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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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붉은 닻-금희
2019년 07월 18일 10시 10분  조회:48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금희
붉은 닻
 
쿠첸밥솥에서 증기가 뿜어나올 시각, 주화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영수는 곁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샤쯔를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주화는 1층으로 내려갈 차비를 했다. 부부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손님방을 지날 때 주화는 걸음을 잠간 멈췄다. 엊저녁 영수가 또 그곳에서 밤을 지냈던 모양, 동그란 손잡이의 방문이 약간 벌어져있었다.
 
주화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냥 닫을가 하다가, 다음 순간 참지 못하고 반대방향으로 확 밀어버렸다. 일인용 간소한 침대 하나와 수수한 책상, 그 앞의 걸상과 벽 쪽 귀퉁이의 플라스틱 서랍장이 화들짝 놀라며 주화 앞에 무참히 민얼굴을 드러냈다. 간밤에 사람이 묵고 갔는지 자취조차 알아볼 수 없게 잘 정돈된 방이였다. 주화는 약간 후회했다. 웬지 영수에게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것처럼 께름직해나서였다. 주화는 머쓱한 기분으로 책상 우 바깥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찬기를 보내고 난 열흘간 영수가 매일 저녁 지키고 있었을 전화기였다.
 
침대머리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아, 또는 걸상 우에 올라가 올방자를 튼 채 한 손으로 전화선을 탈탈 꼬며 영수는 찬기의 전화를 받았을 것이였다. “어떠니? 사람들은 좋으냐? 학교는 멀지 않고? 시차는 적응됐니? 음식은…” 그러면 찬기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엄마. 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런거 같아요…” 주화를 닮아 성격이 불같은 려나하고는 달리 어려서부터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주화는 내려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짙은 갈색의 가죽쏘파가 널직한 거실 한가운데에 마취제를 맞고 쓰러진 흑곰처럼 길게 엎드려있었다. 애들 방과 서재,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쪽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 남쪽 대형 유리너머 영수가 손수 가꾸는 정원에서는 늦가을의 붉은 국화가 스러지고 있었다. 주화는 머리를 돌려 주방 쪽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거실창문 앞에 서 있었다.
 
나지막한 참대나무바자의 정원 앞쪽에 아빠트단지에서 만든 인공련못이 먼지 쌓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여름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노닐던 곳이였다. 주화네 이웃 별장에 사는 로부부의 장난꾸러기 강아지는 저녁산책을 나올 때 가끔 그 련못에 뛰여들어 유유히 수영을 하군 했었다. 련못 우에는 작은 아치형 돌다리가 걸쳐있었고 돌다리의 건너편에는 좌우로 한바탕 노랗게 마른 잔디밭이 펼쳐졌는데 벌써 손 빠른 사람들이 뙈기뙈기 차지하여 가을배며 대파를 줄느런히 널어놓았다. 영수는 한번도 그네들처럼 가을배추를 널어본 적이 없었다. 통통하고 하얀 배추를 사다가 매년 김장을 담그긴 했지만, 백김치(酸菜)감으로 제격인 푸른 긴 배추는 사지 않았다. 주화네 집에 백김치를 한포기씩 가져다 주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였다. 영수를 만나 살아온 지 20년, 다른 것은 그만두고도 입맛 쪽에서라면 영수가 주화네를 따른다기보다 주화가 영수를 닮아갔다는 편이 더 옳았다.
 
21살의 애젊은 주화가 처음 영수를 만날 때만 해도 아침마다 국이나 찌개에 밥을 먹는 한국인의 풍습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주화가 알고 있는 한, 무릇 아침이란 흰 만두에 좁쌀죽, 삶은 계란 하나와 한두가지 짠지를 곁들여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속 편한 식사였다. 혹간 국물을 넣은 면을 먹을 때도 있었고 속을 넣은 찐만두나 꽈배기, 훈툰(馄饨) 따위를 먹을 때도 있었지만 아침부터 찌개에 밥을 먹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밥은 점심이나 저녁때에 볶음채랑 함께 먹는 것이였고 끼니마다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였다. 쌀밥이란 것은 밀가루음식과 틀려서 끼니마다 먹었다간 틀림없이 며칠을 못가서 속이 쓰려날 것이라고 어른들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주화는 영수처럼 매일 아침 찌개에 밥을 먹었다. 혹간 영수가 좁쌀죽을 원할 때가 있었지만 주화쪽에서 오히려 밥이 없으면 허전해 견딜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에게는 그닥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이제 주화는 영수표 반찬과 료리에 온전히 길들여져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영수도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아침밥을 짓지 않는 일은 삼갔다. 주화의 몹쓸 성격이 도져 아주 불쾌한 상황을 겪고 나서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아침, 주방에서 한창 분주히 서둘러야 할 영수는 거기에 없었다. 주화가 일어나기 전에 벌써 식탁 우에 배추김치며 시금치무침, 멸치볶음과 김을 올려놓고 집을 나서버린 것이다. 밥은 밥솥 안에, 된장찌개는 가스렌지 우에 다소곳이 주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영수는 참 좋은 녀자였다. 더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가. 이처럼 부지런하고 건강하며 매사에 똑 부러진 녀자가 그리 흔하지는 않지 않은가. 영수는 그녀의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생활력이 강했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모으고 불리는데 천부적인 재주를 가졌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보다 네살이나 더 어린 중국대륙의 남자에게 시집을 온 한반도 남쪽의 녀자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지금도 그랬지만), 특히 국제결혼 서류를 작성해주는 이들이 그들의 결합에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더욱 그러했다.
 
까만 색의 중화를 운전하고 가게로 가는 내내 주화는 하릴없이 인행보도를 걷는 녀자들을 힐끗거렸다. 젊은 청년의 시절처럼 예쁜 녀자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았다. 10년동안의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주화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온 영수가 그랬었다. “당신, 왜 휘파람을 부는 거죠? 그렇게 하면 녀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가요? 제발 그러지 마. 그런 천박한 짓은 양아치들이나 하는 거잖아.” 9살 난 려나는 소학교에 입학시키고 세돌박이 찬기를 등에 업은 채 영수가 뒤따라오며 또박또박 말했다. 영수는 주화의 못된 성깔들을 그렇게 오래 보아오고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이고, 반드시 말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필요를 느낀다면 상대의 기분이 어떠하든지를 제쳐두고라도 조목조목 리성적으로 얘기하는 성격이였다. 영수는 애들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시누이한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기했다. “연(娟), 넌 어떻게 애들 앞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을 하니? 애들이 아니더라도 여긴 집안이잖아. 게다가 내 집이고. 난 담배연기가 내 집에 배이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그리고, 사실은 담배 피는 자체가 네 몸에 좋지 않은 거잖아. 안 그래?” 도시 외곽의 염가아빠트에서 놀러 온 시어머니를 보고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 울 집에 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마시고 가만 계셔요. 저를 도와 밥을 한다거나 설겆이를 한다거나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제 주방은 제가 잘 알고, 무슨 반찬을 할지도 제가 알아서 한답니다. 걸레질은 아예 손대지 않는 게 좋아요. 어머님이 하시더라도 제가 다시 해야 하니까요.”
 
영수는 그렇게 특이한 녀자는 아니였지만 주화를 만나다 보니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그닥 평범치는 않은 삶을 살게 되였다. 처음 영수를 만나던 날, 주화는 일년동안 일을 해온 식당에서 자리를 옮길가 고민하던 중이였다. 딱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리를 옮겨야 봉급을 올리기 수월하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고등학교 2학년 첫 학기에 주화는 중퇴를 당했다. 학교마다 파벌이 많았고 잔인한 무리싸움도 흔했던 시절이였다. 주화는 어쩔 수 없어 싸움에 가담한 범생이 쪽이 아니라 늘 사건의 선동자요, 최전방에서 온몸을 날려 의리와 명예를 위해 싸우는 열혈남아였다. 그는 교장실에 불리워가서 조사를 받고 중퇴처벌을 받은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진짜 ‘대장부’라는 것을 증명해보인 셈이였다. 주화와 그의 ‘의로운’ 친구들은 머리가죽과 얼굴과 가슴팍 등에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긴 채 학교대문을 나서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거리에서도 그들의 빛나는 행보는 계속 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멍가게 주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너무 반짝거린다는 리유로 멋진 상점의 창문유리에 돌을 던지고, 어쩌다 어깨를 부딪쳤거나 눈을 마주친 아저씨들을 길거리 바닥에서 톡톡히 ‘훈계’했다. 그렇게 사회의 음침한 골목에서 잔뼈를 키워가던 중, 한번의 작지 않은 실수로 주화는 인명사고를 낼 번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주화는 중국을 뜰 계획을 세웠으며 마침 찾아온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아 한국으로 가는 화물선의 밑창에 타게 된 것이였다.
 
한국에서 주화는 거의 다른 사람으로 살아갔다. 당연한 일이였다. 문화도 가치관도 풍습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주화는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을 했다. 억울함과 괴로움과 분노와 외로움이 켜켜이 쌓였지만 아직 해소할 수 있는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을 관두고 돌아올 수도 없었다. 영수를 만날 즈음에는 처음보다 좋아져서 말귀도 좀 알아듣고 일도 익숙해졌으며 그 나라의 물정도 약간 깨달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서럽고 힘든 이방인이였다. 가끔씩 주화는 옛 성깔이 되살아나 주방식구들에게 한바탕 불같은 화를 내군 했다. 영수는 그 사실을 주방 찬모에게서 들었다. “왜? 저 망나니가 잘생겨 보이니? 아서라, 중국인이고 뭐고 떠나서 저런 성깔머리 더러운 애하고는 처음부터 상종을 안하는 게 나으리…”
 
주화는 확실히 잘생겼다. 검은 털이 숭숭 난 종아리를 내놓고 다니는 주방장이나, 여드름투성이에 작고 괴죄죄한 눈을 가진 정과장이나 두꺼운 입술의 느끼남 송씨 등 주방식구들을 통틀어서 아니, 온 식당의 일군들 중에서도 주화만큼 잘생긴 남자는 없었다. 그의 훤칠한 키와 검은 일자 눈섭과 매서운듯 정기 있는 눈매와 분명한 코선과 양기 넘치는 남성적 분위기는 90년대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련상케 했다. 스물다섯, 지방의 한산한 동네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8개월밖에 안되는 영수에게 주화의 우울한 눈빛과 가끔 번뜩이는 분노는 오히려 더 공감 가고 감싸주고 싶은 아픔이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영수가 인사를 하면 주화도 그녀를 따라서 “안녕하세요?” 했다. 점심 장사를 끝내고 식당 식구끼리 밥을 먹을 때 영수가 “잘 먹겠습니다.” 하면 바로 따라서 주화도 “잘 먹겠습니다.” 했고, “많이 드세요.” 짠한 마음에 영수가 말하면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많이 드세요.” 하고 같이 인사를 했다. 주화의 이상한 억양과 어눌한 표정이 재미있어서 영수는 키득키득 웃었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잘생긴 젊은 남자가 자신의 밝은 웃음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는 일이 영수는 즐거웠다. 그들은 어느덧 말을 하지 않고도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였다. 신기한 일이였다.
 
주화와 함께 일을 했던 식당에서 영수는 인생에서 가장 랑만적인 한달을 보냈다. 그처럼 마음이 둥둥 뜨고 일을 해도 지겹지 않고 괜히 감정이 예민해지기는 처음이였다. 온 세상이 커다란 풍선같이 비현실적이고도 아름답게 보였다. 미래는 더없이 찬란했고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은 어느 땅굴 속으로 숨어들었는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좀 다른 느낌이였지만 그 시간은 분명 주화에게도 일생일대에 다시 없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싸움이라면 수없이 많이 경험해보았지만 녀자에 대해서라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주화였다. 매력적인 이성에 대한 막연한 갈구는 있었지만 이렇듯 분명하고 구체적인 한 이성과 몹시 개인적인 감각을 나누는 느낌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주화는 이 감정을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지, 영수라는 녀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간대로야 이것이 정말 사랑일가, 이 녀자랑 진짜 끝까지 갈수 있을가, 주화는 애초부터 아무 희망도 걸지 않았다. 바로 그런 무책임한 의심 때문에 주화는 담대하게 사랑을 진행시킬 수 있었고 끝내는 결혼에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였다.
 
가게에 가까이 오면서 주화는 미리 주차할 자리를 눈여겨보았다. 그들이 가게를 얻은 8년전보다 엄청나게 번화해진 거리였다. 가게는 영수가 발품을 들여 찾은 곳이였고 그 안의 물건들도 영수가 종류별로 선정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였다. 영수는 매일 가게에 나오지 않았지만 가게가 돌아가는 상황을 빤히 알고 있었다. 영수는 탁월한 상인기질에 근거하여 어떤 상품들이 인기리에 팔릴 것인가 하는 것을 족집게처럼 잘 판단했다. 영수가 밀어붙인 상품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다른 가게에서 그들을 본따기 시작할 때 그녀는 벌써 새로운 상품을 엄선해 들여오고 있었다. 돈이 한바탕 모이면 영수는 잽싸게 돈뭉치를 들고 잠재가치가 있는 부동산을 선택해 투자했다. 발품을 아끼지 않고 돌아다니며 비교하고 형세를 파악한 다음에는 과감히 팔건 팔고 사야 할건 사버렸다. 그들에게는 든든한 빽이나 유력 친지를 통한 관계망, 정보망도 없었지만 수년 만에 아빠트와 상가, 차고 모두 해서 9개의 부동산을 가질 수 있는 성과를 누릴 수 있었다. (부동산 투기 방지차원에서 제정된 법률조항들이 지금처럼 세세히 나오지 않았을 시기였다) 이제는 수입상품가게가 아니더라도 그 여러채의 건물에서 나오는 세만 가지고도 애들 둘의 류학비를 감당하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다.
 
차를 아빠트단지안의 골목 쪽에 세워놓고 주화는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이 나오지 않아도 점원들끼리 잘할 수 있는 가게였지만 주화는 원칙상 매일 가게로 나갔다. 사촌 당숙이 소개해온 ‘잘 아는 형’네 집의 아들녀석은 남자직원을 졸졸 따라 다니며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화네 가게에는 별 필요 없는 인력이였다. 계산대를 지키는 녀직원은 주화의 눈치를 흘끔거리며 걸레를 적셔 여기저기 먼지를 닦아냈다. 스물두셋이나 될 법한 어린 녀자였는데 영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애숭이여서 간 크게도 주화에게 지나친 애교를 부리군 했다. 주화는 그런 녀자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기분 좋을 때면 보너스도 챙겨주고 작은 선물 같은 것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가게에 오래 두지는 않았다. 그 아이들은 아직 철이 없어서 필요 이상으로 담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 아이들이 영수를 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가. 주화랑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것이다. 주화는 지금도 너무 멋진 사내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브랜드를 따져가며 코디를 하고 다녔지만 영수는 외관상 너무나도 평범한 주부였기 때문이였다.
 
영수는 늘 일하기에 편한 옷을 선호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그랬다. 한번 산 옷은 잘 관리해서 최소한 5년 이상을 입었다. 특이한 개성의 예쁜 옷들을 골라 입었지만 류행을 따르거나 브랜드의 옷은 입지를 않았다. 화장도 잘 하지 않는 편이였고 곱슬머리도 그대로 길러서 낮은 포니테일로 묶고 다녔다. 길거리에 나서면 전혀 튀지 않는 스타일이였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예뻤다.
 
영수를 처음 보는 순간 주화는 80년대 대륙의 드라마 《서유기》를 떠올렸다. 금빛찬란한 황금관을 쓰고 긴 너울을 드리운 리령옥(李玲玉) 분연의 옥토끼 요정(玉兔精), 그녀처럼 빨간 곤지를 찍고 동그란 코걸이를 걸었더라면 영수가 더욱 인도공주 같았을 거라고 주화는 생각했다. 
 
누가 당신을 내게로 데려왔을가
 
(是谁 送你来到我身边)
 
저 둥근 명월 명월이 아니던가
 
(是那 圆圆的明月 明月)
 
…  
 
영수의 커다란 쌍겹눈과 토끼요정처럼 귀밑에 반달모양으로 휘우듬히 꼬부라진 한가닥 곱슬머리를 보면서 주화는 속으로 〈천축소녀(天竺少女)〉 노래를 흥얼거렸다. 잽싸게 손을 놀려 빈 그릇을 담아오거나 급하게 종종걸음을 칠 때면 그녀의 통통한 흰 팔과 발목에서 짤랑짤랑 경쾌한 방울소리가 들려오는듯 싶었다. 영수의 짜랑짜랑 맑은 목소리와 해처럼 밝은 웃음 앞에서 주화는 자신이 마치 하얗고 높은, 깃털 장식의 혼례두건을 쓴 당승처럼 코믹해진 것 같았다. 영수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주화도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영수가 밥상 앞에서 “잘 먹겠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뒤따라 “잘 먹겠습니다.” 소리쳤다. 주화는 영수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녀자인지 알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국 같은 나라에 이런 녀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후날 주화는 영수의 친정어머니와 그녀의 언니, 오빠들을 차례로 만나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리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영수가 주화를 혼란시키기 위해 갑자기 만들어낸 허구의 가족들 같았다. 그녀의 가족들은 예상보다도 더 주화를 싫어했다. 물론 그녀의 어머니가 가장 로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는데, 지어 그들이 작은 시골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날에마저 자녀들에게 당부하여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중에서 제일 예쁘고 똑 부러진 막내딸을 위한 아름다운 계획이 있었고, 그래서 딸의 후진 안목과 성급한 결정에 아주 섭섭해했다.
 
영수는 주화보다도 더 씩씩하게 그 아픔을 잘 이겨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여 차곡차곡 돈을 모아 전세집도 하나 마련했다. 그 첫번째 전세집에서 영수를 닮은 인형처럼 앙증맞은 려나가 태여났다. 그리고 얼마큼 모은 돈을 중국에 있는 시댁에 송금해주었다. 주화는 고향동네에서 별안간 부자로 인정받았고 많은 길거리패 젊은이들의 훌륭한 본이 되였다. 찬기가 태여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주화는 더이상 한국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겪어야 할 것들은 다 겪어보았고 돈도 웬만큼 모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계속 머물러있으면 돈은 더 모이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거기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머물고 있던 나라였고, 언제든지 돈만 모이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 마음먹었으니까. 비자와 다른 수속 때문에 주화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3개월 뒤에 영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한 5월이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여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거북등처럼 둥글고 평평한 야트막한 동산, 그 푸른 산 정상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마르고 갈라진 석쉼한 소리다. 노래말은 단순하고 길지 않다. 특유의 저음에 꺾기와 뒤집기 창법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 남자가 운을 떼면 다른 남자들이 뒤말을 잇는다. 어린아이들과 녀자는 그 의식에서 소리를 하지 못한다. 소리를 선도하는 남자들은 모두 여섯, 이 고장에서 태여나고 자란 사람들은 아니다. 마을사람들과 자칫 충돌이 일어날 번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여섯 남자 모두 그닥 호전적이지 않았고 그들의 손에는 청동검이 들려있었다. 젊고 활력 넘치며 지혜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분명 마을사람들보다 세상 여러 구석을 더 많이 보았고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노래는 온종일 지속된다. 마을 추장들이 먼저 흙 한줌씩 쥐여뿌리며 제단 주위를 돈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이 함께 제를 지내온 거대한 돌제단이다. 그 앞에서 한 약속들은 어길 수가 없다. 남자들도 그들과 같이 돈다. 다른 마을사람들도 그 행렬에 가담한다. 미구에는 아이들과 녀자들까지 함께 소리를 하며 춤을 춘다. 이제 이 근방 모든 부족사람들이 모두 자원으로 제의에 동참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삼지 않고 련맹친구로 같이 번영하기를 기원한다.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찬다. 어떤 신성한 분위기에 휩싸여 온힘을 다해 자아를 잊고 오직 그 분위기 속에서 마음으로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뭔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조짐이다. 그날 밤, 모닥불 주위에서 부족들의 성대한 잔치가 드디여 끝난다. 추장들은 다른 고장에서 온 남자 여섯을 새로운 리더로 인정한다. 그중 한 남자가 다른 다섯 남자의 추종을 받는다.
 
남자는 과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여넘어 매우 훌륭한 리더십을 선보인다. 산을 중심으로 올망졸망 흩어졌던 부족들을 모조리 굴복시켜 자신의 세력범위 안에 두게 된다. 남자를 비난하고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인정한다. 그 상황에서 남자를 대신할 만한 리더는 다시 없다. 특히 남자가 가지고 온 새 기술ㅡ철의 기술은 부족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나 돌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신기한 힘을 가졌다.
 
남자는 또 바다길에 대해 큰 그림이 있었다. 어선을 개조하고 항해를 격려하며 길을 열어 다른 지방이나 섬나라와 장사문을 튼다. 이 지방이 이처럼 흥성해보기는 처음이다. 사람들은 남자를 좋아했지만 날로 커지는 리익 앞에서 서로간의 다툼을 온전히 그치지는 못한다. 각 세력간의 힘의 평형을 위해 남자는 결혼을 주저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다. 차세대의 리더를 준비하고 양육해야만 이 련맹국가를 든든히 유지할 수 있다. 어느 세력파의 집안과 혼인을 할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또다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남자는 깊이 고민한다…
 
 
 
핑크 리봉으로 머리를 묶은 려나는 바깥 쪽에, 더듬더듬 몇개의 단어밖에 말할 줄 모르는 찬기는 안쪽에 앉히고 영수는 비행기를 탔다. 처음 가보는 중국이였다. 주화와 결혼을 한 것은 실감나는 일이였지만 중국인과 결혼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영수는 이제 자신의 가족과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올 주화를 상상했다. 그의 모습을 애써 그려볼수록 주화는 더욱 낯선 사람이 되였다. 처음으로 영수는 주화가 두려워졌다. 자신이 여태껏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와 십년을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은 한국에서와 다를 것이였고 주화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할 필요를 막연히 느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일이였다. 찬기는 창문에 붙어 우와-- 우와-- 놀고 있었지만 려나는 엄마의 불안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조그만 입술을 꼭 다물고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영수는 그 아이의 경직된 얼굴이 너무 가슴 아팠다.
 
10년전의 장춘공항은 한산하고 어두웠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들은 차문이 잘 닫기지 않는 뻐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공항 입구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한창 초여름이라 반팔에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었는데 동행한 승객들 중에는 아무도 그렇게 얇게 입은 사람이 없었다. 영수는 애들을 데리고 한참을 기다려 짐을 모두 찾았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와 그 우에 박스 하나를 얹고, 자기 키만한 베낭을 둘러메고 핸드백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멘 채 찬기를 한 팔에 안고 걸었다. 려나는 그보다 작은 트렁크를 끌고 자기의 려행가방을 메고 따라왔다. 아무래도 어린 것의 힘에 겨운 무게인지 려나는 대여섯 발자국 걷다가는 멈춰서서 가방을 추스렸다. 그들은 거의 마지막 승객으로 출구를 빠져나갔다.
 
서늘하고 어두침침한 대기실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승객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영수는 그 속에서 주화를 찾아보았다. 려나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아빠--!” 다음 순간 영수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연푸른 샤쯔에 긴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영수의 앞에까지 걸어오더니 손에 들었던 생화 묶음을 내밀었다. 이 세절은 영수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였다. 한국에서도 가끔 엉뚱한 이벤트를 해주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생화를 들고 공항에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조차 않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도 애 둘을 낳은 마누라에게 느닷없이 생화 선물을 해주는 남편은 드물었으니까.
 
붉은 장미에 하얀 백합화 두송이를 가운데 꽂은 부케였는데 장미의 가장자리 꽃잎들이 시들시들 말라있었다. 영수는 뜻하지 못한 선물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주화가 그녀에게서 베낭을 받아메는 사이, 그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영수네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림짐작 스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였다. 녀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으며 젊은 청년도 있었고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들은 한개 련의 군사들처럼 영수네 앞으로 몰려와 그녀와 아이들을 외계인 구경하듯 훑어보았다. 주화가 소개했다. “이 분이 내 어머니이시고, 이 분은 울 아버지고. 이 분은 큰아버지, 그 옆에는 큰어머니, 이쪽은 둘째아버지, 둘째어머니… 여기는 큰 이모, 큰 이모부… 이 애는 둘째 이모네 조카, 그리고 여기는 당숙네 아이…” 영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중국이란 곳이구나, 내 남편 주화는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이구나… 영수는 그 얼굴들을 하나도 분별하지 못한채 머리를 숙여 인사만 했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택시를 타고 주화가 마련한 아빠트로 돌아가는 길에 영수는 왈칵 울음이 터졌다. 바깥은 한없이 펼쳐진 검은 옥수수밭이였는데 갓 싹이 올라온 연두색의 옥수수 포기들이 그렇게 안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영영 떠날지도 모르는 딸과 외손군들을 배웅하러 나오지도 않았다. 영수와 아이들을 외래 종족 취급하는 언니와 오빠만 나왔을 뿐이였다. 언니는 어린 찬기는 좀 안아주었지만 려나한테는 쌀쌀맞게 굴었다. 려나도 이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모, 우리가 무슨 전염병환자야? 왜 항상 그런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봐?” 려나는 이모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그렇게 물었다. “내가 뭘? 얘 좀 봐라, 어른한테 하는 말본새 하고는…” 언니가 려나에게 눈을 흘기면 려나는 픽 입을 삐죽거렸다. “말 안해도 티가 다 나. 울 아빠가 중국사람인 게 그렇게 불편해? 그래도 사람 앞에서까지 무안 주고 그러지 마. 이모네 전세 맡을 때도 울 엄마가 얼마큼 꿔줬잖아, 이사할 때도 울 아빠가 가서 다 도와줬으면서…” 오빠는 애들에게 용돈이라며 각자 5만원씩 세여서 건네주었다. 오빠가 옷가게니 식당이니 장사를 접을 때마다 갚아주었던 돈에 비하면 섭섭한 금액이였다. 그러나 무슨 일에든 새언니의 안색을 살펴야 하는 오빠의 립장을 리해해야 했다. 짐들을 다 부치고 영수는 애들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두 남매는 유리칸막이 바깥 쪽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삼남매였다. 사람들 속에 묻혀갈 무렵 언니가 머리를 돌리는 것이 잠간 보였다. 형제의 연이란 이렇듯 짧은 것이구나, 하고 영수는 생각했다. 영수는 비행기에 들어와 앉아서도 울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 진리만 굳게 잡고 간다면 그다지 슬플 일도, 애잔한 일도 없을 것이였다.
 
그런데 막상 무연히 굴곡진 옥수수밭을 보고 영수는 눈물이 쏟아졌다. 세상이 이렇게 넓었다는 것, 그것을 여태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 작아보인다는 것이 슬퍼져서였다. 영수는 자신이 처음 만났던 주화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다시 십년전으로 돌아가 그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지는 이제 바뀐 것이였다. 여기서 문화도 풍습도 말도 통하지 않는 쪽은 영수였다. 십년전의 주화는 영수보다 젊었고, 십년후의 영수는 주화에게 없었던 아이들과 거처할 집이 있었다. 어느 쪽이 견디기에 더 나은 상황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젊은 시절의 주화는 훨씬 불안한 상황이였지만 대신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그러나 영수에게는 더이상 퇴로가 없었다. 오직 인생을 이곳에, 주화에게 올인해야만 행복을 꿈꿀 수 있었다. 영수는 악착같이 적응해나갔다. 외롭고 힘들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화를 도와 가게를 시작했고 재산을 불려 투자를 했으며 시댁식구들에게 할 만큼의 도움도 주었다. 친지들 중에서 영수의 지위는 확고했다. 그녀의 근면함과 일관성 있는 원칙적인 일처리와 소박한 생활자세를 두고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가. 그녀의 침착함과 성숙됨은 주화의 성급함과 경망스러움을 더 나타낼 뿐이였다.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을가
 
(明月几时有)
 
술잔을 들고 하늘에 물어본다
 
(把酒问青天)
 
과연 천상의 궁궐에선
 
(不知天上宫阙)
 
오늘밤이 어느 해런지
 
(今夕是何年)
 
 
사람에겐 슬픔과 기쁨과 리별과 만남이 있고
 
(人有悲欢离合)
 
달에겐 밝고 어둡고 둥글고 이지러짐 있으니
 
(月有阴晴圆缺)
 
이런 일은 예로부터 완전하기 어려워라 …     
 
(此事古难全) 
 
영수는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调歌头)를 여러번 읊었다. 읊으면 읊을수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도무지 주화와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시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수에게 중문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주화와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신사였다. 영수는 그 선생님의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삶은 그가 가르치는 〈수조가두〉와 달리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풍파가 많다고 해서 꼭 재미있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풍파를 만들기 위해 주화가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정말 많이 싸웠다.
 
영수는 주로 말로 잘못을 따지려 들었고 영수처럼 따박따박 근거를 댈 수 없는 주화는 물건을 던지거나 깨부수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했다. 손에 잡히기 쉬운 열쇠뭉치나 재떨이를 던지는 것은 다반사였고 좀더 분노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에는 화분이나 그릇들을 팽개치기도 했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대화로 풀기보다 일단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버릇을 뗀다’는 명목으로 자주 밀걸레대를 뽑아들었다. 찬기는 맞을 짓도 덜했고 아빠의 분노에 금방 굴복하는 성격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게 부딪쳤지만 려나는 달랐다. 려나는 절대 쉽사리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비나 관용을 구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화가 나면 날수록 눈을 더 동그랗게 치뜨고 아빠에게 대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한 거 없다고! 그래도 때려? 그냥 때리고 싶은 거겠지, 차라리 때려서 나를 병신 만들지 그래?!” 그러면 주화는 정말 미쳐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였다. 그 아이와 주화는 말 그대로 앙숙이였다.
 
얼마나 많은 밤 영수는 그들 부녀사이에서 속을 졸였는지 몰랐다. 어떤 날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어서 주화를 달래 침실 안에 들여보내고 몰래 바깥으로 문을 잠근 적도 있었다. 집안의 방문고리들이 너덜너덜해진데는 다 그만한 리유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로 나가고 화가 풀린 점심이나 오후면 주화는 집으로 들어와 쏘파에서 빨래를 개는 영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화내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면서 응석을 부려 영수에게서 전복죽을 얻어먹었다. 딱 한번 영수가 더는 참을 수 없어 려나를 데리고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 사람하고는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 평생 그렇게 할 것이다, 하고 영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려나는 엄마를 따라가기 원했다. 영수는 찬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찬기까지 데리고 나오면 주화는 금방 무너질 것이였다.
 
모녀는 심양행 기차표를 끊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심양은 그닥 멀지 않고 한국인들도 꽤 많이 산다고 들어서였다. 기차가 거의 출발할 무렵, 영수는 차창 밖으로 달려오는 주화를 보았다. 어떻게 알고 뒤쫓아왔는지 신기했다. 주화는 표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제복을 입은 철로의 일군들이 그를 제지시키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주화는 모두 뿌리치고 성난 사자처럼 달려왔다. 그가 영수네를 찾기 전에 기차는 문을 닫고 서서히 출발했다. 영수는 창문으로 주화가 두리번거리며 기차를 따라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차가 막 속력을 내려던 무렵에야 주화는 영수를 알아보았다. 영수는 순식간에 주화의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그들 모녀가 심양에 내려 한국인 거리를 찾아 호텔에 든 이튿날, 주화는 기어이 그들을 찾아냈다. “어디로 가든 내가 못 찾아낼가 봐. 잔말 말고 빨리 짐 다시 싸!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가르쳐줘야겠어!” 영수는 그런 남편을 둔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 뒤로 그녀는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한번씩 화를 내고 나서 주화는 어떻게든 영수의 마음을 보듬어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완벽하게 내보였다. 어떤 일에서나 똑 부러지고 원칙 있게 행동하는 영수였지만 주화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주화는 그녀의 소원대로 바뀌지도 않았고 그녀를 버리거나 그녀와 헤여지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영수는 이제 주화를 거의 포기했다. 
 
 
 
남자는 신하 신귀간(神鬼干: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신하)을 부른다. 김해 바다 남쪽 해안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보라고 명을 내린다. 그곳은 장사배들이 자주 드나드는 나루터다. 이미 여기 사람들과 거래를 튼 배들도 있었고 새로이 거래를 트려고 찾아온 배들도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해안을 따라 모험을 나온 배들도 만나군 한다. 신귀간 등이 바다가로 나간다. 푸른 남보석 같은 바다물이 모래사장을 철썩철썩 들이친다. 하얀 갈매기가 낮게 날아예고 모래톱에는 작은 게들이 발랑발랑 기여다닌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기다렸을가, 문뜩 희미한 하늘과 푸른 바다가 이어진 지평선 저쪽에서 작고 부연 점이 하나 보인다. 붉은 빛갈이 감도는 점이다. 사람들은 긴장하며 그 붉은 점을 주시한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그것은 가까이 더 가까이 바다가로 나온다. 붉은 닻을 내리고 붉은 기발을 날리며 다가오는 배다.
 
스무명 남짓의 종들이 타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의 양식도 주변 부족들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배가 나루터로 들어온다. 긴 바줄을 던져 배를 바다 기슭 건실한 나무에 정착시키고 승객들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한다. 거개가 건장한 남자들이였고 녀자들은 불과 대여섯 밖에 안된다. 붉은 비단너울을 길게 드리운 녀자 하나가 다른 녀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온다. 이목구비가 매우 또렷하고 눈도 크다. 여기 부족의 녀자들하고는 많이 다른 용모였지만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명문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녀자다. 녀자를 뒤따라서 역시 위엄 있는 남자(허황옥의 오빠: 장유, 스님) 하나가 내린다. 황토빛 품 너른 옷을 입은 남자는 목에 큰 구슬 목걸이를 걸고 있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려 살가죽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특이하게 보인다.
 
녀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모래톱에 읍하고 서 있는 신귀간 등에게 묻는다. “저는 해안선을 따라 오래동안 려행해 왔답니다. 여기는 무슨 고장이죠? 당신들의 왕은 누굽니까? 어디에 있나요?” 녀자는 자신의 이름이 허황옥이라고 한다. 나이는 열여섯,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자칭한다. 녀자의 붉은 배는 화려하다. 종들이 내온 상자는 틀림없이 귀한 보물로 채워져있는 것 같다. 신귀간 등은 바로 홰불을 올린다. 궁에 있는 남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녀자는 그들을 따라 바로 남자의 궁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페백으로 바치고 남자가 례를 갖춰주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시기도 시기려니와 이처럼 마음에 드는 녀자는 없다. 남자는 흥분에 겨워 서둘러 대궐에서 나와 아래쪽에 녀자를 맞이할 간이장막을 하나 치도록 분부한다. 남자는 그 앞에서 속을 졸이며 녀자를 기다린다. 녀자를 태운 수레가 드디여 멀리 남쪽에서 나타난다. 산전수전 다 겪어보아서 이만한 일 쯤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마음보다 가슴이 더 활랑거린다. 어떤 녀자일가, 처사를 보면 예사 재력과 지혜와 결단력을 가진 녀자가 아니였지만 실제로 성격은 어떨지, 용모는 어느 정도일지 너무 궁금하다.
 
수레에 앉은 녀자 또한 속 졸이기는 마찬가지, 이 고장 왕이라고는 들었지만 신하들의 행색이며 지나쳐온 마을들의 살림이며를 보아선 자신이 떠나온 본국보다 형편이 훨씬 처지는 듯하다. 왕이라고 모두 현명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친절하거나 보기 좋게 생긴 것도 아닐 것이다. 최악이 아니기를, 너무 형편없지만 않기를, 녀자는 기도한다. 마침내 흔들거리던 수레는 멈추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열어준 카텐너머로 한 남자가 보인다. “어서 오시요, 당신만을 기다렸습니다.” 진중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다…
 
 
 
수업이 끝났지만 영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다. 수업을 들을 적이면 영수는 자신이 마치 청춘소녀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지난 20여년간, 그녀는 정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쉴새없이 일을 하여 오로지 돈을 벌었다. 그녀는 마치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 사람 같았다. 재력도 학력도 없는 그녀가 그처럼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이 자신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을 모두 어디에 썼던가. 아빠트를 사고, 또 아빠트를 사고, 가게를 사고, 또 가게를 사고, 차고를 사고 또 차고를 사고… 주화에게 멋진 옷을 사주고 새 차를 뽑아주고, 려나와 찬기 모두 미국으로 류학 보내고, 시댁식구들 중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꿔주고, 친정엄마가 아프다 그러면 좀 보내주고… 이럴려고 번 돈이였던가. 정작 그녀 자신은 아끼고 쪼개 썼다. 그러는 동안 20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다시한번 인생을 살았더라면, 스물다섯 주화를 처음 만난 식당으로 돌아갔더라면 여전히 같은 선택을 했을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영수의 잘못이라면 너무 겁이 없었다는 것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 아름답게 설정했다. 이제 열아홉, 열세살이 된 남매를 모두 떠나보내고 친구 하나 없는 중국어 학원에 와서 당시송사(唐诗宋词) 수업이나 들으며 보내는 삶이 과연 그녀가 바라던 행복이였을가.
 
교실에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영수는 일어났다. 뻐스를 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뻐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가기를 택했다. 저녁해가 도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목안으로 파고들어서 영수는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맸다. 1시간 4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것이였다. 저녁에는 주화에게 무슨 반찬을 해줄가 걸으면서 영수는 생각했다. 며칠전부터 갈비타령을 했는데 갈비찜으로 메뉴를 정할가 고민했다. 식당가 앞거리를 지날 때 영수는 익숙한 좁쌀죽 냄새를 맡았다. 노란 좁쌀죽이 참 먹고 싶다고 영수는 생각했다. 여러 재료를 수북이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걸죽하니 끓인 한국식 죽이 아니라, 물 많이 넣어 후륵후륵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중국식 죽을 말이다.
 
영수는 의식적으로 가게 쪽을 흘낏거렸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 불빛이 알른거리는 가게들 앞편에서 초라한 행색의 할아범이 꾀죄죄한 좌판을 펴고 바닥에 앉은 것이 보였다. 살 생각도 없고 구경할 마음도 없었지만 영수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진때가 묻은 구리불상, 무늬가 희미해진 옛날 엽전, 그리고 록색 구슬로 된 목걸이,‘문화대혁명’시대의 잡화들이 띄염띄염 놓여있었다. 골동품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허술한 모조품들 뿐이였다. 영수는 그중 한 물건을 들고 할아범에게 흥정을 거는 사람을 지나쳤다. “이거 진짜 계피석 아니죠?” 붉은 페인트로 일부러 칠해놓은듯 주홍색 무늬가 선명한 돌이였다. “그냥 장난감으로 사시지유, 그래도 망부석이니깐유.” 할아범이 쭈밋거리다 대답했다. 영수는 잠간 멈춰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웃쪽 작은 부분과 아래쪽 더 크고 긴 부분이 련결된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사람모양새를 련상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할아범이 돌을 받아들고 각도를 돌려서 보여주었다. 머리를 쪽지고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녀자로 보이기도 하고 남자로 보이기도 했다. 망부석(望夫石)인가, 망부석(望妇石)인가. 문뜩 파도소리가 들렸다. 외로운 갈매기소리와 처절썩처절썩 노 젓는 소리도 들렸다. 배에는 순항을 지켜주리라 소망을 기원한 5층 파사석탑이 실렸고 배머리에는 물고기 두마리가 새겨져있다. 주위는 온통 검푸른 바다물일 뿐이다.
 
찬기의 류학을 고민할 무렵, 려나가 그랬다. “이것저것 너무 재지 말고 걍 보내. 언어는 어릴수록 배우기가 쉬우니까.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금방 적응할거야. 어차피 언젠간 류학 보내려고 생각했었잖아.” 영수는 려나에게 미안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을 들어간 찬기도 너무 안스러웠다. 한창 사춘기 격변시대를 겪어야 할 아이, 부모의 손길이 아직도 너무 필요한 아이였다. “려나야, 엄마가 미안해. 내가 선택한 삶 때문에 니들도 나 같은 운명을 겪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그 말에 려나가 어른처럼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은 혼자 가는 거잖아.” 려나는 언제 영수의 마음을 읽었을가. 영수 스스로 생각할 때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려나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주화가 들었으면 정나미가 떨어져야 할 말이였다. “애들을 어떻게 키웠길래 이 모양이야? 왜 얘네들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야? 통 한가족이란 개념이 없잖아!”
 
영수는 할아범에게서 그 망부석을 샀다. 가격은 할아범이 부른 절반으로 깎아버렸다. 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공예품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샀다. 이런 돌이 진짜로 서 있는 바다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 치밀었다. 날이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했다. 영수는 베낭을 추스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초록 신호등을 받고 사거리를 지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빵빵거린다. 경적소리가 상식 이상으로 너무 가깝게 들렸다.
 
 
 
주화는 하루종일 가게에서 빈둥거리다가 거리를 조금 싸돌아다녔다. 점심은 영수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나절에는 옛날 ‘영광스런 흔적’을 가졌던 친구들 둘을 만나 기분 좋게 술을 마셨고 늦은 저녁이 되기 전 술상을 파했다. 녀석들도 이제는 녀편네의 눈치를 웬간히도 보는 모양이였다. 음주운전 검사 경찰을 피하기 위해 골목길로 운전하여 돌아오면서 주화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넣었다. 무슨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건너 한번씩 드리는 안부전화였다. “로마요?(老妈呀) 나야, 황주화. 당신 큰아들. 그래, 식사했쥬? 별 일 없구요?” 혹시 용돈이 필요하면 더 보내주겠다고 주화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어머니는 그 말에 매우 반가워했다. “이잉, 아직 저번에 준 게 있다는데두. 하긴 요즘에 날이 부쩍 추워져서 양털 내복 하나 사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주화는 하하 웃으며 걱정 말라고, 자신이 알아서 사드리겠다고 장담을 했다.
 
늙은 어머니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애들 에미하고는 별일 없제? 요즘도 접때처럼 싸우는 거 아니지?” 려나를 류학 보내기로 결정하기 전, 주화네 집에 들렸다가 두 내외가 대판 싸우는 것을 보고 내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됐어! 다 됐다구! 이제 아빠하고는 끝이야, 평생 안 보고 살고 싶어!” 주화에게 귀썀을 얻어맞은 려나가 이를 앙다물고 못된 말을 내뱉었다. 그 애는 한다면 하는 애였다. 영수가 려나 편을 들었다가 눈 깜짝할 새에 주화가 던진 재떨이에 이마를 맞았다. 영수는 분을 가라앉히며 숨을 고르다가 처음으로 주화처럼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져보았다. 맞아도 그리 아플 것 같지 않는 책이였다. “이 년이 미쳤나? 감히 누구에게 뭘 던져?!” 책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주화가 바람같이 달려들어 영수를 내리쳤다. 늙은 시어머니는 찬기의 부축을 받으며 서서 그 요란한 장면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영수의 이마에서 피가 새는 것을 보고 주화는 멈췄다. 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전화를 찾아들고 119를 불렀다. “영수야, 괜찮아? 많이 아파? 미안해, 내 잘못이야. 미안해 여보…” 그리고는 119가 오기도 전에 영수를 벌떡 둘쳐업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살갗이 긁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다음달 영수는 주화 몰래 려나의 류학준비에 착수했다.
 
“싸우긴요? 우리가 뭐 더 싸울 게 있겠어요? 이젠 둘밖에 없는데…” 하고 주화는 전화에 대고 하하 웃었다. 려나를 보내고 한동안은 정말 큰 다툼 없이 잘 지냈었다. 영수는 려나가 걱정되여서 저녁마다 밤을 지새우며 전화를 지켰었다. 그러다가 차차 전화도 뜸해지고 영수도 그다지 려나의 전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생활은 전보다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려나가 보고 싶은 것은 주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애한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애정을 찬기에게 쏟기 시작했다. 찬기는 아빠가 무슨 얘기를 해도 “네. 괜찮아요, 그래요, 아빠.”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영수를 화나게 했다. “당신이 얼마나 억압적이였이면 애가 그래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겠어? 이 애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종래로 분명히 얘기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자기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몰라.” 찬기의 표현은 확실히 애답지 않았다. 주화는 시간을 내여 찬기와 농구도 하고 수영도 해보았지만 무엇을 하든 찬기의 반응은 매번 똑같았다. “이거 할까?” 그러면 “네 괜찮아요, 아빠” 했고, “저거 할까?” 그래도 “네. 좋아요, 아빠.” 대답했다.
 
그래, 그 아이도 나 때문에 보냈겠지, 주화는 골목길에서 차를 끌고 나오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중점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영수는 조바심을 냈다. 중점이 아닐 바엔 미국에 가서 영어라도 확실히 배우고 오는 편이 나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기의 인격이였다. 어떻게 건강하게 자기의 욕구를 표현하는지,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과 어떻게 협상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장악할 만한 정도의 기교에 대해 찬기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얼핏 보아 착하고 평화로운 아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이런 상태는 려나보다 훨씬 나빴다. 주화가 우겨서 찬기와 같이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는 밤, 영수는 결단을 내렸다. 나이가 좀 어리긴 하지만 언어학습에는 더 나을 거라고 자아위안하면서. 아이 둘 다 주화의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 사실 심양에서 돌아오며 은밀히 혼자 세웠던 계획이 아니던가. 생각보다 이르긴 했지만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이였다. 그래야만 다음 행보로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차는 벌써 주화네 아빠트단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곁에 없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학교를 마치면 곧 돌아올 테고, 그때면 그들도 장성해서 지금처럼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수가 곁에 있으니 좀 한산해도 견딜 만한 게 아닌가? 찬기까지 떠나고 나서 주화는 하루에도 몇번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지? 싸우지 않는다니 됐다. 애들 다 키워놓고 보면 부부한테는 결국 서로밖에 없느니라.”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요, 알죠, 걱정마세요.” 주화는 차고에 차를 들여놓고 현관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캄캄했다. 1층에도, 2층에도 어느 방에도 불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기에 배는 일단 고프지 않았다. 영수도 수업이 끝나고 아는 사람이랑 밥을 먹고 들어오나? 생각하면서 주화는 쏘파에 기대앉아 티비를 켰다. 아직 늦은 저녁이 아니였다. 티비에서는 퀴즈프로가 한창이였다. 주화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였다. 20분이 지났을가, 처음 참가한 녀자들이 모두 탈락하고 최후의 2인만 남았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영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화는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 뚜-- 신호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뚝 끊어졌다.  
 
티비에서는 사회자가 마지막 퀴즈를 내고 있었다. “손이 책상을 뚫지 못하는 리유가 뭘까요? 네. 당연한 일이지요. 손은 책상을 뚫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걸까요? 마찰력, 전자기력, 중력. 자, 1, 2, 3, 어느겁니까?” 주화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뚜뚜뚜뚜 통화중인 것 같은 신호음이 들려왔다. 2명의 후보중 한 사람이 맞췄는 모양이였다. 화면 안에는 떠들썩한 함성이 울려터졌다. “네. 맞습니다. 바로 전자기력입니다! 손을 구성하는 원자와 책상의 원자는 본질이 서로 다른 물질이죠.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각자의 원자핵 바깥에서 춤추는 전자들은 절대 서로 다른 상대를 용납하지 못한답니다. 가까이 갈수록 엄청난 배척력을 느끼게 되는 거지요…”
 
주화는 잠간 티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전화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 “지금 련결할 수 없는 상황” 이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주화는 음울한 신음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탁자 우에 던지고 쏘파 깊숙이 물앉았다. 찬기도 류학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영수가 더는 밤새 손님방에서 전화기를 지키지 않겠지, 그러면 두 사람에게 정말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을 거라고 주화는 생각했었다. 영수가 바라는 게 그것이 아니였던가? 그것이 아니였단 말인가? 주화는 슬금슬금 불안해났다. “나 허락 없이 떠날 생각 같은 거 하지조차 말라.”고 소리지르던 날, 영수는 창 밖을 내다보며 또박또박 말했었다. “뭐? 자기 허락 없으면 떠날 생각을 말라고? 흥! 알았어, 알았다고. 당신이 정 그렇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벌써 3년 전의 일이였다.
 
주화는 손을 약간 떨며 핸드폰을 다시 찾았다. 영수는 오늘 중국어학원에 갔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오다가 잠간 무슨 일이 있어 늦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주화는 영수가 다니는 중국어학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영수의 동료나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몰랐다. 뚜ㅡ 뚜ㅡ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바로 끊어져버렸다. 휑뎅하고 서늘한 집안에는 주화 혼자 뿐이였다. 다투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집에서 한 녀자와 그녀의 아이들과 같이 10년을 살았다는 것이 조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고영수는 대체 어디에서 온 녀자일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왜 그 녀자와 하나가 되는 일은 이다지 어려울가? 주화는 검은색의 거실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지금 막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고 있는 영수를 볼가 싶어서였다. 붉은 헤드라빛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닻을 내리고 붉은 기발을 펄럭이는 한척의 배였다. 종래로 본 적 없었던 배였다. 배머리에 금빛찬란한 례관을 쓰고 신부의 너울을 길게 늘어뜨린 천축소녀가 찬바람을 맞으며 그림처럼 서 있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녀자는 다가왔다.
 
 
 
“려나야, 다시한번 생각해줄래? 류학이란 것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러 가는 거란다. 젊은 시절에 몸에 익힌 문화란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니가 미국에서 돌아온다 해도 엄마나 아빠랑은 더 멀어질 수도 있게 된단다. 니가 아니? 문화차이란 얼마나 대단한 건지?”“물론 알지. 다른 사람의 몸에 배인 습관을 절대 흉내 내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거, 그게 문화차이가 아닌가? 엄마가 하는 얘기, 뭔 말인지 알아들어. 엄마는 지금 아빠랑 도무지 모든 걸 공유할 수 없어서 쓸쓸해하고 있는 거잖아.” 3년전 려나의 출국수속 절차를 밟으면서 영수가 물었던 것이였다. 영수는 택시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왠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느낌이였다. 어떤 거대한 힘이 그녀가 앉은 택시를 집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는 주화가 있는 집주위에서 불규칙적인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멀리 해변가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영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주화인 것을 알아보았다. “저기에요, 저기! 바로 저 집이란 말이에요.” 하고 영수는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영수는 주화의 나라에 닿을 수 없었다. 주화에게 다가가는데 방해되는 것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자신의 발 아래 자리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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