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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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제94장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성립 댓글:  조회:4380  추천:3  2015-08-25
제94장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성립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성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해주었다. 동북인민정부에서는 조선족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지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연변대학교 부교장 림민호를 단장으로, 항일렬사자가족 김신숙을 단원으로, 연길한어전문학교 교도주임 반룡해를 수원으로 한 대표단을 구성했다. 예술축전에 참가할 배우들은 새로 창작한 가무종목을 다그쳐 련습하였다. 9월 22일, 대표단일행은 연길역을 떠나 23일 심약역에 도착했다. 심약역에는 동북인민정부 지도일군들과 각계 대표들이 나와 대표단일행을 환영하여주었다. 9월 27일, 대표단일행은 북소리와 환호성속에서 북경역에 도착하였다. 수십만의 각계 대표들이 역에 나와 대표단을 맞아주었다. 9월 28일, 대표단일행은 로동인민문화궁에서 주은래총리의 국제국내정세에 대한 보고를 들었고 29일에는 주은래총리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에 가서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9월 30일, 마침내 모택동주석의 초청을 받고 북경호텔을 향하게 되였다. 모택동, 류소기, 주덕, 송경령, 장란, 리제심 등 공화국의 주석, 부주석들과 정무원총리 주은래가 연회대청앞에서 대표들을 맞아주었다. 400여명 대표와 배우들은 지구별로 줄을 지어 령도자들의 앞을 지나가면서 악수하고 인사를 올렸다. 접견이 끝난후 대표들은 연회에 참가하였다. 술과 음료수가 한쪽에 놓여있고 연회상에는 여러 가지 푸짐한 료리들이 갖추어져있었다. 의자가 없이 서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연회여서 자못 경쾌했다. 한동안 지난후 진운, 팽진, 리유한, 우란후, 류춘 등 령도자들이 제가끔 잔을 들고 조선족대표단이 서있는쪽으로 다가왔다. 대표들은 열렬한 박수로 그들을 맞았다. “동지들은 조선족대표들이죠?” 진운은 이렇게 물은후 말을 이었다. “나는 동북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조선족을 잘 리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족은 정말 믿음직한 민족입니다. 동북해방전쟁때 조선족인민들은 용감하게 잘 싸웠습니다. 동북해방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놀았지요. 우리는 조선족인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뒤이어 팽진이 말했다. “나는 조선족에 대해 깊은 정을 가지고있습니다.” 동북국과 제4야전군사령부에서는 적지 않은 조선족경위원들을 두어 기관과 사령부안전을 담보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들이 조선족에 대한 극히 큰 신임이였다. 특히 팽진의 처제 장수암은 조선족정치활동가인 리철부의 안해였기에 팽진은 조선족에 대한 리해가 남달리 깊었던 것이다. 10월 1일, 북경성은 새벽부터 징소리, 북소리, 폭죽소리속에 들끓었다. 림민호, 김신숙, 반룡해는 청첩장을 받고 천안문서쪽 관례대에 오르고 배우들은 북경시민들과 함께 시위행진에 참가하였다. 남자들은 흰 광목바지저고리를 입고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성들은 환한 색깔의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그들은 괭과리, 북, 새납을 행진용악기로 삼았다. 모택동주석을 비롯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천안문성루에 오르자 시위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시위행진대오를 따라 관례대앞을 지날 때 조선족배우들은 격동에 넘쳐 “모주석만세!”, “중국공산당만세!”, “중화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배우 김성민은 괭과리를 맡았는데 한동안 지나니 괭과리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괭과리채가 꺾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3일 밤,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예술축전활동이 있었다.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이미 자리에 착석하고 있었다. 7시 10분, 회인당강당 동쪽켠에서 갑자기 박수소리가 터졌다. 모택동주석이 대청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고있었던것이였다. 이어 선물증정의식이 있었다. 각 민족 대표들은 순서대로 각기 주석대에 올라가 가지고온 선물을 모택동주석께 드리였다. 조선민족대표단은 세 번째로 주석대에 올랐다. 림민호가 먼저 연변인민들이 국경첫돐을 경축하는 서명부 한책을 모주석께 올렸다. 다음 김신숙이 조선족저고리와 조끼, 바지 한벌을 드렸다. 그다음 반룡해가 옥석으로 만든 벼루를 드렸다. 또 그 다음 예술단 단장 김동구가 조선족 회색두루마기를 모택동주석께 입혀드렸는데 두루마기의 길이와 품은 웅장한 모택동주석의 몸매에 딱 맞았다. 모택동주석은 두루마기를 훑어보면서 사의를 표하였다. 대청에선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렸다. 마지막으로 배우 정영숙이 남색비단에 원앙새를 수놓은 방석을 드렸다. 선물증정이 끝난후 예술축전이 있었다. 연변문공단, 내몽골문공단, 신강문공단, 사천성의 장족, 묘족들의 가무종목은 명절의 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 연변문공단의 5개 종목은 그날 밤 문예축전의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먼저 대합창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를 공연하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부른 노래소리는 회인당에 메아리쳤고 중남해의 정원을 넘어 수도인민들의 흉금을 울려주었다. 김혜련의 “지게춤”, 리인숙 등의 4인무 “절구춤”은 관람자들의 흥미를 자아냈다. 김인숙의 노래 “민가련창”과 방초선의 독창 “베짜기노래”도 절찬을 받았다. 각 민족대표들은 “조선족의 예술은 기교가 높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축전에서 조선족대표단은 모두 10차례나 단독으로 공연하였는데 공연때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때로부터 조선족예술은 북경인민들과 전국인민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이날 밤 모택동주석은 조선족문공단을 포함한 소수민족문공단의 공연을 관람하고 “완계사” 한수를 지어 류아자선생에게 화답하였다.   지루한 밤 지샐줄 모르던 이 적현에 백년동안 마귀떼 우줄우줄 춤추어 오억인민 단란히 모일수 없었네   수탉이 홰를 치자 천하는 밝아 여러 민족 주악속에 위텐곡도 울리니 시인의 흥취 비길바 없구나!   중앙방문단 연변방문   1952년 7월 24일, 팽택민을 단장으로 하고 싸쿵료를 부단장으로 하는 중앙대표단 일행 50여명이 길림성인민정부 부주석 서원천의 안내하에 렬차로 연길에 도착하였다. 주덕해, 동옥곤, 최채 등 연변의 당정지도자들이 연길역에 나가 중앙대표단을 맞아주었다. 이날 연길시 6만5000여명 인구중 3만여명이 연도환영을 나왔다. 환영군중들의 울긋불긋한 꽃초롱불은 방문단이 지나가는 앞길을 가로등처럼 비추어주었다. 중앙에서는 이번에 도합 4개방문단을 서남, 서북, 중남, 동북, 내몽골과 수원 등지에 파견하여 소수민족을 위문하며 중앙인민정부에 대한 여러 소수민족인민들의 희망과 요구를 료해하게 하였다. 연변으로 나온 중앙방문단은 바로 그 4개 방문단중의 하나였다. 팽택민을 단장으로 싸쿵료(몽골족), 핑스크(몽골족), 아에사이(위글족)를 부단장으로 하여 동북으로 나온 중앙방문단은 7월 9일 북경을 떠나 수원을 거쳐 15일 심양에 도착한후 두 개 조로 나뉘여 한조는 료서로 가고 다른 한조는 연변으로 나온 것이다. 7월 27일, 연길시 3만여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체육장에서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성대한 모임을 가졌다. 환영대회에서 주덕해의 열정에 넘치는 환영사와 팽택민의 답사가 있은 뒤 모택동주석께서 중공연변지위, 연변전원공서에 보내는 금기가 전달하였다.《중화인민공화국 여러 민족은 단결하라!》는 모택동주석의 친필제사가 금기에 새겨져있었다. 이어 중앙방문단의 선물증송의식이 있었다. 선물로는 수령의 초상화 190폭, 모택동, 주덕, 주은래의 친필제사 500매, 기념메달 6500개, 환등기 2대, 도서 25종에 1392책, 약 25종에 15상자, 현미경 한 대를 포함한 26종의 의약기자재, 의학서적 303책이였다. 28일, 중앙방문단을 환영하는 운동대회가 있었다. 연길, 룡정 3개 시의 1900여명 선수들이 조선족 씨름, 그네, 널뛰기 시합에 참가하였다. 29일 오후부터 30일 오전까지 중앙방문단은 각족 각계 대표 50여명과 좌담을 가졌다. 좌담에서 사람들은 생산건설, 전선지원, 민족단결 등 면에서 얻은 보귀한 경험을 소개하였다. 중앙방문단은 연변에 체류하는 기간에 선후하여 중공연변지위, 연변전원공서, 연변대학, 동북조선인민보사, 인쇄공장, 연변교육출판사, 연변문공단, 룡정시, 로두구고무공장, 최죽송농업생산합작사와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 등을 방문하였으며 기타 소수민족들인 회족, 만족들도 찾아보았고 일부 렬사유가족, 군인가족들도 위문하였다. 중앙방문단은 연변에서 9일간의 방문활동을 끝마치고 8월 2일 저녁차로 연길을 떠났다.   조선족 구역자치의 선포   1952년 8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구역자치실시요강》이 발표된 12일후인 8월 21일, 연변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주비위원희의가 연길에서 열리였다. 회의에서 주비위원회의상무위원회를 산생, 대표회의의 임무, 대표자격 등 문제를 토론, 결정했다.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드디어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기 각족 각계 인민대표회의가 연길시인민극장에서 소집되였다. 300여명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였다. 동북인민정부대표 왕일부, 중공길림성위서기 리몽령, 길림성인민정부 주석 률우문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동옥곤이 회의에서 “길림성인민정부 연변전원공서 서업보고”를 진술하고 주덕해가 “길림성연변조선민족자치구시정건설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보고에서 주덕해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기관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공작을 진행한다.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곧 창립될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의 임무는 민족특징을 돌보며 민족형식을 통하여 민족평등정책을 관철하며 여러 민족 인민을 단합시켜 체계적으로 절차를 밟아 정치, 경제, 문화 건설을 진행하는것이다”고 지적하였다. 대회에서 정식으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를 성립하고 “자치구인민정부조직조례”와 “민족단결에 관한 결의”를 통과한후 제1기 인민정부주석, 부주석, 비서장 등을 선거하였다. 주덕해가 제1기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부주석으로는 동옥곤(董玉昆), 최채(崔采)가 당선되고 비서장으로는 곽명광(霍明光), 부비서장으로는 박창무(朴昌武), 장국근(張國勤)이 당선되였다. 전인영(田仁永), 요흔(姚昕) 등 32명이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대회에서는 항일전쟁승리기념일인 9월 3일을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기념일로 규정하였다. 자치구산하에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이 포괄되여 있었는데 인구는 도합 85만4000여명이였다. 그중 조선족이 53만명으로서 62%를 차지하였다. 9월 3일, 연변 각계 각족 인민 3만여명이 연길시 서광장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성립모임을 성황리에 가졌다. 중앙과 동북국, 길림성에서 파견되여 온 당정 지도자들이 회의에 출석하였다. 자치구인민정부 주석 주덕해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창립을 장엄하게 선포하자 대회장은 환호의 열도가니로 끓어번지였다.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소망이였던가. 이것은 지난날 항일전쟁시기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서 제출되였던 동북에서의 조선인민족구역자치의 완전한 실현이며 자산계급 민주주의를 구유한 애국지사가 신해혁명직후에 국회에 제출한 민족자치방안의 더욱 높은 단계의 실현이였다. 조선족은 마침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조선족은 소수민족신분으로 세계인구 4분의 1을 차지하는 새중국의 광활한 땅에서 마음껏 활보할수 있게 되었다. 과경조선인은 문헌상에서와 민간속에서 개간민,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심지어 삼한인(三韓人) 등으로 불리면서 고정된 족명조차 없는 망국노 류랑민의 생활을 영위해와야 했다. 그러나 이젠 조선족이라는 정치개념의 확립과 더불어 이런 력사현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었다. 쪽지게를 지고 오랑캐령을 넘어온 족속, 쪽배를 타고 선구나루터를 건너온 족속, 그 족속들이 뼈를 심고 살을 파묻어 걸군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토지혁명과 전쟁의 불길이 흩날리던 항일전쟁, 해방전쟁의 나날에 조국강산에 진붉은 피를 휘뿌리며 영웅적기개를 보여주던 그 민족이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이 되었다. 이날 연길시거리는 수천수만의 환호의 인파로 출렁이였다. 골목과 거리마다엔 민족복장을 떨쳐입은 주민들이 북장고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면서 자치구성립의 날을 경축하고있었다. 이 인파속에는 나젊은 작곡가 김성민도 섞어있었다. 그는 차창준이 금방 써준《자치구창립의 노래》가사를 손에 쥐고 주민들과 함께 춤노래판에 한도가니로 휩쓸렸다. 덩실덩실 춤추던 김성민은 불현듯 주선률이 떠올라 무릎을 꿇고앉아 기보하기 시작했다.   에루화 저절시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루화 두둥실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 세웠네...   자리를 차고 일어난 김성민은 금방 작곡한 노래를 소리높이 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김성민의 노래에 맞추어 북장고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노래소리는 조선족의 숙망을 담고 멀리멀리 울려갔다.(끝)   참고서적   1.《日本帝國主義侵華檔案資料選編-東北經濟掠守》 中華書局 2.《金日成將軍凱旋記》韓裁德 著 民主朝鮮社(1945년 발행) 3.《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8권) 4.《김일성회억록 》(1-7권) 5.《中國共産黨延邊歷史大事記》民族出版社 6.《中國朝鮮族歷史硏究》朴昌昱 著 延邊大學出版社 7.《조국광복회운동사》조선로동당출판사 8.《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 金昌順 共著 9.《용정반일운동》연변인민출판사 10.《延邊大事記》延邊大學出版社 11.《연변조선족역사화책》연변인민출판사 12.《혈연의 강들》류연산 저 연변인민출판사 13.《1930年代延邊民生團事件硏究》金成鎬 著 한국 백산자료원 14.《연변항일혁명사적지》박청산 저 연변인민출판사 15.《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 저 연변인민출판사 16.《中共延吉党史資料》吉林文史出版社 17.《중국조선족력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18.《중국抗日戰爭과 조선민족》-1910-1952년 조선민족통사 고영 일 주필 도서출판 백암 19.《中朝韓日關係史硏究論叢》延邊大學出版社 20.《東北抗日聯軍》(上, 下券) 21.《僞滿憲警統治》中華書局 22.《嚴峻的考驗》呂永俊 口述 韓泰岳 整理 23.《延邊人民抗日鬪爭史》延邊大學出版社 24.《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 연변인민출판사 25.《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 저 민족출판사  
93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댓글:  조회:1840  추천:0  2015-08-25
 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주덕해 조선민족 대표해 천안문에 오르고 연변인민 떨쳐나와 공화국의 탄생을 환호   개국성전   1949년 10월 1일. 이날은 중국인민에게 있어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더없이 감격스로운 날이였다. 수도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날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에서는 제1차회의를 열고 국가주석, 부주석의 명단을 선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며 주은래를 정무원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모택동을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심균유를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라영환을 최고인민검찰서 검찰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을 “중앙인민정부의 시정강령”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오후 3시, 수도 북경의 30만 인민대중은 천안문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속에서는 무시로 우뢰와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천안문성루에는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요인들이 올랐고 관례대에는 여러 민족 대표들이 올라섰다.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대포한 주덕해도 있었다. 국가의 주악속에 모택동은 국기게양대의 스위치를 눌렀다. 오성붉은기가 10월의 상공에 나붓겼다. 뒤이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가 천안문광장에 울려퍼졌다. “중앙인민정부는 성립되였다!” “중국인민을 일떠섰다!” 격동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중국대지를 진감하였으며 전 세계에 울려퍼졌다. 중국인민은 피어린 투쟁을 거쳐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모택동의 장엄한 선포는 낡은 중국에 대한 결속의 선고였으며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통치의 붕괴에 대한 선고였으며 백여년동안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결말에 대한 선고였다. 새중국을 창건하기 위해 중국의 조선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일제와 싸웠으며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조선인들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생명을 바쳤다. 때문에 오늘 조선인은 중화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어 자신들의 대표를 당당하게 천안문성루에 세울수 있게 되었다. 이어 주덕총사령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지휘원과 전투원들에게 중앙인민정부 및 모택동동지의 명령을 견결히 집행하며 재빨리 국민당군대의 잔여부대를 숙청하여 아직 해방되지 못한 국토를 해방하라는 중국인민해방군 총부의 명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륙해공군의 렬병식이 있었다. 보무당당한 인민해방군 3군전사들은 름름한 모습으로 천안문광장을 주름잡았다. 이날 연길시 2만여명 군중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경축모임을 가지고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중국공산당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집회에서 연변의 당정지도일군들은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으며 모택동주석과 주덕총사령에게 보내는 축전을 채택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 연길시 5만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승리적페막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탄생을 열렬히 경축하고있습니다. 갖은 고통과 압박을 받은 우리 중국사람들이 오늘부터 새로운 새대ㅡ인민민주독재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중국인민은 더는 제국주의와 반동파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산당, 모주석, 주총사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단결하여 생산계획을 견결히 완수 또는 초과완수함으로써 전국인민해방전쟁을 계속 지원하며 반동세력을 소멸하고 전 중국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하여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한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보문은 그날로 전파를 타고 북경에 전하여졌다.   “나라가 섰다!”   아래에 저명한 민간문학가 리룡득선생의 “나라가 섰다!”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리룡득선생이 직접 겪은 일을 서술하고있는 이 글은 당시의 연변인민들의 뜨거운 정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내가 열살되던 해였다. 나는 편벽한 산골학교인 안도현 량병향 보광촌소학교 4학년생이였다. 10월 3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 앞뜨락에서 한창 놀고있는데 사무실쪽으로부터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신문 한 장을 들고 다그쳐 오시며 소리쳤다. “동무들! 우리 나라가 섰습니다!” “뭐, 우리 나라가 섰다구요?” 나와 반 친구들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벙벙해 서있기만 했다. “우리의 새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였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어데요? 좀 보자요!” 나는 다른 애들을 제체놓고 선참으로 선생님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선생님 손에 쥐여져있는 동북조선인민보(10월 2일부 신문)를 빼앗다싶이 받아쥐였다. “중화인민공화국만세!”라는 대형 활자체와 그 아래에 모신 모주석의 초상화가 첫눈에 안겨왔다. 오른쪽 톱에 “중국인민정협 원만 성공리에 페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고, 모택동 중앙정부 주석에 당선”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찍혀있었다. “애들아! 우리 새 나라가 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친구들은 나를 빼곡히 에워쌌다. “얘들아! 우리도 인젠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날 오후 상과는 예상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라 창립의 크나큰 기쁨에 휩싸인 선생님이나 우리의 심정은 모두 이 일 외의 다른 생각을 할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학교에서는 인차 전교사생(전교사생이라야 겨우 100여명)이 참가한 경축모임을 가졌다. 교장선생님은 격앙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창건소식을 알리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우리는 인젠 어엿한 자기 나라가 있는 학생으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꼭 새 나라 어린이답게 학습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뒤이어 교무주임선생님께서 장엄하게 신문독보를 하시였다. “...부주석들로는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고강, 장란...” 이날 오후 산간벽지의 자그마한 운동장에선 오래도록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집으로 뛰여간 나는 집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와 어머니(당시 우리 집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세동생이 살았다.)를 보고 소리부터 쳐댔다. “할매, 멈마! 우리도 인젠 내 나라가 있게 되었어요!” “아니 내 나라가 있게되다니?” 할머니와 어머니는 중뿔난 나의 말에 잠시 일손을 멈추시고 쳐다보셨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응, 그런 일이였구나.” 주름투성이 할머니얼굴은 대뜸 환해지시였다. “그래요. 우린 비록 이 몇 년간 자유해방속에 살았다지만 여태까지 나라라곤 없었지요. 그런데 인젠 당당한 내 나라가 있게 되어단 말이예요!” 나는 선생님한테서 들은 도리를 제법 내리 풀었다. “참으로 기쁜일이로구나!” 어머니도 환성을 올리셨다. 뒤미처 동생들이 들어왔다. “얘들아! 우리들에게도 인젠 나라가 있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나는 동생들에게 오성붉은기를 그려보이면서 내 아는대로 제법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때였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할매, 엄마, 돈 좀 줘요.” “아니, 밤중에 갑자기 돈을 해선 뭘하니?” “나라가 선 기쁨을 경축해야지 겠않어요?” “참, 얘두, 우리끼리 어떻게 경축한단말이냐?” “아니, 꼭 할수 있어요. 빨리, 응!” 나의 성화에 어머니는 200원(동북화페)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나는 공소사로 펄쩍 달려가 과자 두근을 얼른 사왔다. “자, 이 한근은 우리 몫이고 이 한근은 동생들 몫, 우리 이 과자를 먹으며 새 나라 창건을 경축하자요!” 1950년 3월 20일, 동북조선인민보 제2면에는 우리 나라 국가가 실렸고 뒤미쳐 우리 학교에서는 국가를 배워주게 되었다.   일어나라 노예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 쌓자...   나는 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오자마자 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국가를 배워드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은 중국력사에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으며 우리 조선민족동포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후 중국공산당은 민족압박제도를 철저히 페지하고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조선민족인민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의 한 성원으로서 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인민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자기들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오매에도 그리던 나라의 주인이 되어 국가대사와 지방사무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1년도 채 안되던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불길은 압록강과 두만강가에까지 퍼져왔다. 이웃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기에 처하여있었고 우리 나라의 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중국정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구호를 내걸고 그해 10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전선에 파견, 조선인민군과 배합작전하여 북진하고있는 미군을 3.8선부근에까지 밀고나갔다. 이때 인민일보는 동북거류조선인이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보위전쟁에 참가하라는 보도를 계제하면서 조선인들의 참군열조를 불러일으켰다.   北京에 거주하는 조선 교민은 집회를 열어 미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이승만의 내전 발동을 질책하여 중국에 거류하는 우리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 조국의 동포의 인민해방전쟁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원할것이다.(인민일보 1951년 7월 12일 제1판 기록에서 인용)   동년 10월 17일, 동북조선인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延邊大學 林民鎬副校長은 동북조선민족대표의 신분으로 중앙인민방송국의 초청을 받고 10월 14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 인민은 모두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인민들의 해방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외교부 발언인의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들은 돌아가 조국을 보위할 권리가 있다는 광명하고 정대한 성명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 담화발표는 중국조선인들에게 보낸 동원의 호소였다. 조선인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참군열조를 일으켰다. 부모가 자식을 전선에 보내고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냈으며 학교학생들과 기관일군들이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탄원했다. 도문철도국에서는 선후로 500여명의 종업원들이 기관차를 몰고 조선전선에 나가 철도운수사업에 참가하였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000여명의 녀간호원을 양성하여 전선에 파견하였다. 항미원조총회에서는 전선을 지원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대포를 헌납하라고 호소하였다. 각지의 조선인들은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지구에서는 97억여원(낡은 화페)이나 헌납하였는데 이 돈으로 비행기 7대반을 살수 있었다. 항미원조전쟁중에서 “근근히 연변지구에서만 6만여명이 조선전쟁에 참군했으며 8천여명이 희생되였다.”(《중국항일전쟁과 조선족》고영일주필 도서출판 백암)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의 2년 9개월의 협동작전 끝에 드디여 미군과 함께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였다.(계속)  
92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댓글:  조회:1780  추천:0  2015-07-27
제92장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조선민족지도자들 연변의 정권건설 주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서 구역자치 주장 주덕해와 민족사무처   동북행정위원회는 1948년 4월 민족위원회에 민족사무처를 신설, 주덕해를 처장으로 임명했다. 민족사무처는 할빈시 남강 마가구에 자리잡고있었다. 민족사무처의 주요임무는 조선인들을 공산당의 주위에 묶어세운후 여러 민족과 단결하여 생산을 회복, 발전시키며 전선을 지원하는것이였다. 이 중대한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민족사무처에서는 조선인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간부양성에 힘을 몰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문공대를 세우고 자체신문인 “민주일보”를 간행하기도 했다. 1948년 7월 20일에 거행된 조선인간부학교 개학식에서 교장 주덕해는 동북 각지에서 선발되여 온 150명 학생들에게 학습을 잘 하여 인민의 훌륭한 근무원이 되여달라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다. 주덕해는“당의 건설”,“민족정책” 등 과목을 직접 강의하였다. 1949년 1월 학생들이 졸업하고 돌아갔다. 그때 학습을 마치고 돌아간 학생들은 북만 각지의 토지개혁과 지방사업에서 골간으로 되었다. 1949년 2월 10일, 민족사무처는 9개월 동안의 사명을 완수하고 해산되였다. 그날 주덕해는 민족사무처의 전체 일군들은 이제 곧 연변에 가서 연변의 당정부문에 배치될것이라고 선포했다. 아울러 문공대는 연변문공대와 합치게 되고 “민주일보”는 “연변일보”, 남만의 “단결일보”와 합쳐 “동북조선인민보”로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조선인간부학교도 연변에 나가 조선민족간부양성사업을 계속 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어 민족사무처 간부들은 연변에 나와 연변의 당정 중임을 지니게 되였다.   3급 인민정권 전면 수립   1948년 3월부터 조선인 림춘추(1948년 3월 27일 임명), 문정일(1949년 3월 7일 임명), 주덕해(1949년 3월 20일 임명. 연변지위서기 겸.)가 선후로 연변전원공서 전원직무를 맡고 연변에서의 정권건설사업을 주도하였다. 1948년 11월 15일, 동북일보는 “민주정권건설사업을 다그쳐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 동북행정위원회 제2차 행정회의의 결정을 전달하고 1949년 춘경전에 본지구에서 현, 구, 촌 3급인민대표대회와 정부위원회의 선거를 끝낼것을 요구하였다. 사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급 당조직은 반드시 민주운동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고 전당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민주운동에 참가하는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11월 중순부터 중공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동북국과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에 쫓아 촌급선거사업을 시험적으로 진행하기 시작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사업간부양성반을 꾸려 2878명의 선거사업간부를 양성, 그중 구급조리원이상간부 1049명, 행정간부 858명이였다. 그들로 조직된 선거공작대는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사업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시험공작에서 경험을 얻은후 촌급정권을 세우는 공작을 보편적으로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까지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사업이 기본상 끝났는바 왕청현의 7개 촌을 제외한 57개 가두, 548개 촌에 비교적 완정한 촌급인민정부가 세워졌다. 촌급선거공작에서 촌급정권이 기본군중의 수중에 장악되도록 보증하였으며 불순분자가 혼입하지 못하게 하였고 민족, 성별 비례에도 중시를 돌렸다. 하여 촌급정권의 대표성과 대표의 광범성을 보장하였다. 선거공작을 통하여 가일층 군중을 교양하였고 정치에 참여하는 군중의 자각성과 적극성을 더욱 높였다. 인민군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높였고 각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였으며 생산을 발전시키려는 인민군중의 의욕을 북돋우었다. 촌급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된후 각 현에서 륙속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길림성민족사업회의   1949년초, 길림성위에서는 연변의 주요한 책임자들에게 길림성민족사업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내였다. 통지를 받은후 림춘추, 주덕해, 김세균, 리욱, 오훈 등은 인차 회의에 참가할 준비에 달라붙어 연변의 력사발전, 토지개혁정황, 혁명투쟁력사 등 방면의 자료를 수집하고 문건을 작성하였다. 연변인민들의 크나큰 기대를 안고 떠난 대표들은 1949년 1월 19일 아침차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성위일군들이 자동차를 타고나와 역광장에서 연변대표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이것은 연변의 최고급 책임자들에게 있어서는 최고급 대우였다. 연변에서 자동차를 타보지 못한 그들은 자기들이 타던 마차보다 자동차가 훨씬 빠르다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성초대소에 도착하자 대표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이부자리를 펴놓고 가져온 자료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월 21일, 길림성민족사업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대표들은 근 40명 되었는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였다. 진정인이 회의를 사회하고 주보중, 주덕해, 림춘추 등 많은 사람들이 연변의 건설문제에 대해 연설하였다. 주보중은 회의에서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후 조선인민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압박을 받았고 중국에 와서 또 중국착취계급의 착취를 받았기에 혁명성이 특별히 강하다는 것, 조선인민들은 중국의 항일투쟁가운데서 중국인민과 피로써 우의를 맺었다는 것, 자기의 피땀으로 연변을 개척한 연변조선인들은 반드시 연변을 잘 건설해야 하며 중국의 각 민족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강조하였다. 회의에 참가한 연변대표들은 항일투쟁과 해방전쟁가운데서 세운 연변조선인들의 력사적공훈에 대해서 한결같이 긍정하고 연변의 전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전망에 대해 구김없이 토론하였다. 회의는 특히 연변에 건립될 정부의 규모에 대해 열렬한 토론은 진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중국 땅에 와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비장한 사실과 쏘련의 국가조직형식 등 실례를 들어가면서 연변을 가맹공화국형식으로 만들어 완전히 조선인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였다. 주덕해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우리 조선인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면서 놈들과 싸워온 것은 누구나 다 승인하는 사실이며 우리의 빛나는 력사인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명기해야 할바는 우리가 혁명에 참가한 목적이다. 우리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고 혁명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압박과 착취를 없애고 로고대중의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 역시 손님으로, 지원병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민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력사가 부여한 의무를 다한 것이다. 피를 흘리는 싸움에서 이러하였다면 이후 건설가운데서도 마땅히 손님으로서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으로서 자기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특점에 따라 민족자치권을 향수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독립왕국을 꾸리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대표들은 드디여 연변조선족자치정부를 창립하여 중국공산당과 중앙인민정부의 령도밑에 충분한 민족자치권리를 향수하면서 연변을 보다 아름답게 건설하기로 의견을 통일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연변에서의 교육발전사업에 대해 토론하고 연변조선민족자신의 최고학부인 연변대학의 창건문제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고 우리 조선민족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발양하여 후대들의 교육사업에 큰 중시를 돌리기로 의견일치를 가져왔다. 회의기간 대표들이 장춘을 방문하는 기회에 림민호는 건국대학에 들려 많은 책을 구입하여 연변대학도서관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희의는 2월 4일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1949년 8월, 주보중은 운남성으로 전근되여가기 전에 중공중앙 모택동주석에게 편지를 보내여 “먼저 연길지구에서 민족자치를 실현” 할 것을 건의하였다.(1989년 길림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回憶周保中》의 p.268에서)   주덕해 전국정치협상회의에 출석   1949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북경의 중남해에서 모택동의 사회하에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에는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각 인민단체, 각계, 민주인사, 소수민족, 해외화교 등 23개 단위의 대표 134명이 참가했는데 소수민족대표로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조직조례”,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할 단위 및 대표인원수에 대한 규정” 등 문건을 채택했다. 9월 17일, 신정치협상회의준비위원회 제2차회의가 소집되였는데 회의에서 정치협상회의조직법초안, 공동강령초안, 정부조직초안 등이 기본적으로 채택되였다. 이 회의에서 신정치협상회의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라고 고쳤다. 주은래는 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열리기전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대한 몇가지 문제”라는 보고를 하였다. 보고에서 주은래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한족이 4억 이상으로 그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몽골족, 회족, 장족, 위글족, 묘족, 이족, 조선족, 고산족 등 소수민족은 전국인구의 10%도 안된다. 물론 인구의 다소를 막론하고 다 평등하다, 우선 한족은 다른 민족의 종교, 언어, 풍속, 습관을 존중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자치를 목표로 하는가, 아니면 자치범위를 초월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 민족정책의 한낱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우리는 민족자치를 주장한다. ...우리는 련방을 실시하지 않지만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여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하도록 한다.”고 강력히 지적했다. 1949년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에는 각 당파, 인민단체, 각계, 각 민족 대표 662명이 참가했다. 조선족을 대표하여 주덕해가 이 회의에 참가했다. 9월 29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 채택되였다. 공동강령에는 “각 소수민족의 집거지구에서는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바 민족집거구에서의 인구의 다소와 구역의 대소에 따라 각각 민족자치기관을 건립한다”고 명확히 규정되여 있었다. 공동강령을 토론할 때 주덕해는 중국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다고 표시하였다. 주덕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은 과거에 독립적민족이 아니였기에 쏘련의 민족문제와는 그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다고 천명했다. 회의기간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현상황을 소개함과 동시에 장래 민족문제에서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하여서도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민족간부를 양성할 문제, 민족지구의 민족관계문제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주덕해는 또 연변은 력사적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떤 지방의 한족(漢族)의 교육은 뒤떨어지고있으므로 소수민족도 한족(漢族)을 도와주어야 할 문제가 나선다고 제기하였다. 주덕해는 또 각 민족의 발전과 단결문제도 언급하였다. 각 민족이 단결하여야만 경제상에서도 공동히 발전하게 될것이며 경제가 발전되면 국가건설에 대하여서도 공헌이 클수 있다고 하였다. 회의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거하였으며 모택동이 초안을 작성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선언”을 일치하게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나라의 명칭, 수도, 국기, 국장, 국가(國歌) 등도 결정하였다. 이러한 국가대사를 토론할적마다 주덕해는 조선민족인민을 대표하여 자신의 민주권리를 충분하게 행사하였다. (계속)  
91    제91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 3 댓글:  조회:2058  추천:0  2015-05-19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당의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1주년에 모주석 모시고 북경서 공연 도서간행물출판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이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밑에서 해방되였다.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유구한 력사를 가진 조선족중의 많은 선진인물과 지식인들은 해방을 맞은 그날부터 신문을 창간하고 출판물을 간행하여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중국공산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였다. 1945년 11월, “길동활혈문헌사”에서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1946년에 들어서서는 연변등사사, 조선의용군 제5지대 정치부, 룡정청년회, 도문중쏘문화협회 출판부, 연변사범학교, 길림성 조선인민주련맹, 연변문화사, 청구재출판사, 연변출판사, 길동출판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쏘련집단농장의 이야기”, “쏘베트공청의 생활” 등 과 같은 세계의 첫 사회주의국가를 소개하는 도서와 “공산주의원리”, “가치 가격과 리윤”,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등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도서 그리고 “팔로군”, “국민당과 공산당”, “련합정부를 론함”등과 같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소개하는 도서들을 출판하였다. 1947년 3월, 전문편집출판기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였으나 출판사는 조선족중소학교 교과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구였기에 화룡중쏘문화협회, 연길중쏘우호협회, 룡정중학교 생산합작출판부, 룡정인민학원 인쇄부, 청년문고출판사, 연길시한글학회, 왕청인민민주대동맹, 소식보사, 시사순보사, 길동군구정치부 인쇄공장, 민주출판사, 대중출판사, 인민일보사, 길림일보사, 연변일보사, 동북조선인민보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계속 일반도서를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된 서적들로는 “사회주의발전사”, “새 인생관”, “사회과학개론”, “공상으로부터 과학에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공산당선언”, “중국공산당간사”, “삼풍”, “사상지남”, “대중철학”, “쏘련공산당력사 간략독본”, “쓰딸린략전”과 같은 사회과학서적과 “대중가요집”, “현대소설의 구성”, “태풍”, “북륙의 서정”과 같은 문예서적들 그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조선어문법”과 같은 어학서적들이 있었다. 1945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 연변에서 조선말도서를 무려 173종을 출판하였다. 동북조선인민보사는 일반도서를 전문 출판하는 편집기구인 출판과와 인쇄기구인 동북조선인민보 제2인쇄공장, 도서발행기구인 동북조선인민서점을 가지고 있다. 잡지출판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1945년말, 연길시청년회에서 월간잡지 “이스크라”를 간행하였고 뒤이어 또 번역문을 주로 싣는 종합성간행물 “신건설”을 출판하였다. 1947년에는 길림성조선인민주련맹에서 대형종합잡지 “민주”를 간행하였고 1948년에 토지개혁이 일단락 끝난 뒤 대중잡지사에서 월간잡지 “대중”을 간행하였다. 1949년에는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 선후하여 종합잡지 “문화”, 농민잡지 “농민의 기쁨”, 소년잡지 “소년아동”을 간행하였고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교육잡지“교육통신”을 간행하였다. 종합잡지 “문화”는 일정한 편폭으로 문학작품을 실었는데 이 잡지의 주요책임자는 리성휘이며 후에 리홍규가 주필을 맡았다. 이 잡지는 지금의 “연변문학”의 전신이다. 연변교육출판사 창립 1948년 2월 8일부터 12일까지 길림성교육청 청장 려량의 사회하에 연길시1중에서 길림성해방구중한교육회가 열리였다. 뒤이어 2월 13일, 리호원, 박근식, 황범식, 박재한, 로승균, 강근모 등의 발기로 조선족중학교의 대표 20여명이 연길시2중에 모여 조선문교재편찬문제를 둘러싸고 좌담하였다. 이 모임에서 길림성 민주련맹 책임자 량환준에게 교육출판사 창립준비사업을 위임하였다. 단시간의 준비를 거쳐 1947년 3월 24일, 전국에서 첫 번째 민족출판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출판사의 취지를 “동북조선족의 문화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문 교재, 잡지와 기타 도서를 출판하는것”이였다. 연변교육출판사는 초기에 길림성교육청의 지도를 받았고 출판사내에 관리위원회를 두었는데 량환준이 총책임을 맡고 안변기가 경리를 맡았다. 교과서는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2중 교원들이 보수도 없이 편찬하였고 인쇄는 연길, 룡정, 도문, 왕청 등지의 작은 인쇄소에 맡겼으며 자금은 여러 학교로부터 1263만원(동북화페)의 류통권을 얻었고 그후 1948년에 길림성교육청으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물가가 날마다 올라가는바람에 초봄에 받은 교과서예약금으로 종이를 사서 교과서를 출파하고나면 적지 않은 결손을 보는 문제가 나타났다. 교과서주문부수가 늘어날수록 결손이 그만큼 증가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연변전원공서의 동의를 얻고 학부모들에게 예약금 대신 예약미를 받기로 하였다. 그후부터 조선족이 살고있는 부근의 기차역마다에는 교육출판사로 보내오는 쌀이 산더미를 이루게 되었다. 이 쌀로 종이공장과 종이를 바꿀 타산이였기에 교육출판사지도부에서는 연변전원공서를 거쳐 동북국 선전부에 가 정황을 회보한후 소개신을 석현종이공장에 떼줄 것을 요구하였다. 석현종이공장에서는 쌀보다 광목을 수요된다고 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동북림시행정위원회상업국을 찾아가 쌀만큼 광목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 광목으로 종이문제를 해결했으며 그해 동북페 160여억원을 수입을 얻어 재정토대를 닦아놓았다. 1948년 7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출판사종업원대회에서 연변전원공서 문교과장이였던 량정봉을 연변교육출판사 겸임주임으로, 량환준을 실무부주임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1948년 4월 1일부터 1년사이에 편집출판인원이 60여명으로 늘어났다. 1948년 6월부터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자기의 직속인쇄공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서점을 넘겨받고 발행사업을 하게 되었다. 하여 출판, 인쇄, 발행 등 부문을 초보적으로 갖춘 기업체로 되었으며 1947년말부터는 종업원이 162명에 달하는 지방국영단위로 되었다. 사내에는 사부, 편집부, 경리부(서점 포함), 공무부를 두고있었다. 1947년에는 학교교원을 조직하여 소학교와 초중의 한글, 정치상식, 력사(조선력사) 교과서를 편찬출판하였는데 그쳤으나 1948년부터는 소학교의 산수, 자연, 지리(조선지리, 동북지리) 교과서를 더 편찬출판하였으며 1949년에는 초중의 중어, 대수, 기하, 물리, 화학, 식물, 동물, 생리, 광물 교과서까지 편찬출판하여 조선족소학교와 초중 각 과목의 교과서를 거의 다 편찬출판하였으며 7개 과목의 고중교과서도 편찬출판하였다. 이런 교과서들은 1948년부터 동북 각 해방구 조선족중학교에 공급되였다. 연변가무단 창립 연변가무단의 전신은 1944년 6월 진찰기변구에서 건립된 화북조선의용군과 정치간부학교구락부다. 이 구락부를 1945년초에 조선의용군화북지대 선전대라고 이름을 고쳤다. 1945년 가을, 료녕성 대석교에서 부대를 재편성할 때 선전대의 골간들을 제5지대 선전대에 편입시켰다. 1946년 8월, 제5지대 선전대는 지방의 “이스크라”극단, 룡정예술단의 부분적배우들과 합병하여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대라고 하였으며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온 길림군구 선전대(한족)와 합하여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로 편성되였다. 1947년 2월,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는 룡정에서 안도의 “5.1”선전대와 합병하여 길동군분구 정치부 선전대라고 하였다. 1947년 12월, 선전대는 연변전원공서로 넘어와 단기간의 준비사업을 거쳐 1948년 3월 16일, 연변지구 전원공서 민족사무처 문공단을 건립하고 연변문공단이라고 략칭하였다. 1949년 2월, 흑룡강성 할빈동북민족사무처문공단의 부분적배우들을 받아들인후 연변문예공작단이라고 하였고 1950년 1월, 정식 연변가무단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때 인원은 97명이였다. 연변가무단은 몇 명의 한족을 제외하고는 거의다 조선족으로 구성되였다. 연변가무단은 건립초기에는 경기병이 되어 연변지구에서 선전활동을 벌렸으며 1950년, 국경 1주년에는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공연하여 모주석과 당중앙 지도자들의 절찬을 받기고 했다. 모주석은 연변가무단을 비롯한 소수민족예술인들의 공연을 보고 유명한 완계사 “류아자선생에게 회답함”이란 사를 짓기도 했다. 음악창작에서는 해방직후 허세록, 박우, 동희철 등 작곡가들이 “새 아리랑”, “베짜기노런, “주구청산기” 등 대중적가요를 창작하였고 1947년에 연변교육출판사에서 38수를 묶어 처음 “대중가요집”을 출판했다. 건국후 “중화인민공화국경축의 노런, “대생산의 노런 등을 창작공연하였고 1950년 건국 1주년에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선보인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섰다”, “새 아리랑”, “베짜기노런 등은 중앙지도자들이 관람하였고 또한 중앙신문영화촬영소에서 기록영화로 찍어 전국에 방송하였다. 저명한 작곡가 허세록은 40여년동안 “베짜기노런, “고향생각” 등 150여수의 가곡에 30여부의 기악곡을 창작한 음악가로서 특히 대중가요창작에 성과가 크다. 김성민은 연변가무단에서 배우, 작곡, 부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40여년동안 400여수이 가곡, 무용곡, 기악곡을 창작하였다. 그는 민족적감정이 짙은 조선족신민가의 창작에 정력을 몰부어왔다. 그가 창작한 “자치주창립경축의 노런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관악 “축첩행진곡”은 1947년 허세록이 작곡한것인데 당시 길림성의 관현악대에서는 서로 다투어 연주하였다. 연변가무단에서는 가극, 신창극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차창준, 홍성도 등이 가극 “승리에로 전진”을 창작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우순, 김인해가 2막 2장의 가극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를 창작하였다. 1951년부터 연변가무단에서는 창작일군들을 각 현에 내려보내여 민족민간무용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시작하였다. 가무단에서는 연길현의 민간예술인 양창윤을 요청하여 “농악무”와 “부채춤”을 배웠다. 가무단에서는 민간예술을 발굴하고 수집하여 “농악무”, “승무”, “사모무”, “활춤”, “칼춤” 등 몇십종을 정리하였는데 그중 “농악무”와 “장고춤”이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농악무”는 1951년 8월 15일에 연변중쏘우호협회구락부에서 첫 공연을 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농악무”를 전수한 하태일은 우수배우상을 받았다.
90    제90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2 댓글:  조회:2476  추천:0  2015-03-30
창립초기 연변대학은 사범, 의학, 농학 3개 부가 있었다. 사진은 연변대학 농학부 제1기 학생들. 조선민족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은 자기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에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을 세울 구상을 내놓아 회의참가자들의 일치한 호응을 얻었으며 인차 중공길림성위의 동의를 거쳐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받았다. 연변에 돌아온 림춘추는 연변대학창립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림민호, 김유훈, 박규찬 등과 함께 구체임무를 맡고 밤에 낮을 이어 동분서주하였다. 대학이 창립되기전에 “태아”의 이름을 “동북조선인민대학”이라고 지어두었다가 창립시에는 “연길대학”이라는 “아명”을 달았고 그후 “연변대학”이라고 정식 명명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시 쓰달린극장에서 성대한 개학식이 열리였다. 사회자 최채가 준비위원회를 대표하여 연변대학의 창립을 정중하게 선포하였다. 림춘추는 대회에서 “연변대학의 창립은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나는 체현”이라고 강조하고 나서 “대학의 전체 성원들은 공산당의 지도하에 한결같이 뭉쳐 간고분투의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라”고 호소하였다. 교원과 학생대표들은 한결같이 학교를 제집처럼 잘 꾸리겠다고 굳게 다졌다. 연변 각계 인사와 동북 각지에서 온 래빈들이 자기 가정의 경사처럼 기뻐하며 축사를 드렸다. 그 후 개교기념일을 4월 1일로 정하였다. 드디여 중국조선족최고학부 연변대학은 목청높이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여났다. 오래전부터 연변대학의 창건을 관심하여왔던 길림성정부 주석 주보중은 트럭, 피아노, 주단 등을 보내주었고 연변대학 창설에 가정 큰 공헌을 한 림춘추는 조선으로 나간후에도 늘 잊지 않고 재정면에서 도와주었으며 도서자료를 해결하여주었다. 동북 각지에 있는 조선인들은 구차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물심량면으로 성심성의로 지원하였다. 제1대 교장 주덕해, 부교장 림민호는 조선민족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다. 연변대학의 취지는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학교로 하여금 점차 우리 나라의 조선민족건설인재를 육성하고 조선민족과학문화교육을 발전시키는 기지로 되게 하는것이였다. 창립당시에는 문학부, 리공학부, 의학부와 농업전문을 설치하였으나 1950년에는 원 문학부와 리공학부를 합병하여 사범학원으로, 의학부를 의학원으로 고쳤다. 1956년에 또 통신학부를 증설하였고 1957년에 원 농업전문을 농학원으로 고쳤다. 1958년 7월, 연변대학의 의학원과 농학원은 연변의학원과 연변농학원으로 분립되였다. 연변대학은 원 사범대학원을 기초로 조절하고 출실히 하여 조선인의 중등교육교원, 민족간부, 과학기술인재를 육성하는 종합적인 대학으로 되었다. 창립시기로부터 1958년 7월까지 연변대학은 줄곧 조선인학생만 모집하는 단일적인 민족대학이였으나 변강지구의 한족간부, 교원, 과학기술인재가 부족하고 또 원천이 없는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9년부터 부분적으로 한족과 기타 민족 학생도 모집하였다. 이리하여 연변대학은 조선민족의 건설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중점으로 삼고 기타 민족인재의 육성을 돌보는 여러 민족이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대학으로 되었다. 연변일보 창간 1945년 8월 18일, 연길에서 민영조선문신문 “한민일보”가 창간되였다. 한민일보는 8절지에 2개 면의 일간지였다. 창시인은 광복전 조선의 “매일신문” 간도지시장이였던 최무였다. 그들은 괴뢰만주국 동만신문인쇄소와 연길천주교인쇄소를 합병하여 신문인쇄공장으로 삼고 대유학자로 불리우던 개산툰 서단훈장 한석기를 사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뚜렷한 정치적경향성을 띠고있지 못하고 자연주의적 색채들이 담겨져있었다. 한민일보는 보도에서 일본을 제한외에는 거의다 선전하였다. 이를테면 “한국림시정부 수령 김구씨 귀국전 장개석을 회견” 등 기사를 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이란 무엇인가?”, “맑스주의 자본론입문”, “10월혁명략전” 등 글을 싣고 중, 쏘, 한(조선)의 친선, 감조감식 등 글을 제창하였다. 1945년 11월 5일,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한민일보”를 접수한후 “연변민보”로 개칭, 재조직하여 민주대동맹의 기관지로 만들었다. “연변민보”는 창간호로부터 모택동의 “련합정부를 론합”이라는 글을 련재하면서 신문의 정치경향성을 보여주었다. 신문은 국내외 시사를 보도해주고 정치리론을 풀이해주기도 하였다. 1946년 1월 23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연길에 길동분성위, 길동전원공서, 길동군분구를 두기로 하였다. 하여 “연변민보”는 전원공서의 기관지로 되었다. 연변민보는 연변전원공서의 창립을 경축하여 “호외”를 내놓았고 1946년 4월 24일에는 동북에서의 쏘련붉은군대의 철퇴를 위하여 붉은 색으로 칠한 “붉은군대환송”특집을 내놓았다. 1946년 5월 1일, 길동군구 정치부에서 “연변민보”를 접수하여 “길돈일보”(조선문판)로 개칭, 길동군부구 정치부기관지로 만들고 유명선을 주필로 임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신문은 신화통신을 싣기 시작하고 국민당을 질책하는 여론을 일으켰다. 1946년 9월, 중공길림성위기관이 연길로 옮겨옴에 따라 “길동일보”는 성당위의 기관지 “인민일보”와 합병되고 “인민일보”(조선문판)로 개칭되였다. 하여 길림성당위는 조한문기관지를 두게 되었다. “인민일보”(1947년 3월10일 “길림일보”로 개칭됨) 사장은 소림, 부사장은 손평, 주필은 장흔이였으며 부주필로는 석과, 림민호, 김평 등이였다. 림민호와 김평은 부사장을 겸하고 조선문판을 주관하였다. “인민일보”(조선문판)는 민족성을 많이 띠고 조선반도에 대한 보도비중을 늘였다. 1946년 9월 9일은 “훈민정음”발표 500돐 기념일이였다. 연길에서 개최된 이 기념행사를 길림성민주련맹에서 주최하고 “인민일보”(조선문판)에서 후원하였다. 이 기념행사보도에서 기자는 “정음반포 5세기동안 봉건통치계급의 한글천시와 일제의 잔혹한 문화유린으로 하여 조선사람이면서도 저마다 제 말과 글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제말과 글을 찾게 된 이 기쁨 조선 겨레치고 그 누구에겐들 없으랴!”고 토로하기도 했다. 또 전선에서 보내온 자료로 “장관구(蔣管區)에서 울고 있는 조선민족동포”란 글을 련재함에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 3월 11일, 길림이 해방되자 성당위기관은 길림으로 옮겨갔다. 하여 연길에는 중공연변지위가 또다시 건립되였다. 연변지위는 4월 1일, 지위기관지 “연변일보”를 창간하기로 하였는데 그 편집원과 인쇄설비 및 인쇄공은 기본적으로 원 성당위기관지 “길림일보”(조선문판)의 설비와 인원들이였다. 중공연변지위 선전부장 최채가 사장을 겸임하고 석과가 부사장을 맡았다. 주필은 “길림일보”때 부주필이였던 림만호가 맡았다. “연변일보”는 공산당의 주장과 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해방전쟁정세를 선전하며 연변 각지 인민들의 투쟁정황을 반영함으로써 공산당의 중요한 여론도구로 되었다. 신문사는 군사화하였다. 전방에서 하기공세와 추기공세가 발동되면 신문사도 거기에 발맞추어 립공운동을 벌리면서 신문간행을 다그쳤다. 편집, 기자와 인쇄공들은 “분초를 다투어가며 신문을 내놓는 것이 곧 국민당반동파의 가슴팍에 총칼을 찌르는 것이다”, “일체는 전선의 승리를 위하여!”란 구호를 내걸고 일하였다. 기자들은 이불짐을 메고 수십리길을 도보로 취재하러 다녔고 편집들은 합숙에서 쪽잠을 자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평판기를 돌리다가도 정전만 되면 기계바퀴에 바줄을 매고 인력으로 돌리면서 신문인쇄만은 절대적으로 보장하였다. 중요한 전파를 알리는 신화사전문이 급작스레 들어오면 인쇄에 교부했던 판면일지라도 새로 판을 조절하여 새 기사를 바꾸어넣어야 하였다. 이렇게 매일이다 싶이 신문판면을 뜯어고치며 밤과 낮이 따로없이 신고스레 일해도 낯을 찡그리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당시 연변일보의 발행부수는 8000여부에 달하였다. 1949년 4월 1일, 중공중앙 동북국의 비준을 거쳐 “연변일보”, 북만(할빈)의 “민주일보”, 남만(통화)의 “단결일보”등 세 개의 조선문신문을 합병하여 “동북조선인민보”로 개칭, 연길에서 발간식을 하였다. 신문은 중공연변지위의 기관지였지만 전 동북경내의 조선인을 독자대상으로 삼았다. 사장은 최채였고, 부사장은 리욱성이였다. 할빈에서 온 김동구와 통화에서 온 백남표가 주필, 부주필을 맡았다.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는 남만과 북만에 주재기자를 파견하고 조선인집거구에 자체의 통신보도망을 두었다. 신문은 자기의 사설에서 종합성, 민족성, 지방성, 대중성을 신문의 특성으로 한다고 하였다. 신문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조선문신문이였다. 3개 신문사일군들이 한곳에 모이니 종업원총수는 177명, 그 가운데는 편집과 기자들이 84명이였다. 신문발행부수는 1만5400부에 달하였다. 그후 “동북조선인민보”는 또 “연변일보”로 개칭되였다. 연변인민방송국 창설 연변의 방송사업은 비교적 일찍 발전하였다. 1937년 4월, 괴뢰만주국은 연길에 방송국을 세웠다. 이 방송국은 1945년 해방될 때 쏘련홍군과 당지인민들의 보호가 있었기에 비교적 원상태를 보전하고있었다. 1946년 8월 17일, 중공길림성위와 길림성정부가 연길에 옮겨오면서 이 방송국을 회복시키고 성당위에서 직접 령도하였다. 방송국명칭은 “연길신화방송국”이였다. 이 방송국은 “연안신화방송국” 후에 해방구에 비교적 일찍 세워진 방송국의 하나였다. 방송국은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과 배합하여 방송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는데 대내로는 전력을 다하여 전선을 지원하도록 민중들을 동원고무하였고 대외로는 적을 폭로하고 와해시키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8년 3월 10일,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가 길림시로 옮겨간후 연길신화방국을 기초로 하여 11일 1일, 연길인민방송국이 세워졌다. 연변지위 선전부 부장 최채가 국장을 겸임하고 얼마후에는 류수림이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은 중앙방송국 전국중계종목 외의 6시간을 완전히 조선어로 시사종목과 지방종목을 방송하였다. 송신공률은 1킬로와트였는데 모든 록음, 중음, 송신 등 방송설비는 일제가 남기고 간것들이였다. 청취범위는 연길, 룡정, 도문 일대였다. 방송국에는 편집조, 방송조, 기무조 등 세 개의 정식기구가 있는 외에 전문일군 1명이 서무를 맡아보았다. 방송국 전체 종업원은 15~20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조선말방송은 중국에서의 우리 겨레의 유일한 조선말방송이였으며 중국에서 유일한 소수민족방송이였다. 연길인민방송국의 사업방침은 “지방성, 민족성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조선민족을 주요대상으로 하여 여러 계층을 돌보는것”이였다. 그러다가 1951년 4월 연길인민방송국을 “연변인민방송국”으로 고쳤다. 연변인민방송국은 상기의 사업방침의 지도하에 5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뉴스”, “지방소식”, “시사해설”, “음악방송”, “소설련속랑독” 등 방송종목을 이어왔으며 대상성방송종목들로는 “종업원방송”, “청년학생방송”, “부녀방송”, “소년아동방송”같은것이였다. 초창기이지만 방송프로가 비교적 소박하면서도 다양하게 꾸려졌었다. 또한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발맞추어 여러차례의 전역성보도를 조직함으로써 방송의 위력을 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민족인민들에게 계속 줄기차게 혁명하며 끝까지 혁명하여야 한다는 사상의식을 부어넣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나라에서 국내해방전쟁이 계속되던 나날에 나어린 연변인민방송국은 장강남북에서 벌어지고있는 전쟁형세와 중국인민해방군의 승리의 소식을 제때에 널리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동시에 전선지원소식도 제때에 보도하여 연변청중들의 전선지원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연변인민방송국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하게 선포하는 실황을 실패없이 중계하여 연변청중들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게 하였고 개국축전의 성대한 실황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계속)  
89    제89장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1 댓글:  조회:2325  추천:1  2015-03-01
  \ 광복을 맞아 새 학교에 등교하는 연길시의 조선족학생들. 낡은 교육제도 개혁 민족언어문자로 교수 중국조선민족의 최고학부 연변대학 창설 “8.15”해방은 연변조선민족앞에 일제침략자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말과 글로써 교육을 발전시킬 광활한 전망을 펼쳐주었다. 예로부터 자식공부를 위해서는 소까지 팔아 뒤를 대준다는 우리 민족이였다. 일제에게 글과 말을 빼앗기고 황민교육을 접수하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민족의 지성인들은 얼마나 가슴치며 통탄했던가. 그러나 이젠 글과 말을 되찾게 되였다. 민족의 유지인사들은 인차 손을 쓰기 시작했다. 유지인사들의 노력과 알선으로 교원들을 모셔오고 교사를 마련하여 소학교, 중학교를 세웠다. 이런 거동은 타성적이며 자발적인 상태에 머물러있었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만은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1946년9월,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은 전개할데 관한 지시”에서 동북해방구 교육사업의 총적인 방침은 “일제강점시기의 노예교육과 장개석의 봉건적, 파쑈적 교육의 여독과 영향을 일층 숙청하며 민족적이고 민주적이며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신민주주의교육을 확립하여 교육으로 하여금 신민주주의 정치적투쟁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하며 동북인민들의 평화민주건설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동북지구에서의 우리민족 교육사업의 방향을 명시하였다. 그후 동북정무위원회에서는 건국전야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동북해방구교육사업회의를 소집했고 “사립학교잠정방법”, ”중등교육에 대한 지시” 등 문건을 발부하였다. 하여 우리 민족의 교육사업은 생기있고 건전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민족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 확립 1945년 9월, 최문호, 김유훈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연길에서 결성되였다. 이들은 일제시기에 학교를 접수하고 원래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초빙하여 연길시사법학교, 연길중학교, 공업학교, 광성중학교, 고려녀자중학교와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룡정에서는 장남섭, 주채와, 림룡호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조직되였는데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영신중학교, 은진중학교, 근화녀자중학교, 명신녀자중학교 등 중학교 및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도문에서는 심인갑, 강상락 등 지식인들이 주최하는 “교육조사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은 괴뢰만주시기의 학교를 접수하고 중소학교를 운영하였다. 조양천에서도 민주대동맹이 주최하는 “교육후원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중소학교가 운영되였다. 해방전쟁시기의 해방구교육은 신민주주의 교육으로서 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를 위하여 복무하였으며 해방전쟁과 해방구경제건설이 수요하는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인민군중의 계급각성과 문화수준을 제고하는것을 자체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부교육은 군중교육보다 더 중요하며 성인교육은 아동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중등교육의 비중은 마땅히 사범교육을 제1위에 놓고 직업교육을 제2위에 놓으며 보통중학교 교육을 그 다음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학교운영방침을 제기하여 여러 류형의 간부학교와 단기강습반을 많이 운영하였다. 이것은 해방전쟁, 토지개혁, 정권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간부를 많이 양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정책이였다. 해방전쟁시기에 물력, 인력의 제한으로 정부에서는 많은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할수 없어 “인민들이 동원되여 자체로 학교를 운영하며 정부에서 방조”하는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학교교육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확한 시책이였다. 그리고 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의 실제적인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학제, 과정 및 운영방법에서 여러가지 형식을 취하였다. 해방후 조선민족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과 권리를 가지게 되였다. 이에 따라 연변에서는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것은 민족언어문자사용에서의 평등을 보장하는 공산당의 정책이 학교교육에서의 구현으로서 조선민족의 문화교육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여주었다. 1945년 11월 1일, 간도림시정부에서는 일제강점시기의 간도사범학교를 접수하고 개조하여 연길사범학교로 고쳤다. 1946년 8월 26일, 길림성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사범학교는 길림성민주학원 교육학부로 되였다가 1948년 3월 급속히 발전하는 학교교육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연변고급사범학교로 고쳐졌다. 이 학교에는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고급사범학급이 설치되여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창건전까지 1230면(중학교 교원 330여명, 소학교 교원 900명)에 달하는 교원을 양성하여 자기 민족 교원대오를 형성시켜주었다.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 학교의 학생성분도 큰 변화가 생겼는바 80%이상 학생이 로동자, 농민 가정출신이였는데 사범학교 학생과 농민간부반의 학생은 국가의 경비로 학습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빈부의 차이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육불평등의 력사를 종말짓기 되였다. 반면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노예사상, 봉건사상, 전통적관념은 신민주주의교육의 발전을 엄중히 저애하고있었다. 하여 당과 정부에서는 그들의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하고 로농병과 결합하고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도록 이끌어주었다. 한편 학생들에게도 정치사상교양을 적극 진행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7월까지 연변지구에서는 중학교지도일군과 골간교원강습반을 설치하고 “신민주주의론”, “형세와 임무”, “중국근대사”,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 “로해방구교육”,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 등의 모택동저작과 교육문건을 학습하면서 사상개조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번 운동을 통하여 교원들은 정치인식을 통일하고 토지개혁을 옹호하며 로농병속에 들어가 로농병을 위해 복무한다는 사상과 관점을 수립하게 되였다. 1946년 9월, 중소학교교과서를 편집하고 심사하는 연변교육연구회가 결성되였다. 10월 13일에는 연길시 각 문학단체대표 40여명이 모여 “연길한글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1월 26일에는 “연길조선문교재편집위원회”가 창립되였는데 주임에 리호원, 부주임에 림민호가 당선되였다. 1947년 3월 드디여 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조선문교과서를 정식 출판할수있게 되였다. 해방초기에 교과서는 연변 각 학교에서 자체로 편찬하다보니 통일된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토지개혁과 계급투쟁을 반영한 글들을 많이 선택한 교과서가 처음으로 출판되자 각 학교에서는 그것을 통일적인 교과서로 사용하였으며 조선의 박상중이 쓴 초급중학교용 “조선어문법”을 보충교과서로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소학교의 한글, 상식, 산수, 자연 등 교과서와 중학교의 한글교과서가 출판되였다. 이해에 50만책의 교과서를 출판하여 남만을 제외한 전 동북 조선인 중소학교에 공급하였다. 1948년 6월 12일, 길림성교육청에서는 학교교육에서 문화지식과목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는 방침을 제기하였다. 고급인재 양성 위해 1949년 4월 1일에 창립된 연변대학. 연변에 공립중학교가 9개소, 민영중학교가 19개소(그중 고중학급을 설립한 학교가 3개소, 고중을 증설한 학교가 2개소)가 있었는데 교원은 409명, 학생은 1만813명이나 되였다. 학생들의 사상의식은 뚜렷이 높았으나 문화지식수준은 매우 낮았다. 하여 학생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육을 강화하면서 문화지식전수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업을 제기하엿다. 학교들에서는 이 과업을 실현하기 새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동북국에서 배치한 일반중학교의 각 과목이 차지하는 비례는 문화지식과목 90%, 정치과목 10%, 사범학교는 문화지식과목 70~75%, 정치과목 10%, 실무과목 15~20%였다. 학과목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처음으로 통일적인 요구를 제기한것이였다. 조선인중학생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는것이 또 하나의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1948년 3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의 소학생은 도합 18만 7236명이였고 졸업생은 3638명이였으며 다음해에는 졸업생이 5645명으로 늘어나게 될 형편이였다. 그러나 연변적으로 고중생을 400명좌우 밖에 모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1950년 3월, 룡정에 연변고급중학교를 설립하고 각 현 중학교의 고중학급을 연변고급중학교에 귀속시켰다. 연변의 749개 농촌마을에 13만 700여호 농가가 있었는데 매개 마을에 중학생이 평균 15명있었다. 이것은 매12호에 1명 중학생이 있은셈이다. 연변 80만 인구가운데서 학생이 1.4%를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시기에 비하면 학교는 150개소, 학급은 660개, 학생은 1만500명, 교원과 직원은 761명이 더 늘어났다. 길림성에 중학교가 도합 41개소가 있었는데 연변에 26개소가 있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 앞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부문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되는 전문인재, 고급인재들을 양성하여야 할 력사적과업이 나섰다. 1945년 9월, 룡정에 룡정의과대학이 창립되엿고 1945년말에는 길동군정대학이 창설되였다.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길림성립민주학원이 건립되였고 1948년 4월에는 연변정치간부학교가 건립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에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첫 소수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창립되였다.(계속)
88    제88장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댓글:  조회:2503  추천:0  2015-02-10
         리옥금 국빈회에서 "도라지" 부르고 김시룡 세전벌서 "호조조" 성공시켜 리옥금과 "품앗이조" 토지개혁이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조선족농민들은 당과 인민정부의 호소를 적극 받들고 호조합작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렬사가족, 군인가족들이 농업전선에서 앞장서 나섰다. 혁명렬사가족 리옥금이 조직한 품앗이조와 호조조가 그 일례라고 할수 있다. 리옥금은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태생(1922)이다. 8살때부터 지주집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 리옥금은 15살 때 조선 함경북도 덕산지역에서 오빠를 도와 유격대에 정보를 나르고 밥도 지어날랐다. 그러던 어느날 큰할아버지의 밀고로 탄로가 나 더는 유격대를 도와 일할수 없게 되자 조선을 떠나 연길현 조양천 태평구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왔다. 그후 얼마 안되여 리옥금은 림지룡에게 시집을 갔다. 1942년 ?졈鳧?연길시 흥안향 소대려촌에 이사해왔다. 1945년 9월, 리옥금은 농회부주임으로 되었다. 남편을 입대시킨 리옥금은 어린 시동생, 시누이 넷을 보살피면서 가사와 농사일, 사회사업에 바삐 보냈다. 리옥금의 모범적행동에 영향을 받아온 마을의 청장년중 80%가 참군하였다. 끌끌한 남자들이 다 참군하다보니 늙은이와 어린이들밖에 남지 않아 이듬해 밭갈이를 할 사람이 적었다. 그때 리옥금은 호리를 세 번이나 마스면서도 끝내 밭갈이재간을 익혔고 자기 집은 논 3무 2푼을 갈아번진외에 십여호 군인가족녀성들을 조직하여 품앗이조를 무어 밭을 갈아번지였다. 연변에서는 “호조합작”문제를 비교적 일찍 제기하였다. 1946년 2월중순,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이였던 동곤일은 각 현의 현장, 건설과장 회의를 열고 “연변농업생산의 총화”라는 보고를 통하여 “호조조”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보고에서 생산호조조를 통하여 소농경제의 약점을 극복할수 있으므로 그 조직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자원적결합”과 “등가교환”의 원칙을 잘 관철한다면 그렇게 어려운것도 아니라고 제기했다. 조선족들은 과거 공동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두레”를 무은적이 있었다. 이런 옛 생산형식은 “호조조”를 꾸리기 위한 좋은 바탕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리옥금은 품앗이조를 무어 일하던데로부터 앞장서 호조조를 조직해 그해 농사를 녀성의 힘으로 지었고 잘 여문 낟알을 나라에 바쳐 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표창을 받았다. 1947년 리옥금은 생산, 전선지원렬사가족모범으로 선거되여 길림성로력모범회의에 참가하였고 1948년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옥금이 조직한 호조조의 영향을 받고 전현의 호조조도 매우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1948년 10월, 지구로력모범대회에서 리옥금은 암소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그해 겨울 리옥금은 영광스럽게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월에는 아세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때를 리옥금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조선족을 대표하여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당중앙은 서백파에서 북경으로 오고있는중이였지요. 저는 영광스럽게 모주석의 마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멎자 중앙지도자 8명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주석께서도 내리시였지요. 어찌나 격동되였는지 감히 주석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석께서 저의 앞을 지나간후에야 뒤모습을 보았는데 팔각모자를 쓰셨더군요. 그렇게 웅장하셨습니다. 제가 회의에 올 때 동네분들이 환송하며 모주석의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하던 부탁이 떠오르자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날 저녁 북경에 돌아온후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모주석을 다 뵈였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틀이 지난후 전체회의가 시작되였는데 저는 주석단성원으로 되었지요. 회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주석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주석께서는 회의장에 오시여 저의 앞줄 오른켠에 앉아계셨지요. 당시 그이의 뒤모습만 봤을뿐입니다. 후에 만찬회가 있었는데 주석께서 또 오시였지요. 저는 모주석과 한좌석에 배치되였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모주석의 얼굴을 보았으며 격동된 나머지 그이의 허리를 꼭 그러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오락회가 시작되였지요. 주석께서는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는것이였지요. 제가 금방 배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자 주석께서는 저를 보고 ‘도라지’를 부르라는것이였습니다. 뒤이어 저는 노래도 부르고 조선춤도 추었습니다.(서봉학, 리광수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에서) 1949년부터 각급 당조직에서는 호조합작운동을 당의 중심사업으로 삼고 “생산대에 참가하여 생산을 지도”할 것을 전체 당원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자원적이며 쌍방이 다 리로와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해 봄에 연변지구에는 2만 3799개 호조조가 조직되였는데 80%의 로력과 축력이 호조조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매기철에 먼저 매고 후에 매는 모순 때문에 53%를 차지하는 1만 2593개 호조조가 무너졌다. 년말까지 남아있는 년간호조조가 1만 490개로서 32%를 차지했다. 실패한 영성촌의 "대형호조조" “호조조”를 조직하라는 소식은 세전이벌에 자리잡고있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에도 전하여왔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두서넛집씩 모여 소겨리조, 품앗이조 등 계절호조조를 조직하여 농사를 지었다. 영성촌에서 “호조조”를 정식으로 꾸린 것은 1947년 여름이였다. 그때 이곳에서는 토지를 분여하면서 전 마을을 한데 합하여 한 개 “호조조”를 무었다. 호조합작의 경험이 없는 형편에서 대번에 큰 조를 뭇고보니 모순이 련속부절하게 나타났다. 로력랑비가 많았고 아무 때나 일밭으로 나가기만 하면 한 개 공씩 적어넣었다. 뿐만아니라 로력공수평가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되여 생산적극성이 영향을 주었으며 생산력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되었다. 게다가 토지개혁의 대중적운동의 거센 조류속에서 조직하다보니 적지 않은 농민들이 “호조조”에 들지 않으면 법을 위반하는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비판이거나 투쟁을 받을가 겁나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해 가을 중농이상 농호 일곱집이 먼저 “호조조”에서 물러나가자 억지로 참가하여던 농민들과 로력, 부림짐승이 넉넉한 집들은 슬금슬금 “호조조”에서 나갔다. 영성에서 처음 조직한 “호조조”는 이렇게 유아무야해지고 말았다. “호조조”가 건립될 때 선참 참가하였던 김시룡은 당의 호소대로 끝까지 합작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으나 “호조조”가 무너지고보니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당은 가난한 농민에게 땅을 주었다. 김시룡은 당의 은혜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생활의 체험에서 당의 말을 들으면 틀림없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는 호조합작을 실시하라는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불바다라도 뛰여들어가려는 심정이였으나 랭혹한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도에 밀린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진 “호조조”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난 김시룡은 그 일로 고민에 빠지기까지 했다. 1948년 봄, “대형호조조”를 강제적으로 조직하여 실패한 경험교훈을 찾고 이번에는 자원호혜의 원칙을 관철하여 “소형호조조”를 조직하였다. 영성에서는 서로 뜻이 맞고 감정이 맞는 농민들이 네댓 혹은 대여섯씩 한 개 조를 무어 전촌을 여섯 개 “호조조”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촌농회의 간부들은 회의가 많아 밭일에 참가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으므로 농민들은 간부들과 함께 조직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자원호혜의 원칙에 좇아 “간부조”라는 특별한 “호조조”를 따로 내왔다. 여섯 개 “호조조”가운데서 갑자기 김장룡호조조가 조원 한사람이 병사하는바람에 로력이 결핍하여 흩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김시룡은 자원적으로 “김장룡호조조”로 넘어갔다. 김시룡은 조장을 도와 “호조조”를 잘 꾸려나갔다. 김시룡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로력이 늘 딸린다던 이 “호조조”는 개체농호보다 1주일 앞당겨 타작을 끝마쳤다. 성공한 "김시룡호조조" 1949년 봄, 영성의 여섯 개 소형호조조는 또 다시 대형호조조로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감농군이고 살림꾼이며 진국인 김시룡을 조장으로 선거하였다. 큰살림을 한몸에 떠멘 김시룡은 조원들의 앞장에 서서 밭일에 참가하였으며 제일 일찍 밭에 나갔다가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김시룡은 경영관리사업에 힘을 기울여 존재한 모순을 찾았다. 군중들은 시끄러운 밭머리평공, 비오기전후의 김매기, 후치질에서의 로동차이, 로동강도, 불합리한 등가교환 등 18가지 모순을 폭로하였다. 이에 김시룡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책을 창조적으로 제기하였다. 우선 표준공을 정하였다. 토질이 좋은가 나쁜가, 어떤 곡식을 심는가, 마을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등을 고려하여 조원들의 민주적인 평의를 거쳐 봄부터 가을까지 소요되는 총공수를 정하였는데 이것을 표준공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한 현상이 시정될수 있었다. 다음 합작자금을 설치하였다. 담배농사, 양기르기 등 비교적 많은 로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농업과 부업은 개인으로 경영하기 힘들었다. “호조조”에는 로력은 남아있으나 자금이 없었다. 이런 실정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부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조원들에게서 받아들인 자금을 합작자금이라고 하였다. 분배때에는 합작자금 역시 로력과 같은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조원들의 숙련정도, 신체상황, 같지 않은 로동에 따라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세전이벌은 본디 땅이 기름졌다. 그런데 해방전에는 지주의 착취로 말미암아 땅을 잘 가꾸지 않아 한전의 평균수확고는 겨우 쌍당 1000킬로그람좌우였고 수전은 2150킬로그람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김시룡호조조”는 가난한 조선족농민 23세대로 조직되였는데 총인구 117명 가운데서 남자로력 20명, 녀성로동력 26명이였다. 가축으로는 소 16마리에 소수레 12대였으며 그 외에 말 한 마리와 노새 한 마리는 호조조의 연자방아간에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지는 한전 26헥타르 6무 5푼, 수전 13헥타르 9무 6푼인데 합치면 40헥타르 6무 1푼이였다. 그러니 인당 3무 3푼 돌아가는셈이였다. 기시룡은 춘경때 남아돌아가는 로동력을 조직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전 1쌍과 수전 8무를 확대하였다. 하지만 농토는 적고 로력과 축력이 남아돌아가는 모순을 의연히 해결되지 않았다. 김시룡은 세심히 따져보았다. 아무리 심경세작하더라도 한 개 로력이 한전 2.5헥타르거나 혹은 수전 1.5헥타르를 다룰수 있으니 수, 한전을 평균 잡으면 한로력이 2헥타르를 다룰수 있다. 그렇다면 40헥타르의 땅을 다루는데 남자로력 20명이면 족하다. 한 마리 소로 평균 3.5헥타르의 땅을 개간할수 있으니 12마리면 넉넉하다. 그러니 소 4마리나 남는셈이다. 남아돌아가는 로력과 축력을 합리하게 리용하여야 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인당 알곡 465킬로그람밖에 안돌아간다. 이것으로 공량을 20%로 바치고 식량, 종자, 사료를 남겨놓는다면 의복을 지어입을 돈이 생길 구멍이 없다. 그러니 알곡생산만으로는 살림 펴일수 없었다. 이에 김시룡은 우선 땅을 잘 가꾸었다. 농토의 시비면적을 80%로 증가하고 40%의 밭을 네벌 김매고 네 번 후치였으며 그 외 밭은 세벌 김매고 세 번 후치였다. 하여 헥타르당 수확고를 2612.5킬로그람으로 올려 전해보다 64%로 증산하였으며 개체호보다 헥타르당 105킬로그람 증산하였다. 1헥타르 8무의 개간지에서도 적지 않은 수확고를 높이였으며 1헥타르 1무의 한전을 수전으로 개답하여 수확고를 높이기도 했다. 그밖에 담배농사를 하여 수입을 올렸다. 김시룡은 또 조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여유로력을 조직하여 닭, 오리, 돼지, 양 등을 사양하였으며 여자들을 조직하여 약재를 캐게 하였는데 부업으로 업은 수입은 5만여킬로그람의 식량가치에 해당되였다. 농업과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의식의 해결이 문제없이 되었으며 생활을 일정한 정도로 개선할수 있었다. 김시룡은 공부하지 못하여 일자무식이였으나 늘 목책을 챙겨갖고 다녔는데 목책에 여러 가지 부로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누구나 그 기호를 알아볼수 없었으나 김시룡은 그 목책을 펼쳐보기만 하면 “호조조”의 실정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고있었다. 개체로 경작할 때보다 수입이 증가되니 “호조조”내부에서 동요하던 조원들은 장기타산을 갖게 되었으며 “호조합작”이라면 외면하던 개체호들은 호조조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은 연길현의 계선을 넘어 전 연변에 소개되였다. 경영관리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해산될 위험이 있던 적지 않은 “호조조”들은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을 학습하고 새로운 기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9년, “김시룡호조조”는 연길현로력모범대회에서 1등“모범호조조”로 당선되였다. 1950년, 김시룡은 길림성특등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에 가 국경 첫돌기념모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 쓰딸린의 접견을 받았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1기로부터 제3기에 이르는 기간 줄곧 대표로 당선되였고 또한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김시룡은 1951년에 연변농학원과 손잡고 새벽농업대학을 창설하여 농업로동에 참가하고있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업과학기술을 습득케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첫 초급농업사 1951년 3월,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근거하여 토지출자를 특점으로한 초급농업사를 시험적으로 건립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전국로력모범 김시룡호조조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경험적으로 해보게 하였다. 여러차례의 토론 끝에 22호 조원중 6호는 계속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에 남아있고 부유농민 송병관은 아예 혼자하겠다면서 나가고 15호가 초급농업사에 가입하였다.이것은 연변지구에서 건립된 첫 초급농업사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는 건립한 첫해에 증산하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의 수전 헥타르당 수확고가 3865킬로그람인데 비하여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의 수확고는 3800킬로그람이였고 혼자한 송병관의 수확고는 3234.5킬로그람이였다. 혼자하는 것이 호조조보다 못하고 호조조는 농업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셈이였다. 1952년 1월초, 동북인민정부 판공청 주임 왕광위는 공작조를 데리고와서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조사한후 보고를 썼다. 당시 동북인민정부 주석이던 고강은 이 보고를 비준, 이첩하면서 각급 지도간부들에게 김시룡농업사의 경험을 연구하라고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3성의 성보는 이 보고를 실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농업생산합작사란 이 새사물이 농촌경제생활의 중심으로 되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94개의 초급농업사를 세울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이해 봄에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농업사를 세우는 고조가 일어나 190개의 초급사가 새로 건립되였다. 왕청현에서는 민족련합사도 건립되였다. 농업사가 급격히 증가된 새로운 정세에 비추어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농업생산호조합작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의”(초안)를 진지하게 관철하였다. 특히 이 “결의”에 명사된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온당하게 전진”하는 방침을 진지하게 관철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중견력량, 호조경험, 대중토대 등 조건에 근거하여 농업사를 정돈 공고히 할 것을 제시하였다. 연변지구에는 비준을 거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업사가 60개나 되었다. 현에서 그들더러 호조조로 고치라고 해도 그들은 듣지 않고 그냥 농업사를 꾸려나갔다. 당시 이런 농업사를 “검은 사”라고 하였다. 이런 “검은 사”도 후에는 다 자기궤도에 올라 공고히 되었다.  
87    제87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4 댓글:  조회:3159  추천:0  2014-12-31
해남도전역에 참가하러 떠나는 40군 포병영의 조선인전사들(1950년 4월 16일 뢰주반도에서) 해남도서 대나무배로 미국현대화군함 격퇴 정주서 조선인으로 무어진 독립 15사 편성 조선인포병영 1949년 12월, 광동성과 광서성이 해방되자 대륙은 기본적으로 해방되였다. 광동성과 광서성의 국민당잔여부대는 꼬리빳빳이 해남도로 도망쳐갔다. 장개석은 설악을 해남도방위총사령으로 임명하고 해남도에 19개 보병사, 핸군 제3함대 50여척의 군함, 공군 4개 대대에 30여대의 비행기까지 배치해 “해, 륙, 공 립체방어체계”를 형성, 총병력은 10만명이였다. 국민당군은 매일같이 비행기와 군함으로 연해도시를 포격하였으며 해남도에 있는 경애종대에 대하여 토벌을 감행하면서 해남도는 “깨뜨릴수 없는 성새”라고 떠들어댔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사령부는 제40군과 제43군에 해남도공격을 명령했다. 40군에는 소문난 조선인포병영이 있었는데 이번에 명령을 받고 사단직속포병영으로 재편성되였다. 그들은 몇문의 포를 가지고 료심전역, 평진전역으로부터 조국의 서남 계림과 남녕에 이르기까지 수십차의 전투를 거쳤다. 차츰 전투에서 로획한 “5.7식야포”, “3.8식야포”, “14련식야포” 등 현대화무기로 자신을 장비하면서 300여명의 병력을 가진 영으로 장성하였다. 영장은 김영만이고 교도원은 장범이였다. 이번에 포병영이 맡은 주요한 임무는 목선을 타고 적의 비행기와 군함을 대적하면서 보병을 안전하게 도해(渡海)할수 있도록 호위하는 “항행호위영”역할을 하는것이였다. 부대는 인차 수상훈련에 달라붙었다. 조선인전사들은 연변의 산골에서 살다보니 대부분이 바다를 처음 보았고 헤염칠줄도 몰랐다. 배에 오르기만 하면 배멀미를 하는 등 곤난이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남방의 무더운 날씨 때문에 쩍하면 학질 아니면 리질에 걸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하루도 훈련을 드틸수 없었다. 해뜨기전부터 밤 늦게까지 그네뛰기, 풍랑속에서 노젓기, 다리건너기, 헤염치기 등 훈련에 이악스럽게 달라붙었다. 하여 3개월간의 간고한 훈련을 거쳐 끝내 해상작전을 할수 있는 “해군전사”로 련마되였다. “항행호위영”전사들은 당지의 경험많은 배사공을 스승으로 모시고 참대를 베여다가 배를 뭇고 돛을 달고 포를 설치하였다. 돛 네폭을 달고 자동차발동기를 설치한 대나무배는 전투원 34명이 탈수 있었는데 배에다는 또 산포, “5.7”, “3.8”식야포 각각 한문, 고사기관총 2정, 수압식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3정을 배치했다. 포판은 이불솜을 물에 적셔 감싸놓아 진동되지 않도록 했다. 배에 물이 새여들지 못하게 돌을 가루내여 기름반죽을 해서 틈을 발랐으며 물뽐프는 참대나무로 만들었다. 해상실전련습까지 성공적으로 끝낸 조선인전사들은 자랑스럽게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제1대의 해군”이라고 말하였다. “항행호위영”의 전사들은 나무배로 현대화한 미국제 군함과 싸워 이길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해남도해방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하겠다고 “혈서”를 써서 상급에 맹세하였다. 영용한 “항행호위영” 1950년 4월 16일, 출정을 앞두고 사령부에서는 서문시 앞바다에서 도해부대를 환송하는 대회를 가졌다. 주덕총사령, 제4야전군에서 보내온 축하신 및 뢰주반도인민들로부터 보내온 한폭의 붉은기가 “항행호위영”에 증송되였다. 기발에는 “풍랑을 헤가르며 승리적으로 전진하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영장 김영만은 기발을 받아 제2련 련장 김두만에게 넘겨주었다. 군악대의 주악에 맞추어 자동차에 앉은 “항행호위영” 전사들은 군중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부두에 이르렀다. 500여척의 대나무배에 벌써 한 개 사의 병력이 올라있었고 그들이 탄 배의 좌우 량켠에는 우리 조선인 “항행호위병” 배 12척이 쭉 늘어서있었다. 저녁 6시 30분, 출발을 알리는 신호총이 울리자 배는 종대군악대의 주악과 끊임없는 구호소리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개 사의 병력을 호위하여 거침없이 순풍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는 “항행호위영” 조선인장병들의 마음은 더없이 설레이였다. 약 15킬로메터를 항행했을 때였다. 문뜩 공중에 조명탄이 떠오르더니 해상은 대뜸 대낮처럼 환히 밝아졌다. 이어 앞으로는 적 군함이 함포사격하면서 다가왔고 하늘로는 적기가 으르렁거리면서 날아와 포탄을 투하하였다. 포탄의 폭풍에 아군의 배들은 마구 뒤흔들렸고 어떤 배에는 벌써 물이 새여들었다. 조선인포병영 전사들은 포를 장치한 대나무배를 총출동시켰다. 대나무배들은 영장 김영만의 명령에 따라 적함을 향해 접근해갔다. 아군의 배는 배후로 에돌아가서 적함에 불벼락을 안기였다. 이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함은 배머리를 돌리더니 정신없이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 군함이 도망친 뒤 아군의 배는 어둠을 헤치며 순풍을 따라 거침없이 해남도방향으로 내달렸다. 한 전사가 어둠속에서 해남도가 보인다고 소리높이 웨치자 모두가 흥분에 겨워 야단법석이였다. 이때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이 뒤덮이면서 바람이 일었다. 배가 파도에 밀리워 갈지자로 달아나는통에 앞으로 저어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50여세 되는 경험 많은 배사공은 조금도 두려움없이 힘껏 노를 저어 나갔다. 해남도 해안을 지키던 적함이 아군을 발견하고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이에 “항행호위영” 12척 배에 건 모든 포가 일제히 맞불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포사격에 적의 방어시설이 하나 하나 무너졌다. 배가 해안에 거의 닿게 되자 보병들은 배에서 첨벙첨벙 뛰여내리더니 헤염쳐 륙지에 올랐다. 500여척의 배에 앉은 보병이 승리적으로 해안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적을 무찌르며 돌진해나갔다. “항행호위영”은 승리적으로 임무를 수행한후 대륙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임무를 접수하라는 상급의 명령을 받고 배머리를 돌렸다. 약 15마일가량 왔을 때 날의 희붐히 밝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빛 속에 내다보니 동쪽 앞바다에 적의 군함이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항행호위영”쪽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다. 아군을 발견한 4척의 군함은 량켠으로 갈라져서 포위해오고 있었다. 사태는 아주 위험했다. “전투준비!” 김영만영장은 과단성있게 전투명령을 내렸다. “1, 2련은 각기 량컨으로 갈라져 적함을 공격할 것!” 명령이 떨어지자 김두만련장은 2련의 배 여섯척을 왼쪽으로 몰고나갔다. “동지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최후의 희생을 각오합시다!” 김두만련장은 소리높이 웨치면서 전사들을 지휘하여 적함을 향해 돌진해나갓다. 적함과 아군배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있었다. 1000메터, 500메터, 400메터... “쏘앗!” 사격명령이 내리자 제2련 3패 7반 반장인 조창수가 맨 앞에서 다가오는 적함을 겨냥해 전방포를 갈겼다. 명중이였다. 적함에서는 불기둥과 함께 삼단같은 연기가 치솟아올랐다. 다른 배에서도 동시에 포를 쏘았다. 불의의 습격에 겁을 먹은 적함은 배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함에 명중탄을 안긴 조찬수와 부사수 김동무가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다른 곳에서 싸우던 제1련에서도 적함과 맞다들어 용감히 싸웠다. 놈들은 우리의 포화에 질겁한 나머지 뿔뿔이 도망쳤다. “항행호위영”은 승전고를 울리면서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때로부터 해방군에서와 인민들속에서 대나무배로 미국제 현대화군함을 격퇴시켰다는 미담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50년 5월, 해남도가 해방된후 40군 군부에서는 해항시에서 공신표창대회를 열고 사직속포병영 제2련 3패 7반 반장이며 세1포수인 조찬수를 군의 전투영웅으로 추인하고 그가 생전에 탔던 배를 “조찬수호”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조찬수의 시체를 서문시 남산에 모시고 “전투영웅 조찬수지묘”라고 새겨진 묘비를 세웠다. 독립 15사의 탄생 1950년 1월말, 중공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각 군과 특종병부대에 소속되여있는 조선인 장병들에게 즉시 하남성 정주시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특수한 전투과업을 수행하는 일부 부대 조선인 장병들을 제외한 제4야전군내의 전체 조선인장병들은 3월초순까지 륙속 정주시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항일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8.15해방직후부터 해방전쟁의 성스러운 싸움터에서 세련된 강철의 전사들이였다. 3월중순의 어느날, 중앙군위의 명령에 의한 독립 15사의 편성의식이 거행되였다. 독립 15사, 이는 사장으로부터 보통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선인으로 무어진 조선인부대였다. 전 사에는 4개 보병퇀, 1개 포병퇀, 공병영, 통신영, 반땅크영, 경위중대, 야전병원이 있었고 사급기관으로는 정치부, 참모부, 공급부가 있었다. 사장에 전우, 참모장에 지병학, 정치부 주임에 양근, 공급부 주임에 김윤식, 작전과장에 최봉준, 간부과장에 리용근, 대렬과장에 윤제학이 임명되였다. 퇀급이상 간부도 제4야전군 사령부와 정치부에서 임명하였는데 그들로는 제1퇀에 최학훈, 계중수, 리모출, 제2퇀에 리원성, 리성진, 김철, 제3퇀에 황동화, 김하석, 장중, 제4퇀에 장교덕, 황병태, 송덕만이였다. 포병퇀은 사참모장 지병학이 퇀장을 겸하고 최희택, 손흥산 등이 퇀의 지휘원으로 임명되였다. 편성의식대회는 정주시 광장에서 거행되였는데 110폭의 축기가 봄바람을 타고 나붓기였다. 이 축기들은 지방의 토비숙청으로부터 3하강남, 길림외각지대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료심전역, 평진전역, 장강도하전투와 중남, 서남지구 여러 전투와 전역에서 조선인 장병들이 수여받은것들이였다. 대회에서 제4야전군 정치부 주임 등자희가 야전군사령부와 정치부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그는 조선인 장병들이 전국해방전장에서 이룩한 공훈을 높이 평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 장병들은 3년 반의 해방전쟁가운데서 간고분투하고 영용히 싸운 모범이였고 옹정애민의 모범이였으며 3대규률 8항주의를 준수한 모범이였습니다. 조선민족의 아들딸들인 그대들은 조선민족의 자랑이며 또한 우리 중화민족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천만 지당한 말이였다. 독립 15사의 장병들가운데는 대공이상을 세운 사람만 해도 2000여명이 되었고 그중 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만도 100여명이였으며 85%이상이 중국공산당 당원이였으니말이다. 지휘원들의 연설이 있은후 성대한 사열식이 있었다. 구호를 웨치며 정보로 사열대앞을 지나가는 1만8000여명의 강철의 행진대오, 지축을 울리는 씩씩하고 호매로운 발걸음소리! 장병들 얼굴마다에는 승리의 희열이 비끼여있었다. 장백산기슭에서, 송화강반에서 자위에 떨쳐나섰을 때 일본패잔병들이 버리고간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장비되였고 복장마저 통일되지 못했던 대오가 지금은 국민당군에게서 빼앗은 땅크, 대포와 보총,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중국인민해방군의 통일복장을 떨쳐입은 정규화한 부대로 자라났다. 두 손에 총을 받쳐들고 보무당당히 사열대 앞을 지나가는 민족의 건아들과 사열대우에서 손을 젓는 지휘원들의 얼굴에는 드높은 긍지의 빛이 력력히 흐르고있었다. (계속)
86    제86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3 댓글:  조회:3952  추천:2  2014-11-20
조선족자제병들 팔면산서 토비와 접전 군중을 발동해 지혜롭게 토비굴 기습 422퇀 룡산으로 진격 중경을 해방한후 422퇀은 해방군총부로부터 고향인 동북에 돌아가 대생산건설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여 부대는 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의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런데 사천성 반현부두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악서, 리천현일대에 집결하라는 총부의 명령이 시달되였다. 422퇀은 즉시 출발하여 리천현소재지에 이르렀다. 알고보니 국민당패잔병, 지방악질분자, 토비 수천명이 상서 룡산지구 팔면산에 가려 하고 있었는데 이 한무리의 토비들을 숙청할 임무가 47군에 떨어진 것이다. 작전부서에 따라 주공임무를 담당한 제422퇀은  1950년 1월 3일 이른아침, 룡산을 향해 떠났다. 3일동안에 200킬로메터의 길을 강행군하여 5일에 룡산현소재지에 이르렀다. 퇀지휘원들은 우선 팔면산의 토비들의 움직임을 료해하려고 룡산현인민정부에 가 현장 손기력을 만났다. 손현장은 워낙 우리 주력부대가 한달전에 사천을 진공할 때 룡산현에서 당과 정부의 건설사업을 하도록 이곳에 남겨둔 동지였다. 퇀부에서는 손현장의 소개를 통해 팔면산토비들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다. 사흥주를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은 팔면산에 둥지를 틀고앉아 룡산의 다른 토비두목인 구백릉, 구파평 형제패와 이미 20여년을 날카롭게 맞서 룡산을 남북으로 나누어 차지하고 할거국면을 이루고있었다. 사홍주란 놈은 악착하기 그지없는자였는데 첩을 일곱씩이나 두고도 예쁜 처녀나 색시들을 보기만 하면 강제로 끌어가군 했다. 이자에게 강간당한 여자들과 비참하게 살해된 사람이 얼마인지 몰랐다. 이자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아편을 팔아 무장을 사들이기도 했다. 송희렴은 상서토비무장에 “희망”을 걸고 사흥주에게 소장급 사장벼슬을 주었다. 422퇀은 룡산에 이틀동안 휴식하면서 사상동원, 식량준비, 적정료해, 행군로선선택 등을 주밀하게 했다. 적아의 력량대비를 보면 아군은 2000여명, 토비는 5000여명으로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싸워야 했으며 싸워서 꼭 이겨야 했다. 1950년 1월 8일 새벽, 아군은 룡산을 출발했다. 리야, 팔면산까지는 100킬로메터, 직선으로 가지 않고 초두채에서 내계붕방향으로 그리고 또 락탑계, 세차하, 모아탄, 룡두방향으로 에돌아 전진하였다. 적들로 하여금 해방군이 리야를 차지 않고 보청으로 가는줄로 믿게 하려는 기만전술이였다. 부대는 강행군하여 룡두에 도착한후 백성들속에 들어가 보청으로 가는 길을 물어 짐짓 그곳으로 가려는것처럼 여론을 퍼뜨렸다. 오후 4시, 정파퇀장은 제1영을 이끌고 리야를 습격하러 나섰다가 리야진근처 약 1킬로메터 떨어진곳에서 한무리의 토비들과 조우전을 벌리게 되었다. 토비들은 처음엔 아주 완고했으나 아군의 기관총사격과 포사격에 눌리워 황망히 리야진으로 도망쳐들어갔다. 퇀부에서는 우선 리야진북쪽 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수하남안으로 진격하던 3영도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도하하여 그곳에 이르렀다. 아군은 리야진 북산의 제일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토비무리를 포격하여 놈들이 팔면산으로 도망쳐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토비두목 사흥주는 다른 토비두목들과 함께 리야진에서 술판을 벌리고 질탕 먹고마셔대면서 “공산군주력이 중경에서 팔면산을 공격하자면 적어도 10일 혹은 반달이 걸려야 한다”고 떠벌리고있었다. “15년전 하룡, 소극의 부대가 우리 룡산을 포위한적 있었지. 그러나 나를 잡지 못해거든. 그런데 강서에 있는 고까짓 공산군이 다 뭐냐!” 사흥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밖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희떱게 소리치던 사흥주는 정황을 알아보려고 황망히 진교로 나갔다가 불의의 습격만 당하고 진으로 돌아와보니 다른 두목들은 진자현만 남겨놓고 벌써 팔면산으로 도망쳐버리고 없었다. 사흥주는 부관에게 노래 두 마리를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노새는 아군의 포소리에 놀라 달아나버리고말았다. 황급히 밖에 나온 사흥주는 졸개놈의 말을 빼앗아 타고 허겁지겁 팔면산으로 달아났다. 422퇀은 지친데다가 지형까지 익숙하지 못해 그날은 더 추격하지 않고 리야진에 주둔한 뒤 사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사의 정찰과장이 아군에게 투항한 원 국민당 영순지구의 전원 섭붕승을 데리고 와 전파퇀장에게 팔면산의 지형을 소개하게 했다. 팔면산은 룡산현남부와 사천동부의 유양현사이에 있는 호남, 사천, 호북 3개 성 경계지대로서 높이가 해발 1400메터나 되고 길이가 45킬로메터나 되는 아주 험악한 산이였다. 산은 사면팔방이 험한 낭떠러지,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졌으며 산허리에는 소문난 연지동, 뢰풍동, 로동 등 크고작은 동굴이 많아서 실로 천연적인 지하보루였다. 산꼭대기로 통하는 네갈래 오솔길은 모두가 울퉁불퉁한 돌길이였다. 토비들은 멜대광주리를 메고도 나는 듯이 오르내리지만 지형에 생소한 아군전사들은 바라보는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해나서 기여다닐 지경이였다. 토비들은 이런 험난한 길에다가 또 갑문, 가시목문, 또치까까지 설치했고 대량의 토막나무무지와 돌무지를 쌓아놓고있었다. 1월 18일 아침 5시 정각, 팔면산에 대한 총공격의 포성이 울렸다. 아군은 정파퇀장의 지휘하에 제2영은 대암문으로 제1영은 소암문으로 동시에 공격을 들이댔다. 두곳은 모두 70~80도의 강파로운 절벽이였는데 산우의 길에 있는 세 개의 가시목문우에다는 소방울까지 달아놓았고 또 가시목문 량켠에는 또치까를 구축해놓았다. 가시목문을 다쳐 소방울소리가 나면 인차 또치까에서 총을 쏘고 토막나무와 바위돌을 내리굴렸다.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아군은 몇 번의 돌격에서 모두 실패하고말았다. 군중속에서 길잡이를 찾아내 재차 진공하자는 방안을 세운후 많은 전사들이 군중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의 대부분 군중들은 자녀와 친척들을 산우에 두고있는 형편이라 산우의 정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뿐더러 도리여 해방군의 모든 행동을 토비들에게 알려주었다. 전사들이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실제행동으로 군중을 도와주어서야 군중들은 차츰 해방군을 믿게 되었다. 토비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있던 일부 군중들은 자진하여 팔면산의 길안내로 나섰다. 팔면산을 지혜롭게 탈취 1월 20일 새벽 3시, 팔면산에 대한 공격을 재차 벌리였다. 돌격임무를 맡은 양보재련장은 퇀장의 명령에 따라 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세사람의 길안내를 따라 바줄이며 줄사다리며 갈구리 등을 지니고 대소암문사이에 있는 이가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뒤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니 안개속에서 기암절벽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팔면산으로 오르는 첫머리였다. “원숭이”라는 별명을 가진 길잡이 팽오보가 허리에 줄사다리를 차고 어깨에 바줄을 멘후 절벽우의 한그루의 소나무를 겨냥해 손에 쥔 갈구리를 울리 던졌다. 갈구리가 소나무에 가 면바로 걸리자 힘주어 잡아당겨 든든히 자리잡게 한후 팽오보는 휙 몸을 날려 10여메터의 절벽을 눈깜짝할새에 톺아올랐다. 팽오보는 나무에다 줄사다리 한끝을 단단히 메놓고 다른 한끝을 절벽아래로 내리던져 전사들이 타고오르게 했다. 이렇게 그가 줄사다리를 놓으면 전사들이 타고 오르고 하여 두시간이 되나마나해서 100여명의 전사들이 팔면산에 오를수 있었다. 양보재가 신호총 세발을 발사하자 인차 포성이 울리고 기관총소리가 울렸다. 이는 토비들의 줄의력을 딴데 돌리고 돌격련을 엄호하기 위한것이였다. 3패는 다른 두 길안내의 인도를 받아 대암문공격에 나섰고 1,2패는 팽오보의 안내를 받으면서 소암문으로 접근해들어갔다. 날이 이미 밝고 있었다. 소암문을 지키는 100명가량의 토비무리가 우등불곁에 모여 불쬐임을 하다가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놀라 나무와 바위돌을 마구 굴려내렸다. 나무와 돌들이 굴러내리는 소리가 산사태가 터지는것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 산아래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요란할 때 산우에서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울렸다. 10여명의 적들이 총소리와 함께 나자빠졌다. “공산군이다! 빨리 도망쳐라!” 토비들이 질겁하여 뒤돌아섰지만 양련장이 거느린 두 개 패가 덮쳐들어가면서 한명도 놓치지 않고 몽땅 생포해버렸다. 대암문을 지키던 토비들도 아군 돌격패의 불의의 습격에 어쩌지 못하고 투항하고말았다. 주력부대는 산에 오른후 련을 단위로 수색전을 벌리였다. 조련장은 즉시 제5련을 거느리고 연자동에 이르러 전투대형을 지어 연자동을 포위하고 굴안의 동정을 살폈다. 연자동에는 네 개의 동굴이 한일자로 나란히 뚫려져있는데 굴과 굴사이는 약 10메터 되었다. 그리고 굴아에는 첫굴로부터 네 번째 굴까지 통하는 길이 있었는데 사흥주의 사령부와 후군부는 네 번째 굴안에 있었다. 가장 특이한 굴은 세 번째 굴이였다. 굴안에 들어간 다음 한구간의 내리막을 내려가면 수백명을 용납할수 있는 “대청”이 있고 그 주위에는 오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으며 대청청에 가득 널려있는 석주, 석순, 석화는 천연적인 엄페물로 되고있었다. 굴안에는 또 사천으로 통하는 비밀도로도 있었다. 실로 혼자서 “만인을 대적할수 있는 요충지”였다. 오후 5시, 수색하러 나갔던 부대가 모두 연자봉에 집결하여 연자동을 물샐틈없이 겹겹이 포위한후 정치공세로 사흥주를 투항시켜 보려 하였다. 그러나 사흥주는 투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다. 연자동안의 컴컴한 굴안에서 기관총사격을 하기도 하고 보총사격을 하기도 하던 토비들중 담큰한 작자가 굴어구에 나서서 큰소리를 질러댔다. “공산군들은 들어라. 여기는 어르신님들이 계시는 ‘작은 대만’이네라. 신선도 쳐돌라오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다 뭐냐!” 그러자 다른 토비가 나서서 악독하게 웨쳐댔다. “올라오려면 어서 올라오너라! 술도 있고 고기도 있으니 어르신께서 초대하련다. 그리고 계집들도 붙여주마!” 토비들의 조롱에 참지 못한 전사들은 명중탄을 안겨 그놈들을 쏴놉혔다. 악다구니질하던 놈들은 벼랑에 굴러떨어졌다. 정퇀장의 명령에 의해 산포가 불을 토했다. 연자동 굴 어구마다에 포탄이 날아가터졌다. 토비놈들은 포탄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쿠!”“아야!”하고 법석을 대다가 한창 지나니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튿날 동틀 무렵, 연자동에서 나온 토비 한놈을 붙들어다 심문하니 그놈은 사흥주가 굴안에 없다고 했다. 자정이 지나서부터 어둠을 빌어 굴에다 바줄을 매 절벽에 드리우고는 그것을 타고 굴아래로 도망쳤다는것이였다. 3련과 5련은 즉시 연자동산마루를 점령하고 폭파약으로 연자동중심문을 폭파하였다. 그러자 산중턱에 대기하고있던 두 개 패 전사들이 제꺽 신을 벗어 휘발유를 쳐 홰불을 만들어 들고 굴안으로 들어갔다. 굴안을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대부분 토비들은 굴안의 삼면에 낸 출구로 도망치고 남아있는 놈은 얼마 안되였는데 바닥에 20여명의 토비시체가 널려있었다. 굴안에서 아군은 무전기 1대, 수십자루의 보총, 10만여근의 량식, 대량의 천과 의복, 아편, 소금, 기름 등을 들춰냈다.  
85    제85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2 댓글:  조회:2319  추천:1  2014-10-09
  156사 남창보위임무 완수 족친부락무장 해제 422퇀 장강 뛰여넘어 중경해방전투서 용맹을 강서땅에서 1949년 6월하순, 강서일대는 장마비로 뒤덮였다. 강서성의 여섯갈래 큰강이 몰려드는 파양호의 수위는 3메터나 껑충 높아졌다. 호수주변의 수많은 촌락들과 논밭이 큰물에 잠겼고 교통이 단절되였다. 이런 기회를 리용하여 각지의 토비들은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 강서성의 경비사로 남아 도시질서를 유지하고 공업생산을 회복시키는 일에 바삐 돌아치고있는 156사는 미처 농촌을 돌보지 못하고있었다. 하여 강남의 특징인 족친부락무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이런 무장은 말이 족친부락무장이지 실지는 지주들의 무장으로 지주들의 리익을 보호하고있었다. 그런데 몇십년간 계속되여내려오는 족친부락간의 싸움은 그 뿌리가 깊어 빈곤한 농민들은 족친부락무장을 자신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담보로 알고있었다. 156사가 경비부대로 남창시에 들어간 것은 6월 2일이였다. 급선무는 발전소, 식량창고, 수도국과 기타 설비와 물자들이 특무와 패잔병들의 파괴를 받지 않도록 보위하며 공장들에서 생산을 회복하도록 동원조직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등 사업을 전개하는것이였다. 하지만 농촌의 형세가 긴장하게 되자 부득불 경비사의 대부분이 농촌으로 파견되지 않을수 없었다. 156사는 남창시에서 약 100킬로메터 떨어져 주위에 빙 둘러있는 정안, 여간, 청강, 무주 등 지역들에 네 개의 조선족영을 파견하였다. 후에는 또 466퇀, 467퇀 퇀부와 그 직속부대들까지 진출시키다보니 조선족 지휘원과 전투원들이 약 3000명이나 농촌을 완전히 해방하는 간고한 사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3영은 남창시에서 동남으로 약 100킬로메터 떨어져잇는 진현, 여간 두 현을 포함한 파양호남단과 륙지가 잇닿아있는 농촌으로 가게 되었다. 농촌에 내려온 3영은 전투대의 임무와의 선전대와 공작대의 임무까지 맡아야 했다. 그런데 가장 큰 애로는 언어문제였다. 북방한어를 대충 아는 조선족장병들은 남방사투리가 심한 이곳에서 거의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식사도 큰 문제거리였다. 주식은 입쌀과 밀가루였는데 부식물은 물고기와 고구마뿐이였다. 매일 물고기를 먹자니 습관에 맞지 않았고 화식비도 초과되였다. 이런 특수정황을 분석하고 해결대책을 연구하였다. 우선 각 련을 애민공작대, 부업대, 전투대로 나누었다. 한어수준이 좀 높거나 문화수준이 높은 약 60%의 인원을 애민공작대로 무었다. 이들의 임무는 빈곤한 농민들의 농사일과 살림일을 방조하면서 그들의 지방사투리를 배워내는것이였다. 그 과정에서 군중과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면 앞으로 진행할 선전대, 공작대의 사업에 효과가 클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약 10%의 인원으로 조직된 부업대에서는 물고기잡이, 석재캐기 부업을 하여 화식비초과문제를 해결하였다. 나머지 인원들로 전투대를 무어 담당구역에서 야간감시보초와 주간이동보초를 서면서 부락무장이 외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전사들이 농사일을 비롯한 모든 일을 방조해주면서도 밥 한끼 먹지 않고 엄격히 군중규률을 준수하자 한달도 못되여 농민들은 마음의 탕개를 풀어주었다. 언어도 차츰 익숙해져 군중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농민들은 주동적으로 지주, 부농들의 동태를 보고하기도 했다. 부락의 빈곤한 농민들이 발동되자 부대에서는 인차 농회와 부녀회를 조직하고 기층정권을 건립할 준비로서 우선 감조감식을 실시하고 농촌의 계급을 획분하였다. 이렇게 되니 은페되여있던 계급모순이 포면화되면서 족친부락지간의 모순은 완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족장병들의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애정에 감화된 군중들은 감추어두고있는 족친무장을 적발하기 시작했다. 하여 족친무장은 해제하게 되었고 토비들도 꼬리를 감추게 되었으며 족친지간의 장벽도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강서지방은 드디여 우리 조선족장병들에 의해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되었다. “멀지 않은 10월 1일에 새 중국이 창건되게 된다!” 이 소식은 156사 장병들에게 환희를 불러왔다. 9련의 영웅모범강연대회에서 시를 즐기는 지도원 최학송은 시적인 언어로 개막사를 올리기도 했다. “심심산골 내고향 북간도를 떠나 넓고넓은 료서평원을 지나 천하 제일강산 만리장성을 넘어 40일간 광활한 대지를 씩씩하게 전진하였노라. 노호하는 장강을 건너 승승장구하여 우리 군대의 창건지인 이곳 남창에 조선족의 젊은이들이 찾아왔노라. 씩씩하게 발맞추어 이땅의 한식솔로 태연히 나타났더라. 이제 곧 새 중국이 탄생된다. 이것은 우리 조선족용사들의 오랜 념원이였노라. 우리 모두 새 중국의 탄생을 환호하자. 우리 모두 새 중국을 끝까지 지키기로 맹세하자!” 1949년 10월 1일, 남창시방송국은 거리에 확성기를 가설해놓고 남창시군정위원회, 정부, 각계, 각층에서는 “8.1”봉기를 일으켰던 광장(지금의 8.1광장)에 식장을 가설하고 새중국탄생기념활동을 하였다. 156사에서도 대표들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나머지 대부분 전사들은 대회장을 보위하기 위해 남창시의 주요거리와 강가를 경비하였다. 확성기에서 “동방홍”노래소리가 오래동안 울렸다. 뒤이어 새 중국 국가로 된 “의용군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렸다. 음악이 끝나자 모택동주석이 우렁찬 목소리로 “중국인민은 일떠섰다!”라고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장엄하게 선고하였다. 확성기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나올 때 남창의 거리거리와 강가에서 경비를 서고있던 조선족전사들도, 남창광장에서 경축대회에 참가한 조선족전사들도 모두 가슴이 희열로 벅차올랐다. 환승환은 남창봉기광장상공에서 휘날리는 오성붉은기를 바라보면서 호매롭게 말했다. “저 오성붉은기에는 우리 조선족전사들의 피도 슴배여있소! 우리 156사 조선족용사들의 피도 섞여있소!” 중경해방전투 절대다수가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141사 422퇀(원 연변의 길동1퇀의 후신)은 1949년 7월 20일에 장강도하작전에 참가하여 장강천험을 뛰여넘은후 호남성 부정현일대에서 국민당패잔병들을 숙청하고 사천쪽으로 진격하여 나갔다. 그러나 8월에 잡아들자 열대지방의 기후에 적응되지 않아 90%의 전사들이 학질과 리질로 앓아누었다. 지어 생명을 잃은 전사들마저 생겼다. 하지만 고추와 마늘을 즐겨먹는 관계로 조선족전사들은 저항력이 강했다. 병에 걸리지 않은 “행운아”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면서 량식을 구해다가 죽을 쑤어주면서 환자들을 간호하였으며 하루에 몇 번씩 보초를 서군 하였다. 당지 백성들의 말에 의하면 항일전쟁시기 왜놈들은 의창을 강점한 뒤 학질과 리질에 걸려 무리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로 다수를 이룬 422퇀 전사들은 둬달 병마와 싸운후 거뜬히 일어섰다. 이들은 11월 7일부터 12월 2일까지 근 한달동안에 련속작전을 하여 백계장, 아봉관 전투에 참가하여 적군 63명을 살상하고 3913명을 포로하였으며 말 17필, 척탄통 13정, 60미리포 18문, 박격포 3문을 로획했다. 422퇀은 영순지구에 들어간후 제2야전군 제3병퇀 제139사와 협동작전하여 국민당의 마지작 소굴인 중경을 해방하는 간고한 전투를 벌리였다. 422퇀은 상, 악, 천 전역에서 처음부터 국민당 제15군 군장 송희렴의 부대를 추격하면서 험산준령을 넘었다. 비를 무릅쓰고 조두채에서 출발한 422퇀은 하루 낮과 밤을 험악한 산길을 톺게 되었다. 오르내리는 거리가 35킬로메터되는 백운산의 좁고 가파로운 길을 넘기란 여간 조련치 않았다. 경사가 17도나 되는 산길에 비까지 줄창 내리여 미끄럽기가 그지 없었다. 낮에는 지팽이를 짚고 밤에는 홰불을 들고 무인지경을 줄여나가야 했다.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등에 멘 짐이 비에 젖어 점점 무거워나고 짚신은 이미 닳아 떨어져 어떤 전사들은 언녕 맨발로 걷고있었다. 어떤 전사들은 걸을 수 없으니 아예 엎드려 기였다. 그러다보니 5킬로메터가량 되는 루인파의 내리막길을 4시간이나 걸었다. 행군도중 몇몇 전사들이 낭떠러지에 굴러떨어져 희생되기도 했다. 험한 산을 넘고나니 이번엔 강을 건널 일이 큰 문제였다. 세수하를 건널 때였다. 골물사태에 다리가 밀려가서 세수하를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다. 그런데 갖은 고생을 다해 다리를 놓았으나 번마다 기세사나운 물에 밀려가군 하였다. 마지막에 림시다리를 가설하고 쪽배도 몇척 얻어왔다. 부대는 림시다리와 배를 리용하여 한번에 몇사람씩 강을 건너야 했는데 전 사가 세수하를 건너는데 이틀밤 이틀낮이나 걸렸다. 이렇게 갖은 애로를 전승하면서 38갈래나 되는 세수하를 건넜다. 부대는 팽주로부터 백마에 이르러 적과 싸운후 중취쪽으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중취에서 국민당 15군 제64사 제191퇀과 치렬한 싸움을 벌려 일부 적들을 소멸하였다. 그런데 중경을 해방하는 길을 열려면 반드시 중취를 점령해야 했다. 11월 21일 오후 4시, 제3영 부영장 정용은 앞장에 서서 지휘하면서 비발치는 적탄을 뚫고 돌격하여 재빨리 중취를 점령하였다. 중취를 앗긴 적들은 중취서산으로 기여올라가 3영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영부에서는 서산의 적 화점을 까부시라는 나팔신호를 울렸다. 정용부영장은 계속 9련을 지휘하여 적화점을 향해 번개같이 돌격해올라갔다. 몇몇 전사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정용부영장은 기포련에 신호를 보내 모든 60미리포, 박격포, 기관총으로 적 화점을 사격하라고 알렸다. 돌격나팔소리가 창공에 울려퍼지고 집중사격이 시작되였다. 9련전사들은 정용의 지휘하에 맹호같이 돌격해나가면서 적을 무찔렀다. 3시간 남짓이 진행된 전투에서 아군은 적 200여명을 살상하고 200여명을 포로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출신인 정용부영장은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422퇀은 무사히 오강을 건너 계속 전진하였다. 그들은 우로구에 쳐들어가 적 일부를 포로하고 적정을 탐지하여 적들이 열래장에 주둔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75킬로메터를 강행군하여 열래장을 불의에 기습하였다. 제1영 제2련에서는 감쪽같이 적 보초병을 요정내고 병영속에 뛰여들어 총 한방 쏘지 않고 달콤한 꿈나라에서 헤매이던 적 신편 제1군 제2사 부사장 이하 1000여명을 포로하였다. 422퇀은 계속 행군하여 중경에 도착한후 형제부대와 함께 중경시가지를 해방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10여일간의 치렬한 시가전에서 422퇀의 조선족장병들은 무비의 용감성으로 영용히 싸워 11월 30일, 끝내 중경을 해방하였다. 중경해방전투에서 422퇀은 국민당군 7483명을 살상, 포로하였는데 그중 퇀급이상 군관이 19명이나 되었다.  
84    제84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 1 댓글:  조회:2516  추천:0  2014-09-22
연변의 건아들 호성하 피로 물들이며 배다리 놓고 단풍전투 지혜롭게 벌려 장강도하작전 서막 열어 "다리부설영웅 6련" 동북해방전쟁이 끝난후 조선족장병들은 제4야전군으로 재편성된 동북의 각 부대를 따라 산해관을 넘어 화북으로 진군, 평진전역에 참가하여 당고전투와 천진시가전에서 용맹을 펼쳤다. 당시 천진에는 국민당군대 13만명이 견고한 방어시설을 가지고 웅거해있었다. 천진을 해방하는 것은 곧 국민당의 숨통을 끊고 북평을 고립무원한 처지에 빠뜨리는것이였으며 전 화북을 해방하는 관건적인 고리였다. 1949년 1월 1일, 산해관의 한 회족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즐겁게 설을 쇠고있던 제4야전군 특종부대 공병퇀 2영 6련 전사들은 평진전역에 참가하라는 긴급명령을 받았다. 공병 6련은 치치할공병학교를 졸업한 제3기 졸업생들로 무어진 련인데 련장 왕충발과 1패 패장, 사무장 등 3명을 제외한 138명이 모두 조선족열혈청년들로 무어진 부대였다. 이들은 1947년 7월 연변지구의 중학교학생들가운데서 모집되여 1년간의 학습과 실습을 거쳐 다리부설, 嬖? 지뢰해제, 갱도수축 등 기술을 장악하였고 이미 료심전역에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기도 했었다. 6련의 임무는 천진시 동북쪽 소서영문앞 넓고 깊은 해자 호성하에 다리를 놓아 38군의 포와 전차가 안전하게 건너도록 담보하는것이였다. 6련은 밤에 다리를 놓을 철선을 리가분까지 운반해놓고 명령을 기다렸다. 1월 4일 오전 9시, 아군의 수백문의 포가 천진시에 구축한 적의 방어시설을 포격, 방어선을 산산이 부셔놓았다. 11시, 아군 보병의 총공격이 개시되였다. 명령을 받은 6련 전사들은 호성하게 배다리를 놓는 전투에 돌입했다. 철선을 끝고 앞장에 서서 나가던 2패 패장 송천화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이밖에 김영도 등 여섯명 전사도 부상을 입었다. 이에 전사들은 철선을 엄페물로 삼아 얼음우로 철선을 밀며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런데 적의 포격에 얼음이 꺼지는 바람에 얼음을 리용할수 없게 되었다. 지도원 김창룡이 앞장서 가슴치는 물속에 뛰여들자 전사들도 주저없이 물속에 뛰여들었다. 뼈를 에이는듯한 차디찬 물속에서 전사들의 손발이 인차 꽛꽛이 얼어 마비되였다. 라영필패장은 적탄에 손가락 세 개가 뭉텅 끊어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손을 대충 싸매고는 계속하여 전사들과 함께 철선을 한데 무어 배다리를 놓았다. 그들의 손에 이해 끝내 호성하에 배다리가 놓여졌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한줄기라고 하던 호성하가 한줄기인 것이 아니라 두줄기눼?것이다. 그러니 다리 하나를 더 놓아야 했다. 그런데 다리 하나를 놓기 위해 마련한 기재를 이미 다 써버렸다. 어떻게 할것인가? 지도원 김창룡은 과단성있게 부련장 윤성기에게 38군 공병영과 련계하여 다리 놓을 기자재들을 가져오도록 하는 한편 호성하를 건너 적의 손에서 기자재를 빼앗아올 것을 3패 패장 라영필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적또치까에서 퍼붓는 미친듯한 기관총사격에 돌격하던 전사들은 음페물에 의거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전사 김운송이 희생되였다. 이에 지도원 김창룡은 엄호사격으로 적의 화력을 압도하여 전사들의 전진로를 열어주었다. 부패장 황충경이 인솔하는 돌격조가 번개같이 적또치까에 접근하여 적화구에 수류탄묶음을 던져넣었다. “꽝!”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또치까가 산산이 부셔졌다. 이 기회에 돌격해들어간 전사들은 철근과 목재를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두 번째 호성하에도 7메터 길이의 다리가 놓이게 되었다. 김창룡지도원이 신호탄 세발을 쏘아 다리부설이 성공되였다고 군부에 알리였다. 그러자 중무기들을 실은 아군의 자동차와 전차들이 기세드높이 다리를 건너 천진시내로 진입하였다. 6련 전사들은 목숨바쳐 놓은 다리우로 지나가는 기계화부대를 보면서 “만세!”, “만세!”하고 격동되여 웨치고 또 웨쳤다. 15일 오후 4시, 천진시는 해방군에 의해 끝내 해방되였다. 하지만 6련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다른 공병부대와 함께 국민당군이 사방에 매설해놓은 지뢰를 해제하는 전투에 뛰여들어야 했던 것이다. 6련은 반을 단위로 지뢰를 제거하는 경쟁을 벌리였다. 제1반에서는 시간당 170개의 지뢰를 제거하여 최고기록을 따냈다. 6련은 형제부대 전사들과 함께 한달동안의 간고한 싸움 끝에 천진시교에 매설해놓은 40여만개나 되는 지뢰를 죄다 해제해버렸다. 지뢰해제전투에서 6련은 조선족전사 김사련 등 3명이 희생되였다. 2월, 사령부에서는 표창대회를 열고 6련에 “다리부설영웅련”이라는 축기를, 2패 5반에는 “기률을 잘 지키는 반”이라는 축기를 수여하였다. 이외에 전 련이 집체대공을 세웠고 지도원 김창룡을 비롯하여 송천화, 라영필, 김영도 등 18명에게 대공을, 23명에게 소공을 기입해주었다. 장강도하작전에서 1949년 4월, 제4야전군의 조선족장병들은 다시 부대를 따라 중남의 6개 성을 해방할 임무를 맡고 남진의 길에 올랐다. 조선족장병들은 간고한 행군에서 애민모범, 규률준수의 모범으로 되었고 수많은 련과  영이 모범 련, 영으로 되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병퇀은 70일간의 행군을 거쳐 5월 7일, 장강이북에 도착했다. 장강첨험을 뛰여넘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많은 조선족장병들의 서막인 단풍진전투에서 연변의 원 길동부대에 속했있던 제156사 466퇀은 주력부대의 순조로운 도하작전을 위해 불후의 공훈을 세웠다. 단풍진은 무한에서 약 50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위치해있는데 제4야전군이 장강을 강행도할 지점의 하나였다. 단풍진에는 국민당군 백승희의 126군 304사 912퇀 제3영과 황안보안퇀 일부분이 주둔하고 있다. 남하선봉 15병퇀은 백숭희부대에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야전군주력이 장강이북에 집결되기를 기다릴 사이도 없이 즉시 단풍-무혈간의 약 100킬로메터 전선에서 강행도하작전을 벌리였다. 이에 앞서 4월 28일, 백숭희는 장강방어선을 강화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열고 장강북안에 배치했던 26군을 장강남안으로 철거시키고 강북에 8개 영만 남겨두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장강이북에 남아있는 적들은 아군의 도하작전의와 동정을 정찰하는 한편 북안의 배들을 랍치하여 남안에 끌어감으로써 아군의 도하작전을 파탄시키려 시도하였다. 43군 사령부에서는 15병퇀 사령부의 통일적인 도하작전방안에 따라 단풍진에서의 강행도하임무를 156사에 맡기였다. 이제 156사는 단풍진의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불의의 공격을 들이대 적들의 통제하에 있는 배를 몽땅 빼앗은후 그 배를 타고 장강을 도하하여 돌파구를개척해야 했으며 제2제대의 퇀들로 돌파력량을 확대하여 적들의 반격을 물리침으로써 무한을 포위공격할 후속부대들의 도하를 보장해야 했다. 주공임무가 466퇀 3영에 떨어졌다. 적의 방선은 일직선으로 된 장강을 등지고 북을 향해 반원형으로 포진되고있었다. 아군은 동쪽거점을 1호목표, 북쪽거점을 2호목표, 서쪽거점을 3호목표, 선박이 집중되여있는 부두를 4호목표라 략칭했다. 3영은 퇀의 경위련까지 배속받아 5개 련의 병력으로 1,2,4호 목표를 공격하며 1영은 3영과 협동하여 3호목표를 공격하기로 했다. 2영은 퇀의 예비대로 배치되였다. 5월 13일 저녁 19시 정각, 여느때 같으면 잠자리를 찾을 전사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예정된 지점에 재빨리 집합하였다. 156사 각 퇀은 지정된 로선으로 각기 전진했다. 466퇀은 신주-단풍간도로를 따라 단숨에 15~20킬로메터 달려 공격출발점인 반석교에 도착, 때는 정각 22시 30분이였다. 반석교앞 언덕에 설치된 466퇀 지휘부에서 동숭빈퇀장이 전투명령을 내렸다. “단풍전투는 원 계획에 변동이 없다. 극히 은밀히 행동하여 24시간전에 적진부근에 접근한다. 2,3로선 부대들은 1로선에서 나는 총소리를 공격개시신호로 삼는다. 1,4호목표를 공격하는 제1로선 련대들은 적에게 발각되기전까지는 은페하여 적진으로 돌진한다. 그 행동개시시간은 24시 정각이다. 지금 22시 55분이다. 각 영은 곧 전투행동을 개시하라!” 자기들이 나갈 로선에 들어선 1,3영은 즉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음력 16일이여서 달빛에 단풍진륜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3영은 두 개 로선으로 나뉘여 1호와 2호 목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두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9련은 1,4호 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10련은 그 예비대였다. 한 개 중기패를 배속받은 경위련은 2호목표를 공격하는 돌격련이였고 8련은 그 예비대였다. 23시 20분에 제1로선 선봉패인 1패를 령솔하여 전진하던 9련 부련장 김범도는 전화로 영지휘부의 허락을 받은후 장강북측 전진로선을 버리고 뚝남측 강변으로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뚝에 딱 붙어 강변으로 전진하는 것이 더욱 유리했던 것이다. 적진 전면에 접근하여 경중기의 엄호화력을 배치하면서 돌격시간을 기다리고있던 제3로선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1영이 1호목표의 적에게 발각된것이였다. 3영 영장 원성은 곧 9련과 경위련에 돌격개시명령을 내렸다. 수십정의 경, 중 기관총이 1호와 2호 목표에 몰사격을 퍼부었다. 엄호화력에 적들의 화력이 압도된 순간을 리용하여 9련 1패 패장은 1반을 지휘하여 적진의 장애물을 폭파하고 적의 화점에 달려들었다. 1반 반장 림수현이 제일 앞에서 적의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 좌측으로 접근한 3반 전사 오창근도 1호 화점에 수류탄을 던졌다. 이리하여 1호거점에서 도망치는 일부 적들은 3반에서 추격하고 1반은 1호화점을 점령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2반은 부련장 김범도의 지휘하에 맹호마냥 내달려 부두를 점령했다. 전투가 시작되여 2분만에 1호거점을 돌파하고 8분만에 부두를 점령했다는 김범도부련장의 전화보고를 받은 3영 영장 원성은 예비대인 10련을 전투에 투입시켜 종심으로 공격함으로써 2호, 3호 거점을 측면으로 위협하라고 명령했다. 경위련은 수심이 1메터 넘는 늪을 건너 적의 화점으로부터 10여메터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 2,3패와 중기패의 화력으로 적의 화력을 압제하게 한후 선봉패인 1패로 하여금 적의 화점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해 15분만에 2호방선을 돌파, 2련과 함께 종심으로 돌입하여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1호목표를 공격하는 선봉패인 1패를 엄호하기 위하여 2,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던 9련 련장 차춘모는 복부에 중상을 입고도 계속 지휘를 견지하였다. 련락병 최장근이 달려가 업으려 할때 그는 자기는 관계하지 말고 빨리 부두로 돌격하라는 말만 남기도 눈을 감았다. 련장이 희생되자 지도원 김성희가 2,3패와 중기패를 지휘하여 드센 화력으로 1패를 엄호하였다. 1호거점을 돌파하고 10련이 전투에 투입한후 9련은 곧 부두에 집결하여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시간 남짓한 전투로 단풍작전의 기본임무를 완수하였다. 다만 1영이 공격하던 3호거점의 화점에 몰려든 적들이 계속 대항하고있을뿐이였다. 이 보고를 받은 동승빈퇀장은 산포 1문을 갖고 3영에 와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0여정의 경, 중 기관총의 적의 화점을 봉쇄하고 산포가 직사하자 적들은 환기를 내두르면서 투항을 알려왔다. 싸움이 5월 14일 4시 30분에 결속되였으니 전투는 약 5시간 걸림셈이였다. 이번 작전에서 아군은 적 487명을 소멸하고 경, 중 기관총 18정, 보총 430자루, 선박 69척을 로획했다. 반면 9련 련장 차춘모, 경위련 지도원 박량호 등 9명의 조선족장병을 비롯한 43명 아군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단풍전투에서 로획한 배를 타고 아군은 5월 14일부터 장강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466퇀 2영을 주공대로, 3영을 제2제대로 하여 도하에 성공한후 또 장강남안에서 적의 배 300척을 로획하여 제4야전군 후속부대들의 신속하고 순조로운 도하를 보장하였다. 장강을 건너 466퇀은 형제부대들과 함께 강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의창, 의당, 삼두평에서 적 6000여명을 섬멸하였다
83    제83장 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2 댓글:  조회:2441  추천:0  2014-09-13
  로심전역에서 이름을 떨친 인민해방군 제156사 제446퇀 제2영 “김상범련”의 부분적 조선인장병들. 조선인장병들 전투마다 대공세우고 수많은 전투영웅 배출 동북해방전투서 3550명 희생  목숨으로 동북의 새날 맞아 "영용완강한 7련" 중국인민해방군 제43군 156사 466퇀 3영 7련은 해방전쟁에서 크고작은 전투에 30여차나 참가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워 “영용완강한 7련”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7련의 전신은 돈화현의 림민호, 차성진 등 조선인청년들이 식칼로 일제패잔병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조직한 유격대였다. 이 유격대는 후에 돈화현 보안퇀 3련으로 편성되였다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합세, 1945년 5월 길동경비 2려 5퇀 4련으로 되었다. 그해 7월 다시 2려 6퇀 3영 7련으로 편성되였다. 1946년 11월, 7련 소속부대는 신개령을 지키는 한편 견고한 방어시설을 수축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25일 7련은 길림시 교외 402고지를 탈취하라는 전투임무를 맡고 출발하였다. 402고지에는 적 한 개 련이 몇 개의 또치까에 둥지를 틀고있으면서 아군이 길림으로 진격하는 요도를 막고있었다. 다른 련에서 몇차례의 진공을 시도했지만 사상자만 냈을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있었다. 전투명령이 떨어지자 1패와 3패의 엄호를 받으면서 2패의 조성학반이 눔깜작할새에 적진앞 50메터되는곳까지 돌격해 들어갔다. “장개석군 형제들, 총을 바쳐라! 해방군은 포로를 너그럽게 대한다! 빨리 투항하라!” 조성학반장의 담찬 웨침소리였다. 그제야 적들은 아군 돌격소조를 발견하고 발악적으로 사격해왔다. 이에 격분한 조성학은 전사들에게 “돌격!”하고 소리치면서 맨 앞장에서 돌진해들어갔다. 적진에 뛰여든 전사들은 시퍼런 날창으로 적들을 마구 찔러 쓰러뜨렸다. 전투소조 6명 전사는 인당 6명의 적을 쓰러눕혔다. 이에 적들은 질겁해 도망치는 놈으로 아우성치는 놈으로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이때 7련이 고지로 돌격하였다. 한시간의 치렬한 전투 끝에 7련은 402고지에 붉은기를 꽂았다. 이번 전투후 7련의 조성학반은 대공 1차를 기록받고 “조성학전투영웅소조”칭호를 수여받았다. 1947년 10월말, 7련은 길림교외의 룡담산주봉의 하나인 철가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철가산에는 한 개 련의 150여명의 적이 절벽에 콩크리트또치까와 포대를 쌓아놓고 길림으로 통하는 요도를 지키고있었다. 놈들은 아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주봉밑부터 50메터사이의 나무를 몽땅 베버린후 물을 쳐서 얼음강판을 만들어놓고 1개 퇀 병력이라 해도 얼마든지 막아낼수 있다고 장담하고있었다. 7련에 주공임무가 떨어졌는데 7련은 3패에 진로를 돌파할 것을 명령했다. 전사들은 짚신바닥에 쇠줄을 동여맨후 칼로 얼음을 찍어 얼음층계를 만들면서 산으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톺아올랐다. 3패의 전사들이 적진에서 50메터 떨어진 곳에까지 갔을 때 은페할 나무가 없어서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적들은 수류탄을 마구 내리뿌렸다. 붉은 피가 삽시에 얼음판을 붉게 물들였다. 3패 8반 김윤식이 전사 3명을 거느리고 돌격해올라가겠다고 패장에게 청원했다. 이에 패장 최응남은 적고지에 맹렬한 사격을 퍼부어 김윤식네를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김윤식은 3명 전사를 거느리고 비발치듯하는 적탄을 무릅쓰고 적진 밑에까지 접근했다. 그때 2명의 조원은 희생되고 김윤식도 어께에 부상을 입어 피못이 되었다. 그러나 김윤식은 모진 동통을 참으면서 적 또치까 뒤문으로 뛰여들어가 살아남은 적 경기사수놈에게 덮쳐들었다. 억대우같은 적 사수놈은 18살 밖에 안되는 부상입은 김윤식을 깔아눕혔다. 이때 김윤식은 그놈의 두귀를 잡아당겼다. 놈이 “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김윤식은 몸을 일으켜 그놈의 대갈통을 경기관총에 대고 마구 짓쪼아놓았다. 놈을 쓰러눕힌 김윤식은 겅기관총으로 다른 또치까의 적들에게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뒤따라온 최응남패장은 련속 5개의 적 거점을 까부시고 15명을 포로했다. 드디여 진격로가 열렸다. 이때 7련이 돌격해 올라왔다. 3영과 2영도 돌격해 올라와서 적들을 일망타진하고 철가산을 점령했다. 전투후 김윤식은 대공3차를 기록받고 “대담한 단신영웅”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호신용 모젤권총 한자루를 장려받았다. 그후 김윤식은 전오가자전투에서 부대의 퇴각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국 해방후 그를 렬사인민영웅으로 추모하였다. 1948년 1월, 7련은 독립6사 17퇀 3영 7련으로 개편되였다. 3월 9일, 길림의 적들이 장춘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튿날 7련은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25킬로메터 강행군하여 길림시 서쪽 양가교 대통로 길북쪽 200메터 되는 초가집들에 숨어 건량을 눈에 섞어 요기하면서 적들을 매복습격하려고 기다렸다. 오전 11시, 적들의 선발대가 지나갔다. 돌격신호총소리에 뒤이어 나팔소리가 울렸다. 7련은 쏜살같이 적들에게 덮쳐들었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맹호같이 뛰여나가면서 총 두방을 쏘아 적 두놈을 쓰러눕혔다. 질겁한 적들은 사처로 흩어졌다. 한철혁은 수류탄 두 개를 련속 뿌리고나서 기관총을 하늘에 대고 쏘며 소리쳤다. “손들엇!” 한철혁의 고함소리에 질겁한 적들이 눈우에 총을 던지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발 살려주시오” 하면서 애걸했다. 적지휘관의 마누라들도 손목시계, 금반지, 귀걸이, 목걸이를 떨리는 손으로 내들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한철혁은 단신으로 포로한 100여명 적과 가족을 뒤따르던 전사에게 맡기고는 계속하여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한철혁은 다시 60밀리포를 멘 적을 쏴눕히고 포를 빼앗았다. 뒤이어 초가집을 한집한집 수색하여 적 소장이하 200여명을 포로하고 기관단총 한자루, 경기관총 1정, 보총 150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공 1차를 세웠다. 양가교전투에서 7련은 적 700여명을 포로하고 포 4문과 수많은 총을 로획하였다. 장춘시 이도하자전투에서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어두운 밤을 타서 측면으로 적들의 뒤를 뚫고들어갔다.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한 개 투탄조를 거느리고 적 화점 3개를 요정내고 적 련장이하 7명을 사로잡았으며 경기관총 3정, 보총 60자루를 로획하여 특공(대공 3차)을 세웠다. 그번 전투에서 7련은 적또치까 7개를 까부셨고 80여명의 적을 포로하고 중기관총 7정, 경기관총 3정, 군마 30필을 로획했다. 하여 7련은 집체대공 1차를 기록받았다. 금주전투와 흑산저격전 1948년 9월 12일부터 11월 2일까지 동북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대한 료심전역이 전개되였다. 로심전역은 료녕성 서부 및 심양, 장춘 지역에서 진행한 거대한 전역으로서 해방전쟁에서 결정적의의를 가지는 3대 전역중 하나이다. 이 전역에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 47만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역에서 조선인으로 편성된 많은 부대들이 금주를 공략하고 흑산, 대호산에서 영용히 작전하여 동북해방의 승리를 안아왔다. 료심전역의 첫 전투는 금주전투였다. 1948년 10월 14일, 절대다수가 조선인인 동북야전군 제3종대 제7사 산포영은 맹렬한 포사격으로 적들의 방어공사를 까부시고 보병들과 협동작전하여 적들이 “금성철벽”이라 자랑하던 배수지를 점령, 주력부대의 진공에 길을 틔워주었다. 특히 산포영부패장인 리영철은 전사들과 함께 교통호를 적 또치까부근까지 파고들어가 포탄 한발에 적또치까를 날려보냈다. 치렬한 전투에서 그가 거느린 포병반은 사상자가 많았지만 계속 전투를 견지하면서 적의 화점을 까부셨다. 제119사 359퇀 5련은 조선인 련이였다. 이 련의 2패 패장인 김력준은 의현과 금주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령활하고 과단성있게 부대를 지휘하여 적 두 개 련을 섬멸하고 100여명을 포로하였다. 1련의 조선인간호원인 정화주는 금주전투에서 적의 포화속을 뚫고 뛰여다니면서 많은 부상병을 구해내 “구호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금주전투가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국민당군 료요상병퇀 10만대군이 금주를 지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적들은 흑산, 대호산에서 해방군의 저격으로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저격진지에는 인민해방군 제10종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아군은 보총, 수류탄, 기관총, 산포로 비행기, 땅크, 대포 등 미국제중무기로 무장된 국민당의 5개 군과 12개 사의 병력과 맞섰다. 적아간의 군력차이는 현저했지만 아군은 끄떡 않고 적을 맞아 싸웠다. 10종대 28사 83퇀 3영은 대부분 조선인들로 구성되여있었다. 특히 3영 8련은 연변과 흑룡강성의 조선인전사들로 묶어져있었다. 이들은 흑산현북쪽의 대백태자툰을 고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23일 아침, 료요상병퇀은 미친 듯이 아군에게 덮쳐들었다. 25일 아침, 적들은 3영이 대기하고있는 대백태자를 향해 돌격해왔다. 8련은 국민당군 제71군의 18개 련의 대부대와 맞다들어 싸우게 되었는데 용사들은 6차례나 적들의 미친 듯한 돌격을 격파해버렸다. 1패 3반 전사인 최성걸은 적의 포탄에 다리뼈가 절골되여 행동하기 불편하자 날창으로 절골된 다리를 찍어 끊어버린후 상반신에 힘을 모아 적들에게 기관단총불벼락을 안기면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영용히 희생되였다. 한편 흑산 101고지에서도 치렬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10종대 제30사 89퇀은 연변의 길동1퇀이 재편성된 부대인데 대부분이 조선인전사들이였다. 고지를 지키던 28사부대가 치렬한 전투에서 크게 손실을 입으면서 적들에게 고지를 점령당하였다. 1영 2련 련장 김인석은 전 영과 함께 28사부대를 증원하여 고지를 쟁탈할 임무를 맡았다. 25일 밤, 아군은 일거에 고지를 점령했다. 뒤이어 2련과 28사의 한 개 련만 남아 고지를 사수하고 그 외의 부대는 전부 철수하게 되었다. 날이 밝으면 기필코 적들의 맹렬한 공격이 있게 될것이였다. 10여일동안 바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지칠대로 지친 전사들은 전투만 그치면 총을 안고 코를 드렁드렁 골기가 일쑤였지만 이번만은 김인석련장의 명령에 따라 전호를 파지 않으면 안되였다. 포격속에서 낮아진 전호를 전사들은 삽으로, 날창으로 파고 팠다. 몇시간동안의 악전고투를 거쳐 겨우 몸을 가릴만큼 파지였다. 날이 밝아지자 과연 적들의 맹렬한 포사격이 시작되였다. 포격으로 생긴 진동과 폭풍은 전사들을 허공 들어다놓았고 돌과 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약냄새와 연기에 숨막힐 지경이였다. 약 30분동안 계속되던 맹렬한 포격이 멎자 국민당군은 중기, 경기 등 화력의 엄호밑에 아군진지를 향해 까맣게 기여올랐다. 정면에 배치된 2련의 기관총 2정이 적을 향해 불을 뿜었다.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그러나 화력과 병력의 절대적으로 우세인 적들에게 101고지 일면을 점령당하고말았다. 형세는 매우 위급했다. 이때 갑자기 28사가 총출동하여 노도와도같이 반격해왔다. 그런데 101고지로 오르던 국민당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분분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금주전투에 참가했던 아군주력부대들이 흑산-대호산일선에 이르러 료요상부대를 포위하고 전면적인 진공을 들이댔던 것이다. 2련은 40여명 사망자를 묻은후 101고지를 떠나 이미 출격한 본 부대를 따라 돌격해나갔다. 11월 2일, 료심전역이 승리적으로 끝나고 전 동북이 해방되였다. 연변의 아들딸들은 쉴 사이도 없이 만리장성을 넘어 평진전역에 뛰여들었고 소속부대를 따라 남진의 길에 올랐다. 지난 3년간 진행된 동북해방전쟁에서 3550여명의 조선인전사가 희생되였다. 동북조선인들은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끝내 동북의 새날을 안아왔다. (계속)
82    제82장.동북산야에 울린 승리의 노래.1 댓글:  조회:2969  추천:0  2014-07-14
중국인민해방군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에로 조선인장병들 동북해방전장에서 진붉은 피 휘뿌려 "3기공세"에서의 조선인장병들 1946년, 동북민주련군의 통일적인 편제에 든 조선인무장대오는 장춘제1차해방전투, 사평보위전과 라법-신참 저격전 등 전투에 참가하였다. 길동경비1려는 주력부대와 협동작전하여 라법-신참 계선에서 국민당군의 진공을 막음으로써 그들의 기염을 꺾어놓았으며 북만과 동만의 련계를 차단하려는 국민당의 음모를 짓부시고 연길-라법, 라법-할빈간의 철도운수선을 보장, 아군의 대후방인 동만과 북만근거지를 보위하였다.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의 “3하강남”, “4보림강”전역에서 주력부대에 참가한 조선인전사들은 엄한을 무릅쓰고 송화강을 세차례나 건너 1월에는 치따무전투, 2월에는 성자가전투, 3월에는 덕혜와 농안간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동만독립사와 길동경비 2려 등 조선인부대는 한편으로는 길해선, 라기선 이남으로 출격하여 쌍하진, 쌍양 등 지구의 적거점을 공격함으로써 길림과 장춘의 적군이 남만근거지를 침공하지 못하게 제어하였고 또 길림동쪽으로 침공해오는 적군을 로야령일선에서 견제하였다. 다른 한편 화수림자, 부가툰, 려대방자 등 10여개의 적의 거점을 공격하고 130여개 촌을 해방, 그후 동만근거지와 남만근거지를 련결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1947년 5월, 해방전쟁은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으로 진입하였다.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전략적반공에 진입한 동북민주련군은 1947년 5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사이에 하기, 추기, 동기 세 번에 걸쳐 동북의 국민당군에 향해 전략적인 공세를 발동, 30여만의 적을 섬멸하고 적들을 장춘, 심양, 금주 등 몇 개의 거점에 몰아넣고 고립시켰다. 이 세 번의 공세에서 조선인장병들은 영용히 싸워 큰 공훈을 세웠다. 1947년 5월부터 7월 1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하기공세를 펼쳐 적 8만여명을 소멸하고 42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이 공세에서 동만의 조선인장병들은 길동지구의 부대들과 함께 선후하여 화전, 연통산, 반석, 이통, 쌍양, 로아령, 천강, 강밀봉, 대툰 등지에서 수십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길해철도 이남과 길돈철도 이동의 대부분 지역들을 해방하고 남만과 동만근거지를 하나로 이어놓았다. 쌍하진전투에서 독립사 제4퇀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치로하에서 적 120여명을 소멸하였다. 특히 로야령에서 독립사는 장개석의 제1강군이라고 불리우는 신1군과 10여일동안 치렬한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하기공세에서 동만독립사 제4퇀 6련같은 전투모범련과 오룡진 등 100여명의 전투영웅과 모범들이 나타났다. 독립4사(리홍광지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매하구일대의 국민당군 제60군 제184사를 전멸시키는 전투를 벌려 승리를 거둔후 5월 14일, 형제부대와 함께 공업도시 료원을 해방하였다. 1947년 9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 아군은 50일간의 추기공세를 발동, 적 6만 5000여명을 섬멸하고 17개 도시를 해방하였다. 추기공세에서 동북야전군은 전쟁형세의 발전에 적응하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지방부대로부터 보충받았다. 연변, 목단강, 송강, 통화지구의 지방부대에서 싸우던 조선인장병 2만여명이 이때 야전군 각 종대에 편입되였다. 동만 독립사는 동북군구독립1사, 3사와 합쳐 10종대로, 리홍광지대는 동북군구 독립4사(후에 166사)로, 원 길동군구 독립 3퇀, 6퇀과 길남군분구 71퇀은 동북군구 독립6사(후에 156사)로, 송강군구 8퇀과 길남군분구 72퇀, 74퇀은 동북군구 동립11사(후에 164사)로 각기 편성되였다. 주력부대로 된 여러 조선인부대들은 주기공세에서 길림과 장춘 주변의 적 주력을 유인하여 운동전가운데서 섬멸하였다. 10종대 29사와 독립6사는 아군부대와 배합작전하여 길림주변의 강밀봉, 기반가, 우라가, 룡담산, 환희산, 단산자 등 지점을 공격하여 적을 길림시안에 몰아넣고 30사는 장춘주변의 덕혜진에 신속히 출격하여 아군부대와 함께 덕혜를 해방하고 다시 장춘이남에 진출하여 28사와 함께 중고, 철령, 장당 일대에서 장춘과 심양에서 쓸어나오는 적을 저격하였다. 특히 덕혜현소재지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제30사 6퇀 2영 영장 박종수 등 수많은 조선인전투영웅들이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1947년 12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이미 동북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고친 아군은 동기공세를 발동, 적 15만 6000여명을 섬멸하고 18개 도시와 600만 인구를 해방하였다. 3개월간의 동기공세에서 제10종대의 조선인장병들은 형제민족장병들과 어깨곁고 엄한을 무릅쓰고 남하하여 법고, 참무 등 현소재지를 포위하고 적 75사 만여명을 섬멸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심양으로부터 공주툰의 적을 지원하러 오는 적 신1군, 신6군을 견제하는 전투에서 4000여명의 적을 섬멸함으로써 형제부대가 공주툰에서 국민당 신5군을 전멸하도록 조건을 창조하여 주었다. 2월 19일, 10종대는 개원현 경운보에서 신6군 62사를 추격하여 7200여명을 섬멸하였으며 뒤이어 개원을 해방하고 적 3400여명을 섬멸하였다. 화룡현청년들로 조직된 제30사 99퇀 3영은 황화산에서 적 59사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고지쟁탈전을 벌려 끝내 142고지를 탈환함으로써 형제부대의 적 62사를 섬멸하는 전투를 보장해주었다. 전투에서 교도원 김성룡과 8련 련장 김수억 등 수많은 조선인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리홍광지대도 심양, 철령 일대에서 운동전을 벌려 공주툰섬멸전과 사평해방전투를 유력하게 지원하였다. 왕청현 조선인농민들로 조직된 독립6사 7련은 인민영웅 김상범의 이름으로 명명된 모범전투련이다. 12월에 장춘동역의 적 또치까를 8분간에 까부시고 역을 점령하여 “전투모범련”칭호를 수여받았고 이듬해 1월 21일, 오마툰전투에서 일거에 적 한 개 영을 섬멸하여 집체대공1차를 세워 “맹타격, 맹추격의 용감한 부대”라는 축기를 수여받았다. 2월, “김상범련이 소속된 독립6사는 호가툰, 고점자 일선에서 길림으로부터 장춘으로 철퇴하는 적 60군의 주력을 맞받아 자기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적들과 영용히 싸웠다. “김상범련”의 기관총사수 정형련은 중상을 입고서도 화선을 떠나지 않고 단신으로 기관총을 휘둘러 적의 5차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50여명을 섬멸하였다. 인민영웅 주광문은 적들과의 백병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독립6사는 적 2000여명을 섬멸했다. 첫 붉은기를 사평성루에 아군의 “3기공세”에 기가 눌리운 국민당군은 몇 개 도시를 거점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사평에는 2만여명 적이 지키고있었는데 국민당군은 새로운 방어시설을 구축한후 증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리고있었다. 1948년 3월 21일 새벽 3시, 사평을 수복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해방군의 대포는 국민당군의 방어선과 또치까를 짓부셔버렸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1종대 제2사 4퇀 1영의 제2련은 철도동쪽으로부터 성을 향해 공격하였다. 그들은 세겹이나 되는 철조망과 함정, 지뢰매장구역을 지난후 7메터 깊이의 해자를 넘어 적의 또치까를 폭파하면서 전진하였다. 전투에서 앞장선 폭파조 전사 9명이 모두 희생되였다. 뒤이어 제1반 반장 김동원이 거느린 두 번째 폭파조가 내달아 적들과 백병전을 벌리면서 돌격하여 제일 먼저 사평성루에 붉은기를 꽂고 부대의 돌파구를 열었다. 2련은 재빨리 돌파구를 통해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이때 기차역부근의 다리밑에 수축한 국민당군의 비밀또치까에서 맹렬한 사격이 터져나와 2련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김동원은 적의 또치까에 수류탄을 뿌리고 수류탄이 터지며 생긴 연막을 리용하여 적의 또치까에 접근한후 폭파약꾸레미를 또치까안에 밀어넣었다. 폭파소리와 함께 적의 비밀또치까는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2련은 적을 무찌르며 돌격하였다. 전투에서 2련은 100여명 적을 섬멸하고 400여명 포로하였으며 20여정의 기관총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을 로획하였다. 그러나 2련은 김동원을 비롯하여 거지반 희생되여 3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인민해방군은 드디여 사평을 수복, 전투에서 적군 1만 9000여명을 소멸했다. 전투후 2련은 “돌격련”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김동원은 특등전투영웅으로 추천되고 “모택동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김동원이 거느린 1반은 “김동원영웅반”으로 명명되였다. 제2차 장춘해방전투 제2차 장춘해방전투는 아군이 전략적후퇴를 하였다가 1948년 4월에 다시 시작한 포위전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장춘포위전에 참가한 부대들로는 동북인민해방군 제1종대와 제12종대의 주력부대들이였다. 동만의 독립6사도 이 포위전에 참가하였는데 이 사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독립6사 17퇀 3영은 장춘교외전투에서 이도하자, 잎담배공장, 양가점 일대에서 쌍양보안퇀의 400여명 적을 소멸하였고 대방신비행장을 점령하였다. 17퇀 포위권정면에는 건국대학, 건국묘, 조가산남령의 적수비군이 있었다. 17퇀은 그놈들을 상대로 소가보자로부터 수의대학이 위치해있는 탕도구에 이르는 구간의 포위경계임무를 맡았다. 17퇀 2영과 3영은 몽땅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졌는데 그들은 여러차례 적들의 포위돌파시도를 깨뜨렸다. 아군의 포위로 말미암아 독안에 든 쥐로 된 장춘시내의 국만당군대는 먹을것이 떨어져 사경에 이르렀다. 놈들은 포위를 뚫고 심양으로 도망칠 예산으로 여러차례나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번마다 아군에게 제지당하였다. 7월 6일 새벽 3시경, 한 개 사단이상의 적들이 자욱한 안개가 낀 기회를 빌어 대포사격의 엄호밑에 아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치려 하였다. 독립 6사 17퇀 2영과 3영 7련 진지에만 하여도 두 개 영의 적들이 덮쳐왔다. 7련 3패 8반 반장 한철혁은 7련 주력이 아직 전투에 뛰여들지 못한 정황하에서 전반 전사들을 인솔하여 적들과 근거리전투를 하였다. 적들이 30메터 가까이까지 덮쳐왔을 때 전사 엄도영은 쏜살같이 뛰여나가 적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하였다. 엄도영은 적 12명을 포로하여 진지에 넘겨주고는 계속 적진에 돌입하여 물중기 2정과 기관총 1정을 로획하였다. 한철혁반장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돌격해나가 맞은켠쪽의 적의 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위로부터 “강철8반”이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았고 엄도영은 “강철용사”칭호를 받았다. 8반만 하여도 34명의 적을 소멸하고 23명을 포로하였을뿐만아니라 중기관총, 경기관총 4정, 보총 20자루, 수류탄 25개, 탄약 6000발을 로획하였다. 8반이 용감하게 싸울 때 7련도 전투에 뛰여들었다. 7련은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힌후까지 10여시간 싸워 적 한 개 영 이상의 병력으로 조직된 진공을 3차례나 물리쳤다. 적들은 포위를 돌파할 가망이 없게 되자 시내로 뒤꽁무니를 뺐다. 적정을 주시하던 3영 최봉준영장은 반돌격명령을 내렸다. 7련은 박지현련장의 지휘밑에 적들을 추격하였다. 8반의 전사들은 10명중 7명이나 부상당하였지만 계속 적을 추격하였다. 8련과 9련에서도 예비병력까지 몽땅 동원하여 적들을 추격하여 쓸어눕혔다. 적들은 또 포위되였다. 17퇀 2영과 3영의 조선인전사들은 적들의 여러차례 포위돌파를 짓부시고 적 424명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보총 34자루, 경기와 중기 6정, 척탄통 5개, 탄약 만여발을 로획하였다. 장춘포위전에서 17퇀에서만 해도 53명의 조선인용사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48년 10월 17일 밤 12시, 국민당군 제60군의 증택성군장은 장춘동쪽 방어구역에서 철거하고 아군에게 투항하였으며 동반부 방어구역을 아군 독립6사와 8시에 넘겨주었으며 10월 19일에는 동북행정 부사령이며 제1병퇀 사령 정동국, 참모장 룡군진, 제1병퇀 참모장 양우매도 신7군과 함께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장춘은 드디여 해방을 맞게 되였다. (계속)  
81    제81장.자위전쟁으로 승리전취물 보위 댓글:  조회:2520  추천:2  2014-05-23
신세 고친 조선족 향토 보위하기 위해 앞다투어 전선으로 장개석 전면내전 발동 항일전쟁이 승리한 그 시기 동북에는 국민당군대가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지와 원조밑에 동북을 독점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부터 대량의 군대를 파견, 1946년 6월에 이르러 장춘-심양 철도연선의 심양, 사평, 장춘, 길림 등 중요한 도시들을 련이어 점령했다. 동북을 지키고있던 동북민주련군은 “북쪽으로 발전하고 남쪽으로 방어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심양 등 큰 도시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하여 동만, 서만, 북만에 분산되여 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동만근거지는 1945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장개석은 160만 군대를 동원하여 해방구에 대한 전면적진공을 발동하였다. 군민당 제71군은 교하일대까지 쳐들어온후 “일주일내에 도문강반까지 쳐들어가 전 동북을 수복하겠다”고 떠버리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중공길림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길림시에서 철거하여 8월 17일 연길로 이동하였다. 당시 돈화와 연변지구만이 안정하고 믿음직한 해방구였다. 연변인구의 80%를 차지한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을 견결히 옹호했으며 시련을 거친 상당한 수효의 간부들을 가지고 있었다. 연길에 옮겨온 성당위, 성정부, 성군구는 길동분성위, 연변지위와 함께 사무를 보았다. 이렇게 옮겨온 성위, 성정부, 성군구 지도기관은 1948년 3월 9일, 길림이 해방될 때까지 연길에 있다가 3월 10일, 연길을 떠나 길림으로 돌아갔다. 참군참전 열조 1946년 6월, 국민당군대는 로야령을 넘어 교통요지인 신참과 랍법에 침입해 들어왔다. 연변인민들은 국민당의 진공앞에서 나약함을 보이지 않고 “자위전쟁으로 장개석의 진공을 분쇄하자!”는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참군고조를 일으키는 한편 연변경비려를 교하-랍법-신참 일선에 파견하여 적을 막아 완강하게 전투를 벌리게 했다. 1946년 5월 17일부터 6월 8일까지 연변에서는 3659명이 참군하였는데 화룡 한 개 현에서만 하여도 1536명이 참군하였다. 연길현 흥안촌 녀성 리옥금은 남편 림지용의 참군을 지지하였으며 미구에 또 세 시동생의 참군을 지지하고 가기가 집안팍의 일들을 도맡아하였다. 리옥금의 남편과 마을의 적잖은 청년들이 희생되자 젊은녀성들은 자기 남편을 참군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을 본 리옥금은 부녀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우리 가난한 농민들은 남의 하늘아래 남의 땅에서 허리도 못펴고 살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이 땅의 주인으로 되었어요. 우리가 이 땅을 보위하지 않고 누가 보위하겠어요. 참군하는 것은 반동파를 때려업고 나라와 가정을 지켜 좋은 나날을 보내기 위한것이지요.” “참군하면 영광스럽다!” 이는 당시 조선족들 가운데서의 사회적기풍으로 되었다. 연길현 세린하구 동불사에 살고있는 박씨성을 가진 한 할머니는 딸을 군대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세 아들을 전선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지금 나의 가장 사랑하는 딸을 부대에 보냅니다. 나에게는 ?18살나는 아들이 있습니다. 만약 전방에서 사람을 수요하면 이 아들까지 전선에 보내겠습니다.” 화룡현 숭선촌의 송씨댁 늙은 어머니는 아들 송기섭을 떠나보낼 때 아들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국민당반동파를 때려부시지 않고서는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편안히 살수 없다. 너는 나의 아들이자 또한 공산당과 인민의 아들이다. 용감히 싸워 적을 많이 소멸하거라!” 왕청현의 금방 결혼한 한쌍의 부부는 서로 고무격려하면서 참군하였고 훈춘현 삼가자에 사는 60여세의 서군산부부는 외동아들을 군대에 보냈으며 훈춘현 밀강향에 사는 강병식, 강병국 형제는 서로 자기가 참군하겠다고 다투다 못해 나중에는 마을사람들 “재판”에 의해 형님인 강병식이 참군하였다. 농촌에서의 참군고조는 도시청년들과 학생들속에도 재빨리 파급되였다. 1947년 6월 4일, 연길시제2중학교에서는 131명의 남녀학생들이 참군할 것을 탄원하였고 민족간부양성을 위해 세워진 연변민주학원에서는 51명이 한꺼번에 참군하였다. 같은 해에 연길, 룡정, 도문 등지의 수천명 중학생 졸업생들이 앞을 다투어 전선으로 나갔다. 길림성군구의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참군정황통계자료에 의하면 전 성 참군자총수는 18만 9455명인데 그 가운데서 연변참군총수가 5만 2051명으로서 27.5%를 차지하였다. 당시 연변인구는 88만 9455명이였는데 참군자총수는 연변인구의 5.88%를 차지하였다. 이밖에 약 10만여명이 공인부대, 기간대, 무장민병 등 지방무장조직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참군한 조선족자제병들은 대부분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의 제28, 29, 30사와 조선족이 위주가 된 동북군구 소속 독립 제4, 6, 11 사에 편입되여 후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로 되어 동북해방전쟁과 전국의 해방하는 성스러운 싸움에서 영용히 싸웠다. 모든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전선을 위하여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하여!” 이는 연변인민들의 장엄한 구호였다. 이 구호의 고무하에 연변인민들은 전선지원을 위한 총력전을 벌리면서 해방전쟁에 떨쳐나섰다. 전선지원의 중요한 내용은 담가대나 운수대 또는 민부로 전선에 나가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부대를 따라 부상병을 구하거나 량식, 탄약을 나르고 철도나 도로를 수리하며 방어공사를 쌓는 등 일들에 직접 참가하여 전쟁을 위해 복무하는것이였다. 해방전쟁시기 연변에서 전쟁을 위해 근무한 연인원수는 30만 2300명에 달하며 동원된 차량수는 2만 9200대에 담가대는 군대식으로 편성되였다. 담가 한 대에 대원 여섯명씩 배치되였고 담가 세대가 한 개 중대로, 세 개 중대가 한 개 대대로 편성되였다. 담가대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해방군전사들을 따라 화선을 넘나들면서 부상병을 구원하였다. 지어 화선 20메터 가까이까지 들어가서 부상병을 업어내왔다. 조선족담가대원들은 대부분 한어를 몰랐으나 부상병을 친절히 간호하여 상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담가대원들은 자기 돈으로 닭알과 과일을 사서 부상병들을 대접했으며 부상병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부상병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려 애썼다. 그들은 적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늘 담가를 나무로 위장하고 적기의 공습을 받을 때엔 자기의 몸으로 부상병을 엄호하였다. 연변담가대원들은 1948년 반년사이만 하더라도 화선에서 1600여명의 부상병을 구했다. 전선근무대에서 운수대의 공훈도 매우 컸다. 운수대는 기차, 자동차, 마차, 우차들을 망라한 운수기재들을 동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조선족으로 조직된 담가대, 운수대 등 전선근무대들은 전 동북이 해방된 뒤 산해관을 넘어 평진전역에 참가하였다. 후방인민들은 각종 형식으로 전선원호사업에 떨쳐나섰다. 연변의 각 현에서는 수혈대를 조직하여 자기의 피를 부상병에게 바쳤다. 조선족인민들은 수없이 많은 위문품과 수만통의 위문편지를 전선에 보내여 전사들을 고무격려하였다. 연변문공단은 전선부대의 전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제1선에 나가 로천공연을 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들의 투지를 북돋우어주었다. 전쟁근무에 동원되고 참전임무를 집행하는 가운데서 각지에는 숱한 영웅과 모범이 나타났는바 립공수상자는 2700여명에 달하였다. 후방에서는 대생산운동을 전개하여 량식과 군수물자를 많이 생산하여 전선을 지원하였다. 청장년 대부분이 참군참전하다보니 후방보위와 생산은 녀성들과 로인들이 많이 하였다. 농촌녀성들은 “남성들은 군대로, 녀성들은 밭으로!”라는 호매로운 구호를 내걸고 농업생산의 주력군으로 되었으며 걷우어 들인 량곡가운데서 제일 좋은 것을 골라 전선에 보냈다. 연변은 당시 대후방이였다. 훈춘, 도문 등지에 세운 제혁공장, 신공장, 방직공장, 염색공장, 옷공장 등의 군수품공장에서는 군수물자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전선에 보냈다. 또 광범한 녀성들은 천짜기와 형겊신만들기 운동을 벌려 전선의 수요을 충족시켰다. 1946년 6월, 중공동북국의 지시에 의해 훈춘에 병기공장이 세워졌다. 1947년 여름부터 동북야전군은 전략적후퇴로부터 전략적진공에 넘어갈 준비를 하였다. 부대가 끊임없이 확대되는바람에 무기장비의 수요량도 급증했다. 군사공업부의 지시에 의해 훈춘병기공장에서는 자체로 82밀리박격포를 연구제작하였다. 1948년까지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00여문의 박격포를 생산해냈다. 1948년말에 훈춘철길옆에 번져져있는 세 개의 차량을 뜯어다 녹이여 철판을 만들어 원재료로 삼고 시험제작에 성공하였다. 이밖에 훈춘병기공장에서는 1946년 8월부터 1947년 7월까지 1년동안에 82밀리박격포 포탄 5만 5000여발, 탄알 220여만개를 생산해냈다.
80    제80장 토지개혁운동 댓글:  조회:2822  추천:1  2014-05-13
         망국노 “개간민”이였던 조선인 농민 땅의 주인 되여 중국 력사상 처음 소수민족 신분으로 정치권리 가져  두 차례의 군중공작회의 “중국신민주주의혁명의 근본문제는 농민문제였고 농민문제의 핵심은 토지문제였습니다. 1946년 5월, 중공중앙은 ‘토지문제에 관한 지시’를 내려 토지정책을 조정하며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할 것을 각 해방구에 요구하였습니다. 7월 7일, 중공중앙 동북국에서는 ‘형세와 임무에 관한 결정’을 발표하여 각급 공산당조직에 주구청산, 감조감식, 식량과 토지를 나누는 투쟁에로 농민들을 조직발동함으로써 동북근거지를 창설하고 공고히 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해방전 동북의 토지 대부분은 ‘동양척식회사’, ‘동아권업회사’, ‘만주척식회사’와 같은 일제와 괴뢰만주국의 경제적략탈기구, 친일주구 및 대지주들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척지, 국유지, 군용지와 같은 ‘공유지’가 30%ㅡ60%를 차지하였습니다. 연변지구의 토지개혁운동은 1946년 7월에 시작되여 1948년 4월에 끝났는데 대체로 세 개 단계를 거쳤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토지개혁의 첫단계는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였는데 주요하게는 주구를 반대하고 청산하는 투쟁으로부터 제1차 토지분여까지였다고 한다. 중공길림성위, 길동분성당위, 각 현당위의 800여명(그중 조선인 500여명)토지개혁공작대는 농촌에 깊이 들어가 군중을 선전, 발동하여 먼저 량곡을 대여하고 사출하는 투쟁을 벌렸고 1946년 봄과 여름사이에 토지를 측량하는 방식으로 지주의 남아도는 풋곡식을 빈고농에게 나누어주었다. 60%의 농민들에게 토지, 역축, 량곡, 농기구 등을 나누어주어 그해의 식량곤난을 해결하였고 농민의 계급적각성을 높여 지주와 투쟁할 기초를 닦아놓았다. 9월, 중공길림성위에서는 연길에서 현위서기가 참가하는 제1차 군중공작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군중운동초기의 표면적인 현상과 국부적현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추측으로 하여 중소지주를 돌봐주고 구별있게 대할 것을 일면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래서 회의후 일부 지구에서 군중이 발동되지 못하고 간부가 도맡아 하며 반동적지주에 대하여 힘있게 타격하지 못하며 중소지주에게 토지를 너무 많이 남겨주는 등 우경편향이 산생하였으며 “밥을 설구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하여 11월말, 중공길림성당위에서는 제2차 군중공작회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토지개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군중을 대담히 발동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표현과 결부하여 우경사상 및 간부가 도맡아하는 사업작풍을 비판시정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의 성격과 목적을 명확히 하고 지주와 기타 계급에 대한 정책을 규정하고 지주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정책의 기본원칙은 대담하게 군중을 발동하여 불온분자를 철저히 적발하고 제거하며 봉건세력을 소멸하고 지주의 통치를 뒤엎고 농민이 진정 나라의 주인으로 되게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것이다.” 회의에서는 “견결히 빈고농에 의거하고 중농을 단결하며 지주를 타격하는” 계급로선을 재언명하였으며 각지에서는 “량곡을 대여하고 량곡을 사출하며 풋곡식을 나눈 기초우에서 대담하게 군중을 발동하여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여 봉건세력을 철저히 짓부시고 농민의 통치를 수립할것”을 호소하였으며 “토지분배의 령도권을 빈고농의 손에 장악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어떻게 생산을 발전시키며 재정경제의 곤난을 극복하며 전선을 원호하겠는가 하는 문제들을 연구하고 구체적공작을 포치하기도 했다. 회의후 각 현에서는 회의정신에 좇아 빈고농단을 조직하고 그의 령도하에 지주를 투쟁하고 토지를 나누는 투쟁을 전개하였고 악질지주를 체포하여 공개심판하고 징벌하였으며 지주의 토지재산을 몰수하여 빈고농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에 제1차로 토지분배투쟁을 기본적으로 끝냈는데 길동지구에서는 53만 7275명의 빈고농들이 22만 8193헥타르의 땅을 분배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연길현의 송영명 훈춘현의 한회삼 드 각지의 악질지구들이 질벌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연길현의 송영명, 훈춘의 한희삼 등 각지의 악질지주들이 징벌 받았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하고 일부 지구의 군중이 잘 발동되지 않아 지주에게 좋은 땅을 남겨주고 땅을 많이 남겨주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지주의 위풍을 꺾어놓지 못하였다. "중국토지법대강"반포 토지개혁 두 번째 단계는 1947년 7월부터 10월까지였다. 이 시기 주요한 투쟁은 “큰놈을 치고 감춘 재산을 들춰내는”것이였다. “이 운동에서 수천년동안의 봉건통치지반을 짓부시고 봉건계급의 정치적위풍과 경제적세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지주계급은 저들의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고 갖은 수단으로 계급적보복을 하였습니다. 특히 국민당이 발동한 전면적내전으로 하여 지주계급들은 역청산을 꿈꾸게 되었는데 군중들은 악질지주들의 이러한 음모를 까밝히고 그들의 위풍을 여지없이 꺽어버렸습니다.” 당시의 형세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분석이였다. 그러던 1947년 10월10일, 중공중앙에서는 “중국토지법대강”을 반포,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대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여있었다. “봉건적 및 반봉건적 토지제도를 철페하며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토지제도를 실시하는 원칙밑에 농촌의 기타 모든 토지와 함께 전 촌의 농촌인구에 따라 통일적으로 평균분배하며 토지가 많은데서 떼내여 적은데 보태주며 비옥한 땅에서 떼내여 척박한 땅에 보태줌으로써 전 촌 인민들이 동등한 토지를 소유하게 하며 그것이 개인소유로 돌아가게 하여야 한다.” 연변의 각 현들에서는 성당위의 토지회의정신에 근거하여 보편적으로 빈고농대회를 열고 토지법대강을 학습, 토지를 평균분배할 문제를 연구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1947년 11월 이듬해 4월까지였는데 대폭적인 재검열, 대오정돈, 토지의 평균분배를 하였다. 농촌들에서는 회억대비의 방법으로 낡은 장부를 따지고 농민들의 계급각성을 한걸음 더 제고하며 반동지주에 대한 새로운 투쟁을 벌렸다. 이리하여 반동지주들의 “검은 토지”와 감추어둔 총, 식량과 재산들을 파내여 몰수하였다. 한편 “당내에서 당을 정돈하며 혁명대오에서 대오를 정돈하는 운동”을 벌리였다. 1948년 1월, 1개월 남짓한 시간을 리용하여 토지개혁운동의 철저한 승리를 담보하고 새로운 정치임무를 영접하고저 사상, 립장, 작풍, 생활제도 여하를 검사하고 계급이색분자를 철저히 조사하여 내는것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고 사상상, 조직상, 작풍상으로부터 공산당의 순결성과 통일성을 보장하고 공산당의 전투력을 제고하는것을 목적으로 한 당정돈과 대오정돈을 진행하였다. 연변 각지의 공산당조직들에서는 비판과 자기비판의 정신을 발양하여 우로부터 아래에, 로간부로부터 새로운 간부, 당내로부터 당외에 이르기까지의 적극적이고 민주적인 사상투쟁을 전개, 당내와 간부대오내에 존재하는 평화적향락사상, 관료주의작풍, 자유주의작풍, 유격주의작풍, 무규률현상 등을 치중하여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릇된 현상은 령도면에서는 우경사상을 반대하는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서 표현되였고 조직로선면에서는 빈고농로선과 성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서 나타났으며 령도방법면에서는 “풀어놓는것이 정책”이며 “군중이 정권”이며 “빈고농의 말이면 다다”라고 강조하는데서 표현되였고 뿌리를 찾기도 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상작풍면에서나 생활면에 결함이 있는 동지들에 대하여서는 사실을 밝히고 비판하는 것으로 그들을 교양하였다. 당정돈과 대오정돈 가운데서 성분이 좋지 못하고 력사상에 문제가 있는 일부 당원과 간부들에 대해서는 심사하고조 직상상의 결론을 지어주었으며 규률을 위반한자에 대해서는 조직상의 비판과 처분을 주거나 법적제재를 가하였다. 당조직의 심사를 거쳐 연변에서 80명이 당적을 취소당했는데 연길현에서 7명, 훈춘현에서 29명, 화룡현에서 23명, 왕청현에서 21명이 당적을 취소당했다. 당정돈과 대오정돈을 거쳐 광범한 당원간부들은 보편적으로 당성교양과 당의 규률교양을 받아 계급적각성과 정책수준이 높아지고 군중과 실제를 리탈하는 관료주의와 군벌주의 작풍을 개변하고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게 되었으며 당의 규률관념이 강화되여 당의 각항 방침정책을 정확히 관철함에 있어서 량호한 기초를 닦아놓게 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중에서 나타난 “좌”적편향이 철저히 극복되지 못한 탓으로 당정돈과 대오정돈 가운데서 당내와 간부대오내에 존재한 문제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평가하고 지나치게 투쟁을 강조하며 간부를 너무 엄중하게 처리하여 부분적 당원과 간부들의 적극성에 손상을 준것과 같은 문제들도 나타났다. 조선인농민 땅의 주인으로 1948년 3월부터 연변 가지에서는 공산당의 령도밑에 토지평균분배위원회를 내오고 인구에 따라 토지를 평균분배하기 시작했다. 우선 빈고농들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토지가 평균수보다 적은 중농에 대하여는 그 부족되는 부분을 보태주고 토지가 평균수보다 많은 사람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가만 놔두었다. 지주, 부농들이 로동가운데서 자신을 개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도 농민들과 같은 수의 토지를 분배하여주었다. 토지분배시에 여러 민족의 생산습관과 특점에 대하여서도 돌보아주었는데 수전의 대부분은 조선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채소밭과 한전의 대부분은 중국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연변 5개 현에는 도합 15만 4243호에 71만 8886명(그중 조선인 81.9%)의 인구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농호가 11만 6681호에 55만 167명이였는데 이들은 도합 18만 2064헥타르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이는 농촌인구 인당 평균 4.5~7.05무의 토지를 분배받은 것으로 된다. 빈고농들은 또 같지 않은 수의 가옥, 가축, 농기구, 량곡, 의복 등도 분배받았다. 1948년 4월, 각 현에서는 선후하여 토지평균분배사업을 완수하였다. 정부에서는 제때에 땅문서를 발급해주고 농민들의 번신투쟁의 전취물을 보호하는 법령도 선포하여 “토지는 밭갈이하는자에게”라는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현하였다. 땅은 조선인농민들의 명줄이였다. 연변의 대다수 조선인농민들은 “화전민”의 후대로서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넌 그때로부터 피와 땀으로 밭을 일구고 수전을 개간했으나 결국엔 소유권이 없어 세세손손 소작농, 고농 생활을 해왔다. 해방후 연변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이 령도아래 지주를 타도하고 토지를 분배받아 땅의 주인으로 되었다. 이는 조선인농민들이 오매에도 잊지 못할 념원이였고 세세손손 내려오면서 피 땀흘려 싸워온 진귀한 대가였다. 그때 농촌에서는 “토지 얻은 기쁨”(박순연 작사 리경택 작곡)같은 노래가 많이 보급되였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 아침 닥쳐왔다네 지주토지 한간토지 우리네 손으로 분배하였다네 에헤라 좋구나 데헤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땅을 분여받은 조선인농민들은 밭머리에 처자를 데리고 가 땅없어 받은 설음과 땅의 주인된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영원히 공산당을 따르며 집과 밭을 보위하기 위해 혁명할 것을 다지게 했다. 연길시 전복순네 집은 과거 일곱식구였는데 지주의 땅을 부치면서 겨우 살았다. 1933년 그의 아버지가 항일유격대에 량식과 정보를 날랐다는 죄로 일본놈들에게 하루밤사이에 여섯이 총살당하고 열네살 나던 전복순만이 집에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그녀는 믿을 곳 없이 사처로 돌아다니다가 1936년 남편을 만나 연길시 혜공상에 거주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자 남편은 참군하고 혼자서 세식구를 거느리게 되었다. 너무 가난하여 세식구가 이불 한 채를 덮어야 하는 형편이였다. 1947년 초봄, 전복순은 토지분배위원으로 뽑히웠다. 신이 없어 맨발로 아직 녹지 않은 논밭을 뛰여다니면서 땅을 잰 전복순은 1200평 언덕밭을 분여받았다. 그 기쁨 무슨 말로 다 표현하랴. 전복순은 밭머리에 서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격동되여 웨쳤다. “땅, 얼마나 힘들게 찾아온 땅인가! 내 기어이 옥답으로 만들어 살해된 집식구들을 기념할테다!” 전복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빈고농단, 농회, 민병, 부녀회의사업에 바삐 돌면서 식전식후의 짬짬 시간을 타서 30여차의 거름을 밭에 이여 날았다. 풍작을 거둔 전복순은 알뜰히 고른 좋은 식량을 전선에 보냈다. 이에 대하여 박창욱교수는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이는 전복순일가의 념원만이 아니였습니다. 토지개혁을 한 결과 농촌에서의 봉건제도, 지주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였고 광범한 농민들은 토지를 분여받고 진정한 땅의 주인으로 되어 신세를 고쳤습니다. 이 승리의 열정으로 연변에서는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새로운 열조가 일어났습니다. 지난날 망국노, 개간민의 처지에 있던 조선인농민문제가 끝내 해결되였습니다. 민족문제해결의 실질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문제로서 조선족인구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농민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조선인은 드디여 소수민족의 신분으로 중국력사상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나서게 되었으며 땅의 주인으로서의 정치적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계속)    
79    제79장 주구청산투쟁 댓글:  조회:2472  추천:0  2014-04-14
인민들 투쟁전렬에 나서서 피의 원한 풀고 피의 대가 받아내 길동군정대학 길동군정대학은 1945년말부터 준비하기 시작하여 1946년 1월 6일 연길에서 정식 설립되였다. 주보중이 교장을 맡고 옹문도, 강신태가 부교장을 맡았다. 길동군정대학을 세운 목적은 시급히 수요되는 청년군정간부를 양성하기 위한것이였다. 길동군정대학에서는 1946년 3월 20일, 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쳐 500여명 학생을 입학시켰다. 그중 조선족학생이 380명이였다. 1946년 7월, 길림군구의 결정에 좇아 원래의 항일군정대학본교 제3대대, 태항산 조선군정학교 간부반을 토대로 하여 세워진 조양천교도대, 조선의용군 제7지대에 세운 화전군정학교와 길동군정대학을 합병하여 동북군정학교 동만분교를 내왔다. 교사는 연길 북대영에 잡았다가 인차 왕청현 라자구에 옮겼다. 학생은 2600여명, 조선족학생이 71.5%를 차지하였다. 1946년 8월, 동만분교는 룡정에 옮겨왔다. 9월에 원 룡정은진중학교자리에 교사를 잡고 10월 18일부터 정식 제1기분과학습을 시작하였다. 중공길림성위와 길림군구의 결정에 따라 동북분교를 길림분교로 개칭, 주보중이 교장을, 진정인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1948년 3월, 길림시가 해방되자 중공길림성위와 성정부, 군구가 길림시로 옮겨갔다. 이에 분교도 길림에 옮겨갔으며 학원들을 모두 부대에 편입시키고 길동분교는 동북군정대학 제4퇀으로 재편성, 치치할에 가서 분교와 합병하였다. 길림분교나 동만분교 시기에 군정대학이 길동지구에 자리잡고있는 원인으로 하여 습관적으로 줄곧 “길동군정대학”이라고 불렀다. 길동군정대학은 설립되여서부터 2년 4개월간 4기에 걸쳐 3700여명의 학원을 졸업시켜 부대에 수송했다. 길동군정대학은 해방전쟁의 전면적인 승리를 위하여 우수한 군사간부와 정치간부를 양성,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악질지주와 주구들을 청산 해방되자마자 연변인민들은 악질지주와 일제의 주구에 대한 청산투쟁에 귈기해나섰다. 이것은 기세드높은 군중운동으로 번져졌는데 주구청산투쟁과 감조감식투쟁의 결합은 농민들의 단순한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넘어가게 했고 공산당이 령도하는 군중사업이 커다란 성과를 취득하게 하였다. 화룡현 삼도구에는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대지주 리영춘이 있었다. 리영춘은 화룡현 덕화향 길지촌의 류가라는 한족집 돼지몰이군이였다. 리영춘은 남들보다 먼저 귀화입적한후 다른 사람을 동원시켜 입적시키고는 입적비를 받아먹었다. 1919년, 리영춘은 녀동생 리춘화를 동북군 화룡현보안퇀 련장 석중운에게 첩으로 바쳤다. 하여 석중운의 권세에 의거하여 토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차지하게 되자 리영춘은 화룡부근의 대금장에 이사하여 백호장을 담당하고 지방깡패로 되었다. 1931년에는 화룡현 명신사 사장으로 되었다. 차츰 리영춘은 1600여정보의 토지와 수천평방메터의 가옥을 가진 화룡현의 첫째가는 대지주로 되었다. 1945년 8월 20일, 일제가 망한지 며칠 안되여 리영춘은 지주 문덕창, 주회창 등과 결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그러모아 화룡현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문덕창이 회장으로 되고 리영춘, 주회창이 부회장이 되었다. 수하에 30여명 무장대를 두었다. 1945년 10월 2일, 남평일대의 조선족들이 로농청부동맹창립대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리영춘은 무장대를 보내여 탄압하게 하였다. 하여 9명의 사상자를 내는 류혈사건을 빚어냈다. 남평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한 화룡주둔 쏘련홍군은 10월 5일 쏘련홍군 20여명을 파견하여 치안유지회의 무장을 해제하고 문덕창, 리영춘, 주회창, 두유상, 리영창 등을 체포하였다. 10월 10일, 인민군중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해 쏘련홍군은 리영춘과 리영찬을 화룡에 호송해다가 인민재판에 넘겼다. 그날 화룡 남가소학교운동장에서 리영춘을 재판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는데 분노한 군중들은 앞다투어 리영춘의 죄악을 고소적발했다. 군중재판에 의해 그날 리영춘은 당장에서 처단되였다. 1946년 가을, 훈춘현인민정부에서는 전 현 여러 민족 인민들의 강렬한 요구에 의해 8000여명이 참가한 공개재판대회를 연후 친일악질지주 한희삼을 청산, 총살하였다. 한희삼은 훈춘현 경신구 소하전사람이였다. 1904년 그는 혈혈단신으로 훈춘 포대촌으로 왔다. 온 낯이 곰보투성이인 그를 사람들은 “한곰보”라고 불렀다. 땅 한뙈기도 없고 집 한칸도 없던 한희삼은 포대촌에서 5년동안 소장사로 사기쳐 거액의 돈을 모으게 되었다. 그 돈으로 1700무의 땅을 산후 호되게 빈고농민들을 착취했다. 정씨성의 로인은 10년동안 한희삼네 돼지를 먹이다가 지쳐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한희삼은 약 한첩 써주지 않고 팽개쳐버렸다. 한희삼은 농민들의 반항을 탄압하고 유격대의 습격을 방비하기 위해 일제에게 달라붙어 총 13자루를 타내다가 무장자위단을 조직한후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무장대까지 가지게 된 한희삼은 더욱 미친 듯이 농민들의 반항과 지하당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무장대가 생겨서 3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이자의 손에 10여명의 유격대원이 살해되였다. 이자는 또 일제와 배합하여 10여차나 피비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1938년, 한희삼은 일본천황에게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 비행기를 사서 헌납하기까지 하였다. 토지개혁운동이 깊이있게 진행됨에 따라 연길현 세린하일대의 농민들은 투쟁의 예봉을 악질지부이며 대매국역적인 손영명에게 돌렸다. 1947년 3월, 혁명적농민들은 손영명의 죄악을 폭로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이 악질지주를 처단하였다. 봉천사람인 손영명의 백부 손부인은 광서년간에 세린하에 와 비적두목 손루와 한동아리가 되어 부당한 수단으로 숱한 돈을 끍어모아 벼락부자로 된 동시에 순관질을 하는 아들의 세력을 등대고 자지방을 차지한 대지주로 되었다. 이자의 유능한 보가사군인 손영명은 협잡질을 일삼으면서 세린하, 두도구, 이도구, 동불사 일대의 수한전 9000여헥타르와 산림 1700헥타르, 가옥 360칸을 차지했다. 손영명은 또 세린하에다 기름공장, 제분공장, 벽돌공장, 석회구이가마 등을 꾸려놓고있었고 연길에다는 “태화륭상졈과 “친일방식당”, 가목사에다는 “덕발동철공장”을 꾸려놓고있었다. 손영명의 집울안면적은 7000여평방메터도 더 되었는데 담장 네귀에 포대를 쌓았고 대문에는 문간보초를 세우고있었으며 집에다 보총과 단총 70여자루를 두고 10명 기병을 가지고있었다. 손영명은 소작인 1000여명, 소 1200여마리, 말 20여필, 마차 2대, 승용차 1대, 화물자동차 1대를 갖고있었고 70톤씩 넣을수 있는 량곡뒤주 7개나 있었다. 소작인과 머슴들에 대한 손영명이 착취는 지독했다. 이자는 여러 가지 명목의 가렴잡세를 받아냈는데 이를테면 보갑비, 툰비, 보초비, 방공비, 등유비, 결혼세 등 이루 헤라릴수 없었다. 고리대로는 봄에 량곡 한섬을 꿔주고는 가을에 석삼을 받으며 돈을 꿔주고는 량곡으로 받고 량곡을 꿔주고는 돈으로 받는것외에 꿔준 돈을 년말에는 매달 5푼리자에 본전을 합쳐 받는것이였다. 소를 1년동안 쓰게 하고는 콩 석섬을 받았고 하루동안 소를 쓰게 하고는 두자루의 품값을 받았다. 이밖에 이자는 길닦이, 집짓기, 과동먹이풀준비 등 힘겨운 일들을 모두 작인들에게 무상으로 시켰다. “9.18”사변전 이자는 민국관리들을 등에 업고 무장자위단 40여명을 내세워 작인들의 반항을 진압하였다. 괴뢰만주국이 건립되자 이자는 또 왜놈들과 위만관청에 무릎을 꿇고 달라붙어 무장자위단 40여명을 긁어모았으며 두도구경찰서와 야합하여 약수동, 대홍동 등지에서 44명 혁명자를 살해했다. 이 시기 각 현에서는 일본특무, 순사, 자위단장, 괴뢰경찰특무, 반역자 등을 잡아내여 청산하고 그 죄악에 근거하여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는바 투쟁이 치렬했으며 철저했다. "해란강대참안"청산대회 1946년 8월, 연길현공작대는 장안구 하동에가 일제주구를 청산할데 대한 선전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가운데서 김신숙으로부터 몰래 간직해두었던 “하동자위단이 혁명동지를 참살한 사록”을 받았다. 이 사록은 구위에서 사업하다가 왜놈들의 혹형을 받아 사경에 이른 김신숙의 남편 김학군이 림종시에 남겨놓은 유물이였다. 김신숙은 남편의 유언대로 이 사록을 병속에 넣은후 깊숙이 파묻어두었다가 내놓은것이였다. 사록에는 살인귀들의 명단과 그들의 극악무도한 죄상이 낱낱이 기록되여있었다. 이 사록은 곧 연길현정부에 보고되였고 현정부에서는 조사조를 파견하여 유서에 적힌 내용에 따라 조사하였다. 하여 1931년 10월 15일부터 1932년 8월 7일까지 기간에 일본침략자와 그 주구들이 마반산, 하동, 화련리, 소영자, 화첨자 등지를 94차나 “토벌”하면서 1700여명의 혁명자와 반일군중들을 살해한 전대미문의 “해란강대학살사건”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었다. 조사를 거쳐 죄악이 큰 18명의 살인귀들을 체포하였다. 1946년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중공연길현위에서는 길림성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연길시의 서광장에서 “해란강학살사건”청산대회를 열고 이 사건을 조작한 일제와 그 주구들의 죄행을 청산하기로 하였다. 청산대회준비처에서는 동북 각지의 피해자가족들에게  대회에 참가하여 악당들의 죄상을 까밝히도록 미리 통지를 하였다. 소영자, 하동, 화련리의 피해자가족은 물론 수십리, 수백리 떨어진곳에 있는 피해자가족들, 지어 조선에 있는 피해자가족들도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대회에 참가하러 왔다. 회의는 600여명 피해자가족과 1만여명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열리였다. 대회장주석대정면에는 “연길현해란강살인사건청산대회”라고 쓴 프랑카드가 걸려있고 주석대량켠에는 “살인귀를 잡아내고 그 죄악을 폭로규탄하자!”는 표어들이 씌여져있었다. 5일간의 대화에서 30여명 피해자가족들이 일제와 그 주구들의 죄상을 성토했다. 그들의 피눈물나는 성토는 1만여명 군중들의 크나큰 의분을 자아냈다. 첫날부터 하늘을 진감하는 구호소리속에서 대회가 들끓었다. 대회가 끝날 무렵 대회주석단대표 한동우가 대회에 18명의 범죄자명단을 공포, 처리방안을 내놓았다. 죄악이 극악한 최남순, 박희선, 리철우, 김동우, 박승준, 허남철, 황병윤 등 7명은 사형에 처하고 서봉묵은 무기형에, 허병선은 유기형 7년에, 박영춘은 유기형 5년에, 최성일, 허동룡, 윤승화, 허경규, 허동간, 박명호는 죄악이 크지 않고 죄를 승인하며 뉘우지는 태도가 좋기에 석방한다고 했다. 이에 군중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찬동했다. 살인귀들을 단죄한 이 청산대회는 인민들의 투지를 한결 높여주었고 반동파들의 잔인한 본성과 흉악한 몰골을 똑똑히 발가놓았을뿐만아니라 토지개혁을 유력하게 추동하였으며 향토를 보위하고 전 동북을 해방하는 싸움에 귈기해나서도록 연변인민을 고무해주었다.  
78    제78장 소작료와 리자 인하 투쟁 댓글:  조회:2465  추천:0  2014-04-03
  인민부담 경감시키고 인민생활 향상시키기 위해 가렴잡세 취소  소작료와 리자 인하 공유지 분배 연변철도로동조합 1945년 10월 15일, 연변로동자농민청년부녀총동맹의 지도하에 연변철도로동자의 첫 군중단체인 연변철도로동조합(이하“로동조합”으로 략칭)이 조양천에서 조직되였다. 민주추천방법으로 리충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17명의 상무위원, 7명의 후보위원, 3명의 감찰위원을 선거하였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는 연변의 첫 철도로동자군중조직이였다. 광복후 연변의 철도는 쏘련홍군이 군사관제를 실시하였으나 몇갈래 철도는 분할상태에 있었다. 목도선의 대흥구이남에는 도문철도운영부가 나오고 대흥구이북은 마희산비적의 교란과 파괴를 받아 운수를 회복할수 없었고 장도선에는 조양천감리부(길림국 국민당유지회계통)가 나와 하발령까지 관할하였고 화룡선은 군중이 자체로 단거리운영을 하였고 조개선은 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조양천지구의 유지회계통과의 투쟁이 초점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45년 11월, 로동조합에서는 주군군의 무장을 빌어 조양천철도경찰의 무장 50여자루를 해제하고 감리부장 왕홍운패거리들을 쫓아버린후 돈화이남의 장도선, 화룡선, 조개선, 대흥구이남의 목도선을 접수하였다. 11월 30일,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전원공서의 결정에 의해 연변철도관리국을 내오고 지희겸을 국장으로, 리충진을 부국장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2월, 동만철도관리국에서 파견한 강례(김옥성)가 연변에 와 철도를 접수한후부터 연변철도관리국을 동만철도관리국 연변분국이라 하였다. 로동조합이 나온후 철도로동자들은 적극적으로 기관차, 차바곤, 선로, 통신신호시설을 복구하였다. 하여 1946년 1월 조양천역을 중심으로 연변경내의 네갈래 철도선이 기본적으로 개통되여 군사운수외의 민용운수도 하게 되었다. 2월 20일, 로동조합총지부는 제3차 확대회의를 소집, 통일적인 운행지휘계통을 내오고 철도국에서 통일적으로 경영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연변경비퇀의 군사운수를 담보하여 비적토벌투쟁과 제1차 장춘해방전투를 유력하게 지원할수 있게 하였다. 1946년 4월, 로동조합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철도공회로 재조직되였다. 철도공회는 6월에 동만철도총공회에서 접수관리하면서 길동분회로 개칭되였다. 인민생활 향상 위해 “가렴잡세를 취소하고 인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며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소작료와 리자를 인하시킨다.” 이것은 1945년 11월, 연변행정정독찰전원공서에서 발포한 “10대 시정강령” 제6조의 규정이다. 이 규정을 실천하기 위하여 중공연변지방위원회에서는 촌정무위원회, 각 단체 대표, 지주와 소작인들이 참가한 조절위원회를 건립하였으며 툰에까지도 류사한 조직을 건립하여 소작료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외에 왜놈과 괴로만주국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분여하여주고 경작권을 확정, 소작료는 “2.8”제를 실행하고 바친 소작료는 빈민구제량과 군량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1946년 2월, 춘경생산과 공유지분배사업에 결부시켜 연변전원공서에서는 “연변지구소작료조례”를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조례”에는 “고정적소작료에 대해서는 작년도의 원 소작료를 25% 낮추되 자연재해와 인위적재해로 하여 곡식의 전부 혹은 대부분이 해를 입었을 경우에는 소작료의 지불을 중지하거나 인하하여 지불한다.” “림시적소작료는 상등전에 대해서 22%를 바친다” “소작인이 소작주는 사람에게 무대가로 로동하여 주거나 례물을 보내며 또한 타작한 곡식을 실어다주는 등 방법은 일률로 금지한다”는 등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광범한 농민들을 지주의 각종 착취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생활면에서 향상을 가져오게 했고 정치면서 법률적보호를 받게 하였다. 반면 지주들의 위풍은 대대적으로 꺾어졌다. 이밖에 일반적인 지주와 부농의 합법적리익도 보장하여주었다. 1946년 4월, 연변전원공서는 “연변전원공서 제12호 포고”를 반포, 이렇게 지적하였다. “무릇 개인에게 속하는 토지는 정부에서 죄악이 극도에 달한 매국역적이라고 선포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률로 그의 소유권을 보장하며 누구든지 침범하지 못한다.” 해방전 농민들은 고리대금착취를 보편적으로 매우 엄중하게 받았다. 고리대금을 놓는자들로는 지주, 부농, 왜놈과 괴뢰만주국의 금융기구, 고리대금업자 등이였다. 고리대에는 량식변리를 놓는것과 돈으로 고리대를 놓는 두가지 형식이 있었다. 왜놈과 괴뢰만주국 금융기관에서는 주로 현금으로 고리대를 놓았으며 지주, 부농들은 주로 량식으로 변리를 놓았다. 고리대의 비률은 일반적으로 높았는데 변리는 5푼 내지 10푼까지 달하였다. 빈고농들이 돈을 꿔쓰려면 보증인을 한두명 내세우거나 그 돈에 상응한 재산을 저당잡혀야 하였다. 따라서 채무자는 오래동안 그 무거운 채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지어 일부 채무자들은 파산당하고야말았다. 해방후 인민정부에서는 보증금제도를 없애버리고 리자를 1푼으로 낮추어 실행하도록 하였다. 소작료와 리자 인하는 농민들에 대한 봉건적착취를 경감시켰고 왜놈과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집중적으로 타격하여 농민들의 계급적각성을 높혀 줌과 동시에 그들이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물질적토대를 닦아주었다. 이리하여 공산당의 위신이 높아져 토지개혁운동의 전면적전개에 튼튼한 기초가 생기게 되었다. 공유지를 분배하다   연길시 해방1주년기면식장(1946년 8월 15일) 연변지구의 농업생산을 빨리 복구발전시켜 물질적부를 창조하여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킴과 아울러 군대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946년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연길에서 연변농업생산현장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우선 토지문제를 토론하였다. 농민의 토지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렬한바 현정부에서는 차압한 왜놈과 괴뢰조직의 재산을 농민들에게 합리하게 분배해주어 경작하게 하며 동시에 나머지 공유지를 소작주어 묵지 않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회의에서는 춘경운동을 발동할데 대하여 구체적으로 토론, “21만 1500톤의 량곡을 생산하여 자급자족하자”는 1946년 연변지구의 량곡생산분투목표를 제정하였고 농민에 대한 선전교양을 잘할것과 생산중의 구체문제를 잘 해결할데 대하여 포치하였다. 회의에서는 춘경생산을 승리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 농촌에서 다음과 같은 조직을 내올 것을 요구했다. 첫째, 고농, 소작농, 빈농, 중농으로 농회조직을 내오고 농민이 법에 의하여 소작료를 줄이고 지주와 소작계약을 정하게 하며 농민의 리익에 관계되는 모든 운동을 령도해야 한다. 둘째, 합작사를 조직하여 농민의 부림소, 농기구, 비료, 종자 등을 조절하고 농산물을 수송하고 팔며 농촌의 일용품을 구입하는 등 일을 맡아해야 한다. 셋째, 자원적으로 결합하고 등가교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생산호조소조를 조직하여 소농경제의 곤난을 극복하고 농업생산을 촉진해야 한다. 광복전 식민주의자들이 차지한 “공유지”(경작지)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4개 현에서는 30좌우, 돈화, 안도현에서는 50~60%였다. 이러한 “공유지”를 네가지 종류로 구분할수 있는데 첫째, 동양척식회사가 저당잡고 대부하는 방법으로 략탁한 동척지와 자작농창정지이다. 다음으로 괴뢰만주국정부가 강제로 수매한 토지였는데 만척지, 만척자작농창정지, 일본인개척단지, 조선인개척단지, 중국인(한족)개척단지, 군용지, 도읍계획용지, 철도용지 등이 포함된다. 셋째는 원래 공유지였던 도학전, 현학전, 림지, 농장, 묘지 및 기타 현과 촌에서 소유하던 땅이였다. 넷째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사, 공장과 사인이 수매한 토지였다. 이런 토지들을 동척, 만척, 관동군, 괴뢰만주국정부가 각각 관리했다. 동척과 만척에서는 략탈한 토지의 경작권을 다시 농민들에게 넘겨주어 고액이 소작료를 받았다. 그자들은 또 “자작농창정지”를 실시하여 토지를 비싼 값으로 농민들에게 외상으로 팔아 고리대착취를 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20일, 중공중앙동북국에서는 “일본침략자와 괴뢰정권의 토지를 처리할데 관한 지시”를 공포, “모든 동북경내의 일본침략자와 괴뢰정권의 토지, 개척지, 만척지 및 일본인과 대한간의 소유지를 즉시 무대가로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나누어주어 춘경에 리롭게 하고 인민들의 식량을 증가하며 땅을 묵이지 말게 해야 한다”고 했다. 연변전원공서에서는 이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길림성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포고 제12호”를 반포한후 공유지를 무상으로 땅이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46년 4월, 길동분성위에서는 소속 각 현에 “공유지를 분배해줄데 관한 지시”를 내리였다. 각 현에서는 이 지시를 받은 후 즉시 공유지처리위원회를 건립하고 춘경과 결합하여 공유지를 분배하는 고조를 일으켜 1946년 6월말까지 공유지를 전부 분배하였다. 연변제1차림시참의회의 1946년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연길에서 연변제1차림시참의회가 열렸다. 각계통 인민들이 선거한 대표들과 사회인사들 중에서 초청을 받은 의원들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 연변전원공서 부전원 동곤일이 정부사업보고를 진술했다. 동곤일은 보고에서 우선 연변전원공서가 제기한 10대시정방침을 어떻게 관철실시하여 정권을 회복개조하였으며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어떻게 소작료와 리자인하투쟁을 진행했는가 하는 정황을 치중하여 총화하였다. 이어 조직건설, 민정사업, 사회구제사업, 사회질서, 재정사업, 건설사업, 농업문제, 무역관계, 교육문제 등 제반사업정황을 총화했다. 보고에서 동곤일은 중한(中韓) 두 민족은 굳게 단결하여 공동으로 새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하여 지적했다. 회의에서 길동군분구 사령원 강신태가 “우리군대의 사업경과”라는 제목의 보고를 진술하고 길동분성위 서기 당천제가 연설하였다. 당천제는 연설에서 평화, 민주, 단결, 건설에 대하여 “아는 것은 죄다 말하고 말할 것은 죄다 말하는” 정신에 좇아 직업, 계급을 따지지 않고 인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하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라고 참의원들을 격려하였다. 회의에서는 연변림시참의회잠정조례를 채택했다. 또 림시참의회잠정조례에 근거하여 당천제를 의장으로, 강위청, 림계학을 부의장으로, 지희겸 등을 상무위원으로 하는 상무회를 선거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보내는 전보문을 통과하기도 했다. 3월 27일, 길동분성위에서는 “림시참의회사업에 관한 지시”에서 연변림시참의회의건립을 긍정하였고 연변림시참의회의건립은 중국공산당이 길동지구에서 민주주의정치를 실행한 중요한 표징이라고 지적하였다.(계속)  
77    제77장 장춘해방전역에서의 “조선퇀” 댓글:  조회:3500  추천:0  2014-03-25
   위기일발의 시각 적을 막아나선 “조선퇀” 170여명 장병 목숨바쳐 적진에 붉은기를 격변시대 1946년 새해 첫날, 연변행정독찰전원공사 전원 관선정은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관선정은 신년사에서 “인민정권의 령도하에 광범한 군중을 단합시켜 신생의 정권을 보위하고 공고히 하여야 한다. 일만잔여세력을 소멸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면서 연변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이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중한(中韓)민족의 단결이 우선 필요하다. 중한민족의 단결이 없다면 새로운 연변건설은 불가능하다. 신생의 민주정권은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게 해야 하며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모두 존중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해 첫날, 연변군분구 사령원 강신태도 “우리가 건설하는 군대는 인민의 자제병이다”는 제하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강신태는 연변군분구의 모든 장령들은 전심전력으로 인민의 리익을 위해 복무해야 하며 적대세력을 소멸하고 인민의 정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인민은 자신의 자제병을 옹호하고 인민의 자제병들은 인민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여 지적했다. 1945년 10월 30일에 설립되였던 동북인민자치군은 이해 1월 4일, 중공중앙의 지시에 좇아 동북민주련군(총사령 림표, 정위 팽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길림성공작위원회는 해룡에서 당, 정, 군 주요책임자회의를 소집,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를 중공료길성위로 할데 관한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정신을 전달했다. 료길성위아래에 길림, 길동, 통화, 료북 등 4개의 분성위를 두었다. 2월 27일 중공길료성위에서는 당천제를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중공길동분성위로 개칭할데 관한 동북국의 지시정신을 전달, 당천제가 분성위 서기를 맡고 옹문도가 부서기를 맡았다. 분성위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액목, 안도, 교하 등 8개 현의 당의 사업을 관할했다. 이에 따라 길림군구도 길료군구로 개칭(사령원 주보중)하게 되었고 연변군분구도 동북민주련군 길동군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강신태가 의연히 사령원을 맡고 당천제가 정위(겸)를 맡았다. 군분구산하에 두 개 려를 두었는데 1려 려장은 강신태(겸), 정위는 당천제(겸)가 맡았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다. 1퇀 퇀장에 남창수였다. 병력은 3000여명 되었다. 2려 려장은 등극명, 정위는 애극복이였다. 4퇀 퇀장은 증도, 5퇀 퇀장은 최희봉, 6퇀 퇀장은 김동파, 포퇀 퇀장은 김철이였다. 병력 역시 3000여명이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박일우가 지대장을 맡고 아래에 제1총대, 제2총대, 왕청지대, 화룡지대를 두었다. 1월 10일, 중공대표와 국민당대표는 “정전협정”을 정식 달성하고 동시에 정전명령을 내려 13일 밤부터 군사행동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정전협정에 “동북을 제외”한다는 것을 견지했다. 아울러 미국의 의도에 따라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동북에 이동하여 전략요지를 점령하게 했다. 이에 중공중앙에서는 국민당이 동북문제에 관한 단판을 거절하는것과 관련하여 림표, 팽진에게 “국민당이 의연히 우리와 동북문제에 관한 단판을 거절하며 동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승인하지 않을 경우 무력적인 해결방침을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동북국에서는 즉시 적들이 진공할 경우 견결히 격파할 조치를 취했다. 연변림시참의회에서는 모택동, 장개석 및 전국정치협상회의 원칙에 좇아 평화적으로 동북문제를 해결하며 동북에서의 군사충돌을 정지하며 내전과 독재를 반대하고 인민들로 하여금 평화적인 환경속에서 새 동북을 건설하게 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3월중순, 박락권은 명령에 의해 연변경비 1려 1퇀을 이끌고 장춘지구로 들어가 부대를 동북민주련군 동남종대 제75퇀으로 개편하고 장춘해방전역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박락권과 “조선퇀” 1946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장춘해방전투는 항일전쟁승리후 아군이 처음으로 대도시를 공격점령한 전투로서 동북해방전쟁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바로 이 전투에서 박락권퇀장, 고생호퇀장을 비롯한 용감한 조선인전사들이 슬기롭게 싸워 기개를 떨쳤다. 동남종대 24려 려장이였던 하경적은 “제1차 장춘해방전투에서의 ‘조선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남종대는 24려 70퇀, 25려 75퇀으로 구성되였는데 그가운데서 75퇀은 전부 조선인으로 조직되였다. 하기에 그때 우리는 이 퇀을 습관적으로 ‘조선퇀’이라고 불렀다. 박락권퇀장은 동북항일련군에서 주보중사령원 부관으로 있었고 그후에는 쏘련 원동방면군 보병 제88려 4영 7련에서 중위소대장으로 있었으며 1945년 9월에 항일련군선견대의 일원으로 연길에 이르러 ‘조선퇀’을 조직하였다는것이다. 28살인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동그스름했는데 퍼그나 다부져 보였다. 그의 한어가 류창했다. 결혼한지 몇 달 밖에 안되지만 안해와 갈라져 부대를 거느리고 이번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나와 곁의 전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조선퇀”은 갓 성립되였기에 신병들이 많았다. 그러나 참군한후 정치교육을 잘 받았기에 사기가 충청해 있었다. 4월 14일 날밝을 무렵, 각 종대는 장춘교외의 적군을 향해 진공을 개시했다. 오전에 국민당은 쏘련군대로부터 정식으로 장춘을 넘겨받았다. 점심때 쏘련군대를 태운 마지막 렬차가 장춘을 떠났다. 오후 2시, 괴뢰길림성 대리주석 왕빈화와 제4종대 사령 겸 장춘위수 사령인 진가정을 우두머리로 한 국민당군정요인들이 시교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포성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있을 때 아군전사들은 파죽지세로 시주변의 적군들을 섬멸하고있었다. “조선퇀”은 남령의 초가와붕일대에서 출발하여 조가산, 정수(淨水)공장에 있는 적들을 공격했다. 적들은 아군의 공격에 겁을 집어먹고 눈먼 총 몇방을 쏘아대고는 시내로 도망쳤다. 동남종대는 다른 종대와 함께 시구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퇀”과 71퇀은 몇시간동안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오전 10시좌우에 선후로 공업학교, 농학원, 리과원을 점령했다. 그런데 “조선퇀”은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쪽을 향해 진군하다가 대륙과학원(지금의 장춘응용과학연구소)을 지키고있는 적들의 완강한 저격을 받게 되었다. 쓰딸린거리는 남쪽의 남령으로부터 북쪽의 역전까지 남북으로 시내중심을 꿰뚫은 큰 거리로서 길이가 5킬로메터나 되고 길량켠에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적군은 건물마다에 숱한 또치까를 구축하고 거리에 장애물을 겹겹이 설치해놓았다. 대륙과학원은 쓰딸린거리 남단 서쪽켠에 있었다. 반지하실까지 하여 6층으로 된 이 청사는 모두 화강암으로 지은것으로서 적들이 장춘을 고수하는 남단의 가장 주요한 방어거점이였다. 적들은 증원된 한 개 련을 주둔시키고 정문과 지붕에 모래마대로 퇴적식방어진지를 만들고 창문마다에 각종 화력을 배치해놓았다. 청사앞에는 록시를 박고 철조망을 늘여놓았다. 화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압도한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였다. 박락권은 이 임무를 1영에 맡겼다. 오후 2시, 1영 영장 김윤배는 기관총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적들의 화점에 집중사격을 퍼붓게 했다. 적들도 완강히 반격했다. 쌍방은 몇분동안 불질을 하였지만 아군은 높은 위치를 차지한 적들의 화력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폭파조 전사들은 기관총과 수류탄의 엄호를 받으며 청사를 향해 포복전진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맹렬하여 어떤 전사들은 길에 쓰러지고 어떤 전사들은 록시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도 들지 못하다가 그대로 되돌아오고말았다. 사령부에서는 몇문의 포를 대륙과학원에 돌렸다. 청사지붕과 청사앞 장애물들은 아군의 포성에 의해 마구 짓부셔졌다. 때를 같이하여 기관총도 분노의 불길을 토했다. 아군의 드센 화력에 적들의 화점은 하나하나 벙어리로 되어갔다. 이윽하여 “꽝” 하는 폭음과 함께 대륙과학원청사에 불이 달렸다.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한 박락권은 “돌격!”하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한 전사가 뒹굴기도 하고 기기도 하며 청사앞의 또치까에 접근하여 폭파약꾸레미의 도와선에 불을 달아놓고 다시 뒹굴어 돌아왔다. “꽝!”하는 굉음과 함께 또치까가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전사들은 폭파소리와 함께 맹호마냥 청사앞 또치까를 뛰여넘은후 쏜살같이 청사안으로 돌격해들어갔다. 청사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아래층으로 몰려들었다. 청사에 들어간 1영 전사들은 도망치려는 적들과 맞다들어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진작 기다렸다는 듯이 앞다투어 총을 내던지고 투항했다. 몇놈이 뒤울안으로 해서 도망친외 나머지는 전부 포로되였다. 1영이 대류과학원을 공격하고있을 때 2영 영장 전룡화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대륙과학원 맞은켠에 있는 법정대학청사를 공격하고있었다. 한시간 남짓한 치렬한 전투를 한 개 련의 적들을 전부 섬멸하였다. 전투는 끝났으나 전사들은 또 다른 전투 “불끄기전투”에 투신했다. 한편으로는 널려있는 귀중한 의기와 자료를 그리고 진렬되여있는 범, 곰, 꽃사슴, 고래 등 진귀한 동물표본들을 날라내느라고 야단법석을 치고있었다. 불길이 더 세차게 타올라 천장에서 큰 불꽃들이 사정없이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계속하여 귀중품을 끄집어냈다.  170여명 조선인장병 장렬히 희생 연길현 인민들이 전선에 보내는 군용신. 16일, 날이 밝기전에 종대의 각 퇀은 벌써 전투구역에 들어섰다. “조선퇀”은 계속하여 쓰딸린거리를 따라 시 중심으로 진공하라는 전투명령을 받았다. “조선퇀”은 두시간의 격전을 거쳐 의과대학청사를 점령하고 점심에 홍인광장(지금의 해방광장) 남쪽까지 쳐들어갔다. 홍인광장은 쓰딸린거리와 옹인대로(지금의 해방대로)의 교차점에 위치하고있는데 장춘시구역의 한 개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광장 서북쪽에 3층으로 된 “만자회”청사가 솟아있는데 이는 괴로만주국시기 종교적색채를 띤 자선기구였다. 3층으로 된 견고한 청사는 퐁격이 독특했고 거리를 향한 쪽으로 든든한 담장이 둘러있었다. 청사안에서도 각 통로들을 제압할수 있었기에 적들은 여기를 한 개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던것이다. 아군은 먼저 광장 남측의 건축물들을 점령하여 반달형으로 “만자회”를 포위한 다음 야음을 타 쳐들어가기로 작전을 짰다. 전사들은 피로를 잊고 마른 음식에 랭수 몇모금 마시고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광장의 서남측과 동남측 층집들이 인차 아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때라고 생각한 박락권퇀장은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불벼락이 삽시에 “만자희”에 쏟아졌다. 폭파조의 전사들은 지형을 교모하게 리용하면서 때로는 기여서 때로는 달려서 재빨리 광장을 꿰뚫고 청사앞 담장에 접근해갔다. 폭파소리가 몇 번 나더니 담장이 날아나고 대문안의 화구가 벙어리로 되었다. 잇달아 박퇀장은 친히 돌격조를 지휘하여 청사로 돌격해들어갔다. 교활한 적 지휘관은 부하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집안의 책상, 걸상들을 몽땅 층계입구에 쌓아놓았다. 그것은 아군의 진공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박퇀장은 즉시 일부 전사들에게 밖에 나가 위층에 올라가서 적을 족치라고 명령했다. 진퇴량난에 빠진 적들은 고스란히 두손을 들고 투항하고말았다. 대동광장(지금의 인민광장)은 장춘시 중심이였다. 거기엔 괴뢰 시정부, 경찰국, 방송국, 은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광장서북쪽에 자리잡은 중앙은행청사가 제일 웅위로왔는데 회색화강암벽에 철문이 달려있었다. 보기에도 견고한 건물이였다. 그 안엔 4000여명 적군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군구사령부에서는 협동작전하여 먼저 시정부, 경찰국, 방송국을 탈취한 다음 은행을 고립시키고 나중에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4월 18일 낡밝을 무렵, 돌연 신호탄이 날아오르면서 회색하늘을 갈라놓았다. 삽시에 귀를 째는 듯한 총포소리가 려명의 적막을 깨뜨렸다. 맹렬한 포화는 층집들에 집중되였다. 동남종대는 쓰딸린거리, 민강로, 장춘거리에서 동시에 진공을 발동하였다. “조선퇀”은 종대의 주공부대로서 괴뢰시정부청사를 공격하는 중임을 맡았다. 점심때쯤 되어 “조선퇀”은 시정부청사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전사들은 비발같이 쏟아지는 적탄을 무릅쓰고 돌격하였다. 맹렬한 포화에 시정부청사에는 불이 달렸다. 바람이 불자 불은 갈수록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청사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후 2시좌우에 “조선퇀”은 괴뢰시정부청사를 탈취하였다. 오후 4시, 세 개 종대는 이미 중앙은행을 물샘틈없이 포위하였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고말았다. 5시,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세 개 종대의 포화는 사정없이 은행청사지붕과 청사앞 방어선에 쏟아져내렸다. 적들은 미친듯이 반격을 시작하였다. 탄알이 아군이 점령한 집벽에 폭우처럼 쏟아졌고 폭파에 날아간 유리쪼각들이 전사들의 몸에 마구 들씌워졌다. 벽은 벌둥지마냥 구멍이 펑펑 뚫렸다. 아군 돌격대가 돌격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거세여 광장을 지나갈수가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군은 포병위치를 옮겨 단거리포격을 들이댔다. 포탄이 청사에 어김없이 날아들자 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몇발의 포알이 창문으로 날아들어갔다. 온 청사에 불이 달리자 적들은 당황해서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타서 세 개 종대는 새로운 공격을 들이댔다. “조선퇀”이 청사와의 거리가 20~30메터되는 곳까지 전진했을 때였다. 갑자기 은행의 몇 개 철문이 열리더니 천여명 되는 적이 물밀 듯 몰려나와 동남방향으로 몰려갔다. 사태는 매우 위급했다. 만약 적들을 막지 못하면 후방에 있는 천명이나 되는 포로들과 산처럼 무져놓은 탄알이 반격의 력량으로 될터인즉 그 후과는 상상할수조차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무리져나오는 적들 앞을 용감한 “조선퇀”장병들이 막아나섰다. 앞장에 선 퇀장 박락권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날창을 적의 가슴에 박았다. 치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기회에 서남종대, 동북종대, 동남종대의 70퇀은 각각 서, 북, 동 3면으로부터 포위를 돌파하려는 적들에게 측면공격을 들이대여 적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앞의 적들은 아군에 포위되고 뒤의 적들은 은행청사에 도로 기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안의 독전대에게 가로막혀 진퇴량난에 빠졌다. 이에 아군은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고 포로를 우대한다!”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떤 적들은 무기를 놓고 아군켠으로 달려왔다. 적들은 투항을 알리는 백기를 흔들고야말았다. 퇀장 박락권은 놈들의 투항을 접수하려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교활한 적 한놈이 날창으로 박락권퇀장의 가슴을 찔렀다. 그때 박락권은 28세였다. 이번 전투에서 부퇀장 고생호도 적의 날창에 배를 찔리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앙은행청사우에 드디여 붉은기가 꽂혔다. 아군에 의해 은행이 점령된것이다. 이번 장춘해방전역에서 아군은 적 2500여명을 살상하고 1만 4000여명을 포로했다. 그만큼 대가도 컸다. “조선퇀”은 장병 170여명을 잃었다. 전역이 끝난후 75퇀은 구태시에서 잠시 휴식정돈하고 연변으로 개선했다.(계속)  
76    제76장 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 댓글:  조회:3272  추천:0  2014-03-21
  로흑산일대의 토비숙청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동북근거지창설의 크나큰 장애와 우환 제거 4000여명 토비 숙청  대량의 군수물자 로획   우환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패망한후 동북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륙, 해, 공 3로로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일본군과 괴로군 패잔병, 경찰, 헌병, 특무, 일제의 앞잡이들과 토비들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진공하는 이른바 “지하군”, “선견군”,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동북경내에는 갈래가 복잡한 정치토비가 무려 9만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사회적기초가 되어 국민당의 조종밑에 도처에서 살판치면서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뒤엎고 교통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재물을 로략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정권을 적대시하면서 때만 오기를 기다리는 일만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해버리지 않는다면 농민대중을 폭넓게 발동할수 없을 것이고 근거지의 안정이 있을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국민당이 대거 진공해오면 정면과 배후의 량면협공을 받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것이였다. 때문에 일만잔여세력과 정치토비는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하는데 있어서 크나큰 장애와 우환이였다. 이리하여 동북에서는 “근거지를 건설하며 토비숙청을 다그치자”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1945년 겨울부터 기세드높은 토비숙청투쟁을 벌리였다. 연변에서의 토비숙청은 전 동북적으로 제일 먼저 시작되였다.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연변군분구에서는 동북국의 지시와 “군대를 건설하는 한편 토비를 숙청하자”는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군분구 사령원 강신태와 정치위원 옹문도가 몸소 책임지고 토비를 숙청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비숙청에 동원된 병력은 군분구의 경비부대와 각 현 보안퇀 및 조선의용군 제5지대였는데 병력은 1만1천여명, 절대다수가 조선인들이였다. 삼도만을 두 번 치다   연길시 서광장서 열린 참군대회. 1941년 가을, 연길현 삼도만 평강촌에는 지방인민정권수립을 반대하는 한무리의 토비들이 있었다. 위만퇴역기병소좌 진보흥을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이였다. 이자들은 지방인민정권을 반대하면서 백성들을 략탈하고 유린했다. 전보흥은 위만 군사부 삼도만 평강촌림대 부대장이였는데 해방후에도 계속 반동립장을 견지하면서 원 촌림대의 무기와 병마를 그러모아 토비대를 세웠다. 전호흥은 인민정권이 나날이 발번공고화되는것을 보고 한때 명월구경비퇀의 개편을 접수하였으나 다시 배반을 시도하였다. 하여 경비퇀 영장 손장상이 가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외면하면서 같이 간 30여명의 무장인원을 억류하였고 두 번째로 권유하러 간 팔도구민주대동맹 위원장 최학성 등도 억류하였다. 경비퇀에서는 몇 번이나 서신으로 억류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전보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대항할 주비를 하였다. 이에 경비퇀 퇀장 남창수가 2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평강촌을 포위하였다. 토비들은 통제고지를 차지하고 포대에 숨었거나 토성화구에 매복하면서 아군의 진공에 맞섰다. 아군은 진지를 리용하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전투를 벌리였다. 결과 2시간 남짓 격전을 벌리였지만 적을 무찌를수가 없었다. 도리여 40여명 전사자를 냈을뿐이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평강촌포위토벌은 실패하고말았다. 1946년 1월, 연변경비 1퇀과 3퇀이 련합하여 두 번째로 삼도만토비를 포위토벌하였다. 1퇀은 직접 삼도만을 공격하고 3퇀은 삼도만 서북쪽에 있는 인삼장부근에서 퇴로를 막았다. 1월 27일 새벽, 드디여 전투가 벌어졌다. 자지러진 총소리속에서 아군의 땅크가 토성대문을 들이밀자 부서져버렸다. 이에 당황망조한 토비들은 북산길로 하여 평강으로 도망쳤다. 토비두목 전보흥과 오건은 도망직전에 억류하고있던 팔도구인민민주동맹 위원장 최성학, 명월구수비영 영장 손장상 등 9명을 삼도만 평강촌 북쪽 오품엽자 골짜기에서 살해하는 “오품엽자구참안”을 빚어냈다. 곽영춘토비무리를 격멸   토비숙청을 위해 참군하는 청년들. 송하평탄광을 일명 “만탄”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화룡시가지에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있다. “9.18”사변후 일본이 “만주탄광주식회사”를 운영하였는데 수천명의 중국인탄부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당했으며 무고하게 목숨을 앗기였다. 곽영춘은 탄광의 경찰이였는데 후에는 로동자들을 때려죽이고도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 4대십장의 하나로 되었다. 1945년 9월, 송하평탄광 “보안대” 두목자리를 차지한 곽영춘은 인차 안도의 선병균, 오도양차의 단수림과 결탁하였다. 그는 100여명의 병사에 100여자루 보총, 2정의 기관총을 가지고있었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이 대오를 개조해보려고 했다. 현당위 서기 운청, 현보안퇀 부정위 장보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송하평에 가 귀순할 것을 권고하였다. 2개월 남짓이 공작한 결과 곽영춘은 자신의 대오를 동북인민자치군 화룡보안퇀 독립영으로 재편성하고 영장이 되는것을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그러나 장개석군대가 기세사납게 장춘과 길림을 공략하자 그는 선병균, 단수림과 반변을 밀모하면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장개석을 옹호해나섰다. 곽영춘은 사람을 보내여 길림에 가서 국민당의 위임장을 얻어온후에는 위장을 벗어버리고 공공연히 공산당을 원쑤로 대했다. 그는 무장대오를 거느리로 화룡시가지에까지 와서 시위하였고 기관총을 가지고 현정부에 들어가 식량과 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그는 또 퇀광주위에 방어공사를 설치하고 초소를 증설하면서 “화룡거리를 밀어버리고 공산당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떠들어댔다. 1945년 12월 24일, 룡정의 보안 4퇀과 쏘련홍군 20여명이 지원하러 왔다. 25일, 화룡의 보안6퇀에서는 날자를 정하고 곽영춘에게 련장이상간부를 데리고 회의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곽영춘이 정한 날자에 오지 않으니 4퇀과 6퇀은 쏘련군과 함께 탄광으로 출발하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곽영춘은 한창 술판을 버리고 질탕 먹고 마시고있었다. 아군이 초소를 지나 곧바로 영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자 곽영춘 등은 술좌석에서 뛰여나와 저항하였다. 총소리는 송하평하늘가에 자지러지게 울려퍼졌다. 적들이 저항은 완강하여 좀체로 누구러들려 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전투는 2시간 남아 끌어 3시경에야 끝났는데 적 43명이 격살되고 48명이 생포되였다. 곽영춘과 나머지 놈들은 포위를 돌파하고 안도로 도망쳤다. 아군은 곽영춘의 집에서 국민당 퇀장위임장을 사출해냈다. 1952년 곽영춘은 화전현에서 체포된후 처형되였다.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격멸 오도양차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위만경찰 경위 로진이 여기에 “보안대”를 세웠다. 그해 11월초에 “보안대”를 “안도현공안대대 고동하3중대”로 고치고 단수림이 중대장으로 되었는데 ㄹ병력은 100명좌우였다. 단수림은 안도현 반동두목 선병균의 문객이였다. 단수림은 화룡현을 누비면서 살인, 략탈, 강간을 일삼았으며 때로는 교통을 차단하고 우리 군을 매복습격하였다. 곽영춘이 무리가 소멸된후 단수림은 더욱 기고만장해 미쳐날뛰였다. 1946년 음력설직전에 화룡현보안 6퇀 퇀장 박근식은 일부분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오도양차에 둥지를 틀고있는 있는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공격했으나 2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적 11명을 소멸했을뿐 토비소굴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3월 15일, 연변군분구 부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6퇀과 8퇀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였다. 단수림이 거점을 잡고있는 마을은 2메터 높이의 담장과 화점으로 둘러쌓여있었고 경비가 삼엄하였다. 마을뒤의 산에는 또치까까지 높이 솟아있었고 마을안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친후 구회괴는 8퇀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마을을 진격해들어가고 6퇀은 서북산의 또치까를 치고 포병련은 마을 동남에 있는 산의 진지를 차지하고 기회를 엿보아 싸움을 돕기로 하였다. 전투는 아침 7시경에 시작되였다. 적들은 마을안팍의 방어공사에 의지하여 밀집화력으로 아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면적인 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후 3시까지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때 6퇀은 서북산 또치까에서 가까운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또치까에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들은 차츰 기가 죽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치까가 파괴되고 적의 화력이 갑자기 즘즉해졌다. 구회괴는 단신으로 동남쪽담벽을 넘어들어갔다. 전사들도 잇따라 구회괴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들어가 단숨에 전 촌의 적을 제압할수 있는 또치까를 탈취하였다. 마을의 적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빠져나가 안도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80여명을 소멸하고 총 40여자루 로획했다. 필서문의 끝장 필서문은 두 번 혁명대오에 기여들었다가 두 번 변절하여 적에게 항복한자이다. 필서문은 하북성사람으로서 안도현 처창즈에 와서 토비질하다가 1932년 항일대오에 기여들어 구입원, 유격대 중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2퇀 퇀장, 군부 부관장 등 직무를 맡았다. 후에 일본헌병대 나가지마공작반에 투항하여 대전자특수반에 편입되였고 항일군민을 해치였다. 항일전쟁은 승리하였으나 안도현소재지가 아직 해방되지 못하고있을 때 필서문은 선병균도당에 빌붙어 치안유지회의 반동무장공안대를 조직하고 제4중대 중대장을 담당하였으며 우리 경비부대가 안도를 해방하는것을 여러번 저애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가 선병균비적을 치고 안도를 해방할 때 필서문은 대오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4중대는 길동군구보안3퇀 1영 4련으로 재편성되였다. 필서문은 또다시 혁명대오에 기여들어온후 적극성을 보이면서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였다. 필서문은 1946년 4월에 현대대장이 되기까지 했다. 대대장이 된후 반동본성이 재발한 필서문은 반란을 일으킬 꿍꿍이를 하였다. 5월 19일, 1영 4련이 명령을 받고 훈춘으로 갔을 때 필서문은 심복을 보내여 4련의 사무장 조개선, 패장 곡화림 등과 반란을 밀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련의 많은 사병들이 6월 13일 밤에 도망쳐버렸다. 필서문은 또 여러번 사람을 림강, 돈화 등지에 보내여 토비들을 그러모으고 무기를 수집하게 하였다. 중공안도현위 서기 겸 현대대 정위 박덕흠은 필서문의 음모활동을 료해한후 길동군구에 보고하였다. 군구에서는 보안3퇀이 1련의 무기를 해제하도록 결정하였다. 1련은 지도원을 내놓고는 다 필서문의 심복들이며 반란의 주력이였다. 군구에서 파견한 선견부대 리자상영장이 거느린는 2영이 6월 29일, 안도에 도착하였다. 현위에서는 즉시 전화로 대전자에 있는 필서문에게 현에 돌아와 회의에 참가하라고 통지하였다. 교활한 필서문은 요긴한 일이 있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에 문득 현에 와서 방정위를 찾았다. 그는 낌새를 노리다가 현장의 첩이 죽어서 조문을 간다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간부들이 현대대부에서 행동계획을 짜고있는데 필서문이 또 대대부에 갑자기 뛰여들었다. 이때 리자상이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하였다. 그를 1련에 압송하여 심복들더러 무장을 내놓도록 명령하게 했으나 심복들의 완고한 저항을 받아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필서문은 다리를 상했으나 혼란한 틈을 타서 담을 넘은후 도망치고 그 외의 비적들은 격살되였거나 포로되였다. 장백산밀림으로 달아난 필서문은 다시 120여명의 비적을 그러모아가지고 9월에 길림에 가서 장백군에 투항하여 제1퇀 3영 소좌 영장으로 되었다. 1948년 해방군이 길림을 포위하였다. 길림성군구 사령원 주보중, 길림시경비구 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쓴 명령을 필서문에게 보내여 투항할것을 권고했으나 필서문은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방군에 포로되였고 1949년 3월 안도현에서 처단되였다. 토비를 치고 안도를 해방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 연변의 대부분 지구는 해방되였으나 안도현에서는 1945년 8월 20일, “림시유지회”를 내오고 후에는 또 괴뢰림시현정부를 내왔다. 대악질지주 선변균 삼형제가 조직한 무장은 이 정권의 기둥이였다. 그들은 이도백하, 송강, 량강구, 만보 등 교통요지를 지키면서 우리 군의 안도해방을 극력 저지하려 시도하면서 국민당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46년 3월, 동북민주련군은 안도현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갈래는 남만의 양정우지대 즉 료남독립 2사 3퇀과 1퇀(1개영) 그리고 리홍광지대 한 개 패로서 이도백하를 치기로 하였으며 다른 한갈래는 길동군분구 부사령 구회괴가 길동군분구 경비려 2개 퇀을 거느리고 화룡을 거쳐 오도양차와 대전자를 치기로 하였다. 오도양차에는 토비 한 개 대대의 병력이 지키고있었다. 3월 6일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리하여 안도를 해방하는 돌파구가 생기게 되었다. 3월 8일 밤. 부대는 대전자에서 1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십기가 서남툰일대에 주둔하면서 적정을 분석한후 투항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구회괴부사령원이 직접 적의 주둔지에 가서 담판했다. 적들은 하는수 없이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총 한방 쏘지 않고 대전자를 해방했다. 이도백하에서는 선병의의 한 개 중대가 지키고있었다. 대장 강승무는 완고분자로서 투항을 거부하였다. 남만부대와 동만부대는 이도백하에 집결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태세를 취하였다. 3월 16일 점심때 공세를 발동하여 12시간의 격전을 벌려 비적을 전부 섬멸하고 그길로 안도현소재지 송강진을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선가의 지주무장을 전부 소멸하고 림시현정부도 뒤엎어졌다. 3월 18일, 제1임 현장 주유숭이 해방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안도현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마희산비적집단의 괴멸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400여명의 대오를 확대하였다. 이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동북정진군 제1련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었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을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었다. 마희산비적단은 구성된 그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감행했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해 3월에 마희산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사람을 쏴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략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페), 입쌀 16만3500킬로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주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략탈해 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하에 마희산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주력부대는 쥐도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린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후 그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경찰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락후한 군중 40여명을 롱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이 되었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해 10월 15일, 일본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지하건군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자들을 그러모으고 청년들을 롱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1퇀, 묘령에 2퇀, 대흥구에 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의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자엥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1영은 묘령에 2영은 계관라즈에, 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무기는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었다. 1948년 8월, 토비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탹탈하다가 김태길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략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군도로 찍어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1, 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현주 위만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0 라자구일대에서 600여명을 그러모아 자위대를 조직한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었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건군조직에서 련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중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있엇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여 토비들이 미처 손쓸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외에 나머지들은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1영은 미처 막을사이 없이 흩어지고말았고 소영장은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은 전사하였거나 포로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인군중을 죽였고 조선인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인의 재산을 략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도 64명 조선인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인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격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시켰다. 부퇀장 류방무는 토지개혁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돈화의 토비숙청투쟁 일본이 무조건투항한후 쏘련군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제때에 일본군을 집중시키지 앟아 흩어진 패잔병들이 돈화의 산야에 숨어 늘 부근의 마을을 습격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이런 대오가 각지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 때 지주, 위만관리와 경찰, 자위단 및 오랜 비적들은 갖은 애를 써서 이런 대오의 령도권을 탈취하였다. 그들로는 앵목의 리충옥, 성서의 당옥, 대석두의 리옥보, 대포시하의 장영춘, 관지의 장진호, 태평령의 등진상, 삽어하의 주흥복, 남항니어의 왕대법사 등이였다. 이자들은 오로지 국민당을 동경하고있었고 무장을 쥐자 극력 세력을 늘이였다. 1945년 8월 19일, 동북항일련군 소분대 리문장 등이 쏘련군과 함께 돈화에 왔고 얼마후에 또 류건평이 왔다. 9월초, 류건평을 사령으로 하는 돈화현보안사령부가 건립되자 자연발생적인 무장대오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1월, 양상규 등 연안간부들이 와서 중공돈화현위와 현림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공산당원이 현장이 되는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위만군 소좌군의 출신인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었다. 그는 국민당돈화현당부의 려명과 언녕부터 배짝이 맞아 들락날락 하는자였다. 그는 수하에 수백명의 공안대를 두고 보안대와 엇섰다. 보안사령부는 먼저 교도대를 조직하고 4개 향의 8개 대대를 받아들여 재편성, 간부를 파견하였다. 국민당은 각종 수단으로 이런 지방무장을 끌어당겼으며 보안사령부에서 재편성하여 임명한 대대장을 국민당의 상좌퇀장으로 위임하였다. 11월 하순부터 류화일은 공개적으로 국민당간판을 내걸었고 향의 대대들을 국민당에 기울어지게 하였으며 항일련군간부였던 리문장을 대포시하에서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양상규는 미리 기미를 알고 관지를 떠났기에 살해당하지 않았다. 돈화주둔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중공돈화현위에 즉시 현소재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전을 담보할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현위는 교도대대와 함께 현소재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는데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겨우 륙과송까지 왔다. 때마침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돈화를 지나다가 양상규를 만나 돈화의 정황을 듣고 그들을 반격하기로 하였다. 하여 교도대대와 부근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두 개 중대가 합쳐 800여명이 쏘련홍군과 련계짓고 돈화로 쳐들어갔다. 5지대의 지원을 받아 요충지를 점령한 리공발이 류화일을 사로잡고 무장해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길가에서 류화일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공발은 마차를 가로막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류화일의 호위병 서규영 등이 무장해제를 거절하면서 보안사령부 전사 2명을 쏘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리공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하면서 마차에 뛰여올라 류화일을 끌어내리고 호위병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보안사령부에서는 뒤이어 쏘련홍군의 지지하에 류화일이 통제한 공안대대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돈화림시정부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4개 향은 여전히 토비가 통제하고있었다. 1946년 2월, 동북민주련군에서 파견한 득극명려가 돈화경에 왔다. 부대의 선견대가 서관툰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토비의 습격을 받았다. 격전 끝에 토비를 물리치고 진지를 점령하였다. 나흘후 대황툰에서 토비를 타승하고 말을을 점령하였다. 아군은 정치적공세를 들이대여 대포시하의 장영춘, 혹석의 석덕진 등을 항복시켰다. 기타 토비들은 혼란에 빠져 장춘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후에 장춘에서 전부 소멸되고 돈화의 잔여비적들은 산속으로 도망쳤으나 선전교양을 거쳐 대부분이 항복하였고 완고분자들만이 포로되였거나 진압당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겨울부터 시작한 토비숙청투쟁은 1946년 7월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동만근거지건설의 우환을 제거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보호하였다. 이번 토비숙청에서 아군은 4000여명 토비들을 소멸하고 각종 포 24문, 중경기관총 76정을 포함한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로획했다. (계속)  
75    제75장 조선의용군 제5지대 댓글:  조회:5269  추천:1  2014-03-07
  연변에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12월. 연길.) 조선의용군 여러 갈래 지대 편성해 남만 북만 동만서 국민당반동무장 섬멸 전국해방전투서 혁혁한 전공을 조선의용군 “7.7”사변전후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연안에 가서 중공중앙당교 아니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거나 공부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무정장군과 중앙당교의 진광화 등 많은 조선인혁명자들은 항일 최전선에 나아가 피어린 싸움을 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동지들은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에 배치되여 공작하였다. 일찍부터 중국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각 반일민족주의정당, 단체들은 각지에 간부학교, 군사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7.7”사변후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실현되고 전 중국인민들이 일제와의 성전에 떨쳐나서자 이에 고무된 조선인 각 정당, 단체들은 분산된 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38년 5월 김규식, 김약산이 령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발기에 의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련합하여 조선민족해방전선련맹을 결성하였고 1940년 5월에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동립당이 련합하여 김구를 위수로 한 한국독립당을 건립하였다. 이 두 조직은 서로 손잡고 중국항일력량과 련합하여 항일의 길에 떨쳐나섰다. 관내에서 맨처음 항전에 나선것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등 청년들이였다. 그들은 1938년 7월에 조선청년전지복무단을 조직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함께 무한보위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과 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고 국민정부군사위원회의 정치부의 지도하에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약산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군사학교출신이 대다수를 점한 이 의용대는 무한보위전의 포성속에서 태여났고 후에 3개 지대로 나뉘여 항일 제1선으로 달려나가 일본침략군과 싸우는 한편 적병사들에 대한 선전, 고동 공작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림으로써 중국정부와 인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다른 한편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한국림시정부에서도 건군공작을 다그쳐 1940년 9월 17일에 중경에서 광복군총사령부를 세우고 간부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그들은 3개지대의 군사인원들을 중경, 서안 등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적군공작을 돕는 한편 앞으로의 대부대건설계획을 세우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중일전쟁이 대치단계에 이르자 국민당정부는 소극적으로 항전하고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반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2년남짓이 국민당군대와 련합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려오던 조선의용대는 당시 화북지대의 20여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항일에로 불러일으키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팔로군과 손잡고 항일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중경, 호북, 광서 일대로부터 북상하여 끝내 팔로군총부의 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이르렀다. 그후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중국관내의 조선인항일력량을 통일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정부의 지지와 협조를 받고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총사령에 리청천, 부사령에 김약산을 추대한 광복군은 원 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성하고 김약산이 지대장을 겸하였으며 원 광복군 제2지대로 편성하고 림범석을 지대장으로 임명했다.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온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팔로군내의 조선동지들과 화북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청년조직과 련합하여 조선의용대를 화북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하였다. 2만5천리장정에 참가했던 무정장군을 사령원으로 박일우를 정치위원으로, 박효삼을 참모장으로 한 조선의용군은 전투력이 강한 항일무장대오였다. 항일근거지의 가렬처절한 반“소탕”전투에서 의용군은 헌신적으로 싸웠다. 진광화, 석정 등 의용군지휘자들은 성스러운 항일구국공작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였다. 그들의 영웅적업적은 전 중국인민들로부터 찬양을 받았고 항일근거지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1942년 7월에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재조직되였고 연안에 들어가서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최창익과 한빈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화북조선의용군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성립한후 무정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를 받으면서 많은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또 화북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항, 태악, 기로예, 진찰기 등지에 독립동맹분맹을 내오고 북평, 천진, 신향, 개봉, 석가장, 승덕 등지의 조선인 농민, 지식인, 중소상인들 속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북과 조선에 공작원을 파견하였으며 할빈일대에는 독립동맹 제12지부를 내왔으며 평양과 서울에서도 동지들을 쟁취하는 공작을 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화북에서 싸우던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은 팔로군과 어깨겯고 동북에 진출하여 일제의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새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들중의 일부는 조선북반부로 나가고 중경에 있던 한국림시정부 요인들과 중경, 서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은 “개인의 신분”으로 조선남반부로 돌아갔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   심양에 집결한 조선의용군(1945년 11월 7일.)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뒤인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명령에서 우리 나라 관내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적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인솔하에 관내에서 나와 도보로 동북으로 진군, 11월 4일 심양에 도착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지도기관은 심양에서 회의를 열고 변화된 형세에 대처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때 조선북반부에 진주한 쏘련군은 중국에서 나가는 조선의용군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의용군은 림기응변하여 부대를 1, 3, 5 지대로 편성한후 조선인이 모여사는 남만, 북만, 동만으로 나가서 중공중앙동북국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먼저 동북근거지를 건설하는 투쟁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제1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 정치위원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 정치부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 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경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명의 병력과 연안ㅡ조선혁명군정학교 졸업생, 각 항일근거지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보병 9개, 기관총중대, 경위중대 등 11개 중대를 두었다. 제1지대는 그후 리홍광지대로 발전하였으며 1946년 12월에는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로, 1948년 11월 심양이 해방된후 독립 제4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였으며 이미 1만2천여명 병력을 가진 정규군 사단으로 발전성장되였다. 1945년 11월 25일, 북만으로 진군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한다고 선포하였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주이에 리근산, 참모장에 김연이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아군 359려와 송강군구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목란, 통하, 방정, 연수, 상지 등 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와 토비숙청에 참가하면서 2000여명으로 병력을 늘였다. 3지대가 할빈으로 들어왔을 때는 병력이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할빈시의 위수임무를 맡은 3지대는 부대를 파견하여 동북국을 비롯한 성, 시의 주요한 당정기관을 보위하였으며 송화강대철교, 발전소 등 큰 곳을 수비하였다. 그리로 일부 병력을 시교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의 순조로운 진전을 보장하게 하였다. 1948년 1월,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였다. 그해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를 받고 할빈을 떠나 길림성 연통산일대에 가서 길동경비사령부의 조선인부대와 목단강에서 온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진 목단강군구 제14퇀과 함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편성되였다. 그해 10월, 3지대는 장춘포위전에 참가했다. 장춘이 해방된후 3지대는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1949년 3월,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후 3지대는 제4야전군 독립 164사 491퇀에 편입되여 료심전역에 참가했다. 1945년 11월 21일, 길림시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소부분인원을 남겨 길림시에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11월 29일, 화전현소재지에 주둔한 길림성보안총대 제7대대는 상부의 명령과 조선의용군 심양회의정신에 따라 12월말에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되였다. 이 부대는 화북에서 온 의용군을 골간으로 하고 7대대를 주력으로 화전현, 서란현, 교하현 등지의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조직한 무장대오로서 지대의 지대의 지휘부는 괴뢰만주국 화전현공서 울안에 설치되여있었다. 박훈일(朴勳一)이 지대장 겸 정치위원을 맡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치위원, 김극이 참모장을 맡았다. 지대부아래에는 6개 중대가 소속되있었다. 1946년 3월, 7지대는 화전현 보안퇀으로 개편되였다. 양상곤이 퇀장으로 임명되고 현위서기 왕소천이 정치위원을 겸임했으며 송무선이 부퇀장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창건된 뒤 길림지구에서 반혁명적무장을 짓부시는 투쟁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돈화역에서의 풍파   1946년초 룡정에 꾸려 많은 군정간부를 양성해낸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1945년 11월 9일,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동만을 향해 진군하였다. 5지대는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대오였다. 조선의용군 부사령이며 정치위원인 박일우가 제5지대의 정치위원을 겸했고 리익성이 지대장을, 전우와 리권무가 참모장을, 주혁이 정치부주임을 맡았다. 지대는 9개 중대로 구성되였는데 정찰, 경위, 무전, 통신, 악대 등 지대직속까지 합하여 대원이 900여명 되었다. 지대에는 참모부, 정치부, 공급부가 설치되여 있었다. 정치위원 박일우는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교장 김두봉)이였다. 박일우는 화룡현사람으로서 일찍 30년대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였다. 1945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대회에서 재중조선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활에 관한 보고를 하여 대표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지대장 리익성도 일찍 항일투쟁에 참가한 투사였다. 심양을 떠난 부대는 연도에서 조선부락 동포들의 환영을 수없이 받으면서 행군했다. 새하얀 조선옷을 떨쳐입은 부락민들은 동구밖에까지 나와 부대를 맞아주었고 마을에 들어가서는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군 했다. 의용군전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눈물겨운 전투담을 들려주었고 조선의용군행진곡 등 항일혁명가요를 배워주었다. 행군도중 리익성지대장은 행군속도를 다그쳐 동만에 진출하라 조선의용군사령부의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도보로 행군해서는 그 명령에 지정된 시간내에 동만에 도착할수 없다고 생각한 리익성지대장은 한 참모일군에게 청원역에 가서 기차를 구해보라고 지시했다. 역에 갔다온 참모일군은 기관차와 차량 10바곤은 구했으나 기관사가 없다고 했다. 기관사가 없어 골치를 앓고있는데 때마침 한 중대에 참군하기전에 기관사조수로 일한적있는 한 전사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차를 타면 길림까지 헐히 갈수 있다는 생각에 전사들을 기뻐날뛰였다. 의용군전사들을 꽉 박아실은 기차는 악대가 연주하는 “조선의용군행진곡”의 장엄한 군악소리속에서 서서히 반석역에 들어섰다. 플래트홈은 마중나온 수백명 조선인군중들의의 환호성, 만세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워낙 반석역에 잠간 멈춰 점심을 먹으려고 기차를 세웠으나 환영나온 군중들의 성의와 열성에 감동된 의용군전사들은 차에서 뛰여내려 환영군중들과 한덩어리로 엉켜 부등켜안고 돌았다. 남녀로소할것 없이 의용군전사들을 부등켜안고 “우리 군대, 우리 군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일우정치위원이 플래트홈에서 군중들을 향해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박일우는 제5지대를 대표하여 반석지구 조선인군중들에게 인사를 드리고나서 국제국내형세,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정책, 동북조선인들의 당면한 과업에 대하여 말했다. 박일우의 연설은 무시로 일어나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선인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 “조선의용군만세!”를 웨치면서 호응했다. 박일우는 반석지구 조선인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박정덕, 장천립, 채동성,차진 등10여명을 남긴다고 선포했다. 반석에 남은 이들은 그후 반석지구에 조직된 조선족자위무장대오를 기초로 하여 2개 중대의 조선인무장력량을 조직함으로써 반석지구의 인민민주정권을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확보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길림에 이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전원이 기차를 타고 갈수 없는 형편에서 먼저 2개 중대로 선발대를 무어 전우의 인솔하에 화물차를 타고 연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선발대를 태운 화물차가 돈화역에 멈춰섰을 때였다. 사면팔방에서 총성이 요란히 울리고 “네놈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차에서 내리면 살려준다!”는 중국말로 웨치는 고함소리가 어지러히 들려왔다. 그 웨침소리속에는 로어로 뭐라고 꽥꽥거리는 고함소리도 섞어있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파악한 전우는 당황해하는 전사들을 눅작혔다.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절대 총을 쏘아서는 안됩니다. 진상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그렇다쳐도 쏘련붉은군대까지 가담했길래 충돌이 생기면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게 될것입니다. 쏘련붉은군대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 지고무상의 권력을 갖고있으므로 절대 맹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째야 한단말입니까” “먼저 쏘련군대를 설복해야지요. 진상이 밝혀지면 문제가 해결될수 있습니다. 자, 모두들 무기를 놓고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립시다.!” 결국 선발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돈화시내로 압송되고말았다. 참모장 전우는 우선 붉은군대사령원을 만날것을 요구했다. 쏘련공산주의대학의 졸업생인 전우는 류창하게 로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는 자신은 쏘련에 있을 때 또꼬브라는 이름을 썼으며 지금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한후 연변으로 나가는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나 붉은군대사령원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발대가 돈화에서 국민당계통의 지방무장에 의해 억류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제5지대 대부에서는 상황을 즉시 조선의용군사령부에 무전으로 알렸다. 이에 조선의용군사령부에서는 이미 연길쏘련군사령부에 정황을 알렸다는 답전이 왔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교하현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여킬로메터 상거한 조선인부락에서 출발하여 돈화를 향해 강행군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연길쏘련군사령부의 강신태대위는 돈화사건에 대한 조선의용군사령부의 급전을 받고 즉시 돈화에 가서 쏘련군사령부와 교섭하였다. 전우와 강신태의 인내성있는 해석과 설복 끝에 자기들이 돈화보안사령부 류화일의 꾀임에 들었다는것을 알게 된 돈화쏘련군사령부에서는 5지대 선발대전원과 몰수했던 무기를 내놓았다. 위만군의 상위로 일한적 있는 국민당원 류화일은 돈화지구의 혼란한 틈을 리용하여 치안유지회를 조직했고 돈화현 현장자리에까지 기여 올랐다. 현장이 된후 이자는 돈화보안사령부를 조직했다. 류화일은 국민당특무들과 공공연히 결탁하여 돈화에 건립된 인민민주정권을 뒤엎고 돈화국민당당부까지 세웠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돈화를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화일은 일본군패잔병부대가 비밀리에 돈화를 거쳐 연변쪽으로 도망간다고 쏘련군사령부에 거짓보고를 했다. 류화일의 말을 믿은 쏘련군은 군대까지 파견하여 류화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제5지대 지대부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돈화남쪽의 림강툰에 이르렀을 때 돈화사건이 금방 해결되였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돈화지구에 인민민주정권을 세워주고 앞으로 동만지구의 혁명형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계획의 첫단계로 돈화의 반동무장을 소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돈화에는 8개 보안대대가 있었는데 7개 대대가 변절하여 류화일을 괴수로 하는 국민당측에 넘어가 있고 유독 1개 조선인대대만이 마호에 철퇴하여 투쟁을 견지하고있었다. 제5지대는 조선인대대와 손잡은후 주밀히 정찰하고 세밀하게 전투를 포치하여 12월 중순의 어느날 반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류화일의 반동무장을 일거에 섬멸해치웠다. 제5지대의 재편성   1946년 연길에 설립된 민주학원에서 원장 주보중과(앞줄 왼쪽 다섯번째)과 교직원들. 1945년 12월 8일 밤에 문정일이 조선의용군선견대를 거느리고 먼저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 관선정과 연변교육계의 박재하가 마중나갔다. 연길에는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을 맡았다. 12월 31일, 박일우,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제5지대 400여명 장병을 거느리고 연길에 도착하였다. 1946년 1월초순, 5지대는 연변경비 1퇀, 2퇀과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15, 16퇀을 편성하고 조양천에 교도대를 세웠으며 훈춘에 1개 중대를 파견하여 건군사업을 벌렸고 포병부대의 건립에 착수했다. 15퇀은 5지대의 절반 력량과 경비 2퇀이 합병한 부대였다. 1946년 3월, 15퇀은 길동경비 2려의 1개 퇀으로 되었고 그후에는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개칭되였다. 1948년 1월에는 동북군구 독립 6사에 편입되여 16퇀으로 되었다가 1948년 11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6사 466퇀으로 개칭되였다. 부대가 자주 재편성되는 과정에 한족(漢族) 1개 영이 편입되기는 했지만 기본상에서 조선인퇀의 본색을 확보하고있었는바 2영과 3영, 퇀직속의 대부분은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이 퇀은 라자구일대에서의 토비숙청, 하발령방어축성물로동, 동만철도경비, 길림외곽지구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등에서 견강한 집단으로 장성했다. 관내로 진군한후 이 퇀의 2영7련 즉 “김성범련”은 이름을 떨친 영웅련대, 모범련대였고 3영9련은 장강도하작전의 서막인 단풍전투에서 전투련으로 되어 대담하고 용감하고 신속하고 령활하게 전투를 하여 2분만에 1호부루를 폭파하고 6분만에 부두를 점령함으로써 전반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였다. 1949년 11월에 열린 156사 제1차 영웅모범대회에서 리순임, 정형련이 1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고 19명이 각기 2, 3, 4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였으며 김성범, 주광문, 박문수 등 13명의 렬사가 인민영웅으로 추인되였다. 16퇀은 1946년 3월에 동북민주련군 길동 경비 1려 1퇀으로 되었고 그후 동북군구 독립 1사 1퇀으로 개칭되였으며 1947년 8월에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0사 89퇀으로 개칭되였다. 이 퇀은 1946년 1월중순부터 삼도만, 대흥구, 묘령, 천교령 일대를 주름잡으면서 토비를 숙청했고 1946년 4월에 장춘 제1차 해방전투에서 “조선퇀”의 영예를 떨쳤다. 그후 화전, 로야령에서 운동전을 벌렸고 덕혜전투, 진단목전투, 법고추격전, 개원전투에서 다시 한번 “조선퇀”의 이름을 날렸다. 1948년 4월 25일, 10종대 30사는 개원에서 공로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89퇀의 박국제(특등공), 조영희(대공 2차)를 비롯한 103명이 대공수훈자로 표창받았다. 료심전역의 마지막단계인 흑산-대호산 저격전에서 89퇀 1영은 101고지를 쟁탈하는 관건적인 전투에서 아군 28사의 전우들과 함께 끝끝내 고지를 쟁탈하고 지켜냄으로써 흑산저격전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흑산저격전이 끝난후 89퇀은 제4야전군 47군 141사 422퇀으로 개칭되였고 관내로 진출하여 평진전역에 참가하고 장강을 뛰여넘어 곧추 중경까지 쳐들어갔고 그후 호남서부의 산악지대를 주름잡으며 “동북범”의 본때를 보여주면서 토비를 족쳤다. 훈춘에 파견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1개 중대는 1개 퇀으로 편제를 확대발전시켰다. 그리고 5지대의 성원들은 골간으로 조직된 포병대대도 그후 포병퇀으로 확대되여 제4야전군 포병부대의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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