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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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산, 초모자에 숨은 한마리의 용
2013년 04월 21일 13시 14분  조회:2578  추천:3  작성자: 김호림
  봉림동鳳林洞은 광서(光緖, 1875~1908) 말년 형성, 숲이 울창하다고해서 상서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런데 뭐가 산신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미구에 마을을 찾아 내려온 것은 이름자에 넣은 봉새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봉림동이라고 하면 방채봉 노인은 마을 이름을 만든 수림 대신 동네 어구에 있었던 논을 눈앞에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1933년 여름날의 밤에 생긴 일이었다. 마적들이 짐승무리처럼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쳤다. 엄마는 이웃들을 따라 동구 밖의 논으로 천방지축 뛰어갔다고 한다. 벼가 두어 뼘이나 자란 논은 엎디면 잔등이 보이지 않아서 마을 근처의 은신처로 안성 맞춤했던 것이다.

    “정말 한심하지요? 엄마는 논에 이른 후에야 등에 업고 나온 게 제가 아니고 베개라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어언 80년 세월이 흘렀지만 방채봉 노인은 어처구니가 없는 그 일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단다. 훗날 조모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 살 배기의 어린 방채봉은 그런 난리판에도 태평스레 따뜻한 아랫목에 누운 채 코를 쌕쌕 골고 있었다고 한다.

   불행한 일은 기어이 그들을 비켜가지 않았다. 배포 유하게 그냥 사랑방에 누워있던 부친은 근처에서 총소리가 우당탕 터지자 급기야 울바자를 뛰어넘었다. 그러다가 유탄에 허벅다리를 맞아 그로 인한 과다출혈로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때 부친은 1910년 좌우에 출생한 20대의 나이였으니 분명히 두만강을 건넌 이민 1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부 방동규가 고향 함경도를 떠나 간도로 올 때 아직 머리태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고 방 씨 가문에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조선인 남자들은 거개 머리태를 기르거나 상투를 얹고 다녔다. 문호개방에 따라 조선 26대 왕 고종이 부득불 전국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린 것은 1895년이다. 이에 따르면 방동규는 늦어도 아들을 보기 10년 전인 19세기 말까지 이미 간도 땅을 밟은 것이 아닐지 한다.

   방동규는 훗날 독립군에 입대, 청산리 전투 때 김좌진金佐鎭이 인솔하는 부대의 군량 도감都監으로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靑山里 전투는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 등이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으로 유인하여 대파한 전투를 말한다.

   청산리 전투가 끝난 이듬해 독립군의 대부분은 러시아로 이동하며 일부는 간도지역에 흩어진다. 그때 방동규는 마치 용이 구름 속에 형체를 숨기듯 봉림동에 행적을 감추고 무명의 시골선비로 되었던 것이다.

  봉림동은 모아산帽兒山 서북쪽의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이다. 모아산은 해발 517미터로 연길과 용정의 계선으로 되는 산이다. 산등성이에 둥그렇게 솟은 모습은 그야말로 농부의 밀짚모자草帽子를 방불케 한다. 모아산이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방채봉 노인이 봉림동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 무렵 모아산은 수림이 남벌되고 있었으며 8.15 광복 후에는 아예 민둥산으로 사람들의 집단기억에 흉물을 만들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식목을 하면서 비로소 봉새가 깃들만한 ‘봉림鳳林’이 다시 일어선다.

  예전에 이 모아산의 산꼭대기에는 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우물이 그토록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하니 정말 봉새처럼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인시절의 이운학이 처음 산에 올랐던 1962년에는 물의 기억이라곤 얼마 고여 있지 않았다.

  그맘때 산기슭의 마을에 구전하는 우물 이야기는 단 한마디였다.

  “옛날의 우물이라고 하던데요, 물맛이 기차게 좋았다고 합니다.”

  일찍 모아산 비탈에서 돌보습 등 원시시대의 석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인간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산정에서는 또 고대 봉화대가 발견되기도 했다. 우물의 이런 옛 주인들은 세월의 장막 뒤로 몸을 감췄고 더는 우물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운학이 부소대장으로 있던 00사단은 모아산에 우물이 아닌 비밀갱도를 파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방책이었다. 그런데 갱도작업을 시작할 무렵 뜻하지 않던 풍파가 생겼다. 군부대가 주둔했던 용산龍山 마을의 노인들이 이를 극구 막아 나섰던 것. 속설에 따르면 모아산에 ‘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산속에 큰 늪이 있대요. 그게 터지면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거지요.”

  용산은 광서 말년에 생긴 오랜 마을인데 북쪽 모아산의 산줄기가 마치 용과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지난 세기 40년대 일본군도 모아산에 갱도를 구축하려고 탐사를 진행했지만 결국 모아산에 물이 있다면서 갱도구축을 포기했다고 한다.

  진짜 모아산에 용이 있다는 설은 현지에서 진실처럼 받아지고 있었다. 산기슭의 다른 마을도 저마다 용 룡龍자를 그 무슨 호신부처럼 달고 있었다. 용산 부근의 용암龍岩 역시 용산과 비슷한 이유로 생긴 이름이다. 용암이라는 동명의 지명은 또 봉림동의 동쪽에도 하나 나타난다. 모아산 동북쪽의 골짜기에 자리 잡은 동네는 아예 물 수水자까지 달아서 용수동龍水洞이라고 불렸다.

  항간에서는 모아산을 동해의 용왕이 변해서 된 산이라고 전한다. 태고시절 깊은 바다에 잠겨있던 산이기 때문이란다. 또 풍수설에 따르면 모아산은 용의 왼쪽 뿔이며 서쪽의 마안산馬鞍山은 용의 오른쪽 뿔이다. 용은 물이 있어야 재롱을 부릴 수 있는 법, 물의 기운을 안고 있는 용이기 때문에 모아산에는 필시 큰물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천지신명에 감히 맞서는 해방군 군인들에게는 한낱 허망한 미신에 불과했다. 군부대의 조사팀은 모아산에 물은 있지만 갱도를 파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바위 틈새로 빗물이 새어 들어가서 고인 정도라는 것이었다.

  “설마”가 화근이었다. 갱도의 폭파작업은 그대로 재화災禍를 부르는 종소리로 되였다. 굉음에 ‘용’이 놀랐는지 산체까지 요동을 쳤으며 뒤미처 돌사태가 동쪽 갱도를 덮쳤다. 작업 중이던 군인들은 전부 갱도에 갇혔다. 관처럼 작은 공간이어서 그들은 인차 질식사 일보 직전까지 갔다. 자칫 모아산 전체가 거대한 무덤으로 될 판이었다.

  이때 신령스런 일이 아니라면 해석하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운학이 갱도작업을 검사하느라고 마침 사고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한발 빠르면 그 역시 갱도에 갇히고 한발 늦으면 갱도에 갇힌 군인들이 송장으로 되는 시점이었다. 뒷이야기이지만 항간에는 신물神物의 ‘용’이 물불을 가릴 줄 모르는 군인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는 얘기가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그들을 어렵사리 구출하고 잠시 숨을 돌리던 이운학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더란다. 그때까지 미처 북쪽의 갱도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도 돌사태가 일어났다면 갱도에 갇힌 사람은 벌써 주검으로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금세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이운학은 가파른 그 산비탈을 언제 어떻게 대어갔는지 모른다. 다행이 먼발치에서 벌써 갱도 입구에 모여 있는 군인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운학은 여기에는 별일이 없었구나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갱도 입구에서 그 무슨 괴성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흡사 용의 몸뚱이를 방불케 하는 굵은 물줄기가 흉흉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무렵 산기슭에서 밭일을 하던 봉림동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때 아닌 골물에 밭이 모래무지처럼 좔좔 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맑은 날씨에 무슨 날벼락이오?”
  “이건 용왕님을 노엽힌 거로구먼.”

  촌민들은 난데없는 골물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운학은 촌민들을 안심시킨 후 부하들과 함께 폭파로 물구멍을 막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수차의 사투 끝에 겨우 물줄기를 막을 수 있었다. 성깔을 부리던 ‘용’은 그때부터 다시 산속 어디론가 잠적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운학은 군부대에서 퇴역한 후 용정 시내에서 살고 있다. 그는 지금도 모아산을 지날 때면 저도 몰래 걸음을 멈춘다고 한다. 그 때 그 일은 그에게 평생토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기실 모아산의 ‘갱도’에는 다른 일화도 있었다. 그때 군인들은 식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용산 마을에 토끼를 길렀다고 한다. 그런데 토끼가 마을에 군인들처럼 ‘갱도’를 줄레줄레 파놓을 줄이야! 모아산에 나무우리로‘집단부락’을 만들고 토끼를 강제로 이주시켰더니 이번엔 죄다 수풀로 뿔뿔이 도망했다고 한다.

  그처럼 짐승들의 별천지가 아닐지 한다. 훗날 백수百獸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가 모아산을 찾아왔다. 등산로 입구의 호랑이 석상은 워낙 산기슭의 기차역 앞에 있었다. 예전에 시민들은 호랑이가 시내에 내려와 있는 게 불길하다고 하면서 석상에 늘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세간의 그런 불안 때문인지 정부는 나중에 호랑이를 산신처럼 모아산에 갖다 모셨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용이든 호랑이든 이곳이야말로 하늘 아래에 있는 그들의 진정한 둥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모아산은 기둥을 박고 전망대를 만들며 철심을 박고 기상대를 세우는 등 인간의 ‘둥지’로 둔갑하고 있다. 산에 봉림鳳林은 다시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용’이 그냥 둥지에 숨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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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로웅선
날자:2013-04-24 19:32:34
제가 조금들은 바에 의하면 모아산 이름에 관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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