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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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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제71회 좌권현을 떠나 석루현으로 댓글:  조회:4986  추천:0  2014-05-23
항일전쟁시기 자랑찬 우리 조선혁명가들이 조선청년련합회를 창립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던 오늘의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아직도 옛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태항산기슭의 홍복사 옛터와 작은 언덕에 이름없는 조선의용군 무명렬사의 묘소....마을은 그지없이 적막하기만 하였다.   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옛집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예나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골목길 너른 마당에 모여 삼삼오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조선혁명가와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바로 이 마을 선량한 사람들과 군민의 정을 나누면서 고락을 함께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상무촌의 홍복사 옛터와 조선의용대 무명렬사 묘지를 답사하고 다시 마을을 빠져 나오다가 마을 중심에 《로신예술학교옛터(魯迅藝術學校舊址)》라는 낡고 간판 하나가 흙벽에 붙어있는것을 우연하게 발견하였다.   너무 낡아 글을 알아보기도 힘든 간판이였지만 유명한 로신예술학교가 이곳에 있었다는것을 발견하여 여간 기쁘지 않았다. 팔로군이 세운 로신예술학교는 수많은 예술인재를 양성한 곳으로서 조선혁명가이며 음악가인 정률성이 다녔던 학교이다.   로신예술학교는 1938년에 연안에서 창설되였다. 예술인이며 또한 전사였던 학원들은 수요에 따라 전선에 나가기도 하였는데 많은 학원들이 팔로군이 개척한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오게 되였다. 그들은 상무촌에 주둔하면서 소규모의 로신예술학교, 위생학교를 만들어 계속 학습하고 싸웠던것이다. 연안에 있는 로신예술학교에서 공부하던 정률성도 수요에 따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와서 한동안 활동한적이 있다. 그러니 아마 정률성도 상무촌의 로신예술학교에서 활동했을것으로 생각되였다.   간판이 붙은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을 가진 비교적 괜찮은 벽돌, 기와 건물이 나타났다. 지금은 민가로 사용되고있는듯 정원에는 만발한 화초와 커다란 옥수수 타래가 걸려있었다.   호기심 많은 동욕진 어린이들이 촬영장면을 지켜보고있다   동욕진의 로신예술학원 옛터(일부 학원들이 단련을 목적으로 이곳 태항산 근거지에 와서 한동안 활동하였음)   마을어구에서 한담하는 마을 녀성들   좌권현 동욕진 진정부대문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와 다른 답사지인 마전으로 떠났다.   좌권현 마전진은 현소재지에서 45킬로메터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차는 계속 남으로 달려 태항산 대협곡을 빠져나왔다. 앞에는 넓은 평지가 나타났고 멀리 민가들이 보였다. 마전에 도착한것이다.   태항산 산줄기가 담처럼 둘러있어 마전의 기온은 다른 곳 보다 조금 높았다. 일조가 좋은데다가 청장하가 수원으로 되여 이곳에서는 논농사까지 하고있었다. 마전은 《태항산의 작은 강남》으로 불리우고 있다. 수려한 마전의 풍경에 도취되여 있는데 차는 벌써 팔로군 총부 기념관 앞에 멈춰섰다. 흰 담으로 둘러싸인 기념관에 들어서니 아늑한 정원이 있었고 량쪽으로 벽돌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총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유적지에는 20여개 방이 있었는데 각기 팔로군총부기념관, 팽덕회장군 및 좌권장군 기념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그리고 총부 각 부서 집무실과 경위실이 있었다. 기념관과 전시실에는 항일전쟁시기의 많은 사진과 유물이 있었다.   팔로군 총부 기념관은 마전진 최남단에 위치했다. 그 옆에는 등소평이 살던 옛집이 있었고 마을 중심에 중국공산당 북방국 옛터가 있었다. 마전진 동북쪽으로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였는데 그곳이 바로 좌권장군이 희생되였다는 십자령이라고 한다.   팔로군 전방 총사령부와 중공중앙 북방국은 5년간 마전에 있었다. 주덕, 팽덕회, 좌권, 류백승, 등소평, 서향전, 섭영진, 진의를 비롯한 수많은 중국 당과 군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고 태항산의 항일투쟁을 령도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작은 연안》이라고도 했다.   저녁녘에 우리는 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차는 다시 207국도를 따라 북상하여 태항산 대협곡을 지나 좌권현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오전 9시에 우리는 좌권현을 출발하여 산서성 소재지 태원으로 떠났다.   소강남으로 불리우는 태항산의 마전진 전경   마전의 팔로군 본부 기념관   기념관 정원   기념관 일각   기념관실내(팽덕회 부사령원의 침실)   작전지도   기념관 외벽     좌권현에서 태원까지는 2시간 남짓이 가야했다. 좌권현 선전부에서 승용차를 내여 우리를 태원까지 보내주었다.   태원은 분하(汾河) 기슭의 분지에 위치하였다. 산서성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 중심인 태원시는 수천년의 력사를 가지고있다. 일찍 춘추시기에는 진양(晉陽)이라고 불렀으며 조나라 도읍지였다.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나서 태원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방송국부터 찾아갔다. 중앙인민방송국 태원기자소의 리세박(李世璞)주임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59세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는 분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방송국 부근에 호텔을 정했다. 식사를 마치니 오후 3시가 되였다. 아무것도 할수 없는 반중건중한 시간이였다.   리세박주임은 오후에 회의가 있다며 나갔고 최룡수교수는 피로했기때문에 호텔방에서 휴식하였다. 우리는 그냥 앉아 있을수 없어 남은 시간에 관광이나 하려고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태원의 명승인 진사(晉祠)를 보기로 했다. 택시를 잡고 거리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시 중심에서 25킬로메터 가면 진사라고 하였다.   진사는 태원시 서남부 현옹산(懸甕山) 기슭에 축조된 사원과 원림이 결부된 고대건축이다. 진사의 유래는 아득히 먼 기원전 주나라시기에서 기인된다. 기원전 11세기 주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諸侯)를 봉했는데 주무왕(周武王)의 차남 숙우(叔虞)가 당(唐)나라 땅을 분여 받았다. 바로 지금의 산서성 지역이다. 당나라에 온 숙우는 진수(晉水)를 리용해 농토수리에 전념하면서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때로부터 700여년간 이 지역에는 재앙이 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유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릴수 있었다 한다. 북위(北魏)시기에 와서 누군가 숙우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사당을 짓고 《당숙우사(唐叔虞祠)》라 하였다. 그후 이곳을 흐르는 진수에서 《진》자를 따서 《진왕사(晉王祠)》로 고쳐 불렀는데 사람들은 그냥 진사라는 약칭을 쓰고있다.   진사에 도착하니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고 광장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진사에는 전당과 정자, 루각, 고목이 많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고목이 숲을 이룬 사이로 정교하게 축조된 옛 루각과 전당이 나타났다. 진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성모전(聖母殿)이다. 성모전은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인 송(宋)나라 시기 축조된 커다란 전당이였다. 전부 나무로 축조된 전당 건물앞에는 8개 나무 기둥이 있었는데 기둥마다에 나무로 조각한 룡이 있었다. 나무기둥을 맴돌며 치솟아 오르는 룡의 형상은 아주 생동하였다. 그리고 성모전에는 33개 인물조각상이 있었다. 흙으로 빚은 성모(聖母)와 시녀 군상은 인물의 형태가 각이(各異)하고 표정이 다양하여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이들 군상을 보노라니 녀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와 다정한 속삭임, 은은한 탄식 소리를 금시 듣는것만 같았다.   성모전 앞에는 금인대(金人臺)가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갑옷차림의 철제 조각상 네 개가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힘찬 팔뚝을 쳐들고 여러자세로 서있는 이 네 철제 조각상을 《금인(金人)》이라고 하였다. 위풍당당한 4개 금인은 성모전의 부르럽고 온화한 녀인들의 조각상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였다. 4개 금인 가운데서 서남쪽의 금인이 1097년 송나라 때 만들어진것으로 력사가 가장 유구하였다.   진사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았다. 맑은 호수물과 정교한 정자, 아름드리 고목, 다양한 화초들은 마냥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태원의 명소, 짐사 입구   저녁 식사후 기자소의 리세박주임과 함께 석루현(石樓縣)의 임석평(任石平)부현장과 태원시 당사연구실의 거문휘(巨文輝)처장을 만났다. 우리는 석루현에 가서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지를 답사할 뜻을 이야기했다. 임석평부현장은 래일 석루현에 돌아가니 함께 가자고 열정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리고 석루현에 홍군동정기념관(紅軍東征紀念館)을 새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저녁 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이튿날 만나기로 하고 헤여졌다.   2003년 10월 26일에 우리는 석루현으로 떠났다. 조선혁명가 양림의 싸웠던 전적지를 찾고 홍군의 동정기념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태원 기자소의 리세박주임도 승용차를 가지고 함께 떠났다. 리세박주임과 임석평부현장이 각기 태원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걸 기다리다 보니 오전 10시가 되여서야 출발하게 되였다.   우리는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태원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따라 곧추 서쪽으로 달렸다.   석루현은 려량산의 서부 황하 동안에 위치하였다. 4개 진 10개 향에 근 10만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석루현은 황토고원의 한 부분으로서 지세는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다.   동부는 려량산맥의 한 줄기인 통천산(通天山)이 남북으로 뻗어있다. 해발 2000m에 달하는 통천산의 주봉은 괴석이 층집처럼 쌓여 석루라는 이름을 가졌다한다. 석루현 서부는 구릉지대이다. 두텁게 덮인 황토는 빗물에 씻겨 이곳에 수많은 골짜기를 형성해놓았다.   한시간 정도 달리니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임석평부현장은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면 안되기때문에 지름길로 가자는것이였다. 계속 고속도로를 달려 류림(柳林)에 간 다음 그곳에서 남하하면 석루현에 갈수있지만 길을 너무 에돈다고 했다. 그렇게 가면 길은 괜찮지만 저녁에야 도착할것이라고 하였다. 도로상황을 모르는 우리는 그냥 따르는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석루로 가는 길이 그처럼 엉망일 줄은 좀 더 가서야 알게 되였다.   이윽고 차는 흙 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도처에 두터운 황토가 쌓여있었는데 차가 지나면 먼지가 연기처럼 일어 하늘을 가린다. 게다가 이따금 길에 널린 커다란 흙덩이가 승용차 밑바닥에 긁혀 요란한 소음을 내기도 하였다.   한적한 곳이기때문에 석루현으로 가는 차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마주 오거나 지나쳐 버리는 차만 있으면 아주 위험하였다. 길에 다른 차가 있으면 그 차가 일으키는 먼지가 뒤덮여 지척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때문에 먼지에 가려 차가 어느 나무에 가 부딪칠지 어느 바위와 충돌할지 모를 일이다. 다행이라면 임석평부현장의 기사는 이 길을 다닌 경험이 풍부한것 같았다. 그냥 감각으로 앞의 차를 지나치거나 마주오는 차를 피해 달렸는데 기사의 운전솜씨에 저도 몰래 감탄이 나왔다.   산을 몇개 넘으니 구릉지대가 나타났고 산의 나무도 점점 적어졌다. 이따금 산간마을이 보였는데 길가나 골짜기의 평지에 집 몇채가 있었을뿐 대부분 마을사람들은 산에 굴을 파고 만든 토굴집에서 살았다.   5시간의 긴긴 려행을 거쳐 이날 오후 우리는 2만여명의 인구가 살고있는 석루현 현성에 도착하였다.   중국의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기 직전에 2만 5천리 장정을 마친 홍군은 황하를 건너 동정을 진행하였으며 산서성 서부인 석루현을 공략하고 항일구국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 동정의 선견대를 거느리고 황하도강작전을 성공시킨 조선혁명가 양림의 사적이 석루현의 홍군동정기념관에 있었던것이다.
100    제70회 동욕진 상무촌의 사적지 댓글:  조회:4893  추천:0  2014-04-14
1941년 조선혁명가들은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북상한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지도하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하여 적후 항일투쟁을 진행하였다. 조선혁명가들은 팔로군의 작전을 도와주었고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또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키워나갔다.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한 조선청년련합회는 각지에 청년련합회 지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7월 8일, 조선청년련합회 연안지회(延安支會)가 설립되였다. 회장은 음악가 정률성이 맡았는데 연안지회 회원은 20여명이였다. 이날 지회 설립대회에 참가한 무정은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주의적인 조선공화국을 건립할것을 호소하고 조선민족의 반일통일전선 구축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연안에 조선혁명 간부들을 양성할수 있는 조선간부학교 건립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후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도 나타났다. 1941년 6월, 국민당 구역의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함으로써 팔로군 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자는 147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조선청년련합회에 받아들여 의용대로 재편성함이 필요하였다. 당시 조선청년련합회 회장인 무정은 연안에 있었기때문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 회장을 맡았던 진광화와 부회장 윤세주가 대원들에 대한 사상지도사업을 맡았다. 그리고 박효삼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7.7》사변기념일인 7월 7일에 결성되였다.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고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화북지대 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였다.   (권립교수) “1941년 7월에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근거지에 오자 련합회에서는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하고 본부를 산서성 료현 즉 좌권현에 두었습니다. 지대방에 박효삼, 부지대장에 리익성, 정치위원에 진광화였습니다”   화북지대 본부 류수대(留守隊) 대장은 려운길(呂運吉)이였고 대원들로는 최창익, 왕지연, 장진광, 최손(崔孫), 마춘식(馬春植), 리치민(李治民), 양민산, 리달, 리대성, 리철준(李哲俊), 호일화(胡一華), 주연, 박성호(朴成浩), 장지복(張志福)등이였다. 기타 대원 다섯명이 더 있는데 신원이 밝혀지지 않고있다. 그리고 류수대 녀성대원으로는 한명숙(韓明淑), 문정원(文正元), 장수연(張秀延), 권혁이 있었다.   상무촌의 홍복사 옛 사원   홍복사 사원비석 로신예술학원 옛터(상무촌 마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1대는 대장 리익성, 정치지도원 진한중의 령솔하에 안양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하진동(河振東), 제2분대 분대장은 리지강(李志剛)이였고 대원은 최지남(崔指南)을 비롯한 18명이였다. 제2대는 대장 김세광, 정치지도원 풍중부(馮仲夫)의 령솔하에 찬황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제2대 제1분대 분대장은 조렬광이였고 제2분대 분대장은 손일봉이였으며 대원은 김강(金剛) 등 19명이였다. 제3대는 대장 왕자인, 지도원 박무였고 순덕(順德)에서 활동하였다. 제3대 제1분대 분대장은 한경(韓慶)이고 제2분대 분대장은 관건이였으며 대원은 장평산(張平山)을 비롯해 11명이였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일제가 강점한 적후에도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하게 하였다. 강홍구(姜弘九), 리경산(李景山)을 상해에, 김해암(金海巖)을 한구에 파견하였으며 김위(金煒), 김창만, 조련(趙連), 심청택(沈淸澤), 진동붕(陳東朋), 김무, 림평을 북평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최계원(崔啓源), 봉오식(奉五植), 리철(李哲), 김파륜(金巴倫)을 석문(石門)에 파견하였고 주화(朱華)를 청도에 파견하였다. 뿐만아니라 국민당군 20사에 호유백을 파견하고 국민정부 림시수부 중경에 주진룡(朱震龍)을 보냈다. 재편성을 거친 화북지대는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분회의 지도밑에 무장선전, 간부양성, 적후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화북지대 각대는 구역을 나누어 하북 평한철도 구역으로 진출해 무장선전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중국민중에게 항일사상을 전수하면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 보루나 초소에 접근하여 함화하기도하였으며 일본군 병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제국주의자의 희생물로 되지 말것을 권고하였다. 또 도처에 선전표어를 붙이고 삐라를 살포했으며 도로, 철도를 파괴하고 전선(電線)을 절단하는 등 파괴활동을 진행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 사이 화북지대는 유명한 선옹채전투, 호가장전투, 형대전투, 5월 반소탕 혈전을 겪었다. 그리고 북경, 천진, 상해, 청도, 무한, 중경 각지에 파견된 대원들도 각지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면서 조직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권립교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적후 근거지에 온 첫 일년간 주로 세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적후 무장공작대를 조직하여 북경, 상해, 무한, 청도 등 전국각지에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우리민족 상황을 료해하며 의용대 입대사항을 처리하고 적후선전사업을 했습니다. 둘째는 조선의용대 간부학교를 세우고 각지에서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교장에 무정이고 부교장에 진광화였습니다. 세번째는 화북지대를 세 개분대로 나누어 우리 당의 령도하에 태항군구 산하에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화북지대는 첫 일년간 팔로군에 배합하여 40여차의 대일작전에 참가했습니다.”   1941년 8월 15일,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 신입대원들을 교양하기 위해 동욕진 상무촌에서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이 시기 적후로부터 온 30여명 조선청년들이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고 국민당 구역으로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147명 조선청년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모이게 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간부훈련반을 개설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지대장 박효삼이 교장을 맡고 최창익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최창익, 김학무, 한빈, 윤세주, 진광화, 박무 등이 교원으로 있었다. 훈련반 훈련내용은 정치와 군사 그리고 과외활동이였다. 정치는 조선문제와 정치상식과를 설치하여 공부하였다. 윤세주가 조선문제를 강의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혁명동력과 혁명의 전도문제를 언급해 설명하였다. 최창익이 맡은 정치상식과는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교재를 사용하였다. 주로 사회발전사, 국제문제, 정당문제가 언급되였다. 시사강의는 김학무가 맡았는데 매주 시사를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훈련반에서는 또 군사과목을 설치하였다. 주로 전선에서 활동할수 있는 기본상식과 초보적인 군사지식을 배워주었다. 상무촌에서 개설된 간부훈련반은 중국 관내 조선혁명자들이 자체로 개설한 군사, 정치학교였다. 훈련반은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창립됨에 따라 화북조선청년학교로 확대되였다. 뿐만아니라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山東分校)가 설립 되였다. 하북성 섭현 남장에서 답사하였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바로 이 간부훈련반의 계속이다.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확대된후 본부는 하북성 남장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더 큰 규모의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던것이다. 군 경력이 풍부한 박효삼, 정치선전사업에 능한 윤세주, 김학무, 연안에서 활동한 최창익 등이 교원으로 있었기때문에 학원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기능을 련마할수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중국공산당의 정치사상과 지도리념이 학원들에게 전수되였고 팔로군식 교육과 훈련이 전수되였다. 상무촌의 홍복사 유적지는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켰고 또 많은 유감을 남겨주었다. 축구장만큼 큰 공지는 잡초가 무성하였고 이따금 부서진 유리기와가 보였다. 그것은 홍복사 옛절이 불타버린 후 남겨진 흔적이였다. 조선혁명가들은 여기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재편성하고 간부훈련반을 개설했으며 팔로군과 함께 적극적인 사업을 전개했던것이다. 홍복사 옛터를 답사하고있을 때 형효수연구원이 마을의 75세 고령인 조은경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마을 뒷산의 무명 조선의용군 렬사묘지를 60여년 묵묵히 지켜온 분이였다. 항일전쟁시기 10대 소년이였던 조은경로인은 늘 의용대 대원들과 함께 지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셋째 삼촌집에서 살았다. 당시 그의 셋째 삼촌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두명이 투숙하고있었다. 1941년 12월, 일제가 마을을 습격하였다. 마을에 있던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신속히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기관총으로 적을 막고싸웠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대피한 다음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엄호가 있었기때문에 상무촌은 리금주(李金柱)라는 농민 한명이 숨지는 피해만 받았을뿐이다. 그러나 이번 토벌에서 유격대의 엄호를 받지 못한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농민이 적에게 살해 되였다. 조은경로인은 조선의용군은 마을사람을 구해준 은인이고 또 늘 빈곤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서 그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로인은 마을 뒷산에 조선의용군 렬사의 묘소가 있다고 하면서 렬사 이름은 모르겠지만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전우를 묻어놓은것만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에도 로인은 늘 묘소를 찾아가 확인하였다면서 묘소의 분명한 위치를 확인해 주었다. 상무촌 마을사람들은 최근 돈을 모아 의용군전사 묘소를 보수하고 기념비까지 세웠다.   상무촌의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소를 지켜온 조은경 로인 우리는 조은경로인을 따라 마을 뒷산으로 갔다. 현지인들은 그 산을 《토지뇌(土地
99    제69회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지 댓글:  조회:4929  추천:0  2014-04-08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과 무장선전을 진행하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은 선후로 두차의 치렬한 전투를 치렀다. 1941년의 호가장전투와 1942년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이다. 이 두차의 전투에서 모두 조선의용군의 영웅적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피는 중국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소박하고 근면한 태항산의 인민은 중국군민과 어깨겪고 싸운 조선의 혁명선렬들을 잊지 않고 있다. 조선 혁명선렬들의 두려움 모르는 항쟁정신과 국제주의정신은 중국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하북성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의 렬사릉원을 나와서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선전부 일군과 리사화로인의 도움이 있었기때문에 많은 내용들을 짧은 시간내에 완수할수있었던것이다. 우리의 차는 계속 달려 산서 경내로 들어갔고 섭현의 고마운 분들은 우리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바래주었다.   10여분 뒤 우리는 하북성 섭현 경내를 벗어나 산서성 좌권현 경내에 들어섰다. 우리는 좌권현 마전진(麻田鎭) 운두저촌(雲頭底村)의 조선의용대 주둔지옛터로 찾아갔다. 맹진나루터로 황하를 건넌 조선의용대 주력은 태항산으로 진격했으며 좌권현에서 재정비를 거쳐 유력한 항일무장대오로 성장했던 것이다. 207국도를 따라 넓은 들을 지나니 멀리 병풍같이 둘러선 산이 보였다. 산기슭에는 숲이 우거진 작은 마을이 있었고 마을 앞으로 맑은 청장하가 흐르고있었다. 길가는 농민들은 그 마을이 바로 운두저촌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잡초가 무성한 들을 지나 청장하에 놓인 쇠사슬과 나무판으로 만든 다리를 거쳐 마을에 들어갔다. 운두저촌은 300여 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비교적 가난한 마을이였다. 마을 동북쪽에는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흰 담으로 둘러싸인 3합원(三合院) 구조의 옛집 한채가 있었다. 그리고 건물에는 《조선의용군구지(朝鮮義勇軍舊址)》라고 밝힌 작은 간판이 보였는데 이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조선의용대 주둔지 옛터였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량켠에 낡은 단층집이 있었으며 아직까지 주민이 살고있었다. 정면 건물의 기와나 기둥을 보아서 옛 절이라는것을 알수있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은 옛날 피향묘(皮香廟)라는 사당이였다고 하였다. 봄 깃든 운두저촌(2008) 운두저촌 마을길 운두저촌의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옛터의 낡은 건물은 후에 수선을 거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운두저촌 입구의 문루에 새겨진 조선글 구호 조선글 표어가 지금도 선명하다 마을어구 문루   항일전쟁시기 김학무가 거느린 조선의용대는 1941년부터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지휘부는 사당에 설치했고 기타 대원들은 마을 민가에 산재해 거주하였다. 현지인들은 당시 조선의용대가 80여명에 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1942년 이후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근거지의 팔로군 전사들의 식량배정은 하루 한근이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한근 두냥을 배정 받았으며 대원들은 그 두냥을 절약하여 마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다고한다.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입한 조선의용대는 대적선전과 정보수집, 포로교양, 간부양성사업을 진행하였고 때로는 전투에 참가하거나 생산운동을 진행하였다. 운두저촌에는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람벽에 써놓은 표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운두저촌 서남단의 마을 입구에는 작은 문루(門樓)가 있다. 현지인들은 남각(南閣)이라고 했다. 밑부분은 큰돌로 쌓아 만든 아치형 문이고 웃부분은 벽돌과 기와로 지은 작은 루각이였다. 루각에는 토지신(土地神)이나 재물신(財物神) 소상(塑像)이 있었다. 태항산 지역 대부분 마을 입구에 모두 이와 같은 문루가 있다. 마을사람들의 출입이 모두 무사하기를 비는 이 지역 민속이였다. 운두저촌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전쟁시기 이곳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써놓은 표어가 지금도 남아 있다. 남쪽 벽에는 《왜놈의 상관(上官)을 총으로 쏴죽이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고 씌여있고 북쪽 벽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전지원병(前志願兵)》이라고 씌여있다. 우리 글로 씌여진 표어들은 많은 시간속에서 퇴색되여 잘 알아볼수 없었지만 지금 새롭게 새겨놓아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문루 처마밑에는 《조선의용군옛터》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좌권현 정부가 이곳을 현급 문화재 보호지로 정하고 잘 보수했던것이다. 조선의용대의 항일 사적지를 보호하려는 현지 정부의 노력을 알수 있었다. 60여년의 비바람속에 그냥 남아있는 표어들, 이를 아끼고 보존한 현지인들에게 절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해서 우리는 운두저촌을 떠나 좌권현으로 출발하였다. 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려 태항산 대협곡을 지났다. 길가에는 키 높은 백양나무가 줄지어 있었고 량옆으로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스쳐지났다. 우리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다양한 산봉우리들을 쳐다보면서 감탄을 련발했다. 산의 웅장함과 기이함에 저도 몰래 탄성이 터져 나왔던것이다. 답사팀의 촬영기자는 차를 멈춰 세우고 그 아름다운 산들을 렌즈에 담자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차는 계속 달렸다. 태항산 대협곡은 이튿날 팔로군 총부나 동욕진 상무촌(上武村)을 답사할 때 다시 와야했기때문이였다.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는 좌권현 소재지에 들어섰다. 산서성 중부에 위치한 좌권현은 5개 진, 10개 향에 16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현성은 춘추시기 료양읍(僚陽邑)이라 했고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상당군(上黨郡)에 귀속되였다. 동한시기 이곳은 료양(遼陽)으로 불리웠으며 항일전쟁시기 좌권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좌권현으로 이름을 고쳤다. 좌권현은 민요와 《소화희(小花戱)》가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민요를 곧잘 불렀으며 또 창작하기도 하였다. 《소화희》는 춤 형식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좌권현의 독특한 무극(舞劇)으로서 명성이 높다. 현정부 뒤편에 괜찮은 초대소가 있어 찾아갔는데 현에서 대형 회의를 소집하고 손님을 모두 이곳에 배치했기때문에 빈방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근에서 호텔을 찾아 투숙하였다. 이곳에서는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했지만 조건은 그렇지 못했다. 좌권현은 빈곤현이였다. 정부청사를 중심으로 괜찮은 건물 몇 개가 있을 뿐 대부분 낡은 주민집들이였다. 거리에는 행인이 별로 없었고 다만 희미한 가로등만이 어렴풋이 길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거리엔 택시가 하나도 없어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 성을 구경하러 나왔지만 택시가 없어 어디든지 갈수 없었던것이다. 10월 24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최룡수교수와 함께 좌권현 정부를 찾아갔다. 전에 현장과 서기를 만난적이 있었기때문에 직접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두사람 모두 일보러 나가고 없었다. 할수없이 선전부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선전부에서는 열정적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선전부의 소개로 우리는 좌권현의 《수재》로 불리우는 형효수(邢曉壽) 연구원을 알게 되였다.   태항산 언던에 보이는 관제묘(무신 관우를 기리는 절당) 태항산의 기이한 산봉들 좌권현 정부 청사(원 료양현) 좌권현의 형효수 당사 연구원 형효수연구원은 당사연구실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후 좌권현정부에서 출간하는 《금일좌권(今日左權)》신문 주필로 사업하고있었다. 60세가 넘은 형효수연구원은 태항산에서의 조선의용군에 관련한 저서를 집필하고있었다. 우리는 조선의용군에 관련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뿐만아니라 그에게서 조선의용군 무명렬사 묘지를 60년간 지켜온 조은경(趙恩慶)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형효수연구원은 동욕진으로 가면 조은경로인을 만날수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날 오후, 선전부에서 차를 마련해 우리는 형효수연구원의 안내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차는 207국도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전날 자세히 보지 못했던 태항산 대협곡을 다시 보게 되였다. 차는 대협곡의 중심인 신가교(申家峧)에서 멈춰섰다. 주변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우뚝 솟아있었고 벼랑에는 굴을 파고 만든 제단이 있었으며 제단에는 중국인들이 숭상하는 충의신(忠義神) 관공(關公)상이 있었다. 형효수연구원은 제단의 바른편 산 너머에는 북조시기 축조하기 시작한 고환운동(高歡雲洞)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일찍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류수(劉秀)가 총애한 금팽(芩彭)장군이 이곳에 병영을 세웠다 한다. 동한 개국공신인 금팽장군은 류수의 명을 받고 이곳 험한 지세를 리용해 병영을 세우고 비밀리에 군사력을 키웠다. 지금 병영의 흔적은 찾을길 없고 고환운동이라는 동굴 하나가 있을 뿐이다. 고환(高歡)은 북위(北魏)시기 승상을 지내면서 국권을 틀어쥐었던 인물이다. 그가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고 하여 고환운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위나라 황제를 퇴위시키고 북제(北齊)를 세웠다. 그는 고환을 신무제(神武帝)로 추앙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바로 태항산의 이처럼 험악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했던것이다. 차는 계속 남쪽으로 달렸다. 태항산은 돌로 된 산이라기보다는 찰흙이 굳게 다져 이루어진 산이라고 할수 있다. 그만큼 삐죽삐죽 모난 괴석이나 바위는 많지 않았다. 두터운 황토가 수천년이란 긴긴 세월 속에 돌 보다 더 굳게 다져져 형태가 독특한 산봉우리와 벼랑을 형성했던것이다. 선녀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신녀봉, 거부기와 토끼의 모습을 닮은 귀토봉(龜兎峰)이 있었다. 귀토봉은 마주한 두 산봉우리가 하나는 거북과 같고 하나는 토끼와 흡사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 산봉우리는 거부기와 토끼의 경주를 련상시켰다. 한시간 지나서 우리는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 이르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결성을 설명해주는 형효수 연구원(왼쪽) 조선의용군 주둔지 옛터 한국에서 세운 순국선렬 전적비   상무촌은 작은 산간마을이였다.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촌 정부를 찾아가는 우리를 지켜보았다. 촌 정부는 큰 마당을 가진 단층 집이였다. 동욕진 왕세수(王世秀)서기 겸 진장이 통지를 받고 거헌충(巨獻忠) 촌주임과 함께 기다리고있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마을에 낡은 흙집들이 많은것을 보아 이곳 주민들의 빈한한 생활을 짐작할수있었다. 골목길을 이리저리 에돌아 마을 뒷산에 도착하니 커다란 비석이 나타났다. 검은 대리석 비석에는 《순국선렬전적비(殉國先烈戰績碑)》라고 새겨져있었는데 비석은 흰 대리석으로 된 큰 거북의 등에 세워져있었다. 비석은 현지 정부가 2003년에 한국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아 세웠다한다. 비석 뒤에는 축구장만큼 넓은 평지가 있었으며 아담한 단층집 한채가 있었다. 집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했으며 뒤로는 웅장한 산이 멀리 보였다. 이곳이 바로 상무촌 홍복사(洪福寺) 옛터였는데 조선의용대는 1940년 8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이곳에 주둔해있었다. 거헌충촌주임은 홍복사는 큰 사원이였지만 후에 일제가 불살라 버려 지금은 작은 단층집 하나만 남았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작은 흑판하나가 있었으며 그 옆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비석에는 홍복사는 당나라 정관(貞觀)년간에 축조되였고 명나라시기 다시 보수를 거쳤다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항일전쟁시기에는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가 있었으며 조선의용군과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총부 요원들이 거주하였다고 적혀있었다. 1938년 10월말 무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서성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호남성 제9전구로, 제2구대는 호북성 제5전구로 이동하였다. 이때 최창익은 리익성이 거느린 제2구대와 함께 호북에서 활동하다가 황하를 건너 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성지 연안으로 갔다. 당시 30여명 조선청년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1940년초에 전방으로 나갔으며 팔로군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진출하였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결성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이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창립대회에는 중공중앙을 대표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참가했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의 성립을 축하하고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지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 그는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전승할 때까지 싸울것을 조선혁명가들에게 희망하였다. 당시 각지에서 모여온 21명 대표들이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팔로군 포병퇀 제1임 퇀장으로 있던 무정을 련합회 회장으로 선출하고 진동남 항일근거지 선전극단의 단장으로 있던 진광화를 부회장으로, 리유민을 조직부장으로, 장진광을 선전부장으로, 한득지(韓得志)를 경제부장으로 선거하였다. 최창익은 련합회 위원을 맡았다. 조선혁명가들은 열렬한 토론을 거쳐 계급과 당파, 종교를 불문하고 전 민족이 하나로 단결된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화북망명청년의 단합과 항일무장대오를 결성하며 전반 조선민족해방전쟁의 발동과 중국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고 일제구축과 조국광복 대업을 완성한다는 등 내용의 련합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때 무정은 팔로군 포병퇀의 사무가 많았기때문에 진광화가 실제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지도사업을 맡았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의 팔로군 지구로의 이동을 추진하였다. 련합회의 회원인 리극(李克), 로민, 왕극강(王克强) 3인은 국민당지구인 락양과 중경으로 파견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항일을 시도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 창설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결성을 보게 되였다.
98    제68회 5월의 혈전 댓글:  조회:5476  추천:0  2014-03-25
웅위한 태항산맥의 한부분인 하북성 섭현 석문촌의 련화산은 그 아름다운 자태를 세인들에게 자랑하고 있다. 하늘높이 치솟은 높은 봉이 련꽃잎처럼 펼쳐졌다하여 련화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이 산 기슭에는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인 좌권과 조선의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진광화, 윤세주가 묻혔던 묘소가 있다. 태항산, 섭현 석문촌 련화산의 윤세주, 진광화 렬사 묘소 렬사들에게 꽃묶음을 전하려 가는 고 최룡수 교수(중앙당학교) 석문촌 련화산기슭에 지은 조선의용군 렬사기념관 렬사묘소를 찾은 연변과 장춘의 중앙방송 애청자분들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사람들은 이곳을 잊지 않고 있다. 해마다 청명이면 마을사람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을 기리고 있다. 렬사들의 유골은 해방후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렬사릉원으로 이장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마냥 이곳에 찾아와 렬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항일전쟁시기 가장 처절했던 5월의 반포위토벌 전투를 회억하군 하였다. 최근년간에는 현지정부에서 조선의용군 기념관까지 세워놓았다. 그리하여 조선투사 진광화와 윤세주를 기리는 수많은 관련학자와 유가족이 자주 이곳을 찾아오기도 한다.   (권립교수) “1942년 6월에 있은 마전포위망 돌파전투는 보다 더 치렬했습니다. 1942년 5월에 일제는 수만명의 병력으로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이른바 5월 대소탕을 진행했습니다.”   1942년 5월 화북의 일본군 주력은 팔로군 태항산 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소탕을 전개하였다.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 참패를 본 일본군은 항일근거지를 공격하여 후환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중국을 정복하려는 저들의 야망을 실현할수없다고 판단하였던것이다. 일본군 선두부대는 중국인 옷과 팔로군의 회색군복을 입고 근거지에 진입하였기때문에 백성들도 일본군이 근거지에 접근한것을 미처 모르고있었다. 교활한 적은 선진적인 정보기술로 전화와 전보가 비교적 집중된 팔로군 전방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했던것이다. 5월 22일, 일본군 41사단 주력이 료현(遼縣 지금의 좌권현)을 포위하였다. 팔로군 전방사령부 사령 팽덕회와 참모장 좌권, 정치부 주임 라서경(羅瑞卿)은 신속히 주력부대를 적의 포위권 밖으로 전이시켰다. 그러나 지휘부는 미처 전이하지 못한 상황에서 포위해 오는 적과 격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였다. 팔로군 사령부와 북방국, 당학교, 신화일보사, 조선의용대를 비롯한 기관일군 수천명이 마전(麻田) 부근의 남애포(南艾鋪)에서 수만 일본 정규군의 포위에 들었다. 이때 태항산에 모인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 전방사령부와 함께 있었다. 초기 소분대로 나뉘여 화북각지에 파견되였던 조선의용대는 형대전투를 비롯한 수차의 전투를 겪었다. 비록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희생도 있었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잘 훈련되고 자질이 높은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을 아끼려는 목적으로 이들을 일선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고 후방에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이 감쪽같이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포위하자 모두가 전투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팽덕회와 좌권은 분산돌파를 계획하고 좌권이 후위를 맡았다. 정치부 산하에 있던 조선의용대는 라서경주임의 지휘를 받으며 포위돌파를 시도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적이 산기슭으로부터 공격해왔다. 라서경주임은 경위부대를 거느리고 적을 저격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박효삼 대장이 자진하여 전투임무를 요청했다. 팔로군의 전투부대는 경위를 맡은 한 개 패와 조선의용대 백여명뿐이였기 때문에 라서경주임은 할수없이 조선의용대를 전투에 투임시킬 수밖에 없었다. (권립교수)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팔로군 총정치부 주임 라서경동지가 령을 내렸습니다. ‘경위패는 서쪽 고지를 점령하고 비무장대오가 이전하도록 엄호하라, 조선의용대는 동쪽고지를 탈취하고 엄호하라!’ 우리 의용대는 박효삼의 지휘하에 비처럼 쏟아지는 일본군의 총탄을 헤치며 동산을 점령하고 하루종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기관관부와 가족들이 안전하게 이전하게 했습니다.”   사령부 수십명 경위원들이 서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 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동쪽 고지에서 적을 저격하였다. 이들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고 싸울 때 비전투원들은 신속히 포위권을 뚫고 나갔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이동하고있는 비전투원들을 폭격하였다. 전투에서 부근 십자령(十字嶺)에서 진행된 치렬한 전투에서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엄호를 맡고 혈전하던 조선의용대는 밤 장막을 타서 무사히 포위권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일부 대원들이 흩어졌다.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는 일부 녀성대원을 거느리고 화옥산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27일 새벽 산속을 빠져나오던 이들은 적에게 발각 되였다. 윤세주와 진광화, 최채는 녀성대원들을 엄호하기 위해 적을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적을 유인하여 산 아래로 달리던 진광화는 벼랑가에 몰렸다. 그는 적탄을 맞고 벼랑으로 떨어져 장렬히 희생되였다. 산허리로 달리던 윤세주도 적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고 산우로 달린 최채는 동굴에 숨어서 무사할수있었다. 적이 떠나간 다음 최채는 비통한 심정을 달래며 진광화와 윤세주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윤세주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으로 희생되였던것이다.   (권립교수) “이번 전투에서 의용대 용사 10여명이 보귀한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97    제67회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옛터 댓글:  조회:5475  추천:0  2014-03-16
국민당의 수십만 반동군대의 포위와 추격을 물리치고 2만 5천리 장정을 진행한 홍군은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해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창설해나갔다.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된후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청년들이 팔로군이 개척한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모여왔다. 중국공산당에서는 태항산에 모인 조선혁명가와 조선청년들을 지도하고 이들을 조직하기 위해 무정을 태항산에 파견하였다.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을 겪은 조선혁명가 무정은 새로운 임무를 맡고 태항산으로 향했다.   섭현 중원촌 전경 중원촌 촌어구에 세워진 루각 팔로군 초대 포병퇀장이며 조선의용군 사령원인 무정이 중원촌에 거처하였던 곳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의 개최를 주도하였던 무정은 줄곧 중국공산당 중앙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온 혁명가였고 홍군과 팔로군의 군사전문가였다. 2만 5천리 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다시 홍군부대를 따라 력차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6년 홍군동정에 참가한 그는 홍군 제1방면군과 함께 황하를 건너 산서 경내에서 싸웠다. 홍군의 동정에서 조선혁명가 양림이 희생되자 당중앙에서는 조선혁명가들을 더욱 잘 보호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위험한 일선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이해 6월 홍군은 동정을 마치고 섬북에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中國人民抗日紅軍大學)을 설립하였다. 무정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작전부대를 떠나 고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홍군대학 1과에서 학습하였고 졸업후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담임하였다.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로농홍군은 본격적인 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와 팔로군 총사령부는 항일투쟁을 더욱 유력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팔로군 포병부대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1937년 말, 팔로군 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된 무정은 포병부대 건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7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진서남(晉西南) 전략요새인 림분에 갔다. 그는 그곳의 부대까지 합쳐 근 1,000명에 달하는 전사들로 포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권립교수) “7.7사변후 팔로군 총사령부 주임직을 맡은 무정은 중국인민의 포병건설에 나섰습니다. 1938년 1월에 림분에서 중앙군위 포병퇀 성립대회가 열렸습니다. 중공중앙 북방국의 책임자 양상곤이 축사를 하고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봉이 무정동지를 포병퇀 퇀장으로 임명할데 관한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독했습니다.” 1938년 1월 28일, 림분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설식이 있었다. 무정이 포병퇀 퇀장으로, 구창성(邱創成)이 정치위원으로, 원광이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인 양상곤(楊尙昆)이 축사를 하였고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해 축하했다. 포병퇀은 편성되였지만 여러가지 곤난이 많았다. 우선 포병부대가 쓸만한 대포가 얼마 없었고 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몇사람 없었다.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다. 그는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이 시기 무정이 직접 훈련해낸 포병간부들은 후날 중국인민해방군 포병부대 고위 지휘자로 되였다. 이해 2월, 태원(太原)이 일제에게 강점되자 림분지역이 적의 공격목표로 되였다. 포병부대를 보호하고 계속 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무정은 총부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거느리고 섬북으로 철수하였다. 그들은 섬북 락천(洛川)에 새로운 훈련기지를 정했다. 모택동은 무정을 비롯한 포병부대 지휘자들을 직접 접견하였고 주은래, 주덕, 팽덕회를 비롯한 당과 팔로군 지도자들이 락천기지에 와서 포병퇀을 시찰하였다.   (권립교수) “무정은 포병간부 훈련반을 꾸리고 직접 교관을 맡았습니다. 이때 양성해낸 포병간부들이 새중국의 제1대 포병 지휘관으로 됐습니다. 1938년부터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대일작전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에는 포병퇀의 절반을 거느리고 태항산 근거지의 팔로군 전방사령부 소재지에 와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족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 조선청년 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1939년 2월, 무정은 포병퇀을 거느리고 다시 황하를 건너 진동남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출격하였다. 이때 서안과 락양 팔로군 판사처를 통해 포병부대에 수요되는 장비가 송달되였고 전사들도 잘 훈련되였기때문에 포병퇀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였다. 1940년에 팔로군이 백퇀대전을 전개할 때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전투가 가장 치렬한 곳으로 달려가 유력하게 전투를 지원해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팔로군 포병퇀을 창설하고 일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던 무정은 조선의용대를 재정비하고 조선혁명가들을 규합시키기 위해 포병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는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독립동맹 주요사업을 책임지고 그때로부터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과 함께 하게 되었다. 중원촌 마을 북쪽에는 비교적 높은 둔덕이 있다. 돌길을 따라 둔덕에 오르면 찌그러져가는 낡은 절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중원촌 원정보사 옛 절이다. 문에 들어서니 낡은 흙벽에 걸린 《섭현중원촌원정보사문물보호구(文物保護區)》라는 간판이 보였고 작은 마당 앞에는 검은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푸른 기와와 벽돌로 된 건물이였다. 정교한 꽃무늬와 그림으로 장식된 처마나 집앞에 세운 옛 돌비석을 보아서 사원이 분명하였다. 집 벽에는 《태항신화일보구지(太行新華日報舊址)》라는 작은 간판이 있었다. 사원의 신상(神像)은 사원 맞은 편에 새로 지은 흙집에 옮겨져 있었다. 섭현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화북조선혁명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태항 신화일보사가 있었던 곳(원정보사 내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로도 추정되는 원정보사 옛터(항일전쟁시기 신화일보사도 이곳에 있었다)    1942년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은 이곳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를 개설하였다. 교장은 무정이였고 교무주임은 김학무였다. 제1기에 20, 30명 학원을 받았는데 학습기간은 5개월이였다. 학교는 비교적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학교를 설립한 목적은 화북 적점령구로부터 조선인들이 탈출해 올 경우를 대비해 그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가입시키는데 있었다.   (귄립교수) “1942년 11월 1일에 태항산근거지에 화북조선청년 학교를 꾸리고 화북각지의 조선족청년들을 흡인했습니다. 이해 일본군이 천진, 북경에 조선인특별훈련반을 꾸려 우리 청년들을 전쟁의 대포밥으로 만들려한 그 음모에 대처하여 꾸린 학교였습니다. 무정을 교장으로 김학무를 교도주임으로 한 이 학교는 1944년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로 고쳐졌습니다.” 당시 화북전역을 석권한 일본침략자들은 더 많은 조선인을 조선국내, 중국 동북으로부터 화북에 강제 이주시켰고 또 천진을 비롯한 각지에 조선징병특별훈련반을 세웠다. 그리하여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많은 조선청년들이 항일근거지로 찾아왔다. 학원들은 중원촌 원정보사에서 공부하였고 부근 공지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학원수가 훨씬 많아지고 조선의용군도 확대되여 본거지를 옮기게 되였다. 이들은 중원촌을 떠나 하남점진 남장촌으로 옮겨갔고 이곳은 신화일보 인쇄공장으로 사용되였던 것이다. 원정보사 옛절이 있는 둔덕에 서 있노라니 중원촌 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이따금 무정사령원이 경위병을 데리고 골목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환각으로 보이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귀전을 스치는 바람결을 타고 씩씩한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구령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바로 이 원정보사의 빈방에 모여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들고 문화지식과 정치를 학습하였고 군사기능을 익혔던 것이다. 이날 점심 다시 현성에 돌아와 빈관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후 우리는 짐을 챙겨 가지고 산서성 좌권현으로 출발할 계획이였다. 좌권현은 섭현과 린접해 있었다. 섭현에서 답사해야할 마지막 코스인 석문촌을 지나면 바로 좌권현 경내이기때문에 우리는 석문촌을 답사하고 그 길로 계속 좌권현으로 가려 했다. 리숙영과장이 미리 차를 준비시켜주었다. 그리고 줄곧 우리의 답사를 도와주었던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도 석문촌까지 계속 안내하였다.   섭현의 고마운 분들과 혜여지면서(우로 세번째 리사화 로인) 렬사릉원 팔로군 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좌권장군 묘소(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 태항산에서 희생된 진광화, 윤세주 렬사 묘소   차는 섭현 현성을 출발해 고속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달렸다. 맑은 청장하가 굽이굽이 흐르고 한쪽으로는 무연한 산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10여분 달려 우리는 석문촌 련화산(蓮花山) 기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산기슭에 있는 진기(晉冀)렬사릉원으로 향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봉이 멀리 보였고 그 앞에는 낮은 산언덕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산밑 골짜기로 무성한 소나무 숲이 보였다. 우리는 오솔길을 따라 산언덕으로 오르면서 선렬들의 령전에 증정하기 위해 들꽃을 꺾었다. 산기슭 골짜기에 넓은 평지가 있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로 돌비석과 기념탑이 보였는데 좌권장군묘지였다. 해묵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사이에 돌로 쌓은 커다란 묘지와 하늘높이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탑에는 《좌권장군기념탑》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장방형으로 된 묘지앞에는 《좌권장군》이라고 새겨져있었고 그 우에 가로로 《좌권장군비묘》라는 영문자모가 새겨져있었다. 한자 병음을 새긴것이 아니라 우리 글 발음을 영문으로 적혀있는 것이 흥미로웠다. 좌권장군묘는 조선청년련합회 선전부장을 맡았던 조선혁명가 장진광이 설계했다. 중국항일전쟁시기에 희생된 중국공산당의 최고급 장령의 릉원을 조선혁명가가 설계해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의용대에는 얼마나 많은 기술자들이 있었는가를 짐작할수 있었다. 좌권장군묘에서 작은 골짜기를 지나면 높은 산언덕이 있다. 해빛 밝은 언덕에는 조선의용대 주요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의 묘비가 있다. 좌권장군묘소 보다는 많이 작았지만 돌로 정교하게 만든 이들 묘소도 역시 장진광이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1942년 5월 일제의 포위토벌에서 희생된 조선혁명가 진광화, 윤세주는 좌권장군과 함께 이곳에 안장되였던것이다. 답사팀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들꽃을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고 묵도를 드렸다. 윤세주 렬사가 작사한 노래 이 귀전에서 울려퍼지는 듯 하였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지들아/ 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지들아/
96    제66회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창설지 댓글:  조회:5422  추천:0  2014-03-06
1938년 일본침략자들이 수십만 대군을 몰아 무한을 포위공격할 때 포연이 자욱한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조선혁명가들은 2년 남짓한 동안 국민당 통치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과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전과 부패한 국민당 통치는 조선혁명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1941년부터 조선의용대 주력을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북상하여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왔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모인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주력은 팔로군과 함께 어깨겯고 싸우면서 새로운 당을 창립하고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하북성 섭현 하남점진은 1943년이후 조선혁명가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는 하북성 섭현 중원향과 태항산 중심부에 위치한 좌권현에서 활동하였다. 섭현 하남점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답사팀은 2003년 10월 23일 오후에는 중원향 중원촌으로 향했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서 활발한 대적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화북에 있던 많은 조선 이주민들이 조선인 항일부대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수많은 열혈 조선청년들과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병사들은 기회를 타서 조선의용대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신속히 장대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직을 재정비할 중요한 회의를 개최하려했다. 그러나 1942년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대한 일제의 몇차례 토벌로 하여 회의는 7월까지 미루어졌다. 적의 5월 포위토벌을 극복한 조선의용대는 섭현 중원향 중원촌에 집결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으로있던 무정도 포병부대 창설임무를 완수하고 이 시기 새로운 임무를 맡으러 중원촌에 왔다. 이들은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朝鮮靑年聯合會) 제2차회의를 소집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전신인 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섭현 중원향 중원촌의 일각 마을 입구의 문루 중원촌 62번지,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머물렀던 곳 62번지 주민집, 무정이 머물렀다는 가옥 중원향은 섭현 현성에서 4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향 소재지인 중원촌에는 천여명 인구가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였다. 섭현에서 산서성 좌권현(左權縣)으로 통하는 도로가 마을 옆을 지났다. 이따금 마을의 고요를 깨치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농민들은 평지에 조이삭을 말리고있었다. 마을은 조그마한 언덕에 자리잡았는데 우리는 마을 한쪽 귀퉁이에 있는 중원촌 62번지로 찾아갔다. 중원촌 62번지는 커다란 4합원 구조의 건물이다. 대문을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이 있었고 정면에 흙집 한채가 보였다. 매우 낡은 2층 건물이였는데 한쪽 구석에 아직 주민이 살고있었다. 리사화로인이 소개한데 의하면 중원촌에 온 무정과 조선청년련합회 요원들은 이곳에 거주하였다. 집주인은 양언군(楊彦軍)이라는 30대 젊은이였다. 양언군의 할아버지 양면환(楊面煥)은 이 집에서 무정과 조선의용대 간부들을 주숙시켰다고 한다. 무정은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현지인들과 가까이 하기위해 현지의 마청산(馬靑山)과 관주로(關柱勞)를 경위원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양면환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양면환로인도 무정은 중원촌에서 훌륭한 군견 한 마리를 길렀고 군견을 리용해 편지를 전하기도 하였다고 생전에 회억하였다 한다. 62번지의 낡은 2층 건물은 수십명이 거주할수있었고 또 수십명 정도의 회의도 소집할만해 보였다. 그러나 리사화로인은 1984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의 간부들이 중원촌을 답사할 때도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는지 마을의 다른 유적지인 원정보사(元定寶寺)에서 열렸는지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했다고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고 원정보사에서 열렸다는 사람도 있었다는것이다. 조선청년련합회와 조선의용대의 재정비를 목적으로 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는 1942년 7월 14일부터 중원촌에서 열렸다. 각지 분회의 대표들까지 모두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결성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되였다. (권립교수) "대회는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선독립동맹으로,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하였습니다. 국민당이 조선의용대 번호를 취소하자 이곳에서 독립적인 조선의용군을 만들었습니다.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도합 천여명이나 되였습니다. 이들은 중공중앙의 호소를 받들고 대생산운동에 참가한 한편 적후사업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대회에서는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蔡國藩 원명 김호 金浩), 김창만, 왕지연, 리유민, 진한중, 리춘암 등 11명을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고 김두봉을 집행위원회 주임으로 선거하였다.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군은 1944년초 주력이 연안으로 이동할 때까지 줄곧 태항산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화북지대는 조선의용대 대원, 각지에서 온 학생, 소상인, 류랑자, 일본군 통역관 종사자들을 교육 흡수해 근 200여명에 달했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각대로 나누어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항일유격구에서 활동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가장 많이 집중되였고 산동이나 섬서, 화중에도 흩어져 활동하였다.   중원촌의 원정보사 옛터,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 소집지  밖에서 본 원정보사 옛 담 진동남지구는 태항산지역 팔로군 전방총사령부와 129사 사령부가 위치한 곳으로서 중국 팔로군의 활동중심지이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조선혁명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집중되여 있었다. 초기에는 진광화와 윤세주가 이곳 조선혁명활동을 이끌었고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동맹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졌다. 진동남지구는 독립동맹의 총부 소재지이고 의용군의 중심지로서 줄곧 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1942년 8월,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 13명 대원을 거느리고 진찰기지구로 진출하였다. 이곳은 팔로군 115사가 개척한 항일근거지로서 산서성 동북부의 오대산을 중심으로 산서북부, 차할, 하북 북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이에 앞써 조선혁명가 림평(林平), 채국번, 고생호(高生鎬), 김무가 이곳에서 활동하고있었다. 이들은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청년련합회 진찰기 지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리익성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진찰기에 온후 군대는 리익성이 책임지고 적후공작은 채국번이 맡았으며 재편성한 조선독립동맹 진찰기 분맹은 공명우가 책임졌다. 진찰기지구는 조선인이 많았던 북경, 천진, 당산, 기동으로 쉽게 진출할수있었고 또 중국 동북이나 조선 국내에 거점을 만들기 편리하였다. 진서북(晉西北)지구는 려량산맥(呂梁山脈)을 중심으로 한 산서성 서북 산지를 말한다. 하룡이 이끄는 팔로군 120사가 이곳 흥현(興縣)에 주둔하면서 섬북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었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최창익, 허정숙, 최영(崔英)이 진서북에서 활동하고있었다. 그러다가 최창익과 허정숙이 떠났다.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된후 1942년 11월 13일에는 김세광, 문명철, 최채, 최영이 흥현에서 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을 창립하였다. 분맹 책임자는 김세광이였고 조직위원을 맡았던 문명철은 팔로군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문명철(1914―1943)은 전라남도 사람으로서 중국에 건너와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그는 호남성 북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국민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41년 그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했고 1942년, 조선독립동맹 진서북 분맹 조직위원을 맡았다. 그는 수차 적후를 넘나들면서 적과 싸웠다. 1943년 4월 14일, 백여명 적에게 포위된 문명철은 두명 중국인 전사와 함께 싸우다가 마지막에 수류탄을 터뜨림으로서 적과 함께 죽는 희생을 선택하였다. 연안을 중심으로 한 섬감녕(陝甘寧) 지구에는 일찍부터 조선혁명가들이 많이 모여왔다. 이곳은 태항산 항일근거지 다음으로 조선혁명가들이 가장 많이 집결된곳이다. 항일군정대학과 동북간부훈련반(東北幹部訓練班)에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리고 팔로군 359려단에는 주덕해(朱德海)와 리권무(李權武)가 있었다. 정률성과 주덕해가 선후로 섬감녕 지구의 조선청년련합회 지회를 책임졌다. 그러다가 1942년 태항산으로부터 김두봉, 한빈, 윤치평(尹治平), 조렬광, 권혁(權赫 일본녀성), 연군(燕軍) 등이 연안에 도착하여 1943년 1월 10일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을 창립하였다. 항일전쟁후 팔로군 115사는 부분적 유격대를 산동에 파견하여 산동 각지에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주혁(朱革)과 로민(魯民)을 산동에 파견해 조선인 쟁취활동을 진행하게 하였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 대원들이 산동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주혁이 조선독립동맹 산동분맹 주석을 맡았고 리명이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로민은 교동(膠東)분맹을 세워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에 50여명 맹원을 확보하였다. 1943년, 하북성 창려현(昌黎縣) 철남에서 조선독립동맹 기열료 분맹이 창립되였다. 일찍부터 기동에서 활동하던 리대성(李大成)이 조직위원을 맡고 진국화(陳國華)가 선전위원을 맡았으며 주연(朱然)이 정치주임을 맡았다. 책임자는 진찰기 분맹의 군 책임자였던 리익성으로 나타나고있다. 한편 산서성 태악산(太岳山) 지역에는 리옥근, 관건, 조소경(趙少卿), 하앙천(河仰天)이 선후로 팔로군 적군공작부(敵軍工作部)에서 활동하였다. 팔로군 통제지역뿐만 아니라 신사군 활동지역에도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있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공산당이 령도하는 신사군은 장강 이남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환남사변(晥南事變)을 겪었지만 신사군은 계속 강소, 절강, 안휘를 비롯한 화중지역에서 장대해졌다. 1944년 1월, 홍택호(洪澤湖) 부근에서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가 성립되였다. 독립동맹 본부에서 파견한 리성호(李成鎬), 김윤덕(金潤德), 손달(孫達)이 주요책임자로 되였다.   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가 태항산 조선의용군 군정학교를 다닌 항일간부 김응삼과 강재렬 북편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최명세 상해에서 강소북부 조선의용군을 찾아간 항일간부 김현대 동만에서 관내에 가서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항일간부 최강 벽에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전사 태항산에서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창설은 중국 관내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조선독립동맹은 각지에 지하투쟁 일군을 파견하여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단합시켰으며 중국공산당과 적극 협력하여 일제와의 최후승리를 준비해나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소재한 연안뿐만 아니라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으며 강남의 신사군에도 간부들을 파견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장병들은 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동시에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적과 싸웠으며 무장선전, 정보수집, 포로교양을 진행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의 력량을 크게 확대시켜나갔고 또한 중국항일전쟁에 큰 기여를 하였다.      (권립교수) "화북조선청년 련합회는 중공중앙에서 무정동지, 진광화, 리유민 등을 태항산근거지에 파견하여 1941년 1월 10일에 건립한 단체입니다. 회장은 무정이 맡고 조직부장은 리유민이 선출되였습니다."
95    제65회 섭현의 사적지 댓글:  조회:4832  추천:0  2014-02-15
태항산의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2년말에서 1943년 사이에 연안으로 많이 떠났다.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는 새로운 정풍운동이 시작되였고 국내외 정세에 관한 교육이 본격화되여 각지 주요간부들을 소환하였던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에서는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고있었다. 조선독립동맹 조직을 강화하고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려면 많은 간부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태항산에서 싸우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연안으로 떠났다. 태항산에 남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은 1943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의 투쟁을 재조직해 나갔다. 그는 하북성 섭현의 남장촌과 중원촌을 전전하면서 조선의용군 교육을 강화하고 부대를 확대했다. 그리고 투쟁경험이 풍부한 간부들을 각지 조선인이 집거한 곳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투쟁에로 이끌었다. (권립교수) “무정동지는 “그러다가 1941년부터 당중앙의 명령에 따라 화북지구의 조선인민을 조직하는 사업에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조직사업과 조선의용군 지도사업에 나섰습니다.” 무정이 남장에 머물렀던 집 정문 무정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거처했던 곳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이 남장촌에 거처했던곳은 현지의 지주집이였다. 지금의 남장촌 528번지와 529번지에 유적이 남아있다. 답사팀이 흙집과 벽돌집이 섞여 있는 남장촌의 좁고 그늘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담으로 둘러싼 커다란 집 한채가 보였다. 담은 후에 벽돌로 다시 쌓은것으로 보이나 비교적 정교하게 만든 정문에서 우리는 옛 건물모습을 어렴풋이 보아낼수 있었다. 입구에는 하남점진 남장촌 528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고 마당 세면에 낡은 건물들이 있었다. 맞은 편에는 흙으로 된 단층집이 있었는데 금방 허물어질것만 같았다. 왼편 역시 2층으로 된 낡은 흙집이였다. 그리고 오른쪽에 검푸른 벽돌로 만든 비교적 괜찮아 보이는 2층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지주가 살던 집이였고 후에 무정과 경위원이 거처를 잡았던 곳이다. 집 옆에 비슷한 벽돌 단층집이 있었다. 역시 검푸른 벽돌로 만들어진 괜찮은 집이였는데 번지수는 529번지였다. 당시 지주 집은 모두 벽돌로 된 좋은 건물이였다. 지금 볼수 있는 흙집들은 마을사람들이 지주 집 넓은 뜨락에 새로 지은 집이다. 비록 새로 지었다하지만 흙으로 지었기때문에 오히려 더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항일전쟁시기 무정사령원이 머물렀던 집은 528번지의 2층으로 된 벽돌집이였고 529번지의 벽돌로 지은 단층집은 의용군 간부들이 머물던 곳이였다. 남장촌에서 우리는 리사화로인의 소개로 무정사령원의 통신원으로 있었던 왕소안(王小安 76세)로인을 만났다. 1943년 당시 16세 어린 나이였던 왕소안로인은 근 3년간 무정의 통신원으로 있었다. 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남장촌에는 조선의용군과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 도합 300여명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웠기때문에 무정은 전사들과 학원들을 거느리고 훈련과 학습을 하는 한편 부근의 산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를 심었다. 조선의용군사령부에는 무정과 취사원(炊事員) 한명, 경위원 두명 하여 4사람이 있었다. 무정은 사격술이 대단하였다. 계절에 따라 강가에 나가 물오리를 사냥하였는데 늘 백발백중이였다. 하남점진에는 의용군이 운영하는 대중병원(大衆醫院)이 있었는데 한번은 왕소안이 무정의 편지를 병원의 백은도(白殷道)원장에게 전했다. 백은도원장은 서한을 본 다음 무료로 왕소안의 신체검사를 해주었다. 무정을 비롯해 조선의용군은 모두 조선말을 하였는데 현지인들과만 중국어로 대화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다리에 난 상처를 가르키면서 부상당하던 경위를 이야기했다. 한번은 그가 무정사령의 명령에 따라 소금 구하러 형대부근으로 갔었다. 그때 적의 포격을 받았는데 파편에 상처를 입었던것이다. 다행히 동행했던 김부장이 그를 부축하여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였다한다. 왕소안로인은, 무정사령부에 4명 부장이 있었는데 한분은 김씨이고 한분은 양씨라고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당시 성씨에 직함을 붙여 불렀기때문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1944년 조선독립동맹이 태항산을 떠나 연안으로 간 다음, 나머지 조선의용군은 무정과 함께 야전사령부 정치부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직, 선전, 경영 등 세개 부를 두었는데 리유민(李維民)이 조직부장, 김창만이 선전부장을 맡고 홍림(洪林)이 경영부를 책임졌다. 선전부 산하에 양계가 선전과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왕소안로인이 회억한대로 무정과 함께 있었다는 김씨, 양씨 성을 가진 간부는 선전부 부장인 김창만, 선전과장인 양계인것으로 추정된다. 왕소안로인 내외분은 남장촌 431번지에 살고있었다. 낡은 단층집이였는데 구들에는 잘 포개여놓은 이불과 나무 궤가 있었고 바닥에 낡은 쏘파 하나가 있었을 뿐이다. 왕소안로인은 조선에서 보내온 화책(畵冊) 두권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섭현에서 활동할때 무정은 남장촌 마을사람들의 상황을 더욱 잘 료해하기 위해 나이가 어리고 순박한 왕소안을 통신원으로 받아들였던것이다. 1945년 무정은 명령에 따라 요원들을 거느리고 연안으로 갔지만 왕소안은 그냥 고향에 남아있다보니 부대와의 련락을 다시 가지지 못했다. 해방후 왕소안로인은 3년간 군 복무를 하였다는 증명이 없었기때문에 줄곧 평범한 농민으로 지금까지 지냈다. 왕소안로인은 후에 조선에서 화책을 보내주었다고 하였다. 무정의 경위원을 맡았던 남장의 왕소안 로인 남장의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옛터에서 왕소안 로인(좌)과 함께 답사팀은 남장촌으로부터 하남점진 하일촌(河一村)으로 갔다. 강 건너에 위치한 하일촌은 남장촌 보다 퍽 작았고 마을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 보였다. 1,000여명 인구가 사는 마을 집들은 매우 낡아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생산운동에 나선 조선의용군은 하일촌에서 3.1상점, 대중병원, 사진관, 방직공장을 운영하였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일본침략군은 병력과 물력 부족으로 본격전인 공격전을 개시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적들은 정면전장에서 국민당군에게 계속 압력을 가하는 한편 팔로군들이 활동하는 항일근거지에 대해서는 포위와 봉쇄 정책을 실시하였다. 게다가 련속되는 가물로하여 태항산근거지에는 기근이 들었다.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생산자구(生産自救)》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43년 무정이 태항산에 온후 조선의용군의 생산활동은 본격화 되였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감자나 채소를 심고 목화를 재배했을 뿐만아니라 변구 진남은행(晉南銀行)으로부터 돈 만원을 빌려 병원과 상점, 리발소를 차렸다. 무정의 1945년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의용군의 경제운영 상황이 상세히 밝혀지고있다. 하일촌에는 하남점인민법정(河南店人民法庭)이 있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였는데 이곳이 바로 항일전쟁시기 의용군이 운영하던 3.1상점 옛터이다. 3.1상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내여 세운 상점으로서 쌀, 소금, 비누, 성냥을 팔았다. 점원은 4명이였고 책임자는 신태식(申泰植)이였다.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였는데 부지런히 운영하여 10만원의 월수입을 올렸다. 명절이면 상점에서는 렴가로 항일가족이거나 빈민들에게 물품을 내주었고 또 늘 마을사람들을 도와 좋은 일을 해주었다. 3.1상점 옛터에서 조금 더 나가면 낡은 옛집이 있었다. 괜찮은 부호의 집이 아니면 사당 자리인것 같았다. 정문에는 하남점진 하일촌 112번지라고 밝혀있었다. 리사화로인은 이곳이 의용군이 경영한 대중병원 유적지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112번지 건물과 그 옆의 114번지 건물이 모두 대중병원으로 사용되였던 건물이라고 알려주었다. 대중병원은 1943년 3월 2,000여원을 투자해 세운 병원으로서 내과와 외과, 약제실이 갖추어졌었다. 백퇀대전(百團大戰)때 팔로군에 체포되여 항일근거지에 오게 된 백은도는 교육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참가한뒤 내과의사겸 대중병원의 원장을 지냈다. 부원장이며 외과의사였던 김상현(金尙顯)은 자원적으로 의용군사업에 참가하였다가 병원에 배속되였다. 약제사 김희원(金熙元)은 1942년 12월 림분(臨汾)에 주둔했던 적군으로부터 도주해 온 자원병(自願兵)이였다. 그리고 리화림(李華林)을 비롯한 일부 녀성의무일군도 한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모두 조선 사람이였다. 병원은 월수입이 3만여원이였다. 병원 의사들은 의술에 많은 심혈을 쏟았으며 각종 소염제를 만들어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병원은 또 많은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거나 약값만 받았다. 그리고 계절마다 마을사람들에게 천연두 예방주사를 놔주었다. 의용군이 운영한 3.1방직공장은 대중병원 뒤쪽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을뿐이다. 방직공장은 1945년 3월 1일에 착공하였고 책임자는 홍림이였다. 공장에 30여명 로동자가 있었는데 모두 조선인이였다. 리사화로인은, 하일촌 마을 입구에 조선의용군이 세운 사진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버드나무 한그루와 그 옆에 찌그러진 집 한채가 있을뿐이였다. 조선의용군은 이처럼 어려운 환경속에서 생산경영운동을 적극 전개해 자급자족 하였을뿐만아니라 현지 백성들을 도와주면서 힘을 키웠다. 문화지식이 있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단순한 농사뿐만아니라 병원이나 상점, 공장 경영도 곧잘 해냈던것이다. 조선의용군이 꾸린 "3.1상점" 이 있었던 곳 조선의용군이 꾸린 대중병원 건물 대중병원으로 리용되였던 옛 건물 하일촌 마을을 떠나면서 조선의용군의 사적지들을 너무나도 잘 아는 리사화로인에게 감탄이 갔다. 리사화로인은 1984년 5월에 12명으로 구성된 연변조선족자치주 원 조선의용군 간부 전적지 고찰단이 섭현에 왔다고 하면서 그때 그분들과 함께 다니며 기억해 두었다고 설명해주었다. 1984년에 섭현을 방문한 원 조선의용군 간부로는 윤재덕(尹載德), 정길운(鄭吉雲), 최명세(崔明世), 리섭, 고철 등이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이들이 항일전쟁시기 직접 활동했던 옛 사적지를 둘러보고 자상히 설명한것이 지금 섭현 당사연구실 자료로 남아있다. 다음은 하남점진 적안촌(赤岸村)으로 갔다. 팔로군 129사 군부가 있었던 적안촌은 지금 혁명전통 관광을 이르는 《홍색관광(紅色旅遊)》을 적극 개발하고있다. 거액을 투자하여 유적지들을 잘 복원하였기때문에 지금 많은 관광객을 류치하고 있다한다. 적안촌은 하남점진 서북쪽으로 2, 3킬로메터 떨어진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129사 사령부와 중공중앙 북방국 태항분국, 태항구(太行區) 당위원회가 있던 곳이다. 팔로군 129사는 홍군 제4방면군과 부분적인 섬북홍군으로 개편한 부대이다. 류백승이 사장, 서향전이 부사장을 맡았고 1938년에는 등소평(鄧小平)이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1937년 10월 19일, 화북에 진출한 129사 769퇀이 양명보(陽明堡) 비행장을 습격하였다. 한시간 격전을 거쳐 24대의 적기를 불태워버리고 100여명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양명보 습격전은 129사의 첫 항일 대승전이였다. 1938년 2월, 129사 주력부대는 장생구(長生口), 신두령(神頭嶺), 향당포(響堂鋪) 등 3차례 전역을 펼쳐 침략자들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1940년 하반기에 들어서서 중국은 극심한 위기에 처하게 되였다. 국민당군의 정면전쟁의 실패로하여 장개석은 중경을 비롯한 서북 오지에 몰리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중경까지 쳐들어간다고 위협하면서 비밀리에 국민당과 담판을 진행하였다. 인력, 물력 부족으로 장기전을 할수 없었던 일본은 시급히 장개석의 항복을 받아내야 했던것이다. 일제의 막강한 허울에 질겁한 사람이 많았기때문에 전반 중국은 실패와 망국의 비분에 잠겨있었다. 이런 비관정서를 떨쳐버리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공격전을 개시하여 전국 인민의 항전의지를 고무하기로 결정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 팔로군 100여개 퇀이 일제가 통제한 정태선(正太線)을 차단하기 위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백퇀대전이다. 129사는 120사와 협동하여 3개월 남짓한 공격전에서 수만명 적을 소멸하였다. 129사만 하여도 크고 작은 전투 500여차를 겪었으며 7,500여명 적을 소멸함으로써 휘황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29사의 적극적인 항일전과 휘황한 전과는 전민의 항쟁을 한껏 고조시켰고 적후 항일근거지도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였다. 이해 12월 129사는 사령부를 섭현 적안촌에 설치하였다. 적안촌의 팔로군 129사 지휘부 기념비 129사 류백승, 등소평 등 지휘원들의 동상 129사 사단 지휘부 건물 적안촌의 129사단 지휘부로 통하는 돌계단 길 적안촌을 찾은 조선의용군 항일로간부(1984년) 적안촌에 들어서면 붉은 기 모양으로 된 붉은 돌비석을 보게 된다. 비석에는 129사라는 금빛글발이 새겨져 있었고 비석뒤편 광장에는 129사 지휘원들의 동상이 있었다. 가운데 류백승과 등소평이 서고 그 옆에 4명의 사령부 요원이 둘러서있는 모습이였다. 적안촌은 산세를 타고 형성된 마을이다. 부지면적이 1,800여평방메터인 사령부 옛터는 하원(下院), 상원(上院), 후원(后院) 세개 4합원 구조의 집으로 되였다. 하원은 현지인들이 제를 지내던 사원자리였다. 사령부 회의실, 사무실, 경위원 숙사가 이곳에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담과 집들이 있었는데 사령부 옛터의 상원이였다. 가운데 사령부 각 부서 집무실 자리가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류백승과 등소평의 옛 거처가 있었다. 상원은 섭현의 가장 큰 부자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1940년, 연안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리유민을 비롯한 10여명 조선혁명가들이 팔로군 사령부 산하의 적공부(敵工部)에 배치되여 한동안 사업하였다. 그들은 로획한 적의 문서와 정보를 번역하고 적군포로를 심문하였으며 대적선전 계획을 세우는 등 일들을 하였다. 상원 뒤편으로 후원이 있었는데 작전실과 사령부 기타 요원들의 거처였다. 류백승과 등소평은 5년간 이곳에서 항일전쟁을 지휘하였다. 적안촌 마을 서북쪽에는 묘파산(廟坡山)이 있다. 지금 산에는 렬사기념탑과 정자, 장군들의 묘소가 축조되여 장엄한 분위기가 한결 짙었다. 129사 출신인 류백승 원수와 서향전 원수, 리달(李達) 장군을 비롯해 6명 공화국 원수와 장군의 골회가 이 산에 묻혀있다. 1990년 등소평이 칠필로 《장군령(將軍嶺)》이라는 석자를 써주었는데 지금 이 글은 산언덕 담벽에 새겨져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사람들은 묘파산을 장군령이라고 부르고있다.
94    제64회 하북성 섭현의 남장 댓글:  조회:3705  추천:1  2014-02-10
무연한 황토고원(黃土高原)과 화북평원을 동서로 량분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항산맥(太行山脈)은 항일전쟁시기 적후 유격투쟁이 가장 치렬하였던곳이다. 태항산의 옛 명칭은 대형산(大形山)인데 산세가 웅장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태항산은 지세가 험악하고 요새가 많아 유격전을 펼치기가 적성인 곳이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적후에 깊이 들어가 싸웠다. 조선혁명자들은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다음 반일최전선에 나가 싸우기 위해 단연히 북상하여 태항산구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팔로군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항일전쟁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적과 싸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 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자욱이 력력히 남아있다.   유유히 흐르는 청장하 하북성 섭현의 명소 왜황궁 녀와 광장 옛건물을 수선해 축조한 관광명소 왜황궁 한단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하북성 섭현(涉縣)으로 향했다. 한단시 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섭현까지 갈수 없는가고 문의하였다. 녀기사가 갈수있다고 하자 가격을 흥정하고 섭현으로 떠났다. 한단시를 벗어날 때 녀기사는 집에 들려 남편을 불러냈다. 자기는 길을 잘 모르니 남편이 모셔다 준다는것이다. 차는 한단시를 벗어나 309국도를 따라 서부로 달렸다. 잘 닦아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지만 석탄을 가득 싣고 달리는 트럭을 많이 볼수있었다. 석탄이 많이 나는 산서성으로부터 석탄을 날라 화북평원을 통해 멀리 수송해 가는것이였다. 석탄트럭이 많이 다니기때문에 길바닥에는 석탄먼지가 많았다. 차가 지날 때마다 수면에 파문을 내듯이 검은 석탄먼지가 길바닥에서 맴돌았다. 산서성과 린접한 섭현은 한단과 20, 30킬로메터 떨어져있다. 섭현은 1,500여평방킬로메터 면적에 38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이곳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호두를 비롯한 농산물이 유명한 고장일뿐만아니라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섭현 현성에서 12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왜황궁(媧皇宮)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왜황궁은 봉황산(鳳凰山) 산허리에 축조된 1450년전의 건물이다. 4, 5층 정교한 루각이 산 벼랑에 축조되여 반공중에 걸린 것이 그야말로 귀부신공(鬼斧神工)의 걸작이다. 왜황궁은 돌로 구멍난 하늘을 막고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다는 중국의 유명한 전설의 주인공인 녀와씨(女媧氏)를 기념해 만들었는데 북제(北齊) 시기부터 축조되였다. 지금 이 건물은 하북성 10대 고대건물의 하나로 유명하다. 섭현의 선전부와 이미 련락이 되였기때문에 차는 곧바로 섭현 현정부에 도착하였다. 선전부의 언론담당인 리숙영(李淑英)과장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리숙영과장은 30대 젊은 녀성이였는데 매우 활달하고 친절했다. 그녀는 우리를 현정부 초대소(招待所)로 안내해 주었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섭현의 선전부 부부장 장화평(張華平)과 문학예술가련합회 부주석 강옹군(江擁軍)이 호텔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사전에 우리의 답사 목적을 알려주었기때문에 이들은 원 섭현 당사판공실 주임이였던 리사화(李士華)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섭현에서 학식이 가장 뛰여나다하여 《섭현공부자(涉縣孔夫子)》라는 아호를 가진 분이다. 섭현의 공자님이라는 뜻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호텔방에 모여 앉아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리사화로인은 71세 고령이였지만 몸은 퍽 건장하였고 또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는 섭현의 중원촌(中原村), 남장(南莊), 석문촌(石門村) 등지에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섭현은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지가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미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였으므로 다른 곳을 답사하지 못하고 우리는 호텔에서 리사화 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섭현의 "공자" 리사화 로인(좌)와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우)  리사회로인의 이야기[1]: 1943년에 태항산 항일근거지 인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적들의 철벽같은 포위로 물품이 아주 결핍하였고 쌀도 많지 않았다. 당시 섭현에 머물던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긴장한 학습과 훈련,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함과 동시에 대생산 운동에 참가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옥수수, 감자를 심었고 적후의 련락소를 통해 소중한 물품을 구해왔다. 극도로 빈곤한 근거지의 의용군 식생활을 보면 야채와 나물이 고작이였고 대부분 좁쌀 죽으로 끼니를 에워야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자리잡고있는 남장촌(南莊村) 뒤산 골짜기에는 낡은 절이 있었다. 절에는 사묘(司苗), 사과(司果)라는 중 두명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가 일제가 파견한 밀정이였다. 사묘와 사과는 늘 팔로군의 행적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정보를 일제 본부에 전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팔로군이나 의용군 전사들에게 접근하여 금전과 부귀로서 회유하려 들었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가서 감자를 심는 일을 하게 되였다. 휴식할 때 사묘와 사과는 혼자 있는 의용군 전사 차만길(車萬吉)에게 접근했다. 두놈은 나물과 죽을 먹으며 이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일본군으로 넘어오라고 차만길을 구슬렸다.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의 정보를 알려주면 많은 돈을 줄것이며 또 큰 도시에 가서 호강시켜주겠다고 했다. 차만길은 짐짓 생각해보겠다고 하고서는 두놈이 떠난후 즉시 무정사령에게 보고하였다. 무정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절에 찾아가 사묘와 사과를 체포하고 심문하였다. 놈들은 일제의 파견을 받고 이곳에 왔다고 실토하였고 의용군은 마을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두놈의 죄장을 밝힌 다음 총살해 버렸다. 리사화로인의 이야기 [2]: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은 섭현 중원향(中原鄕) 중원촌에 있을 때 한 지주 집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중원촌은 강을 사이 두고 팔로군 사령부와 마주하고있었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이 불때면 강을 건널수 없어 고생이였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긴급한 상황을 팔로군 사령부에 전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장마철이라 강을 건널수 없었다. 무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며 잘 훈련시킨 군견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편지를 군견의 목에 매달아 강을 건너게 하였다. 주인의 뜻을 안 군견은 재치있게 헤염쳐 강을 건너 편지를 전했고 또 답장까지 받아가지고 왔다 한다. 우리는 저녁까지 리사화로인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남점진 남장의 희대, 우리글로 "중조한 우의기념대"라고 쓴것이 흥미롭다 남장유아원, 원 조선청년간부 학교 터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 10월 23일은 태항산지역 답사를 시작한 네번째 날이였다. 섭현에는 답사할 곳이 많고 내용도 많기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찍 일에 달라붙었다.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이 선뜻 길 안내를 나섰고 선전부의 리숙영과장이 우리를 배동해주었다. 우리는 먼저 하남점진(河南店鎭) 남장촌으로 향했다. 청장하(淸漳河) 기슭에 자리잡은 하남점진은 섭현 현성에서 2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진정부 동남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남장촌에 이르게 된다. 대부분 흙으로 만든 집이였고 이따금 검푸른 벽돌로 지은 기와집이 보였다. 원래는 마을이 위치가 낮은 청장하 기슭에 자리잡았지만 물이 자주 지기때문에 부근의 산언덕으로 옮겼다 한다. 남장촌에는 근 4,000명 인구가 살고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은 바로 이 마을에 주둔했던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공지가 나타났고 거기에는 커다란 로천 무대가 있었다. 현지인들은 로천무대를 《희대(戱臺)》라고 불렀다. 명절이면 《희대》에서 공연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지에 모여 재미나게 여러가지 공연을 구경하였다 한다. 벽돌과 콩크리트로 만든 무대건물 웃부분에는 모택동 초상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 남장이라고 씌여있었다. 더욱 재미나는것은 남장이라고 쓴 아래에 우리 글로 《중조한우의기념대》라고 밝혀놓은것이였다. 중국과 조선, 한국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수교하기전에는 무조건 《중조우의기념대》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한국을 포함해 넣었다는것이 흥미로웠다. 구태여 외교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과 함께 지냈던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조선과 한국을 동일시하고있음을 느낄수있었다. 그만큼 모든것을 포용할수 있는 현지인들의 그 넉넉함에 감탄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 이 기념대는 남장의 문화센터로 사용되고있다. 자주 사용되는건 아니지만 명절이나 큰 대회가 있으면 이곳에 모여 공연도 하고 촌민회의를 소집하기도 한다. 《희대》는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 군사간부학교가 설립될 때 학교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항일을 선전하는 연설을 하거나 재미나는 공연을 선보였던것이다. 섭현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린접한 곳에 위치하였다. 지형적으로 보면 태항산 중심부분과 가까운 이곳은 또한 태항산 중심에서 하북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하다. 조선혁명가들은 대체적으로 1943년경에 섭현에 모여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이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였고 조선혁명가 무정이 사령원을 맡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자체의 군대로서 조선의용군을 가지고있었고 당으로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투쟁의 수요에 따라 많은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꾸렸는데 섭현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중조한우의기념대》가 있는 공지 한쪽에는 남장 유아활동중심(幼兒活動中心)이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 곁에 철대문이 있었고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주변에 단층으로된 벽돌기와 건물이 둘러있었다. 그중 서쪽의 단층 벽돌집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였다. 건물구조를 보아 옛날 절간으로 사용한 건물임을 짐작할수있었다. 문 옆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현판이 붙어있었다. 현판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년간 이곳에 있었다. 1943년 4월 조선의용군 본부와 조선독립동맹은 남장촌에 주둔하였으며 이해 9월, 남장촌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해 당, 정, 군 간부 300여명을 양성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조선혁명가들은 각 곳에 많은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을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혹은 《태항산군정학교》라고도 불렀다. 1943년 12월, 일제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조선의용군 주력은 연안에 집결하였다. 그때 태항산근거지에 있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으로 떠났지만 무정은 계속 남아 팔로군의 사무를 보면서 조선청년 간부양성에 몰두하였다. 동북과 화북에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하여 태항산근거지에 온 많은 조선청년들은 섭현 남장에 있는 이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졸업직후 연안으로 가거나 다시 지하투쟁 임무를 맡고 적후로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고철(高哲)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1944년, 남장 마을 어귀에 빈 절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갔기때문에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절에는 늘 향불이 피워져있었다. 당시 성냥이 몹시 귀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피워놓은 향불은 전사들의 담뱃불로 잘 씌였다한다. 100여명 학원들이 학교에서 학습하고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간소한 시설로 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리섭(李涉)선생이 남긴 회억록에 의하면 낡은 절간을 보수해 만든 학교는 교탁이나 책걸상이 따로 없었다. 학원들은 얇은 이불을 깔고 앉아 무릎우에 필기장을 놓고 공부하였다. 이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학원들은 팔로군과 함께 대생산운동을 하였고 선전과 군사훈련에 열중하였으며 또 상급의 지시에 따라 적후를 넘나들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근거지에 필요한 약품과 물자를 날라왔으며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적의 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엿한 조선의용군 전사로, 조선혁명 간부로 성장했던것이다. 1945년 3월 1일에 태항산 군정학교가 재 출범하였는데 그때 전교에 293명 학원이 있었다. 무정이 교장을 맡고 무정, 양계(楊界), 박무 3명이 정치과를 맡았다. 그리고 교무주임에 장지민, 교무간사에 공명우(孔明宇 일명 주성 朱星)이 맡았다.  
93    제63회 진기로예 렬사릉원 댓글:  조회:3863  추천:0  2014-02-07
중국항일전쟁사에서는 팔로군의 “랑아산의 다섯용사”를 영웅의 전범으로 간주한다. 우세한 일본침략군에게 포위된 팔로군의 다섯용사가 랑아산의 천길 벼랑에 몸을 던져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민족의 항일영웅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장렬한 희생도 이에 조금도 무색하지 않는 영웅적 행동이였다. 죽을때까지 원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려는 의욕으로 적을 붙안고 수류탄을 터쳐 함께 죽음을 선택하였던 손일봉과 한청도 그리고 탄약과 수류탄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총검을 비껴들고 적과 마지막 힘을 다해 백병전을 하였던 박철동, 이들은 자랑찬 우리민족의 항일영웅으로 꼽히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인민을 포함한 모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중국대지에 피흘리며 싸운 영웅이였다. 이들의 빛나는 이름은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태항산기슭의 호가장 전투와 더불어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답사팀이 석가장 근교의 호가장 전적지를 답사하고나서 다른 한 목적지 한단으로 출발한 것은 10월 22일 아침이였다. 우리는 석가장 장거리 뻐스역에서 뻐스를 타고 한단으로 출발하였다. 중국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는 진기로예 렬사 릉원이 한단에 있었고 거기에는 조선의용대의 지도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묘비가 있었던 것이다. 한단까지는 고속도로를 리용해 4시간 정도 시간이 수요된다. 하북성 남부에 위치한 한단은 동력과 원자재 특히는 방직공업으로 유명한 공업도시일뿐만 아니라 남부로부터 하북성에 들어오는 교통중추이기도 하다. 고대문화도시인 한단은 전국시기 조(趙)나라 도읍이였는데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후 이곳에 한단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초기 한단은 5대 상업도시의 하나로 유명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한단 부근에는 전국시기 유적을 많이 찾아볼수 있다. 한단시에 도착하여 진기로예(晉冀魯豫) 렬사릉원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한단시 기차역광장의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유명한 조각상을 보았다. 가벼운 복장에 투구와 갑옷을 거치고 활을 들고 말을 달리는 무사의 동상이였는데 이는 고도인 한단의 상징이라고 한다. 호복기사 동상(한단 기차역 앞에 세운 호북기사 동상)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호복기사에는 이러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한다. 전국시기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할 때 조나라는 국세가 약화되여 외부의 침습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북방의 유목민족의 습격과 겁탈을 많이 당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이들과의 접전에서 늘 패하군 하였다. 무령왕은 수차의 싸움 끝에 조나라 군대가 실패한 원인을 밝혀냈다. 조나라 병사들은 소매가 너른 불편한 복장을 한데다가 무거운 갑옷을 거치고 또 굼뜬 전차를 따라 다녔기에 기동성이 약했다. 반면 가벼운 차림을 한 유목민족의 기병들은 신속히 돌진하였을 뿐만아니라 활을 백발백중으로 쏘았던것이다. 무령왕은 보수적인 여러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의 고집을 꺾고 단연 병사들의 군복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가벼운 차림으로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결과 조나라는 수차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국시기 군웅(群雄)의 위치를 지키게 되었다 한다. 호복기사란 북방유목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달려 활을 쏜다는 뜻이다. 옛 이야기였지만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경제성장과 인민의 생활향상에 전념하는 중국의 현황을 설명해주는것 같기도 하였다. 한단시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굽어져 릉원로(陵園路)를 따라가면 록음이 우거진 거대한 릉원을 볼수있는데 이곳이 바로 진기로예렬사릉원이다. 릉원로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총부 전방사령부와 정치부, 진기로예군구 희생자들 그리고 팔로군 129사의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1946년에 착공하여 1950년 10월에 준공된 릉원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일찍 축조되고 규모가 비교적 큰 렬사릉원이다. 철대문으로 된 정문 한쪽에는 흰 대리석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진기로예렬사릉원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1986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전국중점 렬사기념건축물보호단위로 되였다고 밝혀있었다. 1995년에는 국가민정부에서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320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정문이 있는 북원에 들어서면 하늘높이 치솟은 회색 기념탑이 보인다. 탑에는 모택동이 쓴 《무상광영(無上光榮)》이라는 금빛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북원은 렬사기념탑을 제외하고도 인민영웅기념묘소, 진렬관, 4.8렬사각(四八烈士閣), 렬사기념당, 좌권장군묘(左權將軍墓), 좌권장군기념관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는 1937년 겨울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7.7》사변이후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정면전장에서 거듭 실패하자 북상한 팔로군 각 부대는 태항산에 의지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팔로군 115사는 평형관(平型關)전투에서 승리한후 산서북부, 차할, 하북북부에 근거지를 창설하였고 129사는 태항산을 중심으로 산서, 하북, 하남, 산동을 포함한 광활한 진기로예항일혁명근거지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에만 하여도 무려 10만 7천여명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릉원 중심부에 모셔진 좌권장군묘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팔로군 부총참모장이였던 좌권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팔로군 최고 간부였다. 좌권장군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홍군시기 조선혁명가 양림의 후임으로 홍군 제1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팔로군 부총참모장을 담임했고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웠다. 1942년에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태항산 항일근거지를 토벌하였고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1942년 5월 일본침략자의 포위토벌을 반격해 싸운 전투를 이라고 한다. 좌권은 5월의 혈전에서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팔로군총부 전투부대를 지휘하여 총부 지휘원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의 조선혁명가 진광화(陳光華)와 윤세주도 5월의 반포위토벌전에서 희생되여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에 매장 되었다가 해방후 한단렬사릉원으로 옮겨졌다. 답사팀을 함께 했던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는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한단 기열료 렬사릉원입니다. 이 뒤에 보이는 것이 좌권장군 묘이고 그 곁에 진광화 렬사 묘입니다. 1942년 5월 태항산의 반소탕전에서 희생되였는데 좌권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최고급 간부입니다.진광화렬사 묘소는 그 곁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니 진광화렬사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진기로예 렬사릉원의 기념비 렬사릉원 간판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릉원의 기념동상 조선혁명가 진광화의 묘소 진광화렬사 묘지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에 위치한 좌권장군묘소 한켠에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된 렬사들의 묘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혁명가 진광화(1911―1942)렬사묘가 있었다. 원형으로 된 묘소곁에는 바람벽처럼 만들어놓은 렬사들의 묘지(墓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진광화렬사의 묘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혁명렬사 진광화동지묘지, 광화렬사의 원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평천리(平川里) 사람으로서 1911년에 태여났다. 그는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후 반일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왔다. 그는 1937년에 광주에서 중국 국립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일찍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 그리고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하였다.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38년에 화북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해 중국공산당 북방국 진기예구(晉冀豫區) 당부에서 중요한 사업을 맡았다. 1941년에 화북 조선청년련합회를 설립, 령도하였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싸우다 산서 편성(便城) 화옥산(花玉山)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진기로예변구 당정군민 및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렬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움.》 진광화는 1929년에 평양상업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혁명당 산하단체인 철혈단(鐵血團)에 가입하였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광주(光州)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동맹휴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으로 건너와 오세(五世)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남경에서 그는 남경 조선인 류학생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남경의 조선인협회인 한교회(韓僑會)의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그는 중국 광주에 가서 국립중산대학 문학원 교육학부에 입학하였다. 중산대학에는 30여명 조선학생들이 있었다. 진광화는 조선학생들을 단합시키고 진보적인 중국학생들과 접촉하면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광동의 당조직을 회복할 때 중산대학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조선학생이 중산대학 당지부서기를 맡았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진광화는 학생들가운데서 덕망이 높았고 조직력도 강하였던것이다. 학교시절 그는 리소문(李蘇文)을 비롯한 조선학생들과 함께 《12.9》애국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사후 일부 학생들이 체포되였는데 그 가운데 7명 조선학생도 포함되였다. 학교측에서는 리소문을 강제 퇴학시켰다. 조선학생들은 학교당국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보석 석방할것을 교장에게 요구했고 또 강제 퇴학령을 취소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 학생들은 집단퇴학할 것이라고 하였다. 진광화가 령도한 이번 학생투쟁에서 학교측은 할수없이 학생들의 정의적인 요구를 들어주게 되였다. 진광화는 또 로신서거 기념대회에 참가해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일제 침략하에 있는 조선인민의 고통을 이야기하여 장내 1,000여명 중산대학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37년 7월, 진광화는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갔다. 그는 연안에 있던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였고 1939년에는 팔로군 전방사령부 정치부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진광화는 진기로예변구 당학교 교무과장, 조직과장 겸 총지서기로 있었고 조선청년련합회 진기로예지회 회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지도원 사업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그는 태항산에서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윤세주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렬사릉원 남원의 렬사공묘 남원에 모셔진 조선혁명가 윤세주 렬사묘비 한국의 렬사유가족이 윤세주 렬사묘소를 참배하고있는 장면 진기로예렬사릉원 남원은 북원과 길하나를 사이두고있었다. 길을 건너 남원에 들어서니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정면에 장엄한 비석 하나가 서있었다. 비석에는 인민해방군진기로예렬사공묘(烈士公墓)라고 씌여있었다. 광장을 지나니 넓은 평지에 정연하게 렬사들의 묘지가 배렬되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는 약 200명 렬사가 고이 잠들고있다. 렬사들의 고혼을 깨울세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조선혁명렬사 윤세주의 묘소를 찾아갔다. 장방형으로 된 정결한 묘소 앞에는 검은 대리석 묘비가 있었다. 거기에는 중문과 조선글로 《석정윤세주렬사(石鼎尹世冑烈士)》라고 씌여있었다. 윤세주(1901―1942)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여났다. 《3.1》운동시 그는 윤치형(尹致衡)과 함께 밀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세주는 일제가 1년 6개월이라는 궐석재판을 언도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류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 윤세주는 김원봉을 만나 함께 길림에서 조선의렬단을 창단하고 단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에 의렬단 대부분 단원들이 조선내에 들어가 암살과 파괴 활동을 전개하려했지만 행적이 발각되여 많은 단원들이 일제에게 체포되였다. 윤세주는 당시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악착같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윤세주는 출옥후 다시 중국에 와서 독립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다시 김원봉과 합류하였고 조선혁명당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윤세주는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학교 교관으로 있었으며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조선인 특별반 교관으로 있었다. 1938년 그는 무한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건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용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선전사업을 맡은 그는 조문판(朝文版) 주필을 맡고 간행물 《전고(戰鼓)》를 편찬하였다. 무한이 함락된후 김원봉과 함께 중경에 갔던 윤세주는 김원봉의 파견을 받고 조선의용대 주력을 거느리고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조선청년과 혁명자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학식이 많은 윤세주를 매우 존경하였다. 1942년 5월에 그는 태항산에서 진광화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민족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중국 태항산에 뼈를 묻은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를 생각하니 우리는 마음이 아파났다. 국화꽃을 사서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령전에 묵도를 드렸다.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각오하고 싸웠던 렬사들, 우리의 귀전에는 윤세주가 작사한 유명한 노래 이 들려왔다. 진기로예렬사릉원에 정중히 모신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의 불굴의 투쟁사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투쟁행적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조선민족 투사들이 영용히 싸웠던 태항산, 중국대지에 우뚝 솟아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영용히 항격했던 태항산은 우리를 부르고있다.  
92    제62회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 댓글:  조회:3677  추천:0  2014-02-04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풍기던 처절한 호가장전투는 끝났다. 적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수류탄을 터친 손일봉과 한청도, 적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총창에 쓰러진 박철동......이들의 영웅적 행동과 자아희생정신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중국 화북대지의 작은 마을로서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고장이다. 마을 구석구석에는 옛날 사용했던 우물이며 석마가 보였다. 단풍든 마을 뒷산으로 오불꼬불한 산길이 하나 있었다. 룡팔채로 통한다는 바로 이 길로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던 것이다. 호전증서기는 1941년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 몇 명이 이 마을에서 희생되였다는 것을 마을 로인분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마을뒷편에 묻혔다가 후에 다른곳으로 이장하였다한다. 호전증서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후에 로혁명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습니다. 로혁명가들의 자손까지 두차례 찾아왔습니다. 당시 의용대는 동남구로부터 왔다가 서산으로 철수했습니다.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룡팔채로 통하는 좁은 산길입니다. 그들은 뒤편 산길로 철수했습니다”     호가장 뒷산길,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곳으로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창립되여서부터 수많은 크고작은 전투를 겪었지만 대부분 경우는 주로 선전과 정보탐지와 전문해독임무를 맡았기때문에 일선 전투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가 겪은 가장 치렬한 혈전의 하나였다. 전투에서 네명의 대원이 장렬히 희생되였고 대장 김세광이 중상을 입었으며 대원 김학철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현지인들이 희생자들을 찾아 마을 부근에 매장하였다. 담사팀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다는 호가장 마을 뒤산, 룡팔채로 통하는 전적지를 보고나서 다시 마을에 들어왔다. 마을 뒤편에 크지 않은 평지가 있었는데 말린 옥수수대를 가득 쌓아놓고있었다. 호전증서기는 평지를 가리키면서 호가장전투에서의 희생자들은 일차로 이 평지에 매장하였다가 다시 찬황현의 황북평(黃北坪) 마을로 옮겨갔다고 소개하였다. 1995년부터 조선의용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호가장 마을을 수차 방문하였다. 호전증서기가 소개한데 의하면 의용군 자녀들도 호가장에 왔었다 한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묻혔다고 하는 호가장마을 평지부근을 여러차례 파보았지만 유감스럽게 아무런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현지인들은 박철동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유체를 찾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옮겨갔던것이다. 호가장은 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때문에 팔로군 진기로예변구(晉冀魯豫邊區) 제1분구 사령부가 있었던 황북평마을에 정중히 이장하였다. (권립교수) “전투가 있은후 1942년 2월 27일, 중경에서 추도회를 가졌습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대련()을 드렸고 주덕, 팽덕회도 만련을 보냈습니다." 1941년 12월 15일, 조선의용대 대원, 찬황현 각계 인사 수백명이 황북평마을에 모여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이듬해 2월 7일 중경에서도 성대한 추도회가 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주덕, 팽덕회 등이 모두 추모의 글을 썼다. 하북성 찬황현 황북평향 황북평촌은 한단시 이북에 위치하였다. 차로 약 3시간 거리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팔로군 제1분구 사령부 옛터가 있고 마을 뒤편에는 2002년경에 잘 보수해 놓은 조선의용대 렬사 묘소가 있다. 마을 뒤산으로 가면 세멘트로 잘 닦아 놓은 평지와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에 낮은 담으로 둘러놓은 4명 렬사들의 묘소가 있다. 묘소와 비석은 박철동, 손일봉, 리정순(일명 왕현순), 최철호(일명 한청도) 순으로 되여있다. 렬사묘소는 동향으로 되었는데 고향인 조선을 그리는 렬사들의 마음을 헤아려서라고 생각되였다. 황북평마을의 렬사묘소를 새로 보수할 때 당시 의용대 대원들이 사용하였던 잉크병과 조선의용대 휘장을 비롯한 소중한 유물도 발견되였다 한다. (권립교수) "손일봉동지는 중앙군사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하고 또 광주군사학교에 가서 포병기술까지 배우고 로구교사변후 포병련장으로 있다가 1940년에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청년이였습니다."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손일봉(1912-1941)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여났다. 의주에서 공립일반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목재공장에서 일하다가 1931년 중국 청도에 건너왔다. 청도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려던 그는 일제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지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하고 독립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3월 3일에 손일봉은 기타 애국청년들과 함께 폭탄으로 상해에 있는 일본대사와 륙전대(陸戰隊) 사령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비밀이 루설되여 실패하고말았다. 행적이 적 밀정에게 발각된 손일봉은 할수없이 상해의 전우들과 작별하고 하남성 락양으로 떠났다. 상해를 떠난 손일봉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청년들을 교양하는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또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935년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에 가서 계속 공부하기로 하였다. 광주에서 그는 1938년까지 중앙륙군군관학교 광동분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중국군 포병련장의 신분으로 1939년 9월에 있은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과 1940년 6월에 있은 신양회전(信陽會戰)에 참가하였다. 1938년 무한을 점령한 일본침략군은 수차에 걸려 호남성 장사를 포위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민의 완강한 저격에 부딛쳐 번번히 실패하였다. 장사대회전에서 중국군민들은 수만명 일본침략군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민당군 포병련장이였던 손일봉도 이 회전에 참가하여 중국 군민과 함께 일제를 유력하게 타격하였으며 그후 신양회전에도 참가하였다. 장사회전과 신양회전에서 싸우던 시기 손일봉은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의 신분으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으며 후에는 조선의용대 주력과 함께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하였고 호가장전투를 겪게 되었던것이다. 일본침략자들과의 육박전에서 총검에 찔려 희생된 박철동(1915-1941)은 충청북도 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충주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1년에 중국 심양에 건너와 활동하였다. 그는 심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편 밤이면 야학에 다녔다. 야학에서 그는 조선혁명당의 소개로 중국 관내에 들어와 활동하게 되였고 1934년 1월에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기에 입학하였다. 1935년 7월, 그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고 당의 파견을 받고 화남으로 가게 되였다. 남하도중 그는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일본밀정들에게 체포되여 3년간 일본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출옥한 박철동은 다시 중국 화북에 들어와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활동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을 때 이들과 회합한 박철동은 정식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그후 1941년 호가장전투에 참가했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일본침략군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수류탄을 터쳤던 한청도(1915-1941)의 원명은 최철호였다. 그는 조선충청남도 대전(大田) 사람으로서 1935년부터 중국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8년 5월, 제6기로 중국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하고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새로 창립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해 중국 제5전구와 제1전구를 전전하면서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하였다. 1940년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한 한청도는 의용대의 파견을 받고 서안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해말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와 함께 찬황현 황북평마을에 매장된 조선혁명 렬사 왕현순(王現淳 1918-1941)의 원명은 리정순이다. 평안북도 벽동(碧潼)에서 태여난 그는 1933년에 중국 남경에서 김원봉중심으로 운영된 조선혁명군정학교(朝鮮革命軍政學校) 제2기를 졸업하였다. 그후 1938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한후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편입되여 싸웠다. 그는 조선의용대를 따라 호남에서 대적선전공작을 하다가 화북으로 진출해 형대(刑臺)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중국의 관련 자료에는 호가장전투라는 어구를 찾아볼 수 없고 형대전투라는 표현이 있다. 호가장은 너무나도 작은 마을이기때문에 직접 호가장전투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호가장이 소속되여있던 형대현의 지명을 따서 형대전투라고 개괄하고 있다. 1941년말 형대부근에서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수차의 전투가 있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형대전투라고했던것이다. 이로하여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희생소식을 보도한 당시 기사들도 다소 혼란을 보이고 있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전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회억에 의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희생과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만 다른 두 조선의용대 렬사인 왕현순과 주동욱(朱東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있다. 조선의용대 대원 왕현순, 주동욱이 현대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당시 보도를 보아서도 왕현순과 주동욱 렬사는 호가장전투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호가장 부근에서 진행된 다른 전투에서 희생되였고 이들이 함께 형대전투 조선의용대 희생자들로 보도되였던것으로 추측된다. 1942년 2월 19일호 《신화일보》에 형대전투에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1941년 12월 26일 화북 형대부근의 한차례 혈전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고 쓰면서 제3지대의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 주동욱 네 동지가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약력을 적고있다. 손일봉은 중앙군관학교 제12기를 졸업하고 최철호는 중앙군관학교 특별반 제6기를 졸업하였으며 왕현순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졸업, 주동욱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 졸업이라고 밝혀졌다. 기사에서 밝힌 12월 26일로 보아서 호가장 전투와 형대부근의 전투를 종합해서 보도한것이 분명하다. 기사에서 지적한 제3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말한다. 전쟁년대였던 당시 보도의 정확성에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형대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용감히 적과 싸웠으며 또 장렬히 희생되였다. 황북평 마을에 묻힌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왕현순 렬사 그리고 아직 희생지마저도 찾지 못한 주동욱렬사 이들은 모두 우리민족의 훌륭한 아들이였고 자랑찬 청년들이였다.    호가장 마을의 옛집 호가장 마을의 옛집 마을의 옛 우물 방과한 호가장 소학교 어린이들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를 기리는 사람들 답사팀이 호가장마을 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할때는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저녁녘이였다. 석양에 비낀 호가장 마을은 더없이 적막하였고 금빛 단풍은 노을속에서 더욱 빛났다. 이따금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 수류탄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가는 영웅적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멸적의 함살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우리는 호가장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소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다소나마 생기를 보태주었다. 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간마을 호가장을 떠나 차는 다시 석가장으로 향했다.  
91    제61회 호가장전투 댓글:  조회:8176  추천:0  2014-02-01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출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만악의 일제와 피흘리며 싸웠다. 그들의 항쟁은 중국관내 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한페지로 엮어지고 있다. 1941년말에 있었던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의 하나였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은 적후에서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념원을 안고 화북으로 진출해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용사들은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선전공작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대적공작과 민중선전을 진행하던 조선의용대는 호가장 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적의 공격을 받아 혈전을 치르게 되였다. 석가장에서 주문빈렬사의 동상이 모셔진 화북렬사릉원을 보고나서 2003년 10월21일 오후 답사팀은 유명한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원씨현(元氏縣) 호가장으로 출발하였다. 원씨현 현성을 거쳐가려면 길을 많이 에돌아 가야했기때문에 차는 곧추 호가장 마을로 달렸다. 석가장시를 벗어나 근 한시간정도 달리니 낮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여맥인 이곳 산들은 대체적으로 높지 않았지만 산줄기와 언덕이 많았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이따금 산기슭을 따라 오붓한 마을들이 보였다. 30여분 더 가니 산간에 위치한 호가장 마을이 나타났다. 산세를 타고 가옥들이 줄지어있었는데 집들은 모두 지붕이 평평한것이 특징이였다. 집집마다 지붕에 옥수수이삭과 옥수수대를 말리고있었다. 마을 바른편 언덕에는 감나무들이 많았다. 감을 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할아버지가 사닥다리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면 할머니는 밑에서 그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한없이 정적한 산간 마을,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하북성 석가장시 원씨현 호가장마을 감따는 늙은 량주 마을입구 호가장 촌민위원회  마을 어귀에서 곡식을 말리는 로인에게 물어 촌주임을 찾아갔다. 촌정부에 가보니 사무를 보는 사람은 없었고 어린아이 하나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있었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촌의 호전증(胡栓增 1945년생)서기를 만났다. 호전증서기는 우리가 조선의용대의 호가장전투에 관련해 알아보려고 왔다고 하자 선뜩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1995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인 로인 분과 그들 자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다고하였다. 호가장 마을은 아득히 먼 수(隋) 나라 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호씨 성을 가진 한 관리가 전란을 피해 이곳에 오게 되였다. 그후 그 관리의 가족을 중심으로 인가(人家)가 점차 많아지면서 드디어 마을이 형성되였다. 9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은 현재 200여 세대가 살고있는데 모두 성이 호씨이다. 마을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고 마을에는 로인과 아이뿐이였다. 마을 뒤쪽에는 호가장소학교가 있었다. 낡은 교실에서 수십명 어린이들이 공부하고있었다. 소학교를 지나 마을 뒤에 이르니 골짜기 너머 뒷산으로 향한 오솔길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의용대가 철거하던 전적지였다. 호전증서기는 오솔길을 가리키면서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길을 따라 뒤산으로 철수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마을 로인에게서 당시 전투상황을 조금 들었다면서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룡팔채(龍八寨)라는 곳이 있는데 의용대 대원들은 그쪽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였다. 가을을 마친 호가장 마을 렬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있는 호가장마을 어린이들 조선의용대의 호가장 전투에 대해 설명해주는 호전증서기(오른쪽 두번째)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철수하였다는 마을 뒷길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화북지역에 모인 조선의용대는 1941년에 화북지대로 편성되여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화북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이고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으며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새롭게 편성된 화북지대는 무장선전활동과 간부양성, 적후 조직활동을 비롯한 3대 방침을 확정하였다. 특히 화북지대는 무장선전 활동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전민의 항전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1941년에 들어와 중국의 항일전쟁은 대치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의 인민들을 항일에로 이끌고 일본군을 와해하며 화북에 있는 조선인을 쟁취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화북지대는 3개대로 나뉘여 평한철도(平漢鐵道 북평으로부터 무한까지)연선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는 대장 리익성과 지도원 진한중(陳漢中)의 인솔하에 하북성 한단(邯鄲)이남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는 대장 김세광(金世光)의 인솔하에 석가장 부근의 원씨, 찬황(贊皇), 림성(臨城) 부근에서 활동하였으며 제3대는 대장 왕자인(원명 최인 崔仁), 지도원 박무(朴茂)의 인솔하에 석가장 이남 한단 이북의 사하(沙河), 형대(刑臺), 무안(武安)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그들의 항일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적의 진지에 접근해 적군을 와해시키는 함화(咸話)를 진행하였다.   (권립교수) “1941년 12월에 있은 호가장 전투. 그날 화북지대 제2대 대장 김세일 동지는 전사 스물아홉명을 거느리고 호가장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선전사업을 했고 항일조직사업을 도왔습니다다.”   김세광이 이끄는 화북지대 제2대는 1941년 11월 중순경에 무장선전 활동을 개시하였다. 20여명 대원들은 의용대 총부 소재지인 산서성 동욕진(桐峪鎭)을 출발해 원씨현에 이르렀다. 그들은 석가장 지역 각지 정세를 살피고 그곳 군중들을 동원할 선전물을 준비해가지고 길을 떠났다. 원씨현에 도착한 그들은 현지의 항일무장부대인 원씨현 독립영(獨立營)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원씨, 북영(北營), 왕가장(王家莊) 등지를 다니며 좌담회와 군중집회를 가졌고 또 무장(武莊)의 적 보루에 접근하여 대적 함화를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면서 군중집회를 가졌다. 이때면 다른 대원들은 일제를 반대하는 구호를 바람벽에 써놓거나 삐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위험한것은 대적 함화였다. 의용대 대원들은 적진과 50킬로메터 거리를 두고 메가폰으로 반전선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류창한 일본말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죄행을 폭로하면서 죄악의 전쟁을 멈출것을 권고하였다. 함화는 대체로 밤에 진행하기때문에 적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일반적으로 출동하지 않았다. 이처럼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제2대 대원들은 12월 11일, 찬황으로 가던 도중 호가장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원씨현 경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제2대는 12월 11일 첫 전투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날 새벽 일본군 30여명과 괴뢰군 40여명이 선옹채(仙翁寨)를 습격하였다. 적정을 발견한 전투원들은 신속히 반격에 나섰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독립영 전사들과 함께 유리한 지세를 점하고 일제히 사격하였다.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고 적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선옹채 전투에서 의용대와 독립영은 사상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100여명의 적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옹채 전투가 있은 다음 조선의용대 제2대는 서안사변 기념일인 12월 12일에 호가장 마을에서 선전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호가장으로 갔다. 선옹채에서 호가장 마을까지는 산길로 30여분 거리였다. 밤이 깊어지자 대원 고상철(高相喆)이 보초를 서고 기타 대원들은 호가장 마을의 큰집을 빌어 투숙하였다. (권립교수) “그날 밤, 그들은 수백명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동틀 무렵부터 피타는 포위망 탈출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마을 밖에서 뜻하지 않은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대원들은 신속히 일어나 집 앞에 집합하였다. 제1분대 분대장인 조렬광(趙烈光)은 대원 장례신(張禮信)에게 적정을 살피도록 명령하고 기타 대원들과 함께 탈출계획을 연구하였다. 호가장마을에 살던 괴뢰군 가족이 의용대의 상황을 적에게 보고했던것이다. 적은 찬황, 획록(獲鹿), 정형(井陘)의 200명 병졸을 끌어 모아 3면으로 마을을 포위하고있었다. 부근에서 활동하던 팔로군 독립영 1련이 경계하던중 적과 접전하게 되였다. 독립영은 호가장 마을의 의용대를 지원하려했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적정보고를 받은 김세일대장은 마을북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손일봉(孫一峰), 박철동(朴喆東), 김학철(金學哲)등과 함께 엄호를 맡았다. 대부분 대원들은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엄호를 맡은 대원들은 부상을 입고 뒤에 처졌다. (권립교수) “손일봉은 탄알이 다 떨어지고 수류탄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군 8명이 산굽이를 돌며 그를 향해 덮쳐들고있었습니다. 손일봉은 비호같이 덮쳐들어 일본 소대장 한놈을 끌어안고 옆에 있는 바위로 들이쳤습니다. 수류탄의 폭음과 함께 손일봉은 일본군 8명을 저승에 보내며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들고 일본군 소대장에게 덮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손일봉은 7, 8명 놈들과 함께 쓰려졌다. 전우가 장렬히 희생되는것을 본 박철동은 계속 적들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적의 총검에 찔려 희생되였다. 이들과 함께 엄호를 맡았던 한청도(韓淸道) 역시 적들과 싸우다 희생되였다. 그는 총탄이 떨어지자 원쑤들과 함께 죽을것을 각오하고 수류탄을 터쳤다. (권립교수) “스물여섯살의 전사 박철동은 일본군 두놈과 육박하여 두놈을 쓸어눕혔지만 온몸이 피투성이 되였고 맨 주먹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창을 꼬나든 일본놈이 또 덮쳐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내밀고 ‘찔러라, 강도놈아!’하고 웨치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의용대 전사 네명이 희생되고 많은 부상자를 났습니다. 대장 김세일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김학철 선생도 이 전투에서 체포되여 일본감옥으로 압송되였습니다.” 기타 대원들은 계속 접전하면서 산기슭 오솔길을 따라 독립영이 있는 룡팔채쪽으로 퇴각하였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가한 장례신선생은 후날 전투 경과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세대원의 희생경과를 회억하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후에 중국 조선족 문단의 거장으로 된 김학철선생도 바로 호가장전투에서 다리에 총탄을 맞고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60여년전 피비린내와 화약내를 확확 풍긴 처절한 전투가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지금 적막에 잠겨있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서 겪은 수많은 대규모 전투에 비하면 호가장전투는 큰 싸움이 아니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를 소멸하였던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를 비롯한 조선의용대 전사들의 영웅적 행동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켜주었다. 그들은 실제행동으로 조선의용대는 수적으로는 적지만 철 같은 대오이고 영웅적 대오이며 조선인민은 두려움 모르는 불굴의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빛나는 투쟁정신과 영웅적 행동은 널리 전해지면서 항쟁에 나선 천백만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옥수수를 지붕에 말린다 호가장 마을의 낡은 담벽과 대문 의용대 전사들이 수류탄을 터쳐 죽음으로 왜놈들을 소멸했던 탈곡장    한국에서 찾아온 가족들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렬사의 묘소를 참배하고있다   《불멸의 발자취》김성룡저 민족출판사 2005
90    제60회 보정과 석가장에서의 답사 댓글:  조회:4436  추천:0  2014-01-20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의 국공합작이 이룩되여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였지만 중국의 위기는 더욱 커갔다. 야망의 일본침략군은 흔구전역에서 국민당국을 격파한후 태원을 함락하였고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 항주를 련이어 강점하였다. 일제는 장개석과 국민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남경에서 30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피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의 만행앞에서 군민들은 일떠났지만 정면전쟁에서의 국민당군의 실패는 거듭되였다. 비록 리종인이 서주에서 대아장전역의 국부적인 승리를 이룩했지만 전세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급급히 무한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장개석은 황하의 언제를 폭파하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하였다. 이는 비록 일제의 공격을 잠시 제지시키기는 하였지만 황하류역 수많은 농가와 밭들이 물에 잠겼고 천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가옥을 잃고 류리걸식하게 되었다. 화북, 화동, 화중의 광활한 국토가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고 수억 중국인민이 일제에게 짓밟힐 위기의 시각이 닥쳐왔다.   (권립 교수)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은 화북과 화동지역에서 새로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피어린 항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연안으로부터 온 수많은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 통치구를 떠난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제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계속 국민당 각 전장에서 싸웠고 도시에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하늘을 치받고 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력력한 자욱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피어린 항쟁을 한 조선혁명자들의 행적을 찾아 태항산으로부터 연안까지의 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3년 10월 20일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때라 날씨는 쾌청하고 하늘은 한결 맑았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획부의 서봉학주임, 중앙인민방송국 박군기자 그리고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와 함께 오전 8시 북경을 출발하였다. 우리는 북경 서역에서 기차를 리용하여 보정으로 향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한 고도 보정시는 항일전쟁시기 하북성 성 소재지였고 줄곧 하북성의 물류중심이고 교통중추였다. 동으로는 유명한 항일전적지 백양전(白洋澱) 담수호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항산에 린접해 있는 보정시는 북경의 남대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보정시의 볼거리는 많았지만 우리가 답사해야할 곳은 보정사범학교(保定師範學校)와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 옛터였다. 북경에서 보정까지는 130킬로메터, 기차로 두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보정사범학교는 기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정시 서하관가(西下關街)에 위치하였다. 검은 담과 기와로 정교하게 만든 학교 옛 교문은 많이 낡아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관리일군을 찾아 교문을 열어보니 아치형 교문 너머로 정원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상 하나가 보였다. 하얀 대리석으로 된 녀대생의 모습이였는데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책을 든 모습이었다.     보정녀자사범학교 원 사범학교 교장 동금의(오른쪽 두번째) 로인 고풍적인 학교도서관 학교기념관에 전시된 학교혁명사-김산(장명)의 행적이 밝혀있다   학교 력사교원인 왕병강(王炳剛) 부교수가 우리를 안내 해 주었다. 학교 정원으로부터 시작해 우리는 학교의 옛 도서관 전시실, 7.6렬사기념관(七六烈士紀念館)을 참관하였다. 사범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동금의 로인이 우리의 답사를 돕기 위해 모처럼 학교에 나와 학교관련 력사를 설명해 주었다. 1904년에 설립된 보정사범학교는 유구한 력사를 가진 학교다. 옛날에는 직예 제2사범학교로 불리웠고 후에는 하북성립사범학교로 불리다가 지금은 보정사범학교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이사(二師)로 불리우고 있다. 1923년 학교에 중국공산당 당조직이 있었고 많은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들이 이곳에서 학습하였다. 《9.18사변》후 교원과 학생들은 일본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당국에 항의하여 투쟁하였다. 1932년 7월 6일, 보정사범학교에 공산당원이 많다는 것을 탐지한 국민당 당국에서는 일제밀정과 함께 학교에 돌입하여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을 체포하려 하였다. 당시 학교에는 80% 사생들이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반제대동맹, 좌익작가련맹에 참가한 진보 인사들이였다. 이들은 학교를 보위하고 공산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국에 대항하여 싸웠다. 당국에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들의 투쟁을 진압하였는데 진압과정에서 36명이 체포되고 9명이 피살되였다. 이들을 7.6렬사라하고 학교에는 이들을 기념하는 7.6렬사기념관이 있었다. 동금의 로인은 학교의 관련자료를 찾아 조선혁명가 장명(김산)이 학교에서 활동했던 사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당시 김산은 장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력사교원으로 있었다. 당 대표의 신분으로 당 조직을 발전시키던 그는 적이 추적해 오자 진보적인 교장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학교자리에는 2층으로 된 교수청사와 학생기숙사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그리고 학교정원에는 학교 초창기에 심었다는 고목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해묵은 나무 그늘아래 학생들과 모여 앉아 지식을 론하고 혁명사상을 전하는 조선혁명가 김산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보정사범학교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사범학교를 보고나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다른 한 답사지인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로 향했다.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있었던 조선혁명가 무정이 다녔다는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는 보정시 동북교외인 위생로(衛生路)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5, 6층 낡은 주민아파트와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거리, 편한 모습으로 거리를 걷는 행인들...보정시는 번화한 상업도시라기보다는 비교적 조용한 소도시였다. 주민구를 벗어나 동북쪽으로 가니 널찍한 거리가 나타났고 봉건시대 관아의 문(衙門)과 흡사한 건물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문 앞에 위엄을 부리는 돌사자가 없을 뿐이였다. 붉은 기둥에는 보정군교기념관(保定軍校紀念館)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보정군관학교 상무당 학교를 졸업한 명사들을 소개하는 담벽   보정군관학교 기념관앞에서 최룡수(오른쪽) 교수와 함께 붉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정면에는 상무당(尙武堂)이 있었고 주변에 단층집 몇 채가 줄지어 있었다. 단층집은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상무당 뒷벽에는 군관학교 1기부터 9기까지 졸업생들의 상황을 밝히고 또 명단을 적은 도표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보아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최룡수교수는 아마도 무정은 변성명을 했을 가능성이 많고 원적도 중국 동북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비슷한 것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보정사범학교 왕병강부교수는 륙군군관학교에 관련한 력사를 많이 연구한 분이였다. 그에게서 제공받은 자료에는 륙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전부 명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고 또 무정이라고 추정할만한 이름도 없었다.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안고 륙군군관학교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기념관은 아직 준비단계여서 본격적으로 개방되지 않고있었다. 더욱 상세한 자료를 찾을수도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시기 무정은 보정륙군군관학교 혹은 산서의 북방군관학교를 졸업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가 분명하지 않다. 보다 유력한 증거인 무정의 친필 약력을 보면 무정은 1923년초에 중국에 들어왔다가 1925년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 그러므로 무정이 륙군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시간은 1924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북성의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니 멀리 산서성의 북방군관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같은 하북성에 위치한 보정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유력한 추측이다. 더욱이 무정이 팔로군 포병퇀 퇀장을 맡았을 때 포병퇀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던 중국인 원광(袁光)은,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한 증언이 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1912년부터 1923년까지 도합 9기로 학생들을 졸업시킨 당시 중국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근대적인 군사학교였다. 학교전신은 원세개가 1902년에 설립한 륙군학당이다. 륙군학당은 근대적인 군사교육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지만 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하면서 대부분 학원들이 부대에 돌아갔기때문에 학교 운영이 중지되였다가 1912년부터 다시 보정륙군군관학교로 출범하였다. 이때까지 학교는 3기에 거쳐 240여명을 졸업시켰다. 1923년, 학교는 군벌혼전을 겪은데다가 또 운영경비마저 부족한 탓으로 일년간 중지되였는데 그때까지 도합 5기로 510명 학원을 졸업시켰다. 1924년에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7기 입교생을 받았다. 그뒤 다시 북벌전쟁이 일어나는 등 많은 혼잡이 빚어졌기때문에 1924년후의 졸업생 관련자료가 자상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정은 1924년 제7기(1912년부터 계산)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서 수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장개석, 진성, 류치(劉峙), 설악, 장치중, 부작의(傅作義), 도치악, 엽정, 동진당(董振堂), 하기풍(何基豊)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고위장령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엽정, 동진당, 하기풍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하였고 장치중, 부작의, 도치악도 선후로 중국공산당쪽으로 넘어왔다. 장개석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가 입교할 때 절강성에서만 하여도 천여명이 보정륙군군관학교에 지망하였는데 합격되여 정식 입교한 자는 겨우 14명 뿐이였다한다. 그만큼 입교가 어려웠고 엄격한 시험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북경에 온 무정은 입교시험을 통과해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고 꾸준한 학습을 거쳐 우수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를 떠나면서 우리는 무정에 관련한 더욱 유력한 증거를 찾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더욱 많은 연구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보정륙군군관학교를 답사한 다음 서둘러 보정시를 떠나 석가장으로 갔다. 우리는 뻐스를 리용하기로 하였다. 뻐스역에는 석가장으로 가는 소형 관광뻐스가 많았다. 우리는 자리를 정하고 오후 4시가 넘어서 하북성 소재지인 석가장시로 출발하였다.   차는 북경에서 석가장으로 통하는 경석(京石) 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후에 석가장에 도착하였다. 성 소재지인 것만큼 석가장은 보정시 보다 퍽 번화했고 상업적인 분위기도 다분하였다. 우리는 석가장의 굉원대주점(宏苑大酒店)에 입주하였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저녁에 호텔을 나와 발 가는 대로 거리를 거닐다가 한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10월 21일 아침, 석가장에 있는 화북렬사릉원(華北烈士陵園)으로 가 보았다. 석가장시 중심부의 중산서로(中山西路) 343번지에는 남향으로 축조된 거대한 릉원이 있다. 검은 대리석판으로 된 정문에는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 렬사릉원이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넓은 광장에 키 높이 솟은 렬사기념탑이 보였다. 광장 주변의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기념관 건물이 몇 개 있었다. 기념탑 뒤로 걸어가니 푸른 잔디밭이 있었고 거기에는 기념동상들이 3줄로 배렬되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에 조선혁명가 주문빈 렬사의 반신 동상이 있었다. 동상을 받쳐주는 기념비에는 주문빈 렬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문이 적혀있었다. 《주문빈 1908-1944. 원명은 김성호,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 사람. 원 중공 기열변(冀熱邊) 특구 조직부장. 항일전쟁전에는 로동운동에 종사. 1944년 가을 풍윤현 양가포 전투에서 희생.》 우리민족의 자랑인 주문빈 렬사가 하북성 동부에서 항일하다가 희생된 후 그의 유해는 당산에 있는 기동렬사릉원에 모셨다가 격이 더 높은 이곳으로 이장하였던 것이다. 정원 한쪽에 렬사들의 묘지가 있었다. 흰 돌로 정교하게 만든 묘지가 줄 지어있었는데 가운데 주문빈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답사팀 일행은 묘소 앞에 묵도를 드리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피어린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된 주문빈 렬사의 빛나는 한생을 그려보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되자 팔로군 115사는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을 중심으로 적후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주문빈 렬사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하북성 동북부에서 싸웠다. 8년간의 피어린 항쟁을 거쳐 근거지는 료녕성 금주(錦州)이남 발해(渤海)서부 산서, 차할, 하북의 광활한 지역을 포함한 진찰기 해방구로 확대되였다.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주문빈렬사의 동상 동상비석의 비문   부지면적이 21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은 화북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우다가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릉원이다. 항일전쟁 승리후 1948년, 주덕 총사령은 석가장에 렬사릉원을 만들어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할 것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렬사릉원은 1953년에 준공되여 이듬해부터 대외로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89    제59회 무정부주의자 류자명 댓글:  조회:4895  추천:0  2014-01-17
우리민족 독립운동사에는 중요한 정치리념의 하나로 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는 서방 리론으로서 유럽의 그리스어 《아나르코(anarchos)》에서 기원한다. 아나르코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금 많은 저서들은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Anarchism)이라고 하지만 이 사상이 동방으로 전파될 때 일본학자에 의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계속 무정부주의라는 표현을 쓰게 되였다. 우리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리회영(李會榮),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무정부주의 대표로 평가받고있는 반일투사가 바로 류자명이다. 이들은 모든 지배자와 억압자들을 반대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숭상하는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고 자유로운 조선을 건립하기 위한 항쟁에 나섰던 것이다. 류자명은 중국망명후 의렬단에 참가해 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중국내 조선혁명자들의 통합을 위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구축을 적극 주도한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청년시기의 류자명 북해공원에서 이야기하는 최룡수 교수와 류자명의 딸 류득로 녀사 2003년 10월 28일에 답사팀은 북경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북해공원(北海公園)에서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櫓) 녀사를 만났다. 편한 양복을 입은 류득로 녀사는 부리부리한 두 눈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강한 인테리적 느낌을 주는 그는 중국과학기술대학(中國科學技術大學) 재료물리(材料物理)와 화학학부 교수, 박사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있었다. 북해공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정해 앉은 후 류득로 녀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다년간 비밀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알려지지 않고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아버님은 말쑤가 적으셔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머님도 이야기하지 않아 우리도 잘 모릅니다. 생활면에서 보면 아버지는 매우 검소한 분입니다. 밥 한 그릇에 김치가 있으면 식사가 되지요. 우리 집 김치는 아버지께서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서 어머니가 알게 되었고 저도 배워서 좀 담글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김치를 아주 즐겨 잡수셨거든요. 그리고 아침에는 차를 마십니다. 그이는 노래도 하지 않았고 춤도 몰랐습니다. 언제나 엄숙한 표정이셨습니다. 젊었을 때는 수영을 좀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바둑을 좀 알뿐 기타 문예활동은 몰랐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러셨나 봅니다.》 딸 류덕로 녀사가 회억하는 류자명은 언제나 소박하고 엄숙한 사람이였다. 다년간의 혁명활동에 종사하는 가운데서 형성된 성격일 것이다. 류자명(1894-1985) 류자명(1894-1985)은 충청북도 충주(忠州)에서 태여났다. 3남매중 막내로 태여 난 그의 원명은 류흥식(柳興湜)이였고 류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였다. 1910년, 충주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봉건혼인을 치르고 이듬해 충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그후 수원(水原)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 간이농업학교(簡易農業學校)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겪게 되였다. 그는 학생중심의 시위를 계획한 것으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류자명은 림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여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서울을 거쳐 중국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 천진 지역에서 류자명은 신채호, 김약산을 비롯한 혁명자들을 만나 의렬단의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약산의 부탁을 받고 단재 신채호를 만나 함께 의렬단 선언을 작성하였다. 1923년에 의렬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여 조선혁명가들의 심금을 크게 울려주었다. 이 시기 류자명은 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던진 의사 라석주(羅錫疇)의 의거를 비롯해 의렬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1927년 2월, 류자명은 김규식을 비롯한 혁명자들과 함께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동방피압박련합회는 국민당의 후원을 받았고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으며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문, 중문, 조선문으로 발간하였다. 류자명은 련합회의 각국 대표들의 련락과 비밀지부 설립, 영향력 확장 등 사무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류자명은 상해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상해 강만(江灣)에 위치한 농업학교 립달학원(立達學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한인청년련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남화통신(南華通信)을 간행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리회영, 정화암, 류수인(柳秀人), 박기성(朴基成)을 비롯한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있었다. 이들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중국 동북 3성 강점과 더불어 남화한인청년련맹을 조직하여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였고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일파들을 응징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들의 통일전선을 도모하였다. 줄곧 평범한 교원의 신분으로 비밀적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이 시기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활동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류자명은 남화한인청년련맹의 주요 맹원들을 토대로 조선혁명자련맹을 조직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를 보면 류자명이 조선혁명자련맹의 위원장을 맡고 류기석(柳基石), 박성기, 리승래(李升來), 정화암, 리종봉(李鐘鳳)이 위원으로 있었다. 그후 더욱 광범위한 통일전선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 단체들과 함께 민족련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련맹을 묶었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과 더불어 이 련맹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남경이 일제에게 함락된후 련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1938년 4월 10일 조신민족전선련맹의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는 련맹이 결성된 경위에 대한 류자명의 설명이 실렸다. 류자명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본련맹은 주의나 사상이 각이한 단체들이 자기의 립장과 조직을 확보하면서 공동한 강령에 따라 실행하는 련합적인 조직이다. 련합전선(聯合戰線)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련맹을 절대 조선혁명 대중의 머리우에 군림한 지도단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련맹을 가장 완벽한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시점으로 할뿐이다. 때문에 가장 완벽한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선통일에 적극 노력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통일전선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나 미래 독립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국가를 건립할 때에나 모두 여러 당파의 공동노력을 수요한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오직 이렇게 해야 만이 진정 조선민족의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류자명은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대표리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무한이 함락된후 류자명은 김원봉과 함께 여러 곳을 거쳐 중경에 갔다. 김구(앞줄 좌로 두번째) 모친를 장례를 치르고, 앞줄 오른쪽 첫사람이 류자명 대한민국 림시정부 요원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1941년 중경을 떠나 복건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실험장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복건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류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오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류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약산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일본침략자들은 불리해진 정세를 돌려세우기 위해 발악적인 전역을 발동하였다. 일제는 중국내의 주력부대를 집중하여 예상계(豫湘桂) 전역을 감행하여 하남, 호남, 광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국민당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해 류자명은 중경에 가서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림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일제가 계림으로 공격해 오자 류자명 일가는 다시 복건성 영안으로 갔다. 그는 영안에서 전시 고아들을 거두어주는 강락신촌(康樂新村)에서 일을 보다가 항일전쟁 승리의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류자명은 1946년 대만에서 장관공서(長官公署) 농림처에서 기술실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대만농업실험소》 소장을 맡았다. 대만농업실험소는 중국의 첫 농업과학연구소였다. 그후 류자명은 조선으로 가려 했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향항을 거쳐 상해에 왔다가 1950년부터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호남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류자명은 농학교수로, 교육자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신생한 공화국의 농예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류자명은 원예면에서 지위가 매우 높았다. 특히 그는 포도재배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호남에는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는 줄 알았지만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재배에 성공하게 되였다. 호남에는 여러종류의 귤이 많았는데 류자명은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리고 마왕퇴에서 출토한 농작물과 중국벼의 기원이란 론문을 발표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류자명의 딸 류덕로 녀사는 《호남대학에 2급 로임을 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부교장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호남대학 학생들은 류자명의 집을 제집 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 또 일부 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류자명은 일어교원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그는 늘 농장이나 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연구사업에 몰두하였다. 류자명은 만년을 비교적 편하게 보냈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조선 국적이였고 또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잘 친했기때문에 욕을 보지 않았다. 당시 호남농업대학 지도부와 교원, 학생들은 모두 류자명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를 존경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집 문앞에 《국제우호인사 류자명 선생댁이니 돌입하지 말라》는 간판을 붙여 주었다. 때문에 그는 동란기를 무난히 넘길수 있었다. 류자명은 또 중국의 대 문호인 파금(巴金)과도 매우 친숙하게 보냈다. 중국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던 파금은 무한에서 류자명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뜻을 같이한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되였다. 비록 늘 함께 있지 않았지만 해방후에도 파금과 류자명은 계속 가까이 친하는 훌륭한 벗이였다. 중국에서 우수한 농학자로 사업해 온 류자명은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장사에서 파란만장한 한생을 마쳤다. 그는 세상 뜰 때까지 끝내는 다시 조선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저명한 농학자 류자명 류자명(오른쪽 두번째)부부와 중국의 명사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파금이 류자명에게 보낸 서한 한국 독립훈장 증명서 북해공원의 시원한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류덕로 녀사는 잘 정리해둔 사진과 자료들을 펼쳐들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청년시절의 류자명, 농학자로서의 류자명, 백범(白凡)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확고한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던 류자명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이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전반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항쟁해온 투사이다. 그는 평범함 학자의 신분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했으며 각파 정치세력이 첨예한 모순을 드러낼 때는 조용히 다시 학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지켜보았다. 전반 인민의 광범위한 의지와 요구는 꼭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88    제58회 독립운동가 김철남 댓글:  조회:4143  추천:1  2014-01-14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관내에서 중국 군민과 함께 피 흘리며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싸운 지사도 있었고 대도시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한 혁명가도 있었으며 항쟁의 제일선 전투에서 직접 싸운 투사들도 있었다. 또한 중국 항공부대에서 방어사무를 맡아본 장교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김철남이다.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중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찍부터 민족독립의 길을 찾아 중국에 들어온 그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줄곧 국민당 장교의 신분이였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김철남(1895~1952)은 또 김병두(金炳斗) 라는 별명도 있다. 3.1운동후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국민당군에 복무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총감부(防空总监部) 과장을 지냈으며 1941년에는 귀양항공대대(贵阳航空大队) 대령()으로 근무하였다. 중국에서도 김철남은 반일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1921년 12월 그는 손두환과 함께 중국 각지의 조선인동지들을 규합하기에 힘썼고 기관지 을 발행하였다. 그후 상해에 거주하면서 한인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한인구락부를 조직하고자 발기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철남은 1943년 11월에 림시정부 교통부 차장을 겸직하고 이듬해 12월에 다시 참모차장에 임명되였다. 1945년 2월 7일 동지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14명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그가 서거한뒤 1972년에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정부가 발급한 독립메달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 2004년 1월 21일에 답사팀은 음악공연과 교수에 다망히 보내는 김정평 교수와 련락을 가지고 그의 동생 김중평 교수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정평 교수와 김중평 교수가 바로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의 장남과 차남이다.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 녀사가 장남 김정평, 차남 김중평,넷째 아들 김인평, 막내딸 김애평과 함께 북경에서 생활하고있고 셋째 아들 김야평은 미국에서 사업하고 있었다. 이 가정은 말 그대로 음악가정이였다. 1929년 생인 김정평 교수는 중앙민족대학 음학학원의 교수이며 북경대학 음악감독 겸 지휘로 사업하고 있다. 차남 김중평씨는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고 무한군구 가무단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으며 셋째 김야평씨는 중앙악단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갔고 넷째 김인평씨는 북경음악주보 부총편으로 사업하다 퇴직하였다. 그리고 막내딸 김애평씨는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다 퇴직한 분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녀들까지도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국제음악 대상을 수여받는 화려한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김철남에 관련해 알아보고저 한다고 하자 이들은 어머니 역소군 녀사를 모시고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96세인 역소군 녀사는 청각이 좀 불편했을뿐 퍽 건강해 보였고 자녀들의 도움으로 우리의 질문을 조금씩 알아듣고 아득한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장남 김정평 교수도 이따금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사업에만 열중하고 늘 집을 돌보지 않았다는 아주 평범한 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1895년 9월 12일, 조선 황해도 신천의 몰락해 가는 봉건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하여 가정이 날로 몰락해갔기때문에 그는 어릴때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목사가 꾸리는 학교에서 청소를 하고 등갓을 닦는 등 잡일을 하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총명한 그는 미국 목사의 도움을 받아 대학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늘 교회에 가서 교회음악을 들었고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하였다. 1915년 5월에 김철남은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할 념원으로 중국 상해에 왔다. 그는 상해, 남경지역을 전전하면서 혁명의 길을 찾았다. 그러던 김철남은 조선인 혁명자들의 규합에 심혈을 기울리다가 복건성 복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게 되었다. 1924년 손중산이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자 김철남은 이 학교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교도퇀 부퇀장으로 있으면서 교장판공실 부관으로있던 조선독립지사 손두환과 익숙히 지냈고 또 학교의 다른 조선인 지사들과도 함께 활동하였다. 북벌전쟁시기 김철남은 북벌군을 따라 광주로부터 강서성 남창으로 진격하였다. 북벌군이 승전한후 그는 남창에서 중국 녀성 역소군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후 그는 국민당 총사령부를 따라 상해를 거쳐 남경에서 다년간 활동하였다. 상해, 남경에서 김철남은 국민당 고위 장교로 있었기 때문에 가정은 비교적 유족한 편이였다. 그는 이 시기 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상해, 남경에 오는 조선혁명자나 청년지사들은 모두 김철남을 찾아와 도움을 받았다. 그때면 김철남은 그들이 좌파든 우파든 헤아리지 않고 무릇 조선인이면 애써 도와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늘 조선혁명자와 조선청년들을 집에 수용하였고 그들이 혁명활동을 진행하도록 지원해주었다. 상해에서 김철남은 한 고향 사람이며 경신학교 선배인 최중호(崔重鎬1891-1934)와 의형제로 지냈고 김구, 김원봉과도 많이 접촉하였다. 최중호는 조선의용대의 한 사람이였던 최채(崔采 1914-현재)의 부친이다. 그리고 로씨야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온 장성철과 가까이 보냈고 녀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락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온 박시창, 최창석(崔滄石 최용덕)도 김철남 일가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철남 일가는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도와주면서 묵묵히 독립운동에 기여한 혁명가족이다. 남경에 있을 때 그들은 삼산리(三山里) 1번지 화패루(花牌樓) 곁에서 살았다. 량쪽 부모에 많은 자녀까지 두었기 때문에 모든 가정부담은 김철남의 부인인 역소군 녀사가 짊어지게 되였다. 게다가 자주 찾아오는 조선혁명자들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역소군 녀사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이 임무를 감당해 나섰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저당 잡혀서 혁명자들의 로비를 마련해 주었고 손수 옷가지를 만들어 입혔으며 혁명자들을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었다. 김철남 일가가 상해, 남경에 있을 때 장성철, 손두환,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최창석 그리고 녀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또 국민당 조기 항공학교를 졸업한 장성철은 기술이 뛰여난 행기술자였다.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의 군정 요원들의 비행기가 뜨기 전에 꼭 그에게 비행기 점검을 맡겼다고 한다. 장성철은 비행기의 발동소리를 듣고 고장난 곳을 정확히 짚어 내였다. 당시 국민당 공군의 가장 중요한 비행기 수리소가 곤명에 있었는데 장성철은 그 공장의 공장장이자 공정사로 있었다. 손두환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다년간 조선혁명가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또 독립운동사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최창석은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일자리도 없어 상해에서 고생이 많았다. 최창석 일가는 늘 김철남 일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최창석은 끝내 상해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조기 녀류 비행사였다. 그의 부부는 김철남 일가와 이웃하였다. 조선의 진보적인 혁명가들과 접촉이 많았기때문에 이들은 늘 밀정들의 감시를 받아야했다. 권기옥 부부는 한동안 김철남의 집에서 피신하다가 체포된 일도 있었다. 그때 김철남은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일을 모르고있었다. 역소군 녀사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가 집에 밀정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김철남에게 알려 무사할수있었던것이다. 김철남이 조선혁명가들과의 련락이 빈번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였기때문에 국민당 특무들이 그를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김철남은 공산당 혐의를 받았고 밀정들을 눈을 피해 한동안 상해에 잠복해 있기도 하였다. 그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사귀였던 국민당의 많은 장교들이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화를 입지 않았고 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교관으로 학교에서 일어를 배워주었다. 황포군관학교 제8기 사생 명록을 보면 김철남은 외국문교관으로 나온다.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防空) 부문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소극방공처(消極防空處) 처장으로서 소주(蘇州)에서 일본침략군의 폭격을 막기 위한 공습방어체계를 설립하다가 후에는 호남, 호북 공습방어 사령부에서 대령 군관으로 있었다. 김정평 교수는 항일전쟁시기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인재가 많이 필요했기때문에 김철남은 다시 군사위원회 공습방어 총감독부 소극방어처 처장으로 있게 되었다. 그는 적기가 오면 경보를 울리고 정보를 전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일본침략군이 상해를 공격할 때 김철남은 소주에 가서 공습방어 초소와 공습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하늘에서는 적의 비행기가 빈번히 날아와 폭탄을 던졌지만 김철남은 태연하게 전화로 방어와 반격 작전을 지휘하였다. 송회호전이 끝난 후 그는 호남에서 공습방어사령부 사령으로 있었다. 무한회전을 비롯해 호남성 장사는 일제 주력부대의 수차로되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강의한 중국 군민들은 일치단합하여 장사전역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 가운데서 공습방어부대의 역할도 자못 컸던 것이다. 국민당군이 패퇴하여 중경에 수부를 옮기게 되자 그는 선후로 사천성 기강(綦江), 감숙성 란주, 사천성 성도(成都) 강진(江津) 군용비행장의 방공시설 구축사업에 참가하였다. 이때 그의 신분은 국민당 군사위원회 방공총감부(防空總監部) 과장(科長)이였다. 국민당군을 따라 일제와 싸우는 수차의 전투에 참가하는 동시에 김철남은 조선혁명가들의 반일혁명 투쟁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김철남은 민족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남경에서 손건(孫建), 리연호(李然浩)와 더불어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개인신분으로 각 단체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련맹 3단체의 조선민족전선통일 촉성회가 출범하게 되었고 그후 수개월의 노력을 거쳐 12월 드디어 조선민족전선련맹이 출범하게 되였다. 1940년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는 김철남이 김병두라는 이름으로 김규광이 이끄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주요 성원으로 기록되여있다. 중경에서 김철남은 계속 국민당의 관직을 보류한 상황에서 한국 림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교통부 차장을 지냈고 1944년에는 림시정부 참모차장으로 있다가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김철남은 중경에서 포츠담 회의에 관련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실망을 안고있었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많이 접근했던 김철남은 림시정부를 따라 한국에 가지 않았다. 수십년간 일제통치하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던 조국과 인민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누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은 구름은 가셔지지 않았고 드디어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 다년간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고심하고 투쟁해 오던 김철남은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고 병석에 눕게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북경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에서 사업하던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남 김정평 차남 김중평 넷째 아들 김인평 막내딸 김애평(왼쪽)과 독립운동가 장성철의 딸 장동옥(오른쪽) 김정평 교수는 아버지에게서 조선말을 배우지 못한것이 유감이였지만 혈액속에 흐르는 민족의 피는 예술면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도록 격려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민족의 정서와 정감은 그의 온 가정이 예술에 몸담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였다. 음악에 관련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예술인 가정 일동이 모두 흥미진진해졌다. 말쑤가 적던 김중평 선생은 이때 《윤극영이 작곡한 노래 은 아버지께서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전파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중국에서도 잘 아는 이 노래가 조선 독립운동가 김철남에 의해 전파되였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였다. 정열에 넘쳐있던 김정평 교수가 제의하여 모두가 노래 《반달》을 부르기로 하였다. 장동옥씨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김정평 교수가 지휘를 맡아 모두들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을 기념하였다. 
87    제57회 조선의용군의 북상 댓글:  조회:4922  추천:2  2012-12-03
.TRS_EDitor p{text-algin:justify; text-indent:1em;} .TRS_EDitor p font{text-indent:1em;} .TRS_EDitor div{text-algin:justify; text-indent:1em;} .TRS_EDitor div font{text-indent:1em;} .TRS_EDitor font{text-indent:1em;}   독립운동 원로들의 지지를 받은 김구는 이들을 중심으로 중경에서 한국림시정부를 계속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만들며 장개석과 국민당의 신뢰를 얻은 김구는 림시정부 요원들을 이끌고 중경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와 반면 수적으로 우세한 소장파 진보적 청년들을 이끌었던 김원봉은 점차 국민당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대다수가 항일 제일선으로 나갈 것을 탄원하면서 직접 일제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중경에서 형식적으로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였고 이를 반대해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팔로군 통제구역으로의 북상이 있게 되었다.   사천성 기강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중경에 돌아왔을때는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난 오후였다. 비는 계속 구질구질 내리고있었다. 우리는 련화지 림시정부 청사 부근에서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들었다. 비교적 활달한 가경해 관장이 우리를 초대하였다. 식사후 가경해 관장을 따라 우리는 중경의 다른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1940년 중경에 옮겨온 한국림시정부는 처음에 양류가에 자리를 정했지만 일제의 폭격에 가옥이 파손되자 석판가로 옮겼다. 그러나 역시 일제의 폭격이 잦아 다시 오사야항 1호(號)로 이주했다. 오사야항이 바로 지금의 화평로 2항(巷)이다. 유중구 화평로(和平路) 2항에 이르니 찌그러진 2층 집들이 보였는데 헐망한 집에는 아직까지도 주민이 살고있었다. 나무와 얇은 벽을 발라 만든 건물은 금방 무너질것만 같았다. 이곳 5, 6, 7번지 건물이 당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이 거처를 잡고 사무를 보던 곳이다. 중경시절 림시정부는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고 김구는 여기에서 《백범일지》의 후반을 완수하였다. 오사야항 유적지에는 작은 기념비가 있었는데 한자로 《대한민국림시정부구지(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는 1995년 련화지의 림시정부 기념관을 만들 때 함께 세웠다 한다. 건물 위층은 복도로 서로 이어져있었고 김구는 당시 2층에 거주했다고한다. 지금 이곳에는 9가구가 살고있었다. 중경시 도시개발계획에 속한 이곳의 위험가옥은 곧 허물게 된다. 가경해 관장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언녕 허물어야할 건물이였지만 건물 앞 기념비가 있어 연장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보수하든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 만들든지 조치를 취하도록 관련부문에 반영하련다고 말했다.   화평로 2항(옛 오사야항 1호)의 대한민국림사정부 거처 추용로 37번지, 한국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지금은 미원이라는 가게로 변함)   화평로의 림시정부 유적지를 보고나서 우리는 추용로(鄒容路)로 갔다. 추용로 37번지는 한국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기강으로부터 중경에 본거를 옮긴후 김구는 림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기에 서둘렀다. 조선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요구하던 장개석도 이때 김구와 한국림시정부를 수락하고 조선의용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오전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Korean Independence Army)창립식이 있었다. 광복군 총사령은 리청천, 참모장은 리범석, 총무처장은 최용덕, 참모처장은 채형세(菜衡世), 부관처장은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은 안훈(安勛), 훈련처장은 송호, 군무처장은 류진동(劉振東)이였다. 광복군 창립식에는 림시정부 요원과 중국 국민당의 손과, 오철성(吳鐵城), 공산당의 주은래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가하였다. 광복군이 창립되였던 가릉빈관 자리는 지금 가릉 신촌(新村)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광복군은 창립된후 각지에서 선전공작과 초모활동을 진행하였다. 사령부는 중경 추용로 37번지에 있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군정부 건물에 정했다. 추용로에 도착하니 3층 낡은 건물이 나타났다. 낡은 건물이였지만 정면은 새롭게 장식하였고 1층은 미원(味苑)이라는 음식가게 였다. 이시기 한국광복군은 몇 개 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리준식(李俊植)이 제1지대장으로, 공진원(公震遠)이 제2지대장으로, 김학규(金學奎)가 제3지대장으로, 라월환(羅月煥)이 제5지대장을 맡았다. 광복군은 대부분 기간 본부를 서안에 정했기 때문에 중경의 추용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중경지역 답사를 시작해서 사흘째 되는 날인 11월 20일, 우리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길을 떠났다. 날씨는 그냥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였다. 빈관앞에서 택시를 타고 중경시 남안구 탄자석(彈子石)으로 갔다. 거기에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옛터, 김원봉의 거주지,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옛터를 비롯한 유적이 있다. 중경시 남안구는 장강 이동과 이남지구가 포함된다. 탄자석은 남안구의 북부에 위치했다. 한시간 뒤 우리는 탄자석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먼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탄자석 묘배타(苗背沱) 81번지를 찾아갔다. 묘배타는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정확한 주소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택시기사가 현지인들에게 열심히 물어서야 겨우 남안구 탄자석 묘배타 81번지를 찾아냈다. 옛날에는 손가화원(孫家花園)이라는 공원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사천성 물자저장 관리국이 자리하고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평탄한 곳이였다.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커다란 정문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국가저비국(國家儲備局) 435처(處)라고 씌여있었다. 정문 뒤로 커다란 공지가 있었고 한쪽에 새로 지은 3층 건물이 있었다. 옛날의 손가화원 정원과 건물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1940년 3월 중경에 온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요원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본부를 거느리고 이곳에 거처를 잡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과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당시 주소는 남안구 탄자석 아궁보(鵝宮堡)였다. 탄자석 묘배타는 비록 중경시에 속한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농민이였고 생활도 넉넉하지 못한 편이였다. 묘배타를 보고나서 탄자석 대불단(大佛段)으로 향했다. 탄자석 상업구를 지나니 좁은 골목길 량켠에 크고 작은 가게와 난전을 펼친 시장거리가 나타났다. 비가 온 뒤라 길에는 흙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이 많고 길이 좁았기에 차를 시장 입구에 대기시키고 도보로 걸어 들어갔다. 시장길을 반쯤 더 들어가니 대불단 150호 건물 표식이 보였다. 2층 낡은 벽돌건물이였는데 지금은 유명한 동군각대약방(桐君閣大藥房) 분점으로 되여있었다. 이곳은 1942년 광복군 제1지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40년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가 중경에 자리를 잡자 곧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이룩해냈다. 그리하여 국민당 통치구역에는 두 개의 조선인 반일부대가 있게 되였다. 하나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지지하는 조선의용대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이 지원하는 한국광복군이였다. 이 두 조선인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각 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이시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소장파 청년들은 일제와 직접 싸울수 있는 북상진로를 주장하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도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통합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 대회에서 북상을 결정하고 조선의용대 각 부대는 하남성 락양에 집결하여 북상항일 준비를 다그쳤습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여 팔로군 통제지역으로 가자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광복군쪽으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1941년 11월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제6차 대회를 소집하고 림시정부에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한국림시정부에는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두 당이 경쟁하는 국면이 나타났고 광복군을 재편성하게 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총사령 겸 제1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한 뒤였기 때문에 사실 중경에 남은 대원들은 50여명 정도뿐이였다. 제1지대 본부에는 부지대장 신악, 비서에 리달(李達), 총무조장에 리집중, 조원에 한지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경 탄자석 대불단 150호에 거주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부가 있었던 대불단 150호로부터 조금 더 나가면 대불단 172호가 나타난다. 이곳은 광복군 부총사령이며 제1지대 지대장이였던 김원봉의 거처였다. 3층 벽돌건물이였지만 지금은 더욱 헐망하였다. 아래층은 간소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고 그 곁에는 소매점과 동군각대약방 다른 분점이 있었다. 중경에서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치렬한 경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국림시정부내의 권력과 중국측의 지원금 사용을 비롯한 문제를 가지고 진행된 이러한 경쟁과 투쟁은 1945년 일제의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였고 마침내는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한채 각자가 귀국행로에 올랐던 것이다.   남안구 탄자석(손가화원 옛터),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곳 대불단 150호, 광복군 제1지대가 있었던 곳 광복군 1지대 김원봉, 2지대 리범석, 3지대 김학규(좌로부터) 대불단 172호, 김원봉가 있었던 거처 옛터   탄자석의 사적지들을 답사하고나서 다시 중경시 조천문으로 갔다. 저녁 배를 타고 중경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야할 배편은 바로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여 태항산 지역으로 나가던 배길과 비슷하였다. 11월 20일 저녁 우리는 조천문 부두에서 우의호(友誼號) 관광선에 올랐다. 3층으로 된 륜선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방은 307번이였다. 4명이 함께 방 하나를 썼는데 침대는 상하 두 층으로 모두 6개가 있었고 방에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배는 네온등불빛이 휘황한 중경부두를 떠나 서서히 동으로 달렸다. 중국의 최대하천인 장강의 옛 명칭은 양자강(揚子江)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청장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장강의 총길이는 6380㎞이다. 장강은 사천경내에서 민강(岷江), 타강(沱江), 가릉강과 합친뒤 무수한 산을 지나면서 세계적인 명소인 장강삼협을 형성했다.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으로 구성된 삼협은 서부 봉절(奉節), 백제성(白帝城)에서 시작되여 호북성 의창까지 총 거리가 192㎞이다. 배가 중경시를 벗어나자 밖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울리는 뱃고동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가 들려올뿐이였다. 침대에 누워 조선의용대의 북상항일로선을 생각해 보았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 선생은 《태항산근거지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그 경과를 자상히 서술하였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지도원인 석정 윤세주는 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 대원들을 인솔하여 《민생호》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났다.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진출은 김원봉이 비밀리에 중경 팔로군 판사처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와 련계하여 이룩되였다. 이를 모르는 국민당의 고위 관원들이 연회를 베풀어 이들을 전송하기도 하였다. 최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의용대의 북상을 엄호하기 위해 중경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원봉마저 움직인다면 의용대의 북상행로의 정체가 드러나 누구도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날수없었기때문이다. 조선의용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은 배를 타고 산간도시인 만현(萬縣)에 도착하여 하루 묵은후 1월 3일 봉절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들은 천하명승인 구당협, 무산(巫山) 12봉을 구경하면서 의창부근에 이르렀다. 당시 의창은 일제에게 강점되였기때문에 의창으로 가지 못하고 자귀(秭歸)에서 배를 내렸다. 이들은 다시 륙로로 호북성 로하구(老河口)를 거쳐 락양에 도착하였다가 맹진(孟津) 나루를 통해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장강 소삼협 장강삼협의 웅위한 산봉들   11월 23일, 우리가 탄 배는 구당협을 거쳐 무산에 이르렀다. 장강의 지류인 대녕하(大寧河)가 이곳에서 장강에 흘러드는데 소삼협은 대녕하 상류에 위치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바꿔 타고 천하절경인 소삼협을 관광하였다. 맑은 물과 울긋불긋 단풍이 든 산, 이따금 보이는 산간마을들은 참으로 선경인 듯 싶었다. 북상항일에 나선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아름다운 삼협을 지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역시 우리와 같이 장쾌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여 경탄을 련발했을 것이고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일제를 타격할 의지를 더욱 굳혔으리라 생각하였다. 배는 계속 동으로 달렸다. 푸른 물결은 쉬임없이 흐르고 천태만상의 산봉들은 련달아 눈앞에 아득히 펼쳐졌다. 하나하나의 산봉들의 미묘한 자태를 눈에 새기기도 전에 또 다른 산봉이 나타나 숨까지 가빠났다. 철석같은 몸으로 장강을 조이는 듯 기문(夔門)은 웅위로운 남성의 미를 한껏 자랑하였고 구름이 허리에 감도는 신녀봉(新女峰)은 아름다운 소녀의 몸매를 련상시켰다. 웅위한 구당협, 수려한 무협, 위태한 서릉협을 거쳐 날이 어두워져서야 우리는 의창에 도착하였다. 의창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비행기편으로 북경에 돌아와 중경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86    제56회 7당 통합대회 사적지 댓글:  조회:4959  추천:3  2012-11-30
항일전쟁시기 중경지역에 모인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가들은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자체무장을 갖추었지만 대원 다수가 국민당 부대에 흩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전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국공 량당간의 암투가 자못 치렬하여 조선반일지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관계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많이 신뢰하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 가운데 사상이 좌적이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점차 이들을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도리여 김구와 림시정부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지원을 주려하였다.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의 중경 진입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통합을 전제조건으로 내 세웠던 것이다. 중국내 조선인 지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하고 통합된 당파를 만들어야 계속 지원을 줄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구와 리청천을 비롯해 한국림시정부 요원들은 대부분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게 되었고 각 당파간의 단합에 고심하게 되였다. 2004년 11월 19일, 새벽부터 보슬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약속시간을 맞추어 우리는 가경해 관장을 만나 함께 기강으로 떠났다. 중경시 동남부에 위치한 기강현은 귀주와 린접하고 있다. 인구는 92만여명에 달하고 면적은 2,000여㎢이다. 중경으로부터 귀주의 준의(遵義)로 가는 고속도로가 기강으로 통하여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였다. 40여분 달리니 기강현 경내에 들어섰다. 기강은 경내로 기강하(綦江河)가 흐르면서 생긴 이름이다. 귀주성에서 발원하는 기강하는 북으로 흘러 기강현을 지나 장강에 흘러든다. 때문에 기강현의 수상운수도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달리는 차에서 가경해 관장은 사천과 중경의 인문특점을 자랑삶아 이야기해주었다. 중경지역을 포함한 사천은 산이 많고 습한 고장이다. 산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도보로 언덕을 오르내려야했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작고 내력이 강하다. 또한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습하기 그지없는 날씨로하여 이 고장 사람들의 인내력은 더욱 강하다. 뼈를 에이는듯한혹한이나 볕이 강한 혹서가 아니라 일년내내 미적지끈하게 덥고 습하기 때문에 수천년간 이곳 사람들의 지구력과 근면성을 키워냈던 것이다. 가경해 관장은 또, 사천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는 보잘 것 없지만 일단 사천을 벗어나 활동하면 대부분 명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등소평과 같은 위인도 사천사람이고 공화국을 일떠 세운 10대 원수중 주덕, 섭영진, 류백승, 진의 네사람이나 사천사람이라고 하였다. 가경해 관장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기강현에 들어섰다. 우리는 우선 기강현의 상승가(上昇街)로 찾아갔다. 거리목에 이르니 커다란 작업장이 나타났다. 일군들이 한창 길을 닦고있었다. 작업장에서는 누런 흙을 파헤치고 있었고 량쪽으로는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승가는 가면 갈수록 지형이 점점 높아진다고 하여 가진 이름이다. 새로 닦고 있는 길 량쪽으로 좁은 석판길이 있었고 현지인들은 지게에 여러 가지 물품을 지고 석판 길을 따라 상승가를 오르내리고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길을 닦기 위해 상승가 입구의 많은 가옥을 허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옛 건물들도 포함되여 있는데 지금은 작은 옛 건물 하나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이제 곧 허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있었던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자리는 지금 도로 건설장으로 변해 버린 셈이다. 우리는 석판 길로 건설공지를 지나 계속 걸어갔다. 빗물이 석판에 떨어져 귀 맛 좋은 소리를 냈고 석판 길은 비에 젖어 한결 빛났다. 길을 따라 한동안 가다가 상승가 107번지에 멈춰 섰다. 거기에는 4합원 구조의 낡은 옛집 한 채가 있었다. 1939년 기강에 온 림시정부 의원과 조선청년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한다. (가경해관장) “이 집의 구조는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벽도 가운데 나무쪼각을 하고 거기에 흙을 발라 만든 벽입니다. 이쪽은 벽돌로 되었는데 후에 지은건물이고이 정면을 보면 기둥의 조각이라든가 계단 조각을 보면 당시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리청천은 이쪽 낡은 건물에 살았습니다. 그리고2,30명 조선인 임정요인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중경시 기강, 건설장으로 변해버린 상승가의 입구 곧 허물어 버릴 상승가 입구의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의 부분적 건물 비가 내리는 기강의 상승가 석판길 지게로 물건을 나르는 중경시 기강 사람들 상승가 107번지, 리청천과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오른편에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고 왼편에는 낡은 흙집이 있었다. 집은 모두 2층 건물이였는데 왼편의 흙집은 옛 건물 그대로이고 벽돌건물은 후에 보수한 건물이였다. 집은 현지의 염상(鹽商)으로 있던 부자의 집이였다. 중경부근은 천연 소금이 나는데 천연 소금은 바다 소금에 비해 맛이 독특하다. 그러므로 옛날 이곳에는 소금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한다. 당시 이곳에 20, 30명 조선인이 거주했고 1940년 광복군 총사령으로 된 리청천과 부인도 이곳에 거처를 잡았다고 한다. 림정의원으로 있던 손일명(孫一鳴)은 이곳에 거주하다가 병사하였는데 그의 묘지가 부근의 산언덕에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묘지를 찾지 못했다. 가경해 관장은 그 묘를 다시 확인하고 증인을 찾기 위해 기강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로인분들을 찾아 문의해 보았지만 끝내는 확인하지 못했다. 상승가 입구의 림시정부 청사 옛집을 허물 때 옛집을 복원하기 위해 측정작업을 하였는데 그때 현지 로인이 손일명의 묘지가 있다고 증언하였다한다. 그리고 리선자 부관장을 비롯해 묘지를 이미 확인하였고 지금 남은 사항이라면 증언자의 싸인을 받아 가는 일이라고 가경해 관장이 소개하였다. 비는 그냥 내렸다. 갈피를 잡을수 없이 여러 로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도 퍼그나 지났다. 그러나 묘 자리와 증언하는 로인은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보슬비는 그냥 멎지 않았다. 상승가를 본 다음 우리는 차를 돌려 기강현 타만진(沱灣鎭)에 갔다. 기강하 기슭의 언덕에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이 곧 타만진이였다. 타만 65번지에 가니 비탈진 곳에 낡은 가옥이 보였다. 빈터에 다 망가지고 나무 기틀만 약간 남아있는 집이 바로 1939년 김구가 머물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근에 림시정부 요원이였던 리동녕(李東寧)과 조소앙(趙素昻)의 거처가 있었다. 모두 헐망한 가옥이였는데 지금은 집주인들이 창고로 쓰는 듯 하였다. 때문에 번지수도 명확하지 않아 관련 연구일군들만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강하는 큰 굽이를 지며 흘렀다. 강폭은 100여m 정도였고 물은 자못 깊었다. 이따금 화물을 가득 실은 배가 강에서 오고갔다. 기강에 머물 때 조선인 청년들은 체력을 증강하고 전장에 나가 싸울 일념으로 기강하에서 수영훈련을 하기도 하였다한다. 그리고 한 독립지사는 기강하 기슭을 거닐며 망국의 한과 고향에 대한 사무침에 시달리다가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유감스럽게 그 의사의 명함에 대해 가경해 관장은 명확히 밝혀주지 못했다. 타만에서 멀리 산봉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루각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비가 내리기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산으로 올라갈수 없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곳엔 관음묘가 있었고 부근에 또 동굴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조선인 청년공작대가 거기에 거주하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음묘는없어지고 새로 지은 루각 하나가 있을뿐이라고 했다. 타만에 머물면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다당련합회(多黨聯合會)를 준비하였고 조선인 각 당파와 혁명단체의 통합을 이룩하려 했다. 국민정부의 장개석은 조선인 내부의 불화와 분렬을 지적하면서 통합이 여의치 않으면 재정지원도 고려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통합이 이룩될때까지 림시정부의 중경진입을 허락하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기강의 타만 거처에서 여러가지 고민에 빠져있었고 후세에 남긴 《백범일지(白凡逸志)》을 집필하고있었다. 그는 각 당파와 단체의 요인들과 만나 독립과 민족해방을 이야기했고 투쟁방향을 두고 치렬한 론쟁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세월속에 사라져 가는 타만의 유적지를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났고 비속에 하염없이 흐르는 기강하 물결을 보노라니 마음은 슬퍼지기만 하였다. 중외를 진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국림시정부와 김구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시국은 갈수록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지대한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앞에 너무나도 무력하였고 드디어 중경이라는 오지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상해, 항주, 무한, 장사, 광주의 련속되는 함락을 겪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피난민 신세로 기강에까지 온 한국림시정부의 상황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각 파벌의 언쟁은 끊기지 않고있었다. 현실은 모든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모든 항쟁의욕을 말살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수없었다. 수십년간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이끌어온 독립투쟁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강의 타만진 리동녕, 조소앙의 기강 타만진 거처로 추정되는 곳 김구가 백범일지를 쓰면서 7당 통합대회를 준비하였던 곳, 지금은 몇개 집 틀과 허물어진 담만 남음 기강 타만진의 중산로소학교 입구 7당 통합대회 옛터를 가르키는 가경해 관장   중경시 기강현 중산로(中山路) 18번지에 이르면 작은 소학교 하나가 있다. 길거리에서 보면 잘 알리지 않지만 길가의 광고판들을 자상히 살피면 그속에 중산로소학교(中山路小學校)라고 쓴 작은 간판아래 교문이 보인다. 교문으로 들어가니 3층 교수청사가 있고 운동장이 있었다. 교수청사 바른편으로 새 아파트와 낡은 2층 건물이 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쪽을 가르키면서 당시 이곳에는 옛 사원이 있었고 그 곁에 영산빈관(迎山賓館)이 있었는데 조선혁명가들의 7당 통일회의가 바로 영산빈관에서 진행되였다고 하였다. 1939년 8월 27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빈관에 모여 통일회의를 열었다. 중국 내 반일단체의 대통합을 위한 또 한차례 좌우합작 노력이였다. 중국내 조선 독립운동진영은 두 개 큰 정당이 주도하였다. 하나는 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고 다른 하나는 김구와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을 핵심으로한 조선민족통일전선련맹이 형성되여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도 서로 주장이 달랐기 때문에 통합과 분렬을 거듭하는 상황이였다. 기강에 도착한 김구와 림시정부는 우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련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고있을 때 장개석 국민당은 이들에게 다소 랭담한 태도를 보였다.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통합된 당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림시정부의 중경 진입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합작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비상시기에 열린 기강의 7당 통합대회는 중국 내 조선반일투쟁 력량을 집중, 통일하고 중국 국민정부와의 협동을 강화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각 당파간의 모순과 분쟁은 도저히 극복되지 못했다. 우선 개인중심의 통합을 반대한다는 리유로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탈퇴하였다. 9월에는 기타 5당 대회가 속개되였지만 김원봉과 김구, 조선민족혁명당과 림시정부간의 모순이 극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이 리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김구세력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5월 조완구, 엄항섭을 대표로하는 한국국민당, 리청천, 최동오(崔東旿)를 대표로하는 조선혁명당, 조소앙, 홍진을 대표로한 한국독립당이 새로운 한국독립당으로 합병하였다. 새로운 한국독립당은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집권당 역할을 하게 되였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저들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국민당과 장개석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의용대와 경쟁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 창립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기강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장개석의 허락을 받고 중경으로 본거를 옮겼고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85    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② 댓글:  조회:6280  추천:0  2012-11-09
 중국 전민이 동원되여 일본침략자와 싸우던 그 가렬처절한 전투에 뛰여들기 위해 조선혁명가 한락연은 프랑스로부터 중국에 왔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은 기필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전승할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조선인민도 독립과 해방을 맞이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자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저지른 일본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야망을 전세계에 전해주고 유지인사들을 단합시켜 일본침략자와 싸울 것을 다지며 무한에 거처를 잡았다.   (권립)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귀국하여 무한 동북항일구국 총회에서 사업했습니다.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민주인사들과 접촉하고 국민당 장군들과 외국인사들과 접촉했습니다. 그때 한구에서 학교를 꾸리고있던 미국 기자 스노, 한구에서 전선지원 의료대 훈련반을 꾸리고있던 스미스트라이 녀사에게도 한락연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한락연은 당의 지시에 따라 줄곧 상층 통일전선 사업에 자신의 한생을 바쳤습니다.” 진보적인 항일잡지 반공(대부분 반공 잡지의 표지그림은 한락연이 그렸다) 한락연은 반공잡지에 동북 장고봉에 관련한 글을 실었다 한락연은 이 건물에 거폭의 항일선전화를 그려 걸어놓아 전민의 항일의지를 고양시켰다   귀국하여 무한에 도착한 한락연은 동북에서 활동할 때 친숙하였던 염보항의 소개로 다시 공산당조직활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무한에는 중공중앙 장강국(長江局)의 령도를 받는 동북항일구국총회(東北抗日救國總會)가 있었는데 동북에서 활동하던 류란파(劉瀾波), 염보항, 우의부(于毅夫) 등이 책임자로 있었다. 무창(武昌) 명월교(明月橋) 순직회관(順直會館)에 본부를 둔 동북항일구국총회는《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를 출간하였는데 한락연은 늘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으며 잡지의 표지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하였다.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그는 선전대와 함께 거리에 만화를 붙였고 또 한구(漢口)의 가장 번화한 강한관(江漢關) 종루(鐘樓)에 거폭의 선전유화를 걸어놓기도 하였다. 동북항일구국총회의 련락사업을 맡은 그는 또 쏘련 대사관과 련락을 가지고 쏘련의 중국항전 지원사업을 추진시켰다. 쏘련대사관의 한 무관은 그에게 독일제 사진기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외국어에 능했기때문에 국제인사들과 쉽게 접촉할수 있었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劉玉霞)녀사가 회억한데 의하면 길림성 룡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은 어려서부터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에 능했고 또 로어도 조금 배웠다한다. 그후 유럽을 다녀오면서 또 영어, 독일어, 이딸리아어도 잘했다한다. 당시 국제우호인사 스메들리(Annes Smodler)는 한구에서 의료일군 지원자 강습반을 만들려 하였다. 저명한 미국 녀기자였던 스메들리는 전장의 구호일군을 양성시키는 한편 팔로군에 보낼 약품을 모으려 하였던것이다. 무창에 있던 한락연은 늘 강을 건너 한구에 가서 스메들리의 사업을 도와주었으며 외국기자들에게 전쟁터의 사진을 전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죄행과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많은 소중한 사진들을 외국기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중국의 항일투쟁을 국제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한락연은 또 중국인민의 벗인 국제우호인사 루이.앨리(Rewi Alley), 에드가 스노(Edgar Snow) 등과 친숙한 사이였다. 이들이 1938년, 한구에서 중국공업합작협회(中國工業合作協會)를 세울 때 이미전부터 이들을 알고있었던 한락연은 이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그는 무한에서 범장강(范長江), 진룡비(陳龍飛)와 함께 청년구국협회(靑年救國協會)를 조직하였는데 협회는 민주인사 심균유(沈鈞儒), 전준서(錢俊瑞)가 령도하는 상해구국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무한에 있던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인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은 동북항일구국총회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한에 모인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적극적인 련계를 취하면서 항일통일전선을 이끌어나갔다. 1938년 8월 13일, 8.13항일전쟁 전면개시 일주년을 기념하는 횃불시위가 무한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한락연은 수많은 중국, 조선 청년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십여만 시위 인파속에는 《중화민족선봉대 총대부(總隊部)》, 《동북항일구국총회》,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 등 글자를 새긴 기치를 볼수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엽검영(葉劍英)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시위의 앞장에 섰다. 이해 한락연은 주은래가 조직한 작가와 예술가 연안(延安)방문단에 참가해 연안을 방문하였다. 그는 연안의 녀대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무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있던 한락연은 또한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도왔다. 이시기 혁명의 성지(聖地) 연안으로 가려하는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인 혁명활동가 강극부(姜克夫)를 통해 리명(李明), 왕수성(王守成), 장영(張英 녀) 그리고 서양화를 배우는 장진광(張振光) 등 4명 조선청년을 연안에 보냈다. 이들은 서안의 팔로군판사처를 거쳐 연안으로 갔다. 이들 중 리명(李明), 장진광(张振光)은 연안 항일군정대학(抗日军政大学)에서 학습한후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파견되여 조선의용대와 조선독립동맹의 요원으로 되였다. 1938년 전민의 항일투쟁정서는 크게 앙양되였지만 전세는 호전되지 않고있었다. 일본침략군은 상해, 남경을 함락한후 세면으로 무한을 포위해왔다. 적들은 비행기, 땅크를 동원하였고 최 정예부대를 투입해 무한공격전을 개시하였다. 중국 군민들도 이에 대항해 무한주변 산과 물에 의지해 완강히 적들과 싸웠다. 적아 쌍방이 백여만명 병력을 투입한 무한회전은 일제의 무한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이해 겨울, 무한의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당의 지시에 따라 중경(重慶)에 옮겼다. 한락연은 주은래의 결정에 따라 중경에 옮겨온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구국총회 본부를 설치한 오랜 전우 염보항의 집에 거처를 잡았다. 이듬해 봄, 한락연은 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와 결혼하였다. (한건립) “어머니는 기독교 녀청년회에서 전국협회 농촌부 총간사였습니다. 청년회 본부는 상해에 있었습니다. 상해에서 후에 부유난민소가 있었습니다. 이조직은 후에 무한에 옮겨왔는데 어머니는 무한에서 아버지와 결혼. 어머니는 당시 미국 꼴롬비아 대학 석사졸업생이였습니다. 1935년 졸업하고 38년 모든 항일조직이 모두 무한에 모였는데 무한에서 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무한 기독교 녀 청년회에서 사업했는데 기독교라는 종교이름이였지만 당사의 조직사를 보면 무릇 여기에 참가한 사람은 항일, 혁명의 참가 기한을 모두 그때로부터 기록했습니다. 기독교 이름이지만 사실은 진보적인 조직이였습니다. ” 40년대 가족사진(한락연과 부인 류옥하, 딸 한건립, 아들 한건행)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유화 뒷줄 좌로 두번째가 류옥하 녀사이고 다섯번째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녀사이다     류옥하는 일찍 미국 꼴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지적인 녀성이였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선후로 한구와 중경에서 녀성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고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 항일전쟁이 폭발한후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인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주임위원을 맡은 전지당정위원회를 설립하고 리제심(李濟深)을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공산당에서는 국민당 상층인사들과의 련락을 강화하고 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은래를 전지당정위원회 위원으로 배치하였다. 한락연은 전지당정위원회에 파견되여 소장지도원(少將指導員)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그는 염보항의 소개로 제7전구 사령부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주로 산서와 섬서지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의 련락사업을 맡아 두 군 사이의 마찰을 감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중경으로부터 서안을 거쳐 진동남지구를 자주 시찰하였다. 그는 기자이면서 또 전지당정위원회의 소장지도원의 신분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를 자유롭게 다닐수 있었다. 그는 전구인민들의 항쟁사실을 사진에 담았으며 현지 풍경과 민속을 화폭에 담았다. 이해 겨울, 한락연 다시 산서성 남부를 시찰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진동남지구를 토벌하고있었다.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황하를 건너 항일전쟁에 나선 국민당 장병들을 위문하였고 팔로군 주둔지에 가 보았다. 그는 팔로군 전선총부(前線總部)의 부참모장인 좌권(左權)장군을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산서에 주둔하고있던 국민당 93군은 장개석의 직계부대였다. 그는 93군 참모장인 위외(魏巍)와 긴밀한 련락을 가졌는데 위외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줄곧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인물이였다. 그의 주변에는 혁명을 지향하는 수많은 진보적인 장병들이 있었다. 1940년 2월, 장개석은 93군에 밀령을 내려 산서의 팔로군 유격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명령을 받은 위외는 작전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구실로 명령을 하루동안 하달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당천제(唐天際)사령원이 거느린 공산당의 유격부대는 순조롭게 국민당군의 포위권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 일로 하여 93군 내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국민당에서는 위외를 중경의 중앙훈련단에 와서 강습하라고 하였다. 사실 강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위외가 중경에 돌아가면 체포되여 심판받거나 구금될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는 한락연을 만나 서한을 팔로군의 팽덕회(彭德懷)부사령원에게 전할것을 요구하였다. 팽덕회를 만난 한락연은 위외더러 계속 93군에 남아 사업을 견지할것을 요구하는 팔로군측의 의사를 전했다. 5월에 한락연은 위외의 서한을 가지고 서안의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떠났다. 그는 서안을 거쳐 중경으로 가던 길이였다. 그러나 서안을 떠나 중경으로 가던 도중 한락연은 보계(寶鷄)에서 국민당 밀정들에게 체포되였다. 밀정들은 그를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적들의 혹형을 이겨내고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으며 옥중의 기타 전우들과 함께 적들과 투쟁하였다. 한락연은 전지 기자의 신분으로 팔로군의 진동남근거지를 다니며 공산당과 팔로군, 신사군의 항일을 적극 선전했다(태항산근거지의 민가) 한락연의 옥중 자화상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하였다. 그러나 위외의 사건과 련계되였기에 처음에는 쉽게 풀려날수가 없었다. 당시 위외는 사태가 엄중한것을 짐작하고 93군의 부분적인 진보인사들을 거느리고 팔로군을 찾아 떠났던것이다. 위외는 후에 백천(白天)으로 이름을 고치고 팔로군 전선총부 참모처장을 지냈으며 함께 93군에서 나온 하눌(夏訥)은 전선총부 참모로, 양공소(楊公素)는 전선총부 비서로 사업하였다. 3년간 옥고를 치른 한락연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상층인사들, 동북 민주인사들의 노력으로 가석방되였다. 그러나 밀정들은 계속 그를 감시하였으며 그에게 서북을 떠나지 못한다는 등 여러가지 제한을 주었다. 출옥후 한락연은 서안시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계속 당의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해 여름에 그는 예술기질이 있는 학생 황주와 함께 다시 섬서로 떠났다. 수개월간 한락연은 중국의 참담한 모습을 진실한 화폭에 담아냈으며 동행한 황주에게 회화기교를 전수하는 동시에 혁명사상을 전수하였다. 드넓은 중화대지의 아름다운 경물들과 빈궁에 허덕이는 농민들, 낡은 마차, 농촌녀인들의 진실한 모습이 그들의 화폭에 담겼다.
84    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① 댓글:  조회:5554  추천:2  2012-11-07
“전국이 해방된후 나는 여러차례 신강에 가군 하였다. 거기에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를 늘 보게 된다. 그리고 멀리에서 울리는 락타방울소리를 듣는다. 그때면 가파른 어느 산정이나 바위우에 락연선생님이 서있는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의 모습은 영원히 젊어보인다. 그는 산기슭의 맑은 샘가에서 나를 보고 웃는듯 하였다.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가벼운 부름소리가 난다. 락연선생님, 제가 왔어요!” 이는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黃冑)가 1982년, 은사인 한락연(韓樂然)선생을 기념하여 쓴 글의 한 대목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 그것은 조선독립과 중국혁명의 중임을 떠메고 반일투쟁의 험난한 길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의 한생을 방불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 한락연의 학생 황주의 작품, 그의 작품에서는 한락연의 화풍이 잘 보여진다   중국 길림성 룡정촌(龍井村)에서 태여난 한락연(1898-1947)은 최초의 중국조선족 무산계급혁명가이며 탁월한 화가이며 국제반파쑈전선의 투사이다. 그의 원명은 광우(光宇)이고 자는 락연(樂然)이다. 지금 북경에는 그의 딸 한건립(韓健立), 아들 한건행(韓健行)이 살고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의 련락을 받고 우리가 한락연의 유가족을 찾아간것은 2003년 9월 18일 오전이였다.촬영사 김철기자와 력사고문 최룡수교수 일행 3명이 갔다. 북경시 방장(方莊) 방고원(芳古園)에는 한락연의 딸 한건립이 살고있었다. 남편 강기민(康冀民)씨는 외교관으로서 오문(澳門)문제 중국-뽀루뚜갈 련락소조 중국측 대표로 일하다가 리직한 분이고 한락연의 아들 한건행은 국가체육총국 체육신문업본사 대형행사센터의 부주임으로 사업하고있었다. 이들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건립녀사는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이였고 한건행씨는 스포츠사업을 하는만큼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스러웠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기민씨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족이였지만 한건립녀사와 한건행씨는 조선말을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어로 대화가 오고갔다.   한락연의 자화상   한락연 북경 유가족과 함께(좌로 두번째 딸 한건립, 네번째 아들 한건행) 2003년   한건립녀사는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아버지께서는 194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944년에 태여났으니깐 그때 네살이였지요. 한건행은 그때 두살이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면 마지막 신강으로 떠나실 때의 일뿐입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트럭에 앉아 신강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함께 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아버지는 다음엔 꼭 데리고 간다고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자상한 이야기는 후에 어머니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회억을 더듬으면서 이들 오누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락연의 아명은 윤화(允化)였고 또 한소공(韓素功)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가정이 가난했기때문에 그림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한락연은 어렸을 때 형제가 여럿이 있었지만 모두 페결핵으로 요절하였다. 때문에 한락연은 후에 자녀들의 이름자에 모두 건강하다는 건(健)자를 넣어주었다 한다. 나라가 독립 못하며 녀성들도 자립할수없다하여 딸한테는 일어설 립(立)자를 붙여주고 말한대로 행동에 옮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한테는 행(行)자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한락연은 하학후면 묘지에 가서 나무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14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선후로 전신국과 세관에서 일하며 집안살림을 보태지 않으면 안되였다. 세관에서 일할 때 한락연은 많은 외국서적을 접하게 되였으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술에 관한 전문서적도 찾아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길림성 룡정에서도 조선의 3.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군중시위가 있었다. 한락연은 이날 시위를 위해 교회당에서 밤새도록 프랑카드를 썼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사람들을 련락하기도 하였다. 3월 13일, 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던 그는 무고한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제의 만행을 직접 보게 되였다. 마침내 그는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고 젊음의 끓는 피를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사업에 기여할 결의를 다지며 고향을 떠나게 되였다. 1919년, 로씨야의 사회주의 10월혁명을 동경한 한락연은 로씨야로 갔지만 울라지보스또크의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중국 상해에 가자 그들과 함께 다시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한락연은 전차(電車)회사와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한편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늘 조선혁명자들과 접촉하면서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조선혁명자들의 내부 종파투쟁과 암투에 큰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한건행) “1923년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동북에 파견되였습니다. 아버지는 동북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 중국공산당원이라는 기재가 있습니다. 당사에는 심양 봉천 당지부 설립의 한사람. 조선쪽의 공산당과 어떤 인물들과 련락하는지 몰랐지만 로소비의 회억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수요일이면 꼭 밖에 나갔다고합니다. 심양에서 심양미술전문학교(지금 심양로신예술학교) 미술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상해의 로소비, 구양여천을 초청해 회화와 희곡을 강의한 학교였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당원들과 련락하기 위해 학교에 나가셨습니다. 그는 소자원을 당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은행에서 대부금 맡아 운영하는 학교였습니다. 혁명활동으로 아버지가 외출하였을 때 빚 재촉이 와서 학생들이 아버지 방에서 트렁크를 열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전부 맑스주의저작과 혁명서적이였다고합니다. 그리고 일본 파쑈의 죄행, 조선의 곤혹 이 같은 내용의 서적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합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당시 중국공산주의자 채화삼(蔡和森)이 창간한 《향도(向導)》잡지의 애독자였던 한락연은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에 접근하였으며 1923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이해 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의 파견을 받고 중국 동북으로 가게 되였다.   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락연의 기사 성경시보에 실린 한락연의 미술활동 관련 기사 조기 공산주의 간행물인 향도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했던 곳 할빈 보육중학교, 한락연은 할빈에서 보육중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한락연이 꾸린 락천사진관이 있었던 곳 흑룡강 치치할시 룡사공원에 있는 격언정, 한락연이 격언정을 설계했다 한락연(한행지)를 시정국 공정과 과원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1924년 봄, 봉천(奉天 심양)에 도착한 한락연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을 알게 되였다. 그는 염보항의 도움으로 개인 유화전시회를 열었고 또 소남관(小南關) 풍우대(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세웠다. 기독교청년회와 미술전과학교는 한락연이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좋은 장소였다. 그는 수많은 청년들을 조직해 맑스주의 리론을 학습하게 하였으며 사회 각계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25년에 그는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이끌어준 소자원(蘇子元) 등 청년들도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심양의 중국공산당 조직사업을 훌륭히 완수해 내였다. 1925년 여름,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가 다시 할빈에 남아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할빈 보육중학교(普育中學)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초도남(楚圖南), 조상지(趙尙志)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수분하(綏芬河)에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만들었으며 또 치치할시 룡사공원(龍沙公園)의 격언정(格言亭)을 설계하였다. 1929년 가을, 한락연은 동북으로부터 상해를 거쳐 멀리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예술의 전당으로 불리우는 프랑스에서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찾아보려고 했던것이다. 한락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때는 서방의 전반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경제공황을 겪던 시기였다. 프랑스 리옹에 도착한 한락연은 거리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류학하는 중국의 화가들인 상서홍(常書鴻), 려사백(呂斯百)을 알게 되였고 또 리옹의 중국호텔에서 개인 회화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그림들이였지만 그의 과감한 행동과 짙은 동방적인 회화기법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았고 또 려비도 얼마간 마련하게 되였다한다. 그후 한락연은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에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1931년, 빠리에서 예술대학에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예술의 조예를 깊이 하는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 중국언어지부에 가입하고 국제로동운동의 경험을 학습하였다. 이해 그는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시야를 넓혔고 여러차례 회화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 류학시절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거리에서 사생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개선문의 부조 유화(한락연)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양호성장군 등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서(뒷줄 좌로 다섯번째가 한락연), 이 사진은 온가보 총리의 백부 온붕구가 수장한 사진이다   1937년 7월, 일본제국주의는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딸리아에서 이 소식을 접한 한락연은 급급히 빠리에 가서 빠리 석간신문사의 촬영기자 신분으로 반파쑈국제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얼마후 그는 항일전쟁의 일선에서 사업하려는 열망을 안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는 서안사변 주인공의 한사람인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83    중국항일전쟁시기 조선지사들 댓글:  조회:6259  추천:2  2012-09-18
완평성 담밑의 경종석에는 중국을 침략한 일군의 만행이 적혀있다     1937년 “7.7”사변을 통해 일본은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하였고 중국인민의 전면항전도 개시되였다. “7.7”사변때 로구교를 수비하면서 가장 먼저 일본침략군과 싸운 중국군에는 일찍 중국의 여러 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장병들이 많았는데 이들도 중국군민과 함께 처음부터 정면전장에서 일본침략군에 맞써 용감히 싸웠다. 북평에서 반일활동에 종사하던 김자렬(1897~1961)은 1924년에 리대소의 소개로 풍옥상 장군의 국민군 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북벌과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자충장군의 수하에서 180사단 참모장을 맡았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그는 부대를 따라 로구교항전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대아장전역, 서주전역에 참가했고 또 조양, 남과점 전투에도 참가했다. 장자충장군이 순국한후 그는 부대를 떠났다. 풍옥상의 서북군에는 김자렬외에 또 강석훈(1896~?)이라는 조선인 군관이 있었다. 그는 29군 113려단 소좌부관으로 있었다. 1937년에 그는 랑방에서 228퇀 기관총련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적을 소멸하였다. 그후 그는 림기, 사자령 등 전투에 참가하여 대아장 전역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국의 전면항전이 개시된에 |따라 국공량당이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는 중국내 조선의 여러 당파들의 단합을 촉성하였다. 1937년 11월, 조선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좌익당파들이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보위전의 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중국 관내 조선민족의 첫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가 정식 창립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소속되여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의 령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4명의 중국관원과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대표하는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대표하는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류자명으로 구성되였다. 의용군 창립시 대원수는 120명이였다. 김원봉이 총대장을 맡고 산하에 두개 구대를 설치하였는데 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이고 정치지도원은 왕통이였으며 제2구대 구대장은 리익성이고 정치지도원은 김학무였다. 이듬해 대오는 한배 더 늘었기에 제3구대를 설립하였는데 구대장은 한지성이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창립후 곧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여 선전, 구조, 정보수집을 비롯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부분은 중국의 유명한 문인 곽말약의 에서 일부 언급된다. 무한이 함락된후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은 여러 전구에 나뉘여 적정을 수집하고 일본군 정보를 해독하였으며 포로를 심문하고 항전을 선전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이 중경으로 천도하자 조선의용대 본부와 한국 림시정부가 령도하는 여러 조선인 당파들은 모두 광서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갔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상해 로신공원(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지 기념석 남경근교의 천녕사(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중경시 기강현 실험소학교(7당 통합대회가 있었던곳)     항일전쟁시기 김구가 령도한 한국 림시정부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 성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파견대 사령 시라가와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를 폭사하였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은후 국민당과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 림시정부가 추천하는 조선청년들을 여러 군관학교에 받아들여 학습하고 훈련하게 하였다. 장객석은 중경부근에 도착한 김구와 한국림시정부에게 조속히 통합대회를 소집할것을 요구하면서 통합되여야만 더 확실히 지원할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중경부근의 기강현에 모여 통일대회를 열었다.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7당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렬한 변론을 진행했지만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장개석의 거듭되는  촉구하에서 좌파 수령 김원봉과 우파 수령 김구는 1939년 5월에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협력과 단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정부의 수락을 받고 중경에 한국림시정부 사무기구를 두고 한국 광복군을 창건하기도하였다. 하지만 사실 중국내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줄곧 진정한 단합을 이루지 못했다. 유감이 아닐수없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총대장이며 제1지대 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 지도원 윤세주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민생호 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그들은 주은래와 중경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을 받았기에 순조롭게 한국 림시정부와 중국국민당을 떠나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찾아가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장강삼협을 지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가 있었던 곳(하북성 섭현) 조선의용군 주둔지(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지를 지킨 현지 로인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대원 대적 함화를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조선의용대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한후 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조선청년 혁명학교를 꾸렸다. 1942년 7월 14일, 하북성 섭현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창립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 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되였다.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이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을 맡고 김두봉이 집행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은 화북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는데 이때 대오는 2백여명이였다.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과 파로군은 어깨겪고 싸우면서 적후 선전활동, 반포위 토벌투쟁을 진행하였다.   1942년 12월 11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는 대장 김세광의 인솔하에 하북성 석가장부근의 원씨현에 가서 선전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호가장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항일투쟁을 선전하였다. 대원들은 강연을하고 시사보고를 했으며 또 군중들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도하였다. 그리고 담벽에 선전표어를 써놓았다. 하지만 이날 밤 그들은 뜻하지 않게 백여명 일본군과 괴뢰군의 포위습격을 받았다. 김세광 대장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김학철을 거느리고 대원들을 엄호하면서 철수하였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덥쳐드는 적을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쳐 7,8명 적을 소멸하고 희생되였다. 총칼로 적과 싸우던 박철동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의 총칼에 찔려 희생되였다. 한청도 역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치며 희생되였다. 이와 같이 엄호를 맡은 대원들이 영용하게 잘 싸웠기 때문에 대부분 대원들은 마을을 빠져나와 지원하려 달려온 팔로군과 회합할수있었다.  팔로군의 백퇀대정은 일본침략군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일제는 1942년 5월에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미친듯한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적 선견대는 현지 백성으로 분장했기 때문에 쉽게 근거지에 접근해 팔로군 전선총부가 있는 료현으로 공격해왔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팔로군 본부 참모장 좌권은 팽덕회 부총사령원과 전투력이 없는 천여명 후근일군을 신속히 대피시킨후 직접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적을 막고싸웠다. 조선의용군 박효삼 대장은 백여명 대원들을 거느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서 수차 적을 물리쳤다. 이들은 싸우는 한편 점차 십자령부근으로 철수하였다. 전투는 점점 더 치렬하였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십자령부근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그리하여 팔로군 참모장 좌권이 폭격에 희생되고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은 분산 철수하였다. 철수도중 조선의용군의 주요 간부 진광화와 윤세주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고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는 섭현의 좌권장군 묘소와 얼마떨어지지 않는 해빛밝은 언덕에 안장되였다. 호가장 전투가 있었던 원씨현 혹장마을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태항산, 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기념관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사적소개(하북 섭현) 조선의용군이 남긴 대적구호,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하북 섭현)     항일전쟁시기 혁명성지 연안은 줄곧 전국 혁명지사와 뜻있는 청년들이 지향하는 곳이였다. 조선청년들도 다투어 연안에 갔는데 거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창작한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1918~1976)도 있었다.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과 둘째형 정충룡은 일찍부터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에 건너와 중국혁명에 참가하였으며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맏형은 투쟁중 불행히 일경에게 체포되여 옥사하였고 둘째형은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여 북벌전쟁에서 희생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정률성의 셋째형 정의은도 조선의렬단의 성원으로 있었다.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정률성은 1933년에 중국남경에 와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진보적인 “5월문예사”에 참가해 자기의 예술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상해와 남경에서 정률성은 오랜 조선혁명가 김규광, 김산, 박건웅을 알게 되였다. 그의 누나 정봉은은 박건웅과 결혼하기도하였다. 항일전이 본격 발발한후 정률성은 1937년에 김규광, 박건웅 등의 도움으로 얀안에 가게 되였다. 연안에서 그는 로신예술학원을 다니면서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였다. 이 가운데 팔로군 대합창의 “팔로군 행진곡”은 해방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였다.   항일전쟁시기 연안을 찾아오는 열혈청년들 음악가 정률성 연안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기념비   1944년말,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본부는 중국내 조선인을 단합시켜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항일전쟁 승리후 아름다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정치과 군사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기로하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의 2백여명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박효삼을 따라 연안에 도착해 연안의 조선청년들과 회합하였다. 이어 전국 여러 항일근거지에서도 조선청년들이 속속 연안에 모여왔고 쏘련에서 륙학하고 돌아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정학교 건교를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5일, 조선혁명군정학교 창립대회가 연안 라가평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주덕과 서특립이 경축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가 김두봉이 교장을 맡고 박일우가 부교장을 맡았는데 학교 학원수는 280여명이였다. 이시기 각지 조선혁명력량은 모두 독립동맹 분맹과 군정학교 분교의 이름으로 발전되고있었다. 팔로군 제1임 포병퇀장 무정이 령도한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293명에 달했고 독립동맹 산동분맹의 리명이 령도한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 학원수도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진찰기분맹 리대성이 령도한 조선의용군은 백여명이나 되였고 신사군쪽에도 화북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왕신호(김웅)가 령도한 백여명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82    조선족,해방전쟁시기 공적 댓글:  조회:11500  추천:3  2012-09-04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집거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이젠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다. 자치주 창립을 경축하면서 조선족의 혁명투쟁사를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을 이끌고 중국군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적 공적은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해방전쟁시기의 공적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입하였고 8일에는 쏘련군이 동북으로 출병하였다. 대세가 기울렀음을 판단한 일본천황은 라지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9월 3일 태평양 미군 군함 미수리호에서 일본은 정식 항복서에 서명함으로써 동맹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해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에게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즉 소속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진출하는 팔로군 각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해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전적인 해방과업을 완수하라고하였다. 명령에 따라 기동의 주연이 가장 먼저 조선의용군 백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팔로군 기열료 부대를 따라 출발하여 9월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연도에서 계속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입대시켰는데 심양에 도착할때 이미 4백명 정도 되였다. 심양에서 이들은 심양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쳐 천여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편입하였다. 관내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력 그리고 신사군의 조선의용군들도 선후하여 심양에 도착하였다.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은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을 경축하고 성대한 군인대회를 열었다. 대회 결의에 따라  김두봉, 무정,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간부들이 먼저 조선에 가고 기타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계속 중국 동북에 남아 조선주민을 보호하고 단합시키기로 하였다. 군인대회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3개 지대로 나뉘여 남만, 동만, 북만으로 진격하였다. 김웅과 방호산이 2천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거느리고 남남에 남아 투쟁하기로 하고 박일우와 리익성이 천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 제5지래를 거느리고 동북의 조선인이 가장 많이 집거해있는 동만(연변)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북만은 이미 군창건 기반이 닦아졌기 때문에 주덕해를 비롯한 19명 간부를 파견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군하고있는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대원들   심양에서 군인대회를 열고있는 조선의용군(력사사진)   조선의용군의 호소에 따라 동북각지 조선청년들이 용약 공산당부대에 참가하였다.   심양 오가황소학교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개최지 옛터 기념비   할빈부근 배극도, 조선의용군 제3지대 편성지를 설명하고있는 할빈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 주덕해(연변 초대 주장 겸 주당위 서기) 항일간부 김응삼(하북 로태농장에서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지도원을 담임)   항일간부 강재렬(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에서 근무)   항일간부 최명세(북평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장직을 맡음)   항일간부 김현태(상해에서 신사군의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진출후 선전사업)   항일간부 최강(연변으로부터 관내에 가 조선의용군에 입대, 동북에 온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 퇀급 간부로 사업)   한편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들어온 88려단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9.18사변후 동북에서 간고하게 항일하던 동북민주련군은 조직적으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철수하였으며 그곳에서 쏘련 원동방면군 제88려단으로 편성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출신의 이들은 동북각지에 아주 익숙하였기 때문에 부분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직접 조선으로 가지 않고 동북에 남아 중국공산당을 도와 사업하였다. 조선인 강건(강신태)는 연길로 가서 쏘련군의 도움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설립하고 조선인 경비부대를 창설하였따.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고려경찰대를 조직하여 목단강군구 창설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당 장개석은 공산당의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그냥 지켜볼수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중쏘조약에 따라 쏘련군의 손으로부터 동북 행정대권을 그냥 접수하면 될줄 알고있었지만 공산당은 이미 동북에 발을 들여놓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있엇던것이다. 그는 급히 두률명을 시켜 국민당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동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동북에 도착한 림표는 동북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통솔하였지만 부대가 너무 흩어져 전투력을 일시 전투력을 형성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동북의 한족들은 대부분 국민당군을 정부군으로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산당은 갑자기 군중기반이 없게 되였다. 림표는 할수없이 얼마안되는 부대롤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한걸음한걸음 철수하였다.   리홍광(1910~1935), 리홍해, 리의산이라고도 한다. 조선경기도 룡임군 단삼동에서 태여났다. 리홍광은 남만 항일유격대의 주요 창시자이며 동북항일련군 지휘부 참모장으로 있었다. 1935년 5월 12일, 불행히 전사하였다.   허형식(1909~1942), 동북항일련군 고위 지휘자로서 리희산이라고도 한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겸 제12지대 정치위원을 맡았고 송눈평원에서 유격전을 진행함으로써 란서 풍락진 전투의 승리를 거두기도하였다. 1942년 8월에 경성 청봉령에서 일제와 싸우던중 불행히 희생되였다.   주보중(가운데)을 따라 동북에 온 강신태(좌)와 김광협(우)   항일련군의 호소하에 적극 동북민주련군에 입대하고있는 동북의 조선청년들   국민당 정예부대가 동북에 들어오자 쏘련 주둔군은 심양을 국민당 행정관원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심양을 내주게 되였다. 제1지대는 심양을 떠나 남만 각지의 조선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열혈청년들을 선동해 적극 부대를 확대하여 통화에 이르렀을때 이미 만명규모를 갖춘 대부대로 되였다. 장시기 일제의 시달림을 받아왔던 동북의 조선인들은 조선의용군을 보자 “우리의 군대”라고 하면서 크게 신뢰했으며 젊은 자녀들을 다투어 조선의용군에 입대시켰던것이다. 1지대는 남만에서 비교적 완정한 민족사업과 요육체계를 형성하였고 공산당을 도와 각곳에 민주정권을 세웠다. 통화 일본잔여세력의 폭동을 진압한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리홍광지대로 개칭하였으며 자질이 좋은 대원들을 한개 중대 한개 중대씩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보냈다. 주덕해는 할빈에 도착한후 배극도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고 팔로군 359려를 도와 목란, 방정, 연수, 상지 등지에서 싸웠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뽑아 359려에 보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연변에 도착한후 동북항일련군 간부들이 조직해놓은 조선인부대와 합쳐 동만군구 경지 제1려를 편성하였다. 제1려는 산하에 제1퇀, 제2ㅊ퇀, 제3퇀을 두었다. 한편 이들은 민주정권을 세우는 한편 토비숙청을 진행하여고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연변 광범한 조선인 군중들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항일련군 간부들의 두리에 굳게 뭉쳤기 때문에 연변은 신속히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한 근거지의 하나로 건설되였다. 그리고 제5지대가 길림을 지날때 일부 간부를 남겨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건립하도로 하였다. 이들은 길림보안총대의 조선인대대와 함쳐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했다. 박훈일이 7지대 대장을 맡았고 또 화전현에 군정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학습시켰다. 동북의 조선인부대는 동북민주련군 서렬에 포함된후 조선쪽의 수요로하여 대량의 고위간부들이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독립동맹도 민주동맹으로 개칭하고 동북경내 조선인 민중들을 이끌고 공산당을 따라 토지개혁을 통해 땅의 주인이 되고 가각적으로 중국적을 가진 조선족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의 통계에 따르면 동북경내 조선족인구는 당시 110만이였다. 조선족인구의 80%이상이 동만 연변에 집중되여 있었기에 연변의 군중기반은 아주 좋았다. 왜냐하면 20세기초 공산당조직이 생기면서 항일련군과 반일조직들은 줄곧 동만에서 활동하였기에 당은 줄곧 광범한 조선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때문에 일제가 투항한후 동만의 공산당조직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는데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 2057명 당원 중 1120명 조선족 당원이 있어 반수이상을 차지하였다. 1948년, 연변의 3175명 당원중 조선족 당원수는 2579명으로서 총수의 80%를 차지하였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족 군민들은 동북에 방금 발을 들여놓은 팔로군과 신사군의 가장 믿음직한 뒷심이 되였고 연변을 비롯한 조선인 집거지는 공산당의 가장 훌륭한 후방근거지로 되였다. 1946년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은 사평까지 공격해와 민주련군과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사평전투에 배합하기 위해 북만과 동만 각부대는 쏘련군의 철군 기회를 빌어 신속히 할빈과 장춘을 차지하려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 점령군속의 조선인부대를 봉기하도록 설득하였고 또 조선인 로동자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공산당부대는 별로 힘 드리지 않고 할빈을 차지할수있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위주로 편성한 조선퇀은 하경적이 지휘하는 동남종대에 편입되여 조리회가 거느린 동북종대, 양국부가 지휘한 서남종대와 함께 장춘을 공격하였다. 장춘을 쟁탈하는 혈전에서 조선퇀의 박락권 퇀장과 고생호 부퇀장이 선후로 희생되였다. 하지만 전사들이 두려움없이 잘 싸웠기에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을 점련하고 장춘쟁탈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장춘쟁탈전에 참가한 김응삼 로인이 괴뢰만주국 중앙은행 청사를 공격하던 전투를 설명하고있다.   장춘쟁탈전을 앞두고 련지도원 김응삼(좌)이 겸위원과 통신원과 함께   적아쌍방의 력량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기에 민주련군 주력은 한개원 남짓이 싸우다가 결국 사평에서 철수하고말았다. 팽팽하던 대치국면이 무너지자 상황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였다. 림표는 련속 장춘시와 길림시를 내주면서 송화강 이북으로 주력을 철수시켰다. 길림성 당위와 정부도 신속히 로야령을 넘어 연변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조선족 인구가 80%이상을 차지한 연변은 동만의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4차의 림강보위전시기 남만의 리홍광지대는동북민주련군 독립 4사로 편성되여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와 제4종대에 배합해 간고한 적후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각지 정부기구를 보호하고 적 거점을 제거하였으며 적의 유생력량을 분산해 하나하나 적을 격파하였다. 1947년 3월에 독립 4사는 민주련군 제3종대 8사 22퇀과 함께 휘남현성을 해방하였다. 이 싸운에서 조선족 전투영웅 조성두는 폭약을 안고 적의 화점을 폭파함으로써 자아희생적인 폭파영웅으로 되였다.   폭파영웅 조성두의 묘소(료녕성 휘남)   림강 렬사릉원에 모셔진 조선족 렬사의 묘비   동만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동만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되여 영용히 싸웠다. 조선족 장병을 위주로한 동만독립제1사(조선퇀), 동만 독립 3퇀과 독립 6퇀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한 72퇀은 길림과 장춘주변에서 간고한 유격전, 대치전을 진행하면서 국민당 60군을 견제하였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줄곧 로야령을 넘어 연변쪽으로 공격하지 못했고  연변의 백성들은 전력으로 생산에 열중해 대량의 쌍과 탄약, 피복을 끊임없이 전선에 수송하였으며 전선의 부상자들을 연변에 실어다 치료해주었다. 림강보위전과 강남 직격작전이 끝난후 동북민주련군은 대규모의 반격을 시작하였다. 하기, 추기, 동기 동세가 련속 펼쳐졌으며 광범한 조선족 인민들은 생산을 발전시켜 유력하게 전선을 지원하였을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녀들을 다투어 부대에 입대시켰다. 통계를 보면 해방전쟁시기 63000여명 조선족 청장년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조선족 17명당 한명이 입대한 셈이다. 특히 연변 5개현은 34855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연변 참군총수의 85%를 점한다. 197년 9월 10일,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중 조선족 장병이 가장 많은 제10종대가 정식 편성되였다. 북만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수송한 조선청년들로 제10종대 28사를 편성하고 서란, 영길, 유수, 교하 등지 조선족 보안부대로 제10종대 29사를 편성하였으며 조선족 장병이 반수이상인 동만독립사로 제10종대 30사를 편성하였다. 1948년초, 조선족 장병이 다수를 차지하는 동만 독립 3퇀과 6퇀, 71퇀으로 독립 6사를 편성하였다. 1958년 4월에는 길남 73퇀 1700명 조선족 장병과 송강군구 제8퇀, 목단강군구 제14퇀의 2200명 조선족 장병을 합쳐 독립 11사를 편성하였다. 동북에서 국공량당의 대결전인 료서전역때 독립 6사와 독립 11사는 기타 독립사단과 함께 길림, 장춘부근에서 싸우다가 장춘을 포위하여 최종 장춘을 해방하였다.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는 흑산, 대호산에서 료요상 병촨을 성공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료서 대섬멸전을 담보하여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이 가운데 10종대 28사 조선족 반장 최성걸은 적의 포화에 찢겨진 자기의 왼다리를 절단해버리고 계속 적과 싸움으로써 “계급의 강골”로 불리웠다. 그의 사적은 오늘까지도 료심전역 기념관에 전시되여있다. 줄곧 심양주변에서 적을 견제해 싸우던 독립 4사의 조선족 장병들은 신속히 남하해 기타 부대와 함께 심양을 공격하여 심양을 해방하는데 기여하였다. 동북이 해방된후 독립 11사는 장춘 수비임무를 맡았고 독립 4사는 심양 보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독립 6사는 주력부대인 제6종대에 편입되여 중국인민해방군 156사로 되여 관내로 진입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사평해방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족 렬사 김동원(사평 렬사기념관)   흑산 저지전의 101고지 기념비   10종대 28사 강철8련 명세서(김교진 지도원 정리)   료심전역 기념관의 최성걸 렬사의 동상   최성걸렬사가 사용했던 기관단총   료심전역기념관의 강인복 렬사 동상   우수한 호사장 강인복 렬사 유상    료심전역기념관 렬사담벽에 새겨진 조선족렬사들 명단(일부분)   연변의 혁명렬사기념비   동북이 해방된후 제4야전군 조선족장병들은 선후로 평진전역, 장강 도하작전,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전역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공화국 창건을 위해 마멸할수없는 공적을 세웠다. 조금도 과장이 없이 연변은 그야말로 산마다 진달래꽃이 피고 마을마다 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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