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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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칼럼의 매력 댓글:  조회:385  추천:0  2021-08-05
칼럼의 매력 김학송   얼마전에 한 교원으로부터 보내온 메시지를 접했다.내가 쓴 칼럼 〈돌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2019년 7월 3일 《길림신문》 ‘두만강’칼럼 코너에 발표)가 조선족 중학교 8학년 하권 조선어문훈련과목에 실렸다고 한다.     기분 좋은 소식이였다. 솔직히 칼럼은 별로 써본 적이 없는데 그냥 청탁에 의해 쓴 글이 발표된 지 얼마 안돼 교과서에 수록됐다고 하니 가슴이 무척 설레이였다.   흔히 교과서에 오르는 글은 글중에서도 학생들의 글짓기 공부에 최대한 도움이 되는 가장 모범적인 글로 선정된다. 이번의 칼럼은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리해관계가 철저히 배제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선정된 글이여서 더구나 보람차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왜 하필 이 글이 교재에 올랐을가?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굴리게 되였다.   아래와 같은 몇가지로 그 원인을 개괄해보았다.   아마도 글에 담긴 소박한 내용이 긍정적인 메시지로 큰 울림을 낳은 것이 첫번째 원인일 것이다.   글에서는 명품수석이 형성되는 과정과 명품인간이 탄생하는 과정의 모종 류사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수석애호가인 ‘내’가 돌 앞에서 무한한 경이와 감동을 느끼는 원인을 하나하나 밝혀나간다.   수천만년 파도 속에서 뒹굴며 수마(水磨)와 사마(沙磨)와 풍마(风磨)를 거쳐 생겨나는 게 수석이다. 수석은 오랜 시간 모진 아픔을 감내하며 몸에 붙은 허접찌꺼기를 버리고 자연의 예술품으로 거듭 태여난다. 돌은 돌이지만 고난의 수련을 거쳐 돌의 경지를 넘어 수석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자신을 뛰여넘는다. 인간도 온갖 시련과 아픔과 역경을 이겨내야 비로소 정갈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참된 인간—명품인간으로 우뚝 일떠서게 된다.   론리적 련계가 잘되였기에 글의 내용에 대한 신뢰도와 호감도가 높아진 것 같다.   명품수석의 조건과 명품인간의 조건을 대입시키며 설득력 있는 비유로 공감대를 극대화시킨 데도 원인이 있다.   명품수석이 되자면 모양이 이뻐야 하고 수마로 피부가 부드러워야 하고 색상이 아름다와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석질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돌의 재질이 단단하고 물씻김에 의해 돌의 피부가 부드럽고 거친 데가 없어야 명품수석의 반렬에 오른다. 인간도 ‘문화의 물씻김’에 의해 내면이 윤이 나고 부드러워야 참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적 문구는 ‘문화의 물씻김’이다. 문화의 물씻김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 이 글을 제대로 읽은 키워드이다.   문화는 부드러운 물에 비견된다. 물은 부드럽지만 만물만상을 다스린다. 이 가운데 내재된 철리가 ‘문화의 물씻김’이라는 표현을 지탱하는 내적인 에너지이다. 한낱 무생물인 돌도 부드러운 물씻김에 의해 숭고한 예술품으로 승격되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심령을 다스리는 문화는 무엇보다 강한 힘으로 우주에 참여하고 인간성의 형성에 참여한다.   문화는 경제보다 군사보다 강한 힘으로 인류의 진화를 추진한다.   여기서 물과 문화의 류사성은 합리성과 설득력을 가진다.   진정으로 깊은 문화를 가진 사람은 부드러울 수 밖에 없다.   령혼에 윤기가 돌 수 밖에 없다. 문화의 세탁에 의해 오물이 제거된 까닭이다. 하기에 목소리도 눈빛도 부드럽고 온화하다. 리타적이고 행실이 한없이 겸손하고 착하다.   성미가 거칠고 욕심이 사나운 인간은 사람접대를 받기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성격이 거친 사람을 가리켜 덜된 사람이라 한다)   소박한 은유와 여러가지 수사법도 이 글의 문화성과 교훈성을 높이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작자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은 결국 명품수석의 조건이 아닌 명품인간이 되는 조건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굳이 날 선 사회비평이나 풍자가 아니더라도 부드럽고 짧은 글이 더 큰 감화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 칼럼이 성공한 비결인듯 싶다.   길림신문
2    [두만강칼럼]돌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댓글:  조회:567  추천:0  2019-07-04
돌은 돌만이 아니다. 따져보면 우주 물질의 본원은 암석의 무한한 화분과 화합의 결과물이다. 최초의 생명도 돌에서 발원하였다. 원시인류도 돌과 ‘친구’하며 돌을 징검다리 삼아 한걸음씩 문명에 다가섰다. 한점 돌 앞에서 나는 늘 무한한 경이와 감동을 느낀다. 수억년 세월의 신비를 소장한 활화석이 아니던가. 수석(夀石)취미도 돌에 대한 경이에서 출발한다. 자고로 문인아사(文人雅士)들이 그토록 경배한 수석은 자연사랑과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동양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대저 수석이란 자연 속의 흔하고 흔한 돌중에서 엄격히 선발된 예술적 기품을 갖춘 자연석을 지칭한다. 수석이 되자면 우선 석질이 좋아야 하고 형태가 빼여나야 하고 색상이 아름다와야 한다. 이 세가지를 모두 겸비한 수석은 귀품(贵品)이 되여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거나 수석박물관에 모셔져 후손만대에 기쁨을 선물한다. 석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는 두가지인데 우선 모오스경도(莫氏硬度) 5도 이상의 단단한 돌이여야 한다. 다음으로 수마가 잘되여 돌갗이 윤택이 나고 부드러워야 한다. 돌갗이 거칠면 좋은 접대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이다. 날카롭거나 날 선 석피(石皮)는 시각적으로도 불편하고 촉감도 좋지 않고 자칫 손이 상할 념려가 있어 누구든 거부감을 느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명품인간’이 되자면 우선 마음수마가 잘되여 모 나고 거친 데가 없어야 한다. 마음결이 비단처럼 함함하고 포근하면 가까이 다가가도 찔리거나 상할 념려가 없으니 누군들 싫어하겠는가. 마음결이 부드럽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승화되고 문화적으로 진화가 잘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격이 모 나고 거친 사람은 아무리 벼슬이 높고 돈이 수없이 많아도 우수한 인간의 반렬에 서지 못한다. 마음결이 부드러운 사람은 타인을 존중한다. 불리익을 당해도 쉽사리 화를 내지 않고 모든 것을 평화로 감싼다. 아무리 열 받아도 머리뚜껑이 도무지 열리지 않는 건 분노를 억제하는 브레이크가 작동이 잘되기 때문이다. 공공장소에 가서도 행여 타인에게 방해가 될세라 목소리의 톤을 낮출 줄 안다. 이런 사람은 동물적인 야성보다는 인간적인 기질이 훨씬 강하다. 마음결이 부드러운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작은 수입, 소소한 일상, 하찮은 사물한테도 깊은 애정을 드러내며 풀 한포기, 해빛 한줄기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머리 숙인다. 마음결이 부드러운 사람은 소박하고 겸손하다. 양보할 줄 알고 한걸음 물러설 줄 알며 허세나 사치와는 멀리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몸을 낮출 줄 안다. 마음결이 부드러운 사람의 령혼은 웃는다. 가슴 속에 늘 온화한 바람이 불기에 그의 눈과 입과 얼굴에는 항상 꽃이 핀다. 이런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풍경이 되여 주변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방출한다. 마음결이 부드러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한다. 부질없는 욕심이나 욕망에서 해탈되였기에 그의 가슴은 언제나 외부를 향해 정답게 열려있다. 리타적인 삶을 갈망하며 타인을 위한 행실에서 생명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다. 심성이 부드러운 사람은 인격적으로 완성된 가장 아름다운 인류의 꽃이다. 심성의 부드러움은 인간의 품질과 무게를 가늠하는 가장 명확한 저울이다. 마음이 부드럽게 수마되자면 문화의 ‘물씻김’을 자주 받아야 한다. 자기를 낮추는 훈련, 오기나 독기를 버리는 연습, 타인을 배려하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점차 거칠고 모가 난데가 사라지게 된다. 저 수석을 보라, 얼마나 조용하고 겸손한가? 우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성자(圣者)이지만 늘 침묵하며 자신의 몸을 그늘 속에 숨긴다. 소리 높은 물결에게 자리를 양도하고 제 무게 하나로 억년을 버틴다. 그러다가 그 누군가와 인연이 닿으면 어줍게 웃으며 흔연히 그의 ‘친구’가 되여준다. 그래서 나는 석광(石狂)이가 되였다. 돌은 나의 영원한 스승인 까닭이다. 때론 석질 좋고 수마가 잘된 수석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대의 령혼은 안녕하신가” 라고. 길림신문
1    행복을 ‘과식’하다 댓글:  조회:641  추천:0  2019-04-08
[두만강칼럼] 얼마전 평소에 좋아하던 개고기를 잔뜩 포식한 데다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급성위장 장애가 생겨 며칠간 병원신세를 톡톡히 진 교훈이 있다. 과식이 나쁘다는 것은 평소에 잘 알고 있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정작 끝없이 먹고 픈 개고기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게 탈이였다. 과식하는 작은 습관이 자칫 큰 병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단지 음식 뿐이 아닌 것 같다. 욕심을 ‘과식’하면 욕심쟁이가 되여 타인의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만다. 명예를 ‘과식’하면 명예중독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마음의 뜰이 황페해지기 십상이다. 권력을 ‘과식’하면 또 어떨가? 능력 이상의 권력을 ‘포식’하면 허영심에 불이 붙어 결국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 무너지게 된다. 행복을 ‘과식’하면 행복불감증에 걸리기 쉽다. 어릴 적부터 행복을 ‘과식’한 아이들일수록 정신적 체질이 허약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다. 자가용을 ‘과식’하면 과시욕의 팽창으로 오만방자해지기 쉽고 너무 크고 호화로운 자택에서 살면 가족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멀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이렇게 보면 물질을 과식해선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식은 불식’,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난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당한 모자람이 오히려 심신의 건강에 유조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 누구나 물질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로출되였기에 욕심의 파도에 휘말려들어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한 경각심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겨냥하는 과녁이 될 수는 없다. 삶을 밀어주는 근원적 에너지는 오히려 내가 선택한 가난과 소식에 있다. 배속에 음식이 적을수록 정신이 맑아지는 법이다. 사람은 탐욕이나 야망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참인간으로 돌아온다. 음식을 과식하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독소가 피를 혼탁해지게 하고 건강 이상을 초래한다. 우월감을 ‘과식’하면 허파에 바람이 들어차 과대망상증을 불러오게 되고 명예, 권세, 황금을 ‘과식’하면 거기에서 파생하는 무형의 독소의 작간으로 오기나 ‘풋기’ 따위 불순물이 자라나기에 마음은 길을 잃고 허무의 광야에서 헤매돌게 된다. 인간의 령역을 올곧게 지키기 위하여 인류의 선각자들은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자원하여 가난을 선택하였다. 텅 빈 충만을 즐기였다. 이것이 바로 어른다운 품위이고 경지가 아니겠는가?! 과식해도 좋은 게 더러 있기는 하다. 그것이 바로 책이고 지식이고 문화이다. 물질이 외부적인 포장이라면 문화는 포장 속에 숨겨진 내용물에 해당한다. “좋은 술은 뚝배기에 담긴다”는 말이 있다. 형식보다는 내용의 중요성을 설파한 고담이다. 물질적인 것, 외향적인 것에 치중하다 보면 자칫 그보다 훨씬 중요한 내적인 것을 상실하는 착오를 범하게 된다. 아무리 호화차량, 호화저택을 소유하고 최고급 브랜드에 진주보석을 휘감고 다녀도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빈약한 사람은 타인의 존경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작 물질적인 식욕은 분에 넘치게 팽창하지만 정신적인 식욕은 형편없이 위축되여가는 게 현대인들의 ‘통병’이라면 이를 지양하고 치유하는 처방으로 독서와 명상을 권장하고 싶다. 물욕이나 명예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 령적인 존재를 완성에 이르게 한다. 은퇴한 후로 나의 삶은 팽팽하던 긴장감을 상실하고 안일과 포만감에 휩싸여 게을러질 때가 많다. 걸음걸이도 느려지고 샘 솟 듯하던 시상도 가끔 흐름을 멈추군 한다. 이것은 정신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적신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 나도 행복을 ‘과식’했나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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