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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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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단편소설] 귀두야, 안녕?-김영해 댓글:  조회:863  추천:0  2019-07-18
김영해    귀두야, 안녕?       교실출입문에는 언제나 자물쇠가 달랑 잠겨져있었다.   “참, 연미는 오늘도 늦을려나?”   명복이는 궁시렁거리며 바지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꺼내 자물쇠구멍에 밀어넣고 삑 돌렸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는 이내 열렸다. 명복이는 열쇠를 뽑고 자물쇠를 벗겨 문손잡이에 건후 문을 밀고 들어섰다. 교실 정중앙에 책걸상 두벌이 나란히 놓여져있다보니 널직하다 못해 운동장처럼 휑하였다. 교실 뒤벽에 붙어있는 칠판에는 “개학을 맞으며”라는 주제로 벽보가 꾸며져있었다. 명복이가 재간껏 그림을 그리고 연미가 또박또박 분필글씨를 쓴것이였다.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명복이는 그 벽보가 선참으로 눈에 띄워 기분이 좋았다. 제딴에도 그림은 괜찮게 그리는것 같으니까 화가나 디자이너가 되려는 꿈을 가져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하고있는터였다.   명복이는 벽보에 눈길을 주며 씩 웃고는 책가방을 걸상에 놓고 물통을 집어들었다. 수도칸에 가서 물 한통을 받아든 명복이는 약간 다리를 벌린채 엉기적거리며 걸었다. 사타구니에 기저귀라도 찬것처럼 모양새가 영 꼴불견이였다.   아- 쪽 팔려. 이게 뭔 꼴이야?   연미가 봤으면 꼭 뭐라고 놀려줬을것 같아 명복이는 주위를 힐끗거렸다. 다행히 복도는 사람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명복이는 교실에 이르러 밀걸레를 씻어 교실바닥을 쓱쓱 밀다말고는 주춤 서버렸다. 약간 미간을 찌프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계속해서 밀걸레질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쉬여가며 청소를 끝낸 명복이는 역시나 엉기적거리는 걸음새로 물통의 물을 버리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칠판이 정면으로 보이고 벽쪽으로나 창문쪽으로도 거리가 알맞은 적당한 자리였다. 추울 때면 해가 비치는 창문쪽으로 조금 드텨앉고 해빛에 머리가 따갑거나 눈이 새물거릴 때면 벽쪽으로 조금 드텨앉으면서 늘 그 자리에서 뱅뱅 돌기에 한참 좋은 자리였다. 명복이는 책가방을 열고 조선어문교과서를 꺼내 뒤적거렸다. 교과서의 과문은 하나같이 따분하고 재미가 없었다. 명복이는 머리를 들어 교실앞쪽을 쳐다봤다. 오성붉은기가 칠판우의 정면에 붙어있고 그옆에 시계가 걸려있다.   일곱시 이십분.   연미는 아직도 오지 않고있다.    이 계집애가 또 늦잠을 자나봐?   명복이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가끔 가다 머리가 새둥지가 된채로 뛰여오거나 얼굴에 베개자국이 남아있는채로 상학종소리와 함께 교실에 들어서는 연미의 우습강스러운 꼴이 생각났던것이다. 엊저녁에도 컴퓨터로 늦게까지 음악프로그램을 본다고 했으니까 아마 눈곱도 못 떼고 헐레벌떡 뛰여올지도 모를 일이였다.   계집애가 엉뎅이에 뿔이 난겨-   명복이는 외할머니의 말투를 흉내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만 보면 눈이 반짝거리는 연미였다. 이제 자기도 크면 가수를 할거라나 뭐라나 하는 연미가 명복이의 눈에는 영 한심해보였다.    명복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반쯤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복도 저쪽 끝에서 팔에 붉은 완장을 건 한족애 두얼이 뭐라고 쑤얼거리는게 보였다.    칫- 니들이 맨날 그래봤자 문명반은 우리인걸.   명복이는 “6학년”이라고 씌여진 학급패말아래에 걸린 삼각형의 류동홍기를 쳐다보며 “흥”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류동홍기는 뿌리를 내린 명복이의 자리처럼 3학년때 거기에 걸린뒤로 내리는 일이 없었다. 학급패말이 몇번을 바뀌는 동안에도 여전했다. 그러고보니 명복이와 연미만 남은것도 3학년때부터였다. 1학년때에는 10여명이 되던 학생들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하나둘 적어지기 시작하더니 3학년에 올라오면서 달랑 두명만 남아버리고만것이였다. 그러고나서 오구작작 떠들 일도, 여기저기에 연필밥이며 종이뭉테기를 널어놓을 일도 없어지고말았고 규률도 위생도 맨날 만점이였다. 그래서 류동홍기따위는 시시해질려고 하는 명복이였다. 옆의 한족반에서 흘러나오는 랑랑한 글소리를 들으며 교실문을 닫고 도로 자리에 와 앉았다. 과문랑독이라도 해야 할것 같아 다시 조선어문교과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1과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하였다. 커다란 교실에 명복이가 과문을 읽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10분쯤 지났을가.    3과를 읽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박선생님이 들어섰다.   “랑독을 하는구나. 연미는 아직 안왔어?”   박선생님은 하이힐을 딸깍거리며 책상앞까지 걸어와 명복이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져주었다. 그 서슬에 향긋한 냄새가 명복이의 코를 비집고 들어왔다. 명복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벌씬 웃었다.   “안 왔어요. 연미는 매일 늦는걸요.”   “그러게 말이다.”   박선생님은 입을 쭝긋해보이고는 창곁에 놓인 사무상우에 핸드빽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명복이는 박선생님이 서랍에서 분을 꺼내 토닥토닥 얼굴에 바르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올해 51살인 박선생님은 나이대에 걸맞게 약간 부푼듯한 몸매였다. 넙적하면서 윤택 나는 얼굴에 적당히 큰 눈이며 코, 입이 안성맞춤하게 자리잡고있어 꽤 유복해보이는 모습이였다. 더군다나 몇년전부터는 얼굴색도 밝아지고 짜증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 늘 웃고다녀서 성격 좋은 선생님이시구나 생각하고있었다. 시내에 집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통근뻐스를 타고 다니며 출퇴근시간이 일정했고 아침마다 교실에 들어서면 손거울을 꺼내들고 분과 립스틱을 바르는것이 첫 일과였다. 매일 아침마다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보며 명복이는 엄마가 반나마 쓰고 남긴 로션병을 떠올리군 했다. 이젠 류통기한이 지났을법도 한데 뚜껑을 열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풍겨 그것을 버릴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점점 예뻐지네.   명복이는 마술을 부리듯이 박선생님의 얼굴이 화사해지고 륜곽이 또렷해지는것을 지켜보며 입을 짭짭 다셨다.   화장을 끝낸 박선생님은 “상학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과문을 읽고있어.”하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이랑 드라마이야기도 하고 자질구레한 집이야기도 하면서 아침시간을 때우는 박선생님이였다. 퇴직이 멀지 않았는지라 작년부터 굳이 교수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것때문에 박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보다 더 한가한 편이였다. 30여년을 꼬박 해온 일이라 교수안을 쓰는것이 식은 죽 먹기였지만 고작 두명뿐인 학생을 놓고 교학연구를 한다거나 새로운 교수방법을 적용한다는것은 어쩜 화사첨족 같은 일이였다. 협동학습이나 층차학습은 운운할 여지도 없는지라 최대한 명복이와 연미가 알아듣기 쉽게 교재내용을 가르쳐주는것이 보다 실용적이였다. 교재연구는 수업을 하면서 교수참고서며 사전들을 주르륵 펼쳐놓고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책을 들여다보며 하는것으로도 충분했고 하나를 가르치면 반개도 잘 리해하지 못하는 명복이나 연미에게 공부는 늘 피동적이였고 교재내용을 초월한 의문따위는 없었다. 따라서 박선생님에겐 수업시간 40분외의 시간마저 교수준비나 교학연구에 할애할 필요성은 썩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명복이가 과문 둬편을 더 읽었을무렵 상학종소리는 울렸고 이어서 박선생님도 교실에 돌아오셨다.   수입과 세률에 따라 바쳐야 할 세금액을 계산하는 수학시간이 끝나고 두번째시간은 조선어문시간이였다.    뭘 쓰지?   명복이는 작문책을 펼쳐놓은채 뒤더수기만 썩썩 긁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동년시절에 있었던 잊을수 없는 일중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거나 몹시 후회되던 일, 심각한 계시를 받은 일을 화제로 작문을 지으라는 요구였다. 글감 고르는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였다. 명복이에겐 매일매일이 똑같아보였다. 아침잠이 적으신 외할머니가 푸르스름해서 일어나 지어놓으신 아침밥을 먹고 거의 일등으로 등교하여서 청소를 하고 연미랑 같이 공부를 하고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와 역시나 외할머니랑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잠을 자는게 전부였다. 길에 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농촌마을에 감동이나 계시를 받을만한 일을 저질러주는 사람도 없었고, 명복이가 잊을수 없을만치 후회되는 일을 저지를 상대도 없었다. 명복이가 잴잴 말을 번질 때부터 마을엔 손군들을 데리고 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태반이였고 그 애들이 학교에 붙을 나이가 되면 시내에 전탁생으로 보내지거나 로인들과 함께 이사를 가버렸다. 그렇게 비여버린 집들엔 어데선가 이사를 온 한족사람들이 들어서 살았다. 그런 탓에 지금도 한족반은 학생수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온 동네 소학교에 다니는 조선족애는 명복이와 연미 둘뿐이였다. 말이 온 동네지 실은 온 향진이였다. 마을이 여라문개나 되는 향진에 소학교와 중학교가 합쳐진 진중심학교가 하나뿐이고 소학부의 조선족반은 명복이네 반뿐이였다. 이제 여름에 명복이와 연미까지 초중에 진학하면 소학부의 조선족반은 없어질것이였다. 어른이고 애고 주위에 함께 울고웃으며 일을 만들어갈 사람이 없는데 잊을수 없는 일을 적으라니 명복이는 난감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선생님, 못 쓰겠어요. 글감이 없어요.”   명복이는 책상에 엎드리며 빤히 박선생님을 쳐다봤다.   “음?”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박선생님이 움찔하며 명복이를 바라봤다.   “애두 참, 소학교 6년을 다녔는데 집에서 있은 일이나 학교에서 있은 일가운데서 글짓기요구에 맞는 글감을 못 찾겠어?”   박선생님은 리해할수 없다는듯이 명복이를 향해 혀를 찼다.   “집엔 엄마 아빠도 없고, 학교에 오면 연미밖에 없는데 뭘요…”   명복이는 억울하다는듯이 툴툴거렸다.   “하긴… 근데 언제는 뭐 글감이 있어서 썼냐? 정 쓸것이 없으면 교과서의 과문들을 본따서 생활속에서 일어날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서 써봐. 응?”   박선생님은 명복이에게 눈을 껌뻑해보이고는 다시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 아마도 게임하거나 채팅하는 눈치였다.   “네-”   명복이는 한숨을 풀 내쉬고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작문책에 커다랗게 “잊을수 없는 일”이라고 제목을 썼다.   이모가 새해 선물로 노트북을 사줘서 감동받았다고 쓸가?…   명복이는 방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노트북을 사주면 자기는 연미처럼 음악프로를 보거나 게임만 하지 않고 여러가지 프로그램조작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공부에 유익한 자료도 찾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누군가가 이모일수는 없다는걸 알고있었다. 시내 복장회사에 출근하는 이모는 늘 바빴고 명복이만 보면 “넌 애물단지야. 이제 키도 할머니를 넘어서는데 할머니를 잘 도와드려.”하며 눈을 할기죽거렸다. 늘 까부장해서 눈치를 주는 이모가 무서웠다. 이모한테 뭘 사달라거나 용돈을 달라고 칭얼거려본적이 없었다. 그런 이모가 노트북을 사준다는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였다.   이모는 안되겠고… 연미랑 싸워서 후회된다고 쓸가? 아참, 연미가 왜 아직도 안 오지?   명복이는 벌떡 일어나서 목을 빼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멀리 보이는 길어구에도 연미의 그림자는 없었다.   “선생님, 연미가 왜 안 와요?”   “응? 어머, 내 정신 좀 봐. 전화를 한다는게 깜빡 잊고.”   박선생님은 창밖을 내다보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전화를 안 받는데… 아픈가?”   박선생님은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귀에 댄채 교실밖으로 나갔다.   계집애가 영 자고있는지도 모르지. 히히… 아, 맞다. 그 일…   명복이는 실실 웃으며 작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5학년때쯤인가, 연미의 바지엉뎅이가 젖어있어서 오줌싸개라고 놀려줬던 일이 생각났던것이다.    그날 점심에 청소를 하다말고 명복이는 칠판을 닦는 연미의 바지엉뎅이가 손바닥만큼이나 젖어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늘 덤벙이면서 여기저기 물을 흘리고 다니는 연미인지라 또 수도칸에 물앉기라도 했나싶어 명복이는 “너 바지에 오줌 싼거지? 오줌싸개-”하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연미는 홱 돌아서서 “내가 왜 오줌을 싸? 니가 쌌지?”하며 손걸레를 명복이쪽에 던졌다. 명복이는 걸레를 피해 교실뒤켠으로 뛰여가며 “키를 쓰고 울 집에 소금 빌러 오너라.”하고 익살맞게 목청을 뽑았다. 연미는 애가 나서 “아니야, 안 쌌어.”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명복이는 박장대소를 하며 “바보- 바지가 젖었는데.”하고 연미의 엉뎅이를 손가락질해댔다. 그제서야 바지엉뎅이를 만져보던 연미는 손바닥에 벌겋게 피가 묻어나자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피를 본 명복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쩔줄을 몰라 당황해하는데 마침 박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피가 묻은 연미의 손과 젖어버린 바지엉뎅이를 번갈아보시던 박선생님은 연미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셔서 옷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아무것도 모른채 어정쩡해진 명복이에게 박선생님은 “연미는 이제 녀자가 되여가는거야. 너도 크면 알게 될거다. 놀려주지마.”하고 오금을 박고는 교실밖으로 내보냈다. 명복이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박선생님이 울고있는 연미의 등을 토닥이며 뭔가를 차근차근 이야기해주고있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연미는 한달에 한번꼴로 두어날씩은 체육시간을 안 본다고 교실에 엎드려있었고 명복이는 그때마다 “칫, 녀자가 되는게 머 어때서?”하면서 입을 비쭉거렸다. 아직도 연미가 녀자가 된다는게 뭔지 모르겠고 왜 그때 바지엉뎅이에 피가 묻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연미를 놀려준게 후회될 일이라면 후회될 일이였다.   작문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려는데 하학종소리가 울리는지라 명복이는 주섬주섬 책상우를 정리하고 교실밖으로 나갔다. 다음 시간은 체육시간이였던것이다. 체육시간은 한족반 애들이랑 같이 보게 되여 있었다. 3학년때부터 체육시간외에 영어, 음악, 미술 시간도 한족반 애들과 같이 시간을 보는데 그때마다 한족반 교실의 맨 뒤줄에 앉아야 했다. 처음엔 무엇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한족애들이 발언하고 소조토론하는것이 재미있어보였다. 명복이와 연미도 한족애들과 소조편성을 해주었지만 어쨌거나 언어가 딸리는편이여서 애들은 토론이나 발표에 잘 끼여주지 않았다. 이젠 한족애들과 대화도 마음대로 할수 있고 점심시간이면 같이 놀수도 있었다. 가끔 가다 모순이 생겨 “니네 조선족애들은…”하며 한족애들이 똘똘 뭉쳐 한편이 될 때는 속수무책이였다. 그래서 명복이는 언제나 한편이 되여주는 연미와 딱친구였고 한족애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래도 체육시간만은 함께 운동하고 유희도 할수 있어서 연미랑 둘이 하기보다 엄청 재미있었다. 그런 체육시간도 오늘은 별로였다. 연미가 없어서가 아니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명복이는 혼자 교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휴식시간에 전화를 해봐도 연미의 전화는 꺼져있었다. 감기에 걸려 코물을 질질 흘려도 자리를 비우는 법이 없었는데 별일이였다. 자리를 비우지 않기는 명복이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가다가 아플 때도 있지만 서로가 혼자면 얼마나 심심할가싶어서 꼬박꼬박 학교에 나오기로 무언의 약속이 되여있었던것이다. 닭알볶음과 민들레무침으로 도시락을 후딱 비운 명복이는 교실에서 뚜벅뚜벅 걸어다니다가 박선생님의 사무상에 다가갔다. 밀어넣어진 의자를 끌어당겨 엉뎅이를 붙이고 앉았다. 거죽이 베로도천으로 된 방석이 포근했다. 명복이는 사무상우에 턱을 고이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침부터 잔뜩 흐려있던 하늘은 더 우중충해있었다. 당금이라도 검은 구름장들이 아래로 무작정 떨어질것만 같아 가슴이 갑갑해났다.   한참을 바라보아도 마을로 통한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안 보였다. 명복이는 팔베개를 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박선생님은 인차 돌아오시지 않을것이였다. 요즘 들어 틈만 나면 작은 칼을 들고 민들레 캐러 나가셨다. 학교가 마을과 동떨어진 산기슭에 자리잡고있는지라 봄에 달래가 발그스름한 싹을 올리밀기 시작해서부터 여름이 짙어질 때까지 녀선생님들은 점심시간이면 달래며 민들레, 산나물들을 캐는데 열을 올리셨다. 명복이가 하교를 할 때면 선생님들은 록색나물로 저녁반찬을 만든다며 좋아들 하셨다. 어제도 비닐주머니에 골똑 민들레를 캐신 박선생님이 오후 상학종소리가 울릴무렵에야 돌아오셨다. 명복이는 잠간 눈을 감고 자려고 했지만 잠들수가 없었다. 가끔 가다 사타구니가 찡찡 아파나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프러졌다. 하필이면 체육시간에 대렬훈련을 하다보니 엉기적거리며 겨우 따라다닌 명복이였다. 자유활동시간에 축구를 하자는 한족애들을 물리치고 교실에 들어왔지만 사타구니는 여전히 아팠다.   괜찮은건가?… 이제 며칠이 됐지?   명복이는 눈을 끔뻑거리며 날자를 세여봤다.   꼭 사흘전이였다.   그날 오후시간이 끝나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둑어둑할 때까지 학교운동장에서 한족애들이랑 축구를 한 명복이는 저녁에 숙제를 끝내기 바쁘게 인츰 잠에 곯아떨어졌다. 한밤중에 소변을 보려고 일어났던 명복이는 깜짝 놀랐다. 오줌을 누는데 고추가 찡찡 아프길래 집안에 들어와서 전등을 켜고 살펴봤더니 고추의 껍질이 우로 댕댕 말려올라가 있는게 아닌가!   명복이는 덴겁하여 외할머니를 흔들어깨웠다.   “할머니, 내 고추가 왜 이래요?”   명복이는 눈을 비비며 엉거주춤 일어나앉는 외할머니앞으로 벌거벗은 아래도리를 쑥 내밀었다.   “멀 그러냐?”   잠기가 채 가시지 않은 외할머니는 눈을 슴뻑거리며 명복이를 쳐다봤다.   “이것 봐요. 고추가 왜 이렇게 됐어요? 껍질이 올라갔어요.”   명복이는 외할머니의 얼굴앞에 바투 다가선채 손가락으로 자기의 고추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외할머니는 명복이의 고추를 들여다봤다.   “남자들은 크면 원래 이렇게 되는거여. 내사 사내녀석을 못 길러봤으니까 모르긴 하지만서두. 그 껍질이란게 올라가야 정상이란 소리는 들었구만 멀 그래. 그냥 자. 별일 없으면 절루 내려오겠지.”   외할머니는 명복이의 볼기짝을 찰싹 두들겨주고는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명복이는 손으로 껍질을 살살 아래로 내리밀었다. 하지만 고추는 성난듯이 꼿꼿하게 서있고 껍질은 밀려내려오지 않았다. 다칠 때마다 쿡쿡 아파났다.   외할머니 말처럼 절루 내려올가? 남자들은 크면 왜 고추껍질이 올라가는데?…   명복이는 두손을 허리에 짚고 걱정스레 고추를 노려보다말고 어쩔수없이 팬티를 끌어올려 입고는 전등을 껐다. 외할머니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남자들은 크면 수염도 나는걸 보면 고추의 껍질도 우로 말려올라갈수도 있지 않는가. 헌데 엄마와 이모, 딸 둘만 키운 외할머니가 남자애들의 성장에 대해 알기는 하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달리 뭘 어찌할수도 없는 명복이였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말을 믿고 고추의 껍질이 절로 내려오거나 혹은 사타구니의 아픔이 사라지길 기다렸지만 사흘이 지난 아침까지도 고추는 그대로였다. 오줌을 눌 때마다 조금씩 아파서 물도 적게 마시지만 통증은 가끔 가다 은은하게 전해졌다.   아… 아빠라도 있으면 물어볼텐데…   명복이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으며 한숨을 훌 내쉬였다. 명복이는 요즘 따라 아빠가 무척 그리웠다. 명복이는 엄마나 아빠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엄마는 명복이가 여섯살 때에 한국에 갔다고 하셨는데 여태 귀국한적이 없었다. 처음엔 한달에 한번씩 전화가 오다가 차츰 두어달에 한번씩으로 줄더니 이젠 일년에 고작 두세번 정도 전화가 온다. 전화가 올적마다 “나중에 가면 그동안 못해준거 다 보상해줄게.”하며 울먹이는 엄마였지만 명복이는 이젠 “엄마”라는 말조차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여섯살 때 엄마랑 찍은 사진을 닳도록 들여다보며 엄마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명복이의 얼굴은 여섯살 때의 얼굴이 아니였다. 동그랗던 얼굴이 기름해졌고 이마에 여드름이 줄느런히 돋아있는가 하면 코밑도 가뭇가뭇해서 엄마가 알아볼수 있을지 걱정이였다. 그래도 엄마는 목소리라도 들을수 있었지만 아빠의 소식은 그 어디에서도 들을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아빠를 입에 올리는 법이 없었고 함께 사는 동안 명복이를 보러 오는 친가집식구들은 없었다. 명복이가 외가집만 있기라도 하듯이 기껏해야 이모네가 다녀가고 외할머니의 친척들이 다녀가는게 다였다.      2학년땐가, “나의 가족”을 소개하는 글을 쓰라는 숙제가 있어서 외할머니에게 아빠에 대해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아빤 먼데 갔단다. 너무 멀어서 언제 올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외할미의 말을 잘 들으면서 쑥쑥 커야 되는거다.”고 하셨다. 그때 외할머니의 표정이 무서우리만치 어두워서 겁을 덜컥 먹은 명복이는 그후부터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친구들이 아빠가 어디 갔냐고 물으면 “먼데 가셨대.”하고 얼버무렸다. 이젠 친구도 연미밖에 남지 않았으니 묻는 사람도 없었다. 아빠가 한국에 가고 할머니랑 같이 살고있는 연미에겐 외가집이 없었고 연미네 엄마도 아주 멀리 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둘은 가끔 수업을 하다가도 박선생님이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잠간 눈을 감고 조는 사이면 멍하니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명복이는 먼데 가신 아빠를, 연미는 먼데 가신 엄마를 머리속에 그리고있었던것이다.    지금도 명복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기억에도 없는 아빠의 얼굴을 머리속으로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소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명복이는 오후 수업이 끝나자 곧장 집으로 와버렸다. 엉기적거리며 평소의 두배나 되는 시간을 소요하여 집에 도착할무렵 고추는 더 아파났다. 명복이가 잔뜩 울상이 되여 집에 들어서보니 외할머니가 민들레를 다듬고있었다.    “왔냐? 연미가 학교 못 갔지? 어유, 그 불쌍한것이 죽다 살았네라.”   “네? 연미가요? 왜요?”   외할머니의 밑도 끝도 없이 중뿔난 소리에 명복이는 두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글쎄, 가스중독이란다. 엊저녁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석탄이 잘 타지 않았나보지. 니네 박선생님이 연미 찾으러 왔다가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렀다니까. 아까 촌장이 시내에서 내려올 때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더라.”   “와… 어떻게 그런 일이…”   명복이는 입을 커다랗게 벌린채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연미에게 전화를 한다고 나가신 박선생님이 안 보이시길래 민들레나 캐고있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던것이다. 하긴 학교에 있었다면 하교할 때 들려서 교실문 잘 잠그라고 당부를 하고 가시는 분인데 오후 내내 안 보이시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다.   “큰일날번했던거지. 하루밤새에 연미랑 할미랑 다 죽을번했잖냐. 그러길래 농촌에서는 석탄보다는 나무로 불을 지펴야 하는건데. 쯧쯧-”   외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깨끗하게 다듬은 민들레를 놋대야에 보기 좋게 담아놓으셨다.   그러니까 연미가 학교에 못 왔지. 맹탕 학교를 빼먹을 계집애가 아닌데.   명복이는 서둘러 책가방을 벗어놓고 슬그머니 뒤로 돌아서서 바지와 팬티를 끌어내렸다. 얼른 고추를 살펴봤다.   헌데!   댕댕 말려올라간 껍질이 시멀겋게 부어있지 않는가! 툭 다치기라도 하면 당금이라도 터질듯이 팽팽하게 부은 그것은 마치 고추중간에 양파링과자를 걸어놓은것 같았다.   “할머니, 내 고추가 떨어지는것 아니예요?”   명복이는 외할머니를 향해 덴겁한 소리를 지르다말고 급기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왜? 아직도 그놈의 고추가 아프냐?”   외할머니는 일손을 멈추고 명복이쪽으로 다가앉았다 .   “할미가 좀 보자… 어유- 곪은것 아냐? 이놈의 고추가 말썽이네… 걱정말아. 랠은 할미랑 시내병원에 가보자. 안 그래도 민들레를 이모 집에 갖다주려 했는데 잘됐네라. 뚝 그쳐. 사내녀석이-”   외할머니는 “어구구”하며 허리를 짚고 몸을 일으키고는 명복이의 팬티며 바지를 살살 끄당겨 입혀줬다. 그리고 명복이를 꼭 가슴에 끄당겨 안아주었다. 외할머니보다 한뼘이나 더 큰 명복이는 할머니의 몸에서 나는 시크무레한 냄새를 맡으며 곱다라니 안겨있었다. 어쨌거나 명복이는 아직 아이일뿐이였다.     이튿날 아침, 명복이와 외할머니는 첫 뻐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창밖으로 파랗게 살이 오르기 시작한 산들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지만 명복이는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시내에 이르러 길 량켠에 화사하게 핀 복숭아꽃들이 눈에 띄워서야 입가에 조금씩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역에 이르러 뻐스에서 내리니 이모가 기다리고있었다. 연두색코드에 흰 바지를 받쳐입은 이모는 길가에 핀 복숭아꽃처럼 화사했다.   “이모, 안녕하셨어요?”   명복이는 입속으로 낮게 웅얼거리며 이모를 향해 히죽 웃었다.   “어- 그래.”   이모는 명복이를 쓰윽 쓸어보고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민들레를 넣은 비닐주머니를 받아들며 미간을 찌프렸다.   “엄만 또 멀 이런걸 갖고오셨어요? 병원 오신다며…”   “좋은거잖냐. 요즘엔 시내에서 파는 민들레도 비료를 친다더라.”   외할머니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이모가 회사에 잠간 말미를 맡은것이여서 셋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이르러 진찰권을 끊으면서 이모는 “니는 아플데가 없어서 별데 다 아프니?”하며 명복이의 사타구니쪽을 힐끗 쳐다봤다. 명복이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주춤주춤 외할머니의 뒤로 숨어들었다.    비뇨외과진찰실앞에 이르니 몇사람이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있었다. 명복이는 진찰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고추에 무슨 병은 생긴건 아닌지, 무슨 수술이라도 해야 하는건 아닌지 걱정하며 긴장을 하고있었다.    드디여 명복이의 차례가 되여 진찰실에 들어서니 50대쯤 되여보이는 남자가 흰 의사가운을 입고 점잖게 앉아있었다.   “누가, 어디 아픈데요?”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조선말을 들으며 긴장되였던 마음이 다소 풀렸다. 뭐라고 말할가 막 입을 벌리려는데 “얘가요, 제 조칸데요, 고추가 아프대요.” 하며 이모가 명복이를 의사앞으로 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의사가 마주한 테블앞에 선 명복이는 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녀석, 부끄러워하긴. 자- 내가 좀 봐두 괜찮겠어? 이쪽으로 와.”   의사는 싱글 웃으며 명복이를 자기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명복이는 머뭇거리며 테블을 돌아 의사앞에 가서 멈춰섰다. 의사는 조심스레 바지를 끌어내려 명복이의 고추를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도로 바지를 올려주었다.   “생식기에 염증이 왔어요. 큰 문제는 없어요. 일단은 고름부터 빼야 하니까 처치비를 물고 오세요.”   이모가 얼른 의사가 떼여주는 처방전을 들고 돈 물러 나가버리자 명복이는 또 쭈밋거리며 외할머니곁에 붙어섰다.   “근데 쟈가 고추껍질이 까올라져 올라간건 괜찮수? 그것땜에 염증이 오고 아픈거 아니유?”   외할머니가 의사를 보며 진물이 누르끼레 나온 눈을 슴벅거렸다.   “할머니, 그건 포피라고 하는겁니다. 남자애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생식기가 발달해지면서 귀두와 포피가 떨어지게 되여있는겁니다. 크는 과정에 꼭 겪는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평소에 자주 씻어주면서 위생청결을 잘해주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자연포경이 안되면 간단한 시술로도 해결할수 있으니까 걱정 안하셔두 됩니다.”   포피? 귀두?   처음 듣는 단어에 명복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 무슨 말인지… 암튼 의사선생이 괜찮다니까 괜찮은거겠쥬.”   외할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명복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모가 수금도장을 팍팍 찍은 종이딱지를 가져오자 의사는 명복이를 데리고 옆칸에 딸린 외과처치실로 들어갔다.   “왜 아빠랑 안 왔니? 다들 아빠랑 오던데.”   “아빠요… 먼데 갔어요. 엄마도 한국 가고. 외할머니랑 사는데…”   낮은 소리로 대답하는 명복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있었다.   “무섭니? 괜찮아. 사내녀석이 이런것도 못 참으면 어떡하니?”   의사는 명복이더러 바지를 내리게 하고 핀센트로 약솜을 집어 고추를 살살 소독하였다.   “자식, 고추가 잘 생겼네. 자, 봐라. 요렇게 댕댕 말려올라간 놈은 포피고 여기 성이 나면 머리를 쳐드는 놈이 귀두야. 남자애가 어른이 될려면 이렇게 포피와 귀두가 떨어져있어야 하거든. 눈까풀이 자유로이 움직이며 눈동자를 가리거나 드러내는것처럼 포피도 자유롭게 움직여서 필요에 따라서 귀두를 덮거나 드러내야 하는거란다. 지금 포피가 막 귀두랑 떨어질려고 이러는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   의사가 곪은 곳을 살짝 터치고 고름을 쥐여짜는것이 아팠지만 명복이는 “아”하고 낮다랗게 신음소리를 뱉어내며 참았다. 웬지 의사앞에서 의젓한 남자애가 되고싶었던것이다.   처치가 끝나고나서 의사는 명복이에게 포피를 우로 끄당겨서 고추를 씻는 방법을 자상히 알려주셨다.   “할머니는 녀자라서 모르니까 너 혼자서 매일마다 씻어야 돼. 할수 있지?”   다짐을 받는듯한 의사의 말에 명복이는 힘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 의사가 시키는것이라면 고추씻기가 아니라 무슨 수술이라는것도 할수 있을것 같았다.   다시 진찰실에 들어가서 의사는 외할머니에게도 명복이의 고추를 잘 씻어주라고 말씀하셨고 연고를 처방해주면서 다음부터는 아프면 참지 말고 제때에 병원에 오라고 거듭 당부했다.    “사내들의 명줄과도 같은건데 잘 건사를 해야죠.”하는 롱담 섞인 의사의 말을 뒤로 하며 외할머니랑 진찰실에서 나오는 명복이의 마음은 구름이 걷힌듯이 가벼웠다.    계단을 내려 병원로비에 이른 명복이는 슬며시 외할머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할머니, 저… 연미를 보고 가도 돼요?”   “누군데? 시간이 바빠죽겠는데 얘는?”   저만치 앞서서 콩콩거리며 쫓기듯이 걷던 이모가 발걸음을 딱 멈추고 홱 돌아섰다.    “제 친구가…”   명복이는 우물거리며 힐끗 외할머니의 눈치를 봤다.   “어유, 깜빡 잊었구나. 올 때부터 그 생각을 하고있었던건데. 거 있잖냐? 우물집 상철이네 딸애, 그 녀자가 낳은 계집애를 말하는거다.”   외할머니는 앞이마를 철썩 치더니 이모를 향해 목소리를 죽였다.   “아… 누군가 신고해서 녀자가 도로 북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그 집? 근데 애가 왜요?”   명복이는 뭔 소린가싶어 눈이 둥그래서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어제 가스중독이 와서 병원에 실려왔네라. 넌 얼른 회사에 가봐라. 나랑 명복이가 보구 갈게.”   “그럼, 그렇게 해요. 요즘 회사일이 바빠서 자리를 오래 비울수 없어요. 명복이도 이모가 한가할 때 놀러 오도록 해.”   이모는 명복이와 외할머니에게 손을 저어보이고는 쌩 바람을 일구며 로비를 빠져나갔다. 외할머니가 연미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를 않아서 촌장과 통화를 하고 둘은 물어서 병실로 갔다.   막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가려는데 “명복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다보니 박선생님이 손에 보온병을 들고 걸어오셨다. 명복이가 얼른 박선생님을 향해 경례를 올리는데 외할머니가 성큼 나서서 박선생님의 손을 잡으며“어구, 선생님이구려. 선생님덕에 연미랑 할미랑 살았다더구만.”하고 부산을 떨었다.   “뭘요, 명복이가 아프다더니 의사는 보였어요?”   박선생님은 손으로 명복이의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 역시나 향긋한 냄새에 명복이는 습관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보였수다. 괜찮다누만. 녀석 고…”   “할머니!”   명복이는 얼굴이 빨개지며 할머니의 말을 가로챘다. 외할머니가 엉겁결에 말을 끊고 명복이를 쳐다보는데 박선생님은 히죽 웃더니 “명복이가 쑥스러운가봐요. 저도 명복이까지 등교하지 못한다니까 아예 청가를 맡고 여기로 왔어요. 얼른 들어가요.”하며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제서야 명복이와 외할머니도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박선생님은 “명복이네가 보러 왔어요.”하며 보온병을 탁자우에 놓았다.   연미와 나란히 누워 점적주사를 맞고있던 연미 할머니가 줄레줄레 들어서는 그들을 보며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였다.    “어떻게 왔수? 바쁜 걸음을 하셨네.”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연미 할머니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듯 가벼웠다.   “어유- 다행이요. 동갑이나 연미에게 박선생님은 정말 귀인이요. 큰일날번했잖구머요? 나도 이 녀석이 좀 아프다길래 왔던 걸음에 들렸소.”   외할머니가 연미 할머니의 침대가에 걸터앉는바람에 명복이는 문어구에 선채 발로 바닥만 긁었다.   박선생님은 명복이한테 침대곁에 있던 나무의자를 내여주고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명복이는 의자에 앉아 병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천정에 일광등 하나가 달려있고 출입문 왼쪽에 나란히 걸어놓은 “환자수칙”과 “문병주의사항”이 하얀 벽에 붙어있을뿐 나머지 공간은 텅텅 비여있었다. 연미와 연미 할머니가 차지한 침대 두개가 좌우 량쪽벽에 붙어있고 침대머리에 탁자가 나란히 놓여있으며 그사이에 한메터 남짓한 통로가 있었다. 이불이며 침대시트까지 하얀 간소한 공간에 얼굴이 하얀 연미가 점적주사바늘을 손등에 꽂은채 새근거리며 자고있었다. 명복이는 주사액이 똑똑 떨어져 혈관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말고 “연미, 저 불쌍한것을 하마트면 잃을번했다니까.”하는 소리에 할머니들쪽에 눈길을 돌렸다. 외할머니는 연미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있었고 연미 할머니의 움푹 패인 우묵한 눈에서 홀쪽하니 여윈 볼을 타고 눈물이 주루룩 흐르고있었다.   “정신이 드니까 연미가 무사한지부터 물었지 뭐유. 제 에미가 젖먹이를 떼여놓고 울면서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나중에라도 쟤 엄마를 만나면 내가 뭐라고 하겠소.”   “연미나 우리 명복이나 불쌍하긴 매 한가지요. 상철이는 한국에 가서도 연미 에밀 못 만났다우? 한국 갈 때는 그럴 희망이라도 품고 간다드만.”   외할머니는 명복이쪽에 측은한 눈길을 주며 눈굽을 찍었다.   “그랬으면 언녕 돌아왔겠지. 그냥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잡고있는거짐. 상철이와 쟤 에미 사이가 각별했잖소.”   “울 명숙이도 언제 올려는지… 명복이가 이젠 저리 커가는데. 자식들은 끝까지 애물단지요. 후-”   두 할머니는 마주보며 한숨을 깊게 토해냈다.   자고있는 연미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는 명복이의 마음은 썩 가볍지가 않았다. 후유증이 생길가봐 며칠은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니까 한주일정도는 혼자 공부할걸 생각하니 더구나 어깨가 축 처졌다. 게다가 왜선지 외할머니의 얼굴도 어두워보여서 말없이 뒤를 따라 스적스적 걷기만 하였다. 뻐스에 앉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할머니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이따금씩 명복이의 볼을 만지다, 머리를 쓰다듬다 하시면서 명복이를 정깊게 바라볼뿐이였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나서 외할머니는 또 민들레를 캔다고 나가셨고 명복이는 방안에서 뒹굴며 티비를 보다가 낮잠을 잤다.   한잠을 푹 자고 깨여나니 외할머니가 돌아와서 저녁밥을 짓고계셨다. 구들목에 놓인 민들레바구니에는 민들레가 얼마 들어있지 않았다.   저녁를 먹고나서 명복이는 의사가 처치를 하고 내려놓은 고추포피를 우로 잡아당겨 귀두와 포피를 깨끗이 씻고 연고를 발랐다. 포피가 내려와있고 고름도 빠졌는지라 별로 아프지가 않아서 저절로 입이 벙그레졌다.    명복이가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외할머니가 명복이를 자기앞에 불러앉혔다.   “이젠 너에게 알려주어야 할것 같아서 그런다. 네가 아직 어린것 같지만 어쩔수 없다. 연미 할미를 보니까 사람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구나. 그래서 말인데… 마음 단단히 먹구 들어라. 할미가 종일 생각해보구 어렵게 결정을 내린거니까.”   아빠 일을 알려주려는가?   순간적인 생각에 명복이는 바싹 긴장되였다. 막 가슴이 콩닥거리고 입술이 말라들고있었다.   “네 아빠 영복이는… 네가 세살 때 감옥에 갔네라.”   “네?!”   명복이는 순간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먼데 갔다고 해서 이름도 모르는 먼 나라에 가서 실종이 된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기를 버리고 중국 어딘가에 가서 어떤 아줌마랑 살고있는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병이나 사고로 하늘나라에 간것은 아닌지 하고 상상을 해왔었던것인데 감옥이라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니네 아빤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 뜨고 가족은 아버지랑 남동생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동생, 그러니까 니 삼촌이 니가 한돐이 될가말가 할 때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여버렸지 뭐냐. 그걸 살려보겠다고 니 아빠가 별짓을 다하면서 돈을 벌었거든… 그러다가 그만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간거야. 죄가 중해서 무기징역을 받았다누나.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된단다… 니 할아버지는 화김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돌아가셨고 니 삼촌도 더는 병원비를 이어댈수가 없어서 호흡기를 떼였다드라. 그 후사들을 다 니 엄마가 치렀네라. 니 엄만 자기 할 도린 다 한거다. 그러고 그동안 진 빚을 갚으려고 한국으로 간거고. 니 엄마에 대해선 니 이모한테서 들어도 될거니까 나중에 이야기하는걸루 하고… 암튼 니는 할미 말을 잘 들으며 건강하게 커야 되구 이 할미랑 의지해서 살아야 된다는것만 알문 되는거다.”   명복이는 한동안 멍멍해서 외할머니만 빤히 쳐다보았다. 아빠가 감옥에 갔고 무기징역을 받아서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것만 머리속에 들어올뿐이였다. 그외에 할아버지나 삼촌, 엄마의 얘기는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명복이의 머리속은 이미 아빠얘기로도 충격을 먹고있었으니 그럴법도 했다.    그날밤 명복이는 내내 쇠살창을 사이 둔 사이로 아빠와 헤여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 다음날부터 명복이는 한동안 우울하게 보냈다. 공부를 하다가, 티비를 보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멍해질 때가 많았고 어떤 날엔 까닭없이 이불속에 숨어 펑펑 울었고 어떤 날엔 한족애들과 걸고들어 싸움을 하는가 하면 어떤 날엔 축구를 한답시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종일 운동장에서 뛰여다녔었다. 그러다가 연미가 학교에 나오자 다시 말동무가 생기고 같이 놀기도 하면서 서서히 웃음을 되찾고 명랑해졌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알려주지 않은 사실도 있음을 명복이는 감감 모르고있었다. 명복이의 아빠가 지은 죄는 인신매매이며  그중의 한사람이 연미의 엄마였다는 사실, 그리고 엄마는 한국에서 한국사람이랑 재혼해서 살고있다는 사실도.   어쩜 그 전부의 사실을 알았더라면 명복이는 다시 연미랑 웃고웃으며 학교에 다닐수 없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명복이는 그런 사실들을 모른채 성장통을 겪으면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알아가고있었고 매일마다 커가고있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뒤의 어느날 아침이였다.   명복이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며 휘휘호호 휘파람을 불었다. 씨엉씨엉 걷는 걸음새에서부터 힘이 넘치고있었다.    명복이가 아침에 일어나니 고추가 성을 내고 곧추 서있었고 귀두가 쑤욱 머리를 내민채 포피는 우로 건뜻 말려올라가있었다. 손으로 귀두와 포피를 살살 만져봐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귀두를 살살 만질 때마다 이상야릇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명복이가 살그머니 포피를 잡아당겨 귀두를 덮어놓아도 포피는 다시 우로 건뜻 말려올라갔다. 아마 눈까풀처럼 자유로와진 모양이였다. 혹시라도 무슨 수술이란것을 하게 될가봐 아침저녁을 열심히 고추를 씻은 명복이고보면 한시름 놓고 기뻐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지금, 명복이는 몸도 마음도 훌쩍 커있었다. 외할머니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뒤로 귀두도 꿈틀꿈틀 밖으로 나오려 하는걸 봐선 남자로 되여가는거니까 아빠나 엄마가 없어도 이젠 살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명복이였다. 열네살인 지금까지도 아빠나 엄마가 없이 외할머니의 손에서도 잘 자라왔지 않는가 하는 자부심에 신심도 생겼다. 명복이는 아직 꿈도 확실치 않지만 앞으로 뭘하든 잘 살아갈것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열심히 하면 화가나 디자이너도 될수 있을것 같고 다른 그 무엇도 될수 있을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오늘 아침 귀두의 로출로 확신이 되여버리고말았던것이다. 아마 한사람을 조금 크게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하루면 충분하다는 말도 이러한데서 비롯된것인지. 암튼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기분이 좋아진 명복이였다.   명복이가 흥얼거리며 막 골목길에서 벗어나서 학교로 올라가는 큰길에 접어드는데 옆골목으로부터 연미가 뛰쳐나왔다.    “너 어제 그 음악프로 봤어? 노래하는거 죽이지?”   연미는 신이 나서 안무동작까지 보여줬다.   “너두 참, 가수가 되면 한국 갈려고 그러지? 엄마 만나려고.”   “어?! 어떻게 알았어? 울 엄마에 대해 알어?”   명복이는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어른들이 말하는걸 엿들었어. 니가 병원에서 잠만 자고있을 때…”   “아… 그랬구나. 실은 나도 안지 얼마 안되는데. 내가 음력설때 아빠한테 집에 오라고 울며불며 야단을 치니까 아빠가 할수없이 사정을 알려준거야. 근데 니 아빠 소식은 알어? 작년엔가, 니네 외할머니와 우리 할머니가 이야기하는것을 살짝 엿듣긴 했는데… 듣고도 그냥 잠을 자는척하면서 누워있느라고 엉뎅이가 다 델번했었거든. 히힛-”   연미는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크득크득 웃었다. 계집애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맨날 웃고 다니는 연미를 보며 명복이는 별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슬픔 같은것은 꼬물만큼도 찾아볼수가 없는것을 봐선 연미는 아직 철부지였다. 적어도 명복이의 생각으론 그랬다.   “알어. 하지만 괜찮어. 난 이제 어른이 되여가고있으니까.”   명복이는 목소리에 힘을 넣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연미는 눈을 깜빡이며 명복이를 쳐보다가 깔깔 웃으며 저만치 앞으로 뛰여갔다.   명복이는 앞서 뛰여가는 연미를 따라잡으려 성큼성큼 뛰여갔다.   앞서거니뒤서거니 뛰여가는 연미와 명복이의 등뒤로 아침해살이 무더기로 쏟아지고있었다…  
25    손을 잡아주세요 댓글:  조회:427  추천:0  2019-07-11
 김영해    손을 잡아주세요        띠리링― 띠리링―   핸드폰 알람소리가 시끄럽게 울리였다. 한창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던 옥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더듬더듬 머리맡을 만졌다. 핸드폰이 손에 닿지 않는지라 억지로 눈을 떠보니 핸드폰이 화장대 우에서 번쩍거리며 부르릉부르릉 몸을 떨고 있었다. 아마도 남편이 신새벽에 나가면서 충전코드에 꽂아서 올려놓은 모양이였다. 늘 그랬다. 잠들기 전까지 핸드폰을 매만지며 드라마를 보거나 시시껄렁한 글들을 읽는 옥희는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을 잊고 있었고 옥희가 단잠에 빠진 신새벽에 낚시를 나가는 남편은 옥희의 핸드폰을 충전해놓군 하였다.   옥희는 끙― 하고 힘을 쓰며 몸을 반쯤 일으켜 핸드폰 쪽으로 손을 뻗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룬―   막 욕이 나가려는 것을 참으며 옥희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확 열어제꼈다. 얼른 침대에서 내려 시트를 살폈다. 다행히 시트에 젖은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축축해진 속옷은 아래도리에 끈끈하게 달라붙으며 불쾌감을 주고 있었다. 옥희는 속옷과 잠옷을 와락와락 벗어 세탁기에 훌 처넣었다. 세제를 넣고 전원을 련결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샤와를 하려다가 대야에 물을 받아 쭈그리고 앉아 아래도리만 씻고는 나와버렸다. 속옷을 찾아입고 다시 이불 속에 기여든 옥희는 이불을 턱밑까지 끄당겨 덮고 머룽머룽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이러지? 벌써 이러면 어쩔려구… 후―   옥희의 입에서 낮은 한숨소리가 새여나왔다. 반년 전부터 실실 새는 오줌 때문에 민망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가끔 가다가 어쩔 새 없이 오줌이 새여나와 한번씩 실수를 하고 나면 기분은 엉망이였다. 오늘도 핸드폰을 쥐려고 갑자기 힘을 쓴 게 탈이였다. 이젠 큰소리로 웃는 것도 조심스러워지는 옥희였다.   병원에라도 갈가?… 아니지, 그러면 다들 알게 될 텐데…   옥희는 길게 숨을 들이쉬였다가 내뱉고는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처음 몇번은 당황하다가 인터넷에서 두루 검색을 해보고 뇨실금이겠구나 하고 인지를 하고나서부터 저절로 약방에 가서 약을 사먹고 있지만 차도는 별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 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이제 막 50대초반인데 뇨실금으로 병원에 들락거린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다닐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금이라도 “××는 뇨실금이라며? 녀자가 저 정도면 앞날이 훤한거지 뭐.”하고 빈정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올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이전에 한 남성동료가 전립선염이였는데 그때 다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남성동료가 지나갈 때마다 지린내가 나기라도 하듯 코를 찡그리며 돌아섰던 것을 보면 병도 병 나름으로 다른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였다. 다른 병도 아니고 기관이 로화되여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이며 오줌과 관계되는 병이라는 것 때문에 옥희는 스스로도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나이가 되면 원래 이렇게 삐걱거리게 되는 건가?… 그냥 이대로 살아? 어디 살점이 아픈 것도 아니여서 사는데는 지장이 없잖아. 내 맘만 추스리면 못살 것도 없지 뭐…   이런저런 생각을 두서없이 굴리다 말고 옥희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버렸다.     옥희가 눈을 떴을 때는 막 출근시간이 되여오고 있었다. 밥도 못 먹은 채 허둥거리며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대충 화장을 끝내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출석체크시간이 지났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단위에 이르러 헐금씨금 계단을 올라 사무실에 이르러 보니 아무도 없었다. 사위를 두리번거리다 말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 오늘 월요일이지!   옥희는 몸을 돌려 회의실로 뛰여갔다. 본인이야 뛴다고 하겠지만 뒤에서 보면 그냥 웃몸은 앞으로 향하는데 엉뎅이와 아래 몸은 뒤에 처져서 겨우 따라가고있어 막 엎어질 듯한 우스꽝스러운 꼴이였다. 나이라는 것은 본인이 아무리 “마음이 청춘인데”하고 고집을 피워도 신체의 곳곳에서 “나 나이 들었수”하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다행히 뒤문이 열려있어 옥희는 얼굴에 게면쩍은 웃음을 단 채 허리를 약간 굽히며 걸어들어가 뒤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직함(职衔)평의 때문에 월요일에 출근하자 바람으로 회의를 한다고 토요일에 위챗통지가 왔었는데 그걸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옥희는 숨을 고르며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 같으면 핸드폰을 놀거나 소곤소곤 잡담을 했을 텐데 의외로 다들 앞을 응시하며 회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직함이란 로임인상과 관계되는 문제인지라 그럴 법도 했다. 해마다 직함평의에 관한 정책은 조금씩 변화가 있었고 직함정원도 급별로 많아지거나 적어지거나 하면서 대중이 없었다. 직함평의에 관한 문건이나 표준 같은 것은 누구나 관심하는 내용이니 자연히 회의내용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도 고급직함으로 평의되였으면 좋을 텐데…   옥희는 속구구를 하다 말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3년 후면 퇴직을 하게 되여서 퇴직하기 전에 고급직함을 받고 로임도 더 받아보고 싶지만 생각대로 쉬운 게 아니였다. 옥희가 한창 어렸을 때엔 사업년한이 30여년이 되면 나이순번으로 거의 고급직함을 받게 되여있었지만 몇년전부터는 아니였다. 뭐든 실적으로 경쟁을 하게 되여있고 옥희처럼 나이가 든 사람들은 쟁쟁한 젊은이들과 비긴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리하게 되여있었다. 영예증서나 론문 같은 것들을 갖고 점수를 매기는데 사업년한이 긴 것 빼고는 다른 항목들은 젊은이들과는 비교도 안되였다. 작년에도 그랬다. 고급직함 정원은 7명이였고 평의표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젊은이 4명과 50대 3명이 순위권 안에 들었었다. 헌데 결과공시가 끝나기 바쁘게 순위권 밖이였던 젊은이 하나가 점수계산이 잘못되였다고 의견을 제기해왔고 령도들이 계산과 순위배렬을 다시 하고 보니 고급직함을 평의받은 사람 가운데 50대는 고작 2명 뿐이였는데 그것도 순위가 말미여서 간당간당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막 퇴직을 앞둔 50대들은 “50대들에게는 따로 정원을 배분해야 한다.”느니, “사업년한으로 참가자격을 제한해야 한다.”느니, “차라리 나이순번으로 하자.”느니 하며 우야우야 떠들었지만 “젊은이들의 적극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게 점수제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하고 령도층에서 한마디로 일축하는 바람에 아무 소용이 없고 말았다. 아마 올해에도 경쟁이 치렬할 것이 예상되는 마당에 몇년째 손을 꼽으며 퇴직할 날만 기다려온 옥희에게 버젓이 내놓을 만한 실적은 별로 없었다. 당연지사였다. 뭔가를 이루어보겠다고 뛰여다닌다는 것은 혈기가 왕성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지 40대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승진이며 영예 같은 것들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터라 다들 쉬운 일을 맡아 적당히 쉬여가며 로임을 타먹고 하루하루를 소진하는 것이 당연한 거로 되여있으니 말이다. 지금 같아선 옥희 정도면 퇴직할 때까지 고급직함을 욕심내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일지도 몰랐다. 공연히 들떠있다가 실망만 하게 되느니 차라리 평정심으로 느긋하게 바라만 보는 게 건강에도 좋을 것이였다. 더우기 옥희는 다른 사람이랑 옴니암니 무엇인가를 따지며 아귀다툼을 하는데 서툴렀다.   에이, 될 대로 되라지. 그깟 로임 안오르면 말고…   옥희는 속으로 게두덜거리며 핸드빽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까부터 부르릉거리며 진동음이 울리는 것을 회의가 끝나면 전화를 해볼 양으로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종시 그칠 념을 않고 집요하게 울리고 있어 ‘누가 급한 일이라도 있나?’하고 슬쩍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엥?! 웬 일이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옥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핸드폰액정에 ‘양로원원장’이라고 현시되여있었던 것이다.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태 옥희한테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는 원장이였다.   옥희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허리를 구부정한 채 얼른 뒤문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오기 바쁘게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무슨 일인데요?!”   옥희는 얼른 복도구석 쪽으로 발걸음을 재우치며 낮으나 힘있고 급박하게 물었다.   “엄마분이 딸한테 전화를 해달라고 아침부터 부탁을 해서요. 일하는 시간이여서 바쁠 거라고 말씀드렸는데도 오늘은 기어이 고집을 피우네요.”   걸걸한 원장의 목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가운데 “울 딸이 전화를 받소? 날 좀 바꿔주오.”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힘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옥희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피씩 웃어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왜 전화를 넣어달라고 했을지 짐작이 갔던 것이다.     엄마는 아직 자기절로 식사도 하고 집안에서 거동도 하지만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두세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소변을 보면 속옷과 바지를 채 끌어내리지 않아서 몽땅 젖어버리는 것이 례상사, 물은 챙겨주지 않으면 하루종일 마시지 않아 변비가 생기고 누가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자기를 미워한다며 앵돌아지기가 일쑤였다. 하루에도 서너번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히며 애를 쓰던 올케가 오죽하면 “난 이젠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어요.”하고 손을 들고 투항을 해왔겠는가. 옥희의 말처럼 이젠 큰애기가 되여버린 엄마를 혼자서 시골집에 있게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옥희는 시아버지가 자취를 하는 마당에 친정엄마를 모신다고 나설 형편이 아니였고 뭐가 문젠지 아이도 없이 딩크족이 되여 북경에서 자유롭게 사는 오빠에게 엄마를 모셔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였다. 남동생이 한국에 가고 혼자서 여태 엄마를 모셔온 올케더러 힘들어도 참아라고 한다는 것은 누나나 형이 되여서도 차마 못할 노릇이였다. 결국 자식들이 함께 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양로원에 모시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식들의 결정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양로원으로 떠나가는 날, 엄마는 출발시간이 다 되였는데도 자꾸 차에 실은 옷보퉁이를 끌어내리셨다.   “낯선 곳에 가서 어찌 사냐? 호리원들이 그렇게 구박을 한다든데…”   “어머니, 괜찮아요. 원장도 조선족이고 조선족할머니들도 많아서 말동무가 될 거얘요.”   올케는 조심스레 엄마의 손에서 옷보퉁이를 앗아 다시 차에 실었다. 올케는 옥희보다 두살 어리지만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던 녀인이여서 그런지 얼굴색이 칙칙하고 피부가 거칠어서 오히려 년상 같아보였다.   “엄마, 구박은 무슨? 오히려 나보다도 잔소리를 더 안할 걸요.”   “네가 뭘 아니?! 나도 다 들은 소리가 있는데.”   엄마는 버럭 화를 내셨다. 올케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하다가 옥희를 향해 불만을 쏟아낸 것이였다.    “엄마, 그건 다 헛소문이얘요. 이제 엄마가 양로원에 가게 되면 올케도 한국에 가기로 했어요. 애들도 다 커서 제노릇을 하는데 부부가 마냥 떨어져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니까 엄마 혼자 여기 못있어요.”   “나두 안다. 이전엔 애 공부시키느라고, 후엔 나를 돌보느라고 며느리가 여태 시골에 처박혀있은 거. 며느리는 자식노릇 잘한 거여. 그러게 나 혼자 있는다잖냐!”   엄마는 올케의 눈치를 힐끗 보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웅얼거리시더니 종당엔 또 옥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어머니, 미안해요. 저두 이젠 나이가 드니까 몸이 아파서 애아버지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그래요.”   천성이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올케는 두 손만 마주 비비며 송구스레 시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적당히 부푼 몸이며, 강굴강굴 지져올린 파마머리며, 새로 꺼내입은 주름진 코트 때문에 촌티가 완연한 올케는 엄마 앞에선 언제나 싹싹하고 착한 며느리였다. 량부모를 일찍 여의고 시부모들을 제 부모처럼 모셔온 올케 덕분에 그동안 한시름을 덜고 살았던 옥희네 형제였다.   “자넬 뭐라 하는 게 아니요. 쟤가 자꾸 날 혼자 못 있게 하잖수. 이젠 에미말을 귀등으로도 안 듣는 거요.”   엄마는 양로원에 가게 된 것이 옥희탓이 되기라도 하듯 약간 구부정했던 허리를 쭉 펴서 뒤짐을 지고 옥희를 향해 눈을 지릅떴다. 옥희는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고 돌아서서 남은 짐들을 챙겼다.   옥희의 남편이 “어머님, 갑시다. 우리가 자주 보러 다닐 게요.”하며 달래서야 차에 오른 엄마는 옥희를 향해 “딸년을 키워 무슨 쓸모가 있냐?! 뭐든 반대부터 하려구 하지!”하고 소리를 한번 더 지르고서야 문을 탕 닫아버렸다. 엄마가 양로원에 가기 싫어서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옥희는 일순 얼굴빛이 흐려졌다. 양로원으로 가는 동안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로 귀찮은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뒤좌석의 엄마를 보며 옥희는 내내 가슴이 알알해났었다.    그렇게 올 때부터 양로원이 싫다고 했던 엄마는 아직도 양로원에 맘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식당아낙네는 음식솜씨가 없어서 반찬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네라.”, “저 한족 호리원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욕한다.”,“어떤 로친네들은 너무 지저분해서 같이 못 있겠다.”하고 옥희한테 공소를 해왔다. 양로원이 여차여차하게 나쁘니 자길 집에 가게 해달라는 속내가 뻔히 보여서 “여기가 우리 시에서도 제일 좋은 양로원이래요. 좋기만 한데 뭘 그래요?”하고 일축해버렸더니 이젠 대놓고 “난 집에 가서 혼자서도 살 수 있네라.”하며 집에 데려다 달라고 옥희한테 간청을 했다. 꼭 마치 유치원에 있기 싫어 앙앙거리며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어린애 같아서 안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였다.      옥희와 엄마의 통화는 짧게 끝나지지가 않았다. 짐작했던 대로 엄마는 수화기를 넘겨받기 바쁘게 집에 한번만 다녀오겠다고 했다.    진땀을 뺀 옥희가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니 회의가 끝나 다들 우르르 회의실에서 쓸어나오고 있었다. 옥희는 얼른 회의실에 가서 핸드빽을 챙겨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옥희보다 두살 많은 선배가 잔뜩 얼굴에 인상을 쓰고 있었다.   “공로는 없어도 고생한 보람은 있다는데 맨날 이게 머요? 맨날 실적실적 하면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요? 젊었을 때 일 안한 사람이 어디 있소?”   보나마나 고급직함평의 때문이였다. 선배가 사무실에서 제일 어른인지라 나이가 어린 후배들은 서로 슬몃슬몃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사무실의 성원은 모두 7명인데 50대는 옥희와 선배 뿐이고 40대 한명, 30대 3명에 20대 한명이다. 사무실에서 고급직함평의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옥희와 선배, 그리고 40대인 명수이다. 작년까지 명수와 옥희는 참여를 포기했었지만 몇년째 점수가 순위권 밖이여서 고급직함을 받지 못했던 선배는 많이 민감해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선배는 이제 1년이면 퇴직하니까 올해가 마지막 기회였다. 어쩜 선배에게 있어서 고급직함은 자기 사업에 대한 총화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참, 옥희두 말해보오. 올해에도 젊은이들이랑 한데 섞어서 점수를 매기는 게 옳다고 생각하오?”   “네? 나는 회의를 잘 듣지 못해서…”   선배가 갑자기 묻는 바람에 옥희는 갈피를 못 잡고 어물거렸다.   “옥희도 퇴직 전엔 고급직함을 받아야지. 우리 나이 든 사람들이 이렇게 손 놓구 앉아있을 게 아니요. 단합을 해야 한다니까.”   “맞아요. 선배님들이 앞에서 길을 잘 닦아야 우리도 나중에 쉬울 거예요. 노력 좀 해보세요. 평의표준을 바꾸든지, 특례를 만들든지.”   아직은 30대라서 고급직함평의에 자격미달인 미선이가 얼씨구나 동을 달았다. 남의 일에 말하기는 쉬운 법이였다.   “글쎄 우리도 선배님들하고 경쟁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포기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도 보세요. 평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만 밑졌죠.”   명수가 어쩔 수 없다는듯이 두 손을 펼쳐보였다. 맞는 말이였다. 업무능력이 좋고 군중위신도 좋은 명수가 작년에 평의된 사람들보다 뒤지는 데가 없었다. 작년까지는 그래도 선배들을 돌보아야지, 선배들이 인츰 퇴직을 하면 그 정원이 또 돌아오는데, 한 단위에서 함께 사업한 세월과 정이 있는데 하는 여론들 때문에 체면 좀 차리는 젊은이들은 평의에 참여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워낙 사람수가 많은 단위여서 약삭바른 젊은이들은 평의에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선배들을 압도했었다. 그리고 또 작년에 평의받은 선배 하나가 고급직함을 받은 사람은 퇴직년한을 5년 연장할 수 있다는 특혜를 누려 퇴직을 안하는 바람에 선배들에게 마냥 양보만 하는 것도 현명치 못한 처사라는 여론이 젊은이들 축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하여 올해엔 다들 평의에 참여할 게 뻔했다. 그러니 경쟁이 더 치렬할 수밖에.   “명수를 말하는 게 아니오. 명수의 능력이야 우리 부서에도 다 인정하잖소. 우리도 욕심은 나는데 젊은이들과 비기면 떨어질 게 뻔하니깐 안타까와서 그러는 거요. 우리가 젊어서 논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젊었을 때는 선배들과 경쟁을 못하게 하더니 지금 이러니까 맹랑해서 그러오.”   선배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선배의 말도 틀린 데가 없었다. 옥희랑 한창 젊었을 때는 사업년한을 따져서 나이 지긋한 사람들 속에서만 평의를 했던 터라 젊은 축들은 평의에 참여할 자격도 없었다. 그때는 비슷한 년령대의 사람들끼리 비겼기에 실적에 현저한 차이가 나지 않았고 그때는 또 지금처럼 영예증서 같은 것이 많은 것도 아니였다. 헌데 나이가 들어 영예증서를 따기 어려운 마당에 갑자기 그것으로 젊은이들과 견준다니 억울할 법도 했다. 그러고 보니 붉은 가위의 증서를 타본 지도 꽤 됐다는 생각이 들어 옥희는 “힝”하고 코바람을 불었다.   “정책이 그렇다는데… 우리가 50대들의 정원(名额)을 따로 떼여주고 우리들끼리 경쟁하게 해달라고 해서… 말이 먹힐가요?”   옥희는 조심스레 선배를 쳐다봤다.    “밑져야 본전 아니겠소? 평의표준이 최종적으로 결정되기 전에 한번 건의라도 해봐야지 별수 있소?”   “글쎄… 그러게요.”   옥희는 종시 맺고 끊지를 못하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그만큼 옥희는 고급직함평의에 간절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이 많은데 가망도 없는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더우기 옥희는 뭐든 치렬하게 쟁취하기보다는 한걸음 물러서서 적당히 양보하면서 편하게 사는 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보세요. 년령대를 끊어서 정원을 배분하는 것도 괜찮다고 봐요. 우리도 선배들이랑 경쟁하기보다 나이 어린 축들끼리 비기는 게 맘도 편해요. 같은 또래에서 실적이 뒤처지는 것은 본인의 문제니깐요. 그럼 힘들 내보세요. 화이팅―”   명수는 옥희와 선배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여보였다. 옥희는 명수를 향해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명수가 밉지 않았다. 선배도 아무 죄 없는 명수를 향해 불만을 쏟아낸다는 것이 부질없어 보였던지 게면쩍게 씩 웃고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선동력이 있는 선배가 50대들을 추동질하여 일을 벌릴 것만 같았다.    이번 주는 부산하겠구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려나?   옥희는 머리를 기웃거리며 어제 채 처리하지 못한 문건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글줄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아침부터 뇨실금이다, 지각이다, 직함평의다 하면서 마음이 어수선해진 마당에 엄마까지 집에 간다고 야단을 쳐놔서 머리속은 뒤죽박죽이 되여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할 분위기가 아니였다. 일도 안하면서 사무상 앞에 앉아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엄마일부터라도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옥희는 잠간 고민을 하다가 지각을 해서 부끄러운 대로 한참이나 어린 주임한테 사정얘기를 하면서 청가를 맡고 나와버렸다. 여기저기에서 불안한 기운이 감돌 것 같은 사무실을 빠져나오니 한결 마음이 가뜬해진 것 같기도 하여 옥희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막 9월에 접어들어 청명한 가을하늘은 푸르고도 높았다. 저런 가을하늘 아래 시원하게 숨 한번 안 들이쉬고 콩크리트상자 속에 갇혀서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한다는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옥희는 슬그머니 팔다리를 쭉쭉 뻗어보고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택시에 앉은 옥희는 습관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의 엄지를 감아쥐여 무릎에 놓았다. 옥희는 종래로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우에 놓는다거나 두 팔을 몸 량켠에 곧게 내리드리우지 않았다. 늘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지 않으면 가방끈을 감아쥐였고 정 안되면 네 손가락으로 엄지를 꼭 감아서 주먹을 부르쥐군 하였다. 엄지가 남의 눈에 띄우는 게 싫어서였다. 옥희의 엄지손가락의 마디는 특별히 짧았다. 어찌된 셈인지 남의 엄지의 절반가량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엄지가 남들보다 많이 짧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열대여섯살이 되여있었고 병원에 가보니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 엄지의 길이가 짧은 것은 미관에 안 좋을 뿐이였지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남들보다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수공작품도 잘 만들었던 옥희였다. 하지만 사춘기에 이르면서 친구들이 “어머, 엄지가 이렇게 짧아? 엄청 귀엽네.”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싫었던 옥희는 차츰 엄지를 감추고 다니기 시작했다. 엄지 때문에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마저 끌어당긴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옥희는 손을 쳐들거나 손을 내젓거나 악수를 하는 것과 같은 동작들을 삼가하게 되였고 또 그러다 보니 늘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아있거나 서 있어서 얌전하고 점잖은 이미지를 갖게 되였다. 그런 이미지가 옥희의 성격이 내성적으로 발전하고 사사건건 눈치부터 살피게 되는데 한몫 하였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옥희에게 있어서 흠이 있는 손을 누군가에게 보인다거나 어떤 일에 당면하여 자기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다 어려운 일이였다.   호― 오늘 어떻게 엄마를 달래지?   옥희는 한숨을 내쉬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가을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지나며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이 파도마냥 굼실거리고 있었다. 계절은 참 아름다운 것이였다.     옥희가 양로원에 이르러보니 마침 로인들이 울안에서 해볕쪼임을 하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옥희를 발견한 엄마는 활짝 웃으며 반기는가 싶더니 이내 정색을 했다.   “옥희야, 나 좀 집에 갔다 올란다.”   “집엔 왜요?”   또 아까 전화에서 하던 소리를 할 것 같아 옥희는 일부러 무심한 척했다.   “집을 그렇게 허망 비워두면 쓰냐? 쥐가 다 구멍을 뚫는다니까. 불도 때고 마당도 치우고 해야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올케가 한국에 갈 때 동네사람한테 부탁을 해놨어요. 가끔 들여다보니까 괜찮을 거예요.”   “암튼 내가 한번 다녀와야겠다. 가져올 것도 있다니까. 전번에 급히 오다 보니 짐을 채 못챙겼잖냐?”   “뭔지 말하면 내가 어련히 갖다주지 않을라구요? 집엔 안돼요!”   “넌 왜 그러니?! 집에 한번만 다녀온다는데. 자식을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엄마는 급기야 화를 내며 양로원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뒤에서 손등으로 눈굽을 쓱 훔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옥희는 가슴이 짠해났다.    엄마는 정말 긴요한 물건을 두고와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니였다. 어떻게든 집에 갈려는 속셈이였다.   “엄마, 집엔 이제 아무도 없어요. 빈집에 가서 엄마가 어떻게 혼자서 불을 때고 밥을 지어서 먹고 산다고 그래요? 엄마 나이 이제 여든셋이라구요.”   옥희는 얼른 뒤따라 가서 엄마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이젠 뼈에 살가죽만 붙어 앙상한 손에 온기마저 없었다. 몸도 줄어서 옥희의 어깨아래로 보이는 엄마의 파마머리는 금방 염색한 거라 어색할 정도로 새까맣지만 숫구멍이 펀히 보이게 듬성듬성하였다. 볼살이 처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검버섯이 쿡쿡 박혀있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옥희는 명치끝이 찌릿찌릿 아파왔다.   엄마가 귀찮게 굴 사람은 이제 옥희밖에 없었다. 엄마를 양로원에 모시는 날에도 오빠네는 휴가를 못냈다고 북경에서 오지도 않았었다. 항상 그랬다. 엄마의 생신이나 명절에도 오빠네는 올케나 옥희의 카드로 입금을 하고 엄마한테 전화 한통만 하면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엄마가 갑자기 아프거나 올케네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뛰여다니는 것은 옥희의 몫이였다. 한밤중에라도 남편을 깨워서 차를 몰아 엄마를 병원으로 모시거나 음식꾸레미나 약꾸레미를 안고 휴일마다 시골로 내려갈 때면 가끔 엄마한테 “엄마, 그래도 출세한 큰아들보다 엄마 근처에서 살면서 엄마한테 잔소리를 하는 이 딸이 더 낫지 않아요?”하고 객적은 소리를 하며 킬킬 웃었다. 그러면 엄마는 “그래도 네 오빠가 울 집의 자랑이고 기둥이네라. 너보다는 작은 며느리가 더 고생이잖냐?”하며 종시 옥희에 대한 칭찬은 입도 뻥긋하지 않으셨다. 당연한 노릇을 하면서 웬 생색이냐는 눈빛이셨다. 그럴 만도 했다. 아들도 곁에 없는데 얹혀사니까 며느리의 눈치가 보일 것이고 동동거리며 뛰여다니는 딸이 아깝기보다는 멀리 가기라도 하면 어쩔가 싶은 위구심에 붙들어매고 싶어 더 못되게 구는 거라고 옥희는 믿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는 옥희라면 얼마든지 자기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자꾸만 징징거릴 것이였다. 그런 엄마를 모셔갈 수 없는 자기의 처지 때문에 옥희는 자꾸 가슴속 어딘가로부터 한숨이 새여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원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엄마 방에 들어선 옥희는 화들짝 놀랐다. 크지 않은 구들에 손바닥만 하게 찢어놓은 휴지들이 한가득 널려있었다.   “엄마,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내가 기저귀 만드느라고 두루마리휴지를 찢은 거다.”   “네?!”   옥희는 억이 막혀 입만 커다랗게 벌렸다.    “글쎄 저걸로 기저귀 만든다고 온 오전 극성을 피웠다니까 그러우. 내가 안된다고 해도 말을 들어야 말이지.”   어느새 들어왔는지 키가 작달막한 할머니 하나가 옥희를 보며 하얗게 웃었다. 옥희가 올 때마다 “효녀네. 우리 아들은 광주에 있어서 자주 못 오는데… 언제 올려는지 모르겠네.”하며 부러워하던 할머니였다. 양로원에 올 때마다 표정이 부옇게 죽은 로인네들이 대문 쪽만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서 음식이라도 푼푼히 사와서 대접하는 옥희였다. 1년이 가도록 다녀가는 자식이 없는 로인도 있고 명절이 되여야 우르르 쓸어와서 저희들끼리 왁작 떠들다가 돌아가는 가족도 있어서 매주 다녀가는 옥희가 양로원에선 효녀로 불리우고 있었다.   “종이기저귀가 얼마나 비싸냐? 양로비는 가득 받으면서 기저귀는 너보구 사오라고 하니까 그러지. 근데 잘 안되더라. 후훗―”   엄마는 장한 일을 한 어린애처럼 옥희를 바라보며 키들키들 웃었다. 양로원에 오면서부터 종이기저귀를 차니 옷을 적실 일이 없었지만 기저귀를 차는 엄마를 볼 때마다 옥희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집에서는 지나가는 소리로 “기저귀라도 찰가요?”하면 펄쩍 뛰던 엄마가 곱다라니 기저귀를 차기까지에는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가 싶어서였다.   “엄마두 참―”   할 말을 잃은 옥희는 찢어진 휴지들을 거둬서 차곡차곡 개이기 시작했다. 다시 해볕쪼임을 한다고 엉기적엉기적 다리를 옮겨놓으며 밖으로 나가는 엄마의 뒤모습을 바라보는 옥희는 심란했다.    사람은 원래 이렇게 늙어가는 건가?    어쩜 엄마의 모습에서 후날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세 남매를 키운 엄마도 결국은 양로원에서 서서히 스러져가는데 외동아들만 둔 자신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싶었다. 벌써부터 서서히 늙어간다는 징조를 보여주고 있는 몸뚱아리가 아닌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인지능력이며 둔감해진 몸놀림, 잦은 병치레에다 대신 아집은 세여지고 시름은 많아지고 있어 어느 누가 봐도 중년이라 하기에는 한물 가고 로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애매한 년령대임에야. 그럼에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출근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은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의연한 척 살아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옥희는 자꾸만 한숨이 새여나오고 가슴이 답답해나군 했다.   엄마가 점심식사를 끝내자 옥희는 방구들에 엄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옥희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옛날 일들을 세절까지 기막히게 또렷하게 기억하면서도 지금의 일은, 당장 점심에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조차 생각 안나는 엄마였다. 한창 어릴 때의 이야기를 하다가 응대가 없기에 돌아보니 엄마가 어느새 잠이 들어있었다. 입을 약간 벌린 채 옥희 쪽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누워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옥희는 자꾸 서글퍼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자고 있는 엄마를 그대로 두고 되돌아오는 옥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깨여나기라도 하면 어린애처럼 또 따라 나설가봐 원장한테 인사를 하고 그냥 나와버린 옥희였다.     오후에도 사무실의 분위기는 침침하기만 하였다. 선배의 얼굴은 굳어져있었고 롱담을 잘하는 명수도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후배들은 저마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붙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자중해야 함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였다.    옥희가 커피라도 타 마시려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선배가 불러세웠다. 또 고급직함평의에 관한 소리를 하려나 싶어서 옥희는 얼른 선배 쪽으로 다가갔다.    “저 옥희, 그게 있소?”   선배는 실실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옥희는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슴벅거렸다.   “야, 참!”   선배는 킥킥 웃더니 옥희의 귀에 대고 “생리대 있소?”하고 물어왔다.    “아, 없는데요.”   옥희는 손을 펴보였다.   “생리가 두어달씩 끊기길래 이젠 안 오나 보다고 했던 게 오늘 또 신호가 오더라니까. 안 그래도 오늘 짜증이 자꾸 나길래 고급직함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나 했던 게 이것이 올려구 그랬나 보요. 후훗― 근데 옥희도 아직 페경전이지?”   선배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이 옥희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선배의 입김에 옥희의 귀불이 따가와났다.   “아… 아뇨… 전 작년에… 페경이 된걸요.”   옥희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뇨실금에, 페경에 이제 녀인으로선 다 산게 아닌가?   “어머, 미안. 공연히 물었네. 난 나보다 어리니까 아직 생리가 있을 줄 알고 그랬지. 다른 사람한테 물을 걸 그랬네.”   선배는 미안해하며 옥희의 어깨를 툭 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아참, 페경전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옥희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페경이 되고 나서 한동안은 편하기만 했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실의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녀자이면서도 녀자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 위축되였다. 작년 거의 반년을 우울하게 지냈던 옥희였다. 저절로 운동도 하고 마음도 추스리면서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가끔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파는 매대 앞을 지날 때면 공연히 씁쓸해졌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자기가 페경이 된 녀인임을 자각해야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잊고 지낼 수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선배한테 들켜버리고 나니 죄를 지은 것처럼 느낌이 찝찝했다.    페경이면 페경이지 뭐, 자연의 섭리인 걸 어떡해.   옥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고뿌를 들고 커피를 타러 갔다. 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오전부터 나돌아다니다 나니 오늘 할 일이 쌓여있었다. 몸이야 어떻게 늙어가고 있든 출근하여 꼬박꼬박 로임을 받는 이상 할 일은 해야 했다.    오후에 자꾸 처지는 기분을 추스리며 일을 하느라니 일의 진척은 굼뜨기만 하였다. 겨우 퇴근 전까지 하루일을 마무리한 옥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칼퇴근을 해버렸다. 이럴 때엔 사무실을 떠나고 사람들 속을 떠나는 게 상책이였다. 그만큼 옥희는 혼자의 세상을 좋아했다. 자그마한 주방용품가게를 운영하는 남편은 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아무 때나 훌훌 떠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움 때문에 자기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고 대신 옥희한테 등한했다. 어릴 때 강가에서 자라서 고기잡이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은 젊어서부터 낚시에 흥취를 갖고 있었다. 낚시도구는 릴낚시대부터 고기망태기, 파라솔… 편의걸상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챙겨놓고 시도 때도 없이 낚시하러 다녔다. 이른새벽에도 가고 한밤중에도 가고 온 대지가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도 갔다. 이런 남편 때문에 옥희는 언제나 혼자였다. 밖에 나가서 남들이랑 어울리는 게 불편했던 옥희는 늘 집에 있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를 챙기는데 열중했고 그 아이가 쳐다보기도 어려운 성인이 되여버린 지금은 혼자서 집에 있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집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스스로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평정심을 갖게 되는 게 옥희도 별일이였다.    맏딸이였지만 항렬로 둘째였던 옥희는 어릴 때부터 응석을 부릴 줄 몰랐다. 맛있는 먹거리나 좋은 옷견지가 있으면 맏이인 오빠나 막내인 동생의 차지였고 옥희는 선뜻 “나도”하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하나뿐인 딸이라서 금지옥엽으로 키울 법도 한데 남존녀비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어린 옥희를 새벽부터 깨워 엄마가 밥 짓는 것을 돕게 했다. 여라문살이여서 한창 놀음에 탐하고 잠이 모자랐던 옥희였지만 아버지가 활 이불을 열어제끼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엄마의 잔심부름을 하며 아침밥상을 차리군 하였다. 아마 그때부터였던지 몰랐다. 옥희가 불평이나 불만은 마음속 한구석에 접어두고 남의 눈치만 살피며 욕 안 듣고 둥글둥글 살게 된 것이. 오빠의 동생이라서, 동생의 누나라서 오빠나 동생의 심부름을 도맡아서 했던 옥희는 그때도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좋았다. 혼자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문유리에 그림을 그리거나 삶은 감자쪼각을 볼이 미여지게 먹으며 뒹굴거나 종이오리기 같은 것을 하면서 고물고물 놀 때면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번지군 했었다. 무슨 일이라도 하라고 호령하는 아버지의 눈치도, 오빠나 동생의 집적거림도 없어서 마음이 평화롭고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여서도 옥희는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를 키우며 정신없이 바빴던 시절에도 옥희는 가끔 남편과 아이를 놀러 보내고 혼자 집에 있군 하였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시간과 생활 절주를 조절하며 느긋하게 지내느라면 참고 사느라 상처 받았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치유되군 했었다. 여직껏 옥희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혼자서 집에서 드라마도 보고 책도 보면서 마음을 다스려왔던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접어놓고 눈치만 보며 사는 옥희의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였고 다시 세상 속으로 한발 내디딜 수 있는 힘이 되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재빨리 사무실을 나와버린 옥희였다.   옥희는 걸어서 갈가 하다가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 택시를 탔다. 아직 해는 채 지지 않아 날은 훤하였고 금방 퇴근시간이 된지라 길이 그다지 막히지는 않았다.   집에 이르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옥희는 이마살부터 찡그리며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물고기비린내가 확 코를 찔렀던 것이다.    신발을 벗기 바쁘게 코를 킁킁거리며 비린내의 발원지를 추적하던 옥희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싱크대에 커다란 잉어 두마리가 누워있었다. 틀림없이 새벽에 낚시하러 나간 남편의 소행이였다.   “이걸 여기에 놓으면 어쩌라구?!”   옥희는 저도 모르게 발을 탕 구르며 소리를 꽥 질렀다. 혼자서 문을 따고 들어왔으니 남편이 집에 없을 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하루종일 참고 참았던 울화가 드디여 분출구를 찾아 터져나온 것이였다. 옥희는 눈살이 꼿꼿해서 잉어를 노려보다 말고 두 손으로 량쪽 태양혈을 지긋이 눌렀다. 태양혈을 따라 피가 올리솟는 느낌 때문에 머리가 찡하니 아파오고 있었던 것이다. 옥희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둥켜안은 채 휘청휘청 걸음을 옮겨 침실로 향했다.    아침에 옥희가 부랴부랴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대로 이불은 침대 우에 아무렇게나 뭉그러져있었고 화장대 우에는 크고작은 병에 담은 화장품들이 질서 없이 널려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옥희는 그대로 침대 우에 몸을 던졌다.    참자, 참자, 참아야지…   옥희는 념불처럼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심호흡을 하였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거듭하는 사이 구부러졌던 몸은 점차 펴이기 시작했고 몸의 신경이 서서히 느슨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가.   두통이 좀 가라앉아서야 옥희는 누운 채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띵”하며 전화가 련결되였다.   “좀 조용들 해라, 여보, 왜 그러오?”   남편의 목소리는 이미 한껏 들떠있었다. 술 한잔 잘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저… 잉어는 뭐예요?”   “아, 그거. 내가 오늘 낚시한 거지. 오늘 재수가 좋을려니까 점심때까지만 했는데 그런 잉어 네마리를 낚은 거요. 그래서 두마리는 당신 먹으라고 남겨두고 두마리는 친구들이랑 먹고 있는 중이요. 별일 없지? 그럼 전화 끊소.”   옥희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편은 덜컥 전화를 끊어버렸다.    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 찬다고 옥희는 핸드폰을 저만치로 훌 던져버렸다. 래일모레면 환갑이 될 위인이 늘 셈평이 좋아서 탈이였다. 뭐든 속으로 숨기고 숨도 크게 안 쉬고 사는 옥희와는 달리 남편은 뭐나 대강대강이였고 맘에 넣어두는 법이 없었다. 래일 당장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오늘 먹고 잘 데가 있으면 된다는 남편이였다. 이 나이 먹도록 뭔가를 이루려는 꿈도 없었고 여한도 없이 잘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남편이였기에 옥희에 대해서도 섭섭할 정도로 관대했다. 대신 집안 돌아가는 형편에도 옥희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한테서 전화가 온 지 여러 날이 된 것 같았다.   다행히 통화한 것은 닷새 전이였다.    이 녀석은 뭐하고 있지?   옥희는 궁금해서 위챗으로 아들한테 물음표가 달린 이모티콘을 꼭 눌러 발송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응답이 없길래 막 전화를 하려는데 영상이 건너왔다.     ―뭐냐?   옥희는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집이예요, 제 집.   녀석한테서도 인차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제서야 옥희는 아들이 산 집이 열쇠를 넘겨받을 때가 되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년초에 아들은 주택을 계약했고 공사중이였던 아빠트가 이제 완공이 되여 집을 분양받았던 것이다.    ―아, 열쇠를 받았나보구나. 그럼 인테리어는 언제 할 건데?   ―돈이 모이는 대로 시작해야죠. 집을 비워두기보다 인테리어를 하고 내가 살든지, 세를 주든지 하는 게 더 경제적일걸요.   ―하긴 그래. 세집생활도 신물이 나지? 제 집이 있으면 얼마나 맘이 편하니?   ―괜찮아요. 집세로 돈이 허망 빠져나가는 것이 아까와서 그렇죠.   옥희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외지에서 혼자 살더니만 이제 돈의 중요함을 알아버린 녀석이 기특했다. 언제까지 자기만 쳐다볼 줄 알았는데 이제 녀석은 슬슬 제 둥지를 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였다. 처음 주택을 계약할 때도 옥희는 아직 일찍하지 않나 싶어 주저했지만 아들녀석은 자기의 업무능력이며 회사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 몫의 집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디에든 정착을 할 것이며 그때 집을 마련하기보다 지금부터 돈을 모아 마련하면 뒤심이 있어 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 아들이 대견해서 선불금을 마련해준 옥희였다.   그래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힘이 나는 것 같아 옥희는 조금 더 누워있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헌데 옷을 갈아입으려던 옥희는 그만 랑패상을 짓고 말았다. 아침에 속옷과 잠옷을 세탁기에 처넣고 세탁기를 돌린 채로 그대로 출근을 해버렸던 것이다. 탈수가 다 된 옷들은 세탁기 안에 꼬깃꼬깃 구겨져있었다. 옥희의 머리속으로 다시 뇨실금이며 페경이며 하는 단어들이 우야우야 소리를 치며 몰려들었다. 아들 때문에 조금이나마 전환이 되였던 기분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랬다. 뭐든 아래로 곤두박질치는데에는 한순간이면 족했다. 옷을 대충 툭툭 털어서 빨래건조대에 널고난 옥희는 옷만 갈아입고는 저녁식사를 건너뛴 채 뭉그려놓은 이불 속에 기여들었다.       따뜻한 이불 안에서 옥희는 자꾸 졸음이 몰려왔다. 묵직한 돌멩이 하나가 지지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져 가슴이 답답한 가운데 무엇인가가 가슴속에서 쑥 빠져버린 듯한 허탈감에 온몸에서 맥이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몸도 정신도 이제 따라가주지 않는다. 시아버님도 언젠가는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고 엄마를 마냥 양로원에 두기도 마음이 아픈 일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녀석에게는 집 인테리어도 해주고 자가용도 사주고 싶고… 어쩜 자기나 남편만 뺀 주위사람들이 다 신경이 쓰이였다. 헌데 앞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여태 잘 살아왔는데.   옥희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자기의 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지만 온전히 붙어있는 엄지였다. 그 엄지가 있어서 병신이 아니고 온전한 사람일 수 있었고 그 엄지가 있어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었다. 이젠 정말 허물이 있는 손이라도 자신 있게 불쑥 내밀고 싶었다. 그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있다면 옥희도 아주 자연스럽게 무난히 늙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제 슬슬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 내 몸 같지 않은 몸으로 그런대로 삐걱거리며 살아지지 않겠는가.   옥희는 허공을 향해 팔을 뻗고 손을 뻗어보았다. 아주 길게.   길게 뻗은 손에서 엄지가 점점 길어져서 식지의 중간 쯤에 이르고 식지와 길이가 같아지다가 식지를 넘어서 점점 길어지는 모습을 환영처럼 지켜보며 옥희는 까무룩하게 잠 속에 빠져들어갔다…
24    보리수나무(2) 댓글:  조회:1212  추천:1  2015-01-26
  5   조심스레 포장지를 뜯었다. 내 주먹보다 조금 큰 조그마한 갈색 나무함이 나왔다. 나무함을 열자 은은한 향이 풍겨나왔다. 주홍색 보료우에는 옅은 황갈색의 념주가 쪼로록 꿰여있는 념주팔찌가 곱게 놓여있다. 하나, 둘, 셋……열여덟. 빨간 색실에 꿰여진 념주알은 꼭 열여덟알이였다. 나는 조심스레 념주팔찌를 집어 또록또록 념주알을  굴려보았다. 이것이 있으면 괜찮아질건가? 념주팔찌를 오른손목에 걸며 웬지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부터 념주팔찌를 착용하려고 작정한것은 아니였다.  20대일 때에도 녀자들이나 하고다닐것 같은 액세사리같은것에는 신경도 안썼고 더구나 념주팔찌는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념주팔찌를 구매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였다. 얼마전 숙제를 하던 민우가 “보리”가 뭐냐고 물어왔고 갑작스레 학구열이 치솟은 나는 체계적으로 보리의 모양과 특점 ,용도 등을 찾아볼 양으로 검색을 하였다. 검색창에 “보리”라고 쳐넣자 “보리차, 보리밥, 보리멸치……”하고 숱한 련관검색어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내 눈길은 하필이면 “보리수나무”에 꽂히고말았다. 보리는 뒤전인채 보리수나무를 클릭하여 구슬알처럼 동그랗고 빨간  보리수나무열매의 예쁜 모습에 눈을 앗기고말았다. 이미지아래에 적힌 보리수나무이름의 유래며 특점,열매의 효능들을 읽어보다가 보리수나무의 꽃말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아래에서 깨다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보리수나무열매로 념주를 만든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컴퓨터를 끄기 바쁘게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넣어 보리수열매로 만든 념주팔찌 하나를 구매해달라고 부탁했다. 난데없는 소리에 친구는 “왜? 너 불교를 믿니?”하고 의뭉스러워했고 난 “아니, 그런건 아니고. 어쨌든 필요하다. 꼭 보리수열매로 만든거야 해. 념주보다 보리수열매가 더 중요하니까.”하고 오금을 박았었다. 정말로 내게 중요한것은 념주가 아니라 보리수열매였다. 보리수나무의 열매도 보리수나무의 꽃말과 같은  의미를 갖고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니, 그럴거라고 확신했다. 암튼 보리수열매로 만든 념주팔찌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불교설에 의하면 념주알 하나를 굴릴 때마다 하나의 번뇌가 끊어진다고 하나  불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 그런것은 통할것 같지 않다. 하지만 보리수열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이 편해진다는것이 신기했다. 그만큼 난 무엇이든 잡고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킬 그 어떤 절박함에 쫓기고 있었다. 그것이 한낱 나무의 꽃말일지라도말이다.  난 이제 주성이처럼 누군가의 눈에 우수가 비끼는 일같은것은 반복하지 않고싶음에야.   전처와 리혼하게 된것은 부득이한 상황에서였다. 나와 그녀는 친구들의 소개로 만나게 되였고 학력이며 집안형편까지 어슷비슷하여  편한 마음으로 교제를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였다. 주성이가 태여나고 애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손도손 별탈없이 몇년을 쭉 살았었다. 그러다가 지역경제의 불황으로 국영기업들이 하나둘 해체되면서 민족장기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그녀가 정리실업을 하게 되였다. 잠간은 마트에서 수금원일을 하다가 얼마동안은 누군가의 옷매대를 봐주다가 언제는 인쇄공장에서 허드레일을 하다가 하면서 직업이 온정치 못했던 그녀는 점차 성격이 까칠해지고있었다. 해맑게 웃던 모습은 어데가고 걸핏하면 짜증을 냈고 내가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내가 돈을 못본다고 무시해요?”하며 말에 가시를 돋쳤다.  갑자기 실업을 당한 그녀의 위축된 심정을 리해해주려고 안하던 집일도 하고 애교도 부리며 나도 무척 애를 썼지만 그녀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성이가 열살이 될 즈음부터는 나를 보는 눈길이 이상했다. 택시가 농촌구역으로 가서 전화가 불통이 되여도 따지고 들었고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날이면 깐깐히 셔츠들을 살피고 냄새를 맡아보는가 하면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누구냐며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느날부터인가는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한밤중까지도 자지 않고 잠옷바람으로 거실에 버티고앉아있기 시작했다. 그런 날이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하얀 잠옷바람으로 거실 중간에 꼼짝않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때문에 나는 등골이 싸늘해지군 하였다. 그런 일이 거듭해지자 내 인내는 바닥을 드러냈고 결국 둘은 티각태각 다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를 못미더워했고 나는 나대로 그녀가 나를 믿지 않는다고 랭랭해졌다. 사랑은 믿음이라고도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깨여진 믿음만큼이나 하루하루 소진되여가고있었다. 그 와중에 사위가 바람을 피운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장인은 과격한 성격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떴고 결국 우리의 혼인은 파국을 맞게 되였다. 리혼서류에 도장을 찍을 무렵에는 나에게 바람난 남자, 장인어른을 죽게 한 사위라는 힐난들이 쏟아지고있었다. 난 본의아니게 그녀한테 원쑤같은 존재가 되여버렸고 그녀는 주성이한테 내가 범접도 못하게 가로막았었다. 썩 후에야 그녀가 우울증이나 의부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수 없는 일이 되여버렸다. 그때 나나 그녀에게 보리수나무 한그루라도, 보리수열매 한개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마음을 기댈수 있는 그 무엇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서로 좀 더 믿어주고 서로를 보듬어줄수 있지 않았을가싶었다.   나는 다시 념주알을 또록또록 굴리기 시작했다. 이제 난 괜찮은거야. 난 이제 정말로 괜찮아질것이였다. 혼인이란 당사자가 아닌 주변사람들이나 생활의 양상에 따라 흔들린다는것을 알아버렸으나 나에게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흔들림들을 극복해낼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마치 오또기가 누가 어떻게 흔들고가든 몇번을 흔들리든 종당에는 오똑 하고 서듯이말이다. 6     “밥 줘!” 사위를 둘러보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던진 말이였다. “금방 잡수셨잖아요.” 나는 비우고 내놓은 밥그릇을 가리켜보였다. “나 안먹었수. 밥 달라니까!” 어머니는 검버섯이 더덕더덕 돋아있는 바짝 마른 손으로 방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안됩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시면 배탈이 납니다.” “나쁜것들! 날 굶겨죽일려구 이러지? 얼른 밥 달라니까?!” 어머니는 손을 뻗어 베개를 집어던졌다. 이어서 비자루며 삼태기며 닥치는대로 주어서 봉당에 던져버렸다. 이제 피해망상증세를 보일 정도로 어머니의 병세는 악화된것이였다. 이럴 때에는 설득이나 제압보다 노기를 발설하도록 내버려두는게 상책이였다. 한참이나 죽일놈 살릴놈 하며 입에 못담을 욕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진 어머니는 기력이 소진할 즈음 과자봉지를 쥐여줘서야 겨우 안정이 되였다. 어머니는 먹을것을 탐한 어린애같이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듯이 과자봉지를 품에 꼭 그러안고 와삭와삭 먹어댔다. “어머니, 천천히 드세요…… 어머니……”  나는 안스러운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다말고 널린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나한테 눈길 한번 안주고 먹는데만 열중이였다. “제가 귀국하면…… 어머니를 다시 모셔가겠습니다……그때까지 잘 계십시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렸다. “어딜 가시우? 나두 데리고 가면 안되우? 여기 재미없수.” 어머니가 입가에 묻은 과자부스레기를 쓱 닦으며 머리를 돌려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날 데려가달라니까. 우리 큰 아들이 날 기다리우. 내가 이 과자 다 줄게.” 어머니가 내쪽으로 다가앉으며 과자봉지를 쑥 내밀었다. 뿌연 어머니의 눈빛속에 어떤 간절함이 얼핏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형은 종적을 감춘지도 거의10여년이 되여오고있었다. 형은38살에 과부가 되여 반찬가게를 하는 어머니와 열아홉살에 고중을 중퇴하고 택시회사에 취직한 나의 뒤바라지로 연구생공부까지 하고 상해에 있는 외자기업에 취직을 했었다.  처음 몇년은 어머니에게 드문히 용돈도 보내드리고 해마다 설명절이면 선물꾸레미를 안고 한번씩 다녀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생끝에 락이라며  누구에라 할것없이 형자랑을 했었고 나도 별로 탐탁치 못한 내 공부를 접어두고 두살터울인 형의 공부뒤바라지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었다. 하지만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합작하여 사업을 시작한지 1년만에 형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도 안한채 몇년을 뜬구름같이 보내면서 1년에 한번꼴로 전화로 안부만 전하더니6년전인가  중국 어딘가에서 잘 있으니 찾지 말라고 영상통화 한번 하고는 감감 무소식이 되고말았다. 그런 형을 어머니는 처음에는 기다리다가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체념한듯이 입도 뻥긋하시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형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였다. 늘 오락가락하는 어머니의 기억도 어쩜 형을 만나야겠다는 의념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던지 몰랐다. 불행중 다행이랄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이 4년만에 형에게서 전화가 오던 날 어머니는 형에게 집걱정은 하지 말고 잘 살아라고 하시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용케 참으셨다. 형편이 좋아지면 다녀가겠다는 형에게 나는 “형한테 가족은 뭐야? 잘났다고 으시댈수 있는게 가족이야? 나나 어머니는 형한테 뭔데? 형같은 사람은 필요도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쭉 살아!”하고 오금을 박았다. 그즈음 난 형을 만나본적이 없는 안해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안하는 형때문에 미안하다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날 통화로 어머니는 형에 대한 근심을 덜었는지 밤새 형의 사진을 보면서 눈물짓더니 이튿날부터 아예 정신줄을 영 놓아버리셨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나 들락날락하는것도 아니여서 완전히 아무도 못알아보셨고 남의 정신으로 엉뚱하게 말하고 행동하셨다.  며칠이 지나서부터는 피해망상증으로까지 발전하셔서 낮에는 구석을 찾아 숨어서 벌벌 떠시는가 하면 밤에는 자꾸 누군가 자기를 잡으러 온다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안해는 밤에 무서워서 집에 있을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고 나는 피로때문에 졸음운전을 하다가 결국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 우리 집 경제형편에 가정보모를 구할수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나나 안해가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선택을 한것이 양로원이였다. 남보기에는 불효같겠지만 나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였다. 더구나 멀지 않아 내가 출국할것을 념두에 두면 안해 혼자서 민우와 어머니를 돌본다는것은 무리였으니까.   “어머니, 나중에요…… 나중에 제가 꼭 모셔갈겁니다.” 나는 나무꼬챙이처럼 깡깡 마른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과자봉지를 다시 쥐여드렸다. 차마 드라마에서처럼 이 과자를 다 드시면 형이 올거라는 말은 할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형이 걸어왔던 전화번호는 련락이 되지 않았던것이다. 참 오래동안을 쭉 그래왔던것 같다. 형의 전화번호는 늘 바뀌였고 형이 먼저 전화를 하지 않는 한 그를 찾을 길은 없었다. 그 반면에 나는 바보처럼 혹시라도 형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을가 전전긍긍하면서 전화번호를 한번도 바꿔본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형 역시 나에게는 한번쯤 더 휘청거리게 만드는 흔들림의  일부였고 나는 불교를 믿지 않음에도 보리수념주 한알이라도 더 굴리며 그 흔들림을 견뎌야 했다. 형에게 나나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을가? 어머니의 눈귀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는것을 외면하며 돌아서는 내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뚤렁뚤렁 떨어지고있었다. 어머니 생전에 난 다시 내가 둘째아들 영수라고 말해줄 날이 있을가?   7   우~욱! 안해가 갑자기 입을 막아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엄마가 왜 저러죠?” 민우가 눈이 동그래서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다. 뭘 잘 못먹었나?”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장실안으로 사라지는 안해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후 , 휘청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온 안해의 얼굴은 해쓱하게 질려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는 조심스럽게 안해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안되겠다. 나 혼자 비행기 탈테니까 당신은 얼른 병원에 가봐.” 나는 티슈를 꺼내 안해의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을 닦아주었다. “……나 임신……했어요.” “뭐?!” 머뭇거리며 내뱉는 안해의 말에 나는 눈이 화등잔이 되고말았다. 임신이라니? “이미 5주가 되였어요.” 안해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아프기 직전에 그러니까 반년전에 병원에 가서 피임환을 꺼냈어요. 그때 당신이 막 출국수속을 시작할 때였죠. 당신이 출국을 한다는것이 정말 불안했어요. 요즘 세상에 걸핏하면 리혼인데 몇년동안을 당신과 난 무엇을 믿고 떨어져서 있어야 하나 생각했죠. 그렇다고 택배회사의 직원인 나나 택시회사의 운전수인 당신이나 모두 로후에 보장이 없긴 마찬가진데 돈을 안벌수도 없구요. 둘다 혼인에 실패하고 재혼하여 겨우 안정된 살림을 하는데 이러다 또 갈라지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 몰래 임신하기로 했어요. 당신이 알면 말릴가봐서요.” 안해의 해쓱한 얼굴에서 가벼운 미소 한점이 얼핏 스쳐지나고있었다. 안해가 임신하려는것을 알았더면 난 정말 말렸을것이였다.  민우를 낳자마자 리혼을 한 안해여서 안해에겐 임신은 축복이 아닌 고통으로 남아있음을 난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난 늘 불안했어요. 밤에 어머니를 돌볼 때에는 내가 얼마만큼 어려움을 견딜수 있을가, 전남편이 민우를 만났을 때에는 당신이 민우를 온전히 받아들일수 있을가 , 주성이가 다녀갔을 때에는 당신은 돌아가고싶지는 않을가……하는 생각들로 잠을 설쳤어요. 결국 나나 민우나 당신을 하나로 묶어 온전한 가족을 만들 방법은 새 생명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들 애가 있다고 리혼을 안하는것도 아닌데 난 그거라도 붙잡고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싶었고 지키고싶었던거죠. ……당신에겐 한국에 도착하면 알려주려고 했는데……” 성격과 달리 차분하게 말을 끝마친 안해의 눈에서 눈물이 똘랑똘랑 떨어지고있었다. “당신도 참~” 나는 팔에 힘을 주어 안해를 그러안았다. 안해에게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그 무엇이 필요했던것임을 난 그제야 알았다. 내가 선택한것이 보리수나무의 꽃말같은것이였다면 안해가 선택한것은 새 생명의 잉태라는 거창하고 신성한것이였것이다. 나는 손목에서 념주팔찌를 풀어 안해의 손바닥에 놓았다. “뭐죠? 당신이 한동안 열심히 걸고 다니던건데.” “보리수열매로 만든거야. 보리수나무의 꽃말이 뭔지 알아? 부부의 사랑과 결혼이래.” 념주알을 또록또록 굴리는 안해의 입귀에 실날같은 웃음이 피여오르고있었다. 이제 안해도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해질것인가?   비행기에 탑승하기전 나는 보리수나무 한그루를 다운하여 핸드폰 액정의 배경화면에 깔았다. 그리고 푸른 나무들사이로 빨갛게 얼굴을 내미는 구슬알같은 보리수열매들과  눈맞춤하며 핸드폰을 끄고 안해와 민우에게 밝게 웃어보였다. 안해의 팔목에 걸려있는 보리수념주팔찌에 한번쯤 더 눈길을 주고 성큼 발자국을 내딛는 내 귀로 가슴속에서 보리수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 소리가 우썩우썩 들려오고있었다……     
23    보리수나무(1) 댓글:  조회:1110  추천:0  2015-01-26
보리수나무 김영해     1 어머니가 아까부터 나를 힐끔거린다. 세면도구를 침대밑에 밀어넣고 생필품과 식품이 놓여있는 탁자우를 정리하는 내내 어머니는 미간을 약간 찌프린채 내쪽에만 신경을 쓰고있다. 내가 머리를 돌리면 제꺽 눈길을 피하면서 아닌보살을 하다가 내가 안보는것 같으면 또 흘낏거린다. “왜 그러십니까? 왜 자꾸 절 봅니까?” 나는 눈섭을 쭝긋하며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저…… 누구……시우?”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덩둘하다. “어머니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 영수. 모르시겠어요?” “아~ 영수. 알지. 내가 왜 모를라구?”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어머니의 동공은 텅 비여있다. 어머니는 허허로운 눈길로 사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탁자우에 손을 뻗어 바나나 한개를 집어든다. 껍질을 벗겨 뭉텅 뭉텅 목이 메여지게 떼여먹는다. 거퍼 열개를 세기도전에 마지막조각까지 입에 밀어넣고는 또 한개를 집어든다. “천천히 드세요. 누가 빼앗기라도 합니까?” 나는 컵에 물을 따라 건네드렸다. “우리 둘째는 안온다우? 에미 볼러 병원에.” 어머니는 물을 꿀꺽 들이켜더니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가 둘째라니깐요. 둘째 아들 영수.” 나는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며 마디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오~ 둘째 아들 영수.” 어머니는 또 머리를 끄덕끄덕하고는 아까처럼 뭉텅뭉텅 바나나를 떼여먹는다. 후~ 저도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가 치매라니?   어제 아침식사를 할 때였다. 어머니가 갑자기 민우를 향해 눈을 지릅뜨셨다. “넌 누구냐? 왜 우리 집에 왔냐? ” “네?” 민우는 밥을 씹다말고 눈만 슴벅거렸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애가 놀라게.” 안해가 어머니를 할깃거리며 민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왜라니? 너 얼른  제 집에 가!” 어머니는 안해를 찔 흘겨보며 민우에게 밥풀이 묻은 숟가락을 흔들어댔다. 급기야 민우가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입안에서 밥알이 튕겨나왔다. 안해는 제꺽 민우를 그러안으며 어머니를 향해 눈을 치떴다. 어머니가 숟가락을 던지고 방으로 휭하니 들어가는것을 보면서 나는“아차”싶었다. 며칠전에도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보며 “누구시우?”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던것이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였다. 나는 어머니와 따지려드는 안해를 달래서 출근시키고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왔다. 의사가 인지능력 정밀검사며 혈액검사, 에마라이검사를 시키고 결과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들어갔다. 검사결과를 적은 종이들을 휘릭휘릭 넘기며 대충 훑어보던 의사가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덤덤하게“로년성치맵니다.”하고 내뱉는 순간 나는 멍해지고말았다. 어머니가 로인 100명중에 5명 꼴로 걸린다는 치매라니?   그제야 그동안 어머니가 보이신 반상적인 행동들에 리해가 갔다. 1년전부터 드문히 자주 쓰는 생필품을 두는 곳도 잊어버리고 오후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아침인줄로 착각하셨다. 그러다가 서너달전부터는 한달에 한번 꼴로 돈이며 물건들이  잃어졌다고 괜히 이 사람 저 사람 의심하면서 주변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고 걸핏하면 버럭버럭 화를 내며 누구라없이 욕을 해댔다. 안해는 “로인네가 점점 성격이 괴퍅해진다”며 못마땅해하였고 나는 나대로 사람이 늙으면 의례 기억력이 감퇴되고 성격도 변하나보다고 여겼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런것들이 다 치매증상이였던것이다. 서둘러 입원수속을 하고 생필품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신뒤축을 잘잘 끌고 어린애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딱히 볼것도 없으면서 내내 사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하셨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감에서였다. 그렇게 아침부터 정신줄을 놓으셨던 어머니는 오후에 잠간 눈을 붙이고나서야 올똘한 정신으로 돌아왔었다.   어머니가 오늘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도 멀쩡하시길래 오늘은 괜찮나싶었는데 내가 세수하고 들어오는 사이에  또 정신줄을 놓고 지금 나를 못알아보는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있을려니 가끔 가다 꼭 필요한 물건을 찾지 못해서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며 “이걸 어째? 이걸 어째?”하고 넉두리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며 옷을 반반하게 차려입고 출입문앞까지 왔다가도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어딜 가려고 했지?”하고 락담하며 다시 방에 들어가던 어머니 모습들이 선히 떠오른다. 다른 가족들이 집에 있는 동안에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보였으면 집에 혼자 남았을 때는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를 얼마나 반복하셨을가싶다. 그때 어머니는 깜빡깜빡하는 자신의 기억때문에 얼마나 혼란스럽고 막막하셨을가? 자식이 되여서 그것도 모르고 “사람이 늙으면 저렇게 되는구나”하고  여겼던것을 보면 내가 어머니에 대해 여간 무심한것이 아니였다. 병치료라도 잘하여 속죄하고싶은데 치료는 병의 진행속도를 늦출수만 있을뿐 완치할수 없는 병이란다. 후~ 어머니는 이제 어느만큼 더 망가져야 하는것일가? 한숨이 나간다……   2 요즘 들어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번이고 정신이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한참씩이나 시계를 들여다보다 창밖을 내다보다 하면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헛갈려 하셨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는 민우에게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활짝 펴고 웃으면서 “이쁜 손자~ 빠이빠이”를 하시고도 저녁밥상에 앉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얼굴을 번갈아보며 “누구들인데 내 집에 있수? 우리 둘째 오면 당장 쫓겨날줄 아시우.”하고 눈살을 꼿꼿이 세웠다. 그런가 하면 낮에 티비를 보다말고 갑자기 일어나서는 “도적이 오는구나.”하며 돈지갑의 돈을 탈탈 털어내서 베개속에 숨기기도 하고 낮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에미가 좋아하는 생선국을 끓여야지.”하며 랭장고에서 얼려둔 잉어를 꺼내 그대로 냄비에 집어넣기도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뒤를 따라다니며 일일이 수습을 하다보면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말못할 슬픔같은것이 꾸역꾸역 올리밀었다. 오늘도 울화 비슷한 슬픈 감정을 추스리며 어머니가 벌려놓은것들을 수습할 동안 어머니는 티비를 보다말고 쏘파에 기댄채 잠이 들어있었다. 약간 벌려진 입귀로 침이 흘러나와 허옇게 줄을 긋고 있었고 가릉가릉 코를 골며 잠들어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픈 사람같지 않게 평화로와보였다. 아마 주무시는 동안에는 어머니는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온전한 자신을 꿈꾸고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갑삭하게 마른 어머니를 들어서 방안의 침대에 눕히고 거실로 나와 카펫우에 벌렁 누워버렸다. 나도 쉬고싶었다. 어머니가 치매확진을 받은 다음부터 우리 집의 생활질서는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주근을 야근으로 바꾸고 안해와 둘이서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러다보니 출근시간이 아니여도 몸은 늘 긴장상태에 있어야 했고 간혹 짬시간을 타내 쉴뿐이였다. 요즘엔 대중할수 없는 어머니의 정신상태때문에 쉴 여가가 마땅치 않아 몸이  뻐근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동안 잠간이라도 눈을 붙이면 정신이 날것 같았다. 눈을 감고 온갖 잡생각을 지우며 잠이 들가 말가 할 때였다. “삐이익~”하고 열쇠 트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컹”하며 출입문이 열렸다. 문쪽을 보니 안해가 문을 반쯤 연채 막 열쇠를 뽑고있었다. “뭐 이런게 다 있어? 에이, 재수없어!” 안해는 문을 닫고 들어서면서부터 투덜거렸다. “왜 그러는데?” 나는 부스스 일어나 앉으며 독오른 고추같이 댕댕하게 굳어진 안해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아, 글쎄! 호구부를 안고쳐주잖아요.” “호구부에서 뭘 고치는데?” 난데없는 소리에 나는 의아해났다. 안해는 대충 신발을 벗어던지고 종종걸음으로 걸어 쏘파에 털썩 들어앉았다. 화를 낼 때면 의례 그러하듯이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민우요. 민우이름 고치려고 공안국 호적과에 다녀왔어요. 아까 호구부를 가지고 입학등록하러 학교에 갔더니 호구부에 있는 이름 그대로 박민우라고 적어야 한다더라구요. 학적은 호구부를 기준으로 한다면서. 그래서 입학등록도 안하고 그 걸음으로 공안국에 갔더니 이름은 얼마든지 고칠수 있는데 성씨는 못고친대요. 애가 만 18살이 되여서 동의를 하면 그때 고칠수 있다나 뭐라나. 무슨 법이 이래요?” 안해는 단숨에 기관총 쏘듯이 내뱉고는 발딱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이가 들어도 일이 제 생각대로 안 되면 막 그물에 걸려나온 고등어같이 팔딱거리는 모습은 여전했다. 나는 안해가 사라진 방문쪽을 향해 실없는 웃음 한점을 흘리고 다시 카펫우에 벌렁 누워버렸다. 박민우라? 그제서야 민우녀석이 호적에 있는 이름은 최민우가 아닌 박민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최민우라고 몇년동안을 부르다보니  깜빡 잊고 살았던것이다. 애이름때문에 안달을 떠는 안해의 마음을 알것 같았다. 8월말이면 소학교에 입학하는 녀석에게 갑자기 선생님이 “박민우”하고 부르면 자기 이름이 최민우인줄 알고 있는 녀석이 어리둥절해질게 뻔했다. 함께 유치원에 다니던 애들이 “넌 왜 갑자기 박민우가 됐어?”하고 캐여묻기라도 하면 녀석은 대답이 궁해질것이였다. 녀석이 상처를 받을것을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짠한데 안해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싶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부러 애를 속이려고 그랬던것은 아니였다. 나와 안해는 민우에게 친아빠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민우가 부모의 마음과 처지를 리해할수 있을만큼 컸을 때 이야기해주려고 작정했던것뿐이였다. 이제는 입학때문에 호적문제가 튀여나왔으니 그냥 얼버무릴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말았다. 당장은 민우에게 자기의 이름이 박민우라는 사실을 될수 있는 한 상처를 덜 받게 하면서 알려주고 받아들이게 하는것이 우선인데 그걸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이다. 후~ 또 한숨이 나온다. 어머니가 아프다는것을 알고나서 한숨은 그동안 내 몸속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출구를 찾기라도 했듯이 시도때도 없이 습관처럼 흘러나온다. 그렇게라도 한숨을 토해나면 조금은 숨을 쉴것 같기도 하다. 헌데 정말로 요즘 같아서는 사는게 너무 힘들다. 어디선가 예기치 못했던 문제들이 불쑥불쑥 튀여나와 나를 한번씩 흔들어놓고 간다. 그때마다 괜찮은척 씩 웃어보이지만 파도가 바다가의 모래를 핥고가듯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가고있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걸가?...... 어머니는 어떡하고 민우는 어떡하지?......그리고 주성이는?...... 눈을 감고있어도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속을 휘젓고다닌다.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자 하고 되뇌이는 사이 내 몸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며 나는 까무룩한 잠속으로 서서히 서서히 빠져들고있었다……     3   다행이였다. 주성이가 왔을 때 어머니는 마침 정신이 맑아있었다. “저……할머니, 잘……지내셨어요?” 주성이는 문가에 선채 머뭇거리며 어머니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음?” 그제서야 티비에만 집중하고있던 어머니가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돌렸다. 다음 순간 어머니는 아픈 로인네같지 않게 벌떡 일어나서 엎어질듯이 허겁지겁 문께로 다가왔다. “이게……이게……주성이가? 내 손주 주성이가?” 주성이의 손을 와락 부여잡은 어머니의 뿌연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싶더니 주루룩 흘러내렸다. 이제 이마에 여드름이 몇개씩 돋아있고 코밑수염까지 가뭇가뭇한 주성이는 동그랗던 얼굴이 약간 길어지긴 했지만 눈매며 입귀에 어릴 때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었다. “네……할머니가 아픈것은 ……괜찮으신가요?” 주성이는 당황했는지 잡힌 손을 빼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럼, 그럼. 우리 주성이가 언제 이렇게 컸냐? 이 할미는 손주가 이렇게 크는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넉두리를 하며 주성이를 쏘파께로 잡아끌었다. “세상에? 어쩜 이리도 잘 컸냐? 쯧쯧~  청년이 다 되였구나. 열두살적까진 할미 뒤를 곧잘 따라다니던 꼬맹이였는데……그동안 어떻게 한번을 안다녀가냐?......어이구, 어찌 혈육의 연을 끊으려고…… 니 에민 독하기두 하네라.” 어머니는 주성이의 손을 싹싹 어루만지시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데 주성이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사위를 두리번거리고있었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애가 어쩌다 왔는데 좋은 말들을 해줘야지 않습니까?” 나는 어머니에게 티슈를 건네주었다. “그래, 그래야지. 몇년만에 보는 내 새낀데. 내가 너 보러 가겠다고 전화를 할 때마다 네 에미가 너한테 상처가 된다고 기를 쓰고 말리더니……네가 어른이 되면 제 피줄을 찾아 오겠지 하는 요행으로 하루하루를 참고 견뎠는데 이렇게 보는구나. 어이구, 우리 주성이~” 어머니는 한손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눈확을 꾹꾹 눌러닦고 다른 손으로 주성이의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등을 툭툭 두드려주기도 하면서 어쩔줄을 모른다. 주성이는 부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 몸을 맡긴채 피끗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주성이가 인터폰으로 “주성입니다”라고 한마디를 한 외에 나한테 반토막의 말도 건네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터폰으로 한 말은 내가 아니고 다른 그 누가 물었어도 대답했어야 할 말인것을 보면 결국 나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않은 셈이였다. 갈라져있은 시간동안만큼이나 주성이와 나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골이 패워져있는 모양이였다. “자식,이젠 아빠 키를 넘어서네. 어른이 다 됐구나. 어디 아픈데는 없니? 공부는 잘하고 있고?” 나는 일부러 목소리톤을 높이며 주성이의 어깨를 툭 쳤다. “네.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 나는 멈칫했다. 주성이의 입에서 내가 익숙했던 “아빠”란 호칭대신 “아버지”란 낱말이 생경스럽게 튀여나오고있었다. 열두살적에 엄마를 따라가며 “아빠, 나 아빠마음 알아요.”하던 주성이가 지금은 과연 어느만큼이나 내 마음을 알고있을가? 여전히 코물눈물범벅이 된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어머니와 불편한 자세로 가끔 가다 어색하게 씨익 웃어주면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주성이를 번갈아보며 난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말 어른이 되면 녀석은 다시 찾아올가? 나는  차가 떠나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차창너머로 나를 바라보던 주성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열일곱살짜리 애치고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우수가 비낀 눈빛이였다. 그 눈빛으로 녀석은 나에게“엄마를 원망하지 마세요. 제가 어른이 되면 찾아뵐게요.”하고 말하고는 훌쩍 떠나가버렸다. 문득 주성이에게만큼은 난 영원히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에게 맑은 눈빛을 주지 못한 리유만으로도 나쁜 사람으로 락인받기엔 충분했다. 그럼에도 내가 주성이에게 아빠로 인정받고싶은것은 단지 미련이나 욕심때문일가? 후~ 나는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끝내는 묻지 못했던 말 한마디를 허공에 던졌다. 주성아, 넌 만 열여덟살이 되면 성씨를 고칠거니? 하고.       4   “엄마, 나 로봇인형 살거야!” 민우가 장난감을 놀다 말고 저만치 던져버렸다. “안돼. 너 지난주에도 하나 샀잖아. 갖고놀것이 있는데도 자꾸 사는것은 돈랑비야.” 안해가 옷을 개이다 말고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사줘요. 우리 돈 많잖아요. 내가 전번날 돈을 이~렇게 많이 갖다줬는데.” 민우는 두팔을 벌려 커다란 원을 그려보였다. “안돼. 그것은 민우가 대학교 갈 때 쓸 학비야. 그러니 누구도 쓰면 안되는거야.” 안해는 민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힝! 엄마, 미워! 아빠가 날 쓰라고 준 돈인데……” 민우가 발딱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아버렸다. “아니, 저 녀석이……” 안해가 발딱 일어섰다. 그 서슬에 무릎에 놓였던 옷들이 떨어지며 흩어졌다. “관둬. 애하고 뭘 따지려고.” 나는 안해한테 휙 손을 저어보였다. 안해는 민우가 들어간 방문쪽을 꼬나보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탕 구르고는 탈싹 주저앉았다. “아니, 6년만에 고깟걸 들려보내면서 애한테 뭐라고 했길래 맨날 제돈이라고 저러냐구요?” 안해가 옷을 탁탁 털며 화를 냈다. “아직 어려서 그럴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역시 민우가 고까운것은 어쩔수 없었다.   생각외로 민우는 자기의 이름이 “박민우”라는것을 잘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왜죠?”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싶더니 친아빠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엄마가 친아빠와 리혼을 하고 나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이름이 “최민우”가 아니고 “박민우”여야 하는 사실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어주었다. 며칠동안은 가끔가다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인츰 언제 그랬냐싶게 웃고 떠들어댔다.  담임선생님한테도 사정이야기를 한터여서 학교생활도 무난하게 하고있었고 나와도 예전처럼 “아빠, 아빠”하며 같이 놀아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마침 꾸준히 약을 복용한 덕에 어머니의 병세도 잠간 주춤하는 상태여서 나와 안해는 한숨을 돌릴수 있었다. 그렇게 두어달은 무난히 지났을가 할 때였다. 느닷없이 전화 한통 없던 친아빠가 련락을 해왔다. 그동안 한국에서 일하다가 귀국했다며 애를 보고싶다고 하였다. 애를 임신했을 때 딴 녀자랑 놀아나고 출산하기 바쁘게 리혼을 제기하고도 무슨 렴치인가고 안해는 전화에 대고 악을 바락바락 썼다. 하지만 친아빠란 사람은 끈질기게 전화질을 해댔고 나중에는 학교에 가서 애를 데려갈거라는 협박 비슷한 말에 안해는 결국 민우를 만나게 해주고말았다. 처음에는 눈이 올롱해서 자기를 데리러 온 사촌누나란 사람의 뒤를 쭈볏쭈볏 따라나서던 민우는 한주일에 한번씩 서너번을 다녀오더니 아빠가 어떻고 할머니가 어떻고 하며 그쪽에 가서 놀던 이야기를 신나게 주어대기 시작했다. 민우가 그럴 때마다 안해는 내 눈치를 살피며 “민우야, 우리 이제 공부할가?”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나는 겉으로는 무심한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심히 불편했다.  세살 때부터 꼬박 4년을 키워온 민우가 갑자기 나타나 선물꾸레미들을 안겨주는 사람을 아빠라고 따라주는것을 보면서 여간 허망한게 아니였다. 나와 안해, 민우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민우가 덜컥 돈꾸레미를 안고왔던것이다. 은행카드나 저축통장도 아니고 현금으로 애의 책가방에 들어있는 돈을 꺼내며 난 어이가 없어 입만 벌어졌다. 큰 일을 한듯이 시뚝해진 민우는“엄마, 이거 아빠가 주는 양육비래요. 내가 쓰는거래요.”라고 말하고는 코노래를 부르며 새로 산 장난감을 논다고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버렸다. “뭐? 양육비?! 6년만에 보내는게 이거래?” 돈소리를 들을 때부터 언짢은 기색이던 안해는 코웃음을 치며 돈뭉치를 집어 쏘파후에 훌 던져버렸다. “아니, 달랑 만원을 애한테 들려보내놓고 양육비라뇨? 6년에 만원이 말이 돼요? 유치원비도 달마다 600원을 웃도는데 만원으로 뭘 할수 있다고 양육비니 뭐니 해요? 여태 안줬으면 입도 뻥긋하지 말것이지 그걸 던져놓고 애한테 생색을 낼려구요? 나중에 난 양육비 줬으니까 아빠구실을 한거다 할려구요?나 원, 기가 막혀서!” 안해는 량옆구리에 두 손을 짚은채 왔다갔다 하며 당금 싸우기라도 할듯이 쌕쌕거렸다. 나역시 똥 씹은 기분이였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것은 아니지만 이건 기본이 안되였다. 거지에게 적선하는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돈을 못벌어온것도 아니면서 자기 자식에게 하는 짓치고는 너무 졸렬했다. 어른들의 기분이  어떤지 전혀 알길이 없는 민우는 그날 이후로 맨날 새것을 사달라고 타령이였다. 오늘은 장난감을 사달라, 래일은 학용품을 사달라 게임기를 사달라 하면서 필요하지 않는 비싼것들을 사내라고 성화였다. 그리고는 그 뒤끝에 꼭 “아빠가 돈을 엄청 많이 줬는데”하면서 안해의 속을 뒤집었다.   오늘도 서로 앵돌아지면서 마무리된 안해와 민우의 실랑이를 보면서 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괜찮지 않은것이 아닌가? 이제 실오리바람이 스쳐도 난 외줄우에서 떨어질것같은 불안감이 발끝으로부터 몸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있었다. 그리고 난 외줄타기를 할 때 평형을 잡아주는 장대기같은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었다.
22    공(2) 댓글:  조회:969  추천:1  2015-01-18
  5 엄마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하루밤을 묵어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엄마 혼자 두기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일찍 저녁밥을 먹고 티비앞에 다가앉았다. 엄마가 유일하게 시청하는 프로는 연변위성채널의 6시 45분쯤에 방영되는 한국드라마였고 아직 시간이 일렀다. “엄마, 만수형의 말대로라면 도적은 만수가 아닐것 같은데. 안그래요?” 나는 엄마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릴가봐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그놈밖에 그런 짓 할 사람 없어. 도적도 들던 곳에 자꾸 든다잖니? 천하에 몹쓸놈같으니라구.” 남편이 낮에 뭐라고 말했든 엄마의 생각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래두요. 나이 50을 바라보는 사람이 여직 장작이나 훔치고 있겠어요? 개과천선이란 말도 있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동이 있을적마다 엄마의 말은 립증이 되지 못했던 까닭에 난 엄마의 말보다는 남편의 말을 더 믿고있었다. “네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마누라건사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개과천선은 무슨? 흥!” 엄마는 낮에 사위앞이라 억지로 참았던 울화를 터뜨렸다.   워낙 게으른 만수가 새 동네에 와서 처음에는 농사를 착실히 하는가싶더니만 한국에 간다고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중한수교가 이루어진지도 10여년이 더 지나서 처음에는 친척방문이요, 국제결혼이요 하면서 합법과 불법이 어울어져 출국붐으로 한동안 세상이 혼란스럽더니 이젠 로무다, 려행이다, 취업방문이다 하면서 조금 똘똘한 사람들은 죄다 빠져나가고 농촌에는 로인들만 집을 지키고있는 상황이였다. 만수도 밭부터 처분하고 이제나 저제나 하고 출국비자가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무슨 놈의 운인지 뭘 해도 만수는 꼭 락방되군 하였다. 밭을 양도한 돈으로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만수가 동네투전판까지 들락거리다보니 집살림은 나날이 못해갔다. 약삭바르지도 못한 만수처가 삯일을 해봤자 생김새며 발음이며 한족말이며 어느것 하나 똑 부러진것이 없어 고용주의 업수임을 받다보니 남과 같은 일을 하고도 삯전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서 애의 공부뒤바라지도 빠듯했다. 결국 두어해전에 만수처는 이웃집의 부모도 없이 혼자 사는 로총각과 눈이 맞아버렸다. 여건이 좋지 않아 한평생 총각으로 늙을것 같던 로총각은 못생기고 꼭 여물지는 못하더라도 뜬금없이 몸을 달구는 정욕을 해소해줄수 있는 만수처가 필요했던것이고 만수처는 만수처대로 빈둥거리는 신세에 구박하고 손찌검을 하는 만수보다는 소비돈이라도 쥐여주는 로총각이 좋았던것이다. 그러다가 어쩌구려 들통이 나서 만수와 리혼을 한 만수처는 로총각과 함께 시내로 들어가 세집을 잡고 식당일을 하면서 살게 되였다. 엄마는 만수처가 바람을 피게 된것이 전적으로 만수의 탓이라고 했다. 불을 땔 장작도 제 손으로 꺾기 싫은 녀석이 제 마누라와 자식을 먹여살리지 않고 마누라 손바닥만 핥아먹을려고 하니 누군들 바람이 안나겠냐고 했다. 만수처가 그렇게 도망치다싶이 떠나고나서 엄마는 만수네와 련락이 끊겼다. 한 동네라고 하지만 집사이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있었고 만수처가 없는 마당에 엄마는 만수와 엮일 하등의 리유도 없었던것이다. 엄마와 만수사이에는 얼핏 계산해도 2년이라는 세월이 비껴지나갔지만 엄마는 만수가 여전히 한 동네에서 할 일없이 빈둥거리며 사는줄로 알고있었다. 만수형의 말대로라면 누나의 주선으로 로씨야에서 장사를 하고있을 만수가 엄마의 생각으론 매일마다 엄마네 집을 기웃거리며 장작을 훔치는데 열중하고있었던것이다. 지극히 리성적으로 판단할 때 남편이 낮에 알아온것이 정확하다면 만수는 도적질할 객관조건이 주어지지 않은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가 공연한 의심을 한다고 결론을 지으려면 엄마가 병적인것으로 치부할수밖에 없어 내 마음이 허락치가 않았다. 머리로는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내 마음은 자꾸 엄마쪽으로 기울어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엄마는 50여분간 방영되는 한국드라마가 끝나기도전에 잠이 드셨다. 입을 약간 벌리시고 드릉드릉 코를 고시는 엄마를 보며 난 가슴이 쓰려왔다.   6 엄마걱정때문에 온밤을 궁싯거리다가 늦게야 잠이 든 내가 궁둥이가 뜨거워나서 눈을 떴을 때는 일곱시가 다되여가고있었다. 엄마가 언제 일어나 불을 지피셨는지 가마에서 뿜겨나온 뜬김이  집안에 안개처럼 얄포롬히 감돌고있었고 구수한 밥향기가 코끝으로 솔솔 날아들고있었다. 누군가 일찍 일어나서 아궁이에 불을 때서 온돌을 덥혀주고 아침밥을 지어준다는 느낌은 참 좋았다. “엄마,백할머니는 어디 가셨나봐요?” 백할머니는 엄마네 웃집의 앞집에 혼자 사는 분이셨다. 평소같으면 하루에도 벌써 몇번을 다녀가고도 남았을 할머니가 전날부터 한번도 안보이셔서 난 내내 궁금했었다. “그 할머니? 내가 너한테 말 안했었니? 돌아가셨다고.” “네? 언제요?” 난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니까 음력설 며칠전에 돌아가셨어. 전날저녁까지도 말짱하던 로인네가 아침에 가보니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더란다. 병원에 옮겼지만 의식불명인채로 숨을 거두고말았지 뭐니. 뇌출혈이였다나. 암튼 로인네들은 묵은 해를 넘기기 어려워하거든.” 엄마는 심심찮게 말하고있었지만 얼굴기색은 많이 어두워있었다. “그랬었군요~”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고말았다. 나이가 들면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적마다 마음은 심란했다. 더우기 풋면목이라도 아는 사람인 경우에는 말못할 비애같은것이 가슴 어느 구석에서부턴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백할머니의 소식 역시나 그랬다. 아흔에 가까운 백할머니는 자식들을 다 성가시키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20여년을 혼자 살고있었다. 아들네는 한국에 다녀와서 몇년전부터 시내에 들어가 살고있었고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딸이 가끔 들르며 보살펴주고있었다. 자식들이 모셔가려고 했지만 워낙 성격이 강하신 할머니는 남의 눈치도 볼 일없이 혼자 사는게 편하다고 고집하셨다. 엄마네가 몇해전부터 이사들어와서 사는 집이 할머니의 아들네가 시내로 이사가기전까지 살던 집이였던 까닭에 할머니는 곧잘 엄마네 집에 드나들었고 엄마도 맛있는것이라도 있으면 할머니몫부터 챙겨 날라갔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가까이 지내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엄마도 꽤 많이 상심하셨던것 같았다. 문득 아무래도 이 겨울에 들어 갑작스레 매일마다 도적이 든다고 엄마가 걱정하시는것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남겨진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게 아닌가싶었다. 따져보니 그럴  법도 했다. 엄마네 아래집과 그 앞집은 엄마네가 이사오기전부터 빈 집인데다가  앞집과 뒤집까지 1년전에 겨끔내기로 비였고 백할머니까지 돌아가셨다고 하니 무슨 일이 일어났댔자 머리를 내밀 사람은 안해를 한국으로 보내고 혼자 사는 웃집의 촌장뿐이였다. 할머니의 죽음과 잇달아 갑자기 혼자가 된듯한 느낌에 엄마는 얼마나 황황하고 심란하셨을가싶었다. 이제야 난 엄마가 그동안 반복해온 일련의 행동들의 원인을 알것 같았다. 워낙 소심한 성격이셨던 엄마는 1년전에 사랑채에 넣어둔 목재를 잃어버린후부터 늘 도적이 들지 않을가 경계하여왔다. 엄마네가 이사들어올 때부터 동네는 이미 예전 동네가 아니였다. 다들 외국에 가고 외국갔다와선 또 시내에 들어가고 하다보니 이 동네에도 원래 살던 사람들이 얼마 없고 외지에서 밭을 세내서 농사지으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있었다. 그 사람들은 거의다 관내에서 들어온 한족들이여서 엄마는 도저히 시름을 놓을수가 없었다. 왜선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예전부터 한족들은 속이 검다고 한결같이 고집하고있었다. 그러다보니 집이 빈건 비여서 음산하고 안빈건 외지인들이 들락거려서 동네가 어수선하다며 엄마는 얼마 안되는 돈까지도 늘 이불밑에 깔고자는가 하면 머리맡에 식칼이나 가위같은것을 놓고 주무셨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판에 만수처는 떠나버리고 백할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엄마의 도적걱정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였고 마침내 언제부턴가는 만수를 도적놈으로 찍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새로 이사들어온 동네다보니 아는 사람도 적고 거뭇거뭇한 한족들은 워낙에 말붙이기조차 껄끄러웠던 탓에 전과가 좋지 못한 만수를 빼곤 딱히 찍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도적놈이라고 찍어놓은 만수가 있고보니 더 안절부절 못했고 결국 의심은 확신으로까지 이어져 어제같은 일이 생겼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어제 새벽에 정말 누군가가 다녀갔는지 아니면 엄마가 꿈을 꾸셨는지 착각을 하셨는지 엄마를 빼곤 누구도 모를 일이였다. 게다가 엄마는 그게 만수였다고 황소고집을 부리니 누구의 말을 믿고 안믿고를 떠나서 사건자체가 황당했다. 암튼 엄마는 어제 소동으로도 만수에 대한 의심은 가셔지지 않았고 만수가 아니라도 도적놈은 어딘가에 있는거라고 고집하고 계셨다. 이런 시점에서 설득은 무용지물이 되여버리고 어떻게라도 텅텅 비여버린 엄마의 마음을 위로해줄 동무같은것이 필요했다.     7 오전에 오겠다던 사촌형수는 오후 한시가 거의 되여서야 들어섰다. 키가 크고 몸집이 펑퍼짐한 편인 사촌형수는 싸구려리발소에서 아무렇게나 깎은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있었다. “오셨어요?” “어.” 말하는 사람은 난데 사촌형수는 엄마쪽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서 오게나. 추운데 고생이 많네.” 엄마는 두 손을 비비며 어줍잖게 서있는 사촌형수의 손을 잡아끌어 구들에 앉혔다. “이번에 엄마를 잘 부탁드려요. 도적놈때문에 자꾸 걱정을 하셔서.” “무슨, 나도 아재랑 함께 있음 좋지.” 사촌형수는 조심스레 나를 흘낏 쳐다보고는 눈길을 어디 둘지 몰라 허둥거거렸다. 아무래도  난 사촌형수에게는 쳐다보기조차 어려운 존재인 모양이였다. “우리 둘이 서로 동무를 하면서 잘 있기요. 그래야 얘들도 시름을 놓을것 같구려.” 엄마는 사촌형수를 보니 마음이 든든해졌는지 환하게 웃고있었다. 그제야 나도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 하나를 내려놓은듯싶었다. 내가 작별인사를 하고 막 집을 나올 때였다. 사촌형수가 아까부터 주머니에 찌르고있던 손을 쑥 내밀었다. “이거, 애를 주우.” “네?” 내가 어망결에 받아든것은 50원짜리 지페였다. “안그러셔두 되는데.” 나는 도로 사촌형수에게 밀어주려 했으나 사촌형수는 저만치 물러나 서성거렸다. “애한테 먹을것이나 사주라구.” 사촌형수는 게면쩍게 웃었다. “자네가 무슨 돈이 있다구. 쯧쯧. 주는거니 받았다가 애를 주거라.”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흐뭇한 눈길로 사촌형수를 바라봤다. 대견해하는 눈빛이셨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돈을 지갑에 넣으면서도 웬지 영 개운치가 않았다. 벼룩의 등에서 간을 빼먹는 그런 느낌이랄가.   사촌오빠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형님내외의 손에서 자랐고 초중도 못마치고 농사일로 잔뼈를 굵혔지만 정작 농사수입은 형님네 몫이였고 사촌오빠는 장가갈 나이가 다 되도록 자기 몫의 집도 소도 농사기구도, 적금도 없었다. 혼기가 꽉 차서 더 미룰수 없을 무렵에야 겨우 결혼을 하고 허술한 초가집 하나를 세내여 신혼살림을 차리였다. 하지만 워낙 내세울것없이 변변치 못한데서 색시라고 데려온 사촌형수는 덩치도 크고 식성도 좋은데 똑똑하지 못했다. 다행히 말도 잘 듣고 일도 수걱수걱 잘해서 별 탈없이 잘 사나 싶었는데 몇년이 지나도록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촌오빠는 선천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신체결함을 갖고있었다. 두루 병보이러 다니는 눈치였는데도 좋아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촌오빠는 삼년전에 방취제시험에 합격되여 한국에 가게 되였다. 후에 오빠를 통해서 전해들은것이지만 워낙 색시에게 마음이 없었던 사촌오빠는 한국에 가서 취업을 쉽게 하려면 독신이여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사촌형수를 구슬려서 리혼을 하였다고 한다. 어수룩한 사촌형수는 그냥 가짜리혼이니 귀국하면 복혼한다는 사촌오빠의 말을 곧이듣고 리혼서류에 도장을 찍었고 사촌오빠는 처음 1년간은 꼬박꼬박 생활비를 보내주는가싶더니 다음 1년은 반년에 한번 꼴로 보내다가 이제는 전화련결도 잘 안된다고 했다. 그사이 워낙 허술하던 초가집은 작년인가 폴싹 물앉고말았고 사혼형수는 언제는 시내에 가서 보모일을 하다가 언제는 동네의 빈 집에 가서 지내다가 하면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워낙부터 형제사이의 우애가 돈독하지 못하고 돈을 많이 따졌던 형님내외는 그러는 사촌형수를 “부실한 녀자”라며 외면을 하고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사촌형수의 말처럼 사촌오빠가 돌아오면 둘이 복혼을 하여 재미있게 살려니 믿고있었고 오갈게 없는 사촌형수를 만수처를 대할 때처럼 아껴주었다. 그래서 사촌형수는 설명절에도 엄마네 집에 와서 며칠씩 묵어가기도 했고 가끔 아무 일없이도 문득 들려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고가군 했다. 식사를 해도 꼭 제일 큰 국사발에 담아서 두어그릇을 후딱 비우는 사촌형수를 나는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있었지만 사촌형수는 사촌형수대로 날 어려워하면서도 우리 애가 귀엽다고 20여원씩 쥐여주기도 했었다. 그런 사촌형수가 한동안 엄마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니 안심은 되면서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속으로는 도대체 사촌형수가 엄마를 돌볼것인지, 엄마가 사촌형수를 챙겨줄것인지 대중이 안갔다. 하지만 딱히 다른 방도도 있는것이 아니여서 두고볼수밖에 없었다.   8 나는 한참을 걷고나서야 머리를 돌렸다. 이젠 들어가셨을줄 알았던 엄마가 앞뜨락에 뒤짐을 진채 내쪽을 바라보고 서계셨다. 여전히 검정털실모자에 국방색솜옷차림이셨다. 굽어들기 시작한 허리는 두팔을 한껏 뒤로 뻗어 뒤짐을 진 탓에 약간 뒤로 젖혀져있었다. 엄마는 내가 돌아다보는것이 알리셨던지 어서 가라고 손을 휙휙 저으셨다. 그러는 엄마의 머리우로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재빨리 흩어지고있었다. 간만에 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를 보니 갑자기 어린 시절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은 두만강가의 산기슭에 오붓이 자리잡은 자그마한 오지동네여서 문만 나서면 곧바로 산에 오르거나 강가에 이를수가 있었다. 시골아이들 거개가 그렇듯이 나와 친구들은 계절을 불문하고 틈만 나면 늘 산이나 강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산이나 강에서 기껏 놀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에 집집의 굴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여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놀음을 파하고 뿔뿔이 집으로 향했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서 집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는 부모님이 집에 계신다는 무언의 암시였다. 연기가 피여오르는 날은 꼭 엄마가 일찍 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밥을 짓고 계셨고 연기가 피여오르지 않는 날은 나혼자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찬 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숙제를 하거나 저녁준비를 한다고 설쳐야 했기때문이다. 아빠트에서 사는 지금 굴뚝의 연기쯤은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것이지만 드문히 외출을 하여서 시골마을의 굴뚝들에서 연기가 피여오르면 난 그 집들에서 누군가가 살고있다는 안도감이 들군 했었다. 헌데 이제 엄마네 마을에도 연기를 피여올릴 일이 없어진 굴뚝들이 하나둘 늘어나고있다는것에 알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내가 머리를 돌리는 순간 양철기와를 멋스럽게 올린 빈 벽돌집들속에 엄마 혼자만 외롭게 남아질것 같은 그 허망함이라니. 엄마가 아무리 굴뚝에서 연기가 피여올린들 5년전에 한국에 간 오빠나 출가외인이 되여 도시에서 살고있는 나나 양어장을 지킨다고 극성인 아버지가 집문을 떼고 들어가 오손도손 밥상에 마주앉는 일은 없을게 아닌가. 나는 엄마를 향해 손을  저어보이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뗐다. 골목길에서 나와 큰 길로 접어드는 맞은  켠에 높다랗게 터를 잡은 중학교가 보였다. 역시 비여진지 오랜 건물이여서 유리창이 다 깨여지고 문짝이 떨어져나가 볼썽사나왔다. 뜨직뜨직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눈속으로 길가에 줄느런히 서있는 집들이 비쳐들었다. 정부에서 얼마간의 건축비를 대주는 정책이 있어서 다들 벽돌집을 짓고 파란 양철기와를 얹고 새하얀 강화창문틀을 대고 방도문까지 달았지만 정작 거기에 사람이 살고있는 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포장도로가 쫙 뻗고 가로등까지 설치되여있고 벽돌집까지 줄지어있어 초요촌이라도 되여보이지만 사람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바람만 휙휙 불어지나는 동네는 휑뎅그레하기만 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집을 비우고 밭을 비우고 학교를 비우고 동네를 비웠으니 아직도 더 비워야 할 그 무엇이 남아있을가? 나는 막 출발을 하려는 뻐스를 향해 잔달음을 쳤다. 벌써 몇개 동네를 거쳐온 뻐스안은 이미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로 꽉 차있다.  겨우 빈 좌석을 찾아 앉으며 난 커다란 의문부호 하나를 떠올려본다. 이제 이들은 또 어디에 가서 어느 귀퉁이를 어떻게 채울가? 점점 속력을 내는 뻐스의 뒤로 내가 금방 빠져나온 동네가 점점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득하게 , 아득하게…… 
21    공(1) 댓글:  조회:933  추천:0  2015-01-18
공(空)   김영해   1   “오늘 끝내 잡았다!” 전화를 타고 들려오는 엄마의 말소리는 거의 환성에 가까왔다. 뭘? 뭘 잡아? 나는 오리무중에 빠진채 눈만 슴벅거렸다. “결국 그 놈이였더라. 새벽에 또 왔더라니까.” 엄마는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히 신비스럽게 속닥거렸다. 새벽에?...... 어머! 나는 화닥닥 일어나 앉았다. 잠기가 확 가셨다. “누구였어요?” “만수 그 놈이였어.” 엄마는 이새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만수라? 익숙한 이름인데…… 엄마가 한참 설명을 해서야 유난히 키가 작았던 한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만수는 엄마네가 예전에 살던 동네의 뒤집사람이였다. 만수가 결혼적령기에 이르렀을 때는  90년대초로서 한창 녀자들의 도시진출로 인해서 웬만히 잘 생기고 똑똑한 총각들도 속절없이 무더기로 늙어가는가 하면 기혼남성들도 혼자서 늙은 부모님과 어린 애 뒤치닥거리를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시절이였다. 만수는 어려운 살림에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겨서야  겨우 장가를 들어  우리 뒤집에 들어서 새살림을 차렸다. 만수처는 가무잡잡하고 길죽한 얼굴에 눈이 작고 입까지 튀여나와 생김새가 못생긴데다 발음도 똑똑치 못했고 자기앞가림을 잘 못하는 축이였다. 그에 비하면 만수는 키가 작은것과 매사에 신중하지 못한 가벼운 성정만 빼면 누가봐도 처보다는 훨씬 훌륭해보였다. 누가 낫고 기울든간에 부부라면 부족한 사람을 챙겨주어야 마땅한데 그런 아량이 없는 만수는 처를 업신여기면서 공연히 사람들앞에서 구박을 주기도 하고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친정집이 다른 현시의 농촌에 있는 만수처는 딱히 갈데도 없었고 역성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는 그런 만수처가 불쌍하다고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갖다주기도 하고 가정싸움에 끼여들어 만수처의 역성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만수처는 쩍하면 엄마네 집으로 마실을 다녔고 애가 어렸을 때는 가끔 엄마한테 맡기고 일보러 나가기도 했었다. 만수처는 내가 집에 다녀갈 때마다 애를 데리고 와서는 한참을 놀다가 가군 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만수처의 눈길은 부럽다 못해 흠모에 가까와 있었다. 만수처는 내가 대학을 나왔다는것이며 도시에서 산다는것이며 직장에 다닌다는것이며 남편이 회사원이라는것까지 고루 다 부러워하고있었다.  간혹 가다 만수처는 수수한 내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이며를 한참이나 바라보면서 “아주머닌 딸을 잘 둬서 좋겠어요.”하는 말을 어눌하게 뱉어내군 했다. 하지만 오빠와 나이터울이 비슷했던 만수는 어렸을 때 늘 오빠에게 놀림받고 왕따당했던 앙금이 남아있는지 우리 부모님들을 보고 언제 한번 반갑게 인사를 하는적도 없었다. 워낙에 만수를 마뜩잖게 여기던 아버지는 언젠가 술상에서 만수한테 괄시를 당한후로는 엄마한테 똑똑하지 못한 그집식구들이랑 아는척을 말라고 침을 놓았다. 그래도 만수네가 10여년전에 공사마을로 먼저 이사오기전까지 엄마가 만수처나 애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헌데 그 만수가 엄마네 물건을 훔친 도적이라지 않는가? 난 믿겨지지 않아 전화를 놓은후에도 한참이나 궁싯거렸다.   2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뻐스를 타고 엄마가 살고있는 시골로 내려가는  동안 남편의 얼굴은 내내 굳어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난 뭐라 눈치를 줄수도 없었다.   며칠전 밤 일곱시쯤해서였다. 아들애의 숙제공부를 도와주고나서 엄마에게 안부나 전할려고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이왕과는 달리 발송신호음이 “뚜-뚜-”하고 두번을 울리기 바쁘게 전화기를 드는 불규칙적인 어수선한 소리와 함께 “워이~”하고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잔뜩 깔려있었다. “엄마, 머해요?” “조용히 해. 지금 밖에 도적놈이 오고 있어. 내가  전등을 끄고 창곁에 숨어서 지키고있다니까. 저봐, 손전등불빛이 번쩍이며 이곳으로 오고있는걸. 전화 끊어.” 엄마는 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급하게 말을 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혀를 차며 “네?!”하는 단음절을 신음처럼 내뱉았을 때는 전화기에서 “뚜뚜뚜”하는 신호음만 요란스레 들릴 뿐이였다. “왜 그래?” 입을 하 벌린채 그대로 굳어져버린 나를 남편은 의아쩍게  쳐다보았다. “집에 지금 도적이 오고 있다는데……무슨 도적을 지킨다구……” “뭐야?” 남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가고있었다. “그게 무슨 소린데? 당신 엄마는 왜 그런대?” “……” “당신 엄마가 이젠 정상이 아닌가봐.” 남편이 담배 한가치를 뽑아 입에 물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쩔건데요?!” 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상하게도 “당신 엄마”란 말에  더 화가 났다. 자기 부모라면 “정상이 아니다”는 말 한마디로 그냥 스쳐지낼수 있는 일일가싶었다. “그럼 어쩌라고? 하루도 빌새없이 도적이 맨날 온다고 그러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민경들도 이제 당신 엄마 말을 안믿는걸 몰라?!” 남편은 담배연기를 훅 들이켰다가 내뿜으며 시까스르는듯 빤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로인네가 전등도 안켜고 어두운 방안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있을거예요? 저러면 또 온 밤을 안 자고 날을 새울걸 뻔히 알면서. 에잉~” 난 말을 하다보니 막 울먹거리기까지 하였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 흐름을 알수가 없는 법이여서 순간적으로 벅차오를 때는 제어할 방법이 없는것이였다. 결국 남편은 본의 반 타의 반으로 밤에 택시를 불러 시골에 사는 엄마네로 내려가고 말았다. 파출소문을 두드려 민경들을 부르고 이웃집에 사는 촌장까지 불러내서 집주위를 한바퀴 돌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눈 덮인 집주위에는 사람의 발자국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못이 쾅쾅 박힌 헛간 문도 열쇠 두개를 단채 그대로 있었고 쇠살창을 댄 울바자도 터진 구간은 없었다. 한참을 소란스럽다가 아무 이상이 없음이 확인되자 남편은 멋적게 민경들과 촌장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할수밖에 없었다. 그게 불과 며칠전인데 이제 와서 또 도적을 잡았다고 하니 남편이 웬소리냐싶어하는것은 당연한 반응이라고 봐야 했다.   3 뻐스에서 내린 곳부터 엄마네 집까지 멀지는 않았다. 곧은 길을 한참 가다가 골목길에 접어드니 벌써 엄마네 집이 보였다. 쇠상찰로 된 삽작문을 밀자 “딸랑~”하고 방울소리가 야무지게 났고 이어서 집으로 들어가는 방도문이 덜컹  열리며 검정색털실모자를 꾹 눌러쓰고 오빠가 입다가 내놓은 국방색솜옷을 대충 걸친 엄마가 기다렸다는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오냐?” 새벽에 겨우 흥분을 눅잦히며 전화를 하던 사람같지 않게 엄마의 표정은 평온했다. “애 아빠는 파출소에 들려서 민경들과 함께 온댔어요.” “나때문에 민이 애비가 고생이구나. 며칠전에도 다녀갔는데……” 엄마는 혀아래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손에서 가방을 받아들었다. “아버지는 오셨어요?” 나는 창문으로 집안을 기웃거리며 살폈다. “와서 뭘 하니? 내가 오지 말랬어. 니들이 오는데 뭘.” 엄마는 당연한걸 왜 묻냐는듯 덩둘해하셨다. 아버지는 2년째 공사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서 남의 집 양어장을 지키고있었다. 양어장은 산아래에 인공으로 파서 만든 작은 늪이였는데 그 삼면으로는 넓은 벌이 시원하게 펼쳐져있어 시야가 탁 틔였다. 늪가에는 아버지가 거취하는 20여평되는 벽돌집 말고도 자그마한 정자를 더 짓고 돌상이며 돌걸상같은것을 들여놓았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부뚜막까지 쌓아올려 늪에서 고기를 낚거나 배를 타고 노닌 여가에 밖에서 음식을 끓여먹으면서 캠핑을 하기에는 그저그만이였다. 양어장의 주인내외는 도시에서 살고있었는데 남자는 모 국영단위의 주임이나 과장자리를 꿰차고 앉은 모양이였고 주인내외는 늘쌍 휴일이면 자가용을 몰고 친구들과 함께 소풍삼아 다녀가군 했다. 정작 주인은 물고기키우기보다 휴가지로 쓰는데 더 열중하고있었지만 아버지는 산밑에 뙈기밭도 만들어놓고  닭이나 개도 키우면서 한시도 양어장을 비울 념을 하지 않았다. 명절에도 아버지를 볼려면 우리가 양어장에 와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일이 일인지라 아버지가 오실줄로 알았는데 역시 아닌 모양이다. “근데 엄마, 엄마는 어떻게 도적놈이 만수인걸 단번에 알아봤어요?” 나는 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기 바쁘게 전화를 받을 때부터 미심쩍었던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캄캄한 밤에 창문너머로 밖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수 있다는것이 난 믿겨지지 않았다. “목소릴 들었지. 몸집도 분명히 그놈이였다니까. 그리고 그 놈이 워낙 도적놈이니 제 버릇 개 주겠냐?” 원래부터 도적이라니? 나는 무슨 소리냐싶어 엄마의 입만 빤히 쳐다봤다. “그게 말이다. 아마 10년도 더 된 일일걸.”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개 이러했다.   만수네가 이 공사마을로 이사오기전인 10여년전의 어느 여름날밤이였다. 늦은 시간에 엄마는 배탈을 만나 뒤간에서 일을 보고있었다. 한창 배를 붙안고 끙끙거리는데 웬 그림자가 뒤울안에서 어슬렁거리고있는것을 발견한 엄마가 정신을 도사리고 살펴보니 만수였다. 엄마는  대충 뒤를 닦고 겁도 없이 문을 와락 열고 “뭐하는 짓이냐?”하고 소리쳤다. 그 서슬에 와뜰 놀란 만수가 끌고가던 나무가지를 그 자리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그냥 몇가지 가져다 쓸려고……”하고 얼버무리고는 후닥닥 뺑소니치고말았다. 엄마는 만수의 행실이 괘씸했지만 아들또래이고 이웃사이에 쌓아온 정이 나무 몇가지만 못하랴싶어 만수가 이튿날에 사과하면 이웃사이에 훔쳐가는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타일러주고 나무를 가져가라고 할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만수는 사과는커녕 마주치기라도 하면 머리를 외로 탈고 아닌보살을 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아버지는 그즈음에 창고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장독이며 낫이며 곡간에서 줄어든 두어마대의 옥수수까지도 만수의 소행이라고 넘겨짚었다. 아버지는 물증이 없어 떠들지는 못하고 문단속을 엄히 하면서 엄마와 만수처랑 어울리는것을 극구 말리셨다. 부부는 한통속이라는것이 아버지의 일가견이셨다. 그렇다고 여겨서 그런지 만수처의 마실도 한동안은 뜸해진것 같았다. 그러고나서 반년쯤인가 지나서 만수네는 아무런 변명이나 해석도 없이 지금 엄마네가 살고있는 공사마을로 먼저 이사를 왔었던것이다. 그때 엄마가 만수한테서 느낀것은 서운함이나 고까운 감정을 벗어나 일종의 배신감같은것이였다. 엄마가 자기 처며 애를 보듬어준 세월을 생각하면 그번의 만수의 행동은 배은망덕한것이였다. 그럼에도 엄마가 그 일을 여태 묻어두고 산것은 만수처와의 끈끈한 인연때문이라고 했다. “오늘같은 일이 생길줄 알았더면 그때 그 놈을 확실하게 혼을 내는건데.” 엄마는 못내 후회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아무래도 이번만은 엄마의 말이 맞는것 같았다. 아니, 맞기를 바랬다. 만수가 어떤 사람이였던가를 떠나서 난 정말로 만수가 도적이기를 바랬다. 만수가 도적이고 또 잡을수까지 있다면 이제 엄마는 도적놈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남편도 도적놈을 잡는다고 민경들앞에 체면을 구기고 소란을 피우지 않아도 될것이였기때문이다. 어쩜 나는 그동안 엄마걱정보다도 남편의 눈치를 살피는데 더 신경이 씌였는지도 모른다.   4 민경들과 함께 집에 들려 정황을 료해하고 다시 나간 남편은 거의 점심때가 되여서야 돌아왔다. 아까 통화를 하면서 대충 결과를 짐작한 나는 말없이 남편이 겉옷을 벗는것을 거들어주었다. “어쨌누? 그 놈을 붙잡아 류치장에 가둔거유?” 엄마는 남편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바투 다가앉았다. “아니. 못잡았는걸요.” “어유, 그 놈이 그새 도망쳤나보네.” 엄마의 얼굴에 실망의 그늘이 어리고있었다. “그게 아니구. 집이 비여있었어요. 이웃들과 물어보니 집을 비운지가 1년이 되는데 어디 갔는지 모른대요. 두어달전에 경운기에 무슨 이사짐같은것을 실어간걸 본것이 마지막이래요. 요사이엔 본적이 없고 엊저녁에도 온 기척이 없었다는데요.” “내가 분명히 새벽에 봤다니까. 그 놈이 자기 자식또래같은 애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왔었수.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놈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대두 그러네. 아무래도 나한테 잡힌걸 알고 돌아가자바람으로 도망친거지. 에이~” 엄마는 눈살을 찌프리며 맹랑해하셨다. “저두 혹시나 해서 민경들과 같이 그 사람 형네 집에까지 갔다왔어요. 형이 그러는데 지금 저 집에 살지 않는지가 꽤 오래 되고 로씨야장사를 갔대요. 돌아와도 시내에 세를 내서 얼마가 머물다가 금방 로씨야로 돌아가군 하는데 자기도 두어달째 아무 련락이 없었다는데요.” “형제니까 싸고도는거겠지. 그 놈은 원래부터 그런 놈이였어. 제 버릇 못고친다구. 이번엔 꼭 잡았어야 하는데.” 엄마는 남편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셨다. “어머님이 당장에서 잡은것도 아니니까 우리쪽에서도 할 말이 없죠.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인데 왜 장작이 필요해서 가져가겠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요.” 남편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는 모습을 난 조마조마해서 지켜보았다. “내가 없는 말을 하는게 아니잖수? 내가 오늘 새벽에 분명히 잡았다니까. 그 놈이 맞아.” 엄마는 기어이 고집을 부렸다. “그게 잡은겁니까? 그냥 어두운 집안에 숨어서 내다보고 있은거지. 얼굴도 못보았잖아요. 어머님이 올 겨울에 들어 이상하시다는 생각 안들어요?  1년전에 사랑채에 넣어둔 목재가 잃어진것은 믿겠어요. 근데 올 음력설을 지나고나서 어머님이 맨날 도적이 장작을 가져간다는데 저희 눈엔 줄어든것도 안보이고 도적이 다녀간 흔적도 못발견했거든요. 뭘 어떻게 믿어요? 오늘도 어머님 말을 믿고 한나절이나 밖에서 얼었는데 결국 이게 뭡니까? 사람이 없다잖아요. 생사람을 도적으로 몰다가 화를 입는다구요!” 남편은 버럭 화를 냈다. 남편의 말처럼 매일 도적이 온다고 소란스러운 사람은 온 동네에서 엄마뿐이고 도적맞혔다는 물건이 돈이 되는것도 아닌 불을 때는 장작이라니 정상적인 사유로 리해될수 없는 일이긴 했다. 게다가 밤중에 전지불빛이 비쳐도,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비쳐도 “저봐, 또 도적놈들이 언제 올려나 넘보고 있는거다.”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걸 보면 엄마의 도적놈걱정은 분명히 도를 넘어서고있었다. 엄마가 도적놈을 잡는다고 소동을 피울적마다  함께 설치면서 민경들보기가 창피스러웠던 남편이고보면 화를 낼법도 했다. “자넨?! 아니, 왜 사람 말을 이렇게 안믿나? 남들이 그러는것도 섭섭한데 자네까지 그러나? 원참!” 엄마는 안색을 흐리며 삑 돌아앉았다. 남편은 끙하는 소리를 신음처럼 짧게 뱉아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화를 참는 기색이 력력했다. 남편은 한숨을 풀 내쉬더니 거칠게 담배 한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서로 등을 돌리고 앉은 엄마와 남편을 보다말고 엄마립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이라는것이 쉬이 바뀌는것이 아니니말이다.
20    소리가 보이니(2) 댓글:  조회:1588  추천:2  2013-08-11
5 “저 녀자가 벙어리 청소부야?” 나를 마주 향하고 앉은 녀자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날 눈빗질하고있었다. 나를 등지고 앉았던 박선생이 머리를 피끗 돌려 날 보며 씩 웃어주고는 녀자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양이였다. “말을 알아들어?!” 녀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박선생이 손으로 자기의 귀를 가리키기도 하고 녀자의 입을 가리키기도 하면서 한참을 부산스럽더니 녀자가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고 날 보며 게면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마도 듣지는 못하는데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고 말을 하는거라고 박선생이 이야기를 해준 모양이였다. 나는 녀자를 향해 입귀를 들어올리며 머리를 까댁거려보였다. 박선생의 손이 티비를 가리켜보이고 녀자의 눈길이 티비와 나를 엇갈아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박선생의 갸냘픈 등은 열심히 들썩이고있었고 박선생의 손짓에 따라 녀자의 눈길은 내 몸이며 핸드폰, 십자수 심지어 구석에 놓은 청소도구들에까지 골고루 미치며 얼굴표정이 다양하게 변해가고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은 시종 입을 가리고있는것을 봐선 아무래도 박선생과 여전히 말을 하고있음이 분명했고 그 말의 내용의 중심대상은 나일것임에 불보듯 뻔했다. 둘이 그러는 모양을 나는 무표정하게 지켜보다말고 크게 하품을 하고 졸린듯이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순간 , 그 간단할래야 더 간단할수 없는 그 일관된 동작 하나로 인해 난 혼자가 되고말았다. 눈을 감는다는것—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외부세계와의 차단이였다. 나는 눈으로 세상을 봤고 눈으로 사람의 말을 들었고 말을 배웠으니 눈은 내가 세상을 내것으로 인식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였다. 이제 눈을 감았으니 워낙 고요하기만 했던 내 세상은 평화롭기까지 하다. 박선생은 나를 등지고 앉지 않아도 될것이고 녀자는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아도 될것이고 그들은 내 쪽을 마음껏 힐끗거리며 소리내여 웃어도 될것이였다. 내 몸에 붙은 눈을 감아버리는 동작으로 나는 그들한테 불편했던 나라는 존재를 그들에게서 온전히 제거시킬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경이롭게 느껴졌다. 왜 그동안 피로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기를 쓰고 남의 말을 듣고 살았을가?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는 내 눈을 항상 경계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가? 문득 어디선가 들어두었던 “말을 알아듣는 벙어리가 더 무섭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그 말대로라면 말을 듣고 하기까지 하는 나는 더 무서운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정상인이 아니면서도 입을 통해서 넘나드는 온갖 비리가 섞이는 말들을 빤히 쳐다보고 사는 나는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답지 않은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장애인의 세계에서는 역시 수화가 아니여도 얼마든지 말하고 들을수 있는 온전한 장애인도 아닌 이방인이였다. 종국적으로 난 어디에도 속할수 없는 어눌한 내 발음처럼 어리버리한 처지였다. 그러고보니 아들애의 말처럼 온전히 수화에만 골몰하면서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면 난 적어도 확실한 장애인으로 될게 아닌가? 말을 버리는 일, 아들애때문이 아니라도 한번 고민해볼만한 일이였다. 아주 이전에 병으로 잃었던 말을 , 피나는 노력으로 어눌하게나마 되찾았던 말을 이제 버릴지 말지 고민해야 할 때가 온것이였다.     6 “현이 애비가 공부를 끝낼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걸려야 하니?” 엄마가 입술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하고있었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내 눈을 보며 최저한 속도를 늦추어 말을 하는것이 엄마가 나에 대한 배려였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난 항상 엄마의 목소리는 잔잔한 보슬비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울거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어릴 때 들어두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기억에 없지만 말이다. “네. 이제 1년만 더 공부하면 된대요.” 나도 최대한 입모양에 주의를 하며 말을 했다. 내 발음이 정확해야 엄마가 덜 가슴아파할거니까. “그렇구나. 현이 애비의 공부가 빨리 끝나야 너도 덜 고생할텐데. 네가 어렸을 적에 내가 좀만 더 신경을 썼어도……” 엄마는 몸을 돌렸다. 촉촉한 엄마의 눈에서 난 엄마의 슬픔을 읽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는 자신을 원망하군 했었다. 내가 여섯살 때 아버지는 인민공사의 제방뚝을 수축하는 공사현장에 반년째 집단주숙을 하며 가있었고 엄마는 혼자서 중풍으로 앓아누운 할머니를 돌보며 생산대일을 하고있었다. 나는 집에서 할머니의 물심부름을 하며 혼자서 놀다가 점심 때가 되면 가마목에 준비해둔 점심밥을 할머니와 함께 차려먹군 했었다. 농군들이 제일 바쁜 모내기철에 코물을 훌쩍이며 감기에 걸린 나에게 엄마는 촌위생소에서 얻어온 약을 먹이는것이 고작이였고 그렇게 거의 한달을 시름시름 감기를 앓다가 어느날 밤 갑자기 고열이 나면서 입술이 새까맣게 질려 정신이 혼미해진채로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뇌막염이 진행된 상태였다. 의사는 엄마에게 감기로 인한 바이러스가 척추를 통해 뇌에 침입한것이라고 알려줬다고 했다. 응급치료를 거쳐 생명을 보전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난 청력을 잃고말았던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함때문에 난 밤에 잠을 자다가도, 아침에 눈을 떠서도, 밥을 먹다가도, 장난감을 놀다가도 안들린다고 시도때도없이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렸고 그때마다 엄마는 눈물로 얼굴을 씻군 했었다. 내가 차차 듣지 못한다는 현실에 적응이 되여가면서 안정을 찾아갈 무렵 난 이미 내 눈앞에서 수많은 입들이 하나같이 벙긋벙긋 하는 모습들때문에 곤혹스러워하고있었다. 엄마는 하루 아침사이에 청각장애인으로 된 내가 잴잴 번지던 말조차 안할가봐 틈만 나면 나를 마주앉혀놓고 수없이 같은 말들을 반복하면서 입모양을 보고 말을 따라하게끔 가르쳐줬고 학교 갈 나이가 되자 롱아학교에 보냈었다. 난 롱아학교에서 수화를 배웠고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방법을 배웠을뿐만아니라 글자를 익히고 지식들을 배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미를 만났고 우린 친구가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같은 롱아라고 해서 같은 운명인것은 아니였다. 부모가 국영공장의 로동자였던 영미는 어른이 되여서도 부모의 그늘아래에서 유족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배고픈 걱정을 안하고 살고있었고 부모가 농민이였던 나는 생계조차 문제였다. 내가 롱아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만만찮은 내 교육비와 아버지의 병원비를 감당하느라고 엄마는 빚더미에 눌려 허리가 휘여져 숨이 가빴었다. 그런 엄마에게 난 무엇을 더 부담시킬수가 없었고 일찌감치 나랑 처지가 엇비슷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버렸다. 결혼을 했댔자 다리를 살룩살룩 저는 장애를 가진 남편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시원찮았던 탓에 형편이 좋아진것은 아니였지만 청소부일이라도 하면서 먹고 살수 있다면 난 만족이였다. 2년전부터 남편은 장춘에 있는 기독교신학교에 재학중이였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 전도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면 매달 월급을 준다고 했다. 나를 만나기전부터 남편은 기독교신자였고 어쩌다가 교회에서 추천을 받아 그 학교에 가게 된것이였다. 남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신앙일뿐이지 먹고 살기 위한것이 아니라지만 어떻든간에 나에겐 남편이 졸업을 하면 수입이 보장된다는것이 제일 기쁜 일이였다. 나는 기독교를 신앙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의식과 믿음은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는것이 내 견해라면 견해였다. 어쩜 이것이 엄마가 장애인인 나를 교육받게 한 나쁜 점이라면 나쁜 점이겠다. 장애인이라면 남보다 지력이 뒤쳐지든지 의식이 뒤쳐지든지 뭔가 조금은 뒤져서 정상인들의 동정을 유발시킬수 있어야 하고 가난하면 가난때문에 주접이 들줄도 알아야 하는건데 전혀 그렇지 않은 나때문에 주위의 정상인들은 피곤할것이니까말이다. 다만 날 한껏 작아지게 하는것은 아들애뿐이였다. 나때문에 아들애가 마음의 장애를 갖게 하는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아들애가 이제 나한테서 등을 돌리고 저만치로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내가 벙어리라서, 말을 하는 벙어리라서 말이다.     7 나는 뚫어져라 길건너편의 신호등만 바라보며 껌벅이는 수자를 세고있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신호등이 파란 색으로 바뀌는 찰나 나는 급히 횡단보도에 내려섰다. 하지만 두발작만에 화들짝 놀라며 멈춰서고말았다. 난데없이 승용차 하나가 내 코앞을 휙 스쳐지난것이였다. 가슴이 활랑이며 등골에서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급히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누군가에게 팔이 홱 나꿔채이며 횡단보도밖으로 밀쳐졌다. 얼결에 휘청이다가 몸을 가누고서보니 웬 우악진 40대의 남자 하나가 눈앞에 떡 버티고서있었다. 뭐야? 나는 씩씩거리며 눈에 힘을 주고 남자를 째려봤다. “죽고싶어?! 왜 차가 오는데 뛰여들어?” 남자는 50여메터밖에 서있는 검은색 승용차 하나를 가리켜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아…… 나는 그제야 남자가 내 앞에 서있는 까닭을 눈치챘다. 금방 내가 치일번 했던 승용차였다. “신호등이 켜졌길래……” 나는 어눌하게 내뱉으며 맞은켠 신호등을 가리켜보였다. “경적을 울렸잖아?!” 손바닥을 탁탁 앞을 향해  치는 동작을 해보이는 남자의 목의 힘줄이 지렁이같이 살아나고있었다. 남자는 나를 향해 삿대질까지 해가며 뭐라고 더 말했으나 갑작스런 일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나는 이젠 한마디도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남자의 입만이 물속에서 숨쉬는 금붕어입처럼 뻥긋거리고있을뿐이였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숨이 한줌만해서 불이 뚝뚝 떨어질것 같은 남자의 눈길을 피해 코앞에서 쉴새없이 나불거리는 남자의 입만 멍하니 바라보며 남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신호등……붉은 신호등……우회전……교통규칙……” 남자는 대개 이러루한 단어들을 내뱉고있었다. 아마 붉은색 신호등이 켜져도 직진하던 차가 우회전은 할수 있다는 교통규칙도 모르냐고 나한테 호통치는 모양이였다. 나도 그쯤의 상식은 알고있었다. 다만 오늘은 길건느기게 급해서 차가 오는지 안오는지 살펴보지 않았을 뿐이였다. 하학하면 내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던 아들애가 혼자 집에 갔다는데 내 마음이 급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놈의 경적은 원체 난 듣지를 못했다. 하지만 난 내가 귀를 못듣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고 설명할 마음이 없었다. 하긴 내 눈의 집중력만 안떨어지면 어지간히 알아듣고 말할수 있지 않은가! “……혼자 죽어!” 끝으로 이 네음절을 입술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내뱉고난 남자는 발을 탕 구르며 나를 한번 더 노려본후 몸을 돌려 가버렸다. 쫙 줄이 선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의 커다란 등짝이 승용차안으로 사라지길 기다려 나는 침을 탁 뱉았다. 니나 죽어. 나는 코바람을 힝힝거리다말고 갑자기 눈물이 쑥 빠져나왔다. 나한텐 경적소리를 듣지 못한 죄밖에 없었다. 길건너편의 신호등을 확인하고 서있어야 했던 나는 우회전하는 차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나도 차에 치여 죽고싶어서 그런것은 아닌데  나만 몰아부치는 남자가 미웠다. 혹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 남자는 하던 욕설을 멈추었을가? 그러기는커녕 병신 주제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으로 보였다.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아버리며 길 건너편에 눈길을 주니 그새 붉은색으로 바뀌였던 신호등이 또 깜박이며 막 푸른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우회전하는 차가 없나 살펴보고서야 횡단보도에 내려섰다. 오늘은 참 안좋은 날이다. 이제 소리를 보기가  참 지겹다~     8   인공와우수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박선생을 바라봤다. “그래, 인공와우수술. 들어봤지? 보통 벙어리들은 말을 못들으니까 글자를 모르고 글자를 모르니까 인식이 훨씬 떨어지잖아. 근데 현이엄마는 글자를 아니까 그냥 벙어리들이랑은 달라. 현이엄마는 들을수만 있다면 우리랑 별로 다를게 없을것 같은데 말이야. 인공와우수술을 해볼 생각은 안해봤어?” “아니요.”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공와우수술에 대해 못들어본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귀 뒤쪽의 머리를 박박 밀고 살을 길게 찢어내고 머리 뼈를 들어내고 그 작은 달팽이관에 전선을 삽입하고 뇌가 눌리지 않도록 뼈를 얇게 갈아낸 후 자성을 띤 보청기를 뼈에 부착한 후에 다시 덮는 수술이였다. 내가 어릴적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지만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지금은 청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수술이였다. 하지만 복잡하고 힘든 수술보다는 수술전 검사부터 시작해서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나한테 있어서는 천문수자에 가까왔다. 한쪽 귀만 수술한다쳐도 거의 인민페 17만원에 가까운데 한달 월급이 800원인 나에게 있어서 그 돈은 죽을 때까지도 만져볼수 없는 돈이였다. 나는 아예 인공와우수술에 대해서 엄마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었다. 그런 수술이 있는 줄을 알면 가난때문에 딸에게 소리를 찾아주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은 더 갈가리 찢어질것이였다. 늙고 힘없는 엄마에게는 먼 옛날처럼 한번 장애인이 되면 쭉 죽을 때까지 장애인으로 사는것인줄 아는게 더 마음 편한 일일것이라고 난 생각했던것이다. 그리고 나도 잊고 살았었다. 소리를 들을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경제적인 요인때문에 소리를 찾을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더 비참해질것 같았고 가슴속에 워낙 얼마 남지 않은 행복감마저도 사라질것 같았기때문이였다. 자기의 무능력을 승인하며 산다는것은 어지간한 용기로 할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헌데 그 인공와우수술을 해보란다. 것두 난 여느 벙어리와 다른 글자를 아는 벙어리니까. 인공와우수술— 실은 나도 하고 싶다. 나도 이제 소리를 듣고 싶다. 한번도 들은적이 없는 아들애와 남편의 목소리, 너무 어릴 때 들어서 이젠 기억에 없는 부드러울것 같은 엄마의 목소리, 도대체 어떤 소리일지 궁금한 내 목소리, 책에서 글줄로만 읽어봤던 새들의 지저귐 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온갖 미세한 자연의 소리들과 눈으로 보기만 했던 이름도 모를 악기들이 내는 소리며 인공적인 소리, 고막이 파렬된것 같은 거대한 굉음까지도 듣고싶다. 그 미묘한 소리들과 잡다할것 같은 소리들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애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가려듣고 함께 웃어주고 싶고 잠자리속에서 아들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등을 다독여 잠재워주고싶고  숨죽여 우는 아들애의 울음소리를 듣고 꼭 그러안고 달래주고싶다. 소리를 들을수만 있다면 소리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하기전 다시는 고열때문에 괴로와하는 아들애를 옆에 두고도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이 없을것이고 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길을 건느는 일도 없을것이고 아들애가 목이 터지게 부르는 줄도 모르고 잰걸음을 치는 일과 같은 슬프기만 한 일들이 없을것이였다. 또한 나는 다시는 누군가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것이 겁나지 않을것이고 난 눈을 감고도 원하는 모든 소리와 말을 들을수 있을것이고 못듣는것때문에 겪었던 모든 불편한 일들을 피할수 있을것이였다. 헌데…… 헌데…… 난 인공와우수술을 할수가 없다. 난 여전히 들을수가 없다. 전혀.   9   누군가 팔굽을 툭툭 건드렸다. 머리를 돌려보니 어느새 들어왔는지 아들애가 제법 묵직해보이는 비닐가방을 들고 내 옆에 다소곳이 서있다. --뭔데? 난 수화를 했다. 아들애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한 날 이후로 나는 아들애앞에서 쭉 수화를 해왔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준거야.” 아들애가 말을 하며 비닐가방을 들어 내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열어보니 공책이며 필통, 연필, 다이어리같은 학용품들이다. --왜 준거야? “래일이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날이래.” 장애인돕기? 난 가슴이 덜컥했다. 조심스레 아들애의 기색을 살폈다. --너 괜찮아? 기분이 안 나빠? “아니. 뭐가 기분 나빠? 엄마, 아빠가 장애인인거 맞잖아.” --아니, 넌 엄마, 아빠가 장애인인걸 싫어하지 않나 해서. “아니야. 싫어한게 아니라 속상했어. 친구들이 엄마를 놀려주니까 속상했던거지 엄마, 아빠가 장애인이라서 싫거나 부끄러웠던것은 아니야.” 아들애가 입술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아들애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선생님이 말해줬어. 장애인들을 놀려주거나 괴롭히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구. 장애인들도 여느 사람들처럼 자기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간다고 했어. 그래서 서로 도와주며 살아가야 하는거라구.” --그래? 선생님이 그런걸 다 얘기해줬어? 참 고맙구나. 늘 고마운 선생님이였다. 조학금이 내려오면 아들애부터 챙겨주고 아들애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유념해주시는 선생님이였다. “이전에도 늘 얘기해줬는데 우리들이 어려서 잘 알아듣지 못한거야. 근데 이젠 나도 다 알아들을수 있어. 컸거든. 그리고 엄마, 수화를 하든 말을 하든 엄마 맘대로 해. 나 이제 정말 컸어. 나중에 내가 더 크면 엄마 귀를 수술해서 들을수 있게 할거야. 몹시 아플 때 수술같은거 하면 금방 낫잖아. 그러니 답답하더라도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 알았지?” “현이야~” 나는 아들애의 이름을 부르며 아들애를 꼭 그러안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열한살짜리가 이렇게 속깊은 궁리를 하고 있을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인공와우수술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막연하게나마 엄마 귀를 수술해서 듣게 해주겠다는 아들애가 있는데 이제 내게 뭐가 더 필요하단말인가?     나는 오랜만에 아들애의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갔다. 귀여운 동물그림이 있는 십자수라도 한점 해서 아들애의 교실에 걸어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십자수를 파는 매대에 이르기도전에 멀리서부터 이전에 안보이던 커다란 풍경화그림 한폭이 눈에 띄였다. 나무잎이 노랗게 빨갛게 물들어있는 가을풍경이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거의 4메터 길이에 1메터 남짓한 너비를 가진 크기였다. 액자까지 맞춰넣어서 그저 보기에도 화백들이 그린 유화못지 않은 운치를 갖고있었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한것은 그 옆에 붙은 가격표였다. 만원? 입이 딱 벌어졌다. 만원짜리 십자수라니? 내가 가끔 몇백원씩 받고 팔던 조그마한 십자수에 비하면 엄청난것이였다. 문득 저런것 17점이면 내 귀가 들릴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저도모르게 내 입귀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난 소리를 보지 않고 들을수 있는 길이 생긴것이 아닌가?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좋았다. 언젠가는 나를 듣게 해준다는 아들애의 약속이 내 마음의 드팀목이라면 뭔가 내 손으로 할수 있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이였다. 꼭 이루어낼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목표가 생긴다는것, 어두운 턴넬을 지나갈 먼 곳의 한점의 불빛이 보인다는것은 어찌해도 좋은 일이였다.그리고 이제 남편도 1년만 되면 졸업을 하고 돌아올것이고 남편과 함께 손을 맞들고 벌면 행복은 한발작씩 내게로 다가올 것이였다. 워낙 행복이란 노력하는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거니까. 금방 받은 한달 월급을 탈탈 털어 제일 큰 크기의 십자수천과 두가방도 더 되는 색실뭉테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한껏 따스해진 봄바람이 살살 볼을 만지며 내 머리카락을 기분좋게 날려주고있었고 길가의 관상용나무들에서 파아란 잎사귀들이 파르르 파르르 떨며 웃고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무수히 많은 달팽이관들이 팽글팽글 돌아가고있었다. 또 그리고 문득 꽉 닫힌 내 귀로 슬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스치는 소리며 조잘조잘 시내물이 흐르는 소리며 삣쬬롱하는 새소리들이며……        
19    소리가 보이니(1) 댓글:  조회:1295  추천:0  2013-08-11
소리가 보이니?   김영해   1 우웩! 토악질이 날려고 했다. 웬 앙큼한 녀석이 변기밖에 덩치 큰 놈을 보란듯이 싸질러 놓았다. 변기에서 새여나온 물에 적당히 퍼질러져 막 주위로 흩어지고있는 상당히 고약한 상태였다. 냄새도 냄새려니와 그것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순 위속으로부터 내용물이 욱하고 올리밀었던것이였다. 에이! 투덜거리며 비자루로 쓸어서  변기에 밀어넣었다. 더럽다고 투덜대며 어물거릴 새가 없었다. 변기청소를 끝내고 변기주위와 바닥의 타일까지 말끔히 닦아내려면 아직도 시간이 어지간히 걸려야 했다.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변기의 물을 내렸다. 어어! 변기의 물을 내리는 찰나 나는 풀쩍 뛰며 비자루를 팽개치고 나와버렸다. 변기에서 내리는 물이 쏟아지는 힘을 못이기며 우로 튕겼고 그 서슬에 미처 변기로 빠져나가지 못한 오물들이 물방울과 함께 가차없이 내 얼굴에 튕겼던것이다. 화장실밖 위생실에 걸린 거울에서 누런 똥물이 튕긴 얼굴을 확인하는 찰나 나는 발을 탕탕 구르며 씩씩거렸다. 어디선가부터 밀려오는 화를 어디로 분출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릴 때 였다. 자그마한 손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탁 털며 머리를 홱 돌려보니 아들애였다. 왜? 나는 아들애의 입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들애의 얼굴빛이 빠르게 어두워지고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했다. 아니나다를가 아들애는 대답도 않은채 눈을 내리깔고 쌩 나가버렸다. 현이야~ 이름을 부르며 쫓아나갔지만 아들애는 어느새 저만치서 머리도 돌리지 않은채 잰걸음을 치고있었다. 나는 그자리에 굳어진채 아들애의 자그마한 등이 달싹이며 멀어지는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고서있었다……   2 물통을 엎지르기도 하고 비자루를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평소보다 곱절이나 되는 시간을 거쳐 겨우 청소를 끝내고 접수실로 오니 아무도 없었다. 늘 그랬다. 접수실에서 우편물을 받아서 분류하여 각 교연실의 우체통에 넣어주는 일이 고작인 박선생은 자기의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법이 별로 없었다. 나이가 쉰둘인 박선생은 요추간탈출로 신체가 안좋다며3년째 교수일선에서 물러나 이제나 저제나 하고 퇴직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였다. 우편물이 오는 시간은 늘 일정했다. 택배나 잡지는 점심 12시쯤이면 도착했고 신문은 오후 2시쯤이면 도착했다. 하여 박선생은 그 시간대를 제외하고는  늘쌍 다른 사무실들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때우기가 일쑤였고 그러지 않는 시간이면 티비를 켜놓고 한국드라마에만 매달려있었다. 보매 내 눈에는 전교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박선생이였다. 공부하는 학생들보다도 더 편해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였고 그가 뭘하든 내게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동료도 아니였고 그저 한 공간을 같이 리용하는 딱히 무슨 사이라고 찍어 말할수도 없고 또 아무사이도 아니라고 해서 각자 살아가는데 티끌만치도 영향주지도 않는 그런 사이였다. 내가 여기서 청소부일을 하는지도 꼬박 2년째이지만 우리 둘사이에는 서로 이렇다할 마찰이 없었다. 마찰이 없다는것은 느끼기에 따라서 사이가 좋거나 아니면 사이가 소원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로가 접수실에 있든 없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상대방이 없어도 일이 있어서 나갔으려니 하고 생각하면 그만이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출근할 적에 어쩌다 책상에 마주앉아 돋보기를 걸고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더니 또 다른 사무실에 놀러 간 모양이였다. 안그래도 혼자 있고싶었는데 잘 됐다싶어하며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연히 심호흡을 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갑자기 울고싶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느닷없이 머리속에 커다란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헌데 그 의문부호에 마침표를 찍어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애땜에? 남편땜에?......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답안 대신 공연히 의문부호가 줄줄이 떠오르며 머리속이 번잡해지고있었다. 막 머리가 아파지려 했다. 뭔가 복잡한것을 생각하기가 딱 질색이였다. 나는 급기야 허리를 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생각을 털어버리고싶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꾹꾹 눌렀다. -영미야, 나 기분이 안 좋아. -왜?  무슨 일 있나보구나. -재수없게 청소하다가 얼굴에 똥물이 튕겼어. 지랄맞게. -저런~ 기분 더러웠겠다. -그때문만이 아니야. 그 모습을 우리 현이가 봤지 뭐니. -아이 참, 어쩌다가? -마침 화장실에 있었나봐. 난 그 애가 있는줄을 몰랐었고. 화장실에 칸에 그렇게 많은데 면바로 걔가 그 시간대에 거기 있을줄을 내가 어떻게 알았겠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잔뜩 토라져서 불렀는데도 대답도 안하고 가더라. 등을 보이면서. -쪼꼬만 녀석이 왜 그런대? 가만히 보니 현이는 나이에 안 어울리게 심각한 구석이 있더라. -몰라. 애가 이제 날 싫어하겠지? 날 부끄럽게 생각할지도 몰라. 난 그게 걱정이다. 자식이 부끄러워하는 부모—너무 한심하지 않니? -안그럴거야. 아직 어려서 뭔가 리해되지 않는것이 있어서 그런거니까 언젠가는 널 리해할거다. -글쎄 그랬으면 좋으련만…… 영미와의 대화를 끝내고도 내 마음은 개운하지가 않았다. 내 눈앞에서는 자꾸 아들애의 자그마한 등이 달싹이며 멀어져가고있었다. 나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한창 수업중일 시간이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들애가 걱정되여서 그대로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아들애의 교실앞에 이른 나는 슬금슬금 교실뒤문으로 다가갔다. 발뒤꿈치를 들고 뒤문유리로 교실안을 들여다보았다. 애들이 한창 뭔가를 쓰고있었다. 똑같은 교복들을 입고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아들애의 조그마한 잔등을 알아보았다. 아들애도 똑바로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있었다. 멍해 창밖만 바라보고앉았을가봐 걱정했던 아들애의 모습이 아니여서 안도의 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열한살은 기분전환이 빠른 나이인가보다. 다시 발걸음을 가볍게 옮겨놓으며 접수실에 돌아와보니 박선생이 어느새 돌아와 티비를 보고있었다. 박선생은 문을 떼고 들어서는 나를 보자 예나다름없이 사람좋게 벌씬 웃어주었다. “청소 끝났나보네.” “네.” 나도 히죽 웃어주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책상밑에 세워놓은 종이가방에서 십자수천과 색실 한뭉테기를 꺼냈다. 전면청소는 끝냈으니 이제 휴식시간마다 가끔 어지러워지는대로 밀걸레로 닦아내면 되였기에 한숨 돌리면서 수놓이를 할수가 있었다. 청소하는 여가에 내가 짬짬이 할수 있는 소일거리치고는 십자수가 제격이였다. 아무때든 쉽게 손에 쥐고 놓을수가 있었고 갖가지 색실을 꿴 바늘로 천을 찔러 도안을 수놓아가는 동안이면 오로지 눈과 손끝에만 정신이 몰두되면서 온갖 잡다한 근심거리들이 잊혀져있어 좋았고 십자수가 한점씩 완성될 때마다 그것을 팔아 돈을 벌수 있다는 희망때문에 더 좋았다. 아무래도 아침청소때의 기분나쁜 일을 빨리 잊으려면 오늘도 십자수에 매달려있는게 상책일것 같았다.   3 선생님은 야단치지 말고 잘 타일러보라며 안스러운 눈길로 아들애를 한번 더 바라보고는 수업하러 가버렸다. 내 앞에 버티고 선 아들애는 눈을 내리깐채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손으로 아들애의 두 어깨를 잡고 아들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왜 싸웠는데?” 나는 조심조심 물었다. 아들애는 입을 쀼죽 내밀고 고개를 옆으로 탈았다. 대화를 거부하는 상태였다. “말을 해야 수업하러 들어갈게 아니니?” 아들애의 작은 입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꼭 닫겨져있었다. “네가 싸우면 엄마가 속상해. 알지?” 아들애는 고개를 탄 채로 눈을 들어 나를 피끗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들애는 급히 수화를 해댔다. --엄마, 말하지 마. 엄마 뒤에서 박선생님이 웃어. 나는 몸을 돌렸다. 박선생이 급히 입으로 손을 가리고 허둥거리는 눈길을 티비쪽에 돌리고있었다. --엄마가 말하면 발음이 이상해. 그래서 남들이 웃어. 아들애는 여전히 수화를 하고있었다. --엄만 이제 말을 하지 말아. 엄만 벙어리잖아. 벙어리? 갑자기 된방망이에 얻어맞은듯 머리가 뗑해났다. 번연한 장애인호칭을 아들애한테서 들은것인데 일순 당황스럽다니? --엄마가 벙어리인걸 남들이 다 아는데 왜 꼭 말을 해야 해? 것두 이상한 소릴 내면서. 수화를 해. 엄만 그거 잘하잖아. 나도 할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엄마가 수화를 하면 못알아듣잖아.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엄마 말을 알아들으라고 말을 하는거야. 발음이 이상한건 어쩔수 없어. 엄마가 들을수 없으니까 어떻게 틀렸는지 알수가 없는거잖아. 엄만 그냥 느낌으로, 입모양으로 말하니까 그럴수밖에 없어. 나도 수화를 했다. 우리 모자의 대화를 굳이 박선생이 듣게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지 마. 난 엄마 말소리가 듣기 싫어. 아들애의 코가 세차게 발름거리고있었다. 녀석이 몹시 화났을 때의 표정이였다. --오늘도 엄마땜에 싸웠어. 친구들이 놀리잖아. “니네 엄마 벙어리 맞니? 말을 하는데 왜 벙어리니? 혹시 우리 학교에서 일하려고 일부러 벙어리인척 하는거지? 근데 발음이 그런걸 봐선 혀가 짧은건 아니니?” 애들이 이러면서 놀렸단 말이야. 나보고 막 혀를 내밀어보래. 혀가 짧은지 긴지 본다구. 그래서 내가 확 때려줬어. --그래도 친구를 때리면 안되잖아. 사이좋게  지내야 착한 학생이지. 우리 현이가 얼마나 착한데. --평소에도 엄마가 지나가면 뒤에서 놀리던 애들이였어. 내가 엄마 대신 때려준거야. 엄만 못듣잖아. 누구라도 엄마와 등 돌리고 서있으면 욕을 해도 못듣잖아. 등을 돌리면 못들어? 나는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들애가 내가 등짝만 바라보고있으면 온전한 벙어리가 된다는것을 알고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현이야, 엄마는 그래도 괜찮아. 그러니까 엄마땜에 싸우지 말아. 엄마는…… “엄만 엄마 맘대로만 해! 나도 내 맘대로 할거야!” 아들애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내뱉고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나는 쫓아나갈것을 잊은채 한참이나 아들애가 나간 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어느새 박선생이 다가와서 내 팔을 끄당겨 의자에 앉혀주었다. “애들이 어릴 땐 싸우기도 하고 그런거지 뭐. 좀 지나면 금방 다시 친해서 웃고 떠들거니까 넘 걱정하지 마.” 박선생이 어수선하게 손짓 발짓을 하며 날 바라봤다. 잡티가 얄포롬하게 깔려있고 잔주름이 지기 시작한 마른 얼굴에 근심 한올 실려있지 않고 덤덤했다. “네.” 난 억지로 입귀를 들어올려 웃어보였다.   4 집에 돌아와서도 아들애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간은 살짝 찌프려져있었고 고집스럽게 꼭 다문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아들애는 나와 눈길을 마주칠려고 하지 않았다. 식사시간이 되니 주방쪽을 힐끔거리다가 밥상이 차려지자 내가 부르기도전에 저절로 들어와서 밥을 먹었고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자기 방에 들어박혀 숙제공부를 하였다. 집에만 들어오면 티비앞에 죽치고 앉아 무엇을 하든 내가 두세번씩 독촉을 해서야 마지못해 움직이던 아들애가 아니였다. 아들애는 내게 조그마한 등짝을 보이며 내가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보란듯이 완전히 해소해버리고 있었다. 열한살내기가 거부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제법이였다. 활동그림처럼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아들애를 보며 내 마음은 무엇인가에 아작아작 귀퉁이가 먹혀져나가며 은근한 아픔이 몸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있었다. 나때문에 아들애가 상처를 입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아들애의 엄마로 된것이 옳은 일이였던지 다시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어쩜 한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정상인처럼 살고싶었던 내 욕심이 아들애의 행복을 희생으로 하지 않는가 싶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장애인부모를 가진 아들애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색다른 눈빛들을 지금이나 앞으로나 견디기 힘들것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어쩜 영미의 선택이 명지한것이였던것 같기도 했다. 영미는 롱아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였다. 어릴 때 뇌막염을 앓고 청력을 잃은 나와는 달리 영미는 선천적으로 와우가 없어 전혀 소리란 뭔지를 몰랐다. 영미는 자기의 청각장애가 유전될지도 모르고 설사 유전이 되지 않더라도 장애인부모는 자식의 짐이 될지도 모른다며 아예 독신을 고집했다. 그런 영미가 아들애가 나보고 말을 하지 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가싶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꾹꾹 눌렀다. -나 아무래도 온전한 벙어리가 되여야 할것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니? -울 현이가 나보고 말을 하지 말래. -걔는 왜 그런다니? 듣지 못한다고 말까지 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내 발음이 이상해서 친구들이 웃는단다. 오늘 그것때문에 자기 반의 애를 때렸어. 애들이 평소에도 내가 지나가면 뒤에서 놀린다잖아. -세상에~ 혹 그 녀석이 평소에 자기 엄마가 벙어리라는것때문에 상처 받은건 아니라니? -받았을거야. 안그러면 그렇게 애들과 싸울 애가 아닌걸 너도 알잖아. 현이는 워낙 자길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남을 골탕먹이는 일이 없는 애야. -그야 나도 알지. 어려도 얼마나 똑 부러진 앤데. 근데 그럼 넌 어쩌니? 말을 안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해? 주위에 같이 수화를 할 사람이 있는것도 아닌데. 정말 말을 안할거야? -모르겠어. 현이의 의사를 무시할수도 없고. -너두 참 세상 살기 힘들다~  현이가 금방 입학했을 때는 네가 현이때문에 수화를 안하고 살았잖냐. 담임선생님이 현이가 습관이 돼서 친구들과도 수화를 할려고 해서 애들이 놀린다고. 현이때문에 손에 익은 수화를 안하고 듣지도 못하면서 힘들게 말을 한건데말이다. 발음을 좀더 정확하게 할려고 네가 거울을 보며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는지 내가 아는데…… -후~ 어쩌겠니? 듣지 못하니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발음은 늘 어눌하고. 좀만 대충 하면 남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눈만 껌벅이고. 에이~ 그따위로 하는 말 안한다고 뭐 서운할것도 없지. 금쪽같은 현이에 비하면. -난 그래도 네가 부러웠어. 소리를 전혀 들은적이 없어 말을 배울 엄두도 못내는 나에 비하면 넌 얼마나 대단하니? 넌 그래도 남들의 입모양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수가 있고 어눌한 발음으로라도 말을 하니까 정상인들과의 소통이 조금은 되지만 난 전혀 아니잖아. -그게 뭐 소용있니? 현이 말처럼 그들이 등만 돌리면 난 여전히 벙어린데. -어머~ 현이가 그래? 등돌리면 못듣는다구? 야참, 현이가 정말 나이또래보다 훨씬 조숙하나 봐.. -아무래도 가난한 집 애들이 일찍 철이 드는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가 봐. 넌 좋겠다. 혼자니까 나같은 고민은 없을거니까. -그야 그렇지만 각자 행복은 따로 있는거야. 네가 현이때문에 힘들고 현이도 너때문에 상처받지만 나중엔 그래도 서로 보듬어줄수 있는 가족이 있어 서로 위로가 될거야. 난 지금은 홀가분하지만 아마 나중엔 쓸쓸할걸. 그러니까 니가 장애인부모라고 너무 자책하지 마. 아들애의 엄마가 된것도 후회하거나 미안해하지 말아. 알았지? -그렇지만…… 영미와의 대화를 끝냈을 무렵 손가락마디가 뻐근해났다. 버튼을 눌러 메시지를 쓰는것도 쉽지만은 않다는것을 매번 긴 대화가 끝날 적마다 느끼는 일이였다. 하지만 핸드폰이 내게 필요한 리유는 그뿐이였고 또 난 그때문에 눈앞에 있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수 있다는것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였다.
18    귀(归)-(2) 댓글:  조회:2386  추천:0  2012-08-15
4   “탁~” 스위치가 켜졌다. 휑하니 밝은 방안에는 인기척 하나 없다. 녀석은 또 나갔나? 남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발송음이 한참을 울려서야 련결이 된 전화기 저쪽에서는 싸움이라도 난듯이 “때려!” “부셔!”하는 열띤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있었다. “어디니?” “컴방요.” “또 안들어올거야?” “네.” “밥은?” “여기서 라면 먹었어요. 다른 일 없죠? 전화 끊을게요.” 남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가 툭 끊겼다. 거의 매일마다 녀석은 낮이면 실컷 뻐드려져 자다가 밤이면 집을 빠져나가군 했다. 녀석이 어디로 가는지 남자는 알고있었다. 10원만 내면 밤샘할수 있다는것때문에 녀석은 매일 PC방으로 드나들고있었다. 열여덟살이라지만 남보다는 어리숙하다못해 조금 모자란다는 평을 받고 있는 녀석이여서 초중을 졸업하고나서 딱히 할일이 없게 되였다. 사립전문학교를 2년쯤 다니더니 제 머리로는 도무지 안되겠는지 때려치고 반년전부터 컴퓨터게임에 빠져있었다. 불량아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고 나쁜 짓거리들을 배우지 않는것만으로도 남자나 안해는 만족하고있었다. 아직 뭘 하기에 어린 나이여서 시킬 일도 없거니와 초졸학력으로 뭘 할수 있을지도 막막한지라 그저 저렇게 사고를 안 치고 세월 보내는 양을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보고만 있을뿐이였다. 오늘도 녀석은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쪽잠을 자다 하다가 래일새벽쯤 주인이 궁둥이를 툭툭 두드려서야 집으로 돌아올것이였다. 그때까지 남자는 철저히 혼자일것이였다. 뭘하지? 남자는 쏘파에 벌렁 드러누우며 느닷없이 “심심하다”는 낱말을 떠올리고있었다. 겨우 밤 9시다. 며칠전 방취제추첨이 된 명호가 기쁜 김에 국경절을 쇤다고 한턱 낸것이였고 남자는 오늘따라 일찍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버렸다. 명호는 이제 비자를 발급받으면 한국 간다고 들떠있었으나 마지막 추첨에서까지 락방신세를 면치 못한 남자는 똥 씹은 기분이였다. 술맛도 별로여서 한잔을 들고 홀짝거리다가 먼저 궁둥이를 들었던것이다. 집에 들어설 무렵에는 이미 말짱해있었고 대신 잠기가 쏙 빠져달아나고 없었다. 아까 6시반에 전화가 왔던 안해한테서 전화가 또 올리도 없고 전혀 애정이 가지 않는 티비를 켤 생각은 아예 없다. 남자는 쏘파우에서 몸을 뒤집으며 핸드폰을 꾹꾹 눌러 메시지함을 열었다. 새 메시지 몇개가 들어와있었다.   --당신의 운명적인 반려를 찾고싶습니까? 여기에 전화하십시오……   뭐야, 이거? 아직도 이런 말에 얼리우는 사람이 있나? 남자는 픽하고 실소를 하였다. 재빨리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엄마, 아빠~ 저 나쁜 일하다 잡혔어요. 메시지 보면 이 은행구좌번호로 5000원만 입금해주세요. 그래야 풀려나요. 사연은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아들   이런~ 어제부터 벌써 세통째 똑같은 메시지다. 사기메시지인걸 번연히 알면서도 남자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순간적으로 철렁한다. 남자는 얼른 메시지를 삭제했다.   --고객님의 전화료금이 결제되였습니다. 잔금이 25원 50전입니다.   --고객님의 전화번호가 중앙방송CCTV3에서 하는 ‘비상6+1’프로에서 노트북이 당첨되였습니다. 홈페지로 들어가셔서 해당사항들을 확인하시고 경품을 가져가십시오……   …… …… 정작 아는 사람이 남긴 메시지는 하나도 없었다. 하긴 남자를 급하게 찾을 일이 없고는 번잡하게 메시지를 쓸 사람이 남자가 아는 사람들중에는 없다. 남자 또한 누군가에게 급하게 필요했던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매일마다 메시지를 체크하고 삭제하고 하는 일을 거르지 않고 하고있었고 그럴 때마다 수신함에 넘치는 광고메시지나 사기메시지에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있는중이였다. 엉뚱한 소리나 황당한 사기멘트에 쳇~하면서도 메시지마저 없으면 남자는 너무 심심할것 같았기때문이였다. 단 궁금한게 하나 있다면 어떻게 남자의 전화번호를 알고 메시지를 보내오는가 하는것이였지만 그것을 몰라도 살아가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고 궁금하다는 생각은 반짝 하고 떠올랐다가는 인츰 유감도 없이 사라져버리군 하였다. 혼자 킬킬 웃으며 메시지들을 삭제해버리고나서 남자는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이럴 때면 남자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녀석이 부러웠다. 안해는 다른 가전제품은 다 갖추면서도 컴퓨터만은 안된다고 외고집을 부렸다. 부자간이 컴퓨터앞에 마주앉아 릴레이식으로 엇갈아가며 채팅하는 꼴은 죽어도 못본다는것이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안해의 눈에 컴퓨터는 인터넷연애의 가장 근본적인 죄범이였다. 어디 가서 얻어들었는지 인터넷연애의 엔딩이 실생활의 혼외련이라고 고집하는 안해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쏘파에 엎드린채 핸드폰으로 열심히 구슬알맞추기게임을 하다말고 불편한 자세때문에 팔이 저려와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담배갑을 쥐고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냄새가 질색인 안해때문에 남자는 담배를 베란다에서 피웠던것인데 인제 습관이 되여 안해가 없는 지금에도 담배를 피울 때면 발걸음은 저도모르게 어김없이 베란다로 향하게 되여있었다. 남자는 담배 한대를 붙여물고 창문을 열었다. 맞은켠 아빠트가 시야에 한가득 들어오고있었다. 서로 다른 색조의 불빛을 발산하고 있는 창들사이에 가담가담 끼운 어두운 창들은 마치 미지의 동굴같았다. 손가락으로 까닥 다치기만 해도 끝을 알수 없는 동굴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남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남자는 길게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머리를 위로 젖혔다. 어? 남자의 눈에 비쳐든것은 네모난 하늘이였다. 끝간데 없이 펼쳐져 시야가 모자라는 둥글고 넓은 하늘이 아니라 비좁다 못해 바라보는 눈이 막 짜증이 날것 같은 작고도 작은 네모난 하늘이였다. 그 하늘에 별 몇개가 희미하게 반짝이고있었다. 당금이라도 다 세여버릴것 같은 별들이였다. 별이 다 어데로 갔지? 그 많던 별들이…… 남자의 기억속의 밤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있었다. 소학교 때 처음으로 별자리를 배우고 초저녁부터 별자리그림을 쥐고 밖에 나앉아 별자리를 찾을 때도, 힘든 농사일에 초저녁에 곯아떨어졌다가 한밤중에 소피보러 밖에 나왔을 때도 하늘은 늘 말그대로 별천지였다. 눈이 모자랄 정도로 넓고 둥근 하늘에 누가 쏟아부은 보석인양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별들을 남자는 한번도 세여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헌데 지금 남자의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각약각색의 불빛에 검정색마저 옳바르게 갖추지 못하고 작은 별 몇개만이 파르르 떨고있을뿐이였다. 남자도 알고있었다. 북쪽을 향한 베란다에 나서면 역시 이만큼한 하늘이 있을것이라는것을 .하지만 그 하늘이라고 깊고 푸근하고 별이 많을가? 높아진 아빠트때문에 동강난 두쪽 하늘을 합친대야 여전히 숨막히게 작을것이고 거기서 반짝이는 별이라야 역시 남자는 단숨에 세여낼수 있을것 같았다. 남자는 급기야 자기한테 차례진 하늘은 조만큼하다는것을 깨닫고말았다. 별들도 서울로 튀여버렸나?...... 남자는 멍하니 텅텅 비여버린 밤하늘을 쳐다보다말고 흐읍하고 심호흡을  했다. 차가와진 밤공기가 페부로 스며들며 가슴이 아릿해났다. 10월의 밤공기속에 뭔가 무르익는 가을의 냄새는 없었다. 남자는 창문을 닫고 베란다에서 나오며 오늘 밤은 별을 세며 잠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5   책장앞에 버티고 선 남자는 어디서부터 뒤질가고 잠간 생각을 해보았다. 새것처럼 남아있는 녀석의 교과서들과 남자가 여기저기서 얻어다가 꽂아놓은 민간이야기책이며 건강상식책들, 그리고 부류를 알수 없는 잡지들이 어수선하게 꽂혀있는 책장은 말이 책장이지 수납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렸다. 책이 꽂혀있는 공간보다도 더 많은 공간에 약병이며 화장품병, 면도기며 공기청정제까지 별의별 생필품들이 줄느런히 늘어져있어 서뿔리 손을 댔다가는 정리하기가 어지간히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무질서한것들을 허트리지 않고 단박에 찾아내기 위해서는 남자는 무엇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확정을 하고 손을 써야 했고 따라서 오래간만에 기억이라는 창고를 뒤적거려야 했다. 싫은대로 생각을 굴리니 안해가 령수증이며 저축통장이며를 넣어두던 도시락만큼한 크기의 나무함이 선참으로 떠올랐다. 잇달아 목걸이며 반지며를 넣어두던 네모난 선물함도 생각났고 큐빅이 박힌 머리삔이며 브로찌를 넣어두던 화장품가방도 생각났다. 헌데 그것들을 안해가 어디에 건사해두었던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안해가 떠난 뒤로 3년이 지났어도 남자는 한번도 그것들을 뒤져본적이 없었다. 그속에 남자한테 필요한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굳이 그것들을 뒤져야 할 리유도 없었다. 3년동안 아무 불편없이 살아왔다는것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주고있었다. 다만 오늘 갑자기 찾아야 할것이 생겼고 남자는 그것을 안해가 건사해두었을거라고 믿고있을뿐이였다. 남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기웃거리다말고 아예 의자를 끌어다가 그우에 올라섰다. 없으면 필요할것 같고 있어봤자 정작  쓸모가 없는 먼지를 흠뻑 들쓰고있는 여러가지 내용물을 담은 병들과 곽통들을 옮겨놓으면서 혹은 책들의 뒤에, 혹은 책들사이에 버려진듯이 놓여있는 작은 함 몇개와 화장품가방을 뒤져냈을 때는 어지간히 시간이 흘러 남자의 목덜미가 뻣뻣해나고 손바닥이 검스레 변해가고있었다. 남자는 의자에서 내려 찾은것들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하나하나 들추기 시작했다. 무슨 보물함이라도 열듯이 남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함 하나를 열 때마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남자의 손에 의해 차례로 함들이 열리며 3년째 빛을 못보았던 물건들이 하나 둘 밝은 빛속에 로출되였다. 몇년전의 전기료금납부명세서며 난방비납부명세서를 비롯한 때지난 령수증들과 잔액이 10원도 차지 않는 저축통장 세개와 큐빅이 떨어져나가 팽하니 빈자리가 흉물스럽게 보이는 머리삔 몇개, 줄끊어진 도금목걸이와 진가를 알수없는 진주목걸이 한개가 전부였다. 말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것들이였다. 저것들을 안해는 왜 버리지 않고 꽁꽁 챙겨두고있었는지 남자는 알수가 없었다. 마지막 함까지 다 뒤지고난 남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만 슴벅거렸다. 어디루 간거지? …… 남자는 더 생각하기가 싫었다. 남자는 바닥에 널린것들을 와락와락 그러모으면서 술만 벌컥벌컥 들이켜던 맹랑한 녀자를 원망하고있었다. 그 녀자가 아니였더면 오늘도 열심히 마작패를 맞추고있을 남자였다.   남자는 오늘따라 이른 시간에 마작청에 갔고 아직 판을 벌이기에는 사람이 모자랐다. 분명히 도박임에도 불구하고 마작청은 공공연히 도심의 여기저기에 널려있었고 공안기관에서 굳이 단속하러 나오는 일도 별로 없었다. 간판도 없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수에 따라서 판이 벌어지군 하였다. 넷씩 한판이였고 한사람이 20원씩만 내면 점심을 먹고 오후 다섯시까지 놀수 있었다. 마작청주인은  기계마작 몇틀을 갖춰놓고 인당 20원씩 내는 돈으로 점심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순수입이였다. 아빠트마다 거의 마작청이 한두개씩 있는 편이고 그런 마작청마다 하루에 적어도 두세판은 실히 벌릴수 있는것을 봐선 인구가 20여만을 웃도는 이 작은 산간도시에도 한가한 사람은 썩 많은 축이였다. 그런 한가한 사람들은 대개 가족중 누군가가 출국하였다는것이 공통점이였다. 사람들은 마작청에서 도박을 하고 시시껄렁한 사람도 알아가고 출국한 사람들의 정황도 교류하고 가끔 회식도 하면서 조금씩 얽혀서 돌아가고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마작청은 공개된 비법영업장소였다. 영업청주인은 대개 녀인들이였고 그들의 수완에 따라 판을 벌리는 사람들의 인수가 좌우지되고있었고 단골도 확보되였다. 오늘도 판을 벌이기전 남자를 비롯한 단골들은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다가 꼬박 두어달째 마작청출입을 하지 않는 녀자이야기가 나왔고 영업청주인이 녀자가 이젠 안올거라고 했다. 남자는 “왜?”하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고 영업청주인은 워낙 녀자와 한마을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며 녀자의 이야기를 대충 들려주었다. 녀자의 남편은 한국에 간지 10년이 되였고 5년전에는 한국국적을 가지려고 녀자와 가짜리혼을 하고 인민페 10여만원을 주고 한국녀인과 위장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고나서 3년이 지나 남편은 한국국적을 갖게 되였고 출입국도 보다 자유로와졌지만 2년이 더 지난 지금도 애초에 약속한대로 안해와 아이를 한국에 데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가깝지도 않던 친척들이 한국에서 남편을 만난적 있다며 안좋은 소리를 전해주었고 녀자와 남편은 전화로 곧잘 다투군 했었다. 집구석에서 속만 썩이는것이 안스러워서 영업청주인이 마작이라도 놀라고 불러들인것이였다. 두어달전에 남편은 여름방학에 아이를 한국에 놀러보내라고 했고 아이가 도착하고나서 나흘만에 녀자한테 끝내자고 전화하여왔다. 녀자한테 미안하지만 자기는 위장결혼한 한국녀인과 진짜로 살고있고 둘사이에 아이도 생겼으니 어쩔수 없다고 했다. 가짜리혼은 말이 가짜지 실은 서류상으로는 진짜리혼으로 되여있는 터라 어디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녀자는 결국 남편은 포기하더라도 아이는 찾아야겠다며 한국으로 가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나서 속으로 “아, 그래서 그날 그렇게 술을 마셨구나.”하다말고  남자의 머리속에 느닷없이 떠오른것이 결혼증이였다. “결혼증”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는 순간 남자는 자기와 안해가 결혼증을 냈던지 안냈던지 아리송해났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기억은 분명한데 결혼증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남자는 갑자기 그것을 확인하고싶어졌고 머리속에서 온갖 기억을 총동원하여 생각다못해 무작정 집으로 뛰여와버렸던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시간째 찾고있어도 종내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안해의 함에서 나온 쓸모없는것들을 그러모아 쥐고 쓰레기통으로 향하면서 남자는 뭔가 몸에서 쑥 빠져나간듯한 허탈감에 빠져버렸다. 결혼증을 내지 않았나?...... 남자는 쏘파에 털썩 주저앉아 차근차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안해를 만난것은 13년전이였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진지 얼마 안되여 도시사람들이 한국으로 떠나고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진출하면서 한창 가라오케이며 술집이 호황기를 이루고있던 때였다. 안해는 술집아가씨였고 농촌에서 도시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남자는 잘 나가는 친구들과 함께  며칠에 한번 꼴로 술집에 들락거리다가 안해를 만났었다. 어쩌다가 눈이 맞아서 동거를 하게 되였을 때에야 남자는 안해가 5살짜리 아들애가 딸린 리혼녀라는것과 자기보다 4살이나 년상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이 30에 가진것 없는 로총각신세였던 남자는 안해의 신상을 알게 되고나서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고 한동안은 안해가 술집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었다. 남자가 친구들의 잔일을 도와주며 벌어오는 알량한 돈과 안해의 술집수입으로 먹고 살면서 명절이면 음식꾸레미를 들고 안해네 친정으로 인사드리러도 두어번 다녔을 무렵 주위에서 결혼을 해야지 않냐는 제의들을 해왔다. 남자는 별로 안될것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안해는 결혼은 하겠지만 결혼식은 싫다고 했다. 축복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가 리혼한 마당에 다시 결혼식장에 서기 싫다고 했다. 남자 역시 나이가 나이인지라 별로 힘들여 식을 치를 생각은 없었고 부모가 일찍 세상 떠서 남자 집에는 굳이 결혼식을 강요할 어른들도 없었다. 결국 안해의 의사에 좇아 두 집 어른들과 친구들이 모여앉아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 여직 외가집에서 보살펴주고있던 안해의 아들애를 데려다가 함께 사는것으로 남자와 안해의 정식결혼생활은 시작되였었다. 헌데 그러고나서 결혼증을 발급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고 결혼증까지 거부할 안해가 아니였는데 말이다. 결혼증이 없다면 안해와 남자는 남남이란 뜻이고 각자 뭣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결혼증도 없이 안해가 13년을 같이 살았을리가 없는데 그것을 찾을수가 없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였다. 결혼증…… 남자는 아무리해도 석연치가 않았다. 남자는 갑자기 무엇인가에 얽혀버린듯한 느낌에 자꾸만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뒤로 련며칠을 남자는 쩍하면 할일없이 책장앞에 서서 안읽던 책들로 하나씩 꺼내보고 안쓰던 생필품들도 쥐였다 놓으면서 혹시라고 결혼증이 어느 구석에 숨어있지 않나 뒤적거렸다. 어느 날은 책상서랍과 옷장, 이불장까지 다 뒤져보기도 했었고 또 어느날은 침대매트밑까지 들춰보기도 했었지만 종내 문제의 결혼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남자는 곧잘 꿈속에서 안해를 보군 했었다. 남자의 꿈속에서 안해는 어떤 날은 “우리가 언제 결혼이라도 했어? 결혼했다는 증거 있어? 결혼증이라도 있냐구?”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버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우리 이제 리혼한거야.”하며 결혼증명사진이 다 뜯겨진 결혼증을 홱 쥐여뿌리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남자는 급기야 속이 바짝바짝 말라가다가  언젠가부터는 결혼증을 안내지 않았나 하는쪽으로 생각이 치우치면서 의문스러워지다가 나중에는 될대로 되라지라는 식으로 체념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그러는 와중에 락엽이 쓸쓸히 뒹굴던 가을도 지나가고 막 겨울이 오면서 남자는 차츰 결혼증에 대해 잊어가고 있었고 또 철수의 일을 도우며 푼돈을 벌다가 마작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는 일상을 지내게 되였었다. 6   창문도 없이 뜨락을 향한 출입문만 있고 네모상 하나와 의자 몇개가 놓여있는 방은 방이 아니라 그냥 세면트로 만들어진 칸이라고 함이 더 합당했다. 천정에 매달린 일광등에서 흘러나오는 약간 푸른 빛을 띤 불빛이 허옇게 방안을 밝히고 있었고 밖으로부터 찬바람이 휙휙 불어치며 전기줄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나무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속에 간간히 호곡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얠 여기다 모실가?” 성호가 품에 안았던 둥근 도자기를 상우에 내려놓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그래야지, 우리와 밤새 같이 있을건데.” 남자는 머리를 끄덕끄덕하고 상에 다가가 손에 들었던 검은 비닐주머니를 상우에 올려놓았다. “복도 지지리도 없는 녀석! 이게 뭐냐?” 성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성호의 눈확이 붉어있었다. “누가 아니라니? 하필이면……” 남자는 비닐주머니에서 술잔과  술병, 마른 안주들을 꺼내 상우에 놓았다. 남자는 술 석잔을 따라서 한잔은 도자기앞에 놓고 나머지는 성호와 자기앞에 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않을가?” 남자가 머뭇거리며 성호를 바라봤다.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니?......” “……” “그래두 한마디는 해야겠지? 오늘이 마지막인데……명호야……나쁜 자식, 한국 간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어쩜 ……어쩜 이렇게 골회함속에 들어서 돌아오냐? 바보같은 자식......너 오늘 귀국해서 첫날 밤이잖어. 니가 외로와할가봐 우리가 온거야…… 오늘 저녁은 우리랑 술 한잔 하다가 ……부디 잘 가거라.” 성호가 울컥하며 머리를 돌리는 찰나 굵직한 눈물방울이 술잔에 뚤렁 떨어졌다. 남자의 눈에서도 아까부터 참고있던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남자는 팔소매로 눈물을 쓱 닦고 술잔을 들었다. “그래, 잘가라. 거기선 부디 잘 있구……” 성호와 남자는 골회함앞에 놓은 술잔에 각자의 술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술잔을 내려놓고 둘은 말없이 마른 안주를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잠간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가. 갑자기 밖에서 호곡소리가 높아졌고 둘은 동시에 몸을 흠칫 떨었다. “고시원에서 화재가 나서 그렇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니?” 남자가 침묵을 깨며 빈 술잔을 채웠다. “명호가 돈을 아낄려고 고시원에 들어간게 잘못이였어. 고시원은 원래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이 주숙처로 많이 썼는데 방값이 옥탑방보다도 훨씬 싸니까 지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리용거든. 중국에서 나간 조선족들도 상당히 많아. 업주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것이니까 방은 좁아터졌고 조그만 뙤창도 하나만 있고 환기도 잘 안되고 안전시설도 잘 안되여있어서 사고가 나면 끝이야.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명호형이 시신처리하러 갔다와서 그러는데 화상은 별로 안입은걸 봐서 질식한것 같더란다. 고시원사고가 보통 그렇지. 화재는 순식간에 번지고 입주자는 많은데 복도가 좁으니까 허둥대다가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연기에 질식하여 죽는거지. 명호녀석이 복이 없을려니까 그 변을 당한거구. 후우~” “그래 보상금같은것은 제대로 받았다니? 가족들은 그래도 살아야겠는데.” “글쎄다. 자세한것은 나도 모르겠는데 별루인것 같드라. 명호가 일당일을 했는데 로동계약이나 보험같은것은 안했다는 소리도 있고. 금방 가서 잘 모르는것도 있었겠지만 녀석이 한푼이라도 아낄려고 그랬나봐. 한국사람들에 비해서 중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보험에 대한 인식이 별로 안높잖아. 뭐 밑지는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고시원쪽에선 또 나름대로 리익만 따지다보니 적은 액수의 화재보험을 해서 보험보상금이 얼마 안되는데다가 업주가 사고가 나고나서 종적을 감추었다더라. 사망자가 명호말고도 더 있다나봐. 거기에 상한 사람도 있을거고 사람은 안상했지만 물건이 타버린 사람들도 있겠으니 감당이 안되겠지 뭐. 딱히 뭐라고 말은 안하는데 안좋은것 같아. 죽은 사람이 억울할뿐이지.” “그렇구나. 그럼 명호마누라와 딸애는 어쩐다니? 애가 여라문살밖에 안되여보이더만.” “어떡허나 살겠지. 산 사람은 살아내는 법이잖니? 당금은 힘들겠지만……후우~” “후우~” 둘은 약속이라도 한듯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넌 언제 가니? 이제 비자가 나올 때도 되였지?” “글쎄다. 돌아온지가  반년도 더 되는구나. 나 그동안 많은것을 생각했어. 넌 내가 한국에 다녀오면서 달라졌다는 느낌이 안드니?” 성호가 따지듯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피씩 웃고는 두번째 술병의 마개를 땄다. “달라졌지. 다른것은 그만두고라도 말투부터 알리지 않니? 너나 내 마누라가  한국말을 얼음에 박밀듯이 내뱉는것을 보면 난 같이 대화를 나누기조차 창피하다. 공연히 내가 촌스러워보여서.” 남자가 삐뚤렁한 시선으로 성호를 바라봤고 그러는 남자를 보면 성호가 쿡 웃었다. “자식, 그건 아니지. 살다보니 그렇게 된것뿐이야. 처음엔 티나서 잡힐가봐 일부러 고쳤고 후에는 연변말투만 튀여나가면 다들 쳐다보는 눈길이 싫어서 그런거야. 나도 이제 좀더 있으면 아마 연변말 그대로 하게 될거야.” “연변말이 그대로 튀여나올 때까지 있을려구?” 남자의 눈이 커졌다.  성호는 명호의 골회함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라졌어. 뭐랄가? 좀 더 현실적으로 세상을 봤다고나 할가?…… 안그래두 망설이고있었는데 명호땜에 결정을 내렸어. 이제 안갈거야.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 가는것만 길이겠니? 기실 우리 외국인로동자가 버는 돈은 그 나라의 수입정황에 비교하면 여전히 최하층이야. 다만 그 돈을 중국에 와서 쓸 때만이 엄청 많아보일 뿐이야. 간단히 말해서 거기에선 10원을 벌었는데 여기에선 10원이 100원의 가치가 되는거지. 그걸 나도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왜선지는 모르겠구. 뭐 로동력단가의 차이라고 하는것 같기도 하더라만 내가 그걸 리해할리는 없구. 암튼 외국에 가서 무시 당하며 일하기보다 고향에서 땀을 흘리는것이 더 보람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 우리 고향에도 로무다,방취제다 하면서 청장년들이 다 빠져나가고 고령동포로 로인네들까지 다 나가다보니 임자없는 밭들이 얼마나 많니? 다른것은 몰라도 우리 집의것과 친척들의것만 합해도 몇쌍은 쉬이 될거다.” 성호는 잠간 말을 끊었다. “그런데는?”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성호를 바라봤다. “난 올해부터 농군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이제껏 벌어온 돈으로 투자해서 산에 목장을 세우고 소를 키우고 그 거름을 모아서 밭에 내면서 유기농을 할거야. 농촌에 일군이 적은것을 감안해서 농기계를 투입해서 현대화로 할 생각이구. 목장이 잘 되면 직접 그 목장의 소를 잡아서 파는 정육점도 열고 불고기뀀점도 차리면서 사업을 확장시켜갈 예산이거든. 처음엔 어렵겠지만 하다보면 될 법도 하잖냐? 너나 철수도 도와주면 나에겐 든든한 힘이 되는거고. 생각 좀 해봐. 그렇게 허구헌날 한국만 바라보지 말고.” 성호는 웅숭깊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의 눈앞에는 어릴 때 보아왔던 고향의 모습이 어른거리고있었다. 넓게 펼쳐진 들판에서 퍼렇게 독을 쓴 곡식들이 바람에 술렁이며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었고 푸른 빛이 한결 짙은 산기슭에서 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있었다. 남자는 공연히 목이 타서 술을 한모금 마셨다. 목이 더 타들어갔다. “……다시 농촌에 돌아가야 한다구?......” 성호가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자꾸  나갈려고 들뜨지 말고 우리의 근본을 생각해봐. 어데 간들 우리야 힘으로 벌어야 할 사람들이잖니? 이전에는 벗어나지 못해서 악을 쓰던 시골이지만 마음을 다잡고 살펴보면 다 돈이 될것들이야.  수확할수 있는 사과나무 한그루가 만원씩이란다. 과일나무를 심어도 되고 인삼재배를 해도 되고 도시사람들의 취미생활에 맞게 농촌생활체험장을 만들어도 되고 리조트를 꾸려도 될것 같단말이야. 열심히 찾다보면 길이 보일거고 돈도 벌어질거고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겠냐? 그들도 뿌리가 여기에 있는 이상 언제까지고 타향생활, 타국생활을 할수는 없을테니까.” “글쎄……” 남자의 눈앞에 티비에서 보아왔던 처녀들이 사과배 따는 모습이며 아이들이 시내가에서 찰랑이며 노니는 모습들이 스쳐지나고있었다. “쉽게 결정을 내릴수는 없을거야. 우리들이 호미자루를 던지겠다고 얼마나 악을 쓰고 도시에서 버텼는데. 그걸 잊을수는 없을거야. 나도 이렇게 깨닫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고.” 성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남자는 두 손을 깍지 끼고 앉아 성호와 골회함을 번갈아보며 속으로 성호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날 밤 남자와 성호는 지난 이야기로 울다가 웃다가 침묵하다가 하며 술 세병이나 굽을 내였고 날샐녘에야 잠간 눈을 붙였었다. 그 도중에 소피보러 밖에 나왔던 남자는 도시상공에 떡하니 펼쳐져있는 둥근 하늘을 보았었다. 허나 별이 적기는 네모난 작은 하늘과 별다를바 없었다. 그리고 새벽즈음에 성호와 마주하고 상에 엎드려 명호의 골회함을 올려다보며 쪽잠을 자는 동안 남자는 꿈속에서 둥근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보았었다. 그 별들은 흰 줄을 죽죽 그으며 남자를 향해 눈부시게 쏟아지고있었다.   7   안해가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남자에게 손바닥만한 빨간 수첩을 건네줬다. 그것을 받아서 확인하는 순간 남자는 움찔했다. 결혼증이였다. 남자는 서둘러 펼쳐보았다. 분명히 남자와 안해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남자는 의아쩍은 눈빛으로 안해를 바라봤다. “이걸 왜 주는데?” “그거 업수이 보지 말아. 날 따라 한국까지 갔다왔으니까. 당신보다도 나아.” 눈이 커지는 남자를 보며 안해가 샐쭉 웃었다. “남들이 그러는데 리혼은 일방적으로도 할수 있다며? 리혼신청을 하거나 신문에 공소를 하면 어느만큼 시간이 지나면 할수 있다구 하더라구. 혹시라도 당신이 그럴가봐 내가 갖고간거야. 그거라도 갖고있으면 당신이 함부로 못하겠다싶어서 안심이 될려구.” “허참~” 남자는 허구프게 웃고말았다. 안해는 뭐든지 잘 얻어듣고 얻어들은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게 탈이였다. “근데 이제 당신이 갖고있어야 할것 같아서 주는거야. 귀국하기전에 많이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처사하는대로 따라주기로 했어. 어차피 난……” 안해는 말끝을 흐리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자는 안해가 무슨 말을 하려고하는지를 알것 같았다. 남자는 씩 웃으며 다가가 안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걱정 하지 마. 우린 언제까지고 세식구가 함께 잘 살거니까. 당신도 금방 나을거구. 힘을 내야지.” 고개를 외로 트는 안해의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들고있었다. 남자는 안해의 손을 꼭꼭 눌러주고는 안해의 눈앞에 손에 든 결혼증을 흔들어보이였다. 안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실문이 닫기고 남자는 한동안 수술실밖 복도에 놓인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남자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한꺼번에 일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남자는 미처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음력설이 지나고나서 안해한테서 장인 장모의 환갑잔치 날자를 두주일 뒤로 잡으라고 련락이 왔고 그 두주일동안을 남자는 례식장을 정하고 초대장을 만들고 로인들의 옷을 맞추고 하면서 정신없이 보냈었다. 환갑잔치 사흘전 공항에 안해마중을 갔다가 인파속에서 안해를 발견한 순간 남자는 도무지 자기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1년전에 다녀갈 때까지만 해도 실한 편은 아니지만 꽤 부피가 있어보이던 안해의 몸이 홀쭉해져있었다. 다이어트라도 했나고 못마땅하게 머리를 기우뚱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던 남자는 저도모르게 “어?”하는 소리를 내지르고말았다. 안해의 몸은 많이 말라있었고 얼굴색이 누렇게 뜬것이 완연히 병색이 돌고있었다. 돌아오는 택시안에서 “어디 아픈거지?”하고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고 안해는 “자궁암초기래. 수술하면 백프로 완치된대.” 하고 담담히 말했다.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호흡이 떡 멈추는것 같았고 머리속에서 뭔가 꽝하고 터지며 모든 사유가 정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남자는 말을 해도 행동을 해도 정신줄을 한절반 놓고있었다. 이틀뒤 연변부유보건병원에 와서 재검진을 하고 수술치료에 대해 상담받고 입원날자와 수술날자를 잡은후 곧바로 내려와서 이튿날 환갑잔치를 치뤘고 3일간 휴식하고나서 안해는 예약한대로 어제 입원을 하고 오늘 수술에 들어간것이였다. 안해가 귀국하여서 꼭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안해와 남자는 대화 한번 편히 나눌새없이 돌아쳤었고 씩씩한척 하는 안해의 모습을 보며 남자는 남몰래 속만 울컥거렸었다. 후우~ 복도 없는 녀자지…… 남자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감싸쥐였다. 그러는 남자의 팔을 누군가 툭 쳐왔다. “늦었지? 거의 끝나니? 수술.” 철수였다. “아직. 너 바쁘다면서 어떻게?” “안그래도 급한 일이 있어서 처리하고 오느라고 늦었어. 제수씨는 괜찮겠지? 괜찮아야 될텐데.” “응. 괜찮을거다…… 넌 마누라와 잘 정리되였니?” “그럭저럭. 나도 량심이란것이 있는데 마누라가 벌어온 돈을 덥석 낚아챌수는 없지. 자기가 잘되니까 나몰라라 하는것이 괘씸해서 애먹이려고 했던것뿐이야. 나도 요즘엔 집인테리어를 하면서 밥벌이는 하고있는걸 너두 알잖냐? 외국 간 사람들에 비하면 새발에 피지만 나름대로 수입이 꽤 짭잘한걸. 아들애는 날 따르기로 했어. 마누라는 어차피 아직 한국에 있는거니까 아무래도 나랑 있는게 낫겠지. 언젠가 마누라한테 가더라도 말릴 생각은 없어. 부모들끼리야 어찌 되든 자식연이야 못끊지. 마누라가 10만을 주겠다 그러더라. 위자료라나?” “위자료는 남자가 녀자한테 주는게 아니니?” “누가 주나 어떠니? 돈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한테 주면 되지. 거절할가 하다가 받았어. 마음의 보상이라고 할가? 하하하, 내가 요즘에 이렇게 유식해진다. 근데 니 마누라는 정말 괜찮냐?” “괜찮겠지. 초기니까 자궁을 들어내면 별일없겠지 뭐. 완치률이 높은 암이라니까 다행이다. 혹시라도 다른 조직에 퍼졌을지도 모르니까 수술후에도 신경을 늦추지 말고 항상 주의해서 살펴봐야 한다더라.” “그렇겠지. 그나저나 녀자가 자궁을 들어내면……” 철수는 입을 뻥긋하다 말고 남자의 눈치를 보며 다시 다물었다. 남자는 못들은척 잠자코 있었다. 남자도 알고있었다. 녀자가 자궁을 들어낸다는것은 뭘 의미하는지를. 이제 남자에게 자기를 꼭 빼닮은 아들을 그려보는것 같은 일은 없을것이였다. 10여년동안 임신이 안되여 속을 끓이면서도, 안해가 술집아가씨였을적에 몸이 많이 상하여 힘든거라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혹시나 하는 바램을 가슴 한구석에 조용히 간직하고 살고있었다. 헌데 이젠 그런 바램마저 버려야 했다. 남자는 키가 자기를 훨씬 넘어서는 PC방에만 붙어사는 녀석과 자궁이 없는 안해와 셋이서 온건히 한가족으로 살아야 했다. 그것이 숙명이라면 숙명이였다. “마누라의 아들이면 내 아들인거지.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라는데. 다 잘될거야.” “하긴 뭐. 친자식이라고 별거겠냐? 마음 붙이기에 달린거지. 잘 될거라고 믿고 살아야지.” 남자와 철수는 마주보며 웃었다.     두 주일뒤. 남자는  안해의 퇴원수속을 하기 전날 밤 성호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 아무래도 너한테 갈가보다. 시골생활이 안해의 건강회복에도 좋을것 같아서. 돈도 벌고 건강도 지키고 일거량득이잖니? 근데 거기 밤하늘에 별이 많니? 난 그게 있어야 되는데……” “자식, 그래, 별이 엄청 많아. 니가 죽을 때까지 세여도 다 세지 못할만큼 많아. 온 하늘에 구슬을 그릇채로 부어놓은듯이 반짝거린다구. 그러니까 와라, 얼른.” 전화기 저쪽에서 성호가 힘있게 껄껄 웃고있었다. 남자의 눈앞에는 무수한 뭇별들이 반짝이는 둥글고 넓고 푸근한 밤하늘이 끝없이 펼쳐지고있었다……  
17    귀(归)-(1) 댓글:  조회:1877  추천:0  2012-08-15
귀(归)   김영해       1 누구지? 남자는 투덜대며 가까스로 눈을 떴다. 깜깜했다. 어둠속에서 아무것도 가려볼수가 없었다. 남자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앉았다. 초인종소리가 지꿎게 울리고있었다. 에잇! 짜증을 내며 일어서려던 남자는 후훗~ 웃어버리고말았다. 차탁우에서 핸드폰이 번쩍거리고있었고 초인종소리는 거기에서 울려나오고있었다. 알람소리였다. 남자는 팔을 차탁우로 뻗어 핸드폰을 끄당겼다. 알람을 끄고 남자는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매번 알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깜빡 속아넘어가면서도 정작 알람소리를 다른것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다. 초인종소리는 어느날 갑자기 혼자서 출입문에 설치된 초인종을 꾹꾹 누르며 록음한것이였다. 다른 알람소리를 시도해보지 않은것이 아니였지만 결국은 남자가 뭘 하고 있든간에 단박에 주의력을 끌수 있는데는 이 초인종알람소리가 제일이였다. 알람소리를 끄고나니 방안에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멍하니 꺼먼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천정에 달린 둥그런 전등이 무슨 허물처럼 꺼멓게 보여왔다. 저 놈의 팔자~ 남자는 불쑥 전등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스위치를 켜지 않는 한 전등은 천정에 매달려있는것이 천직인줄 알고 불도 밝히지 않은채 언제까지고 매달려있을것이였다. 남자는 할일없는 전등을 쳐다보다말고 몸을 일으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티비를 켰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껌벅하더니 확 밝아졌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출렁이는 파도우에 작은 구조함선 몇정이 흔들리고있었고 화면 절반을 차지하고 어떤 군인의 사진이 클로즈업되고있었다.  KBS1채널이였다.   “……군 관계자는 현재 천안호 침몰 해역에서는 잠수 요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생존자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실신 등 크고 작은 잠수 관련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사고가 난 해역의 수온은 평균 3도 정도로 잠수요원 한 사람이 또렷한 의식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20분 정도입니다. 군 관계자는 침몰 함선에 접근하는 시간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임무 수행 시간은 7~8분에 불과한 상황에서 이 기간 동안 최대한 활용해 탐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으로 관측했습니다……”   “뉴스라인”프로에서 천안함사건에 대해 보도하고있었다. 구조잠수요원 누군가가 순직했다는 기사를 다루고있었다. 3월 26일에 일어난 일이니까 벌써 5일째다. 긴장된 분위기로 한국방송채널마다 천안함사건을 특종으로 다루고있고 구조사업이며 선체인양사업의 진척이 낱낱이 실시간으로 보도되고있는 중이였다. 하지만 남자는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 몇시지? 남자는 중얼거리며 핸드폰액정을 들여다봤다.10시15분이였다. 남자는 담배를 피울가 말가 망설였다. 눈 질끈 감고 딱 한대만 피울양으로 막 담배갑에 손을 뻗치려는 그 때였다. “전화받으세요~ 전화받으세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냉큼 접속버튼을 눌렀다. “나야, 어딘데?” 역시나 통화는 언제나와같이 똑같은 순서로 진행될 조짐이였다. “집.” “머하고 있었어?” “티비보고있었-다.” 남자는 저도모르게 말꼬리를 낮추며 “다”를 입속으로 삼켜버리고말았다. 요즘 들어 가끔 있는 일이였다. 오늘도 어정쩡하게 입속으로 사라져버린 “다”를 생각하며 남자는 입을 쩝쩝 다셨다. 뒤를 채 보지 못한듯한 께름직한 느낌이였다. “티비? 재밌어? 어디서 머가 나오는데?” 안해는 남편의 입에서 사라진 “다”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응, KBS1에서 천안함사건이 나오는데.” “그래? 나 지금 막 야근하고 들어오는 길이거든. 궁금해서 그러는데 사태진전이 어떻대?” 남자는  버릇처럼 픽 하고 실소를 했다. 예전부터 시사에 전혀 뒤전인 안해가 궁금한것은 지금 남자가 정말 티비를 시청하고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일것이였다. “누가 죽었다는데. 무슨 구조요원이란다.”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해줄수도 있었지만 남자는 간단하게 일축하고 말았다. 남자나 안해는 천안함사건에 관심이 있는것이 아니라 그 시간 그 때에 진행되는 방송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할뿐이였으니까. “어머머, 참 안됐네. 자기야, 오늘은 머했어?” 들을 때마다 송충이 달라붙는듯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자기”, 남자는 정말 그 단어가 싫었다. “그냥, 티비나 보고 암것도 안했는데.” “그랬구나.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럴거지. 심심했겠어.” 남자는 안해의 진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안해는 남자가 친구들과 어울려다니는것을 별로 안좋아하고있었다. 친구가 많으면 나쁜 짓거리하는 잔머리 하나가 더 돌아간다는것이 안해의 신조였다.  “요즘엔 회사도 잘 안돌아가나봐. 야근도 줄고 뽀너스도 줄고……자기가 돈 좀 아껴서 써. 돈이 여간 어렵게 벌어지는게 아니라니까. 국내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한번씩은 나와봐야 아는데……” 본격적인 대화의 시작이였다. 남자는 가끔 가다 “응”을 내뱉으며 열심히 들어주었다. 대개 통화의 주인공은 안해였고 남자는 가끔 듣고있다는 표시만 하면 되였다. 드디여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남자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너두 수고많다~ 남자는 티비를 꾹 꺼버렸다. 어둠속에 묻혀버린 방안은 삽시에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조용하다못해 으스스한 느낌까지 들었다. 남자는 방금까지도 혼자서 신나게 떠들던 티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입이 닫겨진 티비는 언제 시글벅적했냐싶게 무슨 괴물처럼 어둠속에  웅크리고있었다. 순간 가슴이 섬찍해나며 소름이 끼쳤다. 남자한테 티비는 더는 오락이나 휴식을 위한 가전제품이 아니였다. 1년전 안해가 다녀가면서 한국위성방송접수기를 설치한후로부터 남자의 티비사랑은 급격히 령하로 떨어져버렸다. 서울에 있는 안해와 같은 시간대에 같은 채널의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할수 있게 된 티비는 안해의 눈이 달린 원거리감시기였다. 오늘도 그 임무를 착실히 리행한 티비는 어둠속에서도 남자를 노려보고있는것만 같았다. 에잇,  내 팔자! 후우~ 남자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오늘 밤도 무용지물이 되여버린 천정에 매달린 전등이 눈동자가 빠져버린 우묵한 눈확처럼 남자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남자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는 남자한테로 어둠이 기다렸다는듯이 꺼멓게 덮쳐들며 형체도 없이 삼켜버리고있었다.     2     남자가 집을 나설 때는 날이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7시였다. 5시에 마작판을 파하고 집에 돌아와서 그때까지 구슬알맞추기게임을 열번도 넘게 다시 했음에도 득점은 700점도 초과한적이 없었다. 안해가 오늘은 전화를 걸어오지 않을것이라는것을 확신하며 티비를 끄는 찰나 남자는 가슴속으로부터 한줄기 휘파람같은 가벼운 바람이 흩어져나오는듯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남자는 모임장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택시기사의 눈총도 아랑곳하지 않고 휘이익~ 휘이익~ 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휘파람을 불어대였다. 남자가 “미나리”음식점에 이르렀을 때는 술상의 분위기가 막 익어가고있었다. 환하게 웃는 성호의 모습이 선참 눈에 띄였고 손짓까지 곁들어가며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철수와 명호의 열띤 모습도 보였다. 문쪽을 향해 앉은 철수가 먼저 알아보고 “여기~”하며 손짓을 했고 성호와 명호도 그제야 남자를 알아보고 웃음 띤 얼굴로 “이제 오니?” “빨리 와라”하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남자는 온 얼굴을 활짝 펴서 웃음이란것을 만들어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허허~” 남자는 신발을 벗고 자리에 올라가며 사람좋게 웃어보이고는 성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자식, 와주니 고맙지. 이게 얼마만이니?”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잡아주고는 남자를 끌어당겨 자기옆에 앉혔다. “5년만인가? 얼굴보기는.” 남자는 덜 다듬어진 돌처럼 보는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하던 모습대신 한결 끼끗해진 성호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자식 봐라, 그새 말을 반토막씩 잘라먹는 버릇 생겼네.” 성호가 악의없이 핀잔하며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기만 하겠냐, 요즘엔 아예 티비에 붙어서 산다. 너 오늘도 티비보다 왔지?” 옆에 앉은 철수가 장난기어린 얼굴로 시까스르자 명호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티비사랑은 알만한 친구들은 다 알고있었다. “티비? 티비가 왜?” 성호만 뭔 소리나싶어 눈을 껌벅거리고있었다. “티비는 무슨, 일 있어서지. 너는 인젠 완전히 귀국한거니? 다시 안가고?” 남자는 지꿎은 철수의 눈길을 피하며 성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글쎄. 그건 봐서. 일단 술이나 마시자. 다들 편하게 아까 나누던 이야기들을 계속 나누고.” 성호는 남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있었는데?” 남자가 궁금해서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뭐긴 뭐겠니? 한국얘기지. 요즘 그거 빼면 뭐 다들 공동언어가 없단다. 못난 놈들~” 명호가 무슨 심사가 비틀어졌는지 사내답지않게 입을 비쭉거렸다. 성호는 “자식~”하고 허허 웃으며 명호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었다. “난 말이야, 왜 다들 한국이나 일본, 미국 이렇게 외국이 아니면 못산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단말이야. 네편네든 로인네든 나가면 올줄을 모르고말이야. 니들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한국문전에도 가본적이 없는 철수녀석이 말끝마다 “야”를 요상하게 붙이며 시비조로 따지고들기 시작했다. “금방 귀국한 성호도 있지만, 친구놈들 쭉 봐봐. 외국과 관계없는 놈 몇이냐? 내 녀편네는 한국간지 7년이 되도록 돌아올념을 안해. 내가 일년에 집인테리어 몇개만 하면 얼마든지 먹여살릴수 있는데도 말이야. 호범이녀석은 녀동생 한국에 시집보내고 늙은이들까지 줄줄이 출국시켰잖냐? 명호 니 놈은 방취제시험치고서는 공장에도 제대로 출근 안하고 추첨되기만 목빠지게 기다리고있지?” “맞는 말이다. 우리 친구들만 그런게 아니고 세상이 다들 그렇게 돌아가잖냐? 말그대로 미친 놈의 세상이지.” 명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리고 수현이놈은 일본 갔다가 돌아온지 얼마 안되잖아. 그래도 걔가 난 놈이야. 오자바람으로 시정부 외사과에 출근하는것을 보면. 그놈 아마 일본서 벌어온 돈으로 그 자리 산걸거야. 하긴 그 녀석은 공부 많이 해서 일본 가기전부터 공무원이였으니까.  나같이 가방끈 짧은 놈은 억만금을 줘도 그런 자리 못마련할거야.” 철수는 자조하듯이 입귀를 풀럭이며 피씩 웃더니 이번엔 남자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얌마, 시간맞춰 티비보는 니 녀석은 녀편네 한국 보낸것도 모자라서 세번이나 까만 도장 맞고도 아직도 이제나 저제나 비자 떨어지기만 기다리지? 너 그딴거 확 걷어치우고 나하고 집인테리어 같이 하자니까 그러니? 드문드문 푼돈이나 벌지 말고 아예 두손 잡고 크게 한번 해보잔 말이다. 외국돈은 뭐 하늘에서 떨어지는 떡인줄 아냐? 니들은 그래 이게  다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거야?” 철수는 말할수록 열이 오르는지 잔을 들어 술을 쭉 들이켜고 빈잔을 머리우에 거꾸로 쳐들었다. 눈치없는 술방울 하나가 뚤렁하고 철수의 푸수수한 머리에 떨어졌다.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철수도 멋적은지 쿡하고 따라웃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성호가 입을 열었다. “나 한번도 말한적이 없는데…… 오늘은 이 말을 너희들한테 해야 할것 같다. 니들 셋 다 한국만 쳐다보고있으니 들어두는것도 나쁘지는 아닐거야. 난 합법적으로 나갈려고 중간에 귀국했다가 재입국한 시간을 빼고 꼭 8년을 한국에서 살았어. 중국에 있을 때엔 중국만 벗어나면 노다지판이여서 허리만 굽히면 돈을 주을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나도 처음엔 가서 고생을 많이 했어. 너희들두 알잖냐? 내가 첫번엔 브로커에게 사기당하고 두번째만에 겨우 출국에 성공한걸. 난 려권사진을 바꿔가지고 남의 이름으로 나갔으니까 처음부터 불법체류였어. 자진귀국하기전까지 3년내내 난 지하철을 타보지도 못하고 걸어다녔어. 왜냐구? 불법체류단속을 하는 경찰들이 늘 지하철입구에서 잡거든. 그걸 피하느라고 골목골목을 걸어다녔다니까. 건축현장일을 할 때도 늘 긴장되여있어야 했지. 뒈질놈들이 꼭 점심시간이면 잡으러 온단말이야. 그때면 점심도 못먹고 무조건 제일 높은 층으로 뛰여서 숨었어. 창문도 없이 벽체만 있는 어느 칸인가의 딱딱한  세면트바닥에 놈들이 갔겠다싶을때까지 누워있었지. 얼굴에 신문한장 덮어쓰고 말이야. 나말고도 몇명 더 있을때도 있는데 다들 아무말도 안해. 허기진 배는 꼬르륵거리고 신문장밑에 감춰진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여있으니까 서로 모르는척하는거지. 근데 이걸 누구한테도 말할수가 없다는게 더 힘든거였어. 친구들한테 말하면 쪽팔릴것 같고 가족들한테 말하면 걱정할것 같으니까. 지금은 형세가 좋아져서 거의다 합법적으로 출국하니까 나처럼 그런 고생은 안하겠지만 겪어보지 않고는 믿을수조차 없는 일들이 많고도 많아. 한마디로 제집문을 나서면 고생이야. 외화벌어들이는게 쉬운줄 아니? 싸움판이야. 아직도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서 못돌아오는 사람들이 허다해.” 성호는 의미있게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얼굴에 웃음기는 간곳없고 심각한 표정들이였다. “니 말들으니까 지하철에서 박스 덮고 사는 사람들 모습이 막 떠오른다. 그런줄까지는 몰랐는데……” 명호는 말끝을 사리며 성호의 눈길을 피해버렸다. “그렇다고 외국 안가면 또 뭘하겠니? 호미질도 제대로 안해본 나한테 뚝힘 빼고는 아무것도 할줄 아는게 없다.  난 시키는 일만 할줄 알았지 내가 내 머리로 뭘 생각해서 할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형편이거든. 도무지 여기에서는 무슨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겠는지 궁리도 안난다.” 남자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하긴 뭐, 우리가 다 시골에서 굴러들어왔으니 남처럼 학력이 있냐, 빽이 있냐, 잘사는 부모 있냐? 나도 삼촌이 이끌어줬으니 작은 주방가구가게라도 차리구 집인테리어를 하고있는거지 혼자서면 턱두 없어. 생각만 해도 신경질부터 난다. 에이, 술이나 마시자.” 철수는 투덜거리며 술잔을 채웠다. 다들 그러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지. 나나 너희들이나 거기서 거기지 누가 더 잘난 놈 있냐? 우리가 한 마을에서 자라서 지금까지 함께 친구로 있다는게 중요한거지. 자자~ 술이나 마시자.” 성호가 술잔을 쳐들었다. “마시자, 마셔! 먹고 죽겠냐?” “그래, 오늘은 화끈하게 마시는거다.” 다들 우야우야 술잔을 들며 기분을 돋구었다. 다시 어릴적에 마을을 쏘다니며 장난을 치던 일이며 련락이 없는 친구들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분위기는 둥글어갔다. 그날 술에 만취한 남자는 술값을 낸다는 성호를 밀어내고 기어코 지갑을 털었고 집에 돌아오자바람으로 그대로 쏘파에 꺼꾸러져버렸었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기신기신 일어난 남자는 핸드폰에서 부재중전화 다섯통을 발견하고는 아연해져 한참이나 제자리에 굳어있었다. 안해가 밤 10시쯤에 걸어온 국제전화였다. 안해가 전화를 걸어오는 시간은 보통 저녁 6시 좌우가 아니면 10시좌우였던것이였다.   3   녀자는 무릎을 세워잡은 두 팔에 얼굴을 묻고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옅은 갈색으로 자연스럽게 염색된 긴 생머리가 팔과 어깨를 덮고있었다. 남자는 두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른채 잠간 녀자를 바라보다말고 “흐음”하고 헛기침을 하였다. 녀자는 머리를 들어 남자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이지만 아이라인이며 입술라인까지 섬세하게 다음어져있었다. 녀자는 머리를 쓸어 뒤로 넘기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즈막하게 내뱉었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신을 벗고 온돌에 올라가 네모난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녀자와 마주앉았다. 상에는 맥주와 마른 안주 몇가지가 올려져있었다. “무슨……일 있는가보지?” “맥주와 마른 안주 시켰어요. 더 필요한것 없죠?” 녀자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맥주병을 끄당겨 병마개를 뚝 뚝 따고는 한병을 남자앞으로 밀어놓았다. “번거로우니까 각자 저절로 부어마시도록 해요.” 역시 눈이 커진 남자의 반응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녀자는 절로 술을 따라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또 부었다. 남자와 녀자사이에는 답답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이지? 이 자리에 나온것이 막 후회되고있었다. 예전처럼 늘 다니던 마작청에 갔던것이고 판을 벌리기에는 사람이 모자랐다. 영업주인이 자기가 한창 바쁘다며 녀자에게 전화를 걸어보라고 번호를 알려주었다. 녀자라면 여러번 마작을 같이 놀아본적이 있는지라 남자는 아무 우려도 없이 안나오냐고 전화를 걸었었다. 겨우 알아들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일이 있어서요.”하던 녀자가 전화를 막 끊으려는 찰나에 “같이 술 마셔줄래요? 술동무가 필요해서요.”하고 말해왔다. 머리속에서 “똑딱”하고 1초가 지나가는 동안 남자는 그1초동안의 고려도 하지 않고 “그러지.” 하고 대답해버렸다. 다방앞에 이르렀을때까지도 남자는 자기가 왜 녀자의 부탁을 들어주었는지 합당한 리유를 생각해내지 못하고있었다. 점심때도 안된 한낮부터 별로 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별로 아는것도 없는 녀자와 다방에 마주앉아 술을 마셔줘야 한다는게 썩 좋은 일은 아닐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은 마당에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고 궁둥이를 툭툭 털고 일어날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철수라도 부를걸 하며 남자가 머리속의 온갖 단어들을 동원해 침묵을 깨뜨릴 적당한 한구절의 말을 주어맞추고있을 때였다. “저기요” 녀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황급히 핸드폰만 만지고있던 자기 손에서 눈길을 떼여 녀자를 바라봤다.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해요. 정말로 술을 마시고싶은데 부를 사람이 없어서요.” 녀자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전화에서 하던 말을 반복하고있었다. “아니, 괜찮은데. 어차피 마작쪽을 만지면서 돈을 잃느니 차라리 술을 마시는게 나을지도 모르지.” 남자는 안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씩 웃었다. 녀자가 웃는듯 마는듯 입귀를 실룩거렸다. “집에서 혼자 마실려니 미친년 같고 그렇다고 대낮에 녀자 혼자서 이런 곳에서 술마신다는것도 이상하게 보일것 같았어요.  하지만 술은 마셔야겠구, 별로 친한 친구도 없구 해서요.” 녀자는 짝태오가리를 오리오리 찢었다. 찢는것이 짝태가 아니라 그 이상인것처럼. “무슨 일이 있는것 같긴 한데. 술을 마신다고 일이 해결되는것은 아니지.” 남자는 자기 잔에 맥주를 따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건배해요.” 녀자가 남자의 잔에 쟁그랑~ 술잔을 부딪쳐오고는 또 쭉 들이켰다. 남자는 얼떠름해서 잔을 들었다. “안마셔도 돼요. 거기 그냥 앉아있어주셔도 돼요. 그냥 마주 앉아있는 사람이 필요했던거니까요.” “허참~” 남자는 들었던 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술을 마시기도 멋적고 안마시기도 무엇한 묘한 분위기에 남자는 어정쩡해지고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녀자는 남자한테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서너잔을 더 마시고서야 “껄~”하고 트림을 하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한국말 참 잘하든데. 혹시 한국에라도?” “아뇨. 한국드라마 보면서 절로 배웠어요. 자꾸 따라하니까 이렇게 되데요. 몸가짐이며 화장이며 옷차림도 한국식으로 할려고 많이 신경쓰는 편이얘요. 남편이 살고있는 환경속의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이여야 나중에 남편이 귀국해도 낯설지 않을것 같아서요. 제가 여태 이러구 살았어요. 웃기죠?” 녀자의 말을 들으며 남자는 자꾸 반토막이 나는 자기의 말투를 생각하고있었다. “한국말을 하고 한국옷을 입은들 무엇해요?...... 사람을 통채로 한국에 반납하게 생겼는데. 나만 짝퉁이 한국녀자 됐죠.” 녀자가 씁쓸히 웃고나서 또 술을 부어마시기 시작했다. “아참, 오늘 술 참 약해요. 도무지 취해지지가 않네요. 오늘같은 날엔 취해야 하는건데.” 녀자는 벌써 네번째 병마개를 따고있었다. “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시죠?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 전요, 말을 할 상대도 없는 사람이예요. 바람 핀다고 헛소문이라도 날가봐 친구도 안만나고 살아와서 친한 친구 하나없어요. 친정부모도 돌아가셔서 안계시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도 저먹고 살기 바빠서 로씨야에서 장사를 하느라고 내 말엔 귀기울일 형편이 못돼요. ” 녀자의 목소리의 톤이 슬슬 높아지고있었다. “올해 들어서 하도 답답해서 마작판에도 다닌거예요. 그렇다고 거기에 친할만한 사람들이 있는것도 아니잖아요. 거개가 한쪽씩은 어딘가에 가버린 외기러기들이여서 자칫하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것 같은 판국들인데. 안그래요?” 난 뭐 외기러기 아닌가? 남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술과 함께 삼켜버렸다. “난요, 외국 가서 돈버는 남편한테 미안하지 않게 살려고 애썼어요. 열심히 살림하고 자식뒤바라지 극성으로 하고 돈도 허투루 안썼어요. 친구모임에도 안나가고 노래방에도 안다니고……그런데 그게 다 무슨 쓸모가 있어요?...…” 적당히 톤이 높아진 녀자의 목소리가 갈리고있었다. 이쯤에서는 울음이 나올법도 한데 녀자의 눈에는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맥주만 랭수 들이키듯 벌컥벌컥 들이키고있었다. 녀자가 술을 마시는 폼은 단아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가녀린 체구보다는 꽤 단단한 녀자를 보며 남자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있을 때였다. 다섯번째 병까지 비워버린 녀자가 남자의 앞에 놓인 병을 끄당겼다. 남자는 엉겁결에 병에 손을 뻗쳤고 그 서슬에 녀자의 손이 남자의 손아귀에 잡히고말았다. 녀자가 흠칫 손을 옴츠렸다. 남자는 덴겁하여 얼른 손을 놓았다.  남자와 녀자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미……미안한데.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것 같아서……” 남자는 더듬거리며 호주머니에서 담배갑을 뒤져냈다.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려다 말고 도로 집어넣고 애꿎은 담배갑만 뭉그러뜨렸다. 그러는 남자를 보며 녀자가 샐죽 웃었다. “뭐 이 정도는 마실수 있어요. 가끔 밤에 혼자서 캔맥주를 두세개씩은 마셨거든요. 이렇게 나와주셔서 고마와요. 언제 술동무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보답으로 한번쯤은 같이 마셔줄수 있어요. 살다보면 어디 술마시고싶을 때가 한두번이겠어요?” “술? 난 매일 술을 마시고싶은데.” 남자는 어줍게 웃으며 녀자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자기의 잔을 들었다. 녀자도 잔을 들었다. 남자는 잔을 비우며 이 녀자라면 술동무로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녀자가 다방문을 나설 때는 점심때가 지난지도 한참이였고 막 점심식사를 끝낸 일없는 사람들이 다방으로 몰려들고있었다. 그때까지도 취기가 없이 말짱한 녀자와 헤여지며 남자는 오늘 녀자한테 필요한것은 어쩜 술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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