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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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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요” 댓글:  조회:5275  추천:54  2007-07-08
중앙당학교의 조선족 교수 최룡수김성룡      북경시 서북교외의 아름다운 의화원 부근에 자리잡은 중앙당학교 앞에 서면 자연 숙연한 마음이 든다. 중국공산당의 중견간부와 고위간부, 맑스주의 리론간부를 강습시키는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인 만큼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쉽게 접근할수없는 곳이다. 이곳에 우리 조선족 교수분이 계신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정작 일을 보려고 찾아왔을때는 그분이 퇴직한 뒤인 2002년말이였다. “구경 어떤 분인지?” 궁금한 면이 많은 분이였다. 중국의 중층이상 간부들만이 공부할수있는 중앙당학교인데 거기서 교원까지 했다는 그 자체가 전설같이 들렸다. 게다가 잊혀진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을 찾아 한국이나 중국 조선족 사회에 알렸다니 더욱 궁금하지 않을수 없었다. 미국의 기자 님.웨일즈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던 조선혁명가 김산(장지락,张志乐)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이분이였고 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이면서 혁명가였던 한락연(韩乐然), 기동(冀东)항일유격대를 이끌었던 주문빈(周文彬), 지하투쟁의 지도자였던 리철부(李铁夫), 혁명리론가 김규광(金奎光)…이런 쟁쟁한 인물들의 진실을 밝혀 내기도 했던 것이다. 중앙당학교 교수로 퇴직한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우리민족의 력사를 밝혀내기 위해 또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력을 아끼지 않는 그분이 바로 최룡수 교수이다. 머리가 희슥했지만 얼굴색이 맑아 정력적인 분으로 보였다. 또 많이 겸손했고 인자해 보였다. 중앙당학교 교원저택에 사시는 최룡수 교수는 우리를 만나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사 답사에 관련한 의견과 건의를 제기하였다. 일제와의 항쟁을 위하여 광활한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이지만 투쟁과정에 이데올로기로 인한 대립을 멈추지 않고 끝내 각기 자기 길을 걸어야만 했던것도 사실이였다. “교수님은 중앙당학교에서 사업하셨지요? 그럼 교수님은 민족주의자입니까? 공산주의자입니까?”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도저히 궁금증을 달랠수없어 물었다. 공식적으로 물으면 실례될것 같아서 헤여질때 재미 삶아 던진 질문이였다. “사실 이데올리기적인 대립이 너무나도 오래되여 사람들에게 편견이 서게 된것 같은데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합니다. 정치목적을 위해 그것을 인위적으로 획분하여 서로 공격하던 시절은 이젠 력사속에 잠재워야하지요. 저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잡니다.” 대답이 퍽 공식적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받았던 그 공식적인 대답이 그후 5년사이 최교수와 함께 일을 하면서 그것이 가장 진솔한 대답이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최교수는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로서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느껴지게 되였다.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2005년은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성대히 기념하고저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만들기 위해 최룡수 교수님을 찾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것은 2003년 가을부터였다. 최교수는 저택에 잘 보관해 두었던 자료들을 펼쳐보이면서 구체적인 지도를 주었다. 북경에 지금 어떤 분들의 유가족이 남아있으며 어떤 분들이 비교적 연구가 깊다고 알려주었고 또 어떤 곳들을 다니며 현지답사를 해야한다고 지적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편한 몸이지만 직접 태항산답사와 상해, 남경지역 답사를 다녀오셨다.  “언제부터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습니까?”라고 물으면 늘 “연구라기는 어렵고 그저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는거요.”라고 대답하는 최교수 이시다. 사실 최교수가 조선혁명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1981년의 일이였다고한다. 당시 중앙당학교에 조남기장군이 왔었는데 조선족 교원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 만나 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조남기장군이 관내 조선민족의 투쟁을 이끌어왔던 많은 항일투사들의 사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러면서 북경에 있으면서 이 일을 좀 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를 제기했다. 뜻하지 않은 건의를 받은 최룡수 교수는 “력사 전문가도 아닌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하겠습니까?”고 주저했다고한다.     그러자 조남기 장군은 “당신은 전문가이기 보다는 먼저 조선족 학자요. 조선족이기에 이 일을 해야하지 않겠소?”라고 지적했다. 그러했다. 력사 전문가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특히 관내지역의 투쟁사가 더욱 그러했다. 그때로부터 최교수는 다시 생각을 고쳐하고 관련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 어려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자료에서 나오는 주소와 지금의 주소가 다른곳이 많았다. 또 많은 현장이 덧없는 세월속에 파손되고 변화되여 확인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북경의 크고 작은 골목길을 얼마나 헤매고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로인만 만나면 옛날에 이곳이 어찌되였는가를 자상히 물어보면서…”사모님이 손님들에게 차를 권하면서 한마디 이야기했다. “산에 기념비나 절을 많이 찾아보아야하지요. 렬사들의 묘자리를 확인할려고 산을 얼마나 헤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금도 북경에 있는 반일투사들의 유가족은 최교수를 은인처럼 생각해 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 )씨, 김규광의 여러 아들,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橹), 주문빈의 녀동생 김신정(金信正), 한락연의 자녀… 이들은 한국기자들을 포함해 기자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교수가 부른다면 기꺼이 응해 나서고 또 기자들까지 만나준다. 그만큼 서로 믿었고 또 정도 깊었던것이다. 최교수의 저택에는 카드로 작성해 놓은 조선혁명가들의 약력이 수백개가 정리되여있고 또 소중한 사진자료나 신문자료들도 있었으며 친필 약력이라든지 혁명자들이 남겨놓은 시작이나 역작들도 있었다. 다년간의 로고가 그대로 보여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장백산맥의 남단, 압록강 북녘에 자리잡은 편벽한 산간마을인 료녕성 신빈현(新宾县)의 평정산촌(平顶山村)은 눈만 뜨면 보이는것은 산뿐이였다. 인간사회는 전란과 투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빈곤과 억압에 허덕였지만 춘하추동 변함없이 산은 산대로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봄이면 적설이 사라지고 시내물이 졸졸 흘러 마을에 생기를 보태주고 북산의 만발한 진달래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또 산에 나는 나물과 산짐승, 강의 물고기는 빈곤한 이 고장 사람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한다. 고요한 마을어귀에 한 소년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길가는 로인 한분을 쳐다보고있었다. 낯선 로인이였다. 소년은 그 로인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고 길을 따라 산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하여 몹시 궁금했다. 소년은 드디어 산으로 올랐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산마루를 따라 곧추 올랐다. 산등성이에 선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였고 산기슭의 더 큰 마을을 보게 되였다. 그리고 아득히 펼쳐진 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가가 더 궁금해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린시절의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이야기를 할때마다 최교수는 행복감에 잠기는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게 자기 가족을 소개한다. 아버지(최천길,崔天吉)는 부지런한 농군이였고 호조조 조장, 합작사 사장을 하였고 또 인민공사를 하셨다. 하지만 공산당은 회의가 너무 많아서 간부하기 싫다면서 그냥 농민으로 사셨다고 한다. 큰형(최룡서,崔龙瑞)은 해방전쟁시기 리홍광지대 통신중대 지도원을 했으며 선후로 대공 세번 세웠다. 항미원조 전쟁때는 사령부 정찰참모로 사업했고 38군 주둔지인 보정에서 사장급 간부로 퇴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최룡실,崔龙实)는 료녕성 안동시(지금의 단동, 丹东)특등로력모범이라고 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형님들에게서 혁명교육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일찍 아동단에 들었고 비밀편지도 날라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때는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고 또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 배움의 길을 찾아 떠났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250리 길을 걸어 도착한곳이 신빈현 현소재지에 있는 신빈현조선족중학교였다. 소년은 교장을 찾아가 입학시켜 줄것을 요구했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보아야했다. 한족소학교를 다닌 소년은 자습하여 조선글을 조금 알뿐이였으니 조선력사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구집에 머물면서 밤새도록 조선력사 교과서를 외웠고 시험을 보아 끝내 신빈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어엿한 사나이로 성장한 소년은 대학입학시험에서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썼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이 슴배인 이 작문은 료녕성 본계시(本溪市) 지역의 최고점수를 맞았고 드디어 중국의 명문대인 북경대학 철학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어머니의 명함은 제가 지어 주었다구요.” 최교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봉건유습이 남아있어 어머님은 줄곧 명함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냥 ‘최박씨’라고 불렀답니다. 최씨네 집에 시집온 박씨 녀성이라는 뜻이지요. 내가 중학교를 다닐때였습니다. 호구등기를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 존함을 쓰고 나서 어머니 명함을 쓰자니 그냥 ‘최박씨’라고 할수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하던 끝에 ‘박정옥(朴贞玉)’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머님에게 새로운 명함을 지어 주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어머님도 즐거워 하시며 눈물까지 머금었어요.”     장백산 기슭의 아름다운 산간마을에서 나서 자란 소년은 드디어 어엿한 사나이로 되여 북경대학에 가게 되였다. 하지만 그를 반겨준 드넓은 세상은 그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피로 모주석 만세를 썼지요. 너무나도 분통이 터져 자살할 생각도 들었구요.”   그 시절을 겪어온 사람들은 아마 모두가 모주석을 숭배하는 마음이 있었고 “모주석 만세”를 많이 불렀을것이다. 1957년 국경절을 맞으며 천안문광장에서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북경대학 학생들이 주석대 앞에 섰기때문에 검열하러 나온 중앙령도들 앞에 선 모택동을 가까이에서 똑똑히 볼수있었다. 학생들은 흥분되여 저도몰래 “모주석 만세!”를 소리 높이 웨쳤다. 그속에는 최룡수 교수도 있었다.   “만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주석 만세를 웨친것은 기쁘다는 뜻이지 정말 만년 살라는것은 아니였습니다. 물론 모택동을 숭배하는 마음은 있었지요.”   북경대학에서 공자철학을 전공한 최룡수교수는 졸업후 길림전력학원(吉林电力学院)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그는 3차나 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받았으며 2차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965년말에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으로 되였습니다. 대학 졸업생이 4년사이 이렇게 제발되기는 흔치 않은 일이였지요. 당시는 기운이 나서 열심히 사업했고 농촌에서도 많이 일했습니다. 물론 좌적인 경향도 있었지요. 당시 인식이 그러했으니 말입니다.”     길림성 화피창(桦皮厂)의 조선족대대인 성화대대에 공작조로 내려갔을때의 일이다. 겨울이여서 몹시 추웠는데 공작조 성원들은 대대부에서 석탄불을 피우고 자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엔가 가스에 중독되였던 것이다. 문가에 있었던 최교수는 그래도 적게 중독되였든지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수없었다. 그는 안깐 힘을 모아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으로 몸의 신경을 조금 깨운 그는 힘겹게 수화기를 들고 공사에 전화를 해서 모두가 구조될수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강뚝이 터졌을때였다. 농촌공작대 대장인만큼 그는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강에 뛰여들어 물막이에 나섰다. 그러면서 젊은이들과 민병들을 지휘하여 물을 막고 터진 뚝을 고쳐놓았다. 하지만 추위로 그의 몸은 모두 얼어 그만 쓰러지고말았다한다.     “하도 젊었으니 목숨이 붙어있었지 잘못 될뻔 했다구요. 그때는 참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 후에 그처럼 큰 억울함을 당할줄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얼마 안되여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2월 제강”이 나왔고 잇달아 “5.16제강”이 나왔다. 하나는 류소기가 작성한것인데 대자보를 쓰지 말자는 등 내용이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5.16제강”이였다. 길림전력학원의 공청단원들은 우에서 지시하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2월 제강”을 비판하고 총화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나젊은 최교수는 상급의 지시대로 했을뿐이라고 하면서 “잘못된”것을 시정하려하지 않았고 자기의 주장을 떳떳히 세웠다. 사건 뒤면에 엄연한 권력투쟁이 도사리고있는것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길림시 당위원회 서기의 추종자로서 헤이방(黑帮)이라는 루명을 쓰게 되였다. 길림시 부비서장으로 있던 범생경(范生庆)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최교수를 단독 심문하였다. “잘 못한 일이 없는가?” “조직에 교대할것이 없는가?” “모주석과 혁명에 대해 립장이 흔들리지 않았는가?” 기어코 무엇을 꼬집어 내려는듯이 문책이 계속되였다.     “개별담화를 한다는것이 사실은 루명을 씌우려는 수작이였지요. 헤이방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또 화가 동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혈서를 썼던거죠. 모주석 만세라고요.”     그때의 일을 회억하는 최교수는 지금도 많이 괴로워하는 표정이였다.     “당시 개인숭배가 많았어요. 밥을 먹을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고 대회를 열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객관세계를 다시 보게 되였어요. 문제를 리상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고 분석하게 되였던것이지요. 일제시대 우리는 도꾜방향을 향해 매일 아침 절을 했습니다. 물론 일제놈들이 강요한것이지요. 일제시대와 하는 짓이 꼭 같아서 큰 반감이 생겼던것입니다. ”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최교수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금생활을 하게 되였고 고된 로동을 하게 되였다. 또 그가 자살할것 같아 그냥 사람을 붙여두어 감시하게까지 하였다.     “그때 나를 감시하던 사람이 원래 국민당이였던 사람이였는데 도리여 나를 감시했던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최교수는 그후 또 조선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였고 5.16분자로 무함받기도 했다. 당시 손오석(孙五石)이라는 동창생이 조선에 가게 되였는데 헤어질때 최교수는 그에게 돈 30원을 준 일이 있었다. 사실 손오석은 정상적인 조동으로 조선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되여 최교수는 조선수정주의자로 락인 찍혀 2층집의 한방에 갇히게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는 조직적인 무함이였던 것이다. 당시 혁명위원회를 설립할때 최교수가 가장 젊고 학력도 좋아 전도가 가장 유망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대회에서 당위서기를 비판하게 되였는데 사람마다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최교수는 이 사람에 대한 결정자료를 보자고 요구했고 자료가 없으면 발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교수는 남의 눈에 나게 되였고 드디어는 조선수정주의자라는 루명을 쓰고 3개월 남짓이 감금되여 생활하게 되였다한다.     “그때는 정말 자살하고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감금생활과 고된 로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말이지요. 모주석에게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투쟁하고 반대한 사람은 글쎄 내가 입당시켜준 사람이 였던 것입니다. 나를 조선특무로 무함했던 사람이지요. ”     “문화혁명이 총적으로 잘 못 되였지요. 하지만 문화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 나쁜것은 아닙니다. 조직에서 시킨 일이니 조직에서 책임져야지 개인이 책임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간 남을 무함하거나 때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나쁘지요.”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지요.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솔찍해야지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전국적으로 진리표준(真理标准)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였다. 이는 문화대혁명후 가장 큰 규모의 맑스주의 자아교양활동으로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명확히 하였다.   이 시기 최교수는 길림에서 리론간부 리론토론회에 글을 발표했다. “유심주의 세계관의 대폭로(唯心主义世界观的大暴露)”라는 이 글은 당시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주임의 그릇된 작법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먼저 사상이 있어야하고 그 사상에 따라 자료를 찾고 또 사상을 증명해야한다고 했다. 유심주의적인 거꾸로 된 작법이였던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최교수의 글은 길림성 리론지인 “신길림(新吉林)”에 발표되였다. 이 글은 길림성에서 그릇된것을 바로잡는(拨乱反正) 리론적 근거로 되였다.   1978년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의 사상리론 교양의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에서도 진리의 표준에 관련한 토론이 심각하게 진행되고있었고 점차 실천만이 진리의 표준이라는데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본격적으로 과거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있을때였다. 중앙당학교의 많은 글들이 최교수의 관점과 같았고 또 중앙당학교에서도 최교수의 글에 중시를 돌리고있었다. 그리하여 얼마후 최교수는 중앙당학교로 조동되여 맑스주의리론과 철학 강의를 하게 되였다. 개인 서류도 보지 않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그냥 중앙당학교로 조동하게 되였던것이다.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것은 맑스주의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택동을 우상화하고 모택동사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던 문화대혁명 직후였기에 이 진리표준을 다시 내세우기까지는 쉽지 않았지요. 이것으로 검증한다면 문화대혁명은 틀린것이고 모택동에게도 문제가 있지요.”     중앙당학교에 전근된 최교수는 리론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 철학과 경전을 강의하게 되였다. 그는 독일어를 자습하여 직접 철학론문을 번역하면서 강의에 열중하였다. 1981년 정당(整党)이 시작되였다. 중앙당학교에서는 최교수를 정당판공실의 성원으로 선정하고 조직조 조장을 맡겼다. 정당이란 학교내의 모든 임직원을 상대로 문화대혁명시기 잘못된 일이 없는가를 밝혀내는 일이였다. “문화대혁명의 교훈이 있는데 문제를 확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였어요. 절대 근거가 없이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대자보를 썼거나 조직의 명령에 따라 비판대회에 참가한 정도는 그냥 다 넘어가게 했습니다. 실사구시적이여야지요.” 이처럼 실사구시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구체적으로 개인과 집단간의 책임을 분별하여 일을 했기 때문에 중앙당학교에서는 순조롭게 정당을 완수하게 되였다. 하지만 청화대학 같은 경우에는 문제를 확대화하여 교육장을 하던 사람까지 걸려들어 철직받고 쫓겨난 사례도 있었다한다. “철학은 실사구시해야 됩니다. 또 철학으로 사업을 지도하니깐 사업을 실사구시적으로 진행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사람은 솔찍해야하거든요.” 실사구시해야하고 진실하게 살아야한다는것이 최교수의 인생관이라고 할수있다. 그는 바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사업을 했고 학문을 연구했으며 또 진실하게 인간을 대해왔던 것이다. 1985년에 최교수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의 직함처(职称处) 처장을 맡게 되고 1991년에는 학위판공실 주임을 맡게 된다. 당학교는 원래 공무원계렬에 속했기때문에 직함을 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 교장으로부터 시작해 당학교를 교육계렬에 포함시켜 직함을 평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 임무를 맡은 최교수는 문건을 작성해 중앙조직부에 보냈다. 드디어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현 당학교는 대학전문학교 체제로, 성 당학교는 본과체제로 하기로했다. 그리하여 많은 로간부들이 직함을 가지고 교수로 되였다. 물론 여기에는 중앙직함개혁 지도소조의 비준을 받기 위한 최교수의 숨은 노력이 많았다. “그때까지 공무원으로 대접받았는데 후에는 교수 대접을 받게 되였지요. 명색이 학교인데 그때에야 교수가 있게 되였던 것입니다.” 최교수의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흘렀다. 학자로서의 최교수는 가치 있는 론문들을 많이 써냈고 또 조선독립운동사에 관련한 연구도 많이 진행해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하지 않았다.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최교수가 발표한 론문들을 정리할것 같으면 철학론문이 많다. 특히 1993년에 발표한 “조선유학사의 특성과 역활(朝鲜儒学史的特点及其作用)”이 주목되는데 론문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유학의 핵심인 퇴계(退溪) 리률곡(李栗谷)을 언급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성리학이나 주자학으로 퇴계를 많이 연구했지만 최교수는 변증법적으로 연구했다. 독일의 헤겔과 퇴계를 련계시키면서 변증법을 리용했던 것이다. 또 퇴계 리률곡의 사상을 실학사상과 련계 시켜 연구하여 돌파적인 관점을 제기하고있다. 일반적으로 률곡을 성리학자로 보는데 그의 실학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극히 드물다. 최교수는 실학과 성리학을 분리하여 률곡의 실학사상내용을 쭉 뽑아서 문제를 증명해 나갔으며 결국에는 실학사상은 조선유학사상의 새로운 단계라는 주장을 내세워 학계를 놀래웠다. 조선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면서 최교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8차에 걸쳐 연안에 다녀오면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아무런 기념물도 없는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일본포로들을 교육하던 곳까지 기념물을 만들었는데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위해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워온 우리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기념물이 없다는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데요.” 최교수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가지고 연안시 박물관 관장에게 서한을 보내 기념비를 세워야할 중요성과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의 거듭되는 노력을 거쳐 드디어 연안시 라가평(罗家坪)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돌비석이 있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관련 부문과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내 료녕성 신빈현에다 리홍광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했고 길림성 반석(磐石)의 홍광중학교에 리홍광에 관련한 자료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책만 보고 력사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꼭 자료를 충분히 장악해야하고 현지를 답사해야합니다. 이 두가지가 겸비되여야만이 진정한 연구가라고 생각됩니다.” 최교수의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관내지역에서 투쟁했던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현장을 답사하고 박물관이나 서류관에서 자료를 찾고 또 유가족을 만나고 하면서 흘러간 력사를 진실하게 살려내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2005년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 60주년과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기념행사의 하나로 우리가 제작한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과 연변텔레비죤방송을 통해 중국의 광범한 조선족과 대면하게 되였고 또 민족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정리되여 조선족 독자들과 만나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사에 크게 감동된 청취자와 독자들은 다투어 편지와 전화를 보내왔으며 뒤에서 제작팀을 유력하게 도와준 최교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무더기로 쌓인 편지들은 최교수에 대해 알고싶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였다.     “우리 력사가 실사구시적으로 우리 조선족에게 알려졌다니 그만큼 더 기쁜일이 없다”며 최교수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다.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데요. 환경조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 한평생 맑스주의를 신앙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진실된 삶을 추구해왔던 최교수였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최교수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구경 우리는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고있는것일까?” 스스로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해 보게 된다.   최룡수 약력 1936년 료녕성 신빈현에서 출생 1954년 신빈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62년 9월 북경대학 철학학부를 졸업하고 길림전력학원 맑스레닌주의 교학연구실 교원으로 임직. 1964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5반”판골실, 무장부에서 사업. 1965년 농촌의 사회교육사업조 조장 1966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전직 부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을 력임.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음. 1973년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성 직속기관 당위원회 선전처에 조동. 간부교양과 대 대만선전사업을 책임. 1978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철학실에 조동. 1985년 9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직함처 처장. 1991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국급 당지부 서기. 1993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주임. 교수직함. 1995년 국무원 특수 수당금 획득.
20    제10회 중산대학과 조선인 혁명가들 댓글:  조회:3687  추천:62  2007-06-10
   국공합작이 이룩된 후 손중산은 군사인재 양성을 주로하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한편 국립광동대학을 정치전문인재 양성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군사간부만큼 리론가와 조직가로서의 정치간부도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취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광동대학은 당원간부를 양성하는 주요 기관으로 되었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로 되었다.    1924년 11월 11일, 손중산은 친히 혁명학교인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하였다. 학교 터는 광주시 문명로(文明路) 215번지에 위치한 광동고등사범학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정했다. 지금은 학교가 전부 남으로 이사하여 남은 것은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던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소집지인 종루뿐이였다. 종루는 현재 로신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5년 3월 12일, 중국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북경에서 간암으로 서거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부터 국립광동대학을 정식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는데 지금까지 중산대학으로 불리우고 있다.    20년대 후반기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황포군관학교 입교와 동시에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교직원 사업에 종사하였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중산대학은 많은 조선청년들의 배움의 전당으로 되였다. (권립) 중산대학의 전신은 1924년에 선 국립광동대학이다. 1926년 봄에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 김원봉 등은 당국과의 교섭을 거쳐 조선족은 무료로 중산대학에 입학할수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해에 57명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산, 김성숙 등이다.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일부는 전선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후방에 남아서 계속 지하활동을 진행하였다.    1926년 4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보고인 고경(高警) 134호 서류를 보면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간의 협의내용을 알수있다.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은 이때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卫)의 초청으로 중국국민당 제2차 대표대회에 참석하고저 광주에 오게 된다. 그는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장교 손두환(孙斗焕)을 통해 국민당 내 실력자이며 황포군관학교 교장인 장개석(蒋介石)을 만났다. 손두환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으로서 량자사이의 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만난 자리에서 려운형은 조선 독립운동자들에 대한 자금지원을 요구했지만 장개석은 끝내 난색을 표했다. 대신 려운형은 혁명간부와 군사기술 전문가의 양성이 필수요건임을 인식하고 조선청년들을 입교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장개석은 이를 쾌히 승낙하고 국민정부 관할내의 군관학교, 국립대학, 기타 국립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조선인은 언제라도 무조건 입학을 허가하고 군교 생도들에게는 서적, 숙소, 식비, 피복을 제공하고 일정액의 봉급을 지급하며 졸업후 24개월 동안은 국민혁명군에 의무 복무해야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의 입학과 동시에 중산대학에 많이 입학할수있게 되었던 것이다.    광주시 중산대학은 현재 신항서로(新港西路)에 위치하였다. 교문을 들어서면 키 높이 자란 고목을 가로수로 한 길이 여러갈래로 뻗어있고 푸른 잔디가 펼쳐진 정원과 교수청사들이 있다. 학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손중산의 동상과 중국 근대 력사인물들의 동상들이였다.    광동성 당사연구실의 조직(曹直)선생이 70여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답사팀을 배동해 주었다. (조직) 중산대학의 전신은 손중산이 1924년에 창설한 국립광동대학입니다. 1926년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학교 명칭을 중산대학이라고 고쳤습니다.    중산대학 도서관은 한창 수건중이여서 부분적 도서실만 개방하고있었다. 답사팀은 겨우 관리일군들을 설복해 도서관의 장서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요한 서류들은 모두 짐으로 꿍져있었다. 답사팀은 대학의 초기 교직원 상황을 찾아보았다. 산처럼 쌓아놓은 짐짝속에서 몇권을 찾아 살펴보았지만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서 조선사람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당시 의렬단 간부급 단원이였던 강세우, 김성숙(金星淑), 정유린(郑有■), 장지락(张之乐), 리영준(李英骏), 최원(崔圆), 서의준(徐义骏),리활(李活) 등이 중산대학에 입학하였고 마준(马骏), 김동주(金东洲), 김원식(金元植)을 비롯한 많은 지식청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의하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 본과 또는 예과에서 학습하였다.    광주 중산대학에 모여 함께 공부하게 된 김성숙과 장지락은 일찍 북경 활동시기부터 함께 혁명해온 훌륭한 동지였다. 김성숙이 바로 유명한 공산주의 리론가인 김규광(金奎光)이고 장지락이 바로 혁명가 김산(金山)이다. 에드가.스노의 부인 님.웨일즈가 남긴 유명한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이 바로 김산이다.    김산이 북경으로부터 광주에 온 것은 1925년 가을이였다. 이때 대부분 의렬단 단원들도 광주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 모인 많은 조선혁명자들은 서로 분파로 나뉘였고 혁명 경력도 매우 복잡하였다. 로씨야에서 풍부한 투쟁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조선 국내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상해에서 온 사람도 있었고 북경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때 김산과 김규광은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무장투쟁의 군사단체를 형성하기보다는 우선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단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시기 이미 사상, 조직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된 김산과 김규광은 대중투쟁을 위한 정당수립에 심혈을 기울렸다. 더욱이 광주에 모여온 수많은 혁명자들의 분파를 없애고 유력한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우수한 조선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서 군사, 정치 교육을 받고있을 무렵 광주에는 중국 동북, 로씨야 씨베리야나 모스크바, 조선국내, 일본 등지에서 온 다양한 경력을 가진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중국 국민혁명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그 성과를 조선의 반일독립운동으로 련결시켜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불원천리 광주에 모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친목을 도모하는 차원을 넘어서 모든 조선혁명자들을 단합시켜 이들의 힘을 한곳으로 집결시켜야 했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과 김규광, 김산 세 사람이 핵심이 되어 분파를 제거하고 대중운동을 형성할 준비를 다그쳤다.    우선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군인회가 결성되였다. 1926년 6월 28일호 동아일보가 광주 조선혁명 군인회에 관련 보도를 실었다. 보도에 의하면 창립시 회원이 백 20명이나 되었다. 군인회는 더욱 확대 발전시켜 조선군단까지 만들 계획을 세운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광주의 조선혁명가들을 단합하기 위한 조직체인 류월(留粤) 한인동지회가 1926년 6월에 창립되었다. 황포군관학교의 손두환이 회장을 맡았다. <아리랑>에서 김산이 회억한데 의하면 김원봉, 김규광, 김산의 노력으로 조선인의 모든 집단과 정파를 대표하는 중앙동맹체인 조선혁명청년련맹 창립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였고 3백명 회원을 받았다.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 련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였는데 그 가운데는 련맹 창도자인 김규광과 김원봉이 포함되였다.    1927년 4월 류월동지회는 제2차 림시대회를 소집하고 지도층을 개선하였다. 마준, 정유린, 서의준, 리영준, 채원개, 리활, 김동주, 장지락, 김원식 9명이 신임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이 가운데 리활이 바로 저명한 저항시인 륙사(陆史) 리원록(李源禄1904.4.4--1944.1.16)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련모(恋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阴)을     부지런한 계절(季节)은 피어서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저명한 저항시 <광야(旷野)>를 창작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갈망했던 시인 리륙사(李陆史)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여났다. 1925년 일본에서의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의렬단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들어가 일제 주요기관들을 파괴하다 체포된 윤세주의 의렬투쟁 사적은 그를 크게 감동시켰던 것이다. 초기 그는 북경에 자주 다니면서 조선정세 보고와 군자금 전달사업을 맡아 보았다. 후에 중국에서의 혁명중심지가 광주로 옮겨짐에 따라 그는 광주의 중산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인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하여 류월동지회인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리륙사는 선후로 17차례의 옥고를 치른다. 일제 감방에서 그의 번호가 64번이였기 때문에 호를 륙사로 하였다한다. 굴함없이 일제와 싸우면서 의렬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는 몸이 쇠약해짐에 따라 붓을 무기로 삶았다. 전민족의 수난기였던 그 암흑한 사회에서 주옥같은 시들로 항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싸우던 리륙사는 1944년 1월 북경 일제감옥에서 옥사한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의 창립과 함께 김규광은 활발한 리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련맹의 기관지인 <혁명행동>을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김산은 부주필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김규광은 련맹의 모든 선언을 기초하였는데 그의 론문들은 인차 유명해졌고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련맹 내부는 의연히 여러 파벌들로 나뉘여 지도권 다툼을 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을 위해 더욱 특별한 조직이 필요하였다. 김규광과 김산은 각지 공산당원 80명을 모아 조선인 공산주의 비밀조직을 내왔다.    조선혁명청년련맹은 어디까지나 정당이 아니였다.의렬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선민족독립당이 이시기 형성되였다. 조선민족독립당은 11명 위원을 선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체계가 수립되면서 많은 조선혁명가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수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 틈에 끼여 어떤 사람은 고문으로 어떤 사람은 황포군관학교나 중산대학의 강사로, 어떤 사람은 혁명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혁명군대에 들어가 전투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고 함께 혁명을 론하면서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고있었다.    
19    제9회 황포군관학교의 조선혁명가들 댓글:  조회:4929  추천:48  2007-06-10
   광주시 황포구 장주도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사람들은 복원된 교실, 기숙사, 사무실, 식당들을 돌아보면서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바로 이처럼 간소한 학교에서 20여년간 중국혁명을 주름잡았던 수많은 장성급 인물들이 배출되여 나왔던 것이다.    앞줄 건물 2층에는 총리 사무실과 교장실, 비서실이 있었고 부근에는 학교 각부서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벽에는 황포군관학교 1기생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편액이 걸려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조선혁명가들은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교하기 시작하였다.    <중앙륙군 군관학교 제11기 제1총대 동학록(同学录)>에 따르면 1925년 6월부터 1926년까지의 황포군관학교 제3기 동학 성명 적관표(籍贯表)에는 한국 함경북도의 리빈(李彬),조선의 차정신(车廷信),한국의 장성철(张圣哲), 조선 한성(汉城)의 류철선(刘铁仙) 등 네명이 있다. 그리고 <황포동학총명책(黄埔同学总名册)>의 자료를 보면 3기에 리일태(李逸泰)가 더 있다.    외환과 내란을 겪고있던 19세기말 조선왕조는 근대화한 국가창립을 주도하게 된다. 개화파와 수구파가 모두 고종왕을 중심으로 한 군주제 국가를 건립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 적관란에도 조선혁명자들을 조선인 혹은 한국인으로 등록되였던것이다.    이들 네 사람은 일찍부터 광주에서 활동하다보니 가장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선학생으로 되었다. 이 가운데서 차정신, 장성철, 류철선은 중국의 조기 항공활동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들은 류월한인회의 박태하와 함께 손중산의 지도로 설립된 항공학교에서 항공기술을 배웠으며 한동안 쏘련에 있는 조선인 조기 항공기술가 김공집(金公缉)과 함께 쏘련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세 사람은 황포군관학교의 설립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3기에 입교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제4기에 조선인 24명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권립) 우리민족 청년들이 황포에 입학할수있게 하기 위해 김원봉은 학교 당국과 교섭하여 우리 동포청년들의 입학절차에 관한 협의를 달성하였다. 먼저 엄격한 심사와 시험을 거쳐 합격이 되면 반년간의 예비교육을 받고 다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입학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황포 4기에는 24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제5기에는 6명, 후에는 십명 도합 45명의 우리민족 열혈청년들이 입학했다. 1925년 통계에 의하면 황포와 그 산하의 병영에는 60여명 우리민족 청년들이 있었다.    당시 최림(崔林)으로 변성명한 김원봉이 제4기에 입학해서 강평국(姜平国), 류원욱(柳远郁), 박효삼(朴孝三), 박건웅(朴建雄), 양검(杨俭), 전의창(田义昌), 리우각(李愚悫), 권준(权■), 리집중(李集中), 왕자량(王子良), 윤의진(尹义进), 최영택(崔永泽), 김종(金钟), 리종원(李钟元), 로일룡(卢一龙), 리기환(李箕焕), 오세진(吴世振), 전홍묵(全洪默), 백홍(白红), 로세방(劳世芳), 박익제(朴益济), 문선재(文善在), 로건(卢建) 등 도합 24명이 입교했다.    황포 5기에는 백여명 조선청년들이 입교하였는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정변으로하여 자진 퇴교하거나 강제 축출 당해 겨우 4명만 졸업할수있었다. 그리하여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에도 제5기생으로 김호원(金浩元), 안유재(安维才), 장흥(张兴), 장익(张翼) 네 이름만 남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학생신분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교직원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학교초기 쏘련군사학교를 졸업한 강섭무(姜燮武)가 포병훈련 교관 겸 쏘련고문의 통역으로 있었고 상해림시정부에서 온 김철남(金铁男)이 제3교도단(教导第3团)의 소좌(少校) 부단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조선혁명가 손두환(孙斗焕)이 황포군관학교 교장판공청 부관으로, 운남강무학당(云南讲武学堂)을 졸업한 리계동(李启东)이 부관으로, 리검운(李剑云)이 조교(助教)로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조선족 교직원으로는 양림(杨林)이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고문단과 함께 온 양달부(杨达夫) 일명 량도부(梁道夫)라고도 하는데 그가 포병교관으로 있었으며 3기 졸업생인 리빈(李彬)이 제4기 정치과 구대장(区队长)으로 있었다. 제5기 교직원들로는 중좌(中校) 주임교관에 양림, 황포탄 의거의 주역이였던 오성륜(吴成伦), 채원개(蔡元凯), 최추해(崔秋海), 안응근(安应根), 오명(吴明), 3기 졸업생인 리일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제2보병대대 소좌(小校) 구대장 최추해가 바로 저명한 조선혁명가 최용건이다. 그리고 제6기 교직원으로는 채원개, 4기 졸업생인 박효삼(朴孝三), 공주선(孔周宣) 세 사람이 있었다. 이때 최용건은 이미 특무영(特务营) 제2련 련장을 맡고 교직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년간 학계의 연구를 거쳐 1927년까지 황포군관학교 본교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명단이 통계되였다. 그러나 당시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던 험악한 상황에서 국적과 호적을 고치고 변성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조선혁명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수많은 조선 열혈남아들이 중국 청년들과 함께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했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기술을 련마하였다. 당시 사용했던 군교학생들의 제복, 무기,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개여놓은 군인이불, 정숙한 교실을 돌아보노라니 씩씩한 황포군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았다.      “분투정신은 주의(主义)에서 온다. 사병들의 정신을 발휘하려면 우선 주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 혁명적 주의가 있어야만이 우리 혁명이 목표가있게 되고 혁명목표가 있어야만이 우리의 분투정신이 있게 된다.” 손중산 총리의 연설을 가슴에 명기한 학생들은 열심히 혁명사상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기능을 련마하였다. “혁명은 대중의 힘에 의지해야한다. 오로지 대중을 무장하고 무력항쟁해야만이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우리는 장강을 넘어서 북으로, 북으로 진격할 수 있고 드디어는 조선으로 쳐들어가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 이와 같은 열망을 안고 조선 청년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학습과 훈련에 뛰여들었다.      이시기 각지 국민혁명군 여러부대도 군관학교나 강무학당을 설립해 우수한 장교들을 양성하기에 심혈을 기울렸다. 국민당은 각지 군교의 군사와 정치 교육을 통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를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로 개칭하고 각지 군관학교와 강무학당을 황포군관학교에 합병하였다. 그리고 혁명의 수요에 따라 각지에 황포군관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는데 조주(潮州)분교, 남녕(南宁)분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하자 무한에 황포군관학교 분교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정치과의 500여명이 무한에 옮겨 오게 되고 무한에서 195명의 녀학생을 받아 군교 녀학생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답사팀이 선색을 따라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찾아갔을 때는 광주 답사를 한 일주일 후였다.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무한시 해방로 259번지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호북성 무창실험소학교(武昌实验小学校)로 되어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와 운동장에서 떠들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창실험소학교 새 교학청사 뒤편으로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거대한 단층 건물이였는데 두부분으로 나뉘여있었다. 그 가운데 건물벽에는 흰대리석에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유적지라고 밝혀져있었다. 건물 주변에는 십여메터 높이의 고목이 줄지어서 군인들의 씩씩했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사실 1927년 이후로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사명은 완수된 셈이다. 그후 무한분교에 대부분 학원들이 집중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하여 국민당도 분렬되여 황포군관학교 교장의 신분으로 국민당군의 실권을 잡은 장개석이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장개석은 남경에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전면 교체해 버린다. 또한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의 졸업식까지 남경에서 진행하였다. 이로써 대혁명시기의 중국 혁명과 군사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되었던 황포군관학교는 사실상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끝마치게 된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 이후로 대부분 학생들은 무한분교나 남경에서 학습하고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륙군군관학교 제21기 동학록>을 보면 그뒤 황포군관학교 제6기부터 21기까지 역시 조선인 혁명가들이 있었다. 제6기에 신석우(申硕雨), 최문용(崔文镛), 로식(鲁植) 원명은 김창만(金昌满)이 있었고 기병과(骑兵科)에 김진문(金真文), 김명산(金明山), 김은제(金恩济)가 있었다. 제8기 보병과에 리근호(李根浩)가 있었고 제20기 보병과(步兵科)에 김중진(金重镇), 기병과에 장철부(张哲夫)가 있었으며 제21기 포병대에 조동린(赵东麟)이 있었다. 조동린은 당시 24세로 조선 정주(定州)사람이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다는 설명까지 밝혀져있다.      광주의 황포군관학교 대부분 건물은 1938년 일본참략자들의 폭격을 받아 파괴되여버렸다. 그후 1965년에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93년에 재차 수건하여 지금은 비교적 완정한 모습을 볼수있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 정문을 나와 흰 담을 따라 가노라면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를 나와 한동안 걸으면 황포군관학교 부근의 붉은 벽돌과 흰 세멘트로 축조된 서양식 건물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총리사무청사 유적지로서 당시 손중산이 사무를 보던 곳이였고 하나는 군인구락부(俱乐部) 유적지로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이 여러 가지 모임을 가지고 휴식하던 곳이였다. 군인구락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로천(露天) 수영장이 있었다. 입구의 흰 대리석 석판에는 수영장에 관련한 설명이 있었다. 1926년 군교 학생들이 두 개 못을 파서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수영장은 사용하지 않고있었지만 부근 주둔부대 전사들이 이곳 공지에서 빨래를 말리고있었다.        총리사무청사와 군인구락부, 수영장 유적지들은 길 오른쪽에 차례로 있었다. 길 외편은 숲이 우거진 작은 산이 있었다. 손중산 기념공원이였다.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돌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그 우에는 벽돌로 담을 쌓았고 담 뒤에는 우뚝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흰탑에는 <손총리기념탑(孙总理纪念塔)>이라고 새겨져 있고 탑우에는 손중산 기념동상이 있었다. 왼손으로 허리를 집고 오른 손을 자연스럽게 내 밀고있는 모습이였다.      저녁녘이 되어서 답사팀은 황포군관학교 유적지를 떠났다.     수억 중국인민들에게 국부(国父)로 존경받는 손중산에 의해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 인민들의 중견인물로 될 수많은 혁명, 군사인재를 양성해낸 황포군관학교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배움의 터전에는 훗날 국민당의 항일명장들인 장치중(张治中), 두률명(杜聿明)이 있었고 중국공산당의 염검영(叶剑英), 섭영진(聂荣臻), 림표(林彪), 진의(陈毅), 진갱(陈赓), 서향전(徐向前), 좌권(左权), 주사제(周士弟), 류지단(刘志丹), 라서경(罗瑞卿)을 비롯한 장성급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니고 이국 땅 만리에서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했던 조선의 지사들은 바로 이들과 함께 혁명과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의 격변속에 반일독립투쟁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18    제8회 황포군관학교 유적지 댓글:  조회:3879  추천:68  2007-06-10
(권립)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1924년 1월부터 1927년 7월까지이다.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는 북양군벌을 때려 엎기 위한 혁명전쟁을 가리킨다. 1924년 1월에 국내 혁명전쟁을 실시. 이 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는 광주였고 우리민족 혁명자들의 활동중심지도 광주였다. 민족지사들은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등 학교에서 민족해방의 기량을 닦았고 북벌전쟁에서 몸바쳐 싸웠다.     20세기 2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중국의 주요 모순은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국권을 팔아가며 자기 세력 확충에만 여념이 없던 크고작은 봉건군벌과 반제반봉건 사명을 짊어진 모든 진보세력간의 대결이였다.    새로 창건된 중국공산당은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사명을 짊어지고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과 손잡고 피어린 항쟁을 진행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력사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에 들어서게 된다. 1924년에 개최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는 국공합작을 실현함으로써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의 시작을 의미한다.     광주시 문명로(文明路) 215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로신(鲁迅)기념관이 바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던 곳이다. 2층 건물 가운데 종루가 탑처럼 높이 솟아 있는 이 건물은 80여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건물은 원래 광동고등사범학당(广东高等师范学堂) 강당이였는데 후에 이곳에 국립광동대학이 설립되였다. 국립광동대학은 손중산이 서거한 후 중산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27년 중국의 대문호인 로신선생이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이곳에서 혁명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건물 한 부분을 로신기념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현재 중산대학은 광주시 남부로 이사해 갔다.      1924년 1월 20일부터 30일까지 이 강당에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된다. 대회장은 종루 밑층의 강당이였다. 국민당 총리신분으로 대회주석을 맡은 손중산은 대회에서 국민당을 재조직하고 삼민주의(三民主义)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쏘련과 련합하고 공산당과 련합하며 농민과 로동자를 부조한다”는 3대 정책을 내놓았다. 공산당원인 리대소, 모태동, 림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등도 대회지도사업에 참여해 대회에서 중국국민당 제1기 중앙집행위원과 후보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는 원만히 페막되였고 국민당은 중국 각계급 련맹의 정당으로 개조되였다. 대회에서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두 당은 반제반봉건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전국의 새로운 혁명고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로신기념관 정원은 만 7천여평방메터에 달했는데 후에는 중산대학의 운동장으로 사용하였다. 강당과 정원은 대회와 집회를 가지기 적합했기 때문에 공산당과 국민당 지도자들은 늘 이곳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또한 군중집회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곳은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 혁명의 대 본영으로 되었고 지금은 전국 중점문화재로 되였다.     3백여 평방메터에 달하는 종루 밑 강당은 1, 2층을 통털어 만들어 공간이 퍼그나 컸을 뿐만 아니라 광선이 충족하였다. 강당에는 주석대와 관중석이 당시 모양대로 복원되여 있었다. 주석대 정면 벽에는 손중산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량옆에 국민당 당기와 중화민국 국기가 걸려있었다. 관중석은 흰천으로 두른 탁상과 긴 나무걸상들로 정연히 배렬되여있었고 대회에 출석한 대표들의 명함이 걸상 등받이 뒤에 적혀있었다. 명함들을 살펴보니 공산당 대표로 참석했던 모택동의 이름도 있었지만 방청석은 밝혀지지 않아 조선대표로 참가한 의렬단 성원 권준(权竣)의 이름은 찾을 길 없었다. 안내일군들과 문의해보니 분명 방청자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대회에 출석한 외국인이거나 방청자들에 대한 연구가 없다는것이였다.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있은 후 손중산은 국제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건의에 따라 혁명군사학교 설립사업을 다그쳤다. 그는 황포장주도(黄埔长洲岛)에 학교 터를 정하고 각지에서 학생모집 사업을 전개할 것을 포치하였다. 모택동을 비롯한 공산당 인사들도 학생모집 사업을 적극 도왔다. 1924년 3월 27일 황포군관학교 입시 시험이 광주에서 진행되였다. 엄격한 시험을 거쳐 천 2백여명 수험생들 가운데서 3백 50명 정식 입교생(入校生)과 백 20명 예비 입교생을 선발하였다. 정식 입교생들은 1대, 2대, 3대로 나누어 편입하고 예비생은 제4분대에 편입하였는데 이들을 학생총대(学生总队)라고 하였다.     6월 16일, 학교 개교식이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학교 전칭은 <중국국민당륙군군관학교(中国国民党陆军军官学校)>였지만 광주시 황포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포군관학교라고 한다. 손중산은 이날 개교식에서, 군관학교의 취지는 혁명군을 건립하여 위기의 중국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포장주도는 광주시 동쪽 교외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곳을 답사하려면 반나절 시간이 수요되였다. 답사팀이 황포군관학교를 찾아 떠난 것은 2월 10일 오후였다. 광주답사를 시작한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였다. 련일 내리던 보슬비도 멎고 날씨는 한결 맑고 따뜻하였다.     차는 신항동로(新港东路)를 따라 곧추 동남부로 달렸다. 번화한 광주시구역을 벗어나 한시간 쯤 가노라니 시교에 도착하였다. 길도 많이 좁았고 집들도 낮은 건물들이였다. 광주시 황포구(黄埔区)에 속하는 장주도(长洲岛)는 주강(珠江)하류의 큰 섬이다. 시 구역을 벗어나 달리노라니 황포조선소(黄埔造船所)가 보였고 그 옆으로 황포군관학교 옛터를 가르키는 도로표식이 있었다. 조선소 부근에 장주도로 가는 작은 나루터가 있었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 나룻터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여있었다. 나룻배는 2,30분에 한번씩 온다고 했다. 오토바이, 승용차, 빵차, 트럭까지 대기하고있었다. 강폭은 천여메터 되어 보였는데 강기슭에는 낡은 고기잡이 배 몇척과 수백톤급 륜선 두척이 정박하고있었다.     20여분 기다리니 바른편으로부터 배 한척이 건너왔다. 거대한 철선(铁船)이 였는데 배에는 역시 오토바이, 승용차, 트럭들을 가득 싣고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자 푸른 등을 기다렸다는 듯이 배의 행인과 차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이편의 차들이 배에 올랐다. 나룻배는 도보로 가는 행인의 료금은 받지 않았지만 기동차는 료금을 받았다.      섬에는 주둔군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옛터는 장주도의 하장(下庄)에 있었다.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하장에 이르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황포군관학교 옛터를 안내하는 간판이 길옆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아 갈수 있었다.   흰 담으로 둘러싸인 황포군관학교 정문에는 <륙군 군관 학교(陆军军官学校)>라는 검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청나라 말기 륙군학당(陆军学堂) 건물을 수선해 만든 학교 주 건물은 전형적인 중국식 사진삼로(四进三路)의 2층 건물이였다. 4줄로 배렬 된 2층 건물은 회랑(回廊) 3개로 이어졌는데 회랑과 건물이 한데 붙어 일체를 이루고있었다. 백여평방메터 되는 큰 방과 2,3십 평방메터 되는 작은 방이 수십개 있었는데 각기 학교사무실, 교실, 학생 기숙사, 회의실로 사용했던 것이다. 회랑과 2층건물사이에 정방형의 작은 마당이 6개가 있었다. 거기에는 나무통에 물이 담겨져있었고 또 화분들이 곱게 배렬되여 있었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이중압박에 시달리던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기량을 닦으면서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던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의 산물인 황포군관학교에 모두 주요한 간부들을 파견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파견한 주은래(周恩来)가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섭영진(聂荣臻)과 엽검영(叶剑英)이 교수부 비서, 부주임을 맡았으며 등연달(邓演达), 운대영(恽代英) 등이 정치교관으로 있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조선혁명가이며 공산당원인 삐스디(毕士悌)도 황포군관학교 군사교관으로 있었다. 삐스디가 바로 유명한 조선족 혁명가 양림이다.    국제공산당에서도 많은 기술일군들을 황포에 파견하였다. 손중산은 혁명군 창건에서 쏘련홍군의 건군리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학교 설립시 여러차례 대표단을 쏘련에 보냈고 또 쏘련의 많은 기술일군들을 고문으로 초빙했다. 그리하여 황포군관학교에는 보로딘(鲍罗廷)을 비롯한 많은 로씨야인들이 정치, 군사, 보병, 포병, 공병 고문으로 임명되였다. 이와 함께 일찍부터 로씨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혁명가들이 통역신분으로 혹은 입교생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오게 된다.    이시기 중국내에 활동하던 의렬단도 광주에 모여 단장 김원봉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되고 광주에 있던 기타 조선인 열혈청년들도 만강의 희망을 안고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권립) 국민당 1차대회는 국공합작을 의미, 중국혁명의 진보를 의미한다. 이에 고무된 우리민족 의렬단의 거두인 김원봉선생과 상해, 무한, 북경의 의렬단 성원들이 광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로 테로적인 수단으로 반일투쟁을 진행해오다가 로씨야와 련합하고 공산당과 련합하며 농민, 로동자를 부축해야한다는 손중산의 삼대정책에 흡인되고 손중산의 신삼민주의에 흡인되여 국공합작의 길에서 민족해방투쟁의 기량을 닦으려 했다. 마침 1924년 6월에 황포군관학교가 개학하고 11월에는 광동대학이 섰다. 1925년 시월에는 중산대학으로 고쳐진다. 이리하여 적지않은 우리민족 혁명지사들이 이 두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의렬단 단장 김원봉이 광주에 도착한 것은 1924년 4월 중순으로 추측된다. 그는 광주에서 쏘련 대표를 기다리는 한편 국민당 원로들인 료중개(廖仲恺)와 담평산(谭平山)을 방문하였다. 료중개는 손중산의 유력한 조수였고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서 국공합작의 전 과정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쏘련과의 교섭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 재정부장에 광동 성장을 겸하고있는 실력자였다. 중국공산당 당원이면서 국민당에 입당한 담평산은 중앙조직부장을 맡고있었다. 이들을 만난 김원봉은 조선혁명투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의렬단 단원들의 국민당군 배속이거나 황포군관학교 입교가 가능해 졌다. 그후 1925년 8월경에 의렬단 간부진과 19명 단원은 광주로 오게 되고 따라서 의렬단 본부도 광주에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김원봉을 포함한 의렬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국주의세력과 유착한 군벌정권을 타고하고 국민정부의 힘으로 중국통일을 실현해 낼수 있다고 조선혁명가들을 믿었다. 그들은 중국이 통일되면 국민정부의 지원아래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과 자유를 찾을수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7    제7회 광동에서의 투쟁 댓글:  조회:3472  추천:66  2007-06-10
    답사팀이 광주로 떠난 것은 2004년 2월 7일 저녁이였다. 3시간 남짓한 비행을 거쳐 광주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9시 30분이였다. 보슬비가 내리는 광주, 번쩍이는 네온등 불빛은 비속에서도 광주의 번화함을 감추지 못하고 꿈처럼 빛나고 있었다.   중국대혁명시기 혁명의 중심지로서의 광주는 커다란 흡인력을 가지고 수많은 혁명지사들을 광주에 모여들게 하였다. 당시 중국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이 광주에서 군벌타격 투쟁을 적극 지도하고있었던 것이다. 조선민족 혁명자들도 새로운 독립의 길을 찾아 광주에 모여든 것은 지난 세기 20년대였다.  (권립) 광주는 손중산선생의 혁명활동 중심지로서 우리민족 혁명자들에게는 크나큰 흡인력을 갖고있었다.1917년 손중산은 광주에서 비상국회를 열고 호법군정부를 세우고 북벌을 선포했다. 제국주의를 한없이 미워하고 군벌을 한없이 미워한 우리민족은 북벌전쟁의 크나큰 흥취를 가지고 지대한 관심을 표했을뿐더러 손중산선생을 찾아 떠났다.     광주에 도착한 이튿날 답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황화강렬사릉원(黄花岗烈士陵园)이였다. 릉원은 광주시 동북부 백운산(白云山)풍경구 이남의 선렬중로(先烈中路)에 위치했는데 지금은 황화강공원이라고 한다.    1911년 4월 27일 손중산이 령도하는 동맹회(同盟会)는 광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팔에 흰천을 동인 결사대 백여명이 황흥(黄兴)의 령도하에 청정부 량광총독서(两广总督署)로 돌입했지만 다른 호응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고말았다. 도처에서 적들이 포위해 오자 봉기자들은 총독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왔다. 봉기가 실패한 후 청정부는 많은 혁명자들을 살해해 그들의 유체를 거리에 내 던졌다. 5월 3일, 동맹회 회원 반달미(潘达微)가 <평민일보(平民日报)>의 기자신분으로 사람들을 조직해 72명 수난자들의 유해를 거두었다. 그들은 피로 얼룩져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곳에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신해혁명이 승리한후 1912년 사람들은 이곳에 렬사릉원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1919년 화교들의 의연금으로 릉원이 확건되였다.    부지면적이 12만 9천 평방메터이 릉원 정문은 십여메터 높은 석패방(石牌坊)으로 되어있었다. 정문에는 손중산이 친필로 쓴 <호기장존(浩气长存)>이란 금빛 글발이 새겨져 있었다. 정문에서 돌계단을 따라 3백여메터 가노라면 렬사묘비가 있고 그 뒤에는 기공방(纪功坊)이 있었다. 기공방은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큰 돌 72개를 금자탑 모양으로 쌓고 그 우에 자유녀신상을 조각해 만들었다.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에서 72명 렬사들은 두려움없이 싸웠으며 그들의 과감한 혁명정신은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황화강 렬사들의 투쟁은 신해혁명의 도화선이였다. 렬사들의 투쟁에 크게 고무를 받은 중국인민은 손중산을 따라 무창을 중심으로 전국 도처에서 봉기를 일으켜 드디어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었다. 그러나 신해혁명후, 중국은 더욱 큰 혼란기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부패한 만청정부는 당시 군권을 잡고있던 원세개(袁世凯)를 내각총리로 임명하고 무너져가는 봉건정권을 만구하려고 하였다. 원세개는 기세 드높은 전국의 혁명정세에 비추어 혁명자로 위장하고 청조 황제를 퇴위시켰다. 그리하여 남경에 설립된 참의원은 원세개를 대총통(大总统)으로 선정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야망에 찬 원세개는 혁명성과를 절취한후 즉각 국회를 해산시키고 <중화민국 림시약법(中华民国临时约法)>을 페지했을뿐만 아니라 매국적인 <21개 조약>을 일본과 체결하면서 부단히 자기 세력을 확충하였다. 비밀리에 국권을 팔아 자기 세력을 확충하던 원세개는 드디어 봉건제도를 다시 회복하고 스스로 황위에 등극하게까지 되었다.    그러자 원세개를 토벌하는 투쟁이 시작되였다. 운남 도독 채악(蔡锷)은 운남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귀주, 광서, 광동, 절강 등지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거듭되는 실패로하여 1916년 3월, 원세개는 퇴위를 선포하고 그해 6월 6일 울화증으로 죽는다. 원세개가 죽은 뒤 두목을 잃은 방대한 북양군벌들은 각자 자기 세력을 확충하기에 급급했고 서로 끊임없는 권력쟁탈을 진행함으로써 인민들을 다시 도탄속에 밀어넣었다. 북양군벌 가운데서 세력이 비교적 큰 군벌들로는 직계(直系)군벌 풍국장(冯国璋)과 조곤(曹锟), 환계(皖系)군벌 단기서(段祺瑞), 봉계(奉系)군벌 장작림(张作霖), 진계(晋系)군벌 염석산(阎锡山)이 있었고 운남의 당계요(唐继尧), 광서의 륙영정(陆荣廷)의 세력도 막강하였다. 이들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국권을 팔고 인민을 수탈하면서 저들의 세력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1917년 북평의 중앙정권을 잡은 환계군벌 단기서 역시 손중산의 <림시약법>을 페지하였다. 이에 손중산은 <림시약법>을 보위하고 민주혁명의 성과를 되찾기 위한 호법운동(护法运动)을 호소하고 호법군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남방각지의 군벌들도 서로 자체의 리익관계로 분렬되면서 호법운동도 성공하지 못했다. 호법운동이 실패한후 손중산은 새로운 혁명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거듭되는 실패를 겪은 그는 새로운 혁명군대가 있어야 함을 절박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혁명을 지도할 더욱 유력한 당조직을 만들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광주시 해방로(解放路)를 따나 북에서 남으로 가노라면 월수공원(越秀公园), 중산기념당(中山纪念堂), 인민공원(人民公园)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서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였다. 답사 팀이 탄 차가 기념당 정문에 들어섰을 때 손중산선생이 친필로 쓴 <천하위공(天下为公)>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한다는 그 글뜻에서 혁명선구자 손중산선생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수있었다. 기념당은 거대한 극장으로 되어있었다. 록화가 잘 된 기념당 정원 정면에는 거대한 손중산 동상이 있었다.     광동성의 중점 문화재인 중산기념당은 광주시민과 해외 화교들이 손중산을 기념하기 위해 돈을 모아 축조한 것이다. 기념당은 손중산선생이 일찍 사용했던 총통부 옛터에 축조되였는데 우리나라 유명한 건축설계사 려언직(吕彦直)선생이 설계했고 1929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준공되였다. 중산기념당은 화려한 팔각형 건물로서 외형은 장엄하고 웅위해 보였고 푸른 기와로 된 지붕은 민족특색이 짙어 보였다. 실내는 3,238개 좌석이 배치된 거대한 공연장이였는데 회의장소로도 사용되였다.    해방후 정부에서는 1988년까지 7차례에 거쳐 자금을 투입해 건물을 수건하였다. 그리하여 정원은 6헥타르로 확대되였고 70여년이 넘는 극장건물도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될수 있었다. 지금 이곳은 광주시의 주요 관광지의 하나로 되어 국내외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다.      이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은 시국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고 손중산의 혁명을 적극 동조하였다. 1921년 12월, 국제공산당 대표 마린은 리대소의 소개로 계림에서 손중산을 만났다. 그는 국제공산당을 대표하여 더욱 광범위한 로농대중과 단결하고 혁명무장의 핵심으로 될 수있는 군관학교를 설립해야한다는 두가지 건의를 제기하였다. 그후 리대소는 상해에서 여러차레 손중산을 만나 침식을 잊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는 또 수많은 당원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해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는 중국신민주주의 혁명중심지로 되었고 수많은 조선 혁명자들도 광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권립) 한편 광주에 있던 우리민족 항일인사들은 1921년 9월 광주거주 한인한고향회를 건립하고 서로 돕고 아끼면서 반일투쟁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광주에 있던 우리민족 반일인사들은 형제민족과 손잡고 광주 중한협회까지 건립했다. 초기에는 70여명, 한달후에는 수백명으로 증가했다. 광주의 많은 군정간부들과 지명인사들이 이에 참가하여 우리민족의 해방투쟁을 지지해 나섰다.    손중산과 호법군정부는 조선민족의 독립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림시정부의 요인들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었다. 그리하여 신정, 려운형, 려운홍, 박은식 등이 선후로 군정부를 방문하였으며 동맹회 회원이였던 신정은 림시정부의 특사신분으로 호법군정부와 교섭하기도 하였다. 손중산을 만난 신정은 림시정부 승인문제, 조선 청년 교육문제와 관련해 합의를 보고 유력한 지원을 받게 된다. 신정은 또 박태화(朴太和)를 비롯한 십여명 림시정부 관원들을 광주에 파견했다. 이들은 광동성 각계의 도움을 받으면서 박태화를 회장으로 하는 류월한인회(留粤韩人会)를 조직하였다. 류월한인회는 광주의 조선 이주민들을 도와주는 한편 혁명가들을 단합시켰다. 그후 류월한인회가 주도로 되어 중국과 조선 지명인사들이 광동도서관에 모여 <중한협회(中韩协会)>를 건립했다. 손중산이 이끄는 호법정부의 많은 의원들과 관원들이 중한협회에 참가해 두나라 혁명투쟁을 공동히 진행하기로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鲜总督府警务局)의 자료를 보면 20세기 초 광동에는 5백여명 조선 이주민들이 살고있었다. 그 가운데 광주에만 300명이 있었는데 남성 80명에 녀성 220명으로 집계 되여 있었다.    20년대에 들어서서 이주민뿐만 아니라 많은 혁명자들이 광주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25년, 광주에 조선혁명자들이 60여명이 활동하고있었고 1927년에는 급증하여 8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동북에서 군사기능을 배우고 유격전을 전개하던 독립군 400여명이 있었고 로씨야에서 다년간 투쟁해오던 백여명 조선혁명자들이 포함되였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포병, 기관총 기술을 배우고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은 후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온 조선인 군사간부 30여명도 포함되여있었다. 이들은 쏘련 고문단과 함께 와서 중국 각계 요인들과 련계를 달아주고 통역을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밖에 조선과 일본에서 건너온 애국자 백여명, 동북공산청년동맹 성원 70여명도 있었다.    도처에서 총과 폭탄으로 일제 요인들을 사살하던 의렬단도 이시기 광주로 옮겨오기 시작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를 주장하던 의렬단은 민중에 의지할 힘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여러차례의 의거가 있었지만 일반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상황이 나타나자 의렬투쟁도 새로운 방략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 성원들이 조직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광주에 모여왔다.    광주에 모여온 이러한 조선청년들은 거의 다 지식인으로서 애국자일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가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 흩어져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투쟁해왔기 때문에 투쟁경력이 달랐고 정치견해도 같지 않았다. 공산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으며 관망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중국혁명에 동조하면서 새로운 독립투쟁의 길을 찾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독립투쟁의 성공을 이끌어낼 공동한 꿈을 지니고있었던 것이다.
16    제6회 의렬단 투쟁과 중국공산당 창건 댓글:  조회:4191  추천:64  2007-06-10
   1919년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반제반봉건 투쟁을 선호하였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가혹한 침략과 수탈을 받고있는 조선 지사들의 반일 투쟁은 더욱 치렬하였다. 이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진행된 반일유격투쟁과 곳곳에서 작탄을 터쳐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한 의렬투쟁이였다.    1919년 11월 10일 중국동북 길림성내에서 의렬단이 창단된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는 취지로 조직명칭이 의렬단으로 되었고 단원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 국내에서 반일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수많은 의사들이 중국내에 집결되였다. 무력항쟁을 위한 군대양성을 목적으로 한 중국 동북의 신흥무관학교(新兴武官学校)의 학생들이 중추가 되여 약산(若山) 김원봉(金元凤)과 함께 의렬단을 창단하게 된다. 김원봉은 남방에서 파견한 중국인 주황(周况)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에 가서 주황에게서 폭탄제조기술을 배우는 한편 리종암(李锺岩),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등 8명 단원을 확보했다. 여기에 국내 밀양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의 판결을 받고 중국으로 도주한 윤세주(尹世胄)를 비롯한 몇 명이 가담하여 도합 단원 13명이 확보 되였다.   의렬단원들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의로운 피”를 흘리려 한 열혈 남아들이였다. 일제식민통치자들을 상대로 폭탄이나 총기를 사용해 파괴와 암살을 진행하는 것이 이들의 행동방법이였다.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 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였다. 김원봉은 신채호가 기초한 리승만 성토문의 54인 서명자 중 한명일뿐만 아니라 이들 서명자 가운데서 김재희(金在喜), 송호(宋虎), 오성륜(吴成伦), 최용덕(崔用德), 정인교(郑寅教) 등을 의렬단에 받아들여 참모진을 구성한다. 그뒤 김원봉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고 모든 타협주의를 반대하면서 오직 폭력적 대중혁명을 주장하였다.    20년대 의렬단은 선후하여 밀양(密阳), 진영(进永) 폭탄반입사건, 부산,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쿄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黄浦滩) 의거 등 의렬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진행된 의렬투쟁은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을뿐만 아니라 동방 피압박 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상해의 황포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배들이 쉼 없이 오고갔다. 황포강을 사이두고 서쪽은 20세기 초엽 상해의 번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많은 옛 건물들이 고스란히 보존 되여 있다. 대부분 회색의 서양식 돌 건물들이다. 강을 사이두고 포동(浦东)지구의 번창한 모습이 오늘의 상해 황포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고 있다. 멀리 하늘을 박차고 선 동방지주(东方之珠) 방송 송신탑이 있고 그 주변에 현대식 빌딩이 숲을 이루고있었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의 황포탄 의거 유적지가 옛날 세관자리였다. 답사팀은 세관청사 옛 건물을 찾아 외탄을 거닐었다.   (외탄에서 만난 행인) 이곳에서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을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상해지식청년입니다. 여기가 바로 당년의 회풍은행이고 그 옆이 바로 세관청사입니다. 해방이전과 똑 같습니다. 옆이 푸른 지붕인 건물이 평화판점이고 그 다음은 중국은행 건물입니다.      현지인들의 소개에 의하면 세관부두와 그 주변은 당시와 다름이 없었다. 열혈투사 오성륜, 김익상(金益相), 리종암이 민족을 위해 단연히 일제 군부 거물급 인물인 다나까를 저격했던 의거의 현장이다. 부두와 세관 건물 모두가 변함이 없었다.   강기슭을 여유롭게 거니는 행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설레이는 마음은 진정할수 없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죽기를 맹세하고 스스럼 없이 저격에 나선 민족의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최룡수) 1922년 3월 22일 의열단 대원 김익상, 오성륜, 리종암 세 투사는 바로 여기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를 저격하는 서건이 발생했다. 미국 여사 한명이 오발로 피살되고 다나까를 쏘지 못했다. 실패후 도망치다가 체포되였다. 오성륭은 감옥에서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였다. 그후 여기에 관해서는 혁명가 김산이 <괴상한 무기>라는 소설을 써 발표했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다나까가 탄 륜선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 닿았다. 침략팽창의 추진자로 소문난 일본 륙군대장 다나까 기이찌(田中义一)는, 동남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던 중 상해 시찰을 위해 상해에 오게 되었다. 다나까는 잔교를 지나 부두에 내려 영접을 나온 고위 관리들과 악수를 나누고있었다. 이때 제1선에 선 오성륜이 놈의 가슴팍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금발의 외국 녀인이 불쑥 나타나 앞을 막았다. 총 세 방이 뜻하지 않게 그 녀인을 맞추고 말았다. 이때 제2선에 있던 김익상이 혼비백산해 승용차쪽으로 뛰여가는 다나까에게 총 두방을 쏘았다. 총알은 그놈의 모자를 꿰뚫었을 뿐 역시 명중되지 않았다. 련속 던진 폭탄마저 불발이였다.     다나까가 차안에 굴러들어가 버리자 제3선에 있던 리종암이 폰탁을 던졌다. 급급히 던진 폭탄이 폭발하기 전 미군 해병이 폭탄을 바다에 차 넣었다. 련속되는 습격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나까는 급급히 현장을 떠났고 호위병들이 습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틈에 끼여있던 리종암은 쉽게 탈주했으나 구강로(九江路)와 한구로(汉口路)로 달리던 김익상과 오성륜은 끝내 적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5월 오성륜은 탈옥하여 계속 항쟁을 하였지만 김익상은 나가사끼 지방재판소로 압송되였다가 1925년 옥사하였다.    의렬단의 충직한 투사였던 김익상은 1921년 9월, 홀몸으로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약을 던지기도 하였다. 폭탄의 위력이 약했던 탓으로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총독부 청사내로 여유있게 잠복해 들어가 폭탄 세 발을 던지고 삼엄한 일본 경찰들의 경계와 추적을 피해 북경으로 무사히 귀환한 김익상은 실로 신화적인 인물이였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은 원쑤 침략자들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다나까 저격에 나섰던 김익상은 끝내 성사하지 못하고 일제 감옥에서 희생되였다.          처절하고 비장했던 의렬투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다나까 저격의거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 침략자들을 전율시켰으며 민족의 반일의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외국인을 포함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련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의렬단은 투쟁수단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새로운 대중운동의 길을 찾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 내 조선인 반일지사들이 여러모로 민족독립과 해방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을 때 중국에는 새로운 정치력량이 력사무대 등장하였다. 중국 혁명을 주도하고 수억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의 력사적 과업을 짊어진 이 정치력량이 바로 중국공산당이였다.     황포탄에서 다나까 저격지를 답사한 이튿날인 2003년 9월 23일,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기념관을 찾아갔다. 기념관은 상해시 흥업로(兴业路) 76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석고문(石库门) 2층건물로 된 기념관 주변은 해 묵은 오동나무들이 둘러있었다. 손바닥만한 오동나무 잎이 설레이는 사이로 보이는 이 평범한 2층 건물에서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던 것이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 기념관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있었다. 기념관은 1952년에 수건되여 지금까지 천만을 넘는 관광자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화국이 창건된후 1950년, 중앙에서는 전국적으로 혁명문화재와 혁명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호할데 관한 통지를 발부했다.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조사와 검증사업을 거쳐 지금의 흥업로 76번지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지점이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상해대표로 참가하였던 리한준(李汉俊) 형제가 살았던 집이였다. 다소 수건과 복구작업을 거쳐 건물은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숙엄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기념관 전체를 감돌고있었다. 450평방메터에 달하는 전시청에는 혁명문화재와 력사문헌 그리고 일부 소중한 력사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물들은 중국공산당 창립의 력사적 배경과 각지 공산주의 소조의 활동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있었다. 1차 대회는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회의청에서 진행되였다. 회의청은 원래 모습으로 복구되였고 가구와 물품들도 모두 원래대로 모방되여 있었다. 탁상우에 놓여진 16개의 찻잔을 보면서 우리의 사색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동과 격정의 옛날로 달려갔다.    1840년 아편전쟁이후,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과 수탈을 감행하여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전락되였다. 그때로부터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투쟁은 끝없이 진행되였다. 그러나 태평천국 농민봉기나 자산계급이 령도한 신해혁명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새로운 정치력량을 요구하였고 새로운 당을 요구하였다.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은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중국에 전해왔고 1919년 5.4신문화운동은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계급의 결합을 촉성시켜주었다. (권립)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공산주의자 안병진은 특수한 사명을 가지고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왔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공의 창시자로 될 리대소 선생과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공의 건립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20년초 리대소와 진독수는 중국공산당 창건을 위해 적극 준비하고있었다. 이때 조선 혁명가 안병진이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维经斯基)를 안내해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북경에서 리대소를 만나고 상해에서 진독수를 만나 중국공산당 창건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후 북경, 호남, 호북, 산동 등지에 공산주의 소조가 나타나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였다.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상해에서 각지 공산주의소조 대표들이 모여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바로 중국공산당 창건대회로서 림시강령을 채택하고 당의 사업기구와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모택동, 하숙형, 동필무, 진담추, 왕진미, 등은명, 리달, 리한준, 장국도, 류인정, 진공박, 주불해와 포혜승 등 13명이 전국 53명 공산주의자들을 대표해 대회에 출석하였다. 국제공산당에서는 마린(马林)과 니꼴스키(尼科尔斯基)를 대표로 대회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회의는 프랑스 조계지 경찰청의 저애를 받게 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상해 대표 리달의 부인 왕회오(王会悟)의 건의에 따라 가흥(嘉兴)의 남호에서 회의를 계속 하기로 하였다.    24일 답사팀이 가흥의 남호에 도착했을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척이 조용히 떠있었다. 길이가 16메터이고 너비가 3메터인 유람선의 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이 유람선이 바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이 마지막 회의를 하였던 곳이다.    1964년 봄, 동필무 동지가 남호에 와서 이 유람선을 보고 당시의 유람선과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련신 감탄하였다 한다. 이 자그마한 유람선에서 중국공산당의 규약과 첫 결의안이 채택되고 중국공산당 중앙국이 조직되였다.    회의를 페막하면서 전체 대표들이 작지만 견정한 목소리로 구호를 웨쳤다. “중국공산당 만세!”‚“제3국제만세!”‚ “공산주의 만세!”    그때로부터 고난에 시달리던 중국 무산대중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쟁의 길에 나서게 되었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오르게 되었다.    
15    제5회 단재 신채호의 북경 유적지들 댓글:  조회:3589  추천:50  2007-06-10
 단재 선생의 며느리 리덕남 녀사와 함께 단재 선생이 북경에서 활동했던 유적지를 찾아 답사한 것은 2003년 10월 16일이였다.    보타암에서 한동안 생활하던 신채호 선생은 후에 선후하여 지금 북경시 백탑사(白塔寺) 이남의 금십방가(锦什坊街) 21호와 초두호동(炒豆胡同)에서 생활하였고 동린각로(佟麟阁路) 서쪽에 위치한 석등암(石灯庵) 부근에도 거주하였다.    석등암 사원은 지금도 어렴풋이 그 모습을 보아낼수있었다. 동린각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동안 가노라면 5,6층 되는 주민 아파트 몇채가 둘러있는  사이에 많은 단층집들이 촘촘이 있었다. 단층집 가운데 건물은 전통적인 중국식 4합원(四合院) 구조로 되었는데 규모는 매우 컸다. 그리고 꽃무늬를 새겨 놓은 기와라든가 각가지 조각을 한 처마, 담벽을 보아서 이곳이 분명 사원자리임이 틀림없었다. 지금은 여러 주민호들이 촘촘히 비집고 들어와 함께 살기 때문에 사원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현지 가두주임이 기자들을 열심히 맞아주면서 부근에 살고있는 70세 동(董)씨 할머니 한분을 소개해 주었다. 그 로인은 어렸을적에 이곳에서 살았고 60년대는 석등암의 비구니로 있었다고 가두주임이 소개해 주었다.   여기가 석등암 사원이 있던 곳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수십년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사원의 주건물과 담이 조금 남아 있어 찾아볼수있습니다.     동씨 로인의 말에서 분명 이곳이 석등암 옛터라는 것을 알수있었다. 그러나 당시 석등암의 규모나 더 상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사당의 비구니로 있었다는 가두주임의 소개가 맞다면 동씨 할머니는 분명 가장 유력한 증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던 탓으로 많이 소심해 졌는지 로인은 분명한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석등암 건물 마저 많이 파괴되여 버린 상황이니 사람의 피해야 더 컸을것이다. 갖은 정신적 세파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도 동씨 로인은 그 한단락의 력사를 감추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판단되였다.      북경에서 본격적인 독립활동에 종사하던 신채호는 1919년 상해 림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가게 된다. 그러나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회의에서 자기의 주장을 스스럼없이 피력하던 신채호는 더는 참을수 없어 회의장을 박차고 나섰다. 그런데 문어귀에 몇몇 청년들이 그를 막아 나섰다. 청년들: “안됩니다. 정부조직이 이룩되기까지는 누구도 이 자리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우리에게 남은 것이 이제 무엇이 있느냐? 대의밖에 더 있느냐? 민족적 대의가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비켜라!”    청년들: “안됩니다. 제발 여기를 못 떠납니다.”    신채호: “그럼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신채호: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리승만은 리완용이나 송병준 보다도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를 우리의 대표라 할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일은 단재 신채호의 뜻과 반대로 성사되여 갔다. 회의를 박차고 나온 그는 상해 림시정부와 결별하고 림시정부를 반대하는 창조파의 선두에 나선다. 드디어 그는 북경에 돌아와 무장항쟁을 주도하는 군사통일주비회의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 1919년 중국 길림에서 창립된 의렬단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드디어 의렬단의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게 된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서 보여진 절대독립론은 자치론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干会)의 로선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단재 신채호의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과 폭동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자들 뿐만 아니라 의렬단이나 김구가 이끄는 상해 림시정부까지도 합리하고도 정당한 폭력수단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1920년 후에 신채호 선생은 관음사(观音寺)에 한동안 출가해 있은 경력이 있다. 이날 오후 답사팀은 관음사를 찾아 떠났다. 관음사는 북경시 북신교(北新桥) 부근의 전영강(前永康) 2항(巷)에 있었다는 기재가 있다. 현재 그곳에는 사당은 없고 좁은 골목길에 높은 담을 쌓은 민가들만이 늘어서 있을뿐이다. 부근에 옛날 사당 자리 같은 낡은 건물이 보였지만 지금은 고적(古籍)도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현지인들은 이 건물은 옛날 백림사(柏林寺)의 일부 사당이 남아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당시 단재 신채호는 몹시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독립운동 방략과 방법에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었고 민족의 미래에 비관에 잠겨 있었다. 오직 무장항쟁의 길만이 정확하다고 주장해 오던 단재 신채호는 기타 타협론자들과 외교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극심한 생활난까지 겪에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처자들을 떠나 보내고 자신은 관음사에 몸을 담고 승려로 된다. 이 한 단락의 력사를 두고 일부 사람들은 그가 독립운동에 절망하고 한 시기 방황했기 때문에 출가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1920년대 신채호의 투쟁 행적을 살펴보면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시기 비록 관음사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민족력사와 투쟁리론 저술에 더 없는 성과를 이룩해 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렬단을 비롯해 북경지역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계속 련계를 가지고 또 독립군 자금을 모아 더욱 큰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비밀리에 활동했던 것을 보아도 그의 출가는 독립운동에 실망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리한 필봉을 무기로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관음사에 잠시 몸을 담고있었을 뿐이였다.     1920년대말 단재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 활약하게 된다. 1926년 그는 재 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련맹에 가입하고 1927년에는 중국, 조선, 일본, 대만 등 여러나라 대표 백 20명이 참가한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의 조선대표로 참가하며 1928년 4월에는 직접 무정부주의 동방련맹 북경회의를 개최한다. 이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활동경비를 모으기 위해 위험한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안해 박자혜와 아들 신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다음 길을 떠났다.  (권립) 1928년에 이르러 선생은 반일자금을 모으러 떠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십년도형에 떨어져 려순감옥에 갇혔다. 그는 일제의 그 어떤 취조와 혹형앞에서도 언제나 떳떳하고 태연자약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이 일제가 없는 자유로동사회를 건설하는것이라고 높이 웨쳤다. 그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위해 취하는 일체 수단은 모두가 정당한것이라고 일제놈들 앞에서 웨치고 또 웨쳤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모으는 방법이란 외국 위조지페를 만드는 것이였다. 그들은 이로써 폭탄 제조소를 설치하려 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중국인 류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위페를 교환하려 했으나 놈들에게 발각되여 대만 기륭항에서 체포되고 만다. 일제 옥중에서 적들과 과감히 맞써 싸우던 그는 2년후 10년 징역으로 판결 받고 려순감옥으로 이송된다.  (권립) 감옥에서 그의 몸이 형편없이 쇠약해지자 한 친척이 보석하려 했지만 그 친척이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단연히 거절했다. 그는 1936년 2월에 56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리유로 가석방을 완강히 거부한 단재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뇌익혈로 옥중에서 빛나는 한생을 마쳤다.     북경에서 신채호 선생의 활동지점들을 답사하고난 후 리덕남 녀사는 중국의 성인 공자를 모신 국자감(国子监)이 부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에 가보련다고 했다.     고요한 국자감 공자의 동상을 바라보며 리덕남 녀사는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 같았다. 공자는 중국의 성인으로 이처럼 사람들의 공대를 받고있는데 독립운동의 영웅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야만 했던가?    시원한 가을바람에 고목이 가지를 흔드는 조용한 정원에서 리덕남 녀사는 신채호 선생의 유가족 이야기를 하였다.    광복후 한국 리승만 정권하에서 신채호의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금기시 되었고 그의 유가족도 많은 압박과 피해를 받았다. 아들 신수범(1921--1991년)은 갖은 고생을 겪다가 20여세 년하인 리덕남 녀사과 가정을 이루지만 일단 아버지의 일은 비밀에 부치고 살았다. 리덕남 녀사는 남편의 행적이 하도 수상하여 남편이 첩자인줄로 알고 경찰에 고발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신수범은 이런 안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저명 인사들을 찾아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 해 주었고 민족해방에 대한 그의 기여를 설명해 주었다. 그때로부터 리덕남 녀사는 시아버지 신채호의 위대한 업적을 인식하고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유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단지 신채호의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십년간 온갖 고생을 할대로 다하던 신수범씨는 1991년 병으로 사망하고 리덕남 녀사만이 계속 신채호의 기념활동을 위해 힘쓰고 있다. 리덕남 녀사는 “사람은 더 없이 천할수도 있고 더 없이 청정하고 위대할수있다”고 감회 깊은 이야기를 했다.     “내 죽거든 내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죽는 순간까지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일제 감옥에서 옥사하니 나라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보지 못한 그는 정녕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압박자들과 굴함없이 싸웠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빛나는 삶과 그의 고귀하고 청정한 마음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질 것이다.   사진설명: 1 신채호 2 리덕남 녀사와 함께
14    제4회 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댓글:  조회:4874  추천:70  2007-06-10
북경 해전구에 자리 잡고있는 동물원은 북경의 중요한 유원지의 하나이다. 매일과 같이 수천명의 관광자들이 이곳에 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동물원 서북쪽에는 지금까지 보존되여 있는 옛 건물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삼패자화원(三贝子花园)이 바로 북경 군사통일회의를 소집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작은 호수를 사이두고 2층 양옥이 남아있는데 규모가 제법 컸다. 이 건물이 바로 삼패자 화원의 주 건물인 창관루(畅观楼)이다. 흰 대리석 기둥과 2층 베란다를 보아도 건물의 비범함을 짐작할수있었다. 정원에는 여러 가지 화초가 만발하였고 가담가담 금빛 기와에 붉은 벽으로 된 옛 집들이 있어 더욱 화려하고 고풍적으로 보였다. 북경 관광지남(指南)에 의하면 이곳은 만생원(万牲园)이라고 하였는데 현지인들이 삼패자화원이라고 불렀다.      패자(贝子)는 만청 작위이다. 만족어로 고산패자(固山贝子)의 약칭인데 타고난 귀족이라는 뜻이다. 청나라의 작위를 본다면 친왕(亲王),군왕(郡王)의 아들을 패륵(贝勒)으로 봉하는 경우가 많은데 패륵의 아들을 패자로 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패자란 패륵의 세 번째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기재에 의하면 광서(光绪) 32년인 1906년 청나라 대신들인 재택(载泽) 등이 외국에 나갔다가 코끼리, 사자 등 기이한 동물들을 가져다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초 동물원이 이루어졌고 이름도 만생원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삼패자 화원은 북경에 오는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되었고 화원의 창관루는 한때 청조의 자희태후까지 머물던 곳으로 대뜸 북경의 명루로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조선인 혁명자들이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권립) 1919년 5.4운동이 발발했다. 5.4운동때의 큰 별인 리대소 선생의 신변에는 김일하 등 한패의 우리민족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리대소 선생의 신변에서 맑스주의를 배우고 지하활동에도 종사했다. 그때로부터 특히 1920년에 연변에 대한 일제의 경신년 토벌이 있은후에 보다 많은 우리 민족반일인사들이 북경에 모였고 또 신채호 선생의 대동단결의 호소에 발 맞추어 대단결, 대통일을 주장하는 반일인사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박용만 선생이다. 박용만 선생은 구라파와 아메리카 렬강들의 힘에 의거해 민족해방을 얻자는 소극적인 외교론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전민족적인 무장주의를 주장했고 대통일을 주장했다. 1921년 4월 27일 북경에서 군사통일준비위원회를 열게 되었다.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9인이 주최하에 국내 국민회(国民会), 하와이의 독립단(独立团),북간도국민회(北间岛国民会),서간도군정서(西间岛军政署),국내 로동회(劳动会), 국내 통일회(统一会), 로씨야 연해주의 국민의회(国民议会)의 찬동을 얻고 중국 동북지역의 군사적 통일을 합의하였고 무장 항쟁을 주장하였다. 회의는 중국 동북에서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며 국경지역에서 일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또한 박용만의 제의로 대회는 상해 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광범위한 민족련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3.1운동이후 일제 통치하에 시달리고있는 조선의 독립에 관련해 여러 가지 그릇된 투쟁 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내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일부에 조국의 완전통일을 체념하고 대일본제국내의 조선자치구역을 추구하는 이른바 자치론자들이 나타났다. 한편 리승만을 위수로한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면서 강대국에 의한 독립을 꾀하는 외교로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경 군사통일회의 주요 창도자의 한사람이며 독립운동 지도자의 한사람인 단재 신채호가 리승만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을 제기하였다.   아(我) 이천만 형제자매에게 향하여 리승만,정한경 등 대미위임통치 청원 및 매국,매족의 청원을 제출한 사실을 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노라.„이렇게 시작되는 단재 신채호의 <성토문>에는 김원봉, 김창숙, 오성륜, 최용덕을 비롯한 50여명이 서명하였다. 북경 군사통일주비회의, 상해림시정부의 시책을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출범한 이 회의는 중국관내 조선족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로써 더욱 많은 반일투사들이 강대국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의 단결과 무장투쟁을 거쳐 일제를 타도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무장항쟁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携手)하여 불절(不绝)하는 폭력-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剥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는 단재(丹斋) 신채호(申采浩1880--1936년)가 1922년, 의렬단 단장 김원봉의 부탁으로 기초한 의렬단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의 일부이다.      문학가이며 력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조선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학문에 뛰어난 그는 일찍부터 리동휘, 신정과 더불어 충청남도 세 수재로 불리웠다.  1898년 그는 서울 성균관으로 들어가 박사로 되었으며 6년간의 고심한 연구를 거쳐 조선 근대의 저명한 학자로 된다.  (권립) 신채호 선생은 20여세에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였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반일사상 계몽운동에 뛰여 들었다. 1910년 사월에 청도회의에 참가한후 해삼위에 가서 신문을 꾸리면서 반일계몽운동을 하다가 1915년에 북경에 도착한후에 13년동안 무서운 빈곤과 굶주림을 이겨내면서 반일사상 계몽운동을 했다. 1905년부터 신채호는 선후하여 <황성일보>, <대한매일신보>의 론설기자로 활약하면서 민족주의를 선양하였다. 국내에서 독립협회, 신민회 등 진보조직에 몸을 담고 계몽운동을 적극 추진하던 그는 1910년 4월 중국 청도에 온다. 청도에서 그는 신민회가 조직한 청도회의에 참가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방과 더불어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청도회의의 결의에 따라 중국 동북에 독립군 기지를 설립하기 위해 힘썼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로씨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상해의 신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국에 오게 된다. 그는 신정의 동제사에 몸을 담고 신정을 도와 박달학원을 개설하고 청년들을 가르쳤다.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 길을 찾아보려는 신채호의 발상으로 시작한 박달학원에는 문일평, 홍명희, 조소앙, 신정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1914년 신채호는 동북의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료녕성 환인현으로 간다. 이번 행차에 그는 환인현의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하였고 백두산에도 올랐다. 유적지 답사와 민족사 자료 수집활동은 그가 후에 조선민족의 력사를 재검토하고 서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력사관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북에서 신채호는 또 대종교의 교주인 라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고 동창학교(东昌学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그후 단재 신채호는 리상설, 신정, 박은식, 류동렬, 조성환, 리춘일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韩革命党)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지만 조직의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후 북경에서 력사연구와 문학창작에 몰두한다. (권립) 단재 신채호는 북경에서 있는 기간 <동방(东方)> 잡지를 꾸려서 전문 일제의 침략 죄행을 폭로하였고 또 많은 반일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주의 력사관에 날카롭게 맞서서 우리 민족의 독립 력사관을 피력했으며 조선사 총론을 비롯해 많은 력사 저작을 남겨 우리 민족 해방투쟁에 력사학적 뒷받침을 제공해 주었다. 독립 운동가로서의 신채호는 또한 조선 민족 각 반일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면서 대동단결을 위해 민족 유일당 조직 촉진회까지 건립하게 된다. 1915년 북경에 도착한 신채호는 숭문문(崇文门)밖 보타암(普陀庵)에 거주하면서 북경 도서관을 다니며 <조선사>의 집필을 구상하였고 또 북경의 권위 신문들인 <중화보>, <중화시보(中华时报)>에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당시 <중화시보>의 가장 열정적인 투고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무렵 그는 또한 북경대학의 리석증(李石曾), 채원배(蔡元培)를 비롯한 중국학자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 신문화운동의 주요 인물들이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명희와 깊은 교분을 맺게 된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년)가 바로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의 저자이다. 당시 남양군도에서 3년간 방황하던 조명희는 북경에 온후 신채호의 숙소를 자주 다니면서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1916년 봄, 신채호는 북경에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탈고한다. 작품은 한놈의 입과 손을 빌어 나라의 독립운동 전개를 상징적 수법으로 극화한 소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15년부터 근 13년간 주로 북경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북경에는 신채호 선생의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기재된 지점만 하여도 보타암, 금십방(锦什坊), 석등암(石灯庵), 관음사(观音寺), 초두호동(炒豆胡同) 등이 있다. 답사팀이 신채호 선생의 유가족인 리덕남 녀사를 만난 것은 2003년 10월 16일, 보타암에서 였다. 10월에 들어서면서 북경의 날씨는 한결 맑았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의 안내에 따라 신채호 선생이 북경에서 가장 먼저 머물렀던 곳인 보타암에서 리덕남 녀사를 만난 것은 오전 10시 경이였다. 회색 양복을 단정히 입고 옅은 갈색 안경을 건 리덕남 녀사는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리덕남 녀사가 바로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朴慈惠) 녀사 사이에서 낳은 장남 신수범(申秀凡)의 부인이다. 신채호 선생의 손자인 신상원(申尚原), 손녀 신지원(申智媛)의 어머니로서 리덕남 녀사는 현재 신채호 연구와 기념활동을 위해 열심히 사업하고있다. 보타암은 북경시 숭문구(崇文区) 동변문(东便门)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사찰 건물이 없고 우물가에 3메터 남짓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리덕남 녀사와 답사팀이 비석을 둘러싸고 아무리 자세히 훑어보아도 신채호 선생과 관련되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비문은 다만 이곳이 옛날 보타암이 있던 곳이라는 것만을 증명해주고 있다. 덧없는 세월이 많이 흘렀다. 현지인들은 옛날 이곳에 암자가 하나 있었다는 아득한 기억만 더듬는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단재 신채호가 활동했던 곳이였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관련 사학자들의 발길도 잘 닿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빛나는 력사와 선각자들의 발자취는 덧없는 세월속에 망각 되여 침묵만 지키고 있다. 다만 가을 바람에 설레이는 해 묵은 버느나무만이 긴 가지를 흐느적거리며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13    제3회 초기 공산주의자 리동휘의 활동 댓글:  조회:4235  추천:46  2007-06-10
  제1차 세계 대전의 포화가 세계를 뒤덮고 있던 20세기 초, 인류사상 가장 큰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1917년 부패한 짜리 로씨야에서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일어나 첫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10월혁명 승리는 각국 무산계급 투쟁을 고무하여 주었고 세계 피압박 인민과 피압박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에 허덕이던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였다. 조선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은 전례없이 고조되였다. 각국의 비폭력적 해방운동은 세계 렬강의 비정한 외면과 제국주의, 봉건주의의 피비린 탄압을 받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수많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민족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부 의사들은 폭탄 투척을 감행하고 일부 의사들은 일제 괴수와 추종자들에 대한 암살을 목적으로 한 의렬투쟁을 전개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에 환상을 품고 외교적인 노력을 하였고 더욱 많은 선각자들은 중국 동북에 군사기지를 세우고 무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시기 로씨야 10월 혁명의 승리에 고무되여 아시아 각국에 맑스주의 리론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의 진보적 인사들도 공산주의 리론을 접하고 또 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재(诚斋) 리동휘(李东辉1873--1935년)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조선말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륙군 참령(参领)으로 지냈던 리동휘는 개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리동녕(李东宁),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많은 학교들을 세우며 조선의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던 그는 1912년 중국 동북에 망명하여 간민회에 가담하였고 1915년에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아시아지역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권립) 1919년 상해에는 688명(조선인 총수) 우리민족 선각자들이 맹활동하고있었다. 그들은 제각지 철혈단, 구국모험단, 애국부인회요 수많은 단체들을 결성하여 반일투쟁의 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그해 9월 조기 공산주의자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했다. 1919년 9월,동방의 빠리로 불리 우는 국제도시인 상해에 도착한 성재 리동휘는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한편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그는 상해에 있던 려운형(吕运亨)과 손잡고 공산주의 소조를 건립하고 1921년 1월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선거된다. 그리고 려운형과 김립(金立), 안병찬(安秉瓒)등이 중앙위원으로 당선 되였다. 그들은 상해에 <유신인쇄공장>을 세우고 맑스주의 저작을 번역 출판하고 직접 진보적인 잡지도 꾸리면서 맑스 레닌주의를 적극 전파하였다. 한편 리동휘는 김하규 등을 연변에 파견하여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연변에 첫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룡정의 대성중학교, 광흥중학교, 은진중학교 학생들속에 건립되였다. 조기 공산주의자들은 로농혁명의 길, 로씨야 혁명의 길을 선전함으로써 적지 않은 선진인물들이 협애한 민족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회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사상에 제한되여있던 구춘선을 대표로 한 국민회의 많은 지도자들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변에는 1300여명 조선족들이 조기 공산주의 단체들에 가입하였다. 이 사이 리동휘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공산당 제2차 대표대회에 출석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레닌을 만나 자금면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상해 림시정부 수립후 군무총장을 맡았던 리동휘는 1920년 국무총리로 나섰지만 좌우익간의 치열한 대립에 커다란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쏘련에서 보내온 지원금 40만불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겨 리동휘를 위수로한 고려공산당은 상해림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동북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지도하던 성재 리동휘는 그후 쏘련으로 넘어가 활동하다가 1935년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新韩村)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권립) 리동휘 선생이 상해에서 악전고투하고있을 때 다른 한 공산주의자 안병진 선생이 특수한 사명을 지니고 상해에 도착했다. 1920년 모스크바 동방대학 출신인 안병진이 공산국제의 대표이자 로씨야 공산당 대표인 위신스키를 안내하여 상해로 온다. 그는 북경과 상해에서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들인 리대소와 진독수를 만나 위신스키와 회담하게 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창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안병진은 그후 일제 옥중에서 십년간 고생하다가 출옥한 후 조선의용대의 충직한 지하일군으로 계속 투쟁하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있은 후 두 나라 혁명가들 가운데서는 공산주의 학습 열조가 일어났다. 쏘련 10월 혁명승리에 크게 고무된 공산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적극 선전하면서 로농대중에 의지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내에 들어온 조선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활동을 적극 전개함과 동시에 중국의 진보적인 인사들과 적극 접촉하면서 <중한호조사(中韩互助社)>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중한호조사는 1921년 1월 한구에서 설립되였다. 다년간 한구에서 조선인들을 적극 도와주던 중국의 유명한 대 변호사 시양이 조선인 리우민(李佑民)과 합작하여 <중한국민호조사>를 설립하였다. 이해 3월 호남성 장사에서 <장사중한호조사>가 건립되였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의 한사람인 하숙형(何淑衡)이 장사중한호조사의 선전부 주임을 맡았고 모택동이 통신부 주임을 맡았다. 한편 광동에서는 <중한협회>가 설립 되였는데 손중산의 아들 손과(孙科)가 나서서 조선인들과 함께 <중한협회> 기관지인 <광명>을 꾸리면서 조선 혁명자들을 도와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호조사 활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1922년 8월 상해에 <중한호조총사>가 창립 되었다. 전국 각지의 중한 호조사를 통해 두 나라 혁명자들과 두나라 인민의 단결이 이루어 졌으며 동방 피압박 민족의 대 단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규식, 리동휘를 비롯한 조선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구국의 길을 적극 탐색하고있을 때 중국의 정치중심지인 북평에도 많은 조선 혁명자들이 모여 왔다. 리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을 비롯한 수많은 선구자들이 북평에 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북경에서의 반일투쟁 유적지 답사는 2003년 9월 15일 시작하였다. 이날 아침 10시, 취재팀은 북경 서산의 향산공원에 모였다. 북경의 향산은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이다. 북경시와 20키로메터 상거한 향산은 1186년 금나라 황제가 이곳에 사원을 축조하면서 인적이 닿기 시작하였다. 금대에 만든 사원 대영안사(大永安寺)가 있는데 현지인들은 감로사(甘露寺)라고도 한다. 그후 사원은 부단히 확건되면서 청나라 건륭 10년인 1745년에 와서는 정의원(静宜园)으로 명명되였다. 향산공원에서 취재팀의 력사고문인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북경에서의 조선인 혁명자들의 행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북경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옛날 전문으로 많이 들어왔다고 본다. 북경에는 좌익 인물들이 많았다. 북경은 총적으로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신규식, 김규식, 안광천 등 이런 사람들이 좌익이다.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자만이 림시정부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시영도 반대하였다. 또 향산은 리대소, 진독수와 관련 되는 사람, 25년 좌우 북경 여러 대학에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무정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대부분 북경에 유가족이 많다. 향산 기슭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적극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 신문화운동의 지도자이며 중국 공산주의 선구자인 리대소가 조선 혁명가들에 대한 동조가 많았다.    북경 서산 기슭에는 중국의 위대한 공산주의자 리대소 릉원이 있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목이 우거지고 흰 대리석 건물과 비석이 푸른 잔디와 꽃밭 사이에 유난히 아름답게 안겨 왔다. (최룡수) 중국 공산당의 창시인으로서 조선혁명에 대단히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5.4운동의 지도자의 한분이였던 그는 조선의 3.1운동을 적극 평가하고 북경에 오는 조선 젊은이들의 혁명사업을 도와주었고 20년 상반기에 조선 젊은이들을 만나 혁명 사업을 도와 주었고 또 이 시기 김일학, 김상지 등 조선청년들을 향산 자유원에 보내 혁명사업을 하게 하였다. 김산과 김성숙이 꾸리는 <혁명>잡지에도 글을 발표하였다.    3.1운동이후 상해 림시정부는 미국에 있는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지만 리승만은 계속 미국에 남아 활동하면서 미국 월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주의 제창에 맞추어 위임통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았다. 더욱이 1920년 일본군이 조선독립군 탄압을 구실로 중국 동북에 출병하여 조선 독립군과 독립 단체들이 붕괴되거나 분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본군과 동북의 봉건군벌 장작림이 결탁하여 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있을 때 림시정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이 필요되였다. 1921년 2월 초, 박은식(朴殷植),원세훈(元世勋),金昌淑(김창숙) 등 14인이 <我同胞에게 告함>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선언은, 전국민의 의사에 따라 통일되고 안정된 정국을 만들고 단결된 힘으로 독립운동의 발전방향을 확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이해 4월 박용만(朴容万), 신숙(申肃), 신채호 등의 조직하에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의(军师统一筹备会议)가 소집된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억압과 수탈에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기 위해 혁명자들은 무장투쟁의 길을 확정하게 되었으며 대단결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진설명: 1 리동휘 2 옛 북경역
12    제2회 무창봉기에 참가한 독립운동 지도자 신정 댓글:  조회:4440  추천:70  2007-06-10
(권립)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이다. 청나라 말기이후에 북양군벌통치의 어두운 현실에서 거세찬 불길이 타오르던 그런 시기이다. 신해혁명이며 5.4운동과 같은 대격변을 거치면서 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길을 탐색하던 시기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 민족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 우리민족의 선각자, 지성인들은 중국의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중국의 정치도시인 북경에서, 중국의 당시 혁명의 중심지인 광주에서 민족해방의 길을 탐색하게 됐다. 아시아 동방의 국제도시 상해, 지금도 황포강 기슭의 외탄(外滩)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취재팀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2003년 9월 22일이였다. 상해의 가장 유명한 상업거리 남경로에서 쇼핑을 하고 난 관광객들은 황포강반에서 다리 쉼도 하고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기도 한다. 서양식 옛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앞으로 누런 황포강 물결이 출렁이고 수시로 커다란 화물선이 강에서 오고간다. 강가 유보도에 서서 출렁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사색은 어느덧 백년 전으로 달려간다. 아시아 대지에 검은 구름이 뒤덮인 1911년 봄,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에 굴강한 조선 사나이 한 명이 도착한다. 한쪽 눈은 날카롭게 늘 흘겨보고 있었고 월리암식 수염이 강직하게 치켜 있는 30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그는 상해에 도착하자 진보적인 신문인 <민생보(民生报)>를 통해 송교인(宋教仁), 진기미(陈其美), 황흥(黄兴), 서천복(徐天复) 등 동맹회의 중견인물들과 사귀게 되었으며 이름을 신정(申柽)으로 고쳤다. 예관 신정이 바로 조선의 저명한 혁명가 신규식이다. 1879년 1월 13일, 조선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여난 신규식의 자는 공집(公执)이고 호는 예관(睨观)이다. 어려서부터 문무가 겸비한 그는 륙군무관학교를 졸업한후 1902년 륙군보병 참위로 임명된다. 그러나 보국의 뜻을 지닌 신정의 뜻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국운은 날로 쇄락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대와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와 싸우려던 신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죽음으로 보국할 생각으로 독약을 복용한 신정은 가족들의 구원으로 살아남았지만 눈 신경을 다쳐 오른쪽 눈이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신정은 망국의 울분과 구국의 길을 찾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최초의 조선족 투사이며 박달학원(博达学院)을 세우고 동제사(同济社)를 결성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혁명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거대한 기여를 한 신정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독특한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권립) 상해로 온 신정은 손중산선생의 동맹회에 참가했고 무창봉기에 참가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노라 등 시를 써서 손중산 선생을 노래하고 손중산선생이 창도한 공화제도를 노래했다.신정은 남사에 참가하고 동제사를 세워서 우리 백의동포의 대단결을 모색해 왔다. 1912년 신정은 동제사를 발기, 결성하였다. 동제사란 중국 성구 동주공제(同舟共济)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생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동제사는 중국혁명에 의지한 조선독립 목표를 세운 비밀조직이였다. 동제사는 북평, 천진, 만주, 연해주, 구미, 일본 등지에 지사를 두었고 본부는 상해에 설립했다. 최초 회원은 3백여명에 달하였는데 본부 리사장은 신정, 총재는 박은식이 담당하였다. 신정을 위수로 한 동제사에는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赵素昂), 문일평(文一平), 신건식(申建植), 조성환(曹成焕)을 비롯한 쟁쟁한 거물급 조선지사들이 활약 하였다. 신정은 동제사의 영향력을 넓히고 더욱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동제사의 협력단체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를 조직하였다. 송교인, 호한민(胡汉民), 료중개(廖仲凯), 추로(邹鲁), 대계도(戴季陶), 진과부(陈果夫) 등 중국 거물급 인물들이 신아동제사에 가입하게 됨으로써 그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였다. 한편 신정은 1913년 12월 7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개설하였다. 우수한 민족독립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이 학교에서는 박은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등이 교학을 담당하였다. 학원은 3기에 걸쳐 조선인 졸업생 백여명을 양성하였다. 신정은 중국내 진보인사들과의 친분관계를 통해 많은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천진군수학교, 남경해군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에 보내 무장투쟁을 위한 힘을 키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리범석 장군이다. 그는 신정과 당계요(唐继尧)의 주선으로 운남륙군강무당에서 군사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20년대 더욱 많은 조선인 애국청년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광주 중산대학이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은 것도 신정과 동제사의 역할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신정은 려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 현순 등과 토의하여 1919년 3월 하순 프랑스 조계지 보창로에 조선독립 림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정부조직사업에 착수하였다. 4월 10일 제1회 림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였고 13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수립되였다. 신정은 11월 상해림시정부 법무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상해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림시정부 대통령도 없고 국무총리도 떠나 버린 상황이 빚어졌다. 1921년 5월 신정은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고 또 외무총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이 이끄는 중국 호법정부와 적극 협조하여 외교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해 11월 3일 신정은 손중산 대통령의 접견을 받아 외교관계를 정식 설립하게 된다. 손중산과 호법정부는 상해림시정부를 정식 승인하였고 여러 군사학교에 조선청년들을 수용, 양성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차후 북벌전쟁이 완성되면 조선민족 국권회복운동을 전력으로 원조해 줄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림시정부의 외교적 대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인 성과와 전 민족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상해 림시정부는 로선과 경영면의 내분으로 고뇌에 시달리고있었다.1922년 신정은 국무총리를 사퇴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림시정부와 조선독립운동전선의 분렬상태에 비관한 나머지 마침내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때 광동군벌 진형명이 반란하여 손중산의 혁명 역시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손중산은 광동을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권립) 손중산은 그를 로동지라 부르며 높은 평가를 했다. 물론 신정은 손중산이 가리킨 길에서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한 분이다. 때문에 손중산 선생과 더불어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됐다. 1922년 광동군벌 진형명이 영국제국주의와 결탁해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다. 손중산은 광주를 떠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신정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국의 불행이 어찌도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중산선생이 고심히 경영해온 혁명사업이 이제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이는 중국의 불행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큰 불행이다.(中国之不幸, 抑如何是之甚? 中山先生苦心经营之事业,全成泡影.此不仅是中国之大不幸, 亦韩国之大不幸.)” 중국 신해혁명과 같은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끝내 지대한 절망속에 빠지고 말았다. 신정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하던 중 이해 8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민족과 운명을 걱정하던 예관 신정은 지대한 절망을 안고 세상을 하직하였던 것이다.                    공화국 새날이 밝아오고     [共和新日月]                   낡은 세상 새로이 바뀌노니  [重辟旧乾坤]                   사해의 만민이 기뻐하며     [四海群生乐]                   손중산 우러러 높이 모시네  [中山万世尊]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여>라는 제목으로 된 이 한시는 신정이 신해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중국의 혁명가 손중산을 축하해 지은 시이다. 반일투사이며 민주주의혁명의 선행자이며 저명한 시인, 작가, 교육가인 신정선생은 44세를 일기로 상해 애인리 57번지에 있는 그의 거소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령구는 상해 만국공동묘지에 모셨다. 만국공동묘지는 지금의 송경령 공묘(公墓)로 이름을 바뀌였다. 20세기 상해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 투사들이 이곳에 모셔졌던 것이다.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저녁녘이였다. 푸른 잔디밭에 정방형 흰 비석들이 촘촘히 누워있었다. 황혼빛이 비쳐드는 묘지에서 수많은 렬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투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 안태국,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싸워왔던 투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투사들의 혼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사진설명: 1 신정(신규식) 2 상해 만국공동묘지 
11    제1회 관내 조선족 반일투쟁의 특점 댓글:  조회:3992  추천:69  2007-06-10
2003년 3월 20일,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조선족인민의 훌륭한 아들인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 동지의 추도식이 북경시 팔보산 혁명렬사릉원의 고별청에서 열렸다. 추도식장에는 당과 국가의 주요 지도자들, 국가 해당부문에서 보낸 화환이 놓여져 있었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주임을 비롯한 지도자들, 문정일 동지의 유가족과 친우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조객들이 비통한 심정을 안고 문정일 동지와 영결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포화가 울부짖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와 적후를 넘나들면서 피어린 항쟁을 해온 로혁명가 문정일 동지를 영결하는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가렬처절했던 전쟁년대의 수많은 렬사들이 떠 올랐다. 신해혁명, 북벌전쟁, 광주봉기, 정강산 투쟁, 2만 5천리 장정 그리고 삼엄한 적후에서의 지하투쟁, 태항산 항일투쟁을 비롯한 중국력사의 중요한 사변에는 모두 우리 조선족 렬사들의 피어린 자국이 남아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 그 어디에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진리를 위해 싸운 조선족 선렬들의 력력한 발자욱이 남아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미 백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계는 새로운 21세기에 들어섰으며 기계문명을 넘어서 정보문명사회로 본격 발전하고있는 오늘이다. 평화와 발전, 화해의 분위기가 주되는 오늘 세계이다. 그러나 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국가와 민족과 종교로 인한 국부적인 분쟁과 쟁탈은 의연히 존재하고있고 국부적인 전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랭전시기의 사유가 의연히 존속되면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점에서 <격정의 세월>, 우리민족 항쟁의 력사를 다시 돌이켜보고 불멸의 발자취를 답사하는데는 자못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를 거울로 삶고 그 속에서 경험을 총화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은 인류의 지혜이고 인류발전의 소중한 재부이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 아직까지 민족의 숨결, 선렬들의 발자취가 남아있어 우리를 부르고 있다. 똑같은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안고 싸워왔지만 그 결과는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판이하게 달랐던가?  우리는 구경 무엇을 바라고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미래는 구경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날로 새로워지고 발전하고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평화와 발전, 대화와 민족화해라는 새로운 시점으로 우리의 력사를 재조명하고 그 진실을 밝히며 진리를 위해 항쟁해 온 선렬들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민족자강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것이 답사를 시작하는 우리의 바램이였다.  관내에서의 조선족 반일투쟁사는 또한 그 자체의 특수성을 안고 있다. 원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우리민족의 관내지구에서의 혁명투쟁은 뚜렷한 특점이 있다. 우리민족 민간의 대중적인 혁명운동, 군중운동 보다도 주로는 직업혁명가들의 혁명투쟁이였고 직업혁명가들로 이루어진 혁명단체들의 혁명투쟁이였다. 이를테면 양림 동지, 중국공산당 하북성당위원회 서기 리철부 동지, 북경시당위원회 조직부장 김산,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 주문빈, 김약연 선생 등 혁명가들이 있었다. 수많은 혁명단체들, 조선민족 혁명당, 청년 전위동맹 등. 두 번째는 그들이 직업혁명가이고 자질이 매우 높았다. 20세기 40년대 중국항일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마이선생은 조선혁명가들은 군사정치면에서 모두가 강유력한 간부들이며 탁월한 군사지휘원이며 모범적인 정치사업가들이라고 높이 평가. 믿음직한 자료에 의하면 관내에서 싸운 조선의용대 성원의 90%는 황포군관학교나 기타 군정대학의 학생들이다. 이들중에는 중산대학을 졸업한 대학생들도 있었다. 세 번째 특점은 자질이 보다 높고 그들의 중국혁명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관내지구에서 싸웠기에 그 영향력이 컸다. 남만, 동만유격대, 료하유격대를 비롯한 일곱갈래의 반일유격대는 동북에서 자체의 지위와 의의를 갖고 있다. 관내지구에서의 우리 혁명가들이 참가한 혁명투쟁, 이를테면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이만오천리 장정 이것들은 전국의 혁명투쟁에 직접 영향을 준 그런 차원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일으킨 그런 차원에서 진행되였다. 이런 자랑찬 력사는 우리 민족 해방사에서 전반 중화민족해방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 렬강은 중국에 대한 침략과 략탈, 식민지화의 발걸음을 재우쳤고 부패한 만청정부는 거듭 제국주의자들에게 굴욕적인 타협을 진행하면서 령토와 국권을 팔아먹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도 근대화한 군국주의 강국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드디어 제국주의 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서방 제국주의와 신형의 일본 군국주의는 저들의 침략적 야욕을 전반 아시아에 돌렸다. 부패한 만청정부의 타협과 굴욕으로 하여 중국은 흑룡강 이북의 수많은 령토를 상실했을뿐만 아니라 향항, 오문을 내주고 많은 주요 도시들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제국주의자들은 함포를 내세우고 피비린 탄압과 수탈을 감행하였고 곳곳에 조계지를 세우고 수억 중국인민들을 수탈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일로전쟁을 통해 로씨야를 물리치고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식민지 통치를 가심화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시아 각국은 의연히 봉건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부패한 봉건제도로 하여 각국 국내에는 여러 가지 모순으로 가득하였고 부패한 통치자들은 국내로는 인민들에게 가혹한 착취와 피비린 탄압을 계속하면서 대외로는 제국주의에게 타협하면서 국권을 상실하고 하루하루의 안일만 영위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이중의 압박하에 허덕이던 전반 아시아 인민들은 반제반봉건이라는 공동의 력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손중산이 령도하는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무창봉기의 승리는 수천년 존속해오던 부패한 봉건제도를 뒤엎고 자산계급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손중산이 령도한 자산계급 혁명은 부패한 만청정부를 뒤엎고 자산계급 혁명의 승리를 선호하였지만 그 혁명은 철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청정부가 무너지면서 각지 군권을 잡은 봉건관료들이 거듭되는 복벽을 시도하였고 드디어는 각지 봉건할거세력의 혼전국면이 나타났다. 억만 중국인민은 의연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이중 수탈에 허덕이고있었다. 아시아 동방에 자리잡은 조선도 역시 국내외로 수많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일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조선에 대한 병탐부터 시작하였던 것이다.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반도에 발을 붙이기 시작한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5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와 군권을 완전히 박탈하였으며 조선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로씨야를 물리치고 1910년 <합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드디어 조선을 완전 독점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인민들의 항쟁의 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조선에서의 항쟁은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져나갔다. 조선내 각종 비밀결사 투쟁과 로농대중 그리고 학생투쟁이 계속되였고 중국 조선 국경지대와 동북, 로씨야 씨베리야에서 폭넓은 무장투쟁이 전개되였으며 중국 관내를 본거지로 의렬투쟁과 군사,정당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그리고 아메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외교활동과 독립군 지원활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조선인이 살고있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쟁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다.     (권립): 우리 민족 선각자들은 관내지구를 우리 민족 해방투쟁의 싸움터로 활무대로 간주해왔다. 일찍 1910년 4월에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거두들인 신채호, 안창호, 조승환 등은 산동성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동북 모지에 반일기지를 건립할데 대하여 의논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해온 수많은 조선 지사들이 중국혁명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투쟁 전략을 확정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조선이 일제의 완전식민지로 전락되여 모든 국권을 상실한 반면 중국은 자산계급 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있는 상황이였다. 다음은 중국과 조선이 모두 반제반봉건의 공동의 력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이 로씨야와의 쟁탈전쟁을 드넓은 중국 만주땅에서 진행함으로써 중국에서 로씨야의 기득권을 회수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야심이 로골화 된 상황에 일본제국주의는 또한 중국과 조선의 공동의 적이였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중국 관내에서의 조선족 반일투쟁사가 본격 시작된다. 손중산을 따라 신해혁명에 참가한 신정, 북벌전쟁에 참가한 양림, 김준섭,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와 남창봉기에 참가한 수많은 조선족 투사들,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양림, 무정, 지하전선에서 투쟁한 리철부와 김산, 조선의용군의 태항산 항일투쟁....수많은 렬사들이 독립과 자유를 위해, 진리를 위해 싸웠다.
10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댓글:  조회:3857  추천:123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1935년 12월 메마른 겨울 찬바람이 세찬 섬북의 작은 도시 와요보에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있었다. 문밖에서는 참바람이 계속 세차게 불어치고있었지만 널찍한 토굴집에 모인 사람들은 뜨거운 열의로 중국의 전도와 운명을 거론하고있었다.     중앙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이곳을 전국혁명의 대본영으로 만들었다. 섬북혁명근거지는 지역이 넓어 홍군이 얼마든지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전개할수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경제가 락후하며 교통이 불편하여 홍군을 확대하고 부대공급을 하기에는 곤난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장정을 마치지 못한 홍군부대도 적지 않았다. 장국도가 거느린 제4방면군이 계속 사천경내에서 방황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6군단과도 련락이 두절된 상황이였다. 직라진전투가 있은후 와요보에 도착한 모택동, 장문천, 주은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12월 17일부터 25일까지기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해야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전면 서술하였다. 북평에서 발생한 12.9애국청년학생운동은 중국인민 항일구국민주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였다. 중일간의 민족모순이 격화되고 항일민주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중국력사도 토지혁명전쟁으로부터 민족혁명전쟁으로 전변되고있는 길목에 놓이게 되였다. 이러한 정세에 비추어 와요보회의에서는 국내전쟁과 민족전쟁을 결부시키고 직접적인 대일작전을 위해 힘을 키우며 홍군의 력량을 확대할것을 결의하였다.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은 양림은 각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쏘베트근거지 확건사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군중들을 발동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적극 선전하는 과업을 맡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와요보를 위협하는 적들을 저격하였다. 그는 75사 전사들을 거느리고 락생진 부근에서 적 3개퇀의 공격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6년 1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동진항일과 매국역적 염석산을 토벌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했다. 홍군 제1방면군은 신속히 동정편대로 재조직되였다. 팽덕회가 총사령을 맡고 모택동이 총정치위원을 맡았으며 염검영이 총참모장을 맡은 중국인민항일선봉군이 조직되였다. 동정항일선봉군은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으로 무어졌다. 양림은 계속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년 2월 18일 전사들을 거느리고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동으로 내달리던 양림은 새로운 명령을 접수하였다. 홍군의 첫 작전임무는 동으로 황하를 건너 확고한 진지를 마련한 다음 계속 려량산맥의 각현들을 공격하여 점령하라는것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홍군 1군단은 제2사를 선두로하였고 15군단은 75사를 선두부대로 하였다. 게다가 모택동과 홍군총지휘부가 모두 제15군단과 함께 도하한다고하였다. 양림은 사장 장소동과 토의한후 직접 223퇀을 거느리고 하구나루터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고 대도하를 건넌 양림은 풍부한 도강작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0일 양림은 선견대를 거느리고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에 이르렀다. 마을앞으로는 누런 황하가 사품치며 흐르고있었고 강대안은 절벽이 가로막혀있었다. 강폭은 근 천메터에 달했고 강에는 갇 풀린 얼음쪼각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홍군전사들은 양림의 지휘하에 하구촌 곁으로 흐르는 무정하에서 엄격한 도하훈련을 진행했다. 큰 벼랑이 막혔기 때문에 적들은 홍군의 행동을 알수없었다. 그들은 황하의 물살과 도하에 수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였고 선견대가 탈 나무배도 대기시켜 놓았다. 배는 작은 목선 5척과 큰 나무배 2척뿐이였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들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모두가 공산당원이거나 공청단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전투의 승리만은 의심치않았다. 사 참모장인 양림이 직접 도하작전을 지휘한다기에 전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그들은 중앙홍군 장정시 금사강나루터를 탈취하고 통안진을 습격하는 전투 지휘자인 양림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2월 20일 밤 하늘에는 별도 달도 다 보이지 않았다. 양림의 명령에 따라 40명 돌격대원들은 5척의 작은 배를 타고 먼저 강을 건넜다. 그들은 팔에 흰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양림은 직접 기타 전사들과 함께 2척의 큰배를 몰고 뒤를 따랐다.     돌격대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기관총 부대를 조직하여 적의 화력을 제압하게 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개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하가와촌에 도착한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있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위치한 이름 없는 하가와촌,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이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만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양림이 희생된후 홍군 주력부대는 양림이 개척해 놓은 하구나루를 통해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25일에 석루현을 점령하고 천 2백여명 적들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년 5월 5일 예기한 군사목적에 도달한 홍군주력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정치와 군사적인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이해 하바기에 들어서 전국각지를 전전하면서 싸우던 기타 홍군주력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모여오기 시작하였다. 제4방면군은 당중앙의 거듭되는 명령에 따라 사천을 벗어나 북상길에 올랐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제6군단과 회합하였다.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하룡부대는 홍군 제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두 방면군은 감숙, 녕하로 진출하여 섬북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1936년 11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팽덕회 사령원의 인솔하에 서부로 진격하였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 그리고 제4방면군은 산성보에서 공동작전하여 추격해오는 적 주력을 통쾌하게 섬멸한후 승리적인 대회합을 이루었다. 1936년 11월 23일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제2방면군, 제4방면군 산성보에서 회합하였다. 이는 만리장정을 거친 홍군의 대회합이며 또한 홍군장정의 철저한 승리를 의미하는 순간이였다. 중국로농홍군 총사령인 주덕은, 세 주력홍군의 대회합과 산성보전투는 장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장정은 우리의 승리와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홍군은 섬감쏘베트근거지에 발을 붙이고 전국 항일구국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맞이해야한다고 강조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은 드디어 홍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위대한 전투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하였고 또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이들이 남겨놓은 빛나는 발자취는 장정정신과 함께 인류력사에 기록될것이며 그들의 드높은 혁명정신은 마냥 우리를 격려할것이다.  
9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댓글:  조회:3069  추천:61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풀벌레소리 자리러지고 바람이 소슬한 1935년 가을, 국민당의 통수 장개석은 우울한 심정으로 아미산을 내려왔다. 산수가 수려한 사천의 명산 아미산도 그의 울적한 심정을 달래줄수없었다. 수십만 국민당 주력이 중국대지 절반을 추적하면서 홍군을 죽음의 수렁인 설산과 초지에 몰아넣었지만 홍군은 절경에서 벗어나 지금 곧바로 섬북 쏘베트혁명근거지로 향하고있었던것이다.     아미산 기슭에서 장개석은 머리를 들어 흰구름이 감도는 산봉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갖은 심리적 압력을 이겨내면 6년 고생하였는데 결국 공산당과 홍군을 전멸시키지 못했구려.”  그도그럴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반 동북을 삼켜버리고 호시탐탐 하북과 전반 중국을 노려보고있는 상황에서 고집스레 홍군을 정벌하는데만 정력을 기울려왔던 장개석은 끝내는 실패를 승인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착취와 압박에 허덕이는 만백성들은 물론 자산계급과 소시민들까지도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는 장개석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장개석은 급급히 장학량에게 전보를 보내 성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장개석 대신 동북을 잃어버린 죄명을 쓰고 외국에 망명해있던 장학량은 착잡한 심정으로 장개석을 만났다. 그는 조속히 옛 부하들인 동북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려하고있었다. 오직 일제와 싸워 이겨야만이 그는 일제에게 짓밟히는 동북백성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동북군 장병들에게 미안하지 않을수있었으며 또 실패의 치욕을 씻을수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을 “서북 공산당토벌 부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장학량은 새로운 임명에 탐탁치 않았지만 잠자코 숨어있기보다는 그래도 옛부하들인 동북군을 다시 거느릴수있다는것이 반가웠기 때문에 명령을 접수하였다.       한편 이때 홍군은 급촉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고있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한 홍군은 랍자구천험을 돌파하고 합달포에 이르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다시 조직된 홍군 간부퇀과 더불어 단호히 모택동의 군사로선을 따라 북상하였다.     합달포에서 홍군은 간만에 편한 잠을 잘수있었다. 전사마다 동전 한잎을 분여받았다. 당시 동전 두잎이면 살진 양 한마리를 살수있었고 한잎이면 닭 다섯마리를 살수있었다. 홍군 장병들은 모두 기꺼운 심정으로 거리에 나갔다. 모욕을 하고 리발을 했고 맛나는 음식을 사먹었다. 합달포에서 모택동은 국민당 당국의 신문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장악하게 되였다. 신문에는 섬북에 강서의 중앙쏘베트지역만큼 큰 혁명근거지가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시작한 서해동의 부대가 이미 섬북의 류지단부대와 회합했다고 보도되였다.     모택동은 홍군 퇀급이상 간부대회를 열고 북상로선의 정확성을 강조하고나서 이제 홍군은 섬북으로 진출하여 그곳의 류지단, 서해동의 홍군과 합쳐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것이라고 했다. 회의에서는 홍군을 재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종대와 홍군 1방면군 주력을 정식 중국로농홍군 섬감지대로 합병하고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모택동을 정치위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홍군 1군단을 섬감지대 1종대로, 3군단을 2종대로 중앙종대를 3종대로 편성하였다. 양림이 소속한 간부퇀은 섬감지대 3종대로 되였다.     재편성을 거친 홍군은 8천여명이였다. 장병들은 경건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였다. 섬북이 어떤 곳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사람마다 희망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물이 줄어든 위하를 순조롭게 통과하고 소규모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륙반산을 넘었다.       홍군 섬감지대는 드디어 꿈속의 천당에 들어섰다. 눈앞에는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이 펼쳐졌다. 고원에는 수많은 황토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고 또 비바람에 씻기고 패여 깊은 골짜기를 형성해 놓았다. 메마른 서풍은 모래먼지를 날리며 몰아쳤고 흙먼지가 전사들의 옷속으로 날아들었다. 드넓은 황토벌에서 이따금 귀가하는 양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군 하였다. 이 모든 정경은 남방에서 온 홍군장병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홍군전사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노래를 부리며 행군하였다. 대오는 앞뒤가 보이지 않을정도로 길게 늘어서있었다. 게다가 먼지가 자욱하여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고있는 전사들은 뒤에서 후근부대가 적과 조우한것조차도 몰랐다.     대오의 마지막에서 달리던 양림과 간부퇀 전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동북군 기병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양림은 즉각 전사들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그는 신속히 골짜기속으로 달려가서 몸을 은페하고 적 기병을 저격하였다. 전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모두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말을 탄 적들은 골짜기로 들어올수없었고 또 말우에서 사격하려면 명중률도 낮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정확한 사격으로 많은 적들을 사살하였고 또 일부 부대를 나누어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끝내 적의 기병부대를 물리쳤다.         만수천산을 지나 중국 10여개 성을 전전한 홍군은 드디여 섬북의 오기진에 이르렀다. 홍군전사들은 어린이들마냥 오기진으로 뛰여갔다. 석양이 붉게 물들어있었고 길가의 흙담에는 어슴푸레 “중국공산당만세!”라는 표어가 씌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오기진 거리에는 행인들이 별로 없었다.     이때 머리에 흰수건을 두른 몇사람이 달려와 홍군전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속에는 향당지부서기가 있었고 쏘베트 향정부 주석도 있었다.     “쏘베트! 쏘베트정부!”     홍군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마중나온 사람들을 얼싸안았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1935년 10월 19일 섬서성 오기진, 강서성 중화쏘베트를 떠나 장정을 시작한 당중앙과 홍군은 일년하고도 9번째 되는 날에 섬북쏘베트혁명근거지에 도착했던것이다.   모택동은 쏘베트 향정부 당정책임자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거지의 상황을 료해하였다. 섬감쏘베트혁명근거지는 1927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섬서성 당위원회의 지도하에 청간, 위화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봉기실패후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 중국로농홍군 섬감유격대가 설립되였고 이 부대는 후에 홍군 26군으로 개편되였다. 1934년에 이르러 류지단이 령도한 이 부대는 섬북에 혁명근거지를 형성하고 섬감변구 쏘베트정부와 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습종훈이 정부주석을 맡고 류지단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이시기 또 각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홍군 27군으로 개편하였다. 류지단이 홍군 26군과 27군을 거느리고 국민당군과 간고한 전투를 계속하고있을무렵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했던 홍군 25군이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 25군은 악예환근거지에 남겨진 부대였다. 이 부대는 제4방면군 주력의 이동을 성공적으로 엄호한후 하남, 호북, 섬서, 감숙 등지를 전전하였다. 군장 장자화, 부군장 서해동이 거느린 이 부대는 1935년 7월 국민당당국의 신문에서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회합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고 당중앙과 홍군주력은 꼭 북상할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이해 9월 15일 제25군은 섬서성 연천현 영평진에서 류지단의 제26군, 27군과 회합하였고 영편진에서 중국로농홍군 제15군단을 조직하였다. 서해동이 군단장을 맡고 장자화가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류지단이 부군단장 겸 참모장으로 있었다.   모택동과 중앙홍군은 오기진에서 추격해오는 감숙군벌 마홍빈의 기병부대를 소멸하고 하사만(下寺湾) 으로 진격해 홍군 제15군단 주력과 회합했다. 15군단은 총과 탄약, 의복, 약품을 중앙홍군에 주었을뿐만 아니라 동전 5천원을 지원하였다. 중앙홍군에서는 양림과 주사제, 왕수도, 송시륜, 황진, 오수권을 비롯한 많은 주요간부들을 15군단에 지원 보냈다. 1935년 11월 3일 당중앙회의가 하사만에서 소집되였다. 회의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는 모택동을 주석으로하는 중국로농홍군 서북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번호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팽덕회가 사령원을 맡고 모택동이 직접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원 1군단과 3군단을 제1군단으로 합병한후 림표가 군단장을 맡았고 서해동이 계속 제15군단 군단장을 맡았다. 제15군단 산하에 제75사와 78사, 81사를 두었다. 양림은 홍군 25군으로 편성된 제15군단 제75사 참모장을 맡게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 총병력은 만 6천여명이였다.       홍군 제1방면군이 섬북에 도착한 사실은 국민당군을 크게 놀래웠다. 국민당은 많은 병력으로 섬서서부를 봉쇄하고 동북군 4개사를 동원해 홍군을 공격하게 했다. 선진적인 무기로 무장한 동북군은 전투력이 강했다. 만약 이들이 홍군을 포위한다면 홍군과 혁명근거지는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투의 승부는 제1방면군이 섬북에 발을 붙일수있는가에 직접 관계되였다. 만약 동북군이 근거지에 진입하면 홍군은 다시 부평초같이 이곳저곳 전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홍군은 반드시 이 전투를 이겨야했다.     하사만 대회가 있은후 모택동과 팽덕회가 제15군단 지휘부로 찾아왔다. 그들은 제15군단 각부대 지휘원들과 함께 적정에 대해 주밀하게 토의한후 섬북의 홍군을 집중하여 직라진 부근에서 적을 유인,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양림은 15군단과 75사가 맡은 임무를 자상히 연구하고 직접 현지에 가 보았다.     직라진은 주민이 백세대도 안되는 작은 진이였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작은 길 하나가 진을 가로질러 뻗어있었다. 진동쪽에 돌로 에워싸인 작은 산채하나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강 하나가 흐르고있었다. 양림은 나무 하나, 언덕 하나를 빠짐없이 살펴보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진동쪽의 산채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전사들을 보내 산채를 허물어버리게 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의 포치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 각부대는 직라진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1군단은 북쪽의 석취와 봉황두에 매복하였고 15군단은 동남쪽의 한 마을에 매복하였다. 15군단의 백여명 홍군이 양림의 지시에 따라 산마루에서 적을 유인하였다. 11월 20일, 동북군 57군의 선봉을 맡은 109사가 직라진으로 공격해왔다. 우원봉이 거느린 이 부대는 유인하는 홍군과 접전하면서 쉽게 직라진에 들어왔다. 우원봉은 626퇀과 627퇀을 진 량쪽고지에 포치하고 지휘부를 진 가운데 설치했다. 모택동은 직접 홍군지휘부에 찾아와 적들을 깨끗히 소멸할것을 각부대 지휘원들에게 요구했다.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요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양림은 직라진부근의 적들을 전부, 철저히 섬멸하기로 작심했다. 밤이 깊어지자 홍군은 신속히 직라진쪽으로 접근하여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21일 새벽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홍군은 밀물처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군단과 15군단은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양림은 작전계획에 따라 부분적인 전사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진중심부로 돌진하였다. 2시간의 격전을 거쳐 그들은 적지휘부를 점령하였으며 많은 전략물품을 로획하였다. 적 109사 사장 우원봉이 급급히 패잔병들을 이끌고 진동쪽의 산채에 들어가자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채를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산채의 돌담과 물길을 이미 끊어놓았기 때문에 적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한 양림은 공격을 잠시 멈추라고하였다.   홍군 기타 부대는 직라진의 적들을 소멸하고 적 지원병을 격퇴하였다. 직라진의 적들은 잠을 채 깨지 못한채 대부분 격살되거나 생포되였다. 적 626퇀 퇀장은 자살하고 627퇀 퇀장은 중상을 입고 퇴각하다가 숨졌다. 산채에서 지원군을 기다리던 우원봉은 포위를 뚫기로 결심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시켜 한쪽 포위를 조금 틔우게 하였다. 우원봉은 급급히 수백명 병졸들을 이끌고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적들은 싸울렴을 하지않고 모두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10여리를 추격해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적 109사 사장 우원봉도 격살되였다. 직라진 전투에서 홍군 제1방면군은 적 천여명을 격살하고 5천 3백여명을 생포하였으며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기전 두대도 로획하였다. 직라진 전투는 홍군 제1방면군의 전환점이라고할수있다. 1년간 간고한 장정을 진행해온 홍군들은 드디어 발붙일 곳이 있게 되였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근거지가 있게 되였다. 이무렵 중국력사도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고있었다.   1935년 12월 9일 북평의 6천여명 학생들이 거리에 떨쳐나와 반일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소리높이 웨쳤다. 간고한 로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한 홍군전사들은 추운 겨울 북평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민감하게 이를 파악하고있었으며 수많은 역경을 이겨온 홍군에게 새로운 력사적 기회가 도래했음을 감지하고있었다.  
8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댓글:  조회:3288  추천:65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사천성 북부의 송반초지는 평균 해발 3천여메터의 고원습지로서 예로부터 이곳은 인적하나 없는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져있었다. 남북으로 약 2백킬로메터, 동서로 약 백킬로메터되는 송반초지는 사천성과 감숙, 섬서의 린접한곳에 위치했다. 만수천산을 넘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곳에 당도한 홍군은 또 한차례의 생사를 다투는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야했다. 장정을 시작해서부터 홍군이 이겨낸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 악렬한 자연환경으로 인한 시련을 놓고볼때 아마도 송반초지의 시련이 가장 컸다고 할수있다.     초지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집없었다. 아침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며 찬비가 후둑후둑 내리다가 점심에는 갑자기 맑게 개인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군 하였다. 폭우로하여 초지의 강물이 급격히 불었고 도저히 도섭할수없었다. 홍군선견대는 할수없이 비가 멎고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계속 전진하군 하였다.     초지 한가운데는 작은 산등성이가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초지의 물줄기는 남북으로 갈려 수천갈래로 흐른다. 남으로 흐르는 강들은 민강과 합쳐 장강으로 흘러들고 북으로 흐르는 강들은 북으로 마곡강과 합쳐 황하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두갈래 큰 강인 장강과 항하를 나누는 분수령이기도 하였다.      초지에 들어선 이튿날부터 많은 홍군 장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모조리 소모하고 소리없이 흙탕속에 잠겨버리군 하였다. 어떤 사람은 저녁까지만 하여도 빗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서있었지만 이튿날 날이 밝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섰던 자리에는 이따금 거품을 뿜는 검은 흙탕물뿐이였다. 계속 전진하고있는 사람들의 얼굴색도 검푸르러 있었다. 모진 추위와 기아로하여 많은 전사들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간부퇀 참모장인 양림, 중앙종대 제3제대 책임자인 무정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도 기타 홍군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간고한 송반초지의 어려운 행군을 진행하였다. 험악한 대자연은 인간 정신력과 의지력의 극한을 강요하고있었던것이다.       1935년 5월 참모장 양림이 거느린 간부퇀 전사들의 빛나는 전과로 금사강을 건넌 중앙홍군은 승리적으로 제4방면군과 회합하여 좋은 국면을 개척할수있었다. 그러나 제4방면군의 장국도가 중앙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딴전을 부렸기 때문에 홍군은 이 불모지인 송반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금사강을 승리적으로 건넌 중앙홍군은 회리부근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한편에서는 양림을 비롯한 간부퇀이 제3군단과 함께 회리현성을 공격하는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 한편에서 지도간부들이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회리회의에서는 군사작전에 대한 총화를 진행하고 계속 북상하여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할 계획을 세웠다.     양림은 간부퇀과 함께 회리로부터 출발하였다. 홍군 참모장 류백승이 거느린 홍군 선견대는 순조롭게 소수민족지역을 통과했으며 슬기롭게 대도하기슭에 당도하였다. 홍군은 안순장 나루에서 배한척으로 강행도하하여 대안의 적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안순장에는 홍군을 도하시킬 나무배가 고작 4척뿐이였다. 적 주력부대가 곧 추격해 왔기 때문에 홍군은 여기에서 며칠씩 도강할 여력이 없었다. 류백승과 섭영진은 즉각 홍군 1군단과 간부퇀을 거느리고 대도하 북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방향으로 공격해갔고 1군단 2사와 홍군 5군단이 림표의 지휘하에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탈취작전에 나섰다.     양림은 홍군들과 함께 대도하 북쪽기슭에서 행동했다. 부대는 안순장을 지원하러 온 사천군과 부딛쳤다. 홍군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적들과 싸워 하나하나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로정교로 향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일주야를 적들과 계속 치렬한 접전을 치르면서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전진하는 홍군들은 적들과 큰 전투를 겪지 않았다. 선견대는 하루 120킬로메터를 달려 남먼저 로정교에 이르렀다.     대도하로부터 로정에 이르는 이곳은 해발 7천여메터되는 대설산과 해발 3천여메터의 이랑산이 마주한 곳이다. 대도하 강물은 두 산사이에 깊은 협곡을 형성하면서 벼랑사이를 사품치며 흘러내린다. 청나라 강희 44년에 서장의 라싸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이곳에 다리를 가설하게 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다리는 13개의 굵은 쇠사슬로 량쪽벼랑을 이어주고 거기에 널을 펴서 만든 다리였고 그 길이는 101.6메터였다. 홍군을 막기 위해 적들은 대안에 사격진지를 구축했고 다리의 널판을 죄다 뜯어버렸다. 로정교는 오직 13개의 굵은 쇠사슬만이 허공중에 걸려있을뿐이였다.     홍군은 22명 돌격대원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추호도 주저없이 쇠사슬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들의 뒤로 다른 전사들이 부지런히 널판을 깔아 다리를 만들면서 전진했다.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홍군전사들은 기관총을 집중해 적진을 향해 사격하였으며 사기를 돋구기 위해 나팔수들을 모아 공격나팔을 울리게 하였다. 나팔소리가 천년의 협곡을 진동하였고 콩볶듯한 총성이 그칠사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공격해오는 홍군전사들 앞에 더럭 겁에 질린 적들은 진지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22명 돌격대원들은 용감히 불속에 뛰여들어 길을 헤치고 로정교를 점령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영웅적 22명 돌격대원들은 한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날이 저물무렵 적들과의 치렬한 접전을 거친 양림도 홍군전사들을 거느리고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강 량안의 전사들은 부근의 적들을 소멸하고 로정교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였다.       로정교를 탈취한 홍군은 대설산인 협금산을 넘어 드디어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중앙홍군과 홍군 제4방면군이 회합한후 홍군 간부퇀은 제4방면군의 홍군대학과 합병하여 새로운 홍군학교를 편성하게 되였다. 간부퇀 퇀장인 진갱이 악예환혁명근거지에서부터 장국도와 모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홍군 1군단 사장으로 조동되였다. 그리하여 예지량이 새로운 홍군학교 교장을 맡았다. 합병한후 홍군간부퇀은 홍군학교 특과퇀으로 편성되였다. 특과퇀의 대리퇀장은 위국청이였고 조선혁명가 양림은 계속 특과퇀의 참모장을 맡았다.      1935년 6월 26일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량하구에서 소집되였다. 회의에서는 금후의 작전방향을 토의했으며 계속 북상하여 섬북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순조롭게 사천을 벗어나 섬북으로 전진하기 위해 송반을 점령하는 송반전역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29일 중공중앙정치국 상무회의에서는 새로운 조직구성을 내왔다. 장국도, 진창호, 서향전을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충선거하였다. 하지만 두 주력홍군의 회합은 새로운 모순을 야기시켰다. 장국도는 당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북상로선을 반대하면서 홍군은 남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구실을 대면서 북상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군의 송반전역도 무산되고말았다. 국민당의 주력부대인 호종남군이 이미 송반을 점령하고 막강한 병력으로 수비하고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홍군은 장국도의 주장에 따라 두갈래로 나뉘게 되였다. 홍군 5군단, 9군단과 제4방면군의 부분적 부대로 좌로군을 편성하고 1군단과 3군단, 홍군 4방면군 부분적 부대로 우로군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거느리던 중앙홍군은 둘로 나뉘여지게 되였고 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던 주덕도 좌로군을 거느려야했기때문에 모택동을 떠나게 되였다.     1935년 8월 21일 모택동은 우로군을 거느리고 당중앙과 함께 일망무제한 송반대초지에 들어섰다. 만약 병력을 분산하지 않았다면 두 주력홍군은 얼마든지 송반의 적진지를 돌파할수있었다. 하지만 적이 한발 앞써 유리한 지세를 차지했고 홍군도 두갈래로 나뉘여 병력이 약화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죽음의 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다. 양림이 소속된 홍군학교도 우로군에 포함되였다. 그는 특과퇀 장병들을 거느리고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과 함께 초지에 들어섰다. 선견대가 가면서 길을 표시해 놓았지만 비바람에 씻겨 대부분 알아볼수없었다.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길잡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풀뿌리가 무성한곳을 밟으며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검은 빛갈을 띤 초지의 물은 독성이 있어서 그냥 마시면 배가 붙다가 죽게 된다. 그리고 상처난 자리에 물이 묻으면 곧 썩어버리군 하였다.     찬비와 희박한 공기 그리고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수렁에 비해 더 큰 위험은 식량부족이였다. 사천북부 척박한 곳으로부터 송반초지에 들어왔기에 홍군전사들은 충족한 식량을 장만하지 못했다. 일부 대오는 초지에 들어선 이틀날부터 쌀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수시로 쓰러지는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다 소모하고 숨졌다.     양림은 여러 군관학교에서 철같이 굳세게 다져온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전사들을 도와주고 앞장서서 길을 내면서 전진하였다. 간부퇀 전사들은 양림이 낸 발자욱을 따라 손에 손잡고 한걸음한걸음씩 따라 나섰다. 전반초지는 습하기 그지없었고 마른땅 한쪼각도 찾을수 없었다. 불을 피우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전사들은 겨우 피워놓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온기를 보충하면서 밤을 지내야했다.        뭇별이 초롱초롱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양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몸은 마냥 추워들고 배도 굶주렸지만 종시 그리운 고향과 안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장정을 시작한뒤로 이미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였다. 동북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안해 리추악의 환경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일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고향산천은 계속 일제에게 짓밟히고있을것이다. 씻은듯 맑은 밤하늘에는 사랑하는 안해의 얼굴이 나타나 웃어주는것만 같았다. 양림은 끊없는 향수에 잠겼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하늘에는 다시 먹장구름이 지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곳에 계속 주저해 있을수는 없었다. 해야할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보고 해방된 조국에 갈려면 우선 초지의 죽음의 고비를 꼭 전승해야했다. 전세계 무산자들과 함께 모든 죽음과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의 그날을 맞이해야했다.     양림은 정신을 가다듬고 전사들을 격려하면서 걸음을 재우쳤다. 폭우로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빗물에 잠겨 어느곳이 수렁이고 어느곳이 초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양림은 곁의 전사들과 함께 서로 팔을 끼였다. 이렇게 하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곁에서 쉽게 구할수있었다. 홍군장병들은 한마음으로 뭉친 강철의 집단적 힘으로 죽음의 초지를 정복하려했다. 수백명 전사들이 서로 팔을 겯고 어깨나란히 줄지어 망망한 초지를 향해 전진하였다. 그들은 인터나쇼날을 높이 부르면 드높은 열의로 전진했다. 7주야의 간고한 행정을 거쳐 우로군 홍군들은 드디어 죽음의 지대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하였다. 홍군이 절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아 송반초지로 가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고있던 국민당군 호종남은 드디어 자기의 오판을 알게 되였다. 그는 뒤늦게 나마 포좌에 부대를 파견해 홍군을 막게 하였다. 이를 미리 파악한 홍군은 포좌를 포위하고 지원부대를 매복습격하는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홍군의 위기를 가셔지지 않았다. 당중앙에서는 신속히 북상할것을 좌로군의 책임자 장국도에게 촉구하였다. 하지만 장국도는 물이 불어 부대가 전진할수없다는 리유로 이를 거부하였고 주덕의 권고도 물리치고 계속 남하하려 시도하였다. 게다가 당중앙과 함께 우로군에 포함되였던 홍군 제4방면군의 일부 고위간부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9월 장국도는 드디어 당중앙의 북상로선을 거부하고 단연히 남하할 명령을 내렸다. 우로군 책임자의 한사람인 진창호도 장국도의 명령에 따르기로 하였다. 모택동과 당중앙은 할수없이 파서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장국도의 작법을 비판하면서 북상을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거느린 제3군단과 중앙종대에 명령을 내려 밤도와 북상하도록 하였다. 부대는 신속히 행동하여 이미 아계로 전진한 홍군 제1군단과 회합하려 떠났다. 우로군의 홍군대학은 새벽 3시에 출발명령을 받았다. 명령서는 모택동과 주은래가 공동으로 서명했다. 특과퇀의 정위 송임궁은 부대를 소집하고 연설했다. 그는 북상과 남하의 로선투쟁을 설명하고나서 북상하려는 사람들은 중앙홍군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양림과 특과퇀은 원래부터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해온 터이므로 두말할것도 없이 부대를 따라 나섰다. 원 간부퇀의 대부분 간부와 전사들은 홍군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고 학원들은 대부분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였다. 그러므로 양림을 비롯한 원 간부퇀의 장병들이 일제히 북상할것을 주장하고 떠나자 학원들도 따라나서게 되였다.   1935년 9월 10일 밤, 중앙홍군은 6시간의 밤길을 달려 아서에 이르렀고 날이 밝자 계속 아계로 전진하였다. 모택동과 장국도의 북상과 남하분쟁은 군사적인 쟁론이면서도 의지의 대항이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은 홍군 1군단까지 합쳐 겨우 8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주덕, 류백승을 비롯한 주요장령이 장국도 부대에 남아있고 제5군단과 9군단도 제4방면군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북상의지는 무엇보다도 강했다. 그는 이 8천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중국혁명의 새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려했다. “우리는 꼭 승리해야한다. 아니 우리는 꼭 승리할수있다!”     굳은 혁명리상과 정치적 신념은 더욱 굳은 의지를 낳았고 그 의지는 그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었다.     긴긴 밤이 지나고 동방이 희쁨히 밝아왔다. 피빛의 아침노을이 붉게 비추고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지난 홍군은 두터운 황토가 쌓인 섬북으로 진군하였다. 람루한 옷차림에 무기도 보잘것 없는 대오였지만 이 대오는 그 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는 강철의 대오였다.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인민의 운명을 짊어진 이 대오는 서서히 중국서북대지를 향해 움직여갔다.  
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⑦ 댓글:  조회:3371  추천:94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⑦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청장고원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금사강은 만리장강의 상류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탕굴라산맥 북쪽기슭으로부터 한줄기 물길이 흘러내려오다가 강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천리 금사강이 되였다. 금사강은 경치가 수려한 운남의 려강에서 큰 굽이를 돌아 동으로 흐르고흐른다. 강물은 해발 3340메터에서 2296메터로 흘러 그 락차가 천여메터에 달한다. 운남경내에서 흐르는 금사강은 강폭이 비교적 넓고 물살이 급했다. 게다가 강량안은 높은산으로 이어져 그 지세가 무척 험했다.   북상항일의 전략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중앙홍군은 오강을 건너고 귀양으로 양동하다가 1935년 4월말에 운남성 서북쪽에 이르게 되였다. 중앙홍군은 운남성 소재지인 곤명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펼쳐 금사강부근의 적들을 모두 곤명부근으로 모이게 한다음 금사강을 건너 북상할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모택동과 주은래는 직접 도강계획을 작성하고 1935년 4월 29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이름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명령에 따라 홍군 제1군단은 원모현에서 북상하여 금사강의 룡가나루터를 점령하고 제3군단은 순전현에서 북상하여 홍문나루터를 점령하며 중앙종대는 간부퇀을 선봉으로 직접 금사강의 교평나루터를 점령하게 되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홍군 세갈래 부대는 주야를 불문하고 강행군을 하였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길에서 현성을 공략하지도 않고5월 3일전으로 여러 나루터를 점령하고 나룻배를 확보하여 도강을 실현해야했다.   중앙종대 홍군간부퇀이 점령해야할 금사강 교평나루는 급류가 사품치고 량안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된 험요한 요새였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관건적인 문제는 적 보다 한발 앞써 각 나루터에 도착하는것이였다. 만약 적들이 홍군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강 량안의 배들을 죄다 불태워버린다면 홍군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교평나루터의 중요성을 파악한 중앙에서는 류백승을 홍군간부퇀 선봉부대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당의 총책임을 맡은 장문천도 간부퇀에 찾아가 5월 1일전으로 나루터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완수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간부퇀 장병들은 운남성 서북쪽에 위치한 등록현의 한 산간마을에 주둔하고있었다. 4월 29일 저녁 주은래는 류백승과 함께 이곳에 찾아왔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 방에서 주은래와 류백승은 교평나루를 탈취할 작전계획을 자상히 연구하였다. 주은래는, 교평나루 탈취는 당과 홍군의 생사에 관계되는 중요한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꼭 신속히 행동하여 적을 불의에 습격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해야한다고 했다. 간부퇀의 참모장을 맡은 양림은 주은래와 너무 익숙한 사이였다. 일찍 국민혁명군 두차례 동정시기부터 함께 작전을 연구했었고 서금에서도 함께 일을 보았던 사이였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적극 내놓고 간부퇀 각 부대의 상황을 자상히 설명하였다. 끝으로 그들은 류백승과 정위 송임궁이 간부퇀의 선두부대인 3영을 거느리고 출발한 다음 퇀장 진갱이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주은래는 가장 어려운 상황까지 고려하였다. 그들은 만약 간부퇀이 강나루를 확보하고 강을 건넜지만 배가 없어 주력부대가 강을 건느지 못할 경우 단독으로 북상하면서 유격전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작전을 쉽게 하달하기 위해 류백승과 양림은 모두 선두부대에 나섰다. 간부퇀 선두부대 전사들은 하루 180리의 속도로 급행군하여 교평나루터로 달려갔다. 간부퇀의 8련이 선두영의 앞장에 서서 내처 달렸다. 그들은 로획한 국민당군복을 바꿔입고 길잡이를 따라 산길을 달렸고 장밤 지속된 급행군 도중 십분밖에 쉬지 않았다. 늘 산길을 달리던 길잡이 마저 이처럼 고된 급행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길잡이를 자주 바꾸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 한 산마루를 톺아오를때였다. 40여세인 길잡이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곳 산길에는 익숙했지만 아편쟁이여서 체력이 많이 떨어져있었다. 할수없이 홍군전사들은 번갈아가면서 그를 담가에 들고 달려야했다. 이처럼 간고한 강행군을 거친 간부퇀전사들은 밤 장막속에서 강가에 도착하여 은은히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게 되였다.     이곳 금사강은 사천과 서장 사이를 흘러내려오다가 운남성 석고부근에서 180도의 큰 굽이를 돌아 북쪽으로 흘러간다. 강줄기는 고산준령을 가로질러 3천여메터 깊이의 대협곡을 형성해 놓았고 바위나 벼랑에 부딛치는 급한 물소리는 협곡을 진동하였다.     중앙홍군이 머리를 돌려 북상길에 오를 무렵 장개석은 급급히 곤명에 있는 군벌 룡운에게 전보는 보냈다. 그는 금사강의 모든 배들을 불살라버리고 강을 철저히 봉쇄할것을 명령하였다.     교평나루터는 금가강기슭의 중요한 나루터로서 사천과 운남 두성을 이어주는 길목이였다. 예로부터 소금, 량식, 가죽, 약재를 비롯한 물건들이 이곳을 통해 교역되였다. 교평진으로부터 나루터까지 산비탈길이였는데 량켠은 모두 천애절벽이여서 자칫하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간부퇀 선두부대가 강기슭에 도착하였을때 교평나루터는 이미 봉쇄상태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경각성을 늦춘 적 군관이 사사로운 일 때문에 숨겨둔 배 두척이 있었다. 국민당 복장을 한 홍군은 쉽게 이 두 배를 빼앗았고 또 다른곳에 숨겨둔 배 3척을 찾아냈다.     양림은 선두부대에 도강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은 신속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강대안의 적들은 마작놀음에 정신없었다. 홍군전사들은 신속히 적들을 생포하고 나루터를 통제하였다.     홍군이 순조롭게 교평나루터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류백승은 즉각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명령에 따라 간부퇀 후속부대는 계속 강을 건너고 선두부대는 신속히 강북 여러진지를 통제해야했다. 홍군전사들은 요기를 할 사이도 없었다. 그들은 길가의 주인없는 한가게에서 상우에 돈을 남겨두고는 만두며 구운떡을 가져왔다. 전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만두를 나누어 먹고 대충 허기를 달랬다. 강북 수비를 맡았던 운남군벌 왕보경은 홍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급히 도주하였다. 한참 도주하다 생각하니 나루터를 빼앗긴 책임 역시 총살감이였다. 그는 할수없이 병졸들을 수습해 다시 나루터로 공격해왔다. 이미 유리한 지세를 점한 홍군전사들은 공격해오는 적들을 효과적으로 저격하였고 적 두목인 왕보경은 홍군에게 사로잡히고말았다.         나루터에 도착한 류백승은 놀람을 금치못했다. 지세나 험하고 물살이 급해 도저히 다리를 가설할수없었다. 게다가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급전이 왔다. 홍군 1군단과 3군단이 모두 도강작전에서 실패했던것이다. 1군단은 곤명으로의 양동을 멈추고 급급히 금사강가의 룡가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비행기정찰로 홍군 1군단의 행동을 파악한 적들은 이미 룡가나루터를 철저히 봉쇄하고있었다.  3군단도 명령에 따라 홍군나루터를 점령했지만 배 한척밖에 구하지 못했다. 룡가나 홍문 나루터 역시 교평나루터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가설할수없었다. 그리하여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원 작전계획을 포기하고 모두 교평나루로 이동하여 그곳으로 강을 건널것을 1군단과 3군단에 명령하였다.     새로운 명령을 받은 류백승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한번에 수십명밖에 실지 못하는 배 5척으로 1군단과 3군단을 포함한 모든 홍군부대를 도강시킨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강북의 적정이 걱정스러웠다.     이때 홍군전사들이 배 2척을 더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배 7척으로 도강하게 되였다. 강기슭에 사령부를 설치한 류백승은 중앙군위에 전보를 보냈다.    “교평나루터는 이미 통제되였고 배 7척을 찾았음. 배 7척으로 주야에 만명을 도강할수있으니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는 5일에 도강을 끝낼것으로 판단함”     전문을 보낸 류백승은 극도로되는 피로로 쓰러질것만 같았지만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해낸 간부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간부퇀 동지들은 하루에 근 200리에 달하는 산길을 달렸소. 그것도 밤에 적들을 피해가면서 험한 살길을 달려 나루터를 점령하였소. 한 사람이 어찌 하루에 이처럼 먼길을 달릴수있겠소? 그러나 그들은 해냈소.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를 했소. 그들은 무엇에 의지했겠소? 바로 드높은 각성과 당성에 의지했던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 누구도 이 임무를 완수못해냈을것이요.”         하지만 위험을 가셔지지 않고있었다. 모든 홍군이 교평나루 하나로만 도강하려면 최소한 5월 5일까지 시간이 걸려야했다. 그럼 이 사이 부근의 적정이 가장 중요했다. 비록 홍군의 교묘한 전술로 뒤에 처진 국민당군 주력은 한주일 남짓한 거리에 두고있지만 앞의 적정을 알수없었다. 홍군의 도강을 담보하려면 최소한 5일까지는 적 주력이 공격해오지 말아야했다.     누구도 숨을 돌릴 사이가 없었고 누구도 지친 몸을 돌볼 사이가 없었다. 류백승은 다시 눈길을 간부퇀 지휘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홍군주력이 강을 건느려면 시간이 필요하기때문에 강북 적의 요새인 통안주를 신속히 점령하라고 간부퇀에 명령했다.     간부퇀은 의논을 거친후 작전명령을 내렸다. 참모장 양림이 선견대를 거느리고 앞장에 서고 그 뒤에 정위 송임궁과 퇀장 진갱이 간부퇀 주력을 거느리고 따르기로하였다.     통안주는 교평나루터에서 20킬로메터 떨어진 작은 산간도시였다. 산비탈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는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교평나루터를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기때문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게다가 부근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아주 험했다.     “모든 희생을 아끼지 말고 반드시 통안주를 점령하여 홍군의 도강안전을 보호하라!”     류백승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양림은 간부퇀 선견대를 거느리고 통안주로 돌진했다.     통안주로 통하는 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 하나뿐이였다. 이 산길에는 길은 산허리와 벼랑을 에돌아 굽이굽이 뻗어있었고 대부분 길목은 겨우 한사람만이 통과할수있었다. 그중 화염산으로 불리우는 길목이 가장 험했다. 이곳 산길 한쪽은 천길 벼랑이였고 한쪽은 천길 낭떨어지였다. 적들은 화염산 길목을 차지하고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공격해오는 홍군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또 큰돌을 굴러내려보내면서 완강히 저항했다.     양림은 간부퇀의 참모장이였지만 본대나 후위에서 부대를 지휘하거나 작전을 감독하지 않았다. 그는 몸소 정찰패를 거느리고 앞장서 달렸다.     돌격대의 나팔소리가 울리자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염산 길목으로 돌진했다. 앞에서 달리던 전사들이 적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또 일부는 산정에서 굴러내리는 돌에 맞아 상처를 입었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양림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돌진하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리한 관찰로 신속히 적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발견하였다. 양림은 민첩한 동작으로 벼랑가에 몸을 부치고 한걸음씩 전진했다. 총알은 그의 주변에서 땅이나 돌에 맞쳐 불티를 튕겼지만 그의 몸에는 미치지 못했다. 기타 전사들도 즉각 양림의 뒤를 따라 몸을 벼랑가에 붙이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들은 앞장선 참모장의 전술동작을 따라 모두 무사히 화염산을 지났다.     느닷없이 몸가까이까지 쳐들어온 양림과 홍군전사들을 발견한 적들은 황급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고 일부는 머리를 돌려 통안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양림이 선견대 한개영을 거느리고 통안주에 막 도달했을때 통안주 부근의 서창과 회리로부터 달려온 국민당군과 조우하게 되였다. 적의 원병은 사천군벌 류원당의 두개 퇀과 한개 박격포련이였다. 양림은 소속부대를 신속히 포치하고 선제타격을 가했다. 유리한 지세를 차지한 홍군전사들에게 선제타격을 당한 적 원병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탓으로 그대로 진영이 무너졌다. 적들은 다투어 진지를 버리고 통안주로 철수하였고 통안주의 지세를 리용해 계속 수비하려 들었다.     철수하는 적을 몰아 그대로 통안주를 점령할수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양림이 거느린 선두영의 병력은 태부족이였다. 지칠대로 지친 선견대 한개영의 병력으로는 수배에 달하는 적의 수비를 뚫을수 없었던것이다. 양림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렸다.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통안주의 적들과 대치하면서 황혼녘까지 계속 격전을 벌리고있었다. 이때 홍군 간부퇀 정위 송임궁이 후속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당도하였다.     1935년 5월 1일 오후, 홍군간부퇀은 두길로 나누어 적진을 향해 공격했다. 송임군이 일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거짓 공격을 하였고 양림은 두개영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적 측면을 공격하였다. 양림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홍군전사들은 용감하고 지혜롭게 적과 싸웠고 적의 진지를 하나하나 점령함으로써 드디어 적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진행되였지만 간부퇀 참모장 양림이 잘 지휘하였기때문에 홍군은 아주 적은 희생으로 통안주를 점령하였다. 전반 전투에서 홍군은 전사 4명이 희생되고 8명이 부상하는 대가로 화염산 천험을 돌파하고 통안주를 점령했으며 천여명 적들을 격살하거나 생포했던것이다.     통안주에서의 중대한 승리는 금사강의 교평나루터를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전반 중앙홍군의 승리적 도강을 유력하게 담보해주었다. 5월 5일까지 작은 교평나루터에 수만 홍군주력부대는 7척의 배를 리용해 도강하였다. 사람은 많고 배는 적었지만 전사들은 질서있게 움직였고 여유롭게 강을 건넜다. 뱃사공도 힘든줄 모르고 노를 저었다. 홍군은 일주야에 5원이라는 푼푼한 삯전을 뱃사공에게 주었고 때마다 전사들도 흔히 먹지 못하는 돼지고기 료리로 뱃가공을 대접했다. 30명밖에 타지 못하는 작은 나무배 7척으로 수만홍군이 금사강을 건넜다.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강을 건넌 홍군은 7척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뱃사공에게는 한사람당 동전30잎의 삯전을 추가로 주었고 배한척은 뱃사공 개인의것이였기때문에 동전 80잎을 지불하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간부퇀에 표창령을 내렸고 간부퇀의 전공은 적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중앙홍군의 금사강 도강은 동서고금 군사상의 기적이 아닐수 없다. 중앙홍군이 금사강을 건넌후 추격하는 적과 홍군은 한주간의 거리를 두게 되였고 사기 드높은 홍군전사들은 씩씩한 걸음으로 노래부르며 계속 북상하였다.
6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⑥ 댓글:  조회:3079  추천:53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⑥    1935년 2월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인 음력설이였지만 침침한 중국대지는 특수한 사건이 별로 없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해 첫시작인듯 하였다. 당시 <신보>월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북평이나 천진, 상해, 남경등지의 사람들은 예나 다름없이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고있었다. 그래도 신문이라도 읽는 사람이라면 장개석 위원장의 포상금이 최신상황을 조금 알수있었다. 장개석은 주덕, 모택동, 서향전을 생포하는자에게는 10만원을 장려하고 수급을 바치는 자에게는 8만원을 장려한다고했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장개석은 음력설을 려산에서 보냈다. 장개석과 송미령은 장학량부부와 함께 려산의 서양식 별장에서 즐거운 음력설을 쇠였다. 장개석은 최근 한동안 이른바 토비숙청문제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과 홍군은 이미 패망해버렸으며 더 신경쓸 나위도 없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이때 그의 주요관심사는 일본문제였다. 그는 모임에서 연설할때마다 이른바 중일친선을 강조하면서 일본인을 자극하는 집회를 가지지 말고 일본제품 배격행동을 하지 말며 충동적인 반일행위를 자제할것을 요구하였다. 동북 3성 기름진 땅을 잃어버리고서도 총칼을 들고 다가선 일제 앞에서 그는 계속 타협하기에만 열중했던것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과 중앙홍군은 쉽게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상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공산당은 1934년 7월 15일에 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모두 단합하여 항일할것을 전국인민과 항일무장에게 호소하였다. 7월 22일 중앙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인 조선혁명가 양림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홍군의 북상항일선언을 옹호한다”는 글을 홍색중화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는, “망국의 참화가 눈앞에 닥쳐왔다. 망국의 치욕이 모든 중국사람의 머리에 떨어질것이다!”라고 쓰면서 “오직 쏘베트와 홍군만이 중국 군민들을 이끌고 싸울수있는 통수이며 항일의 유일정확한 대표”라고했다. 양림은 모든 중국인민이 중국로농홍군의 북상항일 호소를 받들고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기를 희망하고있었다.       중국 서남부의 겨울추위는 왕년보다 더 했다. 혹한이 몰려드는 운남성 동북부의 작으마한 도시 짜시진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3백여세대 인가밖에 없는 작은 산간도시 짜시진에 이르러 중앙홍군은 서부로 진격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서 간부와 전사들은 음력설을 맞이했으며 그동안 전투와 행군길의 피곤을 풀고있었다. 한편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도자들은 짜시진의 작은 판자집에 모여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화로를 둘러 앉은 지도간부들은 감자며 고무마를 불에 구워먹으면서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운명을 두고 열렬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짜시회의는 준의회의의 계속이였고 준의회의의 결의를 한층더 확정하였으며 장문천을 당중앙의 총책임자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잠시 북상계획을 포기하고 귀주에서 근거지를 개척할 계획을 세웠다.     가렬처절했던 토성전투는 홍군의 실패로 끝났다. 적의 병력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였기 때문에 홍군은 어려운 격전을 치러야했고 나중에는 공산당의 정예 군사간부로 무어진 간부퇀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토성전투가 있은후 장강을 넘어 북상하려던 홍군의 계획은 무산되였고 중앙홍군은 운남성 동북부의 적수하 기슭 토성부근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에 들었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전략전술을 써야했다. 이시기 홍군의 지휘를 맡은 모택동은 과감한 행동계획을 세우고 기동령활한 전술로 적의 포위를 타개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중앙홍군은 다시 원길로 되돌아서 적수하를 건너 귀주성 경내로 진입하였다. 홍군이 서진하거나 북상할것이라고 오판하고 병력을 토성부근에 집결시켰던 국민당군은 헛물을 켜고말았다. 홍군은 경건한 걸음으로 곧추 귀주로 공격하였다.       장정에서 양림이 참모장을 맡은 간부퇀은 줄곧 중요한 과업을 짊어지고있었다. 간부퇀은 홍군의 특수한 부대였다. 홍군대학, 홍군 제1보병학교, 홍군 제2보병학교, 홍군특과학교의 학원들로 편성한 이 부대는 천여명의 홍군 기층 군사간부들로 구성되였다.     간부퇀은 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와 함께 행동했으며 군위종대 사령원인 엽검영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들은 당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 기관을 호위하고 중앙지도자들의 안전을 보위하며 군사간부들을 보류하고 강습시키며 또 전투부대에 간부를 파견하였을뿐만 아니라 직접 싸워야했다.     장정초기 적의 4개 봉쇄선을 돌파하고 상강을 지나는 등 간고한 행군과 치렬한 전투에서 그들은 극도로되는 피로와 기아를 극복하면서 적들과 싸웠고 중앙지도자들을 호위하고 경위하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냈다.     준의회의가 있은후 간부퇀은 토성전투를 시작으로 일선전투에 직접 참가하게 되였다.        귀주성 북부에 위치한 루산관은 해발 천 4백여메터에 달한다. 북쪽으로 동자현과 15킬로메터 상거해있고 남쪽으로 준의현과 접해있다. 사천과 귀주를 이어주는 천금도로가 산을 가로질러있다. 길 량켠은 천애절벽과 천길 낭떨어지로 되여있어 루산관 길목은 말 그대로 천험이였다.     1935년 2월 하순 루산관에는 구질구질 잔비가 끊지 않았다. 적수하를 다시 건너 귀주성내로 진입한 홍군은 곧바로 준의를 향해 진격하였다. 뒤늦게야 홍군의 행동방향을 파악한 장개석은 급급히 귀주성내의 국민당군을 그러모아 준의로 진격했고 또 준의의 부분적인 부대를 루산관에 포치해 홍군을 저격할것을 명령하였다.     홍군간부퇀은 루산관 지원부대로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홍군과 국민당군은 루산관에서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수많은 우수한 홍군장병들이 쓰러졌고 적들은 천험을 리용해 끝까지 저항했다. 적아쌍방이 모두 수많은 희생을 냈지만 전투국면은 타개되지 않았다. 이때 명령은 받은 간부퇀은 신속히 루산관으로 진격했다.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하루 60킬로메터를 달려왔다.  26일 오후 팽덕회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홍군 제3군단의 13퇀과 12퇀, 간부퇀은 정면으로부터 골짜기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이때 적의 배후로 우회한 제3군단의 10퇀과 11퇀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홍군부대의 우렁찬 나팔소리는 루산관에 울려퍼졌고 홍군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돌진했다.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적의 화력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날 저녁 모택동과 중앙종대가 루산관에 이르렀다. 물안개 자욱한 루산관에서 모택동은 더 과감한 작전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는 일선의 홍군전사들에게 계속 적들을 추격하여 국민당군 오기위 부대를 격파할것을 명령하였다.  양림은 홍군전사들과 함께 극도로 되는 피로를 극복하면서 계속 적들을 추격하였다. 28일 새벽 홍화강부근에서 홍군부대는 오기위부대와 부딛쳤다. 홍군 제3군단은 준의의 남대문으로 불리우는 홍화강 진지를 사수하였고 제1군단은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홍화강에서의 접전도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홍군 10퇀 퇀장 장종손이 쓰러졌고 참모장 종위검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홍화강진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는 팽덕회와 주덕까지도 진지에 와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곳이 적에게 돌파되면 적의 배후로 우회한 홍군 1군단의 작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준의와 루산관도 적의 손에 다시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홍군은 오갈데 없이 적의 포위속에서 전멸하고말것이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재차 간부퇀을 내세웠다. 홍군간부퇀은 남쪽으로 정면공격을 개시하고 11퇀은 좌측으로 협공하였다. 홍군의 모든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장병들은 생사를 불구하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치렬한 접전이 계속되고있을때 적의 배후로 우회한 홍군 1군단이 나타났다. 두 주력홍군이 앞뒤로 공격해오자 질겁한 적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적지휘관 왕가렬과 오기위가 선후로 도주하자 국민당군은 그대로 무너져서 서로 다투어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적들은 오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오기위는 급급한 나머지 부하들이 다 강을 건느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끊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수많은 국민당 병사들이 다리와 함께 오강물속에 떨어졌고 강을 건느지 못한 천 8백명 적들은 모두 총을 놓고 투항하였다. 귀주성에서 홍군은 재정비를 거친다음 타곡신장과 로반장 전투를 진행하였다. 두 전투는 걸음걸음 대형을 갖추고 온당하게 공격해오는 적들과 치른 한차례 공방전이였다. 모택동은 이러한 공방전은 희생이 너무 많다고 반대했지만 그의 의견은 납득되지 않았다. 두 전투에서 홍군은 막대한 희생을 냈으며 적들은 계속 공격해와 홍군은 다시 포위에 들 위험이 있었다. 1935년 3월 16일 홍군은 다시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모택동과 주덕은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너 적을 유인하기로 하였다. 양림은 간부퇀과 함께 귀주성 모태에 당도하여 도강 경계임무와 호위임무를 맡았다. 간부퇀의 공병련은 신속히 강에 다리를 만들어놓았고 한개영의 부대를 강건너에 보내 적을 경계하게 하였다. 이어 홍군주력부대와 중앙지도자들이 선후로 강을 건넜다. 모택동은, 공병련의 공로를 치하하고나서 홍군은 운남의 국민당군을 끌어내기만 하면 승리라고 했다. 류백승과 주덕고 홍군간부퇀의 작전지휘와 공병련의 공로를 극구 치하하였다.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넌 홍군은 더 이동하지 않고 강기슭에 잠복했다. 홍군이 적수하를 다시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적들은 모든 주력부대에게 추격명령을 하달하였고 운남에 있는 부대마저도 북상하여 홍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한동안 잠복했던 홍군은 다시 네번째로 적수하를 건너 귀주성내로 진격하였다. 양림과 간부퇀은 이때 줄곧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와 함께 행동하였다. 밤 장막이 깃든 귀주성 북부에서 홍군부대는 마주달려오는 적의 추격부대 틈사이로 신속히 빠져나왔다. 적들은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홍군주력부대도 발견하지 못한채 머리를 숙이고 앞으로만 달렸다.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온 홍군은 계속 적을 속이는 작전을 펼쳤다. 홍군 제9군단은 홍군주력으로 위장하고 계속 북상하는 듯이 보였고 홍군주력은 신속히 남하하여 곧바로 귀주성 소재지인 귀양으로 전진했다. 귀주성내 국민당군 주력은 이때 모두 홍군을 추격하여 북상했기때문에 홍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다. 홍군의 진정한 의도는 신속히 남하하여 오강을 건너 운남성 경내로 들어가는것이였다. 홍군 주력부대는 오강을 강행도하하고나서 일부 부대를 귀양부근으로 파견했다. 홍군 1군단 4퇀은 귀양성을 공략할 태세로 돌진하였다. 귀양에서 작전지도를 보고있던 장개석은 등골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지휘할수있는 부대는 대부분 귀주성 북부에 있어 귀양까지 오려면 며칠 시간이 걸려야했다. 하지만 홍군은 눈앞에 닥쳐왔고 귀양에는 4백명 경찰까지 합쳐도 천명되지 않는 병력뿐이였다. 급해난 장개석은 가장 가까운 운남성에 급전을 보내 급히 주력부대를 귀양으로 진출시킬것을 명령했다. 드디어 홍군의 소원대로 운남성의 국민당 주력부대가 귀주경내로 들어갔다.   폭우속에서 승리적으로 오강을 건넌 홍군주력부대는 신속히 운남성 경내로 진격하였다. 적의 겹겹한 포위속에서 위기를 맞았던 홍군은 모택동의 교묘한 전략적인 전술과 희생적인 전투정신으로 드디어 적의 포위를 뚫고나왔던것이다. 적수를 네번 건느고 오강을 슬기롭게 탈취한 홍군주력부대는 이제 수십만 적의 대군을 뒤에 두고 무인지경인 운남성으로 들어갔다. 양림과 간부퇀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를 따라 기름진 운남성 중부지역으로 진격하였다.  
5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댓글:  조회:2747  추천:61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1935년 1월 28일 귀주성 서북지역의 작은 진인 토성부근에서 치렬한 접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적아쌍방은 한 진지를 놓고 거듭 빼앗고 빼앗기면서 싸웠다. 나무들이 불타고 전쟁터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피말리는 전투는 세시간 남짓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다. 일반전사들이 쓰러졌을뿐만 아니라 앞장서 달리던 지휘원들도 수없이 쓰러졌다. 팽팽한 전투상황은 타개되지 않았고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있었다.     수천리길을 걸어 귀주성에 도착한 홍군은 귀주와 사천 린접부근인 이 토성에서 또다시 피어린 전투를 겪어야했던 것이다. 홍군 3군단과 5군단이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 힘겹게 적들을 막고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지원군까지 합세하여 더욱 기승스럽게 공격해왔지만 적수하 기슭을 따라 북상하고있는 홍군 1군단은 3시간 후에야 도착할수있다.      적들은 이미 토성에 위치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지휘부앞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조속히 위기의 국면을 돌려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토성진지가 무너지면 홍군은 적수하를 등에 두고 싸우는 절경에 빠지게 된다. 홍군의 주덕총사령도 더 참을수 없었다. 그는 총을 잡고 직접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모택동은 중앙홍군 간부퇀을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간부퇀 집합!”     “나가서 적들의 기세를 제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천여명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용맹한 장병들은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또 지혜롭게 적의 허점을 잘 노려 치명타를 안겼다. 이 무적의 강철대오에는 조선인 혁명가 양림도 있었다. 그는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전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공격도중 적의 지휘부를 발견한 양림은 특과영의 박격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4영 위국청 영장과 함께 전사들을 지휘해 몇발 안되는 박격포로 준확하게 적 지휘부를 까부셨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싸울 신심을 잃은 적들은 드디어 뿔뿔이 철수했다.       홍군부대에서의 양림은 명망이 높은 고위 지휘원이였다. 그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을 제외하고는 홍군시기 유일하게 군구사령원 직무를 맡았던 외국적 고위장령이였다. 양림이 이처럼 중임을 뛰여나게 잘 완수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산계급 신형인민군대의 고위지휘원으로 된것은 그의 풍부한 경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그는 선후로 6차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문무가 겸비하고 군사와 행정이 모두 뛰여난 군정간부로 성장했다.  양림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자는 지원(志远)이였으며 사업의 수요로 양주평(杨州平), 양녕, 삐스티,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에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이는 그가 다닌 첫 군사학교였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교관사업을 하였다. 그러므로 서대파조선인반일군사학교는 그가 다닌 두번째 군사학교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유격대들은 서로 단합하여 일제와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洪范图), 김좌진(金佐镇)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다. 양림은 한개 중대를 거느리고 대부대와 함께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반일유격대는 적들에게 일치하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는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凤梧洞)전투가 있은후 양림은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지식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싶어 중국 관내로 향했다.   1921년 4월 상해에서 한동안 머문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1,000리 길을 걸어 곤명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곤명에서 양주평이라는 이름으로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세번째로 군사학교에 들어온 양림은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기능을 련마하였다. 그는 매일아침 등에 벽돌을 지고 10리길을 달리며 몸을 단련하였으며 훌륭한 서적을 접촉하면서 혁명진리를 적극 탐구하였다. 1924년 양림은 학과와 기술과 모두 전교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였다. 그의 뛰여난 재능을 언녕 눈여겨본 학교 교무장은 학교에 남아 사업할것을 요구했지만 혁명에 뜻을 둔 양림은 학교측의 요구도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서 양림은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중국공산당과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였다. 1925년 양림은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황포군교에 들어가게 되였고 주은래의 천거로 교학부 학생총대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였으며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1925년에 양림은 학생대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동정에 참가하였다. 그의 기동령활하고 과단하며 적의 허점을 찌르는 전술은 교관들과 학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해 6월에 승리적으로 광주에 돌아온 양림은 다시 양희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제2차동정에 참가하였다. 포술전문가인 양림은 쏘련 고문 갈렌(加仑)과 함께 적사령부를 포격하기로 하였다. 세심한 관찰을 거친후 양림이 직접 대포를 조준하여 곡선포격을 가했다. 포탄은 민가들을 지나 곧추 적사령부를 강타하였다. 적의 지휘체계가 파괴되자 혁명군은 신속히 돌진하여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제2차동정의 승리를 거두었다. 두차례 동정을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직하였다. 그는 교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계속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5년 6월에 양림은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 때 양림은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파견되였다. 이 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국공량당의 군사인재 양성요람인 황포군관학교에서는 이시기 좌우대립이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직에서는 다시 양림을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배치하였다. 교내 혁명자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여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다.     3년후 귀국한 양림은 상해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선후로 만주성 당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의 인민대중들을 동원하여 세개의 로농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 만 5천여명 군중들을 조직해 반일대회를 열고 반동지주들을 진압했으며 몰수한 량식과 재물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9.18사변이 있은후 양림은 다시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로 반석로농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부대는 만주로농의용군 제4군 제1종대로 개편되였고 산하에 3개 소대를 두었다. 후에 이 부대는 남만유격대,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성장하였다.     1932년에 동북 3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전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 국민당은 중앙쏘베트지역 홍군에 대한 토벌에만 전력하였다. 당시 크게 확대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많은 인재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상해 군사회의에 참가하던 참에 강서성의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조동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그의 재능은 더욱 크게 발휘되였다. 그는 선후로 로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 중화쏘베트중앙정부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 강서군구 산하 회창-순우-안원군분구 사령원, 홍군 23군 군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담임하였다. 로농홍군 총정치부 위원 겸 로동및전쟁위원회에서 사업할때 그는 주임인 주은래의 지도하에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제반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주은래를 도와 10개 보충퇀을 새로 편성했으며 직접 새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훈련받은 전사들은 홍군 주력부대로 수송되여 전선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또 쏘베트정부를 도와 군중들과 함께 다리와 도로를 수리하고 량식과 군수품을 전선에 보냈다. 뿐만 아니라 60여만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냈다.     1933년 4월 강서군구 제3군분구와 제5군분구를 합병하여 월감군구로 만들었다. 양림은 월감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산하의 제23군과 독립2사, 독립3사 그리고 많은 독립퇀을 거느렸다. 하지만 두달후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진행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이 편성되였다. 주덕이 총사령을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위원으로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홍군주력인 림표의 제1군단, 팽덕회의 제3군단, 제5군단이 포함되였다. 양림은 이때 일년간 홍군제1군단 참모장으로 사업하였다. 홍군 제1군단 군단장은 림표였고 정치위원은 섭영진이였으며 라영환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양림이 참모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이시기 양림은 후에 공화국 원수로 되였던 림표, 섭영진, 라영환 등과 함께 모두 군단급 간부로 있었다.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 제5차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뛰여난 지휘재능과 세밀한 사업작풍, 과감한 결단력은 주덕총사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고 근거지 군민들의 애대를 받았다.     이해 중앙쏘베트지역에서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양림은 외국인 대표로 대회에 출석하였고 당중앙의 지명에 따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50여명 위원들 가운데서 오직 양림과 윁남인 홍수만이 외국적 위원이였다.     대회이후 양림은 수요에 따라 제1군단 참모장을 후임인 좌권에게 넘겨주고 홍군대학 총교관으로 사업하였다. 홍군대학은 수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으며 많은 사람들은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공화국 장군으로 되였다.       1934년 10월 1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주력홍군의 대이동을 결정하였다. 중앙홍군총사령부와 산하 직속부대로 군사위원회 제1종대를 조직하였다. 염검영이 이 부대의 사령원을 맡았고 박고, 리덕, 주은래, 모택동, 장문천, 주덕, 왕가상을 비롯한 이들이 모두 이 부대에 편입되였다. 군사위원회 1종대는 4개 지대로 나뉘였다. 제1지대는 팽설풍이 책임지고 제2지대는 라빈이 책임졌으며 제3지대는 조선인 혁명가 무정이 책임졌다. 그리고 제4지대는 진갱이 책임졌다. 제4지대 정위는 송임궁이였고 참모장에 조선혁명가 양림이였다.     장정에 나선 홍군은 8만 6천여명이였다. 여기에 민부들까지 합치면 거의 10만에 달하는 인파가 서서히 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험난한 장정길에 나섰던것이다.     토지를 분여받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살아가던 근거지의 인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홍군을 떠나보냈다.  
4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댓글:  조회:3255  추천:76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1935년 6월 12일 아침, 청장고원 변두리에 위치한 사천성 서부의 대설산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산의 이름은 협금산이고 산을 넘는 사람들은 홍군이였다. 홍군들은 몸에 열을 돋구기 위해 저마다 고추물을 마시고 떠났다.     가파른 눈길을 따라 홑옷을 입은 전사들은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미끌고 눈보라가 세찼기에 수시로 보이지 않는 낭떨어지속으로 미끄러내려갈수도 있었고 눈사태에 파묻힐 위험도 있었다. 공기마저 희박하여 숨이 가빴고 또 머리마저 어지러웠다. 아무리 춥고 지치고 머리가 아파도 걸음을 멈출수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여길을 치렬한 전투를 겪으면서 달려온 홍군들에게 있어서 협금산 대설산을 넘는다는것은 그 어느 전투보다도 참혹했고 험난하였다.      반나절을 거쳐 선두부대가 설산을 넘어 협금산 북쪽기슭 달위진의 한 장족마을에 이르렀다. 중앙홍군을 마중나온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 이곳에 기다리고있었다. 제4방면군 30군 정위 리선념과 제9군 군장 하위가 부분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달위진까지 진출해 협금산을 넘어올 중앙홍군을 기다렸다. 이 부대의 선두를 맡은 25사 사장 한동산이 목성구라는 장목마을에서 중앙홍군의 선두부대를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갖은 고생을 다 겪어온 홍군전사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온 느낌으로 기쁨의 눈을 머금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 전사들은 서로 알건 모르건 부둥켜 안고 감격을 금하지 못했다. 이어 중앙홍군 주력부대도 륙속 도달했고 중앙지도자들도 도착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은 성대한 경축모임을 가지고 두 홍군주력부대의 회합을 축하했다.       어느날 한 홍군 녀전사가 홍군 30군 정위 리선념을 찾아왔다. 이 홍군녀전사가 바로 양상곤의 부인인 리백소였다. 당시 그는 중국로농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로 있었다. 리선념 정위를 만난 리백소는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저는 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인데 리백소라고 합니다. 총정치부 선전부장인 륙정일동지는 홍군의 두 주력부대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을 준비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홍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노래 한곡 만들었는데 정위 동지에게 회보드리려 왔습니다.”      리백소는 노래가사를 리선념에게 전하고 그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두 주력홍군 공래산에서 승리적으로 회합했네/ 백전백승의 4방면군 영웅적 형제들을 환영하네…” 노래를 듣던 리선념 정위는 손벽을 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누가 지은 노래이기에 이처럼 듣기 좋은가?”고 다잡아 물었다. 리백소는 “이곡은 홍군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란 조선동지가 창작한것이고 가사는 륙정일 부장과 제가 함께 썼어요.”라고 대답했다. 조선혁명가 최음파가 작곡한 노래 “두 주력홍군 회합가”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고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에서 천백명 홍군전사들에 의해 불리워졌다.   홍군의 음악가 최음파, 그가 창작한 많은 노래들은 일찍 강서성 서금에서부터 홍군부대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인 최음파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다만 서금의 자료실과 로홍군들의 추억의 글에서 부분적으로 그의 사적이 전해져 내려올뿐이다. 강서성 서금의 중앙혁명근거지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남아있다. “쏘베트구역 음악가들이 자체로 창작한 혁명가곡에는 <군대가 되려면 홍군이 되자>, <랑군님을 홍군에 보내네>, <홍군학교 졸업가>,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앙쏘베트구역의 저명한 가곡가 조선인 최음파가 지은 노래 <사표곡>은 격정적이고 경쾌하며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조선음악가라면 곧 항일전쟁시기 연안의 정률성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률성보다도 10여년 앞썬 1930년대초의 홍군시기에도 우리민족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       최음파는 홍군시기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했던 아주 유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했고 창작을 잘했으며 여러가지 공연도 곧잘 하였다. 당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현대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 민가나 전통예술가들이였고 현대가곡 창작에 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쏘베트지역 군민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대부분 쏘련 노래곡에다 가사를 다시 창작하여 만든 노래거나 전통민요에 현대적인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므로 현대악기인 바이올린에 능하고 현대음악지식을 장악한 최음파의 음악적 재능은 이곳에서 충분히 발휘되였다.     당조직의 소개로 20세 젊은 나이에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에 온 최음파는 홍군전사로, 혁명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자기의 음악적 창작으로 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표달하였다.     1931년 11월 강서성 서금에서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의 개최를 경축하기 위해 최음파는 전우들이 창작한 가사에 곡을 지었다. “전국쏘베트대표대회를 옹호한다”라는 이 노래는 근거지 군민들의 격동된 심정을 담아 군민들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노래는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막식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졌다. 당시 로홍군 오수권도 합창단의 일원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수십년후 그는, 격정에 넘쳐 불렀던 그때 그 노래는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고 이야기했다.     1931년 12월 4일, 국민당 제26로군이 강서성 녕도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홍군으로 넘어왔다. 봉기한 만 7천여명 병사들은 석성과 서금 임전부근에서 재정비를 하고있었다. 봉기부대 병사들은 대부분 북방사람들이였기때문에 남방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있었다. 앓는 사람이 많았고 또 많이 지쳐있었으며 정서도 좋지 못했다. 이를 감안한 림시중앙정부 모택동주석은 공연대를 파견해 이들에게 선전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꼇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의 지시대로 쏘베트지역에 있던 예술인재들이 한팀을 무어 부대위문을 가게 되였다. 17명으로 구성된 위문공연팀에는 리백소, 호저, 전장비, 최음파 등 우수한 선전일군들이 포함되였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비롯한 극을 선보였다. 리백소가 가난한 농민역을 맡고 호저가 국민당 병사역을 맡았으며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전장비가 장개석역을 맡았다.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였다. 공연을 본 수천명 장병들은 장개석을 타도하자, 홍군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출연자들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최음파는 이 공연의 시나리오 편성과 음악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쏘베트지역의 예술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쏘베트근거지의 첫 극단인 8.1극단이 서금의 로농홍군학교에서 나타났고 또 많은 소규모 연극팀이 무어졌다. 이에 비추어 1932년 9월 2일에 중앙에서는 서금에다 로농극사 본사를 설치하였다. 로농극사는 로동자, 농민, 홍군, 쏘베트 직원들이 혁명극을 연구하는 조직이였다. 로농극사의 제일임 사장은 장흠이였고 주요사원들로는 사가부, 리백소, 전장비, 호저, 번한년, 리극농, 채건, 최음파 등이였다. 극사창설초기 최음파는 전우가 작사한 <로농극사 사가>에 곡을 붙여 이 노래로하여금 극사 사원들을 고무하는 전투적 노래로 불리워지게 했을뿐만 아니라 근거지 군민들이 모두가 애창해 부르는 노래로 되게 하였다.     극사는 중앙에 본사를 두고 성과 현에 분사를 설치했으며 또 공장이나 공회, 합작사, 학교 그리고 쏘베트정부기관, 군중단체에 지사를 두었다. 그러나 극작가나 공연배우를 할 사람은 많았지만 음악을 할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최음파는 무척 다망하게 보냈다. 공연이 있는곳마다 찾아가 음악을 편성해주어야했고 또 직접 연주를 맡아야했다.      이시기 최음파와 기타 홍군예술인들의 활약에 대해 로홍군전사들이 여러편의 회억의 글을 남겼다.     로홍군전사이며 양상곤주석의 부인인 리백소는 “로농극사에는 사가가 있었는데 가사는 집체로 창작하였고 조선인 작곡가 최음파가 곡을 달았다”고 회억하였다.     로농극사 사장이였던 로홍군 조품산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홍군대학 개학식이 있던 날, 극사의 사람들은 내용이 풍부한 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공연프로를 보면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으며 또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동지들도 공연을 구경하고 야회에 참석하였는데 온 저녁 박수소리가 끊지 않았습니다.”      중앙쏘베트지역에 홍군대학이 있게 되자 최음파는 홍군대학 구락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였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오수권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중앙에서는 홍군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교장은 엽검영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하장공과 등평 두 군장과 기타 몇분의 사장을 학교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홍군학교의 문화사업은 아주 활약적이였습니다. 활동의 중심은 홍군학교의 구락부였는데 상해나 쏘련으로부터 귀국한 문화인재들이 많았습니다. 례하면 위공지나 석련성이 있었고 작곡을 아는 조선동지 최음파 등이 있었습니다. 문예공연은 거의 한달에 두번정도 진행되였습니다.”      로농극사의 사장이였던 조품산은 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홍군학교의 확극사업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화극사업에 필요한 일군들도 확대되였습니다. 당시 주요일군들 가운데는 최음파도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동지였고 또 우리의 훌륭한 바이올린 전문가였습니다.”      최음파는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공연할때 자주 바이올린 독주를 하였다. 그는 늘 조선가곡을 연주하였다고한다. 그의 전우였던 리백소는 만년에도 최음파가 연주하였던 조선가곡의 선률들을 얼마간 기억하고있었다한다.      로농극사는 1934년 1월에 중앙쏘베트극단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 로농극사의 사원들은 모두가 뛰여난 혁명자이면서 예술가였다. 이들은 예술을 무기로 쏘베트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군민의 문화생활을 풍부히했고 혁명투쟁을 추진했으며 당의 선전사업을 훌륭히 완수해냈다.     그후 홍군이 장정을 시작할때 대부분 사원들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 근거지에 남게 되였다. 이들은 구추백의 지도하에 화성, 붉은기, 전호라는 3개 극단으로 나뉘여 각지 유격구로 떠났다. 최음파는 극사의 주요핵심인 리백소, 호저, 전장비 등과 함께 중앙과 주력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나섰다.        장정길에서 최음파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갖은 시련을 다 겪어야했다. 피어린 상강전투을 겪었고 수천리 강행군을 해야했으며 적수하를 네번 건느고 금사강, 대도하를 뛰여넘고 설산을 넘어야했다. 장정에서 그는 훌륭한 전투원으로, 훌륭한 정치사업간부로, 뛰여난 선전일군으로 활약했다. 전투가 끝나면 그는 별로 쉴사이도 없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혁명가곡을 배워주기도 했다. 어려운 행군길에서 그는 때로눈 부대의 앞에서 달리기도하고 때로운 뒤에 따르는 전사들을 격려하기도하면서 선동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은 걸음을 걸었던것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중앙홍군을 따라 처음부터 장정에 참가하여 섬북까지 살아 남은 외국인은 4명으로 알려져있다. 이들로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 윁남인 홍수 그리고 조선인 삐스티와 무정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홍군시기의 조선인 혁명음악가 최음파는 장정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수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대회합을 노래하였던 우리의 음악가 최음파는 그후의 행적과 희생경과를 남기지 못했다.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진 초지를 지나다 희생되였는지? 어느 치렬한 전투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는지? 아니면 대서북 어느 평범한 마을에서 병으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고있다. 더욱 유감스러운것은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여났고 어떤 경력을 가진 인물인지도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중앙쏘베트지역에 남겨진 그의 불타는 혁명노래와 장정길에 남긴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중화대지에 계속 울려퍼질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원한 음악과 함께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3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댓글:  조회:3056  추천:65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강남의 명산 무이산(武夷山) 서쪽기슭의 풍요한 평지에 위치한 서금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였고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서금은 강서성 동남부의 주요도시로서 강서, 복건, 광동 세개 성을 이어주고있다. 고대에는 서금을 양주역(杨州域)이라고 불렀으며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을 통일한후 구강군(九江郡)에 귀속시켰다. 그후 953년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서금은 1994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20세기 30년대가 시작될때 전반 세계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있었고 중국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있었다. 미국의 실업인구는 천 5백만명에 달했고 쏘련에서는 집단농장을 하고있었으며 나치스 돌격대는 대규모의 검열을 진행하였다. 한편 이딸리아의 무쏠리니도 오지리국경에 18만 병력을 포진하여 팽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있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는 중국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중국은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군벌할거로 도탄속에 빠져있었다. 장강류역의 홍수로 하여 20만명이 숨지고 수원, 산서, 섬서의 지진으로 7만명이 숨졌으며 빈곤선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5천 7백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전란까지 끊기지 않았다. 장개석을 반대하는 풍옥상, 염석산, 리종인의 싸움은 중국 10여개성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농민들은 막중한 군비부담으로 사경을 헤매야했다. 수천만 인구가 전란을 피해 류리걸식하게 되였고 50만 도시 실업인구가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동남부의 한구석에 위치한 서금지역만은 이시기 즐거운 노래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금낟가리에서 풍년의 기쁨을 노래했고 씩씩한 전사들은 우렁찬 구호소리를 높이 웨치며 대렬을 지어 다녔다. 적위대는 농가를 도와 가을에 바삐 돌았고 녀성들은 저녁밥을 지어 밭에 가져갔고 황금낟알을 가득 지고 귀가하였다. 사람들은 중화쏘베트중앙정부를 옹호하고 홍군을 노래하였다. 이곳에는 맑스레닌주의를 신앙하는 수많은 문인, 철학가, 교육자, 직업혁명가, 학생, 상인들이 모여왔다. 당시 서금은 쏘베트지역의 수도였다. 40여만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천여만 인구를 가진 중화쏘베트공화국정부가 서금에 있었던것이다. 중화쏘베트공화국에서는 철저한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빈곤한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홍군 장병들도 토지를 분여받게 되였다. 그들은 토지를 현지 농민들에게 경작을 맡겼다. 대다수 빈곤농민들과 홍군 장병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토지를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였다. 사람들은 무한한 열정을 안고 빈곤농민과 무산자들의 정부인 중화쏘베트정부를 옹호하였다.  쏘베트란 로씨야어의 대표회의이라는 말을 음역한것이다. 지금도 중화쏘베트제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가 강서성 서금시 성북쪽 엽평촌에 자리하고있다. 서금시에서 323번 국도와 206번 국도가 접하는 곳으로 빠져 나가 약 3킬로메터쯤 가면 일찍 홍군시기 쏘베트정부 설립지였던 엽평(叶坪)에 도착하게 된다. 마을에 도착하면 잘 보수된 중화쏘베트 제1차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쉽게 찾을수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풍적인 3진원 구조의 건물이 있다. 당지 대지주네 사당으로 사용되였던 이 건물은 사씨사당(谢氏祠堂)이라고 한다. 사당은 2층으로 되여있는데 건물은 중심부분의 빈 공간을 둘러싸고 축조되여있었다. 1931년 11월 7일, 쏘련의 10월혁명기념일을 맞으면서 이곳에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쏘베트 림시중앙정부를 내오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선거하였다. 대회장으로 사용되였던 강당 정면 벽에는 붉은기와 모택동, 주덕의 초상이 걸려있다. 강당에는 수십명이 앉을수 있는 나무걸상이 있었는데 서서 방청하는 사람까지 합쳐 수백명가량 용납할수 있다. 강당 량켠에는 널판자로 막은 작은 칸들이 있고 칸마다 천으로 문발을 쳐놓았다. 침대 하나와 책상, 걸상을 하나씩 놓을수 있을 정도인 이러한 방들이 바로 쏘베트림시중앙정부의 각 부서 집무실이다. 외교인민위원회, 군사인민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로동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 부서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던것이다.   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쏘베트지역 군민들과 함께 사람마다 평등하고 함께 일하며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쏘베트생활을 마음껏 느끼고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조선인대표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에 참가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고 또 대회에서 발언까지 하게 되였다. 최정무의 부모는 일찍부터 로씨야 우쑤리스크에 이주하였고 최정무도 1910년 그곳에서 태여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후 자유를 얻고 해방을 받은 최정무일가는 토지까지 분여받았다. 최정무는 우쑤리스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놈들에게 짓밟히는 조선과 일제 수탈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었다. 1926년 16살인 최정무는 혁명의 열기를 안고 중국 상해로 왔다. 로씨야에서 이미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한 그는 쉽게 중국내의 지하당조직과 련락을 취할수있었다. 상해에서 한동안 체류하던 그는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아직 그의 이름을 찾아볼수없다. 그가 황포군관학교 몇기에 입학하였고 또 언제 졸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이 시기 1927년에 황포군관학교 기술주임으로 있던 조선인 교관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적으로 보아 최정무는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을 못하고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를 맞게 되였던것으로 보여진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반동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이때 최정무는 학교병원에 몸을 숨겨 다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 그후 그는 광주봉기에 참가했고 봉기가 실패한후 도보로 상해 당조직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인 서금에 와서 홍군 군사기계수리소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홍군 후방정치부 주임이였던 모택담(毛泽覃)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으며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이 산간오지에 찾아온 조선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것이다. 모택담은 집에서 물만두를 빚는다거나 색다른 음식이 있을때면 늘 최정무를 청해다 대접하군 했다. 그는 모택동의 셋째동생이였다.  1931년 11월 7일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소집되자 최정무는 600여명 대표의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가했고 또 발언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였다. 나어린 최정무는 몹시 격동되였고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하였던 말을 죄다 잊어버리고 대회축사를 하였던지 자기의 결심을 발표했던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말을 하였다. 최정무가 연설대에서 내려오자 주석대에 앉았던 모택동주석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모택동은 당시 중화쏘베트공화국 주석이였다. 그는 최정무의 손을 잡고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자상히 물어보았다 한다. 모택동과 주덕은 모두 발언을 잘했다고 그를 치하하였고 모택동은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추천해주기까지 하였다. 그후 최정무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학교 사무장으로 있다가 로농홍군 제1군단 산하 제22군의 부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3년 장개석 국민당은 40만 대군을 집중해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강서성 동남부의 모든 홍군부대는 집중적으로 적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치렬한 격전을 치르게 되였다. 홍군 제22군의 련 지도원으로 있던 최정무도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이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이들은 모험주의적인 전략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유격전에 풍부한 경험을 쌓았던 모택동도 이시기에는 홍군의 지도적 위치에서 물러나있었다. 중앙홍군은 이른바 선제타격의 전략으로 성곽이 견고하고 적의 병력이 방대한 남풍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치렬한 공격전에서 홍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적들은 다른 부대로 남풍성을 공격하는 홍군의 배후를 습격하려 계획하고있었다. 이 위기의 시각 주은래와 주덕은 과감히 공격부대를 철수해냈다. 그들은 주력부대를 려천방향으로 돌리고 잘 은페시켰다. 부분적인 공격부대를 추격해 오던 국민당군은 홍군의 매복에 걸려 황피, 곽원지역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어 홍군은 다시 초대강, 서장지역에 매복했다가 광창으로 공격해오는 적의 한개사를 섬멸했다. 집겁한 국민당 기타부대는 급급히 퇴각하였고 중앙홍군은 제4차 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홍군 제4차 반포위토벌전에 참가한 최정무는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오른쪽 발목을 적탄에 맞았다. 부대를 따라 더 싸울수 없게 된 그는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치료를 받아 탄알을 뽑았지만 그는 지팽이를 짚고 다닐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조직에서는 그를 홍군병원에 남아 당총지부서기 겸 지도원으로 사업하게 하였다.   1934년 10월 홍군은 끝내는 국민당군의 제5차 포위토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득이 중앙근거지를 떠나 장정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홍군병원에는 200여명 중상자들이 있었다. 최정무는 100여명 의료일군들과 함께 중상자들을 민가에 숨겨두고 대부대를 따라 감주로 떠났다. 그러나 100여명이 한데 몰려 움직일수 없었기때문에 그들은 다시 소분대로 나누어 행동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흩어지고말았다. 혈혈단신이 된 최정무는 앞길이 막막했다. 주력부대는 멀리 떠나갔고 적들은 도처에서 홍군을 수색하고있었다. 그는 호북의 농민으로 가장하고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을 찾아가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혼자서 멀고먼 장정을 시작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또 수시로 국민당군과 지주무장대를 피하면서 가야했다. 갖은 고생을 거쳐 그는 1936년에 드디어 도보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는 려운형과 기타 조선혁명가들을 찾지 못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후 최정무는 무한, 개봉 등지를 다니며 공산당부대를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홍군은 장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연 홍군을 찾아 섬북으로 떠났다. 하지만 가던 길에 그는 국민당군의 강제징병에 끌려가게 되였다. 국민당부대에서 그는 국민당 통신부대 두목을 설득하여 20여명 통신병을 이끌고 태항산의 팔로군을 찾아갔다. 팔로군을 찾은 최정무는 무정이 거느린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2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댓글:  조회:3283  추천:81  2007-05-27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1934년 11월말 장정길에 나선 중앙홍군은 가장 처절했던 상강전역을 치르게 되였다. 상강과 소수 두갈래 강을 사이두고 홍군의 북상길을 차단하기 위해 국민당 군대는 남북으로 협공해왔다. 홍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남북을 차단하고 우세한 적들과 치렬한 접전을 거듭하고있을때 홍군주력은 상강을 건너야했다. 하지만 번중한 물건들을 지고 로약자들을 부축하며 움직이는 홍군주력의 행군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저격을 맡은 홍군부대는 수많은 희생을 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홍군은 적의 포위를 뚫고 상강을 건넜지만 막대한 희생을 냈다. 장정출발시 8만 6천여명이던 홍군부대는 3만여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민간에 흩어졌던 것이다.    홍군부대가 귀주성에까지 이동하였을 때 앞에는 설산이 가로막혔다. 부대의 령활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무기는 버려야 하였다. 따라서 포병부대도 다른 부대에 편입되여야 했다.  중앙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던 조선혁명가 무정은 자기의 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가 지휘하던 포병부대도 대포를 버리고 새로운 전투부대에 편입되였다. 무정은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더욱 막강한 포병부대를 건립할 결의를 다지면서 포병부대를 떠나 지휘부에서 일을 보게 되였다. 대도하(大渡河)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사천성의 파서(巴西)에 도착한 중앙홍군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였다. 홍군은 사천성에서 미리 이곳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있던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제4방면군의 당, 정, 군 책임은 모두가 장국도가 맡고있었다. 그는 10만을 헤아리던 강대한 중앙홍군이 수만명밖에 남지 않은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홍군 제4방면군은 수적으로 중앙홍군보다 퍽 더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부대의 우세로 자기의 립지를 높이고 중앙의 지도권을 차지할 생각을 하게 되였다. 당시 당중앙과 모택동은 계속 북상하여 섬감녕근거지를 창설할 전략적 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장국도는 이를 극구 반대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격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강(川康)변경으로 퇴각하려 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홍군4방면군을 이끌고 남하길에 올랐을뿐만 아니라 홍군의 무전암호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그것은 각 군과 당중앙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사실 전반 홍군에 대한 통제가 장국도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당중앙과 모택동은 부대를 지휘할수없는 고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공화국 원수 팽덕회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이번 북진에서 3군단은 우익종대의 가장 뒤에 섰고 홍군 제4방면군의 4군, 30군,  9군과 전적총지휘부가 가운데 섰다. 그때 나는 장국도가 야심이 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아직 이를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다. 모택동과 당의 총적 책임자였던 장문천은 전적지휘부 한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3군단은 아서, 파서지구와 하루, 이틀 거리를 두고있었고 전적지휘부와는 15리쯤 떨어져있었다. 나는 숙영지에 이르러 곧바로 전적지휘부와 모택동이 머문 곳으로 갔다. 사실 나는 모택동을 만나기 위하여 전적지휘부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때 주은래와 왕가상은 병으로 제3군단에 있었다. 파서에 며칠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전적지휘부로 갔으며 비밀리에 제11퇀을 모택동의 거처에 은밀히 음페시켜 만일의 사태를 막으려했다. 얼마후 전적참모장 엽검영에게서 홍군 제1군단이 아계(俄界)지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계의 제1군단과 련계를 확보하고 북진하여 홍군 제1군단과 합치려해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선 길잡이를 찾을수 없었고 길을 물을 곳도 없었으며 더구나 지도도 없었다. 망망한 초원에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아계인지 분간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아계의 제3군단의 주요간부인 양상곤이 이미 다른 부문에 조동됐고 나의 곁에는 3군단 정위를 맡은 리부춘만이 있었다. 나는 조선동지인 무정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에게 지북침을 주면서 꼭 제1군단의 종적을 따라 무전암호를 제1군단에 전해줄것을 요구했다.”   장국도의 시도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군단과 무전련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새로 만든 무전암호를 홍군 제1군단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팽덕회장군은 자기의 가장 믿음직한 전우인 무정을 제1군단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길도 없고 지도도 없었다. 무정은 지남침으로 방향을 확정한 다음 드넓은 초지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언제 어느 은페된 소택속에 깊숙히 빠져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수도 있었고 뜻하지 않게 적의 기병이나 순라대를 만날 위험도 있었다. 무정은 조금도 지체없이 내처 달리기만 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앞에는 불타다 남은 나무쪼각들이 무져져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기에서 휴식하다 떠난것이 분명하였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떠난지 별로 오래된것 같지 않았다. 분명 제1군단의 전사들이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신심가득히 걸음을 재우쳐서 끝내는 제1군단을 찾아냈다. 그는 숨 돌릴사이도 없이 곧추 지휘부로 달려가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모택동은 위험을 무릅쓰고 팽덕회의 제3군단 지휘부에 찾아와 새로운 무전암호로 전보를 보냈다. 《림표, 섭영진 앞: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원지에서 대기할 것.》 제1군단 비휘부에서 새로운 암호의 전문이 번역되여 나오는것을 보자 무정은 그제서야 시름을 놓았다. 드디어 중앙홍군의 2개 주력부대인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련락이 되였고 두 군단은 모택동의 지휘밑에 당중앙에서 확정한 북상항일의 길을 떠나게 되였던것이다. 무정도 이 부대를 따라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1936년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그해 6월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 제1기 고급간부과에서 학습하였다. 고급간부과는 주로 홍군 사급이상의 간부를 양성하는 곳으로서 학원이 도합 36명이였다. 고급간부과의 학원들은 모두가 8년 이상의 투쟁경력이 있어야 하며 전투중에서 3번 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라야 했다. 학원중에는 림표(林彪), 라영환(罗荣桓), 라서경(罗瑞卿), 막문화(莫文骅), 진광(陈光) 등 홍군고급간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령도이면서 학원이었다.    12월, 홍군대학을 졸업한 무정은 계속하여 홍군총부의 작전과장직을 담임하고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강대한 홍군포병부대를 이끌어낼 결의를 다지면서 그는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시기로 들어서게 되였다. 홍군도 팔로군으로 개편됐다. 1937년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조선혁명가 무정을 팔로군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하고 포병부대 건설사업을 맡게 하였다.     해방후 전국정협주석이였던 원광은 당시 포병퇀 제1임 정치부주임이였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림분에 도착한후 우리는 지대의 700여명 전사들을 4개 련으로 재편하였다. 또 그곳에 있던 두 개 련을 합하니 천여명에 가까웠다. 퇀장은 팔로군총부 작전과 과장인 무정동지가 담임하였는데 그는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했으며 홍군대학의 특과영 영장을 지냈고 또 홍군의 포병사업을 지도하였다.     1938년 1월 28일, 림분(临汾)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건대회가 성황리에 열리였다.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포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에 조선혁명가 무정, 정치위원에 구창성, 정치부 부임에 원광이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이 팔로군 포병퇀 창건대회에서 축사를 하였으며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하여 축하를 드렸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에 포병부대가 있게 되였다.     피어린 장정길에서 할수없이 대포를 버리고 포병부대를 해산해야만 했던 무정에게 있어서 이는 더없이 격동된 순간이였다. 포병퇀이 건립된 후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그가 직접 교관을 담당하고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원광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림분에 있을때 우리에게는 대포 몇문밖에 없었다. 전퇀의 천여명이 모두 모여도 포병기술을 아는 사람이 몇이 없었다. 기술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집중강습을 시키고 다시 분산하여 전퇀전사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을 취했다. 그리하여 먼저 련장, 배장급 간부들을 집중해 기술강습을 시켰다. 퇀장인 무정동지와 9련 련장인 조장성동지를 비롯한 이들이 직접 지도원을 맡고 사격원리와 조작기술을 가르쳣다. 또 주은래동지가 후방으로부터 포술전문가들을 보내 우리에게 강의해 주었다. ”      이처럼 일찍 무정이 직접 양성해낸 많은 포병간부들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의 고급지휘원으로 성장됐다.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항일전쟁의 제일선에서 백퇀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일본침략자들을 힘있게 타격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장정길에서 다진 결의를 드디어 실현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 2만 5천리 위대한 장정에 참가하여 굴할줄 모르는 투쟁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했으며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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