 일이였다. 그러던 차 시아버님이 두 아이의 이름을 지어왔다. 형은 날 日자에 길(道)자를 써 일도가 되였고 동생은 깊고 넓을 윤(奫)자에 길 道자를 써 윤도가 되였다. 이제 애들은 평생을 그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이고 그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였다. 이름이 생기고 나서부터 쌍둥이가 훨씬 의젓해진 것 같았다.           4   쌍둥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사랑을 받았다. 자기네들을 예뻐하는 줄 알고 그새 엉큼해진 우리 둥이는 유모차에 앉아 밖에 나가길 무척 좋아했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똑같게 생긴 우리 둥이한테 발목을 잡히군 했다. 긴 속눈섭과 선한 눈매도 똑같았고 오똑한 코와 갸름한 턱선도 찍어놓은 듯했다. 애들 할아버지가 맨날 외우는 것처럼 사내자식들이 어느 엄한 처자들을 울릴려고 괜히 보조개까지 쏙쏙 패여 들어갔다. “어머! 어머! 신기해! 어쩜 이렇게 똑같죠? 아무리 쌍둥이래도 너무 똑같아요!”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모의라도 하고 온 사람들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했다. 그들은 쌍둥이가 너무 똑같은 것이 놀랍고 이상하다는 투였다. 쌍둥이가 다르게 생겼더라면 어땠을가. 아마 쌍둥이인데도 다르게 생겼다고 더 이상해하지 않았을가?!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질문도 거의 비슷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산다는 사실에 놀라군 한다. 나는 이젠 뒤통수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알지만 애들 아빠마저도 가끔씩은 헷갈리는 눈치였다. 쌍둥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주었다. 웬일인지 일도는 자주 설사에 걸렸다. 똑같은 걸 먹였는데도 일도만 아프고 윤도는 멀쩡했다. 일도를 안고 병원으로 정신없이 뛰여다니면서 그나마 하나는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며칠뒤에는 말끔히 완쾌하긴 했지만 일도는 여전히 칭얼거리기 만하고 잘 먹지 않아 통통하던 젖살이 빠져 얼굴은 금세 홀쪽해졌다. 워낙에 뭐든 탈 없이 잘 먹는 윤도는 밥투정이 심한 형이 남긴 몫까지 받아먹군 했다. 차츰 두 아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윤도가 형보다 모든 것이 더 커져버렸다. 사람들은 변해가고 달라지는 쌍둥이의 모습에 무척 낯설어했다. 그리고 당혹해했다. “더 포동포동한 애가 동생이죠? 왜 형이 동생보다 더 작죠?” 그 말에는 나도 난감하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형이 동생보다 더 작은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5분 먼저 세상에 나온 쌍둥이 형이 동생보다 더 작은 것이 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유가 되는지 그 리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형이 동생보다 작은 것이 놀라운 리유는 형은 반드시 동생보다 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던 어느날 윤도가 벽을 짚고 일어섰다. 형인 일도는 여직 방바닥에 엎디여 벌벌 기여다니고 있는 중인데 오또기처럼 혼자서 벌떡 일어선 윤도가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신기했다. 그것은 환회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어머니, 애가 벽을 짚고 스스로 일어섰어요.” “벌써 일어섰어? 너무 장하구나. 근데 일어선게 누구라냐?” “윤도요. 윤도가 일어섰어요.” “녀석두 참, 똘똘하긴. 그 자식은 암만 봐도 딱 지 애비 닮았어! 흐흐.” 시아버님도 어느새 전화기옆에 서 계셨던 모양이다. 두분의 굉장히 흐뭇해하시는 웃음소리가 멀리에서 날아왔다. 잘난 건 모조리 자신 아드님을 닮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지만 결코 야속하지가 않았다. 내 배 속으로 낳은 내 새끼 잘났다고 칭찬하시는 건데 구태여 마음 상할 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행복하기 만했다. 하루볕이 새롭다고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벽을 짚고 일어서던 윤도가 어느새 손을 놓고 뒤뚱뒤뚱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두려움과 동시에 설렘을 안고 세상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윤도의 장한 첫걸음을 빨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번쩍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어머니, 윤도가 걸음마를 뗐어요.” “그랬어? 윤도 그 녀석은 뭐나 남보다 빠르구나. 장하기도 하지.” 전화기에 매달려 시어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다가 문뜩 뒤돌아보니 어느샌가 형인 일도도 벽에 기대여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기껍고 반가웠지만 윤도가 홀로 섰을 때를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환희와 설레임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에미가 되여가지고 일도가 언제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 지도 몰랐다. 늦은 자의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일도가 오똑 선 것이 스스로도 장한 듯 나를 보면서 히쭉 웃었다. 가슴이 짠했다. “어머니, 일도도 혼자 섰어요! 장하죠?” “그래, 장하다!” “얼마 안 있으면 일도도 씽씽 달아다닐거예요.” 괜히 일도한테 미안해서 나는 과장된 손짓까지 했다. 다음부턴 윤도보다 일도 자랑을 더 많이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5   혹시나 했는데 말을 번지는 것도 동생 윤도가 형을 앞섰다. 어린 마음에도 좋고 나쁜게 있어 좋으면 고개까지 까닥까닥거리면서 “조―아”, 어딘가 마땅찮은 구석이 있으면 오만상을 찌프리고 “시러, 시러” 소리를 질러댔는 데 깨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았다. 아직 “응”, “엉” 밖에 모르는 일도에 비해 윤도의 “엄마”, “맘마”, “아파” 소리는 제법 야무지고 올찼다. “우리 윤도는 뭐나 다 빠르구나. 태여날 때 조금 늦게 나온 것 빼고는 말이다. 하하.” 온 가족이 하루가 새롭게 또렷해지는 윤도 주위에 둘러앉아서 고 쬐꼬만 입에서 낯선 단어들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탄하며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을 때 형 일도는 고열로 엄마 품에 안겨 눈도 바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일도야. 너도 윤도처럼 아프지 말고 씩씩하면 얼마나 좋겠니?) 나의 간절한 소망과는 무관하게 일도는 늘 잦은 병치레로 골골거렸다. 아프면서도 아이들은 성장했다. 크면서 점점 자기 것에 대한 소유나 점유욕도 함께 커가는 것 같았다. 장난감이 온 방에 잔뜩 널렸는데도 애들은 굳이 장난감 하나를 놓고 서로 가지려고 싸웠다. 한 애가 장난감 하나를 집어들면 다른 애가 열싸게 달려와 가로채고 튀여버렸고, 그러면 빼앗긴 아이는 생사결판으로 제 형제한테 달려들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빼앗기 위해서 폭력까지 휘두른다.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거나 밀어서 넘어뜨리거나 정 안되면 손으로 상대의 얼굴을 허벼버리기도 한다. 넘어뜨리는 것은 늘 윤도 쪽이고 허비는 쪽은 일도 쪽이다. 아이들은 쫓고 쫓기는 싸움에 지칠 줄도 몰랐다. 싸움에서 유익한 고지에 있는 아이가 장난감을 점령하고 멀리 도망가버리면 빼앗긴 애는 닭 쫓던 개 울 쳐다보 듯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는 악을 쓰고 울어대군 했다. 쌍둥이의 엄마 쟁탈전은 더욱 치렬 했다. 매일 밤 쌍둥이가 잠들기 전까지 가운데 누운 나는 어느 쪽을 향해서 몸을 기울여도 절대 안됐다. 정확하게 중심 포지션을 잡은 후, 추호의 움직임도 없어야 했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한켠으로 몸을 기울라치면 세상에 란리도 그런 란리가 날 수 없었다. 둥이를 무릎에 앉혀서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서로 자기만 예쁘게 안고 자기 것을 먼저 읽어달라고 야단이였다.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다. 맨날 똑같은 싸움을 하는게 지겹지도 않은지 애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그 싸움은 한명이 울어터져야 비로소 끝이 났다. 그 틈에 끼여있는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고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였다. 아이들이 요람에 누워있을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와 시어머님, 친정엄마까지 매일 애 보러 오셨지만 아이들이 커가니 다들 힘이 부치시는지 쌍둥이 육아는 오롯이 혼자 몫이였다. 어른들이 오시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나도 힘든 육아를 년세가 많으신 분들이 돕다가 변고라도 생기면 큰일이 아닌가. 내가 육아 때문에 힘들어 쩔쩔매자 제일 좋아한 사람은 경란이였던 것 같다. “너도 고생 좀 해봐라. 그러면 내 마음 알거다. 호호호…” “어휴, 못된 기집애.” 내가 아기를 갖기 전까지 경란이는 대학 동기중 유일한 애기 엄마였다. 자기만 애 낳고 집구석에 틀어박혀 살림하는게 무척 억울하고 속이 상했던지, 동지가 하나 늘었다고 무척이나 신난 기상이였다. “모를 거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나한테 묻고. 호호호…” “애기 먼저 낳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유세 떨고 있어? 미워죽겠어. 못된 기집애.” 일도와 윤도가 치고 박고 속을 썩일 때마다 나는 괜히 경란이가 미워졌다. 그날도 둥이는 보란 듯이 힘차게 싸웠다. “일도야, 네가 형이니 양보해야지.” “싫어. 형이라고도 안 부르는데 뭐.” “윤도야, 그럼 네가 양보해. 네가 동생이잖니?” “싫어, 싫어.” 쌍둥이 형제는 서로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자기방어가 철저했고 에누리가 없었다. 모든 걸 가지고 싸우는 둥이가 나는 너무 속상했다. 참고 또 참다가 그래도 그예 성질이 터져버려서 둘 다 와락 엎어버린다. 하지만 싸우는 것도 잠간, 애들은 금세 눈물 싸악 닦고 다시금 사이좋게 보냈다. 신기한 것은 저희들끼리는 맨날 싸우고 부수고 하면서도 동네 애들이랑 놀 때는 그래도 형제라고 늘 둘이 단짝이 되고 한편이 되는 것이였다. 두 놈이 막강하게 덤비니 어디에 가나 우리 둥이를 괴롭힐 아이가 없었다. 덕분에 밖에서는 왕따를 당하거나 얻어터지지는 않았다. 아기였을 적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목마를 타고 있던 일도가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아이한테 끄당겨져 목마에서 떨어졌다. 한켠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던 윤도가 형의 울음소리를 듣고 뒤뚱거리며 달려가더니 다짜고짜 동네 형아를 목마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였다. 그 아이가 제 엄마를 부르며 목놓아 울고 있는 사이 윤도가 일도를 부축해서 목마에 태웠다. 몸을 쓰며 달려오는 그 애 엄마 앞에서 나는 눈치 있게 내 자식을 혼내고 울고 있는 남의 자식 달랬지만 속으론 내 자식이 얼마나 흐뭇하던 지,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피여오른다. 역시 두 아이는 한 아이보다 강한 듯했다. 그 후론 윤도만 있으면 둥이를 밖에 내몰아도 마음이 든든했다. “형이 제법이네요. 동생을 다 보호해주고.” “아니 쟤가 형이예요.” 나는 울고 있는 일도를 가리켜보였다. 모두들 덩치가 큰 윤도를 형인 줄 알았다. 씩씩한 윤도와는 달리 맨날 아프기만 하는 일도는 왜소했고 늘쌍 엄마 꽁무니를 떠나지 못했다. 놀아도 엄마 주위에서만 뺑뺑이 치면서 눈을 맞추려 했고 엄마 얼굴이 보일 때마다 씨--익 오버하는 웃음을 보내군 했다. 엄마가 곁에 없으면 일도는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붙임성이 좋아 누구한테든 척척 안기는 윤도와는 너무 딴판이였다.     6   드디여 쌍둥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게 되였다. 애들은 낳아만 놓으면 금방이라던 어른들의 말이 실감이 났다. 유치원에 입학하던 날, 일도와 윤도한테 똑같은 스포티자켓에 멜빵 청바지를 받쳐입히고 똑같은 짱구 책가방을 메웠다. 심지어 책가방속 물건들도 모조리 똑같은 걸로 준비해줬다. 유치원선생님이 신입생 어린이들을 두줄로 나란히 세우면서 또래 중에서도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윤도는 앞줄에, 키가 작은 일도는 뒤줄에 세웠다. 그런데 일도가 기어코 윤도랑 함께 앞줄에 서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울어댈 줄이야. “나도 앞줄에 설래. 왜 윤도만 앞에 서?” “키가 너보다 크니깐 그렇지. 자, 엄마 말 잘 듣지?” “안돼. 나도 앞에 설래.” 일도는 발에 신긴 명품 운동화가 무색할 정도로 발버둥을 쳐댔다. 별수 없었다. 첫날 만은 윤도 옆에 세우기로 하고 어거지를 쓰는 일도를 겨우 달랬다. 태여나서부터 항상 윤도랑 붙어있다가 갑자기 앞뒤로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쌍둥이는 두 아이지만 한 아이처럼 동심일체여서 떨어져있으면 체질적으로 불안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단지 그런 리유에서 일도가 그 란리법석을 떤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도는 윤도와 함께 나란히 앞줄에 섰는데도 기뻐할 대신 이번엔 윤도 앞에 서야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윤도 옆에 섰잖아. 근데 왜 또 그래?” “내가 형이잖아. 그러니 윤도 앞에 서야 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지릅뜬 일도의 눈이 고집스러웠다. 하긴, 일도는 형이 맞았다. 형이 앞에 서야 한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어린 것이 벌써 형이라는 의미의 틀 속에 자신을 구속시키려 하는 것이 놀랍고 슬펐다. 어쩌면 동생일수도 있는 형이다. 서양에서는 우리와 달리 마지막에 나온 아이가 형이 된다. 그들은 먼저 나온 시간보다 태아가 먼저 형성된 시간을 따져서 형과 아우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먼저 나온 아이가 후에 형성되고 먼저 생긴 아이가 후에 나오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른들이 정해준 형이란 이름을 갖고 일도는 지금껏 한번도 보란 듯이 제 아우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곳에서 어쩌면 그동안 잃어버렸던 형의 위상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였을가? (그래 좋아. 이제부터라도 형답게 앞에 서는 거야. 우리 일도 화이팅!) 나는 일도의 형다운 힘찬 새 출발을 응원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자 나 역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는 무척이나 부풀어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록록치 않았다. 오래동안 회사일을 접고 집에만 있었던 터라 현장감이 떨어진 것인 지 하던 일인데도 낯설고 서먹서먹했다. 내가 현역으로 뛸 때보다 우선 기술적으로 많이 업그레이드 돼서 공부도 해야 했고 인테리어 트랜드나 고객들의 보편적인 취향 같은 것도 새로이 파악을 해야 했다.  요즘 고객들은 전문가 못지 않게 아는 것이 많고, 요구사항도 디테일하다 못해 까탈스러울 정도이다. 디자이너의 전문성 있는 건의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색갈을 앞세운다.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거듭거듭 설계를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찌됐든, 오랜만에 나만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상당히 고마운 일이였다. 그런데 둥이를 유치원에 들여보낸 날부터 시끄러운 일이 끊이지를 않았다. 혼자서도 잘 놀군 하던 윤도는 친구들도 많고 놀이기구도 구전한 유치원에 가기가 무척이나 신이 난 모양이였으나 심약한 일도는 유치원이 별로인지 전보다 더 기운이 없어했다. 입학식 날의 씩씩하던 기상도 그날 뿐이였다. 책임감이 무척 강한 일도네 선생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애들의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해서 학부모들에게 보내주었다. 뿐만아니라 그날그날 사소한 정황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주군 했다. “윤도는 간식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일도는 잘 먹지도 않고 보채기만 해요.” “윤도는 친구들이랑 잘 노는데, 일도는 혼자서 땅만 뚜져요.” “윤도는 수업시간에 노래를 잘 따라 부르는데, 일도는 딴짓만 피워요.” 매일매일이 한결같았다. 윤도는 잘 하고 있는데 일도는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똑같은 평가 뿐이였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일도네 유치원에 직접 현장답사를 갔다. 마침 음악시간인지 선생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열심히 노래를 배워주고 계셨는데 이십여명 정도 되는 아이들중 얌전히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애가 몇명이 안되였다. 그중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큰 우리 윤도가 입을 짝짝 벌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역시 윤도는 모범생이였다. 일도는 엄마가 밖에 서 있는 줄도 모른채 한창 엉뎅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는 데 가만히 살펴보니 몇 책상 건너에 앉은 남자아이를 부르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자꾸만 옆자리의 남자애와 장난을 치는 바람에 일도의 앞뒤 좌우에 홍일색으로 녀자아이를 앉혔다던 유치원선생님 말씀이 떠올랐다. 말을 하면서 입술까지 깨물었던 걸 보면 우리 일도가 애 먹여도 어지간히 애를 먹인 게 아닌 모양이였다. 일도가 좀 유별난 건 사실이였다. 허나 일도말고도 그만큼 애 먹이고 속 썩이는 아이들이 꽤 여럿 되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다른 애들은 혼내지 않으시고 다만 모범생 윤도의 쌍둥이 형 일도만을 자꾸 불러내여 혼내는 것이였다. 참답고 열심인 윤도 때문에 형 일도가 더욱 눈 밖에 나지 않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여튼 유치원에서 일도는 단순히 장난이 심한 아이가 아니라 구제불능의 아이로 도장이 찍혀버렸다. 그리고 꼬리표까지 늘었다. “쌍둥이 동생은 뭐나 다 잘하는데 형은 바보래.” 유치원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듣는 일도를 ‘바보’라고 놀렸다. 매일 집으로 돌아오기 전 선생님은 유치원아이들에게 이쁜 색종이를 오려서 만든 ‘꽃’을 나누어주셨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친구들이랑 곧잘 어울리는 윤도는 왕중왕 ‘사자’를 타오군 했으나 오후 자는 시간에 잠도 잘 안 자고 말썽만 일으키는 일도는 언제나 ‘쥐’만 받아왔다. 어른들한테는 한낱 색종이에 불과 한 것이 아이들한테는 상당히 마력이 있는 모양이였다. 윤도는 마치 자기가 사자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기가 충천해서 우쭐렁거렸고 일도는 못난 쥐새끼들 때문에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짜증만 부쩍 늘었다. “할머니, 나 오늘도 사자를 탔어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윤도는 할머니 댁에 전화를 걸었다. 신명나서 제 자랑을 하는 게 윤도한테는 어느덧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여 버렸다. 전에 내가 하던 일을 윤도가 그대로 받아하고 있었다. “그랬어? 똘똘한 내 새끼. 참 잘했어. 일도는 뭐 탔냐?” “쥐!” “그게 뭔 소리냐?” “쥐새끼라는 쥐.” 윤도의 목소리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 아이는 자기 자랑을 하는 만큼이나 일도의 허물을 고자질하는데 열심이였다. 일도는 안 듣는 척, 못 듣는 척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풀이 죽어있는 것이 확연했다. 난 괜히 윤도가 원망스러웠다. 형제끼리 꼭 저래야 하나 싶어서였다. 어느날 일도가 집구석에 틀어박혀 그림책에서 사자 그림을 오려내는 걸 보았을 때는 유치원선생님마저 미워났다. 어릴 때부터 이런 걸로 아이들한테 차별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좋은 교육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이 내심 못마땅했고 원망스러웠다. 장난치고 말썽 좀 부린다고 쥐새끼를 나누어주어 나쁜 어린이 취급을 하면 애가 영원히 자기는 ‘쥐새끼’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갈 것이고, ‘사자’만 타는 아이는 자기는 ‘쥐새끼’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 아닌가? 우월감 역시 자비감만큼 페(弊)가 되는 것이다. 육아교육이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된 후의 많은 습관과 심성들이 그때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겠는가? 당연한 것처럼 아이들한테 차별을 가르치고 있는 교육의 형태가 결국 전 사회를 차별화한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7   어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윤도를 칭찬했다. 입이 마르게 윤도를 칭찬하고 나서 그 대가로 일도를 마음대로 힐난해도 된다는 듯 스스럼없이 일도를 동생보다 못한 형이라고 질타했다 “윤도는 어쩌면 저렇게 의젓하고 믿음직스럽냐? 동생이 마치 형 같다.” 누구나 귀여워하고 추어올리는 가운데 윤도는 점점 더 영특하고 더 의젓해지고 “동생보다 못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 일도는 점점 더 위축되고 동생보다 “못해졌다”. 윤도는 할머니 입에 사탕알을 넣어드렸고 할아버지한테 ‘효자손’을 갖다드리군 했다. 윤도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숨 넘어가는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켠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도는 슬그머니 나한테 다가왔다. 그리고는 할머니 입에 넣어드릴려고 준비해뒀던 사탕을 내 입에 넣어주군 했다. 가끔은 일도가 먼저 할아버지한테 효자손을 갖다 바칠 때도 있었다. 이때면 약삭 빠른 윤도가 쪼르르 달려가서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할아버지 등을 긁어드렸다. “허허. 우리 윤도의 손이 제법 매운데?” 윤도 땜에 흐뭇해하시는 할아버지 옆에서 효자손을 들고 있는 일도는 시무룩해 서 있는다. 왜 난 항상 윤도한테 지는 것일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엄마로서 나는 정말이지 그럴 때마다 너무 속상했다. 윤도는 어쩌다 한번 할머니를 도와 커피잔을 씻어드리고도 두고두고 치하를 받았다. 일도도 칭찬을 받고 싶었던지 윤도처럼 할머니의 커피잔을 씻다가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놈자식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있네.” 자기도 한번 잘해 보려고 했는데 사고를 쳤던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한테 야단까지 맞으니 일도가 제 설음에 북받쳐 윽--윽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뭘 잘했다고 울긴 울어?” 할머니가 깨여진 유리쪼각을 주으면서 일도를 나무랐다. 칭찬받을 일은 윤도가 도맡았고 일도는 욕먹는 일만 도맡았다. 차츰 일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점점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갔다. 일도는 윤도가 무거운 물건을 들어도 거들어주지 않고 구경만 하였다. “동생을 도와 좀 들어주지,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잖아?” “도와주면 뭐해요? 칭찬은 윤도가 받고 욕은 내가 먹는데.” 일도가 무심한 듯 대답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나는 안타까웠다. 일도만을 탓할 일이 아니였다. 이런 생각을 가지도록 몰아간 주변의 문제가 더 크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두 아이를 비교하지 말고 똑같이 대해달라고 주문했다. 칭찬하면 같이 칭찬하고 비평하면 같이 비평해달라고 말이다. “일도 그놈은 칭찬할 일이 있어야 하지, 맨날 욕먹을 짓만 가려서 하니…” 시어머님은 아직도 일도가 커피잔을 깬 일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였다. “거기다가 비실비실 앓음 자랑만 하지…” 윤도는 두리뭉실 건강하기 만한데 여러모로 부족한 일도가 자꾸 아프기까지 하니 처음엔 가슴 아파 어쩔 줄 모르던 가족들도 점차 짜증을 냈다. 한 배에서, 그것도 한꺼번에 나온 아이들인데 어쩜 이렇게 다른 지, 똑같이 키워도 일도만 자꾸 아픈 리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랑이 부족한 걸가? 임신 당시 정밀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의사는 내 배속의 아기집 하나가 다른 쪽의 절반 만 하다고 했다. 아기집이 작은 쪽이 무사히 자랄 수도 있지만 큰 아기집 때문에 도태되여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에 두렵고 가슴이 아팠었다. 다행히 작은 둥이도 엄마와 떨어지지 않았지만 몇달이 지나자 자궁 아래 쪽으로 많이 내려갔다. 의사는 더이상 무리하면 조산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고 덜컥 겁이 난 나는 회사도 그만두고 두달 남짓 반듯하게 침대우에 누워만 있었다. 그 작은 둥이가 먼저 태여나서 형이 된 일도였다.   8   아이들은 점점 머리가 굵어져 감당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가 되였다. 집에만 있으면 어른들 혼을 빼놓는 귀찮은 녀석들 땜에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어 유치원에서 방학만 하면 애들을 모조리 시댁에 보내버리군 했다. 시댁 어르신들한테는 미안하고 송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댁에 간다는 말에 신이 나서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기는 윤도와는 달리 일도는 슬금슬금 나한테 매달렸다. “엄마, 난 할머니 댁에 안 가면 안돼?” “왜? 할머니댁에 가기 싫어?” “응. 싫어.” “왜?” “윤도만 이뻐하는걸 뭐. 그리구 엄마, 난 엄마와 있는 게 훨씬 더 좋아.” 일도는 아예 거머리처럼 내 다리에 찰싹 들러붙었다. 가기 싫어하는 애를 내가 좋자고 억지로 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일도랑 윤도랑 둘이 함께 있으면 시어머님이 곱절 힘에 부치실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에는 일도가 할머니와 대판 싸우기까지 했었다. “한번만 더 애를 먹이면 너를 집에 쫓아버리구 말겠다.” “이게 내 집인데. 뭐.” “이게 왜 니 집이냐? 할머니, 할아버지 집이지.” “우리 엄마 아빠가 사준 집이니까 내 집이지. 아버지 집이면 내 집이에요. 내가 형이잖아요.” 철부지의 소리였지만 시어머님은 많이 노여우셨던지 대뜸 나를 불러들였다. 윤도는 슬금슬금 할머니 눈치를 보며 구석에 앉아있었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잘 안된 일도만이 기고만장해서 안팎으로 장난을 쳐댔다. 눈 한번 깜빡 않고 할머니 면전에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했다니 기가 딱 찰 노릇이였다. 누가 들으면 집에서 엄마가 배워줬나 할가봐 시어머님한테 괜히 미안해져서 나는 얼굴도 바로 들 수가 없었다. 일도를 붙들어 엉뎅이 빵빵 뚜드려주고 억지로 집에 끌고 갔다. 그런데 아직 덜 맞은 모양인지 일도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입을 놀리는 것이였다. “엄마, 할머니네 집 일도 꺼 맞지?” “엄마한테 더 맞을래? 그런 걸 말하면 안된다고 했지?” 길에 사람들이 많아서 자기를 때릴 수 없을 거라 판단이 섰는지 엄마의 위협에도 일도는 끄떡없었다. “엄마, 나 윤도랑 나누는 거 싫어. 정말 싫어.” 예전엔 니 것 내 것 모르더니만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턴 부쩍 제 몫을 챙겼다. 이쁜 것만 보면 서로 자기 것이라고 빼앗아서 치워놓군 했고 ‘일도 꺼’, ‘윤도 꺼’라고 이름표까지 붙여놓으면서 여간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은 마치도 부도가 나서 강제 경매에 나간 집처럼 딱지가 붙어있지 않은 기물이 없었다. 물건에 대해서만 니 꺼, 내 꺼 집착하는 것이 아니였다. 그쯤 들어 둥이는 부쩍 자신들의 이름에 대해서도 계선이 분명해졌다. 예전에는 그냥 “도야” 하고 부르면 둘이 함께 튀여나오던 것들이 이젠 아무리 불러대도 엄마 얼굴 빤히 쳐다보면서 제 이름 부르기 만을 기다렸다. 벌써 정체성의 중요성을 깨우친 것일가. 아이들은 내가 느끼지 못한 사이에 훌쩍 자라있었다. 지난번 사건도 있고 해서 결국 윤도만 할머니 댁에 보내버렸다. 집에 남은 일도 땜에 마무리 작업을 제때에 끝내지 못할가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웬걸, 일도가 전혀 애를 안 먹이고 엄마를 도와 집안일까지 하는 것이였다. 해놓은 건 비록 엉성하기 그지없었지만 제딴엔 열심히 하느라 코등에 송골송골 땀까지 배인 게 너무 신기하고 기특했다. 윤도가 없으니 일도가 시키지도 않는 일까지 하고 있는 것이였다. “일도야. 고마워. 너무 잘했어.” 간만에 칭찬을 듣는 일도의 얼굴에 파릇파릇 생기가 돋아났다. “엄마, 일도가 이뻐?” “당연히 이쁘지. 엄마 새낀데.” “엄마.” 일도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왜?” “일도가 이뻐? 윤도가 이뻐?” “당연히 둘 다 이쁘지.” 일도는 곧 시무룩해졌다. 그 아이는 윤도보다 일도가 더 이쁘다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던 모양이였다. 하지만 어미로서 어찌 두 아이를 사랑하는데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도 안되지만 그런 눈치를 아이들이 가지게 하여서도 안 되는 일이였다.        9   다사다난했던 유치원 생활을 끝내고 일도와 윤도가 나란히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동안은 이런저런 핑게로 애들 공부를 미루기만 했는데 이제 더이상 소홀히 할 수가 없어 매일 저녁밥을 먹이고는 싫다는 애들을 억지로 책상머리에 끌어 앉혀놓고 공부를 시켰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많이 힘들었는지 애들은 뺀질거리며 엄마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누가 더 잘하나 보자.” 경쟁은 질투와 미움의 씨앗이라고 그렇게 거부했으면서도 못난 엄마는 저도 몰래 애들한테 경쟁을 붙였다. 금방까지 끄떡끄떡 졸던 아이들은 엄마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서로 질세라 극성을 부렸다. “내가 먼저 할래.” “엄마, 내가 먼저 할래.” 엄마의 설명은 듣는둥 마는둥 애들은 서로 제가 먼저 대답하겠다고 야단법석이였다. 난 항상 일도한테 첫번째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안타깝지만 일도가 정확한 답안을 말하는 경우는 아주 적었기에 두번째로 대답을 하는 윤도한테 늘 ‘빙고’의 영예가 차례지군 했다. 한 아이에게 한번씩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 내 나름대로의 평등원칙이였다.  “그래. 알았어. 일도가 먼저 해.” 일단은 제가 먼저 대답하게 됐으니 시뚝해진 일도가 윤도를 향해 입을 삐쭉거렸다. 하지만 윤도는 여유 있는 표정이였다. (흥, 어차피 정답은 내가 말할 건데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도, 이게 영어로 무슨 색이지?” 나는 회사에서 가져온 벽지 샘플을 펼쳐서 검은색을 가리켜보였다. 샘플은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자른 백여가지 색상의 벽지를 묶고 있어서 아이들한테 색상을 가르치기는 제격이였다. “블랙입니다.” “빙고. 너무 잘했습니다. 이건 뭡니까?” “화이트입니다.” “빙고. 너무 잘했습니다.” 일도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 애는 윤도한테 흘낏 눈길을 주더니 입을 쭉 내밀고 얄밉고 요상한 얼굴을 해보였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워왔는지 모르겠다. “좋아요. 제일 마지막 문제입니다. 이것은 무슨 색이죠?” 나는 보라색을 가리켰다. 보라색은 자신이 없는 지 일도가 얼굴을 찡그렸다. 혹시나 일도가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대답해버리면 어쩔가 싶어 긴장한 마음에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윤도의 얼굴에 자신 있는 웃음이 피여났다. “핑클인가?” 머리를 쥐여짜다 말고 일도가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컨닝이라도 좀 해볼려고 했다가 윤도한테 교과서를 빼앗겨버린 일도가 미안한 듯 엄마를 향해 배시시 웃고 있었다. 정답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도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내 옆에는 사냥개처럼 눈을 밝히고 있는 윤도가 있었다. “일도가 틀렸습니다.” 어느새 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윤도는 정답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럼 윤도가 말해봐.” “퍼플입니다.” 윤도는 영어 발음이 참 좋았다. 어린 아이답지 않게 혀를 꼬부려야 할 때, 혀를 곧게 펴서 다문 이에 대야 할 때, 혀를 물어야 할 때를 귀신처럼 지켰고 액센트도 빈틈이 없었다. 학교 영어 수업시간에는 워낙 학생이 많아서 선생님이 애들 발음을 일일이 체크할 수 없었고 그러면 어린아이들은 채 여물지 않은 귀로 선생님의 발음을 실제와 다르게들 듣고 틀리게 발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그릇된 발음이 굳어지면 나중에 바로잡기가 무척 힘들기에 나는 애들 영어만큼은 정성을 기울였다. 과외선생님을 모실 수도 있었지만 애들한테 “윤도랑 일도랑 너무 많이 차이가 난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아무리 유능한 선생님일지라도 엄마만큼의 애정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가 직접 영어를 가르쳤다. “빙고. 잘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윤도가 일도보다 월등하게 잘해주었다. 승자의 여유작작한 표정이 윤도의 얼굴을 훨씬 더 크게 만들어주었다. “난 안할래. 안해.” 맨날 지기만 하니 영 재미가 없는 모양이였다. 일도는 처음에는 그럭저럭 따라 하다가도 윤도가 또 자기를 앞서면 몽니를 부렸다. 가끔 일도가 더 잘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신이 나서 시키는 대로 곧잘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차피 둘이 발을 맞추어 진도를 나가야 했기 때문에 윤도는 항상 늦게 따라오는 일도를 기다리느라 더 배울 것도 못 배웠다. 점차 애들은 함께 공부하는 걸 싫어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일도와 윤도는 점점 더 차이가 났고 어느날부터인 지 주위에서 날 ‘윤도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윤도보다는 좀 못하지만 엄마하고 단 둘이 공부할 때 보면 일도도 꽤나 똘똘한데 학교에 가면 왜 그렇게 쩔쩔매는 지 참말로 답답한 노릇이였다.   10   윤도가 반장이 되던 날 일도는 초저녁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 텐데 꼭 윤도에게 칭찬받을 일이 있을 때면 일도가 아팠다. 아픈 일도 때문에 윤도를 마음놓고 칭찬을 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윤도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일도야, 아프지만 말고 너도 윤도처럼 좀 해봐라.” 입이 무거운 애들 아빠가 기어이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을 보니 남편 역시 무척이나 안타까웠던 모양이였다.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을 모조리 똑같이 해서 내보내는데 너무나 차이가 나는 윤도와 일도는 누가 보아도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애 기죽게 왜 그래요?”  나는 뭐든지 동생한테 뒤떨어지는 일도가 너무 안돼 보였고 측은하였다. 어려서 나 역시 일도와 비슷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었기에 누구보다 일도의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 적에 명절이라고 외가집에 가면 나와 정 동갑인 주희를 만나군 했다. 그 애는 큰 이모가 재혼을 한 남자의 딸이였다. 외가집 식구들은 피 한점 섞이지 않은 그 애를 몸살이 나도록 귀여워했다. 늘 가운데 세워놓고 이뻐서 못 견뎠고 보듬고 쓰다듬으면서 완연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그 애는 무시로 어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주희는 이번 학기에도 반에서 최우등생이 되였다더라.” “주희는 노래도 너무 잘하는구나.” 최우등생도 아니고 노래도 못하는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애의 아름다움은 내가 얼마나 못난 아이인지를 절감케 했고, 그 애의 총명함은 나의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애가 있을 때면 나는 완전히 망각된 아이, 그 애의 눈부심을 받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아이였다. 나는 점점 주희가 싫어졌다. 처음부터 싫었던 건 아니였다. 아부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 애를 사랑하는 외가집 어른들을 보면서, 나는 그 사랑을 받는 주희가 미워졌다. 나를 이뻐하다가 그 애가 등장한 후 약속이나 하듯 갑자기 나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가버린 어른들 역시 미웠다. 우리 둘을 저울질하는 게 싫었고 아이를 사랑해줄 수 있다는 어른들만의 특권으로 어린 나의 마음을 울리는 게 정말 싫었다. 그날도 나는 기분이 언짢은 채로 일찌감치 외가집 고방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믐날이라 외가집은 흥성흥성했다. 정지간에서는 무시로 웃음이 새여나왔고 나는 완전히 소외당하는 느낌에 화가 나있었다. 한참이 흐른 후, 어느 순간 정지간이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고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외삼촌과 외할머니가 들어왔다. “우리 이쁜 미정이 여기에 있었구나.”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 그들이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이 생경스러웠고 낯설었으며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미정아, 나가서 주희랑 함께 놀아라.” 자는 척 꿈쩍도 않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가만히 나의 귀에다 속삭였다. “사실은 니가 더 이뻐, 주희는 남이니까 이뻐하는 척하는 거야.” 그 말을 들으니 웬지 고방에 홀로 팽개쳐져 있을 때보다 더 외로웠다. 애들의 여린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어른들이 너무 싫었고, 나와 주희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눈치를 살피는 것도 싫었으며 불편한 내 속마음을 들켜버리는 것도 싫었다. 아무 것도 아닌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감추는 것도 힘들었다. 점차 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인 주희가 너무 싫어졌다. 그래서 난 외가집에 가지 않는 것으로 그 기분 나뿐 감정에서 벗어나군 했다. 후에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였지만 아직도 난 주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어른들은 주희 앞에서 차거운 나를 두고 속이 못된 계집애라고 나무람했다. 하지만 그 애한테서 날 멀어지게 만든 이가 그들 자신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어른들의 계산적인 사랑방식이 아니였다면 나와 주희는 훨씬 더 가까워졌을 지도 모른다.  어릴 적 상처 때문이라도 나는 일도와 윤도 사이에 제발 어른들의 세속적이고 계산적인 사랑이 개입되지 말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내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들도 어른들의 섣부른 판단과 편협한 애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할키는 것은 우리 애들한테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조로, 하지만 무심코 내던진 말들이였다. “쌍둥이는 원래 하나만 똑똑하고 다른 하나는 쭉정이라던데요.” 나는 쌍둥이가 그런 말들을 주어들을가봐 겁이 났고, 상처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버리는 어른들의 입을 옥수수갱이로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11   쌍둥이네 1학년 첫 학기가 후딱 지나갔다. 나는 호출을 받고 학부형 회의에 참석을 했다. 일도네 담임선생님이 지나간 한 학기에 대해 소상하게 총결을 짓고 나서 애들 성적에 따라 상을 나누어주셨다. 첫 학기라서 그런지 격려하는 차원에서 누구나 상이 있는 듯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부모가 앞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군 했는데 아이가 둘이다 보니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불리워 나갔다. 윤도는 최우등생이 되였고 소학교 일학년 반장도 간부라고 우수 간부상까지 받았다. 윤도의 상장과 상을 한아름 받아안고 제자리에 돌아오기 바쁘게 선생님께서 일도의 이름을 불렀다. “진일도, 개근생.” 개근상은 상이 너무 작았다. 상장도 없이 지우개 하나가 전부였다. 서운해할 일도 얼굴이 눈에 선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자마자 선생님이 또 한번 호출했다. “윤도 어머니!” 나에게 모범생 아들을 키운 경험담을 얘기하라고 했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나는 당황하기 그지없었다. 윤도는 최우등생이지만 일도는 겨우 락제를 면한 아이다. 극과 극의 두 아이를 가진 엄마에게 아이를 잘 키운 경험을 말하라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말하라면 잘한 아이와 못한 아이 두 아이를 키운 성공담과 실패담을 같이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모순된 역할을 피하고 싶었다. 하여 극구 손사래질을 하면서 거절하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윤도는 전화통에 달라붙었다. “할머니, 저 최우등생이 됐어요.” “장하다. 내 새끼.” “일도는 무슨 상 탔어?” “일도는요, 개근상 탔어요.” 윤도의 가뜩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가 있었다. 씩씩하고 뭐든지 잘하는 장한 윤도가 무척 고맙지만 소침해지는 일도를 보면 정말이지 윤도를 말리고 싶다. 윤도가 너무 잘할 필요도 없이 일도랑 발을 맞추어 비슷하게 나갔으면 좋으련만. 점점 기운이 없어하고 의욕을 잃어가는 일도를 보면 윤도가 너무 잘하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윤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최우등생 상장이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허구헌 날 일도 앞에서 상장을 꺼내 펼쳐들고 생색을 낼 때는 아니꼽더니만 정작 울상을 하고 상장을 찾아헤매는 윤도를 보니 나도 함께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에 두었는지 잘 생각해봐라. 급해하지 말고.” “그냥 내 서랍에 두었는데요.” 울먹거리는 윤도를 겨우 달래놓고 온 집안을 샅샅이 훑었지만 윤도의 상장은 갑자기 증발이라도 해버린 듯 어디에도 없었다. 썩 후에야 잃어버렸던 윤도의 최우등생 상장을 찾았다. 그때 윤도는 유람을 가고 집에 없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만 뽑혀서 간 것이라 일도는 아무리 부러워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시 찾은 상장은 더는 윤도가 울며불며 오매불망 찾아헤매던 그것이 아니였다. 매직펜으로 윤도의 이름을 까맣게 지워버린 이름란에는 진일도라고 큼지막하게 씌여져 있었다. 나는 심하게 일도를 조졌다. “너 이게 무슨 심술이야!” 나는 분명 일도가 동생이 최우등생이 된 것이 심술이 나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도는 고개를 숙이고 쿨쩍거렸다. “남의 상장에 락서를 해놓고 뭐가 잘했다고 울어? 윤도가 최우등생이 된게 부러우면 너도 더 잘해야지, 뒤에서 이렇게 나쁜 짓이나 하면 쓰겠니?” “심술이 나서 그런게 아닌데…” “그럼? 왜 그랬어?” “내 거 만들어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어처구니라니… “이것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보여드리겠다구?” 일도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까지 해가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일도의 심정은 오죽했을가. 자기보다 뭐든지 낫게 하는 쌍둥이 동생이 있는 것은 일도의 죄가 아니다. 뭐나 잘하는 윤도만 아니였다면 일도도 충분히 사랑을 받는 아이였을 것이다. 이 아이를 외롭게 만든 것은 어쩌면 쌍둥이 동생을 만들어준 나일지도 모른다는 미안한 마음에 나는 일도를 꼭 품었다. “일도야! 엄마는 이 세상에서 일도를 제일 제일 사랑한다.” 쿨쩍이던 일도가 살며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윤도도 사랑해?” “당연하지.” “일도랑, 윤도랑 누가 더 좋아?” 일도가 애원하 듯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마치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온 아이 같았다. 일도의 눈에 아스라하게 안개꽃이 피였다. 내 마음은 흔들렸다. 그러면 안되였지만 나는 그예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차별을 통해 상처받는 아이한테 또 다른 차별적인 고백을 한 것이다. “엄마는 우리 일도가 더 좋아.” “진짜?” 일도가 허공 점프를 하듯 펄쩍 뛰여올랐다. “정말이야! 하지만, 이건 윤도하고는 비밀이야.” “그럼 됐어. 다 됐어.” 일도가 신이 나서 내 볼에 쪽 뽀뽀를 하고는 저만치 달려갔다. 엄마만 인정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가? 그 아이의 표정이 살아있었다. 그래. 너의 기를 살려줄 수만 있다면 그 말을 열번이고 백번이라도 해줄 수 있어. 그렇지만 부디 네가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기를 바라고 네 동생 윤도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12    유람을 떠났던 윤도가 한주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날은 마침 할아버지의 생신날이였다. 엄마의 마음을 확인한 뒤로부터 일도가 눈에 띄게 자신감을 찾아가는 듯했다. 일도는 할아버지 생신날에 전할 생신 축하 메시지를 종이에 적어서 의욕적으로 외웠다. 이번 만큼은 절대로 윤도한테 기회를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어보였다. 가족이 빙둘러 앉아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일도가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축하메시지를 전할 가장 완벽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보내주는 격려의 눈빛에 힘입어 일도가 막 일어서서 입을 떼려고 하는 찰나에 윤도가 잽싸게 일어나더니 씩씩하고 명랑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께 생신 축하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일도가 며칠전부터 준비했던 축하 말이다. 일도는 엉거주춤 일어나던 자세 그대로 멀거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윤도는 정말 다 컸구나.” 할아버지가 윤도를 칭찬하자 할머니가 일도를 재촉했다. “일도야, 너도 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야지.” 자기가 준비했던 말을 윤도가 먼저 해버렸으니 일도로선 억울하고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였다. 같은 말을 하면 윤도를 따라 했다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자기가 며칠전부터 준비했던 축하인사를 윤도가 홀랑 빼앗아갔다고도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기 기회를 빼앗아가는 윤도가 미웠는 지, 일도가 매섭게 윤도를 흘겨보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안해!” “쯧쯧, 형이라는 게.” 일도의 속도 모르고 사람들은 일도를 심술 많은 아이로 일축해버렸다. 나는 바삐 일도를 따라 나섰다. 아빠트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서 일도가 쿨쩍이고 있었다. “엄마, 나 윤도가 미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일도의 눈에는 미움과 적개심이 강렬하게 일었다. “누구나 나만 미워해. 윤도는 이뻐하구! 난 윤도가 없었으면 좋겠어.” 일도가 와락 내 품에 안겨들었다. 이 뭉클한 아픔. ‘형인데 뭐든지 동생보다 못하다’는 딱지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내 아들 일도. 혼자였다면 충분히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을 아이였건만 쌍둥이 동생과 다르다는 것, 뭐나 못하다는 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비교되고 차별시 받아야 하는 내 아들 일도. 나는 일도를 품에 안고 아이와 함께 울었다. “엄마, 난 엄마가 일도 엄마였으면 좋겠어.” “일도 엄마가 맞잖아?” “윤도 엄마가 아닌 내 엄마 말이야!” 아이가 절규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 아이의 심정은 리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수정란이 쪼개여져 두 아이가 만들어졌 듯이 뭐든지 두쪽으로 나눠야만 하는 것이 일도와 윤도의 운명이였다. 억울했을 것이다. 차례지는 몫이라도 똑 같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것마저 달랐으니 더더욱 억울했을 것이다. 가엾은 일도를 위하여 엄마가 돼서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우는 애를 안고 달래는 것밖에는!       13   그날은 아침부터 흐릿한 게 비가 올 잡도리였다. 학교로 가는 쌍둥이한테 우산을 가지고 가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과연 오후에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호되게 퍼붓는 비 속에서 일도와 윤도가 나란히 집에 들어섰다. 일도는 깔끔하게 비옷을 차려입고 우산까지 받쳐들고 있었다. 그런데 윤도는 금방 물속에서 건져 올린 듯 온몸이 젖어있었다. 많이 추운지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련신 재채기를 해댔다. 순간 내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기가 차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윤도 넌 우산은 어쩌고 이렇게 비를 뒤집어써?” “아침에 까먹고 안 가져갔어요.” 윤도가 큰일이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옆에 서있는 일도의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여났다. 비옷을 입고 우산까지 썼으니 비 한방울도 맞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화를 누르면서 일도한테 따졌다. “일도야. 너 왜 그랬어?” “뭘요?” “넌 비옷도 있고 우산도 있었는데 하나는 윤도를 빌려줄 수도 있었잖니?” “엄마, 윤도를 혼내세요. 맨날 까먹고 다니잖아요. 그러니깐 옷이 다 젖었잖아요.” 일도가 잘코사니라는 듯 물병아리가 된 윤도를 보면서 깔깔 웃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쩌다 이 아이가 이 정도로 모질고 독한 아이가 되였을가? 윤도가 밉고 싫다고 투정을 부릴 때는 그냥 순간적인 투정일 것이라고 여겼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던 모양이다. 일도는 형제간에 따뜻한 우애나 기본적인 동정심조차 없는 비정한 아이로 되여 있었다. 이 아이가 어쩌다가 이리 되였을가? 머리 속에서 기차가 충돌하는 폭음이 일고 시야도 흔들렸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화가 치밀었다. 엄마가 자기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듯 일도가 웃으면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팔꿈치에 닿은 그 아이의 손을 매정하게 떼여냈다. 그리고는 윤도를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일도한테 작정을 하고 차갑게 대한 것은 처음이였다. 내 딴에는 그 아이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를 바래서였다. 그런데 일도는 되려 원망스러운 눈빛을 하고 윤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4   이 아이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아기 적 일도는 인정 많고 따뜻한 아이였다. 아기 윤도가 울면 따로 잘 놀고 있다가도 엉금엉금 기여와서는 자기도 덩달아 삐죽거리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윤도를 달랬다. 제 몸집보다 더 큰 윤도를 꼭 안고 토닥거려주었고 어른들이 이쁘다고 먹을 거라도 주면 꼭 윤도 몫까지 받아오군 했었다. 엄마가 아파할 때면 조용히 옆에 와서 누워있기도 했다. 일도가 자주 아팠던 것도 어쩌면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다. 아플 때만이 온전히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그 아이의 비장의 무기였을 것이다. 일도는 다들 걱정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이상하고 나쁜 형은 아니였다. 어쩌면 일도는 ‘아우 타기’를 했을 뿐이였다. 동생이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싫어서 불안해했고 반항했던 것이다. 일도가 윤도를 못살게 굴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모두 그때문이였을 것이다. 봄날 한 가지에 피여난 꽃송이들도 가령 선후순에 따라 형님, 아우 정해주고 형님꽃은 반드시 동생꽃보다 크고 이뻐야 한다고 규정을 세운다면 꽃들 역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아닌가. 일도의 증상은 동생이 있는 많은 아이들이 어릴 적에 갖는 보편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증상이였을 뿐이다. 나는 일도를 리해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더욱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사건이 터졌다. ‘아우 타기’를 넘어서서 일도는 이제 아예 ‘아우 되기’를 작정했다. 그날 일도는 도대체 뭘하는지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도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방문을 따고 들여다보았다. 웬일이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일도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해! 어서 나와서 엄마를 도와줘야지!” “엄마, 여기 일도가 없어요!” 이놈 자식이 일하기 싫으니까 꾀를 부리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짐짓 되물었다. “그럼 넌 누구냐?” “나 윤도예요.” 나는 그들의 엄마였다. 뒤통수만 보아도, 기침소리만 들어도, 등뒤에서 다가오는 자취만 느껴도, 누가 누군지 금방 알아챈다. 무엇때문에 일도가 이런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거짓말로 엄마를 속이려고 하는 걸가? 그런데 아이의 얼굴은 너무 진지해서 전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이는 분명 자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일도인 것을 깡끄리 잊은 듯했다. “넌 윤도가 아니고 일도야. 귀신을 속여도 엄마를 못 속여!” “아니예요. 난 윤도예요!” 일도는 죽어라고 자기가 윤도라고 우겼다. 그 애는 윤도의 옷을 주어입고 있었다. 이때 윤도가 돌아왔다. “일도야, 이제 오니?” 일도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윤도를 향해 싱긋 웃었다. 어리둥절해진 윤도가 가방도 벗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난 윤도야. 일도는 너잖아. 진일도!” “너까지 왜 그러니? 내가 윤도야!” 그쯤 되자 나는 진짜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가 진짜 왜 이러는지. 윤도가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저 고개만 흔들었을 뿐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일도는 오랜 시간 윤도를 미워했었다. 하지만 그 시각 일도는 윤도가 되고 싶어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동생 윤도가 되고 싶어하고 있었다. 아니, 일도는 이미 윤도가 되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그토록 심하게 윤도를 미워했던 것은 결국 윤도가 부러워서였고 윤도가 좋아서였다. 일도가 제일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사실 그 자신이였던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한때 미치도록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내가 너무 부끄러웠고 싫어서, 하얀 명주처럼 곱고 세련된 부자집 딸 령이, 그 애로 될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령이로 변신하는 상상을 하면서 몸살을 앓았다. 령이가 아파서 학교에 못 오던 날, 음악선생님은 음악 반장이였던 령이 대신에 나를 내세워 노래를 지휘하게 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 진짜로 령이가 된 기분! 시간이 흐르지 말고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러주기를, 친구들이 나의 그 찬란한 순간을 기억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령이가 죽으면 내가 그 애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령이가 아파서 죽기 만을 기다렸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였다. 나는 점점 더 이상해지는 일도가 두려웠다. 차리리 맨날 엄마한테 와서 “일도가 이뻐? 윤도가 이뻐? 누가 더 이뻐?”하고 끊임없이 확인을 할 때가 나았던 것 같다. 나는 또 한번 큰 벽에 부딪쳤다. 이제 우리 집에는 두명의 윤도가 있게 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늘 함께였던 둘은 서로한테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에 일도는 퍽이나 자연스럽게 윤도의 역할을 해나갔다. 그의 ‘윤도’스러움에는 전연 어색함이 없었고 되려 일도로 살았던 예전의 그 어느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일도는 정말 윤도 같았다. 그래서 원래부터 일도가 아니라 윤도였을 수도 있지 않을 가는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여느때와 같이 그들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깼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윤도라는 것과 상대가 일도라는 생각 말이다. 엄마로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분명히 두 아이를 낳았었다. 그런데 그들은 윤도라는 한 아이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면 그들은 원래부터 한사람이였던 걸가? 일도와 윤도를 가졌을 때 꿈에서 나는 커다란 바위우에 핀 두송이의 빨간 장미를 보았다. 한송이의 큰 장미와 다른 한송이의 작은 장미였다.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두송이 장미를 향해 나는 달려갔고 호함진 큰 장미를 꺾으려고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큰 송이 옆에 핀 작은 장미가 너무나 애틋하고 가슴이 뭉클해서 작은 장미도 어루만지고 말았다. 같지 않은 크기의 장미로 나한테 다가왔던 것처럼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도 일도와 윤도는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윤도는 엄마의 배 속에서 씩씩하게 잘 놀았다. 뽈록뽈록한 것들이 만져질 때는 이러다 정말 아기가 배를 뚫고 나오는 것은 아닌 지 두려움이 생길 지경이였다. 그런데 아기집이 작아서 걱정을 많이 했던 일도는 꿈쩍도 하지 않는것 같았다. “좀 놀아주십사”, 어루만져주고 말도 걸고 해야만 못이기는 척 조금씩 꾸물꾸물거릴 뿐이였다. 그랬던 일도와 윤도는 태여나서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이 달라졌고 사람들은 두 아이가 한꺼번에 태여났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그 애들을 같은 기준에 놓고 저울질했다. 두 아이는 태여나자부터 사람들로부터 비교대상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두 아이 중에는 좀 더 나은 아이와 좀 더 못한 아이가 있기 마련이였지만 사람들은 쌍둥이기 때문에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 사랑받는 아이가 되기 위해 일도와 윤도는 꾸준히 상대와 싸워야 했고 힘든 겨룸에서 이겨내야 했다. 그것은 엄마 배 안에 있을 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던 것부터 시작된 셈이다. 아이의 전반 생애에 걸친 싸움은 지루하고 힘에 부쳤지만 항시 어른들이 함께 해줘서 아이들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무시로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어른들 덕분에 아이들은 한시라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상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어른들은 싸움의 결과에 진한 흥미를 느꼈고 이긴 아이한테는 관심을, 진 아이한테는 무관심을 선사하는 것으로써 아이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좌절시켰다. 어른들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고투했던 전쟁에서 윤도는 승자가 되였고 일도는 패자로 되였다. 사람들은 승자를 사랑하고 패자를 망각하였다. 소외되고 자비감에 빠진 패자는 점점 더 무기력해져서 점점 못한 락오자로 되였다. 패자는 패자밖에 될 수 없는 자신을 증오하였다. 하지만 승자 역시 슬펐다. 하나가 아닌 둘이였기 때문에 슬픔마저도 공유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였으니까. 그들은 항상 온전하지 못한 자기 몫에 갈증을 느꼈고 결핍으로부터 오는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으며 가진 것을 상대한테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부대껴야 했다.     15   둘 다 윤도가 되고 나서 애들은 별로 싸우지 않았다. 착하지 않은 일도가 사라지고 착한 윤도들만 남았으니 싸울 일이 없었던 모양이였다. 일도가 윤도인 척 연기한 지가 벌써 여러날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두 윤도는 자기네 방에서 공부를 했고 나는 기운없이 거실 쏘파에 앉아있었다. 오리지널 윤도는 듬직하게 공부를 하느라 자기 방에서 꼼짝도 안했지만 가짜 윤도는 벌써 여러번째 구실을 달아 거실에 들락거리면서 엄마의 존재를 확인했고 엄마가 제 시야 안에 들어와야만 시름을 놓군 했다. 아무리 윤도인 척해도 그 버릇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냉큼 베란다에 나가 ‘일도 꺼’라고 씌여진 화분통을 들여왔다. 한해전에 나는 일도와 윤도한테 화분통 하나씩 사주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의 화분에 물을 주고 부식토를 얹어주면서 열심히 가꿨다. 성격이 꼼꼼한 일도는 짬만 있으면 화분의 흙을 뚜졌고 가끔 지렁이도 잡아 묻어주군 하더니 그래서인지 일도 꽃이 한결 호함지고 의연하게 피여있었다. 나는 슬프디 슬픈 표정을 짓고 일도의 화분통을 매만지면서 일도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얼마 안 지나 일도가 촐싹거리면서 방에서 나왔다. 그 애는 애처롭게 앉아있는 엄마를 보고 무척 걱정스러웠던지 대뜸 울상이 되였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엄마가 마음이 아파.” “왜 아픈데?” “엄마는 일도를 볼 수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파.” 아이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도의 꽃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일도만 없어졌어. 일도가 너무 보구 싶어! 우리 일도는 어디로 갔을가?” 왠지 정말로 눈물이 났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일도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쿨쩍쿨쩍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 울지 마. 내가 일도야.” 조금 전까지도 자기는 윤도라고 천연덕스럽게 우기던 아이가 내 귀에 대고 자기가 일도라고 속삭였다. “아니야. 넌 윤도잖아.” 다시는 자작극을 꾸미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못을 박을 요령으로 나는 계속 넌 일도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우겼다. 그러자 아이는 믿지 않은 엄마 때문에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이였다. “나 정말 일도야. 일도라구. 엄마가 일도도 못 알아봐? 뒤통수만 봐도 안다 했잖아! 봐! 내 뒤통수, 일도 맞지?” 일도가 자기의 뒤통수를 나의 턱밑에 들이밀었다. “어디 보자!” 나는 일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뒤통수 보니 일도 맞네! 일도야, 너 어디 갔다 이제야 왔어? 엄마는 네가 보구 싶어서 죽을 번했어.” “나 어디 갔던게 아니야. 윤도가 되고 싶어서 윤도인 척해본 거야. 다시는 안 그럴게.” 나는 슬피 우는 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오래도록 등을 어루쓸었다. 단 5분 먼저 태여나 형이 되였던 일도는 태여나자마자 형이란 큰 타이틀 속에서 형이기 때문에 뭐든지 동생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고 동생보다 훨씬 못한 형이라는 손가락질에 견뎌야 했다. 일도가 만일 동생이였다면 일도의 못남에 대해 어른들이 그만큼 가혹했을가? 형이였기 때문에 일도가 당한 설음과 아픔은 배가 되였을 것이다. 동생이였다면, 윤도보다 부족한 게 많아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되려 사랑을 받았을 지도 몰랐다. 쌍둥이에게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형’이라는 딱지는 아이가 태여나자 바람으로 붙여졌고 내내 일도를 속박하는 무형의 형틀이였다. 형이기 때문에 일도는 자기의 부족함에 더욱 창피해야 했고 더욱 괴로워해야 했다. 결국 아이는 자기 이름을 버리고 칭찬을 한몸에 지닌 동생 윤도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그런데 왜 날 일도라고 했어? 윤도라 하지. 난 일도보다 윤도란 이름이 좋은데.” 일도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일도는 이름 때문에 윤도가 칭찬받고 사랑받고 훌륭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일도야. 이름은 그냥 이름일 뿐이야. 너와 동생, 너와 너의 친구들을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쓰이는 기호 같은 거야. 이름이 좋아서 더 잘하고 이름이 나빠서 못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일도란 이름이 얼마나 좋은데? 난 네가 일도인 것이 좋아. 네가 윤도 하는 게 정말 싫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일도가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윤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 싶었다. 한참 후 일도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내 이름은 일도.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는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는 더 많이 너의 이름을 불러줄게.” 사람이 태여나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 아이한테 어떻게 일깨워줘야 하는 것일가? 나는 난감하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조차도 어떤 것이 자기를 찾아가는 삶인지 아직 잘 모른다. 하긴 죽을 때까지 철저히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앞으로 되도록이면 이 아이의 이름을 많이 불러줘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 그 아이에게 자신을 온전히 살아가도록 하는 따뜻한 손짓이 될 수도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두 아이가 쌍둥이로 태여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마저도 피하지 못했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2    [수필]누군들 우물에 갇히지 않는가? 댓글:  조회:601  추천:0  2014-05-31
외국에 나가 있는 친구들이 꽤 많다. 그들은 외국에 가지 않은 친구들을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호칭한다. 그렇게 부르는 기저에는 있던 곳에서 떠나지 못한 친구들에 대해 발전성이 없음을 조롱하는 의미가 깔려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과연 누가 우물안에 있고 누가 우물밖에 있는것일가? 우물밖에 있는 개구리들은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들을 보고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하지만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들은 밖에 있는 개구리들을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가. 누가 안이고 밖인지는 영원히 상대적인것이니깐. 나다니는 바보가 집에 있는 똑똑이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만 려행은 현자는 더 현명하게 만들고 바보는 더 바보로 만든다는 말도 있다.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에 온후 한동안은 정말 살맛이 났다. 한때는 그야말로 새로운것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더 이상 새로운것이 새로운줄 모르겠고 좋은것이 좋은줄 모르겠었다. 그리고 어느날 문뜩 깨달았다. 난 여전히 우물안에 있다는것을! 나서 자란 고향이라는 《우물》을 뛰쳐나왔을뿐 지금 살고있는 곳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우물인것을! 영주권을 받고 이국생활 6년을 채우고나니까 이곳도 어느새 답답하게 느껴진다. 난 꿋꿋이 슬럼프 생활 석달을 채웠다. 개구리도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 잠간 주저앉는다고 하지 않는가. 충분히 주저앉아보았으니 아마도 난 곧 이곳을 떠나겠지, 더 큰 세상을 향해서. 하지만 새로 가는 곳 역시 우물임을 나는 알고있다. 우물안이 싫은 리유는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우물밖엔 기회가 많은만큼 리스크도 따른다. 지난 몇년동안 뉴질랜드에 여러 차례 대지진이 발생했다. 자연재해에 대한국민들의 관심이 증폭하자 지역마다 세미나를 열어 자연재해 대처요령을 학습시켰다. 손바닥만한 뉴질랜드 땅덩어리를 접시에 담겨진 스테이크처럼 쪼각을 내서 지역별 가능 자연재해를 설명해주는데 안전한 곳이 없었다. 내가 살고있는 오클랜드는 화산위험, 서쪽이나 북쪽으로 가면 쓰나미위험,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지진위험,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지진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에서 왜 사나싶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무심히 살아가고있다. 그나마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것은 이 나라가 세계 유일하게 핵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본토에 핵이 없고 설령 북반구에서 국부 핵류출이 아니라 핵대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기류 등 원인으로 해서 핵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한다. 요즘엔 외국에 나가 있는 가족이 많으니 고향에 계신분들도 함께 마음을 졸일 때가 많을거다.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도 가슴이 철렁하고 미국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도 신경이 곤두설거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곳의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겠지. 그것이 호주의 대산불이든 뉴질랜드의 화산폭발이든, 아르헨띠나의 은행파산이든 우리 동포가 아프리카까지 갈 일은 적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쪽 종족내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거다! 그러고보면 우물은 개구리를 가두기만 한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안전하게 지켜줬다. 나는 우물은 갇혀있고 우물안의 개구리는 무식하다고 배우고 자란 세대지만 우물이 항상 갇혀있는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투루판에 갔을 때 카레즈박물관에 가보았다. 카레즈는 천산의 만년설 녹은 물을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끌어내기 위해 우물과 우물을 땅밑으로 련결시킨 지하수로이다. 땅우로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우물이 보이고 땅밑으로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우물들이 련결되면서 물을 운반하는데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180배나 많은 곳이다보니 지하수로는 필수였다. 그런 카레즈가 투루판에 천개가 넘고 기원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그쪽 동네에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배운 애들은 우리랑 다른 생각을 할거다. 투루판 카레즈 우물의 개구리들은 전혀 갇혀있지 않으니깐. 카레즈를 따라서 폴짝폴짝 안가는데가 없을것이니. 박물관에 설치된 카레즈에 직접 들어가보니 물만 흐르는것이 아니고 량옆에 흙길도 있어서 개구리는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거다. 개구리 본인만 원한다면 5000키로메터의 대장정을 하여 우로는 천산산맥에서 아래로는 투루판 어느 무명씨네 포도밭까지 넘나들며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리라. 우물을 통해서 하늘도 보고 지나가는 새들을 통해서 세상 사는 얘기도 전하고. 따져보면 우리 동네에 카레즈가 없는것도 아니다. 몇해전에 일본 방사능류출때문에 중국에서 소금사재기를 한다는 뉴스를 보고 나는 뉴질랜드 한끝에서 소금과 다시마를 사들였었다. 여차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께 보내준다는 생각으로. 물론 그런 여차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때 사서 모은 소금을 지금까지 먹고있다. 류통기한이 지난것도 여러 봉지가 돼서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 벼룩이나 달팽이가 나타나면 박멸하려고 잘 간수하고있다. 지금 보면 다 부질없는짓이지만 그 당시에 어디 나만 그랬겠는가. 밖에 나와 있는 사람 대부분이 고향에 계신 친지들을 걱정하고 하나라도 보탬이 되려고 했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향은 투루판의 5천키로메터 카레즈보다 훨씬 긴 카레즈를 갖고있다.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고향과 세계를 련결시켜주는 카레즈의 작용을 하니 말이다. 우리를 괴롭히는것은 어쩌면 자신이 우물안에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만 우물안에 있다는 생각이 아닐가. 다 같이 있으면 그게 안이든 밖이든 상관 없는데 나만 고립되여있는것 같아서 두려운것이다. 우리 삶이 항상 그런 식이였던것 같다. 어느 정도 가난한지가 중요하지 않은데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가난하면 괴롭다. 어느 정도 못났는지도 중요하지 않은데 옆에 있는 사람보다 못하니 죽고싶은 마음뿐이다. 절대적인것보다 상대적인것이 더 중요한 세상! 그러고보면 대학교때 처음으로 접한 《상대평가》가 문제가 여간 많은것이 아니다. 59점을 맞아도 다른 학생보다 점수가 높으면 최고가 되는것이고 95점을 맞아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96점이면 나만 락제생이 되는것이다. 배운것을 많이 몰라도 상관없다. 함께 평가받는 사람보다 한개만, 1점어치만 더 많이 알면 되는게 《상대평가》이다. 우리가 한평생 우물을 벗어날수 없는것은 우물밖에 나와서도 우리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우물을 자신안에 만들기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온전히 시작할수 없을것 같은 기분이다. 하여 순례자가 성지에 들리듯 매일 아침 홀리우드 카페에 들린다. 저렴한 값에 비해 꽤 푸짐한 량을 자랑하는 서민적인 카페이다. 손님들도 거개가 가난한 류학생이나 현장 일군들이다. 질보다 량에 신경을 쓰는 고객들사이에 끼여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느라면 카페 커피를 마시는것이 사치스러운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보인다고 생각된다. 내가 마시는 커피는 0.8리터의 대형컵에 커피를 두 스푼만 넣고 나머지는 스킴 우유로 채운것으로 이름만 커피지 사실은 우유에 커피를 띄운것이다. 그러니 나의 하루를 팔딱거리게 해주는건 커피의 카페인이 아니라 커피를 마셨다는 느낌인것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빈 커피컵에 물을 채워서 길에서 마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일일 수분량을 채우지 못한다는 강박관념때문이다. 우리의 습관, 집착, 오랜 세월에 다듬어진 성격조차도 스스로가 만든 우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그것들이 날 가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안에서 난 편안함을 느낀다. 이런 론리조차도 내가 만든 우물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으리. 죽을 때까지 우물안에서 나오지 못한 개구리는 어찌됐을가? 혹시 후손들에게 《예전에 누가 나에게 바깥세상에 대해서 말해줬었어. 아름다운 세상이라구. 젊은 혈기에 나가보고싶었으나 이곳을 선택했지. 그리고 만족한단다.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야. 내가 속하는 곳이지. 나를 선택해준 곳이기도 하고.》라고 하고싶었거나 아니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바깥세상을 동경하면서 회한에 찬 여생을 보냈을수도 있겠다. 개구리도 인간처럼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것, 경험하지 못한것을 동경할테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있는것이 나한텐 최고임을 안다면 좋을텐데. 우물안팎이 사실은 똑같다고 말할수 있는것은 밖에 있는 개구리만의 특권인가?! 《우물안의 개구리》에 대한 세상의 편견은 이제 깨져야 한다. 사실 우물안이든 우물밖이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또한 이 세상에 우물이 아닌 곳이 어디 있을가. 작은 우물밖에 큰 우물이 있고 큰 우물밖에 더 큰 우물이 있다. 달에 간들 그곳 역시 다른 하나의 우물일뿐. 그러니 우리는 서로 다른 우물에 갇혀있을뿐이다. 세상 구조가 그러한데 누가 누구를 갇혀있다고 비웃을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 육신이 우물밖에 있고 우물안에 있는것은 중요한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우물속에 갇혀있는한 우리는 누구나 우물안의 개구리일뿐이다. 2013년 7월 14일 뉴질랜드에서/홍예화  
1    [수상소감] 제대로 글을 쓰는, 진짜 문학인이 되고싶다 댓글:  조회:469  추천:0  2014-05-31
제대로 글을 쓰는, 진짜 문학인이 되고싶다 -홍예화(소주대학교 교수, 수필가)     상을 받아서 참 기쁘다. 그런데 수상소감을 쓰는것은 많이 힘들었다. 멀리 계시는 어머니한테 조언을 구했더니 순식간에 회답을 보내왔다. 짧고 굵게! 《너무 오만해도 안되고 너무 겸손해도 웃기니 알아서 해라.》 결국 더 어려워졌다. 리영애선생님의 배려심 돋는 독촉전화를 받고서도 감히 손 대지 못했다. 특별하게, 멋있게 쓰고싶은데 정작 떠오르는것은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고 더 잘하겠습니다.》라는 식상한 멘트뿐이였다.   상을 받게 된 수필 《누군들 우물에 갇히지 않는가》를 쓴 때가 지난해 7월이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생겼다. 8월에 박사론문을 제출했고 10월에 중국 대학에서 교수임용 인터뷰를 봤다. 올해 년초에 오클랜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월부터 소주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있다. 우리 부모님의 말씀을 빈다면 《참 지루하게도 공부를 하더니 결국은 끝을 꼰》셈이고, 내 글의 표현을 빈다면 《한 우물에서 뛰쳐나와 다른 한 우물로 뛰여든셈》이다. 그무렵 나는 오클랜드시중심에서 벗어나 고속도로로 빠지는 길목옆 아파트에 살고있었다. 대학까지 도보로 40여분이 걸리는 거리를 항상 같은 길만을 고집해서 다녔고 늘 같은 카페에 갔고 같은 커피를 시켰고 같은 방식으로 마셨다. 그날 아침 문득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우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마저 생겼는데 그럴만한 특별한 리유는 전혀 없었다. 그날 역시 다른 때와 똑같은 하루였으니. 내가 만든 일상의 룰을 지키면서 편안함과 무료함을 동시에 느끼는 그런 하루. 어찌됐든 써놓고보니 다양하게 좋다. 과거의 자신을 들여다볼수 있어서 좋고 상을 받아서 좋다. 수상소식을 전해듣는 순간 갑자기 열정이 솟구치면서 당장이라도 작품을 쓰고싶었다. 이번 상을 계기로 제대로 글을 쓰고싶다. 지금껏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없이 어정쩡하게 내키는대로 문학의 길을 걸었던것 같다. 《문학의 길》이라는 표현을 쓰기조차 많이 부끄럽지만 상을 받으니 자신감이 생겨 만용을 부려본다. 이제는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진짜 문학인이 되고싶다.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해준 《길림신문》 편집선생님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진심 고맙다.   * 본문은 2014년 5월 29일 장춘에서 열린 “길림신문” 제1회“두만강”문학상시상식에서 발표되였다.-문학닷컴 편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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