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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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만의 채 꺼내지 못한 이야기
2013년 10월 18일 12시 52분  조회:2602  추천:2  작성자: 김호림
  길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던 촌민들은 그 동네를 ‘걸만’이라고 불렀다. 도문의 마패 북쪽으로 5리 정도 상거한 동네였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었더니 “호걸이 많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중국말로 준걸 걸(杰), 찰 만(滿) 자를 쓰니 그럴 법 한다.

  지명지(地名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초년에 개발되었으며 ‘걸만’이라는 마을은 그 후인 민국(民國, 1912~1949) 초년에 생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걸들의 이름과 경력 등은 마을이름처럼 그렇게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고 하는 리덕송(83세) 옹은 더구나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걸만은 예전에 (혁명)열사들이 많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리덕송 옹은 8살 때 두만강 대안의 온성에서 부모를 따라 걸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때 집은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이 가난했다. 걸만에 먼저 정착했던 삼촌의 권고로 마침내 도강을 작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동네를 토암(土岩)이라고 부르고 있었지요.”

 토암은 훗날 걸만촌 5대(隊, 촌민소조)로 개편, 걸만이라는 마을을 이룬 여러 동네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방문헌은 광서 9년(1883) 토암 동네가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네의 뒷산은 풍화된 암석 구조이며 흙이자 또 암석이어서 토암이라고 작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덕송 옹의 가족이 이삿짐을 풀던 그 무렵 벌써 내력이 싹싹 지워지고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되고 있었다.

  “우리 이 동네의 위쪽에 바위벼랑이 있다고 해서 토암이라고 부르지 않을까요.”

  그 바위벼랑은 일명 ‘여시바위’라고 불리고 있었다. ‘여시’는 ‘여우’를 이르는 강원도, 전라 지방의 방언이다. 예전에 누군가 바위벼랑 위에 앉아있는 여우를 보고 지은 이름인 듯하다. 벼랑에는 지금도 날짐승이 깃든다고 하니 여우가 자주 들락거렸을 법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뉘라 없이 ‘여시’가 우리말 방언인줄 모르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여시바위’를 아주 난해한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정말 약과인 것 같다. 걸만 마을의 제일 바깥쪽에 위치한 1대 뒷산의 이름은 아예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었다. 촌장 저택에서 만난 50대의 아낙네는 그가 시집을 오던 그 무렵 벌써 뭐가 뭔지 모를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집 동쪽에 있는 저 둥그런 산인데요, 다들 ‘산스 가슬’이라고 부르지요.”

  처음 듣는 이름이고 또 하도 괴이한 이름이라서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캐물었다. 그런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솔직히 외국말을 옮겨온 듯한 ‘산스 가슬’의 이름은 그냥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았다.

  “지성이면 감천한다”던가, 나중에 촌민 하나가 우연히 건네는 말 한마디가 우뢰처럼 귀를 번쩍 울렸다.

  “무슨 이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스 가슬’에는 참나무가 많이 자라지요.”

  “물 따라 강남으로”라는 말이 있듯 “더덕 따라 참나무 숲으로”라는 말이 있다. 참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더덕줄기가 묶음이 되고 더덕 씨가 줄레줄레 떨어져서 더덕 밭을 이룬다. 더덕의 방언이 ‘산승’이고 숲의 방언이 ‘가슬’이니 ‘산스(승) 가슬’은 결국 ‘더덕의 숲’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이처럼 지명이 원체 방언으로 만들어진 줄 모르고 있었고 또 그 방언마저 비슷한 음으로 와전되다 보니 마을에는 차마 울지도 웃지도 못할 괴상한 지명까지 생기고 있었다.
 
 1대 마을을 이르는 ‘사무구파’가 바로 그러했다. 자칫 일본말로 오인할 수 있는 지명이었다. 마을 토박이인 리덕송 옹도 웬 일인지 ‘사무구파’로 기억하고 있었다.

  실은 ‘샘물구팡’이었다. 구팡은 우리말 방언으로 처마 밑에 마루를 놓을 수 있게 쌓아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때는 (샘물) 근처의 높은 지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닐세라, 마을 뒤에 큰 샘이 있으며 이 샘 때문에 마을은 중국말로 샘물이라는 의미의 ‘천수(泉水)’라고 불리고 있었다.

  남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자부락골’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자부락골’은 골짜기에 해가 뜨는 시간이 짧아서 잠만 자는 동네라고 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부락’은 소리를 나타내는 말. 그러니 ‘자부락’은 응당 ‘잠부락’의 와전으로 보아야 한다.

  자부락이든 잠부락이든 인가가 죄다 사라졌으니 진짜 잠을 자는 골짜기로 된 셈이다.

  자부락골처럼 소실된 부락은 또 하나 있었다. 토암의 바로 서쪽에 있었던 동경동(東京洞)이다. 광서 초년에 생긴 이 부락은 불과 수십명이 살던 작은 동네였다. ‘동경’은 물소리 혹은 시냇물을 이르던 만주족 말이라고 한다.

  와중에는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지명도 있었다. 신선이 내려왔다고 전하는 ‘신선 더기’였다. ‘신선 더기’는 현재의 걸만 2대 마을로 닭 덕대 같은 둔덕에 제를 지내던 곳이 있다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북좌남향한 이 비탈에 바람이 잘 통하고 또 공기가 시원하여 신선 같은 곳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기왕 지리위치로 생긴 마을의 이름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일명 큰 마을, 대대마을로 불리는 4대 마을은 이름하여 남양툰(南陽屯)이다. 산의 양지 바른 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광서 7년 개발되어 광서 10년에 형성된 이 마을에는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이미 폐교되었다.

  인제 지명마저 학교처럼 허울뿐인 이름 그 자체로 되고 있는 것 같았다. 리덕송 옹의 아내 김보금 로인은 마을의 옛 이름이 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기억이라는 그릇에 지명 이야기를 담을 여유도 생각도 없는 듯했다. 로인은 그의 고향이 걸만 북쪽의 립봉(笠峰)이라고만 말했다. 립봉은 우리말로 삿갓봉을 중국말로 옮긴 말이다. 진짜 마을 부근에는 삿갓 모양의 산이 있다고 한다.

  그가 살고 있었던 삿갓봉은 물론이요, 부모님의 옛 고향은 로인에게 더구나 아득한 옛말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린 조선 땅에서 건너왔지요. 그러나 언제 어디서 건너왔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이 잃고 있는 건 아리송한 옛 기억뿐만 아니었다. 그날 우리는 마침 뜰에 들어서는 리덕송 옹을 만났을 때 인사보다 놀라움을 앞세워야 했다. 그가 몇십리 밖의 도문 시가지에 가서 몸소 쌀 200근을 택시에 싣고 왔던 것.

  현지의 참담한 실상을 보여주는 단면도였다. 농사꾼이 땅을 떠나고 있었고 인가가 자리 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전성기에 수십 가구에 이르렀던 토암 마을 역시 인제 20가구 정도 남아있을 뿐이라고 한다.

  “지금 마을의 옛날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어쨌거나 이곳의 동네는 거개 우리말 방언이 아니면 지리적 위치로 인한 지명을 갖고 있었다. 여러 동네를 하나로 묶은 걸만도 실은 우리말 방언에  연원을 두었다는 설은 예전부터 있었다. ‘걸만’은 방언 ‘거르만’을 중국말로 옮기면서 비슷한 음의 ‘걸만(杰滿)’으로 되었고 그걸 다시 “호걸이 많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르만’은 연변지역의 우리말 방언으로서 호주머니라는 의미의 러시아 말 ‘까르만’에서 비롯되었다.

  이 설법을 억측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긴 예전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를 통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러시아 말의 어휘가 이민들에게 풀씨처럼 묻어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 연변에서 늘 사용하는 어휘 “비지깨”는 바로 러시아어로 “성냥”이라는 뜻이며 “마션”은 러시아어로 “재봉틀”을 이르는 말이다.

  걸만을 우리말 지명으로 해석하면서 실은 ‘걸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걸망’은 걸머지고 다닐 수 있게 얽어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를 말한다.

  실제 마을은 위치가 바로 골짜기 사이에 갇혀 있어서 흡사 긴 주머니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호주머니의 ‘거르만’이나 큰 주머니의 ‘걸망’으로 해석해도 십분 가능하다는 것. 또 심산벽지의 이 고장에서 호걸이 있었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한다.
도대체 ‘걸만’은 두만강 대안의 사람들이 걸망을 메고 건너와서 지은 이름일까, 아니면 연해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온 러시아 말의 지명일까. 또 옛날 마을을 빛낸 호걸이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일까…

  잠깐, 재미있는 지명이 하나 있다. 바로 걸만 끝머리에 있는 ‘삼동(三洞)’이다. 얼핏 이름만 보아서는 세 개의 동굴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기실 광서 초년 마을이 세 갈래의 골짜기가 모이는 어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으로 시초에는 세 개의 골짜기라는 의미의 ‘삼구(三溝’)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게 어찌어찌하여 ‘삼동’으로 와전되었고 지어 한발 더 짚어서 산의 동굴이라는 의미의 ‘산동(山
洞)’이라고 군사지도에 기록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걸만 역시 이 삼동이라는 이름처럼 뭐가 뭔지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종내 찾을 길 없었다. 마을의 집단기억에 더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 걸만에 있던 많고 많은 이야기는 그렇게 영영 묻혀버리는 걸까…*
 

  ( 중국민족 2013년 제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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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빛을 비추라
날자:2014-01-30 19:38:19
나도 걸만에 몇번 갔다왔어요 그런데 걸만에 대해서 아리송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네요
1   작성자 : 도문사람
날자:2013-10-22 06:29:40
참 재미있는 글입니다
제가 보충한다면 저는 60년대에 처음 걸망에 갔다가 <<걸만이란 무슨 뜻인가?>>고 물었는데 걸만은 주변에 작은 여러개 마을 두루두루 걸려매여 총적으로 걸어맺다는 뜻- 걸만이라고 부른다고 합디다. ㅎ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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