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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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행문]두만강은 이렇게 시작된다(김철호) 댓글:  조회:2135  추천:17  2009-03-05
                                  약류하와 홍토수 정답게 몸을 섞어 적봉(赤峰ㅡ일명 紅土山, 해발 1321.4메터)은 구릉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백두산화산분출에 의한 부석은 거개가 검은빛인데 적봉을 덮고있는 부석은 이상하게도 적갈색이라 한다. 그러나 푸른 숲에 싸여있기에 보기에는 그대로 푸른산이다. 산정의 수평면적은 0.8평방킬로메터, 그 둥두렷한 산정에 올라 사위를 둘러보면 멀리로 크고 작은 연지봉과 백두봉이 손에 잡힐듯 가깝고 서쪽으로 몸을 돌리면 손거울같은 원지가 해볕에 반사되여 눈부시다고 적봉에 올라본적 있는 류연산씨가 말했다. 금방 보고온 원지가 저 산봉우리에 오르면 볼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불같이 달아올랐으나 사정이 그러하여 참을수 밖에 없었다. 원지의 직경은 180메터, 맑고 얕은 못속에는 꽃무늬가 돋힌 산천어가 자란다고 한다. 이 원지를 일명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라고 하는데 원지기슭에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옛이름은 만족어로 푸러후리, “룡구(龍狗)”라는 못이라 한다. 못가에는 매죽이라는 산열매가 아주 많았다. 둬자쯤 되는 작은 나무에 다락다락 달린 감푸른 매죽은 완두알만큼 했는데 새큼새큼한것이 먹을수록 맛났다. 철에 따라 산딸기며 들쭉들이 익는데 그 맛 또한 별미라고 안내원으로 나선 숭선진 김송춘진장이 자랑했다. 그러면서 일행중 녀성들을 돌아다보면서 이곳에 와서 녀성들은 무턱대고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짐짓 엄숙한 얼굴을 보였다. 어쩌구려 잘못 열매를 따먹고 임신할수도 있다는 말에 일행은 원지가 떠나갈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알고보니 원지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있었다. 400년전, 세 자매가 원지에서 목욕을 했다.푸쿠륜이라고 부르는 막내동생이 붉은 열매씨를 먹고 그만 임신하게 되였다. 남편없이 임신한 푸쿠륜은 아들 쿠리옹순을 낳았다. 쿠리옹순은 어엿한 사나이로 장성하여 부락의 수령으로 되였다. 그는 어머니의 분부에 따라 삼성(三姓)이라는 지방에 가서 그곳의 내란을 평정하고 국주로 되였으며 나라이름을 만주라고 하였다. 지금도 만족들은 쿠리옹순을 시조로 받들면서 “성자(聖子)”로, 푸쿠륜은 “천녀(天女)”로 모신다. 20세기에 와서 원지는 우리 민족의 현대전설을 전해주고있다. 항일전쟁시기였다. 한 시골마을에는 남편을 유격대에 보내고 의롭게 사는 옥녀라고 부르는 절색의 녀인이 살고있었다. 이웃마을 일제주국놈은 옥녀의 미모에 반해 겁탈하려 집착거렸다. 옥녀는 남편찾아 적봉으로 떠났다. 토벌대를 이끌고 적봉에 이른 주구놈은 옥녀를 보자 눈이 뒤집혀졌다. 깎아지른듯한 적봉이 병풍처럼 막히고 뒤는 원지인지라 더는 도망칠 길이 없게 된 옥녀는 치마를 머리에 둘러쓰고 늪에 뛰여들었다. 남편이 유격대를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는 못우에 비낀 아름다운 무지개를 타고 옥녀가 언녕 승천했을 때였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원지를 옥녀늪이라 불러왔는데 지금도 원지보다 옥녀늪으로 더 많이 불리운다. 옥녀늪으로부터 약류하(弱流河)가 몸을 감췄다 나타냈다 하면서 적봉을 향해 흘러간다. 그 적봉기슭에서 겨우 30메터되는 발치에 “21호변계비석(二十一邊界碑石)”이 세워져있다. 새하얀 돌비석 남쪽면엔 “조선”, 북쪽면엔 “중국”이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몸을 훌쩍 움직이기만 해도 금방 조선땅을 딛고 서있게 되는곳이다. 국경선표식이 처음 선것은 1712년 봄이였다고 류연산씨가 말했다. 청나라 우라총관 무커덩이 리조의 군관 리의복일행과 함께 백두산 5킬로메터 되는곳에 세운것이 첫 “정계비”였다. 너비가 한자여덟치, 높이가 두자세치되는 돌에 78자의 글을 새겼다는 정계비는 문헌에만 남아있고 실물과 원지점은 찾을 길이 없다는것이다. 그리고 광서 13년(1887년)에 두만강발원지의 암류가 흐르는곳에 경계석 10개를 세우고 비석마다에 “화하금탕고하산대려장(華夏金湯固河山帶旅長)”이라는 글자를 새겼다는데 역시 찾을길 없다는것이다. 21호변계선에서 조금 가면 옥녀늪에서 흘러오는 약류하와 조선측 서남쪽에서 흘러내리는 홍토수(紅土水)가 적봉기슭의 개바닥에서 련인마냥 정답게 손을 잡는다. 두만강은 이때로부터 한몸이 되여 곧추 천리를 흐르게 되니 바로 여기가 두만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약류하와 홍토수가 정답게 몸을 섞는 맑고 정갈한 개울을 마주하면 누구라 없이 숭엄한 기분이 된다. 남북 길이가 4메터, 동서 길이가 2메터인 합수목, 무릎을 넘을가 말가 하는 이 개울물이 나라와 나라의 지경이고 수많은 한을 싣고 흘러야 했던 천리강줄기의 1번지였던것이다. 이제 자기가 가닿아야 할곳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있는지 모른채 즐거운 첫발작을 떼버리는것이다. 철부지마냥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또릿거리면서 버들가지를 휘여잡기도 하고 풀잎을 꼬드기기도 하면서 꼬지깽이가 울끈불끈 솟은 개활지로 숨었다 나타났다 숨박꼭질하면서 잰걸음을 치고있는 두만강, 소꿉장난에 심취된 사내아이마냥 수없는 이야기를 조잘댄다. 합수목에 띄운 노란 금잔화 한송이가 눈깜박할새에 두 기슭의 버들과 버들이 맞대인 밑으로 숨어버렸다. 내 마음도 금잔화와 함께 두만강에 싣긴 기분이다. 천리길을 떠나는 심정이다. 아, 두만강 너는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연변일보 1998년 10월 1일 제3면
29    [기행문]만천성의 가을은 좋아라!(김철호) 댓글:  조회:2187  추천:38  2008-10-05
                                                   만천성의 아름다운 풍경 ㅡ울긋불긋 타오르는 단풍속에 백의녀 우뚝 솟아   10월 5일, 우리일행이 만천성풍경유람구에 도착했을 때는 단풍철의 그 찬란함이  고조를 이루고있을 때였다. 10.49평방킬로메터의 호면을 둘러싸고있는 준령의 초목들은 땅을 가르고나온 불씨와도 같은 단풍잎들에 울긋불굿 타올라서 화려가을의 장쾌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있었다. 왕청현관광국 국장을 지내면서 만천성풍경유람구를 구상하고 설계, 건설하는데 유력한 작용을 하다가 지금 왕청현문련 주석으로 활약하고있는 장문일씨가 나루터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9월부터 미모를 자랑하기 시작한 만천성룡구도정상에 우뚝 솟은 백의녀대형조각상을 구경하러 오라고 초청했다면서 그는 멀리 바라보이는 산정의 새하얀 조각물을 가리켜보였다. 파란 호수우에 우뚝 솟은 산정의 정상부위에 하얀 조각물이 아득하게 보였다. 우리는 유람선에 올라 호수를 건넌후 룡구도호텔에 짐을 부리우고 그대로 백의녀조각상이 있는 산정을 바라고 걸음을 재우쳤다. 룡처럼 구불구불 꿈틀거리며 뻗어내려온 암벽우에 콩크리트로 다져놓은 계단이 있어 오르기가 한결 수월했다. 세멘트와 모래를 등짐으로 져올려 한계단 두계단 다졌다고 한다. 조금 오르니 량옆의 파란 호면이 발아래로 보이였다. 노란 참나무잎이 익어있는 가지새로 내려다보이는 호면의 푸른 색갈은 참으로 현란하기만 한테 그 파란 비단우에 울긋불긋 단풍물이 올라있어 말그대로 금상첨화였다. 동행인 작곡가 김경애씨와 녀류시인 최은희씨는 연변에 이처럼 산수가 어우러진 풍경구가 있는줄 몰랐다면서 연신 혀를 찼다. 여러번 만천성을 다녀온적있는 수필가이며 문학평론가인 장정일씨는 멀리 뻗어있는 호면을 가리키면서 유람선을 타고 몇시간이 좋이 걸려야 한바퀴 돌수 있다고 그녀들에게 설명해주고있었다. 오를수록 만천성의 멋진 모습이 더욱 가관으로 눈에 안겨들었다. 오른쪽을 둘러보아도 파란 호수요, 왼쪽을 둘러보아도 파란 호수, 우리가 걷고있는 산정은 말그대로 파란 물에 둘러싸여있는 하나의 섬이였다. 저 멀리서 유람선이 조용한 수면에 큼직한 물자욱을 새기면서 괴물처럼 흘러온다. 유람선에 앉은 사람들은 흥겹게 손을 젓고있었다. 이번엔 저쪽으로부터 뽀트가 달려오고있었다. 뽀트는 재간있는 재봉사가 가위로 푸른 비단을 쫙 가르는듯 쏜살같이 미끄러져갔다. 아무리 좋게 다져놓은 콩크리트길이라 해도 가파른 절벽길인지라 오르기에 여간 숨가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행 내리막길이 나타나면 모두들 가볍게 몸을 쉬우면서 씽씽 내려가기도 했다. 절벽길을 올랐다내렸다 하면서 정상을 톺느라니 백의녀조각상도 점점 크게 륜곽을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커다란 동굴이 앞에 나타났다. 장문일씨는 관광객들의 안전과 유람구의 운치를 더해주기 위해 바위를 뚫고 저쪽으로 통하게끔 인공으로 동굴을 뺀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동굴속에 들어서니 여간만 시원하지 않았다. 몇사람이 마음대로 팔을 휘저으며 걸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넓은 20메터쯤 되여보이는 동굴속은 더위를 피하기에는 참으로 제격인 휴식터였다. 동굴을 빠져나오니 다시 내리막길, 쉽게 내리막길을 내린후 다시 숨을 몰아쉬면서 오르는 절벽 중턱에 큼직한 거부기조각이 누워있었다. 일행은 그 조각상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후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껏 룡의 허리를 타고 여기까지 온것이였다. 룡구도호텔이 들어앉아있는 널다란 곳은 장문일씨의 설명처럼 클림없는 큰 거부기였다. 장문일씨는 거부기와 룡이 드러누워있는 룡구도의 전경을 가리키면서 룡구도에는 룡과 거부기의 풍류스러운 전설이 깃들어있다고 했다. 그 옛날 룡구도에 거부기부부가  살았다. 그런데 안해거부기가 좀 바람기가 심해서 남편거부기는 늘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거부기는 먼길을 떠나게 되였다. 떠날 때 남편거부기는 자신의 역한 배설물로 집주위를 금그어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음심을 품고있던 동해의 룡이 어느새 이 소식을 듣고 구름을 타고 날아왔다. 그러나 배설물로 금그어놓은 속으로 도무지 들어갈수가 없었다. 안해거부기는 애타게 기다리다 못해 몸소 나와서 룡을 업고 집안으로 들어가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였는데 그 정이 어찌도 깊고 뜨거웠던지 동품한 그대로 굳어져버린것이 저렇게 한덩어리가 도여 여직껏 있다는것이다. 장문일씨의 옛말에 도취되여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일행은 다시 걸음을 다그쳤다. 정사에 지쳐 수만년을 굳어진대로 있는 거부기와 룡의 풍류이야기가 깃들어있는 룡구도는 드디여 그 정상ㅡ룡두를 드러냈다. 우리는 언감생심 룡의 머리우에 성큼 올라섰다. 바로 그 머리우에 웅장한 백의녀조삭상이 하얀 웃음을 머금고 기다렸다는듯이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룡구도언저리로부터 여기까지 우리는 1200메터 로정을 걸어올라온것이다. 《이 백의녀조각상은 높이 18메터, 무게 500톤입니다. 총 530만원이 투자되였지요.》 《와! 엄청난 미녀이군요!》 룡구도정상에 미녀를 모셔오기 위해 50만원을 투자하여  부암촌으로부터 산령을 따라 길을 뺐다고 한다. 사천미술학원에서 설계하고 제작한 이 미녀의 옹근 몸체는 90개의 커다란 석재로 무어져있는데 가장 작은 석재가 6톤, 가장 큰 석재는 13톤! 호면에서 220메터의 정상에 우뚝 솟은 백의녀는 틀림없는 우리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녀인상이였다. 마늘을 든 오른손을 가슴언저리에 포근히 품고있고 쑥 한모숨 쥐고있는 왼손을 가벼이 드리우고있는 녀인은 멀리 파란 하늘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볼수록 다정하고 아름답기만한 백의녀는 파란 호면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향기로운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에 유혹되여  관광객들이 매일 여기에 모여드는것이 아닐가. 《작년에는 8만7000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는데 금년에는 훨씬 더 많을겁니다. 7ㅡ8월에 일평균 2000ㅡ3000명이상씩 다녀갔으니말입니다. 올 때 보았겠지만 배초구에서부터 여기까지 이미 콩크리트길이 닦아져있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장문일씨는 천메터문화주랑, 기원당, 민속촌, 식물원, 민속박물관, 명인관, 스키장, 천녀각, 종고쌍탑, 성급(星級)호텔 등 만천성의 건설계획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면서 왕청의 관광업에 대해 락관했다. 백두산을 순수자연 그대로의 경관이라고 하면 만천성은 인문경관ㅡ인간의 가공에 의해 자연의 수려함이 더욱 도드라지게 묘사된 작품이라는것이다. 우리는 장문일씨의 자랑넘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름다운 흰옷의 녀인을 다시다시 우러러 보았다.   ( 이 기행문은 2002년 10월 연변일보에 실린것이고 사진은 금년 2008년 10월 1일ㅡ2일에 찍은 것입니다.)  
28    [기행문]호태왕비(김철호) 댓글:  조회:1881  추천:24  2008-09-25
                                                                                (사진은 1998년에 찍은 호태왕비이다.)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5   ㅡ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6.39메터의 거대석   우뚝 솟은 웅장한 기세와 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호태왕비을 바라보노라면 우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세워져있는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왕 담덤(淡德)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데 호는 령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관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작고하기까지 22년간 64개의 성과 1천4백개의 촌락을 정복하면서 서북으로 료하를 넘어 료서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 잔존촌락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한강계선의 백제령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 신라를 위압하여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락동강하루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족을 격퇴시키면서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떨친 고구려에서의 가장 걸출한 국왕이다. 비석은 높이 6.39메터, 각면의 너비 1.3ㅡ2메터 사이이고 중량이 37톤이나 되는 하나의 방추체자연형모양의 회색 응회암(凝灰岩)의 화산석을 조금 다듬어서 만든것이다. 석좌(石座) 역시 거대한 화강석으로 다져졌는데 보매 원래는 한덩이였댔으나 어떤 원인으로 깨여져 지금은 세쪽으로 되였지만 의연히 땅에 단단히 배겨있으면서 비석을 굳게 받들고있었다. 호태왕비의 석재는 모래구성이 있는 응회암으로서 이런 종류의 석재는 오직 화산구부근에서만 발견되는 돌이다. 집안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돌이 나는곳이 없다. 그러니 가능하게 백두산천지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온것으로 사료된다. 머리속에 거대석재를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보아도 저절로 혀가 차진다. 애급의 금자탑을 세우는 그 장면과 뭐가 다를바가 있겠는가. 또 37톤이나 되는 거석을 들어 올릴수 있는 설비도 없었던 그 시기에 이 돌을 어떻게 세웠으며 무슨 수로 1580여년의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끄떡 않게끔 고정해놓았을가. 그리고 사면 석면에는 어떻게 글을 새겼고… 비석은 1면에 11줄, 2면에 10줄, 3면에 14줄, 4면에 9줄 이렇게 모두 44줄의 글자를 새겨넣었는데 한줄에 41자가 새겨져 1804자가 되겠으나 결자가 생겨 실제로는 1775자이다. 줄과 줄사이에는 세로로 칸을 나누어 선을 그었으며 좌로부터 우의 순서에 따라 정방형으로 조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손만큼 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북부여에서 왔노라. 그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노라. 알을 깨고 출생하매 원래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노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신화로터 서술되여있는 비석에는 왕위의 계승과 전쟁업적, 조상의 묘를 지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당시의 당부까지 까근히 기록되여있어 그야말로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15세기 좌우, 조선의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면서 이 거대석을 금나라 황제의 묘비가 아닐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0년에 와서야 당지 채벌농민들에 의해 이끼가 차고 넝쿨이 덮인 선돌로 발견되여 소문이 났는데 청나라 화인현 현지사 아래에서 일하는 관원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깊이가 파지게 된다. 관월산은 돌에 낀 이끼를 뜯다가 뜻밖에도 글이 새겨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탁본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끼가 덮여 도무지 되지 않아 겨우 뜯어낸곳에서부터 몇글자를 탁본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본한것을 친구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우분, 마분을 바르고 마른후 불을 달아 이끼를 없애고 탁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불에 달구어지면서 돌이 튀는 바람에 귀중한 몇글자를 손상받게 되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불에 튄것 같은 자리와 금이 선곳이 보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는 호태왕비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호태왕비의 서법은 소박하고 무게가 있으며 웅위롭고 대범하며 안정된 산과 같이 드맄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하다.》 호태왕비건립년대는 기원 414년, 바로 중국의 동진시대로서 진나라 황실이 남하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로인해 중원지구가 계속 전화를 겪고 황실이 흔들리자 이 혼란한 틈을 타 고 구려가 이 지역에서 신흥력량을 이루었다. 고구려정권이 형성된후  무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령토 역시 부단히 확대되여 직접 황실까지 위협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군사를 파하여 토벌과 진압을 단행했으나 이러한 전쟁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더욱더 정치경제의 높은 봉우리로 밀어올려주었을뿐이였다. 또 이 전쟁은 중원의 서법예술을 북방에 전달하는 역활을 하여 고구려민족의 기질과 상호 융합되게 한것이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의 력사를 탐색하는데 극히 중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자료보고(寶庫)이며 고구려민족의 지혜가 슴배인 건축예술의 명주이다. 호태왕비는 압록강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유풍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념비로 솟아 세인들을 불러들일것이다. 우리들은 경탄의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호태왕비를 우러러 크게 머리를 숙였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6일    
27    [기행문]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김철호) 댓글:  조회:2288  추천:30  2008-09-25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4 ㅡ1400년 추월추풍에도 색바래지 않은 고구려고분벽화   길림성 백산시문물관리소에서 일하고있는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가 이날 우리를 인도해 오회분탐방을 진행했다. 진유국씨는 다년간 고구려유적에 대해 깊이 탐구한 한족학자로서 집안의 유적지를 들고꿰는 사람이였다. 오회분참관도 금지되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관리일군과 막연한 사이였는지라 손쉽게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묘에 대한 시간적 제한없는 참관을 할수도 있었다. 아래에 서술되는 묘실에 대한 묘사와 벽화에 대한 묘사는 진유국씨가 그날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설명해주어 가능했었다. 또 그가 다년간 연구한 자료와 《집안문물지(集安文物志)》가 큰 도움을 주었다.   통구고분군 우산묘구에는 5기의 높고 큰 봉토묘가 있는데 동서 한일자로 배렬되여있고 5개의 큰 투구같기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오회분(五盔墳) 또는 오괴분(五塊墳)이라고 부르고있다. 오회분은 통구평원중부 우산묘구 최남단에 위치해있는데 남면은 철도주택구이며 북면은 논밭이다. 남으로 집안역과 350메터쯤 떨어져있고 서에서 동으로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인데 민간에 유일하게 개봉한 벽화무덤이다. 이 묘는 항일전쟁때 이미 도굴다했었다.   바깥문을 따라 묘도에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묘실로 인도하는 용도(甬道)좌우에는 힘찬 력사(力士)가 그려져있었다. 한사람은 활에 살을 먹여 당기고있고 다른 한사람은 손에 창을 쥔채 묘실을 지키는 모습이였다. 순간 묘실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싸이면서 종교적성역에 들어선것 같은 착각이 오는것 같았다. 묘실의 평면은 반듯한 정방형으로 동서길이 4.37메터, 남북 너비 3.56메터에 정교하게 다듬은 큰 화강암석재로 쌓았고 백회로 틈을 메웠다. 네벽은 높이가 2.18메터로 약간 안으로 경사졌고 그 우로 량방(樑枋)을 바로 두었다. 량방우는 말각천정으로 교차되는 구조이며 맨 우는 반듯한 돌로 천정을 막았다. 묘실의 높이는 4메터쯤 되여보였다. 묘실안에는 세개의 돌로 된 관대를 두었는데 동서로 배렬되였다. 관은 없고 텅빈 관대만이 남아았었다. 용도 좌우벽을 비롯해서 묘실 네벽, 천정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절묘하고 신비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벽화는반듯한 석재 암면우에 직접 그려졌는데 찬란하고 다채로우며 화려하고 웅장했을뿐만아니라 뛰여나고 류창했다. 묘실 네벽에는 큰 폭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있어 전체 벽화의 주체를 이루고있었다. 머리는 남을 향해 치켜세우고있는 자태인데 황, 록, 홍갈색을 입혔다. 사지는 흰 날개가 달려있고 발톱은 예리했다. 이 묘의 벽화중에는 룡이 모두 39마리 있다고 한다. 서벽에 그려져있는 벽화는 남으로 뛰여나오는 자세였다. 몸은 백색이고 묵선으로 얼룩무늬를 묘사했으며 복부는 분홍색이였다. 다리뒤에  흰 날개가 달려있었다. 남벽은 용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량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주작을 한마리씩 그렸다. 부리는 뾰족하고 가늘며 붉은 색은 불타듯 강렬했다. 몸은 홍색, 꼬리와 날개는 황색, 홍색으로 구분되여있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서로 마주보며 복판 련화자에 서있는 모습이 금방 날개치며 날아갈것만 같았다. 북벽은 현무(玄武)인데 거북과 뱀이 뒤엉켜있었다. 거북은 몸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머리를 돌려 우를 향하여 아래로 뻗쳐있는 뱀머리와 상대하고있었다. 묘실 네귀퉁이에는 괴수가 천정기둥을  받치고있는데 모두 짐승얼굴에 사람몸이였다. 뿌리있는 라체였다. 신비하고 상징적인 주제를 합리적인 배치와 보완적인 배렬을 통해 현란한 색채와 동중정(動中靜)의 붓길로 표현한 기교에 저절로 혀가 차졌다. 벽화의 다른 부분의 내용은 신선, 우인(羽人), 비천(飛天)으로 천정석말각에 교차된 천정우에 그려졌다. 첫번째 천정석의 4면에는 각각 룡이 한마리씩 그려져있는데 발은 량방에 서있고 배와 등은 천정끝에 닿아있었다. 입은 크게 벌려져있어 마치 석벽우의 작은 구명을 물고있는것 같았다. 구멍안에 백회흔적이  보이는것으로 미루어 진주거나 옥석같은것을 상감으로 장식했었지 않았을가 짐작된다. 동남면 말각석우에는 오른쪽으로 소머리를 한 사람과  비천이 있었다. 소머리를 한 사람의 눈은 송록석(松綠石)을 상감했고 몸체는 선인의 형태로 갈색의 깃이 뽀족하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록색의 천이 졸라매여져있었다. 오른 손에는 벼이삭을 쥐고 뒤를 향해 무엇인가를 부르고있었다. 그 뒤는 비천인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코수염을 길렀다. 황색의 깃이 뾰족하고 소매가 긴 도포를 입었는데 오른 손에는 홰불을 들고있었다. 동북에는 복희, 여와의 일월신이 그려져있었다. 동방의 천지창조신이다. 서북에는 룡을  탄 선인과 나는 기발을 탄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서북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制輪神)이 있다. 그리고 제륜신의 오른쪽에는 갈색의 긴 우의(羽衣)를 입은 사람이 보리수아래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조작하고있는데 틀림없는 야철신(冶鐵神)이다. 고구려 제철업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는 벽화이다. 두번째 천정석의 각면에는 룡을 타고 앉은 기악천인(伎樂天人)이 그려져있었다. 천정석아래와 천정의 두껑돌에는 몸을 틀고있는 룡 또는 룡호상박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추상적인 소재의 현실적인 표현은 그야말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진유국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 묘의 벽화에는 원래 도금무늬가 입혀져있었고 조수(鳥獸)의 눈은 청옥(靑玉)으로 상감되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선인의 오른쪽 눈에 송록석이 박혀있는 외에 그 나머지 상감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상감을 입힌 흔적만 있을 따름이였다. 봉토의 규모, 화면내용의 풍부하고 화려함으로 볼 때 이 묘임자는 고구려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굉장한 묘실구조와 완숙한 회화기교로부터 고구려인들의 뛰여난 재능을 충분히 볼수 있었다. 1400년의 추월추풍속에서도 의연히 생동한 색채를 보존하고있는 벽화를 우러르노라니 한편 고구려는 강대한 국력을 갖고있는 문화의 대국이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났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3일
26    [기행문]동방의 피라미트ㅡ장군총(김철호) 댓글:  조회:2389  추천:30  2008-09-23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3   피라미트형의 고분 장군총(將軍塚)은 집안시교의 동북쪽 5킬로메터쯤 상거한 룡산기슭에 우뚝 솟아있다. 마주하는 순간 애급의 피라미트를 바라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누구라 없이《금자탑!》하고 부르짖게끔 웅위롭기 한량없는 고구려의 적석고분이였다. 뭇박힌듯 우두커니 서서 그 장엄함에 매혹되여 련속 경탄을 터치는데 예쁘게 생긴 안내원 한족아가씨가 장군총에 대해 까근히 해설해주었다. 장군총의 외형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바닥밑변 한변의 길이는 35.6메터, 높이는 12.4메터 된다. 웃부분은 뽀족하여 면마다 보호하기 위한 큰돌이 세개씩 세워져있다. (12개 받침돌가운데 1개가 잃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있다.) 1100여개의 세밀히 가공된 석재가 사용되였는데 가장 큰 석재의 길이는 5.7메터, 너비는 1.12메터, 두께는 1.10메터나 되였다. 장군총에서 서북 20킬로메터 떨어진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다리부근에서 고구려채석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장군총석재와 석질이 똑 같다고 한다. 지금도 정자리가 또렷한 돌과 채 다듬지 않은 석재가 널려있는 채석장은 장군총석재의 원지임이 틀림없다고 하니 돌을 캐여 현지에서 잘 다듬은후 20킬로메터의 험하고 가파로운 산길을 운반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땡볕에 그을고 겨울의 한풍에 얼면서 선혈로 이룩한 고루려사람들의 장거이다. 맨 밑층의 석재는 허리께를 넘었다. 잘 드는 칼로 썩둑 벤든 곱게 다듬은 석재를 손으로 쓸어보니 너무도 깔끔했다. 정자리 하나 없이 다듬느라니 얼마마한 정력과 지혜가 들었으랴. 자그마한 오차도 없이 모가 딱 맞게 다듬은 석재는 현대도구로 가공한대도 이렇게 바를수가 있을가.   작은돌 무게 15톤   릉묘의 무너지을 방지해 기대여놓은 보호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였는데 높이가 3.5메터쯤씩 되여 보였고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장대석을 받쳐놓은 곳은 지금도 평형을 잡고있는 반면 하나 잃어져있는 뒤면 오른쪽 벽은 돌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곧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참으로 멋으로 기대여놓은 장대석이 아니라 1600여년의 세월을 버티여주게 한 기둥석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구려사람들의 건축공예에 다시 한번 혀가 차졌다. 다섯번째 층에 묘실까지 통하는 구명이 나있는데 일찍 도굴당할 때 낸 구멍자리라고 한다. 거대의 암석을 어떻게 깨고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묘실에 들어서니 길이와 너비가 5메터쯤 되고 높이가 그보다 좀 더 높아보이는 널방에 장방형 석관좌가 두개조로 나뉘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왕과 왕후의 관을 놓았던 자릴일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의 서남쪽 1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관개토왕비가 서있어 이 무덤이 가능하게 광개토왕릉묘라고 하는 일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이 확실치 않아 어느 왕의 릉묘인지 모르나 확실히 왕의 릉묘인것만은 사실인것 같았다.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원을 3세기무렵까지 밀고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이 적석총은 그 이전의 무덤이 아닐가 생각된다. 빤빤한 묘실벽에 한점 벽화도 그려저있지 않은건 묘주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러한  문화가 도래되지 않았기때문일것이다.   탄성이 나오는 암괴   묘실의 정상부는  한개의 통 암괴로 덮였는데 60평방메터의 50톤 되는 돌판이라고 한다. 저런 암괴를 어떻게 얹었을가. 탄성이 나오지 않을수 없다. 그 돌판을 버티게 쌓은 묘실벽은 가쯘히 다듬은 석재로 6층되게  쌓아올렸는데 귀가 딱맞고 틈서리가 조금도 없이 맞물려있었다. 묘실을 나와 무덤꼭대기에 오르면 회색무늬의 기와쪼각 같은것을 손쉽게 주을수 있었다. 네면 가장자리의 돌에 인공으로 다듬은 기둥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있게 많이 뚫려있는데 보아하니 전각을 세웠던 자리인것 같았다. 고구려의 대형적석묘 웃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되여 있었다는 기재도 있으니 전각이 세워졌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군총뒤의 북쪽 50메터쯤 떨어진 곳에 순장무덤 한자리가 있는것이 보였다. 그 형태는 돌기초우에 세운 돌막이였다. 이런 무덤이 원래 다섯자리 있었다고 하나 지금에 남아있는것이 이것 하나뿐이다. 역시 도굴당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빤히 내다보일만큼 구멍이 펑 뚫려있고 한모서리가 허무러져내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면바로 직하하고있는 점심때쯤이라 장군총꼭대기에 름름히 서서 허리에 손을 찌르고 사위를 둘러봄이 사뭇 위무당당한 기분이였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이 되도록 되여있고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북쪽으로 룡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니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과 조선의 군산이 눈에 잡혀온다. 이 땅에 살면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금방 피부에 닿는것만 같았다.   연변일보 1999년 2월 22일.  
25    [기행문]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김철호) 댓글:  조회:2270  추천:35  2008-09-19
                                          환도산성전경 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2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킬로메터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유리왕 22년(기원 3년) 수도를 졸본ㅡ오년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이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이어져내려 압록강북안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백산계 로령산맥의 산악에 위치해 있다. 웅장한 암산(岩山)을 타고 축조되여 남향개면(南向開面)하였고 고구려산성의 특징인 포곡형(包谷形)으로 골짜기를 끌어안은 모양이 보기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면서 걸음마저 들떠졌다. 여기가 바로 만주땅을 호령하고 중원까지 힘줄을 뻗치면서 동북아의 호랑이로 틀고앉았던 고구려제국의 발전기지였단 말인가. 옹성을 가진 성문이 있었다는 남문유적지를 쑥 꿰면서 곧바로 성내로 걸어들어가는 마음이 자꾸만 설레이였다. 발부리에 걸채이는 허무러진  성벽의 돌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와파편을 바라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의 외각에 있던 군사수비성으로 국내성과 거의 동시에 쌓은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하거나 장기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비성을 두고 때로는 수도로 쓰기도 하였다. 환도(丸都)는《알맹이》라는 뜻이다. 즉 중핵도시란 의미와 함께 수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가 한창 밟고있는 이 땅이 거의 2천년전부터 400여년을 고구려문화를 형성하고 그 빛발을 만방에 뽐냈던 황성옛터인것이다. 남문을 금방 통과한후 곧추 바라보니 옹성북쪽에 산 같아보이는 둔덕이 눈에 띄였다. 전투지휘소로 알려지는 점장대라는것이다. 바로 그 둔덕의 동남쪽에 50평방메터쯤 되여보이는 작은 늪이 멀리서도 파란 물기를 반뜩이고있는데 유명짜한《음마지(飮馬池)》라고 한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재위 기원 18년ㅡ44년) 11년 7월,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전방안을 짜는데 좌보(左輔) 을두지가 맞서싸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어놓으면서 수적으로 렬세이기에 꾀로 물리쳐야 한다고간했다. 왕은 을두지의 계략에 머리를 끄덕인후 성문을 굳게 닫고 적들의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수십일을 굳게 지켰으나 적들이 도무지 포위를 풀려고 않자 급해난 왕이 다시 을두지에게 계략을 물었다. 이에 을두지는 한나라군사들은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견뎌내지 못하기를 기다리고있으니 못속에 잉어를 잡아서 술을 곁들여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잉어와 술을 받고는 곱다라니 포위를 푼후 퇴각해버렸다. 성안에 물과 고기, 량식이 충족한줄로 여겼던것이다. 이런 유명한 사화의 산지인 음마지를 바라고 금방 가을밭갈이를 마친 밭사이를 꿰지르는 걸음이 급하기만 했다. 마른 풀에 둘레를 가리우고있는 작은 늪은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천만 부족했다. 잉어인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기르기엔 지금엔 힘든 늪이였다. 그러나 늪가에 앉아 맑은 물에 손을 잠그고 지략이 넘치였던 고구려장군의 충혼을 빌기에는 마음이 넉넉하기만 했다 음마지에서 자리를 떠 높이 11ㅡ12메터쯤 되여보이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와 집안시의 한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성의 지형이 더욱 눈에 잘 안겨왔다. 자연이 만든 봉우리들의 등성이를 리용하여 석축된 산성은 동, 서, 북의 3면은 거의 반원형을 이룬 험준한 암산릉선을 돌아가기때문에 성외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넓다란 언덕을 이루며 남벽만이 지세가 낮아진 강안절벽우에 있어서 천연적으로 키모양을 이루고있었다. 10만명을 능히 주둔할만큼의 장소였다. 성벽 총둘레가 길이가 6951메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76메터이다. 성안에는 4ㅡ5세기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추돌이 줄지어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있다고 한다. 동쪽 그닥 높지 않은 릉선우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산성하고분군》이 한눈에 잡혀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웅위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군의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은 한폭의 거대한 화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 환도산성주변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집안지역 전체에는 1만2000여기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고분도 있지만 직경이 60메터 넘는 엄청난 크기의 고분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이같이 거대한 고분군은 고구려의 문화수준과 함께 경제력도 뛰여났음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강한 힘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700여년 강국으로 존속할수 있은 그 위대한 힘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가.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으로 대외팽창을 강행했으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시기는 동북아세아의  력학관계가 급변하면서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외교라는 복잡한 신질서가 구축됐다. 이 틀속에서 고구려는 지리적리점과 황해의 해양활동권을 활용해서 중핵조정자로서의 역활을 했다. 5ㅡ6세기경의 고구려령토에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한족의 농경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그리고 조선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였다. 그러니 고구려가 동북아세아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집결된 중심지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화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우쩍 키워 고구려제국의 찬란한 력사를 이룩했을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28일      
24    [기행문]고구러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김철호) 댓글:  조회:2030  추천:28  2008-09-19
ㅡ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1   기원 3년부터 400여년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그 력사를 짙에 수놓았던 압록강중류지역 집안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 졸본 또는 홀성골성에서 천도한 국내성(國內城)의 초로한 잔해는 집안시내 주택가의 아빠트단지에 포위되여있었다. 유적은 지상 2메터 정도까지 돌이 남아있을뿐 볼품없이 방치돼있어 마주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장방형의 석재로 5메터 높이의 성벽을 거의 2700메터나 쌓았다는 웅기의 풍치는 어데로 가고 페허를 방불케 하는 돌각담으로 남았을가. 국내성은 동쪽의 룡산, 북쪽의 우산 그리고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칠성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지형,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천험의 요새요 천혜의 도읍이였다. 서쪽과 남쪽의 천연적인 해자(垓子)외에도 동쪽과 북쪽의 성벽을 따라 건해자(乾垓子)의 흔적이 있는데 폭이 10메터쯤에 이르렀으나 시가지로 형성되면서 흔적이 거의 없이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땅을 도읍으로 정한 유리왕은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기성세력의 등쌀에 배겨낼수 없었던 고구려시조 주몽은 단신으로 탈출, 졸본(卒本)에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우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였으나 아들 유리는 어머니 례씨와 함께 부여에 남아 남들로부터《애비없는 후례자식》이라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상을 지꿎게 따지는 유리의 물음에 어머니는《일곱모진 바위돌우의 소나무아래에 유물을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떠날 때 한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유물을 찾아 산과 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기 집 퇴마루밑에서 일곱모진 주출돌과 주추돌우에 세운 소나무기둥을 발견하고 거기서 부러진 칼토막을 찾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 끝내 태자로 된후 왕업까지 이어받는다. 유리왕 21년 3월에 나라의 교제(郊祭)에 쓸 됒가 달아났다. 옛날 고구려사람들은 돼지를 신에게 바치는 례물임과 동시에 국도를 정해주거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통력을 지닌 짐승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돼지가 달아났으니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은 장생(掌生) 설지를 시켜 돼지를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岩)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한후 돌아와 아뢰기를 국내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며 또한 노루와 고라니와 자라와 물고기가 많이 나니 왕이 만약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리익이 무궁할뿐만아니라 또한 병혁(兵革)의 두려움도 면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해 9월 왕은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후 유리왕 22년(기원 3년) 국내에 천도하였다. 그러니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수도인것이다. 성의 평면구조는 거의 네모꼴이며 산하(山河) 의 방향을 따르고있다고 할수 있어 동남향이다. 둘레는 2686메터, 성내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조양가와 동서를 가로지나는 승리로, 북쪽의 단결로로 이루어졌는데 옛 고구려시기에도 성중의 주요한 도로였다고 여겨지며 이들 도로가 통하는 6개의 문 역시 옛터일것이다. 4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문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성은 아빠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 길이 가로세로 뻗어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되여가고있었다. 다만 북쪽의 아빠트단지 사이에 마치 뚝처럼 5ㅡ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어있다. 통구하옆 주택지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측간의 벽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집안시박물관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있는 고구려석재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톺았다. 그 하나하나가 비할데 없이 귀중한 유물이건만 마치 임자없는 물건마냥 사철 눈비를 맞으며 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풀려지는것 같았다. 고구려건국전후의 각종 류형의 출토문물과 건축유적모형, 환도산성지형모형, 대형호태왕비탁본 및 사진, 국내외 학자들이 호태왕비를 연구한 저작, 자료, 고구려무덤의 연변관정을 보여주는 도편과 왕릉사진, 고분벽화사진…. 이러한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소개되고있었다. 기원 3년부터 기원 427년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하기전까지의 424년의 그 비운의 고구려력사가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제 다녀보아야 할 환도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고분벽화 등을 눈앞에 그리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여야 했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1일      
23    [기행문]상경룡천부(김철호) 댓글:  조회:2106  추천:47  2008-09-01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22    [기행문]두만강에 단풍물결 너넘실(김철호) 댓글:  조회:2050  추천:43  2008-09-01
ㅡ두만강상류 가을산책 단풍의 선경대 9월 28일 오후, 화룡시 선경대에 도착한 취재팀은 바위와 단풍 그리고 푸른 솔이 어루러져 한결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있는 기이한 경관을 바라보면서 환성을 터쳤다. 칠색단저고리를 받쳐입은 고려봉과 금계봉은 다정한 자매마냥 마주서서 예쁨을 비기고있는데 해발 921메터의 독수봉은 누런 갑옷을 떨쳐입은 장수마냥 기세등등하다.가래나무, 버드나무, 개암나무의 단풍은 이미 걷히고 참나무가 한창 불타고있었다. 그속에 섞여있는 고로쇠나무는 새빨갛게 익어 만산의 일점홍으로 유포하다. 칠성암 오른쪽비탈을 꺾어도니 산으로 오르는 통로가 나진다. 독야청청한 고솔과 단풍물이 팍 오른 잡목사이로 한오리의 오솔길이 열리는데 울긋불긋한 단풍속에 섞인 푸른 빛은 더욱 푸르러보였다. 반룡송이며 궁룡송이며가 오늘따라 유달리 의젓해보였는데 그것은 단풍옷을 입은 잡목들에 둘러싸였기때문인것 같았다. 아츠랗게 쳐다보이는 천자암(千姿岩)은 이름 그대로 천가지 자태로 보이는데 역시 단풍물이 올라 더욱 이색적이였다. 고려봉정상에서 바라보는 선경대와 그 주변의 가을경관은 감탄없이는 볼수 없는 단풍의 바다로 술렁이고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있는지라 산발들의 음달은 거뭇한 그림자로 보이는데 해빛을 안고있는 릉선은 황금빛으로 찬란히 빛나고있어 륜곽이 선명한 한폭의 수채화였다. 단풍의 두만강 아직 해가 많을 때 두만강가의 단풍을 취재해야겠기에 일행은 부랴부랴 고려봉에서 내려 남평을 향해 차를 달렸다. 금방 개통한 화룡ㅡ남평 콩크리트길을 벗어나니 절벽중터에 닦은 신작로가 옛모습 그대로 맞아준다. 아츠랗게 내려다보이는 절벽밑으로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는데 량안의 단풍이 비끼여 칠색의 물이 흐르는듯 해보였다. 류신, 길지를 지나 호암령까지 오는 동안 대부분이 절벽사이에 뺀 길이여서 아자아짜할 때가 많았다. 저명한 시인 리욱선생의 시비가 세워져있는 호암령길에 차를 세운후 일행은 좁은 오솔길을 톺아올랐다. 《리욱시비》라고 새겨져있는 번듯한 비석이 눈앞에 안겨왔다. 시비에는 1957년에 지은 리욱선생의 시 《할아버지의 마음》이 새겨져있었다. 두만강 건너는 아시아 최대의 철광석생산지이 조선의 무산시다. 기울어가는 저녁 어둠속에 묻혀있는 무산시는 오래전 영화에서 본 옛도시같았다. 집집마다 굴뚝을 하나씩 차고있는것이 진풍경이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연기가 피여오르는 굴뚝이 몇개 없었다. 갑자기 어둠이 들이닥쳐 오색령롱하던 단풍산은 거무칙칙한 산으로만 보인다. 숭선에서 밤을 지낸 취재팀은 이튿날 해뜨기 바쁘게 군함산에 올랐다. 군함산은 언녕 단풍으로 젖어있었는데 자칫하면 단풍철을 놓칠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함산은 숭선의 일경이다. 그러나 군함산에 올라본 사람들 대부분은 그 백미를 보지 못했을것이다. 두만강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자꾸 내려가면 그 백미가 나타나는데 보지 않고는 감동을 느끼지 못할것이다. 다듬어 세웠을가? 어디에서 옮겨왔을가?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각양각색의 모양을 뽐내는 바위! 그것은 커다란 돌볏이였다. 앞뒤로 다 층암절벽이여서 발붙일곳마저 없는 절벽이 갑자기 나타난다. 너비가 2ㅡ3메터밖에 되여보이지 않는 절벽이 저 아래로 뻗어있는데 오른쪽 산굽이를 휘돌아 흐르는 두만강과 왼쪽 산굽이에 고여있는 호수가 앞뒤로 군함산을 감싸고있다. 두만강과 호수사이에 갇힌 군함산은 단풍철이라 울굿불굿한 빛갈을 물에 던지고있어 더욱 가관이였다. 두만강발원지 숭선에서 18킬로메터 남짓이 달리면 광평령이다. 《저기, 백두산이 보입니다!》 이날 가이드를 맡아준 숭선진문화소 소장 김철호씨가 차창밖으로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광평령에 차를 세우고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있는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일행은 다시한번 감탄하였다. 눈덮힌 백두봉, 그 아래는 황금의 파도가 설레이고있다. 백두봉은 마치 황금의 바다에 둥실 뜬 한척의 하얀 군함같았다. 광평령에서 내리자 백두봉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화려한 가을의 찬란한 단풍이 우리 눈길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하얀 봇나무숲이다. 일매지게 곧추 뻗어오른 봇나무 사람들은 봇나무를 녀인에 비하기를 즐긴다. 곱고 미칠한 몸매때문일것이다. 그러나 몸매보다도 노란색이 오른 이파리때문에 이 가을 더욱 녀인상으로 보인다. 끝없이 뻗은 봇나무숲은 수천의 녀인들이 군무를 추기 위해 대기하고있는듯해 보이는데 나무숲우로 열린 푸른 가을 하늘은 어제 펼쳐질 광활한 춤무대같다. 숭선에서 48필로메터쯤 올라가면 《김일성낚시터》다. 《김일성낚시터》는 두만강일경이다. 모래알까지 들여다보이는 두만강가에 앉아서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낚시질했다는 곳이다. 네대메터 폭으 두만강이 정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흐르는데 두만강기슭의 단풍든 나무들이 꺼꾸로 비껴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기만했다. 강가에 내려가서 손바가지로 두만강물 마셔보았다. 그렇게 달콤하고 시원할수가 없었다. 《김일성낚시터》에서 13킬로메터쯤 더 달리면 두만강발원지이다. 억새풀들이 어느새 가을바람에 하얗게 말라있고 버드나무도 색이 죽어있었다. 저으기 호젓하고 고독해보였다. 가로타고 물을 마실만큼한 작은 개울물이 두만강발원지였다. 두만강발원지라는 개울물에 닿기 조금전에 21호경계비가 세워져있었는데 이쪽엔 한어로 《중국》이라고 새겨져있고 반대쪽에는 조선글로 《조선》이라고 쓰여져있어 엄연히 국경임을 시사해준다. 개울물을 따라 좀 더 올라가보니 물이 땅속에서 스며나온다. 《이렇게 땅속에서 솟았다 없어졌다 하다가 아예 자취를 감춥니다. 그래서 옛말엔 , 즉 도망쳐 흘러오는 강이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우로는 무연한 밀림지대지요.》 숭선진문화소 소장 김철호씨의 설명이였다. 황금의 바다 하얀 백두봉 3킬로메터쯤 더 올라가니 소담한 호수가 나타났다. 옥녀늪이였다. 직경이 180메터의 작은 호수다. 늪가엔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라는 콩크리트표말이 세워져있다. 늪은 그다지 깊지 않아 허리를 넘을가말가 한다고 한다. 늪가를 빙둘러 온통 이깔나무뿐인데 노란 단풍이 들어 호수를 병풍치고있었다. 내친 김에 쌍목봉에까지 가본다고 차를 달렸다. 장백림해는 온통 노란 물결뿐이였다. 길가와 숲은 모두 이깔나무뿐이였던것이다. 앞에서 노란 바람이 물결쳐오고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불어쳐오는 노란 바람은 고비사막의 황사바람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래바람인것이 아니라 바람에 흩날리는 노란 이깔나무이파리들의 군무였다. 소나무 한 그루 없는 이깔의 숲, 그 숲에 아득히 뻗은 가리마같은 황토길, 그 길 끝에는 항상 백두봉이 얼른얼른 눈에 안겨온다. 백두산은 점점 시야에 가까이 느껴지기만 했다. 쌍목봉에는 백두산으로부터 두망강출구의 천리병경선우에 있는 유일한 륙로해관이 있었다. 그다지 번창해보이지 않았지만 짐을 실은 차량들이 자주 들락거렸고 꽤 큰 군영도 자리잡고있었다. 쌍목봉에서 백두산은 지척이였다. 10킬로메터쯤 가면 백두봉이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백두산 코밑에 와 있는것이다. 황금의 물결을 타고 백두봉에까지 올라온것이다. 백두봉은 설레이는 황금의 바다속에 떠있는 대형함선마냥 거연히 솟아있다. (2003년 10월 6일 연변일보 4면)
21    [기행문]도끼봉(김철호) 댓글:  조회:1914  추천:40  2008-09-01
해님 품는 아름다운 산 하늘 날으려는듯한 바위들의 군체 아름다운 일몰 해발 680메터의 도끼봉은 이름 그대로 멀리서 바라보면 시퍼런 도끼가 땅에 콱 박힌 형국이다. 맑은 날이면 모아산같은 높은 산이거나 건축물에서 도끼봉을 지척으로 볼수 있다. 연길의 서쪽에 있는 도끼봉은 한계절 아름다운 일몰을 출연하기도 한다. 진붉은 태양이 도끼봉에 가라앉는 장면은 참으로 장관이다. 도끼봉이 한입두입 태양을 베여먹는것 같기도 하고 태양이 도끼봉속으로 스밀스밀 기여들어가는것 같기도해 멋스럽다. 거기에다 천태만상의 진홍빛 구름떼들이 들러리서는 장면은 더욱 황홀하고 매혹적이여서 눈뗄수가 없다. 그건 참으로 장쾌하고도 비장한 장면이 아닐수 없다. 도끼봉은 등산객들을 유혹하기엔 너무도 충분한 산이다. 뭇산우에 우뚝 솟은 층암절벽은 몇십리 밖에서도 한눈에 유표하니 왜 가보고싶지가 않으랴. 한번쯤은 저 산에 가보아야 하겠는데 하는것이 연길등산객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물론 도끼봉에 가려면 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그러나 맘먹고 가려면 얼마든지 쉽게 갈수도 있다. 팔도에서 도끼봉턱밑까지 잘 닦아진 길이 있다. 도끼봉뒤산에 새롭게 금광이 개발되였는데 금광가는 길이 바로 그 길이다. 팔도에서 한창 건설중에 있는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켠 골짜기로 접어들면 금광가는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20리쯤 들가면 도끼봉에 금방 닿을수 있다. 또 다른 길은 조양천으로 해서 길성, 고성저수지를 지나 석산에 도착한후 산을 톺는것이다. 이 길 역시 길성까지는 콩크리트도로로 잘 닦아져 가기가 퍽 편리하다. 고성저수지부터 흙길이긴 하지만 차를 갖고 간다면 도끼봉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갈수 있다. 이 두 길을 다 버리고 《금불5대》로 도끼봉에 갈수도 있다.《금불5대》는 하늘아래 첫동네같은 자그마한 촌락이다. 마을을 빠진후 달구지길을 따라 한창 가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 밭길을 택해야 한다. 가파롭긴 하지만 농민들이 농쟁기를 끌고 오르내리는 길인지라 걷기는 퍽 좋다. 《김일성동굴》도 있다는데 작년 여름 도끼봉등산을 시도했다가 실패한적 있다. 비가 질금질금 오는 날이였는데 짙은 안개가 산허리에 감겨있어 지척을 분간할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산에서 만난 한 한족농부가 길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일행은 그만 도끼봉 등뒤를 스쳐 10여리를 내려가버렸던것이다. 그날 우리는 안개속에 솟아있는 도끼봉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그저 한탄하고 말았다. 그때 그 한족농부의 손에는 송이버섯 한송이가 쥐여져 있었는데 도끼봉 근처 산에서 딴것이라고 했다. 《도끼봉은 무서운 산이지유. 이런 날엔 찾기가 힘들텐데유. 산밑에 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여태 보지는 못했지유.》 김일성장군이 항일할 때 리용하던 동굴이 도끼봉밑에 있다는 얘기에 다들 귀가 솔깃해졌지만 그날엔 그저 도끼봉자락을 스쳤을뿐이였다. 그후 석산으로 하여 도끼봉에 오른적있는데 그때 전씨성을 가진 산장주인도《김일성동굴》얘기를 해주었다. 《굉장한 동굴입지요. 사냥개를 앞세우고 몇번 가보았는데 들어가기가 무시무시하데요. 개들도 컹컹 짖어댈뿐 동굴에 접근 못하더군요. 그 안에 이 있을같아서 돌아서고 말았쥬.》 산세를 보니 확실히 항일유격대들이 활동하기가 좋은 곳이였다. 가파로운 비탈길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독교봉이 지척으로 시야에 잡혀온다. 여기서 보는 독교봉은 참으로 웅위롭고 거연했다. 특히 소뿔바위의 힘찬 모습에 다들 경탄을 금치못했다. 밭길을 지나 산길에 들어선후 다시 30분가량 더 오르니 늘찬 릉선이 시작되였다. 바위로 형성된 멋진 릉선이였다. 도끼봉을 룡대가리라고 하면 이 릉선을 룡의 몸통이라고 묘사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룡꼬리에 오른것이다. 량옆이 몇길씩되는 절벽이여서 조심해 걷지 않으면 위험했다. 일행은 룡의 꼬리를 밟으면서 허리를 타야 했다. 고구려성벽처럼 뻗어있는 바위릉선은 여러 가지 모양을 보여주었다. 바위새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 있어서 누군가 저쪽에 건너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틀림없는《바위창문》이였다. 곰처럼 늘어져있는《곰바위》, 캉가루처럼 잔뜩 키를 살구고있는 《칼바위》...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군체를 지나 어떤 절벽우에 닫아 앞을 바라보니 높은 바위산이 앞을 콱 막고있었다. 도끼봉이였던 것이다. 도끼봉전설 바늘가는데 실이라고 연변의 괜찮은 산에는 다 전설이 있다. 도끼봉도 례외일수 없었다. 먼 옛날 이곳은 삼림이 울창하고 골이 깊어 인가라곤 없었다고 한다. 산짐승들이 많아 사냥하기 좋았으련만 사람들은 감히 산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까닭은 산에 100년 묵은 구렝이가 있는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만나면 한입에 삼켜버린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황소같다 하여 둥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총각만은 그런 소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산림속에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나무를 찍어 숯을 구웠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어느날 나무찍으러 나갔던 총각은 더디선가 들려오는 가냘픈 비명소리를 듣고 산꼭대기로 치달아올랐다. 열두발 되는 구렝이가 아릿다운 처녀를 앞에 놓고 혀를 날름거리고있었다. 총각은 잽싸게 도끼를 휘둘러 구렝이대가리를 끊어놓았다. 총각은 정신잃은 처녀를 업고 샘물터로 내려가 샘물을 입에 떠넣어주어 정신차리게 한후 어찌되여 이 깊은 산속에 오게 되었는가고 물었다. 《몸져누우신 어머님 병환에 쓸 약초 캐러 왔어요.》 갑자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다시 붙은 구렝이가 나타난 것이다. 총각은 몸을 날려 솟구쳤다가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구렝이목은 뚝 끊어져나가고 바위에 박힌 도끼는 뺄수 없게 되었다. 구렝이를 죽인후 총각은 약초를 캐여가지고 쳐녀가 사는 마을로 왔다. 처녀의 어머니는 그 약초를 달여드시고 병이 나았다. 이에 처녀의 어머니는 그 은헤를 잊을수 없어 총각을 사위로 삼았다. 그때로부터 총각은 숯구이를 그만두고 처녀와 함께 장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총각이 구렝이 목을 찍을 때 깊이 내리박힌 도끼는 세월이 흘러 커다란 바위로 굳어졌는데 그 바위가 지금의 도끼봉이라는 것이다. 49메터 절벽산 하늘로 날아오르려는듯 몸체를 앞으로 솟구친 도끼봉은 삼면이 깎아지른듯한 절벽이였다. 그 절벽으로는 발을 근본 붙칠수 없었다. 정상으로 오르려면 등뒤를 리용해야 했다. 바람벽같은 절벽가에 외통길이 실오리처럼 나있어 기다싶이 산을 톺아야 했다. 45도의 가파른 비탈은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뒤등을 때리는 바람소리마저 아우성처럼 귀를 자극하는지라 다들 얼굴에 긴장을 담고있었다. 밀고 잡아당기면서 간신히 오르고 또 오르노라니 그래도 정상에 닿을수가 있었다. 앞이 확 틔였다. 생각보다는 높은 절벽이 아니였지만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낄수는 있었다. 멀리 기양저수지며, 고성저수지가 한눈에 안겨온다. 또 개발중이라는 금광도 금방 등뒤에 있었다. 모아산도 알렸고 연길시가지도 어렴풋이 륜곽을 보였다. 팔도며 조양천도 한눈에 바라볼수 있었다. 골골마다에 자리잡고있는 촌락들도 오손도손 재미있게 보였다. 도끼봉은 겹으로 솟아있는 여러 절벽산 가운데서 가장 우뚝 솟은 봉오리인데 맨 절벽높이가 49메터라고 한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많은 절벽산이 둘레를 서고있었다. 정상에서 내린후 절벽사이의 오솔길을 타고 곧바로 절벽밑에 도착했다. 혹여 《김일성동굴》이 있나하여 눈이 화등잔이 되어 두리번거렸으나 절벽 금방 밑에는 동굴그림자도 없었다. 아마 어딘가 다른 절벽밑에 있나보다 하면서 다들 아쉬워했다. 절벽밑에서 바라보는 도끼봉은 가관이였다. 닭볕처럼 쭈볏이 솟은 바위, 초대처럼 하늘 찌르는 바위, 커다란 귀방울같은 바위... 바위들의 군체는 지상을 떠나 하늘로 날으려는 뭇짐승떼같았다. 하산하면서 보는 도끼봉은 더욱 멋스럽다. 굽이 돌때마다 여러 가지 자태를 보여준다. 석산으로 내려가면서 보는 모양과 팔도로 내려가면서 보는 모양 또한 같지가 않다. 팔도로 내려가면서 보면 도끼봉은 원시사회의 끝이 뾰족한 초가지붕처럼 보이는데 숲에 가리여 때론 나타났다 때론 사라지는 모습 참으로 유혹적이다. 그러나 석산으로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는 도끼봉은 수려하기가 그지없다.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미가 발견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하는 말 같다. 나무들의 웃수리에 우뚝 솟은 도끼봉은 그 장엄함으로 특유의 매력을 풍겨주고있다. 햇볕받은 절벽산은 이상한 기운까지 발하여 성경에 들어선듯한 기분이기도 하다. 아직 인간의 때가 덜 묻어있는 도끼봉은 도끼라는 투박한 이미지보다는 수집음을 타는 녀인의 맑은 얼굴같기도 하다. 도끼봉은 볼수록 아름다운 산이였다.  2006년 4월 14일
20    [기행문]독교봉(김철호) 댓글:  조회:2073  추천:33  2008-09-01
사진설명 1) 독교봉 원경 2) 소뿔바위 하늘가에서 날아예던 산비둘기 발밑에서 선회 금불사 동불사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서쪽으로 약 10키로메터쯤 들어가면 나즈막한 산자락밑에 금불사(金佛寺)라고 하는 오붓한 마을이 있다. 마을 맨 뒤쪽에 페교된 학교가 있는데 자그마한 운동장까지 갖고있어 참으로 아담해 보였다. 지금은 텅빈 운동장에 텅빈 교실이지만 한때는 아이들을 부르는 정다웠을 종소리도 있었을것을 생각하니 애수가 가슴을 치기도 했다. 마을길에서 만난 한 농민과 마을이름의 유래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는것이였다. 《옛날 이곳에 황금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절당이 있었는데 그래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해방후 사람들은 미신이라면서 절당을 마사버렸지요. 그때 황금부처도 종적을 감췄다고 합데다.》 그러니 동불사(銅佛寺)는 동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사찰로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금불사는 황금으로 만든 부처님을 모신 사찰로 하여 지어진 이름인것이다. 농민에 따르면 이 마을에 절당이 지어진데는 마을 남쪽에 우뚝 솟은 산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농민이 가리키는 그 산은 다른 산과는 달리 산중에 우뚝 솟은 건축물같은 절벽산이였다. 해볕에 절벽이 흰빛을 반사하기도해 신비한 기운에 감돌기도 했다. 절당을 예로부터 명산과 짝을 지어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 저만한 산밑에 당연 절당이 세워질만도 했다. 그런데 산 이름 또한 기이했다. 《독교봉(獨轎峰)》이였다. 홀로 가마(轎子)라는 뜻이다. 옛날 나으리들이거나 귀부인들이 타고 다니던 그런 가마라는 뜻이다. 《독교봉 그 아래로 세로 뻗은 산이 보입지요. 녀자가 누워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보니 그 산이 과연 녀자가 누워있는 것 같아 보였다. 머리를 풀어혜친 한 녀인이 팔과 다리를 뻗고 누워있는데 가슴이 유달리 봉긋했다. 《저 산은 잠자는 녀자이지요.》 《그러니 저 산에 아름다운 전설이 있겠군요.》 생각밖에도 농민은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르겠다고 했다. 아름다운 산에 전설이 없을리 있겠는가. 그후 연변구전설화집에서 독교봉전설을 찾게 되었다. 낭자의 이야기 멀고먼 옛날 이곳은 동해바다와 이어진 아주 아름다운 바다가였다고 한다. 바다를 몹시 동경하고있던 백두산기슭의 한 부자집 낭자는 오매불망 바다를 그리다가 드디여 부모님 허락을 받고 가마를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험한 산길에 강도와 사나운 짐승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인지라 낭자의 부모님들은 도끼를 든 두 사졸(私卒)을 딸려보냈다. 편안한 독교(獨轎)에 앉아 온 낭자는 하늘땅이 맞붙은 것 같은 망망한 바다를 만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구슬처럼 부서지는 은빛 파도며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날아예는 흰갈매기... 잔솔이 다복다복 깔린 바다가에 앉은 낭자는 해가 어느새 진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밤바다 역시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했다. 낮에 보던 흰파도가 밤에는 거뭇한 산발이 겹치면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것 같았다. 낭자는 별들이 내려앉는 검푸른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온밤 바다에서 헤매이던 낭자는 드디여 일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거밋하던 바다는 차츰 담청색으로 변하고 그것은 다시 불끈 솟아오르는 태양의 빛발로 황금색의 세상을 만들고있었다. 장엄하고 신비로운 바다였다. 바다가 이처럼 아름다운줄 몰랐던 낭자는 잠자는것마저 다 잊고 밤에 낮을 이어 바다가에서 헤매였다. 두 사졸은 낭자를 보위해 그 옆을 떠날 념을 않았으나 언녕 피곤이 몰려 높이 치켜들었던 도끼를 축 늘어뜨리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낭자는 바다가 산기슭에 고요히 누워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어찌도 혼곤히 자는지 사졸들은 감히 낭자를 깨울념을 못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깨여나지 않는 낭자, 몇날 며칠 자고 또 자기만 하는 낭자. 사졸들도 도끼를 땅에 처박은채 그만 깊은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자버린 낭자가 저《미인봉》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낭자가 타고왔던 가마는 독교봉이 되고 두 사졸이 땅에 처박은 도끼는《큰도끼봉》,《작은 도끼봉》이 되였다고 한다. 깎아지른듯한 백길 벼랑 독교봉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로두구에서 로두구강철공장 뒤길이거나 로두구만인갱마을 앞길로 하여 작은 도끼봉밑을 지나 독교봉으로 올수도 있는데 이럴 경우 오붓한 산골길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수 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며 냇가의 버드나무숲속의 온갖 새들의 지저귐은 참으로 귀맛을 당긴다. 또 낭자의 사졸이 들고 있던 도끼가 절벽산으로 변했다는 작은 도끼봉밑을 지날 수 있기에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리득을 볼수도 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작은 도끼봉을 오를수 있다. 한족농민들은 작은 도끼봉을 《쑈꾸이즈뻥(小龜子峰)》, 즉 작은 거북산이라고 하고 조선족농민들은《뒤뒤(뒤통수)없는 산》이라고 한다.작은 도끼봉은 과연 앞이마만 툭 튀여있는《뒤통수없는 산》이였다. 그런데 오르고 보면 그 《앞이마》가 아름찬 절벽산이다. 오르는 길은 뉘엿한 《뒤통수》뿐인데 오른후 관찰해 보면 삼면이 빙 둘러 절벽이다. 작은도끼봉에서 내려 이름 모를 한 한족부락을 지나 곧바로 산을 톺을수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면 독교봉의 가장 기이한 바위인 《소뿔바위》가 왼쪽에 붙어보인다. 그러나 금불사에서 바라보면 그 《소뿔바위》가 오른쪽에 붙어있어 보인다. 금불마을에서 작은 시내물을 건너면 산으로 통하는 수레길이 다. 너무 가파롭지 않지만 한창 오르면 숨이 턱에 닿는다. 예쁜 이깔나무숲이며 착한 떡갈나무숲을 지난후 꽤 넓은 밭을 꿰질러가야 독교봉기슭에 닿을수 있다. 바라보면서 오르던 독교봉은 차츰 수림에 가리워진다. 이따금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숲길을 재우쳐 걷노라면 갑자기 앞을 콱 막아서는 절벽에 부딪칠수도 있다. 독교봉 턱밑에 닿았기때문이다. 독교봉은 콩크리트바람벽같은데 산비둘기가 절벽을 선회하면서 날아예는것이 아득히 보인다. 만약 이렇게 절벽을 만난다면 절벽밑으로 해서 옆으로 빠져야 한다. 좋기는 왼쪽 옆으로 빠지면 오르기 좀 편한 기슭이 될수 있겠으나 오른쪽으로 빠지면 아짜아짜한 절벽을 톺아야 한다. 바람벽같은 절벽을 지나면 밀고 잡아당기면서 오를수 있는 가파로운 비탈이다. 여기로 오르면《소뿔바위》를 볼수 있는데 정작 가까이에서 보이는《소뿔바위》는 멀리서 보이는것처럼 미끈하지는 않다. 발을 잘못 디디면 가파로운 피탈에 구을수도 있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왼쪽 산기슭길은 느슨한 숲길이다. 푹푹 빠지는 가랑잎은 무릅을 친다. 사계절 가랑잎이 이렇게 쌓여있는 숲이다. 정상에 올라보면 앞이 탁 틔이는것 같은 기분이다. 절벽 바로 꼭대기이기 때문이다. 발볌발볌 절벽가까지 기여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너무 짜릿짜릿하다.《오금이 저리다》는 말의 함의를 독교봉에서 실감할수 있다. 절벽아래를 내려다보노라면 정말 종아리가 저려나고 다소 떨리는감이다. 《100메터는 좋이 됨직 하다.》 누군가 명동촌의 선바위가 88메터인데 비해보면 독교봉벼랑은 100메터는 능히 될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산정상에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 절벽을 보기가 가관이였다. 줄을 치고 칼로 벤듯한 절벽, 토막나무를 도끼로 찍은 듯 갈라져있는 절벽, 구을기만하면 뼈도 추릴것 같아 보이지 않는 절벽과 절벽사이의 골짜기... 아까 밑에서 볼 때에는 하늘가에서 빙빙 날아예는것 같던 산비둘기들이 여기서 보니 발밑에서 선회하고있었다. 돌을 던져보았더니 한창 있다가《퉁》하고 밑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실컷 절벽을 구경하고 나서야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큰도끼봉이 마주하고있는데 지척처럼 보였다. 커다란 도끼날 앞끝이 땅속에 깊숙히 박힌 모습이다. 우리가 독교를 맘껏 타고있는데 낭자의 두 사졸들은 어데가서 코골고있는지 모르겠다. 금불마을을 에돌아 흐르는 작은 시내물을 따라 올라가면서 바라보니 거울같은 파란 저수지가 안겨왔다. 연변지도에도 표시되여 있는 기양저수지였다. 《연길이 보인다!》 오른쪽 절벽끝에까지 나가면서 멀리 살펴보니 연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연길의 주요한 고층건물을 알아볼수도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연길은 사실상 지척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19    [기행문]황성옛터 성자산산성(김철호) 댓글:  조회:2695  추천:40  2008-09-01
사진설명 1) 성자산산성원경 2) 서쪽 해발 390메터 봉우리의 성자산 성벽앞에서의 필자. 3) 산성리촌 김흥룡로인이 밭에서 주었다는 옛날 동전을 구경하고있는 답사팀. 3) 깅흥룡로인이 산성안에서 파왔다는 방아확이 바자굽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 있다. -2천년 문명 묻힌 력사의 현장 연길에서 동으로 10킬로메터쯤 가면 연길시기름창고(油庫)가 있는데 그 뒤산이 유명한 성자산(城子山)이다. 맞은켠의 하룡촌 높은 산정에서 바라보면 성자산을 둘러싸고있는 성터자리가 한눈에 뚜렷이 안겨온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성자산은 말발굽처럼 생긴 하나의 커다란 옹성(瓮城)이다. 어찌보면 예쁜 연꽃같기도 하다. 아무튼 중간이 움푹 패이고 주위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이 산은 그 옛날 천연적인 군사요새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거기에다 둘레의 길이가 4454메터나 되는 높직한 성벽까지 쌓아겠으니 철옹성이 아닐수 없다. 들쑹날쑹한 산등성이를 타고 뻗어간 성터자리를 따라 한바퀴 돌자면 좋이 반나절은 걸릴것이다. 동쪽과 북쪽에는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에는 개울이 있다. 두 줄기의 개울은 산성을 3개의 덕땅으로 갈라놓았다. 산성의 동쪽, 북쪽, 서쪽, 동남쪽에는 각기 성문자리가 하나씩 있고 동쪽, 북쪽, 서쪽의 성문자리에는 옹성(瓮城)이 수축되였으며 동쪽과 북쪽의 성문은 골짜기어구에 나있어 주요한 통로였을것이다. 북문내 근처에는 망대가 있는데 성밖을 살피는 군사시설이였을것이다. 선조들의 체온 담긴 성벽 서쪽의 해발 390메터의 봉우리가 성자산의 주봉이다. 여기에서 서쪽을 바라고 보면 연길분지를 가르면서 유유히 굽이쳐흐르는 부르하통하가 한눈에 안겨온다. 남쪽으로는 하룡촌이 굽어보이는데 해란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부르하통하와 손자고 곧바로 성자산을 감돌아흐른다. 모아산, 마반산도 한눈에 안겨든다. 모아산이나 마반산에에는 발해시기 봉화대유적지가 있다. 빤히 내려다보이는 남쪽에는 연성고성, 하룡고성이 있고 서쪽에는 소영고성, 북대고성 같은 발해시기의 옛성터들이 성자산을 에워싸고있다. 얼마전 성자산 맞은켠의 하룡산을 탑사한적 있다. 봉우리마다에 봉화대가 구축되여 있었으며 봉화대와 봉화대사이에 군사도로가 뻗어있었다. 성자산북쪽에 홀로 우뚝 솟은 산 하나가 있는데 산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20평방메터 남짓한 자그마한 늪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늪은 왕이 목욕하던곳이라 한다. 늪 한쪽을 막은 둔덕같은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늪으로 보였다. 성자산산성 서문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곳에 비교적 완벽히 남아있는 성벽유적이 있다. 수공으로 다듬은 네모반듯한 장방형석재로 쌓은 성벽은 아직도 견고하게 다져져있는데 어떤 곳은 손을 뻗쳐도 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다. 성벽을 만지노라면 선조들의 체온이 금방 느껴지는것 같아 저도모르게 감개무량해 진다. 기원 3세기때의 중국의 학자 진수가 지은 에 따르면 두만강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북옥저라는 민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일찍부터 고구려세족의 통치하에 있었고 기원 98년에는 고구려 태조왕이 성자산성을 시찰, 성자산성은 고구려의 책성부(柵城部, 지금의 성급이상 행정소재지)였다고 한다. 기원 224년에 고구려 동천왕이 위나라에 쫓겨 북옥저로 도망쳐왔고 285년에는 부여왕실까지 옮겨왔다고 한다. 성자산산성은 668년 고구려멸망까지 고구려동북부의 중요한 진(鎭)이였다. 고구려멸망후 30년이 지난 기원 698년 발해가 고구려 동북쪽의 고토를 회복하면서 성자산산성은 자연스럽게 발해의 판도에 들게 되었다.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에도 계속하여 책성으로 불리웠는데 는 중원에까지 알려졌다. 밭엔 아직도 기와쪼각들이 발해가 926년 거란족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성자산산성은 발해시기의 중요한 진이였을것이다. 거란인이 세운 료를 앞지르고 녀진인들의 금나라가 동북과 중원을 석권하던 말기에 금나라의 료동선무사로 있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1214년 금나라를 배반하고 동하국(東夏國)을 세웠다. 포선만노는 1916년 수도를 성자산산성에 옳기고 16년간 동하국을 영위하다가 1233년 몽골군에 의해 멸망되였다. 그러니 성자산은 명실공히 황성옛터임이 틀림없다. 성안에 있는 거주지의 유적은 이미 넓다란 밭으로 변해버렸으나 여기저기에 기초돌들이 널려있다. 무시로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있는 고구려와 발해시기의 기와며 질그릇쪼각들이 발길에 채여 손쉽게 그런것들을 주을수도 있다. 성내의 중부 덕땅우에는 궁전자리가 있는데 궁전의 기초는 계단식으로 되었고 모두 9개 계단가운데서 6개 계단이 비교적 잘 알리며 그곳에는 초석이 줄지어있다. 토기쪼각들도 더 많이 널려있다. 밭이며 숲에 널려있는 토기파편만 보아도 당년의 위용과 호화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성내 주변의 언덕과 3개의 덕땅우에도 기와쪼각과 질그릇쪼각이 널려있는데 주로 고구려, 발해, 료, 금 시기에 속하는 유물이다. 성내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량으로 보면 료, 금 시기의 것이 비교적 많다고 한다. 발해시기 기와들의 안쪽에는 거의 모두 삼베무늬가 나있는데 이긴 흙을 기와모형에 쳐넣기전에 모형밑바닥에 삼베를 한겹씩 폈기때문이란다. 이러한 삼베무늬를 통해서도 당시 발해의 수공업의 일단을 가늠할수 있을것 같았다. 토기파편외에도 산성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중국화페사에서 제일 일찍한 돈의 하나인 당나라 개원통보를 비롯한 송나라, 금나라, 조선의 숙종대왕때의 송편통보 등 10여종의 동전과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고려솥, 활촉, 말등자 그리고 , , 같은 동하국시기의 귀중한 구리도장도 발견되였다. 이런것들은 지금 연변력사박물관에 보관되여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 작은 실개천이 돌돌 흐르는 동남쪽골짜기의 두 산사이의 트인곳이 옹성(瓮城)자리였고 그 어구에 성자산산성석패가 세워져있는데 정면에 이렇게 새겨져있다. 길림성문화유물단위 성자산산성 길림성인민정부 1961년 4월 13일 공포 도문시인민정부세움 기념석패가 세워진 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의 산성리(山城里)라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유달리 고풍스럽게 보이는 기와집 한채가 있다. 몇십년전 리봉학이라는 로인이 산성안의 궁전터에서 밭을 일구다가 기와무지를 발견하였다. 일밭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번에 열댓장씩 3년동안 부지런히 지게로 지어날랐더니 륙간기와집에 얹을 기와가 모여졌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지은 기와집이 이 고풍스러운 기와집이였다. 나무토막을 놓고 기와 한 장을 뽑아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기와장 안쪽에 찍혀져있는 삼베무늬가 똑똑히 알렸다. 틀림없이 발해시기 기와였다. 지금부터 천년가까운 발해국시절의 기와를 몇천장씩이나 이고 서있는 기와집은 귀중한 문화재가 아닐수 없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아는것 같지가 않았다. 김흥룡이라고 부르는 농민의 집에 산성안에서 파온 방아확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니 과연 바자굽에 방아확이 놓여있었다. 이런 방아확은 마을에 여러개 있다고 한다. 모두다 옛날 유물들인데 아무렇게 방치되여 있었다. 김로인은 옛것에 흥미를 느끼는 우리들을 보고 옛동전 몇잎을 내놓았다. 모두가 산성안의 밭에서 일하다 주은것들이라고 했다. 이전에는 이런 동전을 달라고 하면 공으로 주거나 5, 6원 주면 몇잎 살수 있었다고 하는데 김로인은 한잎에 50원 아니면 안판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아무개는 작년에 금귀걸이 한짝을 주은 것을 팔았고 또 누구는 금비녀, 금가락지를 주었댔다고 자랑삼아 말하는것이였다. 우리가 걸터앉아있는 주춧돌이 산성돌같아보여서 물었더니 바로 그렇다고 떳떳이 대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이 마을의 적잖은 집들의 집기초는 산성의 성벽을 허물어다 다진거라고 로인은 슴슴히 말하는것이였다. 과연 가까운 몇집을 돌아보니 산성돌이 틀림없어보였다. 집기초뿐만아니라 토성이거나 돼지우리, 변소기초까지 산성돌로 쌓은것이 있었다. 잘 개발하기만 하면 연변의 관광명소로 될수도 있을 력사가 숨쉬는 옛성터가 이렇게 방치되여 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2천년되는 문명을 쌓고 지키고 하면서 력사의 사연을 품은채 침묵하고있는 성자산유적지를 떠나는 발걸음은 하냥 무겁기만 했다.
18    [기행문]륙도하(김철호) 댓글:  조회:2244  추천:29  2008-09-01
주덕해 김약연 윤동주 안중근... 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을 낳아 키운 력사의 강반 오랑캐령 오랑캐령을 째면서 건너간 국도옆의 자그마한 골짜기로 맑은 물줄기가 돌돌 산아래로 흘러간다. 손바가지로 물을 뜨기조차 힘겨울 정도의 작을 내물, 그래도 그 물로 목을 추기니 가슴이 거뿐하다. 개울의 청맑은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간단한 도시락을 펼쳤다. 동행한 향토문학수집가인 김재권(원 룡정시문련 주석)씨와 황장석(시인)씨, 윤대일(지신록장 전임공회주석)씨 등은 력사의 산정이며 륙도하의 발원지의 하나인 오랑캐령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멋이 좋다면서 흥겨워 한다. 윤대일씨는 새 국도가 건설되면서 오랑케령이 12메터 낮아졌노라고 말한다. 오랑캐령을 해관령(1915년 이 령에 해관이 설치되였음)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일 높은 봉오리가 해발 830메터, 서쪽의 오봉산이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해발 1055메터라고 김재권씨가 설명해주었다. 김재권씨는 륙도하는 오봉산, 오랑캐령, 허망채골에서 흘러내려온 시내물이 합류되여 이루어진 해란강의 한지류라고 한술 더 떠주었다. 황장석씨는 하는 최서해 소설속의 묘사는 당시의 우리 민족들이 살길 찾아 이 령을 넘던 장면에 대한 묘사였다고 하면서 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징어며 쯥쯥한 명태무침에 맥주잔을 부딛히면서 오랑캐령보다 더 험악했던 민족수난의 현장에 앉아있는 기분은 각별했다. 햇볕에 반사되여 반짝거리면서 풀속에 몸을 숨겼다 나타났다 아래로 흐르는 내물은 작은 생명의 번창을 위해 쉴새없이 조잘거린다. 100여년전에도 우리의 수난민족들은 한줄기의 희망을 안고 저 내물처럼 중얼거리면서 이 령을 넘었을 것이다. 오늘엔 중화민족대가정속의 떳떳한 주인공으로 살고있지만 그때엔 고개마다에 수난과 치욕, 절망과 굴욕만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념비가 많은 륙도하량안 륙도하는 나라의 지도에 표시되여 있지 않는 작은 강이다. 총길이가 45.5킬로메터의 너무나 작은 강이다. 상류는 개구리도 뛰여건널만큼의 작은 시내이고 하류도 기껏해야 다리를 걷고 몇발작이면 건널 수 있는 강이다. (소설가 류연산)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버들이 우거진 속으로 키넘는 물이 흘러 해마다 익사하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빠질만큼 물이 고인곳을 찾을수가 없다. 물론 장마철 홍수 터지면 자갈로 뒤덮인 개천은 표호하는 흙탕물이 범람하여 큰 재해도 불러오지만 그것도 몇 년에 어쩌다 한번씩 있는 일이다. 그러나 륙도하엔 사연이 많다. 깊고 높은 력사의 파도가 흘러지나갔다. 주덕해, 김약연, 윤동주, 안중근, 송몽규, 김창걸... 우리 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이 륙도하반에서 태여났으며 자랐고 활동했다. 15만원 탈취사건유적지, 폭동지휘부기념비, 반일의사릉, 안중근의사 사격훈련유적지... 새날을 맞기 위해 흘린 렬사들의 피는 그 얼마인지 모른다. 명동촌 기독교회당옆에 김약연선생의 비석이 있고 장재촌에 묘소가 있다. 비석은 몹시 파괴된 모습, 문화대혁명때의 흔적이라 한다. 김약연선생은 1868년에 조선 회령에서 태여났으며 1899년 2월 18일, 22세대주 142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명동과 장재촌에 정착, 명동학교를 창립하고 국민회 회장 등 직을 력임하면서 반일인재양성과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 받친 교육가이며 반일독립운동가이다.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오다가 보니 강 왼족 기슭에 하얀 비석이 보였다. 작가 김창걸 문학비라고 김재권씨가 귀띔해주어 모두뜀을 하여 강을 건너 기념사진을 남겼다. 작가 김창걸 문학비는 룡정시문학예술계련합회, 연변대학조선언어학학부, 한국한민족문화연구소에서 세운것이였다. 문학비에는 김창걸선생의 대표작 의 한 글귀가 새겨져있었다. 이 어두운 밤이 밝으면 빛나는 대낮이 되듯이 나와 고분이와의 앞길에도 이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밝은 해발이 비춰주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나는 어두운 이 밤길을 빨리하였다.   김창걸선생은 1936년 1943년사이에 단편소설 20여편을 발표, 를 통해 청년농민 명손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한 우리 민족의 저명한 소설가이다. 일행을 실은 취재차가 우중충 솟은 선바위밑을 지날 때 김재권씨는 고 하여 바라보니 바위산 옆에 깊숙히 패인 골짜기가 있었다. 선바위는 원래 세 개의 큰 바위산이였는데 돌을 까서 길을 닦느라고 두 개의 바위산이 날아났다면서 김재권씨는 아쉬운 한숨을 톺는다. 선바위를 지나 명동촌에서 7-8리 내려오면 강 남쪽에 유표하게 안겨오는 자연석으로 만든 비석 두 개가 보인다. 그 유명한 15만원 탈취사건유적지기념비와 폭동 지휘부기념비이다. 강 북쪽 아담한 마을-승지촌에는 주덕해생가옛터기념비가 있다. 철채에 둘려있는 주덕해생가옛터는 깨끗이 정리되여 있었다. 잔디가 곱게 깔려있는 마당에는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옛집은 없고 기와를 얹은 막 아래 정갈한 우물이 한틀 있었다. 드레박으로 물을 길어 마셔보니 시원하고 맛있었다. 탑식으로 건축한 기념비는 중공룡정시위원회, 룡정시인대상무위원회, 룡정시인민정부에서 2001년 7월 1일에 세운것이였다. 기념비에는 주덕해동지의 략력이 새겨져 있었다. 륙도하기슭 룡정시시교 합성리동산묘지에는 조선의 반일봉기를 지지성원한 반일시위대회-시위에서 수난당한 14명 렬사가 잠들어있는 (일명라고도 함)이 있다. 그리고 그 산 언덕에는 저명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륙도하가 낳은 시성-윤동주 명동촌의 국도옆에 세워져있는 라고 유표하게 새겨져있는 석비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각별히 끈다. 석비옆의 내리막 수레길을 따라 조금 가면 윤동주생가가 있다. 기와를 얹은 10간과 고간이 달린 조선족전통구조의 집이다. 1900년경에 윤동주의 조부 윤하연선생이 지은집인데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는 바로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집은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1993년 4월 그 력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정부에서 윤동주생가를 관광점으로 지정, 1994년 8월 력사유물로서의 윤동주생가를 복원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첫눈에 허물어진 우물이 안겨왔다. 몇 년전에 왔을때에도 시원한 물을 길어 마셨댔는데 우물은 푹 꺼지면서 완전히 메워졌다. 면서 김재권씨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생가를 찾을때마다 읊조려지는 윤동주시인의 저명한 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둔 윤동주는 17세에 시 , , 를 썼다. , 등 동시를 잡지에 발표했으며 1938년부터는 학생란에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일본 교도에서 체포, 2년형을 언도받는다. 1945년 생체실험대상으로 비명에 횡사한다. 생전에 시집 한권 내놓지 못한 시인이였으나 후세에 그의 시가 볕을 보면서 그 찬란한 빛발을 발하게 되는데 일본의 한 학자는 윤동주를 세계적인 시인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그의 시집 는 한국청소년들이 가장 즐겨하는 시집이며 그의 시는 해마다 최고의 시로 뽑히고 있다. 맺는 말 맑게 흐르던 륙도하는 룡정에 들어서면서 종이공장의 페수에 금방 흐려진다. 그 맑던 물이 역한 약물로 오염되면서 공농다리를 지나 피혁공장의 오염된 해란강물과 합류한다. 그로서 짧지만 비장한 흐름은 끝나는 것이다. 백리의 하루 길을 급히 달려 해질녘에 그 로정을 마치고 고느적한 저녁 노을을 맞는다. 이 땅에는 백리되는 강이 기수부지이다. 아예 이름도 없는 강이 얼마인지 모른다. 그러나 륙도하-이 작고 옅은 강에는 너무도 크고 깊은 사연이 실려 흐르고 있다. 그러한 사연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흘러흘러 백년후에도 천년후에도 이 기슭의 보석같은 이야기를 전해줄 것이다. 륙도하여 영원히 흘러라! 2003년 6월
17    [기행문]해란강(김철호) 댓글:  조회:2294  추천:26  2008-09-01
4-5리 넓은 로령산정 새밭물이 한곬으로 모이면서 시작되는 해란강발원지 해란강 상류 《걸어가자면 4시간 좋이 가야 해란강 발원지에 닿을수 있습니다.》 화룡시문련 상무부주석 류재학씨는 은실을 드리운 듯 뽀얗게 내리는 비속으로 멀리 산정을 기리켰다. 증봉령에서 제일높은 산인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해발 1670메터이니까 해란강이 발원한다는 로령은 해발 1000메터이상은 될터란다. 류재학씨는 금년 4월에 화룡시정부의 해당인원들과 함께 해란강발원지 개발을 위한 답사로 로령에 오른적있다 한다. 산정은 4-5리 넓은 새밭으로 펼쳐져 있었는데 새밭주위는 아름드리나무로 둘레를 치고 있더라면서 산우에 그렇게 넓은 평원지대가 있을줄을 몰랐던지라 다들 아연해지고 말았다 한다. 새밭은 습지였다. 그 습지의 물이 한곬으로 모이면서 작은 시내를 이루는데 바로 해란강발원지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긴 시내가 곧추 산아래로 내리 흐르면서 이골저골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하여 지금 눈앞에서 소리치며 흐르는 강줄기가 되었다. 정강이를 넘을 것 같아보이는 물결은 말그대로 벽계수였다. 산곡간을 울리며 갈기치는 물결은 숲이 꽉 우거진 골짜기를 뚫으면서 아래아래로 힘차게 내달린다. 《아마 저쯤이 직소택일겁니다.》 류재학씨가 가리키는곳에 차를 세운 우리는 가파로운 비탈을 내려 집채같은 바위들이 엇갈려 물려있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하얀 물갈기가 바위를 때리면서 흐르것이 하나의 경관을 이루었다. 2메터 남짓되는 작은 폭포가 눈앞에 안겨온다. 커다란 바위를 타고 갈기치며 내리꼰지는 밑에 자그마한 소가 생겼다. 유명한 직소택인 것이다. 1920년 10월 21일 야스까와가 이끄는 일본군 선두부대가 바로 이 직소택에서 호된 타격을 받았는데 김좌진, 리범석의 지휘하에 매복진을 펼치고 있는 북로군정서군에게 삽시간에 90여명의 목숨을 내주여야 했다. 이 전투를 신호로 독립군은 홍범도 등의 지휘하에 이도구 완류구전투, 천수동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을 벌려 수많은 일본군을 살상하는 대일전역가운데서 가장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청산리 마을의 작은 산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석비가 세워져있어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 앞면에는 《청신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항일련군들이 일제와 전투하는 군상이 새겨져있었다. 청산리마을에서 얼마간 내려오면 옥소반같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송월저수지다. 아담지고 화려했다. 송월저수지아래에 자리잡고있는 마을이 송월촌, 마을어구로 하여 서남쪽으로 1킬로메터쯤 올라가면 유명한 송월산성이 있다. 산성둘레의 길이는 2480메터, 눈여겨보면 성터자리가 아직도 알린다. 화룡시가지를 꿰둟고 흐르는 해란강은 묘령툰에 와 잠시 쉬려는듯 급한 흐름을 멈추면서 유유히 흐른다. 바로 이 마을이 김좌진 등이 대일전쟁의 중요한 회의를 가진 곳이다. 일제와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타격하자는 《피전정책》을 결정, 청산리전투같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해란강을 건너면 청호마을, 대종교본부가 있던곳이다. 청호마을에서 국도를 건너면 작은 언덕이 있는데 대종교 제1세 교주 라철, 제2세 교주 김교헌, 대종교 동도본사 주관인 서일의 묘비가 있다. 1911년 서일은 반일의벙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했으며 후에는 대한군정서로 개편했다.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군정서산하에는 김좌진(사령관)을 비롯한 유명한 인물들이 있었다. 해란강중류 그 유명한 백리장성은 해란강기슭에 자리잡고있는 토산자 동산촌 이도구의 산언덕에서 시작된다. 장성은 서성, 룡문, 세린하, 도원, 동불사, 조양, 팔도, 연집, 흥안 등 향과 진을 경유하여 계림북산에 이른다. 력사학교수 방학봉선생에 따르면 백리장성은 실제 거리가 300리도 넘는다. 70리 평강벌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팔가자진남산위에 위치해있는 팔가자산성은 둘레길이 1500메터이다. 평강벌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는 동고성은 그 유적지가 지금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데 금나라시기에 쌓은것이며 선종정우2년 년호가 있는 구리관인이 출토되기도 했다. 평강벌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그래도 서고성이다. 외성은 장방현인데 둘레의 길이가 2720메터이다. 해란강은 비암산에서 조여든 평강벌을 빠져나와 좁은 협곡을 지나 해란강반의 명주-룡정을 감돌며 흐른다. 비암산에는 그 유명한 일송정이 있고 룡정시내에는 룡정지명기원지우물터, 일본간도총령사관 옛청사, 영국더기 등 많은 유적들이 있다. 룡정은 리상설, 윤동주, 송몽규, 양림, 구춘선, 심련수, 강경애, 한락연, 김시룡, 김성휘 등 인물들을 배출했으며 유명한 《3.13》반일시위, 《5.30》폭동 등이 일어났고 서전서숙,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연신학교 등 반일인재양성학교가 있었다. 룡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세전벌은 석정으로 들어가는 산골어구까지 일망무제한 논벌을 펼쳐주는데 그 논벌은 해란강물을 먹고 살진다. 멀리 모아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만무과원이 눈시리게 펼쳐진다. 연변의 5개의 만무과원이 있는데 룡정에 3개가 있다고 한다. 그중 연변룡정과수농장(화룡집단)은 아세아주에서 제일 큰 과수원이다. 룡정시의 과수면적은 8600헥타르, 사과배면적은 6800헥타르에 달한다. 동성용을 감돌아흐르는 해란강반에는 유명한 새벽농민대학이 있다. 1958년 5월 l일, 전국로력모범 김시룡이 창시하였고 제1임교장을 맡았었다. 지금 1만2300평방메터되는 교사에 6개의 실험실과 2개의 표본실, 컴퓨터실, 도서관, 열람실이 있으며 100헥타르에 달하는 실험지와 생산기지가 있다. 이 학교에서는 졸업생 2000여명, 연수졸업생 3000여명을 양성했다. 해란강하류 4킬로메터의 무인지경 골짜기를 경유한 해란강은 화전자(석정)에 다달은다. 첫 동네가 석정 《1, 2대》, 길 하나를 사이두고 두 마을이 있는데 이상한 것은 길 오른쪽 마을은 대부분 낡은 초가집인데 반해 길 왼쪽마을의 집들은 모두가 벽돌기와집들이였다. 마침 소를 몰고 지나가는 농부가 있어서 사정을 물어보았다. 김광명(57세)이라고 부르는 농민은 허허 웃으면서 《부자동네와 가난뱅이 동네지유.》했다. 1대 사람들은 한사람당 1쌍(10무) 이상씩 땅을 다루고있는데 2대 사람들은 한사람당 4무정도의 밭을 다루고있는 것이다. 《농사를 잘 지으면 잘 살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잖구요. 화전자담배가 얼마나 유명한지 아시지유.》 《어르신은 몇대에서 사십니까?》 농민은 어줍게 웃으면서 2대에서 사는데 소도 없어서 이렇게 1대사람한테서 소를 빌려가고있는 형편이라 한다. 구장리라는 패쪽이 세워진 마을을 지나니 산중턱을 남포질해 허물어서는 그 버럭을 차에 싣고가는 사람들이 있어 물었더니 새롭게 금광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구룡마을은 고즈넉했다. 마을길에 사람그림자가 별반 보이지 않고있었다. 지나가는 한 나그네를 잡고 정황을 물으니 그럭저럭 산다는것이였다. 《하룡저수지물이 저 아래까지 올라옵니다. 1, 2대는 에 들어 이사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일명 해란호라고 부르는 하룡저수지공사는 마지막단계에 진입한 것 같다. 아직 물이 저장되지 않고있지만 저장된후의 정경을 상상만해도 가관이 아닐수 없다. 이제 민속촌이 들어선다고 한다. 어린이놀이터, 유람선선박장, 문화교육구 등 시설을 앉히는데 부지면저 56만3천평방메터, 사용면적 20만평방메터의 민속촌이 선다는 것이다. 더욱 흐뭇하게 하는 것은 계림에다 세우는 해란강골프장이다. 총 1480만딸라가 투자되는 골프장은 7월 15일 개장하게 된다고 한다. 36홀로 되어있는 골프장은 이제 300내지 400여명 일군을 고용하면서 아세아의 최고의 골프장으로 부상된다는 것이다. 1년에 년인수로 10만명 손님을 접대, 연변에다 부리워놓을 리익이 상당하지 않을수 없다. 건설총무부 정길준리사는 골프장앞날에 아주 락관적이였다. 《골프장중앙정상에 건설된 클럽하우스와 콘도, 부대시설은 세계 어느 골프장에서도 볼수 없는 초현대식 이딸리아대리석건물로서 아릅답고 웅장하게 건축되였습니다. 이제 수영장과 겨울을 즐길수 있는 스키장까지 건설합니다.》 해란강은 하룡촌에서 부르하통하와 합류하면서 두만강을 향한 달음박질을 다그친다. 《연변인민모주석을 노래하네》라는 유명한 노래에 《해란강반에 붉은기 나붓기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노래로 하여 해란강은 전국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해란강은 겨우 132킬로메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강, 평강벌과 세전벌이 있어 유명하고 력사의 발자취가 력력해 유명하며 영웅들의 그림자가 비끼여 유명하다. 지금 계림에다 건설하는 골프장으로 세계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해란강은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 작은 강이 세계적인 강으로 둔갑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2003년 6월 23일 연변일보 제3면  
16    [기행문]모아산(김철호) 댓글:  조회:2398  추천:33  2008-09-01
그 옛날 봉화대 오늘은 시민들의 공원 새해 해돋이를 즐기는 연길의 명소로 언제나 고향의 산 해발 517메터의 모아산은 그닥 높은 산은 아니지만 연길분지와 룡정의 세전이벌, 동불사벌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어디서나 한눈에 바라보이는 고향의 산이다. 모아산에는 스릴을 느끼게 하는 층암절벽도 없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아름드리 로송도 없다. 모아산은 대단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운치가 있다. 유별나게 둥그렇게 우뚝 솟은 모습은 농부가 벗으놓은 초모자같기도 하고 굉장한 왕릉같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모아산은 민둥산이였다고 한다. 원래는 아름드리 고목으로 우거졌댔는데 일제침략자들이 란벌해 가는통에 민둥산으로 되었다고 한다. 연길을 찾은 주은래총리께서 모아산에 식수하여 삼림공원을 꾸미라고 지시하여 연변의 아들딸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모아산에 올라 소나무며 이깔나무를 한그루 두그루 심었다. 몇십년이 지난 지금 민둥산이였던 모아산은 나무가 꽉 우거진 청산으로 되었다. 하여 새들이 날아들고 짐승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연길사람들에게 있어서 모아산은 없어서는 안될 삶의 공간이다. 10여년전만 하여도 모아산에는 산길이 별로 없었고 있다해도 잔풀에 덮힌 가느다란 오솔길뿐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로세로 많이도 뻗었으며 길도 걷기 편한 오솔길로 되었다. 모아산에 가면 좋은것이 너무도 많다. 불현듯 나타나 나무가지사이를 헤염치는 청설모 한 마리! 사람들의 눈길은 청설모의 뒤를 쫓으며 환성을 터친다. 지난 가을에는 모아산에 잣풍년이 들었댔다. 그래서인지 청설모가 특별이 많았다. 깜찍한 청설모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즐거운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모아산에는 청고운 새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한여름 해종일 하고 지저귀는 뻐꾹새의 노래소리는 정답기만하다. 요즘같은 겨울에는 꿩들이 많이 날아다닌다. 하는 꿔울음소리와 더불에 커다란 꿩들이 숲속을 가로지르며 저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우숩광스러우면서도 귀엽다. 모아산에다 민속촌까지 꾸려놓아 여름이면 모아산민속촌은 연변사람들의 광광지로 되고있다. 민속적으로 꾸며놓은 놀이터며 음식점은 객들을 즐겁게 맞아주고있으며 멋진 수석관까지 있어서 볼거리가 점점 많아지고있다. 수석관에 가면 저절로 환성이 터지게 하는 별의별 수석이 다 있다. 호랑이같은 수석, 자라같은 수석, 동해바다에서 아침해가 솟아오르는것 같은 문형석... 겨울에는 썰매장까지 건설해놓아 모아산은 사시장철 관광객들은 맞고있다. 연길공공선로뻐스는 모아산 호랑이석상있는데까지 간다. 때문에 모아산산행은 더욱 쉬워졌다.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만든 석호(石虎)는 모아산의 문지기가 되어 위엄있게 산객들을 바라본다. 그밑으로 뻗은 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면 모아산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모아산정산으로 오르는 길이 여러갈래이지만 정면길로 오르기가 가장 쉽고 편하다. 날랜 사람이면 15분 좌우면 정상에까지 오를수 있다. 정상부분은 대부분 떡갈나무들이다. 여름이면 떡갈나무를 타고오르는 머루넌출이 멋있고 가을이면 오솔길가에 굴러 다니는 도토리를 줏기가 즐겁다. 모아산은 아주 중요한 발해유적지이기도 하다. 모아산을 학명으로 모아산돈대(帽兒山墩臺)라고 하는데 돈대란 봉화대라는 뜻이다. 봉화란 병란이 나타났을 때 연기, 혹은 불빛으로 하는 신호불을 말하는데 봉화대란 그런 신호를 보내기 위해 전문 설치해놓은 고지(高地)를 말한다. 모아산외에도 연길시에는 대돈대, 소돈대가 있다. 대돈대는 연길시 흥안향에 있고 소돈대는 연길공원안에 있다.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산 모아산은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있는 산이기도 하다. 모아산전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곤룡포를 입은 사사이와 싸워 악을 물리친 목동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멀고먼 옛날 모아산은 오늘의 모아산과 그 모양이 전혀 같지 않았고 이름도 달랐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커다란 버섯처럼 생겼다고 하여 버섯산이라고 불렀다. 곁에 다가가 보면 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요 꼭대기는 가름발로 된 넙적한 청석으로 층층이 덮여있어 마치 양산을 씌운 듯 했다. 사면에는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났는데 큰것은 수레가 둬대 드나들만큼 크고 작은 것은 주먹이 나들만큼 했다. 이런 구멍이 어찌나 많은지 벌집같았다. 오뉴월 삼복지간에도 그 돌속에서 뿜겨나오는 랭기에 몸서리가 쳐졌다. 때때로 산우에서 구들장같은 돌이 떨어지며 산산쪼각이 나는 바람에 아무도 감히 그 산기슭으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버섯산은 그저 버섯산이 아니라 독을 품은 버섯산이였다. 하여 사람들은 버섯산을 따로 독심산(毒 山)이라고도 불렀다. 독심산은 무시로 세전이벌에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안개가 푹 낀 날이면 독심산에서는 무시로 괴상한 소리가 났다. 곤룡포를 입은 사니이의 무리들이 칼을 갈고 풍악을 하는 소리였다. 곤룡포를 입은 사나이는 때론 독교에 앉아 산을 내려오는데 들판을 휘둘러보면서 너털웃음을 치는날이면 영낙없이 광풍이 휘몰아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그러면 세전이벌은 큰 재해를 입었다. 하여 사람들은 사월초파일 석가여래님 생일날이면 독심산에서 굉장한 산신제를 지내군 했다. 그러나 해해년년 산신제를 성심성의로 지냈지만 그 효험이 그리 크지 못했다. 독심산 령밑 마을에 늘 낡은 삿갓을 쓰고 다니며 소를 모는 목동이 있었다. 그도 독심산의 피해를 많이 받아 소떼를 반나마 죽이고말았다. 마음씨 착한 목동은 힘이 장사였지만 언제 한번 남들과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목동은 진작부터 독심산의 곤룡포사나이를 미워했다. 목동은 화근의 뿌리를 빼리라 작심하고 도끼를 메고 독심산으로 올라갔다. 곤룡포사나이는 보잘 것 없는 목동이 죽음을 청하러 온다고 생각하고 앙천대소하며 졸개들을 이끌고 달려나왔다. 어느새 싸움이 벌어졌다. 목동은 도끼를 꼬나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곤룡포사나이도 장검을 비껴들고 번개처럼 지쳐왔다. 도끼와 장검이 부딪치는 순간 장검이 두동강이 나고말았다. 곤룡포사나이는 놀라부르짖으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목동이 몸을 한번 뒤채이면서 벌떡 뛰넘기를 하니 신기하게도 목동이 둘이 되었다. 목동이 몇번 이렇게 뛰넘기를 하는 동안 목동이 순식간에 백여명으로 되었다. 이리하여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목동은 싸울수록 많아져 천여명으로 되었다. 곤룡포사나이는 목동을 당해낼수 없게되자 황급히 굴속으로 도망쳐들어갔다. 목동도 도끼를 들고 뒤쫓아 들어갔다. 굴속에서 계속하여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울려나왔다. 싸움은 해종일 벌어졌다.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독심산이 하고 터졌다. 먼지가 하늘 높이 치솟고 바위와 돌들이 산지사방으로 휘날려갔다. 독심산이 터져버리자 함성소리, 비명소리도 사라지고 사위는 잠잠해졌다. 얼마간 지나 먼지가 사라진 다음 보니 독버섯처럼 생겼던 독심산은 묘처럼 둥그런 모양의 산으로 변해버리고있었다.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하여 달려가 목동을 찾았으나 목동은 간곳없고 늘 쓰고 다니던 삿갓만이 나무가지에 걸려있었다. 이때로부터 독심산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세전이벌에는 재화도 덮쳐들지 않았다. 그후 사람들은 이 산이 멀리서 보면 목동의 삿갓과 비슷하다고 하여 모아산(帽兒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아산에서 보는 해돋이 모아산은 연길사람들이 새해의 일출을 즐기는 명소로 부상하고있다. 필자도 련속 몇 년을 설날아침이면 모아산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했다. 작년 모아산정상에서 첫 해돋이를 함께 구경한 친구의 딸은 해돋이를 보면서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던것이 끝내 중점대학에 붙었다. 많은 사람들은 첫 해돋이를 바라보면서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데 그 친구의 딸은 소원성취한것이다. 2005년 1월 1일, 모아산정산에는 어느새 몇백명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오늘따라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여서 사람들 마음은 한결 부풀어있었다. 푸른 하늘 마지막 별마저 사라지자 날씨는 환히 밝아왔다. 연길시, 룡정시, 조양천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저 멀리 개산툰쪽에 우뚝 솟아있는 형제봉마저도 지척처럼 보였다. 해는 바로 그 산으로 솟아오를것이다. 푸르스름하던 동녘이 붉게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쭉 뻗은 산마루에 붉은 띠가 걸린듯 선명한 색조가 산릉선을 물들였다. 정각 6시 58분 형제봉마루에서 반짝하고 빨간 불빛이 터져나왔다. 불덩이같은 태양이 빠끔 나타난것이다. 주먹만큼하던 불덩이가 쑥쑥 솟더니 한아름 두둥그런 불덩이로 변했다. 첫 태양을 기다리고있던 수백명 사람들은 환성을 울리면서 소소리 높이 웨쳤다.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발을 구루면서 환성을 올렸다. 365개의 태양 낳아올릴 피물든 동방의 메부리! 2005년의 태양 1호가 솟아오른다 2005년의 첫 아기가 태여난다 저 태양 이제 집집의 문 열고 복덩이 되어 안기리니 높이 받들자, 태양의 첫 날을! 꽈악 꺼안자, 첫날의 희망을! 올해의 해돋이는 왕년의 해돋이에 비해 훨씬 장엄하고 예뻤다. 작년에는 동산마루에 구름이 한층 끼여서 해가 구름을 뚫고 솟느라고 둥글고 큰 모습을 다 보이지 못했는데 금년의 해돋이는 완전한 모습을 다 보여줘 사람들을 더 흥분시키고있었다. 해가 산마루로 완전히 솟아오르자 찬란한 해살이 온 누리에 물처럼 뿌려져왔다. 눈덮힌 세전이벌은 해살을 받아 흰눈이 붉으스레 물들었고 아침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마을들도 붉은 물이 올라 동화속의 마을처럼 보였다. 환호하는 사람들 얼굴에도 태양은 붉은 물감을 뿌려 홍조가 어리게 했다. 새해 새 소망을 기원하는 사람들 얼굴은 새해의 첫 해돋이처럼 흥분되여 있었다.    2005년 1월 10일
15    [기행문]뾰족산(김철호) 댓글:  조회:2060  추천:34  2008-09-01
항일전설 깃들어있는 유서깊은 산, 산 정상에 우뚝 솟은 기이한 바위산 뻐스를 타고 연길시가지를 벗어나 연집향소재지에 접어들 때 주의해 보면 뭇산중 그 정상에 바위봉오리가 유독 뾰족하게 솟아있는 괴이한 산을 발견할수 있다. 향소재지 뒤로 좀 멀리 보이는 그 산을 지도에서는 《얜퉁라즈(烟筒砬子)》라고 밝히고있고지만 한족촌민들은 《얜퉁산(烟筒山)》이라고 하고 조선족촌민들은 《뽀족산》이라고 부른다. 어찌보면 굴뚝같아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모양새가 하늘을 겨냥한 창끝과 더 흡사해 보인다. 뾰족산은 해발 649.6메터이다. 뾰족산을 뾰족산이라고 하는데는 이런 항일전설이 전해지고있다고 한다. 뾰족산에 깃든 항일전설 뾰족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팔도구항일유격근거지,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들이 운집해있었다. 뽀족산아래 마을의 조선족농민들도 항일투쟁에 궐기해 나서고있었다. 1934년이 막 가는 어느 날, 항일전사 태항룡이 마을에서 17명 무장대원들과 함께 비밀회의를 하고있었다. 이 소식을 렴탐한 주구놈이 미꾸라지처럼 마을을 빠져나가 일본놈에게 고자질해바쳤다. 삽시에 왜놈과 자위단 2개 중대가 마을을 포위해왔다. 《맞다들어 싸우면 다 죽습니다. 내가 적들을 유인할테니 모두들 마을 뒤로하여 포위를 뚫고 나가시오! 안전지대에서 다시 집합합시다! 빨리 철퇴하시오!》 이렇게 말한 태항룡은 뒤창문을 박차고 후닥닥 뛰쳐나갔다. 어느새 놈들은 마을길에 들어서고있었다. 태항룡은 바자굽에 몸을 감추면서 싸창을 휘둘러 몇놈을 쓰러눕힌후 동지들이 피신한 반대방향으로 냅다 뛰였다. 《잡아라! 저놈이 두목이다! 산채로 잡아라!》 놈들은 벌떼마냥 태항룡의 뒤를 쫓아왔다. 태항룡은 번개처럼 바자를 뛰여넘고 터밭을 빠져나갔다. 놈들의 주의력이 태항룡에게 몽땅 집중되고있는새에 17명 무장대원들은 무사하게 안전지대로 철퇴했다. 마을을 벗어난 태항룡은 눈깜박할새에 산중턱에까지 톺아 올라갔다. 산밑에까지 쫓아온 놈들은 태항룡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태항룡은 그만 오른쪽 발을 총에 맞고 쓰러졌다. 뒤쫓아온 놈들은 태항룡을 꽁꽁 결박하여 산아래로 끌어내렸다. 《네 놈은 이미 잡힌 몸이다! 그래 우리 따라 내려가겠느냐? 아니면 산으로 계속 오르겠느냐?》 왜놈두목이 태항룡을 노려보면 으르렁거렸다. 《흥, 나는 원래부터 산사람이다! 계속 산으로 오르련다!》 《뭐, 계속 산으로 오르겠다고?! 그래 산에 오르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단말이냐?》 《산에 올라야 잃어버린 나라를 찾을수 있거늘 내 어찌 비굴하게 네놈들을 따라 산을 내린단 말이냐! 뽀족한 수는 산에 올라야 있는거다! 하하하...》 태항룡의 야멸찬 웃음에 놈들은 전율했다. 《좋아! 저놈을 풀어놓아라! 어떤 뾰족한 수로 산에 오르나 한번 보자!》 결박이 풀리자 태항룡은 꿋꿋이 일어섰다. 부상당한 다리가 모질게 아팠지만 한발자국 두발자국 힘있게 옮겨 디디면서 절벽을 톺았다. 한발자국도 내디디려니 생각지 못했던 놈들은 항일전사가 피를 흘리면서 씨엉씨엉 절벽을 톺는것을 보고 아연해지고말았다. 악에 바친 놈들은 태항룡을 향해 미친듯이 총질했다. 용감한 항일전사 태항룡은 동지들 있는쪽을 향해 손을 젖고는 영용히 쓰러졌다. 그때로부터 이 산을 뽀족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짜아짜한 절벽길 뾰족산으로 가는 길은 대략 두갈래이다. 하나는 연집하옆에 난 향도(鄕道)를 따라 한창 가다가 항일전사 태항룡이 희생되였다고 하는 절벽길을 톺아오르거나 좀 더 올라가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한갈래는 연길-도문 국도를 따라 조금 가다가 리민촌 밭길에 들어서서 산을 빙 에돌아 오르는길이다. 절벽으로 오른다는것은 초보등산자들을 놓고보면 결코 쉽지가 않다. 사람들이 다닌 자리가 보이기는 하지만 길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분한 누런 부석바위우에 난 《길》을 톺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에는 나무들도 별반 없어서 바위돌을 짚으면서 기다싶이 올라야 한다. 잘못 디디면 부석바위가 와그르르 허물어져 아래로 굴러내리기에 자칫 사고를 빚을수도 있다. 아슬아슬한 절벽을 타고 한창 올라야 잘 다져진 오솔길이 나타난다. 나무도 점점 많아져서 가지를 잡으면서 오를수도 있다. 그러나 량켠이 다 절벽이여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바위우에 솟은 소나무를 감상할수 있다. 항상 그러하듯 소나무와 바위는 어디에서나 잘 어울린다. 푸른 깃을 편 소나무는 검누런 절벽가에 멋스럽게 뿌리내려 그 기상이 더욱 름름하기만 하다. 절벽오솔길에 활등처럼 휘여진 소나무 한그루가 앞을 막고 있었다. 한아름 되는 원 가지는 끊기고 다른 한 가지가 절벽가에 쓰러질듯 누워있는데 반길쯤 되는 절벽을 오르면 그대로 나무 등허리를 탈수 있었다. 쫙 펴져있는 소나무는 커다란 일산같은데 그 밑을 들여다보니 여람은 능히 들어앉을만한 공간이 있었다. 절벽을 다 오른후부터는 창끝처럼 보이는 바위산까지 늘찬 릉선이 시작된다. 산우에 솟은 바위산 안전하고도 쉽게 뽀족산을 오르려면 리민촌의 밭길을 택하는 것이 상책일것이다. 밭길을 따라 한창 가면 뉘연한 초원이 펼쳐진다. 뛰염뛰염 자그마한 락엽송숲거나 소나무숲이 우거져있는 초원은 산우의 커다란 들판이였다. 여름이면 초록빛 초원, 가을이면 황금빛 초원을 펼쳐주는 산언덕 들판은 소와 양떼들과 어울려 아주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있다. 초원엔 한갈래의 수레길이 꾸불꾸불 뻗어있다. 그 길을 따라 한창 가야 초원을 벗어날 수 있는데 이번엔 신비한 바위들의 군체를 만날 수 있다. 여기저기 집채같은 바위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솟아있는데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특히 재미있었다. 이 바위는 멀리서뿐만아니라 가까이에서 보아도 틀림없는 《거북》이다. 머리를 쳐들고 힘차게 기여가는 모습이 산 거북같아 보여 《왁!》소리쳐 놀려보고싶다. 이번엔 너럭바위가 길가에 쓰러져있다. 몇십명은 능히 오를수 있는 너럭바위이다. 이런 바위군체들을 뚫고 한창 가면 깊은 골짝 너머로 뾰족산이 보이는데 뾰족산은 커다란 솥뚜껑의 손잡이같다. 그 손잡이를 잡아들면 뾰족산 전체가 거뜩 들릴것 같기도 하다.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어 산릉선을 타고 빙빙 돌아가야 뾰족산에 닿을수 있다. 늘찬 산길을 따라 한창 가면 솥뚜껑 손잡이같던 뽀족산이 머리를 창끝처럼 쳐든 모습으로 반겨준다. 뽀족산은 산우에 솟은 신비한 바위산이다. 네면이 다 절벽으로 된 바위산에는 별반 초목이 자라지 않고있다. 주위를 빙빙 돌면서 살펴보아도 바위산을 톺을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깎아놓은듯, 얹어놓은듯, 쪼개놓은듯, 세워놓은듯... 아무리 기웃거려도 예리하고 날카롭게 뭉친 바위산을 톺아오를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몇길되는 바위벽에 사람이 오른 흔적이 있어서 살펴보니 디딜만한 자리가 몇곳 있었다. 마침 바위틈에 뿌리박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어 그것을 리용하면 될것 같았다. 바위벽을 마주하고 톺기보다 등을 바위벽에 붙이고 뒤걸음질로 오르기가 더 쉬울것 같아 그대로 해보았더니 과연 한발자국 두발자국 오를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바위벽을 타야 했기에 여간 아짜아짜하고 위험스럽지가 않았다. 오르며 보니 장방형, 정방형의 바위들을 묶어서 세워놓은듯해 발을 놓기가 한결 쉬웠다. 정상에 오른후에는 말을 탄것처럼 절벽을 가로타고 앉아있어야 했다. 이쪽도 저쪽도 다 깎아지른듯 아츨한 절벽이기 때문이다. 앞에 5평방메터쯤 되는 평평한 곳이 있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반메터도 안되는 좁고 울퉁불퉁한 절벽우를 벌벌 기여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평평한 곳에 이르러 보니 대여섯이 빙둘러 앉을수 있는 오붓하고 깜찍한 공간이였다. 허리를 쭉 펴니 멀리 연길시가 한눈에 안겨오고 옹기종기 촌락들도 지척이였다. 흰명주천을 드리운듯한 연집하가 깊은 골짜기에 뿌리 박고있는데 뭇산은 장쾌한 릉선을 긋으면서 아득히 뻗어있었다. 휙휘 불어오는 바람결에 몸이 휘우뚱거렸지만 마음만은 날듯 상쾌했다.
14    [기행문]마반산(김철호) 댓글:  조회:1967  추천:33  2008-09-01
아침해 솟는 산 전설 아름다운 산 해솟는 산 연길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높은 산우에 번듯하게 덧놓여있는 유표한 산이 한눈에 안겨온다. 도문시 장안진 경내에 있는 마반산(磨盤山)이다. 연길의 해는 대부분 마반산부근의 산에서 솟는다. 그래서 유명한《농민의 노래》에서도《마반산 높은 봉에 아침에 솟고 /뒤동산 깊은 숲에 뻐꾸기 운다...》고 했을거다. 해솟는 산, 마반산은 볼수록 기이하고 아름답다. 해란강은 평강벌과 세전이벌을 적시며 흘러내려 연길벌 동쪽을 돌아 부르하통하와 합치면서 발해옛성터이며 동하국의 옛수도였던 성자산을 에돌아 북쪽 협곡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흘러가던 강이 다시 동쪽으로 굽이치는 대안에 웅위롭게 솟은 산이 바로 마반산이다. 연길에서 마반산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까지 선로뻐스를 타고 간후 산릉선을 타고 마반산까지 갈수도 있는데 늘찬 길이라 어지간한 의력으로는 힘겹다. 가장 편리한것은 기차를 타고 가 마반산역에서부터 등산하는것이다. 마반산에 오르는 길 역시 여러갈래이다. 역전마을 뒤로 돌아 잘 닦아진 산길로 오를수도 있고 마을뒤산에 난 가파로운 길로 톺아 오를수도 있다.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은 철길을 따라 한창 내려가다가 절벽산에 붙을수도 있다. 가파롭고 힘겹지만 등반하는 멋이 따로 있기도 하다. 마반산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많다. 그중 두 가지가 유명하다. 금돌이야기 멀고먼 옛날, 마반산아래에는 욕심이 굴뚝같은 부자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이 부자는 섣달그믐날까지 머슴을 부려먹고는 장부를 결산못했다면서 삯전 한푼 주지 않고 돌려보내군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근근득식 살아가는 한 총각이 있었는데 그믐날 빈손으로 어머니한테 돌아갈수가 없어 언덕밭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콩이삭이라도 주어 어머니한테 두부라도 앗아드리려는 마음에서였다. 총각이 콩밭에 머리를 박고 여념없이 콩이삭을 줏고있는데 어데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가파로운 산길을 톺아오르니 웬 백발로인이 큰 매돌에 돌을 갈고있었다. 자신을 멍청히 바라보고있는 총각을 보고 로인이 웬일이냐고 물었다. 총각한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로인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자, 근심말고 내가 갈아놓은 이 돌들을 가져가거라》라고 말하고는 어데론지 사라졌다. 총각은 돌멩이 몇 개 주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여나보니 온 집안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전날 주어온 돌덩이는 몽땅 금덩이였던것이다. 맘씨 착한 총각은 그 금덩이를 이웃 가난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자신도 부스럭 금쪼각으로 밭도 사고 집도 짓고 총명하고 부지런한 안해도 맞아들였다. 이 소문을 들은 부자는 젊은이를 찾아가 사연을 물었다. 이듬해 부자는 람루한 옷차림으로 엉금엉금 산우로 기여올랐다. 아니나다를가 산우에서 웬 백발로인이 돌을 갈고있었다. 부자는 눈물코물을 쥐여짜면서 자신의《가난한 신세》를 하소연했다. 그러자 백발로인은 그럼 이 돌을 몇 개 가지고 가라고 했다. 로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자는 준비해갖고 간 자루속에 로인이 갈아놓은 돌들을 와락와락 주어넣었다. 《욕심을 너무 쓰면 화를 입어!》 이렇게 한 마디를 남긴 로인은 바람결처럼 사라졌다. 로인의 말을 아예 귀등으로 흘려버린 부자는 자루가 이미 가득 찼는데도 자꾸 주어넣기만 했다. 갑자기《쿵》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매돌판이 내려 앉는 소리였던것이다. 부자는 돌맹이를 쥐연든채 커다란 매돌판에 깔리고말았다. 매돌판은 산으로 변하여 탐욕스로운 부자를 영영 묻어놓았다. 이 전설에 의해 후세사람들은 이 산을 마반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쌍둥이참외이야기 옛날 성자산성 북쪽에 참외농사를 하는 한 부지런한 농부가 살고있었다. 어느해 삼복철이였다. 농부의 원두막으로 웬 백발이 성성한 중이 찾아왔다. 《랭수 한그릇 적선하실수 없겠소이까. 나무아미타불!》 이에 농부는 옹배기를 들고 밭머리에 있는 샘터에 가서 샘물을 철철 넘치게 떠다가 중에게 주었다. 물은 감칠맛나게 마신 중은 농부를 데리고 참외밭가운데로 들어가더니 주먹만큼한 쌍둥이 참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쌍둥이참외가 다 익거들랑 뜯어들고 저 산우의 반석을 올려다보시우다. 그러면 후에 여사한것이 있을텐데 문을 찾아 그것만 내여오시면 자손만대 행복하게 살게 될것이옵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다 때가 되어야 성사되는 법이오니 성급해하거나 부정한 마음을 먹지 말고 아무쪼록 참외가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려주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로인은 백발중의 말대로 참외가 익기를 기다렸다. 말복이 지나자 참외들이 때벗이를 했는데 쌍둥이참외는 특별히 잘 자랐다. 이에 농부의 마음은 조급해났다. 반석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가. 커가는 참외를 보면볼수록 궁금하기만 했다. 하여 익어가는 참외를 넝쿨채로 들고 땅에 꿇어엎드려 산우의 반석을 올려다 보았다. 기이한 광경이 나타났다. 좀 희미하기는 했지만 자그마한 금망아지가 금매돌을 돌리고있는데 금매돌에서 금싸락이 쏟아져나오는 장면이 보였던것이다. 농부는 참외가 익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면서 하루에도 두세번씩 쌍둥이참외를 들고 반석을 올려다보았다. 참외가 익어갈수록 반석속이 더욱 똑똑히 보였다. 이렇게 되니 농부는 기다려내지 못하고 딴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 일을 딴 사람이 알면 어쩌지. 내가 선손을 써서 독차지해야지.》 농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참외를 뚝 땄다. 《아뿔싸, 참외가 덜 익었구나!》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이였다. 그래도 행여나 해서 참외를 들고 반석을 올려다보니 금망아지가 매돌을 돌리고있는것이 그냥 보였다. 단숨에 반석밑까지 올라갔으나 눈앞이 번쩍거릴뿐 아무것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뒤걸음으로 한발자국 두발자국 물러서면서 보니 금망아지가 또 보였다. 안달아난 농부는 행여나 하여 련며칠 오르락내리락했지만 끝내 금매돌과 금망아지를 찾지 못했다. 그동안 쌍둥이참외는 아주 썩어버리고말았다. 《못된 마음이 일을 망쳤구나!》 세월이 흘러 농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되었다. 림종시 농부는 아들을 불러놓고 쌍둥이참외이야기를 들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란 마음을 옳게 먹아야 하느니라. 그러면 금망아지와 금매돌이 저절로 찾아오느니라.》 그후부터 사람들은 그 반석산을 매돌산이라 했는데 한자로 번져져서 마반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운치있는 산 가파로운 산비탈의 숲을 헤치고 릉선에 오르면 옛말에 나오는 그 커다란 장방형의 반석바위산이 눈앞에 우뚝 나타난다. 네변이 다 몇길씩 되는 절벽으로 둘러있는 바위산을 과연 오를수 있겠는가 근심되기도 한다. 가까이 가보면 중간쯤에 바위가 허무러진 곳이 있어서 산으로 오르기는 그리 험하지 않다. 허물어진 바위우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닌 자리가 력력히 알리는《길》이 있어 그 길을 잡고 오르면 손쉽게 반석우로 오를수 있다. 마반산은 동서로 약 100메터, 남북으로 약 20메터 돌출되여있는 커다란 암봉인데 산은 하나의 커다란 너럭바위다. 잡목과 이름모를 꽃들도 피여있는데 모두가 바위쯤에 뿌리를 내리고있었다. 높지는 않지만 깎아찌른듯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가 아슬아슬한 서쪽 절벽, 절벽에서 조금 앞으로 바라보면 봉분같은 산봉이하나 있다. 사료에 의하면 옛날 봉화대자리라고 한다. 발해시기의 책성부였고 포선만노가 건립한 동화국의 수도자리이기도 한 성자산성이 여기서 손잡힐듯 지척으로 보인다. 화룡에서부터 시작되는 연변의 천리장성은 바로 저 산봉오리를 흘러지났다고 한다. 마반산에서는 그보다 더 먼 옛날 옥저인들이 살던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했고 항일무장투쟁시기 기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북쪽 절벽 우로 뻗은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보면 발밑은 모두가 절벽으로 아츠랗다. 동쪽절벽은 서쪽절벽보다 더 운치가 있다. 절벽몸체와 분리되여 커다란 바위덩이가 외따로 우뚝 솟은것이 참으로 희구하기만 하다. 좀 날파람 있는 사람이면 이쪽 절벽에서 그 바위덩이우에 오를수도 있는데 자칫하면 몇길되는 절벽밑으로 떨어질수도 있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댓 사람이 두손을 펼쳐야 둘레를 잡을수 있을만큼한 바위덩이가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하여 멋스럽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깊은 협곡을 파면서 흐르던 부르하통하가 휙 휘돌아 온다. 부르하통하는 발밑으로 뻗은 산자락에 가리여 없어졌다가 저쪽 아래서 다시 나타난다. 동서남북에 널려있는 산과 마을, 벌들이 여기서 한눈에 안겨든다. 마반산은 연길주위의 산중에 으뜸의 산인것 같다.
13    [기행문]정암산(김철호) 댓글:  조회:2292  추천:21  2008-09-01
전설과 력사가 묻힌 아름다운 산 운치있는 산 정암산성은 도문시 량수진에서 서북쪽으로 10킬로메터쯤 떨어진 정암촌 북산우에 위치해있다. 5월, 짙푸른 계절을 밟으며 찾아간 정암산은 한폭의 산수화였다. 왕청으로 통하는 국방도로에 서서 바라보니 산우에 우뚝 솟은 산채같은 바위산이 우선 범상치 않았다. 오늘 가이드를 책임진 소설가인 최국철씨가 왕청방향으로 하얗게 뻗은 국방도로를 가리켰다. 잘 닦아진 저 길이 옛날엔 아마 험한 달구지길이였는 모양이다. 버들이 꽉 우거진 속으로 개울물소리가 청맑게 들려왔다. 달구지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앞에 맑디맑은 개울물이 감뛰며 흐르고있었다. 청계하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작은 내였다. 산골물이여서 그런지 너무 맑고 청아했다. 흰갈기를 쳐든 작은 물결이 솨 밀려왔다는 다시 쏴 하고 버들숲속으로 사라진다. 개울건너 골어귀에 집 한채가 보이는데 제법 운치가 있는 산장였다. 정암산선을 보려면 우선 산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어귀부터 찾아야 했다. 그러자면 이 청계하를 건너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리가 없었다. 청계하는 너비가 4-5메터 잘되는지라 뛰여건널수도 없고 하여 다들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섰다. 막 가는 5월인데도 물은 너무 차거웠다. 뼈속까지 찡찡 랭기가 스며와서 다들 낯이 파랗게 질리여있었다. 떡갈나무들은 어느새 지난해의 노란 이파리들을 다 떨어뜨리고 파란 아기이파리들을 잔득 달고있었다. 이깔도 새파랗게 새웃을 갈아입고있었다. 가랑잎으로 메워진 산골짜기에 가담가담 길이 알리는데 이제 헤집고 들어가야 할 유일한 산어귀인것 같아보였다. 도란도란 흘러오는 골짝물이 발아래에서 소근거린다. 산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여기처럼 너럭바위가 많은 산도 흔치 않은것 같다. 길량옆운 온통 거무죽죽한 바위로 덫쌓여있는데 걸터 앉았으면 좋음직한 넙적바위, 한판 장기라도 두고 가고싶을만큼 시원한 너럭바위, 가로세로 엉킨 기암, 우뚝 솟은 괴석... 첫머리부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최국철씨는 좁고 깊은 협곡을 가리키면서 말하다가 키넘는 가시나무를 가리켰다. 손이 뻗치는대로 드릅나무순을 땄다. 싱싱한 나무순은 그대로 입에 넣고 씹어도 향기로울것만 같았다. 30여분 올라가니 성문자리로 보이는 가쯘한 성터가 나타났다. 피끗 보아도 건축물의 흔적이라는것이 알렸다. 두 모서리가 반듯하게 각이 났고 층층이 쌓은것 역시 정연했다. 최국철씨는 산성을 보려면 오른쪽으로 톺아올라 릉선을 타야 한다고 하면서 경사도가 급한 산자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한창 오르다가 머리를 돌려보니 정자봉이 확 눈에 안겨왔다. 길가에서 볼 때보다 더 멋지게 보였다. 파란 벼랑가에 늦진달래가 빨간 미소를 머금고있는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최국철씨는 정자봉에 넋을 잃은 일행의 마음을 달래면서 계속 톺아오를 것을 재촉했다. 정자봉전설 쉴참에 최국철씨는 정자봉에 미련이 많은 우리들에게 정자봉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최국철씨는 땀을 들이는 일행을 바라보면서 말주머니를 풀었다. 먼 옛날 마을에는 정자라고 부르는 예쁜 처녀가 있었다고 한다. 남을 잘 도와주고 부모효도 잘하는 정자는 일솜씨 재고 무척 부지런했다. 동네방네에 처녀를 사모하는 총각들이 많았지만 정자는 늙은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그저 부지런히 농사일에만 진념했다. 마을에는 김부자라는 마음이 음특한 사람이 있었는데 정자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별렀다. 아버지의 병구환때문에 정자네는 김부자한테 빚진 신세였다. 김부자는 틈만 있으면 빚을 턱대고 정자네 집으로 와서 성화를 부렸다. 정 빚을 갚지 못하겠으면 정자라도 내놓으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한 딸을 악독한 사람한테 줄수 없는지라 정자 부모들은 그 일만은 안된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자는 억지로라도 정자를 끌어가려고 앞잡이와 함께 정자네 집으로 치달려왔다. 김부자네 머슴 억쇠는 앞질러 달려와 정자한테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급해난 정자는 뒤문으로 빠져나와 산을 바라고 뛰기 시작했다. 김부자네는 뒤산으로 달아나는 정자를 발견하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뒤쫓았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한사코 달리던 정자는 그만 아찔한 벼랑가에 닿아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정자는 두손을 모아쥐고 눈을 꼭 감았다. 정자가 속으로 이렇게 빌고 있는데 난데없는 천둥이 꽈르릉 울었다. 그 무서운 소리와 함께 사방 20메터의 암석들이 모여와 높이가 백여메터되는 봉우리를 이어주면서 김부자와 앞잡이놈을 기암괴석속에 파묻어놓았다. 마을사람들은 마음씨 착한 정자를 신령님께서 구해준것이라고 여기고 새로 솟은 바위산을 다정하게 정자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색 찬연한 성새 릉선에 먼저 오른 친구들이 부르짖음이다. 달려가보니 과연 산성터가 한눈에 안겨왔다. 큼직한 바위가 엇갈린 중간에 돌로 쌓은 성벽이였는데 높은 곳은 2메터도 훨씬 더 되어 보였다. 쌓은 돌들에는 해묵은 이끼가 파랗게 덮혀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산성은 가담가담 끊긴 자리가 있어서 그렇지 줄곧 릉선을 타고 뻗어있었다. 허물어져 돌무지처럼 보이는 곳이 많았지만 완정한 모습을 보존하고있는곳도 있었다. 그런 구간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환성을 울리면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야단이였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방학봉선생은 저서 에서 정암산산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방학봉선생이 말한 그 많은 유적들을 다 볼수는 없겠지만 릉성을 밟으면서 얼마든지 고색찬연한 옛성새를 만끽할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지금 딛고있는 이끼 낀 산성의 잔해속에서 세월의 숨쉬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마음이 울렁이기도 했다. 갑자기 너무나도 완정한 성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림짐작으로 50-60메터 됨직했는데 키가 낮아진외엔 별로 허물어진자리가 없었다. 만리장성의 한귀퉁이를 옮겨온듯 정연하고 장엄한 성벽을 바라보면서 일행은 연신 감탄을 쏟았다. 많은 산성을 보았지만 이렇게 대면적의 완정한 성벽을 보지는 못했다. 그우로 털썩털썩 걷노라니 발해의 장수라도 된 듯 마음이 뿌듯해났다. 조금 더 가니 동, 북 두 성벽의 련접각이 나타났다. 역시 비교적 완정했고 처음보는 성벽모서리였다. 련접각에서 굽이를 돈 성벽은 서쪽 릉선을 타다가 정자봉쪽으로 굽이돌면서 아래로 경사지기 시작했다. 한창 가니 서문자리가 보였다. 서문유적지를 지나 다시 경사진 릉선을 따라 한창 걸으니 이번에는 칼로 베여 만든듯한 층암절벽이 앞을 가로막고있는데 절벽을 리용하여 그우에 성벽을 쌓은것이 보였다. 절벽 그 자체가 성벽인데 그 우에다 또 성벽을 쌓았으니 그 견고함을 말로 어찌 표현할수 있겠는가. 절벽가에는 진달래가 한창 피여있었다. 야산의 진달래는 이미 막물이들어 이파리가 다 떨어졌겠는데 여기 진달래는 아직도 활짝 피고있었다. 정자봉밑에 와서 시계를 보니 오후 2시반이 넘었다. 오전 10시반에 저쪽 릉선을 오르기 시작했으니 한바퀴 도는데 꼬박 4시간이 걸린것이다. 턱밑에서 올려다보는 정자봉은 그 멋이 또 달랐다. 웅위롭고 름름했으며 어찌보면 도고해보이기까지 했다. 혹 산정에 오를수 없을가 하여 벼랑밑에 붙어서서 길을 찾아보니 발붙힐 자리조차 없었다. 바위산을 한바퀴 돌면서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벼랑을 톺을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사면이 깍아지른듯한 정자봉은 사람의 접촉을 거부하고있었다
12    [기행문]발해성곽 있는 아름다운 오호령 댓글:  조회:1941  추천:32  2008-09-01
험요한 절벽에 고색찬연한 옛성터 수륙교통 굳게 지켜온 군사요충지 연길에서 안도행 뻐스를 타고 오호령 긴 턴널을 지나 석문진에 들어서는 굽인돌이에서 내린후 머리들어 바라보면 웅위로운 바위산이 한눈에 안겨온다. 이 산이 바로 오호산(五虎山) 혹은 오봉산(五峰山)이라고 불리우는 산인데 산을 답사하면 지금도 옛산성자리를 손쉽게 볼수 있다. 석문진에서 원경으로 오호산을 바라보면 다섯 개의 봉오리가 뭇산가운데서 유별나게 우뚝솟아 있어 마치 다섯 장수가 마을을 지켜주는 형국이다. 부르하통하와 철길은 오호산 서쪽의 좁은 협곡을 우회하여 지나간다. 그래서 더욱 특이한 운치를 돋혀주기도 한다. 만약 여름에 이곳을 찾는다면 산기슭에서부터 너무나도 귀를 솔깃하게 하는 개울물소리에 유혹되고 말것이다. 계곡을 울리는 개울물은 너럭바위가 우중충 솟은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있는데 파란 숲에 숨어 재잘거리는 산새들의 정다운 지저귐과 합주를 이루면서 한결 마음을 설례이게 할것이다. 파란 잔디가 주단처럼 펼쳐져있는 사이로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은띠마냥 풀어져 내려와서는 한곬이 되어 더 큰 소리로 노래부른다. 신을 벗어던지고 개울물에 첨벙 뛰여드는 재미 엄지! 그러나 얼마 안가서 다들 개울물에서 급히 뛰쳐나오고만다. 발이 너무 시려 참을수 없기때문이다. 골짜기물이 그렇게 차거울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늘이 꽉 우거진 깊은 산속에서 샘솟아 흘러오는 개울이여서 그런것 같다. 시원한 물에 얼굴을 씻고 손바가지 하여 한모금 떠마시면 그방까지 밀려들던 더위가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 가벼운 등산이 소원이면 첫 봉오리에 오르면 된다. 첫 봉우리와 둘째 봉우리 사이에 창끝처럼 생긴 괴상한 바위가 우뚝 솟아있는데 등뒤 너럭바위가 장수라면 이 바위는 장수가 창을 꼬나든 모양이랄가. 아무튼 하늘 향해 뽀족하게 솟은 바위는 볼수록 괴이했다. 바위는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그러안을만큼밖에 안되고 높이도 한길반쯤밖에 안되지만 워낙 신기하게 생겨서 누구나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싶어 한다. 집채같은 바위를 에돌아 오르면 네댓명은 둘러앉아 점심을 먹을수 있는 너럭바위가 나타나는데 생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일산마냥 해볕을 막아주는것이 또한 이채롭다. 그늘밑에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어 이마에 돋은 땀을 감쪽같이 씻어준다. 만약 가을이라면 이 봉우리에서 마준켠 산과 멀리 석문벌을 바라보는 재미 한결 멋스러울것이다. 출렁이는 금파만경의 석문벌 그 사이를 뚫은 부르하통하의 은뱀같은 흐름, 산자락의 울긋불긋한 단풍물결... 함선을 타고 황금의 파도우를 달리는 기분이 들것이다. 물론 봄이면 바위굽마다에 연분홍물감을 뿌리면서 줄달음치는 진달래를 쫓느라고 환성일것이고 겨울이면 하얀 대리석같은 바위층계를 뛰여오르느라고 야단일것이다. 지금은 초겨울이여서 그런 기분은 없고 바람에 가랑잎들이 날리는 소리와 가랑잎을 밟는 소리가 정답다. 이렇게 바위로 덧쌓인 절벽산이 모두 다섯 개! 봉이마다 모양과 기세가 다르다. 대담한 사람은 절벽타기를 할수도 있다. 그러나 안전조치를 갖추는것이 제일 좋다. 몇길씩되는 깍아지른듯한 절벽을 오르기가 결코 쉽지 않기때문이다. 좋기는 절벽기슭에 난 길을 에돌아 산에 오른는것이다. 한봉우리 또 한봉우리 오를 때마다 정복의 희열과 함께 산의 상쾌함을 맛보면서 자신을 이겨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것이다. 다섯봉우리 가운데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오른후부터는 산릉선을 따라 내리게 된다. 처음 등산했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후에 알고보니 우리가 내리고있는 길은 사실 옛날 성벽자리였다. 알고보니 둥두런 성터자리가 너무도 확연히 알렸다. 조금 더 내려가보니 제법 돌들이 가쯘하게 쌓인 자리까지 알렸다. 한층, 두층... 보기에 엇비슷한 돌들로 쌓은것이 대여섯층은 되어보였다. 산성의 등허리를 밟으면서 걷노라니 그 옛날 장수들이 창을 꼬나들고 산성을 지키는 모습이 떠오른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방학봉선생은 오호산산성을 두고 고 이라는 글에서 쓰고있다. 쭉 내려오던 릉선이 이번에는 급한 경사를 이루면서 아츠란 바위굽을 만들었다. 나무가지를 쥐며서 톺아올라야 했다. 절벽가에는 과연 성벽의 흔적이 력력했다. 그러니 어떤 곳은 돌로 성벽을 쌓고 어떤 곳은 절벽을 리용하여 그 웃모서리에만 조금 성벽을 쌓은것이였다. 몇길씩 되는 절벽을 내려다 보노라니 앞이 다 아찔해났다. 그러니 이런 곳은 저절로 천연적인 성벽이 이루어진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오르니 둥두런 흙무덤이 있었다. 아마 봉화대자리가 아닐가 생각된다. 여기에서 금방 지나온 산자락이 정면으로 확 보였다. 틀림없는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줄느런히 틀고앉아있는 모양이였다. 바위산은 해볕에 반사되여 어룽어룽 검푸른 색을 뽐내는데 금방이라도 호랑이 다섯 마리가 흐르렁거리면서 달려들것만 같았다. 여기서부터 다시 내리막이였다. 역시 오른편은 현애절벽이여서 산성을 쌓은 자리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절벽이 낮아지면서 성벽자리가 확연히 알렸다. 어떤 곳은 허물어지고 어떤 곳은 아직도 덧쌓은 자리가 뚜렷했다. 다시 올리막이 시작되는 곳에까지 와보니 완정한 성벽자리가 보였다. 성벽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느라고 다를 한창 떠들어댔다. 에서 방학봉선생은 오호산산성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방학봉선생이 가리키는 이런 성벽들을 구경하려면 어떻게 서둘러야 할지가 캄캄하기만 했다. 하여 왼쪽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면 이겠지 하고 무작정 골짜기를 뚫었다. 8-9메터씩되는 이름모를 아름드리나무들이 높이 자란 골짜기를 내리기란 여간 힘겹지가 않았다. 한창 내려온후 뒤돌아보니 봉우리가 금방 저기였다. 골짜기가 너무 깊어 얼마 내려오지 못하고있었다. 락엽들이 쌓이고 덧쌓여 무릅을 넘었고 진대나무들이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져있는것이 원시림같기만 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호랑이들이 자주 출몰하여 행인들이 맘놓고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이따금 큰 짐승들의 똥무지며 뚜져놓은 자리까지 있어서 섬찍해나기까지 했다. 아마 반나절은 내려온것 같아 보였다. 두 골짜기가 합해져서 좀 큰 골짜기를 이루었다. 골짜기 밑바닥은 물에 씻긴 커다란 자갈돌이며 바위로 깔려 있었다. 지난 여름 골물이 해놓은 소행인 것 같았다. 누군가 커다란 나무 밑에서 썩은 배모양의 물건을 주어들더니 이것이 뭔가 하였다. 살펴보니 가래토시였다. 10여메터씩 되어보이는 우람진 나무는 가래나무였던것이다. 락엽을 헤집으면서 보니 숱한 가래토시가 널려있었다. 한창 주으니 한주머니가 그들먹해졌다. 사람의 발자취가 별로 나있지 않은곳이여서인지 이렇게 초겨울인데도 가래토시가 널려있었던것이다. 달려가보니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돌무지가 있는데 사실은 돌무지가 아니라 골짜기 중간을 막은 성벽자리였다. 골물의 충격으로인지는 몰라도 한쪽이 허물어지고 오른쪽으로 많이 남은 성벽은 두키는 남아되여 보였다. 돌틈에 이끼까지 파랗게 돋은것이 그대로 있어 아주 오래된 성벽임이 한눈에 안겨왔다. 더러는 성벽우에 서고 더러는 성벽밑에서 만져보면서 사진도 찍었다. 어떻게 이런 산중턱에 성벽을 쌓았는지 모를 일이다. 가쯘하게 쌓은것이 여간 탄탄해 보이지 않았다. 성벽에서 한창 내려오니 골짜기가 차츰 넓어지면서 아주 확 열리였다. 멀리서부터 기적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방 앞으로 기차가 땅을 굴리면서 지나간다. 기차길까지 내려온것이다 여기에도 성벽자리비슷한 곳이 여러곳이 있었고 집터자리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철길을 넘어서니 맑은 흐르하통하가 정답게 흐르고있었다. 철길따라 유수천방향으로 가면 0.5킬로메터, 우리가 뻐스에서 내리던 석문진 굽인돌이까지 가려해도 그만큼한 거리라고 한다. 철길에 나서서 금방 지나온 산골짜기를 올리다보니 아츠랗기만 했다. 우중충한 절벽이며 깊은 골짜기며가 틀림없는 심산협곡임을 알려주고있었다. 산성은 반월형(半月形)으로 생겼고 둘레길이는 약 5킬로메터라고 하니 저기 보이는 저 절벽산을 둥그렇게 그으면서 우리가 지금 서있는 여기를 직선으로 저쪽 산밑에까지 잇닿게 성벽을 쌓은것이 아닐가 생각된다. 10리길을 더 걸어야 차를 탈수 있기에 다들 행장을 잘 정비하고 철길을 따라 석문진방향으로 걸었다. 어쩐지 부르하통하가 아주 아름다워보였다. 물우에 비낀 산그림자가 멋있어 그럴가. 아니면 물이 너무 맑아서 그럴가. 산우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발견 못했는데 내려서 강옆으로 걸으니 그 수려함이 한결 더 했다. 부르하통하 량옆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것 같아 보이지 않는 현애절벽으로 이루어져있었다. 한창 락조가 시작되는 때라 산저쪽으로부터 비쳐오는 해살은 산에 의해 막히고 그대신 산이 커다란 그림자처럼 보였다. 해살이 비껴지나는 산머리와 산그름자가 가라앉는 부르하통하는 한폭의 산수화로 우리들 앞에 펼쳐진것이다. 아, 원래는 이래서 오늘따라 부루하통하가 더 수려해보인것이였구나. 오호산은 강을 끼고있어 더욱 아름다웠다.
11    [기행문]사방산에 올라(김철호) 댓글:  조회:2177  추천:35  2008-09-01
ㅡ화산구로 형성된 신비한 산 전설이 깃든 아름다운 산 한갈래 길이 가리마처럼 사라진 밀림의 웃수리에 사방대의 삼형제바위산이 운무속에서 우리 일행을 유혹하고있었다. 거무칙칙한 바위산 중턱에서 구름이 휘휘 감도는 모양은 마치 전설의 현장같기도 하였다. 하여 답사팀 일행은 저으기 숙연한 기분이 되기도 하였다.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안개가 발에 밟히기도 하여 그런 기분이 더욱 짙어진다. 금방 비가 올듯하면서도 아직 비꼬치질은 없고 그저 섬득한 기운이 감돌기만 한다. 어디서 밀려온 구름인지 갑자기 사방대의 하늘가를 배회하더니 삼형제바위산을 감쪽같이 삼켜버렸다. 사방대는 우리 눈에서 홀연 사라져버렸다. 왕청현 하마탕향의 사방대는 해발 956메터로서 너무 높은 산은 아니지만 화산폭발구로 형성되여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주는 연변의 명산이다. 큰도시와 멀리떨어진 관계로 사람들의 발자국이 많이 남지 않은탓에 계곡을 가르며 흐르는 물은 그대로 마셔도 되게 깨끗하고 길옆 삼림은 제법 울창하였다. 하마탕향로인협회 회장인 김두성로인이 이날 우리 답사팀의 길안내를 맏았다. 우리는 김로인의 뒤를 부지런히 따르면서 구름속에 묻힌 사방대를 향해 발걸음을 재우쳤다. 조금후 구름사이로 가냘픈 해살이 비쳐나왔다. 그제서야 삼형제바위산을 감싸고있던 구름이 사라지면서 우뚝 솟은 괴석이 바라보인다. 흰구름이 걸린 벼랑은 한폭의 그림같았다. 우리 일행은 연신 감탄하면서 멀리 보이는 사방대의 바위산을 감상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못갔다. 구름속을 헤집으면서 비쳐오던 한줄기 해살이 사라지면서 다시금 구름이 끼더니 질금질금 비가 오기 시작했던것이다. 삼형제바위산과 사방대 전체가 다시 구름속에 파묻혀버리고 주위는 어둑칙칙해 졌다. 김두성로인의 롱담이였다. 하마탕에서 잔뼈를 굳혔다는 하마탕향 전하촌의 전유일촌장의 말이였다. 이번 답사에 하마탕향에서 여러 사람이 합류되였기에 답사팀은 제법 흥성흥성 했다. 하마탕향 당위부서기 김수찬씨가 말을 받았다. 김두성로인은 사방대의 래력을 잘 알고있는듯했다. 1950년대까지도 사방대는 쩍하면 우르릉 우르릉 울었댔다고 한다. 산이 운다니 괴상한 일이 아닌가. 산이 어떻게 우는가고 물으니 산 전체가 흔들리는듯 보이면서 멀리서도 들을만큼 괴상한 소리를 내는데 그럴 때에는 아예 입산을 금한다고 한다. 일제시기 일본토벌대가 사방대의 항일유격대를 소탕하러 왔다가 사방대가 울어대는 바람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는 일설도 있다고 한다. 사방대의 울음소리를 들은적있는 김두성로인은 혀를 끌끌 찼다. 지금 보면 지진운동으로 산울림이 생긴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때에는 산이 노해서 그런줄로 알고 아예 산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을 다 저지른 일제침략자들은 저들의 죄를 알아보고 하늘이 노하여 그런줄로 알고 꽁무니를 뺏을것이리라. 비오고 안개가 발목을 감아치는통에 우리는 삼형제바위부터 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사방대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비는 그냥 내리고 산은 오를수록 짙은 안개에 덮히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톺고있는 길은 층암절벽 모서리였다. 안개가 끼였기에 절벽밑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들 별 위험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등산했다. 김두성로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절벽과 좀 멀리 떨어져 걸으라고 당부했다. 누군가 큼직한 나무토막을 절벽밑에 던졌다. 퍼그나 시간이 걸려도 나무가 맨밑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좋이 시간이 흘러서야 우리는 산정에 올랐다. 산정에 올랐어도 안개가 휩싸여서 우리는 산의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안개가 끼여 잘 보이지 않아 그렇지 산정은 퍼그나 넓을 것 같아 보였다. 일행중 사방산의 래력을 알고있는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산정의 이곳저곳을 신비한 눈길로 살펴보았다. 김두성로인이 소리치자 일행을 우르르 몰려갔다. 높이가 2메터 남짓한 둔덕이 뻗어있는것이 너무도 확연히 알렸다. 다른데 산성을 여러번 본적이 있는지라 이것이 확실히 산성의 흔적이라는것이 알렸다. 사방대는 고대의 군사요새지였다고 하면서 김두성로인은 발해국시기의 옛말을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발해국시기였다고 한다. 홍락녀라고 하는 녀장수가 사방대를 지키고있었다. 홍락녀에게는 사랑하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장수였다. 동생은 50리 떨어진 대흥구의 을갑산산성을 지키고있었다. 두 오누이는 거란군이 쳐들어올 경우 봉화대에 불을 지펴 대응키로 약속하고 밤낮이 따로없이 발해의 산성을 지켰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 두 오누이가 혜여진지도 어언 2년 세월, 오누이는 서로 보고싶어도 만날 수 없게 되자 그저 밤마다 달을 바라보며 그리군 하였다. 보고싶은 마음은 홍락녀가 더했다. 일찍 부모를 여인 홍락녀는 동생을 제손으로 키우면서 동생이 아니라 아들처럼 보살펴주었던것이다. 이 밤도 동생은 차거운 삼림속 공기를 마시면서 오랑캐들의 동정을 살피느라 잠을 못자고 있겠지. 둥근달을 바라보는 홍락녀의 마음은 산란하기 그지없었다. 남동생이 너무도 보고싶어 참을수 없었던 홍락녀는 하루는 봉화대에 올라 그만 불을 지피고말았다. 검은 연기가 삽시에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다. 을갑산산성을 지키고있던 동생은 사방대의 하늘가에 난데없는 검은 연기가 치솟아오르는것을 발견하고 거란군이 쳐들어온거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남동생은 즉시 병마를 출동하여 달려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것은 거란군이 아니라 그리움에 젖은 눈길로 바라보는 누나 홍란녀의 아름다운 얼굴이였다. 동생은 누나를 크게 책망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버렸다. 1년도 안되여 다시 검은 연기가 사방대의 봉화대에서 솟아올랐다. 동생은 누나가 자기를 보고싶어 또 저러는것이라고 생각하고 병마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로 거란군이 쳐들어왔을줄이야. 홍락녀는 끝내 거란군에게 산성을 앗기게 되었다. 김두성로인은 앞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홍락녀가 마셨다는 샘터와 그녀의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면서 앞장서 숲을 헤치며 씽씽 걸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김두성로인은 가랑잎이 덮인 너럭바위를 손으로 쓸면서 발자국을 찾아냈다. 과연 사람 발자국 모양의 자국이 드러났다. 금방 옆에 새긴듯한 동그란 구멍이 하나 뚫려져있느데 나무꼬챙이로 뚜지니 한자 남짓 깊어보였다. 산성을 앗긴것이 통분한 홍락녀는 산악같이 울부짖으면서 오른 발을 쾅 굴렀다. 그래서 생긴 것이 이 발자국! 이번에는 오른손에 쥐고있던 창을 바위에 콱 박았다. 그때 창날이 박힌 자리가 이 구멍이란다. 사람들은 다투어 발자국에 자기의 발을 담아보았다. 장수의 발자국이여서인지 두 발이 다 들어가고도 자리가 남았다. 발자국이 새겨진 바위에서 서너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맑은 샘이 흐르고있었는데 홍락녀가 마시면서 힘을 키우던 샘이라고 한다. 파란 샘줄기가 바위쯤으로 흘러나오고있었다. 샘이 고이라고 누군가 돌을 쌓아놓은 흔적이 알렸다. 우리는 머리를 틀어박고 샘물을 마셨다. 가슴이 쩡해나게 차거운 샘이였다. 약간 달큰하면서도 시원해 정신이 번쩍 났다. 샘으로 목을 축이고나서 협곡을 타고 내렸다. 집채같은 바위굽에 발을 옮겨디디면서 한사람 한사람 부축하면서 협곡을 내려야 했다. 협곡을 다 내린후 뒤돌아보니 금방 내려왔던 골짜기에 안개가 기여들어 을 감추어버리고있었다. 대신 난데없는 열길남짓 되어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있었다. 끝이 뽀족한 바위는 발해장수의 투구라 할가 위엄이 있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협곡밑에도 집채같은 너럭바위가 널려있었다. 숲을 헤집고 앞으로 나가는데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전촌장과 김서기가 벼랑밑에 다가가서 비를 끊자고 했다. 과연 벼랑밑에 들어서니 비가 미치지 않아 좋았다. 김두성로인이 아츠라니 보이는 협곡을 가리켰다. 집채같은 바위가 널려있는 협곡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우리가 비를 피하고있는 벼랑밑굽에는 한메터 남짓이 갈라진 홈이 있었다. 들여다보니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 화산폭발 때 생긴 틈인데 그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다. 살펴보니 이렇게 산이 갈라진 자리가 기수부지였다. 기원 926년 발해국이 갑자기 멸망한것은 연변지역의 지질운동과 관련있다는 일본사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락후한 거란인들이 동방의 해동성국인 발해국을 일조에 멸망시키기에는 그 힘이 벅찬 일이다. 그 당시 발해국에는 지진, 화산과 같은 피치못할 자연재해가 불시에 달려들어 거란의 발해진공을 도왔을거라는 사학계의 주장도 있다. 그 깊이를 알수 없는 갈라진 돌산의 틈사리를 들여다보면서 지진 당시의 그 굉음이며 진동이 어떠했으리라 상상해보니 공포가 가슴에 밀려온다. 돌맹이 하나를 던져넣은후 귀를 강구어 들으니 끝없이 굴러들어가는 소리가 난다. 이런 돌틈에 빠지면 황천일것이라는 우수개를 그저 우수개로만 들을 일이 아니였다. 다들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가 즘즘해지자 일행은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아름드리 나무가 가로막혀 그 밑을 기여서 빠지기도 하고 작은 절벽이 놓여 여럿이 손에 손을 잡고 내리기도 하면서 얼마를 내려왔는지 모른다. 우리는 때론 집채같은 바위가 덧쌓여있는 밑을 지나면서 아슬아슬해 하기도 했고 펑 뚫린 바위구멍을 바라보면서 신비함을 느끼기도 했다. 맑은 개울이 졸졸 흐른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올리막이였다. 갖가지 나무로 울창한데 나무틈사이로 바라보니 우리가 서있는 자리는 그저 골짜기인것이 아니라 퍼그나 넓은 평지같아 보였다. 몸을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가 절벽산으로 둘러있었다. 우리는 지금 절벽산속에 갇혀있었다. 가파른 올리막이 앞을 가로 막았다. 한사람 한사람 오를수 있는 가파른 길이였다. 앞사람이 당겨주고 뒤사람이 밀어주면서 얼마나 간신히 올랐는지 모른다. 짐승들도 발을 붙이기 힘들것 같아보이는 벼랑길이였다. 일행은 조심에 조심을 가하면서 한발작 두발작 오르고 또 올랐다. 갑자기 한길 남아 되는 절벽이 앞을 턱 막았다. 김두성로인이 먼저 나무아지를 쥐고 절벽가의 틈사리를 디디면서 웃모서리를 잡더니 씽 하고 꼭대기에 올랐다. 그리고는 아래 사람들의 손목을 하나 하나 잡아 당겨주었다. 마지막 고비였다. 비가 미미 끊긴 상황이라 주위가 한눈에 잘 안겨왔다. 산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일행은 다시 한번 놀랐다. 우리가 지나온 곳은 커다란 함지같은 곳이였다. 성처럼 둘러쌓여있는 벼락산이 20리는 더 되게 둘레를 치고있었다. 우리는 화산구에서 그 기슭으로 올라온것이였다. 움푹하게 패인 커다란 화산구는 지하삼림이였다. 우리는 금방 그 지하삼림에서 헤매이다가 올라온것이였다.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차츰 얼굴을 내밀어주어 우리는 사방대의 신비한 얼굴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사방대는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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