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사람이 물속에 잠겨 있다. 화면은 일색으로 온통 분홍색이다. 넥타이와 와이셔츠 차림으로 미뤄 도시인인듯하다. 그런데 그가 왜서 물에 있는 걸까, 혹여나 물에 빠진걸가… 수중인(水中人)의 얼굴에 비낀 공포와 실망, 단호함에서 뭔가의 답을 읽을것 같기도 한다.
“일부러 물속에 모델을 넣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백 박광섭은 그의 작업실을 가득 채운 분홍색의 수중인(水中人) 그림들을 이렇게 해석했다.
몇년전 그는 작업실 뒤쪽의 마당에 각기 2미터 높이와 길이, 너비의 수조(水槽)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실내 수영장을 임대해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단다.
“물밑의 세계는 눈을 뜨기 어렵지요. 그래서 어쩔바를 모르고 발버둥을 치게 되는거지요.”
박광섭은 지난 세기 70년대 연변 왕청현의 대흥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우리는 공산주의의 후계자라네.”라는 우렁찬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의 계몽단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뒤미처 시작된 개혁과 개방은 그에게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박광섭은 동년배와 더불어 하늘아래 만화경 같은 삶의 행로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을 했다.
수중인(水中人)은 바로 개체의 생존경험과 사회의 문화형태 사이의 제일 민감한 마찰부분을 포착, 이런 모순을 물속의 한 장면에 고착시키고 정련(精練)하여 사진처럼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화백이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화필에 담은 “물속의 아름다움”은 금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은 “당대유화전시회” 등 중국 대륙의 유수의 전시회는 물론 대만과 한국, 싱가포르 등 지역과 나라의 전시회에 등장했다. 2005년부터 유럽에 진출, 각종 그림전시회에 10여차 참가했다. 박광섭의 작품은 세계 정상급의 그림의 향연인 스위스 바셀화랑박람회에도 두번이나 얼굴을 내밀었다.
수중인(水中人), 물에서 헤엄을 치는 사람
어 느날 지인의 안내로 작업실을 구경하러 왔던 한 외국인은 그림을 보자마자 놀란 소리를 하더란다.
“이 화백의 이름이 뭐죠? 중국에서 대단한 화백이 아니예요?”
그는 외국의 그림전시회에서 수중인(水中人) 그림을 보았으며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분홍색은 단일한 색채로 여느 그림보다는 달리 좀처럼 지울수 없는 강력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색은 일명 “중국 색깔”이라는 의미의 “중국홍(中國紅)”이라고 불린다. 박광섭이 소꿉시절을 보냈던 “문화대혁명”시기 온 중국은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방곡곡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 “홍위병(紅衛兵)”의 붉은 완장, “홍소병(紅小兵)”의 붉은 넥타이… 그 시기를 장식했던 광란의 붉은색이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개혁, 개방이 실시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기존 개념의 붉은색 환경에서 차츰 탈피하게 되었다.
박광섭은 그래서 짙은 붉은색이 아닌 옅은 분홍색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연장선에서 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은 자아의 본성을 참모습 그대로 드러내게 되지요.”
박광섭은 약 10년전부터 “수중인(水中人)” 계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생에 대한 그의 사색과 추구는 그림에 그대로 점점이 묻어나고 있었다.
미국 평론가 데비드 깁슨의 박광섭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한두단락 적어본다.
“사람들은 물이 통제하는 환경에서 생활한다. 물은 그들을 기르고 또 그들을 보호한다. 지어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박광섭의 그림에서 여러번이나 그림과 련관된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
“박광섭의 인물화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심미와 의식의 추구를 만족시켰을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훨씬 초월했다. 이 계렬은… 정신세계와 현실계세 사이에 직접적인 련계를 구축했다.”
박광섭의 그림에서 물은 분홍색과 마찬가지로 시대적인 락인이 찍혀있었다. 아니, 화백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환경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무대로 되고 있었다. 박광섭은 그를 포함해 사회의 격변기를 겪는 사람들의 진통과 고민, 리상 등을 세부적인 화상(畵像)에 담으려고 했다.
“물속에 둥근 기포가 보이죠? 또 그림은 원형에 들어 있죠? 원형은 자궁, 래원, 시초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박광섭은 물에 잠긴 련꽃 계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맥없이 시들고 또 일부 찢어진 련꽃은 화판에 떠올라 어디론가 멀어진 아름다움에 깊은 동정을 자아낸다. 여기서 찢어지고 훼손되었다는 의미의 잔(殘)은 참선한다는 의미의 선(禪)과 동음이의어이다. 화백은 이 련꽃을 통해 낡은 사고방식을 깨버리고 참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사람은 물속에 잠겨 있었지만 화백의 마음은 결코 물에 갇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화중인(畵中人), 그림속의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
박광섭은 어릴 때 그림책에 미치다시피 했다. “수업시간에는 그림책을 교과서로 가려놓고 보았지요.”
실은 책속의 주인공 운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인물 자체가 바로 그의 타깃이었다. 룡상에 기대인 황제, 말 잔등에 올라탄 장수, 밭머리에 걸터앉은 농부… 그림책에 나오는 각양각색의 인물은 거의 날마다 그의 연필에 묻혀 공책위에 비뚤비뚤 옮겨졌다.
소학교 4학년때 박광섭은 지인의 소개로 연길에 가서 연변예술학교 미술교원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배운다. 이때에야 박광섭은 인물을 그리는데도 인상의 파악, 세부의 기록이 우선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운동감과 명암감, 해부학 등의 회화적 표현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박광섭은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났다. 날마다 반복되는 따분한 선 그리기도 그에게는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듯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림에 대한 깨달음과 집착은 화판에 한점 또 한점의 그림으로 변신했다.
방학 한달의 시한이 차서 작별을 고할 때 스승이 어린 박광섭에게 남긴 부탁은 단 한마디, 장차 꼭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나이 또래에서 박광섭의 그림은 물위에 피어난 한떨기의 꽃처럼 두드러졌다. 훗날 중학교의 미술교원도 약속이나 한듯 부친에게 이런 부탁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님, 이 애더러 꼭 그림을 그리게 하십시오.”
중학교를 졸업할때 박광섭은 유명한 동북사범대학 미술학부에 지망을 한다. 이때 미술과목의 2천여명 응시자가운데서 그는 전문과 성적이 단연 네번째 순위에 올라 주변의 경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미술에만 너무 집착한 탓으로 다른 과목의 성적이 부진해서 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이듬해 그는 연변예술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며 대학을 졸업한후 또 북경 중앙미술대학 유화연수반에서 계속 그림기예를 닦는다.
이 무렵 북경 동쪽의 “송씨 마을(宋庄)”에 화백들이 모여 더는 송씨의 마을이 아닌 화백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화백마을에는 화백 등 예술인이 1만여명 운집하며 또 화랑과 전시실 등이 무려 100여개 일떠선다. 이름 그대로 화백의 전당으로 둔갑한것이다. 이에 따라 집값이나 임대비가 천정부지로 솟구친건 물론이요, 현재로서는 마을에 발을 비집고 들어설 틈도 찾기 어렵다.
박광섭은 화백마을의 초기 입주자이다. 그래서 다들 그를 유복한 화백이라고 말한다. 실은 그가 화백세계의 흐름을 미리 읽을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아직 남들이 좌표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때 벌써 “송씨 마을”에 발길을 돌렸던것이다.
“‘이 마을은 예술인들끼리 만나서 수시로 교류를 할수 있는 좋은 장소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때부터 박광섭은 “송씨 마을”에 작업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오로지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다. 현재 그는 지인들과 함께 손잡고 “송씨 마을”에 화랑도 운영하고 있다. 그림을 전시하는데 스스로 무대를 마련한 셈이다.
박광섭은 “송씨 마을”의 입적은 그의 그림생애에서 밑그림을 그려준것과 같다고 말한다.
“‘송씨 마을’의 존재적 의미는 돌파와 혁신입니다. 절대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지요.”
그는 늘 지인들과 함께 모여앉아 그림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남의 말에서 독특한 계발을 받기도 하며 아이디어를 주제로 잡아서 함께 전시회를 갖기도 한단다.
쾌적한 환경은 그림속의 사람들을 언제나 그와 함께 숨을 쉬게 하고 있었다.
무제(無題), 화백의 제목 없는 그림
아직은 남들에게 좀처럼 드러내지 않은 비밀이 있었다. 지난해부터 박광섭은 분홍색의 수중인(水中人) 그림을 한 단락 접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전쟁 주제의 그림인데요, 작품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서 지금까지 밖에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백의민족의 력사에 비운의 그림자를 드리운 “조선전쟁”이였다. 지금도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인 조선반도는 언제 불이 확 달릴지 모르는 “화약통”으로 되고 있다. “조선전쟁”은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인것이다. 그러나 당대 미술영역에서 “조선전쟁”을 주제로 삼은 그림은 별로 없다.
박광섭은 “조선전쟁”을 그리기 위해 대량의 문헌자료를 찾아 읽었고 영상자료들을 무더기로 수집했다.
“‘조선전쟁’ 하나를 놓고 전쟁 당사자인 중국과 조선, 한국, 미국은 서로 다른 시각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항미원조”, “조국해방”, “침략” 등 각이한 주장이 존립하고 있었으며 또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두고 시야비야의 론쟁에 휘말려 있었다. 아예 “조선전쟁”이요, “한국전쟁”이요, “6.25전쟁”이요 하는 등 전쟁에 붙인 이름마저 달랐다.
이때 박광섭은 중국인이자 또 조선족인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극심한 고민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그림마다 모두 하나같이 제목이 없는것도 그의 이런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박광섭의 작품은 전쟁그림은 물론 예전의 수중인(水中人) 그림도 제목이 없는게 특점으로 되고 있다.
“그림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수 있습니다.” 박광섭은 그의 무제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했다.
“좋은 작품이라면 사람들에게 상상의 공간을 남겨주어야 하지 않을가요.”*
[중국민족] 제4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