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길(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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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런 책, 우리 어린이들이 읽어도 좋은가 댓글:  조회:2469  추천:0  2014-01-20
평론                  이런 책, 우리 어린이들이 읽어도 좋은가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를 평함                                                                                      강 길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가  2008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의  차례는  평론  “끈질긴 노력  탐구적 시도—김영의 아동소설집 ‘딸라배’를 보고서”(김만석),  본문  단편소설 15편,  평론  “김영의 ‘딸라배’에  담긴 가정파탄과  민족비애상 표현에  부쳐”(신헌재), 평론  ”김영소설연구”(전성호),  꼬리글(김영)로 되였다. 아래에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밝힌다.   첫째,  종교를 수용하고 선전하였다.    ”하늘방석”,”찬송가소리”, “외동오리”  이 세편은 종교와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하늘방석”:  이 작품의 제목자체가 상징성를 띤것으로서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매일 아침전마다 방석에 무릎 꿇고 앉아 하느님께 기도 드리는 “(16쪽)행위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대한민국 륙군 대대장이고 철저한 기독교신자인 아버지와 하느님을 아예 믿지 않는다는 고등학교 교원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어린 딸은  어느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 결국은 각자가 도리가 있다고 여기고 신앙이나 과학이나 모두 수용한다는 내용이다. “찬송가소리”:  이 작품의 지현이 아버지는 정직한 기독교신자로서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단다. 그러다  쌀 한가마니를 어렵게 사는 이웃집에 준것이 안해에게 들통나 리혼을 당하고 서울로 갔단다. 아버지의 찬송가소리를 들으며 자란 지현이는 찬송가록음테프를 사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못사게 한다. 지현이는 두 다리가 절단된 동냥인에게 그 돈을 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현이가 그리도 그리워하고 흠모하던 아버지일줄이야. 술취한 사람을 구원하다 전동차에 치여 병신이 되였다는것이다. ”외동오리”: 이 작품의 철남이와 영희는 어느 곳 3학년학생이다. 내가에서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고기잡이를 한다. 교회에 다니는 영희는 철남에게 찬송가를 배워주겠다고도 하고  죽어 천당 가면 다시 부활되여 사람도 되고 꽃도 되는데 자기는 오리로 부활되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두 아이는 내가에서  알몸으로 노는 자기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른들을 이상하다고 여긴다. 그러다 영희 아버지에게  들켜 영희는 아버지에게 야단맞고 밤에 집을 나가 잃었졌다는것이다. 영희가 죽어 천당에 가서 다시 오리로 부활된것으로 암시하고있다. 중화인민공화국헌법 第36条에는  “国家保护正常的宗教活动。 任何人不得利用宗教进行破坏社会秩序、损害公民身体健康、妨碍国家教育制度的活动。”  이라고 똑똑히 밝혀놓았다. 그러니  ”하늘방석”, ”찬송가소리”,  “외동오리” 같이 종교를 수용하고 종교를 선전한 이러한것은  우리 어린이들이 읽을  작품이 못된다.   둘째, 성표현을  무분별하게 하였다.     ”외동오리”  작품속의 철남이와 영희는  3학년 학생이다.  이 나이면 남녀의 성차이에 부끄럼도 느낄 때다. 그런데 그들은 알몸으로 고기잡이를 한다.철남이는 집에서  “다 큰 애가 옷을 발가벗고 온종일 내물가에서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장난 쓴다” 는 말을 듣고 영희는 집에서 “다 큰 애가 철 없다”고 맞기까지 한다.  이튿날 둘은 또 내물가에서 만난다.”세상에 태여나서부터 영희앞에서 ‘고추’를 숨기지 않으며 자란” 철남이는”급작스레 흥분된 원숭이마냥 팔다리를 괴상하게 놀리며 춤을 추더니 주저없이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뭘 해? 빨리 벗지 않구.”라고 영희보고 소리친다.”울 아빠,엄마는 남자들앞에서 옷을 벗으면 절대 안된다 했어!”라고 하니 철남이는 “피- 그 뭐 보이지도 않는걸 가지구.” 하며 입을 삐쭉한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영희의 말: “흑…내가에서 옷을 벗은게 뭐 그리 대단해서…흑…” 철남이의 말: ”밤이면 말야, 울 아빠, 엄마들과 형님,누나들은 이 내물에서 발가벗고 목욕해. 그런데 우리는 낮에도 안된다니 이상하잖아?” “사스”  작품속의 소학교 3학년생인 금성이는 밖에서 놀다가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수 생각이 나서 돈 일원을 가지려고 뒤집에서 비디오를 보고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비디오의 벌거벗은 두 남녀의 추잡한 꼬락서니를 똑똑히 “ 본다. 아버지에게 쫓긴 금성이는 앞집 마작판에 붙어있는 어머니를 찾아가서 “씨, 아버지 뒤집에서…” 하고 “왼손 엄지손가락과 식지로 동그라미를 지어보이고 오른손 식지로 그곳에 연신 꽂으며” “이거 본다!”고  말한다.”어머?!”, “저 애가 벌써?!”, “아이, 기차라?!”  그것을 본 아줌마들의 말이다. 어머니한테서도 돈 일원을 갖지 못한 금성이는 학교 자기반 교실에 들어가 걸상에 앉아 흑판을 바라보니 “흑판이 텔레비죤형광막처럼 보이며 그속의 벌거벗은 남녀의 추잡한 모습이 환영으로 떠올랐”는데 “웬 일인지 그는 그것이 싫지 않았”고 “ 이상야릇한 기분과 함께 짜릿한 욕망이 생기면서  반급 녀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단다. ”신음하는 새싹”: 이 작품은 1인칭으로 씌여졌다.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저는 심한 전률을 느끼였어요.”로 시작되여 “그래서 이 편지를 쓰는것이얘요.” 하면서 1,2,3 번호를 달고 작품의 단락을 나누고 3의 첫머리는 “…편지를 보니 누군가 사실을 좀 알고 반영한것이 분명하군요.”라고  하면서 서술을  계속하다가 “미안해요.눈물이 편지지를 적시는군요…”로 작품의 끝을 맺었다. 작품의 서술자가 누군가의 편지를 보고  진실을 밝히려고 편지(작품)을 쓰고있는것 같은데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며 그가 왜 1인칭 나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는지 작품에 교대되지 않았다.  무슨 갈래판인지 종잡을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은 현실성이 없는 “사실”로 이야기를 펼치고있다.작품의 주인공 리일은 2학년 중학생이고 시중학교에서 진중학교로 전학한다.  선생님이 리일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와서  “리일학생, 이 걸상을 가지고 잠시 저 뒤줄에 가 앉으시오. 책상을 꼭 해결해주겠습니다.”라고 하니 리일은 ”선생님, 여기에 앉아 일없습니까?” “일없소.일없소…” 그리하여 리일은 녀자애인 “나”의 옆에 앉고  교실의 학생들이  일제히 와하고 웃음이 터졌다는것이다. 선생님이 먼저 리일더러 녀자애인 “나”의 옆에 앉으라고 말하지 못할 리유가 무엇인지 알수 없다.    “그래요.리일이는 확실히 조숙한 아이였어요…나는 한책상에 앉아 그것을 심심히 느꼈어요.”  서술자—“나”의 이 말은  “나”와 리일이 “잠시” 한책상에 앉은것이 아니라 “계속” 한책상에 앉았다는것을 말한다. 그러니 선생님이 책상을 꼭 해결해주겠다고 말한것이나 잠시 저 뒤줄에 가 앉으라는 말은 꼭 해야만 되는 말이 아닌 진실성이 없는 말이 아닐수 없다.     어느 하루 수학시간의 일이다.”수학시간이 거의 끝날무렵…리일이가  갑자기 ‘옛’ 하고 손을 들었어요.” “선생님, 소변부러 갔다오겠습니다.” ”뭐요? 좀 참소.” “그래 바지에 싸랍니까?” “저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입을 열었어요. ‘선생님,소변같은것은 휴식시간에 미리 볼수도 있겠지만 대변은 한시간전에 미리 볼수 없지 않습니까?”  “나”라는 녀자애는 무슨 특수공능이 있기에 한책상에 앉은 리일이 소변보겠다는것을 대변보겠다는것으로 느낄수 있는가? 이보다도 더 한심한것은 “솔직히 말하지만 그때 리일이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와 포옹하였을것이얘요.”이다.  작품에 “사랑” ,“련애”, “”키스”, “임신”이란 단어가  이모저모에서 씌여지고 리일과 “나”는 “신통한 한쌍”으로 학교와 학부모들의 오해를 받아 전교 사생들앞에서 비판도 받고 리일은 학교에서 제명된다.리일이 학교를  떠나는 날, “이윽고 그는 나의 손을 잡아쥐며 와락 저의 목을 끌어안았어요. 저도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끌어안았어요.”라고 작품은 마무리 지었다. 이것을 어떻게  “아직 봉건의식에서 철저히 해방되지 못한 “ 인간들의 오해로  “신음하는 새싹”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  일인칭 서술자의 사유는 중학생들이 련애하고 키스하고 임신까지 해도 그것은 선생님과 학부모의 질책을 받을 일이 아닌 “새싹”이란것이다.     이런 저급적이고 자극적인   자연주의적 성표현과  학생남녀간의 성의식을 무분별하게 찬양한 이것은  분석력이 약한 어린이들에게 유혹이 아닐수 없고  그것을   모방할수도 있다.    셋째, 인물형상 창조가  망태기다.   김만석과 전성호와 신헌재가  “성공적인 인물형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몇편의 작품만  보기로 하자.  ”벙어리철수”  바로보기 이 작품은 김만석과 전성호가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의 15편 단편소설중 첫째로 꼽은 성공작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야기가  생활론리에 맞지 않고  주인공  철수가  바보철수로 되고 서술자인 “내”가  장애인을 모욕한 실패작이다. --시내뻐스든 농촌뻐스든 시발점과 종점이 있다. 어떤 특수사유로 뻐스가 제 로선을 벗어날수가 있지만 결국은 종점으로 돌아가야 하는것이다.  “끝내 뻐스는 시립병원앞에 멈춰섰습니다…우리도 뻐스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벙어리철수는 머리를 푹 숙이고 내릴념이 없었습니다."(12쪽)  왜 종점이 아닌데 내려야 하는가? --“인민경찰아저씨는  강도들과 영용히 박투하다가 머리를 상하였는데 지금 생명의 위험은 분초를 다툰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1쪽) “병원으로부터 한 사람이 뛰여나와 운전수와 차장누나에게 뜨거운 인사를 드리는것이였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좀만 늦었더라면 구급할수 없었을것입니다.” (13쪽) 이 한 사람은 누구이며 경찰아저씨가 어떻게 병원에 오자마자 구급될수 있겠는가?   -- 이윽고 그는 꿈에서 깬 사람마냥 자리에서 일어나 잠간 멍하니 인민경찰아저씨를 지켜보더니 조용히 팔을 내밀었습니다.그는 인민경찰아저씨의 손을 쥐였습니다. 그는 인민경찰아저씨의 손을 쥐고 마치 죽음의 변두리에 떨어지는듯한 아저씨의 심장이 한번씩 뛸적마다 몸을 오싹 떨면서 그 손을 꼭 쥔채 있었습니다. (11쪽) 철수가 왜  그의 손을 쥐여야 했는가? 쥐게 된 리유의 교대는 없다. 려객들도 쥐지 않았고 담가를 메고 차에 올랐다는 사람들도 쥐지 않았다. “나”도 경찰아저씨의 손을 쥐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저씨의 심장이 한번씩 뛸적마다  몸을 오싹 “ 떤것을 느낄수 있겠는가? “그때 보니 벙어리철수의 바지는 후줄근히 젖어있었습니다. 나는 그만 웃음을 참을수 없어 ‘킥’ 하고 입을 싸쥐고 웃었습니다. 그러자  벙어리철수는 어쩔바를 몰라했습니다. 차의 려객들도…왁자그르 폭소를 터뜨리는것이였습니다…이윽고 그는 성난듯 책가방과 화판을 나의 품에 홱 팽개치고 차에서 뛰여내렸습니다.그리고는 얼굴을 싸쥐고 꽁지빠지게 내뛰였습니다.”(12쪽)  이것이 바로 “나”도 아니쥔 경찰아저씨의 손을 꼭 쥐였다는 철수가 바지에 오줌을 싸고 나타낸 표현이다.누가 뭐라고 해도 ,”나”라는 친구까지 입을 싸쥐고 웃었다 해도 경찰아저씨를 한시 급히 병원에 보내기 위해  바지에 오줌을 싼 철수이기에 그것은  얼굴을 싸쥐고 꽁지빠지게 내뛸만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철수가 집에 가서 엄마한데 매를 맞고 내가 가서 해명해서야 오해가 풀렸다는것은 철수를 바보철수로 빚어놓은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나”-- 서술자는 철수의 친구라면서 누구보다도 장애자 철수를 리해 못하고 모욕하고있는 인물이다.  장애자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수라고 하지 않고 “벙어리철수”라고 지칭한다. 이전에 애들이 “벙어리철수 머저리…”라고 놀려주었다면 “나”는 그보다도 더 철수를 ”벙어리철수”라고 인격모욕을 하고있다. 뻐스가 멈춰서자  소변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선것도 오줌을 참느라고  달팽이처럼 몸을 옹송그린것도  다 알면서 그리고 ”생명의 위험은 분초를 다툰다”는 경찰아저씨를 구하기 위해 철수가 오줌을 바지에 쌌다는것을 알아야 할 “내”가 철수의 바지가 후줄근히 젖은것을 보고 웃음을 참을수 없어 “킥”하고 입을 싸쥐고 웃었다는것은  “내”가 철수를 바보취급을 한것이고 “나”는 철수보다 더 못한 바보라는것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런 작품을 놓고 김만석은 “ ‘벙어리철수’에서 나오는 철수는 아동소설에서의 카시모도식(“빠리 노뜨르담”의 주인공의 이름) 인물로 형상화되고있다.”(8쪽) “외모는 보잘것 없지만 남을 위하여 모지름을  쓴 마음이 아름다운  철수의 심미적형상을 창조하였다.”(9쪽)고  하고  전성호는  “특히 소설  ‘벙어리철수’는 심리학적각도로 구상하면서 아동들의 심령미의 탐구를 목적으로 하여 쓴 한편의 성공적인 소설이라 주목된다.”고 하였다.  언어사용에서는 학자자태를 흉내냈으나 관점만은 별로다. “철수는 이런 상황에서 오줌 마려운것도 참고 몸부림치는 아저씨의 손을 꼬옥 잡고 조금이라도 아저씨의 아픔을 덜어드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 철수는 나중에 오줌을 바지에 싸면서까지 아저씨의 손을 놓지 않는다.”(8-9쪽)   김만석의 이 말은          그야말로 김만석은 작품평론을 하면서 작품창작까지 하고있음을 알수  있겠다. 몸부림치는 아저씨? 오줌을 바지에 싸면서까지 아저씨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작품 어디에도 이런 표현이 없다. 평론은 작품을 제대로 보고 써야 한다.  “딸라배” 바로보기  작품 “딸라배”의 주요 인물은 유치원생인 분이와 그의 오빠 소학교 6학년생인 철이다.작품에서 녀동생인 분이가 오빠인 철이를 따라 다니지만 작품의 사건전개에서는 분이가 주동적이고 철이는 수동적이다.작품제목도 “딸라배”이지만 아버지한테서 딸라를 가진것도 분이고 딸라로 배를 만든것도 분이고 그것을 딸라배라고 이름을 지은것도 분이고 그 딸라배를 두만강에 띄운것도 분이다. 다시말해서 분이의 형상창조성공여부가 이 작품의 성공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김만석은 “철이형상은 비교적 성공한 예술적형상”(8쪽)이라고 하였는데 이 작품은 분이의 형상창조를 먼저 말해야 한다. 그럼 분이의 형상창조는 어떠한가?   나는 언젠가 중국조선족문화통신(대표 조성일) 사이트에 “ ‘딸라배’의 허물보기”를 올려 그것을 밝혔으므로 더 말하지 않겠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소설 ‘딸라배’에서 보면 철 없는 분이에게 너무도 무리할 정도로 다듬어지고 승화된 말을 시키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있다.”(158쪽)고 한 전성호의 견해가 나의 관점의 정확성을  반증하고있다. 조금도 아니고 “너무도 무리할 정도”라는 표현은 인물형상창조의 실패를 말하는것이지 성공을 말하는것이 못된다.그럼에도 전성호는 김만석과 같이 “딸라배”를 성공적인 소설이라고 말한다. 자체모순이 아닐수 없다. 더욱 한심한것은 “소설의 주인공 철이의 어머니는 몇년전에 한국으로 돈벌이를 갔다가 거기서 시집가려 한다.그런줄도 모르고 철이와 그의 녀동생 분이는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있다.”(153쪽)라고 한것이다. ”응, 아버지가 맏아매하고 그러는데 어머니는 인젠 안 온대.한국에서 시집간대…”(분이의 말),  “거짓부리! 너?!”(철이의 말 63쪽) 이 한마디 대화뿐만 아니라 전반 작품에서 작자는 철이의 사유를 분이보다 못한것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래 분이가 “그런줄도 모르고”란 말인가?  평론은 작품을 제대로 보고 써야  한다. 한국인 신헌재는 “딸라배를 주으러 강물로 뛰여드는 철이의 행위는 자본주의에 현혹된 현대의 세태를 상징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딸라를 주으려다 결국 실패하고 물에 빠져 죽고만다는 이 작품의 귀결은 또한 자본주의에 현혹되여 자멸해가는 이 시대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으로 해석할수도 있다고 본다.”(141쪽)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  로무송출 및 우리 나라 제도에 대한 악렬한 공격이 될수밖에  없다.  “금빛목걸이”  바로보기 우리의 현실생활에서 금목걸이가 주로 사랑의 상징이라면 작품속의 소학교 6학년생인 김영에게는 금목걸이가 사치의 상징으로 된다. 연필 한자루도 아니다. 사탕 한알도 아니다.로씨야장사에서 망했다는 아버지가 자녀교육에서도 망할짓을 한것이다. 현성까지 와서 차표를 끊으니 돈 2원밖에 남지 않았고  웬 애가 대합실잡화점에서 4원짜리 금빛목걸이를 사는걸 발견하고  아버지는 산 차표를 되물리고 남은 돈 2원을 합쳐서 그 목걸이를 사고 아버지는 산동에서 온 로무일군처럼 꾀죄죄한 보따리를  들고 학교숙사문을 떼고 쑥 들어서고 어떤 애들은 로씨야 사탕과자를 좀 맛보자는 눈치여서 김영은  아버지 목을 끌어안고 꺼슬꺼슬한 볼에 연신 키스를 날렸더니 아버지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정히 싼 금빛목걸이를 꺼내 김영에게 주고 인민페로 환산하면 한 사백원 가량 된다고 거짓말까지 한다.그리고 사십여리 길을 보따리를 메고 맥없이 걸어서 집으로 갔다는것이다. 이 이야기자체가 진실성이 없는것은 물론 이 작품에서 보여진것은 사치의 부추김과 허위뿐이다. 이 이야기를 좀 돌려서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차표를 끊은 다음 아직 발차시간이 30분쯤 남아있어 대합실밖으로 나왔는데 마침 중간체조시간을 알리는 현성소학교의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거기 기숙사에 들어 공부하고 있는 외동딸을 찾아가 보고싶었지만 거지꼴로 찾아가지 못한 아버지는 딸이 아버지가 돌아온것을 알면 일요일에 꼭 그를  보러 올것이지만  아버지는 오래동안 못본 외동딸을 먼발치에서라도 한번 보려고 학교로 뛰여간다. 아버지는 딸의 눈에 띄울가봐 담장뒤에 몸을 숨기고 딸을 찾아보나 모두다 비슷비슷한 애들이라 결국은 차시간이 다되여 외동딸을 찾아보지 못하고 아쉽게 돌아선다. 이렇다고 할때 딸에 대한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은 가짜 “금빛목걸이”가 아니라 천금주고도 바꿀수 없는 마음일것이다. 이 작품은  사십도 되지 않은 아버지나 6학년 녀자애의  심리는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씌여졌다. 김만석은  “ ‘금빛목걸이’에서 작자는 로씨야로 돈 벌러 갔다가 망하고 돌아온 아빠가 주인공 김영에게 4원짜리 가짜목걸이를 사온 사건을 취급하고있다…작자는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의 가치에 방점을 찍고  초점을 맞추면서 사랑 그 자체가 중요한것이지 사랑의 표징인 목걸이는 형식에 불과한  차요한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있다.”(4쪽 )고 하고 전성호는 “ ‘금빛목걸이’는 하나의 아이로니속에 숭고미를 내포시켰다”(154쪽)고 했는데 이런 견해는 모두 현실생활을 떠난 잠꼬대같은 소리이다. 단편소설 "딸라배"가 "별나라"1997년 6기에 처음 발표되였다. 단편소설 "딸라배"가 "제5차리영식아동문학상"을 수상, 평심위원회성원은 리성권 김득만 김만석 정몽호 전상훈 리천석 허호범 최문섭 등 8명, 최문섭의 "보다 높은 차원의 아동문학작품을--제5차리영식아동문학상수상작품평선과 더불어", 이 모든것이 "별나라"1998년 2기에 발표되였다. 김만석이 "연변대학아동문학연구소"이름으로 조직한 "김영아동소설연구모임"에서 강길---나는 "딸라배"와 "금빛목걸이"에 한해서 김만석,전성호와 상반되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2004년부터 시작하여 김만석은 이른바 "중국조선족아동문학대계"1-6권을 편집출판하였었는데 1권에 "딸라배"를 넣었다. 김만석은 2003년 3월 25일에 "강길이 공격한 사람들의 제자 한동문 문아동"이 썼다는 이른바 "밝히지 않으면 안될 사실---강길의 '꼬리에 쓴 머리말'에 대한 조사보고"란 닉명신을 작가협회에도 보내고 문학과예술 편집부에도 보내고 출판사의 주소로 나에게도 보냈었는데 "강길이 아무리 김영의 아동소설을 내리 깠지만 김영의 아동소설 '딸라배'는 이번 '중국조선족아동문학총서' 제1권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동소설로서 한국에 선참 소개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고 한다"라고 떠버렸다. 그리고 2권에는  한국인 신헌재의 "김영의 '딸라배'에 담긴 가족 파산과  민족적 비애상 표현 고"를  넣었다. 강길---나는 신헌재의 틀린 관점을 반박한  " '딸라배'의 허물보기"란 평론을 전성호(당시 연변대학아동문학연구소 리론연구조 조장이였다고 함)에게 주었었는데 얼마후 전성호가 김만석이 부동한 관점은 실을수 없다 했다면서 나에게 되돌렸다. 뿐만아니라 김만석은 이른바 "중국조선족아동문학대계"에 강길---나의 작품은 소설 한편, 동화 한편, 동시 한수도 넣지 않았다. 김영은 1997년 "별나라"에 "딸라배"를 발표하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2008년에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를 묶었었는데 김만석,전성호,신헌재의 "딸라배"에 대한 관점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는 본문이 모두129쪽,  평론이 모두 42쪽 즉 본문의 3분의 1이나 된다 . 그야말로 아기보다 배꼽이 크다 아니할수 없겠다.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에서는 우리 어린이들의 본보기가 될만한 긍정적인물은  거의 찾아볼수 없다. 죽고 시달리고 신음하는 인물이 대부분이다. 그것조차 진실성과 필연성이 없는 억지투성이다.게다가 종교를 수용선전하고 무분별한 성표현을 서슴치 않았고 우리 제도를 비방중상한 외국인의 글도 실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하나의 책이 편집출판되는데 3심제를 걸쳐야 한다. 1심은 책임편집이 보고 2심은 편집실주임이 보고 3심은 총편이 보는 제도이다.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의 책임편집은 김현순이다. 3심은 정년퇴직후 초빙되여 "편심실"에 있은 최문섭이 총편을 대신하여 보았다. 그러니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가 문제가 된다면 책임편집의 책임은 물론 3심을 본 최문섭의 책임이 더 클수밖에 없다. 최문섭은 이런 작품, 이런 평론을 우리 어린이들이 보아도 좋다고 그대로 나가도록 푸른등을 켜주었다. 이는 최문섭의 문학눈높이, 최문섭의 사업태도, 최문섭의 정치립장을 말해준다.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의 발행부수는 3000책이다. 5년전에 주신문출판국에서 김영아동소설집"딸라배"에 대해 처리했다고 하는데 연길시신화서점에서는 2014년 1월 17일에도 이 책을 팔고있었다. 현재 주신문출판국의 지시로 연길시신화서점에서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의 판매가 금지되였다. 김영아동소설집 “딸라배”는 우리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에 해를 줄 책이지 도움을 줄 책이 아니다.
14    소감님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댓글:  조회:1705  추천:2  2014-01-15
 소감님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소감님, 안녕하십니까? 조글로에 올린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말한다”는 글에 댓글을 올려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리고싶습니다. “바른 말을 하기 힘든 세월에 강순길씨가 용감하게 자기 견해를 말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라고 하셨으니까요. 보고도 못본체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소감님은 “강길선생의 비평정신을 지지하면서 즉석에 느낀 소감을 적었습니다.” 문학은 론쟁속에서 발전하는것이겠지요. 누구나 이렇게 말은 하지만 자기와 부동한 관점이 있는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조글로 작가미니홈에서 김만석의 “동시창작, ‘늙은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최삼룡이 “2000년대중국조선족 10인동시집”출간식 및 “2000년대중국조선족동시평론모임”에 참석하여 “이번 동시집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 동시단에는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 외에도 동시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작품집 작가를 선정한것은 잘못되였다. 이런 작품집이 어떻게 ‘우리네 동시’를 대표하는가?”고 질의를 제기하였답니다. 한 네티즌은 “2000년대중국조선족10인동시집”에 대해 2000년대 이전의 작품이 적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만석자신도 “김현순의 평론에서는 10인동시집에 수록된 10명의 동시인들의 작품을 미시적으로 분석…..모방작에 대하여 예리하게 지적”하였다고 긍정하였습니다. 이렇다고 볼 때 편집자인 김만석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재검토해보는것이 학자다운 태도이겠지요. 그런데 “대회에 참석한 교수, 학자, 그리고 나이 많은 작가들은 한결같이 이번 대회에 최삼룡이를 참석시킨것이 최대의 실패라고 말하였다.”고 했답니다. 그런 교수, 학자, 작가들이 한결같이라니? 도대체 누구누구인지 그 이름을 알고싶어지네요. 진정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거나 남이 박수를 친다고 덩달아 박수를 춰주는 로보트같은 사람일것입니다. 소감님과 제가 최문섭 동시 “콩나물”에 대해 론쟁이 붙은것처럼 ”2000년대중국조선족10인동시집”에 대한 부동한 관점은 론쟁을 걸쳐서 깨야할 문제이지 사람을 배척한다는것은 학자다운 모습이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가 한 일이 무조건 성과라고 인정하는것은 과학적관점이 못됩니다. 다음은 동시 “콩나물”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소감님은 저의 관점에 대해 “ 도리가 있는 말입니다. ‘콩나물‘에 대한 견해는 과학적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예술작품은 다 생활론리에 딱 맞게 쓰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특히 아동문학작품은 생활론리에 맞지 않게 쓰는 명작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아동문학작품을 접할 때 그 예술적인 흐름속에서 생활론리를 잊고 작품속에 빠져버리게 되지요. 아니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줄수 있겠습니까. 세계를 뒤흔들고있는 하리포터는 생활론리를 아주 배척해버리고있습니다. 그러나 애들은 환호하고있습니다. 콩나물’에 대한 비평은 정확한 일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딱 그런것도 아닙니다. 콩나물을 접하면서 나는 아주 미적인 느낌을 가졌으니깐요. 콩나물을 줄을 섰다고 하는것을 비평하고있는데 줄을 섰다고 보면 안됩니까.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 또 시루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콩나물을 음표로 상상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동요가 가득 차있다고 상상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강선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 있고 그것이 정상일수도 있습니다. 동심의 눈길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어른의 눈길, 그것도 생활론리에 맞는 눈길로 보고있기때문입니다. 예술론리=생활론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셨지요. 동시, 동화,소설 등 문학쟝르는 모두 자기의 특점이 있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다 생활론리에 딱 맞게 쓰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라고 한 생각은 학술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니 소감님에게 례를 들어 설명할수밖에 없군요.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할수 있지요. 그렇다고 누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참새를 보고 줄지어 간다고 말합니까? 밭에 잡초가 무더기로 자라는것을 보고 누가 줄을 섰다고 말합니까? 생활론리란 이런 상식으로 통하는것을 말하는것입니다. “콩나물을 ……줄을 섰다고 보면 안됩니까.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 소감님은 콩나물이 줄을 섰다고 보면 줄을 선걸로 보이는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생활의 반영입니다. 농촌에서 벼모를 키우는데 비닐판을 씁니다. 가로세로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벼씨를 뭍습니다. 그렇게 키워낸 벼모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한들 머리를 저을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모판에 벼씨를 뿌려서 무더기로 자라올라온 벼모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한다면 아이들인들 믿겠습니까? 소감님이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소감님에게 아이들이 싫어하는것을 왜 굳이 줄을 섰다고 해야 하는지 그까닭을 반문하고싶습니다. 조글로 작가미니홈에는 김만석의 “중국조선족동시발전과정과 2000년대 우리동시”란 글이 올랐는데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여기서 원관념 ‘콩나물’을 보조관념 ‘음표’로 둔갑시키고 그 다음 회화적인 시루안에 빼곡한 콩나물의 정적인 형상을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청각적인 형상으로 엉뚱한 승화를 시킨 여기에서 이 동시의 매력적 형상이 한결 돋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문섭 “콩나물”이 저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콩나물이 줄을 섰다거나 콩나물이 곧 동요라고 한 주장이 생활론리에 맞지 않고 합리성이 없기때문입니다. 한국 동시인 최계락의 “꽃씨”를 최문섭의 “콩나물”과 대조해서 감상해봅시다. 꽃씨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있고//꽃씨속에는 /노오란 나비떼도 숨어있다// 꽃씨를 세번 반복하면서 잎을 말하고 꽃을 말하고 나비를 말했습니다. 작은 꽃씨가 흙에 묻혀 싹 트고 자라서 잎도 달리고 꽃도 피고 나비도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이 동시는 생활론리에 맞고 합리성이 있을뿐만 아니라 작자의 착상과 생동한 예술형상창조가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작자는 어린이들에게 작은 꽃씨 하나의 거룩한 생명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느끼도록 한것 같습니다. 노란 /음표들이/실눈을 뜨고/줄지어 서있다// 하얀 /동요가/시루안에 빼곡이/ 차고 넘친다// 최문섭의 “콩나물”은 시루안에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했는데 그래 하얀 동요란 뭘 말하려는것입니까? 소감님은 “콩나물을 접하면서 나는 아주 미적인 느낌을 가졌으니깐요.”라고 하셨는데 우리 어린이들이 이 동시를 읽고 소감님과 같은 미적인 느낌을 느낄수 있을가요? 저는 한때 “소년아동”잡지에서 동시편집도 하고 동시집도 둬권 묶어 냈었는데 “콩나물”같은 동시는 작품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소감님, 마지막으로 작품론쟁태도에 대해 좀 더 말하겠습니다. 문학론쟁은 저도 하고있고 소감님도 지금 하고있습니다. 문학론쟁은 사실과 도리로써 우리의 인식이 진리에 접근하게 하고 앞으로의 보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최문섭의 하나의 자그마한 동시 “콩나물”은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세워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문제와 이어져있기때문에 동시 “콩나물”에 대한 평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론쟁으로 옳은 결론이 내려져야 할것입니다. 문학론쟁은 견해의 차이이지 자존심의 대립으로 되여서는 아니됩니다. 소감님은 “바른 말을 하기 힘든 세월에 강순길씨가 용감하게 자기 견해를 말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라고 하셨지요. 거기에 저도 한마디 덧붙이고싶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기 잘못을 서슴없이 승인할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의 참뜻을 리해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만 그치겠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강 길 2014.1.15
13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말한다 댓글:  조회:2290  추천:1  2014-01-09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말한다                                                                                                 강 길     언젠가 나는 “이런저런 동시를 보고 한마디”란 글을 써서 조글로 사이트에 올렸다. 네트즌의 반영은 한 사람인가 시원하게 잘 썼다고 호응하고 반대하거나 부동한 의견은 오르지 않았다. 최문섭의 동시 “콩나물”은 내가 비평한 동시중의 한수이다. 노란/음표들이/ 실눈을 뜨고 /줄지어 서있다// 하얀 /동요가 /시루안에  빼곡이 /차고 넘친다 보다싶이 2련 8행으로 된 동시다. 우리가 작곡가를 보고 콩나물대가리를 그린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음표가 콩나물대가리를 닮았기때문이다. 그러니 콩나물을 보고 음표를 련상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콩나물이 줄지어 서있다? 마치도 소학생들이 운동장에 줄지어 서있는듯이? 최문섭이 무슨 콩나물시루를 보고 이 동시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물을 먹고 무더기로 자라올라오는 콩나물은 보았지만 줄지어선 콩나물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시루안에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똥도 아닌 동요가 빼곡이 차고 넘친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콩나물대가리=음표  음표=동요 고로 콩나물=동요   이는 최문섭의 사유방식이다. 콩나물대가리가 음표를 닮았다 해서 콩나물=동요라고 한것은  억지가 아닐수 없다. 최문섭의 론리가 성립된다면 시루안에 동요뿐만 아니라 한국노래, 조선노래,중국노래,일본노래도 가득 차있다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렇다면 동요가 차있다는 주장이 독특한 시적발견으로도 될수 없을것이다. 동요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최문섭이  시루속의 콩나물을 보면서 노래소리도 들었다는것은 환각일뿐이다. 콩나물은 우리 민족만 키워먹는것이 아니고  한족 등 다른 민족들도  키워먹는다.  하얀 동요든 노란 동요든 검은 동요든 시루안에 동요가 차고 넘친다는것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전성호는  "아동문학연구문집" (202쪽)에서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이 동시에서 콩나물의 하얀 줄기를 시각적인 감수로부터 청각적인 감수로 전이시켜 동요라고 명명한 시인의 이 비약은 콩나물자체를 음표에 비기는 세속적인 관습과 이어지고있는데 독자들에게 생동감을 안겨주면서 역시 신묘한 착상이고 자연스러운 전개이며 발견이라 인정된다." 하고 김만석은 "중국조선족동시발전과정과 2000년대중국조선족동시"란 글에서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여기서 원관념 '콩나물'을 보조관념 '음표'로 둔갑시키고  그 다음 회화적인 시루안에 빼곡한 콩나물의 정적인 형상을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청각적인 형상으로 엉뚱한 승화를 시킨 여기에서 이 동시의 매력적 형상이 한결 돋보인다"고 하였는데 전성호의 "이 비약"이나 김만석의 "엉뚱한 승화"는 모두 생활론리를 떠난데서 비롯된것이다 연변작가협회아동문학창작위원회,연변조선문독서사,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는 최문섭 별세 1주기를 맞아 4월 20일부터 1개월간 연길공원 동시동네에서 “콩나물”을 비롯한 14수의 동시로  “고 최문섭 동시화전”을 열었다고 한다. “콩나물”은 최문섭의 대표작이 될수 없다.       또한 연변작가협회의 위탁을 받고 지난해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최문섭의 “콩나물”동시비를 세우게 된다고 했었는데 올해 최문섭 별세 2주기로 밀어놓았다고 한다.       동시 “콩나물”은 2003년에 출판된 최문섭동시집 “물수제비”에 수록된 작품이다. 최문섭이 그 “콩나물”을  책의 뒤표지에까지  박아놓은것을 보면 스스로 인정한 최문섭의 대표작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콩나물”을  강길- 나는 작품이 아니라고 호된 비평을 한것이다.그러나  아직까지 누구도 내가  볼수 있도록 나의 관점을 반박한 글을 어디에도 올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직적으로 “콩나물” 동시화전을 펼쳤거나 “콩나물”동시비를 세우고있다. 이런 조직적행동이 옳바르게 진행된 행사인지 세번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돌에 새겨놓것은 마사버릴수는 있어도 지워버릴수는 없다. 어느 학교의 “반디불”동요비에는 “살금살금 뛰여라“ 쯤으로 되여야 할것을 “살금살금 기여라”로 새겨놓았을것이다. 연변사전이나 조선사전이나 한국사전이나 어느 사전을  뒤져보아도 “기다”의 뜻풀이는 “배를 바닥에 붙이고 움직여 나아가다”로 되여있다. 그러니 기여서 어떻게 공중에 날아다니는 반디불을 잡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옳바른 단어사용 교육도 책임져야 한다. 하나의 단어도 이럴진대 전반 시적착상이 엉망인 동시를 돌에 새겨 “콩나물”동시비를 버젓이 세운다는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는  김례삼,채택룡, 윤동주,윤정석  네분의 동시비가 세워진걸로 나는 알고있다. “고개길”, “병아리”, “앵코타기”는  모두 연변에서 세월과  더불어 생명력을 이어온  명동요이다. 그속에 최문섭의 “콩나물”동시비가 세워진다면 연길공원 동시동네가 잡동사니동네로 되고말것이다.   동시비는 돈만 있으면 세워지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동시에 대한 긍정일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 문단의 력사적기념비로 살아 남아야  할것이다.
12    손발의 고마움 (동시) 댓글:  조회:927  추천:31  2010-03-08
손발의 고마움                   강 길손 손 손손이 없다면어떻게 살수 있을가네 손 내 손 우리 모든 손일 잘 하는 손손 손 손 손이 있을 때고마움을 알아야겠네발 발 발발이 없다면어떻게 살수 있을가네 발 내 발 우리 모든 발길 잘 가는 발발 발 발 발이 있을 때고마움을 알아야겠네
11    코끼리 (동시) 댓글:  조회:1816  추천:52  2010-03-08
코끼리            강 길코가 길고길어 땅에 대이겠네코끼리코끼리코코코가 기네엄마 코도 길고 아기 코도 기네코끼리코끼리코코코가 기네이름 하나만은 잘도 지어졌네코끼리코끼리코코코가 기네
10    민들레엄마 (동시) 댓글:  조회:906  추천:19  2010-03-08
민들레엄마               강 길봄 여름 내내고이 고이 키워가냘픈 머리우에동그랗게 떠인흰 갓털의 씨앗그것은-민들레엄마 아들딸이란다바람아불더라도살랑살랑 불고불어민들레씨앗동- 동-기름진 땅우에 날라가주렴고운 자식미운 자식가슴 아픈 모든 자식그 어디에 가든뿌리박고꽃피고열매맺기를민들레엄마는 두손 모아 빈단다
9    어머니의 손길 (동시) 댓글:  조회:775  추천:13  2010-03-08
어머니의 손길                  강 길낮이면 낮대로돌이는 개구쟁이밤이면 밤대로 돌이는 개구쟁이태질을 하며이불을 걷어차고잠꼬대하며엄마를 부르면어머닌 주무시다도눈을 뜨시고아들의 잠자리보살펴주신다나뒹군 베개다시 곱게 베여주고찬바람 들세라이불깃 꽁꽁밤은 깊고깊어잠도 깊으련만어머니의 잠은마냥 토끼잠 사랑의 손길은때가 따로 없이한밤중에도가만히 뻗어간다
8    아픔의 아픔 (동시) 댓글:  조회:802  추천:13  2010-03-08
아픔의 아픔              강 길아기가 아파하면엄마는아기 대신아파해주고싶다아파도말할줄 모르는 아기엄마는아기보고\"니 감기 나줘\"하신다
7    엄마란 이름 (동시) 댓글:  조회:871  추천:12  2010-03-08
엄마란 이름                강 길엄마란 이름 참 별나네요놀랄 때에도저절로 나오는엄마란 소리아플 때에도저절로 나오는엄마란 소리기쁠 때에도저절로 나오는 엄마란 소리내가 태여나맨처음 익힌그 이름언제나 입에서떠날줄 몰라요
6    울타리 (동시) 댓글:  조회:840  추천:25  2010-02-06
울타리              강길병아리는빠져나갈 구멍 찾지를 못해-삐악삐악  삐악삐악...울타리안을 맴돌며목이        다아                 쉬고엄마닭은빠져나올 구멍 찾아주지 못해-꾸꾸꾸꾸  꾸꾸꾸꾸...울타리밖을 맴돌며속이         다아                 타고
5    거울속의 나 (동시) 댓글:  조회:845  추천:48  2010-02-06
거울속의 나                  강길거울속의 나하고방긋 웃었다책가방 메고설랑집을 나설 때마음속 숨은 다짐숨은 다짐을거울속의 나만이알고있었다
4    엄마의 뜨개질 (동시) 댓글:  조회:842  추천:27  2010-02-06
엄마의 뜨개질                    강길한코한코시작하여한코한코늘여가는엄마의 뜨개질텔레비죤보면서도엄마 손은일을 하신다언제면다될가기다려지더니어느새다된멋진 털실조끼한코 + 한코 + 한코 ......=  몇천몇만 코일가?엄마의 사랑끝간데 없이하나로 이어져있어입지 않고 보기만 해도가슴 따습다
3    동그란 젖내 (동시) 댓글:  조회:833  추천:18  2010-02-06
동그란 젖내                   강길엄마어디가셨지?엄마없는 밤이불포옥쓰고 누워-엄마  엄마...가만히불러보면내 입에서동그란 젖내물씬 나요
2    동시 \"작은 해님\" 댓글:  조회:805  추천:19  2010-02-06
작은 해님                강길아기가 태여나면엄마도 태여나고아빠도 태여난다엄마 얼굴에꽃웃음 방긋아빠 얼굴에웃음꽃 벙긋작은 해님 떠올라집안은 화안하다
1    하늘바위샘물 댓글:  조회:925  추천:30  2009-02-20
  어느 한 곳에 하늘바위산이  높이높이  솟아있습니다. 깎아세운듯한 바위가 하늘을 찌르고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하늘바위 밑동에는 바가지 모양같이 옴폭 패인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돌바가지라 부르고 그 돌바가지우의 바위벽에는 누가 썼는지 ‘하늘바위샘물’이란 글귀가 또렷이 새겨져있답니다.                        하늘바위 밑동 돌바가지,                    말라버린 돌바가지라고                    생각지 말아라.                    바위품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세찬 숨소리                    쏴- 철썩, 쏴- 처절썩.                                                한결같은 믿음                    한가슴에 지니고                    주먹으로 쾅, 쾅, 쾅                    바위돌 세번 치면                    찰랑찰랑 솟아오르리                    맑디맑은 한바가지                    하늘바위샘물...     세월과 더불어 이 시는 한입 두입 읊어지고 전설같은 이야기는 마치도 눈덩이를 굴리듯 보태어지고 둥그러졌습니다.   한 총각이 하늘바위샘물을 마시고 외적을 한 주먹에 열놈씩 쓸어눕힌 천하장사가 되였다느니, 한 엄마가 숨진 아이에게 하늘바위샘물을 먹이고 다 죽은 애를 살려냈다느니, 한 늙은이가 하늘바위샘물을 욕심스레 너무 마시고 그만 아기로 돼버렸다느니... 그야말로 듣는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해주었습니다.   달래동 마을에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서 하늘바위샘물전설을 구수하게 들으며 자란 돌쇠란 소년이 살고있었습니다.   돌쇠에게는 순이란 짝꿍이 있습니다. ‘너는 엄마, 나는 아빠’ 하며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소꿉동무였습니다.   어느 해인가, 달래동 마을에 몹쓸 돌림병이 퍼졌는데 순이는 열이 나 몹시 앓더니 갑자기 두 눈이 멀어버리고말았습니다.   “눈멀어 사느니 죽기보다 할가...”   “죽는다는 말 말아. 내가 있잖아.”   돌쇠는 어깨를 들먹이는 순이를 달래주었습니다.   “니가 뭐길래?”   “난 니 신랑이잖아.”   “그땐 내 눈이 말짱했었거든...”   “눈이 말짱해도 내 각시, 눈이 멀어도 내 각시, 넌 아무 때든 내 각시가 될거야.”   “싫어, 난 죽고 말테야.”   “제발 죽지는 마. 내가 널 다시 찾을 때까지는...”   순이와 이런 얘기가 있은 이튿날, 돌쇠는 마을에서 없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밭으로 나가실 때  물을 담던 호리병박을 허리춤에 차고, 하늘바위산을 찾아 먼길을 떠난 것입니다.   돌쇠는 하늘바위산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고개를 넘고 또 넘었습니다. 그렇게 열두 고개를 넘으면 높디높은 하늘바위산이 있답니다.   돌쇠는 밤이면 큰 나무에 기대여 쪽잠을 자고, 낮이면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돌쇠는 배가 고프면 산나물을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호리병박의 물을 한모금씩 마셨습니다.   열두 고개를 다 넘고 돌쇠는 기진맥진해서 쓰러지고말았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정신을 차린 돌쇠는 일어나서 하늘바위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무덤같은 산봉이 여기저기 있을뿐, 깎아세운듯한 하늘바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길을 잃은게 아닐가?’   돌쇠는 울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산새 한마리가 돌쇠에게  포르르 날아왔습니다.   “혼자서 어디로 가는거니?”   작은 산새가 물었습니다.                    돌쇠는 작은 산새에게 남모르는 가슴속 사연을 얘기했습니다.   “그런 일이었구나. 내가 길잡이를 서줄가? 하늘바위로 가는 길을 알고있거든.”   “그럼 오죽이나 좋겠니.”   “그런데 아직도 멀리 걸어야 해.”   “하늘끝이라도 따라 갈거야.”   그리하여 작은 산새가 포르르 포르르 앞에서 길잡이를 서고 돌쇠는 작은 산새의 꽁무니를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또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돌쇠는 걷는다기보다 기어가는것 같았습니다.   작은 산새는 얼마쯤 날고는, 뒤떨어진 돌쇠가 따라오면 또 얼마쯤 날곤 했습니다.   “작은 산새야, 아직도 멀었니?”   “응, 아직도 멀기는 하나, 걸은것만큼 가까워졌어.”   돌쇠는 발바닥이 터져 쓰리고 다리가 팅팅 부어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조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을 떠난지 딱 석달 열흘만에 돌쇠는 마침내 하늘바위밑에 이르렀습니다.   아, 하늘우에 깎아세운듯한 바위! 누가 만든 예술작품일가?   여름인데도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하늘바위는, 돌쇠의 어린 마음에도 더없이 어마어마하고 또한 거룩해 보였습니다 .   “세상에 이런 산이 있다니?”   “그래, 이 산 저 산 해도 천하명산은 여기야.”   작은 산새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돌쇠는 눈을 크게 뜨고 ‘하늘바위샘물’이란  글귀를 찾아보았습니다. 깎아세운듯한 바위벽에는 이끼만 파랗게 덮여있을뿐이었습니다. 세월과 더불어 글귀가 이끼에 가리워 졌는지 한글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늘바위 밑동의 돌바가지만은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습니다. 물 한방울도 없어 바짝 말라버린 돌바가지였습니다.   돌바가지 옆 여기저기에는 ‘거짓말’, ‘허튼 소리’, ‘속았다’, ‘믿지 말라’, ‘내가 돌바가지에 오줌을 싸고 가노라’ 따위 락서만 지저분하게 갈겨져있었습니다.   ‘내가 잘못 온게 아닐가? 아니,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데...’   돌쇠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눈을 꼭 감았습니다. 그러자 하늘바위산이 마치도 흰 두루마기를 걸친 할아버지처럼 보여졌습니다.   돌쇠는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쳐 불렀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메아리가 쩌렁쩌렁 돌쇠의 귀에 울려왔습니다.   순간 무슨 생각이 든 돌쇠는 얼른 하늘바위에 다가가 귀를 붙이고 숨을 죽이었습니다.   “쏴- 철썩! 쏴- 처절썩!”   하늘바위속에서는 분명 바다가 설레는듯한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위속에 물이 있다니?  바다같은 물이 차있다니?... 몇천몇만년 모여졌기에 이처럼 출렁거리는걸가? ... 아무리 바다같이 물이 많다해도, 바위를 뚫고 방울방울 솟구쳐야 하는 샘물이기에 또한 그처럼 신비한 효험이 있는게  아닐가? ...’   돌쇠는 하늘바위속 샘물 한 호리병박이면 순이의 멀어버린 눈을 환히 보이게 해줄것 같았고, 늙으신 할아버지도 젊어지시게 해드릴것 같았고, 돌림병에 시달리고있는 달래동 마을 사람들의 병도 뚝 뗄것만 같았습니다.   “바위님, 하늘바위님, 맑디맑은 샘물 한 돌바가지만 주옵소서!”   돌쇠는 이렇게 두손 모아 빌고나서, 주먹으로 바위를 쾅 쳤습니다. 돌쇠의 주먹은 터져서 피가 방울방울 돋아났습니다.   그러나 돌쇠는 아픈줄도 모르고 쾅 쾅 두번 세번 바위를 치고 또 쳤습니다.   피는 줄줄 흘러내려 돌바가지를 적시였습니다.   그러자 이게 웬 일이겠습니까?   하늘바위산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돌바가지에는 맑디맑은 샘물이 퐁 퐁 퐁 솟구쳐 올라 넘칠듯 찰랑거렸습니다.   “야, 샘물이 솟아났구나!”   작은 산새은 팔짝팔짝 모두뜀을 하며 기뻐했습니다.   돌쇠는 얼른 허리춤의 호리병박을 풀어, 물속에 넣었습니다. 병목을 넘어가는 물소리가   꼬르륵 꼬르륵 났습니다. 삽시간에 큼직한 돌바가지안의 물은 자그마한 호리병박속으로 거의 빨려 들어가고 밑바닥에 조금 남았습니다.   “작은 산새야, 어서 목을 축여.”   “너도 어서.”   돌쇠는 작은 산새와 함께 나머지 샘물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하늘바위샘물은 참으로 신비한 효험이 있는 약수였습니다. 샘물을 마시자마자 돌쇠의 터진 주먹은 가신듯 아물고 온몸에는 날것만 같은 힘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하늘바위샘물이 든 호리병박을 몸에 지니고 한달음에 달래동 마을로 돌아가기는, 문제가 없을것 같았습니다.   “작은 산새야, 내 팔도 너의 날개와 같았으면 좋겠다. 눈 깜짝할새에 집으로 돌아가게.”   “그럼 너도 나처럼 팔을 저어봐.”   돌쇠는 얼결에 작은 산새의 말대로 두 팔을 저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닌게아니라 돌쇠도 작은 산새처럼 하늘을 날수 있었습니다.   “작은 산새야, 나와 같이 우리 달래동 마을로 가서 함께 살자꾸나.”   “...... ”   그러나 이슥하도록 대답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더니, 따라오려니 생각한 작은 산새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마워, 작은 산새야. 언제나 너를 잊지 않으마...”   돌쇠의 눈에는 이슬같은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돌쇠는 석달 열흘 걸어왔던 먼길을 하루새에 날아서 달래동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마을어귀 느티나무아래에는 돌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 동안 10년은 더 늙어버린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왔어요.”   돌쇠 할아버지는 한참만에야 손자를 알아보고 발을 탕 굴렀습니다.   “이녀석아, 어데 갔다 이제야 오느냐? 이 할아비는 속이 타서 재만 남았다.”   “할아버지, 이것은 하늘바위샘물이에요. 어서 한모금 마셔보세요. 꼭 젊어지실 거예요.”   돌쇠는 할아버지의 꾸중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벙긋 웃으며 호리병박을 내밀었습니다.   ‘얘가 머리가 돈게 아닐가?’   돌쇠 할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은 무척이나 목이 마르기도 했으므로 호리병박을 받아 물 한모금 마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수가?   돌쇠 할아버지는, 새우등처럼 굽었던 허리가 쭉 펴지고 흰머리가 검은머리 되고 밭고랑 같은 이마의 주름살도 마치 다리미로 다린듯 반반해져, 대뜸 젊은이 같아 보였습니다.   돌쇠는 너무 기뻐서 얼른 할아버지의 손에서 호리병박을 채가지고 순이네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돌쇠의 각시가 될 순이가 하늘바위샘물을 한모금 마시고 멀었던 눈을 번쩍 뜬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돌림병에 시달리던 달래동 마을 이웃들도 호리병박의 하늘바위샘물을 한모금씩 나누어 마시고 모두 무병장수 했다지 뭡니까.   그리하여 달래동 마을은 장수동 마을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답니다.   세월과 더불어 돌쇠의 이야기는 또 전설처럼 세세대대 전해졌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하늘바위산아래 후손들이 자동차를 타고 그곳에 가서, 전기드릴로 하늘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약수를  개발하였습니다.   플라스틱병에 넣어 ‘하늘바위샘물표’란 이름을 붙인 이 샘물은 여러가지 광물질이 풍부한데다 티끌만치도 오염되지 않아 비싼 값으로 온 세상에 널리 팔리고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처럼 신비한 효험을 봤다는 사람은 없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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