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사람들은 복원된 교실, 기숙사, 사무실, 식당들을 돌아보면서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처럼 간소한 학교에서 20여년간 중국혁명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장성급 인물들이 배출되여 나왔던 것이다.
앞줄 건물 2층에는 총리 사무실과 교장실, 비서실이 있었고 부근에는 학교 각부서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벽에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편액이 걸려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조선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교하기 시작하였다.
<중앙륙군 군관학교 제11기 제1총대 동학록(同学录)>에 따르면 1925년 6월부터 1926년까지의 황포군관학교 제3기 동학 성명 적관표(籍贯表)에는 한국 함경북도의 리빈(李彬),조선의 차정신(车廷信),한국의 장성철(张圣哲), 조선 한성(汉城)의 류철선(刘铁仙) 등 네명이 있다. 그리고 <황포동학총명책(黄埔同学总名册)>의 자료를 보면 3기에 리일태(李逸泰)가 더 있다.
외환과 내란을 겪고있던 19세기말 조선왕조는 근대화한 국가창립을 주도하게 된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모두 고종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제 국가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적관란에도 조선혁명자들을 조선인 혹은 한국인으로 등록되였던것이다.
이들 네 사람은 일찍부터 광주에서 활동하다보니 가장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선학생으로 되었다. 이 가운데서 차정신, 장성철, 류철선은 중국의 조기 항공활동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류월한인회의 박태하와 함께 손중산의 지도로 설립된 항공학교에서 항공기술을 배웠으며 한동안 쏘련에 있는 조선인 조기 항공기술가 김공집(金公缉)과 함께 쏘련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세 사람은 황포군관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3기에 입교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제4기에 조선인 24명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권립) 우리민족 청년들이 황포에 입학할수있게 하기 위해 김원봉은 학교 당국과 교섭하여 우리 동포청년들의 입학절차에 관한 협의를 달성하였다. 먼저 엄격한 심사와 시험을 거쳐 합격이 되면 반년간의 예비교육을 받고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입학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황포 4기에는 24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제5기에는 6명, 후에는 십명 도합 45명의 우리민족 열혈청년들이 입학했다. 1925년 통계에 의하면 황포와 그 산하의 병영에는 60여명 우리민족 청년들이 있었다.
당시 최림(崔林)으로 변성명한 김원봉이 제4기에 입학해서 강평국(姜平国), 류원욱(柳远郁), 박효삼(朴孝三), 박건웅(朴建雄), 양검(杨俭), 전의창(田义昌), 리우각(李愚悫), 권준(权■), 리집중(李集中), 왕자량(王子良), 윤의진(尹义进), 최영택(崔永泽), 김종(金钟), 리종원(李钟元), 로일룡(卢一龙), 리기환(李箕焕), 오세진(吴世振), 전홍묵(全洪默), 백홍(白红), 로세방(劳世芳), 박익제(朴益济), 문선재(文善在), 로건(卢建) 등 도합 24명이 입교했다.
황포 5기에는 백여명 조선청년들이 입교하였는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정변으로하여 자진 퇴교하거나 강제 축출 당해 겨우 4명만 졸업할수있었다. 그리하여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에도 제5기생으로 김호원(金浩元), 안유재(安维才), 장흥(张兴), 장익(张翼) 네 이름만 남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학생신분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교직원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학교초기 쏘련군사학교를 졸업한 강섭무(姜燮武)가 포병훈련 교관 겸 쏘련고문의 통역으로 있었고 상해림시정부에서 온 김철남(金铁男)이 제3교도단(教导第3团)의 소좌(少校) 부단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혁명가 손두환(孙斗焕)이 황포군관학교 교장판공청 부관으로, 운남강무학당(云南讲武学堂)을 졸업한 리계동(李启东)이 부관으로, 리검운(李剑云)이 조교(助教)로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조선족 교직원으로는 양림(杨林)이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고문단과 함께 온 양달부(杨达夫) 일명 량도부(梁道夫)라고도 하는데 그가 포병교관으로 있었으며 3기 졸업생인 리빈(李彬)이 제4기 정치과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다. 제5기 교직원들로는 중좌(中校) 주임교관에 양림, 황포탄 의거의 주역이였던 오성륜(吴成伦), 채원개(蔡元凯), 최추해(崔秋海), 안응근(安应根), 오명(吴明), 3기 졸업생인 리일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제2보병대대 소좌(小校) 구대장 최추해가 바로 저명한 조선혁명가 최용건이다. 그리고 제6기 교직원으로는 채원개, 4기 졸업생인 박효삼(朴孝三), 공주선(孔周宣) 세 사람이 있었다. 이때 최용건은 이미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을 맡고 교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년간 학계의 연구를 거쳐 19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본교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명단이 통계되였다. 그러나 당시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던 험악한 상황에서 국적과 호적을 고치고 변성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조선혁명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수많은 조선 열혈남아들이 중국 청년들과 함께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했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군교학생들의 제복, 무기,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개여놓은 군인이불, 정숙한 교실을 돌아보노라니 씩씩한 황포군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았다.
“분투정신은 주의(主义)에서 온다. 사병들의 정신을 발휘하려면 우선 주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혁명적 주의가 있어야만이 우리 혁명이 목표가있게 되고 혁명목표가 있어야만이 우리의 분투정신이 있게 된다.” 손중산 총리의 연설을 가슴에 명기한 학생들은 열심히 혁명사상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기능을 련마하였다. “혁명은 대중의 힘에 의지해야한다. 오로지 대중을 무장하고 무력항쟁해야만이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장강을 넘어서 북으로, 북으로 진격할 수 있고 드디어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열망을 안고 조선 청년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학습과 훈련에 뛰여들었다.
이시기 각지 국민혁명군 여러부대도 군관학교나 강무학당을 설립해 우수한 장교들을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국민당은 각지 군교의 군사와 정치 교육을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하고 각지 군관학교와 강무학당을 황포군관학교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수요에 따라 각지에 황포군관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는데 조주(潮州)분교, 남녕(南宁)분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하자 무한에 황포군관학교 분교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정치과의 500여명이 무한에 옮겨 오게 되고 무한에서 195명의 녀학생을 받아 군교 녀학생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답사팀이 선색을 따라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찾아갔을 때는 광주 답사를 한 일주일 후였다.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한시 해방로 259번지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호북성 무창실험소학교(武昌实验小学校)로 되어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운동장에서 떠들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창실험소학교 새 교학청사 뒤편으로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거대한 단층 건물이였는데 두부분으로 나뉘여있었다. 그 가운데 건물벽에는 흰대리석에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유적지라고 밝혀져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십여메터 높이의 고목이 줄지어서 군인들의 씩씩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사실 1927년 이후로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사명은 완수된 셈이다. 그후 무한분교에 대부분 학원들이 집중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하여 국민당도 분렬되여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신분으로 국민당군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전면 교체해 버린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의 졸업식까지 남경에서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혁명시기의 중국 혁명과 군사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되었던 황포군관학교는 사실상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끝마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이후로 대부분 학생들은 무한분교나 남경에서 학습하고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을 보면 그뒤 황포군관학교 제6기부터 21기까지 역시 조선인 혁명가들이 있었다. 제6기에 신석우(申硕雨), 최문용(崔文镛), 로식(鲁植) 원명은 김창만(金昌满)이 있었고 기병과(骑兵科)에 김진문(金真文), 김명산(金明山), 김은제(金恩济)가 있었다. 제8기 보병과에 리근호(李根浩)가 있었고 제20기 보병과(步兵科)에 김중진(金重镇), 기병과에 장철부(张哲夫)가 있었으며 제21기 포병대에 조동린(赵东麟)이 있었다. 조동린은 당시 24세로 조선 정주(定州)사람이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다는 설명까지 밝혀져있다.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대부분 건물은 1938년 일본참략자들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여버렸다. 그후 1965년에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에 재차 수건하여 지금은 비교적 완정한 모습을 볼수있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을 나와 흰 담을 따라 가노라면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를 나와 한동안 걸으면 황포군관학교 부근의 붉은 벽돌과 흰 세멘트로 축조된 서양식 건물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총리사무청사 유적지로서 당시 손중산이 사무를 보던 곳이였고 하나는 군인구락부(俱乐部) 유적지로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여러 가지 모임을 가지고 휴식하던 곳이였다. 군인구락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천(露天) 수영장이 있었다. 입구의 흰 대리석 석판에는 수영장에 관련한 설명이 있었다. 1926년 군교 학생들이 두 개 못을 파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수영장은 사용하지 않고있었지만 부근 주둔부대 전사들이 이곳 공지에서 빨래를 말리고있었다.
총리사무청사와 군인구락부, 수영장 유적지들은 길 오른쪽에 차례로 있었다. 길 외편은 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있었다. 손중산 기념공원이였다.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그 우에는 벽돌로 담을 쌓았고 담 뒤에는 우뚝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흰탑에는 <손총리기념탑(孙总理纪念塔)>이라고 새겨져 있고 탑우에는 손중산 기념동상이 있었다. 왼손으로 허리를 집고 오른 손을 자연스럽게 내 밀고있는 모습이였다.
저녁녘이 되어서 답사팀은 황포군관학교 유적지를 떠났다.
수억 중국인민들에게 국부(国父)로 존경받는 손중산에 의해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 인민들의 중견인물로 될 수많은 혁명, 군사인재를 양성해낸 황포군관학교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배움의 터전에는 훗날 국민당의 항일명장들인 장치중(张治中), 두률명(杜聿明)이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염검영(叶剑英), 섭영진(聂荣臻), 림표(林彪), 진의(陈毅), 진갱(陈赓), 서향전(徐向前), 좌권(左权), 주사제(周士弟), 류지단(刘志丹), 라서경(罗瑞卿)을 비롯한 장성급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니고 이국 땅 만리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했던 조선의 지사들은 바로 이들과 함께 혁명과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의 격변속에 반일독립투쟁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