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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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선생 관련 인터부 2편/김철호
2019년 08월 16일 18시 01분  조회:875  추천:0  작성자: 김철호
김대현선생이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듣고 많이 가슴 아팠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내가 연변일보 재직시절 김대현선생을 인터뷰한 글 두 편이였다. 이 글로 김대현선생의 타계로 아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려고 한다.
 
 
<책 속에 만석의 곡식 들어있는데…>
ㅡ책 모아 7,8년에 3천권의 장서 마련한 김대현씨
 
트럼프, 마작, 장기, 낚시… 거의 모든 놀음에 등돌리고 장서에만 마음이 들떠있는 김대현(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부국장 겸 부주필)씨는 자신의 장서를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책모으기에 본격적으로 살손을 대기는 7, 8년전부터라고 한다. 그간 아글타글 모은 3천여권 책이 객실과 침실의 책시렁에 빈틈없이 꽂혔고 인젠 침대밑이며 베란다에마저 쌓아놓잖으면 안되게 되였단다. 그래도 공일날만 되면 안해의 눈을 슬쩍 피해 그간 챙겨두었던 소비돈을 갖춰가지고 거리의 책난전을 돌아보는데 어느 골목이건 샅샅이 뒤지면서 고서거나 희귀한 책들을 찾느라고 눈뿌리를 뺀다는 것이였다. 이러한 책을 발견했을 때의 그의 마음은 금덩이를 주었을 때보다도 더욱 들떠진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부르는 값이 저렴할 때면 그 기분이 둥둥 떠지고 어깨가 으쓱해진단다.
별의별 책이 다 있었다, 문학, 력사, 정치, 인물전기, 관광저서, 의서… 깔끔히 새것인 것도 있었고 보풀이 일어 원 모양을 찾아볼 수 없이 낡은 것도 있었다. 아무리 낡고 보잘 것 없어보이는 책도 그에게는 그처럼 소중할 수가 없었다. 알뜰히 챙겨서 정히 얹어둔 것을 내리워서 펼쳐보이는 손길은 귀중한 보배를 내보이는 것처럼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광복후에 조선에서 출판한 시집들인데 한 2백권 될 겁니다.” 객실의 책시렁 맨밑층에 얹은 책들을 가리켜보이면서 흐뭇이 웃는다. 어릴 때 애독하던 장편서사시 <독로강>이면 <두만강> 같은 조선의 명시집들이 귀빠진 것 없이 꽂혀있었다. 조기천의 <두만강>은 첫판본을 비롯해 각기 부동한 판본이 4권씩이나 있었다.
출판사, 출판 년월일이 미상인 귀서도 있었는데 책장을 펼치니 리광수, 안재홍, 리은상, 김동인, 김진석, 리태준, 정영섭, 양주동, 라빈, 박화성, 로자영, 박태원. 리조원… 등의 명문이 실린 작품집들이였다. 인쇄, 종이 등으로 보아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 아닐가 의논해보면서 다른 책을 찾아쥐니 대정 2년(1914년) 서울에서 출판한 서예책이였다. 누구의 필법인지 그야말로 룡이 날고 범이 뛰는 필체였다.
어떤 책은 쥐고 놓고 싶지 않았다. 1956년에 북경고적출판사에서 출판한 <자치통감>(1ㅡ10권)은 당시 3천부밖에 발행하지 않았으니 지금 3천부가 그대로 보존돼있다고 해도 40만 인구에 한조가 차례지는 꼴이니 참으로 귀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정 12년(1924년) 초판으로 된 <명심보감>, 소화 2년(1927년)에 찍은 <고문진실전집>, 1957년에 출판한 <조선중앙년감>, 대약진시기의 <민요집>… 김씨는 아무튼 책부자였다. 부자가운데서 책부자가 가장 흐뭇한 부자가 아닌가면서 우스개를 피우는 그는 죄우명처럼 삼는 명언이 하나 있다면서 수첩을 펼쳐보인다.
“부자되기 위해 굳이 밭을 살 필요가 없다. 책 속에 만석의 곡식이 들어있는데. 편안히 살자고 고대광실을 살 필요가 없다. 책 속에 황금으로 지은 집이 있는데. 안해를 고르는데 거들떠보지 않음을 한탄하랴. 책 속에 옥같은 미녀가 줄쳐있는데.”
“얼마나 멋진 명구입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저 책시렁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납니다. 보물고에서 산다는 기분으로 마음이 든든해지지요.” 안해가 먼지투성이의 책을 한아름씩 사들고 오는걸 질색해 하나 못들은척 자행을 고집한다는 것이였다. 민족유산은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책모으기가 그로서는 가장 적중한 작업이라는 것이였다.
요즘 어떤 도서관에서는 적치된 책을 페서로 처리해버리는데 대해 참으로 가슴 켕긴다 한다. 30, 40년대의 책은 아주 드물고 50년대 찍은 책도 얻기 힘든 상황인데 도서관에서 이렇게 책을 없애는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50년을 주기로 책이 소실되는데 지금 손쓰지 않으면 어떤 책은 영영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각별히 책읽기를 즐겨 야금야금 모았으나 “문화대혁명”, 집이사 등에서 밀대를 맞다싶이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하여 가슴 썩였댔는데 7, 8년 심혈을 쏟으니 또 이렇게 모아지더라면서 노력하면 먹은 마음이 꼭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책 외에도 그는 몇 점의 수석을 갖춰놓고 있었고 옛날 다림이같은 고물도 몇 점 챙기고 있었으나 별로 눈길이 쏠리지 않았다. 그런데 신문, 잡지에서 귀중한 력사사료, 명언, 수필, 시, 기행문, 관광소개 같은 것을 가위질해 모은 것이 수천 편 된다는 말에는 마음이 동해 그 자료를 보니 확실히 모두가 주옥같은 자료들이였다. 도서를 포괄해 이런 자료들은 그의 편집, 집필 사업에 큰몫을 보태준다고 한다.
“액외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해 몰래 책을 사들여 핀찬을 들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인젠 그것이 가장 즐거운 일로 고정이 되여버려 저로서도 자제할 수 없고 안해도 더는 어쩌지 못하지요.” 김대현씨는 조금 시뚝한 기분이기도 했다.(1998년 10월 연변일보)
 
 
 
 
수석가 김대현씨
강따라 계곡따라 수석찾아 15년
“수석엔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지요”
 
수석(壽石)에 정이 들어 애석(愛石)생활을 즐긴지도 어언 15년 세월, 지난 15년동안 초라한 행각으로 강따라 계곡따라 다닌 길 얼마인지 모른다는 김대현씨(연변백두산수석학회 고문)는 수석과 정을 나누면서 날이 갈수록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고 한다. 이제 강물이 풀렸으니 올해에도 부지런히 탐서해야겠다면서 며칠전 두만강탐석길에서 주었다는 돌 하나를 내보이였다. 보자마자 “이건 ‘물개’군요!”했더니 “그렇지요!”하고 미소를 띄운다.
한 손 우에 얹을 만큼의 알맞춤한 오석인데 심통하게도 앞부분에 “눈” 두개 패여있고 “코구멍”까지 있었다. 더욱 묘한 건 다른 석질로 된 “입”이였다. 온 몸이 몽땅 까마반지르한 오석인데 어떻게 되여 주둥이에만 골라넣은듯 누른색 돌이 박였을가. 볼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지난 토요일(4월 1일), 백두산수석학회 동료 6명은 올해의 첫 탐석에 나섰다. 도문에서 10리쯤 내려가면 신기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앞 두만강자갈밭이 탐석지였다. 쌀쌀한 날씨지만 첫 탐석에 나선 동료들은 금덩이 줏는 심정으로 자갈밭에 눈길을 박았다. 그러나 해종일 헤매도 별로 신통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까만 “눈동자” 하나가 김대현씨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눈동자”였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살살 모래흙을 파헤쳤다. 다른 한 “눈동자”까지 드러났다. 가슴이 후둑후둑해 났다.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쇠갈구리를 깊숙이 박은 후 돌을 흙속에서 후딱 빼냈다. 강아지새끼처럼 귀여운 돌이였다. 재빨리 두만강물에 헹구었다. 깨끗이 씻긴 돌은 찬란한 오색인데 얼핏 보기에도 틀림없는 “물개”였다.
“돌줏기가 그래서 재밌다는 겁니다. 면바로 좋은 돌 하나 주으면 둥둥 뜨는 기분이죠. 보십시오. 이 ‘눈’,  ‘코’, ‘입’이 얼마나 묘합니까. 이 돌은 우리 집에서 두번째로 좋은 돌입니다.”
“그럼 첫번째 돌은요?”
시렁에 얹힌 까마반즈르한 돌 하나를 가리킨다. 주은지 꽤 오래지만 아직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그 돌 역시 오석이였다. 빈틈없이 잘 수마된 돌은 단순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굴곡이 있고 평범한 것 같지만 신비한 운치가 배여있었다.
“1989년, 한국나들이를 하고 돌아온 후부터 탐석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수석생활이 맘에 들어서였지요. 그러니 본격적으로 돌을 줏기 시작한 것은 1990년부터입니다. 마수걸이가 참 좋았던 같아요. 이 돌은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주은 돌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군침을 흘립니다. 이만큼한 돌은 아마 흔치 않을 겁니다.”
김대현씨는 돌자랑을 자식자랑처럼 늘여놓았다.
그날은 김부식 등 한국애석가들과 함께 탐석길에 올랐다고 한다. 가야하와 부르하통하 함수목이 탐석장이였다. 홍수뒤끝이라 강변은 스산하기 그지없었지만 탐석자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유별나게 눈길을 빼앗는 까만 점에 흡인되여 무릎을 꿇게 되였는데 살살 파헤치며 보니 오석이였다. 가뿐 들리는 까만 돌을 강물에 씻으며 보니 밑바닥이 칼로 벤듯 반듯했다.
“명석을 주었다!”
산천이 떠나라 소리를 지르니 저쪽으로부터 두 친구가 천방지축 달려왔다.
“연변에 이런 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욕심나 죽겠네요.”
돌을 받아쥐고 이리 훑고 저리 훑던 한국친구들도 감탄의 탄성을 감추지 못했다.
“일생 일석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이 돌 하나 있는걸로 자부심을 느낌니다. 어디 내놓아도 나무랄데 없는 명석이지요.”
김대현씨의 돌줏기이야기는 몇날 며칠을 들어도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야하반의 만천성에서 50킬로그람 되는 커다란 돌을 주은 후 길까지 200메터 나무숲을 헤치며 메여내온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도 김대현씨 저택에 곰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다가가 들어보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 무거운걸 어떻게 길까지 메여왔을가.
“수석에 미치면 그렇게 됩니다. 이건 ‘첩첩련봉’, 이건 ‘오리석’, 이건 ‘초모자’, 이건 ‘원숭이’…”
김대현씨는 소장하고 있는 수석들을 하나하나 내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 보니 과연 “원숭이”는 원숭이요, “오리”는 오리였다. 또 산세의 굴곡과 변화를 보여주는 “산”들은 꿈틀대는듯 생동하고 우뚝우뚝하여 기백이 넘치는 것이 한폭의 산수화 같기도 했다. 산이나 계곡, 강가에 가면 흔한 것이 돌이다. 그러나 수석은 평범한 돌이 아니다. 김대현씨의 말을 빈다면 “돌은 돌이로되 수천수만개의 돌 중에 하나가 있으나마나 한 희귀하기 그지없는 돌이다.” 때문에 수석은 인공으로는 도저히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수석에 산이 있고 호수가 있으며 졸졸 흐르는 실개천과 사품치며 쏟아지는 폭포가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수석을 감상하느라면 마음이 취한듯 황홀해지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껏 느끼며 상상과 사색의 나래를 펼치게 됩니다. 집안에 앉아서도 나는 항상 자연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 있습니다. 더 좋은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 생기고 고향과 이 세상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수석이 바로 이런 것이기에 김대현씨는 15성상 휴식일이면 배낭을 등에 지고 탐석행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멀리 두만강기슭과 가야하기슭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수석을 찾아다닌 길 얼마였고 해란강, 구수하, 봉밀하, 부라하통하, 륙도하 기슭을 누비면서 자갈밭을 뚜진 것 또 얼마였으랴. 어떤 때는 석우(石友)들과 함께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록수청산에 한몸을 맡기고 탐석의 즐거움을 맛보느라면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 줄도 모른다고 한다. 공기좋고 경치좋은 대자연 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우채 오로지 탐석에만 열중하는 그 즐거움이란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노란다.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면 가지고 간 도시락을 펼쳐놓고 술 한잔 넘기며 층암절벽에 뿌리 박고 너울너울 셀레이는 소나무숲을 쳐다보노라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면서 도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소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와중에 멋진 돌 하나 줏기까지 한다면 그날은 명절이나 다를바 없어지는 것이다.
“돌 하나에서 아름다움과 그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이야말로 ‘발견의 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탐석은 다름아닌 자연미의 발견이고 천연예술품의 발견입니다. 수석은 이처럼 인간과 자연을 가장 가까이 할 수 있게 하고 자연과 인간을 적절히 조화시켜주는 대자연의 걸작이자 연분을 맺어주는 ‘오작교’이지요.”
그러나 연변에 수석을 사랑하고 탐석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너무 적어 섭섭하다는 것이 김대현씨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제 돌아오는 9월 연변박물관에서 연변백두산수석학회 회원들의 작품을 위주로 수석전람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김대현씨는 그때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들어 안계를 넓힐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제 파묻혀있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찾는 대오가 형성되여 고향의 강과 계곡을 누빌것입니다. 저도 그 속의 일원으로 죽을 때까지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겠지요.”
(2006년 4월 7일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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