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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1
기원 3년부터 400여년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그 력사를 짙에 수놓았던 압록강중류지역 집안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 졸본 또는 홀성골성에서 천도한 국내성(國內城)의 초로한 잔해는 집안시내 주택가의 아빠트단지에 포위되여있었다. 유적은 지상 2메터 정도까지 돌이 남아있을뿐 볼품없이 방치돼있어 마주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장방형의 석재로 5메터 높이의 성벽을 거의 2700메터나 쌓았다는 웅기의 풍치는 어데로 가고 페허를 방불케 하는 돌각담으로 남았을가.
국내성은 동쪽의 룡산, 북쪽의 우산 그리고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칠성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지형,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천험의 요새요 천혜의 도읍이였다. 서쪽과 남쪽의 천연적인 해자(垓子)외에도 동쪽과 북쪽의 성벽을 따라 건해자(乾垓子)의 흔적이 있는데 폭이 10메터쯤에 이르렀으나 시가지로 형성되면서 흔적이 거의 없이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땅을 도읍으로 정한 유리왕은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기성세력의 등쌀에 배겨낼수 없었던 고구려시조 주몽은 단신으로 탈출, 졸본(卒本)에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우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였으나 아들 유리는 어머니 례씨와 함께 부여에 남아 남들로부터《애비없는 후례자식》이라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상을 지꿎게 따지는 유리의 물음에 어머니는《일곱모진 바위돌우의 소나무아래에 유물을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떠날 때 한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유물을 찾아 산과 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기 집 퇴마루밑에서 일곱모진 주출돌과 주추돌우에 세운 소나무기둥을 발견하고 거기서 부러진 칼토막을 찾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 끝내 태자로 된후 왕업까지 이어받는다.
유리왕 21년 3월에 나라의 교제(郊祭)에 쓸 됒가 달아났다. 옛날 고구려사람들은 돼지를 신에게 바치는 례물임과 동시에 국도를 정해주거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통력을 지닌 짐승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돼지가 달아났으니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은 장생(掌生) 설지를 시켜 돼지를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岩)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한후 돌아와 아뢰기를 국내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며 또한 노루와 고라니와 자라와 물고기가 많이 나니 왕이 만약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리익이 무궁할뿐만아니라 또한 병혁(兵革)의 두려움도 면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해 9월 왕은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후 유리왕 22년(기원 3년) 국내에 천도하였다. 그러니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수도인것이다.
성의 평면구조는 거의 네모꼴이며 산하(山河) 의 방향을 따르고있다고 할수 있어 동남향이다. 둘레는 2686메터, 성내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조양가와 동서를 가로지나는 승리로, 북쪽의 단결로로 이루어졌는데 옛 고구려시기에도 성중의 주요한 도로였다고 여겨지며 이들 도로가 통하는 6개의 문 역시 옛터일것이다. 4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문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성은 아빠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 길이 가로세로 뻗어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되여가고있었다. 다만 북쪽의 아빠트단지 사이에 마치 뚝처럼 5ㅡ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어있다. 통구하옆 주택지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측간의 벽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집안시박물관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있는 고구려석재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톺았다. 그 하나하나가 비할데 없이 귀중한 유물이건만 마치 임자없는 물건마냥 사철 눈비를 맞으며 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풀려지는것 같았다. 고구려건국전후의 각종 류형의 출토문물과 건축유적모형, 환도산성지형모형, 대형호태왕비탁본 및 사진, 국내외 학자들이 호태왕비를 연구한 저작, 자료, 고구려무덤의 연변관정을 보여주는 도편과 왕릉사진, 고분벽화사진…. 이러한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소개되고있었다.
기원 3년부터 기원 427년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하기전까지의 424년의 그 비운의 고구려력사가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제 다녀보아야 할 환도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고분벽화 등을 눈앞에 그리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여야 했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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