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제비야 제비야
김 금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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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나의 친할머니가 아니라는것은 내가 한참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였다.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일이였다. 내가 그토록 든든해하고, 닮고싶어하고, 좋아했던 할머니가 워낙에 나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였다니.
나에게 굳이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던지,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겨서인지 사실을 알고 있는 할머니와 엄마와 삼촌고모들과 오빠, 어느 누구하나 나를 붙잡고 엄숙하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큰 고모와 큰 삼촌이 내 동생들을 하나 둘 셋 낳아서 코흘리개들로 자래울때까지 나만의 착각속에서 아무 걱정없이 즐겁게 지낼수 있었다. 할머니란 단어는 내게 여전히 정겨운것이였고, 설날은 내게 여전히 1년중 가장 신이 나는 대목이였었다.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네 설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삼촌들은 동네 아무개네 집의 돼지나 소를 잡는데 쏘다녔고, 오빠와 막내삼촌은 까투리나 참새들을 곧잘 잡아왔었다. 코흘리개 동생들이 볼을 빨갛게 얼리우며 바깥에서 폭죽을 터뜨리면서 놀때에 나는 고모들과 마실 온 동네 아낙들이랑 따끈한 구들위에 앉아서 송편이나 만두나 떠오뽀우 같은 떡을 빚었다.
할머니네 동네는 크지는 않았지만 여느 잡거지구의 조선동네처럼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여러 출신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으므로 집집마다 음식솜씨가 조금씩 달라있는것이 오히려 당연하였다. 그중에서 할머니네는 주로 경상도와 강원도의 조리법을 대충 절충해서 음식을 만들군 하였으며 한족동네들 틈바구니에 살아가는 세월이 길어지면서는 그네들의 생활풍습이나 조리법 같은것도 터득하여 함께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송편을 빚어서 찌기도 하지만 할머니네의 송편은 먼저 쌀가루를 쪄내여 익반죽을 한 다음에 빚어내군 하였다. 고모들은 양철고뿌들을 가지고 와서 얇게 밀어진 떡반죽위에 팥소를 놓고 다시 한번 반죽을 끄당겨 소를 덮은 뒤에 고뿌언저리로 반달모양이 되게 꾹 찍어내군 하였다. 그렇게 찍어내고 남은 사이사이 삼각무늬의 뜨거운 떡반죽을 그대로 뜯어서 훌훌 거리며 입에 넣고 씹어 넘기는 맛이란 또한 뜨끈뜨끈 쫀득쫀득 별미였었다.
절편무늬를 내는 판이 없어서 할머니네는 소주잔으로 꽃모양을 찍어주군 하였다. 반죽을 길고 좁게 밀어준후에 일정한 간격으로 소주잔을 엎어서 동그랗게 원을 찍고 , 바로 돌려와 밑둥으로 그 원안에 꽃을 찍어주었다. 마침 그것은 오각의 별처럼 예쁘게 보였었다.
한 동네에 시집을 간 큰 고모는 만두피를 잘 밀군 하였다. 식구들이 많아서 항상 만두를 몇백개씩 빚어야 했는데 만두만큼은 여자들뿐이 아니라 남자들인 삼촌들까지 모여앉아 빚어주군 하였다. 개중에서 만두피를 미는 일은 할머니가 아니라 한족여자들처럼 한꺼번에 두세개씩 쥐고 미는 큰 고모가 맡았었다.
그러나 큰 고모마저 지금까지도 온전히 배워내지 못한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입쌀순대였다. 그믐날 저녁 온 식구랑 같이 먹고 마시고 춘절만회를 구경하면서 늦게까지 지새우다가 아침일찍 일어나기란 사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한 할머니의 입쌀순대는 언제나 설날 아침 새벽에 만들어졌었다.
하얀 성에꽃이 두껍게 피여있는 창문바깥은 아직 컴컴하였고, 댈그덕 거리는 소리에 어느 삼촌의 커다란 신을 꿰신고 부엌에 나가보면 바로 할머니가 둘째나 셋째 고모와 같이 순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커다란 대야에, 불린 입쌀이며 탕을 친 야채며 돼지피같은 양념들을 함께 버무려 소를 만들어 담고 그 앞에 앉아, 길고 긴 돼지창자에 쇠줄을 끼워서 아구리를 동그라니 벌려 숟가락으로 소를 바지런히 퍼넣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식구들이 매일 먹을수 있는 여러가지 풍성한 먹거리들은 결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였다. 내 기억속의 할머니네 다섯개의 조선가마와 서쪽 방 부엌에 걸린 하나의 커다란 한족가마는 늘쌍 바지런히 움직이는 할머니와 같이, 항시 무엇인가를 바글거리며 끓여내고 있었던것 같았다.
풍성한 설날 아침상을 내오기전에 할머니는 해마다 빼먹지 않고 할아버지 상을 먼저 따로 차려내군 했었다. 법대로 다 할수는 없지만 항상 성의를 다하여 갖출수 있는 모든것들을 깔끔히 갖추어 내놓은 할아버지 상에는 늘 밥을 두둑이 퍼담은 공기에 놋쇠 숟가락이 곧게 꼳혀있었다. 삼촌들이 술을 붓고 절을 한 뒤는 오빠차례였으며 나와 동생들은 절대신 경례를 했던것 같았다.
평소 그렇게 자유스러운 할머니였지만 할아버지 상앞에서만큼은 우리들이 하는 매 동작 하나하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군 하였다. 특히나 막내 삼촌과 오빠의 차례에 다가와서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긴장하며 서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혹시 제비 두마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녕감, 이 아이들을 굽어살펴주소. 신통허니 넝감을 닮아가는 막내아들이유. 서나답게 생겨묵었으이 앞날로 어쨌거나 잘 풀리게 지캐주소. 그라고, 벼락도 몬친다는 7대 장손이요. 얼매나 귀하게 생기고 얼매나 바르게 자랐는지 좀 보소. 공부를 고라고 잘 헌다니 영낙없이 출세할 감이잖우. 그렇게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할머니를 모시고 우리들의 세배도 끝난후에 아침상까지 물리고 나면 한참나절이 지나군 하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다시 동네 장정들과 청년남자들의 세배인사가 시작되군 하였다. 고모들과 나는 그날 종일 집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삼촌들과 오빠는 나가서 동네 가장 연로하신 어른들 집부터 시작하여 돌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군 하였다.
언제 되돌이켜보아도 그런 장면들은 항상 흐뭇한것이였다. 온 동네가 한 집안이 된것처럼 서로의 아들이 서로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서로의 부모가 서로의 아들에게 덕담을 해주는것을 극히 자연시하고 당연시하던 날들이였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고모나 삼촌들까지 내게 굳이 그 얘기를 해주지 않았는 모양이였다. 할머니가 나의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런 분위기의 민족과 집안에게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것 만큼이나 중요한것은 아니였기때문이였다.
ㅡ친할머니지, 왜 아니야? 친할아버지의 할머니니까. 그것이 그들 모두의 이유였다. 얼떨결에 알아버린 할머니의 신상은 나를 잠시동안 혼란에 빠트리였다.
나는 곰곰히 앉아서 내가 혼란에 빠진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큰 삼촌과 큰 고모가 낳은 그 동생들이 원인인것 같았다. 나보다 한참 어린 그 애들을 보고도 할머니는 “내 새끼”라고 불러주었는데 나는 그 호칭이 나를 불러주던 그 “내 새끼”하고는 절대 같지 않을것이라고 단정지었었다. 나를 “내 새끼”하고 불러 줄때에는 고작해서 품에 그러안고 뒤잔등을 썩썩 문질러주었을 뿐이였는데 그 애들을 “내 새끼”불러 줄때에는 번쩍 안아들고 볼을 비비거나 입을 맞추어주기도 하였으니까. 그것때문에 나는 한동안 꽤 울적해했었다.
ㅡ얘, 너는 이제 명후년이면 중학생이다. 걔들은 아직 어리잖니? 하고 엄마가 나를 달랬었다.
ㅡ아니야, 어쨌든 친손녀가 아니니까 다른거야. 친할아버지도 없고, 아버지도 없잖아. 여전히 나를 “우리 김씨네 장손녀”라고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알리고있었고, 여전히 나를 “어이구 내 새끼”라고 불러주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할머니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할머니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동네사람들이 “장손녀”인 나와 큰 삼촌의 딸레미를 번갈아 볼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이군 하였다.
ㅡ이잉, 우리 녕감 큰 아들 국주네 딸이여. 그려, 일찌기 없어지고 아들 딸 하나씩 남겼제. 그 전에도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던지, 내가 어려서 기억을 못했던것 뿐인지 알수가 없었지만 그즈음의 나는 할머니의 억양에서 미묘한 변화를 애써 찾아내군 하였다. 왜 우리 녕감 큰 아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뒤끝에 ㅡ불쌍한거 하는 말은 왜 붙일까?
그래서 나는 동생들과 같이 서서 누룽지를 받아 먹을때 할머니가 크게 뜯어주어도 의심하였고, 작게 뜯어주어도 새침해하였다. 마실 온 동네사람들앞에서 자식자랑을 늘여놓을때 나는 살그머니 곁에 앉아서 막내 삼촌과 오빠 둘 사이에서 할머니가 누구를 더 많이 거론하던가 하는것을 따져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해의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네로 가기를 거부하였다.
ㅡ왜? 할머니 기다리시는데…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둘째 삼촌이 나를 데리러 들렀으나 나는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ㅡ오빠랑 가세요. 이번 설에는 엄마랑 같이 쉴거예요. 거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나와 같은 이유에서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엄마는 항상 이런저런 핑게를 대고 우리들만 할머니네로 보내고 늘 혼자 남아 설을 쇠군 하였었다.
ㅡ여자는 시집에 가서 설을 쇠야지만, 이해해주세요, 어머이. 애들은 보낼께요. 그것은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사이에 도무지 넘을수 없는 마지막 장벽이였나 보았다. 피줄의식이 거의 사라져가는 시대에 남자들마저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 남편의 친어머니도 아닌 여자에게 설을 쇠러 간다는것은 엄마가 기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책이였던 모양이다.
오빠도 어느핸가는 엄마곁에 남아 설을 쇤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한번뿐이 였을뿐 그 다음해에는 다시 할머니네로 갔었다. 오빠는 언제나 나보다 철이 든 아이였었다.
나는 그 해 이후로 연속 몇해동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기까지 다시 할머니네로 설을 쇠러 가지 않았었다. 사춘기의 반항심리도 한몫 하였던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할머니와 삼촌들과 고모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의 반항을 근거있게 나무라지 못하였다. 땅을 나누고, 시집장가들을 가고, 또 무언가들을 갈라가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마침내 나뉘기 시작했던것일까.
예전에 동네총각이랑 눈이 맞아 도망가다가 머리채를 잡힌 고모의 종아리를 후려치던것처럼 할머니는 왜 내 뒤잔등을 털썩 후려치지 못했을까. ㅡ 이 문디 가시내, 누구를 닮아서 못되먹은 속아지야, … 하고 왜 야단 한번 시원히 치지를 못했을까. 몇년동안 들어보지 못한 할머니의 욕설이 그리워서 설날 즈음이면 나는 몰래 슬퍼했다.
그런 나의 유치한 슬픔을 누가 알수 있을까. 오빠라면 알수 있을것 같기도 하였다. 벌써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던 오빠, 항상 나보다 철이 먼저 들어있던 오빠는 내 슬픔을 다 알수 있을것 같았다.
ㅡ대단한 사람이야, 할머니는. 그게 오빠가 계속 할머니네로 다녔던 이유였다.
ㅡ강하고, 바른 여자지. 이것은 엄마의 이유였다.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할수 없었다. 나는 그저, 막연히 오빠와 엄마의 판단이 옳을거라고 인정하였다.
친손녀가 아니였는데도 나를 “내 새끼야”하고 불러주었다는것 만으로도 할머니는 “대단한 사람”이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불러주던 마음이 도대체 얼마나 진심이였을까 하는것을 어떻게 따질수가 있겠는가. 내가 들어온 어떤 부름보다도 듣기에 좋았다는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게 아니였던가.
나는 나 자신을 그리 설득하였다. 다시금 버스를 타고, 한 동네서 사는 큰 고모부의 오토바이뒤에 앉아서, 나는 할머니네로 가 설날아침에 올망졸망 더 많이 늘어난 동생들과 같이 공손히 세배를 드렸다.
동생들보다 머리가 더 크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말을 빌자면 “장손녀”란 이유로 내가 받은 세배돈은 그애들보다 더 많았다. 언니야 보고싶었다. 하면서 찰싹찰싹 달라붙는 여동생들과 처음 보는 나에게 누나 누나 애교를 떠는 남동생들을 보며 나는 이상야릇한 책임감도 희미하게나마 잠시 느꼈던것 같았다.
그애들은 하나같이 생기있고 활발하고 건강하고 대수롭게 자라가고 있는듯 하였지만 사실 그들중 어떤 애는 부모가 벌써 이혼하였고, 어떤 애는 매일같은 전쟁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어떤 애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잃어버렸었다.
엄마와 오빠도 인정한 할머니의 다른 한 대단함은 바로,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어려운 생활배경속의 아이들이라도 하나같이 구김살 없이 밝고 명랑하게 키워낼수 있다는, 그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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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게도 왜 욕심이 없었을까. 건강하고 밝은 아이들을 키우는것 외에 다른 어떤 더 많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아이 하나쯤 키워내는것, 그런 바램이 왜 없었을까. 한 동네 평범한 청년한테 시집을 갔거나, 이웃동네 싸움대장과 눈이 맞아 도망을 갔거나, 기껏해서 읍내 말단 공무원과 식을 올린 고모들은 제쳐놓고, 그렇다 할 일자리가 없어 마작으로 소일하는 둘째와 자그만 구멍가게로 근근히 살아가는 첫째 아들을 보면서 할머니도 이웃들과 비교란것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마지막카드는 막내 삼촌이였다. 오빠와 같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둔 막내 삼촌 명이는 할머니가 길러낸 자식들중에서 학교를 가장 오래 다닌 아들이였다.
어려서부터 명이는 동네애들의 용감하고 의리있고 지혜로운 대장이였다. 명이는 동네 애들을 지휘하여 아무개네 집 뒤뜨락의 오이를 감쪽같이 서리하였으며 도랑에 나가 붕어새끼와 미꾸라지들을 한 대야씩 잡아 오기도 하였고 더 자란 후에는 다른 동네 소년들과의 축구시합을 지휘하거나 심지어는 패거리싸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한 반에 다니는, 이웃동네에 살고 있던 모 여학생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중학생인 명이가 불량뱅이 몇명이랑 싸움을 벌였는데 그 중 약하고 겁많은 불량뱅이 하나의 귀가 찢어지는 바람에 명이는 그만 학교생활을 접게 되였다.
천성적으로 뛰여난 눈썰미와 물불 가리지 않는 대담한 실험정신이 군인으로서 여장까지 지냈던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였었다. 검실검실한 피부에 튼튼한 근육, 번뜩이는 눈매와 끝매가 올라간 숱진 눈섭,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듯 오빠보다 명이를 더 좋아할때가 많았다. 명이에게는 청고한 선비같은 오빠에게서 도무지 느낄수 없는 어떤 통솔자의 강하고 호방한 분위기같은것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을 매혹시켰었다.
항상 일을 찾아서 움직이는 할머니를 닮아서 명이도 새벽같이 일어나 늘 바지런을 떨었었다. 학교를 나오고 철이 들어가면서부터는 집안의 고장난 기계를 수리하거나, 성능이 더 뛰여난 충전기를 만들어내거나, 손잡이 트럭트를 운전하고 밭에 나가 일을 돕는다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었다.
바라던것 이상으로 그는 동네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인근의 한족동네들에서까지 탐내는 젊은 기술일군이 되였다고 하였다. 누구네집 텔레비와 누구네집 탈곡기와 누구네집 트럭트를 수리해주거나, 명실공한 전공의 수입까지 합쳐서 명이의 수입은 동네 어느 청년치고 더 짭짤했던 모양이였다.
도시의 대문들이 농촌청년들을 향해 열리는 시대를 맞아서 막내 삼촌 명이는 첫 사람으로 동네를 떠났고 떠난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동네사람 모두가 생각지도 못했던 돈을 벌어 보내왔다.
그것은 할머니를 참으로 득의하게 만드는 일이였다. 우리 막내 고것은… 하고 시작되는 할머니의 자랑은 그렇게도 자신있고 흐뭇한것이였다. 아직 시작다운 시작을 하지도 않은 마당에 할머니는 벌써 명이가 이미 금의환향이나 한것처럼 매듭지어 얘기하였다.
ㅡ머리를 했던 놈은 결국 어데로 가든지 머리만 하는기라. 명이보다 공부도 더 많이 했고 시내에 힘있는 친척들도 있다는 아래 집 아줌마가 아들자랑을 꺼낼라치면 할머니는 곧 왕년의 암펌기세를 부리면서 무자비하게 눌러놓군 하였다. 오직 할머니는 오빠가 있는 자리를 꺼려했는데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침을 튕겨가며 자랑을 늘어놓다가도 오빠가 들어서는것을 보면 흐릿하게 말끝을 거두어버리군 하였다.
멀끔하고 총기있는 대학생을 대하는 자비감이였을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한 어미의 자존심이였을까. 나는 그것이 그때 즈음 온 동네에, 온 도시에 퍼진 “비교의식”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하군 한다. 비교를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너”와 “나”로 나뉘여졌고 그렇게 갈린한 누가누가 더 나을까? 에 대한 답안을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대학졸업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오빠를 볼때마다 그런 분위기속의 할머니는 제비 두 마리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한 놈은 둥지에 앉았고, 한 놈만이 훨훨 날아갔다는 그 태몽이 말이다. 왜 할머니의 태몽에 대한 신념이 그리 확고했는지 모를 일이였다. 누가 법으로 정해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둥지에 앉은 제비는 평범한 인생을 뜻하고 훨훨 밖으로 날아간 제비는 출세한 인생의 징조라는것을 말이다.
은연중에 그것을 믿기는 엄마도 매한가지였다. 할머니의 태몽을 듣는 순간부터, 할머니가 아직 그 제비가 오빠일거라고 덧붙이기도전에 엄마는 벌써 스스로 오빠의 출세를 철석같이 믿었었다.
양친에게서“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여난(엄마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오빠는 과연 세살에 수자를 백까지 달달 외울수 있었으며, 다섯살에 20이내의 더하기 빼기셈을 할수 있었다. 수자뿐만 아니라 글자를 기억하는 능력도 비상하여서 달리 가르친적이 없는데도 숙제장을 검사하는 엄마의 어깨너머로 많은 한자를 깨우쳤다고 하였다.
오빠의 천재성은 결코 엄마가 날조한것이 아니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단연 앞자리만을 차지했던 오빠의 성적표가 그 유력한 증거물이 되였다. 오빠는 그가 다녔던 학교들의 살아있는 전설로 남았었다. ㅡ교과서를 통째로 달달 외울수 있었대. 또는 ㅡ선생님이 대답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나. 이러루한 부러움의 찬사들은 4년이 지나 그 학교 그 학년에서 공부하는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왔었다.
자신의 바램을 무너뜨리지 않고 중점대학교까지 성내 1등의 성적으로 가준 오빠가 엄마는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엄마는 늘 그녀답게 겸손한 어투로 오빠를 자랑하였었다.
ㅡ 뭐 성적이야 나와 봐야 알지요. 애가 워낙 덜렁거려서… 하고 엄마는 오빠보다 성적이 많이 못한 애들의 부모에게 말해주군 하였다. 둘째 삼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명이에 대한 자부심을 전해 들었을때, 엄마는 안됐다는듯이 머리를 저으며 ㅡ글쎄, 그 좋은 재주에 공부만 좀더 했더라면… 하고 쯧쯧 혀를 차주었다.
엄마는 아마 정말로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순간 갑자기 불편하게 굳어진 할머니의 얼굴근육을 볼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동네 다른 어른들에게 하던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당장에 반박을 하지 않고, 말없이 김치를 집어 써걱써걱 잡수셨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의 엄마가 별로 존경스럽지 않았다. 엄마의 몸에는 타고난 교만같은것이 항상 배여있었는데, 나는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우수한 유전자”? “양호한 교육배경”? 그런것은 과연 얼마나 근거 있는것일까?
엄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타고난 좋은 것과, 노력해서 이룬 좋은 것을 가지고 늘 주위사람들을 내려다보군 하였다. 자신의 그런것들보다 못하다고 해서 꼭 기시하고 조롱하는것은 아니였다. 더 많이는 가여워하고 동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기울어진 동정이 은연중에 항상 존재하던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을 막아버린다는것을 그녀는 알지 못하였다.
바로 그런것으로 부터 시작된것 같았다. 오늘에 와서 이렇게 버성겨지고,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우리가 된 원인이 말이다.
6
ㅡ친척은 무슨, 사기꾼도 그런 사기꾼이 어디 있어요? 오빠와 결혼한지 3,4년 되는 새 언니가 분개했었다.
ㅡ 뭐 형님같았고 친구같았던 삼촌이라고요? 헛, 세상에 가장 기본적인 인간도 못되는 사람이예요. 새 언니는 필경 남이였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오빠에게로 시집와 같이 살게 된 새 언니는, 그 전의 오빠와 막내 삼촌 명이의 관계를 다 알수 없었다.
한 해에, 한 달에 태여나 쌍둥이처럼 자란 오빠와 명이삼촌, 그들지간에는 다른 삼촌고모들과 있을수 없는 어떤 동지애가 있었었다. 오빠보다 겨우 열흘 앞서 태여난 명이는 그 강한 성격에 누가 봐도 탄복하리만치 유별나게 오빠를 위해주군 하였다. 할머니동네 애들과의 군사놀이에서 명이의 빽으로 오빠는 그나마 졸개를 면하고 무슨 장 하나를 차지할수 있었으며 같은 중학교 한 반을 다닐때에는 여러번의 패거리싸움에서 오빠를 구해주었었다.
오빠는 명이를 대놓고 “삼촌”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철이 들면서부터는 사람들앞에서 항상 “명이삼촌”이라고 호칭했었다. 나름대로 오빠는 명이에 대한 의리를 지켜주었는데, 예하면 이웃동네 아무개와 “혈전”을 하러 간 명이의 행방을 절대 할머니한테 고해바치지 않는가 하면 학교 지도부의 “담배피운 애들의 명단”같은데에 절대로 명이의 이름을 적어넣지 않는것이였다. 그것은 다른 애들한테는 크게 의리시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성실을 목숨같이 여기는 오빠에게는 대단한 희생이였었다.
ㅡ그런 시시컬컬한 옛날얘기를 해서는 뭐해게요? 이제 너도나도 다 변한 세상에. 새 언니는 오빠와 내게서 그런 얘기를 다시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이가 사기쳐서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오빠의 돈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나도 분을 참을수가 없었다. 둘사이에 어떻게 구두계약을 하고 어떻게 자금조달을 했는지 목격하지 못하여서 구체세절은 알수가 없었으나 암튼 시종일관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오빠에게 결코 하자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하여서였다.
20만원, 그것이 적은 액수의 돈이란 말인가. 물론 그것은 상대적인 수자로서 백만장자의 눈에는 형제간의 의리까지 상하게 할 금액은 아닐수 있었다. 그러나, 오빠같이 횡재의 기회가 전혀 없는, 가장 성실한 노력으로 더디게 치부할수 밖에 없는, 한 기업의 월급쟁이한테 그만한 금액은 다시 모으기에 너무 힘이 드는 수자였다. 게다가 그것의 일부는 현금이 아니라 동료와 친구들한테서 빌린 빚이였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의 아내로서 새 언니의 속은 얼마나 까맣게 그을렸겠는지.
ㅡ어머니, 저 그 사람 용서 못해요. 아니, 안해요. 현이아빠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참고있겠지만, 전요, 언제든지 그 사람 찾아가서 다 받아낼거예요! 새 언니는 이제 막 뛰여다니기 시작한 조카애를 둘쳐업고 엄마의 집에 찾아와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하소연했었다.
ㅡ어머니, 우리 현이아빠가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빌린 돈인지 다 알잖아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도 다 알잖아요. 근데 어떻게 우리한테 그럴수가 있어요? 그것도 무슨 삼촌이란 사람이? 나 정말 억이 막혀서… 엄마는 며느리의 하소연을 들을때마다 눈을 내리깔고 탁자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며 후우ㅡ 한숨을 내쉬기만 하였다. 퇴직하고 집에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엄마는 폭삭 늙어버렸었다.
새 언니는 말이 좀 많은게 탈이였지만 남편한테는 무척이나 잘 하는 여자였었다. ㄱ시의 유명한 초등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 그녀는 업외시간에 주위 아파트의 아이들에게서 피아노레슨비를 벌어 생활비에 보태군 하였다. 천재성만 있었지 현실성이 약한 오빠와 달리 그녀는 무척 현실적인 여자였었다. 오빠의 령도나 동료들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처리해주는것도 그녀의 한낱 재주였었다. 오빠의 승진은 본인의 능력과 절대 무관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새 언니의 직접적인, 간접적인 참모나 도움과도 절대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빠는 대학졸업 10년만에 겨우 제1자동차공장의 부문 경리로 아득아득 승진을 하게 된것이였다. 새 언니를 만나 결혼하고 애를 낳으며 살아가는 동안, 엄마에게서 물려 받을것이 없는 오빠는 모든것을 스스로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것이 아파트를 사는 일이였을것이다.
눈앞에서 날아간 아파트가 생각키울때면 새 언니는 ㅡ요즘 세상에 나같은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아파트 하나 갖추지 못한 사람한테 덜렁 시집부터 온 여자가. 하고 심사가 바줄처럼 꼬인 말을 내뱉군 하였다. 새 언니같이 바보스런 여자는 사실 많은 남자들에게 필요한것이였다. 이런 희생적인 정신을 갖추지 못한, 너무 지혜로운 여자들뿐이라면 과연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할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하긴, 그 희생정신의 대가로 새 언니는 오빠의 “아파트 구입금 모으기”작전에 몸소 참가해야만 했었다. 50여평 남짓한 낡은 단칸 아파트에 세들어 살면서,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두 사람의 봉급을 차곡차곡 모았지만 아무래도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던것이다. 당장에 먹고 쓰고 할 돈은 걱정없었지만 몇십만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일에는 한참이나 무리였었다.
ㅡ에이, 지금 세상에 꼬박꼬박 봉급을 타가지고야 어디 언제 집을 사겄나? 바로 그 시점에서 오래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지내온 막내 삼촌 명이가 그들앞에 불쑥 나타난것이였다.
오빠네 낡은 아파트단지의 좁고 더러운 길곁에, 윤기 알른거리는 까만색 벤츠를 주차하고 차문을 열고나서 명이는 흔히들 말하는 “사장님”의 행색으로 내려섰다고 하였다. 이마가 벌써 벗어지기 시작한, 온통 번쩍거리는 명품들로 두둑하게 아래배가 나온 몸을 휘감은 명이를, 오빠는 금방에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대학을 나오고 일을 하면서 첫 몇해는 꼬박꼬박 할머니네로 설을 쇠러 갔지만 그 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오빠는 명이를 몇해동안 만나보지 못하였었다. 나도 예전처럼 할머니네로 다니지 못하였다. 내가 금방 대학을 나오고 연해도시의 한 기업에 취직했을 즈음에는 한창 출국붐이 고조를 이룰 때였었다. 여느 조선족가정들처럼 할머니네도 줄줄이 출국을 했는데 몇년동안 온 가족이 통째로 옮기다 싶이 했었다. 게다가 할머니의 국적도 회복이 되여서 몇년뒤에 만난 할머니는 명실공히 외국사람이 되여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머니네로 찾아갔던 그 해 설에는 마침 할머니와 고모 둘이 들어와있어서 나는 오랜만에 그들을 어렵사리 만날수가 있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나즈막한 초가집과 벼짚이 무더기로 쌓여있던 마당과 허줄한 싸리나무대문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막내 삼촌 명이의 후원으로 지었다는 높고 큰 기와집이 나를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온 동네에서 유일하게(처음이였으니까) 기름 보일러를 시공한 집이라고 하였다. 외국에서 몇년동안 살아온 사람들답게 삼촌들과 고모들과 할머니의 품위가 높아졌는 모양이였다. 세개나 되는 아궁이에 번갈아 불을 넣으며 우글거리는 식구들의 때시걱을 해야 했던 할머니네는 보일러와 씽크대 덕분에 전에 없이 깨끗하고 조용해졌다.
할머니네도 이렇게 깨끗하고 조용할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깨끗하고 조용하기때문에 그것이 할머니네 집이 아니라고 할수도 없지 않는가. 나는 내 봉급으로 사가지고 간 할머니의 스웨터 한벌을 가방에서 꺼내놓았었다. 내 기억속에서 항상 검은색 방한용 조끼만을 입고 계시던 할머니가 생각키워서 딴엔 백화점에 가 반나절을 돌아다니며 고른것이였다.
ㅡ이잉, 그려, 고맙데이. 이 늙은거 잊지도 아니허고. 우리 장손녀, 철이 다 들었네이. 할머니는 스웨터를 손에 들고 두어번 만져보고는 뒤자리에 놓으셨다.
ㅡ엄마, 장손녀 장손녀 하면서 그렇게 귀해 하더니만, 헛짓을 한건 아니였네. 고모들이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한국식퍼머를 한 고모들의 밝은 색 티셔츠를 보면서 혹시 내가 고른 스웨터가 촌스럽지는 않았을까 걱정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앉아 있을때에 바깥에서 욱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아이들 몇이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ㅡ 엄마엄마, 누구야? 하고 나를 가리키며 막내고모에게 묻던 여자아이는 신통히도 그녀를 닮아있었다.
ㅡ응, 언니지, 큰 언니. 내가 처음 보거나 그간 훌쩍 커버려 몰라 보게 된 내 동생들이였다.
ㅡ큰 언니는 매화언니잖어. 하고 그 중의 한 아이가 의문을 제기하였다. 큰 삼촌네 큰 딸레미를 이르는 말이였다. 그러니까, 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피끗 바라보았었다. 항상 이런 질문을 들을때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던 할머니, 나는 어느새 습관적으로 할머니의 대답을 기다리게 된것이다.
ㅡ매화언니는 매화언니고, 이 언니가 젤로 큰 언니여. 첨 봤제? 니들은? 하고 할머니가 늘 그랬던것처럼 몸소 답변을 맡았었다.
ㅡ아~ 하고 한 애는 머리를 끄덕이며 놀러 나갔고, 다른 한 애는 ㅡ그럼 어느 큰아버지네 딸이야? 매화언니네 아버지가 젤로 큰 큰아버지라고 했잖어. 하고 한 질문 더 보태였다.
나는 그 어린것의 고집스럽게 찌프려진 양미간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이는 왜 이런것에 흥미를 가질까. 정말이지 나는 이제 더이상 이런 질문과, 이런 질문에 관한 할머니의 답변을 듣고싶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얻어 듣던지 나는 그만 지칠것 같았다.
ㅡ이잉, 다른 한 큰아버지가 있었어. 지금 돌아가셨지만. 그 집의 큰언니여. 할머니도 많이 피곤한것 같았다. 나를 설명하는 일을 반평생이나 해오셨던 할머니도 이젠 쉬고 싶어하는것 같았다. 그때 막내 삼촌 명이에게서 전화가 왔던것이였다.
ㅡ 잉… 잉…그려… 몰러, 엊다 썼는제, 암튼 다 썼어. 글씨, 보일러기름만 혀두 한달에 만원이여… 알아서 보내. 누나들이야 용돈벢에 더 주갔나? … 이잉, 그려… 명이한테 후원을 요청하는듯한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 피곤했냐 싶게 우렁차게 들려왔다.
나는 그때 명이삼촌의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을수 있었다. 도시로 나가 옷공장, 식당, 공사판등을 전전긍긍하며 막벌이를 하던 명이는 출국대열에 섞이여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육지에서 샷시도 짜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데서든지 머리를 할 감”인 명이는 그런 막노동을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모모 외국“사장님”들과 함께 돌아와 이런저런 사업들을 벌리기도 하고, 혼자 국경선내외를 들낙거리며 이런저런 장사도 하다가, 그즈음에는 한창 위성안테나 사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마침 뜨거운 출국붐으로 하여 외국 방송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라 명이의 사업은 예상했던것보다도 겉잡을수 없이 잘 돼갔다고 하였다.
명이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가장 신형의 벤츠는 물론, 그 시내 중심지역에만 해도 세채의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명이는 벌어들인 돈 그 일부의 일부를 떼여서 할머니네 초가집을 밀어버리고 웬만한 소도시의 아파트값에 맞먹는 지금의 기와집을 지었으며, 뿐만아니라 여기저기 움푹움푹 패여서 운전하기 힘든 동네의 길도 수리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김명이란 이름은 할머니네 동네, 지어는 그 동네가 속한 전 진의 자랑이자 표지가 되였다고 하였다.
ㅡ그려, 느이 오빠는 잘 있제? 명이에 대한 자랑을 가까스로 멈추고서 할머니가 내게 당신의 “장손”을 물었었다. 명이의 화려한 경력을 듣고나서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였다. 아니, 말을 하고싶다는 의욕을 상실했던것 같았다.
비좁고 어두운 단칸방 세집의 기름때 찌든 씽크대앞에서 면을 삶아내던 새 언니의 땀에 절은 뒤잔등과, 그날 밤 현관문앞의 빈 공간에다 일인용 간이접이식 침대를 펴고 쪼그리며 자던 오빠의 구푸린 허리가 떠올라서 나는 한두마디로 얼버무렸던것 같았다.
ㅡ예, 뭐, 그저… 다행이 할머니네는 미리 어디서 얻어들은 사전지식이 있었는 모양인지 아니면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던지 더 캐묻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동네를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내가 왜 낭패함을 느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오빠와 새 언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사업단위도 쟁쟁하니 이름있었으며, 더욱이 그들은 옛날의 할머니네나 엄마같이 그 정도로 궁색하게 살고 있지는 아니질 않는가. 그들은 지금 시대 많은 사람들보다도 더 풍족하게 더 버젓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무엇때문에 나는 할머니네 앞에서 그들 얘기하기를 꺼려했을까.
7
“사기꾼”이란 말은 새 언니가 생각해낸것이였고, 사실 오빠는 그렇게 명이를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빠도 명이를 더이상 믿지 않고 있음은 말을 않고도 알아챌수 있었다. 오빠와의 불유쾌한 사건이 있은뒤 지금까지 연락이 끊어진 명이를 오빠는 이제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했다.
ㅡ 돈이란건 말이여, 다니는 길이 있는 법이제. 하고 오빠에게 명이가 말했다고 하였다. 명이는 그 즈음에 위성 안테나 사업을 접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대였다고 하였다. 운전석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 에어폰을 귀에 꽂고 간간히 다른 “사장님”들과 통화하며 한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명이를 보면서 오빠는 명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하였다. 돈이 다니는 길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거라고.
그러면서 오빠는 먼저 명이를 찾아가지 않은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했었다. 천재 대학생으로서 낡은 단칸방세집에 사는 오빠의 자존심도 있었겠지만, 혹시라도 명이한테 무의식적인 부담을 주지는 않을런지, 아니면 어떤 불필요한 오해라도 사지 않을지 싶어서 오빠는 더욱더 먼저 명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ㅡ야, 이렇게 가까운데 있는데. 이후엔 서로 연락하며 살자. 하고 명이가 일식집의 주차장에 벤츠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날에 두 사람은 모처럼만의 회포를 나누었고, 둘 사이의 정이 이후로도 변함없기를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아마 그순간의 기원만큼은 진실한것이였을지도 몰랐다. 오빠의 아들애가 백일을 지낼때 명이는 2시간 남짓 떨어진 ㄴ시에서 부러 찾아와 통이 큰 “사장님”답게 두툼한 부조 봉투를 새 언니손에 쥐여 주었다. 부조라는 명목외에 오빠가 다른 명목의 돈은 더 받지 않을것이였으니까.
그날의 잔치에는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오셨었다. 둘째 삼촌의 결혼식 이후, 10여년 만에 만난 두 여자는 서로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였다. 민감한 피부때문에 머리물감을 들이지 못하는 엄마는 희슥한 머리때문에 겉늙어보인 반면, 아직 정정하신데다가 외국 스타일을 많이 본딴 할머니의 진한 커피색 물감을 들인 파마머리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젊어 보이셨었다.
ㅡ그려, 똘망하니 지 애비 닮아서 잘 생겼네이. 하면서 증손주를 안아본 할머니는 빨간 봉투에 빳빳이 집어 넣은 몇장의 대단결을 엄마한테 넘겨주었다.
ㅡ아니, 뭐 이런걸 다… 하고 주춤주춤 봉투를 받는 엄마에게 다시 증손주를 넘겨주면서 할머니는 벌써 취하셨는지 당신의 손자와 증손자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었다. 어느 놈은 돐 때에 열다섯상을 차렸으며, 어느 놈은 시 중심의 ** 호텔에서 돌잔치를 치렀으며, 또 어느 놈의 잔치때에는 시의 어느 어르신이 왔었다는 등등의 자랑들을 끝도 밑도 없이 끄집어 내였다.
엄마는 묵묵히 할머니곁에서 콩나물김치를 집어 먹고 계셨다. 미구에 할머니는 그만 족하다고 생각되셨는지 입술에 튕겨진 침방울을 닦으며 ㅡ그려, 애들 아파트는 몇평이나 된것이여? 하고 대수롭게 물었었다. 콩나물대가리를 한창 꼬들꼬들 씹으시던 그 찰나에, 갑자기 부자연스레 굳어진 엄마의 표정은 옛날 둘째 삼촌네 결혼식에서 잠시 굳어졌던 할머니의 것이랑 신통히 닮아 있었던것 같았다.
ㅡ 뭐 아직, 차차 모아서 사야죠. 라고 힘겹게 말을 만들어 내는 엄마에게 ㅡ 그려? 난 또… 그라고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께 당연히 … 하긴 요즘 세월은 옛날같지 않아서… 하고 혀를 쯧쯧 차보이는 할머니, 나는 그 순간의 할머니가 옛날 명이삼촌을 안됐다고 동정하던 엄마처럼 별로 존경스럽지가 않았다.
아마 그때의 할머니도 꼭 오빠의 단칸 세집을 업수이 보아서 한 말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다만 오빠가 더 너르고 더 좋은 아파트를 사지 못한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그 더 너르고 더 좋은 아파트를 사지 못했다는 이유로 왜 오빠를 안타까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아파트나 돈을 근거로 한 할머니의 다른 한 교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할머니가 몸소 세운 근거는 아니였다. 그리고 할머니만이 의거하는 근거도 아니였다. 삼촌들과 고모들도 당연시 인정하는 근거였으며, 엄마와 오빠와 형님과 나 마저도 피해갈수 없는 근거였었다. 엄마와 오빠네 부부와 내가 만약 그런것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굳이 할머니네 앞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발이 쭈들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나는 막내 삼촌 명이에 대해 처음처럼 분개를 표할수가 없다. 아들들의 이익문제로 하여 도무지 화해할수 없는 엄마와 할머니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할수가 없다. 엄마는 눈 한번 깜짝않고 오빠 전부의 재산을 가져간 명이를, 명이를 두둔해나서는 할머니네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아니면 그냥 서운함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할머니 또한 자신을 도우려했다는 동기는 쏙 빼고 명이에게 악명만 뒤집어 씌운 오빠를, 그 오빠를 두둔할수 밖에 없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원망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섭섭해 할지 모르는 일이였으니까.
오빠에게 투자 어쩌구따위의 말을 꺼낼 때 명이는 아파트 셋을 다 밀어넣고, 회사를 말아먹고, 빚까지 지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단순히 사업을 담론할때 그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명이는 아메리카쪽에서 쟈켓의 오다를 가져오는 사장님을 알고 있는데, 독자적으로 하청 공장을 찾아서 물건을 만들어내고 수출하여서, 그중의 이윤을 뜯을수 있는 일이라고만 하였었다.
오다를 주는 회사의 가격과 하청 공장의 원가를 잘 맞추기만 하면 생산할 필요도 없고, 영업할 필요도 없고, 바로 그 중간차액을 차지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이미 명이와 그 사장님은 질량과 가격이 다 적당한, 믿을만한 하청공장을 찾았고, 몇번의 거래를 통해서 톡톡한 수입을 보았다고 하였다.
ㅡ이런 장사를 하다보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어. 그치만 아무데서나 딱 맞닥뜨릴수 있는 흔한 기회도 아니지. 안그래? 하고 명이가 여유작작 술을 마시면서 오빠를 건너 보았었다.
ㅡ10만원에 2만원이라, 그렇게 좋은 장사가 없긴 한데… 왜 그 사장님은 그 좋은 돈을 혼자 벌지 않는대? LC는 어떻게 여는지, 계약은 어떻게 썼는지, 여러가지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오빠는 차곡차곡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ㅡ문제는 자금이지. 거래가 잘 되면 오다는 더 많아지기 마련이고, 하청 공장이야 발품을 팔아서 찾으면 그만이지만, 먼저 생산을 가동할 자금은 우리가 내야 하거든. 지금 막 들어오는 오다를 미처 소화시킬새가 없어졌어. 지금 놓치면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갈거잖어. 호방한 성격의 명이는 우유부단하고 앞뒤를 너무 재이는 오빠를 나무랐다고 하였다.
대개 그러루한 상황이였다. 워낙 의심많고 조심스러운 오빠였지만 새 언니가 매일 쓰고 있는, 조그맣고 녹이 쓴 개수대를 생각하고, 자주 막히지 않으면 냄새가 역으로 올라오는 화장실의 변기를 생각하면서 결국 결정을 내렸던것이다.
처음 보낸 10만원에 아직 2만원이 붙어 돌아오기도 전에 명이는 재다시 10만원을 보내라고 하였었다. 물건이 곧 나가고 있으며 그쪽에 도착하는 당날로 계좌에 입금시켜준다며, 또 다른 하나의 오다가 들어와서 급하게 돈을 돌려 써야겠다고 했었다.
명이의 당당하고도 성급한 목소리는 오빠의 심사숙고를 무너뜨렸는 모양이였다. 당장에 보내주지 않으면 비겁하고, 의심많고, 경제원리를 모르는 무능력한 소인배가 될까봐 오빠는 흐리멍텅하게 돈을 보냈었던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무한정의 기다림, 일주일만 참으라던 말은 열흘로 연장되고, 또다시 이번달 말과 다음달 중순으로 미루어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러하듯 오빠는 기다리다가 불안해하고, 의심하다가 원망하고, 분개하다가 자포자기 했던것이다.
그런 뒤의 어느날엔가부터 뚝 끊겨진 명이의 연락, 어디로 간것인지 무엇을 하는건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대체 알수가 없어졌다. 오빠가 바질바질 속을 태우는 동안, 엄마는 얼마나 더 가슴이 아팠을까. 할머니한테 전화를 건 사람은 그러나 엄마가 아니라 새 언니였다. 새 언니는 명이의 모든 행위를 악하게 판단하고 할머니네에게 죄책감을 지워서 다문 얼마의 돈을 받아내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담화의 과정중에 형님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불손한 태도로 불경한 말들을 뱉었으며, 아직 왕년의 “암펌기세”를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되려 호되게 책망당했던것 같았다.
돈이란 것은 주고 받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명이가 고의적인 “사기”를 쳤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며, 지금 명이의 행방을 모르고 있기는 할머니네도 마찬가지일 뿐만아니라, 조카 며느리로서의 새 언니의 태도가 너무 건방졌다는 내용이였다.
이것들이 내가 듣고, 내가 기억하고, 내가 추측해낸 이야기의 전부다. 그 전화 이후로 다시 이어지지 못한 할머니네와 엄마와의 연락, 시간이 흐르면서 분은 점점 가라앉기 마련이지만 명이가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이상, 오빠의 돈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상, 화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결정할수 없어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머니를 잊은것은 아니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에미 손이 곱더라”하던 새 시어머니를, “이 천하에 못된 거”하면서 두들겨패던 강인한 여자를, 어찌 잊을수가 있었겠는가.
나도 그랬다.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김씨네 장손녀”라고 알리고 싶어하던 할머니를, “어이구 내 새끼”안아주면 뒤잔등을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잊어버릴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어떠할까? “어머이, 피줄이 무섭긴 무섭지 예?”하고 나를 흘기던 며느리의 고운 눈을 벌써 잊어버렸을까, 자신의 품안에서 그리 득의해하며 행복해하던 손녀의 웃음을 다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까.
사실 얼마전 엄마네 집으로 가는 도중, 나는 부러 할머니네 동네를 지나쳐 가본적이 있다. 동네를 들어가보지는 않았고, 택시에 앉아 천천히 한바퀴를 돌아보기만 하였었다. 반쯤 넘어 돌고 있을때 나는 기적처럼 그 동네의 하늘에 불쑥 나타나 날고 있는 제비 두 마리를 보았었다. 그랬다, 꽁지가 갈라지고 날렵하게 내리 꼰지며 우아하게 비행하는 폼이 영낙없이 제비였다. 검푸른 몸에 적갈색나는 띠가 둘러져 있는것이 우리 고장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귀제비였다.
그 두마리 귀제비는 쏜살같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 올랐다가 바람처럼 어느결에 지붕위로 꼰져 내려오군 하였다. 두 마리가 서로 엉켜서 날기도 하고 눈 깜짝할새에 반대방향으로 멀어지기도 하였다. 통 무슨 사인지, 무슨 분위기인지 알아 맞출수가 없었다. 다정한 부부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 아니면 둥지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원쑤인가?
택시는 할머니네 동네를 빙빙 돌다가 다시 방향을 새로이 접고 길을 떠났었다. 내가 내다보던 유리창바깥의 하늘도 택시를 따라 덜덜 떨며 이동하였고 그 하늘에서 그림처럼 날아예던 제비 두 마리는 끝내 더 따라오지 못하고 그만치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였다. 모든것이 그렇게 나타났다가 그렇게 사라지는 법이 아니던가?
다만 나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멀지 않은 우리의 장래마저도 그렇게 흐지부지 하는 중 돌이킬수 없는 아쉬움만을 남긴채 그렇게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것이 맘에 내키지 않았다. 차창문을 닫아 올리면서 나는 아직 천방지축 하늘을 날고 있을 철없는 제비들에게 혼자 속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둥지에 앉아 있어도 좋고, 훨훨 날아다녀도 좋지만, 다시는 아이를 잉태한 어떤 어머니의 꿈속에 날아들지 말라고. 설령 그것이 하나의 장난이였거나 실수에 불과하였더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