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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가 있는 친구들이 꽤 많다. 그들은 외국에 가지 않은 친구들을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호칭한다. 그렇게 부르는 기저에는 있던 곳에서 떠나지 못한 친구들에 대해 발전성이 없음을 조롱하는 의미가 깔려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과연 누가 우물안에 있고 누가 우물밖에 있는것일가? 우물밖에 있는 개구리들은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들을 보고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하지만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들은 밖에 있는 개구리들을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볼수도 있지 않을가. 누가 안이고 밖인지는 영원히 상대적인것이니깐. 나다니는 바보가 집에 있는 똑똑이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만 려행은 현자는 더 현명하게 만들고 바보는 더 바보로 만든다는 말도 있다.
고향을 떠나 뉴질랜드에 온후 한동안은 정말 살맛이 났다. 한때는 그야말로 새로운것을 발견하는 재미로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더 이상 새로운것이 새로운줄 모르겠고 좋은것이 좋은줄 모르겠었다. 그리고 어느날 문뜩 깨달았다. 난 여전히 우물안에 있다는것을! 나서 자란 고향이라는 《우물》을 뛰쳐나왔을뿐 지금 살고있는 곳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우물인것을! 영주권을 받고 이국생활 6년을 채우고나니까 이곳도 어느새 답답하게 느껴진다. 난 꿋꿋이 슬럼프 생활 석달을 채웠다. 개구리도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 잠간 주저앉는다고 하지 않는가. 충분히 주저앉아보았으니 아마도 난 곧 이곳을 떠나겠지, 더 큰 세상을 향해서. 하지만 새로 가는 곳 역시 우물임을 나는 알고있다.
우물안이 싫은 리유는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우물밖엔 기회가 많은만큼 리스크도 따른다. 지난 몇년동안 뉴질랜드에 여러 차례 대지진이 발생했다. 자연재해에 대한국민들의 관심이 증폭하자 지역마다 세미나를 열어 자연재해 대처요령을 학습시켰다. 손바닥만한 뉴질랜드 땅덩어리를 접시에 담겨진 스테이크처럼 쪼각을 내서 지역별 가능 자연재해를 설명해주는데 안전한 곳이 없었다. 내가 살고있는 오클랜드는 화산위험, 서쪽이나 북쪽으로 가면 쓰나미위험,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지진위험,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지진위험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곳에서 왜 사나싶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무심히 살아가고있다. 그나마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것은 이 나라가 세계 유일하게 핵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본토에 핵이 없고 설령 북반구에서 국부 핵류출이 아니라 핵대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기류 등 원인으로 해서 핵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한다.
요즘엔 외국에 나가 있는 가족이 많으니 고향에 계신분들도 함께 마음을 졸일 때가 많을거다.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도 가슴이 철렁하고 미국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해도 신경이 곤두설거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곳의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겠지. 그것이 호주의 대산불이든 뉴질랜드의 화산폭발이든, 아르헨띠나의 은행파산이든 우리 동포가 아프리카까지 갈 일은 적겠지만 혹시 모르니 그쪽 종족내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할거다! 그러고보면 우물은 개구리를 가두기만 한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안전하게 지켜줬다.
나는 우물은 갇혀있고 우물안의 개구리는 무식하다고 배우고 자란 세대지만 우물이 항상 갇혀있는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몇해전에 투루판에 갔을 때 카레즈박물관에 가보았다. 카레즈는 천산의 만년설 녹은 물을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 끌어내기 위해 우물과 우물을 땅밑으로 련결시킨 지하수로이다. 땅우로는 규칙적인 간격으로 우물이 보이고 땅밑으로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우물들이 련결되면서 물을 운반하는데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180배나 많은 곳이다보니 지하수로는 필수였다. 그런 카레즈가 투루판에 천개가 넘고 기원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그쪽 동네에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배운 애들은 우리랑 다른 생각을 할거다. 투루판 카레즈 우물의 개구리들은 전혀 갇혀있지 않으니깐. 카레즈를 따라서 폴짝폴짝 안가는데가 없을것이니. 박물관에 설치된 카레즈에 직접 들어가보니 물만 흐르는것이 아니고 량옆에 흙길도 있어서 개구리는 먹고 자고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거다. 개구리 본인만 원한다면 5000키로메터의 대장정을 하여 우로는 천산산맥에서 아래로는 투루판 어느 무명씨네 포도밭까지 넘나들며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리라. 우물을 통해서 하늘도 보고 지나가는 새들을 통해서 세상 사는 얘기도 전하고.
따져보면 우리 동네에 카레즈가 없는것도 아니다. 몇해전에 일본 방사능류출때문에 중국에서 소금사재기를 한다는 뉴스를 보고 나는 뉴질랜드 한끝에서 소금과 다시마를 사들였었다. 여차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께 보내준다는 생각으로. 물론 그런 여차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고 그때 사서 모은 소금을 지금까지 먹고있다. 류통기한이 지난것도 여러 봉지가 돼서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 벼룩이나 달팽이가 나타나면 박멸하려고 잘 간수하고있다. 지금 보면 다 부질없는짓이지만 그 당시에 어디 나만 그랬겠는가. 밖에 나와 있는 사람 대부분이 고향에 계신 친지들을 걱정하고 하나라도 보탬이 되려고 했겠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향은 투루판의 5천키로메터 카레즈보다 훨씬 긴 카레즈를 갖고있다.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고향과 세계를 련결시켜주는 카레즈의 작용을 하니 말이다.
우리를 괴롭히는것은 어쩌면 자신이 우물안에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만 우물안에 있다는 생각이 아닐가. 다 같이 있으면 그게 안이든 밖이든 상관 없는데 나만 고립되여있는것 같아서 두려운것이다. 우리 삶이 항상 그런 식이였던것 같다. 어느 정도 가난한지가 중요하지 않은데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가난하면 괴롭다. 어느 정도 못났는지도 중요하지 않은데 옆에 있는 사람보다 못하니 죽고싶은 마음뿐이다. 절대적인것보다 상대적인것이 더 중요한 세상! 그러고보면 대학교때 처음으로 접한 《상대평가》가 문제가 여간 많은것이 아니다. 59점을 맞아도 다른 학생보다 점수가 높으면 최고가 되는것이고 95점을 맞아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96점이면 나만 락제생이 되는것이다. 배운것을 많이 몰라도 상관없다. 함께 평가받는 사람보다 한개만, 1점어치만 더 많이 알면 되는게 《상대평가》이다.
우리가 한평생 우물을 벗어날수 없는것은 우물밖에 나와서도 우리스스로 끊임없이 새로운 우물을 자신안에 만들기때문이다.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온전히 시작할수 없을것 같은 기분이다. 하여 순례자가 성지에 들리듯 매일 아침 홀리우드 카페에 들린다. 저렴한 값에 비해 꽤 푸짐한 량을 자랑하는 서민적인 카페이다. 손님들도 거개가 가난한 류학생이나 현장 일군들이다. 질보다 량에 신경을 쓰는 고객들사이에 끼여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느라면 카페 커피를 마시는것이 사치스러운것이 아니라 오히려 없어보인다고 생각된다. 내가 마시는 커피는 0.8리터의 대형컵에 커피를 두 스푼만 넣고 나머지는 스킴 우유로 채운것으로 이름만 커피지 사실은 우유에 커피를 띄운것이다. 그러니 나의 하루를 팔딱거리게 해주는건 커피의 카페인이 아니라 커피를 마셨다는 느낌인것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빈 커피컵에 물을 채워서 길에서 마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일일 수분량을 채우지 못한다는 강박관념때문이다. 우리의 습관, 집착, 오랜 세월에 다듬어진 성격조차도 스스로가 만든 우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난 그것들이 날 가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안에서 난 편안함을 느낀다. 이런 론리조차도 내가 만든 우물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으리.
죽을 때까지 우물안에서 나오지 못한 개구리는 어찌됐을가? 혹시 후손들에게 《예전에 누가 나에게 바깥세상에 대해서 말해줬었어. 아름다운 세상이라구. 젊은 혈기에 나가보고싶었으나 이곳을 선택했지. 그리고 만족한단다.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야. 내가 속하는 곳이지. 나를 선택해준 곳이기도 하고.》라고 하고싶었거나 아니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바깥세상을 동경하면서 회한에 찬 여생을 보냈을수도 있겠다. 개구리도 인간처럼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것, 경험하지 못한것을 동경할테니까. 지금 내가 가지고있는것이 나한텐 최고임을 안다면 좋을텐데. 우물안팎이 사실은 똑같다고 말할수 있는것은 밖에 있는 개구리만의 특권인가?!
《우물안의 개구리》에 대한 세상의 편견은 이제 깨져야 한다. 사실 우물안이든 우물밖이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또한 이 세상에 우물이 아닌 곳이 어디 있을가. 작은 우물밖에 큰 우물이 있고 큰 우물밖에 더 큰 우물이 있다. 달에 간들 그곳 역시 다른 하나의 우물일뿐. 그러니 우리는 서로 다른 우물에 갇혀있을뿐이다. 세상 구조가 그러한데 누가 누구를 갇혀있다고 비웃을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 육신이 우물밖에 있고 우물안에 있는것은 중요한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우물속에 갇혀있는한 우리는 누구나 우물안의 개구리일뿐이다.
2013년 7월 14일 뉴질랜드에서/홍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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