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http://www.zoglo.net/blog/jinhulin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기획기사(내가 바라본 세상)

고종의 어의가 잠적했던 ‘너페’
2014년 01월 30일 10시 36분  조회:2003  추천:2  작성자: 김호림

  20세기 초, 서울 궁전에 있던 어의御醫가 두만강 북쪽의 시골마을에 잠적했다. 조선 왕실의 비사秘事처럼 일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었다.
 

  박광훈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63년~1907년 재위)의 어의였다고 한다. 그가 언제부터 태의원太醫院을 떠났는지는 현재로선 소상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북간도로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의병들과 함께 있었다고 박 씨 가문에 전하고 있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 역시 어릴 때 그렇게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말씀하시던데요, 외할아버지는 강원도 임계라는 곳에서 의병들을 위해 상처를 치료하고 병을 보셨다고 합니다.”
 

  구한 말 의병은 1905년 매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일어났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많은 군인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전쟁의 양상을 띠어가게 되었다.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 의병들은 지하활동을 하거나 간도와 만주, 연해주 일대로 이동, 독립군이나 광복군으로 연결되어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간의 박광훈의 행적을 조각조각 맞춰보면 그는 1907년 경 왕궁에서 나왔던 것 같다. 이 무렵 고종이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침략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으나 이 사건으로 폐위되었던 것이다. 왕의 폐위와 더불어 일부 어의가 자진 혹은 피치 못할 사유로 부득불 궁실을 떠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박광훈은 의병활동이 지하에 숨어든 후에도 계속 한반도에 남아있었다. 어쩌면 국권회복에 계속 실올 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서울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왕의 소식이 날아왔지만 천만 뜻밖에도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부고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서울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다. 이를 놓고 뇌일혈이나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한약이나 식혜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박광훈은 시종 왕이 누군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훗날 그는 자식들에게 왕궁의 비사秘史를 일부 털어놓았는데, 와중에는 고종이 내시內侍에게 남겼다는 유언 한마디가 들어있었다.
 

  “짐은 이렇게 죽더라도 백성은 다치지 말게 하라.”
 

  이에 따르면 고종은 자기가 독약을 먹고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이 유언이 구경 누구의 입을 통해 궁실에서 흘러나왔는지는 풀지 못할 미제謎題이다. 그렇다고 박광훈이 함부로 만들어낸 허구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의혹이 있다.
 

  어쨌거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가 독살 당했다는 독살설이 항간에 유포되면서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항거하여 거족적으로 일으킨 민족해방운동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어난 이 비폭력운동은 총검을 앞세운 일제의 군정체제에 의해 결국 무참하게 실패한다.
 

  박광훈은 급기야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듯 고향을 멀리 떠난다. 나중에 그들 가족이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두만강 기슭의 산간마을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 후 중학교를 다니던 김숙자가 어머니를 따라 오지의 이 외갓집을 찾아온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정경이 그의 눈앞에 실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 여느 시골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물레방아가 아직도 마을 귀퉁이에서 철썩철썩 하고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물레방아처럼 마을의 이름도 그 무슨 고물딱지를 방불케 했다. 난생 처음 듣는 이상한 지명이었던 것이다.
 

  “다들 그곳을 ‘너페’라고 부르던데요…”
 

  그러나 “너페”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몰랐다. 넓은 평지라는 의미의 ‘넓평’이 와전되어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앞뒤로 산에 꽉 막힌 이 고장에 ‘넓평’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장 사치였다.
 

  아무튼 너페는 나중에 용화향勇化鄕의 소재지 고령촌高嶺村 아니 고령촌 1,2대(队, 촌민소조)라는 다른 이름으로 세간에 등장한다.
 

  용화 지역은 일찍 석기시대부터 인간이 살고 있던 고장이다. 고령 부근의 지층에서는 인골, 돌도끼, 돌바늘 등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남쪽의 두만강 기슭에는 고구려 고분이 발견되었으며 또 부근의 산에는 옛 성곽과 봉화대가 잔존한다. 광서光緖 7년(1881)을 전후하여 조선인 이민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났다. 훗날 두만강 연안에 무간국撫墾局을 설립하면서 이 일대에 용신사勇新社와 상화사上化社가 나타난다. 용화는 바로 이 두 지명에서 각기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이름이다.
 

  고령촌은 진짜 이름처럼 산이 높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또 나무가 크고 풀이 우거졌다. 그때 어린 김숙자는 아낙네들을 따라 부근의 산에 버섯 따러 갔는데, 앞쪽의 고작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사람마저 수풀에 가려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란다.
 

  “정말 무서웠지요, 그런데 누구도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겁니다.”
 

  알고 보니 산에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뭐 짐승이 사람의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할까… 참으로 마을이름처럼 별난 풍속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너페’도 이처럼 심마니들의 은어隱語로 곰을 이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심심산골의 이 고장에 ‘곰’의 이름자가 달려있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다. 지난 세기 50년대까지만 해도 이 고장에는 호랑이 따위의 큰짐승이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큰짐승들은 울바자를 타고 넘듯 제멋대로 두만강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박광훈 가족이 두만강을 건넌 후 산속에 있던 독립군이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너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박광훈은 동네에서 홀로 떨어져 산기슭에 거처를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부근의 산비탈에 땅굴을 파고 어구를 나무 등속으로 은폐했다. 독립군의 부상자가 오면 땅굴에 남몰래 숨겨놓고 치료를 했다고 한다. 땅굴은 말 그대로 산속 밀영의‘야전병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박광훈은 간도로 이주할 때 옛날의 의병이었던 독립군과 모종의 연락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한반도에 또 난리가 터졌던 1951년 너페에서 세상을 떴다. 어린 김숙자가 너페에 갔을 때 박광훈은 벌써 전설 속의 인물로 되고 있었다.
 

  ‘상투사건’은 그 중의 하나였다.
 

  8.15 광복 후 박광훈은 의사증명서를 받으려고 화룡 시내로 갔다고 한다. 이때 박광훈은 옛날처럼 여전히 머리에 상투를 얹고 있었다.
 

  “아니, 아직까지 상투를 틀고 있다니요?” 관원은 대뜸 얼굴을 찌푸리더란다. 해방된 새 사회에 대한 무언의 불복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상투를 그냥 매려면 증명서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박광훈은 끝내 상투를 남겼고 또 의사증명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고명한 의술 앞에서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제인가는 수백리 밖의 타향에서 웬 농부가 앉은뱅이의 딸을 소 수레에 싣고 찾아왔다. 딸은 그때까지 열아홉 살의 나이를 먹도록 제 발로 땅을 밟고 걷지 못하고 있었다.
 

  “이봐, 인제 걷게 해주면 내 양딸로 되겠느냐?”
 

  박광훈은 다리와 허리에 침을 놓으며 우스개를 했다. 그런데 우스갯소리가 땅에 떨어져 먼지가 묻기도 전에 처녀가 자리에서 저절로 일어섰다고 한다.
 

  훗날 처녀는 우연히 박광훈의 외손녀 남편을 만나자 기어이 집에 초대하고 제잡담 닭의 목을 비틀더란다. 그 시절 닭을 잡아 식탁에 올리는 것은 잔치 때나 있을 법한 융숭한 대접이었다.
 

  초야에 이름 없는 쑥대처럼 묻혀 살아도 의사의 천직은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광훈은 언제나 몸에 붓과 벼루를 소지하고 다니다가 환자를 만나면 돈을 받지 않고 선선히 처방을 뗐다고 한다.
 

  그토록 꾸밈없이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좀처럼 내놓지 않는 ‘보배상자’가 있었다.
 

  나중에 박 씨 가문의 외독자인 외삼촌이 이 상자를 대물림으로 물려받았다. 외삼촌 역시 언제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꼭 갖고 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 상자를 ‘보배’처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궁전의 패물과 옛 의서, 사진 등속을 넣은 것 같습니다.” 기실 외손녀인 김숙자 노인도 이 ‘보배상자’를 눈요기조차 못했다고 한다.
 

  아무튼 상자의 물건은 박 씨 가문의 둘도 없는 ‘보배’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운의 어의에게 드리웠던 암울한 그림자는 종내 사라질 줄 몰랐다. 지난 세기 60년대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박광훈의 손자가 장작나무를 태우듯 ‘보배상자’를 통째로 소각해버렸던 것이다. 공산당에 가입한 손자에게 ‘보배상자’는 ‘보배’ 아닌 봉건사회의 낡은 잔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자 속에 숨겨있던 미스터리의 ‘보배’는 졸지에 한줌의 재로 날려갔다.
 

  이 무렵 김숙자 노인이 모친에게 물려받았던 박광훈의 사진도 재앙을 당한다. 김숙자 노인이 군부대 기밀부문에 배속되면서 미타한 생각이 들어 옛 사진들을 용정의 시댁에 남겼고, 미구에 시아버지가 난데없는 ‘간첩사건’에 연루되자 시댁에서 서둘러 옛 사진들을 죄다 처분했던 것이다.


  어의의 신기한 이야기는 그렇게 "너페"라는 희귀한 지명은 오지의 웬 산골짜기에 꽁꽁 묻혀버렸다.*

    
                                   (지명답사기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에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1 ]

1   작성자 : 빛을 비추라
날자:2014-01-30 19:24:41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이네요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프네요
Total : 16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6 월궁의 선녀 상아가 여기에 묻혔다니? 2015-10-13 2 2576
15 장백산, 발해 남쪽의 신선의 산 2014-11-12 4 3458
14 까마귀바위에 울린 빨찌산의 나팔소리 2014-02-13 1 1898
13 고종의 어의가 잠적했던 ‘너페’ 2014-01-30 2 2003
12 박달족의 이름은 왜 그곳에 나타날까 2014-01-04 12 2160
11 고려하, 북경의 옛말로 흘러간 이야기 2013-10-23 15 2540
10 걸만의 채 꺼내지 못한 이야기 2013-10-18 2 2601
9 연변 땅을 파면 역사가 묻어나온다 2013-10-16 2 3009
8 지명으로 읽는 연변 100년 력사 2013-10-08 2 2917
7 모아산, 초모자에 숨은 한마리의 용 2013-04-21 3 2578
6 양천 허 씨의 마을 조양천 2013-02-18 4 2816
5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2012-03-26 4 4053
4 산해관에 나타난 조선역관 2011-12-05 2 6839
3 [관내유적]십만 무사의 원혼이 서린 법원사(法源寺) 2011-02-01 37 3938
2 낙양성 십리 허에 2010-08-21 46 4955
1 야래자(夜來者) 설화와 한왕(汗王)산성 2009-09-21 49 469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