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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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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돌"(2) 댓글:  조회:1637  추천:0  2012-08-14
5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통증이 밀려올 땐 끊어질듯한 허리와 배때문에 당금이라도 죽을것 같았는데 안 아플 땐 아무 일 없이 멀쩡할수 있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이제껏 아팠던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완치될수 있을 때까지 정도부동하게 은근히 아픔이 쭉 이어졌는데 이번은 그렇지가 않았다. 한주일 쯤 지속되던 미칠듯한 뇨의도 요즘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나는 머리를 기우뚱거리다말고 핸드폰을 꺼내 수자판을 꾹꾹 눌렀다. “왜?!  또 아퍼?” 남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으로 한옥타브 높이뛰기를 하고있었다. “아니. 퇴근할 때 약방에 가서 (金钱草)라는 약 사와요. 책에서 그러는데 그걸 차처럼 우려서 경상적으로 마시면 좋대요.” “약은 소용없다니까. 물을 마시고 줄뛰기나 뛰라니까.” “아니, 난 약 먹을건데.” 나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며칠전에 두번째로 아프고나서 연변병원을 찾았을 때 신장과주치의사는 복부평면 엑스레이촬영을 해보라고 했다. 결국 희미하게 미소량의 결석이 수뇨관에 있음이 나타났고 결석이라고 확진이 내려졌던것이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면서 물을 많이 마시고 뜀뛰기운동을 할것을 권장했고 함께 동행했던 남편은 그 말만 귀에 쏙 들어가박혔는지 집에 돌아오자바람으로 나만 보면 물을 마시라고 닥달을 하고있는 중이였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약이 모든걸 치유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약으로 병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은 잠재의식속에서 스스럼없이 슬슬 기여나와 결석을 치료할수 있는 약이름에만 신경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슬슬 움직여 컴퓨터화면을 재생시키고 인테넷검색사이트에 접속했다. 한어로 “신결석치료방법”이라고 쳐넣고 검색버튼을 누르자 신결석증상, 신결석치료시 주의사항, 신결석환자가 주의해야 할 음식 ……하고 신결석에 관한 카페글과 웹문서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그중의 하나를 클릭하고 빠르게 읽어나가면서 나는 결석이 있다는 배를 손으로 살살 만졌다. 멀쩡했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좁쌀알갱이같은 존재가 언제 아픔을 불러올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몸속에 숨어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오빠가 스무살 때 삼켰다는 철덩이가 언뜻 떠올랐다. 오빠는 단 한번도 위속의 철덩이때문에 불편하다거나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아주 드문히 오빠는 “내 배속의 철덩이는 아마 고기가 붙어서 고기덩어리가 되였을거야.”라고 우스개삼아 이야기할뿐이였다. 그러면 엄마는 “돈이 있으면 위수술을 하고 꺼내겠는데. 돈이 있어야지……그 철덩이때문에 신체가 못쓰게 되는가보구나. 아무렴 사람은 잘 먹어야 병도 안생기는데.” 하시면서 서글픈 표정을 지으셨다. 그 철덩이때문인지 오빠는 식탐이 참 많았었다.     내 심정만큼이나 갑갑하게 찌물쿠던 8년전의 어느 여름날이였다. 환자복대신 팔 짜른 잠옷을 입고 링게르주사를 맞던 오빠는 병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싱글거리기 시작했다. “너 여기 좀 볼래? 여기에다 뇨도관을 꽂았어. 거기로 누런 오줌이 시도 때도없이 쪼르륵 흘러내려서 비닐봉지에 들어찬다니까.”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는듯이 오빠는  헐렁한 잠옷을 막 아래로 내리며 나한테 보여주려하고 있었다. “아, 싫어 . 안볼래. 그게 뭐 구경거리라구.” “봐라. 글쎄 보라니까 그러네. 여기에 작은 호스가 보인다니까.” 오빠는 짓꿎었다. “그럼 여길 봐봐. 여기 팔목에 작은 호스 꽂은거. 이건 혈액투석을 할 때 쓰는것인데 할 때마다 꽂을려니까 시끄러워서 이렇게 고정시켜놓은거야. 혈액투석을 할 때 이것을 요렇게 뽑아서 기계 달린 줄들에 련결하면 된대.” 오빠는 이번엔 팔을 걷어붙이며 뭣인가 팔목에서 데룽거리는것을 보여주었다. “아참, 안본다는데. 난 그런게 싫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저만치 물러서며 눈을 치떴다. “에이~ 보여줄 때 보라는데 그러냐? 네가 또 언제 이런 구경을 한다구. 나두 처음 해보는건데.” 오빠는 손사래까지 치며 물러서는 내가 재미있다는듯이 킬킬거리더니 살짝 이마살을 찌프렸다. “오늘 점심은 뭘 반찬으로 먹지? 병원에서 내주는 음식 참 맛이 없다. 오늘 우리 명태찜 시켜먹을가? 나 그거 먹고싶은데.”  “어이구, 무슨 환자가 돈 아까운줄 모르고 난리야. 그게 값이 얼만데?” 나는  롱담인체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정말로 속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돈이라는 글자를 생각만 해도 피가 마르는데 반찬타령이라니? 예전부터 쭉 가난하게 생활해온 친정에는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었고 겨우 사정사정해서 친척들의 돈을 간간이 꾸어서 들이댈뿐이였다. 월급에만 매달려사는 나의 얼마 안되는 적금도 바닥이 났고 난 돈을 융통하는 재간도 없었다. 돈이 많은 부자한테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있어도 정작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한테는 빌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돌려받을지 막연하기때문이였다. 결국 세상은 그렇게 빈부의 차이가 커지고있었다. 그걸 알리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오빠는 아예 입원비가 얼만지조차 묻지도 않고있었다. 아무렴 알아봐야 가족한테 더 많이 미안할것이니 적게 아는쪽이 나을거라는 생각에 함구하고있는지도 몰랐다. “야, 내가  맨날 먹냐? 오늘만 먹자는데. 며칠동안 병원에서 주는 급식을 먹었더니 영 입맛이 없다니까.  오늘은 그게 당긴다~” 오빠는 당금 명태찜이 입에 들어오기라도 하듯이 입술을 감빨았다. “알았어. 좀 있다 사다줄게. 곱도록이 주사나 맞고있어.” 나는 똑똑 떨어지는 주사방울을 점도록이 바라보며 밝은 표정으로 나와 롱을 하지 못해 안달을 떠는 오빠의 속내는 어떨가고 생각에 잠겼다.   그날 점심 오빠는 명태찜을 맛나게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어쩜 나의 잠재의식속에는 은근슬쩍 오빠가 더 이상 돈을 쓰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있는지도 몰랐다.   6   어떻게 마시지? 풀기가 있어 약간 끈적거릴것같은 푸르죽죽한 약물을 보고있을려니 입에 대기가 저어되였다. 그래도 약이라니 별수없이 마셔야 했다. 친구가 어렵게 구해준 신결석을 치료하는 밀방약이라는데 게을리할수가 없었다. 살짝 눈살을 찌프리며 약사발을 입가에 대고 한모금 입에 물었다. 쓴맛대신 싱그러운 풀향기가 입안에 퍼졌다.  “어~ 맛이 괜찮네.” 나는 숨을 고르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러는 나를 보며 남편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약이라니까 아무거나 잘도 먹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쯧쯧~” 순간, 남편의 얼굴에 10년전에 붕어탕약을 먹는 오빠를 바라보던 내 얼굴이 겹쳐지고있었다. 갑자기 싸해진 기분을 느끼며 약사발을 막 비웠을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가 침실에 가설되여있는지라 일어나기 싫어서 잠간 망설였다. 티비에 몰입한 아들애와 남편은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화벨은 지꿎게 울리고있었다. 전화벨이 두어번 더 울려서야 할수없이 투덜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여보세요~” 전화번호도 확인하지 않은채 심드렁한 소리로 언제나 한결같은 음절을 뱉어냈다. “나야.  왜 인제야 전화를 받어? 뭘하고있었어?” 동생이였다. 삼년째 한국에 체류하고있는 동생이였다. “그냥 티비보고있었어. 퇴근했는 모양이네.” 조선소에서 용접일을 하고있는 동생은 출퇴근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았다. 일이 바쁠때엔 야근도 해야 했고 굳이 회사사정이 아니라도 어려운 집형편때문에 돈이 급했던 동생은 야근비와 보너스를 챙기는데 열중하고있었다. “응, 금방 퇴근하는 길이야. 근데 누난 왜 목소리에 반가와하는 티가 전혀 안나?” 약간 석쉼한 동생의 목소리에는 잔뜩 서운함이 실려있었다. 아마도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동생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내가 야호~하고 환성이라도 지르길 바라고있었던 모양이였다. “워낙 그렇게 생겨먹은걸 뭐 어떡하라고. 안반가운건 아니야.” “하긴 뭐. 그래도 섭섭해, 내가 전화하는거 싫어하지마. 전화도 안하면 나더러 어쩌구 살라구? 여긴 국제전화비가 싸서 다행이야.” 워낙 사이가 나쁜것도 아닌데도 말수적고 무뚝뚝한 나때문에 오손도손 이야기를 주고받는 법이 없었던 우리 오누이는 구태여 멀리 떨어져있는 지금에는 “머하냐?” “일은 안바쁘냐?” “어디 아픈데는 없냐?”하고 매번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안부 몇마디를 주고받고나면 벌써 대화거리가 궁해졌다. “그렇구나. 넌 어디 아픈데가 없는거지?” “나야 뭐 씩씩하지. 아까 엄마한테 전화하니까 누나가 아프다고 걱정하던데 어디가 아픈거야? 중한거야?” “응, 그게……” 잠간 망설였다. 동생은 그 병명을 어떻게 받아들일가? “……신결석이래.” “응?......” 잠간 침묵이 흘렀다. 짧은 몇초사이 동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있었을지 궁금했다. “……허참…… 그거 유전이야. 울 집식구들은 엄마 빼고는 다 그 병을 앓는걸 봐. 아버지도 이전에 그 병을 앓았댔잖아.” “……” “아무래도 우리 집식구들은 신체구조가 그렇게 생겨먹은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병치료나 잘해. 아프고나면 아무도 소용이 없어. 아픈 사람만 아프고 힘들뿐이지 곁에선 아무 도움이 못돼. 돈이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내가 더 안말해도 알아듣겠지?” 나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동생인데도 이럴 때면 꼭 오빠같다. 헌데 뭘 알아들어야 한다는거지? 동생의 말속에 말이 들어있는것 같았지만 알수 없었다. “알았어. 안그래도 약 잘 챙겨먹고 있으니까 걱정 마.” 한참을 더 별로 긴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처남이야? 무슨 전화가 그렇게 길어.” 티비에만 정신을 팔고있던 남편이 시답지 않게 물어왔다. “그냥.” 나는 데퉁스럽게 대꾸하며 쏘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누웠다. 웬지 기분이 별로였다.   그날 밤 나는 내가 물에 빠지면 남편과 동생중 누가 먼저 뛰여들가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며 밤새 궁싯거렸다. 그리고 이튿날, 엄마가 아침 첫뻐스로 허위허위 올라오셔서 병치료를 잘하라며 통장을 내놓으셨다. 건강해야 한다는 말만 내내 곱씹으시다가 돌아서는 엄마를 나는 한참이나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섰었다.   7   완치라? 후훗~ 크득크득 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자꾸 벌어지는 입을 가리며 진찰실을 나오는 나의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뭔가 숨막히게 누르고있던것을 내려놓은듯한 홀가분한 느낌이였다. 언제 아플지도 모르게 몸속에 박혀있던 돌이 배출되였으니 이제 나는 더 아프지 않아도 된것이였다. 병원을 벗어나서 택시를 잡아탈것도 잊은채 헤실헤실 웃으며 한참을 걷다가 느닷없는 경적소리에 머리를 돌리는 찰나, 갑자기 숨이 콱 막혀왔다. 길 오른편에 줄느런히 늘어선 거무틱틱한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던것이다. 화려한 색상이나 환상적인 도안을 채색으로 찍어낸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흰 판에 검은색 글씨로 씌여져 그 어떤 흥미나 환상을 자극하지 않는 극히 단조롭고 무겁게 만들어진 간판들을 내건 곳은 다름아니라 수의점들이였다. 언제부터인지 병원과 얼마 상거하지 않은 이 곳에 하나둘 수의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완전히 수의점거리로 되여있었다. 창문으로 얼핏얼핏 보이는 수의점안은 여러가지 색상을 한 커다란 화환들이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침침할거라는 느낌을 주고있었다. 한번도 들어가본 일이 없지만 어쩐지 으스스한 기운때문에 될수록이면 피해다니거나 피할수 없을 경우로라도 의식적으로 눈길을 돌려버리던 곳이였다. 하지만 누구라도 세상을 마감할 때에는 알게 모르게 그 곳을 리용하게 되여있지 않은가? 굳이 거부할 곳은 아닌데도 굳이 피해가고싶음은 죽음에로부터 멀어지고싶은 잠재의식의 발로였을뿐이였을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피하고싶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마침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택시가 수의점거리를 지날 때까지 눈을 감고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엄마에게서 전해들은 올백으로 머리를 곱게 빗어넘겼다는 오빠의 모습이 날 지켜보고있었다.     오빠가 명태찜을 먹고나서도 나흘이 더 지나 입원한지 꼭 두주일째 되는 날이였다. 병실의 벽은 무서우리만치 하얬다. 벽의 색갈을 닮아가는 오빠의 얼굴은 부석부석 부어있었다. 희멀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난 어이없게도 “오줌”이라는 낱말을 대중없이 떠올리며 서있었다. 고요한 병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빨간 비닐봉지에서 빨간 액체들이 방울방울 흘러내려 링게르관을 타고 주사바늘을 거쳐 오빠의 혈관속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오빠와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고있었다. “후훗~ 어쩌다가 수혈이라는것까지 다 해보는구나.” 답답한 적막을 깨고 오빠가 맥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입귀가 우로 말려올라가고 바람이 헛헛거리고 지나가는 소리를 내는 그 웃음은 어쩜 울음보다도 더 처량해보였다. “그러게말이지. 난 여적 저런거 못해봤는데…오빠 저거 다 하구나면 정신이 한결 맑아질거야. 히~” 역시 입귀를 실룩거리며 헛웃음을 뽑아내는 내 마음은 허허로왔다. “이제 퇴원준비도 슬슬 해야겠지?” “무슨 소릴? 이제 투석도 더 해야 되잖어.” “됐어. 안할란다. 암것도 안하고 집에 갈란다. 이만큼 병원에 있은것도 내가 호사한거지.” “……” “내가 왜 니들 돈까지 쓰며 이렇게 입원한줄 아니? 남들이 웃을가봐 그랬어. 저 놈은 하는 일두 없이 부모 등 쳐먹으며 구질구질 살더니 병원 한번 못가보고 죽더라고 …남들이 웃을가봐. ” 오빠가 사춘기였을 때 집체생산대가 해체되고 호도거리책임제가 실시되면서 촌의 회계사업을 하느라 농사일엔 감감이던 아버지가 어쩌구려 절도죄로 옥살이를 하였었다. 엄마는 세 아이를 거느리고 먹고살기 위해 일하기에 바빴고 한창 사춘기였던 오빠에게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고민이 무엇인지 관심을 돌려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철모르는 나도 애들이 아버지가 감방갔다고 손가락질하는것이 싫어서 한주일씩 학교를 빼먹었는데 민감한 나이였던 오빠는 얼마나 힘들었을가? 결국 초중도 중퇴해버린 오빠는 번듯한 직장인도, 착실한 농군도 아닌 이름표앞에 뭐하나 붙일 업종도 없이 어중이 떠중이들과만 어울려다니는 허접스런 인생을 살면서 36살고개까지 올라와있었다.   “오빤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치료하면 괜찮아질건데…” 괜찮을거란 내 말은 바람이 불면 날려가기라도 하듯 파삭거렸다. 괜찮지 않을걸 뻔히 알고있었으니까. “나도 다 안다, 내 병. 내가 한평생 살면서 쉬염쉬염 놀아야 할걸… 아무 일도 안하고 쭉 놀기만 해서… 벌써 다 놀고 가게 되는가봐. 그게 죄라고 죽어도 이렇게 더러운 병으로 가는구나… 온 몸에 오줌이 골똑 차서… 거기에 빠져죽게말이다…” “오빠,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야.” 나는 마음이 알짝지근해났다. 입귀로 찝찔한 것이 흘러들고있었고 눈에 비친 오빠의 모습이 흐릿해져왔다. 그리고 그 흐릿한가운데서 흔들리는 오빠의 모습은 차츰차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이튿날, 오빠는 나몰래 이미 처방받은 약들을 되물리고 병원비를 결산하고 2년전에 그랬던것처럼 시골로 훌쩍 튀여버렸다. 다르다면 약을 되물리고 남은 돈들을 아는 간호사의 손을 거쳐 내 손에 넘겨준것이였다. 그 돈을 받으면서 내 마음은 오빠에 대한 안스러움과  숨가쁘게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은듯한 안도감으로 뒤죽박죽이 되였었다. 일년뒤 치료에 별 효험이 없는 눅거리 약들을 위안삼아 쭉 달고살던 오빠는 어느날인가 혼자서 머리를 감고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넘기고 앉아 엄마를 향해 “나 빨리 갈려고 주위 사람들을 애먹였나보우.”하면서 안하던 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썩 후에 엄마한테서 그 소리를 전해들으며 나는 “이식비가 있었다면 신장 하나쯤은 미련없이 오빠에게 떼여줄수 있었을가?”라는 생각을 했었고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먼 후날에도 그 물음에 난 툭 찍어 답을 말할수가 없을것 같다. 사람이란 남의 가슴에서 철철 흐르는 피를 자기 손가락에 든 가시만큼이라도 아프게 느끼지 못하는 리기적인 존재임에야.   8   “픽~” 성냥을 그었다. 불길이 확 솟구쳤다. 불붙고있는 성냥개비를 종이에 갖다댔다. 불길이 날름거리며 종이를 핥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종이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잠간사이 성냥불은 꺼져버리고 종이는 한가닥 연기를 피여올리며 활활 타번지고 있었다. 한장, 두장, 세장……종이는 계속 타고있었고 피여오르는 연기도 짙어지고있었다……   춤추듯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 결말을 내가 연출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정말로 난 저러고싶었다. 마치 영화의 한장면처럼 내 글이 활자로 찍혀져있는 종이를 태우며 연기에 아린 눈을 핑게로 오빠를 부르며 조용히 울고싶었다. 하지만 난 그럴수가 없었다. 뇨독증을 앓았던 오빠는 어느날 새벽 고향집에서 아픔으로 몸부림치다가 돌아갔고 부모님들은 오빠의 시체를 나몰래 토장을 해버렸고 나 또한 그 무덤을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어쩜 지금쯤이면 무덤속에 오빠가 지니고갔을 철덩이와 뼈들만 남아있을법도 한데 무덤앞에 서기라도 하면 오빠가 불쑥 튀여나와 예전처럼 “울집 선비야~”하며 반길것 같아서 싫었다. 결국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항상 전전긍긍하는 존재일뿐이였다. 난 파일의 상단을 클릭하고 “인쇄”를 클릭했다. “드르륵”하는 소리에 이어 그동안 내가 썼던 상투적일래야 더 상투적일수 없는 “오빠”라는 제목의 글이 종이에 찍혀 흘러나왔다. 난 종이를 돌돌 말아 빈 유리병에 밀어넣었다. 코르크마개로 꼭꼭 틀어막았다. 그리고 유리병을 상자 깊숙이 넣었다. 또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빠, 이제 잠시만 오빠를 부리우고 살게. 내 몸에서 결석이 배출되듯이 오빠를 잠시만 기억속에서 내려놓고 살게. 너무 오래는 아닐거니까 걱정마. 결석이 유전이라면 언제든지 내 몸속에 다시 생겨나게 될거야. 그때쯤이면 오빠도 내 기억속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가? 그냥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잠시만 내려놓는거야. 알았지?......  
14    "돌"(1) 댓글:  조회:1735  추천:0  2012-08-14
“돌”   김영해   1   역시나. 뭔가 탁 하고 터지며 시원하게 쏟아져나가는 느낌은 없었다. 처마밑에서 떨어지는 락수물만큼이나 천연덕스럽게 똘랑똘랑하는 소리와 함께 겨우 두어방울이 찔끔거리고 떨어질뿐이였다. 아래배에 지긋이 힘을 줘봤자 더 떨어지는것은 없었다. 갑자기 어디선가부터 짜증이 확 밀려왔다. 에잇! 하필이면 비여있는 방광때문에 오줌이 마렵다니? 속으로 게두덜거리며 오줌 두어방울이 떨어져있는 변기에 침을 탁 뱉고 물을 내리고 일어서는 내 눈앞으로 오빠의 얼굴이 휙 하고 스쳐지난것은 순간적이였다. 정말로 오빠의 얼굴이였을지 확인할수 없을 정도로 아주 순간적이였지만 난 그냥 오빠라고 믿어버릴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항상 내 잠재의식속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노크도 없이 불쑥 뛰여드는 불청객처럼 시도때도 없이 튀여나오기가 일쑤였으니까. 그렇게 오줌방울과 오빠의 얼굴을 흘려버리고 나는 아직도 남아있는 뇨의때문에 엉성한 자세로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뒤뚱거리는 걸음새로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 뒤 . 나는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아슴아슴한 기억을 더듬어 오빠와 관련이 되는 잡다하는것들을 기억의 늪에서 하나 둘 건져내고있었다.     기억의 저 편에 잠자고있다가 언제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그날은 마을 뒤산에서 연분홍진달래가 막 꽃망울을 터뜨리며 꽃샘추위를 멀리 뒤켠으로 밀어던지고 산기슭에 봄의 한자락을 산뜻하게 펼치고있던 제법 봄같은 봄의 어느날이였다.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는 내가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안고 작은 체구 전체가 연분홍덩어리가 되여 고개를 옆으로 비탄채 발밑을 겨우 확인하면서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옆으로 슥 스쳐지나면서 “니네 오빠 온다더라.”라는 소리를 흘렸고 한아름 진달래묶음때문에 나는 말소리임자도 확인하지 못한채 어정쩡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내가 섰던 산길에는 온통 진달래가 흩널리였고 나는 종주먹을 쥔채 꽤 빠른 속도로 산길을 허겁지겁 달려내려가고있었다. 단숨에 마을어구까지 달려왔을 때 멀지 않은 곳의 오빠친구네 집 앞마당에서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였고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그 속에서 오빠의 모습을 찾아 눈빗질하였다. 헌데 오빠일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빠친구네 집을 지나쳐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난데없이 “어데 갔다 오니?” 하는 귀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홱 꺾어보니 오빠친구네 집 앞마당에서 웬 까까머리가 나를 보고 싱글거리고 있지 않는가? “이눔아, 사람 보고 인사할줄도 몰라?” “어?” 그제서야 싱글거리며 악의없이 웃고있는 까까머리의 임자를 찬찬히 뜯어보던 내 입이 커다랗게 벌어지였다. 오빠였다. “아, 그냥……오빠가 왔다기에……나 먼저 집에 갈게……” 나는 두서없이 주어던지고는 낄낄거리는 오빠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한채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면서 느닷없이 엄마에게서 들은 소학교 5학년인가 할 때 하얀 소선대원 대복에 붉은넥타이를 매고 시급랑송대회에서 시를 읊었다는 오빠의 어린시절 모습을 어찌해도 상상할수가 없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대신 산길에 버려두고 온 진달래꽃들이 어찌되였을지 걱정되였다. 썩 후에 오빠가 친구들앞에서 무훈담같이 떠벌이는 말을 듣고서야 나는 상해죄로 구속되였던 오빠가 쇠줄을 뭉그러뜨려 만든 쇠덩이를 삼키고 그것을 빌미로 옥살이대신 가석방을 받고 나오게 된것임을 알게 되였다. 그 말을 들은후로 나는 늘 오빠의 위속에 들어있을 쇠덩이가 어떤것인지 궁금했다. 그때마다 그 쇠덩이때문에 오빠의 위에 천공이 생기는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을 잠간씩 해보는동안  빡빡 밀었던 오빠의 머리는 까맣게 자라고 있었고 계절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면서  시간은 미련없이 앞으로만 흘러가고있었다. 그 봄날이후로 가끔 가다 내 눈앞에서 산길에 한아름 흘려버리고 왔던 진달래가 붉게 타고있었지만 나는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꺾는 일따위는 다시 하지 않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내 소녀시절은 오직 학교와 집사이를 오가면서 부지런히 노트를 채워가는 볼펜을 쥔 내 손가락사이로 빠르게 지나가고있었다.   2   어쩌지? 오줌을 눌가 말가고 한참을 망설였다. 배뇨때문에 고민한다는것조차 웃기는 일인데 정말로 오줌이 마려운건지 아닌지를 확인할수 없다는것은 더구나 한심한 일이였다. 혈뇨와 단백뇨때문에 급성신염으로 진단받은지 한달째지만 요즘 들어 부쩍 이상했다. 늘 뇨의를 느꼈고 오늘 새벽에는 배와 허리가 끊어질듯이 아파 진통제까지 맞았었다. 오전에 혈액검사며 소변검사, 초음파검사까지 했지만 의사가 의심하는 결석은 발견되지 않으니 약도 따로 처방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뇨의를 소실되게 할 어떠한 방도도 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뇨의때문에 줄창 화장실에만 붙박혀있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오줌이 마려웠지만 꼭 배뇨가 되는것은 아니였으니까. 즉 뇨의는 있으되 오줌은 없었다. 난 참기로 했다. 아니, 그냥 뇨의를 무시하기로 했다. 자지 않고 있는 동안이면 끊임없이 느껴야 하고 꿈속에까지 따라와 줄창 화장실을 찾는 꿈만 꾸게 하는 뇨의때문만이 아니라면 소변으로 혈액과 단백질이 배출되여나가든 말든 난 내 자신이 신염환자라는것마저도 거부하고싶었다. 헌데 또 소변이 마렵다. 정말로 마려운걸가? 나는 손으로 아래배를 만져봤다. 방광이 부풀었는지를 알고싶었다. 허나 삼겹살처럼 잡히는 배살때문에 방광이 부푼건지 워낙에 살이 많은건지 알수가 없었다. 마른 체구임에도 배살만 붙는것을 보면 엄연히 늘어나는 나이는 속일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손에 지긋이 힘을 넣어 아래배를 눌렀다. 다음순간, 나는 용수철 튕기듯 화닥닥 튀여일어났다. 어느새 다리 안쪽을 향한 속내의의 두 가랭이가 빠른 속도로 젖어가고 있었고 급기야 발등으로 뭔가 뜨끈한것이 툭툭 떨어지고있었다. 오줌이였다. 헌데 멈출수가 없었다. 배뇨를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멈출수 없는게 녀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오만상을 찌프린채 멍청하니 서서 발밑의 침대시트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젖어가는 모습을 바보처럼 내려다보고있는 그때, 문득 어이없게도 내 머리속에서 뜬금없이 붕어 한마리가 풀떡이고있었다. 꺼멓게 독을 쓴 붕어가.     “이거 먹을래?” 오빠가 뭔가 저가락으로 집은채 티비를 보고있는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탕약냄새가 확 풍겼다. 시커먼것이 탕약재는 아닌듯싶었다. “뭐야, 이게?” “붕어살 발라낸거다. 후훗~” 오빠는 그것을 도로 입안에 쑥 집어넣으며 히죽 웃었다. 그러는 오빠의 왼손에는 커다란 꽃밥통이 들려있었다. “무슨 붕어살이 이렇게 시커매?” 눈살을 찌프리며 일어나서 꽃밥통속을 들여다보니 소위 붕어란 놈이 시커멓게 독을 쓰고 여기저기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찢겨진채 고스란히 담겨져있었다. “이게 약이래? 아까 약 지으러 간다더니 이걸 가져왔어?” 나는 눈이 올롱해서 붕어라고 하기엔 너무 안된 모양의 붕어와  안되여보이기는 붕어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 부어서 부석부석하고 누렇게 뜬 오빠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시병원에 갔다가 약값이 너무 비싸서 신염을 잘 치료한다고 소문난 개체진료소에 갔거든. 밀방이라면서 이렇게 처방해주더라. 탕약재와 한근짜리 붕어를 같이 넣고 달이다가 붕어와 탕약을 같이 먹어야 한대. 붕어는 당날로 먹고 탕약은 사흘 먹을수 있다더라. 그래야 붓기도 내리고 약도 든다는데.” 오빠는 말을 하면서도 열심히 붕어살을 발라먹고 있었다. “듣다 처음이야. 맛있어?” 나는 얼굴을 살짝 찌프리며 한쪽 입귀를 들어올렸다. “맛있겠지? 먹을래? 먹어보면 알건데. 후훗~” 내가 이상해하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오빠는 여전히 킬킬거리며 붕어살을 발라먹는데 열중하고있었다. “그것도 약이라고 잘 먹고있네. 몇마리나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쯧쯧~” 내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혀를 차든 말든 오빠는 오빠대로 눈이 잘 안보인다고 티비앞 카펫우에 덜렁 퍼더버리고 앉아 붕어살을 말끔히 발라먹고 탕약도 한사발이나 후루룩 들이켰다. 그러는 오빠를 보며 난 붕어살과 함께 아작아작 씹어먹혀들어갈 내 돈을 걱정하였다.   그렇게 붕어 예닐곱마리를 탕약과 함께 먹었을 무렵 마지막 탕약 지으러 갔다가 오빠는 무슨 심사가 뒤틀렸는지 약 지으려던 돈으로 친구들과 엄청 술을 사먹고는 시골로 튀여버렸다. 정말로 그 붕어가 은을 낸것이였는지 눈도 밝아지고 붓기도 하루하루 내리는것 같다고 엄마한테서 들은것은 오빠가 튀여버린지 한달도 썩 지나서였고 그쯤 오빠는 련락두절하고있었다. 아무래도 동생돈으로 약지어먹다가 나중에 술사먹고 튀여버린것이 미안했던 모양이였다. 나는 나대로 그런 오빠때문에 한동안은 남편한테 미안했었던 그때가 꼭 10년전이였다.   3   “쩐머라? 쩐머라?” 갑자기 병실이 소란스러워졌다. 통증때문에 기운을 소진한 뒤라 나른히 감고있던 눈을 떠보니 옆침대의 녀자가 누운채로 당금이라도 토할듯이 배를 붙안고 욱욱거리고 있었다. 곁에 엉거주춤 서있던 남자 둘이 각기 녀자를 일으키고 비닐봉지를 들이대지만 녀자는 욱욱거리다말고 다시 누워버렸다. 볼썽사납게 흐트러진 파마머리를 한 40대의 녀자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있었다. 입귀엔 피가 묻은 침이 발려져있었고 눈은 질끈 감겨져있었다. 녀자는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였다. “왜 저런대요?” “정확한건 모르겠구. 아까 복도에서 잠간 들었는데 자살하려구 약을 먹어서 금방 위를 씻고 들어오는 길이래. 병원에 데리고 온 남자가 시동생이라는데 갑자기 형한테서 녀자한테 가보라고 전화가 와서 친구와 함께 갔더니 이미 약을 먹었더라나. 형의 말로는 외출중인 형한테 녀자가 전화를 하면서 당장 안돌아오면 죽어버린다고 바락바락 악을 썼다나 봐. 이전에도 몇번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거 같아. 허참, 한족녀자들은 뭐가 달라도 엄청 달라. 못말린다니까.” 남편은 도통 리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기우뚱거리더니만 담배를 피우겠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도 두어시간째 사람을 들볶던 통증이 거의 사라진뒤라 그제서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 여덟개가 놓여있는 응급실은 침대마다 각양각색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찡찡거리며 주사를 맞는 애들과 그것을 어르느라 진땀을 빼는 젊은 부모들의 모습도 보이였고 환자보다는 간호인들이 왁자하니 떠드는 침대도 있었고 환자와 간호인 둘다 입을 닫아매고 떨어지는 링게르방울만 쳐다보는 침대도 있었다. 조선족과 한족이 섞여있다보니 각자의 입에서 튀여나온 조선말과 한어말들은 공중에서  막 뒤섞여 혼잡한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쪽 끝쪽에서는 늙고 추레해보이는  한족로인이 로친네가 쳐든 쓰레기통에 텍텍 뭔가를 뱉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 니 이 몸으로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니?”하고 어떤 조선족아버지가 젊은이에게 낮게 호통치고있었다. 하지만 젊은이든 애든 로인이든 다들 링게르병을 달고 있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안스러워보였다. 모두가 심각하게 앓고있는것인지 아니면 조금만 아프다싶으면 링게르점적주사부터 처방해주는 의료진탓인지 알수가 없었다. 나도 저들속의 일원이라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지어내는데 잠간 담배피러 밖에 나갔던 남편이 황황한 얼굴로 들어왔다. “허참, 글쎄, 누가 저기에 애를 버렸다니까.” “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남편의 입을 바라봤다. “병원대문옆에 갓난아기를 버렸다니까.” “세상에~” “애를 빨간 등산복에다 싸서 버렸어. 금방 간호사들이 와서 경찰들과 함께 안아갈 때 보니까 애가 대여섯달 되여보이는데 얼굴이 새하얀게 너무 이쁘더라. 어떻게 지금도 애를 버리는 사람이 있냐……” 남편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공연히 침대가에서 서성거렸다. 갑자기 심란해났다. 링게르병을 목숨줄처럼 붙잡고 있는 환자들과 거듭 자살을 시도하는 녀자, 그리고 버려진 아기…… 나는 벌떡 일어나앉아 주사바늘을 콱 뽑아버렸다. 주사바늘이 꽂혔던 혈관을 지긋이 누르며 나는 주섬주섬 내려서서 미적거리며 신발을 찾아 발에 꿰였다. “우리 가요.” “왜?” 그제서야 주사바늘을 뽑은 나를 발견한 남편은 의아해하며 주섬주섬 물건을 챙겼다. 선참으로 병실문을 따고 나와 병원현관을 가로지르며 나는 혹시라도 버려진 아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가 두리번거렸지만 버려졌을것 같은 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병원대문을 빠져나와 병원대문주위를 기웃거렸지만 역시 아무것도 눈에 띄는것은 없었다. 대신 9월의 막바지인지라 어제의 끝이라고 해야 할지 오늘의 시작이라고 해야할지 애매한 시간대인 밤12시경의 공기는 차갑게 페부속으로 거침없이 흘러들고있을뿐이였다.   그 날이 바로 어느날 새벽이후 한밤중에 두번째로 배의 통증을 느꼈던 날이였다. 그리고 그 날 난 오빠를 잊고있음을 모르고있었다. 내 신경은 온통 내 아픔에만 쏠려있었으니까.     4   “탕!”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당금이라도 넘칠듯이 아슬아슬하게 눈확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려 무릎에 텀벙텀벙 떨어졌다. 우리 회사에서는 인테넷정보사이트를 운영하고있었고 그 사이트에 게재되는 정보나 광고물들의 홍보비로 회사는 톡톡히 리윤을 챙기고있었다. 회사규정상 사이트의 매 카테고리의 내용물들은 실시간으로 빠르게 업그레이드 되여야 했다. 헌데 내가 어제 청가를 낸탓으로 내가 책임진 카테고리는 엊그제 밤부터 시작되여서 36시간째 업그레이드 되지 못한것이였다. 그때문에 출근하자바람으로 나를 찾은 편집국장의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있었다.  “……청가를 맡았든 어쨌든 선주씨가 맡은 일은 선주씨가 해야 할거 아닙니까? 회사신용도가 떨어지고 회사수입에 차질에 생기면 선주씨가 책임을 지실건가요?  자기 집 일 아니라고 회사일 우습게 생각지 말아요. 그런 사업정신으로 무슨 일을 하겠어요?...... 당장 1시간내로 업그레이드 시키고 절로 알아서 어제 못한 분량을 채워요.” 편집국장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애를 몰아부치듯  목소리에 날을 세워 한껏 쏟아붓고서야 들어올 때처럼 씽하니 찬바람을 일구며 “쾅” 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던것이다. 편집국장의 얼굴을 외면한채 한껏 눈물을 참고있던중이였던 나는 결국 문이 닫히기 바쁘게 좌르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난 분명히 우리 편집실 실장한테 청가를 맡었었고 청가를 맡았으면 일을 안해도 되는줄로 알고있었다. 헌데 그게 아니였다. 아픈것도 죄야?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아내리고 손에 마우스를 잡았다. 분하고 억울해도 일을 해야 했다. “이건 뭐 사람을 일하는 도구로만 생각해요. 아무리 애를 써서 일을 해봤자 월급받기 위해 그러는줄로만 알아요. 저도 건강상태가 안좋아서 산전휴가 좀 달랬더니 안된대요. 옛날엔 해산하는 날까지도 일밭에 나가서 일했다면서 한달전부터 휴가달라는 사람은 제가 처음이래요. 버틸수 있는데까지 버티래요. 안그래도 출산휴가 주는것도 대신 알바를 구해야 하니까 회사손실이라면서.” 옆자리의 사무실막내가 낮게 투덜거렸다. 나는 커다란 롱구공만큼이나 부풀어오른 막내의 배를 안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다 말고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막 마우스를 누르다말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의 사이에 박힌 작은 기미 하나가 눈에 잡혀왔다. 작지만 예나 다름없이 또렷했다.     오빠의 오른손에도 놀랍게도 내 기미가 있는 위치와 똑같은 위치에 기미가 있었다. 다르다면 오빠의 손에 있는 기미가 깨알만큼하여 내 손에 있는 좁쌀알만큼한 기미보다 좀 더 크고 더 선명한것뿐이였다. 어릴적 오빠와 함께 손벽을 마주치며 장난을 치다가 내가 발견한것이였고 오빠는 “어? 진짜네. 엄마자궁에 뭐 이상한것이 있나봐. 안그러면 이렇게 똑같은 곳에 기미가 있을수가?” 하고 놀라와했었다. 하지만 어느 한번의 사고이후로 오빠의 손에 있던 기미는 사라져버렸고 난 내손의 기미를 볼적마다 어쩔수없이 오빠를 떠올리게 되여있었다. 신염치료이후 한 반년을 집에서 빈둥거리던 오빠는 겨울에 관내로 들어가는 외사촌매부를 따라나섰다. 해마다 농한기만 되면 따둔 조리사자격증이 있는 외사촌매부는 관내로 들어가서  한겨울 료리사질을 하여 적잖은 돈을 벌군 했었다. 떠나기전 오빠와 외사촌매부는 우리 집에 들렸었다. 나는 점심 한끼를 정성들여 지어주고 떠날 때에는 차비를 하라며 500여원을 오빠에게 쥐여줬었다. 여태 로총각으로 떨꺽거리며 농사도 안하고 변변히 하는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오빠가 외지로 가서 뭔가 새출발을 했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오빠는 그 돈을 받으며 이제 떼돈을 벌면 몇곱으로 갚아준다고 탕탕 가슴을 쳤다. 헌데 한창 관내로 들어가는 기차안에 있어야 할 오빠와 외사촌매부가 사흗날 점심무렵에 나의 직장으로 들이닥쳤다. 그새 어딘가에 가서 돈을 술값으로 비벼먹고나니 차비가 모자랐던것이다. 벌컥 화가 동한 나는 하는 오빠의 말을 무시한채 돈지갑에 있던 200원을 탈탈 털어주고는 찬바람을 일구며 돌아섰었다. 그렇게 떠난지 석달만에 전화한통 없던 오빠가 보기에도 끔찍한 손모양을 하고 우리 세집에 들어섰다. 커다란 흉터자국이 나있고 군데군데 죽은 껍질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얼룩덜룩한 오른손에 엄지손가락이 제자리를 못잡은채 약간 비뚤게 붙어있었다. 당연히 내 손의것과 닮은 기미는 있었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이 화등잔이 된 나에게 오빠는 차비가 모자라서 계획했던 행선지까지 못가고 대련에 눌러앉아서 직장을 찾았는데 출근한지 보름만에 손이 흐름선에 미끄러져 들어가 그 모양이 되였다고 남의 일처럼 들려주었다. 입사하자마자 로동계약을 한 덕에 만여원 되는 치료비를 몽땅 안은 회사가 그저 밑지고 나앉았다고 가볍게 웃기까지 하였다. 그런 오빠를 보며 난 오빠에게 정말 시를 쓰던 정열의 열여덟살이 있었던것인지 의심되였다. 오빠는 그때 심심하면 “사자머리 펄펄 날리고 나팔바지로 거리를 쓸며……”라는 자작시를 두어구절 읊었고 오빠가 일을 저지를 때마다 엄마는 “문학통신학습반에서 통지서가 왔을 때 보냈어야 하는건데. 그때 강습비 120원이 없어서 못보낸게 가슴에 걸려. 그때 거기라도 갔으면 쟤가 저렇게 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하시며 한숨을 풀풀 내쉬였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이야기는 나한테 신빙성이 없었다. 오른손이 병신이 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오빠한테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문학도였었다는 흔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엄마처럼라고 중얼거리며 후회를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빠가 그 손으로 건네주는 사과를 아무 느낌없이 받아먹을수 있을 무렵 난 죄책감따윈 감감 잊고있었다.  
13    배란기(2) 댓글:  조회:3304  추천:1  2011-09-30
4 절기로는 가을에 속하지만 사람들 의식속에는 언녕 초겨울로 각인되여있고 곧잘 첫눈이 내리기도 하는 11월은 명색이 가을일뿐이지 겨울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그만큼 책에 씌여져있는것보다는 자기의 느낌에 충실할 때가 꽤 있다. 그래서 11월은 언제봐도 가을과 겨울 그 어느 절기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달이여서 난 11월이 안스러울 때가 참 많다. 더구나 11월을 하루하루 겪어갈 즈음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나는 오늘도 신문사의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유리창을 거쳐 흘러드는 한낮의 따스한 해볕을 만끽한채11월을 안스러워하며 그중의 하루의 시간을 쪼개고있었다. 말이 신문사지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큼한 뉴스거리가 거의 전무한 자그마한 산간도시라 매주 세번씩 출간되는 신문에는 거의 인터넷에서 퍼온 기사들이 도배를 하고 있었고 나까지 네명뿐인 편집 겸 기자들은 발 아프게 뛰여다니며 취재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신문이라서 볼만한 기사거리보다 광고가 차지하는 판면이 더 많은지라 개인운영인데도 별탈없이 월급을 타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것은 나한테 참 감사한 일이였다. 나는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는 책이며 문건들을 정리하다말고 머리를 들어 주위를 흘낏거렸다. 맞은켠에서는 마우스에서 손을 떼지 않은채 컴퓨터의 모니터에만 눈을 박고 있었고 왼켠에서는 손거울을 쳐든채 얼굴에 분솔을 토닥거리고 있었고 오른켠에서는 안경을 추슬리며 책에다 줄을 좍좍 긋고있었다. 모두들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고있었다. 나는 의자등받이 가까이로 허리를 밀착하며 슬그머니 뒤등으로 손을 올려 브래지어단추를 풀어놓았다. 금시 팽팽하던 가슴이 느슨해지며 숨이 활 나왔다. 며칠전부터 가슴이 부풀어오르면서 유두가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래배에 지긋이 통증이 오기도 했고 체온이 떨어지며 오슬오슬 추워지기도 했다. 부풀어오른 가슴은 브래지어속에서 다치기도 무섭게 한껏 팽대되여 통증을 호소하고있었고 속옷이 많아진 분비물로 하여 기분나쁘게 달라붙으며 끈적거려왔다. 배란기증상이였다. 다음달 예정생리일로부터 꼭 14일째는 배란일이다. 아기를 만들수 있는 란자가 란소에서 배란되는 날인것이다. 배란일을 기준으로 배란일전 3일과 배란후2일까지 도합 6일좌우는 임신가능한 시간이였다. 남들은 배란기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배란기증상도 느끼지 못한다는데 나는 윤이를 낳기 썩 전부터 배란기를 정확하게 계산해낼줄을 알았고 배란기때가 되면 민감하게 배란기증상을 보이군 했다. 이런저런 불편함때문에 공연히 귀찮아지는 배란기는 윤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제외하고는 어김없이 달마다 찾아왔다. 기껏해서 한번에 한개가 배출되는 란자, 많아야 두개까지 가능하다는 란자가 왜 매달마다 배란이 되여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출산하는데 필요한 란자는 평생에 한두개정도인데도말이다. 윤이가 있는 지금 배란이 안된대도 별 서운할것이 없을것 같은데 매달 나타나는 배란기증상은 내가 아직도 생육기능을 갖춘 녀자임을 꼬박꼬박 일러주고있다. 사정만 하면 언제고 정자들이 줄을 지어 배출된다는 남자에 비해 녀자는 참 린색하다는 생각을 하며 난 달력을 살폈다. 잉태할것도 아닌데 매달 배란기증상을 느낄 때마다 배란일을 계산해보는것이 습관이 되여버린것이 우습기도 했다. 내가 혼자서 속으로 킬킬 웃음을 던지며 배란일을 계산하는 바로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사무실문이 벌컥 열리며 커다란 꽃바구니가 누군가의 팔에 안겨 들어왔다. 약속이라도 하듯이 눈길들은 일제히 꽃바구니에 꽂혔다. 꽃바구니뒤에서 열여덟살쯤 되여보이는 말쑥한 남자애의 얼굴이 불쑥 나오며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누가 김선자씨예요?” “네? 전데요.” 나는 어정쩡해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꽃바구니에 꽂혔던 눈길이 어느새 나에게로 집중되여있었다. “선자씨한테 온 꽃인가보네. 누가 보낸거지?” “좋겠다~ 오늘 무슨 날이지? 무슨 명절이라도 되는가?” “선자씨, 그거 혹 애인이 보낸거 아니야? 애인있었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가운데서 나는 내앞으로 내밀어지는 접수카드에 싸인을 하고 아름넘치게 꽃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꽃바구니에 비닐로 된 하트와 함께 명함장만한 카드가 한장 달려있었다. --생일 축하해!!! 명년 내 생일엔 토끼같은 딸애 하나 안겨주는게 어때? 저녁파티는 기대해도 좋음!!! --남편으로부터 “아참, 안하던 짓을 하면서 ……” 나는 낮게 궁시렁거리며 픽 입귀로 웃음을 흘렸다. “제 생일이라고 남편이 보낸거예요.” 나는 게면쩍게 웃으며 빨간 장미로 꽉 찬 꽃바구니를 사무상 한켠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남편 맞아? 아니 선자씨는 뭐 잘하는것이 있다고 생일에 남편이 꽃을 보내고 그래?” “다들 선자씨 본받으라구. 오죽 남편한테 잘했으면 꽃을 보내겠어? 아줌마들은 돈벌어오라고 바가지 긁을줄밖에 모르니까 생일이 아니라 환갑이라도 꽃 한송이 못받을거라구.” “오늘 뉘네 집 남편들은 다 혼나게 생겼어. 저렇게 꽃을 보내는 센스도 없고 뭐야?” “저거 애인 보낸것인지도 몰라. 선자언니 저녁에 집 못가져가면 애인 보낸것인줄 알거니까 그리 알어.” 다들 꽃을 받은것이 자기라도 되듯이 들떠서 한참을 찧고 빻고 하였다. 그러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내 신경은 카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축하만 할것이지 딸타령은 무슨 딸타령……” 나는 꽃바구니에서 카드를 떼여 명함장캐스에 건사하면서 궁시렁거렸다. 윤이가 선코를 떼는 바람에 둘째를 낳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한참은 집안이 시끄러울것 같았다. 가뜩이나 애들을 좋아하는 남편이 안그래도 언젠가부터 대여섯살 된 녀자애들이 부모들앞에서 재롱을 떠는것을 보면 “우리도 저런 딸애 있었으면 좋겠지?”하고 은근히 부러워하며 내 눈치만 보던 판이였던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힝힝 코바람을 일구며 못들은척 외면을 했지만 이번만은 어쩐지 남편이 집요하게 밀어붙일것 같은 예감이 끈적끈적 달라붙었다. 괜스레 죄없는 윤이가 괘씸스러웠고 둘째를 낳고 온 세상에 자랑하고 다니는 희영이마저 못마땅했다. “호~”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고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희영이의 번호가 뜨고 있었다. 범이 제 흉 보면 온다더니만 하는 생각으로 풀럭 웃음이 나왔다. “생일 축하해~ 오늘 기분 어때? 윤이 아빠가 잘해주지?” “띠”하는 전화련결음이 떨어지기 바쁘게 희영이는 인사말도 없이 저혼자 짝짜그르르 끓어댔다. “그래! 잘해준다. 고마와!” “야, 뉴스 하나 있는데. 이건 기쁜 소식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암튼 특대뉴스—미금이가 넷째 임신했대!” “뭐야? 동창모임때도 그런 말 없었잖아?” 미금이가 딸 셋을 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나는 눈이 휘둥그래지고말았다. “임신한지 금방 한달이 됐대. 나두 어제 밥 먹자고 전화했다가 입덧 한다는 소릴 듣고 알았어. 미금이 남편이 아들을 원한다나 봐.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낳을거라는데?” “아니, 사람이 애낳이기계도 아니구. 지금 세월에 아들딸 따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왜 그런다니?” “누가 아니? 맨날 자식은 하늘이 내려주는 선물이라고 그러더니만 선물 되게 많이 받고싶은 모양인거지.” 선물? 희영이의 말에 난 알쏭달쏭해서 미간을 찌프리였다. 희영이와 통화를 하는 내내 머리속에는 얌전히 구석쪽만 지키고앉았던 미금이의 소심한 얼굴이 정지된 화면처럼 떠있었다. 남편이 아들을 원해서 넷째까지 임신했다는 미금이. 그럼 윤이때문에, 남편때문에 내가 또 애를 하나 더 낳는것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것이 아닌가? 갑자기 오슬오슬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내가 애를 밸수 있는 건강한 자궁을 갖고있다는것을 확인시켜주는 배란기증상. 오늘따라 더 기분나쁘게 느껴지는 배란기증상이였다. 난 웬지 싫었다. 배란기증상이. 5 문어구 량켠에 갈라져놓여있는 인공석 두개는 울퉁불퉁하게 바위를 닮았을뿐이지 바위의 견고함과 웅장함이라든지 기대고싶을만큼한 믿음직함은 하나도 구비하지 못하고있었다. 울창한 숲이라든가 밋밋한 산등성이마저 없이 시내 한복판의 건물문어구에 서있는다는 그 자체부터가 인공석에게는 더없이 어정쩡한 일일지도 몰랐다. 혹 산에라도 서있었으면 날려가는 흙먼지나 지나가는 풀씨가 내려앉아 이끼가 낀다든지 풀싹들이 돋아난다든지 하는 일들이 시간이 어지간히 지난후면 일어날터이고 그러면 조금은 바위를 닮아갈수도 있을것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카페문어구에 놓여져있는 인공석은 그냥 카페외곽에 별 희귀하지도 않은 이색적인 색채를 억지로 보태주고있는 존재일뿐이였다. 인공석 하나에는 의뭉스러움이나 신비로움을 떠올리기에는 그 필체라든지 모양새가 너무다 단조롭고 딱딱한
12    배란기(1) 댓글:  조회:2722  추천:1  2011-09-30
배란기 김영해 1 구름이야. 끝없이 펼쳐진 구름이거든.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구름들이 보송보송 피여나 어디라없이 꽉 채우고있는 구름밭우에 푸른 하늘이 꿈결같이 펼쳐져있단다. 그 하늘아래, 그 구름밭우에 련잎모양의 커다란 이파리들이 빨갛고 노란 가지각색의 커다란 꽃망울들을 살며시 보듬어안고 자장그네처럼 조용히, 아주 조용히 몸을 뒤채고있어. 어떤 꽃망울들은 입김이라도 스치면 당금이라도 터질듯이 부풀어있고 어떤 꽃망울들은 아직은 파란 기운이 감도는 꽃이파리들로 돌돌 감싸고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있고 어떤 꽃망울들은 발가스름하고 노르스름한 본연의 꽃이파리들로 살포시 몸을 부풀리고 있단다. 갑자기 푸른 하늘의 저쪽끝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해. 그 기운은 점차 한줄기의 붉은 빛으로 되여 하늘에 퍼지면 하늘과 구름은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거든. 그 붉은 빛속에서 꽃망울들이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가. 하늘도 구름도 붉은 빛을 뒤집어쓰고 한순간 밝게 빛날 때 꽃망울들이 열리지. 한껏 부풀었던 꽃망울들에서 ,당금이라도 터질것 같은 꽃망울들에서 꽃이파리들이 하나둘 뒤로 몸을 젖히면서 꽃망울들이 열리지. 꽃망울이 열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무엇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라. 아가야. 눈부시게 하얀 날개가 달린 천사같은 아가야. 빨간 꽃망울에서도, 노란 꽃망울에서도 색이름을 알수 없는 수많은 꽃망울들에서 아가들이, 날개를 단 아가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로 날아오른 아가들의 몸에도 붉은 빛이 어리고 입을 열어버린 이젠 꽃망울이 아닌 꽃송이들이 아가들을 바라보며 오색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순간이지. 붉은 빛을 안고 하늘을 배회하던 아가들은 다시 구름밭을 헤치고 날아내리는거야. 구름밭아래에 열린 푸른 하늘로, 그 하늘아래의 어딘가를 향해 날아내리는거야. 붉은 빛을 안은 아가들이, 날개를 단 아가들이 구름밭아래로 붉은 빛줄기처럼 미련없이 서둘러 날아내리면 구름밭은 다시 보송보송해지는거야. 열린적 없었던것처럼, 아가를 잉태한적 없었던것처럼, 아가를 떠나보내지 않았던것처럼. 그러고나면 열렸던 ,꽃망울이 아닌 꽃송이들은 반짝이던 오색의 빛갈 그대로 서서히 흩어져버리고 그가 앉았던 이파리마다에 어느새 입을 꼭 다문 고집스러운 쬐꼬만 새 꽃망울들이 댕그라니 올라앉아있거든. 이제 또 하루하루 부풀어갈 꽃망울들이. 언젠가는 꽃송이로 피여나 흩어질 꽃망울들이야. 구름밭우엔 여전히 크고작은 꽃망울을 보듬어안은 이파리천지야. 커다란 이파리들이 꽃망울을 보듬어안고 자장그네처럼 조용히, 조용히 몸을 뒤채고있어…… 언젠가부터 “아가는 천사야.”하던 엄마의 이야기는 하나의 정경으로 부풀려져 나의 머리속에 그려지고있었고 그 정경속에서 아무리해도 리해하기 어려웠던 그 한구절의 말을 엄마는 아름다운 문구로 부풀려서 내게 차분히 이야기해주고있었다. 그래서 난 믿어버리고말았다. 아가는 천사라는것을. 하늘이 보내준 천사라는것을. 2 “엄마, 아기를 사줘요..”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 책에서 눈을 떼여 윤이를 바라봤다. 컴퓨터게임을 하다말고 아기를 사내라니? 가끔 이렇게 6살짜리 아들애 윤의 입에선 늘 예측할수 없는 엉뚱한 말이 튀여나와 날 당황하게 만들군 했다. “이것 봐요. 아기가 얼마나 귀여워요? 아기 사서 키워요.” 녀석은 머리도 돌리지 않은채 부지런히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 윤이쪽으로 다가갔다. 부동한 피부색을 가진 세 아기를 침대에 눕혀놓고 엇갈아가며 돌보는 게임에 열중하고있었다. “아기를 어디서 파는데?” “상점에서 사면 되죠. 맛있는것도 상점에서 파는데 아기도 상점에서 팔거야. 우리 귀여운 여자아기 사요.” 윤이는 잽싸게 마우스로 피부색이 하얀 아기를 집어내여 보행기에 앉혀놓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분을 톡톡 쳐서는 도로 침대에 눕히였다. “애두, 참. 후훗~” 나는 저도모르게 웃음이 쿡쿡 나왔다. “윤이야, 아기는 상점에서 파는게 아니야. 상점에 없어.”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윤이는 이번에는 마우스로 피부색이 까만 아기를 집어내여 보행기에 앉히고 우유를 먹여 침대에 눕히였다. 그리고는 또 바삐 칭얼거리는 다른 아기에게 놀이감을 쥐여주었다. 물끄러미 윤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말고 윤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알아들을지 난감해졌다. 옛날 어른들처럼 다리밑에서 주어왔다고 말하는것은 너무 황당한 거짓말일것 같고 병원에서 사왔다고 하자니 병원에 가서 사오라고 성화를 댈것 같았다. 그렇다고 낳았다고 말해줄려니 그 말 뒤에 뒤따를 더 많은 물음들을 감당해낼것 같지 않았다. “윤이야, 아기 사오면 윤이 동생 될거거든. 그러면 윤이가 맛있는것도 나누어주어야 하고 장난감도 주어야 해. 그럼 윤이한테는 아무것도 없어도 돼?” “줄거야. 다 줘도 돼. 그러니까 동생 사다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던진 윤이는 여전히 마우스를 쉴새없이 움직이며 세 아기를 번갈아돌보았다. 6살짜리 애에게는 무엇보다도 커보일 장난감도 나눠눌주 있다면 다른 말이 더 필요치가 않음을 난 알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난 윤이를 설득할수밖에 없었다. “동생 사려면 돈이 엄청 많아야 되거든. 엄마 아빠는 아직 그렇게 많은 돈이 없어.” 윤이의 얼굴이 찡그려지고있었다. “아앙~ 동생 사 내! 동생!” 윤이는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녀석은 손에 들었던 마우스를 홱 팽개치고 침대에 마구 엎드려 서럽게 울었다. 녀석은 울음이 터지는것도 갑작스러웠다. 아무래도 녀석은 엄마인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것은 태여날 때부터 타고난것 같았다. “윤이야~” 윤이는 몸을 비틀며 등을 다독이려는 내손을 밀어냈다. 모니터화면의 세 아기들도 저마끔 말풍선에 우유병이며 놀이감이며 기저귀를 그린채 앙앙 울음을 터뜨리고있었다. 나는 할수없이 게임을 종료시킨채 거실로 나와버렸다. “애가 왜 터졌어? 당신네 둘은 붙기만 하면 소란스러워.” 티비에만 정신을 팔고있던 남편이 얼굴을 찌프렸다. “동생 사내래요. 안된다고 했더니 저렇게 터져버렸어요.” “그래? 그럼 사면 되겠네.” 남편은 급기야 희색이 만면해서 벌떡 일어나앉았다. “아니, 당신은? 그게 뭐 애들 놀음이라고 사니 마니 해요?” 나는 어처구니없어 눈을 찔 흘겼다. “안그래도 지금 둘째를 낳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아. 윤이도 혼자면 나중에 외로울건데 이참에 하나 더 낳자~ 응?” 남편도 윤이 못지 않게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싫다니까요. 애는 윤이 하나면 됐어요.” “애가 저렇게 울면서 동생 사달라는데 기특하지 않아? 당신 친구들도 둘째 많이 낳는다며? 부모님들도 손녀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이왕이면 딸 하나 더 보는게 좋지 않겠어?” 남편은 바투 다가앉았다. “내가 윤이를 얼마나 어렵게 낳았는지 당신도 알면서 그래요? 난 자신이 없어요.” 결혼한지 5년만이 생긴 윤이, 난 정말 내 자궁속에 다시 애가 들어설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알아. 당신이 그동안 불임때문에 고생한걸 안다구. 오죽하면 내가 당신을 동무해서 이 억대우같은 신체에 보신약을 2년씩이나 먹어주었겠어? 다 당신이 혼자 탕약 먹기 힘들다고 징징거리니까 되지도 않는 당신 억지에 넘어간거지. 윤이도 낳은걸 보면 인젠 당신이 완전히 치유된거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 마음만 먹으면 되는거야. 안된다쳐도 밑지는것은 없잖아. 우리 낳자~ 응?” 남편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불임이란 말을 듣고 “지금은 약이 좋으니까 치료하면 금방 임신할수 있겠지?”하던 때처럼 절박하리만치 간절한 눈빛이였다. “암튼 난 싫어요. 그만합시다.” 나는 짜증을 내며 인상을 팍 썼다. 남편은 시무룩해지더니 “에이~”하고 김빠진 소리를 내며 다시 카펫우에 누워버렸다. 티비에서는 얼굴에 검은 버섯이 한벌 쭉 깔린 로인이 한창 항일전쟁때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영화에서 퍼왔을 전투화면이 가담가담 끼이며 지루하던 이야기 한토막이 끝나고 광고가 시작되였다. 남편이 리모컨을 꾹 눌렀다. 화면이 껌벅하더니 축구경기장면으로 바뀌였다. 체육채널이였다. 구라파주축구경기 생방송중이였다. 어느새 축구공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남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파란 잔디가 쫙 깔린 체육장에서 땀 흘리며 뛰는 힘이 불끈불끈 솟을것 같은 체구의 축구선수들과 카펫우에 베개를 베고 편히 누워있는 남편의 불룩 솟은 배를 엇갈아보며 나는 그들사이에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여있는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축구공보다 선수의 얼굴과 체격에 시선에 더 꽂히는 나의 귀는 윤이의 방을 향해 활짝 열려있었다. 윤이의 방에서 “잘했어요, 친구!”하는 소리가 연신 터져나오고있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틀림없이 야채가게에 가서 감자며 당근이며를 사는 게임을 하는 모양이였다. 녀석은 게임을 해도 사내애들이 좋아하는 사격이나 스포츠카게임대신 미궁이며 인형옷입히기, 갓난아기돌보기, 야채사기와 같은 계집애들이나 놀법한 애매한 게임에만 열중하고있었다. 나는 슬슬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딱히 해야 할것도 아닌데 쏘파에 기대고앉은 몸이 내 몸같지 않게 불편했다. 육성은 빠져버리고 티비와 컴퓨터가 내는 소리로 꽉 찬 공간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내가 있다는게 불편했다. 쿠션을 안고 티비화면에 눈을 박고 있어도 정작 눈안에 들어오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쿠션을 베개 삼아 베고 쏘파에 쪼크리고 누워도 눈은 감기지가 않았다. 이럴 때 쯤이면 난 뭔가를 바라게 되여있었다. 뭔가 이 소란한듯하면서도 숨막힌 공간에서 빠져가주길 바랬다. 그 바램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여올라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머리끝까지 기여올라갔다가 어디로 빠져버릴지 몰라 다시 온 몸속에 립자로 되여 부서지고 흩어졌다가는 가슴 어디선가에서 다시 뭉쳤다가 부서지고 흩어지기를 거듭하였다. 나는 급기야 쿠션을 팽개치고 벌떡, 아니 슬그머니 일어났다. 저만치 놓여있는 리모컨을 잽싸게 쥐여 꾹꾹 눌렀다. “당신이 축구 안보면 저 사람들이 뽈 안차겠대요?” “보고있잖아!” 남편이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 화면은 바뀌여버렸다. SBS채널에서 이 막 4라운드열전을 끝내가고있었다. 노래제목이 뭔지 파악하기도전 남편은 리모컨을 콱 낚아채였다. 화면에서는 금시 슛하는 장면이 연출되였다. “내가 볼거야!” 나는 남편의 손에 쥐여진 리모컨에 손을 뻗쳤다. 남편은 리모컨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킬킬거렸다. 씩씩거리며 바둥거려도 손아귀를 풀수가 없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나는 리모컨을 내버려두고 씽하니 달려가 디지털티비접수기의 수자판을 꾹꾹 눌렀다. 금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은 다시 경기장면으로 바뀌였다. 화면은 또 껌벅하더니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은 다시…… “에익! 어쩌다 집에 있을려면 꼭 저렇게 심술을 부려. 그 정력이면 애나 낳아 키울것이지……” 노래하는 장면과 축구경기장면이 몇번이나 엇갈아 바뀌던 끝에 남편은 드디여 리모컨을 던지며 휭하니 일어나 위생실로 가버렸다. “와아~” 화면에서는 함성과 함께 꽃보라가 터지며 누군가에게 황금열쇠가 전해지고 있었다. 위생실에서 철렁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슬며시 입귀에 얄궂은 웃음 한자락을 베여물었다. 한참후. 나는 출입문이 닫기기 바쁘게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티비를 끄고 방에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물끄러미 윤이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있었다. 녀석은 벌써 아까 울었던 일을 잊고 캐드득거리며 게임에 열중하고있었다. 하긴 누굴 닮았는지 쉽게 토라졌다가도 쉽게 풀리는 윤이였다. 게임을 하다가 중간중간 머리를 돌려 상큼한 코등에 주름을 만들며 코를 잔뜩 달아맨채 해시시 웃어주는 윤이가 꼭 깨물어주고싶도록 귀여웠다. 좀전의 불편하던 기분은 봄눈녹듯이 사라지고 온몸을 해나른하게 하는 즐거운 느낌이 발끝에서, 손끝에서, 가슴밑바닥에서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희영이가 날린 단체메시지를 확인하며 눈길을 창가로 돌렸다. 가을해볕이 펴지기 시작하는 창가로 노랗게 물든 락엽 하나가 팔랑이며 날아지나고있었다. 어느덧 9월도 막바지에 접어들고있었던것이다. 3 익숙한 얼굴들이 생소하게 보여왔다. 세월은 순진하고 청순했던 고수머리, 단발머리의 소년소녀들 대신 파운데이션을 덧칠하여 기미를 가린 아줌마들과 금방 면도를 끝낸듯 푸르스름한 턱의 아저씨들을 눈앞에 부리워놓고 있었다. 누구는 얼굴륜곽을 보면 금방 알겠고 누구는 눈매만 봐도 익숙하고 누구는 목소리만 들어도 이름을 짚어낼수 있고 누구는 행동거지만 봐도 알만한 그들, 그들은 변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있었다. 얼굴에서 몸에서 자신만의 고유의 그 무엇을 발산하고있는 그들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했다. 며칠전에 본 얼굴도 있었고 몇년전에 본 얼굴도 있었고 졸업한지 꼭 15년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4년의 동창생활중 어느만큼의 시간과 사연들을 공유하고있었든지를 막론하고 똑같이 반가워하고 무랍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수 있다는것이 신기했다. 동창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15년 세월을 “안녕?”하는 한마디 말로 뭉때리고 별 중요하지 않은 추억거리들을 끄집어내여 시글벅적 떠들어댈수 있다는것이 신기했다. 별로 친한 기억이 없는 얼굴들도 “보고싶었다”며 만져주고 손을 잡아주는 내가 혼동스러워졌다. 술이 서너순배 돌았을 즈음 잠간 자리를 비워 홀의 빈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왼쪽 어깨에 손이 실려오면서 왼쪽 옆자리의 의자가 뒤로 당겨지고 누군가 털썩 들어앉았다. 상민이였다. “뭐하니? 여기서.” 불깃불깃한 얼굴로 상민이는 나이와 걸맞지 않게 코등에 주름을 잡으며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그냥. 술 좀 마셨더니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말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굴이 홧홧거리고 머리속에서 수만마리의 지렁이가 무질서하게 기여다는듯 싶었다. “와아~이게 몇년만이니? 7년만인가?” “글쎄. 그런가?” 나는 열심히 손가락을 꼽는 상민이를 바라보며 픽 웃어버렸다. “결혼은 했지? 애는 몇살이야?” 나는 7년전까지도 화려한 싱글이라며 싱글싱글 웃기만 하던 상민이를 떠올렸다. “당연히 했지. 허허~” 상민이의 웃음이 웬지 부자연스러워보였다. “행복하니?” “행복? 그럼, 당연히 행복하지. 넌 아니니? 행복이라는것은 느끼기에 달린거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거겠지. 근데말이야…….” “니들 예서 뭐하니? 다들 반급주제가 부른다고 난리났는데. 얼른 들어가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희영이가 상민이의 말허리를 자르며 잡아끌었다. 그러는 희영이의 가슴이 당금이라도 옷섶을 헤치고 튀여나올듯이 부담스럽게 출렁이고있었다. 7년전 애를 키우는 행복은 따로 있다며 나에게 애를 낳을것을 권고하던 희영이는 지금 둘째아들 준수를 출산하고 요즘엔 애기때문에 시간가는줄을 모르겠다며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는중이였다. 출산때문에 비게덩어리로 되여버린 희영이의 몸매와 아직은 군살 하나 없이 야윈 내 몸매는 어쩜 희영이와 나의 행복지수의 비례만큼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든것은 희영이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희영이는 즐거운 표정 그대로 옷섶을 들추고 잘 익은 밤알같이 탱탱한 젖꼭지를 아기에게 물렸고 아기는 손으로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젖을 쪽쪽 빨았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말할수밖에 없는 그 풍경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떠올리게 하고있었다. 그래서인지 희영이의 얼굴은 볼 때마다 밝아지는 느낌이였다. 지금도 술 한방울 입에 대지 않고 말짱한 정신일것인데도 희영이는 누구라없이 반가와하고 기뻐하는 모습이였다. 희영이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방에 들어가니 다들 반급주제가 가사를 주어내느라고 네한마디 내한마디 떠들석하는 판에 얌전히 앉아 빈 맥주잔만 돌리고있는 미금이가 눈에 띄였다. 한 시내는 아니지만 차를 타고 두시간이면 닿을 거리, 그 거리로 꼭 15년을 못보고 산 미금이였다. “쟨 왜 저렇게 얌전해졌니?” 내 턱짓을 따라 희영이는 미금이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너두 딸 셋을 낳아봐라. 저렇게 안되나?” “애가 셋이야?!” 나는 눈이 화등잔이 되여 재빠르게 미금이와 희영이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얘는?!” 희영이는 급히 커다랗게 벌어지는 내 입을 막으며 낮게 속살거렸다. “조용히 해. 여자는 애를 낳으면 성격도 변해. 애를 키우다보면 아무래도 애의 성별에 묻어가게 돼있더라. 남자애를 키우다보면 조금씩 억세지고 여자애를 키우다보면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지지 않겠니?” 그전의 활달하던 모습대신 소심스러운 미금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난 “아저씨”라고 불렀던 꺽두룩한 키를 가진 무던한 얼굴의 한 남자를 떠올리고있었다. 대학교 3학년쯤부터 미금이는 련애를 하고있었고 침실에도 곧잘 놀라오던 미금이의 남자친구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철부지인 나를 “꼬맹이”라며 귀여워했고 코흘리개애들 대하듯이 사탕알도 사주고 과일도 사주었었다. 졸업을 하고나서 미금이는 곧장 그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연길에 눌러앉아버렸던것이다. 그리고 15년동안 줄줄이 딸 셋을 낳았는 모양이다. “딸을 낳으면 얌전해진다? 그럼 나는? 아들 낳은 나는 활발해졌니?” 나는 입가에 얄궂은 미소를 띠고 시까스르듯이 희영이를 빤히 쳐다봤다. “어유, 이 꼬맹아, 넌 이상해졌다. 애 키우는게 뭐가 힘들다구 몇년씩이나 련락을 끊고 사니? 넌 내가 안찾아냈으면 내내 숨어살 잡도리였지? 나쁜 계집애.” 희영이는 종주먹으로 내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종알거렸다. 희영이와 련락이 닿은것은 내가 친구들과 련락을 끊고산지 5년째인 2년전이였다. 희영이의 친정집이 내가 살고있는 시내에 있는 탓에 희영이가 가끔 올 일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어쩌구려 어느날엔가는 전화련계가 되고 가끔 만나기도 하면서 다른 애들의 소식은 거의 희영이한테서 전해들었던것이다. 희영이가 아니였더면 난 동창모임에도 참가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래, 찾아내줘서 고맙다. 짜아식~” “오길 잘했지? 아무래도 올걸 안온다고 바락바락 우길건 뭐니? 나만 너 설득하느라 힘들게. 얼마나 좋니? 오랜만에 얼굴들도 보고.” 희영이의 얼굴에는 말그대로 함박꽃이 피여있었다. “글쎄다. 후훗~ 근데 상민이는 련락이 안된다더니 어떻게 된거니?” “장춘에 있는 길림신문사 본사에서 기자로 뛰다가 여기 온지 얼마 안됐대. 철수가 며칠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고 련락했다나 봐. 장춘에 한 5~6년쯤 있었다는것 같더라.” “그랬구나. 암튼 이렇게 얼굴 보니까 다들 반갑네.” 활달하고 인정미 넘치는 성격때문에 희영이는 항상 동창생들의 중심에 서있었고 그 자리에서 정보망의 역할을 착실히 해주고있었다. 나와 희영이가 마주보며 킥킥 웃는데 다들 우야우야 일어서며 반급주제가를 합창한다고 난리였다. 들쑥날쑥한 키꼴 그대로 줄을 지어서서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반급주제가를 부르는 그 속에 끼여선 나는 예전처럼 입속으로 낮게 가사만 중얼거렸다. 혹여 음치인 내 소리가 튀여나와 노래를 망칠가 걱정을 하며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의 소리가 없이 입만 움씰거렸다. 그러는 내 눈앞으로 귀여운 윤이가 코를 쫑긋거리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스쳐지나고있었다……
11    그녀는 배가 고팠다(2) 댓글:  조회:2180  추천:2  2011-09-30
4 얼굴이 부석부석해진 미려가 두덜거리며 핸드폰뚜껑을 열었다. (어?!)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메시지발송인을 확인하던 미려가 그대로 굳어져버렸다.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6500747 급기야 뒤죽박죽이 된 머리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강난 기억의 토막들을 주어모으기 시작했다. 울적한 기분인데 남편이 외식하고 들어온다기에 캔맥주를 사고 어정쩡하게 짝태까지 집어들고 집에 들어가고, 그다음은 티비를 보며 홀짝거렸는데…그다음은…그다음은…거기서 미려의 필림은 끊겨져있었다. (어떻게 내가 술마신걸 알지? 혹시 내가…) 뛰는 가슴을 누르며 통화기록을 뒤졌다. 헉~ 6500747 미려는 앞머리를 철썩 쳤다. 매사에 얌전하고 조신하기로 소문난 자기가 이런 일을 저질를수 있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얌전한 강아지 부뚜막우에 올라앉아 똥싼다더니 이렇게 크게 사건을 저질러버릴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이걸 어쩌냐? 어떡함 좋아? 분명 남자인데…내가 뭐라고 말을 했을가? 낯선 사람한테 내가 뭐라고 했을가? 어이구, 골치야! 먼 일을 이렇게 저질러!) 미려는 불가마에 든 개미처럼 맴을 돌고있었다. 썼다가 지워버렸다. 두번씩이나 한 전화에 잘못 보낼리가 없었다. 눈감고 아옹하는 격이였다. 이것도 별로였다. 환장한 년들이나 할 미친 소리 같았다. 술 마시면 전화하라니. 근사한 답신 같았다. 어제일 아는척하는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척하는것 같기도 한것이 센스가 있어보였다. 아까부터 미려는 핸드폰소리에 귀를 도사리고있었다. 어쩜 문득 전화가 올것 같은 예감이 끈적끈적 기분나쁘게 달라붙어있었다. 핸드폰이 부르르 떨고있었다. 미려거였다. 미려의 손이 멈칫멈칫했다. 그러기를 한참 핸드폰뚜껑을 열었다. 귀청을 때리며 남편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튕겨나왔다. 미려는 급기야 전화를 끊으려는 남편을 불렀다. 미려가 더듬거리며 주어섬기고있었다. 미려가 대답을 하기도전에 어느새 전화는 끊겼다. 남편은 항상 그랬다. 미려야 말이 끝나든 말든 상관이 없이 자기 할 말을 다 하고나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그랬다. 언제나 뭘 상의한다기보다 통보하는 격이였다. 그래서 가끔 미려는 둘사이가 상하급관계가 아닌가고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지난번 이사할 때도 그랬다. 늦잠을 자고나서 세수도 안한채 컴앞에 앉아 노닥거리고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만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짐을 싸란다. 오후에 이사한다고. 아무래도 집인테리어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워야겠다싶었지만 그 한동안이 그날로 당장 결정이 될줄은 미려는 감감 모르고있었다. 아침에 나갈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남편이 어느새 여기저기 다 련락을 해놓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있었다. 미려가 정신을 똑바로 차릴 새도 없이 이사짐을 나르는 일군들이 들이닥쳤고 그렇게 이사는 하루만에 시작과 함께 끝을 보았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미려는 저절로도 쿡쿡 허구픈 웃음이 나온다. 집에 들어왔댔자 할 일이 없었다. 밥챙겨먹기도 싫었다. 랭장고를 뒤져 빵하나에 쏘세지 한개로 간단히 저녁을 에때웠다. 뭘할가? 책을 집어들었다. 지난번에 산 헌데 글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기야 독서란 어수선한 기분에 글을 읽을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거였다. 티비를 켰다. 커다란 무지의 여자가 나와서 다이어트 어쩌고 저쩌고 떠들며 화면을 메우고있었다. 허걱~ 무슨 뺄 살들이 저렇게 많다고 란리야? 그럴게면 차라리 살을 올리지나 말거지 이모콘을 꾹 눌러 다른 채널을 바꿨다. 이건? 이상한 두남자가 여자가발을 쓰고 치마를 입고 열적은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세상돌아가는것이 참 이상타. 어쩜 저런 흉내를 내야만 시청률이 올라가나보다. 티비를 꺼버리고 이모콘을 저만치에 확 던져버렸다. 뭘 할가? 컴? 그것도 싫었다. 손가락 꼼짝하기 싫었다. 그러는 미려의 손은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들고있었다. 잠시후 핸드폰신호음이 짧게 울렸다. 메시지였다. 미려의 얼굴에 남실 웃음이 피여올랐다. --혼자서 크리스마스의 밤을 만끽하고있습니다. --저두요, 전 아직 크리스마스를 즐기는데 익숙치 않아서요. --미투,어제 제가 많이 실례했죠? 미안해요 --뭘요, 처음엔 당황했어요. 하지만 미려씨의 이야기 그냥 들어주기로 했어요. 오빠를 많이 사랑하나 보죠? (어머, 내가 오빠 얘길 했나보네) --그보담도 오빠한테 미안한거 넘 많아요. 그래서 항상 맘에 걸리거든요. --그럼 맘에 두지 말고 풀어야죠. 생각하는 만큼 겉으로 나타내고 오빠한테 전하구 그래요. --그럴수가 없게 됐어요. 오빠가, 오빠가 이제 다시 못올 고장으로 갔어요. --아, 미안!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러기에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고 하셨군요. 안그래도 미려씨가 너무 슬프게 울어서 무슨 일 있나보다고 짐작은 하고있었는데 그런 일일줄은 미처 몰랐어요.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생뚱같은 사람한테 밤중에 이상한 이야기를 다 하며 주정을… --제가 왜서 전활 안끊고 그냥 들어주었는지 안 물어요? --글쎄 ,왜죠? 잘못걸린 전화 , 것두 술취한 여자전화 받으면 듣기 거북하게 욕하며 전화기 팽개쳐야 상례 아닌가요? 묻긴 거북하지만… --실은 그날 저도 많이 울적했어요. 실련한지 얼마 안됐거든요. 미려씨의 전활 들으면서 아픈 사연 있겠다 싶어서 아픈 사람끼리 서로 이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냥 들어줬어요. 혹 제가 실례한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뇨, 그냥 고마왔어요. --이미 간 사람은 간거니까 이제 마음 풀어요. 오빠도 미려씨가 괴로와하는거 보면 더 가슴아파할겁니다. --근데 그게 잘 안돼요. 내가 넘 나쁜 동생이였나봅니다. 아참, 제 얘긴 그만 하구요. 실련했다 그러는데 그냥 그 여자 손해본거라 생각하셔요. 어느만큼 사랑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아선 여자라면 보내야죠. --네, 저두 그럴려고 노력하고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울적해지는거 어쩔 방법이 없더라구요. 이제 기분 나쁜 얘기 그만합시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명절 아닙니까? --맞아요,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을 하는겁니다. 나쁜 기분 어제로 털어놓기 위해 애쓰자요. --그럽시다. ㅎㅎ 5 오래간만에 미려가 흥얼거리고있었다. 사무상우는 깔끔하게 정돈되여있었다.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꼬맹이가 눈이 올롱해서 쳐다본다. 미려는 방긋 웃어보였다. 어느새 미려의 손이 핸드폰버튼우에서 춤을 춘다. 꼬맹이가 답답하다는듯이 문쪽을 가리켜보인다. 미려는 어물거리며 궁둥이를 들었다. (전활 해? 말어? 조금 챙피한데…괜찮을거지? 우스운건가? 괜찮겠지.) 핸드폰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다가 멈춰버린 미려. (바보같이! 오늘 일은 끝나가지고 멀 바쁘다구 생색을 내?) 웬지 허전했다. 미려는 금시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의자에 엉뎅이를 붙이기 바쁘게 핸드폰이 부르릉거렸다. 미려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 남편이였다. 남편은 혹 기사년에라도 태여났는지 먹는데는 이상하게 눈을 밝혔다.그러는 남편이 은근히 짜증도 났다. 틈만 나면 멀 먹을가 궁리하는것 같았다. 제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올 때면 의례 장을 봐가지고 자기가 먹고 싶은 남새들을 한가득 사오군 했다. 그러고는 하며 생색을 냈다. 반찬 만들때면 거들어도 잘 안주면서 요건 요렇게 해라, 조건 조렇게 해라고 요구도 많았다. 나중에 제 생각대로 입에 안맞으면 반찬감 아깝다고 눈을 흘긴다. 하고 버럭 화를 낼라치면 제쪽에서 수저를 와당탕 던지며 휭하니 나가버리는 남편이였다. 가끔은 그런 남편때문에 민망하기도 했다. 무슨 모임이든 상관없이 ,익숙한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모여앉기만 하면 남편의 화제는 당연히 먹거리였다. 어디 가서 뭘 어떻게 먹었다는둥, 뭘 어떻게 하면 맛있다는 둥 대개 이런거였다. 혹 미식가여서 료리법이나 료리문화를 알고 이야기를 리드해가면 봐주기라도 하겠는데 이건 아니였다. 순 제 혀바닥 하나만 믿고 하는 소리들이였다. 사회문제며 인간문제, 과학이니 문학이니 하는것에는 전혀 미련이 없는 남편때문에 가끔 미려는 둘사이에 화제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가만히 돌이켜보면 둘이서 싸우는 내용중에 먹을것을 두고 불이 달린것이 태반인듯 싶었다. 그런데 오늘도 점심도 되기전에 저녁소리 한다. (또 머 먹을려구 저래?) 한숨이 다 나갔다. 그렇다고 맨날 먹을것때문에 싸울수도 없다. (뜬금없이 먼 소리 하고 있어? 머리 도는거 아니야?) (그럼 그렇지. 왜 그소리 안나오나 했지) 집에서 해먹자는 소리가 아니여서 미려는 다행이다싶어서 얼른 응낙을 했다. 안그래도 어제 빠진것이 좀 걸리긴 했었다. 남편이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끔 가다 소름끼치는 이발 가는 소리마저 간간이 끼여든다. 항상 그랬다. 조금 술을 마셨다 싶으면 코를 골고 이발을 가는 남편이였다. 처음엔 이발가는 소리에 놀라 깨여나기도 했었다. 속을 긁어내는것처럼 빠드득거리는 그 소리가 당금 뭘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떠는 소리처럼 무섭게 들렸었다. 게다가 코를 골다가는 가끔씩 멈추기까지 해서 같이 숨이 죽여지며 가슴이 답답했었다. 그래도 같이 몇년 세월을 살아가다보니 습관이 됐는지 이제 크게 념려되지는 않지만 어쩔수 없이 드문히 잠을 설치기도 한다. 이런 날은 남편보다 먼저 잠에 곯아떨어져야 하는건데 아까 집정리 조금 하는 사이 어느새 남편이 먼저 노그라져버린것이다. 둘만이 미친다더니 어느새 제 친구를 불러 저희들끼리 권커니 작커니 미치기 직전으로 건배에 신이 나던 남편이였다. 알고보면 별로 술을 잘 하지도 못하면서 항상 선선히 목구멍으로 잘도 넘기군 했다. 그러고는 어떻게라도 제집은 용케 찾아와서 집문만 들어서면 필림이고 머고 왕창 끊겼다. 오늘도 아마 술이 잘된것 같았다. 미려는 남편 친구가 끼이는 바람에 멋적어서 그냥 맥주만 한두잔 홀짝이다보니 그냥 정신이 말짱했다. 자리에 누었지만 코고는 소리와 이발가는 소리의 이중주에 잠기마저 싹 달아나버려 점점 올똘해졌다 --자요? --아뇨. 타자 좀 하고 있었어요. --전화해두 돼요? --그래요. 그게 아무래도 더 편하죠? 갑자기 인형을 선물할줄 아는 남자가 보구 싶어졌다. 어떤 남자일가? 이 나이에 인형을 선물하는 남자는. 근사한 이름이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 멋있을것 같다 핸드폰을 끄며 미려는 입가에 웃음을 빼여물었다. 미려는 뭔가를 위속에 밀어넣는것을 잊고있었다. 6 봄이 올려나보다. 어느새 찬기운이 가뭇없고 해볕마저 따스하다. 겨우내 길가에 방치되였던 눈들이 녹아내리며 길바닥이 흥건히 젖고있었다. 길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새 두터운 옷을 벗어버린 홀가분한 차림새들이였다. 걸음걸이마저 활기에 차보였다. 미려도 하이힐을 신고 소리를 내며 길을 조였다. 미려는 왠지 그냥 희윤의 목소리만 듣고있으면 편했다. 미려보다 나이 한살 우인 희윤이, 둘은 어느새 너나들이하는 친구로 변해있었다. 희윤이가 있어서 미려는 이 겨울을 참 많이 따뜻하게 지내왔던것 같다. 많이 힘들었던 미려를 다독여주고 항상 마음을 열어준 희윤이가 없었더면 미려는 언제까지고 암울한 터널같은 겨울속에 꽁꽁 얼어붙었을지 몰랐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희윤이, 이제 정말로 희윤이가 보고파졌다. (희윤인 어떻게 생겼을가? 착한 얼굴일가? 멋있는 얼굴일가?…) 갑자기 메시지 들어왔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미려야, 나 희윤이.나도 아까 니 생각하고 있었어. 몰라, 요즘엔 자꾸 니가 궁금해져. 어떻게 생겼을가, 내가 느끼던것처럼 따스하고 얌전하고 그럴가?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을 해보는지 몰라. 내가 이러면 안되는줄 아는데 그래도 솔직해지고싶어. 내가 너한테 부담주는거니? 미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갑자기 심장이 콩닥콩닥 뛰였다. --희윤아, 너 그러는거 아니야. 나는 니한테 줄거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냥 천덕꾸러기일뿐이야. 그동안 네가 있어서 정말로 행복했어. --나 너한테서 바라는거 하나도 없어. 그냥 니가 이 세상에 있다는것만으로도 행복해. 널 나한테 오란 말 못하겠어. 하지만 내 마음은 속일수가 없어. 이제 돌아갈수 없을만큼 멀리 와있단말이야. --나 정말 아무것도 할수가 없어. 난 그냥 그림자일뿐이야. 핸드폰만 꺼버리면 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거잖아. 날 헛갈리게 하지마. --처음부터 널 부담스럽게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내 맘속에 그대로 묻어두기엔 너무 억울해. 나 정말로 널 사랑하나 봐. 넌 내가 싫은거야? 미려는 멈칫했다. (정말로 그런걸가? 안그래도 혹시 니가 날 사랑하게 될가봐 내가 얼마나 조심을 했는데. 열에 하나라도 내가 널 사랑하게 될가봐 얼마나 마음을 추슬리고 감추고 그랬는데. 결국 이렇게 되였구나. 내가 환장했지…) 걱정하고있던것이 결국 어느날 갑자기 현실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미려는 어찌할바를 몰랐다. 희윤이한테로 다가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멀어질려니 마음이 아팠다. 미려의 목소리는 아련하게 젖어있었다. 애써 심드렁해지는 희윤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려는 잠간 련민의 정을 느꼈다. 희윤이의 절규를 들으며 어느새 미려의 두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희윤이를 사랑했던가? 7 컴퓨터화면을 들여보다말고 눈이 반짝 빛났다. 오랜만이였다. 가을향기: 오래간만입니다. 와인의 향기: 네. 누구시더라요? 가을향기: 잊으셨어요? 길가는 여자요 와인의 향기: 아, 생각납니다. 저야 길가는 남자였죠. ㅋㅋㅋ 가을향기: 그새 머하셨어요? 와인의 향기: 남방출장 한번 갔다 왔었습니다. 가을향기: 그래서 통 뵐수가 없었나봐요. 제가 얼마나 찾았다구요 와인의 향기:미안합니다. 저 워낙에 채팅을 잘 안해서요. 가을향기: 저 고민 있어요. 와인의 향기: 먼 고민요. 꺼리지 않는다면 제가 기꺼이 풀어드리리다. 저 스트레스세탁소, 고민해결사인걸요. 가을향기: 사랑하고픈 사람이 생겼어요. 와인의 향기: 그래서요? 가을향기: 헌데 사랑할수가 없어요.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유부녀거든요. 와인의 향기: 유부녀가 사랑을 못한다는 법도 있나요? 가을향기: 유부녀가 사랑을 하면 바람난거 아닌가요? 와인의 향기: 아니죠. 생리욕구를 바탕으로 할때 바람난거지만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건 사랑인거지 바람피는거 아닙니다. 가을향기: 그럴가요? 하지만 전 어쩐지 비도덕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와인의 향기: 혹시 상대방에게 멀 바라는게 있어요? 가을향기: 아니요 와인의 향기: 그럼 갚아야 할게 있어요? 가을향기 :아니요. 와인의 향기: 그럼 사랑해요. 님은 정말로 상대방을 사랑하는거니까요. 가을향기: 하지만 그럴수 없어요. 와인의 향기: 진짜 말이 안먹혀들어가네요. 이런 머리굳은 여잘 누가 사랑하나 모르겠네. 가을향기: 그러게말입니다. 와인의 향기: 지금 안불편하시다면 우리 만나요. 가을향기: 네? 와인의 향기: 이렇게 말을 해선 못알아들을것 같아서요. 만나서 제가 확실하게 고민상담해드릴게요. 가을향기:글쎄요. 와인의 향기: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한번 믿어보시라요. 우리 에서 만나요. 잠간, 제가 예약하구요. 가을향기: 네? 와인의 향기: 됐어요. 2호테블에서 만나요. 저 갈색점퍼 입었어요. 30분후에 거기서 뵐게요. 미려가 어정쩡해있는 사이 와인의 향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갈가? 이 밤중에 내가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 것두 채팅방에서 두어번 대화나눈 남자를? 미쳤지.) (안가는거지? 근데 정말로 기다리면 어떡해? 정말로 착하고 근사한 사람이면 어떡해? 내 고민 해결해주러 온댔잖어?) 갈팡질팡이였다. 간다는것도 우습고 안간다는것도 켕기였다. 까만 색을 잃어버린 밤은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이럴 때 남편이라도 있으면 가려는 엄두도 못내련만. 헌데 오늘도 남편은 늦단다. 항상 일 없이 바쁜 남편이다. 지금쯤 남편이 어느 곳에서 희떠운 소릴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결혼해서 언젠가부터 친구들하고 저녁먹고 들어온다고 귀가가 늦어지군 하던 남편이 이제는 제법 드문히 외박까지 하고있는 상황이다. 열시쯤에 불깃한 얼굴로 귀가하는건 례상사고 새날이 되여야 갈지자를 그으며 들어오기도 하고 아예 집도 안들어오고 그길로 출근한적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이 핑게 저 핑게 많기도 하건만 이제는 그 핑게가 중요하지도 않다. 어느새 미려는 남편이 없는 밤에 익숙해져있었다. 있었대야 조곤조곤 대화가 오가는것도 아니고 남편은 티비에, 미려는 책이나 컴에 매달려 저마끔의 세계를 즐기고있을뿐이였으니까. 남편과의 대화가 끊긴지가 아득히 먼 옛날 일이기라도 하듯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세살짜리 아들애마저 할머니집으로 보내버린후 둘은 별로 눈길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미려는 가끔 부부라는것이 시간이 흐르면 다 저들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람대하듯 한건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미려는 컴을 끄며 투덜거렸다. (당신 어디서 뭐하는거야? 맨날 무슨 외식이 그렇게도 많어?) 문득 옥이의 말소리가 귀가에 쟁쟁 들려왔다. 미려는 쳇~ 했다. 먹는데만 밝히는 남편이 여자까지 밝힐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 미려였다. 이러는 미려를 옥이는 물을 건너도 한참은 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었다. 헌데 오늘따라 찜찜하기만 한 기분. 제 맘 짚어 남의 마음인가. 실내에서는 애잔한 음악이 흐르고있었다. 불그스름한 불빛은 면사포마냥 구석구석을 얄포롬히 감싸고 있었다. 2호테블은 비여있었다. 얼른 다가가 거기에 앉을 용기까진 없었다. 빈 테블에 앉아 낯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게 어색하고 무엇하기만 했다. 구석진 테블을 찾아 앉아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그런 미려를 웨이터는 이상스레 훑어보고있었다. 하긴 이 시간에 다방을 찾아 홀로 커피를 홀짝거리는 여자가 청승맞기도 할것이다. (희윤이가 뭘 하고있을가?) 생각이 희윤이에게 미치자 그제서야 꺼놓은 핸드폰이 생각났다. 희윤이에게서 메시지가 오면 머라고 답을 해야 할지, 전화라도 오면 머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꺼놓은 핸드폰이였다. 메시지의 글자마다 잔정이 졸졸 묻어나오는 희윤이, 말소리만 듣고있어도 마음이 포근해나는 희윤이, 희윤이 생각을 하면 미려는 자꾸 가슴이 아팠다. 왼쪽 가슴이 무엇에 맞히기라도 하듯 아릿하게 아파왔다. 손은 저도모르게 가슴을 움켜쥔다. 지금 또 가슴이 아프다. (희윤아, 보구싶어.) 갑자기 사무치게 보고싶은 희윤이. 맨정신으로 앉아있을수가 없다. 꼴깍꼴깍 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는 미려를 웨이터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멀거니 바라본다. 혼자 맥주를 홀짝거리는 여자가 처음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맥주가 병에서 잔으로, 잔에서 다시 미려의 배속으로 시원히 잘도 흘러든다. 그래도 웬지 말짱하기만 하다. 갑자기 찬 공기가 휙 쓸어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금방 들어온 운동모자가 떠들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고수머리가 툴툴거린다. 운동모자가 미려를 발견하고 턱짓을 한다. 운동모자가 고수머리의 뒤통수를 쥐여박으며 들어올 때처럼 휭하니 나간다. 그 서슬에 다시 한번 찬바람이 휙 쓸어들어왔다. 미려는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해났다. 바람맞은 탓인가? (갈색점퍼? 후훗~ 와인의 향기? 개차반이라 그래라. 니따위한테 와인이 머냐? 아깝다 아까워!) 희윤이가 보고싶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꾹꾹 눌렀다. 미려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끌어 떨어지고있엇다… 아침상을 챙기며 남편이 물어오는 말이다. 잔소리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미려는 게면쩍게 웃었다. 남편이 으름장을 놓았다. 웬지 해살이 너무 눈부셨다. 이동통신영업청사를 나선 미려는 핸드폰을 켰다. 오랜만에 켠 핸드폰이였다. 메시지가 들어와있었다. --미려야, 어디야? 왜 핸드폰을 끄고있어? 나때문에 많이 부담스러운거야? 메시지 보면 얼른 전화해. --머 하고 있는거니? 니가 힘든만큼 나두 힘들어. 그렇다고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날더러 어떡하라는거야? 그냥 그자리에 있어줌 안돼? 내가 바라보기만 해도 안돼? 제발 핸드폰을 켜라. 얼른 니 목소릴 들려줘. --미려야, 난데…. 온통 희윤의 메시지였다. 미려의 두눈에 어느새 하얀 습기가 반짝거렸다. --희윤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먼저 다가가서 미안하구 내가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 너와 나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넌 희윤일뿐이고 난 미려일뿐이라고. 너나 나에게 다 아픔이 있을뿐이야. 우린 그냥 길가는 사람이야.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눈빛이 마주쳐서 서로의 존재를 발견했을뿐이야. 우리가 가야 할 길도 이미 지나온 길도 다 달라. 폰이라고 생생현실인건 아니야. 폰이든 컴이든 다 가상공간일뿐이야. 현실속의 날 니가 사랑할수 있을가? 현실속의 널 내가 사랑할수가 있을가? 메시지를 썼다가 다시 쭉 지워버렸다. 핸드폰을 껐다. 카드를 뽑았다. (잘 가! 희윤아! 이제 미려는 없어. ) 새 카드를 갈아끼웠다. 다시 핸드폰을 켰다. 전화 저편에서 아들애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려의 얼굴에 미소 한점이 피여나고있었다. 밝은 해살이 미려의 등뒤로 무더기로 쏟아지고있었다.
10    그녀는 배가 고팠다(1) 댓글:  조회:3438  추천:0  2011-09-30
그녀는 배가 고팠다 1 채먹지 못한 짝태오리들을 한줌 들고 동료들의 뒤를 쫓아가는데 귀에 익은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미려는 눈이 동그래졌다. 병색이 짙은 오빠가 부옇게 흐려진 눈으로 미려를 바라보고있었다. 오빠는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애처럼 말을 더듬고있었다. 미려는 급기야 튀여나올려는 뒤말을 흐려버리고말았다. 미려는 돌따서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오빠뒤를 쫓아갔다. 오늘따라 힘없어보이는 오빠가 마음에 걸렸던거다. (저러면 안되는데. 저러다가…) 쇠잔한 오빠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깔려있었다. 빈 가마속을 긁는듯한 소리가 울렸다. 미려는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은 호주머니에 들어있지 않았다. 빽속에도 없었다. 어디 갔지? 눈을 번쩍 떴다. 핸드폰이 번쩍번쩍하며 진동음에 부르르 몸을 떨고있었다. 얼핏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벽시계는 부엉이눈처럼 파랗게 빛을 뿌리며 내려다보고있었다. 밤 열시. 미려는 전화번호도 확인하지 않은채 핸드폰을 확 꺼버렸다. 보나마나 남편의 전화였을것이였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남편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집전화에 전화를 하다가 미려가 일어나기 싫어하는 티를 보였더니 미려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기 시작한게 언제 일이던가. 전화가 온댔자 누구랑 술마셨소, 몇차째요 하는 내용들인지라 기다려지지도 않지만 남편은 무슨 의무를 리행하기라도 하듯이 꼬박꼬박 행선지를 고해바치군 했다. 남편의 저녁코스를 채근해야 할 사람은 미려인데 오히려 남편이 주동적으로 극성스레 고해바친다는것때문에 미려는 이미 심드렁해지다 못해 시끄러워지기까지 하고있었다. 그만큼 미려의 남편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 그 자체였고, 하긴 남편이 있는 밤이라고 미려에겐 달라질것이 없었다. 좁지 않은 공간에 숨쉬는 실체가 하나 더 있을뿐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티비에 눈을 박고 있고 미려는 미려대로 컴퓨터와 싱갱이질하였다. 언젠가부터 미려와 남편의 사이에는 할 말이 어디론가 쏙 빠져달아나고있었다. 신변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들려줄 흥도 들어줄 재미도 없어졌고 필요한 말을 빼고는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서로가 입에 자물쇠를 잠가버렸다. 워낙부터 성격이나 애호가 같은 점을 찾아볼수 없으리만치 제각각인 미려와 남편이였던 까닭인지도 몰랐다. 연애시절에는 서로가 남달랐던 까닭에 끌리였던 리유가 이제는 공감대를 잃어버린 리유로 되여버린다는게 어찌보면 슬픈 일인듯도 하였다. 그런대로 간혹 가다 외식도 시켜주고 친구들모임에 동참도 시켜주지만 그런 장소에서 미려는 늘 자유스럽지 못했고 그런 날일수록 위려의 위는 더 쌀쌀해나기만 했었다. 이제 남편은 걸핏하면 밤늦게 귀가하기 시작했고 미려는 혼자 있는 밤에 익숙하여지고있었다. 컴퓨터앞에 앉아서 노닥거린다거나 더블침대에서 맘껏 태질을 하며 자는것이 미려한테는 남편의 반찬투정을 받아내며 꼬부장한 마음으로 남편뒤치닥거리하기보다 더 편한 일이였다. 오늘도 한참이나 사이트들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니다가 잠자리에 든 미려였다. (오늘은 또 몇시에 올려고 저 난리야?) 미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잠이 폭 배인 이불속으로 기여들었다. 헌데 계속 잠을 잘려고 눈을 감아도 잠기가 어느새 달아났는지 정신만 말똥하다. 오히려 눈까지 올롱해졌다. 갑자기 배가 고파났다. 몸 어느 한구석인가 허전해났다. 그래서 꿈속에서까지 짝태오리들을 쥐고 허둥댔던가? 그제서야 다시 방금 꾸었던 꿈에 생각이 미쳤다. 꿈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근데 그건 또 머지? 6500747?) 아무 생각도 없이 팍하고 머리속에 수자가 떠올랐다. 꿈에 오빠가 알려주던 전화번호. 자려고 하는 미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기억은 어느새 한달전에로 줄달음쳐갔다. 한달전, 그때를 생각만 해도 미려는 오싹 몸떨림을 느낀다. 너무 추웠던 겨울이였으니까. 한달전의 어느날, 그날은 웬지 하늘에서 거위털같은 눈이 사뿐사뿐 내리고 있었다. 소시적부터 눈을 좋아했던 미려는 일을 보다말고 창가에 붙어버렸다. 눈내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만은 모든 번민이 다 잊혀져 즐거운 기분이다. 바로 그때 호주머니에 찌른 핸드폰에서 하고 진동음이 울렸다. 미려는 창밖의 시선을 거두지도 않은채 핸드폰뚜껑을 열었다. 그냥 간단하고 차분하게 받는 전화. 헌데 전화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지 미려의 얼굴이 갑작스레 창백해져가고있었다. 무서우리만치 창밖의 눈의 색갈을 닮아가고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에서 무슨 소리가 튀여나올듯 말듯하더니 결국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한채 핸드폰을 쥔 손에 의해 가려지고말았다. 몸체가 비틀하더니 겨우 창턱을 짚고 다시 지탱하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창밖 눈내리는 모습을 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암담하고 절망어린, 슬픔이 꽉 찬 그런 빛에 가리여져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미려는 갑자기 몸을 돌려 천방지축 사무실문을 나섰다. 미려는 무작정 걸었다. 귀에서는 아직까지도 엄마의 울음섞인 말소리가 울리고있었다. 하늘에서는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려의 심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 세상 한귀퉁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져가고있는지, 어떠한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지고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은 하염없이 내려 쌓이기만 하고있었다. 그날 미려는 그렇게 눈속을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언제 어디에서 멈춰섰는지, 어떻게 남편 봉수에게 전화를 하고 남편에게 몸을 싣다싶이 하면서 집에 돌아와 울다가는 자고 자다가는 다시 울면서 그 밤을 보냈는지도 몰랐다. 멋도 모르는 두살잡이 아들애를 어떻게 밀어냈는지도, 앙앙 울어대는 아들애를 어떻게 외면하고있었던지도 전혀 기억이 없은채 신들린 사람처럼 그 밤을 보냈다. 그날 밤, 밤은 길기도 했다. 태여나서 처음으로 지새워보는 긴긴 밤이였다. (오빤 지금 멀하고 있을가? 날 내려다보기나 할가?) 까아만 어둠속에서 미려의 머리속은 어느새 흐리마리해가고있었다. 오빠의 얼굴, 전화번호 그리고 눈 ,또 그 무엇이 마구 뒤섞여서 란무하고있었다. 2 (6500747? 누구 전화번호일가? 오빠가 왜 이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아까부터 미려는 내내 한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고있었다. 볼펜뒤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냥 꿈이였다고 떨쳐버리려 해도 도무지 생각대로 되주질 않았다. 펼쳐놓은 다이어리에는 어느새 6500747 이 어지럽게 씌여져있었다. 밤마다 수없이 많은 꿈들을 꾸면서도 아침에 일어날때는 아무것도 기억못하는 미려였다. 그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서도 항상 피곤하고 졸리기만 한 미려였다. 그러는 미려를 두고 누군가 신경쇠약이라고 그랬다. 신경쇠약증은 두가지 증세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잡꿈을 꾸며 잠을 너무 많이 자는거라는것이다. 미려일 경우 후자라는거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미려는 그런가보다고 여기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 안나는 꿈을 굳이 회억할려고 하지 않았다. 혹 가다 종일 안생각나던 꿈이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생각나는 경우가 있긴 했어도 늘 앞뒤가 안맞는 허드레꿈뿐이였었다. 그래서 당연히 미려에겐 몽조란것이 통하지가 않았다. 이렇게 꿈에 대한 기억이 미비한 미려가 꿈에서 오빠와의 만남을 ,오빠가 말해준 전화번호를 그렇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게 미려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사의했다. (혹시 밤중에 깬거여서 그렇나?) 미려는 머리를 홰홰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야 이상하기만 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번호판을 꾹꾹 눌렀다. 신호발송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멈칫했다. (뭐라고 말해? 누굴 찾아야 하는건데.) 미려는 다시 핸드폰뚜껑을 닫고 말았다. 굳이 전화번호를 확인할려고 하는 자신이 부질없어보였다. 창밖은 어느새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전화발송신호음만 멋적게 들려오고있었다. 미려는 집요하게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신호가 열번쯤 울렸고 미려가 막 핸드폰을 끄려하는 때였다. 낯선 목소리였다. 어정쩡해진 미려가 반응을 보이기도전에 전화 저편에서 약간 무거운 목소리가 짜증스레 전해오고있었다. 낯선 남자였다. 미려는 얼른 핸드폰뚜껑을 닫아버렸다. 다음, 전화번호확인을 하던 미려의 눈이 커지고있었다. (이럴수가?) 핸드폰에 말똥하니 찍힌 전화번호는 남편것이 아니였다. 미려는 버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홱 꺽어보니 옆자리가 비여있었다. 생일집이 있어서 저녁 때우고 들어온다던 남편…그래서 남편한테로 했던것일가? 헌데 전화는 엉뚱한데로 발송이 되여버린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바보같이 내가 왜 남편한테 전화를 했지? 내가…) 미려는 이불을 제끼고 일어나앉았다. 아무래도 잠이 올것 같지 않았다. 랭장고에서 빵을 꺼내 입이 터지게 떼여먹었다. 언젠가부터 밤이면 늘 배고픔에 시달렸던 미려다. 위가 쌀쌀해나며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선잠에서 깨여난 미려는 먼가를 꾸역꾸역 위속에 밀어넣는데 열중했다. 그래야 다시 편안히 잠들수 있었으니까. 빵을 한가득 떼여먹던 미려의 눈앞에는 얼핏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려가 밤중에 일어나서 먹을것을 먹을 때마다 신경이 예민한 남편은 잠에서 깨여 부스럭거리는 미려를 못마땅한 눈길로 째려보군 했었다. 남편이 없는 이 순간도 미려는 등뒤에 꽂혀지는 그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빵의 마지막 부스레기까지 목구멍으로 넘겨버린 미려는 컴퓨터를 켰다. 미려의 손이 익숙하게 자판기를 두드렸다. 연변채팅방사이트가 모니터에 확 떠올랐다. 방에 -미려가 가볍게 들어섰다. 한참후 채팅방대화창에는 이런 글들이 떠올랐다. 와인의 향기: 어디시죠? 가을향기: 세상뒤골목입니다. 댁은요? 와인의 향기: 아~ 전 앞골목입니다. 뉘시죠? 가을향기: 길가는 여자입니다. 댁은요? 와인의 향가: 반갑습니다. 길가다 서있는 남자인데 길가는 여자 없나 살피고있었거든요. 가을향기: 그러세요? 마침 길가에 남자가 서있길래 멈춰서서 보니 별로이던데요? 댁인가봐요. 와인의 향기: ㅋㅋㅋ 아뇨. 건 앞서가던 사람이죠. 전 지금 막 오는 길이거든요. 님이 아직 안보이는데요. 가을향기: 아~ 그럼 저기 오시는 분인가봐요. 멀리서 보면 근사한데 가까이에서 보면 어떠실는지… 와인의 향기: 가까이에서 봐도 멋있어요. 가을향기: ㅎㅎㅎ 와인의 향기:근데 우리 인연이 있나봐요. 길가는 여자하고 길가다 서있는 남자, 가을향기와 와인의 향기 서로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가을향기:글쎄요. 근데 길가는 여자하고 길가다 서있는 남자 너무 많아서 탈이죠. 와인의 향기:ㅋㅋㅋ …… 방금전의 불쾌감을 잊은채 미려는 대화속에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모니터화면에 나타나는 글줄을 마주하고 앉아서 미려가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3 하늘이 침침하니 낮게 드리워있었다. 그러더니 점심때가 되기전부터 눈을 푸실푸실 날리기 시작했다. 미려의 책상우에는 문서들이 갈곳을 모른채 이리저리 널부러져있다. 언제나 깔끔하기로 소문난 미려가 그 앞에 무표정하게 앉아있다. 하지만 눈길속에 말할수 없는 애수가 깊게 깔려있었다. 눈! 눈때문에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던것이다. 눈때문에 무작정 울음이 터질것만 같았다. 한달전까지만도 좋았던 눈이 이제는 싫었다. 미웠다. 모든것이 눈탓이기라도 하듯 미려는 눈내리는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사무실 꼬맹이가 눈을 털며 들어선다. 그래 맞어, 크리스마스전날- 평안의 밤! 미려는 신경질적으로 책을 탁탁 털어댔다. 하필이면 평안의 밤이 오늘이야? 컴이 켜졌다. 채팅방 사이트가 떴다. 방에 들어갔다. 없었다. 방에 들어갔다 . 없었다. 미려는 누군가를 집요하게 찾아헤맸고 그 누군가는 어디 공기속에 증발되기라도 한듯 종적이 없었다. 어스름이 내리깔리고 가로등이 하나 둘 눈을 밝히기 시작한 밤. 티비는 저혼자의 연주에 열을 올리고있고 발치에 나뒹구는 빈 맥주깡통. 미려는 바락바락 짝태를 찢었다. 한오리씩 입에 쑤셔넣었다. 아작아작 씹어댔다. 짝태하고 무슨 원쑤를 지기라고 한듯이 악을 쓰고 목구멍으로 넘겨버렸다. 이 놈의 짝태! 니 놈이 값이 얼만데 늘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그랬다. 미려는 짝태때문에 비참해지는 자신을 억지로 추스리고 있었다. 이제 먹어본지도 1년은 거의 된 짝태다. 그날 이후로 미려는 짝태를 입에 대지 않았었다. 그날따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늦게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한 미려는 아빠트단지모퉁이를 돌아서다말고 깜짝 놀랐다. 어둠속으로부터 웬 그림자가 불쑥 튀여나왔던것이다. 투박하게 튕겨나오는 중국말에 미려는 어정쩡해지고 말았다. 동생이라니? 누가 누구 동생이란 말인가?하지만 속으로 잠간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마음을 진정하며 희끄무레한 어둠속에서 상대방을 살펴보던 미려의 속이 철렁했다. 다름 아닌 한 아빠트단지에 있는 택시운전수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미려를 일별한채 택시운전수는 미려의 오빠가 낮에 가짜돈으로 택시비를 물고 거스름돈 95원을 받아간 일을 격한 어조로 빠르게 뱉어냈다. 늘 드나드는 오빠라 미려와 한가족임을 눈으로 익히 알고있었던 택시운전수는 저녁무렵부터 내내 미려를 지키고서있었던것이다. 100원짜리를 꺼내 운전수에게 넘겨주고 거듭 사과를 하면서 미려는 입을 앙다물었다. 더는 참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빠. 서른도 이제 중턱을 넘어섰는데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부모님 농사일도 돕지 않고 허구한날 시내에 있는 미려의 집에 붙박혀서는 어중이떠중이들과 섭쓸리는 꼴이 이제는 눈에 거슬리다 못해 꼴사나왔던것이다. 남보다 못하지도 않은데 왜 장가를 못가는지 몰랐다. 장가라도 가면 상황이 좀 달아질수도 있을텐데… 쩍하면 매부앞으로 용돈을 달라고 손을 쑥 내미는 오빠가 안스러웠던 감정이 인젠 미움으로 돌아선지도 이슥하다. 아무리 친정오빠라지만 남편이며 시댁눈치가 안보일리가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따끔하게 축객령을 내리려던 참이였다. 오빠가 들어선것은 밤 아홉시쯤이였다. 술냄새를 확 풍기며 들어서는 오빠의 손에는 짝태오리가 가득 들려져있었다. 쑥 내미는 오빠의 손을 미려는 매몰차게 쳐던졌다. 말과 함께 미려는 택시운전기사한테서 넘겨받은 백원짜리 가짜돈을 쪼박쪼박 찢어 오빠얼굴에 확 뿌렸다. 흠칫하는 오빠앞으로 이미 준비해놓은 려행용가방을 던졌다. 그날 밤으로 오빠는 미려의 집을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오빠는 1년도 채 안되여 불치의 병을 선고받았고 결국 얼마전에는 세상을 달리하고말았던것이다. 비록 그 모든것이 다 미려의 탓은 아니였지만 오빠의 가슴에 쾅쾅 못을 박아버린 그 일때문에 미려는 늘 체증을 앓고있었던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마치 짝태의 탓이기라도 하듯 짝태를 거부해나서기 시작했다. 짝태가 보일 때마다 오빠를 쫓아버린 그 장면이 재생되였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꿈에 오빠가 보일 때면 미려는 늘 짝태오리를 거머쥐고 허둥대고있었다. 그런 짝태를 오늘은 왜 사들고 왔던지 미려로서도 알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빠에 대한 죄스러움을 찢어내기라도 하듯이 바락바락 짝태를 찢어내는 미려다. 카~악~ 맥주가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게 몇개째던가? 기억이 안난다. --야, 너 머하고 있어? --보면 몰라? 맥주마시고 있잖어. 난데없는 목소리에 게두덜거리며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빠?! 갑자기 벽속으로부터 오빠가 환영처럼 걸어나오고있었던것이다. --그래 나다. 그런데 왜 그렇게 깜짝 놀라고 그러니? 오빠의 목소리에는 윤기가 흐르고있었다. --오빠 언제 왔어? 못봤었는데. 첩약은 다 먹었어? --후훗~ 얘가? 내가 무슨 약탕관이냐? 이 몸에 첩약은 무슨 첩약이니? 근데 왜 전활 안하니? --무슨 전화?! --우리 선비님이 무슨 기억이 이러노? 나 생각나면 6500747에 전화하라 그랬잖어? --아~ 맞다! 그래 전화하라 그랬지. 미안해요, 오빠! 내가 깜박했어. 쳐들린 입귀로 웃음을 흘리고있는 미려의 눈이 개개 풀어지고있었다. --오빠? 오빠야? --네? 누구 찾아요? --아참, 미려라니까! 나야, 나! 김미려! 오빠 동생이야! -- 미려? --이제야 아는구나. 오빠, 오늘 평안의 밤이지? --전화 잘못…… --오늘말이야, 오빠, 남들은 오늘이 평안의 밤이라 그러는데 난 왜 하나도 안편하지? 내가 지금 아파! 마음이 아파, 마음이 아프다구! --저기요, 전화…… --오빠, 내가 지금 술마셔! 오빠 금방 봤지? 내가 술마시는거! 오빠, 미안해! 전화두 못하구… 이렇게 있어서 미안해! 내 속마음이 그런게 아닌데 왜 오빠만 보면 그렇게 나쁜 말만 골라 하고 나쁜 짓만 했는지 몰라.흐흑,흐흑~ 오빠, 정말 미안해! 그래서 내가 이렇게 가슴이 아파! 오빤 날 용서하지마. 두고두고 미워해!응? 흐흑~ 미려는 핸드폰을 든채 오열을 쏟고있었다.
9    싸인(2) 댓글:  조회:1817  추천:2  2011-09-30
       엄마에게 선영이에겐 안말할거라고 약속을 하고 나오면서 선영이때문에 가뜩이나 무거웠던 내 가슴은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더 올려놓은듯 갑갑하고 숨막혀왔다. 음력설이 지나고도 두어달 더 지나서야 전화가 온 선영이는 전화기 저편에서 화가 잔뜩 나있었다.        “언니, 나 사기당했어. 나 그 놈 잡으면 바리바리 찢어놓을거야. 내 돈이 어떤 돈인데 그렇게 떼먹어? ……무슨 일이냐구? 한국국적 할려고 한국남자하고 위장결혼을 약속했거든. 중국돈으로 10만원정도 주고 결혼등록을 하고 한국국적에 입적이 되면 바로 리혼하기로말이야. 근데 그 놈이 혼인신고하기전에 선금을 갖고 튀여버렸어……뭐? 그럼 그만 두라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난 이미 중국측수속을 진행시키고있었던차라 중국국적에 결혼등록이 됐단말이야. 호적상 난 이미 결혼한 녀자로 돼버렸다구……돈도 날리고 처녀명분도 잃었는데 이렇게 있을수 없잖아……암튼 나 어떻게서라도 그 놈 찾아서 혼줄을 내고말거야……”         선영이는 이를 뽁뽁 갈면서 통화가 끝날 무렵엔 엄마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선영이에게 말하지 말라는 엄마나 엄마에게 말하지 말라는 선영이가 날 어느만큼 믿고 서로에게 감추고싶은 사연들을 비밀로 만들어 나에게만 선뜻 올려놓는지 알수가 없었다.정말로 날 딸로, 언니로 믿고 마땅히 터뜨릴데가 없는 쌓인것들을 나에게 전가시키는것인지 아니면 말하기 싫어하는 내가 언제든지 입을 꾹 다물고 있을것 같은 안도감때문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난 그들에게 비밀스러운것들을 간직해줄만한 소중한 존재라고 믿고싶었다.         큰 길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이르러 나는 아무 쓸모도 없는 계약서를 빡빡 찢어버렸다. 찢어지는 계약서와 함께 악필을 근심하였던 내 싸인도 쪼각쪼각 찢어져나갔다. 나는 쪼각난 종이쪼박들을 길가에 입을 벌리고 서있는 참대곰쓰레기통에 넣어주며 입귀를 풀럭이며 허구픈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내 싸인은 버려졌다. 어쩜 아주 오래전에 이미 버려졌는지도 몰랐다. 어디에 구겨박혀있을지도 모르는 결혼전재산공증서나 소중하게 건사한 아들애의 각서 ,그리고 더는 기억이 안나지만 했을지도 모르는 싸인들이 싸인펜을 놓는 순간부터 싸인의 잉크가 채 마르기전에 그렇게 버려졌는지도 몰랐다. 드디여 나는 내가 자기의 싸인을 책임지기조차 어려운 존재임을 본의아니게 서서히 깨달아가고있었다.         싸인을 삼켜버린 참대곰쓰레기통을 바라보다말고 난 몸무게가 통채로 실려 무겁게만 느껴지는 발걸음을 어느새 길녘책가게로 휘청휘청 옮기고있었다……
8    싸인(1) 댓글:  조회:1949  추천:0  2011-09-30
싸인 김영해 1 한낮에 불쑥 동생 선영의 전화를 받게 된것은4평방여의 땅을 차지하고 앉은 8~9립방메터쯤 되는 작은 공간의 가게에서였다. 그날도 나는 한껏 들숨을 들이쉬기만 하면 주위가 금방 진공상태로 될것 같은 좁아터진 길녘책가게에서 내 직장이랍시고 자리지킴을 하고있었다. A4용지 종이 두장을 세워서 합친만큼한 여닫이 뙤창문으로 어제와 별 다름이 없는 풍경들을 눈바램하면서 나는 내 직장이 참 근사하다는 생각으로 입귀에 느슨히 웃음 한조각을 베여물고있었다. 남편이나 아이의 뒤치닥거리를 끝마치고 늦은 아침에 도보로 출근하여 열쇠를 열고 덧문을 내리고 길을 향해서 세면에 댄 유리창안쪽에 세줄로 늘여놓은 줄에 알록달록한 표지의 책자들을 집게로 대롱대롱 매달아놓으면 내 하루영업준비는 끝이였다. 그것도 매일 하는것은 아니였다. 팔리지 않은 책자들은 한번 매달아놓으면 팔릴 때까지 내리는 법이 없고 가끔 먼지만 툭툭 털어주면 되기에 드문드문 새로 도착한 책자들만 보충해서 매달아놓으면 되였다. 이름이 책가게지 정해진 쟝르도 없고 정기적으로 비축된 장서도 없다. 시장통에서 열리는 길거리난전이나 다를바없이 행인들의 눈길을 확 끌수 있는 표지들로 장식된 이야기류의 월간잡지나 격월간잡지가 대부분이다. 시내길거리에 흔하게 널려있어 남다를것도 없고 규모도 작아 시시껄렁해보이지만 밥을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을만큼 돈을 벌수 있는것을 보면 아직도 거의 매일이다싶이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속에는 할일없이 볼거리없는 잡지나 보며 시간을 떼우는 사람들이 꽤 많은듯싶다. 나는 매일 아침 여덟시 반쯤에 책가게에 들어가앉으면 오후 네시에 문을 닫을때까지는 신진대사처리외에는 별로 나올 일이 없다. 출입문마저 꽁꽁 걷어닫고 뙤창문만 열어놓은채 누가 지나가다가 “이거 주세요.”하고 가리키면 그 잡지를 집게에서 내려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치뤄주면 입을 열 필요조차 없이 손만 움직이면 될 때도 허다하다. 책을 들여오는 값이 어떠하든 팔 때는 책뒤에 활자로 찍혀진 값대로 받으면 그뿐이고 책을 갖고 값을 흥정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책을 들여오는 일도 몇년을 하고나니 물목이 훤해서 전화 몇통이면 금방 끝나는지라 언변이 없는데다가 말을 하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로 딱인 직장이다. 그날도 오늘은 뭐할가 하는 궁리도 없이 뙤창문으로 익숙하다못해 좔좔 외울수 있는 풍경을 내다보고있었다. 길건너 맞은편엔 “금파도노래방”과 “이뚱보짜장면”집이 나란히 이웃하고 있고 그 좌우에 약방이며 슈퍼며가 질서없이 늘어서있다. 노래방은 오전이면 계절과는 상관없이 허벅지를 드러내놓은채 한들거리는 아가씨들의 모습만 어른거리다가도 점심시간을 약간 넘긴 시간부터는 들락날락하는 사람들로 흥성흥성하다. 가격이 시간당 20원인 싸구려노래방이라 많이는 어디서 술 한잔 거친 평범하다못해 조금은 추레해보이는 들쑹날쑹한 중년남자들이 불깃불깃한 얼굴로 한껏 호기를 부리며 들어가는 모습들이다. 가끔은 기생오라버니처럼 얄팍하게 생긴 얼굴에 넥타이까지 받쳐맨 샐러리맨인듯한 모습도 보이지만 한창 바쁠 오후출근시간에 그곳을 찾는것을 보면 진짜 샐러리맨은 아닌듯싶기도 하다. 반면에 짜장면집은 점심때면 급히 점심을 때우는 고등학교학생들과 직장인들로 북적거리다가도 노래방이 흥성거릴 무렵이면 호적한 기분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약방이나 슈퍼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가끔 들락거리면서 무엇이 들어있음직한 비닐봉지들을 들고나오는데 한산해보이지는 않는다. 다들 밥벌이는 착실히 하고있는 모양이다. 그날따라 겨울에 잡아들어 첫눈이랍시고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있었고 오전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맞은켠 가게들도 문이 별로 여닫히지가 않았다. 출근시간은 지났고 점심시간은 아직 이른 어중간한 시간대여서 길에도 차며 행인들이 조금은 뜸했다. 내가 눈송이들이 뙤창문가에 내려앉았다가 금시 녹아버리는 모습을 허허로운 눈길로 바라보고있을 때 익숙하다못해 내 몸의 일부와 같은 한적한 공기를 깨고 핸드폰이 울렸다. 듣그럽게 울리는 피아노음악소리를 들으며 폴더를 열어보니 액정화면에는 전화번호대신“확인할수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중문이 떠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했다. 전화번호가 현시되지 않는 전화라면 국제전화, 국제전화를 나에게 걸어올 사람은 분명히 한국에 체류하고있는 선영이뿐이였던것이다. 이제껏 밤에만 전화하여오던 선영이가 굳이 낮에 전화해야 할 일이라면? 못된 생각들이 삽시에 몰려들었다. 전화를 받기가 저어되였다. 나는 팔딱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한참이나 길게 들숨을 들이쉰후 숨을 가다듬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언니, 왜 인제야 전화를 받어?” 신경질적인 선영의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선영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팡팡 솟구치고있었다. 난 길게 날숨을 토해냈다. “넌 왜 한낮에 전화하고 난리니? 갑자기 놀랐잖아.” “그건 그렇고. 언니, 엄마는 어쩌고 있대? 잘 살고있대?” 거두절미하고 선영이는 직통배기로 엄마부터 묻고있었다. 선영이에게서는 언니는 뭐하냐, 조카와 형부는 잘 있냐 하는 기본적인 인사말은 말치레로조차 들을수가 없었다. 굳이 따져보면 전화하는 매너부터 기본이 안되는 동생이였다. 적어도 내 보기에는. “머? 엄마 머?” 빠르게 뱉어내는 선영의 말이 무엇을 뜻하고있는지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아닌보살을 했다. “아~ 잘 살고 있겠지.” “어디 그런 대답이 있어? 잘 사는지 어쩌는지 가까이에 있는 언니가 늘쌍 들여다보고 똑바로 대답을 해줘야지.” 칼칼한 선영이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하지만 난 정확한 답을 말할수가 없었다. 엄마가 그 집에 들어간이후로 난 엄마와 몇번 통화를 했을 뿐 엄마가 살고있는 그 집에 가본 일이 없었다. 통화할 때마다 엄마는 잘 있는다고 했고 가볍고 조용한 엄마의 목소리엔 그늘이 실려있지 않아 나는 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정작 엄마가 잘 있을거라는것은 내 생각일뿐이지 내가 확인한것은 아니니 난 선영이에게도 그냥 잘 있을거라는 추측적인 애매모호한 대답을 할수밖에 없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 계시겠지. 그 집엔 너처럼 빽빽거리며 간섭할 딸도 없어.” “언니두 엄마성질 알면서 그렇게 맘놓구 있어? 엄마야 힘들어도 힘든 기색 안내고 사는 사람이잖아. 엄마는 참을성이 넘 많은게 탈이야. 그러니까 언니가 좀 잘 챙겨. 돈 쓸 일 있으면 말하구. 내가 홀몸으로 이 나이에 돈 벌어 머하겠어? 나두 남의 아들들 못지 않게 엄마를 잘 모실수 있어. 몇년만 꾹 참으면 내가 엄마 남은 여생 호강시킬 돈을 따발로 메고 들어갈건데 엄만 그것을 못참고 기어이 그 집에 들어간대? 아무리 적적하셔도 그렇지. 아니, 아무리……” 또 시작이다. 선영이는 엄마 일로 입을 열었다싶으면 “아무리”를 여라문번씩 곱씹으며 엄마가 혼자서 집구석을 지켜야 하는 매번 반복이 되는 똑같은 리유들을 한보따리씩 풀어놓고야 직성이 풀려한다. “그만해라. 다 끝난 일이야. 엄마도 한번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게 해야잖니? ” 이때쯤이면 난 엄마의 편이 되여 엄마의 립장을 선영이에게 설득시키기보다 선영이의 입을 막아 시끄러운 내 귀를 쉬게 하는게 더 절실하다. “그래두……후우~……” 선영이는 몇마디를 더 주절거리다가 전화를 놓아버렸다. 가게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나는 다시 뙤창문으로 차들과 행인들이 오가는 길에 한정없이 눈길을 던지고있었다. 밖에는 눈발이 굵어지고있었고 하얀 눈을 들쓴 차들이 굼뜨게 오가는 대신 머리를 수굿한 채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있었다. 그날은 12월 5일, 내 생일날이였었다. 2 “엄마, 이거 받아둬요.” “아니, 얘는?” 엄마는 내가 호주머니에 찔러주는 돈을 한사코 내 손에 다시 밀어준다. “내가 주는게 아니구 선영이가 주는거라니까. 얼른 넣어둬요.” 나는 다시 돈을 엄마의 손에 쥐여주었다. “선영이거면 어떻고 니거면 어떻고. 난 돈 없어두 돼.” 엄마는 마구가내로 내 손을 밀어내신다. “엄마! 자식들 체면 좀 생각해주면 안돼요?!” 난 급기야 버럭 화를 내고말았다. 그러는 내 눈앞에는 운전기사한테 커다란 해산물박스를 들려 들어서던 녀인의 탱탱한 얼굴이 스쳐지나고있었다. 난 어정쩡해진 엄마의 손에 돈을 되는대로 밀어놓고는 급히 앞서가는 아들애의 뒤를 쫓아갔다. 등뒤에서 엄마의 부름소리가 들려왔지만 난 머리도 돌리지 않은채 뒤를 향해 팔을 저어보이고는 얼른 아들애의 팔짱을 끼였다. “춥다. 얼른 가자~” 아직 어린애라지만 키가 훌쩍 나를 넘어서니 제법 의지가 되는 아들녀석이다. “엄마, 이젠 외할머니집에선 못자는건가요?” “응? 뭐?” 난데없는 물음에 난 어정쩡해지고말았다. “아~ 거기 외할머니집이 아니야. 나중에 너도 알게 될거야. 왜선지는.” “그럴가?…… 그런데 엄마, 외할머니가 왜 날 귀여워하셨는지 알아요?” “외할머니가 사랑하는 딸의 아들이니까 그랬겠지. 왜? 아니니?” “외할머니가 그러는데 제가 손자여서 이뻐한댔어요. 손녀가 아닌 손자여서. 난 아직도 외할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는데.” “그럴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들애에게 그럴리가 없다고 말을 하면서도 난 속으로 엄마는 충분히 그럴수가 있었다고 믿고있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고 엄마는 두 딸을 낳으셨다. 내가 태여났을 때 “다음에 아들 보면 되지.”하면서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던 아버지는 동생 선영이도 딸임을 알았을 때에는 갓난애를 들여다보시지도 않은채 휭하니 문을 차고 나갔다가 새벽녘에야 술에 곤죽이 되여 들어오셨다고 하셨다. 내가 열살 때 엄마는 세번째로 임신을 하였다가 류산이 된후 불임을 선고받았다. 그후부터 아버지는 자주 술을 마셨고 술주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술이 거나해지면 밖에 나가 동네사람들과 걸고들어 싸움질을 하여 식구들의 가슴을 졸였고 겨우 말려서 집에 데려오면 자리에 틀고 앉아서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당금 잡아먹을듯이 욕을 하다가 술이 깰 무렵에야 잠이 들군 하였다. 이불속에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있는 우리를 걷어차거나 엄마의 머리끄뎅이를 잡아끌거나 솥뚜껑이 부엌으로 날아가기도 하는 날들이면 우리 집은 엄마와 우리 자매의 울음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였다. 지금도 아버지가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채 입귀에 허연 거품을 물고 욕질로 밤을 새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가 질린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당할 때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그러안고 “다 못난 에미탓이야”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아들을 낳지 못한 죄아닌 죄로 평생 아버지한테 구박을 받은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한것이 얼마나 한에 서렸으면 외손군이 남자애여서 이쁘다고까지 하셨을가싶다. 갑자기 찬 공기가 페속으로 훅 흘러들며 아릿한 느낌이 페부에 전해졌다. “엄마,나 오늘 지나면 또 한살 더 먹는거지? 신난다! 엄마, 나도 다 컸어요. 나도 이젠 다 큰 남자라구요. 이젠……” 외할머니소리를 하다말고 아들애는 생뚱같은 소리를 주어댔다. “이젠 뭐?” “아니, 그냥…… 엄마는 몰라도 돼요. 녀자니까. 이히~” 아들애는 거기서 말을 뚝 그치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시물시물 웃었다. 가로등불빛에 이마빡에 난 여드름 두 알이 얼어서 유난히 빨갛게 보였다. 한살 더 먹는다고 신나서 한참이나 떠들던 아들애도 잠이 든지 오래지만 이따금씩 울려퍼지는 폭죽소리로 방안은 한적하지 않다. 문득문득 하늘로 피여오르는 불꽃으로 갑자기 환해지는 밤하늘때문에 방안마저 갖가지 색채들로 아롱거린다. 년말총화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길로 곧장 엄마가 살고있는 집으로 오기로 했던 남편은 오랜만에 고향행차를 한 친구때문에 아직도 귀가전이다. 늦은 귀가가 례사로 되여있는 남편은 결국 한해의 마지막날도 이렇게 마침표를 찍을려나보다. 아까부터 나는 전화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다. 혹시나 폭죽소리때문에 못들을가봐 저어되여 아예 전화기앞에 죽치고 앉았다. 깔고앉은 장단지가 슬슬 저려오는것을 보면 그러고 앉은지도 한참은 된것 같은데 오늘 밤엔 전화벨소리가 울릴것 같지 않다. 일부러 전화를 받고 자려고 늦게까지 텔레비죤을 보면서 기다리고있었는데도 열한시가 다되도록 종시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란 참 요상하다. 한밤중에 전화가 올 때에는 귀찮아서 이불속에서 한참을 뭉기적거리다가 겨우 전화를 받았는데 정작 전화가 오지 않으니 왜 안오는지 궁금하고 또 기다려진다. 한달째 전화가 없던 선영이지만 날이 날인만큼 섣달 그믐날인 오늘만큼은 꼭 전화가 올것 같아서 선영이가 “아무리”를 곱씹기전에 내가 한참을 떠들 말을 아까부터 속으로 되짚어보고있는중이였다. “아무리 어째도 어떻게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니?”, “아무리 어째도 어떻게 엄마한테 이래라 저래라 분부를 하니?”……하고. 녀인은 해산물박스를 엄마한테 떠밀어맡기고는 “저흰 래일 아침에 늦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손질 잘해둬요. 그럼 수고하세요, 아줌마!”하며 그 걸음으로 돌따서버렸다. 녀인이 문을 닫고 나가기전 난 이미 벌레를 씹은 얼굴표정을 만들고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녀인은 문소리와 함께 올때처럼 씽하니 사라져버렸고 엄마는 해산물박스를 옮기느라고 부산을 떨고있었다. “엄마를 아줌마라고 불러요?” “응.그런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내 눈앞으로 하필이면 한국드라마에서 나이가 지긋한 파출부아줌마들이 머리를 수굿한채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주인집녀자들한테 혼나는 모습들이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나고있었다. 그 시각부터 내 머리속에 엄마를 보내지 말걸 그랬다고 퉁퉁거리던 선영이가 어쩜 옳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슬슬 꼬리를 쳐들기 시작했던것이다. 저녁밥을 먹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었다. 돌아올적에 선영이가 보낸거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기어코 엄마손에 돈을 쥐여준것도 내가 효성이 지극하거나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였었다. 엄마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당당해지고싶었던 내 마음의 발로라고 함이 더 적절했다. 언제부터인가 난 무엇인가에 위축되고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 위축감이 엄마로부터 오는거라고 단정짓고말았다. 오늘은 나도 엄마문제로 한참을 궁시렁거리려고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전화벨소리는 울릴줄을 모른다. 선영이는 뭘 하고있을가? 내 보기에도 안스럽고 답답한 나와는 달리 다혈질인 선영이는 활달하고 텁텁했다. 머리를 동여매고 착실히 책상에 마주앉아 공부하는 성격도 아니였고 누가 끄는대로 졸졸 묻어가는 타일도 아니였다. 선영이의 공부실력이면 무난히 대학에 갈수 있었는데도 고중 2학년까지 다니고는 중퇴를 하고 친구랑 남방으로 진출하고말았다. 호텔이며 려행사며 회사들을 전전긍긍하면서 만나는 남자마다 학력이 어떻소 인물이 어떻소 경제력이 어떻소 하고 딱지를 놓더니 혼기를 훌쩍 넘기고 싱글로 산다고 노래처럼 부르고다녔다. 그러는 선영이를 나는 나름대로 나처럼 엄마와 아버지의 결혼생활에 질려버린것이라고 짐작해버렸고 선영이는 세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살수 있는 용기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는거라고 속으로 은근히 그 용기를 부러워했다. 선영이는 적금도 별로 하는 양이 없이 문득문득 엄마한테로 몇천원씩 송금해오기도 하고 엄마에게 이쁜 한복을 보내오기도 하면서 이쁜 짓을 다하더니만 1년전의 어느날엔가는 갑자기 나 한국가우 하는 소리와 함께 한국행을 하고말았다. 한국에 가서도 성격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이 떠돌면서도 엄마안부전화는 잊지 않고 하는 선영이였다. 엄마가 그 집으로 들어간후부터는 엄마대신 나한테로 전화를 걸어와 닥달하는 선영이때문에 나는 조금씩 지쳐가는 중인데도 오늘만은 선영의 전화가 기다려지는것은 선영에 대한 걱정보다 내 속에 뭉친 응어리를 선영이말고는 마땅하게 터뜨릴데가 없기때문이다. 전화오기는 다 글러먹은 시간대에 전화기를 지키고 앉았지만 선영이를 떠올리다 말고 정작 생각은 자꾸 지금쯤 래일 아침에 들어설 그집 자식들을 위해 해산물손질이 아니면 물만두를 빚고있을지도 모를 엄마쪽으로 굴러갔다. 시간이 묵은 해의 섣달 그믐날 밤에서 새해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시각까지도, 새해가 시작된지 한참이나 되였는 시간까지도 전화기는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 앞에 죽치고 앉은 내 머리는 어느새 하나의 선택제를 갖고 수없이 체크하고 지우고 체크하고 지우고 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엄마는 행복하다? 엄마는 불행하다?...... 3 절그럭거리는 열쇠소리에 잇달아 울리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난 잠을 깨고말았다. 손을 뻗쳐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끄당겨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새벽네시. 간밤에 양 천마리를 셀 즈음 겨우 잠이 들었던 신경말초들이 한꺼번에 우야우야 소리를 치며 깨여나 어디선가부터 뭉쳐져 목덜미로부터 기여올라 우로 뻗치더니 태양혈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못들은척한채 나는 억지로 숨을 고르고 식지와 중지로 태양혈을 문지르며 양 한마리부터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 5백마리를 세고나서도 정신은 말짱했다. 그대로 누워있을수가 없어서 물이라도 마시려고 거실에 나오니 남편은 쏘파에서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쏘파 가까이에 다가가서 기다란 몸을 아무렇게나 구기고 드러누워 푸하푸하 코를 고는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는 내 머리속으로 “각서”라는 낱말 하나가 튕겨오르고있었다. 아침밥상이 다 차려져서야 깨여난 남편은 족부안마를 받다가 깜박 잠이 들었댔다고 변명삼아 중얼거리며 헛바람소리가 나는 웃음을 저혼자 허허 웃었고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낚시하러 갈 준비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러는 남편의 앞으로 나는 종이장과 볼펜을 내밀었다. “여기에 각서를 쓰고 싸인해줘요. 오늘부터 퇴근하면 꼭꼭 제시간에 집으로 들어온다고요.” “뭐?!” 남편은 낚시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희귀동물을 보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것도 잠간, 남편의 입귀로 픽~하고 랭소가 흘렀다. “각서는 무슨? 할일이 그렇게 없어?” 남편은 궁시렁거리며 낚시대를 마저 가방에 챙겨넣었다. “써줘요. 제시간에 집에 들어온다, 외박 안한다…이런걸로.” 나는 남편의 코밑으로 주춤주춤 종이장을 들이밀었다. “각서를 쓰고 거기다가 싸인까지? 아니, 당신은 싸인 함부로 하다간 큰 코 다치는줄도 몰라? 안써! 내가 뭐 바보야? 혼자서 이것도 안한다, 저것도 안한다 써놓구 맨날 당신이 그 각선지 뭔지 하는걸 쳐들구 다니며 잴잴거리라구?” 남편은 가소롭다는듯이 코까지 힝힝거렸다. “그럼 잔소리 안듣구 각서대로 하면 되잖아요. 각서…써요. 네?” 내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왔다. 똑마치 외박을 한 남편에게서 각서를 받아내는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구걸하는 그런 꼴이였다. “남자가 그럴수도 있는거지. 바람 안피우는것만 해도 고마운줄 알고 살아야지.” 남편은 손놀림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낚시코며 미끼며를 차곡차곡 가방에 챙겨넣고있었다. “제가 술 마시는거 싫어하는줄 알면서……술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리는데……” 나는 엊저녁 외박을 한것이 내가 되기라도 하듯이 떠듬거리며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이런? 장인어른도 술군이였다면서 무슨 딸이 이래?” 알수 없는 일이라는듯 남편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남편은 쪼르륵하고 가방의 쪼로로기를 잠그고는 손을 탁탁 털어댔다. 그리고는 종이장과 펜을 쥔채 머밋거리며 서있는 날 한참이나 낯선 사람 보듯이 들여다보았다. “오늘 왜 이래? 그만 하자~ 나 낚시가야 되거든. 마누라가 아침부터 댕댕거리면 재수 꽝인거 알지?” 남편은 낚시가방을 들고 휭하니 나가버렸고 그 서슬에 내 손에 쥐여졌던 종이장과 펜은 바닥에 떨어지고말았다. 나는 잠간 멍청한 꼴이 되고말았다. 한참후 자기 방안에서 동정을 엿듣고있었을 아들애가 스적스적 거실로 걸어나왔다. “엄마, 이 각서 제가 써줄가요? 꼬박꼬박 공부 잘하겠다고.” 아들애는 방바닥에 떨어진 종이장을 주어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니다.” 나는 아들애의 손에서 종이장을 받아 휙 책상우에 던져버렸다. 던지는 힘이 너무 컸는지 종이장은 얼마 못날아가고 되려 뒤걸음질치며 책상아래에 내려앉았다. 아들애는 얼굴에 의문부호를 가득 그린채 종이장을 주어 책상우에 올려놓고는 다시 자기 방안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머리가 욱신거려왔다. 화가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화를 밖으로 쏟는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지하고 몸으로 삭여내는데 습관되여있었다. 화가 나서 우당탕거리기앞서 머리가 지끈거리며 화가 나고있다고 신호를 보내왔고 그러면 난 무슨 비법이랄것도 없이 심호흡을 길게 하면서 참자 참자 하며 꾹꾹 내리누르기만 했고 그러노라면 화는 정말로 서서히 서서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군 하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앞에 마주앉았다. 컴퓨터를 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습관때문이지 딱히 컴퓨터를 켜고 할 일이 있는것은 아니였다.나는 잘 운행되고있는 자동시스템처럼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메신저를 로그인하고 사이트를 여는 일들을 순서있게 진행시켜나갔다. 마주앉은 사람모양의 파란 아이콘들이 뱅글뱅글 돌다가 로그인이 완료된 메신저련계란에는 회색아이콘들만 부옇게 떠있다. 나는 메신저를 오프라인상태로 만들어놓고 창을 닫아버렸다. 이미 열어진 공백사이트에 싸이월드사이트주소를 쳐넣고 Enter 을 클릭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몇달째 휴면상태에 빠진 내 싸이홈피는 한적했다. 방명록엔 아무도 새 글을 남기지 않았고 올려놓은지 몇달이나 되는 게시물에는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한적하다 못해 썰렁한 홈피를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싸이일촌에서 아들애의 홈피를 클릭하였다. 아들애의 홈피의 메인은 10대에 어울리게 화려하고 환상적이였다. 파란색 바탕메인에 별들이 눈부시게 깜박이고있었고 마우스의 움직임을 따라 나비가 팔락이며 따라다녔고 랩을 곁든 배경음악은 적당히 성수나고 격렬했다. 빨간색 표식들을 달고 반짝이는 카테고리들중에서 “쏙닥쑥덕”이 눈에 띄였다. 처음 보는것이였다. 마우스를 갖다대니 “일기장”이라는 중문꼬리표식이 떴다. 보면 안되는데 하는 망설임하나 없이 얼른 클릭했다. --4월 22일 수요일 날씨 개임 오늘은 기분이 짱이다. 어제 **이한테 사귀자고 쪽지를 보냈는데 오늘 답장이 왔다. 하트가 빵빵 달렸다. 자기도 좋댄다. ㅎㅎㅎㅎ 입이 귀에 걸린다. 여자친구가 생겼다. 푸하하!!! 그리고 비밀 하나 더! 나 겨드랑이에 털 났다? ㅋㅋㅋ 간지러워~ 이히히. 여자친구라? 가슴이 덜컹했다. 아들애한테 녀자친구가 생겨버렸다.이제 막 열네살을 먹은 녀석, 아직 열세돐생일도 안 지난 녀석한테 녀자친구라니?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였다. 아들애는 언제까지고 내 뒤만 졸랑졸랑 묻어다닐줄 알았지 나 아닌 다른 사람때문에 즐거워서 킬킬거릴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잔병치레가 많은 시부모님들때문에 내 손끝에서만 자라온 아들애였고 남편의 잦은 술놀이때문에 대부분시간을 나하고만 보내는 아들애였기에 나한테서 조금만 떨어져있어도 보고싶었다고 슬펐다고 징징거리던 아들애였다. 생김새가 남편을 꼭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애는 “누구 닮았니?”그러면 엄마를 닮았다고 고집을 부리곤 했었고 좋은 이야기, 궂은 이야기도 나한테만 숨김없이 재잘거렸었다. 그런 아들애였기에 아들애앞에서만은 나도 밝게 웃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주고받는 다정다감하고 마음느긋한 엄마가 되여있었다. 그런 날 남편은 “그 무뚝뚝한 얼굴도 애만 보면 딴 사람이 되네.”하고 빈정거렸었다. 그러거나말거나 나는 아들애만은 언제까지고 내 편으로 내 곁에 있어줄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였다.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애, 아들애에게 생겨버린 여자친구, 그러고보니 아들애도 슬슬 내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있는것이였다. 저러다가 언젠가는 대학간다고 떠날거고 또 어느날은 문득 결혼한다고 다른 여자를 곁에 세워두고 헤벌쭉 좋아할것이였다. 아, 아~ 난 이제 아들애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있어야 하는것이 아닐가? 마음속에 웅크리고앉았던 커다란 무엇이 형체없이 빠져나가버린듯 마음이 허전했다. 나는 한참이나 아들애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다가 말고 댓글을 클릭했다…… 나는 사이트를 닫고 컴퓨터를 끄고 일어났다. 외출복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아들애는 무엇을 하는지 방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아마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히죽히죽 소리죽여 웃고있을지도 모른다. 웬지 “엄마 , 잘 갔다와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새삼스레 섭섭했다. 아무래도 난 손바닥한 구멍책가게가 제일 맘이 편한 곳일듯 싶다. 난 걸음을 빨렸다. 금방 아빠트단지를 나섰는데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잘 갔다와요~” 아들애가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손을 젓고 있었다. “그래, 놀지 말구 공부하고있어~” 나는 아들애를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갑자기 울컥해나며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얼른 돌아섰다. 저기 길가에 관상용복숭아나무가 막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왔다. 5월로 치닫는 4월은 아무래도 마음도 몸도 한껏 부풀어오르는 계절인가보다. 무겁게 무겁게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을 추스리며 나는 걸음을 옮기려다 머리를 돌려봤다. 아들애는 이미 베란다뒤로 사라져버렸었다. 아들애가 비여있는 내 눈은 참 허전할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머리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4 “어떻게 됐어? 장모님은?” 남편은 문을 열어주면서 목을 길게 빼들고 내 뒤를 힐끗거렸다. “안와요.” “왜 안오는데? 아~참, 내 그럴줄 알았다니까. 그 집에서 안보낸대? 장모님이 안오신대?......” 내가 신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편은 문어구에서부터 거실을 거쳐 침실로, 침실에서 다시 거실로 내 뒤를 졸랑졸랑 묻어다니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쉴새없이 떠들고있었다. 활기찬 목소리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났다는듯이 한껏 들떠있었고 걱정 한올 실려있지 않았다. “몰라요. 아무튼 안와요.” 나는 남편을 아니꼽게 찔 흘기였다. “가만 ,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밑지는건데……” 무슨 대단한 궁리나 하듯이 남편은 제법 이마살까지 찌프리며 내 뒤를 묻어다니던 모양새 그대로 뒤짐을 지고 거실을 왔다갔다 한다. 나는 그 모양이 눈에 거슬려 리모컨을 꾹 눌러 텔레비죤을 켰다. 마침 KBS1채널에서 TV동화 프로를 방송하고있었다. 그림동화로 보여지는 사연은 이였다. 자기의 원래의 이름 대신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불리워오며 이름과 함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잊고살았던 엄마에게 무슨 강좌에 다녀오신 아빠가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며 사랑을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기억속에 아득하게 잊혀졌던 엄마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조용히 입속으로 불러보았다. “리순자~” 발음마저 어색하고 생소했다. 아마 금방 말을 잴잴 번질 때 어른들이 심심풀이로 “엄마이름이 뭐지?”하면 “리순자”하고 또랑또랑하게 주어댔다는 엄마의 기억을 빌어 자기가 기억하기라도 하듯이 알고있는 일까지 빼면 내가 엄마의 이름을 입밖으로 번진 일은 열손가락도 다 차지 않을것 같았다.굳이 엄마의 이름을 이야기하거나 적어야 하는 일이 없었던 탓일것만도 아니지만 난 딱히 다른 리유를 찾아낼수가 없었다. 몇십년동안 자기의 이름을 잊고 살아온 엄마가 로년에 또 아무렇지도 않게 “아줌마”라는 이름 하나 더 자처하시고 사셨던것을 보면 엄마는 애초부터 자기를 잊기로 하셨던것이 아닐가? 늦은 아침에 설겆이를 하고있는데 전화를 걸어온 친구가 왜 아직도 엄마를 안모셔오냐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했고 난 어리둥절해서 “뭐가? 뭘?”하며 얼떠름한 표정이 되고말았다. 그 표정이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놀란 표정으로, 암담한 표정으로 급격하게 변해가는데는 불과 1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살고있는 집의 로인네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석에 누워있은지 한달이나 된다는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내 머리속으로 “아줌마”라는 단어가 튀여올라 로그인을 하는 메신저아이콘처럼 수없이 뱅글거리며 현기증이 날려고 하였다. 어딜 가냐는 남편의 물음에 엄마를 데릴러 간다는 소리만 던진채 천방지축으로 문을 나서 무작정 뛰였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달린지 한참이나 되여서야 놀라고 다급했던 가슴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머리속에 한꺼번에 튕겨올라 뒤죽박죽이 되였던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가 되며 엄마한테 가려고 할 때마다 엄마가 로인활동이 있다느니, 가족소풍이 있다느니 하면서 핑게거리를 만들어 못오게 하던 리유를 알것 같았다. 20분쯤 지나서 엄마가 살고있는 집에 도착할 무렵 내 머리속은 이미 엄마를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확고하게 굳어져있었다. 문을 연 엄마의 얼굴은 놀라움이나 반가움, 불안함이나 그 어떤 기색도 없이 비여있는듯이 평온했다. 평온하다못해 무표정한듯한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엄마는 오래전부터 표정을 잃고 살아온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몇년전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도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 두어줄을 단채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그때 난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이 슬퍼보이지 않을수도 있다는것을 깨달았었다. 멈칫거리며 엄마 뒤를 따라서 들어선 로인네의 방안에선 환자특유의 냄새와 늙어가는 냄새, 약냄새와 공기청정제냄새가 섞여서 마음껏 들숨을 쉬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야릇한 냄새가 떠돌고있었다. 로인은 어제밤잠을 안깬건지 아니면 이른 낮잠을 자는것인지 아무튼 자고있었다. 생각외로 로인의 얼굴은 눈이 움푹 들어갔거나 까칠하게 여윈것이 아니라 약간 부은듯하기만 할뿐 몇달전에 본 모습과 별 다름없었다. 평화롭게 꿈나락에 빠져있는 로인을 보면서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어 난 재빨리 방안에서 나와버렸다. “괜찮아보이지? 처음엔 당금 돌아가실것 같든데 이젠 말도 하고 손발도 움직이고……” “엄마!” 뒤따라나와서 중얼거리는 엄마를 향해 난 낮게 소리쳤다. 어정쩡해서 나를 쳐다보는 엄마를 외면하고 나는 또박또박 뱉어냈다. “엄마, 집에 갑시다!” “뭐라니? 집에 왜?”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의 얼굴에 잠간 의문부호가 그려지고있었다. “엄마, 이제 이 집에서 그만 살고 집에 가자구요. 못알아들으셨어요?” “……” 엄마는 눈길을 내리깔고 잠간 무엇인가 생각하는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럴줄 알고 로인네가 아프다는 이야길 안한거다…… 난 못간다.” “엄마, 가요. 로인은 이 집 자식들이 돌보면 되죠. 엄마가 이 집에 앓는 로인네 병구환이나 할려구 온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가요.” 난 엄마의 손을 잡고 애원하듯이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의 눈속에 비치는 나는 그렇게도 조그마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상할수도 있고 아플수도 있는거다. 그럴 때마다 다 버리고 가면 뭐가 되니? 내가 그걸 감안하지 못하고 재혼한것은 아니다.” 엄마는 재혼이라고 그랬다. 난 한번도 엄마가 재혼한것이라고 생각한적이 없었고 엄마주위의 어느 사람도 엄마가 재혼한것이라고 말한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재혼이라고 그랬다. “재혼? 엄마가 년세가 얼마라고 재혼이라고 그래요? 60세도 넘으셨으면서. 재혼은 결혼등록도 하고 조촐한 결혼식이라도 치르면서 하는거예요. 엄마같은 년세에 로인들끼리 합쳐서 사는것은 재혼이라 안그래요. 그냥 같이 산다—이렇게 말할 뿐이얘요.” 단숨에 긴 말을 뱉어내고나서 나는 속이 후련했다. 어쩜 그동안 꽁꽁 묻어두었던 말이 삭혀져서 몸속에 흩어지려는 찰나 적당한 시기를 만나서 뛰쳐나온 탓일것이다. 엄마가 로인이 살고있는 집으로 들어온 이후로 난 내내 찜찜하고 불안한 기분이였다. “세상 별랗게 돌아간다. 로인들은 뭐 소꿉장난이라도 하는줄 아니? 재혼이 아니구 그냥 산다? 그럼 그냥 산다 치자. 그래두 우린 부부다. 부부는 한 사람이 아프다구 다른 한사람은 무작정 버리고 떠나는게 도리가 아니다. 그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엄마는 고집스러웠다. 당신이 술상을 거두라는 말도 하기전에 당신만 남은 술상을 거두었다는 잘못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이불을 들쓰고 있는 엄마에게 난 “엄만 왜 이렇게 살아요? 왜 리혼도 안해요?”라고 바락바락 악을 썼었다. 그때 엄마가 그랬다. 한번 정해진 부부는 쉽게 깨질수 있는게 아니라고. 열여섯살밖에 안되는 내가 그 말을 리해했을리 없지만 그후로부터 난 입을 닫아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싫었고 엄마가 리해되지 않았고 남자가 싫었고 말하기도 싫었다. 엄마처럼 살거면 결혼은 알할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결혼을 한것은 남편이 마음에 들어서거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살아야 하는게 법도거니 하는 인식때문이였다. 언제부터인가도 모르게 내 몸속에는 내가 그렇게도 봐줄수 없어하는 인내라는것이 서서히 배여가기 시작했던것이다. 싫다는 소리 안하는 엄마처럼 나도 얼굴의 표정을 서서히 지우고 살아가고있었다. 난 분명 엄마를 닮고있었고 그래서 난 내가 싫었고 그래서 난 구멍책가게에 숨어있는것이 편했다. 숨통 트일 곳이 없는 나처럼 엄마도 답답할거라는 생각에 로인과 결합하는 엄마를 말리지 않았고 별 간섭도 없이 한번쯤은 엄마의지대로 살아보라고 지켜보고만 있은것은 어쩜 엄마로부터 자유로와지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한 욕심이 아닌지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로인들의 자식들은 엄마를 아줌마라고 부르고있었고 엄마를 돈 안받고 고용하는 파출부대접을 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이제 운신을 못하는 로인네의 병구환까지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아버지의 병구환도 안해본 엄마한테 안지 몇달밖에 안되는 로인네의 지저분한것들을 치워주며 병구환을 시킬수는 없다는것이 엄마를 데려가려는 내 리유였다면 엄마는 부부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이 집을 떠나지 않을 리유가 충분했다. 난 아침에 친구한테서 로인네가 앓고있은지 한달째나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언녕 엄마가 떠나시지 않을것을 알았어야 했다. 엄마가 떠나기로 마음먹었더면 로인네가 앓고있는 사실을 내가 모르게 할려고 백방으로 노력할리가 없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계셨다. 로인네와 함께 살면 부부인줄만 알았지 지금 로인들도 얼마쯤씩 살다가 탐탁지 않으면 아무일 없이 갈라져버리는줄도, 일방이 중병에 몸져눕기라도 하면 다른 일방은 아무 꺼리낌없이 당연한듯이 떠날수 있는줄도 , 더구나 로인들의 결합은 재혼으로 봐주지도 않는 사실조차도 모르고계셨다. 하긴 자기 의사를 밝힐 자유도 없이 중매결혼을 하시고 리혼은 세상 수치스러운 일로 알고 살아온 엄마세대였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리혼한 녀자들은 용서못할 죄라도 지은듯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왔던 시대였던 탓에 엄마도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구박을 그렇게 받으면서도 찍소리 안하고 살아왔을것이고 그런 세월을 살았던 탓에 자식들은 “그냥 같이 살고”있는거라고 표현하는 로인네와의 생활을 만년의 재혼으로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오셨을것이였다. 그런 엄마인줄을 깜박 잊은채 무작정 뛰여온 내가 잘못이였다. 난 갑자기 머리가 서버린듯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안가려는 엄마를 억지로 끌고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렇게 두자니 만만치 않을 병구환에 엄마가 힘들것이 뻔해서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엄마를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길은 내내 무거웠다. 엄마는 끝까지 자기의 이름대신 자식들의 엄마로,누군가의 아내로만 살고싶었던것일가? 아무리해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지금 내겐 엄마의 이름을 찾아드리는것보다 엄마를 집으로 모셔오는것이 우선인데 엄마는 그걸 원하지 않으신다.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짙어가는 록음따라 내 걱정거리도 한결 커져만 간다. 5 방안은 금시 수라장이 되고말았다. 아무렇게나 뽑혀나온 책들은 뽑힌 맵시 그대로 방바닥에 널부러졌고 화장품통과 약상자도 뚜껑이 열린채 어지럽게 흩어졌다. 하지만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증발이라도 해버린듯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훑기 시작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있었다. 길에는 우산을 든 행인들이 급하게 오가고있었고 택시들이 흙물을 튕기며 신나서 빵빵 달리고있었다. 련며칠째 하늘은 비를 퍼붓고 있었다. 묘하게도 저녁무렵이면 비발이 약해지다가 밤이면 비가 긋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또 간간이 내리고 있기를 거듭하더니 오늘은 드디여 작정을 하고 제법 굵게 비발이 쏟아지고있었다. 가게안은 눅눅한 공기로 반소매아래로 내놓인 팔이 끈적거려왔고 비물에 한껏 불려진 뙤창문은 꼭 맞물리지 않아 약간 틈을 내보인채 허접하게 닫겨있었다. 그 틈새로 가끔 비물이 튕겨들어와 나는 얼른얼른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뙤창문이 똑똑하고 울린것은 그때였다. 비물때문에 얼룩진 뙤창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민것은 아들애였다. “너?! 왜?” 아들애는 놀란 내 눈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혼자 있어도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도록 좁아터진 공간은 아들애가 들어서자 당금이라도 터져버릴듯이 꽉 차버렸다. 아들애는 비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보며 벌씬 웃었다. “엄마, 이걸 줄려구요.” 아들애가 쭈밋거리며 호주머니에서 꺼내서 내민것은 웬 종이장이였다. 종이장을 펼쳐보는 내 눈은 분명히 커졌을것이였다. 거기엔 각서라고 적혀있었다. --1.무슨 일이 있든 열심히 공부한다. --2.무슨 일이 있든 엄마와 이야기한다. 서명: 리민수 시간:2009년 5월 10일 각서의 공백부분엔 카네이션 몇송이와 하트가 그려져있었다. 그리고 웃고있는 아들애의 스티커사진도 한장 붙여져있었다. “웬 일이지? 이런것을 다 주고?” “아니, 뭐 그냥……” 아들애는 뒤더수기를 긁으며 애꿎은 바닥을 발끝으로 후비고있었다. “엄마, 절 ……안 욕해요?” 아들애는 힐끗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았다. “뭘? 이쁜 아들을 왜 욕하겠니?” 나는 서있는 아들애를 끄당겨 내 옆에 앉혀주었다. “엄마, 내 싸이홈피에 들어와서 댓글 남기신거 봤어요……깜짝 놀래서 며칠은 엄마 눈치만 봤어요……카테고리 비공개한다는게 깜박 잊고……” 아들애는 떠듬떠듬거리며 얼굴이 붉어지고있었다. 그제서야 난 민수의 싸이홈피에서 일기를 읽고 꾸중대신“이건 비공개해야 하는건데”하고 마음에도 없는 댓글을 선선히 남겨놓고 온 사실을 생각해냈다. 정말 그 댓글을 남길 때까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였다. 조기연애를 한다고 한바탕 혼을 내고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아들애또래의 심정과 감정을 알것 같았고 될수 있는 한 리해하려고 했다. 지금 나는 편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한결 차분한 마음이 되여가고있었다. “엄마는 민수를 욕하지 않아…… 네또래면 그럴수 있어. 여자친구도 사귈수 있고. 처음엔 섭섭했어…… 민수에게 엄마가 모르는 비밀이 이렇게 많나 하고. 후에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축하해줘야겠더라. 민수도 이젠 컸고 훌륭하니까 여자친구도 있는게 아니니?” “정말이예요?!” 아들애는 금시 얼굴빛이 밝아졌다. “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러니까 민수야,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아. 하지만 한가지만 명심해둬. 넌 아직 어리니까 여자친구를 사귀여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 된다는걸. 그리구 엄마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우리 아들 민수가 어느만큼 성숙하든지 늘 엄마와 마음속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걸. 그것뿐이야.” 난 열네살짜리 소년을 상대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어른을 마주하고있기라도 하듯 사뭇 진지했다. “엄마, 고마와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이 각서에 쓴것 꼭 지킬게요. 이게 어머니명절선물이니까요.” 아들애는 각서를 툭툭 치며 싱글거렸다. 나는 제법 어엿해진 아들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웃었다. 아들애가 지금처럼만 커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것 같았다. 아들애가 돌아가고도 한참동안이나 난 각서를 보며 실실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부랴부랴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뛰여왔던것이다. 그날 곧장 내가 앉은 자리의 테이블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는 그 녀인을 보는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턱아래로 보기좋게 늘어진 군살과 윤기도는 얼굴의 오관들보다 몸에 걸친 암록색밍크코트의 윤택이 자르르 흐르는 털들이 내 눈에 비쳐드는 순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의 리유를 알아버렸다. 며칠동안 왜 그 녀인을 만나 싱거운 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리유를 알수가 없어서 떨쳐버릴수 없는 끈끈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정작 알아버리고나니 웬지 씁쓸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어줍게 얼굴에 알릴듯 말듯 미소를 개여올리며 엉성스레 목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녀인은 알릴락말락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녀인의 눈길은 솜의 두께만큼이나 부풀어오른 내 솜옷에 잠간 머물렀다가 탁자우에 포개여놓은 메마른 내 손에 한참이나 머물러있었다.녀인의 얼굴에서는 알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서서히 피여오르고있었다. 그러는사이 내 눈길은 녀인의 귀볼에서 대롱거리는 귀걸이와 무명지를 꽉 조이고있는 보석반지와 명품핸드빽사이를 고루 오가고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여서 반가와요.” 조금 부푼듯한 펑퍼짐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녀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네?......네. 저두요.” 녀인은 약간 웨이브를 둔 짧게 커트한 머리를 귀걸이가 대롱거리는 귀밑으로 쓸어넘기고 통통 살이 오른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마른 딱딱한 손을 내밀어 잠간 잡았다가 손을 빼고 말았다. 통통한 녀인의 손은 싸늘했다. 손가락에 맞혀오던 보석반지의 차가움만큼이나.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것은 아닌데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우리도 해야 할것 같아서요.” 녀인은 핸드빽을 열어 종이장을 꺼내놓았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녀인이 말한 “우리”라는 단어에 난 어느만큼 동조하고있는지를 생각하고있었다. 그리고 녀인이 꺼내놓은 종이장에 이름을 적어야 할 내 악필을 근심하였다. “읽어보고 마음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말하세요. 근처에 타자사가 있으니까 금방 가서 고쳐오면 돼요. 근데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맘에 들거예요.” 종이장을 받아들며 내 머리는 녀인의 몸에 걸친 밍크코트를 만들려면 몇마리의 담비가 죽어야 할가는 생각으로 복잡해지고있었다. 나는 “계약서”라고 쓴 커다란 글자에만 눈길을 박은채 내가 처음 싸인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하기전 결혼수속을 하러 가니 결혼전재산공증을 하라고 하였다. 헌데 난 딱히 적을 재산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지 두해째였고 그 두해동안 난 내 월급을 세방살이하는데 꼬박꼬박 탕진하고있었고 가난한 친정집에는 아들맞잡이인 맏딸이 시집을 간대도 쥐여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공증서에 외삼촌이 결혼하면 사준다던 세탁기를 머밋거리며 적었고 남편은 집이며 텔레비죤이며 랭장고며 부모님들이 장만해준것을 제것인듯 스스럼없이 적었다. 그렇게 난 세탁기 한대라는 글씨와 함께 내 이름을 꼬질꼬질하게 싸인을 했었다. 난 그 공증서를 무심코 아무곳에나 쑤셔넣었고 기억력탓이기라도 하듯 지금껏 한번도 어디에 있을가고 생각해본적도 찾아본적도 없었다. 15년전에 행했던 싸인의식을 나는 지금 웬 낯모를 녀인과 낯익은듯이 만나 내가 아닌 엄마를 위해서 치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다 읽으셨어요?” “네.” 난 서둘러“계약서”라는 글자에서 눈길을 떼여 “갑방”과 “을방”이라고 쓴 서명란으로 옮겼다. 며칠전 받은 전화에서 계약서의 내용을 대충 들었고 그 내용들을 종이장에 옮겼음을것이니 굳이 확인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생각이……” “아니…… 싸인을 하죠.” 나는 서둘러 멜가방에서 수성펜을 꺼내 종이장에 이름을 적었다. 멋있는 흘림체는 아니여도 정자체로라도 반듯하게 쓸려고 노력을 하며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적었다. “다들 이렇게 한대요. 별로 부담될것은 없어요.” 녀인은 내가 넘겨준 종이장에 자기의 이름을 적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계약서를 작성하는것이 자기들쪽의 의사가 아니라 남들따라 해야만 하는 절차이기때문이기라도 하듯 아까부터 녀인은 “다들 이렇게 한대요.”하는 말을 곱씹고있었다. “또 만나요.” 체면있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녀인의 뒤모습을 일별한채 또 만날 일이 뭐가 있을가고 싱거운 궁리를 하고있었다. 그 계약서를 찾아내야 했다. 그 녀인과 헤여져 돌아와서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처박았을 계약서를 찾아내야 했다. 그러면 어쩜 엄마를 데려올수 있는 리유를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책갈피들도 한장씩 펼쳐보고 옷장안에도 깊숙이 손을 넣어보고 화장품이며 약들도 쏟아내며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었을가? 내가 읽은 책만큼이나 얄팍한 기억력은 도무지 기억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계약서를 둔 곳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눈길은 이제 초점없이 허위허위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보기만 한다. 어디가 숨겨둘만한 곳이지? 6 며칠후 난 허구프게 혼자서 후훗~ 웃어버리고말았다. 계약서는 말도 안되게 내 멜가방속에 들어있었다. 녀인과 계약서에 싸인하고 오던 날 남편은 느닷없이 선물이라며 가방을 내밀었고 계약서가 들어있던 멜가방은 돈지갑이며 디스켓이며가 새 가방으로 옮겨지고 계약서만 남은채 그대로 방치되고말았던것이다. 그 가방이 세일품이였다는것은 터진 실밥을 보고 금방 알게 되였지만 나는 내색을 내지 않고 이제껏 쓰고있었고 그 가방을 볼 때마다 간간이 위안을 느끼고있었다. 세일품의 할인된 가격대쯤으로라도 내가 남편의 마음속에 남아있을거라는 생각때문이였다. 원체 활동적인 성격이여서 늘 밖에서 나돌고 술을 밥먹듯이 거르지 않지만 꼬박꼬박 출근은 하고 다른 녀자들한테도 눈길을 파는 법은 없는 남편이였다. 어쩜 무뚝뚝하고 페쇄적인 내가 아닌 엔간히 애교가 있는 녀자라면 별 탈없이 살아갈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니 해본것도 아니였다. 문제는 남편쪽이 아니라 내 쪽에 있을거라는 생각도 슬금슬금 들었었다. 나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남자라면 쉽게 마음을 줄수 없을것 같았고 그렇게 싫은듯 안싫은듯 생김새까지 닮아가며 엄마처럼 살아갔을것이였다. 어쩜 난 결혼증때문에 남편과 살고있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난 항상 몸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그 울타리밖에서 겉돌고있는지도 몰랐다. 난 이미 내가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보이지 않는 속박때문에 스스로 지쳐가고있었고 그 와중에 터진 엄마문제는 내 가슴을 억누르는 또 하나의 짐이였다. 그 짐을 부릴 열쇠가 계약서가 되여주길 난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나는 계약서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계약서에는 로인 쌍방이 결혼등기를 하지 않는다,둘이 함께 생활하기전의 재산은 각자의 재산으로 한다는것과 같은 중요한 내용들과 더불어 명절이나 생신에 어떻게 할것인가하는 자잘한 내용까지도 곁들여 두 로인이 결합한후 일어날수 있는 일의 모든 가능성을 포괄한 시비거리 처리방식들을 명확하게 분별하여 적어놓고있었다. 당연히 내가 찾으려는 조목도 있었다. “두 로인중 일방이 중병에 걸려 들어눕거나 사망할 경우 다른 일방은 아무 책임이 없으며 자기 자녀의 집으로 돌아간다.” 계약서의 조목들을 두루 살펴보면 실은 엄마에게 유리한것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에겐 재산이래야 시골에 있는 낡은 벽돌집 한채뿐이니 로인의 난방시설이 구전한 아빠트와 견줄수도 없었고 엄마는 로인처럼 퇴직금이 있는것도 아니였다. 어쩜 모든것을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엄마가 혹시라도 리익을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제한하려고 만든 조목들 같았다. 내가 지금 찾아낸 조목 역시 엄마가 앓아누웠을 경우라면 내가 아마도 그날로 엄마를 데려와야 한다는 소리같았다. 하지만 어느것하나 사리에 어긋나는것은 아니였다. 각자 자녀의 생활이나 각자의 재산이나 하는것들은 일체 관심을 끊고 두 로인이 함께 생활하는데만 전념하라는 뜻이였다. 녀인의 말마따나 “다들 그렇게 한다”니까 누가 선코를 떼였는지는 몰라도 세상은 벌써 그렇게 돌아간지가 한참은 되였던것이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녀인에게 전화를 넣었다. 전화발송음악이 울리는 동안 난 무슨 말을 할가고 궁리를 하며 미간을 찌프리고있었다. “여보세요~” 녀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물기 한점없이 건조했다. “저……울 엄마 딸인데요……” 나는 갑작스레 당황해졌다. 날 누구라도 설명해야 할지 일순 멍해지고말았던것이다. “네?......아~ 알만합니다.” 녀인은 정말 아는지 아는척을 했다. 그제야 전화번호를 저장했으면 알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녀인이 날 무슨 호칭으로 전화번호를 저장했을지 궁금했다. 녀인의 전화번호는 “담비가죽”이라는 호칭으로 내 전화에 저장되여있었다. “저……울 엄마 말입니다……집에 와도 되잖을가요?......계약서에, 계약서에 와도 된다고……와도 된다고 있는데……그러니까 그 집 시아버님이 아프니까……울 엄마는……” 나는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이마에서 진땀이 빠질빠질 돋고있었다. 그만큼 나는 누군가와 무엇을 따지는데 서툴렀다. 여태 따져본적이 없고 소리소리 지르며 싸워본적이 없는 나였다. “아, 네에. 그래야죠. 전 그쪽에서 여태 아무 소리 없으니까 딱히 갈데가 없어서 있는줄로 알았죠.” 녀인의 목소리는 당금이라도 부서질듯이 건조했지만 거침이 없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엄마가 숨기셔서… …금방 알았거든요. 시아버님이 아프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엄마가 안오시겠다고 하셔서……” “아줌마가 안가시겠대요? 저두 그런 줄은 몰랐는데요.” 녀인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묻어나고있었다. “그러니까 제 엄마보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해주겠어요? 그럼 올지도 모르는데……” “딸의 말을 안듣는데 제 말을 들을리가요? ……저 그럼 이렇게 하는것은 어떨가요? 아줌마를 그냥 계시게 하고 저희가 월급을 지불하죠. 한달에 천원씩요. 병간호비 다들 그렇게 하시잖아요?” “네? 뭘 어떻게요?” 난 일순간 어정쩡해지고말았다. 엄마를 집으로 돌려보내라는데 월급이라니? 병간호라니? “저희가 보모를 구하는 셈치고 한달에 천원씩 드리겠다고요. 그냥 시아버님댁에 계시라구요.” “아니, 그건……” 그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예상치 못한 제의에 눈만 껌벅거리고말았다. 저녁에 난 엄마한테 계약서를 보여드렸다. 계약서를 읽어내려가는 엄마의 눈길이 흔들리고있었다. 한참후 . “그래 이게 ……우리 둘의 결혼증과 같은거니? …… 너희들이 우리 몰래 이런것을 썼니?” 엄마는 한글자 한글자 힘들게 뱉어냈다. “결혼증은 무슨? 피차 서로 껄끄러운 시비가 없자고 하는 일이지.” 나는 눈을 내리깐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엄마, 그러니까 이제 갑시다. 집에.” “내가 안간다면? 이 종이장 들고 법에 고소라도 해서 끌어갈 참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집식구들은 엄말 간병인 취급을 한다고요. 엄만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엄만 파출부노릇을 했다구요.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간병인노릇까지 해요? 엄마에게 돈을 주겠대요. 월급으로 한달에 천원씩. 이래도 있을텐가요?” “이 집 며느리가 그러던?...... 원래부터 드문드문 찬바람같이 달려와선 백원짜리 지페 몇장씩 쥐여주고 가는것을 적선이라도 하는 양으로 알길래…… 참 모색한 여자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할줄은 몰랐는데…… 사람은 돈으로 사는게 아니다. 더구나 부부는. 그 돈 받든지 안받든지는 니 맘대로 하고 . 암튼 난 여기 있을란다…… 선영이에겐 알리지 말거라.”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단단함이 비껴있었다. 아버지와 사실적에 항상 참아주기만 하던 질리도록 보아왔던 가녀린 얼굴이 아니였다. 하지만 엄마는 모르고계셨다. 옛적에 보아오던 착하기만 하던 얼굴이나 지금 보여주는 조금은 고집스러워보이는 얼굴의 내면속에 부부라는 리유때문에 혼인은 깰수 없다는 엄마의 생각은 조금도 변한적이 없다는것을. 엄마는 여전히 엄마였다. 뭐든지 혼자서 숙명처럼 알고 지켜가는 엄마였다. 
7    지렁이 댓글:  조회:1759  추천:1  2011-09-30
지렁이   김영해   “아부지, 돈 좀 줍소.” “뭘 하려구?” “농촌 가겠스꾸마.” “거긴 어째 가겠냐? ” “거기 가서 집 지켜야지. 철호에미 오믄 여기 집 찾지 못함 어찌겠슴둥? 기다렸다가 데리구 와야지. 전번에두 기다려서 데리구 오잔데…” “안온다, 이젠. 못온다.  생각두 말어라.” “그럼 화분통 사게 돈 줍소.” “화분통은 해서 뭐하겐?” “흙을 담지므” “흙을 담아서 머하니? 그걸 밥처럼 먹게? 꽃두 안심으면서.” “이씨, 안주겠으면 그만둡소!” 방문이 쾅 하고 열렸다가 닫긴다.     요놈들은 뭘 하고 있을가? 깜깜한 속에서 갑갑하지도 않을가? 아까부터 지켜보고 서있는데도 전혀 기척이 없다. 손가락으로 흙을 살살 뚜졌다.아무 것도 없다. 손가락으로 설핏한 흙을 헤집으며 더 뚜졌다. 보인다. 불그스레한 꼬리가 보인다. 후훗~ 실은 저것이 꼬리인지 대가리인지 모르겠다.하지만 꼬리라고 해두자. 미물이라도 머리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난 불편하니까. 꼬리를 검지와 식지로 집어 살그머니 잡아당겼다. 쪼오옥 늘어난다. 재밌는 녀석. 꼬리를 놓아주니 다시 흙 속으로 쏘오옥 기여들어간다. 놈은 흙속이 좋은가보다.듣지도 보지도못한다니까 그 럴수도 있을거다.어쩜 나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야 들을수도 있고 볼수도 있지 만 대개 내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상황이다. 화분통 살 돈도 안주는 아버지말은 아무리 들어야 들을게 없고 문밖에는 나가기도 싫으니까 인간의 소리자체가 듣기싫은 것이다. 집안에서 볼거라고는 텔레비죤밖에 없는데 그것도 전탕 여자남자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것이여서 눈만 어지럽지 볼 멋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보지도 듣지도 않 는 지렁이다. 후훗~ 웃기는 말이다. 아참, 나도 요놈들처럼 꽁꽁 숨어버릴가?     “어휴~ 이건 또 뭐야?” 김령감은 투덜거리며 문에 붙은 종이쪼박을 쫙 찢어냈다. 전기료금명세서였다. “오늘은 또 돈이 얼마나 나가야 하나?” 김령감은 궁시렁거리며 종이쪼박을 손에 든채 한손으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삐이익~” 열쇠가 돌아가는가 싶더니 문이 덜컹 열렸다. 집안은 인적기 하나 없다. 김령감은 서둘러 신발을 벗었다.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었다. “이눔아, 뭐하냐?” 김령감은 저도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다. 아들녀석이 이불을 꽁꽁 눌러쓰고 있었다. 급히 이불을 제끼고 보니 눈이 머룽해서 김령감을 쳐다본다. “이씨, 지렁이 되는 연습을 하는데!” 아들녀석은 이불을 와락 걷고 일어나더니 흙만 담은 꽃밥통에 장승같이 마주선다. “어휴~” 김령감은 한숨을 풀풀거리며 제 방으로 건너와 돋보기를 꺼내들고 전기료금명세서를 들여다보았다. 89원으로 나와있었다. 도시로 올라오고보니 돈들데가 한군데가 아니였다. 뭐든지 다 돈이 들어야 했다.뜨뜻한 온돌도 없는 세집도 한달에 세값을400원씩이나 내야 했고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나오던 물도 물방울만 떨어졌다 하면 돈을 내야 했고 위생국이라는데서는 아무것도 하는것이 없으면서도 위생비를 받아갔다. 받기만 하는 전화도 한달에20원씩 꼬박꼬박 내야 한다. 그렇다고 전화마저 입 다물게 할수는 없는 일이다. 김령감은 옷을 벗고 침대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예전에 농촌에서 살던 때의 일들이 필림처럼 엇갈아 어른거렸다. 로친네얼굴이며 철호에미얼굴이 눈앞에 삼삼한데 자꾸 희미해진다. 김령감은 애써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회의를 한댔다. 휑뎅그레한 교실에 김령감밖에 없었다.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누구의 그림자인가 앞을 가린다.  “철호할아버지,철호는 어쩌겠어요?” 40대초반의 녀교원이 김령감을 쳐다보며 주근깨가 다문다문 박힌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뭘 어쩐다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수 없어 물어보려는데 혀가 뻣뻣해지며 말을 안듣는다. 김령감은 안타까이 입만 열었다 다물었다 하였다. “다른 애들은 다 시내로 가는데……”  “글쎄……” 김령감은 대중없이 더수더기만 북북 긁는데  “아부지, 아부지”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만치서 봉호가 보인다. 엉금엉금 기여서 김령감쪽으로 다가온다. “아부지, 날 좀 죽여줍소.” 봉호가 남산만한 배를 붙들고 애원한다. “얌마, 어째 자꾸 죽을 소리만 하냐?” 봉호녀석한테 떽하고 소리를 치는데 소리가 목구멍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목구멍이 졸리기라도 한듯 답답하다. “나를 봅소. 이게 다 오줌이 들어차서 이렇다꾸마. 이래가지구 어찌 삼둥?” 얼굴이 부석부석한 봉호가 자꾸 죽여달란다. 김령감은 그러는 봉호를 쳐다볼수가 없다. 교실인것 같았는데 자기 집 정주칸에 로친네가 벌써부터 “에고”를 부르며 돌아앉아 훌쩍거린다. 청승을 떠는 로친네한테 야단을 쳐야겠는데 ……가슴이 갑갑하다. 돌로 내리누르는것 같다. 어째 녀선생이고 봉호고 로친네고 다 한집에서 복새판인걸가? 자꾸 몸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뭐든지 해결을 봐야겠는데……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소리가 자지러진다. 그새 설핏 잠이 들었나보다. “와이? 누기요?” “어우, 내꾸마. 잘 있음둥?” 로친네다. 이게 얼마만인가? “어째 전화 그리 뜸하오? 얼마나 속을 태운다고.” “안그러믄 어찌겠음둥. 어쩌다가 큰 맘먹고 한국왔는데 석달만 있구 가겠음둥? 시국이 좋아서 무슨 고령동포라고 돈 적게 들이고 왔을 때 오래 있어야지. 내 지금 들어가면 언제 다시 나오겠다구. 이제는 불법이래서 전화도 맘대로 못치꾸마. 그래다가 덜커덕 잡히문 어찌자구.” “그래 일은 어떻소? 할만하우? 또 어디 아프지는 않소?” 김령감은 약골인 로친네가 걱정이다. “괜찮스꾸마. 일자리 바꿨으꾸마. 써료펑즈안에서 무우 자르던 일은 끝이 나서 려관에서 일하는데 청소만 함 되꾸마. 여기 려관은 낮에두 뭐하는지 둬시간씩 있구 나가는 손님이 많아서 놀새 없어서 그렇지 맥은 덜 드꾸마.” “그래두 아픔 약이랑 사먹으며 일하우. ” “내사 무슨. 철호랑 봉수는 어떻슴둥?” “철호는 시내학교 잘 다니우. 공부두 잘하구. 철호 원래 다니던 농촌학교는 아이들이 한 여라문명 되는게 당금 마사질게요. 철호도 시내학교 오길 잘했소. 봉수는 제 보낸 약을 먹구 나아지는 모양이요. 이전보다 말두 잘하구 때시걱이랑두 어물쩍하게 하오. 여기서는 그럭저럭 살만하오. 일두 안하지, 불 땔 일두 없지 농촌보다 썩 편하우. 나가서 버는 당신이 고생이요.” “어우, 그래야지. 다 그거 둘 바라보구 사는데. 우리야 언제 무슨 락을 보겠음둥. 가네 둘이 잘 됨 되지. 울 둘째 봉호가 뇨독증으로 약두 변변히 못쓰구 죽은걸 생각하믄 내 살아있다는게 용하꾸마. 죽기전에 자네 둘을 춰세워야 하는데……” 로친네의 목소리는 어느새 물기가 축축하다. 손님방청소가 끝난 여가에 전화하는거라며 오래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금방 전화를 끝는다.     전화를 끊고나서 김령감은 이리 궁싯 저리 궁싯 거리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 반이다. 배가 출출해났다. 그제야 점심을 안먹은 생각이 났다. 입질이라도 할가고 방문을 열고 나오니 위생실에 불이 훤히 켜져있다. “ 이 녀석이 또 불을 켜고 나왔나?” 탁하고 스위치를 꺼버렸다. “아부지~” “어?” 짜증섞인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아들녀석이 괴춤을 올리며 걸어나온다. 보나마나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 모양이다. 안그러면 저 장승같은 녀석이 안에 있는줄을 모를리가 없다. “너 또 앉아서 눴지? 그럴거면 콱 떼여버려라.” “이씨, 그런데는 어째?” 아들녀석은 씽하니 주방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김령감은 맥없이 쏘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속이 하얗다. 담배피울 참이라도 됐을가? 주방에서 떨꺽거리는 소리가 난다. “뭘 하니?” 김령감은 주방문을 열고 머리를 기웃거렸다. “보면 모름둥?” 아들녀석은 감자를 썩썩 썰면서 머리도 안돌린채 데퉁스럽게 주어던진다. “그게 니가 할 일이냐? 그걸 떼여버려라. 떼여버려. 공연히 그걸 달아줬지. 니가 없음 이 애비가 밥을 못먹고 사냐?” 김령감은 공연히 아들녀석을 시까스르고 꼴도 보기 싫다는듯 문을 확 닫아버렸다. 신발을 꿰여신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고 나왔다.     몹쓸년, 내가 기다리는줄도 모르고 여태 안와? 하긴 니년도 별수가 없을테지. 에이, 다 그 나쁜놈들때문이지. 뭐가 죄가 된다고 제 남정 만나 애낳고 잘 사는 철호에미를 억지로 붙잡아서 조선으로 돌려보내는가말이다. 그게 철호에미 조국이면 어쩌겠는가. 당장 굶어죽을 판에 강을 건너와서 날 만나 잘 사는데 그렇게 떼여놓으면 에미없는 애새끼는 어쩌겠는가? 어휴, 철호에미도 어디서 철호생각에 눈굽을 찍고 있는지 몰라. 또 눈물이 흐르려 한다. 철호에미생각만 하면 난 눈물이 난다. 철호에미 가고나서 자꾸 눈물을 흘렸더니 다들 쉬쉬거리는줄 나도 안다. 내가 울고파서 우나?  바둥거리며 어미 찾는 녀석을 보면 가슴이 미여지는걸 어떡해? 지들이 그 처지가 되여보라지. 눈물이 아니라 피가 쏟지 않나. 니깟놈들이 자꾸 날 손가락질하며 쑥덕거리니까 난 니들이 싫다는거여. 그래서 니들 보는척도 않고 먼산 쳐다보고 니들이 웃는 모습만 봐도 역겨워서 침을 칵 뱉어주고 니들이 내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눈을 부라리는거여. 그럼 왜 전등은 밤새도록 켜고있고 낮이면 강가에 나가 있느냐고? 철호에미 혹시 강을 건너오지나 않을가 그러고있다. 씨팔, 날 정신병자 취급하면 죽을줄 알어. 이 감자처럼 썩썩 썰어서 … … 화가 나려 한다. 에익, 이럴 땐 일도 안된다. 밥이고 뭐고 모르겠다. 화분통이나 볼가? 아참, 그새 저놈들이 새끼치기 한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바이~” 교문에 이르니 기다리고있었다는듯 철호가 반갑게 뛰여온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아바이, 선생님이 래일 올 때 호구부 가져오람다.” 김령감은 꿈틀 놀랐다. “그건 어째서?” “모름다. 내보구만 가져오람다.” “후~” 저도모르게 김령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호구부엔 철호의 호적이 없다. 엄마가 도강을 해온 북조선여자여서 결혼증이며 생육허가증, 출생증 등 일련의 줄줄이 이어진 증을 발급받지 못한 탓으로 철호는 호적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농촌에서 학교에 붙일 때는 다 아는 처지여서 별말이 없었는데 시내로 오니 전학 할 때부터 호구부를 찾았다. 접때도 두루 거짓말을 하고 전학수속을 마쳤는데 오늘 또 호구부를 가져오란다. 이제 또 선생님앞에 가서 뭐라고 둘러붙인단말인가. 오늘따라 철호호적문제에 로친네생각까지 겹치니 마음이 무거워났다. 생각같아서는 어디 가서 밤경비서는 일이라도 해서 로친네고생을 덜어주고싶지만 어디 나가 일할수도 없었다. 아들녀석이 평소에는 멀쩡하니 가만있다가도 문득문득 정신이 들 때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한시도 맘 편할새가 없었다. 농촌에 있을 때도 몇달씩 두문불출하고 있다가도 어느날엔가 갑자기 욱하고 뛰쳐나가서는 며칠씩 보이지도 않는가 하면 한두번은 약을 주어먹은적도 있었다. 제 말로는 철호에미 찾으러 나간다고 하기도 하고 머리가 아파서 약을 먹었다기도 하지만 사람맘을 여사로 졸이게 하는게 아니였다. 요즘 들어서서는 맨날 흙을 담은 화분통만 쳐다보고 있어서 심상치가 않다. 그걸 바라보고있다싶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꿈쩍하지 않고 김령감이 화분통에 가까기 다가가기라도 하면 눈에 독기를 올리고 경계하는 눈치다. 아까는 난데없이 무슨 지렁이가 된다고 이불까지 뒤집어썼잖은가. 김령감은 아들녀석이 걱정되여서 철호의 손을 잡아끌며 발걸음을 재우쳤다.     요놈들이 그거 뭐 수정이란걸 했나 안했나? 맨날 흙속에만 있으니 내가 알수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이렇게 덩치가 크다맣게 눈앞에 드러나있는데도 아버진 눈을 부릅뜨고 살피는데 니들은 저렇게 꽁꽁 숨어있으니 무슨 짓을 한들 내가 알턱이 있나?  아버진 아마 내가 죽기라도 할가봐 겁이 나는 모양이다. 나야 봉호처럼 뇨독증에 걸릴 일도 없는데 왜 죽겠는가. 불쌍한 봉호녀석, 나처럼500원짜리 장가라도 가보지 그래. 제가 무슨 두더진줄 알고 맨날 석탄을 캔다고 가무잡잡해서 탄광일을 하더니만 끝내 볕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갔지 뭔가. 광부가 되는게  월급쟁이인줄이나 알고 극성스럽더니만 결국 그렇게 되고말았잖은가. 촌놈이 뛰여봤자 벼룩이지 별수 있나. 월급쟁이는 아무나 되나? 북조선여자라도 얻어 살라니깐 내 꼴 따라 안한다고 아버지에게 박박 대들더니만 새끼하나 못남기고 저세상에 간게 아닌가. 어휴~불쌍한 자식. 아참, 이 놈이 또 꼼틀거리는 모양이다. 흙이 꼼실꼼실하는걸 보니까. 이번에 시내로 이사할 때 우연히 찾아냈던 생물교과서를 읽으면서 난 요놈에게 흥취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아버지눈을 피해가면서 며칠을 역사질해서 겨우 요놈들을 구해왔다. 거기엔 요렇게 적혀져있었다. “지렁이는 같은 개체에 암컷과 수컷의 생식기관이 함께 존재하는 자웅동체 생물이다. 그러나 한 개체의 알은 다른 개체의 정자에 의해 수정된다. 교배 동안에2마리의 지 렁이는 끈적한 점액질에 의해 서로 묶여서 정자를 교환한다음 떨어져서 고치를 형성 한다. 고치는 다른 지렁이에서 온 정자와 자기 체절속의 알을 집어 수정을 한다……” 재밌지 않은가? 한몸에 암컷의 생식기도 있고 수컷의 생식기도 있다 한다. 고급말로 무슨 자웅동체라고 한단다. 그러니 전 세계 지렁이는 똑같은 성별이란 얘기다. 남자 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암튼 후대번식을 위해 따로 수컷이거나 암컷 이 필요없이 그저 지렁이 두마리만 있으면 수정을 할수 있으니까. 그놈들이 참 부럽 다. 나도 지렁이가 되여볼 참이다. 그래서 오줌도 쭈그리고 누고 밥도 하고 그러는데 뭐가 못마땅한지 아버지는 따라다니며 떼여버리라고 성화다. 지렁이도 할수 있는 일 을 나라고 못할가. 아버지가 철호를 데리고 올 시간도 거의 된다. 그새 뭘 할가? 지렁이나 한번 되여볼가? 재미있는 일일것 같다.     “아바이, 무슨 냄샘까?” 김령감이 열쇠를 뽑는 사이 먼저 집에 들어선 철호가 코를 틀어막고 상을 찌그린다. “응?” 김령감은 서둘러 열쇠를 뽑고 코를 킁킁거렸다. 어데서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고있었 다. 김령감은 공연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른 주방문을 열었다. 밥가마에서 더운 김 이 모락모락 피여오르고있었다. 주방에 있어야 할 아들녀석이 없었다. 아들녀석의 방문을 열었다. “야?!” 김령감은 가슴속에서 쿵 하고 널판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손발이 와들와들 떨렸다. 입술이 파랗게 질리며 말도 안나간다. 그 와중에도 철호가 못들 어오게 밀막으며 방문을 닫았다. “너, 너~ 정말 그걸 떼여버려?” 아들녀석이 창턱에 기대여 쓰러져있었다. 피묻은 손에 까진 연장이 쥐여져있고 식칼 이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다.  바지가 벗겨진 두다리새로 피가 흘러 질펀히 바닥을 적 시고 있었다. 떨어진 화분통에서 지렁이 두마리가 기여나와 피속에서 그물그물 기여 다니며 방바닥에 벌겋게 줄을 쭉쭉 긋는다. 거기에 퀭하니 눈길이 꽂힌 아들녀석은 얼굴이 해쓱해서 웃는지 마는지 상통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저 녀석이 정말 제것을 떼여 화분통에 심을려고 하기라도 했단말인가? 김령감은 온 몸의 힘이 쑥 빠지며 스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 
6    댓글:  조회:1926  추천:1  2011-09-23
 숨 김영해 “호흡곤난을 느끼셨다구요?” 시릴것같은 흰도자기같은 매끄러운 얼굴을 한 녀자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얼굴과 달리 녀자의 눈길은 부드러웠다. 나는 녀자의 눈길을 피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병원대신 절 찾은 이유는요?” 차분차분 귀가에 달라붙는 그녀의 물음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은 대답을 하고싶어진다는것이 이상한 일이였다. “흰 가운이 싫어서요.” 나의 눈길은 녀자의 핑크색 가디건에 꽂혀있었다. “무조건 흰색이 싫으세요?” 녀자는 빨간 펜으로 하늘색차트우에 뭔가를 적고있었다. “아뇨. 흰 가운이 싫을뿐이예요. 호흡곤난을 느끼는것은 제가 숨을 쉬기 싫은것때문이구요. 아프지는 않아요.” “네에~” 녀자의 입가에 얄포롬히 웃음이 번지고있었다. “숨을 쉬기 싫어진것이 언제부터였죠?” 녀자는 그윽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고 난 그 눈길속에서 숨통이 꽉 막혀오던 순간을 떠올리고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날 점심 사무실에는 나와 그녀만 남게 되였다. 그녀는 전날 술을 마신탓에 위가 쓰려서 점심을 안먹는거라고 했고 나는 오후까지 마무리해야 할 자료가 잘 되지 않아서 도시락을 시켜먹고 컴퓨터에 매달려있었다. 마침 추위가 한풀 꺾이고 막 봄으로 치닫고 있는 2월인지라 먼지가 앉아 부연 창문으로 겨울해볕이 따스하게 비쳐들고있었고 스팀에서는 열기가 화끈거려 사무실안은 훈훈하다못해 덥기까지 하였다. 나는 잠간 키보드를 두드리다말고 식곤증이 몰려와서 사무상에 머리를 박고 눈을 붙였다. 전신이 노긋노긋해지며 막 잠속에 빠지려할 때였다. “드르릉~” 난데없는 경운기발동이 걸리는듯한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손님접대용쏘파에 몸을 늘어뜨리고 자고있는 그녀가 눈에 잡혀들어왔다. 머리에는 책더미를 고이고 쏘파등걸이에 다리를 걸친 그녀의 잠자는 자세는 극히 자유로와보였고 그럼에도 뭐가 불편한지 그녀의 조각같은 고운 코로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오고있었다. 상큼하게 이쁜 녀자와 코골이, 어찌해도 련결될수 없는 자칫하면 틀리게 사용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단어조합이였다. “쌕쌕”도 아니고 “가릉가릉”도 아닌 “드르릉”이라고 형용할수밖에 없는 그녀의 코골이는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고있었다. 허참, 무슨 여자가 코를 요란하게 고냐? 하긴 엊저녁에 술을 취토록 마셨다니까…… 혼자말로 중얼거리다말고 난 급기야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사무실에 머물렀거나 다녀간 갖가지 사람들이 흘렸을 각각의 샴프냄새와 비누냄새며 화장품냄새, 누군가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고 남은 커피냄새와 담배냄새며 내가 금방 먹은 도시락음식냄새, 그리고 그녀의 입속에서 풍겨나오는 숙취의 특유의 냄새들이 섞인 혼잡한 공기에 냄새식별에 약한 코가 괜스레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있었다. 다음순간 느닷없이 구정물을 뒤집어쓴듯한 불쾌감과 불결함이 쫙 몸속으로 흩어지며 솜털이 오소소 일어서는듯한 느낌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숨을 쉬기가 왜 이렇게 께름직하지? 하는 생각에 이어서 사무실에 있는 공기가 그녀의 코를 거쳐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배출되여서는 사무실이라는 공간에 흩어지고 그것이 다시 내 코를 거쳐 내 몸속으로 들어올것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남의 몸에 들어갔던것이 내 몸에 들어온다—생각만 해도 불결했다. 숨을 쉴 때마다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배웠지만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분자조합이 다르다고 해서 그 공기가 그 공기가 아니라고 할수는 없을것이였다. 화학적으로 성분이 어떻든 내가 마시는 공기는 그녀가 뱉어낸것이였고 그녀가 마시는것은 내가 뱉어낸것이였다. 께름직한 느낌 하나때문에 지식적인 인식이나 리해따윈 필요치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있는 공간에 숨을 쉬는 다른 누가 있다는 사실이 싫어졌다. 나는 코를 틀어막은 손바닥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그리고 숨을 딱 멈추었다. 1초, 2 초, 3초…….9초…… 눈알이 튀여나올것 같았다. 11초, 12초, 13초…… 혀바닥이 바짝바짝 마르며 혀뿌리가 목구멍으로 끌려들어가고있었다. 후우~ 겨우 20초를 참고 나는 손을 떼고 말았다. 그러자 조잡한 냄새들이 푹 배인 공기가 거침없이 내 코로 흘러들었다. 우욱~ 토악질이 날려고 했다. 나는 급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버렸다. 아무도 없었다. 길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며 가슴이 시원해났다. 하지만 난 그것이 누구도 없다는 사실때문임을 알고있었다. 암튼 난 그날부터 숨을 쉬기가 싫어졌다. 혼자가 아닌 다른 누가 있는 공간에서말이다. 그것이 꼭 반년전의 일이였고 난 반년동안을 래일은 숨쉬기가 괜찮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매일을 살았지만 래일이 오늘로 될 때에는 여전히 숨을 쉬기가 싫었다. 결국 난 오늘 핑크색 가디건을 걸치고있는 이 녀자를 만나보기로 했던것이다. “지금도 숨을 쉬기 싫으세요?” 녀자는 주의깊게 내 표정을 살피고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던 공기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세요?” 녀자는 내 얼굴에서 답안을 찾고있었다. “불결해요. 남이 께작께작 씹었던 음식을 다시 먹는것처럼.” 나는 약간 얼굴을 찌프렸다. “혹시……혹시 그날 한 사무실에 있었던 그녀가 싫었던것은 아닐가요?” 그녀라? 대학교후배였던 그녀가 별로 싫은적은 없었던것 같았다. 그냥 어느날에부턴가 웃는 모습이 별로 탐탁치가 않을뿐이였다. 그녀와 웃음 1년전이였다. 예나다름없이 늦장을 부리는 애를 닥달하여 유치원에 데려가고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니 다들 웅성거리고있었다. “고급직함평의를 한대요. 이번엔 명액이 셋이라면서요.” “그렇다니까. 지금 각 과의 과장들과 국의 령도들이 회의을 한대잖아. 그 문제로.” “늘 그랬듯이 년령순으로 하는거겠지. 저절로 자기 나의 따져보면 누가 될지 짐작이 가잖아?” “안그럴지도 모르죠. 맨날 기구개혁을 한다는데 그것도 개혁이 되여야지 않겠어요? 년초에 직원회의를 하면서 올해부턴 모든것을 업무능력순으로 한다고 국의 결정을 발표했잖아요.” “글쎄, 말이 그렇지 정말 그대로 되겠어? 더구나 직함평의는 로임과 관계되는 민감한 문젠데. 까딱 잘못하면 민심 잃기 일쑤거든.”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져도 아무래도 난 아닐거니까 신경쓸 일도 없네 뭐.” 별로 따져보지 않아도 대화의 요점은 우리 단위에 고급직함평의명액이 떨어졌다는것과 그 명액을 누가 가지는가 하는것이 초점임을 알수가 있었다. 업무능력이면 몰라도 나이를 따지면 아직은 내 차례가 아닌것 같아 나 역시 이 사람 저 사람 둘러보다 말고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사민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자인데 노력 좀 해보지 그래?” 이미 고급직함을 갖고있는 나이 지긋한 동료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였다. “제가요? 아직은 멀었어요. 선배님들에 비하면.” 살짝 미소를 보이면서도 머리속으로 빠르게 수판알을 튕겼다. 학력도 대학본과에 연구생함수공부도 했고 15년동안 사업을 하면서 받은 증서도 꽤 많다. 환경보호국이라는 좀은 남다른 일터때문에 한창 친환경이다, 록색환경이다 하고 부르짖는 시점에서 시대템포에만 잘 맞추면 연구과제를 잡고 연구성과를 내는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였다. 학교때부터 글을 쓴다고 끄적거렸던 탓에 경험총화나 론문작성도 나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한창 뭔가 하고싶은 나이여서 이런 저런 활동에도 많이 참여했고 성과도 어지간히 이루고있는 상태였다. 밀리는것은 나이뿐이였다. 견줘봐도 되겠다는 생각에 공연히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애꿎은 책갈피만 부지런히 펼쳐대고있는데 문이 열렸고 문이 열리면서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화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싱싱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에 그냥 봐도 담배냄새가 꽉 배여있을것 같이 답답한 얼굴을 한 과장이 코등에 걸린 안경테를 추슬러올리며 얼굴에 묘한 웃음을 담고 따라들어왔다. “자~주목! 과장님이 중대한 발표를 하신대요~” 그녀는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주의를 끌었다. 그것이 굳이 그녀가 할 일은 아니였는데말이다.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고급직함평의명액이 내려왔어요. 세명인데 토론을 거쳐 우리 업무과에 한명을 돌리기로 했고 이번엔 그동안의 업무성적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제일 높은 점수를 가진 사람으로 정하기로 했어요. 년초에 직원회의때 모든걸 업무능력순으로 한다고 공포했었죠? 그걸 집행하는겁니다. 이제 실력을 겨루는 세상인줄 알죠? 국영단위지만 우리 국에서도 앞으로 쭉 이렇게 갈거니까 다들 알아서 합시다. 이틀내로 그동안의 증서나 경험자료, 론문, 연구성과들을 정리해서 제출하도록 해요. 알았죠?” 과장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들을 공식적으로 빠르게 뱉어냈다. 다들 “뭐야?”하는 눈빛으로 과장을 바라보기만 할뿐 잠자코 있었다. “그럼 알아들은걸로 알고.” 과장은 몸을 돌려 나가다말고 “잘 준비해봐요. 이제껏 잘해왔으니까.”하며 옆에 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그녀는 과장을 향해 화려하게 웃었다. 뭐가 웃을 일이라고? 난 그녀의 웃음이 눈에 거슬렸다. 화려한 그녀의 웃음이 그 어떤 기분나쁜 뉘앙스를 풍긴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던것이다. 그녀가 웃는것이 싫다는 생각을 한것은 그날부터였다. 그후부터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면 나는 리유없이 화가 났고 공연히 심통이 뒤틀렸다. “그럼 그녀의 웃음이 싫을뿐이지 그녀가 싫은것은 아니라는 얘기죠?” 난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왜설가요?” 녀자는 빨간 펜으로 하늘색차트를 툭툭 두드리며 날 바라봤다. 답안을 찾고싶은 사람은 나인데 녀자는 되려 나한테 답안을 묻고있었다. 나는 코를 발름거렸다. 상큼한 말리꽃향이 코끝으로 흘러들고있었다. “……냄새……냄새가 싫어요.” 녀자는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내 입을 바라보고있을뿐이였다. 코 그리고 냄새 아참~ 난 슬그머니 벽쪽으로 돌아누웠다. “왜 등을 돌리구 그래?” 남편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자기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나는 목덜미에 빳빳이 힘을 주며 벽쪽을 고집하고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데?” 남편은 상반신을 일으키며 얼굴을 내 얼굴에 밀착시켜왔다. 우욱~ 나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발딱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건 또?!” 남편의 목소리엔 많이 화가 나있었다. “내가 그렇게 구토가 나도록 싫다는거야? 응?” 등뒤에서 남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있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흐읍~ 다음 순간 숨을 쉬고싶지 않았다. 술냄새와 공기청정제냄새, 조리법을 알수 없는 음식냄새까지 섞인 냄새가 코로 흘러들며 숨이 콱 막히게 하고있었다. 나는 급기야 다시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입을 반쯤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당신 이상하다. 언젠가부터 내가 술만 마시면 등을 돌리더라? 이젠 구역질까지 나는거야? 난 뭐 그런 당신이 좋은줄 알어?” 남편은 베개를 들고 휭하니 거실로 나가버렸다. 나는 주위에서 맴도는 공기를 몰아낼 양으로 팔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도 코로 숨을 쉴 생각은 없었다. 공기속에는 남편이 뿌리고간 조잡한 냄새들이 흩어져있을것이였다. 나는 이불속에 옹송그리고 누웠다. 정말 내가 많이 잘못한걸가? 나는 남편이 갖고다니는 냄새가 싫었을뿐이였다. 싫은것을 싫은 티를 낸것뿐이였다. 굳이 잘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코때문이였다. 내 코가 열리고있었다. 숨을 쉬기 싫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 시각 이후로 농후한 냄새에만 반응하던 민감하지 못했던 내 코가 열릴줄은 나도 생각못했던 일이였다. 여태 모르고 살았던 미세한 냄새들—상긋한 과일향기와 은은한 꽃향기, 풋고추의 상큼하면서도 매콤한 냄새, 반찬이 냄비안에서 익어가는 맛갈스러운 냄새, , 밥솥안에서 밥이 조금씩 쉬여가는 시큼한 냄새, 건조한 공기중에 떠도는 매캐한 먼지냄새, 속옷에 묻어나는 분비물들의 큼큼한 냄새, 부동한 사람들의 체취……뭐라 이름할수 없는 다양한 냄새들이 여기저기서 풍겨나와 쉴새없이 내 코를 자극하고있었다. 열린 코는 나한테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고있었다. 썩어가는 과일도 싱그러운 향기를 풍길수 있고 꽃향기라고 해서 다 향기로운것도 아니고 남자들의 몸에서 담배냄새만 나는것도 아니라는것과 이쁘고 화려한 그녀한테서는 화장품냄새가 진동하고 담배진이 뼈속까지 배여있을것 같은 과장이 스쳐지날 때에는 은은한 메론향기가 풍긴다는것을. 그런것들때문에 난 곤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차라리 코가 다시 막혀버리면 어떨가? 하고. 문제될것도 없었다. 코가 처음 열린것도 아니였다. 처음으로 코가 열렸던것은 8년전이였다. 2003년의 겨울의 어느날, 여느때와 같이 출근을 하려고 만원이 된 공공뻐스에 올랐었다. 의자등받이를 짚고 선 내 주위로 사람들이 밀려가고 밀려오고 했고 발을 옮겨디딜 자리가 없는데도 차장은 자꾸만 뒤로 들어가라고 했다. 사람들사이에 끼여서 휘청거리다가 어느 순간 머리가 아찔해났다. 냄새-참을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있었다. 담배냄새같기도 하고 마늘냄새같기도 한 너무 진한 냄새를 난 무엇이라 딱히 구분해낼수가 없었다. 얼굴을 찌프리고 주위를 둘러봐도 냄새의 근원지조차 알수가 없었고 내 주위가 온통 그 냄새로 차있는듯 숨이 가빠왔다. 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여 착용했다. 그제야 조금은 냄새가 덜해진것 같았고 숨을 쉴수가 있을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다니는 알지도 못할 누군가를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었었다. 허나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뻐스에 앉을 때마다 그 참을수 없는 냄새는 어김없이 나의 코를 비집고 들어왔고 굳이 뻐스안이 아니더라도 내 앞으로 스쳐지나는 사람만 있어도 난 그 냄새를 맡아내였다. 급기야 나는 그것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체취임을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후에 임신을 확인하게 되였고 남편은 배속의 애가 나 대신 냄새를 맡아주는것이라고 했다. 그때가 마침 사스가 만연되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어디에서 한둘이 확진되였소 어쨌소 하다가 인심이 황황해지기 시작했고 뉴스마다 마스크를 건 사람들이 화면을 채우고있었고 도시와 도시사이의 도로중간에도 림시검사소가 설치되고 열만 나면 병원에서는 발열치료중심으로 보냈다. 저마다 사스예방에 좋다는 약들을 복용하고 외출할 때에는 전문용마스크를 끼고 시장에서 소독수가 매진될 정도로 실내소독에 신경을 썼지만 하루에도 수백명씩 감염이 되고 수십명씩 죽어나간다는 소식이 흉흉하게 퍼지고있던 시절이였다. 광동지역에서 뱀과 같은 야생동물을 포식한데서 발병된것이라 했고 학교나 단위마다 아침 저녁으로 체온을 체크하고 사람마다 체온검사기록부를 지니고 다니는 긴장된 상태에서 가짜마스크가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턴다는 기사도 가담가담 섞이고있어 어디 가나 사스에 대한 이야기뿐이였다. 그럼에도 난 발병지점이 먼 사스보다 눈앞의 체취들에 더 집착하며 마스크를 착용하였던것을 보면 그때에도 어딘가 막힌 구석이 있는 사람이였던것만은 분명하다. 이러구러 여름을 잡아 기온이 높아지면서 사스의 감염률이 떨어지고 완치률이 제고되면서 사스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고 나 또한 출산을 하고나서 언제 그랬냐는듯이 코는 다시 막혀버렸었다. 그렇게 막혀버린 코가 지금 갑자기 열린다니 어정쩡하기만 할뿐이였다. 코가 열린 탓이라고 말하면 남편은 자기한테서 등 돌리는 나를 묵인할수 있을가? 배속에 대신 냄새 맡아줄 생명도 없는데 코가 열렸다는 말을 믿을가? 확신도 없는 일을 가지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있는 편이 낫겠지 하고 궁시렁거리고있는데 티비소리에 섞여 “드르릉”하는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코를 골며 자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거실로 나갔다. 남편은 티비를 켠채 이불을 두 팔과 두 다리새에 끼고 자고있었다. 나는 옷걸이에서 남편의 셔츠를 내려 코에 갖다댔다. 진한 음식냄새에 섞인 옅은 향수냄새가 코속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셔츠를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고 티비를 끄고 침실에 들어왔다. 숨을 쉴 때마다 아까의 향수냄새가 코끝에서 맴돌고있었다. 그리고 구역질나게 하는 역한 냄새들이. ……이제 래일이면 이 냄새들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겠지?..... 이 냄새들을 내가 다 마시는것은 아닐가? 몰라, 혹시 그 냄새들이 내 몸속에서 섞여서 부글부글 괴이다가 코로, 입으로, 땀구멍으로 ,털구멍으로…… 구멍이라고 이름지어진 모든 구멍으로 뿜겨나오며 내 체취로 되는것은 아닌지?...... 혹 자고 일어나면 다시 코가 막히지는 않을가?...... 이러루한 생각을 하며 내가 잠속에 빠져버렸던 그 밤은 5월의 어느날이였다. 그 밤을 자고도 더 무수한 밤을 자고도 내 코는 막혀버리지 않았다. 여기에 앉아있는 지금까지도. “남편이 갖고 들어오는 냄새때문에 늘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어요?” 녀자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말리향이 좀 더 진하게 코끝으로 날아들고있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거의 그랬죠. 코때문에.” 나는 애꿎은 코를 식지로 살짝 긁었다. 녀자는 뭔가 생각하는듯하더니 물었다. “남편이 싫으신건가요?” “아뇨. 갖고다니는 냄새가 싫을 따름이죠.” 녀자가 잠간 미간을 찌프렸다. 녀자는 남자의 냄새가 싫었던적이 없었을가? 난 그게 궁금했다. 목구멍으로 막 튀여나올려고 하는 말을 나는 심호흡과 함께 삼켜버렸다. 난 그런 사람이였다. 항상 하고싶은 말도 배속으로 삼키기에 익숙한. “요즘 들어 호흡곤난을 느낀적은 언제죠?” 생각할것도 없었다. 한주일전이였다. 그 일이 아니였더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것이였다. 처음에 물었더면 언녕 녀자와 나의 대화는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녀자는 이제야 묻고있었다. 그것이 녀자의 직업의 특성이라면 특성이겠다. 어쩐지 알면서도 녀자한테 옭아드는 느낌이였다. 내가 굳이 호흡곤난을 핑게로 녀자한테 이것저것 털어놓는것을 보면. 빨간 봉투 쓱싹쓱싹. 손을 마주 비비자 오물조물 비누거품이 일어났다. 아무래도 한국제품은 중국제품보다 질이 한수 위였다. 중국산 세수비누는 몇번 쓴후로는 미끌거리기만 할뿐 거품이 잘 일지 않는데 한국산 손씻기비누는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도 처음같이 거품이 잘도 일어난다. 비누란 대개 거품이 일어야 때가 지는듯한 거뿐한 느낌이 든다. 꾹 누르면 나오는 액체용보다 굳이 거추장스러운 손비누를 고집하는것을 보면 나도 엔간히 막힌게 아니다. 하긴 난 두루 막힌 구석이 많았다. 컴퓨터타자때문에 펜을 사용해야 할 일이 극히 적은데도 굳이 만년필을 소지하고 다니고 전화번호도 핸드폰에 저장할 대신 꼬박꼬박 전화번호다이얼에 적는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숨통까지 막히라는 법은 없잖은가? 안그래도 말문이 잘 트이지 못한 나다. 어릴적엔 재잘재잘 말도 잘했다는데 커가면서 필요한 말외엔 애교나 수다라는것을 떨줄도 모르는 사람이 되여버렸다는것이 엄마가 나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다. 남들이 모녀간이 오손도손 이야기도 주고받고 시끌시끌 떠들면서 장을 보는 모습을 보면 엄마는 앞에서 “엄마, 빨리요.”하며 건성건성 걸어가는 나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군 하였다. 엄마한테 난 “도무지 살가운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야속한 딸년”이였다. 동료들한테는 착하기는 한데 말문이 무겁다못해 차가운 사람이였고 친구들한테는 영 속내를 알수 없는 미지수같은 존재였고 남편한테는 들을수만 있는 벙어리같은 막막한 녀자였다. 가끔 가다 두루 “순수하다”, “올곧다”는 평을 받긴 하지만 약삭바른 놈이 잘 먹고 잘 사는 지금 세상에 그런 말들이 칭찬이 아님을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난 그냥 성격탓이라고 고집하고싶었다. 대개 개성이 변하게 되는 열두어살난 소녀때 어른들이 흘리는 말의 뜻을 대충이라도 알게 되는 그때에 나는 너무 일찍 말때문에 사람이 힘들어질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즈음 있는 일 없는 일을 재미삼아 입에 달고사는 수다스러운 할머니를 친척들은 외면하고있었고 젊을적 씨름 좀 했다고 떠들며 하늘이 낮다고 큰소리만 치고 다니는 아버지를 동네사람들은 뒤에서 “허풍떨기는?”하며 비웃었었다. 어린 아이인 내가 뭘 안다고 어떤 사람은 “니네 할머니는 왜 남의 흉만 본다니?”하고 나한테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였고 “니네 아버지가 우리 딸애가 너보다 공부 못한다고 했다며? 말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고 전해라.”라고 공연히 나한테 침을 놓았다. 내가 뭘 안다고 저러냐고 억울했지만 그들이 그러는 리유를 조금은 알것 같았고 생김생김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닮고 내가 아버지를 꼭 빼닮은 시점에서 난 아버지나 할머니처럼 입때문에 함부로 남의 미움을 사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였다. 지금 생각해도 열두어살난 계집애가 그런 결심을 한것을 보면 나도 남다른 구석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였다. 아무튼 가난한 살림때문에 위축감과 렬등감까지 느끼며 내 입에서 말은 서서히 줄어들어갔고 어른이 될 무렵 난 말대신 수걱수걱 일만 하면서 사는데 습관이 되여버렸다. 보고도 못본척, 듣고도 못들은척, 할 말이 있어도 없는척 하면서 눈, 귀, 입을 막고 살았는데 이제 코까지 막혀버릴려고 한다니 아무리 속없고 궁리 없는 나로서도 기가 막힐 일이다. 생리의 수요로라도 최저한 숨은 쉬여야 살게 아닌가? 내가 호흡을 필요로 하는 생물체인이상. 위의 생각을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투덜거리며 손바닥안에 차고넘치는 비누거품을 손등에까지 칠하여 몇번을 더 싹싹 비비고 맑은 물에 헹구고나니 손의 느낌이 가뜬하다. 손을 쳐들어 눈앞 가까이까지 대고 이리저리 살펴봐도 말쑥하기만 하다. 요즘 들어 어디서 또 불쑥 튀여나온 신종플루때문에 공연히 2003년의 사스가 련상되며 은근슬쩍 신경이 긴장해지고있는터라 손씻기에 부지런해진것은 당연한 일이지 내 호흡과 무관한것이였다. 더 씻을가? 머리를 기우뚱거려봐도 더 씻을 생각은 없다. 그런것을 봐선 결백증인것 같지는 않다. 결백증환자는 손이 문드러질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번씩이나 씻는다고 하지 않는가? 결백증환자도 아닌 내가 왜 숨을 마음껏 쉴수가 없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렇게 고개만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위생실을 빠져나오다가 딱 맞닥드린 사람이 그녀였다. 진한 화장품냄새가 코를 덮쳤다.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혔다. 코가 열린 불편함이란 이러루한것들이였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찾았는데. 언니 뭐해?” 그녀는 알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짓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기분 나쁘게 하는 저 웃음. 손을 씻은 가뜬한 느낌이 한방에 날려가고있었다. “왜?” 나는 손에 묻은 물을 털며 시답지 않게 흘낏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일없이 나와 말을 섞을 일이 없는 그녀였다. “과장님이 찾으셔. 좀 엄숙한 표정이였는데. 언니 혹시 뭐 잘못한것이 있어?” 그녀의 얼굴에는 잘코사니야 하는 표정이 어려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언니”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는 그녀를 볼 때면 난 그 호칭이 뭘 뜻하는지 나름대로 궁금했다. 나는 대답도 않고 과장실을 향해 스적스적 걸어갔다. 머리속으로 재빨리 요즘 들어 한 일들을 점검하였다. 잘못한것은 없는것 같았다. 뭐가 문제지? 짚이는데가 없었다. 일 하나는 자신있었다. “여기요.” 손가락을 매만지며 엉거주춤 서있는 내앞으로 과장이 내민것은 봉투였다. 눈에 익은 빨간색봉투. 전날 “언니, 과장님의 아들이 대학입학통지서 받았대. 지금 령도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연회상 못차리는걸 알지? 절로 알아서 료량껏 해.”하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미 했을 말을 큰 비밀이나 알려주는것처럼 귀에 대고 속살거렸고 고민고민하다가 퇴근전에 이번달 업무회보서류에 빨간봉투를 슬그머니 끼여넣었었다. 아무리 세상물정에 어둡다지만 코밑치성이 통한다는 리치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알게 되는 세상에 나도 한결같이 나몰라라 할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렇게 세상은 알게모르게 물들어가면서 둥글게 살게 되여있었다. 헌데 그 봉투를 다시 내밀다니? 나는 손을 내밀어 그걸 쥐지도 못하고 다시 되밀어놓지도 못하고 어정쩡해서 면도자욱이 퍼렇게 남아있는 과장의 얼굴만 머룽머룽 쳐다보았다. “성의는 고맙지만 이건 아니죠. 한 과실에서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 뭐가 되겠어요? 더구나 오래지 않으면 인사변동이 있을것인데 남들이 오해하기 쉽죠. 고급직함평의때도 그랬듯이 뭐든지 실적으로 합니다. 사민씨는 실적 좋으니까 지금처럼 계속 열심히만 해요. 이런것은 저나 사민씨에게나 다 안좋은 일입니다. 다시 번복하지 말기를.” 과장은 빨간봉투를 툭툭 두드리고 다시 내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아니 , 그런 뜻이 아닌데……그냥 아드님입학축하로……” 나는 죄라도 지은듯이 더듬거렸다. “축하는 감사해요. 이건 없던걸로 합시다.”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를 내 손에 쥐여주고는 나가달라는 뜻으로 손을 휙 저었다. 극히 부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사무상우에 놓인 봉투를 쥐고 나오면서 얼른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는 순간 기분이 시궁창으로 떨어지고있었다. 다음 순간 가슴속 어딘가로부터 알수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욱 하고 치밀어오르며 목구멍을 콱 막아버리고말았다. 그때로부터 난 한주일 내내 가슴이 무엇에 눌리우기라도 하듯 침침하고 답답했던것이다. 내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녀자는 눈을 깔고 한참이나 미동도 않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똑똑 책상을 두드렸다. “무엇때문일가요? 자꾸만 숨통이 막히는게.” 녀자는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쭝긋하고 나를 바라봤다. “본인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알면 굳이 녀자에게 물을가? 나는 입을 다문채 녀자만 바라봤다. 녀자의 표정은 안온하고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녀자는 매끄러운 얼굴과 표정이 별로 안어울렸다. “날숨을 쉬세요. 길게 날숨을요.” “날숨을요?” 녀자가 확고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뭐든지 뱉어낸다는 생각으로 날숨을 쉬세요. 들이키려고만 하니까 힘든거예요. 들숨은 날숨을 위한거라 생각하시고 날숨에만 집착하세요. 내 몸에 쌓였던 로페물들이 날숨을 통해서 나간다는 느낌으로요. 이젠 좋든 궂든 뱉으세요……” 뱉어? 녀자는 나한테 아직도 뱉어내야 할것들이 더 남아있다고 생각하고있는것일가? 머리속 한가득 피여오르는 물안개를 느끼며 녀자의 핑크색 가디건에 한번쯤 더 눈길을 주고 말리꽃향기를 한번쯤 더 들이키고나서 “심리상담실”을 나설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언니, 나야. 급해서 그러는데 서류 찾아서 팩스로 보내줘……” 날숨 어디 있지? 사무상우에 쌓여있는 서류들을 아무리 뒤적여도 그녀가 쉽게 찾을수 있다던 서류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덥석 국제전화를 건다는것도 말이 아니였다. 이건 아니다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사무상서랍을 잡아당겼다. 열렸다. 차곡차곡 들어있는 책들과 노트들을 하나씩 꺼내놓으며 찾아보았다. 웬 종이장 하나가 책과 함께 묻어나왔다. 뭐지? 사무상우에 올려놓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고급직함신청서”복사본이였다. 뭘 이런걸 다? 고급직함평의가 끝난지도 1년이 지난 마당에 굳이 이것까지 챙겨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가싶었다. 얜 뭘로 그때 점수가 그렇게 높았을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호기심으로 쭉 훑어보다말고 눈이 커졌다. “거둔 성과”란에 내가 모르는 항목이 적혀있었다. 무슨 과제연구담당자와 론문수상자라니? 분명 내가 담당하였던 연구과제였고 그녀가 전근되여오기전부터 실행중이던 그 연구과제담당자중에는 그녀가 없었다. 당연히 론문발표와 수상도 있을리 없었다. 헌데 분명히 연구과제이름과 론문제목까지 번듯하게 적혀있지 않는가? 갑자기 론문제목이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보았던 제목이지? 머리를 갸우뚱거리다말고 머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동성동명이인.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그녀의 고향선배녀자가 나와 같이 연구과제를 완성하였었고 몇년전에 이미 다른 시가지로 전근이 되여있었다. 아하~ 두사람 몫의 성과가 한사람의것으로 되였으니 당연히 점수가 높을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의문의 덩어리들이 이제야 풀리는것 같았다. 나와 실적이 비슷해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압도적인 점수로 고급직함을 평의받게 된것이며 앙바틈하게 생긴 과장이 자기보다 한뼘이나 키가 큰 그녀와 부쩍 가까와져 이런저런 명목으로 그녀를 공식석상에 배동하고 참가하는것이며 그녀가 과장의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것이며 며칠전에는 아무리해도 그녀의 연구과제와는 별로 관련이 되지 않는 해외세미나에까지 그녀가 파견되여 간것이며 …… 들숨대신 길게 날숨을 쉬였다. 날숨과 함께 한숨을 토해내며. 나는 컴퓨터 키보드기밑에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는 서류를 찾아들고 그녀한테 팩스로 보내면서 한장 첨가했다. --대학축하금 얼마? 꼭 대답을 듣고싶은것은 아니였다. 그녀가 대답을 해줄지도 미결이였다. 하지만 그냥 묻고싶었을뿐이였다. 녀자가 가르쳐준 날숨의 방식의 하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후. “삐삐~” 하는 소리와 함께 팩스 한장이 건너왔다. --하나. 언니니까 말하는거야!( 참고:큰걸루야) 하나라? 것두 큰것으로? 두께조차 만져지지 않던 얄팍했던 내 빨간봉투가 떠올랐다. 그녀와 난 개념부터가 달랐다. 내가 말하는 하나는 그냥 100이였다면 그녀가 말하는 하나는 1000이나 10000도 될수 있었다. 큰것이라잖는가? 두장짜리가 들어간 얄팍한 내 빨간봉투는 되돌려올수밖에 없는 운명이였다. 다시 길게 날숨을 토해냈다. 이상하게도 들숨을 짧게 쉬여도 날숨은 마음먹기에 따라 길게 잘도 나왔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갑갑했던 가슴이 조금씩 열리고있었다. 아마도 밖으로 뱉어내야 할게 너무 많았던것이고 그것들이 체외로 배출되는 순간 숨통이 트이는 모양이였다. 나는 사무실을 벗어나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왔다. 대청을 벗어나려다말고 접수실에 얼핏 눈길을 주었다. 청결공아줌마가 머리를 수굿한채 뭣인가에 열중하고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접수실로 향했다. 문기척을 느꼈는지 아니면 내 체취를 느꼈는지 청결공아줌마가 머리를 들며 히죽 웃고는 다시 머리를 수굿하고 손을 움직이기에 바빴다. 상우에 길이가 한메터는 실히 될것 같은 커다란 십자수천이 펼쳐져 있었고 그옆에 수십종의 색실뭉테기가 불룩하게 들어있는 돛천가방이 놓여있었다. “무슨 수를 놓는데요?” 묵묵부답이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뭐지? 들여보다말고내눈이커졌다. 하필이면“최후의만찬”이라니? 다시아줌마를쳐다보았다. “이그림이뭔지아세요?” 역시묵묵부답이다. 워낙대답을바라지않은물음이였다. 나와아줌마사이의대화는이루어질수가없었다. 아줌마는벙어리였으니까. 문득아줌마의왼손켠에놓여있는성경전서가눈에띄였다. 아하~ 가는신음소리가내입에서흘러나왔다. 그러든말든아줌마는나한테눈길조차돌리지않는다. 나는멍청하니굳어져아줌마를멀거니바라보고만섰다. 아줌마는청소가끝난여가에틈틈이성경전서를읽으면서뭘생각하고있었을가? 종일4층이나되는청사복도청소와화장실청소를하면서받는월급700원으로소학교2학년에다니는딸의공부뒤바라지를하는아줌마, 아줌마의남편도벙어리라고했던가. 아줌마는늘무뚝뚝한표정이였지만그표정속에불만같은것은숨어있지않았다. 듣지도못하고말하지도못하면서오직수화로만, 간혹가다가핸드폰메시지로다른사람과의소통을하여가면서아줌마는늘누구를위해기도를하고있었을가? 아름다운꽃송이도있고웨딩드레스도있고귀여운강아지도있고멋진풍경화도있는데하필이면다빈치의명화“최후의만찬”을수놓이하고싶은것은그냥우연은아니였을것이였다. 예수와그의제자열두사람, 모두13사람의얼굴과각이한표정들을갖가지색실로수를놓아나타내야만하는어마어마한작업을아줌마는끈질기게하고있다니?...... 아줌마는그얼굴들중에배신자인유다의얼굴이있다는것도  모든것을알면서도침착한표정을짓고있는예수가무슨생각을하고있는것까지도알고있었을가? 아줌마는자기가그13인의내심을저색실로하나의십자수우에다나타낼수있을거라고자신하고있는것일가?...... 색실을꿴바늘로쉴새없이천을찌르며아줌마는자기의날숨까지도토해내고있는것이아닐가? 접수실을나오며나는다시날숨을길게토해냈다. 한결가볍게. 들을수도있고말할수도있는내가숨통이막혀살아야할리유는어디에도없었다. 나는전화번호를꾹꾹눌렀다. 발송신호가가는사이은은한말리꽃향기가솔솔풍겨오고있었다. “저기요, 아까상담받았던숨막히던여자입니다…… 날숨, 쉬겠습니다. 뱉겠습니다……남편이갖고다니던말리꽃향기여전히싫어요.……다시남편한테서말리꽃향기맡을일은없을겁니다……전란초향기좋아한다고남편한테이야기할거니깐요. 제가날숨쉬는방식은이런것이였나봐요......”   나는가방에서손가락만한휴대용향수병을꺼내공중에팍팍뿌렸다. 길게들숨을쉬였다. 싱그러운란초향이시원하게가슴속으로흘러들고있었다. 다시날숨을길게쉬였다. 그녀의웃음이며녀자의말리꽃향기,구겨진빨간봉투가서서히서서히머리속에서잊혀가고있었다. 그리고어디선가투둑, 투둑하고숨통트이는소리가가까이, 점점가까이들려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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