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은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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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대체 왜 그럴까요? 댓글:  조회:1572  추천:0  2016-05-15
너무 가슴에 와 닿아 퍼 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2    한글과 조선족(반론글 추가) 댓글:  조회:2883  추천:13  2016-02-21
내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엊그제 한국인과 조선족이 말싸움이 붙었다.   사드 관련 문제로 논쟁이 오가던 중 조선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계속 중국을 옹호하자 한국인들과 그 조선족이    서로 말싸움을 한 것이다. 한국인과 조선족의 말싸움은 항상 비슷한 레파토리라서 처음에는 별 흥미가 없었으나    그 조선족이 제법 재미난 말을 해서 주목해보았다.   '한국인은 조선이라고 불리기 싫어서 조선글을 한글로 조선민족을 한민족이라 바꿔부른다.   원래는 한글이 아니고 조선글이고 한민족이 아니고 조선민족이다.'라는 식의 말이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어린애인가? 싶어서 나이를 물었더니 30대라고 한다.   경악을 했다. 한글이라는 표현은 한국과 하등 상관이 없다. 한글이 韓글이 아닌 것이다.   한글의 '한'은 순우리말인 '매우 넓다, 크다' 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큰 글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글이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이 건국 되기 훨씬 이전인 일제 강점기 때에 만들어진 말이다.   오늘날 조선족이 조선글이라 말하는 글자는 그때 이미 모든 민족이 한글이라 불렀어고 남북 분단 이후 김일성이    한국과의 차별성을 가지기 위해 조선이라는 국호를 만들고 인공기도 만들고 하면서 한글을 조선글이라 바꿔 부른다.   중국의 조선족은 그 북한의 영향을 받아 조선글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이 북한을 건국하기 이전에    태극기 앞에서 연설하는 사진을 봤을 것이다. 원래 민족의 깃발은 태극기였고 민족 글자의 명칭은 한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글 명칭에 대한 오해와 비슷한 오해가 한가지 더 있다. 서울의 한강과 서울의 옛지명인 한성이다.   서울의 한강은 한자표기로 漢江이라 쓰고, 한성은 漢城이라 쓴다. 이것을 두고 중국인들은 서울이 한족의 옛식민지였다고   일부 오해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한'이라는 표현은 순우리말인 '크다, 넓다'라는 의미일 뿐 한족과는 하등 상관없다.   한강은 넓고 큰 강, 한성은 넓고 큰 성이라는 의미일 뿐 한족의 漢은 그냥 음이 같아서 차용했을 뿐이다.   위와 같은 내용은 사실 뭐 대단한 지식도 아니다. 한국 중학교 국사교과서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에게 위와 같은 오해로 말을 하면 한국인으로서는 '무식한 놈'이라는   대꾸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1 더하기 1은 3 이라고 계속 우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조선'이라는 명칭은    절대적인게 아니다. 그냥 왕조의 이름이었을 뿐이다. 다만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와 다소 다른 점은 이 민족이 역사상    이루었던 많은 왕정들 중 처음과 마지막 왕정의 이름이 조선이었다는 것 이다. 여기에 김일성은 최초 왕조국가의 이름을    본 따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지었고, 중국은 그 이름을 본 따서 동북의 소수민족에게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여기에 조선족은 민족 문자를 '조선글'이라고 당연시 하는 듯 하지만 한글이라는 명칭은 그 어느 왕조명도    들어있지 않은 정치성이 일절 배제된 순우리말인 '크고 넓은 글'이라는 의미이다.     *이상 퍼온 글입니다. 독자 여러 분들은 곰곰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원글;http://cafe.daum.net/yanji123/BjSM/27804 반론글 이 글은 조선족을 비판하는 것이나, 그 역사 지식의 빈약관계로 본래의  취지를 왜곡하고 크게 망신할만한 것입니다. 한글이냐 조선글이냐? 역사적인 맥락으로 보면 둘다 맞는 표현입니다. 다만 현재 남한 및 서방국가 동포사회에서는 '한글'이라는 표현을 쓰고 북한 및 중국 소련 지역 동포사회에서는 '조선글'로 표현합니다. 한글은 일찍 조선시대초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되어 '훈민정음', '정음'으로 불리다가 갑오개혁 때부터 '조선글'이라 불리웠고, '한글'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 때 민족학자들이 지어놓은 것입니다. 고로 이 글은 한낱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의 작품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 내용전체가 맞다고 하시는 분들은 크게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족 비판 물론 필요하지만 틀린 말과 지식 논리로 글을 쓴다면 세상의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반론글도 퍼온 글입니다. 원글 출처;http://cafe.daum.net/hanryulove/2uZs/8453  
1    [읽어볼만한 글] 민들레 / 송종태 댓글:  조회:1620  추천:1  2016-01-24
[2013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민 들 레/송종태                                                                                                                               등황빛 초롱이 불을 밝혔나. 배꽃 흐드러진 과수원 고랑으로, 청량한 바람이 대야에 담아 놓은 치자 물빛을 순식간 풀어놓는다. 하얀 하늘과 노란 바다가 손을 맞쥐면 갓 깨난 형광 나비는 하르르 창공을 날아오른다. 농막 바람벽에 기대인 한 송이 민들레가 설핏하다. 마치 산모롱이 외딴집 사립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촌로처럼 애처롭다.   몇 해 전, 인적이 드문 철길을 걸었다. 철로 분기선이 휘어진 광장으로 등황빛 물결이 휘감듯 흐르고 있었다. 뜻밖의 모습에 당황하였다. 민들레가 철로 밑 자갈밭을 점령하고 길게 늘어진 철길을 따라 군영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황홀하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무슨 연유로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恨) 깃든 꽃대를 곧추세운 채, 날 선 기세로 저토록 총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지, 발밑을 파고들어 금방이라도 온몸으로 노랑 물감을 풀어놓을 것만 같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여린 새싹이 무지막지한 힘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봄에 피는 초화(草花)는 그저 안쓰럽고 귀여워 다칠세라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운데 민들레의 기세는 예상 밖이었다. 긴장된 마음이 평심을 찾고 나서야 민들레가 귀화 식물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토종식물이 양반집 규수라면 귀화식물은 여염집 아낙이다. 생존력이 강하고 흥부네 가족처럼  많은 식솔을 거느리며 살아가는 특성이 있다. 그 연유는 타향에서 낯선 환경을 견뎌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의 발로가 아닐는지. 객지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내 처지와 엇비슷한 민들레가 왠지 측은하여 연민마저 살포시 고개를 든다.  새 직장에서다.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젊은이들이 몰려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철길에 섬뜩하게 핀 민들레 형상이 스칠 때다. 시야로 들어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섬돌아래 기대어 고즈넉하게 피어난 민들레처럼 한적한 농촌의 쓸쓸함이 묻어나듯, 어디선가 봄직한 모습이다. 굽은 허리와 왜소한 체구가 졸들어 보이지만, 해맑은 미소 속으로 비치는 주름진 얼굴은 지난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안경 너머 커다란 눈은 서그러워 보이나, 앞니가  빠진 탓인지 제 나이보다 대여섯은 위로 보이는 오십 대 중반의 수더분한 사내였다. 당기는 서근서근한 성격 때문인지 곧 친숙해졌다. 한중수교를 맺은 이후 돈벌이를 찾아 고국으로 나왔다는 그는 한국생활에 지쳐 보이고 고독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내게 정신적 의지를 하는지 출퇴근 시에는 꼭 들러 가곤 하였다. 그런 그가 늦어지면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 몇 날을 못 보면 야젓한 그가 불연 듯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귀화 수습 중이라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온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여생을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듯싶다. 귀화에 관한 소견을 피력하기가 조심 스럽고, 신중히 고심하여 내린 결정인지 걱정이 앞선다. 반세기를 지내온 긴 세월인데 인연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이 삶을 시작함은 용단 내리기가 쉽지는 않았으리라. 미련 없는 여정일지 라도 풋풋한 정은 남아있을 터, 과거를 묻어버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 문화와 타협하며 산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듯싶다.   생장점 멈춘 늦가을 뜨락에 민들레 한 송이가 설핏하게 피어있다. 엄동설한을 앞두고 뉘엿한 볕뉘를 쪼이며 슬픈 몸짓으로 왜 그리도 시리게 웃고 있는지. 흡사, 흑룡강 성 조선족 마을을 떠나온 그를 보듯 가슴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온다.   일제 강점기에 그의 가족은 고국을 등에 메고 드넓은 초원과 강이 흐르는 곳에 뿌리를 내렸다.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며 서로 의지하면서 귀화인이 되었을 게다. 이방인이 되어 고국을 찾은 그는 다시 귀화인으로 살기 위해 일터를 잡고 한글 공부를 하면서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귀화인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는 듯하다. 조선족 동포를 방랑벽 있는 길손쯤으로 치부하고는 한다.  민들레의 경우도 그렇다. 무슨 연유인지 사람들은 민들레를 화초라 부르지 않는다. 노랑 저고리를 곱게 입고 자태를 뽐낼라치면 천한 주제에 건방지게 안방 규수나 된 양 앉아 있느냐며 핀잔하기 일쑤다. 정원사는 화단에 잡초가 끼어드느냐고 뽑아내어 내동댕이치고 만다. 타국에서 설움을 삼키며 야생초로 살아온 민들레는 은근과 끈기로 황폐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을 쏟아내듯 총포를 활짝 벌린 채 속절없는 헛웃음으로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고향을 등지고 객지 타향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 나 또한 이방인이 아니던가.   말수 없는 그는 속내를 보이는 법이 없다. 힘들어도 아파도 혼자서 삭이고 홀로 풀어가는 것 같다. 오랜 세월을 자립하며 견뎌온 습성이지 않나 싶다. 교대시간보다 먼저 출근하여 주변 정리 정돈을 하고, 퇴근 또한 남들보다 항상 뒤늦게 한다. 그는 일머리를 도스를 줄을 알고 있다.  며칠 후 샤워장에서 그를 만났다. 항상 구석에서 몸을 씻던 그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왜소한 체구에 비해 유난히 큰 눈은 그렁하게 눈물이 맺혀있다. 몸이 불편한가 싶어 가리고 있는 손을 보니 붉게 상처가 나 있다. 제품이 무너져 다쳤다면서 옆구리 통증을 호소한다. 작업반장에게 보고했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꾸가 없다. 직장을 잃을까 걱정이 앞서 숨기고 있는 듯하다. 겁에 질려 있는 그에게 보고하고 치료를 받도록 권유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떡인다. 눈물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을 훔쳐보던 나의 눈시울이 불에 덴 듯 달아오른다.  둑길이나 빈들에 하얗게 띠를 두르듯 피어나는 개망초는 이미 토종 식물처럼 우리 곁에 자리하 고 태고의 설움을 토해 놓듯 달빛 따라 개울처럼 흐른다. 봄 들녘을 수놓은 민들레 역시 약초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지 오래다. 어린이 동요 속으로, 한약방 탕제로, 늙수그레한 아낙 네 봄나물 바구니로, 연인의 카메라 필름 속으로 용해되어갔다. 문득 그에게 민들레처럼 사랑받는 귀화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민들레 가득 담은 꽃바구니를 선물하고 싶다.   그는 귀화 열망이 강렬하다. 한글 습작 수준은 내국인 못지않은 수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귀화 시험에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야 하는 과정이 있다는데, 그는 애국가를 부르지 못한다고 한다. 가사를 모르는 게 아니라 노래를 전혀 부르지 못한다고 한숨을 내쉰다. 노래가 좋아 틈틈이 한국노래를 듣는다고도 한다. 하지만 내지를 줄을 몰랐다. 받아드리기는 하지만 내뱉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려온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와락 손을 잡았다. 그도 나도, 참아내던 설움을 터트렸다.  세상살이를 어찌 순응만 하며 살아왔단 말인가, 내지르지 못하고 가슴으로 삭이고 안으로 삼키 며 긴 세월을 견뎌온 타성에 익숙해져 있다. 웃을 줄은 알지만 화낼 줄을 모른다. 들을 수는 있지만 인지한 사실을 전할 줄을 모르고, 입이 있어도 입은 받아 삼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벅찬 가슴을 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행위를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방증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테고, 조국 없는 민족의 설움이 그를 함구하게 하지 는 않았는지 반문하고 싶다.   알에서 올챙이로 부화하고 올챙이는 개구리로 변하는 것이 성장이다. 하지만 그는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변태 과정에서 우는 방법을 외부적 충격으로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싶다. 그의 모습 에서 나의 모습을 보듯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는 나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객지를 떠돌며 시행착오로 몸부림친 40년이 아니던가. 담벼락에 기대어 가로등 불빛에 시름을 털고 터벅이며 걸어온 나날들. 길손처럼, 때론 집시로, 이곳저곳 기웃대며 흘러 흘러서 다시 머문 땅. 고향이 지척인데 세월이 쳐 놓은 철조망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돌아가기엔 너무 멀다. 사위어간 육신과 망울진 기억이 타인의 회고록처럼 낯설기만 하다. 한 줄금 비를 맞으며 무지개 뜬 하늘을 고대하던 꿈은 뉘엿한 저녁노을 품으로 서서히 잠겨가고 있다.   오늘 아침은 된서리가 서설처럼 내렸다. 풀잎 바스러진 마른 들판에 철 잃은 민들레가 속절 없이 피어나 꽃대를 웅크리고 떨고 있다. 꽃차례는 제 살던 고향이 그리운 건지 방울방울 눈물을 머금고 있다.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걸까, 시린 꽃잎은 총포를 반쯤 벌린 채 하늘을 향해 토해 낼 듯 애절하다.   세상은 이방인이 꿈꾸는 민들레 영토다.     당선 소감 당선 소식을 접하고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짐은 왜일까, 조바심하며 많은 밤을 지새웠는데 기쁨보다는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무겁게 다가온다. 처음 글을 쓴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선생님께서 게시판에 나의 글을 올려놓았다. 그때 작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슴에 새겼다. 그러나 꿈에 불과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 창조 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그 기쁨을 느끼려 하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게도 이런 영광을 맞는 날이 존재하는가, 세상에서 방황하고 흔들리면서 쏟아낸 눈물의 기도로 삶을 지탱해 왔지만, 꺼져가던 삶의 불씨가 활활 타오를 줄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건강을 잃고 직장에서도 떨려 나왔다. 그러고도 첫 자영업마저 실패로 끝났다. 세상의 미아처럼, 이방인처럼 떠돌았다. 세상에 혼자인 듯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그때 만난 분이 고향 선배이신 충북대 평생교육원 김홍은 교수님이다. 존재감을 찾기 위해 천안에서 청주로 수필 공부를 나섰다. 일하면서도 꿈속에서도 항상 소재 찾기와 문장 만들기 연습을 하였다. 나이 이순을 앞두고 늦깎이 등단을 하면서도 소년처럼 설렌다. 이제야 깨달았다. 삶이란 자신을 찾기 위한 공정(工程)이라는 것을... 시작일 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감성은 젊은이에게 뒤질 게 없다. 세상을 살아가며 남모르게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살아갈수록 고독은 깊어만 가고, 그 아픔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연단이 아닐까 싶다.   지금부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렵니다. 그리고 좋은 글로 세상의 등대지기가 되고 십니다. 끝으로, 부실했던 가장을 묵묵히 사랑과 용서로 대해준 가족에게 감사하고, 길라잡이가 되어 주신 김홍은 교수님, 그리고 문우님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참 잊을 뻔했네요, 당선작 ‘민들레’ 수필을 쓸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해준 조선족 친구 조학래 씨와 이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귀화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약력) 충북대 평생교육원(수필 반) 수료 근로자 문화 예술제 문학 부문 입상 2012년 산업단지 근로자 단편수필대회 은상 2012년 EBS FM (사랑, 그 아름답고 소중한 이야기 공모) 대상 2013년 명지전문대 졸업, 방송통신대 졸업 새마을금고 중앙회, 성남낙원 새마을금고 전무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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