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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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월궁의 선녀 상아가 여기에 묻혔다니? 댓글:  조회:2575  추천:2  2015-10-13
(고조선계렬4) 원제: 월궁月宮에서 하계下界한 전설속의 선녀 갑자기 머리에 혼란이 어마지두 일어났다. 다름이 아니라 산정의 거석으로 쌓은 옛 무덤의 주인은 상아嫦娥라고 우리 일행을 안내한 신씨가 거듭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방금 지나온  괴성각魁星阁에 별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우당탕 하고 들리는 것 같았다. 아예 너럭바위에 파인 돌구멍을 진짜로 하늘의 북두칠성이 떨어진 자리라고 고집하면 그러랴 싶었다. 이거야말로 어린이집에 꾸며놓은 동화이야기의 그림 세상이 아닌가… “정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마을에 대대손손 전해 내려온 이야기이지요.” 신씨는 일행의 의문을 어딘가에 가둬버리려는 듯 이렇게 구구절절 못을 박고 있었다. 도대체 천년을 내려온 전설이 어디까지 허상일까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신씨가 말하는 상아는 전설에 등장하는 선녀이기 때문이었다. 서한西漢 시기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람명훈淮南子․覽冥訓》에 이르기를, “예羿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얻었는데, 항아가 이를 훔쳐 달에 날아갔다.” 이에 따라 항아는 월궁에 선거仙居하는 선녀로 달과 함께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훗날 이 항아恒娥가 상아로 달리 불리게 된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세간의 불문율로 되고 있던 이상한 금기 때문이었다. 봉건사회에서 임금과 어른의 이름은 직접 부르거나 쓸 수 없었다. 그런데 한나라 문제文帝의 이름이 유항劉恒이었으며, 이 때문에 ‘항아’는 선녀일지라도 부득불 이름을 고쳐 불러야 했다. 항구할 ‘항恒’이 영구하다, 오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같은 의미의 항상 ‘상常’을 썼다. 그래서 ‘항아恒娥’는 ‘상아常娥’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또 상아의 성별에 따라 항상 ‘상常’의 왼쪽에 계집 ‘여女’ 변을 붙였으며 이로 하여 ‘상아常娥’는 또 ‘상아嫦娥’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중국 한자에는 이로써 항아 ‘상嫦’이 새롭게 출현한다. 이 글자는 단지 상아의 이름에만 쓰이며, 상아가 궁전을 짓고 살고 있다는 달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이름만 달랑 바뀌었으면 또 모른다. 이 상아가 하늘의 달이 아니라 해발 250여m의 자그마한 야산에 묻혀있다니… 그야말로 상아가 현실세계에 깜짝 나타났는지 아니면 우리가 전설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잠깐 혼돈이 생긴다. 얼마 전 바다에서 불어온 강풍으로 산길의 여기저기에 쓰러진 나무들이 한결 혼란스런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산의 이름 00은 ‘하늘의 누각’이라는 의미이다. 이름만 그대로 풀이한다면 선녀의 ‘궁전’이 있을 법한 명소인 것이다. 00이 멋진 이름과는 달리 세간에 별로 알려있지 않는 이유를 인제 비로소 알 것 같다. 정말이지 “신선은 숨어야 하고, 용은 날아올라야 한다.”는 옛말의 진의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한다. “원체는 비석에 상아의 무덤이라고 밝혀있었다고 합니다.” 신씨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덤 앞에 장승처럼 서있는 거석 앞으로 다가섰다. “40년 전에 무지막한 ‘홍위병’들이 여기까지 올라와서 비석의 옛 글자를 뜯어버렸지요.” 아니나 다를까, 거석에는 손바닥 크기의 부위를 일부러 도려낸 흔적이 있었다. 정으로 찍어낸다고 해도 꽤나 품이 들었을 것 같았다. 예전에 이 자리에는 올챙이처럼 비뚤비뚤한 옛 문자가 여러 개 음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노인들은 이 옛 문자가 바로 무덤의 주인인 ‘상아’의 신분을 밝히고 있었다고 전한다. 어쨌거나 상아무덤의 ‘묘지명’은 인간계의 ‘악귀’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상아는 진짜 한 올의 연기로 되어 천계의 ‘월궁’으로 날아올라갔던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옛날부터 ‘상아’의 무덤이 있는 00산에는 무당 귀신이 현령顯靈하는 등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지금도 산의 나무 한 그루에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00산에 오른 홍위병들은 외지의 젊은이들로, 이곳에 ‘낡은 사회의 잔재’인 고대 유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달려왔다고 한다. 산길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은 험한 서쪽비탈을 타고 00산에 올랐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유적이 바로 상아 무덤이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홍위병들이 동쪽으로부터 시작된 산길을 따라 00산에 올랐더라면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나중에 적석총의 무당이 ‘현령’하여 돌탑에 모인 홍위병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현령하는 재주는 선녀에게 없지 않았을까.” “정말로 상아는 여기가 아니라 월궁에 있었던 모양이네.” “…” 일행은 바지에 묻어난 풀잎을 무덤가에 털어냈다. 그러나 옛 무덤의 주인이 자칫하면 천년의 미스터리로 될 수 있다는 아쉬움은 종내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홍위병들은 옛 무덤을 파헤치지는 않았다. 거석으로 쌓은 큰 무덤을 판다는 것은 전문 도굴자도 아닌 그들에게 엄청난 토목공정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무덤 비석에 새겨진 옛 글자를 찍어내는데 그쳤던 것이다. 상아 무덤과 나란히 북쪽에 있던 예羿의 무덤도 이와 똑 같은 액운을 당하며 ‘묘지명’이 훼손된다. 이 예 역시 상아처럼 상고 시기의 전설로 전하는 유명한 인물이다. 선진先秦 시기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요堯 때 십일十日이 동시에 나타났으며, 요가 예에게 십일十日을 쏘게 했다.”라는 문구가 있다. 서한西漢 시기 허신(許愼, A.D.58~A.D.147)이 저술한 《설문해자說文解字》도 예는 당요唐堯 시기의 사람이며, 그때 하늘에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출현했는데 예가 아홉 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침 천대산의 북쪽에는 당요가 동쪽을 순시할 때 축성했다고 전하는 요왕성堯王城이 있다. 상고 시기의 이 두 유명한 인물은 문자 기록뿐만 아닌 실물의 유적에 실려 가지런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훗날 예의 후손 가운데서 한 갈래는 대륙 서남쪽의 오지의 귀주성貴州省에 문득 나타난다.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묘족의 후예로 구분되고 있지만, 그들은 묘족과 별개의 각가인(革家人, 人자 변이 있는 革)라고 자칭한다. 그들은 특이한 모자 모양에 자기들의 성씨를 분명히 알리고 있다. 여성들의 붉은 모양의 둥근 모자에는 가운데 홈이 만들어져 있으며 술이 달린 나무 꼬챙이가 꼽혀있다. 붉은 모양의 둥근 모자는 태양을 상징하고, 술이 달린 나무 꼬챙이는 시위에 얹힌 화살을 의미한다고 한다. 대륙 서남쪽에서 살고 있는 이족彛族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원래 족명族名에 오랑캐 이夷를 쓰던 동이 계열의 부족이었다. 이족의 민간전설에는 특별히 그들의 선조 예를 칭송하는 시가가 들어있다. 이런 특이한 복장과 전설은 예의 후손들이 삶의 옛 터전이었던 강소성江蘇省과 산동성山東省 등 지역을 떠나 대륙의 다른 쪽으로 이주한 행적을 견증하는 실증물이다. 이 예는 글자 오랑캐 이夷를 만든 활과 하나로 이어진다. 전국(戰國, B.C.475~B.C.221) 시기의 사서 《여씨춘추呂氏春秋》는 “이예작궁夷羿作弓” 즉 오랑캐 부족의 예가 활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이夷는 한나라 때부터 동방의 외국인을 이르던 훗날의 통칭이 아니라 중원의 동쪽인 황하의 중하류 지역에서 살던 주민 즉 동이부족을 이르는 말이다. 거두절미하고, 오랑캐 이夷 자체가 바로 큰 ‘대大’자와 활 ‘궁弓’으로 이뤄져 있다. 또 사람 ‘인人’이 등에 활 ‘궁弓’을 메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세계 여러 지역의 신화나 전설에서 활과 살은 태양과 태양신과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동이부족의 수령 예가 태양신의 전령傳令으로 간주되는 건 당연지사이다. 산마루의 부족 회의장소에 있는 ‘추장’ 전유물의 돌 의자에는 바로 이 전령의 상징인 듯 빛을 사방으로 뿌리는 둥근 태양이 휘호처럼 음각되어 있었다. 태양은 양을 대표하며 달은 음을 대표한다. 음양합일은 남녀합일을 상징한다. 결국 태양신의 전령 예와 월궁의 선녀 상아가 부부로 간주되는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인지 현지에 구전하는 이야기가 한결 재미있다. 이에 따르면 상아는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에 도망한 게 아니라고 한다. 옛날 수신水神 하백河伯이 상아를 아내로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아는 하백의 시달림을 피하고 또 남편 예가 안심하고 해를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득불 불사약을 먹고 달에 날아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를 또 후예后羿라고 부르는데요,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신씨는 무덤 주위를 돌면서 촬영에 열중하고 있는 일행에게 난데없이 이렇게 찬물을 끼얹는다. 산의 지리에 익숙한 그는 자주 현지를 답사하는 사람들의 안내인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중에는 고고학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귀동냥하여 익힌 지식은 인제 웬만한 학자들의 뺨을 칠 정도였다. “무덤의 주인은 대예大羿라고 부른답니다. 후예后羿는 동명이인이라고 하지요.” 사서 《좌전左傳》에 따르면 후예는 또 유궁국有窮國의 국왕이라는 별개의 인물이다. 유궁국은 부락 형태를 벗어난 방국方國이다. 동이부족은 한시기 산동성 중부의 태산泰山 주변에서 부락이나 방국方國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방국은 안정하고 독립적인 경제실체로서 초기 도시연방 식의 원시국가이다. 방국 유궁국의 세력은 나중에 크게 늘어났으며 한때 하夏나라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하나라는 중국 사상 최초의 왕조이다. 일각에서는 유궁국의 국왕 예가 활쏘기의 영웅이었던 선인先人을 흠모하여 후예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后는 상고 시기 특히 주周나라 이전에 군주, 제왕이라는 의미로 쓰였으며 그래서 후예는 예족羿族 제왕의 신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좌전左傳》의 명편 〈효지전崤之戰〉에 “기남령, 하후고지묘其南陵, 夏后皐之墓”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인즉 “효산崤山의 남쪽은 하나라 군왕 고의 무덤”이라는 의미이며, 여기에서 나오는 ‘후后’는 바로 제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제왕 후예가 흠모했던 영웅 대예 역시 실존한 인물로 해석되고 있다. 대예가 해를 쏘아 떨어뜨린 전설은 후손에 의해 신격화되었을 뿐이며 기실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 아홉 해는 실은 동이부족의 여러 부락을 의미하며, 대예가 아홉 해를 쏘아 떨어뜨렸다는 것은 이런 부락들과 싸워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것이다. 또 아홉 해는 하늘의 기이한 현상인 해무리의 허상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상아의 무덤 그리고 이 무덤과 나란히 있는 00산 대예의 무덤은 선녀와 영웅의 실존 설에 무게를 더해 주고 있는 셈이다. 조금은 전후가 바뀐 느낌이 들었다. 해를 쏘아 떨어뜨린 대예와는 달리 유궁국의 국왕으로 있던 후예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와중에 이 후예의 고향은 덕주德州라는 설이 우세하고 있다. 덕주는 00산에서 동북쪽으로 약 450㎞ 상거한다. 덕주를 흘러 지나는 감하減河의 기슭에는 후예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감하는 홍수 배수로인데, 약 50년 전에 인공으로 만든 물길이다. 00산을 내린 이튿날 우리는 후예의 조각상 앞에 섰다. 태양을 겨눠 활시위를 만궁으로 당기는 후예, 그러나 정작 태양을 떨어뜨려야 할 화살은 조각상에서 빠뜨려 있었다. “제일 중요한 이 화살처럼 진실을 빠뜨렸다고 말하는 것 같구려.” 일행 중 누군가 감하에 낙엽처럼 떨어뜨리는 말이었다. 누가 이 조각상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후예의 정체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는 것. 기실 후예는 대예와 한 시대의 인물이 아닌 후손이며, 그래서 후예가 대예처럼 태양에 활을 겨눴다는 자체가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영웅 예가 전설이라는 이미지를 풍기 것 같네.” 그러나 한 여름 덕주의 푸른 감하에는 잔물결도 일지 않고 있었다. 고향에서 그렇듯 추앙하는 후예가 결국 전설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만나니 솔직히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설은 감하의 기슭에서 또 하나 생겨나고 있었다. 대예와 후예가 동명이라는 이유로 두 예가 동일한 일인一人으로 와전됨에 따라 상아가 본의 아니게 일처이부一妻二夫를 하고 있는 것. 상아는 상고 시기의 인물 대예 뿐만 아니라 하나라 시기의 인물인 후예의 아내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상아는 후예의 고향인 덕주의 ‘며느리’로 버젓하게 불리고 있었다. 하늘의 달에서 선녀가 내려오니 지상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책     [박달족의 이야기]에서 발췌
15    장백산, 발해 남쪽의 신선의 산 댓글:  조회:3457  추천:4  2014-11-12
   ( 고조선계열 11)       옛날 신선이 살던 장백산의 이야기는 발해 남쪽에서 시작된다. 이 장백산은 산동성의 수부 제남濟南에서 동쪽으로 불과 7,80㎞ 상거한 추평현鄒平縣 경내에 있다. 그러나 제남의 사람들은 장백산 하면 곧바로 바다 건너 발해 북쪽의 명산으로 알고 있다.   하긴 일명 백두산이라고 하는 이 명산이 바로 장백산의 실체로 세간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추평현 현성에서 만난 장씨 성의 택시 기사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지금 농담을 하는 거죠? 장백산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지요?”   정말이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어느 정도 이해할 법 한다. 장백산은 산동성의 지도에서 마가령摩訶嶺이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가봉摩訶峰은 해발 8백m로 100리 장백산의 3백여 개 봉우리에서 단연 으뜸을 자랑한다.   이 장백산은 일찍 1,800년 전의 옛 문헌에 나타난다. 진(晉 ,265~420) 나라의 도인 갈홍(葛洪, 284~364)은 저서 《포박자抱朴子》에서 “장백은 태산의 부악副岳이다.”라고 적고 있다. 후대의 북위(北魏,386~577) 시기 지리서 《수경주水經注》도 “어자골漁子溝의 물은 남쪽으로 장백산…에서 흘러나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작 발해 북쪽의 명산의 이름으로도 등장하는 건 7백여 년 후의 일이다. 여진인은 장백산을 그들의 발상지로 간주하고 이곳에 사찰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금사․세기金史․世紀》에 따르면 세종 완앙옹完顔雍은 대정大定 12년(1172) ‘장백산’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책봉한다. 장백산은 이로써 문헌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장백산의 별칭인 백두산이라는 이름도 실은 여진족이 지은 걸로 알려지고 있다. 여진족의 말 “Goromin Sanggiyan Alin”을 의역했다는 것. 누군가의 억지주장이 아니다. 《이조숙종실록李朝肅宗實錄》은 “장백산은 호인胡人이 백두산이라고도 불렀다.”라고 명명백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호인은 여진족을 칭하는 말이다.  어찌됐거나 두 장백산은 지질학적으로는 일맥의 산으로 일컫는다. 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호응하는 ‘형제의 산’인 것이다. 남쪽의 장백산은 해발고가 북쪽 장백산의 허리에 미치지 못하지만, 생성연대는 무려 7천만년이나 앞서는 등 형 맞잡이로 되고 있다.   공교롭다고 할까, 북쪽의 장백산에 백운산白雲山이 있듯 남쪽의 장백산에도 백운산이 있다. 또 이 동명의 산은 각기 장백산의 두 번째 산봉우리이다.   “산꼭대기에 늘 흰 구름이 감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요?” 장씨 성의 기사가 추측조로 하는 말이다.   “우리 고장의 전설에요, 옛날 백운 선녀가 있었다고 전하지요.”   장씨 성의 기사는 이렇게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헤쳤다. 백운산 기슭에 전한다고 하는 이 전설은 그렇게 택시에 실려 신명나게 달려왔다.   어느 해 여름, 백운산 일대에는 전무후무한 큰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곡식이 불볕에 타서 땅에 풀썩 물앉을 지경이었다. 농부들은 밤낮으로 비가 내리길 하늘에 빌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고 검은 구름이 밀려오더니 삽시에 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대지에는 또다시 푸른 생기가 돌았다. 얼마 후 날이 개이고 하늘가에서 흰 구름이 두둥실 날아왔다. 구름 위에는 예쁜 선녀가 서있었다. 선녀는 구름과 함께 백운산 산꼭대기에 사뿐 내려앉았다. 이 선녀가 단비를 내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백운白雲 선녀라고 불렀으며 이 산을 백운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운산의 전설은 아름답지만 필경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전설에 선녀가 등장하듯 실화에도 신선이 등장하고 있었다. 장백산이라는 이 이름은 수행자들이 제일 먼저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도인 갈홍이 장백산을 수련의 명산 명부에 넣었고, 당나라의 도인 사마자미司馬子微는 장백산을 동천복지洞天福地의 순위 61번째에 놓았다.   그렇다고 이 산에서 최초로 신선의 도를 닦은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실제상 선진先秦 시기의 도인 백토자白免子가 산의 첫 주인이다. 백토자는 당요唐堯 시기의 인물 팽조彭祖의 제자이다. 전설에 따르면 팽조는 그 후 하나라와 상나라, 하나라까지 거치면서 장장 880년을 장수했다. 백토자는 팽조로부터 신선의 비법을 전수 받아 산속에서 도를 닦은 후 흰 토끼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토공白免公이라고 불렀다. 백토공은 스승 팽조처럼 장수한 신선이었다. 도가에서는 신선의 이름으로 산의 이름을 짓는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을 장수長壽 백토공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약칭 장백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예전에 장백산 기슭에는 백토자의 동상이 있었으며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쓴 비문이 새겨있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볼 때 장백산은 분명히 상고 시대부터 항간에서 불리던 옛 이름이다. 옛 문헌에 지명으로 정식 입적하기 전 이미 ‘신선’과 함께 등장하여 선계와 인간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전설의 백운 선녀가 백토공의 버금으로 유명한 ‘신선’으로 떠오르며, 이에 따라 백운산은 장백산의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그렇다고 장백산의 별칭은 이 하나뿐만 아니었다. 제남의 학자 왕사정(王士禎, 1634~1711)의 《장백산록長白山彔》 등 옛 문헌은 장백산이 또 숙신산肅愼山, 숙연산肅然山, 상재산常在山 등으로 불린다고 기술하고 있다.   숙신肅愼은 요순堯舜 시대에는 식신息愼이라고 하였으며, 은주殷周 시대에는 숙신肅愼, 직신稷愼이라고 하였다. 기실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모두 하나이다. 아쉽게도 숙신이 어떤 계통의 종족이며 생활방식이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잘 전하지 않는다. 선진先秦 시기의 문헌인《좌전·소공구년전左傳․昭公九年傳》은 “숙신, 연,·박은 우리의 북토이다.肅愼、燕、亳、吾北土也.”라고 기록, 숙신이 선진 시기에는 주周나라의 북쪽지역에 있었다고 밝힌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읍루挹婁를 가리키고 있다. 읍루는 또 말갈, 여진족으로 이어지는 만주족의 선조이다. 이처럼 읍루, 말갈, 여진족 계열이라면 숙신은 중원을 멀리 떠나 녕고탑寧古塔 부근에 있어야 한다. 숙신이 살고 있는 ‘주나라의 북쪽지역’은 만주의 북부일대를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발해 남쪽에 나타나는 숙신은 땅위에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그리고 있다. 그들도 동명의 장백산처럼 역시 남북에 선후로 나타나는 일맥의 종족일까…   마침 《국어國語》에 숙신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설화가 실려 있다. 《국어》는 선진 시기의 문헌으로 중국의 첫 국별체國別体 사서이다. 이에 따르면 노魯나라의 공자孔子가 진陳나라에 갔을 때 매 한 마리가 궁정에 날아와 떨어져 죽었다. 매의 몸뚱이는 화살에 꿰뚫려 있었다. 진나라 국왕은 화살의 정체가 궁금하여 사람을 보내 박식한 공자에게 물었다. 이때 공자는 매가 아주 멀리서 날아왔다고 말하면서 숙신이 쓰는 화살이라고 알려준다. 숙신의 화살은 주나라가 공물로 받은 후 진나라에도 나눠줬고 이 때문에 진나라 궁정의 창고에 있어서 금방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화살의 관통상을 입은 매가 어떻게 수천 리 밖의 만주 땅에서 날아올 수 있을까?   이때 매가 천계의 신조神鳥가 아니라면 진나라 부근인 산동성 북부와 하북성 남부의 지역에서 날아올 수밖에 없다. 장백산의 별칭인 숙신산은 바로 좌표계처럼 매가 화살을 맞은 대략적인 위치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숙신은 동이부족처럼 역시 발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옛 종족일 수 있다. 혹자 숙신은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문헌에 보이는 동명의 종족이 아닐 수 있다.   청나라 때의 사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숙신의 옛 이름은 주신珠申이며, 주신은 다스리는 지경 안의 땅을 의미한다. 이 주신을 자칫 만주족의 별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상 그렇지 않다. 1635년, 황태극皇太極은 등극할 때 “우리나라에 원래 만주滿洲… 등 이름이 있으나, 여태까지 무지한 사람들은 늘 주신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지금부터 모두 단지 만주 원명을 부르고 이전의 잘못된 이름을 계속 불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조선이라는 이 국명이 ‘주신→ 숙신→조선’의 변화과정을 거쳤다고 하는 단재 신채호의 주장에 한결 무게가 실리는 부분이다. 숙신은 주신과 더불어 기실 조선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첫 기전체 사서 《사기史記》에는 발식신發息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식신은 숙신의 첫 이름이다. 발식신은 두 형태어의 합체 ‘밝+식신’으로, 발해 남부의 장백산 부근에 있는 ‘밝’ 나라들을 연상시키고 있다. 식신 아니, 숙신, 주신도 결국 선진 시기 ‘조선’의 별칭일 수 있는 얘기이다.  실제로 숙신의 이름은 선진 시기부터  벌써 장백산과 한데 이어진다. 선진 시기의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은  “대황大荒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고 부르며 숙신의 나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불함산은 발해 북쪽의 장백산을 지칭한다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불함산이 장백산의 최초의 이름이라는 데는 학계에서 별로 이의가 없다. 그러나 ‘불함’ 두 글자의 확실한 의미는 지금까지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붉음’이라는 의미의 우리말 고어로 해석하며 또 몽골어 ‘부르칸’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부르칸은 몽골어로 어르신 혹은 무당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불함산’은 ‘신선의 산’이라는 뜻으로 되겠다.   진짜 그럴 법 한다. 이 불함산 역시 북해라는 지명처럼 서쪽의 바이칼호에 나타난다. 바이칼호의 알혼(Olkhon) 섬에는 ‘부르칸산’ 즉 ‘불함산’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조상의 무덤을 모시는 선산이다. 이 때문에 일부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이 부르칸 산에서 찾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불함산이라는 이 지명은 발해 북쪽의 장백산이 아니라 남쪽의 장백산을 지칭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남쪽의 이 장백산 부근에서 용산龍山 문화와 대문구大文口문화가 흥기했기 때문이다. 또 장백산 산체에도 옛 유적이 적지 않다. 예전에 산봉우리의 절벽에는 큰 돌 고리가 달려있었고 많은 산꼭대기에는 철로 부어 만든 쇠기둥이 있었다. 또 산중에는 대홍수 시기의 선박 화석도 있었다고 전한다. 박달족의 선대의 ‘신선’은 상고 시기부터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옛 지명 ‘불함산’의 원주인을 자처하는 북쪽의 장백산에는 이런 ‘신선’의 유적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백설과 부석浮石으로 하얗게 뒤덮인 백두의 봉우리에는 ‘신선’이 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나중에 흥기한 인간의 거주지는 원래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질 수 있다. 한 부족의 이주는 거개 원유의 산 이름과 강 이름 그리고 선조의 전설을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간다. 훗날의 지명에서 선조의 옛 거주지의 연원과 삶의 형태를 조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백산 일대의 박고국이 멸망한 후 원주민의 일부는 발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때마침 만주 북부에는 부여국夫餘國이 건립되며, 동남부에는 또 옥저沃沮라는 부족이 나타난다. 발해 북쪽의 명산 장백산은 그 지명의 연원을 남쪽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옛 지명의 진실한 의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후대의 일부 부족에게는 남고 또 일부 부족에게는 변형 지어 소실될 수 있다. 장백산은 동북아의 최고의 산이지만 최초의 지명 ‘불함’이 단지 몽골어로 해석되는 걸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일이 있다. 장백산은 지명이 생긴 수백 년 후 박달족과 다시 만난다. 611년, 장백산 기슭에서 왕박王薄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농민봉기는 수나라를 뒤엎는 전주곡으로 되었다.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동정東征 때 조정의 강압적인 징병과 수탈이 그 원인이었다. 이 농민봉기로 하여 장백산은 고구려와 얽혀 사서에 또 한 번 기록되는 것이다.   잠깐, 더구나 재미있는 일이 있다. 부악副岳 장백산에 박달족의 그림자가 비껴 있다고 한다면 종산宗山 태산에는 박달족의 나라 ‘발조선’의 이름이 떠오른다. ‘발조선’은 중국의 황제가 태산의 하늘 제단에 올리는 둘도 없는 제물이 되고 있었다.*
14    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 댓글:  조회:1898  추천:1  2014-02-13
  밤이면 늘 울리는 신호 나팔소리는 일본 군경들에게 진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나팔소리는 팔도구에서 북쪽으로 몇리 상거한 까마귀바위에서 띠띠- 따따- 하고 울렸다. 까마귀바위는 바위에 까마귀가 둥지를 틀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까마귀 대신 수림의 범처럼 무서운 “빨찌산”이 찾아올 줄이야!   “나팔소리가 울리면 팔도구(八道溝)에서는 다들 불안에 떨었다고 합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현지 토박이 오정묵씨의 말이다.     오정묵씨는 팔도구 북쪽의 오봉촌에서 나서 자랐으며 훗날 팔도구에 이사하였다. 동네 로인들은 삼삼오오 마당에 모여 앉으면 나팔소리의 이야기를 담배연기에 새뽀얗게 피워 올렸다고 한다.   “일본 경찰과 자위대는 빨찌산이 산에서 내려와 팔도구를 습격하려는 줄로 알았다고 하지요.”   실제 1933년 9월, 연길현유격대는 자정 12시에 팔도구에 있는 일본경찰분주소와 무장자위대를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총과 천, 곡물 등을 탈취하고 군용트럭 2대를 소각했던 것이다.   연길현 팔도구는 국자가(局子街, 현 연길시) 서북쪽에 위치한 산간마을로서 예전에는 시가지 못지않게 번화한 고장이었다. 개간 초기 조선인 간민들이 천주교 교회당을 세우면서 북간도 선교의 중심지로 되고 있었다. 게다가 서쪽의 명월진과 북쪽의 왕청으로 통하는 길목 어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팔도구에는 항일유격대의 근거지가 있었다. 1932년~1936년 기간 연변지역에 설립되었던 11개 항일근거지의 하나였다. 팔도구 북쪽의 마을 부암촌(符岩村)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 세운 항일투쟁기념비와 항일유격근거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부암촌은 항일유격대가 자주 리용하던 부호의 바위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1945년 “8.15” 광복 후 항일전쟁승리를 기념하여 장승촌(長勝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유격대는 훗날 현지인들에 의해 “김일성부대”라고 불린다. “김일성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단 독립사단을 이르던 별칭이다. 제2군단 독립사단은 연변 각 현의 유격대를 통합하여 설립한 부대로서 부암의 항일근거지에 있던 유격대도 여기에 망라된다. 독립사단은 그 구성인원이 거의 전부 조선인이다. 이 부대는 또 “조선유격대”, “조선빨찌산”, “조선혁명군”이라고 불리기기도 했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부암은 항일시기에 또 절세의 녀걸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김정숙녀사가 한때 부암에서 생활하면서 항일투쟁에 투신했던 것이다. 현지에서는 부근 산세가 마치 룡이 여의주를 품은 형국이기 때문에 김정숙녀사라는 여걸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마침 김정숙 녀사가 주거하고 있던 가옥은 둥근 여의주 모양의 북산 기슭에 위치하며, 마을 남쪽에는 또 꿈틀거리는 용 모양의 산줄기가 줄레줄레 뻗어있다.   연길현 8구(區) 소베트정부는 바로 부암촌 북쪽으로 약 3리 정도 상거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부암촌 어구의 둔덕에 위치한 “개똥바위”에 초병을 두었다고 한다. “개똥바위”는 자그마한 돌들이 흡사 “개똥”처럼 마구 엉켜 큰 벼랑바위를 이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바위에 올라서면 팔도구 방면에서 부암촌 일대로 들어오는 산길을 멀리서도 손금처럼 환하게 살펴볼 수 있다. “개똥바위”는 특이한 지형 우세 때문에 유격대의 천연적인 망루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팔도구에는 부암처럼 항일유격대의 흔적이 지명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팔도구를 흘러 지나는 강은 워낙 양지바른 남쪽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조양하(朝陽河)라고 불린다. 그러나 오정묵씨가 어릴 때 들었던 강 이름은 또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홍하(紅河)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피로 붉게 물든 강이라는 뜻이지요.”   팔도 북쪽의 골짜기에서 일본군이 늘 반일지사들을 무더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선혈이 골짜기에서 시냇물처럼 흘러내려 강물을 벌겋 게 물들였다는 것이다. 이 골짜기는 사람이 많이 죽어서 음기가 세다고 “귀신골짜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본군의 피비린 총칼 때문에 무덤처럼 음산한 곳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팔도구 북쪽을 병풍처럼 가로막은 거북이산 정상의 벼랑에는 유격대원들이 “일제를 타도하자”라고 쓴 글발이 씌어져 있었다. 산정의 벼랑에는 또 유격대 부상병이 숨어있던 작은 동굴이 있다.    유격대가 근거지를 설립하고 활발하게 움직이자 일본 군경은 송곳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1933년 12월부터 1934년 2월까지 일본 군경은 연길현 일대에서 “토벌작전”을 대거 벌였다. 항일근거지가 있는 팔도구 일대에는 “토벌작전”이 여러 번이나 진행되었다.  바로 이 무렵 부암촌과 8리 정도 떨어진 길가의 언덕에는 비석이 하나 문득 나타난다.   “일본군이 일부러 세운 위령비(慰靈碑)라고 합니다.” 오정묵씨는 약 40년전 중학교를 다닐 때 식목을 하러 왔다가 처음으로 이 비석을 보았고 또 그때 이 비석의 오랜 유래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의 한 군관이 ‘김일성부대’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하지요.”   비석은 돌들을 키 높이로 쌓아서 만든 기단 위에 세워졌지만, 언제인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로 반죽하여 돌들을 쌓아올린 기단만 홀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기단에는 풀들이 겨끔내기로 자라고 있다.   사실상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비석은 기단 부근에 잔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흙에 묻혀 있는 것 같았는데요, 도구가 없어서 파내지 못했습니다.” 현지를 다녀갔던 연변박물관 전 연구원 리송덕옹은 이렇게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때 리송덕옹은 항일근거지를 답사하던 걸음에 이곳에 잠깐 들렸다고 한다. 예전에 팔도구에서 싸웠던 항일투사들과 함께 전적지들을 찾았던 것이다.   “시초에는 토벌대 대원들의 무덤 일여덟개가 주변에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리송덕옹이 비석 현장을 찾았을 때는 무덤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식목 등 인위적인 파괴와 더불어 세월의 흐름속에 자취를 감췄다. 비석도 누군가에 의해 기단에서 분리되었고 뒤이어 바람처럼 가뭇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아무튼 현지인들과 전문가들의 증언 그리고 비석 기단 등 유물로 미뤄 보면 일본 군경의 무덤과 위령비는 분명히 실존한 한 단락의 력사이다.   연변의 “현지(縣志)”, “문물지(文物志)” 등 지방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지난 세기 30년대 팔도구 부암 부근에는 확실히 일본군 토벌대와 유격대의 교전이 여러 번 있었다. 김순덕(金順德, ?~1934.여름), 왕덕태(王德泰, 1908~1936.11) 등이 인솔한 유격대가 부암 서북쪽에서 토벌대를 매복, 습격하여 여러 명을 사살했으며 또 부암에서 벌인 전투에서 유격대에 의해 토벌대 대원 50여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유격대에 의해 일본 군경이 상당수 사살되었으며 그 때문에 일본군이 그들의 전몰자들을 위해 현지에 무덤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울 법하다는 얘기가 된다.   정작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하는 일본군 군관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격대에 의해 사살된 일본경찰 순사부장이라고 주장한다. 지방의 문헌에 기록된 그가 바로 부암 부근의 전투에서 사살된 제일 높은 계급의 일본 군경이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또 비석의 주인을 두고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갖춘 전설이 파다히 유전했다. 그때 일본군 군관은 비석 기단이 현존하는 언덕배기에서 지형을 정찰하고 있었다고 한다. 언덕배기는 맞은쪽의 벼랑과 수백미터나 상거한 골짜기의 개활지에 위치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 군관은 신변에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고 말뚝처럼 여유롭게 섰다가 유격대원 명사수의 고정 표적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비문과 함께 바람처럼 사라진 비석은 세간에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현재로서는 벼랑기슭의 수림에 일본군이 세운 비석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실제 비석의 견증인인 오정묵씨도 비석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서 일행과 함께 수림을 거의 한시간동안이나 헤집고 다녔다. 40년전 어릴 때의 그의 기억은 어느덧 발목을 덮는 썩은 낙엽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벌써 80년전에 발생되었던 옛 사건임에랴!   일본군의 옛 비석은 빨찌산의 발자취를 간접적으로 확인, 실증할수 있는 기록물이다. 그런데 일본군의 위령비라고 백안시(白眼視)를 한다면 지나간 력사의 일부를 제멋대로 지워버리는 게 아닐지 한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의 울음소리가 수림의 적막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나 비석 저쪽의 멀리에서 울리던 빨찌산의 나팔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중국민족] 2004년 1기                     
13    고종의 어의가 잠적했던 ‘너페’ 댓글:  조회:2001  추천:2  2014-01-30
  20세기 초, 서울 궁전에 있던 어의御醫가 두만강 북쪽의 시골마을에 잠적했다. 조선 왕실의 비사秘事처럼 일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었다.     박광훈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63년~1907년 재위)의 어의였다고 한다. 그가 언제부터 태의원太醫院을 떠났는지는 현재로선 소상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북간도로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의병들과 함께 있었다고 박 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 역시 어릴 때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말씀하시던데요, 외할아버지는 강원도 임계라는 곳에서 의병들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고 병을 보셨다고 합니다.”     구한 말 의병은 1905년 매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쟁의 양상을 띠어가게 되었다.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 의병들은 지하활동을 하거나 간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로 이동, 독립군이나 광복군으로 연결되어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간의 박광훈의 행적을 조각조각 맞춰보면 그는 1907년 경 왕궁에서 나왔던 것 같다. 이 무렵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던 것이다. 왕의 폐위와 더불어 일부 어의가 자진 혹은 피치 못할 사유로 부득불 궁실을 떠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박광훈은 의병활동이 지하에 숨어든 후에도 계속 한반도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국권회복에 계속 실올 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서울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왕의 소식이 날아왔지만 천만 뜻밖에도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부고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서울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다. 이를 놓고 뇌일혈이나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한약이나 식혜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박광훈은 시종 왕이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훗날 그는 자식들에게 왕궁의 비사秘史를 일부 털어놓았는데, 와중에는 고종이 내시內侍에게 남겼다는 유언 한마디가 들어있었다.     “짐은 이렇게 죽더라도 백성은 다치지 말게 하라.”     이에 따르면 고종은 자기가 독약을 먹고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이 유언이 구경 누구의 입을 통해 궁실에서 흘러나왔는지는 풀지 못할 미제謎題이다. 그렇다고 박광훈이 함부로 만들어낸 허구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혹이 있다.     어쨌거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가 독살 당했다는 독살설이 항간에 유포되면서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민족해방운동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어난 이 비폭력운동은 총검을 앞세운 일제의 군정체제에 의해 결국 무참하게 실패한다.     박광훈은 급기야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듯 고향을 멀리 떠난다. 나중에 그들 가족이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두만강 기슭의 산간마을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중학교를 다니던 김숙자가 어머니를 따라 오지의 이 외갓집을 찾아온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정경이 그의 눈앞에 실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 여느 시골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물레방아가 아직도 마을 귀퉁이에서 철썩철썩 하고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물레방아처럼 마을의 이름도 그 무슨 고물딱지를 방불케 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지명이었던 것이다.     “다들 그곳을 ‘너페’라고 부르던데요…”     그러나 “너페”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넓은 평지라는 의미의 ‘넓평’이 와전되어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앞뒤로 산에 꽉 막힌 이 고장에 ‘넓평’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장 사치였다.     아무튼 너페는 나중에 용화향勇化鄕의 소재지 고령촌高嶺村 아니 고령촌 1,2대(队, 촌민소조)라는 다른 이름으로 세간에 등장한다.     용화 지역은 일찍 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고 있던 고장이다. 고령 부근의 지층에서는 인골, 돌도끼, 돌바늘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남쪽의 두만강 기슭에는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또 부근의 산에는 옛 성곽과 봉화대가 잔존한다. 광서光緖 7년(1881)을 전후하여 조선인 이민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 훗날 두만강 연안에 무간국撫墾局을 설립하면서 이 일대에 용신사勇新社와 상화사上化社가 나타난다. 용화는 바로 이 두 지명에서 각기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고령촌은 진짜 이름처럼 산이 높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또 나무가 크고 풀이 우거졌다. 그때 어린 김숙자는 아낙네들을 따라 부근의 산에 버섯 따러 갔는데, 앞쪽의 고작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사람마저 수풀에 가려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란다.     “정말 무서웠지요, 그런데 누구도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겁니다.”     알고 보니 산에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뭐 짐승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할까… 참으로 마을이름처럼 별난 풍속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너페’도 이처럼 심마니들의 은어隱語로 곰을 이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심심산골의 이 고장에 ‘곰’의 이름자가 달려있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지난 세기 5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는 호랑이 따위의 큰짐승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큰짐승들은 울바자를 타고 넘듯 제멋대로 두만강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박광훈 가족이 두만강을 건넌 후 산속에 있던 독립군이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너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박광훈은 동네에서 홀로 떨어져 산기슭에 거처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근의 산비탈에 땅굴을 파고 어구를 나무 등속으로 은폐했다. 독립군의 부상자가 오면 땅굴에 남몰래 숨겨놓고 치료를 했다고 한다. 땅굴은 말 그대로 산속 밀영의‘야전병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박광훈은 간도로 이주할 때 옛날의 의병이었던 독립군과 모종의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한반도에 또 난리가 터졌던 1951년 너페에서 세상을 떴다. 어린 김숙자가 너페에 갔을 때 박광훈은 벌써 전설 속의 인물로 되고 있었다.     ‘상투사건’은 그 중의 하나였다.     8.15 광복 후 박광훈은 의사증명서를 받으려고 화룡 시내로 갔다고 한다. 이때 박광훈은 옛날처럼 여전히 머리에 상투를 얹고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 상투를 틀고 있다니요?” 관원은 대뜸 얼굴을 찌푸리더란다. 해방된 새 사회에 대한 무언의 불복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상투를 그냥 매려면 증명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박광훈은 끝내 상투를 남겼고 또 의사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고명한 의술 앞에서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인가는 수백리 밖의 타향에서 웬 농부가 앉은뱅이의 딸을 소 수레에 싣고 찾아왔다. 딸은 그때까지 열아홉 살의 나이를 먹도록 제 발로 땅을 밟고 걷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인제 걷게 해주면 내 양딸로 되겠느냐?”     박광훈은 다리와 허리에 침을 놓으며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가 땅에 떨어져 먼지가 묻기도 전에 처녀가 자리에서 저절로 일어섰다고 한다.     훗날 처녀는 우연히 박광훈의 외손녀 남편을 만나자 기어이 집에 초대하고 제잡담 닭의 목을 비틀더란다. 그 시절 닭을 잡아 식탁에 올리는 것은 잔치 때나 있을 법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초야에 이름 없는 쑥대처럼 묻혀 살아도 의사의 천직은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광훈은 언제나 몸에 붓과 벼루를 소지하고 다니다가 환자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선선히 처방을 뗐다고 한다.     그토록 꾸밈없이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좀처럼 내놓지 않는 ‘보배상자’가 있었다.     나중에 박 씨 가문의 외독자인 외삼촌이 이 상자를 대물림으로 물려받았다. 외삼촌 역시 언제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꼭 갖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 상자를 ‘보배’처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궁전의 패물과 옛 의서, 사진 등속을 넣은 것 같습니다.” 기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도 이 ‘보배상자’를 눈요기조차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상자의 물건은 박 씨 가문의 둘도 없는 ‘보배’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운의 어의에게 드리웠던 암울한 그림자는 종내 사라질 줄 몰랐다. 지난 세기 60년대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박광훈의 손자가 장작나무를 태우듯 ‘보배상자’를 통째로 소각해버렸던 것이다. 공산당에 가입한 손자에게 ‘보배상자’는 ‘보배’ 아닌 봉건사회의 낡은 잔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자 속에 숨겨있던 미스터리의 ‘보배’는 졸지에 한줌의 재로 날려갔다.     이 무렵 김숙자 노인이 모친에게 물려받았던 박광훈의 사진도 재앙을 당한다. 김숙자 노인이 군부대 기밀부문에 배속되면서 미타한 생각이 들어 옛 사진들을 용정의 시댁에 남겼고, 미구에 시아버지가 난데없는 ‘간첩사건’에 연루되자 시댁에서 서둘러 옛 사진들을 죄다 처분했던 것이다.   어의의 신기한 이야기는 그렇게 "너페"라는 희귀한 지명은 오지의 웬 산골짜기에 꽁꽁 묻혀버렸다.*                                         (지명답사기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에서)
12    박달족의 이름은 왜 그곳에 나타날까 댓글:  조회:2159  추천:12  2014-01-04
[들어가면서]                                  박달족의 이름은 왜 그곳에 나타날까     지명에만 그것도 단 한번 등장하는 한자漢字가 있다. 바다 이름 발渤이다. 그런데 그 유일한 지명인즉 “발해渤海”이다. 발해는 가로세로 해석해도 결국 바다라는 의미가 되겠다. 도대체 무슨 감투 끈인지 몰라 어리둥절 한다.     그러나 우리말이라고 하면 대뜸 경우가 달라진다. 이때 발해는 바다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大祚榮이 698년 만주(동북)에 세운 나라의 국호이다. 아쉽게도 세상에 잘 알려진 국호와는 달리 이 발해(국)의 의미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당나라 제6대 황제 현종玄宗이 대조영을 “발해 군왕”으로 책립하면서 국호가 자연스럽게 발해(국)로 되었다고 전할 뿐이다.     기실 바다 발해는 발해국뿐만 아니라 또 (고)조선과도 이어지고 있다.     선진先秦 시기의 고서 “산해경山海經”은 중국에서 제일 오랜 지리서地理書인데,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며 그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 朝鮮)”라고 (고)조선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북해는 발해 남쪽의 내주만萊州灣을 이르는 말이며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발해 전체를 가리킨다.     잠깐, 선진 시기 북해 즉 발해의 기슭에는 동방대국인 박고국薄姑國이 있었다. 박고족薄姑族은 조이鳥夷의 한 갈래인데 제나라濟國의 말로는 이와 비슷한 발음의 “박고薄鸪”라고 불린다. 아무튼 “박薄”이 고대 중국말에서 “발渤”, “박博”, “포蒲” 등 글과 통용, 가차假借할 수 있기 때문에 박고족이 살던 고장 부근에는 “발해渤海”, “박흥博興”, “포대蒲臺” 등 많은 옛 지명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박”, “발”의 음은 우리말 고어에서도 역시 하나의 뜻으로 통한다. 박, 발, 부루, 불은 모두 광명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겨레의 건국시조인 단군檀君이라는 칭호는 바로 “박달임금, 밝은 임금”이라는 뜻이 된다. 단檀은 박달을 의미하는 말로 박은 밝과 통하며, 군君은 임금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선인先人들이 태양을 숭배하고 태양신의 후손으로 자처하면서 자신들을 불러온 옛 명칭이었다.     국호 “조선朝鮮” 역시 한자漢字로 풀이했을 때는 “동쪽의 햇빛이 밝은 곳”, “아침 해가 선명한 곳” 등으로 역시 “밝다”는 의미로 된다.     누군가는 “조선”이라는 국호는 한자가 생긴 후 비로소 생긴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런 고로 조선을 기어이 상고시대 신화인물과 연관을 지어 “밝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그럴 법 한다. 옛날 열수洌水, 산수汕水, 습수濕水 등 세 개의 강이 합쳐 열수로 되었으며 조선은 이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 조선의 어원은 기실 숙신肅愼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그래서일까, 청나라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숙신의 옛 이름이 주신珠申이며, 주신은 다스리는 지경 안의 땅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국호 조선이 문헌적으로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춘추시기(B.D.770~B.D.476)이다. 제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관중管仲의 저서라고 전하는 “관자管子”에서 “발조선發朝鮮”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얼굴을 보인다. “발發”은 순 우리말 고어로 “밝다”라는 뜻이니 “발조선”은 결국 “밝은 조선”으로 해석된다. 그러고 보면 나라 “발+조선”도 바다 “발+해”처럼  같은 의미를 갖는 두 형태소의 합체가 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을 한자가 생긴 후 만든 이름이라고 해도 그때 일부러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 표기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 “발조선”은 제나라 때 더는 “북해의 모퉁이”에 있지 않았다. 벌써 제나라에서 멀리 8천리나 상거한 나라로 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발조선”을 한반도에 갖다 놓고 있지만 꼭 그렇다고 단정을 지을 수 없다. 관중은 오吳, 월越 등 나라와 곤륜崑崙의 나라도 모두 8천리 밖이라고 이야기하며, 이로부터 미뤄 볼 때 8천리는 단지 상대적으로 먼 거리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에 앞서 기자箕子 조선은 발해 남쪽이 아닌 북쪽의 난하灤河 유역에 나타나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북해 모퉁이에서 살고 있던 박달족은 어느 시점인가 벌써 발해의 다른 쪽으로 자리를 뜨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시절, 대륙에 찍었던 박달족의 발자취는 인제 상당부분 더는 복원하기 어렵다. 선인先人들은 웬만해서는 해득하기 어려운 코드를 우리의 유전자에 심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대손손 전하는 박달족의 전설을 한낱 허황한 이야기라고 단언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새는 날아가도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법. 세상의 인연은 모두 흔적을 남긴다. 한때 북해 기슭에 삶의 터를 잡고 있었던 박달족은 바다와 강, 산, 벌에 도대체 무슨 기억을 묻고 있을까…   ......   .....   (중략).    발해의 서북쪽에 “천서天書”가 있는 부산釜山이 있고 발해 서남쪽에 옛 유적이 있는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발해, 바로 그곳에는 분명히 하나의 진실한 천년의 이야기가 있었다…
11    고려하, 북경의 옛말로 흘러간 이야기 댓글:  조회:2539  추천:15  2013-10-23
  옛날 북경 일대에 고려사(高麗寺)가 있었다. 원나라 때 세운 천년 고찰이라고 한다.    그때 북경 제일 동쪽의 장가만(张家湾) 지역은 강과 늪이 바둑처럼 널려있었으며 또 인가가 아주 드물었다. 선가(禪家)의 도를 닦을 택지(宅地)였다. 스님들은 늘 서쪽으로 5,6리 상거한 고려장(高麗庄) 마을에 가서 시주를 받았다. 나중에 사찰은 이 마을의 이름을 빌어 서 “고려사(高麗寺)”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가만 현지 태생인 백리생(白利生, 50여세)은 바로 고려사 옛터에서 소학교를 다녔던 사람이었다. 장가만소학교(현재 장가만민족소학교로 개명)는 옛 사찰 위에 서있었던 것이다.   “사찰에는 철로 만든 부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리생은 장가만에서 50대 이상의 사람이라면 옛 사찰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해방(1949) 초기에 부처 조각상을 깨버리고 고철로 팔았다고 하지요.”    어찌되었든지 옛 사찰은 훼손될때 벌써 “고려사”라고 불리지 않고 있었다. 아득히 오랜 명나라 정통(正統) 4년(1439), 황제의 칙명으로 중수하고 널리 복과 덕을 쌓는다는 의미의 “광복사廣福寺”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기실 “고려사”라는 이름을 만든 마을 고려장도 그 무렵 사찰과 함께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다.   고려장 역시 원나라 때의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원사(元史)》는 대도(大都, 북경을 이르는 옛날 말)의 물길이 “고려장에서 백하에 흘러든다(高麗庄入白河).”라고 적고 있다. 백하(白河)는 북경 북쪽에서 발원한 강으로 장가만의 동쪽에서 운하와 한데 연결된다. 이때 고려장 부근에는 다른 마을이라곤 없었으며, 그래서 이 고장에서 고려장이 유일한 지표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다고 고려장이 고려사처럼 원나라 때 생긴 마을은 아니다. 《통현현지(通縣縣志)》는 고려장은 당나라 태종 리세민이 요동에서 끌고 온 고구려 포로들로 세워진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등 옛 문헌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에서 최종적으로 참패를 당하기전 고구려 군사 1만명과 주민 4만여명이 포로로 되었다. 《중국통사(中國通史)》의 기록에 따르면 리세민 은 나중에 고구려에서 퇴각할 때 1만 4천여명에 달하는 포로를 관내에 끌고 왔다고 한다. 이런 포로를 유주(幽州) 즉 오늘의 북경 일대에 두고 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포상으로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려장은 고구려 포로가 정착한 마을이라는고 하는 현지(縣志)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다.   고려장이 명소처럼 사서에 기록될수 있은건 마을 부근까지 이어진 운하의 유명세 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운하는 일찍 춘추시기부터 굴착되었으며 오늘날의 추형을 갖춘건 수나라시기로 전한다. 이때 동도 락양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운하계통을 이룬 것이다. 원나라는 지금의 북경을 대도로 정한 후 대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항주까지 직달하는 대운하를 개통하였다. 원 29년(1292), 대도 서쪽의 여러 물길을 도성으로 끌어들인 후 고려장 동쪽에서 백하에 흘러들게 했던 것이다.   고려장의 동쪽에 배들이 정박하면서 “장가만”이라는 마을이 생겨난다. 장가만은 훗날 수상운수 종착지와 물자 집산지로 거듭나게 된다. 그때 장가만에는 날마다 우마차가 실북 나들듯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고려장 주변의 물자를 비축하던 곳은 점차 군락을 끼리끼리 이루며, 이어 중국인 마을 역시 땅을 파고 들어온 운하의 물처럼 강기슭에 웅기중기 들어앉기 시작했다. 고려장의 바로 동쪽에 있는 황목장(皇木場), 전장촌(磚場村)은 이때 생긴 마을이다.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 격”, 장가만의 유명세는 금세 파도처럼 고려장을 말끔히 묻어버린다. 고려장은 이로부터  약 반세기 후의 명나라 때에는 허울 좋게 중국어 발음만 바뀌지 않은 고력장(高力庄)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고려장의 천년 수난사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였다. 청나라 때 만족들은 고력장 북쪽에 작은 마을을 하나 세우며, 고력장과 구분하여 소고력장(小高力庄)이라고 부른다. 고려장 마을이 고력장이 아니라 또 난데없는 대고력장(大高力庄)으로 변신하게 된건 이때의 일이다. 소고력장은 또 동쪽마을과 서쪽마을로 갈라지는 분신을 한다. 훗날 동소고력장(東小高力庄)과 서소고력장(西小高力庄)은 략칭 동장(東庄)과 서장(西庄)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북경 서쪽 묘봉산(妙峰山) 기슭의 고려촌(高麗村) 역시 고려장과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해정구(海淀區) 서쪽 끝머리의 고리장촌(高里掌村)은 적어도 명나라 때까지 고려촌이라고 불리던 마을이였다. 명나라 시기의 《완서잡기(宛署雜記)》에 명백히 고려촌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훗날 청나라 시기의 《광서창평주지(光緖昌平州志)》는 고려촌을 고립장(高立庄)이라고 기록하며 《광서순천부지(光緖順天府志)》는 고립장(高立掌)이라고 적고 있다. 또 리씨 성의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현지사람들은 고리장(高李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중에 이 이름이 비슷한 음의 글자로 바뀌어 고리장(高里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름이 하도 많이 바뀐 탓인지 마을에는 지명 “고리장”의 유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최씨 성의 노인은 대답 대신 오히려 이상한 물음을 물었다.      “우리 마을이 높은 산 아래의 평지에 있다고 해서 높을 고(高)자와 손바닥 장(掌)자를 달지 않았을까요?”   이러니저러니 천년 세월이 흐르도록 “고려”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은 지명이 있다. 고려 군대의 병사(兵舍)라는 의미의 고려영(高麗營)이다. 고려영은 자금성에서 북쪽으로 약 35㎞ 상거한다.   지방문헌인 《순의현지(順義縣志)》는 고려영이 “당나라 때 내지에 온 고려인들이 이곳에 정착했으며 훗날 늘어나서 마을로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영의 동북쪽으로 약 10㎞ 상거한 소고려영(小高麗營)도 옛날의 전란 때 고려인이 살고 있었으며 원래는 역시 고려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남쪽에 또 고려영이 섰고 그 규모가 엄청 컸기 때문에 이에 반해 소고려영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소고려영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남쪽의 고려영 마을을 대고려영(大高麗營)이라고 부른다.   재미있게도 두 고려영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의 마을이 먼저 섰다고 말한다.   어찌되었거나 당나라 태종 리세민이 고구려에서 퇴각할 때 포로로 잡아온 고구려 병사와 가족을 유주(幽州) 즉 지금의 북경 일대에 거주하게 했며 그 정착촌이 하나가 고려영이라고 하는 주장이 통설로 자리한다. 그러나 병사(兵舍)라는 의미의 영(營) 때문에 고구려 군사가 진을 치고 있던 고장이라고 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고구려 군사가 645년 당나라 군대를 추격했던데서 비롯된 지명이라는 것이다. 하긴 “래광영(來廣營)”, “화기영(火器營)”, “옥천영(玉泉營)” 등 영(營)자를 달고 있는 북경의 기타 지명들은 모두 옛날 군대의 병사와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영은 영(營)자가 달린 북경의 제일 오랜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경의 “고려” 지명에 이처럼 혼선이 빚어진데는 예전에 지방 력사와 지리 관련한 전문서적이 적은데 기인된다. 《완서잡기(宛署雜記)》의 머리글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읽을수 있다. 저자 심방(沈榜)은 그가 지방에서 현관(縣官)으로 있을때 그래도 일부 문헌자료들을 볼수 있었지만 경성의 완평에 이른후 지방의 지리서 등속을 볼수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순천부(順天府) 완평현(宛平縣) 지사로 부임하던 3년 기간 전고(典故)를 수집하고 문헌자료를 편저하여 이 책을 묶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려영은 결국 이름만 본연의 모습일 뿐이지 도대체 군영인지 아니면 포로들의 정착지인지 분간키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은 것이다. 단 하나, 이런 옛 지명에 남아있는 “고려”는 거개 “고구려”를 의미한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지명 고려하(高麗河)도 성씨가 분명히 “고구려”이지만 고구려의 멸망후 수백년을 지나 원나라 때 비로소 문헌에 등장한다.   원나라 때 운하공정에서 치적을 쌓은 수리학자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은 북경 동쪽의 리이사(李二寺) 부근에서 백하(白河)에 흘러들던 물곬을 바꿔 고려하에서 백하에 흘러들게 했다고 전한다. 고려사가 부근의 고려장 마을의 이름을 빌었듯 고려하도 부근의 고려영 마을의 이름을 빈듯 하다. 언제 생성된 지명인지는 몰라도 고려하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처럼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있었다. 청나라 건륭(乾隆) 년간의 “흠정일하구문고(钦定日下旧闻考)”는 북경 서쪽의 룡산(龍山)에서 발원하는 강물은 도중에 두갈래로 나뉘는데 남쪽으로 고려영을 흘러 지나는 강을 “고려하”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인만 아니라 신라인들도 북경 일대에 살고 있었다. 18세기 사행단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갔던 박지원은 연행록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당나라 총장(總章) 년간(668~670)신라의 가옥이 있는 곳에는 그곳을 빌려서 관아를 설치했으니, 량향(良鄕)의 광양성(廣陽城)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량향은 현 이름이며 북경의 서남부에 위치한다.   고려 이름의 지명과 달리 광양성에 있던 신라마을은 비슷한 음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명나라 때 이 고장에는 벌써 인적이 드물었으며 오늘날의 촌락은 청나라 때 비로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지에서는 광양성이야말로 최초의 옛 지명인줄로 알고 있으며 지명지(地名志)에도 일절 신라마을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 이름의 마을이든 아니면 신라 이름의 마을이든 모두 고려하처럼 강바닥에 잦아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름 자체가 북경의 옛말로 되고 있는 것이다.*
10    걸만의 채 꺼내지 못한 이야기 댓글:  조회:2601  추천:2  2013-10-18
  길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던 촌민들은 그 동네를 ‘걸만’이라고 불렀다. 도문의 마패 북쪽으로 5리 정도 상거한 동네였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었더니 “호걸이 많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중국말로 준걸 걸(杰), 찰 만(滿) 자를 쓰니 그럴 법 한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개발되었으며 ‘걸만’이라는 마을은 그 후인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에 생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걸들의 이름과 경력 등은 마을이름처럼 그렇게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고 하는 리덕송(83세) 옹은 더구나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걸만은 예전에 (혁명)열사들이 많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리덕송 옹은 8살 때 두만강 대안의 온성에서 부모를 따라 걸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때 집은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이 가난했다. 걸만에 먼저 정착했던 삼촌의 권고로 마침내 도강을 작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동네를 토암(土岩)이라고 부르고 있었지요.”  토암은 훗날 걸만촌 5대(隊, 촌민소조)로 개편, 걸만이라는 마을을 이룬 여러 동네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방문헌은 광서 9년(1883) 토암 동네가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네의 뒷산은 풍화된 암석 구조이며 흙이자 또 암석이어서 토암이라고 작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덕송 옹의 가족이 이삿짐을 풀던 그 무렵 벌써 내력이 싹싹 지워지고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되고 있었다.   “우리 이 동네의 위쪽에 바위벼랑이 있다고 해서 토암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그 바위벼랑은 일명 ‘여시바위’라고 불리고 있었다. ‘여시’는 ‘여우’를 이르는 강원도, 전라 지방의 방언이다. 예전에 누군가 바위벼랑 위에 앉아있는 여우를 보고 지은 이름인 듯하다. 벼랑에는 지금도 날짐승이 깃든다고 하니 여우가 자주 들락거렸을 법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뉘라 없이 ‘여시’가 우리말 방언인줄 모르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여시바위’를 아주 난해한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정말 약과인 것 같다. 걸만 마을의 제일 바깥쪽에 위치한 1대 뒷산의 이름은 아예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촌장 저택에서 만난 50대의 아낙네는 그가 시집을 오던 그 무렵 벌써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집 동쪽에 있는 저 둥그런 산인데요, 다들 ‘산스 가슬’이라고 부르지요.”   처음 듣는 이름이고 또 하도 괴이한 이름이라서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그런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솔직히 외국말을 옮겨온 듯한 ‘산스 가슬’의 이름은 그냥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던가, 나중에 촌민 하나가 우연히 건네는 말 한마디가 우뢰처럼 귀를 번쩍 울렸다.   “무슨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스 가슬’에는 참나무가 많이 자라지요.”   “물 따라 강남으로”라는 말이 있듯 “더덕 따라 참나무 숲으로”라는 말이 있다. 참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더덕줄기가 묶음이 되고 더덕 씨가 줄레줄레 떨어져서 더덕 밭을 이룬다. 더덕의 방언이 ‘산승’이고 숲의 방언이 ‘가슬’이니 ‘산스(승) 가슬’은 결국 ‘더덕의 숲’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처럼 지명이 원체 방언으로 만들어진 줄 모르고 있었고 또 그 방언마저 비슷한 음으로 와전되다 보니 마을에는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할 괴상한 지명까지 생기고 있었다.    1대 마을을 이르는 ‘사무구파’가 바로 그러했다. 자칫 일본말로 오인할 수 있는 지명이었다. 마을 토박이인 리덕송 옹도 웬 일인지 ‘사무구파’로 기억하고 있었다.   실은 ‘샘물구팡’이었다. 구팡은 우리말 방언으로 처마 밑에 마루를 놓을 수 있게 쌓아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때는 (샘물) 근처의 높은 지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닐세라, 마을 뒤에 큰 샘이 있으며 이 샘 때문에 마을은 중국말로 샘물이라는 의미의 ‘천수(泉水)’라고 불리고 있었다.   남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자부락골’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부락골’은 골짜기에 해가 뜨는 시간이 짧아서 잠만 자는 동네라고 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부락’은 소리를 나타내는 말. 그러니 ‘자부락’은 응당 ‘잠부락’의 와전으로 보아야 한다.   자부락이든 잠부락이든 인가가 죄다 사라졌으니 진짜 잠을 자는 골짜기로 된 셈이다.   자부락골처럼 소실된 부락은 또 하나 있었다. 토암의 바로 서쪽에 있었던 동경동(東京洞)이다. 광서 초년에 생긴 이 부락은 불과 수십명이 살던 작은 동네였다. ‘동경’은 물소리 혹은 시냇물을 이르던 만주족 말이라고 한다.   와중에는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지명도 있었다. 신선이 내려왔다고 전하는 ‘신선 더기’였다. ‘신선 더기’는 현재의 걸만 2대 마을로 닭 덕대 같은 둔덕에 제를 지내던 곳이 있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북좌남향한 이 비탈에 바람이 잘 통하고 또 공기가 시원하여 신선 같은 곳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기왕 지리위치로 생긴 마을의 이름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일명 큰 마을, 대대마을로 불리는 4대 마을은 이름하여 남양툰(南陽屯)이다. 산의 양지 바른 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광서 7년 개발되어 광서 10년에 형성된 이 마을에는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이미 폐교되었다.   인제 지명마저 학교처럼 허울뿐인 이름 그 자체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덕송 옹의 아내 김보금 로인은 마을의 옛 이름이 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기억이라는 그릇에 지명 이야기를 담을 여유도 생각도 없는 듯했다. 로인은 그의 고향이 걸만 북쪽의 립봉(笠峰)이라고만 말했다. 립봉은 우리말로 삿갓봉을 중국말로 옮긴 말이다. 진짜 마을 부근에는 삿갓 모양의 산이 있다고 한다.   그가 살고 있었던 삿갓봉은 물론이요, 부모님의 옛 고향은 로인에게 더구나 아득한 옛말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린 조선 땅에서 건너왔지요. 그러나 언제 어디서 건너왔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잃고 있는 건 아리송한 옛 기억뿐만 아니었다. 그날 우리는 마침 뜰에 들어서는 리덕송 옹을 만났을 때 인사보다 놀라움을 앞세워야 했다. 그가 몇십리 밖의 도문 시가지에 가서 몸소 쌀 200근을 택시에 싣고 왔던 것.   현지의 참담한 실상을 보여주는 단면도였다. 농사꾼이 땅을 떠나고 있었고 인가가 자리 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전성기에 수십 가구에 이르렀던 토암 마을 역시 인제 20가구 정도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의 옛날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어쨌거나 이곳의 동네는 거개 우리말 방언이 아니면 지리적 위치로 인한 지명을 갖고 있었다. 여러 동네를 하나로 묶은 걸만도 실은 우리말 방언에  연원을 두었다는 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걸만’은 방언 ‘거르만’을 중국말로 옮기면서 비슷한 음의 ‘걸만(杰滿)’으로 되었고 그걸 다시 “호걸이 많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르만’은 연변지역의 우리말 방언으로서 호주머니라는 의미의 러시아 말 ‘까르만’에서 비롯되었다.   이 설법을 억측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긴 예전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를 통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러시아 말의 어휘가 이민들에게 풀씨처럼 묻어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연변에서 늘 사용하는 어휘 “비지깨”는 바로 러시아어로 “성냥”이라는 뜻이며 “마션”은 러시아어로 “재봉틀”을 이르는 말이다.   걸만을 우리말 지명으로 해석하면서 실은 ‘걸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걸망’은 걸머지고 다닐 수 있게 얽어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를 말한다.   실제 마을은 위치가 바로 골짜기 사이에 갇혀 있어서 흡사 긴 주머니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호주머니의 ‘거르만’이나 큰 주머니의 ‘걸망’으로 해석해도 십분 가능하다는 것. 또 심산벽지의 이 고장에서 호걸이 있었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한다. 도대체 ‘걸만’은 두만강 대안의 사람들이 걸망을 메고 건너와서 지은 이름일까, 아니면 연해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온 러시아 말의 지명일까. 또 옛날 마을을 빛낸 호걸이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일까…   잠깐, 재미있는 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걸만 끝머리에 있는 ‘삼동(三洞)’이다. 얼핏 이름만 보아서는 세 개의 동굴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기실 광서 초년 마을이 세 갈래의 골짜기가 모이는 어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으로 시초에는 세 개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삼구(三溝’)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게 어찌어찌하여 ‘삼동’으로 와전되었고 지어 한발 더 짚어서 산의 동굴이라는 의미의 ‘산동(山 洞)’이라고 군사지도에 기록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걸만 역시 이 삼동이라는 이름처럼 뭐가 뭔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종내 찾을 길 없었다. 마을의 집단기억에 더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 걸만에 있던 많고 많은 이야기는 그렇게 영영 묻혀버리는 걸까…*      ( 중국민족 2013년 제5기)  
9    연변 땅을 파면 역사가 묻어나온다 댓글:  조회:3008  추천:2  2013-10-16
[추천사] 유서 깊은 연변 땅, 땅을 파면 역사가 묻어나온다                           김 철 (시인, 전 연변작가협회 주석)   그들은 걸어온 발자국마다에 이름을 새겼다.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 푸른 물에 눈물을 뿌리며 연변 땅을 찾아온 우리민족, 울창한 밀림에 화전을 일구고 귀틀막을 짓고 마을을 세우면서 지명을 만들고 전설을 엮어온 우리민족, 그들의 남긴 발자국마다에 지명이 생기고 전설이 전해졌다.   그래서 지명은 산 역사가 되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우리민족의 역사, 지명은 그 역사의 살아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전설이 묻혀있는 지명, 하나하나의 지명이 모여 우리민족의 역사가 되고 있다. 연변의 지명에는 이야기가 많다. 그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이주 역사이다. 피눈물의 개척사 그리고 우리민족 이민사에 새겨진 그 전설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많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풍토와 민속, 전설의 발굴 작업은 시급한 상황이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오래오래 전해져야 할 뜻 깊은 이야기들을 집대성한 이 책자가 아주 값지다고 본다.   김호림 씨가 자진하여 이 작업을 해냈고 주옥같은 많은 자료들을 발굴했다. 그 공로를 높이 치하하며 그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자의 지명이야기들은 사적史的인 각도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 조상들의 살아 숨 쉬는 생활기록이기도 하다. 또 민간문학적인 견지에서도 매우 가치가 있다. 풍토와 민속 전설, 민간이야기들은 우리민족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생동한 민간문학이기도 하다. 이런 견지에서 이 지명 답사기는 우리민족 개척사와 민간문학 보물고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지명 답사기가 우리민족의 이민사, 발전사에 산 교과서로서 큰 공헌을 하며 후손들에게 소중하게 전해질 책으로 값진 공헌을 하게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013년 4월 북경에서
8    지명으로 읽는 연변 100년 력사 댓글:  조회:2916  추천:2  2013-10-08
[책제목]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의 풀린다 (2013. 10 한국 글누림출판)   [머리글]           지명, 연변의 또 하나의 박물관           지명은 그곳 사람들의 삶의 무대를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지명에는 주민의 생활상이 찍혀 있으며 그곳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다.     옛날 연변延邊은 기본상 북옥저의 활동범위에 들어있었다. 북옥저는 고대 종족인 옥저沃沮의 한 갈래인데 옥저는 ‘울창한 산림이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먼 옛날 연변지역에는 수림이 꽉 들어찼던 모양이다. 고구려, 발해국, 요나라와 금나라, 원나라 등 북방민족이 세운 왕조는 모두 연변에 도읍을 설치하거나 행정기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연변의 옛 지명들은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이나 “명일통지明一通志”, “성경통지盛京通志에” 등에 나오는 부르하통하布爾哈通河, 해란강海蘭江 등으로 별로 남은 게 없다. 강희康熙 16년(1677)부터 시작된 약 200년 동안의 ‘봉금정책’ 때문에 인적이 끊어지면서 차츰 망실忘失되었기 때문이다.     ‘연변延邊’이라는 이 이름이 제일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한 것은 1913년 출판된 지방지地方志인 길림지지吉林地志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방지는 ‘대륙교통’을 기록하면서 ‘연변’이라는 이름을 거들고 있는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연변’이라는 이름이 고착된다. 3국이 인접한 국경지역에 위치하고 또 연길 변무공서의 관할에 있었기 때문에 ‘연변’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출판된 “중국민국지中國民國志”는 “동북변강은 연변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연변은 길림 연길도延吉道의 변강을 말한다.”라고 보다 명확하게 기재하고 있다.     다른 설에 따르면 청나라 말, 민국 초기 관방에서 ‘연훈제변延琿諸邊’다시 말해서 ‘연길과 훈춘 여러 변방’이라는 지역이름 그리고 ‘연길구역’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다가 점차 ‘연변’이라는 이 지명으로 고착되었다고 한다. ‘연변’이라는 이 지명은 연길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는 것.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연길은 연변 하면 곧바로 눈앞에 떠올리게 되는 지명이다. 중국 조선족의 고향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首府이기 때문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그 전신前身이 1952년 9월 3일 창립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이며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되었다. 이때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조선민족’의 ‘민’자 생략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연길이라는 이 지명의 시원始原은 연기가 모인다는 의미의 연집煙集이라고 전한다. 연길은 사방이 모두 산에 에둘린 작은 분지이다. 개간초기에 인가가 자리 잡은 언덕에는 늘 연기가 자오록하게 피어올라 안개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군락을 연집강烟集崗이라고 불렀으며 연길은 훗날 이 연집의 음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연집烟集은 아직도 연길 시내의 서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강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연변의 많은 지명은 이처럼 이민들의 주거지 환경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용정이라는 이름은 19세기 말 이곳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옛 우물을 발견하면서 작명되었고 도문은 도문이라는 이름 먼저 워낙 석회 가루가 날리는 동네라는 의미의 회막동(灰幕洞, 일명 회막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벌을 찾아 또 샘물을 찾아 이삿짐을 풀었던 조선인들은 간평間坪처럼 골짜기 사이에 들 평坪을 넣어 지명을 만들었고 또 약수동藥水洞처럼 샘물가에 삼수변의 동洞을 넣어 감칠맛 나는 이름을 지었다.     조선인 이민들이 남긴 이런 이름은 나중에 중국말로 고착되고 다시 우리말로 불리다보니 웃지 못 할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훈춘 경신향敬信鄕의 ‘玻璃登’은 중국말 그대로 해석하면 자칫 ‘유리 등잔’으로 되기 십상이다. 기실 우리말로 벌과 그 옆의 더기를 합쳤다는 ‘벌 더기(등)’ 마을이었다고 한다. 중국말로 지명을 옮기면서 ‘벌 더기(등)’와 비슷한 발음의 ‘玻璃登(bo-li-deng)’으로 적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뭐가 뭔지 헛갈리게 하는 엉뚱한 지명도 있다. 두만강 기슭의 대소大蘇라는 동네이다. 분명 소련이 크다는 이야기는 아니겠는데 그렇다고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종잡기 어렵다. 사실 대소大蘇는 큰 소라는 의미로, 마을 뒤의 산언덕이 마치 큰 소처럼 생겼다고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큰 소를 중국말로 바꿔 적으면서 클 대大, 소는 발음 그대로 차조기 소蘇를 쓰다 보니 참으로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 이름을 메달처럼 한꺼번에 여러 개나 달고 있는 지명이 있다.     용정 시내에서 삼합 쪽으로 가는 길가에는 일부러 비석처럼 깎아서 세워놓은 것 같은 높은 바위가 있다. 애초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해서 비둘기바위라는 의미의 ‘부걸라자鳧鴿砬子’라고 불렀다. 훗날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 방향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은 이 바위를 ‘선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바위가 셋이라고 ‘삼바위’라고 불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지방지에는 알쏭달쏭한 의미의 ‘대라자大砬子’로 적혀있다. ‘라자砬子’는 만주족말로 벼랑바위라는 의미이며 ‘대라자大砬子’는 중국말과 만주족 말과 뒤범벅이 된 단어로서 큰 벼랑바위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이 ‘대라자大砬子’를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서 현지에는 또 ‘달라자’라고 다소 엉뚱한 이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기실 만주족 말의 ‘라자’가 지명에 나타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다. 시대에 따라 숙신肅愼, 읍루邑婁, 물길勿吉, 말갈靺鞨이라고 불렸던 여진족女眞族의 일부가 한때 두만강 일대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그 뒤에 우리에게 이웃처럼 익숙한 만주족이라는 족명族名으로 이어진다.   ‘선바위’만 아니라 일부 지명에는 만주족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연길을 남북으로 두 동강 내고 흘러가는 부르하통하는 만주족 말로 ‘버드나무의 강’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화룡의 평강平崗벌과 용정의 서전瑞甸벌을 적시는 해란강도 실은 만주족 말로 ‘느릅나무의 강’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런 연장선에서 ‘연길’의 의미가 실은 만주족 말로 ‘석양石羊’이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연길의 지명은 ‘엽길葉吉’이라는 음에서 생겼으며 ‘엽길葉吉’은 만주족 말로 ‘석양’이라는 의미라는 것. 명나라 때 연길은 ‘호엽길랑위瑚葉吉郞衛’의 관할에 속했다고 한다.     연변,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곳의 지형지물과 명물, 그들이 전승한 신화와 전설은 지명에서 이처럼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명 자체가 바로 그곳의 둘도 없는 생생한 박물관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지명은 마치 무형의 타임머신처럼 우리를 지금까지 잘 몰랐던 역사의 미궁 속으로 안내하고 있다…*  [국민일보에 실린 서평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7707610&cp=du ]  
7    모아산, 초모자에 숨은 한마리의 용 댓글:  조회:2577  추천:3  2013-04-21
  봉림동鳳林洞은 광서(光緖, 1875~1908) 말년 형성, 숲이 울창하다고해서 상서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뭐가 산신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미구에 마을을 찾아 내려온 것은 이름자에 넣은 봉새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봉림동이라고 하면 방채봉 노인은 마을 이름을 만든 수림 대신 동네 어구에 있었던 논을 눈앞에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1933년 여름날의 밤에 생긴 일이었다. 마적들이 짐승무리처럼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쳤다. 엄마는 이웃들을 따라 동구 밖의 논으로 천방지축 뛰어갔다고 한다. 벼가 두어 뼘이나 자란 논은 엎디면 잔등이 보이지 않아서 마을 근처의 은신처로 안성 맞춤했던 것이다.     “정말 한심하지요? 엄마는 논에 이른 후에야 등에 업고 나온 게 제가 아니고 베개라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어언 80년 세월이 흘렀지만 방채봉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그 일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단다. 훗날 조모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 살 배기의 어린 방채봉은 그런 난리판에도 태평스레 따뜻한 아랫목에 누운 채 코를 쌕쌕 골고 있었다고 한다.    불행한 일은 기어이 그들을 비켜가지 않았다. 배포 유하게 그냥 사랑방에 누워있던 부친은 근처에서 총소리가 우당탕 터지자 급기야 울바자를 뛰어넘었다. 그러다가 유탄에 허벅다리를 맞아 그로 인한 과다출혈로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때 부친은 1910년 좌우에 출생한 20대의 나이였으니 분명히 두만강을 건넌 이민 1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부 방동규가 고향 함경도를 떠나 간도로 올 때 아직 머리태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고 방 씨 가문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조선인 남자들은 거개 머리태를 기르거나 상투를 얹고 다녔다. 문호개방에 따라 조선 26대 왕 고종이 부득불 전국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린 것은 1895년이다. 이에 따르면 방동규는 늦어도 아들을 보기 10년 전인 19세기 말까지 이미 간도 땅을 밟은 것이 아닐지 한다.    방동규는 훗날 독립군에 입대, 청산리 전투 때 김좌진金佐鎭이 인솔하는 부대의 군량 도감都監으로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靑山里 전투는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 등이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를 말한다.    청산리 전투가 끝난 이듬해 독립군의 대부분은 러시아로 이동하며 일부는 간도지역에 흩어진다. 그때 방동규는 마치 용이 구름 속에 형체를 숨기듯 봉림동에 행적을 감추고 무명의 시골선비로 되었던 것이다.   봉림동은 모아산帽兒山 서북쪽의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모아산은 해발 517미터로 연길과 용정의 계선으로 되는 산이다. 산등성이에 둥그렇게 솟은 모습은 그야말로 농부의 밀짚모자草帽子를 방불케 한다. 모아산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방채봉 노인이 봉림동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모아산은 수림이 남벌되고 있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아예 민둥산으로 사람들의 집단기억에 흉물을 만들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식목을 하면서 비로소 봉새가 깃들만한 ‘봉림鳳林’이 다시 일어선다.   예전에 이 모아산의 산꼭대기에는 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우물이 그토록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하니 정말 봉새처럼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인시절의 이운학이 처음 산에 올랐던 1962년에는 물의 기억이라곤 얼마 고여 있지 않았다.   그맘때 산기슭의 마을에 구전하는 우물 이야기는 단 한마디였다.   “옛날의 우물이라고 하던데요, 물맛이 기차게 좋았다고 합니다.”   일찍 모아산 비탈에서 돌보습 등 원시시대의 석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인간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산정에서는 또 고대 봉화대가 발견되기도 했다. 우물의 이런 옛 주인들은 세월의 장막 뒤로 몸을 감췄고 더는 우물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운학이 부소대장으로 있던 00사단은 모아산에 우물이 아닌 비밀갱도를 파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방책이었다. 그런데 갱도작업을 시작할 무렵 뜻하지 않던 풍파가 생겼다. 군부대가 주둔했던 용산龍山 마을의 노인들이 이를 극구 막아 나섰던 것. 속설에 따르면 모아산에 ‘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산속에 큰 늪이 있대요. 그게 터지면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거지요.”   용산은 광서 말년에 생긴 오랜 마을인데 북쪽 모아산의 산줄기가 마치 용과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지난 세기 40년대 일본군도 모아산에 갱도를 구축하려고 탐사를 진행했지만 결국 모아산에 물이 있다면서 갱도구축을 포기했다고 한다.   진짜 모아산에 용이 있다는 설은 현지에서 진실처럼 받아지고 있었다. 산기슭의 다른 마을도 저마다 용 룡龍자를 그 무슨 호신부처럼 달고 있었다. 용산 부근의 용암龍岩 역시 용산과 비슷한 이유로 생긴 이름이다. 용암이라는 동명의 지명은 또 봉림동의 동쪽에도 하나 나타난다. 모아산 동북쪽의 골짜기에 자리 잡은 동네는 아예 물 수水자까지 달아서 용수동龍水洞이라고 불렸다.   항간에서는 모아산을 동해의 용왕이 변해서 된 산이라고 전한다. 태고시절 깊은 바다에 잠겨있던 산이기 때문이란다. 또 풍수설에 따르면 모아산은 용의 왼쪽 뿔이며 서쪽의 마안산馬鞍山은 용의 오른쪽 뿔이다. 용은 물이 있어야 재롱을 부릴 수 있는 법, 물의 기운을 안고 있는 용이기 때문에 모아산에는 필시 큰물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천지신명에 감히 맞서는 해방군 군인들에게는 한낱 허망한 미신에 불과했다. 군부대의 조사팀은 모아산에 물은 있지만 갱도를 파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바위 틈새로 빗물이 새어 들어가서 고인 정도라는 것이었다.   “설마”가 화근이었다. 갱도의 폭파작업은 그대로 재화災禍를 부르는 종소리로 되였다. 굉음에 ‘용’이 놀랐는지 산체까지 요동을 쳤으며 뒤미처 돌사태가 동쪽 갱도를 덮쳤다. 작업 중이던 군인들은 전부 갱도에 갇혔다. 관처럼 작은 공간이어서 그들은 인차 질식사 일보 직전까지 갔다. 자칫 모아산 전체가 거대한 무덤으로 될 판이었다.   이때 신령스런 일이 아니라면 해석하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운학이 갱도작업을 검사하느라고 마침 사고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한발 빠르면 그 역시 갱도에 갇히고 한발 늦으면 갱도에 갇힌 군인들이 송장으로 되는 시점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항간에는 신물神物의 ‘용’이 물불을 가릴 줄 모르는 군인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는 얘기가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그들을 어렵사리 구출하고 잠시 숨을 돌리던 이운학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더란다. 그때까지 미처 북쪽의 갱도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도 돌사태가 일어났다면 갱도에 갇힌 사람은 벌써 주검으로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금세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이운학은 가파른 그 산비탈을 언제 어떻게 대어갔는지 모른다. 다행이 먼발치에서 벌써 갱도 입구에 모여 있는 군인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운학은 여기에는 별일이 없었구나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갱도 입구에서 그 무슨 괴성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흡사 용의 몸뚱이를 방불케 하는 굵은 물줄기가 흉흉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무렵 산기슭에서 밭일을 하던 봉림동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때 아닌 골물에 밭이 모래무지처럼 좔좔 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날씨에 무슨 날벼락이오?”   “이건 용왕님을 노엽힌 거로구먼.”   촌민들은 난데없는 골물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운학은 촌민들을 안심시킨 후 부하들과 함께 폭파로 물구멍을 막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수차의 사투 끝에 겨우 물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성깔을 부리던 ‘용’은 그때부터 다시 산속 어디론가 잠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운학은 군부대에서 퇴역한 후 용정 시내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지금도 모아산을 지날 때면 저도 몰래 걸음을 멈춘다고 한다. 그 때 그 일은 그에게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기실 모아산의 ‘갱도’에는 다른 일화도 있었다. 그때 군인들은 식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용산 마을에 토끼를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토끼가 마을에 군인들처럼 ‘갱도’를 줄레줄레 파놓을 줄이야! 모아산에 나무우리로‘집단부락’을 만들고 토끼를 강제로 이주시켰더니 이번엔 죄다 수풀로 뿔뿔이 도망했다고 한다.   그처럼 짐승들의 별천지가 아닐지 한다. 훗날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가 모아산을 찾아왔다. 등산로 입구의 호랑이 석상은 워낙 산기슭의 기차역 앞에 있었다. 예전에 시민들은 호랑이가 시내에 내려와 있는 게 불길하다고 하면서 석상에 늘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세간의 그런 불안 때문인지 정부는 나중에 호랑이를 산신처럼 모아산에 갖다 모셨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용이든 호랑이든 이곳이야말로 하늘 아래에 있는 그들의 진정한 둥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모아산은 기둥을 박고 전망대를 만들며 철심을 박고 기상대를 세우는 등 인간의 ‘둥지’로 둔갑하고 있다. 산에 봉림鳳林은 다시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용’이 그냥 둥지에 숨어있을까…
6    양천 허 씨의 마을 조양천 댓글:  조회:2814  추천:4  2013-02-18
                                 조양천朝陽川 하면 이름자에 들어있는 내 천川자 때문에 강이나 시냇물을 눈앞에 떠올리기 십상이다. 마침 부르하통하가 조양천의 바로 뒤쪽을 유유히 흘러 지나고 있다. 부르하통하는 만주족 말로 버드나무의 강이라는  의미인데 옛날에는 또 별이 뜨는 물이라는 의미의 성현수星顯水라고 불렸다.     뭐라고 하든지 조양천은 꽃대에 앉은 매미처럼 강에 꼭 붙어있는 형국이다. 그렇다고 조양천이라는 이름의 시원이 이 부르하통하로 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지명지地名志는 조양천은 다름 아닌 조양하朝陽河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름자가 붕어빵처럼 똑 같아서 조양천의 이름을 의례히 조양하에서 생긴 줄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조양하는 북부의 하르바령哈爾巴嶺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하르바령은 안도현과 돈화시의 경계가 되는 산인데 만주족 말로 견갑골뱮이라는 의미이다. 조양하는 강물이 양지바른 남쪽을 향해 흐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또 아홉 골짜기의 물이 모여서 흐른다고 해서 일명 구수하九水河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은 장장 160리를 달린 후 조양천의 동쪽에서 부르하통하에 흘러든다.     어쨌거나 조양하가 일부러 부르하통하를 첨벙첨벙 건너와서 마을에 자기의 이름을 선사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고 있다. 정말이지 누군가 미리 결론을 만든 후 억지로 꿰맞추기를 한 게 아닐지 한다. 오히려 이마를 딱 맞대고 있는 부르하통하가 조양천의 이름을 만들었다고 하면 모를까…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부르하통하를 이웃한 조양천에는 20세기 초까지 버드나무와 갈대가 숲처럼 무성했고 또 조개가 모래알처럼 널려 있어서 진주영珍珠營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조양천의 이 최초의 이름은 1910년 무렵 또 시냇물의 바다라는 의미의 천수해川水海라고 개명되었다. 산지사방에 널린 강과 작은 호수, 물웅덩이가 흡사 작은 바다를 방불케 했던 모양이다. 이때 이 고장은 일마평천日馬平川 즉 말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야였고 또 부르하통하 남쪽의 양지쪽에 있었다.     이에 따라 항간에는 조양천을 이름자 그대로 뜻풀이하는 설이 떠돌고 있다.     "강의 남쪽 양지쪽의 평야라는 의미이지요. 조양천이라는 이름자에 들어간 글자들을 하나씩 뜯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정말로 소경이 막대기를 헛짚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것 같다.  아닐세라, 연길 모 여행사 사장으로 있는 허응복은 그게 아니라는 말을 연거푸 곱씹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나온 양천陽川 허許 씨의 마을이라고 해서 조양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역시 조양천이라는 이름자를 그대로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갖춰진 그의 이 이야기에는 선뜻이 반론을 내놓기 어려웠다.     양천 허 씨의 시조는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비金首露王妃의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이라고 전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뱮에 의하면 허선문은 공암촌孔巖村에서 살았다. 공암은 통일신라 때 지은 지명으로 훗날 양천현陽川縣, 양천군陽川郡 등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된 고장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해 주었던 개국공신 허선문에게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며 그때부터 허선문은 본관을 양천陽川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 후 양천 허 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 정승 16인 등 명인을 허다하게 배출하며 현재로선 한국에만 20여만의 인구를 가진 유서 깊은 명문벌족으로 되고 있다.     14세기 말, 고려 충정왕忠定王의 부마이며 양천 허 씨의 15대손인 허징許徵은 정치사건에 휘말려들어 함경도 길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하여 북쪽지방에 자리를 잡은 허 씨는 양천 허 씨의 일파인 용진공파龍津公派를 형성한다. 양천 허 씨의 이 후손들이 훗날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동북 3성에는 양천 허 씨가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다.     한때 연변의 양천 허 씨들은 종친회를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럴지라도 허촌이 바로 양천 허 씨의 마을이라는 의미이며 조양천이 바로 이 허촌에 내원을 두고 있다는 건 잘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허촌은 마치 담장 기슭에 피어난 나팔꽃처럼 조양천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에 가려있었기 때문이다.     허응복 역시 얼마 전에야 비로소 조양천 모교의 스승 지동운에게 우연하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가 받은 감수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직업관계로 연변의 역사를 꽤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다 그가 바로 양천 허 씨였고 또 다른 곳도 아닌 조양천 태생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등잔_ 밑이 어둡다.”는_ 속담의 의미를 실감케 했던 것.     솔직히 그동안 비밀처럼 꽁꽁 감춰 있었던 양천 허 씨의 100년 신비를 하루바삐 벗기고 싶었다. 그래서 허응복은 조양천으로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을 하게 되었다. 지동운은 기실 오래전에 동료 허영학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그에게 알려줬다. 그맘때 지동운은 수학을 가르쳤지만 민족사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는_ 날이 장날이라더니_ 때 마침 허영학은 지동운과 함께 조양천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여태껏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비사秘史는 그렇게 빗장을 열게 되었다.     1989년, 조양천 중학교에서 지리교원으로 있었던 허영학은 학생들에게 향토애를 심어주고자 조양천의 지명유래를 조사했다고 한다.     지명지地名志는 광서(光緖, 1875~1908) 초반 허 씨 성의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허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 정부의 관련부서에서 지명조사를 할 때 허촌에는 56가구 22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으며 전부 조선족이었다. 그 무렵 조양천에 살고 있던 사람들치고 허촌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허영학이 조사 작업을 할 시기 허촌에는 이미 허 씨 성을 가진 노인이 단 한명도 없었다. 이때 강북 마을의 웬 노인이 조양천의 이왕지사를 잘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정작 허촌의 이야기는 부르하통하에서 고대하던 수석水石처럼 줍게 되었다. 그때는 조양천 부근의 부르하통하에는 지금처럼 다리가 없어서 배로 강 양쪽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뱃사공이 마침 허 씨 성의 조선족이었으며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고  말하는 걸까…     “뱃사공의_ 말에 의하면 양천 허 씨가 무산과 회령 쪽에서 건너와서 이곳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양천 허 씨는 그 후에도 조양천에 부근에 와서 이삿짐을 풀었다. 20세기 초, 함경북도 길주의 양천 허 씨 허웅범 삼형제가 다른 성씨의 사람들과 함께 하룡촌河龍村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던 것. 하룡촌은 조양천 동쪽으로 약 15㎞ 상거,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만나는 합수목에 위치한다. 하룡이라는 지명은 마을 부근의 해란강에 수룡水龍이 있다고 소문나서 생긴 이름이다.     각설하고, 1923년 천보산天寶山 부근의 노두구老頭溝부터 두만강 기슭의 개산툰開山屯까지 이르는 천도天圖 철도가 개통되었다. 조양천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나타나는 기차와 함께 이때부터 관방문헌에 버젓하게 등장한다.      “ 허_ 씨 마을이 코앞에 앉아있는데 하필이면 다른 이름을 가져올 리 있었겠어요?”     그러고 보니 이 고장 기차역은 바로 허촌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뱃사공과 가진 대화는 마침내 허영학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의문을 푸른 강물에 말끔히 씻겨 보냈다.     알고 보면 조양천은 허촌과 원체 처음부터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룡 마을이 부근 강의 신물神物을 갖다가 작명했듯 조양천 역시 부근 허촌의 양천 허 씨의 성씨를 갖다가 작명했다는 것이다. 허촌은 이 고장의 제일 이른 촌락이요, 양천 허 씨는 또 이 고장의 첫 주민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옛날 두만강을 건너왔던 양천 허 씨는 허영학이 뱃사공을 만날 때 벌써 아득히 먼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마을에 깃들었던 많은 사연들 역시 한 떨기의 낙엽처럼 배전을 스쳐지나 흐르는 물에 실려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혹여나”하고  허응복은 옛 스승들을 모시고 다시 옛 허촌 마을 자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는 금세 물먹은 담처럼 허물어졌다. 허촌은 도도한 물결처럼 거침없이 밀려오는 도시의 음영에 묻혀 더는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허응복은 허탈감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아직 옛 초가가 한 채 있어서 기척을 했더니 웬 중국인 노인이 나오시는 거예요.”       허촌은 어느덧 진짜배기 중국인 마을로 변신하고 있었다. 허촌은 오래전에 벌써 다른 곳으로 자리를 잡고 철거되었다고 한다. 현지에는 허촌이 바로 그제 날의 조양촌 1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인제 양천 허 씨 마을의 옛 흔적은 다만 조양천이라는 지명에 밤하늘의 별처럼 어렴풋이 비껴 있을 뿐이었다.*
5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댓글:  조회:4051  추천:4  2012-03-26
   지명을 따라 찾은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       북경에는 황제가 살았다고 하는 자금성紫禁城 못지않게 엄청난 호기심을 끄는 게 있다. 바로 북경 근처에 나타나고 있는 ‘고려’ 라는 이름의 지명들이다. 북경의 동쪽 근교에 고려마을이라는 의미의 ‘고려장高麗庄’이 있으며 북쪽 근교에 고려군대의 주둔지라는 의미의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명 ‘고려장’과 ‘고려영’에서 등장하는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이었다. 고구려가 어찌하여 이역의 수도까지 와서 마을을 짓고 군영을 설치하였을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시작한 답사는 나중에 장장 10년의 긴 여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 이름의 지명이 한두 개에 그친 게 아니라 마치 넝쿨에 매달린 열매처럼 연달아 떠올랐던 것이다. ‘고려포高麗浦’, ‘고려동高麗洞’, ‘고려정高麗井’… ‘고려’의 이름은 지어 대륙의 한복판에도 박혀 있었다. 양자강揚子江 일대의 옛 수도 남경南京에 ‘고려산高驪山’이 있었고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으로 유명한 서안西安에 ‘고려거高麗渠’라는 마을이 있었다.     시초에는 산해관 남쪽에서 나타나는 이런 지명을 모두 당나라 때 이주, 유배되었던 고구려 유민과 포로들의 흔적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고려’ 이름의 지명 전부를 그렇게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의 예로 ‘고려성高麗城’을 당나라에 끌려온 고구려 유민이나 포로들의 거주지라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려성’을 ‘고려인 수용소’로 우기는 이런 황당한 주장은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성城’, 다시 말하면 성城의 영향력 범위를 그 나라의 영토로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지명은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의 반영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은 단순한 전설이나 민간설화가 아니라 그 고장의 진실한 역사를 투영投影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은 지명으로 인하여 문헌보다 더 오랫동안 또는 뚜렷하게 남게 된다.     산해관 남쪽에 잔존한 ‘고려’ 이름의 지명은 백의겨레의 고대사에 얽힌 많은 비밀을 풀어나갈 수 있는 키워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고려’ 이름이 들어 있지 않는 다른 지명도 간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적지 않은 지명이 고구려와 직, 간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료史料가 몹시 결여된 상황에서 이런 지명의 역할은 극명하게 두드러지고 있었다.     옛 지명을 추적하는 현장에는 고구려인은 물론 고구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전대前代의 상商나라 유민과 후대後代의 발해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구려의 적석총이 있었다고 하는 ‘고려성’이 있었으며 기자箕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 ‘조선성朝鮮城’이 있었고 말갈靺鞨인들이 와서 이뤘다고 하는 마을 ‘발해진渤海鎭’이 있었다. 또 고구려와 같은 시대의 신라인들이 살고 있던 신라채新羅寨가 있었다.     한편 고구려와 아무런 연줄이 없는 것 같은 지명도 적지 않았다. 하북성河北省 동부의 신나채新挪寨는 새로 옮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실은 당나라 정관貞觀연간(627~649년) 지금의 노룡현盧龍縣 진관향陳官鄕 지역에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이 한데 모여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또 하채下寨 마을은 군영을 세운다는 의미로,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의 군대가 요동으로 고구려를 치러 갈 때 동쪽의 토이산兎耳山을 공략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 지명에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당시의 영토는 고정불변한 게 아니었다. 진한秦漢 이래 황하黃河 이북 특히 하북성 지역은 삼국三國, 동진東晉과 서진西晉, 5호16국五胡十六國, 남북南北朝 등 여러 시기에 걸쳐 퍼즐처럼 사분오열 되었다. 중원은 쩍하면 군웅이 각축하는 혼란한 국면에 빠졌고 또 북방민족의 정권과 밀고 당기는 쟁투를 빈번하게 벌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귀속은 춘삼월의 날씨처럼 변화무상하였으며 서로의 경계가 톱날처럼 들쭉날쭉하였다. 고구려 역시 여러 시대나 사회에 따라 강역이 동서로 넓어지기도 했고 또 남북으로 좁아지기도 했다. 와중에 산해관 남쪽에 나타나는 유수의 ‘고려성’은 고구려가 분명히 어느 한시기 하북성의 많은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물로 된다.     18세기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던 박지원朴趾源의 여행기록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잠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하는 지금의 하북성 동부의 승덕承德을 말한다. 이 여행기록에 따르면 열하에 있는 태학 대성문大城門 밖의 동쪽 담에 건륭乾隆 43년(1778년) 황제가 내린 글을 새겨서 액자처럼 박아두었다고 한다. 거기에 이르기를, “열하지방은 고북구古北口 장성의 북쪽이며…… 진한秦漢 이래로 이곳은 중국의 판도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魏나라 때 안주安州와 영주營州 두 고을을 세웠으며 당唐나라 때는 영주 도독부를 두었으나 먼 지방에 옛 명칭을 그대로 따서 지방 장관을 둔 것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하북성 동부지역에는 오랜 기간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정권이 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답사를 통해 새롭게 만난 고구려성은 대부분 연산燕山 기슭에 위치, 중원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하북성 동부의 요로에 포진되어 있었다. 이런 성곽들은 고구려의 전방방어체계를 이루는 전연지대의 군사 시설물로,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을 감시하고 그들의 침입을 맨 먼저 감지하는 ‘촉각觸角’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답사 도중에 고조선의 강이라고 하는 ‘조선하朝鮮河’에 발목을 적실 수 있었고 또 고구려 경계의 비석이나 다름없는 ‘지경바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구려의 성곽은 지어 유주幽州(지금의 북경) 일대를 지나 하북성의 중남부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실제 고구려는 산해관 남쪽 고조선의 옛 땅에 한때 고토수복의 ‘다물多勿’ 깃발을 꽂았으며 훗날에는 또 그들의 유민과 후손들이 이 고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꿨던 것이다.     필경 고구려의 강역은 많은 부분이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설을 두고 학계는 지금도 시야비야 논쟁의 열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무작정 탓할 수만도 없다. 문헌으로만 증명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고 또 산해관 남쪽의 고구려 유적은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는 게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유적의 대부분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소실되었거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이마저 상당 부분의 기록은 근래에 출판된 지명지地名志나 현지縣志 등 지방문헌에서 자의든 타의든 적지 않게 누락되고 있다. 촌락과 성곽, 사찰, 섬, 우물, 나무 등에 담겨있는 옛 이야기는 그렇게 무심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록이 없고 증거물이 없는 역사는 제 아무리 고집한들 더는 진실이 아니라 허구의 전설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책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글누림」 2012.03 출판)를 쓰면서 고구려의 전모全貌를 밝히는데 벽돌 한 장이라도 놓는다는 마음으로 심혈을 넣었지만, 그래도 본의 아니게 빠뜨린 지명이나 유적이 다소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저쪽에 소외되어있는 한 단락의 역사를 재량껏 문자와 사진으로 충실하게 기록하고자 한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싶다.      2012년 봄  북경에서
4    산해관에 나타난 조선역관 댓글:  조회:6839  추천:2  2011-12-05
     산해관은 만리장성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다.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쌓았다고 전하지만 산해관은 진秦나라가 아닌 명明나라 홍무洪武14년(1381년)에 설립된 관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시발점인 산해관은 중원 일대에서 만주 지역으로 통하는 요로에 위치, 당시 중국에서 첫손 꼽히는 관문 도시였다.   근대 이전 조선의 사절은 해마다 두 번 이상, 한 해에도1천명 이상 이 길을 따라 베이징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간 조선사람 치고 산해관을 모른다는 건 진짜 불가사의라는 얘기가 된다. 지금도 산해관을 찾는 한국인들은 적지 않다. 거개 관광차로 오는 사람들이다. 부근의 유명한 피서지인 북대하北戴河에 놀러 왔다가 산해관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산해관의 경관은 옛 성벽에 둘린 불과2㎢ 크기의 작은 성읍이 주체를 이룬다. 이 성읍에서 장성의 첫 관문인 ‘천하 제1관’을 빼놓으면 산해관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정도이다. 그래서 모두 관문 앞에서 사진 한 두 컷 박으면 그걸로 끝내고 ‘줄행랑’을 놓기 일쑤이다.   이 때문인지 산해관에 ‘조선역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다. 진황도시 관광관리위원회 주임으로 있는 이걸李杰 씨는 산해관 태생이며 또 백의겨레의 핏줄을 이어받은 조선족이다. 이걸 씨 역시 산해관의 조선역관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까? 산해관 어디에 그런 명소가 있어요?”   ‘혹여나’ 하는 생각에 산해관 장성박물관을 찾았다. ‘천하제1관’의 부근에 위치한 산해관 장성박물관은 약800정보의 부지에7개의 전시실을 갖고 있었다. 작은 시내에 비해 어마어마한 덩치에 무척 놀랐다. 박물관은 산해관의 지리, 형성, 변혁 등 내용을 자세히 전시하고 있었다.   장성박물관에는 조선사절과 관련한 그림2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국 명지대학에서10년 전에 기증한 모조품으로, 조선사절단의 수행 화백이 그렸다는 ‘산해관 내외도’ 그리고 조선사절단의 그림 모조품이 전부였다. 조선역관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역관의 위치 등 자료를 기대했던 마음은 금세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설달례薛達禮 씨가 조선역관의 위치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설 씨는 본래 산해관 고성보호개발지휘부에서 근무했는데, 직업관계로 산해관의 지리와 역사에 아주 밝았다. 그는 조선역관은 명나라도 아닌 청나라 때의 역관으로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고 하면서 옛 성읍의 서쪽문인 영은문迎恩門의 동북쪽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설달례라는 이 이름은 미상불 옛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당나라 군대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설례薛禮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설례의 후예가 고구려 정벌이 아닌 답사의 안내자로 나서는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스개 삼아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설 씨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앙천대소를 한다.   “그런 말을 자주 들어요. 정말 설례와 천년 전에는 한 집안이었을지 모르지요.”   유적지 부근에 이르자 허물어지는 집 대문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한 장의 서글픈 풍속도를 그리고 있었다. 조선역관의 장소를 묻는 말에 할머니는 엉뚱하게 저만치 다른 곳을 가리킨다. 한순간 조선역관은 자료는커녕 장소마저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근심되었다.    “여기가 틀림없는데… 착각하시나 봅니다.” 설 씨가 변명삼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잡초더미를 헤집고 허물어진 집 근처로 다가갔다. 한두 채는 그런대로 벽체가 멀쩡했지만 이상하게도 추녀 끝 부분의 벽돌이 한두 장씩 이발 빠진 모양으로 비어 있었다. 문양이 독특하니까 틀림없이 누군가 훔쳐간 거라는 설 씨의 해석이다. 이곳저곳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문양이 새겨진 벽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집 하나를 찾았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을 뜻한다고 하는 태극太極 문양이었다. 그러나 집의 외양이나 내부구조에서는 더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현지인들이 살면서 진작 허물고 뜯어 고쳤지요…” 설 씨의 말이었다.   이런 집들은 독특한 문양을 제외하면 중국 북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민가와 조금도 다른 데 없었다. 문양으로나마 옛집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현재 정확한 위치마저 확인할 수 없는 러시아역관이나 여진족역관에 비하면 진짜 대박 같은 행운이었다.   현지 정부는 성읍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고2003년부터 고성 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민폐로 총25억 위안이 투자된 이 막대한 프로젝트는 하북성의 제1호 문화공정 프로젝트였다. 고성은2008년부터 대외에 개방하면서 명소가 더는 관문 하나뿐이 아닌 일곱 곳으로 늘어났으며 티켓 한 장 가격이 무려100위안이나 되었다. 북경 자금성의 티켓 가격이60위안인데 비하면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가격이다.   그럴지라도 산해관의 명소 명단에는 여전히 ‘조선역관’의 이름이 적히지 않고 있었다. 사실 고성의 복원작업에는 ‘고려역관’ 프로젝트가 들어있었다. ‘고려역관’은 현지의 관습에 따른 ‘조선역관’의 별칭이다. 조선역관의 본래의 면적은0.7정보로 추정되며 복원하고자 했던 역관은 부지가 약1.5정보에 달한다. 현지정부는 이곳을 옛 역관, 요식, 쇼핑 등을 아우르는 관광명소로 개발하려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려역관’은 여전히 폐가 그대로 남았고, 바로 조선역관의 맞은쪽에 복원된 ‘대비원大悲院’의 웅장한 체구에 눌려 더구나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솔직히 조선역관은 현재의 복원하지 않는 폐가 상태로 두는 게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미흡한 자료로는 복원된 조선역관이 자칫 ‘뱀에게 발 그리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부질없는 게 아니다. 훗날 복원한 성벽 위에 쓰인 ‘산해관’ 중문 글자의 아래에는 엉뚱하게 영문 자모로 만든 표음 문자가 적혀 있다. 영문 자모로 만든 표음문자는 중문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지난 세기50년대 비로소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의 부호가 엉뚱하게 시간을 거슬러 수백 년 전의 시대에 등장했던 것이다. 성내의 건물들도 새롭다는 이미지만 풍길 뿐 붕어빵처럼 똑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사상 역참은 하루의 도보거리인30㎞를 상거하고 하나씩 설립되어 있었다. 사절의 ‘공관’인 외국의 역관은 이와 약간 다른 듯하다. 세간에 알려진 외국의 역관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 말이다. 조선역관의 경우에도 산해관과 베이징의 사이에는 풍윤豊潤 고려포高麗鋪 하나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려포는 베이징과 산해관의 가운데 위치, 이 두 도시와 각기 약150㎞ 상거한다.   조선 사절들은 산해관에 많은 필묵을 남겼다. 요충지로서의 산해관은 물론이요, 산해관의 웅장한 위용에 감탄했던 것이다. 산해관은 여행기록 〈열하일기〉에서도 중요한 곳으로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지나며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크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18세기의 조선 북학파인 담헌 홍대용은 박지원의〈열하일기〉와 함께 여행문학의 거작으로 꼽히는 여행기 〈을병연행록〉에 이렇게 읊고 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벌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에 밀치도다   망해정望海亭 제 일층에 취후醉后에 높이 앉아   갈석碣石을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秦始皇의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라한 행색이 뉘 탓이라 하리오.     그때 조선사절들은 ‘산해관’ 관문을 지나면 곧바로 기자조선의 옛 강역을 밟게 되며 또 고구려의 서쪽경계에 다가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옛날 조선 사절이 오갔던 산해관에는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한 핏줄의 겨레가 살고 있는 걸로 널리 알려졌다. 지방문헌에는 일찍 수백 년 전의 요․금시기에여진족과 고려인이 살고 있었으며 지난 세기 초반에도 조선족이 정착하고 있는 걸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도 산해관에는10여 가구의 조선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진황도의 기타 소속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더구나 많다. 지금 진황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1천 가구를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외 또 이삼백 명의 한국인이 상주하여 있으며 성수기이면 한국 여행객들이 물밀듯 밀려든다. 진황도와 인천 사이에는 객화물선이 주당2회 왕복한다.   설 씨에 따르면 진황도를 드나드는 따이공帶工만 해도 백 명을 넘는다고 한다. 따이공은 일명 소상인이라고 하는데 국제선에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화물을 들어준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재미있는 건 다른 국제선에는 없고 오직 한국과 중국을 왕래하는 객화물선에 있다는 것이다. 부두에 가서 따이공이라는 명사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지만 정작 국어사전에는 따이공이라는 명사를 찾아 볼 수 없다.   옛날 산해관 서쪽에 터전을 잡고 있었던 기자조선의 사람들과 그 고토 위에 성을 쌓고 살았던 고구려사람들은 훗날 조선의 사절들이 이 천하제일의 관문을 드나들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 이처럼 봇물을 이뤄 산해관의 관문을 메우리라고 상상인들 해보았으랴.   진짜 놀라운 일은 저녁에 현지 식당에서 벌어졌다. 설 씨가 주식으로 숴이판水飯, 물밥을 불렀던 것이다. 처음 듣는 낱말에 어정쩡해 있는데 물에 쌀밥을 말아놓은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다. 옛날 고향에서 숭늉에 밥을 말아먹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히 되살아났다.   “우리 산해관의 별미이지요. 입맛에 괜찮겠어요?”   어정쩡해 있는 우리에게 날아온 질문에 대뜸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고향을 천리 넘어 등진 타향의 산해관에서 물에 말아놓은 밥을 먹다니? 옛날 장성 위에 떠올랐던 조선역관과 장성을 넘나들던 조선사절의 모습이 금세 눈앞에 아련하게 밟혀왔다. * 
3    [관내유적]십만 무사의 원혼이 서린 법원사(法源寺) 댓글:  조회:3937  추천:37  2011-02-01
  북경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법원사(法源寺)가 별안간 물망에 떠오른 건 불과 10년전의 일이다. 대만 작가 리오(李敖)의 북경 법원사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되면서 여론이 흡사 도가니처럼 끓어올랐던 것. 책 북경  법원사는 금세 낙양의 종이처럼 귀한 몸이 되었으며 지어 법원사는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은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법원사 앞을 지난 거리에는 길손이 드물었다. 홀연히 길가에 나타나는 운동장 크기의 빈터 그리고 거기에 웅기중기 모여앉아 땡볕을 즐기는 동네노인들이 사뭇 이색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의 뒤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불호(佛號)를 일필휘지로 날린 가림 벽이 마치 무대배경처럼 등장한다. 도심에 묻혀있는 고찰은 그렇게 불문(佛門)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선(禪)의 오묘한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찰이지만 입장권을 파는 건 여느 관광지와 다름없었다. 법원사에 어떤 볼거리가 있는가  하고 지폐장과 함께 물음을 창구에 넣자 곧바로 날아오는 대답이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그거야들어가 보면 알거 아뇨?"   대개 사찰에서 첫손에 꼽히는 건물은 대웅보전이다. 법원사의 대웅보전에는 청나라 건륭(乾隆)황제가 하사한 친필 글의 편액 법해진원(法海眞源)이 걸려있다. 당초 옹정(雍正) 11년(1733년) 하사한 사찰 이름인 법원사의 함의를 설명하는 편액이다. 카메라를 드는데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의공(義工) 아줌마가 이를 저지한다. 사찰 전내의 촬영은 일절 금지라는 것이다. 답사를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고 겨우 한 컷 찍을 수 있었다.   그러든 말든 법원사 제일의 명물은 이 대웅보전 보다 절 한가운데의 전각인 민충대(憫忠臺)가 아닌가 한다. 지금은 관음전으로 개명한 이 전각은 사찰을 세우기 전 최초로 제사를 지낸 곳이었기 때문이다.   원일통지(元一統志)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정관(貞觀) 19년(645년) 고구려의 전쟁에서 숨진 장사(將士)들을 추모하기 위해 어령(御令)을 내려 이곳에 사찰을 세우게 했다. 민충대가 바로 그가 이때 제사를 지낸 자리라고 한다. 민충대는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당나라 때에는 7칸 3층으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이세민이 이 사찰을 세우려 한데는 항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숨어있다.   정관 19년 봄, 이세민은 삼군을 인솔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여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출정 전에 지금의 북경인 유주(幽州)에 군대와 군량을 집결한다. 전쟁이 발발한 후 반년이 지난 가을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에 패배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유주를 지난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이세민은 이때 유주에서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푼다. 마침내 이곳에서 퇴각을 멈추고 전패로 흐트러진 군심을 수습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세민은 배를 타고 오늘의 제2순환도로 북쪽 호성하(護城河)인 패하(壩河)를 오르내리면서 원정에서 실패한 울적한 심정을 달랜다. 이때 문득 강기슭에 전원풍경의 마을 하나가 그림처럼 나타났다는 것이다. 푸른 나무 잎사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초가, 미풍에 실려 오는 향긋한 벼 향기 그리고 수면에 무시로 춤추듯 뛰어오르는 물고기는 말 그대로 이색적인 남방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저도 몰래 배를 멈추고 강기슭에 오른다. 북방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마을풍경이 있다니?  그는 신하를 불러 마침 부근을 지나는 백발 노옹에게 고장 이름을 묻게 했다. 노옹은 그들이 황제 일행인줄 알고 제꺽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기지(奇智)를 드러낸다. 그는 황제의 수심어린 용안이 활짝 피어나도록 용왕님이 행차한 마을이라는 뜻의 용도촌(龍到村)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 용도촌은 훗날 이를 도(到)를 같은 중국어 발음의 길 도(道)로 바꿔 용도촌(龍道村)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강기슭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은 이세민에게 더구나 요동 땅에 버리고 온 전몰자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세민은 유주에 불쌍하게 여길 민(憫)자를 넣은 충렬사를 세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중원의 장사(將士)들을 기리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충렬사가 바로 민충사이며 바로 지금의 법원사이다. 법원사는 이로써 북경 성내에서 역사가 제일 오랜 사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작 유주에 사찰이 세워진 건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696년이었다. 이세민의 며느리인 측천무후는 집권한 후 시아버지의 못 다 푼 비원을 풀기 위해 이 사찰을 세우도록 했던 것이다. 그때 어명으로 지은 이름이 민충사인 것이다. 민충사와 유사한 이런 사찰은 이세민의 동쪽진군 연선에 여러 개 되는 걸로 알려진다. 고구려전쟁에서 당나라 군대는 손실이 막대했던 것이다.   어찌하든 민충사는 당나라 유주성의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민충사는 절도사 안록산(安綠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시기 순천사(順天寺)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유주는 안록산과 사사명이 절도사로 임직하고 있을 당시 그들의 본거지였다. 안록산과 사사명은 민충사의 동남쪽과 서남쪽에 각기 보탑을 세우는 등 민충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이어진 민충사의 기연(奇緣)은 이때까지 끊어지지 않은 듯하다. 훗날 안록산의 반란군은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다가 요충지인 동관(潼關)에서 토적(討賊) 부원수 고선지의 부대에 저격당하는데, 고선지는 바로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당나라의 유명한 장령이었던 것이다. 바로 동관의 전투가 있은 후 고선지는 무단으로 작전지역을 변경했다고 그를 황제에게 무고(誣告)한 환관의 모함을 받아 처참하게 참수된다. 사찰에 막연하게 잇닿아있던 고구려의 연줄은 이로써 끝내 비운의 막을 내렸다. 사찰 앞에 있던 두 보탑도 그로부터 수백년 후 드디어 유주 대지진 때문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 후 민충사는 요나라 때는 대민충사(大憫忠寺)라고 개명하며 명나라 때는 숭복사(崇福寺)라고 불리다가 청나라 때 법원사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쭉 불려왔던 것이다.   전각 앞에서 핸드폰으로 어딘가 통화하고 있는 젊은 스님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사찰에서 불교공부에 정진하고 있는 스님이었다. 사찰에는 일찍 1965년 중국불학원이 설립되어 많은 젊은 승려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스님과 사찰 얘기를 나누고 싶어 법원사에서 어느 게 제일 유명한지 알려 주세요 하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역시 우문현답인가, 젊은 스님의 단마디 대답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물음들을 몽땅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버리게 한다.   "모두 당나라 때 만들어진 거죠. 죄다 유명해요."   보아하니 젊은 스님은 부처님만 유일한 관심사인 듯 했으며 정작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연원이나 변혁 같은 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속세의 인간에게 실상이 아닌 잡다한 허상에 욕념을 갖지 말라고 선(禪)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법원사에 있던 많은 보물은 세월의 풍운변화 속에서 전쟁과 인위적인 파괴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최초의 당나라와 요나라 시기의 건축물은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현존하는 사찰 규모도 썩 훗날인 명나라 때 비로소 형성된 것이며, 당나라나 요나라 때에 비해 훨씬 줄어든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는 아직도 여러 조대의 불상과 비석, 법기가 적지 않다. 부동한 풍격의 이런 유물은 시공간을 타고 넘어 당시의 정경을 희미하게나마 더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 내의 보전마다 향불의 연기가 그물그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상 앞의 누런 방석에 꿇어앉아 절을 올리는 신도들이 연기 속으로 마치 실루엣처럼 보인다. 천년전 전몰자의 원혼을 위해 제를 올리던 당나라 황제도 저 연기 속에 현신하여 그때의 정경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법원사는 천여 년 동안 여러 조대를 걸치면서 굵직한 사연들을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었다. 북송의 황제 흠종(欽宗)은 포로로 잡혀 북방으로 끌려갈 때 바로 이 사찰에 한동안 연금되어 있었다. 금나라 대정(大定) 13년(1173년), 사찰은 책문(策問)하는 여진족 진사(進士)들의 시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산해관을 수비하며 청군(淸軍)과 싸웠던 명나라의 유명한 장령 원숭환(袁崇煥)의 시신은 이곳에 운구 되었으며 사찰의 스님이 그를 위해 법사를 치렀다고 한다.   사찰을 감도는 독경소리가 누군가의 애잔한 흐느낌처럼 허공에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쩐지 산해관 너머 원혼으로 사라진 전몰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아 침울한 심정이다. 그래서 여느 신도처럼 불상 앞에 향불을 피우고 한동안 그린 듯 처연히 서있었다.*
2    낙양성 십리 허에 댓글:  조회:4952  추천:46  2010-08-21
 “낙양에는 문물이 많아요. 자갈처럼 지천에 널린 게 문물입니다요.”   택시기사 소(邵)씨는 침이 마를세라 고향자랑을 한다. 그의 중고택시도 어느 왕조 때의  고물인지 시도 때도 없이 찌걱거렸다.   중국 중부의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시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도(古都)이다. 서기 770년, 주(周)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후 선후로 13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유명한 삼국지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한겨울의 낙양은 자욱한 운무에 잠겨 있었다. 서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고분박물관은 엷은 베일에 가린 듯 했다. 고대 의상을 입은 12지의 동물이 마치 고분속의 망령을 옹위하는 듯 박물관 앞에 두 줄로 시립하고 있었다. 고분박물관은 부지면적이 약 3만㎡로, 서한 시기부터 북송 시기에 이르는 20여기의 고분을 복원하고 있다.   박물관 북쪽의 2리쯤 되는 곳에는 뉘엿한 산등성이가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흐릿한 안개에 잠긴 산은 마치 꿈속인 듯 몽롱했다.   낙양 북쪽에 자리 잡은 이 산등성이가 바로 망산(邙山)이다. 망산은 낙양에서 시작되어 황하(黃河) 남쪽기슭을 따라 동쪽으로 무려 100여㎞를 뻗어나간다. 북망산은 낙양시 북쪽의 황하와 그 지류인 낙하(洛河)의 분수령을 이르는 말.   옛날 중국인들은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에서 살고, 북망산에 묻히는 것을 최고"로 삼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낙양의 제일가는 자랑거리는 죽은 사람의 무덤이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고분군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발 300m의 망산은 지리적 조건이 알맞아 고대 고관대작들의 이상적인 무덤으로 되었다. 여기에는 네 개 왕조 10여기의 황제능묘를 비롯하여 청나라 때까지 수십만 기의 무덤이 쓰였다. 그래서 북망산은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다.   옛날 타령처럼 들리던 할아버지의 한숨이 금세 귀가에 들려올 것 같다.   “후유, 벌써 북망산으로 갈 때가 되었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거개 ‘북망산’을 한반도의 어디쯤에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북망산을 잔등에 업고 있는 낙양은 한반도와 2천㎞나 떨어진 ‘천애지각’이다. 그렇다면 낙양은 도대체 배달민족과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1929년 낙양 북망산에서 한 백제인의 묘가 도굴되었다. 도굴꾼에 의해 팽개친 묘지석은 무덤주인이 흑치상지와 아들 흑치준임을 밝혀주었다. 백제 부흥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중심으로 2백여개 성을 탈환했던 일대 명장 흑치상지는 뜻밖에도 이역만리 타향에서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부흥운동 실패 이후 당나라에 투항, 그 후 당나라의 무관으로 맹활약을 한다. 이때 그는 토번, 돌궐 등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를 잇는 등 당나라에서 30여년동안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다. 나중에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군부서열 12위권에 드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간신의 무함을 받아 죽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장남 흑치준의 덕분에 나중에 측천무후(則天武後)로부터 좌옥금위대장군(左玉錦衛大將軍)으로 추증 받아 명예를 회복, 왕족과 귀족들만 묻히는 북망산으로 유해가 이장된다.   북망산에는 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고구려 멸망 직전 막리지(莫離支)를 지낸 천남생(泉男生·634~679)과 그의 동생 천남산(泉男産·639~701), 천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650~692),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708~729)의 무덤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이 발행하는 고고·역사학 계간지 ‘동북사지(東北史地)’에서 밝혀졌다. ‘동북사지’는 “2005년 4~6월 조사·발굴을 벌인 결과, 이들의 무덤을 낙양시에서 찾았다”고 발표했다. 위나라 효명제 왕릉의 북쪽에 위치한 이런 무덤은 원형으로, 크기는 직경 16m, 높이 6m 정도이며, 고구려 기와와 당삼채(唐三彩) 등이 출토됐다고 전한다. 북망산은 또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扶余隆),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제와 고구려 고위층의 무덤이 북망산에 알려진 것만 해도 이처럼 여럿 되니, 그들을 따라 당나라에 유배되고 또 이 북망산에 묻힌 유민들의 무덤은 또 얼마이랴.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십리 허 기슭의 북망산 어디인가에서 유민들의 망혼(亡魂)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서글픈 음조의 성주풀이가 천년의 시공간을 헤가르고 금세 한 올의 바람처럼 귓가를 스칠 듯하다. 음울한 구름장이 하늘나라의 설음처럼 북망산에 낮게 드리워 한결 슬픈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낙양의 동쪽 외곽에 고대 관방측이 세운 첫 불교사찰이 있다고 해서 내친 김에 그리로 차머리를 돌렸다. 사찰에는 참배자가 붐비고 향불이 자오록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찰은 상주하는 스님이 100여명에 달하며 부지면적이 10여 정보에 이르는 등 큰 규모였다.   한나라 명제(明帝)는 꿈에 흰 빛을 뿜는 금빛 신을 보고 사절을 서역에 파견하여 불법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사절들은 서역에서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와서 명제의 명을 받아 경성 낙양에 사찰을 세운다. 사람들은 불경을 싣고 온 백마의 공로를 기리어 그때부터 이 사찰의 이름을 ‘백마사’라고 부른다.   ‘백마사’, 참으로 연상의 끈을 잡게 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한국문헌에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이다. 신라의 박혁거세 탄생설화에 따르면 사람들이 백마의 울음소리를 듣고 가보니 백마가 승천하면서 큰 알을 하나 두고 갔는데, 바로 그 알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밖에도 백제의 견휜 탄생설화 등에서 백마는 역시 상상의 동물인 용과 함께 하늘을 날 수 있는 신성한 동물로 그려졌다. 신라의 고분인 천마총 벽화에서도 벽화의 주인공은 날개가 달린 천마이다.   그러고 보면 백마의 길상적인 이미지는 국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하다. ‘백마사’는 고향의 유물처럼 머나 먼 이역 땅에서 한반도 유민들의 향수를 달래 주지 않았을까.   드디어 시내로 향한 택시는 불과 십여분 후 도심에 이르렀다. 낙양성은 워낙 크지 않은 도시였던 것. 낙양의 도심지역인 옛성(老城)은 변두리가 각기 4㎞ 정도인 네모모양이었다.   “낙양의 볼거리는 땅속에 많아요. 낙양의 문물은 대부분 땅속에 있거든요."   소씨의 농 섞인 소개이다. 진짜 허풍이 아니었다. 외곽에서 고분박물관을 보고 왔는데, 도심에도 비슷한 박물관이 있었다. 말이 도심이지 번화한 상가나 호화스런 빌딩 대신 주나라 임금의 수레와 말 무덤이 이색적인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었다. 임금의 수레에는 여섯 필이 말이 메워졌다는 뜻의 ‘천자육가(天子六駕) 박물관’, 고관대작의 고분으로 유명한 낙양의 모습을 일축하고 있었다.   낙양성은 도심을 흐르는 낙하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바야흐로 안개가 걷히는 낙하 기슭에는 낚시꾼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낚시 줄에 매달려 이따금 수면 위에 바둥바둥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은 도심의 낙하에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6,7천년전 황하에서 몸뚱이에 그림을 그린 용마가 뛰어오른다. 이때 여기 낙하에서는 또  천서(天書)를 등에 업은 거부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이게 바로 유명한 하도(河圖), 낙서(洛書)의 전설이다. 중국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수장인 복희(伏羲)씨는 하도, 낙서에   근거하여 팔괘(八卦)를 그렸다고 한다.   한국 국기에 그려진 팔괘도가 낙하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게 하도, 낙서처럼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수천년 흘러온 이 낙하에는 또 얼마나 많은 전설이 숨어 있을까?   낙양의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는 한글 간판의 식당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제주도’, ‘한도(韩都)’, ‘한풍(韩风)’… 제잡담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했더니, 점원들은 오히려 이방인을 보는 듯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양머리를 내걸고 개다리를 파는 격”이었던 것.   나는 맥없이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이방인’의 행동거지가 이상했는지 식당에서 금방 뭐라고 소곤거린다. 그런데 먼 나라의 말처럼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다. 하남 특유의 사투리인 탓이다. 아, 먼 이방인이었던 한반도의 유민들은 이처럼 난해한 방언을 어떻게 해득하고 말했을까…   이 몇해 사이 낙양 거리에도 ‘한류’를 타고 ‘한식당’이 오늘내일로 불쑥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밀가루 음식이 위주인 낙양에서 원조 ‘한식당’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런 짝퉁 ‘한식당’마저 금방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쌀밥문화는 낙양사람들의 체질에 전혀 어울리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역의 낙양에서 언어소통은 둘째 치고 쌀밥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던 한반도의 유민들이 어떻게 허구 헌 날을 보냈을지 궁금하다.   먼 동쪽하늘 아래의 한반도를 바라고 하염없이 눈물을 짓는 유민들이 동화 같은 화면으로 떠오른다. 태를 묻은 정든 고향에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거냐?…애수에 젖은 유민들의 노래 소리가 금세 안개를 헤집고 세상 저쪽에서 흘러나올 것 같다.     “…저 산비둘기 잡지 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맸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1    야래자(夜來者) 설화와 한왕(汗王)산성 댓글:  조회:4694  추천:49  2009-09-21
    “한 마을에 처녀가 살았는데 밤마다 웬 남자가 와서 그와 동침하였다. 그러나 이 남자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인지 몰랐다. 어느 날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아서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워낙 돌굴에 있는 지렁이었다. 그 후 옥동자를 순산하였으니 그가 바로 나라를 세운, 혹은 유명한 누구였다…”   눈 감고 줄줄 외울 수 있는 옛말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런 야래자 설화는 다만 지명과 장소, 이름이 약간씩 다를 뿐이며 중국과 한국, 일본, 서구까지 전 세계적으로 널리 구전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 견휜의 출생설화가 이와 비슷하며 또 서구의 ‘큐피트-사이키’형 설화도 이와 사뭇 비슷하다. 함경북도 회령지역에 전해오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도 다만 돌굴이 늪으로, 지렁이가 구렁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에서 등장하는 이 늪은 바로 한왕산성에 있는 걸로 전한다. 한왕산성은 몽골어로 임금, 왕의 산성을 이르는 말로 용정시 삼합진에서 서쪽으로 약 10㎞ 상거한 두만강 기슭에 위치한다. 한왕산성은 현지인들이 누르하치가 쌓은 산성이라고 주장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학계에서는 또 이 산성이 조동(朝東)촌 부근에 있다고 조동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이 위치한 산은 천불지산 산맥의 지맥으로 두만강 강기슭에 툭 튀어져 나왔는데, 산 정상의 삼면이 벼랑인 까닭에 흡사 고깔모자처럼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뜨인다.   산기슭에 있는 조동촌 어구에는 서북쪽의 벼랑바위를 배경으로‘한왕산성’ 표지판이 서있다. 이 표지판을 지나 골짜기에 들어서서 북쪽으로 10여분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선다. 산 정상이 왼쪽에 있는지라 그쪽의 수풀로 사라진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비탈을 얼마간 올라가자 불쑥 높은 둔덕이 나타났다. 돌로 쌓은 이 둔덕은 반달 모양으로 벼랑을 감싸고 있었는데, 오솔길은 둔덕을 지나 곧바로 벼랑위에 덧쌓인 석성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둔덕은 다름 아닌 석성 동북쪽 성문 밖의 옹성이었던 것이다. 옛날 산성으로 내왕하던 교통로도 바로 지금 발밑에 밟고 있는 이 산길이 아닐까. 오솔길에 그려진 들쭉날쭉한 나무 그림자는 마치 그리스의 아리송한 상형(象形)문자처럼 홀제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옹성 문자리 부근의 수풀에는 깊이 1.5미터, 지름이 2미터 되는 웅덩이가 여럿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인공적으로 쌓은 돌들이 아직도 반 미터 남짓한 높이로 남아있다. 옛날 초병들의 막사자리로 알려진 유적이었다. 이곳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비탈이었는데, 이 때문에 산성 주인은 옹성을 만들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또 초소를 세울 정도로 성곽 경호에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옹성 밖에서 잠깐 화젯거리가 생겼다. 남쪽 막사 유적지 부근에 벼랑가로 간신히 톺아 오른 오솔길이 있었던 것이다.   “옛날 초병들의 소행으로 보이네요. 다문 몇 걸음이라도 덜려고 한 게 아닐까요.”일행 중 누군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이 오솔길은 초병들이 옹성 쪽으로 돌아가서 성으로 들어가는 일이 귀찮아 만든 ‘지름길’ 같다는 것이었다.   옹성을 지나 내성 성문에 들어서자 불시에 눈앞에 뉘엿한 평지가 나타났다. 산 정상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평했고 또 부지가 엄청 컸다. 성벽은 절벽 위의 가장자리를 따라 산 정상을 구불구불 기어가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지날 정도의 오솔길이 성벽 내측에 그림자처럼 졸졸 붙어 있었다. 둘레가 1,500m인 한왕산성은 중등 크기의 산성으로, 지세를 보아 전형적인 산봉식 산성이었다. 남쪽은 수직되거나 거의 수직된 5~15m 높이의 현애절벽이었는데, 산성은 이를 직접 이용하고 있었다. 기타의 성곽은 이런 자연적인 낭떠러지나 천험 위에 0.5~5m의 높이로 돌을 쌓고 있었다.   산성의 동쪽 모서리에는 망루자리로 보이는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이 자리에 들어서니 산기슭을 따라 연연히 흘러가는 두만강이 먼발치에서 보였다. 동쪽의 삼합진으로 통하는 길과 앞쪽의 강 건너 북한의 회령시 유선, 그리고 서쪽의 두만강 상류로 통하는 강기슭 길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웅덩이가 위치한 모서리 자체가 천연적인 망루였다.   성문자리는 서남쪽에도 하나 있었다. 이 성문은 두만강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바깥쪽은 경사가 심한 비탈이어서 수비에 유리하고 공격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동북쪽 성문처럼 옹성이 없었고 초소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낭떠러지가 낮은 까닭으로 그 위에 서너 미터 높이로 덧쌓은 석성은 산성 전반에 걸쳐 이곳에서 제일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성문 부근의 석성은 약간 허물어진 곳이 있어서 아예 속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석성은 돌들을 안쪽 깊이까지 엇물려주어 역학적으로 아주 안정된 구조를 이룬 모습이었다. 바위 위에 덧쌓인 성벽은 돌들을 모양새에 따라 맞물려서 차곡차곡 올려 쌓고 있었다. 이런 성벽은 아래부터 물려오는 적심석으로 해서 아주 견고했다. 이 때문에 산성은 천년의 풍상세월 속에서 거의 원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성에는 집 자리로 추정되는 건물유적이 세 개나 남아있다. 산성 남쪽에 위치한 이런 건물유적에는 흙으로 쌓은 담이 있어 아직도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산성의 크기와 건물유적으로 미뤄 이곳에 있었던 수비군을 3,0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갑자기 수풀에서 후드득 소리가 연이어 일어났다. 대여섯 마리의 꿩이었는데, 건물유적 북쪽의 늪가에서 물을 먹고 있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랐던 모양이다. 타원모양의 이 늪은 어림짐작으로도 지름이 50m가 훨씬 넘었다. 산 정상의 수원지로는 과연 일대 장관이었다. 늪 서쪽에는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인공으로 쌓은 둑이 있었다. 둑 부근에는 또 지름이 10m, 깊이가 2m 되는 물웅덩이가 있었으며 물웅덩이에는 큰 돌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옛날 물을 긷던 곳이 아닌지 모른다.   현지인들은 산성에서 천 무늬가 있는 회색 기와조각을 발견, 또 돌구유와 구리 숟가락을 발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성한 수풀 때문에 기와조각은 더는 한 조각도 주을 수 없고 구리 숟가락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 서남쪽 성문부근의 건물유적 밖에는 아직도 돌구유가 그대로 남아있어 위의 내용을 방증하고 있었다.   산성 남쪽 1.5㎞ 되는 두만강 기슭에서는 바로 이런 구유모양의 나무관이 여러 기 발굴되어 산성과 이상한 ‘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무덤 떼는 조동촌 부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동 무덤떼로 불리는데, 연변지역의 명나라시기 무덤으로는 단연 첫손에 꼽힌다. 1976년, 연변박물관에서 13기의 무덤을 발굴, 대부분의 무덤은 나무관을 쓴 흔적이 나타나고 있은 걸로 전한다. 무덤의 매장풍속을 보면 단인장이였으며 사기기물과 구리기물, 쇠 기물, 조가비 치렛거리, 구슬, 질그릇 등 230여점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조동 일대는 명나라 때 여진인의 활동지역이였으며 건주좌위의 소재지인 북한 회령과 불과 10㎞ 상거한다. 상술한 정황으로 미뤄 조동무덤떼는 건주 여진인의 무덤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로 자리하고 있다.   산성 부근의 이 조동무덤떼는 산성과 그 무슨 연관이 있으며, 따라서 학계에서는 명나라 때의 여진인이 바로 한왕산성의 진실한 주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다. 정말로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도 여기 산성과 그 무슨 ‘실’로 꽁꽁 얽매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성의 위치나 특이한 지세 그리고 축성기법 등을 미뤄 일찍 고구려시기에 축성되고 그 후 또 요․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산성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다만 이런 견해가 위의 거센 주장에 파묻혀 몹시 미약하게 들릴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만강지역에는 설화를 비롯하여 여진족의 형상이 이상하다고 할만치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이 지역이 여진족의 옛 활무대였던 특수한 지리, 혈연적 관계를 묵과할 수 없다. ‘사돈(査頓)’이 여진족의 낱말이듯 함경도 사람들의 피에는 여진족의 피도 적잖게 섞여있는 걸로 알려진다. 그걸 잠시 제쳐놓더라도 조선왕조의 건국역사에는 여진족 인물이 적지 않게 출현한다. 조선왕조의 건국을 위해 대공을 세운 퉁두란, 즉 훗날의 이지란(李之蘭) 역시 여진족 대토호로 전해지고 있다. 미상불 한왕산성은 여진족의 흔적이 너무 진해서 여타의 주장이 모조리 파묻히고 있는지 모른다.   한왕산성은 수원지나 건물 등 일반 시설은 물론이요, 견고하고 전술의미가 있는 옹성 그리고 수비에는 쉽고 공격에는 어려운 석벽 성곽이 있는 등 두만강지역의 전형적인 천험 요새로 학계의 남다른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산성의 축성연대는 아직도 베일에 깊숙이 가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성의 시원을 열어놓은 ‘야래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수풀에 장벽처럼 둘린 늪에는 야래자의 숨결인 듯 정오의 아지랑이가 그물그물 춤추고 있었지만, 천년의 신화 속으로 사라진 야래자는 더는 종적을 찾을 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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