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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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에 나타난 조선역관
2011년 12월 05일 15시 36분  조회:6840  추천:2  작성자: 김호림
  
  산해관은 만리장성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다.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쌓았다고 전하지만 산해관은 진秦나라가 아닌 명明나라 홍무洪武14년(1381년)에 설립된 관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시발점인 산해관은 중원 일대에서 만주 지역으로 통하는 요로에 위치, 당시 중국에서 첫손 꼽히는 관문 도시였다.


  근대 이전 조선의 사절은 해마다 두 번 이상, 한 해에도1천명 이상 이 길을 따라 베이징을 오갔다고 한다. 중국을 다녀간 조선사람 치고 산해관을 모른다는 건 진짜 불가사의라는 얘기가 된다. 지금도 산해관을 찾는 한국인들은 적지 않다. 거개 관광차로 오는 사람들이다. 부근의 유명한 피서지인 북대하北戴河에 놀러 왔다가 산해관을 거치는 경우도 있다.

  산해관의 경관은 옛 성벽에 둘린 불과2㎢ 크기의 작은 성읍이 주체를 이룬다. 이 성읍에서 장성의 첫 관문인 ‘천하 제1관’을 빼놓으면 산해관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정도이다. 그래서 모두 관문 앞에서 사진 한 두 컷 박으면 그걸로 끝내고 ‘줄행랑’을 놓기 일쑤이다.

  이 때문인지 산해관에 ‘조선역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다. 진황도시 관광관리위원회 주임으로 있는 이걸李杰 씨는 산해관 태생이며 또 백의겨레의 핏줄을 이어받은 조선족이다. 이걸 씨 역시 산해관의 조선역관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까? 산해관 어디에 그런 명소가 있어요?”

  ‘혹여나’ 하는 생각에 산해관 장성박물관을 찾았다. ‘천하제1관’의 부근에 위치한 산해관 장성박물관은 약800정보의 부지에7개의 전시실을 갖고 있었다. 작은 시내에 비해 어마어마한 덩치에 무척 놀랐다. 박물관은 산해관의 지리, 형성, 변혁 등 내용을 자세히 전시하고 있었다.

  장성박물관에는 조선사절과 관련한 그림2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한국 명지대학에서10년 전에 기증한 모조품으로, 조선사절단의 수행 화백이 그렸다는 ‘산해관 내외도’ 그리고 조선사절단의 그림 모조품이 전부였다. 조선역관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역관의 위치 등 자료를 기대했던 마음은 금세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설달례薛達禮 씨가 조선역관의 위치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설 씨는 본래 산해관 고성보호개발지휘부에서 근무했는데, 직업관계로 산해관의 지리와 역사에 아주 밝았다. 그는 조선역관은 명나라도 아닌 청나라 때의 역관으로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고 하면서 옛 성읍의 서쪽문인 영은문迎恩門의 동북쪽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설달례라는 이 이름은 미상불 옛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당나라 군대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설례薛禮을 상기시킨다. 어쩌면 설례의 후예가 고구려 정벌이 아닌 답사의 안내자로 나서는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스개 삼아 그 이야기를 했더니 설 씨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앙천대소를 한다.

  “그런 말을 자주 들어요. 정말 설례와 천년 전에는 한 집안이었을지 모르지요.”

  유적지 부근에 이르자 허물어지는 집 대문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한 장의 서글픈 풍속도를 그리고 있었다. 조선역관의 장소를 묻는 말에 할머니는 엉뚱하게 저만치 다른 곳을 가리킨다. 한순간 조선역관은 자료는커녕 장소마저 찾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근심되었다.



   “여기가 틀림없는데… 착각하시나 봅니다.” 설 씨가 변명삼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잡초더미를 헤집고 허물어진 집 근처로 다가갔다. 한두 채는 그런대로 벽체가 멀쩡했지만 이상하게도 추녀 끝 부분의 벽돌이 한두 장씩 이발 빠진 모양으로 비어 있었다. 문양이 독특하니까 틀림없이 누군가 훔쳐간 거라는 설 씨의 해석이다. 이곳저곳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문양이 새겨진 벽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집 하나를 찾았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을 뜻한다고 하는 태극太極 문양이었다. 그러나 집의 외양이나 내부구조에서는 더는 조선시대의 분위기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현지인들이 살면서 진작 허물고 뜯어 고쳤지요…” 설 씨의 말이었다.

  이런 집들은 독특한 문양을 제외하면 중국 북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민가와 조금도 다른 데 없었다. 문양으로나마 옛집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었다. 현재 정확한 위치마저 확인할 수 없는 러시아역관이나 여진족역관에 비하면 진짜 대박 같은 행운이었다.

  현지 정부는 성읍에 있던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고2003년부터 고성 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인민폐로 총25억 위안이 투자된 이 막대한 프로젝트는 하북성의 제1호 문화공정 프로젝트였다. 고성은2008년부터 대외에 개방하면서 명소가 더는 관문 하나뿐이 아닌 일곱 곳으로 늘어났으며 티켓 한 장 가격이 무려100위안이나 되었다. 북경 자금성의 티켓 가격이60위안인데 비하면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가격이다.

  그럴지라도 산해관의 명소 명단에는 여전히 ‘조선역관’의 이름이 적히지 않고 있었다. 사실 고성의 복원작업에는 ‘고려역관’ 프로젝트가 들어있었다. ‘고려역관’은 현지의 관습에 따른 ‘조선역관’의 별칭이다. 조선역관의 본래의 면적은0.7정보로 추정되며 복원하고자 했던 역관은 부지가 약1.5정보에 달한다. 현지정부는 이곳을 옛 역관, 요식, 쇼핑 등을 아우르는 관광명소로 개발하려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려역관’은 여전히 폐가 그대로 남았고, 바로 조선역관의 맞은쪽에 복원된 ‘대비원大悲院’의 웅장한 체구에 눌려 더구나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솔직히 조선역관은 현재의 복원하지 않는 폐가 상태로 두는 게 오히려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미흡한 자료로는 복원된 조선역관이 자칫 ‘뱀에게 발 그리는 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부질없는 게 아니다. 훗날 복원한 성벽 위에 쓰인 ‘산해관’ 중문 글자의 아래에는 엉뚱하게 영문 자모로 만든 표음 문자가 적혀 있다. 영문 자모로 만든 표음문자는 중문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지난 세기50년대 비로소 만든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의 부호가 엉뚱하게 시간을 거슬러 수백 년 전의 시대에 등장했던 것이다. 성내의 건물들도 새롭다는 이미지만 풍길 뿐 붕어빵처럼 똑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 사상 역참은 하루의 도보거리인30㎞를 상거하고 하나씩 설립되어 있었다. 사절의 ‘공관’인 외국의 역관은 이와 약간 다른 듯하다. 세간에 알려진 외국의 역관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 말이다. 조선역관의 경우에도 산해관과 베이징의 사이에는 풍윤豊潤 고려포高麗鋪 하나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려포는 베이징과 산해관의 가운데 위치, 이 두 도시와 각기 약150㎞ 상거한다.

  조선 사절들은 산해관에 많은 필묵을 남겼다. 요충지로서의 산해관은 물론이요, 산해관의 웅장한 위용에 감탄했던 것이다. 산해관은 여행기록 〈열하일기〉에서도 중요한 곳으로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은 산해관을 지나며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이 크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18세기의 조선 북학파인 담헌 홍대용은 박지원의〈열하일기〉와 함께 여행문학의 거작으로 꼽히는 여행기 〈을병연행록〉에 이렇게 읊고 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벌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에 밀치도다
  망해정望海亭 제 일층에 취후醉后에 높이 앉아
  갈석碣石을 발로 박차 발해를 마신 후에
  진시황秦始皇의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라한 행색이 뉘 탓이라 하리오.
 
  그때 조선사절들은 ‘산해관’ 관문을 지나면 곧바로 기자조선의 옛 강역을 밟게 되며 또 고구려의 서쪽경계에 다가서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옛날 조선 사절이 오갔던 산해관에는 오래 전부터 그들과 한 핏줄의 겨레가 살고 있는 걸로 널리 알려졌다. 지방문헌에는 일찍 수백 년 전의 요․금시기에여진족과 고려인이 살고 있었으며 지난 세기 초반에도 조선족이 정착하고 있는 걸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도 산해관에는10여 가구의 조선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진황도의 기타 소속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더구나 많다. 지금 진황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1천 가구를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외 또 이삼백 명의 한국인이 상주하여 있으며 성수기이면 한국 여행객들이 물밀듯 밀려든다. 진황도와 인천 사이에는 객화물선이 주당2회 왕복한다.

  설 씨에 따르면 진황도를 드나드는 따이공帶工만 해도 백 명을 넘는다고 한다. 따이공은 일명 소상인이라고 하는데 국제선에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화물을 들어준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재미있는 건 다른 국제선에는 없고 오직 한국과 중국을 왕래하는 객화물선에 있다는 것이다. 부두에 가서 따이공이라는 명사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지만 정작 국어사전에는 따이공이라는 명사를 찾아 볼 수 없다.



  옛날 산해관 서쪽에 터전을 잡고 있었던 기자조선의 사람들과 그 고토 위에 성을 쌓고 살았던 고구려사람들은 훗날 조선의 사절들이 이 천하제일의 관문을 드나들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 이처럼 봇물을 이뤄 산해관의 관문을 메우리라고 상상인들 해보았으랴.

  진짜 놀라운 일은 저녁에 현지 식당에서 벌어졌다. 설 씨가 주식으로 숴이판水飯, 물밥을 불렀던 것이다. 처음 듣는 낱말에 어정쩡해 있는데 물에 쌀밥을 말아놓은 음식이 식탁에 올라왔다. 옛날 고향에서 숭늉에 밥을 말아먹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히 되살아났다.

  “우리 산해관의 별미이지요. 입맛에 괜찮겠어요?”

  어정쩡해 있는 우리에게 날아온 질문에 대뜸 뭐라고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고향을 천리 넘어 등진 타향의 산해관에서 물에 말아놓은 밥을 먹다니? 옛날 장성 위에 떠올랐던 조선역관과 장성을 넘나들던 조선사절의 모습이 금세 눈앞에 아련하게 밟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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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저자
날자:2011-12-08 17:04:50
1. 하북성 동부지역(산해관 인근)에는
조선성과 고려성 등 유적이 아직도 적지 않게 잔존하고 있습니다.
사정상 일일이 거명하지 못하고, 또 일일이 올리지 않음을 양지해 주십시오.

2. 실은
선민(유민, 포로)의 족적이 묻혀있는 지명의 현장이 낙양 등 지역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있는 서안에는 또 '고려마을'이 있는데요...)
그런 현장을 (특별히) 찾아보는 것 역시
굳이 그들의 후예가 아니더라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숙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작성자 : 로웅선
날자:2011-12-08 13:29:05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까 "락양성 십리허에"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 문장에서 그 옛날 조선 땅에서 끌려온 유민들을 많이 그리며 애탄의 감정을 내비쳤던데요
같은 민족의 글이라 동감은 많이 갑니다 특히 쌀밥이 없는 타국에서의 처참한 모습을 그렸던데요 저도 감명 깊습니다
저도 연대 졸업하고류하현에 배치받아 가던중 이밥을 먹으려고 길림시 식당을 근방을 다 돌아 다녔는데 그런 곳은 없구요 모두 가 밀가루 음식 이였습니다 억지로 먹었는데 입맛은없었습니다 물론 방법이야없지요 민족마다 식습관이 다르니깐
여기서 제가 특히 지적할것은 락양에 가서도 유민을 그려 보고 전적을 찾아 보는것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과분하지 않으신지요 그 애환의 심정은 리해되지만요
이상 진솔한 말을 했으니 개의치 말기 바랍니다 작자님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2   작성자 : 김도사
날자:2011-12-08 13:00:02
산해관이 옛날 조선의 땅인가?...
1   작성자 : 로웅선
날자:2011-12-08 05:29:30
역관의 개념에 대해 나도 좀 알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나라 관원이나 행상객이 머물었다 가는곳이겠지요 역관이 어찌 여기뿐이겠습니까 명나라와 청조말년에도 조선국과 서로 우호 래왕이 있었더구만요 력사 선생한테서둘은 말이고요
그러하니 오늘날 중한 량국은 더욱더 우호적으로 지냅시다 자고로 옜날것은 다시 못 찾습니다 중국도 청조말년에 동서로 백만평방공리의 땅을 뺏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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