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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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댓글:  조회:1415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고구려멸망후 대중상과 대조영휘하의 고구려군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진국의 성립과 발해건국과정을 거쳐 발전강화된 발해군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동성국》의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국력의 발전을 군사적으로 담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독립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는것입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봉건제도를 유지강화하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재건투쟁을 벌리던 고구려유민들의 항전부대들을 모체로 하여 편성된 발해의 군대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리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복무하였으며 발해의 높은 대외적지위와 강한 국력에 어울리게 방대한 규모에서 유지강화되였다.    발해군대의 병력수 발해 건국직전 대조영휘하의 군사는 40만이였다.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에서 우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료들뿐아니라 《오대회요》를 비롯한 중국측 기록들도 널리 참고하여 발해 초기 군사가 40만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건국과정에 료동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과 우리 나라 북부의 넓은 령토를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40만의 대병력으로 위세를 떨쳤기때문이였다. 발해건국을 전후하여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든 40만의 대군은 모두 정규군인이 아니라 고구려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여나섰던 고구려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였다. 건국이후 발해봉건정부는 고구려이래의 군대편성원칙과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군사제도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대를 질, 량적으로 강화하여나갔다.       《책부원귀》나 《구당서》 등 력사기록들에서는 발해의 병력수에 대하여 승병 수만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수자는 발해의 병력수전체를 가리킨것이 아니라 금군의 수로 보이며 상비군전체를 가리킨 수자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만 하여도 4만이나 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패배감에 물젖어 흑수말갈을 징벌할데 대한 무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문예가 발해의 군사력을 심히 과소평가하면서도 군대수를 10만이라고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말대로 군대수를 단순히 10만으로 볼수도 없다.       《료사》 병위지 상에는 발해의 군대수가 수십만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이것이 발해의 총병력수를 가리킨 비교적 정확한 수자라고 볼수 있다.    발해군대의 군종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은 8위와 금군이였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의 8개 위가 있었다. 8위에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한명씩 배치되여있었으며 그 밑에 도장, 소장 등 여러 무관직이 있었다. 8위에는 부병의 한개 단위를 이루던 절충부가 소속되여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부병은 수도와 그 부근의 수비를 맡아보았으며 동시에 전국에 배치되여있던 8위소속의 절충부들에 가서 복역하면서 지방군과 결합된 중견력량으로 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또한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궁성수비를 위주로 하면서 직접 군주를 호위하는 시위군이였다. 발해의 지방군은 건국초기부터 중앙군과 함께 발해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있었다. 고구려멸망후 각지에서 반침략투쟁을 벌리던 여러 항전세력들은 발해건국을 위한 투쟁에 합세하여나섰으며 그후에는 지방군으로 편성되였다. 발해봉건정부는 초기부터 지방군을 거느린 지방장관들에게 중앙의 관직을 겸임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봉건정부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면서 지방군강화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단위인 부, 주, 현을 단위로 하여 편성, 배치되여있었다. 지방행정단위의 장관인 도독(절도사), 자사, 현승은 민사행정뿐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틀어쥐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부들에는 도독이 아니라 절도사들이 파견되여 그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후국과 속령들에 배치된 군대는 지방군의 구성부분으로 후국왕이나 번장들의 통솔하에 있었다. 지방군의 편성은 중앙군과 달리 병농칠치의 원칙에서 조직된 고구려인평민들이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말갈족출신의 군사들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발해의 군대는 봉건왕권을 보호하고 지배계급의 계급적지배와 리익을 군사적으로 옹호하고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220여년간 나라의 안전을 지켜냈다.    발해군대의 병종 발해군대의 병종구성을 놓고보면 강력한 지상군과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지상군은 기본전투력량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들에서 용맹을 떨쳤다. 발해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한 지상군의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는 발해에 기병 4만을 보내여 도와줄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 4만은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서귀도가 그렇게 많은 수의 기병을 요청할수 있은것은 발해의 기병력이 량적으로 또 질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며 설사 이만한 수의 기병을 동원시킨다고 하여도 국가방위를 위한 전반적무력균형에서는 큰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군사력 특히 기병이 강한 발해로서는 이만한 수의 기병을 얼마든지 동원시킬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후국관내였던 오늘의 평안남도 녕원군에 발해성과 말을 사육하던 양마성이 있는것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양마성에서는 말굴레와 말안장, 금속제활촉들이 많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말사육이 그 어떤 개별적인 지역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로서 전국의 여러 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육된 말들은 발해의 강력한 기병력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강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있었다. 발해가 수군을 가지게 된것은 나라의 지리적위치와 관련된다. 발해는 령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해안을 끼고있었는데 동쪽에는 조선동해, 서남쪽에는 조선서해가 있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립장에 있었기때문에 당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번져질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력량을 강화하였다. 발해에서는 수군의 중요한 전투력인 함선을 건조할수 있는 배무이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에서는 각이한 크기의 배를 건조하였는데 큰 배는 물동량을 고려하지 않고 한척에 100여명이 탈수 있었고 중형배는 40~70여명, 작은 배는 10여명가량 탈수 있었다. 발해사신들이 모진 풍랑을 무릅쓰고 일본에 자주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발해사람들의 진취성과 함께 견고한 배가 마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측문헌기록들에 의하여 발해사신들이 타고 갔던 배를 상상해볼수 있는데 그중에는 키, 돛대, 노, 닻, 끌어당기는 바 등 여러가지 설비를 갖춘 조종인원이 28명이나 되는 큰 배도 있었다. 수군은 바로 이러한 배에 여러가지 무기를 설치하고 바다를 믿음직하게 지켰다. 대형배와 중형배는 기본전투함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형배는 해안을 감시하고 해적행위를 하는 배들을 추적,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발해군대는 기병위주의 강력한 지상군과 발전된 전투함선으로 장비된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는 건국이후 수십만의 군사를 상비군으로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령토확장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었고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대결과 외교분쟁에서도 우세를 차지할수 있었던 동방의 강국이였다.
4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댓글:  조회:1132  추천:0  2021-09-1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발해는 건국후 국력을 계속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십년동안에 벌써 그 령토가 남쪽은 대동강과 덕원(원산북쪽)에서 신라와 접하고 료하일대와 부여의 땅인 송화강류역, 흑룡강이남의 말갈족거주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였다. 발해는 국력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한 결과 《해동성국》(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강화된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강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발해국의 최고권력자의 지위 봉건시대의 국가는 군주의 권력기구인것만큼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국가의 지위를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짓는데서 제일 처음으로 론의되는것이 바로 발해대왕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봉건국가의 국가주권은 지주, 관료 등 봉건통치계급에게 속하였고 국가우에 있는 국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최대의 착취자였다.  국왕은 대씨가문에서 원칙상 맏아들이 대대로 물려받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 또는 가까운 왕족에 의해 계승되였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대왕》, 《황상》, 《기하》라고 불렀고 왕의 명령은 《교》 또는 《조》로, 왕의 아버지는 《로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위는 세습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많은 발해관계사료들은 발해대왕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년호의 제정과 대왕, 황상, 성왕의 호칭, 3사3공제도의 존재 등은 국왕의 천자적지위와 발해가 천자국의 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갖추고있던 대왕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ㅡ 독자적인 시호, 년호의 제정 발해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거나 그 어떤 상서로운 사변 또는 재난 등이 있을 때에는 년호가 새롭게 제정실시되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년호는 황제국가들에서만 독자적으로 제정실시될수 있으며 제후국이나 속국들에서는 자체로 제정할수 없고 다만 황제국의 년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군주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은 최고통치자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군주 대인선 집권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자적인 년호들이 제정실시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협계태씨족보》, 《신당서》 발해전,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와 같은 력사자료들과 금석문들에는 발해존립기간 제정실시된 각종 년호들이 기록되여있다.     력사기록들에 남아 전해지는 발해의 시호와 년호들은 발해가 존립 전기간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쓴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년호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는것, 그 최고통치자가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로 된다. ㅡ 발해군주에 대한 호칭 대왕, 황상, 성왕 발해에는 천자적지위에 있던 군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있었다. 성왕이라는 호칭과 여러 금석문들에 남아있는 대왕, 황상이라는 호칭은 발해군주의 천자적지위를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현존하는 사료들에서 발해군주를 대왕으로 표현한것은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 《일본후기》의 기록이다.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는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이며 대행대왕이라는 표현도 발해국왕의 국서에 올라있는 문구였다고 볼 때 대왕이라는 표현은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발해때의 대왕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시기의 최고군주에 대한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은것이였다. 발해군주도 고구려의 최고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제후세력들의 우에 있는 한급 높은 대왕으로서 천자급의 틀을 갖추고 행세하였다. 발해의 최고통치자는 천자급의 대왕이였기때문에 대왕이라는 호칭외에 황상, 성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군주의 딸도 공주라고 하였다. 발해에서는 국왕의 신성불가침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시기의 성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771년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천손 즉 천제의 자손이라고 하였다는것은 발해지배계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때부터 시작된 천손사상으로 왕족혈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왕, 황상, 성왕 등으로 불리우던 발해군주는 전체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우에 군림하고있던 최고통치자, 전제군주로서 발해의 통치체제는 천자국의 틀거리에 맞게 편성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통치기구의 기본을 이룬 3성 6부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이였다.       발해국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이 3성 6부에 의하여 집행되였으며 봉건국왕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앙집권적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집행단위였다. 발해에서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는 대체로 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고정되였다. 6부의 각 장관은 경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당성의 관리인 좌, 우사정의 아래에서 그의 지시를 받았다. 경의 아래에는 소경과 여러명의 랑중, 원외랑들이 있었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발해에는 3성 6부 아래에 많은 행정관청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청들로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봉건관료기구의 내부조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것으로 되여있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반항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폭압기구였다. 발해에서 이러한 기관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데 복무하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발해의 지방행정기구도 다른 봉건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지방통치기구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는 부, 주, 현이였고 그 아래에 일부 부곡과 촌 등이 있었으며 변방지역들에는 자치적성격을 띤 후국과 속령들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이처럼 발해의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은 주로 고구려귀족들로 임명되였는데 그들은 그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쥐고있은 권력자들이였다.
39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댓글:  조회:1362  추천:0  2021-09-10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38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댓글:  조회:1376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유민들은 신라통치배들이 또다시 적들과 결탁한 다음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계속 줄기차게 싸웠다.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676년이후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고조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한 진국의 성립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투쟁과정에 점차 고구려를 계승한 새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여나갔으며 새로운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압록강류역과 그 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태백산(백두산)일대에서 《진국》이라는 고구려유민들의 소국이 출현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진국은 678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684년경에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고 볼수 있다. 진국왕(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이였다. 668년 9월 고구려왕조가 멸망한후에 침략자들은 전국 각지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강점하고 새로 저들의 지배체계를 세워보려고 획책하였다.       고구려멸망 당시 국가장부에 등록된 호구는 5부, 176개의 성에 69만여호였는데 침략자들은 그때 저들이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실시한 상투적수법에 따라 초기에 계획하였던 9개의 《도독부》(도에 해당함), 42개의 《주》(군에 해당함), 100개의 《현》(작은 군에 해당함)가운데서 불과 도독부 4개와 주 10개밖에 설치하지 못하였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장관(《안동도호》)으로 임명하여 2만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옥》, 《자사》, 《현령》 등의 자리에는 저들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앉히고 거기에 저들의 관리들을 끼워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지역에 대한 침략자들의 강점책동은 고구려유민들을 강점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떨쳐나서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강점자들은 저희들의 관리들을 통하여 실시하고있던 직접적통치방식을 철회하고 투항한 이전 고구려의 왕족들과 관리들을 통한 간접통치방식으로 그 방법을 변화시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9년만인 677년에 강점자들에게 끌려가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보장이 다시 료동지역에 나타나게 되였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의봉2년(667년-인용자) 정축년 봄 2월에 투항한 왕을 료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였다. 료동에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을 안착시키도록 하였다. …왕이 료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면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점자들은 보장왕을 조선국왕으로 임명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파견하면서도 그가 고구려유민들과 손을 잡고 저희들을 반대하여 나설것이 두려워 료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료하서쪽 신민현부근, 후의 료빈탑으로 인정되고있음)으로 옮겨가 있게 하고 연남생을 《도호》로 임명하여 보장왕의 행동을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속령화하고 투항한 고구려의 관리들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고국회복투쟁을 줄기차게 벌리고있었다. 여기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였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수개월간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여 고국땅에서 강점자들을 소멸하고 9월에는 료서 고성에 옮겨와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료동지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면서 고국회복투쟁을 벌리고있던 대중상과 대조영은 료동지역에 돌아온 보장왕을 리용하려고 그와 련계를 맺게 되였다.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던 보장왕도 대중상 등에게 의거하였다.       《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태조 진국왕조에는 보장왕이 《료동에 이르러 중상(태조 진국왕 즉 대조영을 가리킴-인용자)과 서로 통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이 내통한 《말갈》이란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세력을 비속화하여 가리킨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6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유민들의 고국회복투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놀던 이전 고씨왕족들이 더이상 고국회복투쟁에 관여할수 없게 된것이였다. 677년에 료동지역에 온 이후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왕권회복을 실현해보려던 보장왕은 그 내막이 탈로나 681년 강점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주로 끌려갔다. 공주로 끌려간 보장왕은 그 다음해 68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더우기 683년에는 고구려의 고씨왕족이 세웠던 고구려국까지 사라짐으로써 옛 고구려령토에는 고구려왕족이 관여하는 고국회복투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항전세력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이를 계기로 왕족을 내세우려던 종전의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설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성에 의거하여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684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발해라고 이름을 삼았다.》       《제왕운기》의 기록과 제반사실들로 미루어보아 684년에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대왕국의 전신국가로서 봉건소국 진국을 수립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봉건소국 진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더욱 높일수 있게 되였다. 684년이후 진국은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으며 이로하여 압록강류역이북지역에서 침략자들은 더는 배겨낼수 없게 되였다.   ❖ 력사이야기: 대중상과 진국​   △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유민들의 투쟁, 발해의 건국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영주지방에서 힘차게 벌어졌다. 영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은 696년에 고구려의 옛 장수인 대조영의 지휘밑에 말갈인, 거란인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침략자들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강점세력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땅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군사들이 동쪽으로 진격한 목적은 옛 고구려땅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땅에 고구려사람들의 나라를 세우자는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영주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다음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여왔다. 그리하여 698년에 천문령 (료녕성 창무서쪽의 령)에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유민군사들은 강점군을 완전히 섬멸하여버렸다. 이 반격이 얼마나 드세찼는가 하는것은 적장 리해고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혼자서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천문령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침략자들은 다시는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대조영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전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인민들을 집결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여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침략자들과의 투쟁과정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새 봉건세력집단이 형성강화되였는데 이들은 이미 이룩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소국인 진국을 확대발전시켜 발해국의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1대왕은 대조영이였고 초기수도는 동모산이였다.   ❖ 력사인물: 대조영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던 침략자들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으며 그후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세 나라 인민들 특히 고구려유민들의 완강하고도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침략자들이 우리 강토에서 종국적으로 쫓겨나고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완전히 극복되고 우리 조국 력사상에는 이전의 세 나라를 대신하여 발해와 후기신라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였다.
37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301  추천:0  2021-09-10
 7세기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낸 세나라인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만일 삼국시기에 고구려, 신라, 백제 세 나라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쳤더라면 우리 조국은 더욱 발전하였을것입니다.》 삼국시기 고구려는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통치배들은 고구려와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칠 대신 내부싸움을 자주 벌려놓음으로써 우리 나라의 전반적발전을 저애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와 신라통치배들의 결탁 신라통치배들은 남의 힘을 빌어서라도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을 가로막고 저들의 지배권을 넓히려는 야망밑에 당나라와 결탁(야합)하는 반역의 길로 나갔다. 신라통치배들의 이러한 기도는 7세기 40년대이후 더욱 로골화되였다. 640년대 전반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신라통치배들은 643년(선덕녀왕 12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요청하였으며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침공때에는 그를 도와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640년대 후반기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결탁하는 매국적인 행위를 감행하였다. 648년(진덕녀왕 2년) 신라 김춘추[金春秋(603-661년) -후의 태종무렬왕]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범죄적결탁을 밀약한것은 그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고구려침략에서 련속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이 무렵 종래와는 달리 신라와 본격적인 야합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당나라를 방문한 김춘추는 당나라와 매국적인 흥정판을 벌려놓고 두 나라 군대가 《련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대동강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의 광활한 고구려령토는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의 야심에는 또 다른것이 있었다. 그것은 신라와 결탁하여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정복하자는것이였다.       당나라는 신라통치배들과 밀약을 하였으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이킬수 없는 참패를 당한 까닭에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에 선뜻 뛰여들수 없었다. 그리하여 밀약후에도 10여년동안이나 기회를 엿보며 침략전쟁준비를 하였다. 한편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군을 하루빨리 끌어들일 기도밑에 관료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년호를 쓰는 등 사대주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659년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원정군을 보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신라통치배들은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나라와 결탁하고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 민족사에 씻을수 없는 엄중한 죄악적후과를 남기였다.    라당련합군의 침공을 반대한 백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 당나라침략자들은 7세기 60년대에 이르러 신라의 청병을 구실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에 들어섰다. 당시 당나라침략자들은 먼저 라당련합으로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그길로 신라를 정복하고 제일 강대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먹어보자는것이였다. 만일 신라를 당장 정복할수 없는 경우 련합을 유지하여 고구려를 먼저 정복하고 다음에 신라를 먹을것을 계획하고있었다. 당나라와 신라는 660년에 먼저 백제를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660년 6월 소정방이 거느린 13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1 900여척의 배로 덕물고를 거쳐 금강하구로 기여들었고 김유신이 거느린 5만명의 신라군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백제의 형편은 국력이 심히 약화되고 혼란이 조성되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것은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속에서 부화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간신이 성행하여 충신들이 모해를 당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안일해이되여있던 백제의 의자왕과 봉건통치배들은 대응책을 시급히 세울 대신 당나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신라를 먼저 막아야 한다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내였으며 이 사이에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국내깊이까지 기여들수 있었다.       660년 7월 신라군은 별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천년의 요새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청남도 론산군 련산동쪽 5리지점)로 밀려들었으며 당나라침략군은 금강을 거슬러올랐다. 이리하여 라당련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백제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때늦게나마 결사적으로 싸웠다. 계백장군이 거느린 5 000명의 백제군사들은 황산벌에서 5만명의 신라군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 황산벌전투에서 그들은 4차례나 신라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적들의 사비성공격을 지연시켰다.    혁명일화: 계백은 애국적인물​     한편 백제군은 금강을 거슬러오는 당나라침략군 13만명이 소정방의 지휘밑에 기여들자 2차례의 완강한 방어전을 벌리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이 사비성을 포위공격하게 되자 백제의 의자왕과 대신들은 제 한목숨만을 건지려고 수도를 버리고 웅천(공주)으로 도망쳤다. 사비성은 7월 13일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의자왕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7월 18일 적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리하여 백제봉건왕조는 멸망하였다.     백제강점후 라당련합군은 고구려침공에 집중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660년 말~662년에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고구려인민들은 연개소문장군의 지휘밑에 적들의 침략을 짓부셔버리였다. 특히 고구려군은 662년 1월 당나라의 소정방, 방효태가 거느린 침략군과의 사수(합장강)격전에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포함한 1개 군단을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장 소정방은 어찌나 혼쌀이 났던지 산속에 숨었다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고구려내부의 정세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급변하였다.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자 당나라는 그 기회에 고구려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기도하였으며 적들의 간교한 책동에 의하여 연개소문의 세 아들사이에는 권력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대막리지자리를 차지하고 군사지휘권을 잡고있던 연남생은 권력싸움에서 밀리우게 되자 넓은 지역과 많은 군대를 끌고 당나라에 투항하는 반역행위를 감행하였으며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기관하 12개성의 많은 주민들을 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통치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정치적혼란, 투항변절은 강력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뒤흔들어놓았으며 나라의 방위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라당련합군은 668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50만의 당나라침략군과 20만의 신라군은 륙지와 바다, 북쪽과 남쪽에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당나라침략군의 주력은 반역자 연남생을 길잡이로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으로 공격하였고 남쪽에서는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침략군과 신라군이 평양성으로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성은 668년 8월 수십만대군의 완전포위에 들게 되였다.       이 엄혹한 형편에서도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치렬한 공방전은 한달이상이나 계속되였다. 그러나 668년 9월 고구려군의 지휘를 맡았던 신성이 변절투항하였고 보장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인민들을 배반하고 투항하였다. 결국 근 1 000년간 동방대강국으로 위용을 떨치던 고구려는 무너지게 되였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제, 방위체제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망하게 된다는것을 교훈으로 남기였다. 고구려가 무너진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집권층안에서 일어난 추악한 권력싸움과 연개소문의 아들의 변절투항으로 강대한 자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기때문이며 라당련합군의 공격때문이였다.       결국 신라통치자들의 반역적인 외세의존행위로 하여 강대했던 고구려는 무너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삼국통일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당나라침략자들은 고구려가 무너지자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우두머리(안동도호)로 들여앉히였다. 그리고 그 밑에 9개의 도독부를 두어 동방침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고구려인민들은 강점자들을 자기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669~676년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삼국인민들의 단합된 투쟁 고구려가 무너진 후 당나라침략자들은 신라마저 집어삼킬 흉계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정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리하여 온 나라 온 민족이 외세에게 먹히울수 있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이것은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였다.       이 엄혹한 시기에 세나라인민들은 힘을 합쳐 당나라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일떠섰다. 이 투쟁은 본질에 있어서 외적에게 빼앗긴 자기의 령토와 겨레를 되찾기 위한 정의의 싸움이였다. 한편 이 시기 신라통치배들은 당나라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고구려, 백제땅을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먹으려는 조건에서 당나라침략군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에도 신라통치배들은 대동강이남지역까지만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나라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세나라인민들의 투쟁은 669년경부터 시작되여 온 나라 각지에서 벌어졌다. 북방에서는 고구려항전군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당나라강점군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670년 3월 태대형 고연무가 지휘한 1만의 고구려항전군은 설오유가 지휘하는 1만의 신라군과 합세하여 압록강을 건너 옥골로 진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안기였으며 672년 8월에는 백수성에서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수천명의 목을 잘라버리였다.       고구려인민들의 투쟁은 압록강이남지역에서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668년 말부터 각지에서 당나라강점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을 힘있게 벌리고있던 고구려인민들은 평양에 설치되여있던 《안동도호부》를 669년경에 료동지방의 신성(중국 료녕성 무순부근)으로 쫓아버렸다. 한편 고구려의 수림성사람인 대형 검모잠은 항전부대를 조직하여 국모성을 중심으로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으며 남으로 진격하면서 당나라의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조선서해 사야도(소야도)에 피신해있던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한성(장수산일대)에 데려다놓고 《고구려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남방에서는 백제인민들이 670년 7월 신라군과 함께 백제땅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63개의 성을 탈환하였으며 672년 초에는 백제의 거의 전지역을 회복하였다. 669년 2월에 당나라침략군의 우두머리의 하나였던 리적이 자기 왕에게 보낸 보고에는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저들이 장악한 성은 14개뿐이라고 씌여있었다. 이것은 고구려군민들이 처음부터 완강한 투쟁을 벌려 강점자들에게 치명적타격을 주었으며 압록강이북의 많은 성들에 적들이 미치지 못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당나라통치배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내몰아 675년경부터 새로운 공세를 기도하였다. 이때 세나라인민들은 과감한 투쟁을 벌려 적의 공세를 걸음마다 분쇄, 격파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천성(례성강어구)에 침입한 당나라침략군 1 400명을 소탕하고 적선 40여척, 군마 1 000필을 로획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9월 말에는 매초성(경기도 양주)에 둥지를 틀고있던 20만의 당나라침략군을 공격하여 수만명을 살상포로하고 군마 3만여필과 수많은 군수물자들을 로획하는 전과를 이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지금의 강원도 덕원, 문천일대로 진출하였다.       675년 10월 이후에도 크고작은 18차례의 전투를 진행하여 6 0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수백마리의 군마를 로획하였다.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금강하구)에서 적장 설인귀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과 22차에 걸치는 격전끝에 4 000여명을 소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적들은 압록강이남으로 더는 기여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처럼 세나라인민들은 669~676년간에 100여차의 전투를 벌려 당나라강점자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이 시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데서 세나라인민들이 이룩한 큰 성과였다. 신라통치배들의 매국배족행위로 말미암아 세나라 전 강토가 당나라침략자들에게 강점당할 위기를 겪게 되였지만 애국적군민들은 희생적인 투쟁으로 적들을 압록강이남지역에서 몰아내고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신라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에 편승하여 백제의 전지역과 고구려의 대동강이남지역을 차지한 다음 투쟁대오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또 하나의 큰 죄악을 저질렀다.
3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국보國寶 댓글:  조회:1141  추천:0  2021-09-01
      번호 국보 지역 시대 재건시대 비고 001 평양성 평양시 중구역 고구려     002 안학궁성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  고구려     003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고구려 1473년    004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35년    005 숭인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352~1428년    006 숭령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조선 1714년  동명왕 사당  007 보현사 구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08 대성산성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09 청암리성 평양시 대성구역  고구려     010 대성산남문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1 대성산련못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012 대성산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3 법운암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고구려 조선    014 용곡서원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리 조선 1713년    015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16 연광정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구려 1670년    017 부벽루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고구려 1614년    018 칠성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1, 1764년    019 을밀대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0 청류정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6년    021 최승대 평양시 중구역 모란봉 고구려 1716, 1849년    022 전금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고구려 1714년    023 평양종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조선     024 홍복사7층탑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룡화사  고려     025 금강사터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토성내  고구려     026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7 검은모루유적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선사시대     028 강서세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29 약수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0 수산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1 백상루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려 1753년    032 강선루 및 동명관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고려 1768년  성천객사  033 훈련정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미두산  조선     034 안국사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청룡산 고구려 1785년    035 방선문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  조선 1727년  성천객사의 바깥문  036 동명왕릉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994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7 황룡산성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오석산 고구려 919년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38 자모산성 평안남도 평성시 어중리  고구려     039 쌍기둥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40 보현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041 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고려   보현사 암자 042 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3 불영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조선   보현사  044 구성남문 평안북도 구성시 동문동  고려   구주성 남문  045 창성향교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읍  조선   보광전, 천주루  046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7 륙승정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조선     048 천리장성 평안북도 창성군 금야리  고려     049 녕변남문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려     050 서운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약산  고려     051 통군정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고려     052 의주남문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조선     053 금광사 평안북도 의주군 금광리  조선     054 심원사 평안북도 박천군 상양리  후기신라     055 양화사 평안북도 태천군 상단리  후기신라     056 룡오리산성 평안북도 태천군 룡상리  고구려     057 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보현사  058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로동자구  고구려     059 성동리다라니석당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060 구주성 평안북도 구성시 고려     061 룡한산성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 릉한산 고구려     062 룡골산성 평안북도 염주군, 피현군 고구려     063 녕변철옹성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 고구려     064 인풍루 자강도 강계시 충성동  조선     065 강계망미정 자강도 강계시 부창동  조선   강계읍성의 남장대  066 강계아사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  조선   강계력사박물관으로 사용 중  067 고국원왕릉(안악 3호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68 부용당 황해남도 해주시 부용동  조선     069 해주석빙고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0 해주9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71 해주5층탑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 고려     072 순명문 황해남도 해주시 영광동 고려   해주읍성 남문  073 안악제1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4 안악제2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075 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  후기신라     076 로암리고인돌 황해남도 안악군 로암리  청동기 시대     077 강서사 황해남도 배천군 강호리 고려     078 룡동리고인돌 황해남도 배천군 룡동리 청동기 시대     079 소현서원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조선     080 자혜사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081 현암 황해북도 재령군 서림리  후기신라     082 해주다라니석당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  고려     083 학림사5층탑 장연군 학림리  고려     084 관산리고인돌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  청동기 시대     085 광조사진철대사비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고려     086 연안읍성 황해남도 연안군 연안읍  고구려     087 성불사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후기신라     088 정방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정방산성의 남문  089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고려     090 성장김성업비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조선     091 연탄심원사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  고려     092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고려     093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고구려     094 석왕사 강원도 금강군 설봉리  고려     095 신계사터 강원도 금강군 온정리 고구려     096 장안사터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구려     097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098 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099 정양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신라   금강산4대사찰  100 금장암사자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1 장연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금강산3옛탑  102 묘길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03 가학루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  후기신라     104 보현사 강원도 안변군 령신리  후기신라     105 명적사 강원도 원산시 영삼리  신라     106 주둔리 무지개다리 고성군 주둔리  고려     107 함흥본궁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조선   함흥성 북장대의 누정  108 구천각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고려   함경감찰사 감영 109 선화당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조선     110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1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신라   함흥역사박물관 112 정광사 함경남도 리원군 원사리  조선     113 량천사 함경남도 고원군 락천리  후기신라     114 군자루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  조선     115 룡흥사 함경남도 영광군 봉흥리  고려     116 동덕사 함경남도 단천시 두연리  고려     117 공민루 함경남도 단천시 양산동  조선     118 경성읍성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19 경성읍성남문 함경북도 경성시 승암로동자구  고려     120 개심사 함경북도 명천군 보천리 칠보산 발해     121 쌍계사 함경북도 화성군 부암리  조선     122 만월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23 공민왕릉 개성시 하선리  고려     124 개성남대문 개성시 북안동  조선     125 관음사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6 대흥산성 개성시 박연리  고려     127 개성 성균관 개성시 방직동  고려     128 숭양서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29 발어참성 개성시 송악동  후기신라     130 개성옛성 개성시 송악동  후고구려      131 첨성대 개성시 송악동  고려     132 흥국사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3 령통사5층탑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4 화장사부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35 불일사5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6 연복사종 개성시 북안동  고려     137 적조사철조여래좌상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38 표충비 개성시 선죽동  조선     139 현화사7층탑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40 글자새긴성돌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고구려     141 영산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2 김응서집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조선     143 수충사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조선     144 보현사8각13층탑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45 경암루 황해북도 사리원시 경암동  조선     146 칠렬사터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147 중흥사당간지주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동  고구려     148 영명사8각석불감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49 보현사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고려     150 광제사 함경남도 북청군 죽상리  조선     151 현화사비 개성시 방직동  고려   고려박물관 152 광통보제선사비 개성시 해선리  고려     153 오룡사법경대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4 관음사대리석관음상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고려     155 령통사대각국사비 개성시 룡흥리  고려     156 덕흥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57 진북루 량강도 갑산군 갑산읍  조선     158 안주성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  고구려     159 선죽교 개성시 선죽동  고려     160 고구려나무다리 평양시 대성구역 휴암동, 청호동  고구려     161 덕화리무덤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  고구려     162 유점사종 강원도 고성군 월비산리  조선     163 룡화사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고려     164 광법사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구려     165 원산리청자가마터제1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6 원산리청자가마터제2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7 원산리청자가마터제3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8 원산리청자가마터제4호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고려     169 자혜사5층탑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0 자혜사석등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  고려     171 패엽사터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고려     172 고산동고구려우물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  고구려     173 정릉사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74 단군릉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고구려(고조선)      175 순장무덤 평안남도 성천군 룡산리  청동기 시대     176 석왕사호지문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  조선     177 안양암마애삼존불상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고려     178 온정리마애불립상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고려     179 왕건릉 개성시 해선리  고려     180 온달장군과 평원왕의 공주의 무덤(진파리4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1 장군고흘의 무덤(진파리1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182 향단리 돌관무덤 평양시 강동군 향단리  청동기 시대     183 황대성과 고인돌 평양시 강동군 향목리  청동기 시대     184 정릉사8각7층탑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고구려     185 광법사8각5층탑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동  고려     186 정양사3층탑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후기신라     187 청해토성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발해     188 화성동제단 평양시 룡성구역 화성동  고조선     189 삼성사 황해남도 안악군 패엽리 구월산  조선     190 룡강큰무덤 남포시 룡강군 룡강읍  고구려     191 신계사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신라     192 령통사 개성시 룡흥리  고려     193 북관대첩비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리  조선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1 서울 숭례문(남대문) 국보  1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2 원각사지 십층석탑 국보  2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3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서울 종로구 신라 진흥왕 4 고달사지 부도 국보  4호 경기 여주군 통일신라 경덕왕 5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5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성덕왕 6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6호 충북 충주시 통일신라 7 봉선 홍경사 사적 갈비 국보  7호 충남 천안시 고려 현종 8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국보  8호 충남 보령시 통일신라 진성여왕 9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충남 부여군 백제 후기 10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10호 전북 남원시 통일신라   11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전북 익산시 백제 후기 12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국보 12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13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전남 강진군 조선 세종 14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국보 14호 경북 영천시 조선 초기 15 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경북 안동시 고려 후기 16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경북 안동시 통일신라 17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18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19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20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1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2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3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4 석굴암 석굴 국보 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5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6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경덕왕 27 불국사 금동 아미타여래좌상 국보 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8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29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종) 국보 2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혜공왕 30 분황사 석탑 국보 30호 경북 경주시 신라 선덕여왕   31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경북 경주시 신라 32 해인사 대장경판 국보 32호 경남 합천군 고려 33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신라 진흥왕 34 창녕 술정리동 삼층석탑 국보 34호 경남 창녕군 통일신라 35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36 상원사 동종 국보 36호 강원 평창군 통일신라 37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 국보 3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38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9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3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40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국보 4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41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충북 청주시 고려 광종 42 목조 삼존불감 (송광사) 국보 42호 전남 순천시 고려? 43 고려 고종제서 (송광사) 국보 43호 전남 순천시 고려 고종 44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 국보 44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경문왕 45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경북 영주시 고려 중기 46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46호 경북 영주시 고려 후기 47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 47호 경남 하동군 통일신라 정강왕 48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강원 평창군 고려 초기 49 수덕사 대웅전 국보 49호 충남 예산군 고려 충렬왕 50 도갑사 해탈문 국보 50호 전남 영암군 조선 성종   51 강릉 객사문 국보 51호 강원 강릉시 고려 후기 52 해인사 장경판전 국보 52호 경남 합천군 조선 성종 53 연곡사 동부도 국보 53호 전남 구례군 통일신라 54 연곡사 북부도 국보 54호 전남 구례군 고려 초기 55 법주사 팔상전 국보 55호 충북 보은군 조선 인조 56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57 쌍봉사 철감선사탑 국보 57호 전남 화순군 통일신라 경문왕 58 장곡사 철조 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국보 58호 충남 청양군 통일신라 후기 59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 국보 59호 강원 원주시 고려 선종 60 청자 사자 유개향로 국보 60호 서울 종로구 고려   61 청자 비룡형주자 국보 61호 서울 종로구 고려 62 금산사 미륵전 국보 62호 전북 김제시 조선 인조 63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63호 강원 철원군 통일신라 경문왕 64 법주사 석연지 국보 64호 충북 보은군 통일신라 65 청자 기린 유개향로 국보 65호 서울 성북구 고려 66 청자 상감 유죽연로원앙문정병 국보 66호 서울 성북구 고려 67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전남 구례군 조선 숙종 68 청자상감 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서울 성북구 고려 6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69호 부산 서구 조선 태조 70 훈민정음 국보 70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1 동국정운 (권1,6) 국보 71호 서울 성북구 조선 세종 72 금동 계미명 삼존불 국보 72호 서울 성북구 백제 위덕왕 73 금동 삼존불감 국보 73호 서울 성북구 고려 초기 74 청자 압형수적 국보 74호 서울 성북구 고려 75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국보 75호 경남 밀양시 고려 명종 76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국보 76호 충남 아산시 조선 선조 77 의성 탑리 오층석탑 국보 77호 경북 의성군 통일신라 전기 78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78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79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국보 7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0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입상 국보 80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초기   81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국보 81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성덕왕 82 감산사 석조 아미타불 입상 국보 82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83 금동 미륵보살반가상 국보 8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후기 84 서산 마애삼존불상 국보 84호 충남 서산시 백제 후기 85 금동 신묘명 삼존불 국보 85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86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86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목왕 87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경북 경주시 신라 88 금관총 과대 및 요패 국보 88호 서울 종로구 신라 89 금제교구 국보 89호 서울 종로구 평남 석암리 90 금제 태환이식 국보 90호 서울 종로구 신라   91 도제 기마인물상 국보  91호 서울 종로구 신라 92 청동 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 국보  92호 서울 종로구 고려 93 백자 철화포도문호 국보  93호 서울 종로구 조선 94 청자 소문과형병 국보  94호 서울 종로구 고려 95 청자 칠보투각향로 국보  95호 서울 종로구 고려 96 청자 귀형수병 국보  96호 서울 종로구 고려 97 청자 음각연화당초문매병 국보  97호 서울 종로구 고려 98 청자 상감 모란문항 국보  98호 서울 종로구 고려 99 갈항사 삼층석탑 국보  99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경덕왕 100 남계원 칠층석탑 국보 100호 서울 종로구 고려   101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국보 101호 서울 종로구 고려 선종 102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 국보 102호 서울 종로구 고려 현종 103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국보 103호 광주 북구 통일신라 104 전흥법사 염거화상탑 국보 104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문성왕 105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국보 10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06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삼존석상 국보 106호 충북 청주시 통일신라 초기 107 이조백자 철사포도문호 국보 107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 108 계유명 삼존천불비상 국보 108호 충남 공주시 통일신라 109 군위 삼존석굴 국보 109호 경북 군위군 통일신라 초기 110 익재 영정 국보 110호 서울 종로구 고려 충숙왕   111 회헌 영정 국보 111호 경북 영주시 고려 충숙왕 112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1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113 화청자양류문통형병 국보 113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4 청자상감 모란국화문과형병 국보 11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5 청자상감 당초문완 국보 115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6 청자상감 모란문표형병 국보 116호 서울 종로구 고려 117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국보 117호 전남 장흥군 통일신라 헌안왕 118 금동 미륵반가상 국보 11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19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국보 119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20 용주사 범종 국보 120호 경기 화성시 고려   121 하회탈 및 병산탈 국보 121호 경북 안동시 고려 중기 122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강원 양양군 통일신라 12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4 순금 금강경판 국보 123-1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5 유리제 사리병 국보 123-2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6 금제방합 국보 123-3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7 청동 여래입상 국보 123-4호 전북 전주시 고려 128 기타유물 국보 123-5호 전북 전주시 미상 12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국보 124호 서울 종로구 고려 130 녹유골호 국보 125호 서울 종로구 통일신라   131 불국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 국보  1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2 금동제 사리외함 국보  126-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3 은제 사리외합 국보  126-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4 은제 사리내합 국보  126-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5 유향 국보  126-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6 금동 방형사리합 국보  126-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7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보  126-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8 동환 국보  126-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39 경옥제곡옥 국보  126-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0 홍마노환옥 국보  126-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1 수정 절자옥 국보 126-1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2 수정 보주형옥 국보 126-1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3 수정 환옥 국보 126-1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4 녹색 유리환옥 국보 126-1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5 담청색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1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6 유리제 소옥 국보 126-1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7 향목편 국보 126-1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8 청동제 비천상 국보 126-1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49 동경 국보 126-1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0 동제채자 국보 126-19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1 목탑 국보 126-20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2 수정대옥 국보 126-21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3 홍마노 국보 126-22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4 수정제가지형옥 국보 126-23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5 유리제과형옥 국보 126-24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6 유리소옥 국보 126-25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7 심향편 국보 126-2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8 섬유잔결 국보 126-27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59 묵서지편 국보 126-28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160 삼양동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7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161 금동 관음보살입상 국보 128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2 금동 보살입상 국보 129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16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국보 130호 경북 구미시 통일신라 164 이태조 호적원본 국보 131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양왕 165 징비록 국보 132호 경북 안동시 조선 선조 166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국보 133호 경기 용인시 고려 167 금동 보살삼존상 국보 134호 경기 용인시 백제 168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서울 성북구 조선 후기 169 용두보당 국보 136호 경기 용인시 고려 170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 국보 137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1 동검 검경 및 동모부속구 국보 137-1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2 광봉동모 및 검장 국보 137-2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3 금관 및 부속금구 국보 138호 경기 용인시 삼국시대 174 군선도병 국보 139호 경기 용인시 조선 후기 175 나전단화금수문경 국보 140호 경기 용인시 선사 176 다뉴세문경 국보 141호 서울 동작구 청동기 177 동국정운 1질 국보 142호 서울 광진구 조선 세종 178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국보 143호 광주 북구 미상 179 청동검 국보 143-1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0 청동팔령구 국보 143-2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1 청동쌍령구 국보 143-3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2 청동삭구 국보 143-4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3 청동공부 국보 143-5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4 청동세문경 국보 143-6호 서울 종로구 미상 185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144호 전남 영암군 통일신라 후기 186 귀면청동로 국보 145호 서울 용산구 백제 187 강원도 출토 일괄유물 국보 146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8 팔수형동령 국보 146-1호 경기 용인시 미상 189 동조령부병두 국보 146-2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0 동조환상쌍두령 국보 146-3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1 동조령식초 국보  146-4호 경기 용인시 미상 192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신라 법흥왕 193 십칠사찬고금통요 국보  148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4 권지16 국보  148-1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195 권지17 국보  148-2호 서울 서초구 조선 태종 196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7 권지4,5 국보  149-1호 서울 성북구 조선 태종 198 권지6 국보  149-2호 서울 중구 조선 태종 199 송조표전총류 국보  150호 서울 관악구 조선 태종 200 조선왕조실록 국보  15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국보 151-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2 태백산본 국보 151-2호 부산 연제구 조선시대 203 오대산본 국보 151-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4 기타산엽본 국보 151-4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05 비변사등록부의정부등록 국보 152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6 비변사등록 국보 152-1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7 의정부등록 국보 152-2호 서울 관악구 미상 208 일성록 국보 153호 서울 관악구 조선후기 209 금제관식 국보 15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0 금제관식 국보 15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1 금제심엽형이식 국보 156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2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15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3 금제경식 국보 158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4 금제뒤꽂이 국보 159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5 은제팔찌 국보 160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6 청동신수경 국보 16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7 청동신수경 국보 161-1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8 의자손수대경 국보 161-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19 수대경 국보 161-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0 석수 국보 162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1 지석 국보 163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2 두침 국보 164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3 족좌 국보 165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224 백자철화매죽문대호 국보 16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5 청자인형주자 국보 167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226 백자진사매국문병 국보 168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7 청자양각죽절문병 국보 169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28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국보 17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29 청동 은입사 보상당초봉황문합 국보 171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230 진양군 영인정씨묘 출토유물 국보 17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1 백자상감 초화문편병 국보 172-1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2 묘지 국보 172-2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3 잔 국보 172-3호 경기 용인시 조선 세조 234 청자철채퇴화점문나한좌상 국보 173호 서울 강남구 고려시대 235 금동수정감장촉대 국보 174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236 백자상감 연당초문대접 국보 175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237 청화백자 송죽문호 국보 176호 서울 중구 조선 성종 238 분청사기 인화문태호 국보 177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239 분청사기 조화어문편병 국보 178호 서울 서대문구 조선시대 240 분청사기 박지연어문편병 국보 179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241 완당세한도 국보 18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헌종 242 장량수급제패지 국보 181호 경북 울진군 고려 희종 243 금동여래입상 국보 182호 대구 수성구 통일신라 244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5 금동보살입상 국보 184호 대구 수성구 신라시대 246 묘법연화경 국보 185호 서울 종로구 고려 공민왕 247 양평 금동여래입상 국보 186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248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경북 영양군 통일신라 249 천마총 금관 국보 188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0 금모 국보 18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1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0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2 금관 및 수하식 국보 191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3 금제과대 및 요패 국보 192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4 유리제병 및 배 국보 193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5 금제경식 국보 194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6 토우장식장경호 국보 195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57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국보 196호 경기 용인시 통일신라 경덕왕 258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륭탑 국보 197호 충북 충주시 고려 후기 259 단양 신라적성비 국보 198호 충북 단양군 신라 진흥왕 260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 경북 경주시 신라시대   261 금동보살입상 국보 200호 부산 남구 통일신라 262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국보 201호 경북 봉화군 신라시대 263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국보 202호 서울 중구 고려 숙종 264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3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5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국보 20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266 중원 고구려비 국보 205호 충북 충주시 고구려 267 해인사 고려각판 국보 20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8 묘법연화경 국보 206-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69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국보 206-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0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   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06-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1 대방광불화엄경세주묘엄품 국보 206-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2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3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4 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06-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5 법화경보문품 국보 206-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6 인천보감 국보 206-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7 불설예수십왕생칠경 국보 206-1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8 삼십팔분공덕소경 국보 206-1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79 불설아미타경 국보 206-1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0 대방광불화엄경략신중 국보 206-1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1 화엄경변상도 국보 206-1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2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3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4 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06-1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5 대방광불화엄경소 국보 206-1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6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국보 206-19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7 금강반야바라밀경 국보 206-20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8 불설장수멸죄호저동자다라니경 국보 206-21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89 대각국사문집 국보 206-22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0 대각국사외집 국보 206-23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1 남양선생시집 국보 206-24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2 백화도장발원문약해 국보 206-25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3 당현시범 국보 206-26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4 약제경론염불법문왕생정토집 국보 206-27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5 십문화쟁론 국보 206-28호 경남 합천군 고려시대 296 천마도장니 국보 207호 서울 종로구 신라시대 297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경북 김천시 조선시대 298 보협인석탑 국보 209호 서울 중구 미상 299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국보 210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0 백지묵서묘법연화경 국보 211호 서울 관악구 고려 우왕   301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   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국보 212호 서울 중구 조선 세조 302 금동대탑 국보 213호 경기 용인시 고려 초기 303 흥왕사명청동은입사운룡문향완 국보 21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렬왕 30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국보 215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05 인왕제색도 국보 21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6 금강전도 국보 217호 경기 용인시 조선 영조 307 아미타삼존도 국보 218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08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19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09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합 국보 220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10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221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11 청화백자 매죽문호 국보 222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12 경복궁 근정전 국보 223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3 경복궁 경회루 국보 224호 서울 종로구 조선 고종 314 창덕궁 인정전 국보 225호 서울 종로구 조선 순조 315 창경궁 명정전 국보 226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6 종묘정전 국보 227호 서울 종로구 조선 광해군 317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국보 228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18 보루각 자격루 국보 229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19 혼천시계 국보 230호 서울 성북구 조선 현종 320 용범 국보 231호 서울 동작구 청동시대   321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국보 232호 전북 정읍시 조선 태조 322 영태2년명납석제호 국보 233호 부산 남구 신라 혜공왕 32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국보 234호 경기 용인시 고려 충숙왕 324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국보 235호 경기 용인시 고려 후기 325 월성 장항리사지 서 오층석탑 국보 236호 경북 경주시 통일신라 초기 326 고산 구곡시화병 국보 237호 경기 고양시 조선 순조 327 소원화개첩 국보 238호 경기 고양시 조선 안평대군 328 송시열상 국보 239호 서울 종로구 조선 효종 329 윤두서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33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41호 경기 용인시 고려 현종   331 울진 봉평 신라비 국보 242호 경북 울진군 신라시대 332 현양성교론 국보 243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3 유가사지론 국보 244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34 신찬일체경원품차록 국보 245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5 대보적경 국보 246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36 공주 의당금 동 보살입상 국보 247호 충남 공주시 백제시대 337 조선방역지도 국보 248호 경기 과천시 조선 명종 338 동궐도 국보 249호 서울 성북구 조선 순조 339 개국원종공신록권 국보 250호 서울 중구 조선 태조 340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국보 251호 서울 중구 고려 현종   341 청자음각연화문매병 국보 252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42 청자양인각연당초,상감모란문은구대접 국보 25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43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국보 254호 서울 중구 고려시대 344 전충남출토 청동방울일괄 국보 255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5 팔주령 국보 255-1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6 쌍두령 국보 255-2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7 조합식 쌍두령 국보 255-3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8 간두령 국보 255-4호 경기 용인시 청동시대 34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6호 경기 용인시 고려시대 350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57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51 청화백자 죽문각병 국보 258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2 분청사기 상감용문호 국보 259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3 분청사기 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 국보 260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354 백자호 국보 261호 경기 용인시 조선시대 355 백자대호 국보 262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6 청화백자 산수화조문대호 국보 263호 서울 중구 조선시대 357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신라시대 358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5호 서울 영등포구 고려시대 35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66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0 초조본아비달마식신족론 국보 267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1 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국보 268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2 초조본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   삼매대교왕경 국보 269호 서울 관악구 고려시대 363 청자모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64 초조본현양성교론 국보 271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5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2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6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3호 서울 종로구 고려시대 367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275호 경북 경주시 삼국시대 368 초조본유가사지론 국보 276호 인천 남동구 고려시대 369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7호 전북 전주시 고려시대 370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국보 278호 충북 영동군 조선 태종   371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국보 279호 충북 단양군 고려 현종 372 성거산 천흥사 동종 국보 280호 서울 종로구 고려 헌종 373 백자주자 국보 281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374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 국보 282호 경북 영주시 통일신라 375 불상 국보 282-1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6 전적 국보 282-2호 경북 영주시 고려말 377 직물류 국보 282-3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8 기타 복장물 오향, 칠약, 오곡,   칠보류, 사리함 국보 282-4호 경북 영주시 조선 세조 379 통감속편 국보 283호 경북 경주시 조선 세종 380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국보 284호 서울 강남구 고려 정종   38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선사시대 382 백자발 국보 286호 경기 용인시 조선 초기 383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 국보 287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4 백제 창왕 명석조사리감 국보 288호 충남 부여군 백제시대 385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국보 289호 전북 익산시 고려시대 386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290호 경남 양산시 조선 인조 387 용감수경 국보 291호 서울 성북구 고려시대 388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292호 강원 평창군 조선 세조 389 금동관세음보살입상 국보 293호 서울 종로구 삼국시대 390 청화백자 철사진사국화문병 국보 294호 서울 성북구 조선시대   391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관 국보 295호 서울 종로구 백제시대 392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국보 296호 경기 안성시 조선 인조 393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297호 충북 청원군 조선 효종 394 갑사 삼신불괘불탱 국보 298호 충남 공주시 조선 효종 395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 국보 299호 충남 공주시 조선 인조 396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국보 300호 충남 청양군 조선 현종 397 화엄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1호 전남 구례군 조선 효종 398 청곡사 영산회괘불탱 국보 302호 경남 진주시 조선 경종 399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서울 관악구 조선시대 400 여수 진남관 국보 304호 전남 여수시 조선 선조   401 통영 세병관 국보 305호 경남 통영시 조선 중기 402 삼국유사 국보 306호 서울 종로구 조선시대 403 삼국유사 국보 306-1호 서울 종로구 조선 초기 404 삼국유사 국보 306-2호 서울 관악구 조선 중종 405 태안 마애삼존불 국보 307호 충남 태안군 삼국시대     
35    동이전東夷傳 고구려高句麗 사료史料 모음 댓글:  조회:1170  추천:0  2021-07-14
동이전東夷傳   고구려 자료 모음     後漢書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 '예맥'이 있고, 북으로 부여에 접한다. 지방이 이천리이다. 큰산이 많고 계곡이 깊어 사람들이 따라 거한다. 작은 밭일이라 힘써 지어도 족하지 않으니 스스로를 헤아렸다. 고로 그 풍습이 절약하여 밥을 먹고, 집을 크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종류라 한다. 고로 언어와 법등 많은 것이 같아 한쪽 다리를 끌며 꿇어 앉아 절하고 걸음걸이는 모두 달리는 것과 같다. 무릇 다섯종족이 있는데,     '소노부'[혜동에 말하길 '消'는 위지에 '涓(연)'으로 되어 있다.],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로[고려오부는 하나 '내부'로 일명 '황부' 즉 '계루부'이며 둘은 '북부' 일명 '후부' 즉 '절노부'이고 삼은 '동부' 일명 '좌부'로 즉 '순노부'이고 사는 '남부' 일명 '전부' 즉 '관노부'이며 오는 '서부' 일명 '우부' 즉 '소노부'이다.] 본래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이를 이었다. 그 벼슬을 세워 '상가', '대노', '패자', '고추대가',[위지에는 '고추가'이다. 고려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관직명)'와 같다.] '주부', '우태', '사자',[위지에 '사자' 위에 '승'이 있다.] '백의', '선인'이 있다.[위지는 '帛'는 ' (조)'자로 서로 비슷하여 혼란되어 바뀌었다. 조일청의 삼국지주보의 환우기에 '조의'의 우두머리는 '대형'이다. '동이'가 서로 전하길 '조의','선인'이다.라고 하였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이로써 고구려를 현으로 하였다. [전서에 '원봉'중에 '조선'을 정하여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사군으로 하였다.] '현도'에 속하게 하고, 북과 피리와 광대를 주었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모두 깨끗한 옷을 두르기를 즐겨 밤이 오면 쉽게 남녀가 모여 가무와 음악을 즐겼다. 귀신과 토지신, 영성 [전서 음의에 '용성'의 좌각을 말하여 '천전'이라하니 즉 농사에 상서로운 것이다 진일에 우성에 제사지내니 불러 '영성'이라 한다. 풍속지에 진의 신을 '영성'이라 한다. 고로 진일에 동남에 제사한다.]에게 제사하길 좋아하여 시월에 큰 모일을 가져 하늘에 제사시내니 일명 '동맹'이라 한다. 기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불러 수신이라 한다[위지 통지에 ' '이 '隧'로 적혀있다.]. 또한 시월을 맞이하여 이에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치장하였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머리띠를 하는데 관과 같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어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심의하여 이를 살인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혼인은 모두 부인의 집에서 치루고 자식을 낳아 다 크면 그런 연후에 마땅히 돌아온다. 사람을 보낼때가 되면 그 도구를 갖추었다. 금 은 재물 비단이 다될때까지 후하게 장사지내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씨를 뿌렸다.  그 백성의 성품이 흉하고 급하고 기력이 있어 전투를 익히고 노략질을 좋아하였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소속되어 있다.   '구려'는 일명 '맥'이다. 그 갈라짐이 있으니,[심흠한이 말하길 구려에는 종류가 있으니 일명 '맥이'이다. 통지에 '맥'이라 하고 '이'자가 없다. 이 '이'자는 첨언한것이다.] 작은 물에 의지하여 거하면, 이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온다. 이를 소위 '맥궁'이라 한다.[위씨춘추에 말하길 '요동군''서안평현'북쪽이다. 작은 물이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다른 종류를 명하여 '소수맥'이라 한다.]   '왕망'초에 '구려'의 병사를 보내어 '흉노'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가고자 하지 않았다. 강제로 이에 파견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방에서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쫓아 공격했으나 전사하였다. '망'이 장수 '암우'에게 이를 공격하라고 명했으나, 구려후 '추'를 꾀어 변방으로 들어가[위지에는 '騶(추)'가 ' (도)'로 되어 있고 전한서 왕망전에는 '騶'로 되어 있다.] 이를 베어 '장안'에 머리를 전했다. 망이 크게 말하길, '고구려왕'의 명을 고쳐 낮추어 '구려후'라 하였다. '맥인'의 변방 약탈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 고구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광무' 다시 왕호를 회복했다. 이십삼년 겨울 '구려' '만우락'대가 '대승'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이십오년 붐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침입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이에 구하니 모두 변방으로 돌아갔다.       후에 구려왕 '궁'이 태어나자 눈을 뜨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꺼려하였다. [위지에 '懷'는 '惡(미워하다)'오 기록되어 있다. '懷'는 마땅히 '괴(괴이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옛부터 '懷'자는 많이 ' (두려워하다)'와 섞어 썼다. 고로 잘못되어 바뀐 것이다.] 이에 자라 용맹한 장사가 되니 여러번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원흥'원년 봄 요동에 다시 들어와 육현을 빼앗아 노략질 하니 태수 '경기'가 나아가 이를 격파하여 그 큰 장수를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 '궁'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며 '현도'에 속하길 구했다. '원초' 오년 다시 '예맥'이 '현도'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화려는 현이고 '낙랑군'에 속한다.] '건원'원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위지 북사에 '諷'이 '風'으로 기록되어 있고 안제기에 '諷'으로 되어있다. 통감도 이와 같다.] 병사로 변방에 나아가 이를 공격했다. '예맥'의 큰 장수들을 베고 포로로 삼으니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아들 '수성'과 장병 이천여명을 '광'등에게 보내며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자 '광'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에 험하고 좁은 지형으로 대군을 막고 삼천명으로 몰래 들어가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명을 죽이고 상처입혔다. 이에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여국'이 삼천여 기병으로 동시에 이를 구하고자 파견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가버렸다. 여름 '요동''선비'의 팔천여명으로 '요수'를[현의 이름이다. 요동군에 속한다.] 공격하여 빼앗아 사령과 백성을 죽였다. '채풍'등이 뒤쫓아 '신창'으로 나아갔으나 전몰 하였다. 공조'경모', 병조연'용서' 병마연'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막았으나 병사들과 함께 죽었다. 죽은자가 백여명이다. 가을 '궁'이 '마한''예맥'의 수천여기병을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와['台'는 또한 '治'이다.] 장병 이만여명을 파견하고, 주군의 병력을 합하여 이를 깨뜨리고 정벌하니 그 머리를 오백여개나 베었다.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올랐다. '요광'이 위에 말하길 '이 상으로 인하여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자' 하니 의논한자들이 모두 이를 가히 허락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길 궁은 전의 '걸'과 같고 교활하니, '광'은 능히 깨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이를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니니 조문의 파견해야 한다. 인하여 전의 죄를 책망하고 용서하여 가히 처벌하지 않아 후에 친선을 취해야 한다. 하니 '안제'가 이를 쫓았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에 살아있는 백성들을 돌려 보내기 위해 '현도'에 항복하니 고하기를 '수성'등이 포악하고 배반함이 형용할수 없어 마땅히 베어 절단하여 절임으로써 백성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 용서를 받아 죄를 청하여 항복하길 빈다. '선비' '예맥'은 해마다 노략질 하고 백성을 빼앗아 핍박하니, 수천이요, 마름질하여 보내는 자는 수십에 백명이니, 이는 교화될 마음이 아니다. 이 후로 현과 관은 전쟁하지 말것이며 친하고 따르며 살아있는 자를 보내니 모두 바로 그 세를 바쳐야 한다. 사람당 비단 사십필이고 어린이는 그 반이다.       '수성'이 죽자 아들 '백고'가 올랐다. 그후에 '예맥' 복속하여 따랐다. 동쪽으로 작은일들만이 있었다. '순제''양가' 원년 '현토군'에 둔전 육부를 두었다. '질'과 '항'사이에 요동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니 '대방'의 령을 죽이고,[군국지에 '서안평' '대방'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한다.] 낙랑태수의 처자을 잡았다. '건녕'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이를 쳤다. 수백의 머리를 베니 '백고'가 다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길 구걸했다.       三國志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한나라때에 북치고 피리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는데, 항상 '현토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다. '고구려'를 영주로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 지더니. 군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질러 왔다. 이제 '호'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라 한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의 이름이다. 이곳에 관을 두고 '대로'을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았다. 왕의 종족으로 '대가'는 모두 '고추가'로 칭하는데,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이제는 비록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혈통을 잇는 대인으로 '고추가'가 칭한다.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는여, '고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그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모임에 앉거가 일어서는데 있어,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함께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宋書       高句麗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선조는 '주몽'이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이 궁실안에 잠그었으나 태양이 이곳을 밝게 비추어, 몸을 끌었으나 이를 피하였지만, 태양의 그림자가 또한 쫒아 왔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베니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이를 버려 개에게 주었지만, 개는 먹지 않고, 다시 버려 돼지에게 주었지만, 역시 먹지 않았다. 이를 길가에 버렸지만, 소와 말이 이를 피했다. 후에 이를 들에 버렸는데, 새의 무리가 털로써 이를 길렀다. '부여왕'이 이를 쪼개어 나눌려고 했지만, 능히 깰수 없었다. 그 어미에게 돌려 주자,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미 자라 있으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이다. 부여사람이 '주몽'이 사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장차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여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그를 말지기에 명하였다. '주몽'이 매양 사사로이 실험하여, 좋은말과 나쁜말이 있음을 알고, 좋은 말은 음식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나쁜 말은 잘 길러 살찌우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스스로 타고, 여윈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쏘아 하나의 화살을 쏠 시간동안에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한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조몽의 어미가 은밀히 이를 알고, '주몽'에게 말하길,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는 재주로써, 마땅히 먼 곳에 가야한다."  '주몽'이 이에, '오인','오위' 두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물가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이 이들을 급히 쫓았다.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길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달아나는데, 병사가 쫓아와 이에 이르렀다. 어찌 건널수 있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저, 쫓아온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보술수'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를 입고, 한사람은 납의를 입고, 한사람은 수한의를 입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거처를 정하고, '고구려'라 불렀다. 이런 연후로 성씨를 고씨(?)라 하였다.     처음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도망한후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시여해'라 하였다. 자라, 주몽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고, 곧 어미와 함께 도망하여, 이에 돌아오니,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대를 이어 섰다. '여달'이 죽고, 아들 '여율'이 섰고,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섰다. 이에 '부여'를 침공하여 '부여'가 크게 패하니, 속하였다. '막래'의 자손이 서로 전하여 '궁'에 이르렀다. 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보니, 나라사람이 미워하였다. 자라 흉폭하고, 사나우니, 나라가 깨어졌다. '궁'의 증손 '위궁'이 또한 나면서부터 보았다. 사람들이 증조 '궁'과 같다하여,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같음을 '위'라 하였다. '위궁'역시 용력이 있고, 활과 말타기를 잘하였다. '위'나라 '정치' 중에 '요서' '안평'을 침입하였는데,[삼국위지 동이전과 수서 고려전에 '요서안평'은 '서안평'으로 적혀있다. 후한서 군국지에 '안평'은 '기주'에 속하며, 삼국지에 '서안평'은 '유주' '요동군'에 속한다. '요서군'은 '안평' 혹은 '서안평현'에 있다. 이중에 '요'자가 남았거나, 혹은 '요'자 밑에 '동'자가 빠졌다.] 유주자사 '관구검'이 깨뜨렸다. 그 현손 '을불리'와 '리'의 아들 '쇠'가 '열제'때에 함께 '모용씨'와 서로 공격하였다. '건국' 사년 '모용원진'이 무릴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고 '남섬'에 스스로 들어와서 '목저'에서 싸워 '쇠'군을 크게 깨뜨렸다. 승승장구 하더니, '환도'에 이르르자 '쇠'가 달아나 숨었다. '원진'이 '쇠'의 아버지 묘를 파해치고, 그 주검을 싣고, 그 어미와 처와, 보물과 남녀오만여명을 함께 노략질 하고, 그 궁실을 불살라, '환도성'이 패허가 되자 돌아 왔다. 그 후로 '쇠'는 사신을 보내 알현함이 멀어지고, 서로 막혀 원수처럼 지냈는데, 뒤에 가서 '쇠'는 '백제'에게 죽었다.       '세조'때에 '쇠'의 증손 '련'이 사자 '안동'을 파견하여, 표를 받으러 방물을 받치기 시작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받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다이 여기어, 조서를 내리어 그 나라의 이름을 내리니 '원외산기시랑''이오'를 보내어 '련'에게 내리길 '도독요해제군사 정동대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였다. '오'가 거하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일을 물었다. 말하길, '요'는 동남으로 일천여리이고, 동쪽은 '책성'에 이르고, 남쪽은 '소해'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 '부여'에 이른다. 백성은 전의 '위'날 때보다 3배이다. 그 땅은 동서로 이천리이고 남북이 일천여리 이다. 백성은 모두 땅에 정주하며, 산과 골짜기에 근거하여 거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흙과 밭이 척박하여 양잠과, 농사가 족하지 않아 사람들이 음식을 절약한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관명에는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불리우는게 있다. 머리에는 절풍을 하는데 그 형태가 고깔과 같고, 두루 새의 깃털을 꽂아 귀천의 차이를 두고, 서 있을 때는 팔짱을 끼고 꿇어엎드려 절을 할 때엔 한 쪽 다리를 뻗는다. 걸음은 달리는 것과 같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하니 나라에서 큰 모임이다. 그들이 공회에서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이나 은으로 수를 놓아서 장식을 한다. 그들은 또 걸터앉기를 좋아하고 음식에는 그릇을 이용한다. 삼척마가 나는데, 원래 주몽이 타던 것이라고 한다. 말의 종류가 즉 과하마이다. 그 뒤로부터는 사신을 보내서 서로 찾았고,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이때 '풍문통'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니, '세조'가 산기상기'봉발'을 파견하여 '련'에게 고하길 '문통'을 보내라 하니, '련'이 상서와 '문통'을 함께 갖추어 왕화를 받들겠다 하나, 끝내 보내기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가서 이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낙평왕''비'등이 의논하여 나중에 일어나자고 하니, '세조'가 이네 중지하였다. '문통'은 또한 '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현조'가 육궁이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서를 내려 그 여식을 받치라 하니, '련'이 칙서를 받들어, 말하길 여식은 이미 출가 하여, 구하여 동생의 여식으로 응하니, 조정에서 응하였다. 이에 '안락왕''진과 상서 '이부'를 파견하여, 그 곳에 이르러 비단을 보내었다. 그 좌우에서 말하자, '련'이 미혹되니, 말하길 조정에서 옛날에 '풍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낌새도 없이 나라가 멸망당하였다. '은'나라의 본보기가 멀지 않습니다. 마땅히 방편으로써 사양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를 올려 계집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칭하니, 조정에서 그 교사를 의심하여 또한 가산기상시'정준'을 파견하여 이를 꾸짓고, 만일 여식이 죽었으면, 다시 일가 친척에서 가려뽑아 청해야 한다. 하니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전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마땅히 받들겠다."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붕하니, 이내 그치었다.       '고조'때에 이르러 '련'이 2배의 공물을 받쳤다. 그 하사품도 또한 점점 더하였다. 이 때에 '광주'가 바다 가운데에서 '련'이 '소도성'에 파견하는 사자 '여노'등을 궁궐에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를 내려 '련'을 책망하여 말하길, " '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왕의 이름을 도둑질해서 '강'의 왼쪽에 있으니, 짐이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그 나라를 멸하고, 끊어졌던 대를 '유씨'에게 이어 주려 했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를 해서 멀리 찬역하는 적들과 통하니 이 어찌 번신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한가지 과실로 해서 경의 지난날의 정성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기로 곧 돌려 보내 주는 것이니, 경은 여기에 감동하여 그 허물을 뉘우치고 다만 조정의 밝은 법에 순종하여 편안히 맡은 바 땅을 다스리고 그 곳의 형편을 알려 주기 바란다] 했다.       '태화'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였다. '고조'가 동쪽 성밖에서 슬피 울고, 알자복사 '이안상'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한 '대홍려'를 파견하여 '련'의 손자 '운'에게 '사시절도독 발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통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리고, 의관과 복물, 거기 등의 장식을 하사했다. 또한 조서를 내려 '운'에게 세자를 입조하는데 보내어, 교구의예를 치루라고 하였다. '운'이 상서하여 병을 핑계되고, 그 종숙 '승우'를 사신과 함께하여 보내어, 궁궐에 이르자, 엄하게 이를 꾸짓었다. 스스로 이해부터 늘상 조공을 하였다. '정치'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불로 보았다.[다른 여러본에는 '종'이 '조'로 적혀 있다. 북사에는 '선무'라고 적혀 있으나 '정치'란 호는 '세종'이 지은 것이니 북사는 그 제호를 바꾸어야 한다.] '실불'이 나아가 말하길 " '고려'는 멀리 하늘 끝에 걸리어 있어 해마다 순수한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나는 물건들은 바칠 것이 없아옵고, 다만 황금이 '부여'에서 나고, 옥이 '섭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을 섬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니, 나라의 왕이며 신하인 '운'이 끊어진 의를 이를려고 생각하여, 백성들을 모두 국경 안으로 옮겼아오니, 두 물건이 왕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실상 이 두 적들 때문입니다." 했다. '세종'이 말하길, " '고려'는 대대로 상장직을 떠 맡아,바다밖을 제도 하고, 구이를 사로잡고, 실로 이를 정벌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모든 부끄러움을 끼치고 있으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옛날에 공물을 바치지 않은 허물도 그 책임이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니 경은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짐의 생각하는 바의 대략을 알도록 힘써, 무리를 해치는 자들을 잘라 없애고 동쪽 백성들을 편안히 하여 두 고을로 하여금 옛터를 회복하도록 하고 토산물도 빠짐없이 바쳐 오도록 하라] 했다.       '신귀'주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하사하고, 또한 세자 '안'에게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내렸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한 '소연'이 '안'에게 '영동장군의 옷, 관, 검, 패를 하사하는 것을 바다 가운데에서 얻었다. 또한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내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이 섰다. '출제' 초에 '연'에게 조서를 내려 더하길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이라 하고 의관과 복물과 거기를 하사하였다. '태평'중에 조서를 내려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서고, '무정'말에 이르기 까지 공물과 사신이 끝이는 해가 없었다.       南       高麗國(고려국 :고구려)       '동이'의 '고려국'은 서쪽으로 '위노'와 경계하고 있다. '송'말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 평이주 제군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태조''건원' 원년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삼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가서 역참을 통하여 항시 통하였다. 역시 '위노'에 사신을 통하니, 강성해져서 제도를 받지 않았다.       '노'에서는 여러나라의 사신을 집에 두었는데, '제'가 첫째이고, '고려'가 다음이었다. '영명'칠년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를 '위노'에 보냈는데, '위노'도 '원회'를 보내와 '고려'와 서로 엇갈렸다. '유명'이 위주객랑 '배숙명'에게 이르기를 나와 다른 사람이 중국의 명을 받들어 경의 나라에 온 것은 적을 막고자 함이니, '위'가 여기에 있음이다. 스스로 나머지 바깥의 이들은 먼지가 일어나듯이 얻을 려고 바라지 않아도 다스리니, 하물며 동이의 소맥이야 신하로 조정에 속하게 되니, 오늘에서야 감히 내가 이른것입니다. 하였다. '사효'가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말하길 나의 성조가 '위'의 사산에게 일찍이 소국처럼 대하지 않음은 경도 역시 알 것이다. 하였다. '사충'이 말하길 실로 그러하다. 다만 주와 부가 임금의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그  앉고 일어섬의 차이가 심히 높으니 서로 아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하니 '사효'가 말하길 '이도고'가 옛날 사신이었을 때 의관을 바로하고 갔는데, '위국'에서는 반드시 갓끈을 늘여뜨리니, 어찌 얼굴을 보는데 물리치지 않겠는가? '유명'이 또 '노주'에게 말하길 두나라는 서로 비슷하니 오직 '제'와 '위'와 친하다. 변방의 작은 오랑캐로 감히 이르러 신하로써 따른다. 하였다.     '고려'는 풍속에 옷은 궁고를 입고, 관은 절풍하나를 쓴는데, 이를 책이라 한다. '오경'을 알고 있다. 사신이 서울에 있어 중서랑 '왕융'이 이를 놀리며 말하길 옷입는데 정성스러움이 없으면, 몸에 재앙이 온다. 머리위에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하니 답하여 말하길 이것은 곧 옛부터 내려 오는 고깔이 남은 것입니다. 하였다.       '고련'이 백여세에 죽었다. '융창'원년에 '고려왕 낙랑공 고운'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 이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건무' 삼년 (이 밑의 글자는 파본으로 알수 없다.)       周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길 시조는 '주몽'이라 한다. '하백'의 여자가 태양의 그림자를 느끼어 그곳에서 아이를 배었다. '주몽'이 자라나 다스림의 재주가 있어, '부여'사람들이 미워하니 이에 쫓겨났다. 땅을 '흘두골성'에 잡고, 스스로 '고구려'라 불렀다. 이에 '고'로 씨를 삼았다. 그 손자 '막래'때에 점점 성하더니, '부여'를 공격하여 이에 신하로 삼았다. '막래'의 후손중에 '련'이 있는데, 처음으로 '후위'에 사신을 보내어 통하였다.       그 땅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를 건너 이천리이며, 남쪽으로 '백제'에 접하며, 북쪽으로 천여리에 '말갈'과 이웃한다. '평양성'에서 다스린다. 그 성은 동서로 육리이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는 오직 창고에 그릇을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도적이 이르르면, 사방에서 들어와 오로지 수비한다. 왕은 그 곁에 집을 나누어 짓는데, 항상 이에 거처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다. 즉 다른 도읍이다. 다시 '요동', '현토'등 수십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고, 이로써 서로 관리한다.       큰 관리로 '대대로'가 있고, 다음으로 '태대형', '대형', '소형', '의사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그리고 '욕살'이 아우르는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삼등급으로 내외사를 나눈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의 법칙으로써 뺏았아 스스로 오르는 것이로 왕이 관리로써 두는 것이 아니다. 그 형법에 모반한자는 먼저 불살라 죽인고, 그 후에 목을 베며. 그 집안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한 자는 십여배로 갑고, 만약 가난하여 준비하지 못하면, 빗을 지개 하여 잘잘못을 살피여 그 아들 딸 모두 노비로 삼아 이에 갚도록 한다.       장부의 옷은 동수삼(소매와 윗도리가 통자)과 대구고(허리품이 넓은 바지)이고, 흰색 가죽으로 허리띠를 메고, 황색 가죽으로 신을 신는다. 그 관은 '골소'라고 하는데, 붉은 비단을 포개어 이를 만들고, 금은으로 이를 꾸민다. 벼슬이 있는 자는 또한 새의 깃털을 위쪽에 두 개를 꽂고, 이에 다름을 표시한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데, 옷고리와 소매에 모두 선을 두른다. 서적으로는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병기로는 갑옷, 노, 활, 화살, 창이 있다. 조세는 명주나 화폐 곡식으로 하는데, 그 있는 곳까지 쫓아가 빈부의 차이를 두어 이에 걷는다. 땅은 척박하고, 거처는 검소하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짓이 많고, 말하는 것은 거칠고 더럽다. 친하거나 소원하거나 가리지 않고 한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좋아하며 이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 유녀(기생)가 있으며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결혼하는 예는 재물이나 비단이 없고 만일 재물을 얻는자는 노비로 판다고 이르로, 풍속에서 매우 부끄러워 한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그 옷은 중국과 한가지 이다. 형제일때는 삼개월을 한계로 한다. 불법을 공경하고 믿으며, 더욱이 음사를 좋아한다. 또한 신을 모시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깍아 여인네의 모양이고, 하나는 '등고신'으로 말하길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관사에 함께 두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간수한다.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 말한다.       '련'의 오세손은 '성'이다. '대통' 십이년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성'이 죽자 아들 '탕'이 섰다. '건덕' 육년 '탕'이 또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조'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 개국공 요동왕으로 삼았다.       南史       高句麗(고구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어, 그들이 나온 것은 '북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땅은 가히 이천리이고 가운데에 '요산'이 있고, '요수'가 나온다. '한'과 '위'때에 남으로는 '조선', '예맥' 동으로는 '옥저' 북으로는 '부여'에 접하고 있다. 그 왕의 도읍은 '환도산'아래에 있는데, 땅은 큰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깊은 연못은 없으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사는데, 계곡물을 먹는다. 비록 토착하여 살지만 좋은 밭이 없어서 풍속에 식량을 절약하며, 궁실을 짓기를 좋아한다. 거하는 곳의 좌우측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 제사를 지내며, 또한 별과, 땅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사람들은 흉폭하고, 급하며, 노략질 하길 좋아한다. 관식은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높고 낮음에 각각 등급이 있다.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모두 '부여'와 같은 것은 것으로 성질과 기후 의복등은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부족으로 '소노부'·'절노부'·'신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을 하였는데, 점점 약해져,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관직을 두는데 있어,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풍속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 남녀가 매양 밤에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며 즐긴다. 사람들은 깨끗함을 좋아하고, 몰래 술을 담구어 먹으며, 다리를 뻗어 절을 하며, 걸을때는 달음질을 한다. 시월에는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공적인 모임에는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스스로 꾸미는데, 대가와 주부의 머리에는 건과 같은 것을 머리에 쓰는데, 뒤가 없다. 소가들은 절풍을 쓰는데, 모양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는데, 죄를 지은자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중죄인은 죽이고, 그 처자도 죽인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꼬시어 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함이 많다. 이미 결혼하면, 나중에 잘살게 되면 결국에는 옷을 보내온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데 있어서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후이 장사지냄을 좋아하여 금은과 재물과 비단을 모두 죽은자를 위해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주위에 심어 놓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고 말은 모두 작은데 산을 오르기에는 편하다. 나라사람들은 기력을 숭상하여, 활과 화설 칼과 창을 잘 다루고, 갑옷이 있으며, 전쟁을 익힌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속해 있다.       '진' '안제''의희' 구년 '고려왕 고련'이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를 받치며, 붉은빛나는 백마를 받치자, '진'이 '련'을 사지절 도독 영주 제국사 정동장군 고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송''무제'가 보위에 오르자, '정동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이 하였다. 삼년 '련'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독평주제군사를 보태었다. '소제''경평'이년 '련'이 장사 '마루'등을 보내어 방물을 받치자 '주소백'과 '왕소자'를 보내어 이에 위로하였다.       '원가' 십오년 '풍홍'이 '위'을 공격하다가 패하여 '고려''북풍성'으로 도망하였는데, 표를 올려  맞이하여 접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왕백구'와 '조차흥'을 보내어 맞도록 하고, 아울러 '고려'에 재물을 보내었다. '련'이 '홍'을 남쪽에 두고자 하지 않아, 이에 장수 '손수'와 '고구'를 보내어 엄습하여 이를 죽였다. '백구'등이 칠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수'를 사로잡고, '구'등 두사람을 죽였다. 이에 '련'이 '백구'등이 마음데로 죽였다고, 사신을 보내어 잡아 보내달라고 하였다. 임금이 먼나라의 뜻을 어기고자 하지 않아, '백구'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 주었다.     '련'이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육십년 '문제'가 '위'를 침략하고 하여 '련'에게 말을 보내 달라고 하니, 팔백필을 받쳤다.       '효무' '건녕' 이년 '련'이 장사 '동승'을 보내어 표를 받들며, 나라의 슬픈 일을 두루 위로하며 함께 방물을 받쳤다. '대명'이년 또 '숙신씨'가 고시와 돌화살촉을 받쳤다. 칠년 '련'을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옛날과 같이 하였다. '명제''태시' '후발제''원미'중에 공물을 받치기를 끊이질 않았다. '제'에서도 작위를 내렸는데 백여세에 죽었다. 아들 '운'이 섰다. '제''융창' 중에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이주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을 삼았다.       '양''무제'즉위년에 '운'에게 차기대장군을 더하였다. '천감'칠년 무동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삼고 지절 상시 도독 왕은 전과 같았다. 십일년 십오년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다. 십칠년 '운'이 죽고 아들 '안'이 섰다. '보통' 원년 '안'에게 봉작을 내리고, 지절 독 영평이주제군사 영동장군으로 삼았다. 칠년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서고,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받쳤다. '연'에게 작위를 내렸다. '중대통' 사년 육년 '대동'원년 칠년 더불어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쳤다. '태청' 이년 '연'이 죽자 그 아들 '성'에게 '연'을 잇는 작위를 내렸다.       北史       高句麗 (고구려) -이하 고려란 고구려를 가르킨다-       '고구려'는 먼저 '부여'에서 나왔다. 왕이 일찍이 '하백'의 여자를 얻어, 인하여 집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태양이 비추자, 몸을 피하였으나, 태양이 또 몸은 따라다녔다. 이미 아이를 베고 있었는데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다섯되나 되었다. '부여왕'이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는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 버리자 소나 말이 이를 피하고,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무리지어 털로써 보호하였다. 왕이 이를 쪼갤려고 하였으나 능히 깨뜨릴 수 없어, 다시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이를 보자기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남자가 깨뜨리고 나왔다. 장성하자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 풍속에 '주몽'이란 말은 활을 잘 쏜다 라는 것이다. '부여'사람들이 '주몽'이 사람이 태어난 것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기지에 명하였다. '주몽'이 사사로이 시험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 좋은 말은 밥을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말을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밭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를 주었다. '주몽'이 화살 하나로 짐승을 많이 잡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모살할려고 하자 그 어미가 '주몽'에게 고하자, '주몽'이 이에 '언' '위'등 두명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길을 다는 중에 우연히 큰 물을 만나, 건너고자 하나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들이 급히 뒤쫓아 오는데, '주몽'이 물에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이제 병사들이 쫓아 오니 어찌하면 건널수 있겠는가? 이때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서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이르러 여기에 거하였다. '고구려'라 부르는 것이다. 인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부여'에 남아있던 처가 아이를 베었는데, '주몽'이 달아난 후였다. 아들을 낳으니 '시여해'라 하여, 장성하여 '주몽'을 알자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미 어미는 돌가가신 뒤였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니 나라의 일을 맡기었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이 서고,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섰는데, 이에 '부여'를 병합하였다.       한 무제 원봉 사년 '조선'을 멸하고 '현토군'을 두었다. '고구려'를 현으로 삼고, 이를 속하게 하였다. '한나라'때에 옷과 두건 조복과 북과 피리를 하사하니, 항상 '현토군'에 나와 이를 받았다. 후에 점점 교만해 지더니 군에 나와 복속하지 않고, 다만 동쪽경계에 작을 성을 쌓고, 이를 받았다. 그 성을 '책구루'라 부렀다. '구루'라는 것은 '구려'의 성 이름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병사를 일으켜 호를 쳤는데, 가고자 하지 않아, '망'이 강제로 다그치어 이를 보냈는데, 모두, 요새에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에서 허물을 '구려후' '추'에게 돌리니, '암우'가 꾀어 이를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고, 다시 이름을 '고구려', '고구려후'라 하였다. '광무' '건원' 팔년 '고구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상'과 '안' 사이에 이르러, '막래'의 후손 '궁'이 수차례 '요동'을 도적질 하였다. '현토' 태수 '제풍'이 이를 벌하였는데, 능히 금할 수 없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섰다. '순'과 '화' 사이에 다시 여러번 '요동'을 범하여, 노략질 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이를 벌하고, 포로 수백을 베었다.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서 일어나자 '백고'가 통하여 좋아하였다.       '백고'가 죽자 아들 '이이모'가 섰다. '이이모'는 스스로 '백고'때에 이미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였다. 또한 망한 호인 오백호를 얻었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군사로 공격하여 그 나라를 깨뜨리고, 수도를 불사르자, 항복한 호가 역시 모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토'를 공격하였는데,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이이모'가 죽자 아들 '위궁'이 섰다. '위궁'은 증조부 '궁'에서 시작하는데, 태어나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폭해지고 사나워져, 나라를 해치고, 깨어졌다. '위궁' 역시 태어나서부터 사람을 보아 '고려'에서 서로 비슷하다를 '위'라 하는데, 증조부 '궁'과 비슷하니 고로 이름이 '위궁'이다. '위궁' 역시 용력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과 사냥에 능하였다. '위나라' '경초' 이년 태부 '사마선왕'을 보내어 무리를 이끌고 '공손문의'를 쳤는데, '위궁'이 주부, 대가의 장수 수천을 보내어 군사를 도왔다. '정시' 삼년 '위궁'이 '요'의 '서안평'을 도적질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여명으로 '현토'에서 나와 '위궁'을 쳤다.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패하여 달아나니 '검'이  ??고개에 이르기까지 쫓아가서 '환도선'에 올라 그 도읍을 무찔렀다. '위궁'이 단지 아내와 멀리 숨었다. 육년 '검'이 다시 이를 쳤는데, '위궁'이 재빨리 여러 가들과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보내어 쫓았지만, '옥저' 천여리에서 그만 두었다. '숙신'의 남쪽에 이르러, 돌에 그 공을 새기었다. 또한 '환도산'을 깍아 '불함성'이라 새기고 돌아 왔다. 그 후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진나라' '영가'의 난리때 '선비'의 '모용귀'가  '창려' '대극성'에서 일어났는데, '원제'가 '평주 자사'를 내렸다. '위궁'의 손자 '을불리'가 빈번히 '요동'을 노략질 하니 '귀'가 능히 제도하지 못하였다.       '불리'가 죽자 아들 '쇠'가 섰다. '위 건국' 사년에 '모용귀'가 아들 '황'으로 이를 치니, 스스로 '남합'에 들어와 '목저'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쇠'의 군사를 크게 깨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숨으니, '황'이 '쇠'의 아비의 묘를 파해치고, 그 어미와 처 보물과 남녀 오만여명을 노략질 하고 그 궁궐을 불살르며,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 왔다. '쇠'는 후에 '백제'에 의해 살해 당했다.       '진나라 효무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 '현토군'을 공격하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동생 '농'을 보내어 '구려'를 쳤서, 다시 이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가 '구려왕 안'을 '평주 목'에 삼고 '요동', '대방' 이국왕으로 봉하여 장사 사마 참군관을 두었다. 후에 '요동군'을 다스렸다.       '태무'때에 '쇠'의 증손 '련'이 처음 사자를 보내어 '안동'에 이르러 표를 받들어 방물을 받치며, 나라의 휘를 함께 하길 청하였다. 사신 원외산기시랑 '이오'가 '련'에게 절하며 연을 '도독 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오'가 그 처소에 이르렀는데, '평양성'에 거하고 있었다. 찾아가 여러 가지일을 물었는데, 말하길 '요동'에서 남쪽으로 일천여리를 가면 동쪽으로 '책성'에 이르고, 남쪽으로 작은 바다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옛날 '부여'이고 호수는 '전위'때의 세배이다. 후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쳤는데 해마다 황금 이백근과 은 사백근을 받쳤다. 이때 '풍홍'이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태무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어 '련'에게 고하기를 '홍'을 보내달라 하였다. '련'이 상서하여 '홍'이 왕화됨을 받들었다고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았다. '태무'가 노하여 장군을 보내어 이를 쳤다. '낙평왕 비'등이 의논하여 기다리다가 후에 일어나라고 하니 '태무'가 이에 그치었다. '홍'은 역시 '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문명태후'가 '헌문'이 육궁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련'이 여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말하길, 여자가 없어, 아우의 여자를 구하여 응합니다 하였다. 조정에서 이에 허락하니 '안락왕 진'을 보내었다. 상서에는 '이오'등이 그 곳에 비단을 보냈다 하였다. '련'이 그 좌우의 말에 의심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옛날 '풍씨'와 혼인하였는데 얼마있지 않아 그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은'의 때가 멀지 안음을 생각하십시오. 마땅히 방편을 말해야 합니다. '련'이 상서하여 거짓으로 여자가 죽었다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거짓이라 의심하고, 또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어 끊고 이를 책하여, 만약 여자가 죽었으면 다시 여자를 가려 뽑아 청하라. 하였다. '련'이 말하길 만일 천자가 앞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헌문'이 죽자 이내 그치었다. '효문'때에 이르러 '련'이 앞서의 두배의 공물을 받치니 그 하사품 역시 점점 더하였다. 이때 '광주'의 바다에서 '련'이 '제에 보내는 사신 '여노'등을 얻어 대궐에 보내었다. '효문'이 책하여 고하길, '도성'이 그 임금을 죽이고 '강'의 왼쪽에서 몰래 일어나, 짐이 그 나라를 없애고 옛나라를 세워 '유씨'의 대를 끊고자 한다. 이에 경이 바깥으로 그 경계를 넘어 적들과 통하니, 어찌 이것이 신하로써 지켜야할 의라 할 것인가? 이제 하나의 잘못으로 옛날의 정성을 가리지 말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허물을 생각하여 용서함을 감사히 여기고 밝은 법을 받들어 공경하여 거느리는 바를 화목하고 편하게 하니 동정으로 삼가 받들라. 하였다.       '태화' 십오년 '련'이 죽으니 백여세 였다. '효문'이 동쪽 성밖에서 슬퍼하고, 아뢰는 자로 복사 '이안상'을 보내어, 책을 '거기대장군 태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여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어 '련'의 손자 '운'에게 절하며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옷과 관 복과 물건 수례와 기를 꾸미는 것을 하사하였다. 또한 '운'에게 고하길 세자를 입조하라 하여 성밖에서 예를 차리는 것을 명하였다. '운'이 상서에 병을 핑계삼아 숙부 '승우'를 보내고 사신으로 대궐까지 수행하게 하였다. 이를 엄히 책하니 스스로 이에 세마다 항시 공물을 받쳤다. '정시'중에 '선무'가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 불러 보니, 나아가 말하길, '고려'는 정성으로 하늘을 잇어 그 정성이 쌓여 땅에는 토모가 산출되어 왕의 공물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옥이 '섭라'에서 나와, 이제 '부여'가 '물길'을 내 쫓고, '섭라'가 백제와 어울립니다. 나라의 왕인 신하 '운'이 의의 계통을 이어 모두다 경내에 옮기었습니다. 두 물건을 왕의 곳간에 채우지 않고, 양적의 제물을 베풉니다. '선무'가 말하길 '고려'를 어찌 천자를 책망하는가? 오로지 해외를 제도하고 영리한 오랑캐를 벌하여 재물을 얻었다. 지난달 방물을 받친 허물은 꾸짓어서 복종하게 되니, 마땅히 짐이 경에게 말하길, 힘써 위엄으로 다스리고, 두 읍은 옛날로 돌려 보내라. 토모가 잘못된 공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신귀'중에 '운'이 죽자 '영태후'가 동당에서 슬퍼하였다. 사신을 파견하여 '거기대장군 령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더하였다. 또 절하여 그 세자 '안'에게 '진동장군 령오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정광' 초에 또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양나라'가 '안'에게 내리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검 노리게를 얻었다. 이에 사신 '강법성'등을 서울로 보냈다.       '안'이 죽자 아들 '연'이 섰다. '효무제' 초에 고하길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더하였다. '천평' 중에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옛날과 같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섰다. '무정'에 이르러 왔었는데, 해마다 오지 않음이 없었다. '대통' 십이년 사신이 '서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제'가 '동위'를 합병한 해에 사신을 '제'에 보냈다. '제'의 '문선'이 '성'에게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은 옛날과 같다. '천보' 삼년 '문선'이 '영주'에 이르러 사신'박릉'과 '최유'를 '고려'에 보내어 '위'의 유민을 구하라 하니. 조서에서 '유'가 말하길 만일 좇지 안는다면, 의당 일을 좇아야 한다 하였다. 이르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유'가 눈을 크게 뜨고 꾸짓고, 주먹질을 하자, '성'이 마루아래로 떨어졌다. '성'이 숨을 몰아쉬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이에 사죄를 하자 '유'가 오천여호를 되돌렸다.       '성'이 죽고 아들 '탕'이 섰다. '건명' 원년에 '제'의 '폐제'가 탕을 '사지절 령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을 삼았다. '주 건덕' 육년 '탕이 사신을 보내어 '주'에 이르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공 요동왕'을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 받자 '탕'이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렀다. 나아가 대장군을 받고 고쳐 '고려왕'을 봉함 받고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나라는 동쪽이 '신라'이고 서쪽은 '요'를 넘어 이천리이다. 남쪽은 '백제'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일천여리이다. 사람들은 토착하고,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거쳐한다. 옷은 베와 비단과 가죽으로 하고, 땅이 척박하여 양잠하고 농사지어도 족하지 않다. 고로 사람들은 음식을 절약한다. 그 왕은 좋은 궁실을 닦아 도읍을 '평양성'이라 하고 또 말하길 '장안성'이라고 한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의 굴곡에 있어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성내에 오직 창고에 쌓아두고 대비하는데, 적이 이르르면 들어와 지킨다. 왕은 따로 그 곁에 집을 짓는데 항상 거기에 거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역시 다른 도읍지이다. 그 나라에서 삼경이라 부른다. 다시 '요동' '현토'등 십여성이 있는데 모두 관리를 두어 다스렸다. '신라'가 매양 침범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대대로, 태대형, 대형, 소형, 경후사, 오졸,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으로 무릇 십이등급이 있다. 나누어 내외의 일을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에 따라 빼앗아 스스로 오르는데, 왕이 두는 것이 아닌다. 다시 내평과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절풍건을 머리에 쓰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고, 선비는새의 깃털을 양쪽에 꽂는다. 귀한 자는 관을 소골이라고 하는데, 자줏빛비단을 사용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넓고, 큰 바지에 가죽혁대 황색 가죽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은 '오경'과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고, 병기는 중국과 같다. 봄 가을로는 사냥을 하는데 왕이 친히 이를 주제하고, 세는 포 오필과 곡 오석이고 유랑인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고, 열명이 세포일필을 낸다. 조는 호당 일석, 다음은 칠두, 아래는 오두,이다. 형법에 배반하거나 모반하는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른 후에 베고, 집안도 몰살한다. 도적은 열배로 갚고, 만일 가난해서 갚지 못하면 빚을 지는데, 모두 청해 듣고 자녀를 노비로 삼아 갚는다.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는 오현, 금, 쟁, 필률, 횡취, 소, 고지속이 있고, 피리는 굽어 있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서 모여 즐기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 두 개로 나누어 돌로싸 던진다. 떠들며 달리고 쫓기를 다시 세 번한 후 그친다.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절은 한쪽 다리를 끌고, 서 있을 때는 두 손을 맞 잡고 있고, 걸을때는 반드는 손을 낀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공실에서 같이 잠을 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항시 시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공적인 모임으로 의복을 입고,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한다. 걸터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을 할 때 도마를 쓰고, 삼척마가 나온다. 이르기를 본래 '주몽'이 타던 말의 종류라 하는데, 즉 과하라 한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 결혼을 할 때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남자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어 마친다. 재물이 없이 가는 것이 예로 혹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를 부끄러이 여기어, 여자종으로 파는 것으로 여기었다.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만에 길일을 탹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자가 태어났을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자들이 다투어 취한후 가지고 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는 두곳이 있는데, 하나를 '부여신'이라 부르고 나무를 부인모양으로 깍은 사람의 형상이다. 나머지 하나는 '高登神'으로 이르기를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함께 관사에 두고 사람을 파견하여 보호하니, 대개 '하백녀'와 '주몽'을 일컷는 것이다.       '수'가 '진'을 평정한 후에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진치고, 곡식을 쌓아 수비의 책을 만들었다. '개황' 십칠년 임금이 새서를 보내어 책하기를 매양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더니 비록 변방에 붙어 산다고 하더라도 정성이 부족하다. '말갈'은 핍박해 오고, '거란'은 굳게 방비한다. 지난해 재화를 가지고 가는데, 작은 무리들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서, 귀국으로 숨었다. 어찌 거두지 않고자 함이 아니면 고로 도둑이 아닌가? 객사에만 앉아 있지 말고, 더욱 수비를 증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인을 죽이고, 항상 의심이 있어 숨을 죽이고 있다. 점차로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하더니 표를 올려 사죄하였다. 병으로 죽으니,       아들 '원'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공'의 작위를 이으니,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감사하고, 상서에 하례하며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칙서를 내려 왕으로 삼았다. 다음해, '말갈'을 거느리고 만여기병으로 '요서'를 도둑질 하자 '영주' 총관 '위세충'이 공격하자 달아났다. 제가 크게 노하여, 명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양군으로 이에 토벌하고, 그 작위를 물렸다. 때를 맞추어 운송하는 길이 이어지지 않자 여섯 군대가 굶주리고, '임유관'까지 갔다 질병을 만나 돌아오니, 왕사가 구할수 없었다. 다음으로 '요수'에 미치어,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며 표를 올리며 칭하기를 '요동의 하찮은 신하 원'이라 운운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물리고, 처음과 같이 하였다. '원' 역시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서니 천하의 전성기이다. '고창왕'과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궐에 와서 공물을 받쳤는데, 이때 '원'을 입조하라 불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오랑캐의 예의로 대궐에 무례하였다.(?) '대업' 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를 타고 '요수'를 건너 '요동'의 땅에 멈추어 영을 세웠다. 길을 나누어 나아가 각각 그 성의 아래에 당도 하였다. '고려'는 나아가 싸우는 것이 불리하다고 여기어 모두 성을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사들에게 공격하라 명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칙서를 내리니, '고려'가 만약 항복한다면, 곧 마땅히 위로하며 얻어야 하고, 병사들이 들어가 불을 놓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도적들이 문득 항복하려는 말을 하고, 교지를 받들고자 하나 감히 나아가질 못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아가 아뢰고 이를 보고하자, 적이 또 갖추오 방비 하고 다시 나와 방어전을 하였다. 이와 같음을 세 번을 하였는데, 제가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로말이암아 식량이 다 되고, 병사들이 지치자, 보급도 잇지 못하니 여러 군사들이 많이 패하여, 반이 되었다. 이 행함에 오직 '요수'의 서쪽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통정진'으로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칙서를 여러 군사들에 내려 따르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우어 성을 공격하는데, 적의 기세가 그 날로 사그라졌다. '양현감'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곧 그날로 여섯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망하여 '고려'에 들어갔는데,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정예군으로 뒤쫓으니 많은 군사가 패하였다. 십년 다시 천하의 병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고 일어났는데 그 있는곳이 험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역시 약해져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며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자, '회원진'에서 항복을 받고, 이어 사로 잡힌 병사들을 돌려 받았다. 도성에 도착하자 '고려'가 시신을 보내어 친히 사당에 고하자 이를 사로잡았다. 이에 '원'을 입조하라 하였으나, '원'이 오지 않았다. 제가 다시 후에 일어나길 꾀하였으나, 천하가 어지러워 다시 가질 못하였다.       隋書       高麗 (고려:고구려)       '고려'는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실내에 가두어 놓았는데, 햇빛이 따라와 이를 비추니, 감화되어 아이를 배었다.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보통 사람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이를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장성하여 사냥을 따라 갔는데, 많은 짐승을 잡았다. 또 죽이고자 청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어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으로 달아났다. 한 큰 물을 만나 깊어 가히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말하길 나는 하백의 외손이고 태양의 아들이다. 이제 어려움이 있어 병사들이 장차 이르려고 하니 어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포개어 다리를 만드니 '주몽'이 건널수 있었다. 기병이 가까이 왔으나 건널 수가 없어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구려'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대를 잇고,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병사를 일으켜 '부여'를 아울렀다. 그 후손 '위궁'대에 이르러 '위''정시'중에 '서안평'을 침략하니, '관구검'이 이를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손자의 손자)의 아들은 '소열제'인데 '모용씨'에게 깨졌다. '환도'에 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 한 후에 돌아 갔다. '소열제'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증손 '련'은 '후위'에 사신을 보내었다. '련'의 육세손 '탕'은 '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 요동군공 요동왕을 내렸다. '고조'가 즉위하자 '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궐에 이르러 대장군을 수여 받고 '고려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해마다 조공이 끊이질 않았다.       그 나라의 동서는 이천리이고 남북은 천여리 이며, 도읍은 '평양성'으로 또한 '장안성'이라 부른다. 동서가 육리이고 산을 따라 굽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접한다.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이 두 도읍은 번화한 곳으로 그 나라에서는 '삼경'이라 부른다. '신라'와 매양 서로 침략하니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관직은 태대형, 대형, 소형, 대로, 의후사, 오절,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욕사, 예속, 선인등 십이등급이다. 다시 내평, 외평, 오부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쓰고, 벼슬아치들은 새 깃털을 꽂는다. 귀한자는 관을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옷은 소매가 큰 윗도리에 구멍이 큰 바지를 입고, 흰색으로 허리띠를 매고, 황색 가죽으로 신발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같으며 매양 봄 가을로 사냥을 가르치는데, 왕이 친히 이를 내려 본다. 인세로는 베 오필, 곡물 오석이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삼년에 한번 세를 내는데, 열사람이 모아서 세포 한필이다. 조세는 호당 일석이고 다음은 칠두, 다음은 오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서 불살은 후에 목을 베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인다. 도적질하면, 열배로 갚고, 형벌이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에는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가 있고 노를 불어서 화답한다. 매년 초에 '패수'위에 모여서 왕이 수레위에서  대열을 지켜본다. 일을 마치면, 왕이 옷을 물속에 넣고 좌우로 두부로 나누어, 물에서 돌을 던지면서  떠들썩하게 고함치며 쫓고 쫓기기를 세 번한 후에 그친다. 풍속에 걸터 앉는 것을 좋아하고 깨끗함을 즐기며, 달음질 치는 것을 공격하며, 다리하나를 뻗어 절을 하고, 서있을 때는 두팔을 깍지끼고, 움질일때는 반드시 팔을 흔든다. 성품에 거짓으로 복속함이 많다. 부자가 같은 내에서 목욕을 하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은 음란하여 풍속에 노는 여자들이 많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 좋아해야 하고 그런후에야 결혼을 한다.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고, 재물없이 찾아가는 것이 예이다. 혹 재물을 받는 자는 사람들이 함께 이를 부끄러워 한다.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사를 지내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자가 살아있을때의 옷이나 수레 말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후에 간다. 귀신을 공경하고 음사가 많다.     '개황'초에 빈번히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의 평정이후 '탕'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와 곡식을 준비하여 수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십칠년 임금이 '탕'에서 서를 내려 말하길       짐은 천명을 받들어 기르기를 좋아하고 선비를 이끌었다. 왕을 바다 한쪽에 위임하니 베풀어 조정에 화되어 천지의 도를 쫓는 마음을 얻고자 한다. 왕은 매양 사신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하니 비록 변방이라 칭한다 하더라도 정성에는 다함이 없다. 왕은 이미 남의 신하로, 모름지기 짐의 덕과 한가지로 하여, 이에 '말갈'을 내몰고, '거란'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러 변방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나의 신하가 되는데, 선한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분히 여기니 어찌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깊은가? 태부의 공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은 반드시 아뢰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해 비밀히 재화를 가지고, 소인이 이를 따라 움직여 사사로이 활쏘는 자가 하국으로 숨게 하니 어찌 병기를 고치어 올바르지 못한 뜻을 품고 밖의 소문을 두려워하니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 사자에게 명을 내리어, 왕과 신하를 위무하고, 본래 사람의 뜻을 묻고자 하고, 정치와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공허한 객사에 앉아 엄히 방비하고, 눈과 귀를 막고, 영원히 듣고, 보려 하지 않으니, 가히 악함이 있어 사람들이 아는 것을 막고, 관리를 제도함을 막아 살피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또 수차례 기병을 보내어 변방을 약탈하고, 모략을 꾀하고 간사한 말을 퍼트리며, 마음이 온당치 못하다.       짐은 모든 생명에 적자처럼 대하고, 왕에게 땅과 집을 주고, 관직과 작위를 주어 깊은 은혜로 윤택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분명하게 들어났다. 왕은 오로지 믿음을 품지 못하여 항상 시샘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몰래 보내어 관찰하니, 순수한 신하의 뜻이 이와 같은 것인가? 이는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않아 왕이 죄를 어긴 것이니 한번 용서를 한다. 금일 이후로는 반드시 개혁하여 번신의 절도를 지키고, 조정의 법을 받들며, 스스로 신하가 되어 다른 나라를 거스리지 말면 곧 오래도록 부귀를 누릴 것이니 실로 짐의 마음이니라. 다른 나라들은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지만 널리 하늘아래에 있는 짐의 신하이니, 이제 만약 왕이 물리친다면, 가히 버려 둘수가 없어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이들을 편안히 위무해야 한다. 왕이 맘을 씻고 바꾸어 법에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아니 어찌 좋은 선비를 뽑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옛 제왕들이 법을 일으킬 때 어짐과 믿음을 먼저 하고 선함에는 받드시 상을 주고 악함에는 필히 벌을 주니 사해의 안쪽이 짐의 뜻을 듣고자 한다. 만약 왕이 죄가 없는데도 짐이 홀연 병사를 낸다면 나머지 번국들이 짐을 어찌 여기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의심하지 말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도록 하라.       옛날에 "진숙보"란 자가 대를 이어 "강음"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니 놀라 움직이니 내가 경계하자 내 변방을 노략질 하였다. 짐이 앞서 경계하고 뒤에서 위로하니 십년에 이르러 저들이 "장강"의 바깥임을 믿고 무리들을 모아 교만해져 미쳐 날뛰어 짐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장수들에게 명하여 저들을 베니 가고 오는데 달이 차지 않았고 병사는 수천을 넘지 않았다. 도둑들이 번갈아 달아나고 하루 아침에 깨끗이 쓸어 멀고 가까운곳을 베어 편안히 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제 왕이 한함을 탄식하고 홀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들으니 내쫓고 올려 서는 것은 관리가 맡아 할 일이다. 왕을 죄 준대도 "진"처럼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요, 왕을 상 준대도 "진"처럼 두지는 못할 일이다. 그런데 화를 즐겨하고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다니 이 무슨 까닭인가?  왕이 일컷길 "요수"의 넓음이 "장강"만 한가? "고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진국"만 한가? 짐이 만일 백성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왕의 전날 잘못만 책한다면 한 장군에 명하면 될 것인데 어찌 많은 힘이 필요하겠는가?. 짐이 이렇듯 은근하게 타일러서 왕이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왕은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했다       "탕"이 서를 받고 두려워 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병이 들어 죽었다. 아들 "원"이 이어 섰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어 "원"을 상개부 의동삼사로 삼고, 요동군공을 봉하고, 옷을 하사하였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일을 치하하고, 아울러 왕으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이에 "원'을 왕으로 봉하였다.       다음해 "원'이 "말갈" 만여기병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자, "영주"총관 "위충"이 맞서니 도망하였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사로 명하여 수군과 육군으로 정벌하고 그 작위를 취소하였다. 이때에 흉년이 들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여 여섯군이 밥을 굶고, "임해관"에 이르렀을 때 질병이 돌아 왕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요수"에 이르자, "원"이 역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며, 표를 보내기를 "요동"의 똥같은 신 "원"이라 말하였다. 임금이 이에 병사를 그치고, 처음과 같이 하니, "원"이 해마다 조공하였다.       "양제"가 즉위하자 천하의 전성기다. "고창왕", "돌궐"의 "계인가한"이 함께 대궐에 이르러 공물을 받쳤다. 이에 "원"도 입조하라 하였는데, "원"이 두려워하여 대궐의 예를 어기었다. "대업"칠년 제가 장차 "원"의 죄를 벌하려고 하여, 수레에 올라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서 길을 나누어 나아가자 각각 병사들이 그 성아래에 모였다. "고려"도 병사를 이끌고 방어 하였는데, 전쟁에 불리하자, 성을 둘러싸고 굳게 지키었다. 제가 여러 군에 공격하길 명하고, 장수들에게 말하길 "고려"가 만약 항복하려고 하면, 곧 어루만져 병사를 이끌고 얻으려 하지 말라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적은 거짓 항복을 청하고, 장수들은 표를 받들어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먼저 아뢰었다. 이 보고가 이르르자. 적은 다시 준비하여 수비하였다. 이와 같음을 여러번 했으나, 제가 깨닫지 못하였다. 식량이 다되고, 병사들이 쇠하여 지고, 보급이 이어지지 못하며, 군사들이 많이 손상되어, 반밖에 안 남았다. 이렇게 하여 요수의 서쪽인 "무려라"만 빼앗고, "요동군" "통영진"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구년 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여 군사들에게 명하니 마땅히 따랗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진 듯 했다. "양현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제가 크게 두려워 하여 그날 여섯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가 이 사실을 알고, 모든 군대로 뒤 쫓으니, 제의 군대가 많이 패하였다. 십년 또 병사를 일으켰으나 도적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고 길이 끊어져 군사들을 많이 잃어 버렸다. "요수"에 이르렀는데 "고려" 또한 곤궁하여,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며, 죄인 "곡사정"을 보내면서 죄를 속죄하였다. 제가 이를 허락하여, "회원진"에서 그 항복을 받았다. 인하여 포로를 돌려 보내었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정에 고하니 이에 잡아두어 머물게 하고, "원"을 입조하라 불렀지만, "원"은 끝내 가지 않았다. 제께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엄히 다시 일어날 것을 꾀하자 천하에 큰 난이 일어가 다시 가지 못하였다.       唐書       고려(高麗)   고려는 부여로부터 나온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있으나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서 경사의 동쪽 5천 1백 리에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가 3천 1백 리요 남북이 2천 리이다.   그 관직에는 큰 것을 대대로1)(大對盧)라 부르니 1품에 비견되며 나라의 일을 총괄하여 주재하는데 3년에 한 차례씩 교체함에 만약 그 직위에 적합한 자면 햇수의 제한에 거리끼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는 혹은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서로를 공격하여 이기는 자가 된다. 왕은 단지 궁문을 닫고 스스로 호위할 뿐 제어하지 못한다.   다음을 태대형(太大兄)이라고 하는데 정 2품에 비견된다. 대로(對盧) 이하의 관직은 모두 12등급이다. 지방에는 주(州)와 현(縣)에 60남짓의 성을 둔다. 큰 성에는 녹살( 薩) 한 명을 두니 도독(都督)에 비견된다. 모든 성에는 도사(道使)를 두니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그 아래에는 각기 요좌(僚佐)가 있어서 관청의 일을 나누어 관장한다. 의상과 복식은 단지 왕만이 다섯 가지의 채색을 사용하며 흰 비단으로 머리관을 만들고 흰 가죽으로 작은 허리띠를 두르는데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관직의 지위가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관을 만들고 그에 버금가는 자는 붉은 비단으로 하고는 새의 깃털 두 개를 꽂고 더불어 금, 은으로 장식을 하며, 적삼에 대통소매를 하고 바지는 입구가 크며, 무두질한 흰 가죽으로 띠를 하고 무두질한 누런 가죽으로 신발 만든다. 나라 사람들은 거친 털옷을 입고 고깔(弁)을 쓰며 부인들은 머리에 머릿수건(巾 )을 쓴다.   바둑과 투호의 놀이를 좋아하며 발로 공을 차는 유희에 능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변두( 豆)와 보궤(  ) 및 준조( 俎)와 뇌세( 洗) 등을 사용하니 자못 기자(箕子)가 후세에 남겨준 풍습이 남아 있다.       그들이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모두 띠 풀로 집의 지붕을 이는데 단지 절과 신의 사당 및 왕궁과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한다. 민간에는 빈곤하여 초췌한 자가 많으며 겨울이면 모두 긴 아궁이를 만들고 아래로 숯불을 지펴서 따뜻하게 한다. 밭에 식물을 심고 누에를 치는 것 등은 대략 중국과 같다. 그들의 법에는 모반이나 반역을 한 자가 있으면 곧 군중을 모아 횃불을 가지고 다투어 불사른 뒤 온몸이 모두 불에 데어 살이 문드러진 연후에 머리를 베고 집안은 모두 관가에서 몰수하면 성을 지키다가 적에게 항복을 하거나 싸움에 임해서 패하여 달아나거나 또는 살인이나 강도를 한 자는 참수하며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그를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을 시행하는데 있어 엄격하게 하기에 범하는 자가 적으며 또한 길에는 떨어져 있는 물건도 줍지 않는다.   그 풍속에 함부로 지은 사당이 많으니 영성(靈星)의 신과 해의 신 그리고 가한신(可汗神)과 기자신(箕子神) 등을 섬긴다. 도읍 동쪽에 신수(神隧)라 이름하는 큰 동굴이 있는데 10월이면 언제나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습속에 서적을 좋아하는데 누추한 문에 땔나무를 해서 사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큰 거리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이를 일컬어 경당( 堂)이라 하여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에 밤낮으로 여기에서 글을 읽고 활을 익히게 한다. 서책으로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손성(孫盛)의 진춘추(晉春秋)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등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것을 매우 좋아하여 중히 여긴다.       그들의 왕 고건무(高建武)는 바로 앞선 왕 고원(高元)의 배다른 아우이다. 무덕(武德618-626) 2년에 사신을 보내 들어와 예방하였다.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수(隋) 말기에 사졸들이 그 땅에 많이 묻힌 것을 생각하여 5년에 고건무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은 보배로운 명을 삼가 받들어 임금으로 온 세상에 임하였으니 천지인(天地人)의 신령에게 공경으로 따르며 만국을 평안히 할 것이오. 하늘 아래로 두루 사랑을 고르게 하여 어루만져 기르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에는 모두 잘 다르셔져 편안한 것이요. 왕은 이미 요수(遼水)의 왼편을 도맡아 다스리고 대대로 번복의 땅에 거처하며 정삭(正朔)을 사모하여 받들고 멀리서 조공의 직분을 좇아왔소. 그런 까닭에 사자를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펼치니 짐이 매우 기쁘구료. 바야흐로 이제 천하가 편안히 화락하고 온 세상이 잘 다르셔 지니 패옥과 비단이 한껏 왕래를 하고 도로는 막히는 곳이 없소. 이제 한창 화목함을 펼쳐 초빙의 호의를 영원히 도탑게 하고 각자의 강역을 보존하니 어찌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겠소? 단지 수나라 말년에 군사가 이어지고 환난이 얽어졌으니 전투로 공방을 치르던 곳에는 각자 자신의 백성들을 잃게 되었었소 마침내 골육들이 어그러져 멀어지고 가족들이 나뉘어 갈라지니 해가 많이 지났다지만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소. 이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왕래하여 간격이나 차이를 둘 이유가 없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고려인 등은 이미 영을 내려 찾아 모아 놓았기에 얼마지 않아 곧 보낼 것이니, 그곳에 있는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이 놓아 돌려보내 줌으로써 어루만져 기르는 방안을 힘써 다해 인의로써 용서해 주는 도리를 함께 널리 펴야 할 것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고건무는 중화 사람들을 모두 수색하여 모으고 예의로 인도하여 보내니 속속 이르는   자가 1만의 숫자가 되므로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沈淑安)을 파견하여 가서 고건무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天尊像)과 도사(道士)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노자(老子)를 강의하니 그 왕 및 도인과 속인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명분과 실리 사이의 이치는 모름지기 서로 적합해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칭하였지만 끝내는 양제에게 저항하였는데 이 또한 어찌 신하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짐이 만물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하는 것은 교만하거나 귀하게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에 자리하며 힘써 베풂으로써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그들로 하여금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잘난 체해야 할 것인가, 곧 조서로서 짐의 이 마음을 서술하도록 하라] 하니 시중 배구(裴矩)와 중서시랑 온언박(溫彦博)이 이르기를 [요동의 땅은 주(周)나라 때는 기자(箕子)의 나라였으며 한나라 때는 현도군(玄 郡)일 뿐입니다. 위(魏)나라와 진(晉)나라 이전에는 피봉된 강역(彊域) 안쪽으로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라고 칭하지 않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이 이적(夷狄)에 대해서는 마치 늘어선 별들에 대한 태양과도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실 이유가 없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은 번신의 강역과 같아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만 두었다.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건무를 송사하여 이르기를 길을 폐쇄하여 조정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서로 더불어 틈이 있으면 누차 서로를 침략하였다. 조서를 내려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가 가서 그들을 화해시켰다. 건무가 표를 올리고 사죄하며 신라와 더불어 사신을 마주하고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정관(貞觀677-649) 2년에 돌궐의 힐리가한( 利可汗)을 격파하니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하례하였으며 아울러 피봉받은 강역의 지도를 올렸다. 5년에 조서를 내려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매장하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건무는 그 나라가 정벌당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의 부여성(夫餘城)으로부터 서남의 바다에 이르니 1천여 리가 되었다. 14년에 그들의 태자 환권(桓權)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대접하고 노고를 위로함에 있어 매우 지극하였다.       16년 서부대인 개소문(蓋蘇文)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을 범하려 하자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더불어 논의하여 그를 주살하고자 하였다. 일이 누설되자 소문이 이에 통솔하고 있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하여 사열을 펼친다고 말하고 아울러 성의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놓으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와서 사찰하였는데 개소문이 병사들을 부려 모두 살해하지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창고를 불사르며 왕궁으로 달려들어가 건무를 살해하고 건무의 아우인 대양(大陽)의 아들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자리에 올라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은 것이니 그로부터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개소문의 성씨는 천씨(泉氏)인데 수염이 많은 얼굴에 매우 장대하고 형체가 걸출하며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기에 좌우에서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그의 부하에게 땅에 부복하게 하고는 그를 밟고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길을 나설 때는 먼저 호위대를 풀어놓고 길을 인도하는 자가 길게 호령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데 백성들은 두려워 피하며 모두 스스로 구덩이나 골짜기로 뛰어든다.       태종이 고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식을 거행하고 사신에게 부절을 주어 조문하게 하였다. 17년에 자리를 이은 왕인 장(藏)을 봉하여 요동군왕고려왕으로 삼았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相里玄奬)을 파견하여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말로 타일러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개소문이 상리현장에게 말하기를 [고려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진 지 이미 오래오. 예전 수(隋)나라 왕실에서 침략해 올 때 신라가 기회를 타고 고려 5백 리의 땅을 약탈하고 그 성읍들을 신라가 모두 차지하고 있소. 스스로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싸움은 아마도 그칠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그러자 상리현장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인데 어찌 뒤쫓아 논할 것인가?] 하였으나 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위하고 있던 신하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막리지는 그의 주인을 해치고 대신들을 모두 살해하였으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구덩이에 파묻고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뿐이니 백성들은 더욱이 자칫하면 번번이 죽임을 당하기에 원한과 고통을 마음에 담아두고 길거리에서는 눈짓만 하고 있다. 무릇 군사를 출정시켜 백성을 위로하고 반역자를 문죄하여 토벌하면 모름지기 그 명분이 있을 것이요,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였기에 패퇴시키기는 매우 쉬울 것이다.] 하였다.       19년 명을 내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總官)을 삼아 장군 상하를 거느리고 강(江), 회(淮), 영(嶺), 협( ) 등지의 굳센 병사 4만명과 전선 5백 척을 통솔하여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특진영국공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 行軍大總官)을 삼고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관으로 삼아 장군 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6만 명을 통솔하여 요동(遼東)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양군이 세력을 합하여 태종이 친히 거느린 천자의 군대와 모이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이적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 나아가서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포로 2만명을 노획하였으며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의 남녀 8천여 명을 노획하였다. 이날 이적은 요동성으로 군대를 나아가게 하였다. 제께서 요택(遼澤)에 머무르며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지난날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를 건넜으나 그때는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하던 사졸들은 해골이 된 채 서로를 바라보며 드넓은 들녘에 두루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애석하고 탄식할 일이다. 백골을 덮어 주는 도의는 참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니 명령으로 모두 거두어들여 매장하도록 하라] 하였다.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와서 요동을 도왔으나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되받아쳐서 크게 격파하고 1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제께서 요수를 건넌 뒤 조서를 내려 교량을 치움으로써 사졸들의 의지를 굳게 하였다. 제께서 요동성(遼東城)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매우는 것을 보고 제께서 그 중 제일 무거운 것을 나누어 친히 말 위에 실었다. 시종하던 관리들이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투어 흙을 지고 성 아래로 옮겼다. 이때 이적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우리에게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투석수레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전투누각을 만들어 그것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게 하였다. 이적이 수레를 열 지어 놓고 돌을 쏘아 그 성을 공격하니 맞는 곳은 모두 무너졌다. 또 충차(衝車)를 밀어 그 누각에 부딪치니 기울어져 넘어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께서 친히 기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적과 더불어 회맹하여 그 성을 에워쌌다. 급작스레 남   풍이 매우 맹렬하기에 그 서남쪽의 누각에 불을 놓을 것을 명하니 연이어 성 가운데로 연소되어 가옥들이 모두 타버렸다. 전사들이 성에 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지고 불타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날랜 군사 1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에 제께서 정주로부터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 하나씩 설치를 명하여 요동성까지 이어지게 하고 태자와 약조하기를 요동을 극복하면 봉화불을 올릴 것이라 하였다. 이날 제께서 봉화를 올릴 것을 명하니 그 불길이 전달되어 변방의 요새로 들어갔다.     군대를 백애성(白崖城-백암성)에 자리하고 공격을 명하니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의 화살에 맞았기에 제께서 친히 피를 빨아 주었더니 장군과 사졸들이 이를 듣고 감동하여 격려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에 의자하고 물에 임하여 사면이 험난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이적이 충차로 부딪치고 돌을 날리며 화살을 성 가운데로 빗발같이 집중시켜 쏘았다. 6월에 제께서 그 서북쪽에 이르자 성주 손벌음이 몰래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이르기를 [신이 이미 항복을 원하였으나 그 중에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하므로 조서로서 기치(旗幟)를 하사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할 것이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 하였다. 손벌음이 성 위에 기치(旗幟)를 세우니 고려는 당의 군사가 성에 오른 것이라 여기고 이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이 함락되자 손벌음이 항복을 구걸하였다가 중도에 후회하여서 제께서 그가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노여워하여 성 안의 사람과 물건들을 전사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허락하였었다. 항복을 받기에 이르자 이적이 제에게 여쭙기를 [전사들이 분발하여 앞을 다투며 화살과 돌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대문일 뿐입니다. 이제 성을 거의 빼앗았는데 어찌하여 다시 그들의 항복을 허락하여 까닭 없이 장군과 사졸의 마음들 저버리십니까?] 하였으니 제께서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병사를 풀어놓아 살육하게 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포로로 삼게 하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곳간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면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항복을 받아들이니 남녀 1만 명과 날랜 병사 2천 4백 명을 노획하고 그 성에 암주를 설치하였으며 손벌음을 암주자사에 제수하였다. 우리의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그들을 몽땅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군대를 따르며 스스로 공적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그 누가 너희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마는 너희들의 가족들은 모두 가시성(加尸城)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저들은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파산시키면서 한 사람의 힘이 사용되기 바라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하며 모두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천자의 수레가 나아가서 안시성(安市城)의 북쪽에 머무르며 영을 펼쳐놓고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였다. 고려의 북부녹살(北部 薩) 고연수와 남부누살(南部 薩) 고혜정이 고려와 말갈의 무리 15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도왔다. 적중에 대로(對盧)가 있어 나이가 많고 일에 익숙하였는데 고연수에게 이르기를 [내 듣기로 중국이 크게 어지럽자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다고 합니다. 진왕(秦王)은 뛰어난 무예로 향하는 곳에는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는 항복을 청하고 서쪽 오랑캐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지금은 국력을 기울여 이곳에 도착하였기에 용맹한 장수와 날랜 병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는 가히 막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계략이 될 만한 것은 만약 군사를 조아려 싸우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 버티며 날래고 굳센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로를 끊으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군량이 반드시 다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고자 하여도 길이 없을 것인즉 이는 싸우지 않고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바로 나아갔다. 태종이 밤중에 모든 장수를 불러 몸소 친히 지휘하였다. 이적(李勣)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우진달(牛進達) 등 정병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기습군이 되어 산의 북쪽으로부터 좁은 계곡에서 나와서 그들의 후미를 들이치게 하였으며 태종은 직접 보병과 기병 4천을 데리고 북과 뿔피리를 숨기고 깃발과 표지를 가로누이고서 적 병영 북쪽의 높은 봉우리 위로 향하고는 모든 군대에 명령하여 북과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군사를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해당관리에게 명을 내려 조당(朝堂)의 곁에 항복 받을 막사를 차리게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午時)에 여기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다음날 고연수가 단지 이적(李勣)의 군사만을 보고 더불어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무기(無忌)의 군대에서 먼지가 이는 것을 머리서 바라보고 영을 내려 북과 뿔피리를 함께 불게 하며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하며 창을 지닌 보병 1만 명으로 그들을 공격하니 고연수의 무리가 패하였다. 무기가 군사를 풀어놓아 그들의 후미로 타고 오르게 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다다르니 적들이 크게 무너졌으며 1만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고연수 등이 그 나머지 도적들을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리하여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애워싸고는 동쪽 하천의 교량을 치워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기고 서서히 나아가며 적의 진영을 바라보고는 시위하고 있던 신하에게 이르기를 [고려는 국력을 기울여 왔기에 존망이 달여있는데 한번 패하였으니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 절을 올리고 하늘에 감사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 등이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니 태종은 원문(轅門)으로 인도하여 들였다. 연수 등이 무릎으로 기며 앞으로 나와 깊이 절하고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녹살( 薩) 이하 추장 3천5백 명을 가려내어 군대의 벼슬을 수여하고 내지(內地)로 옮겼다. 말갈 천3백 명은 거두어들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나머지 무리들은 놓아 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3만 필과 소 5만 두 및 명광갑(明光甲) 5천 벌을 노획하였으며 다른 장비들도 그만큼은 되었다. 고려국이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더니 후황성(后黃城)과 은성(殷盛) 등은 모두 스스로 발을 빼고 도망하여 수백 리에 사람과 인가의 기척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자가 행차하였던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 山)이라 하고 장작(將作)에게 영을 내려 파진도(波陣圖)를 작성하게 하였으며 중   서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돌에 새겨 그 공로를 기록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鴻 卿)을 그리고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장량(張亮)이 또 고려와 더불어 건안성(建安城) 아래에서 다시 싸워 모두 격파하니 길게 늘어서서 에워싸고 공격하게 되었다.       8월에 진영을 안시성(安市城) 동쪽으로 옮기자 이적이 마침내 안시성을 공격하며 고연수 등 항복한 무리들의 진영을 그 성 아래로 끼워 놓고 그들을 불러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견고하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며 매번 태종의 지휘 깃발이 보이면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저항하였다. 제께서 매우 노여워하자 이적이 이르기를 [적을 격파하는 날 남자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합니다.] 하니 성 안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영을 내려 흙산을 쌓게 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를 공격하게 하였더니 고려 역시 성가퀴(치-雉)와 성벽의 담을 더욱 올려 저항하였다. 이적이 그들의 서쪽을 공격하여 발석거와 충차로 그들의 망루와 성가퀴(雉)를 허물어 버리자 성 안에서 담이 붕괴됨에 따라 즉각 나무를 세워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에 흙을 싸서 땅을 만들고 이를 언덕에 쌓아 올려 산을 이루고는 그 중간에 다섯 길을 내어 나무를 대로 흙으로 그 위를 덮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점차 성에 가까이 다다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傅伏愛)를 보내 군대의 병력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하며 흙산을 점차 높이 올려 그 성을 밀치니 성이 붕괴되었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통솔하던 곳을 떠나 있었더니 고려인 1백 명이 스스로 성을 무너뜨리고 싸웠으며 마침내 흙산을 점거하여 구덩이를 끊고 불을 쌓아 방패를 둘러 스스로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고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두루 돌려보게 하였다. 모든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사흘이 되도록 극복할 수 없었다.       태종이 요동의 곳간에 쌓여 있는 것이 얼마 없고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얼어죽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군대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치자 성 안에서 모두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가로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손으로 절을 하며 받들어 배웅하였다. 태종이 그들의 견고한 수비를 가상히 여겨 명주 1백 필을 하사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는 충절을 격려하였다. 처음에 요동성을 공격하여 함몰시킨 뒤 그 성이 천자의 군대에 항거한 까닭에 응당 노비로 몰수된 자가 1만 4천 명이었는데 모두 앞서 모아 유주(幽州)로 보냈다가 장차 장수와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였다. 태종은 그들이 부모와 처자가 하루 아침에 흩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 벼슬아치에게 영을 내려 그들의 값어치에 준하여 베와 비단으로 속 값을 치르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3일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스스로 항복한 뒤 항상 탄식을 거듭하다 얼마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들의 사신에게 일러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군주에게 이르라. 미색이라는 것은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너희가 바친 것은 실로 아름답고 곱다. 그러나 본국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온 것을 가련하게 여기기에 그들을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그들의 친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미색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상처 입게 하는 것이기에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며 모두 돌려보냈다.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파견하여 청구도로 가서 그들을 정벌하니 설만철은 바다를 건너 압록수로 들어가 진격하여 박작성(泊灼城)을 격파하고 노획한 포로가 매우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하여 큰 배를 만들게 하고 섬주자사 손복가(孫伏伽)를 보내 용감한 사졸들을 불러 모집하게 하였으며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군량과 장비를 운송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는 장차 크게 거사하여 이로서 고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제께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이 제위를 잇고 또 병부상서 임아상(任雅相)과 좌 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및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속속 그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건봉(乾封-666~668)원년에 고장(高藏)이 그의 아들을 들여보내 예방하고 태산 아래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해 개소문(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남생(男生)이 대를 이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그 아우 남건(男建) 및 남산(男産)과 화목하지 못하고 각기 붕당을 수립하여 서로 공격하였다. 남생이 둘째 아우에 의해 축출되자 국내성(國內城)으로 달아나 자리잡고 죽음으로 지켰으며 그의 아들 헌성(獻誠)은 궁궐로 찾아들어 구원하여 줄 것을 애원하였다. 조서를 내려 좌 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남생이 몸을 탈출해 도망하니 조서를 내려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에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 영국공 이적에게 명하여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비장 곽대봉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2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고 신성에 이르러 모든 장수에게 이르기를 [신성은 고려의 서쪽 경계에 진영을 둔 성으로 가장 요해지이니 만약 먼저 도모하지 못한다면 나머지 성 역시 쉽게 항복시킬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신성의 서남쪽에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쌓아 놓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니 성 안에서는 곤궁하고 급박하여 몇 차례 항복하는 자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향하는 곳마다 극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太大兄)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데리고 흰 깃발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며 또한 들어가 알현할 것을 청하니 이적이 예의를 갖추고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남건은 여전히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총장(總長-668~670)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의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번번히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크게 패하였다. 남건 휘하의 착병총관승 신성(信誠)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군중을 찾아들고 성   문을 열어 안에서 호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문을 열게 하여 이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성에 올라 북을 치고 떠들썩하게 하며 성문의 누각을 불사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남건이 곤궁하고 급박해지자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쳐서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포로로 하였다. 12월에 경사에 이르러 함원궁(含元宮)에 포로를 바치고 승리를 알리는 의식을 치렀다. 조서를 내려 고장은 그 정치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고 남산(男産)을 선봉으로 섰기에 사재소경에 제수하고 남건(男建)은 검주(黔州)에 유배시켰으며 남생(男生)은 길을 인도한 공이 있기에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에 봉하였으며 특진 등의 관직은 예전처럼 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은 예전에 다섯 부로 나뉘어져 성이 1백76개, 호구가 69만 7천이었으니 이에 그 땅을 나누어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州) 그리고 1백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였다. 우두머리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고 중화인과 더불어 백성들을 가지런히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파견하여 군사를 총괄하고 진정시키게 하였으나 그 후에 도망하여 흩어지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의봉(儀鳳-678~679)연간에 고종이 고장(高藏)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에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거처하게 하며 본지의 오랑캐들을 진압하여 군주가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자 몰래 말갈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반역을 꾀하였다. 일이 드러나자 불러 소환하고 공주(恐州)에 유배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사람들을 나누어 옮겨 하남(河南)과 농우( 右) 등 여러 주로 흩어지게 하고 빈약한 자들은 안동성(安東城) 부근에 머무르게 하였다. 영순(永淳-682~683)초 고장이 죽자 위위경에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운구하여 경사에 이르게 한 뒤 힐리( 利)의 묘 좌측으로 매장지를 하사하고 겸하여 비석을 세워 주었다. 수공(垂拱-685~688)2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성력(聖曆-698~700)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옛 가구들을 통솔하여 다스리도록 위임하였지만 결국에는 실행되지 않았다. 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德武)를 제수하여 안동도독으로 삼고 본지의 오랑캐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옛 가구로서 안동에 있는 것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나뉘어져 돌궐과 말갈 등에 의지하여 머무르니 고씨 임금은 마침내 단절되었다.       의봉(儀鳳-676~679)초에 남생(男生)이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에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獻誠)은 우위대장군 겸 영우림위상하에 제수하였다. 천수(天授-690~692)연간에 즉천(則天)이 일찍이 안 대궐로부터 금은 보물을 내어 재상 및 남북 관청의 문무관으로 하여금 은밀히 활을 잘 쏘는자 다섯 명을 가려 뽑게 하여 함께 내기를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제일의 자리를 사양하자 헌성이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薛土摩支)에게 사양하였으며 설토마지가 또 헌성에게 사양하니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에 능한 자 다섯 명을 가려뽑을 것을 명하셨는데 간택되는 자가 대부분 한나라의 관리가 아닙니다. 신은 이후로부터 한나라의 관리가 활 쏘는 기술에 뛰어나다는 명성이 없을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데 명궁을 가려뽑는 일을 중도에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즉천이 가상히 여기고 그의 말을 따랐다. 이때 혹독한 내준신이 항상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하였는데 헌성이 거절하고 답하지 않으니 마침내 준신이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거짓을 꾸며 목을 옭아 죽였다. 즉천이 후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우우림우대장군에 추증하고 예절로서 장례를 다시 치러 주었다.      
34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댓글:  조회:1616  추천:0  2021-05-21
되는 집안과 안되는 집안. 01.되는 집안은 웃음 꽃이 가득하고          안 되는 집안은 근심걱정이 가득하다. 02.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이 주식이고    안되는 집안은 불평과 원망이 주식이다.   03.되는 집안은 돌똘뭉쳐 하나가 되고       안되는 집안은 뿔뿔이 흩어져 콩가루 된다.   04.되는 집안은 어른을 공경하고             안되는 집안은 자식을 공경한다.   05.되는 집안은 가정을 위하고 안되는 집안은 가옥을 위한다.   06.되는 집안은 온기가 가득하고 안되는 집안은 냉기가 가득하다.   07.되는 집안은 잘 될 이유를 말하고 안 되는 집안은 안될 이유만 말한다.   08.되는 집안은 나눔의 즐거움을 알고 안 되는 집안은 돈세는 즐거움만 안다.   09.되는 집안은 마음을 뜯어고치고 안되는 집안은 얼굴만 뜯어고친다.   10.되는 집안은 자신을 위해 관리비를 쓰고 안되는 집안은 아파트 관리비만 사용한다.   11.되는 집안은 칭찬과 격려에 침이 마르고 안되는 집안은 원망과 비난에 밤을 새운다.   12.되는 집안은 나은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지만 안 되는 집안 그 날이 그 날이다.   13.되는 집안은 ‘성실’이 가훈이고 안되는 집안은 ‘실성’이 가훈이다.   14.되는 집안은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안 되는 집안은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15.되는 집안은 대상을 가려서 싸우지만 안 되는 집안은 아무하고나 부딛힌다.   16.되는 집안은 ‘고마워’가 통용어이고 안되는 집안은 ‘이게 뭐야?’가 상용어다.   17.되는 집안은 할말 안할 말 가려하고 안 되는 집안은 싫어하는 말만 골라서한다.   18.되는 집안은 사람이 들끓고 안되는 집안은 해충만 들끓는다.   19.되는 집안은 ‘잘해보자’고 말하고 안되는 집안은 ‘해보나마나 뻔하다.’고 말한다.   20.되는 집안은 자신을 바꾸고 안 되는 집안은 상대를 바꾼다.   21.되는 집안은 계획세워 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대충대충 뒤죽박죽 살아간다.   22.되는 집안은 하루하루를 금쪽같이 사용하고 안되는 집안은 휴지처럼 낭비한다.   23.되는 집안은 사랑과 의욕이 불타고 안 되는 집안은 증오와 원망이 불탄다.   24.되는 집안은 좋은 글 좋은 말이 보물이고 안되는 집안은 연속극이 보물이다.   25.되는 집안은 ‘위하여’살아가고 안 되는 집안은 건배할 때만 ‘위하여!’다. 26.되는 집안은 좋은 친구가 많고 안되는 집안은 나쁜 친구가 많다. 27.되는 집안은 상대의 말에 귀기울이고 안되는 집안은 혼자 열변을 토한다. 28.되는 집안은 노래소리 드높고 안되는 집안은 고함소리 드높다. 29.되는 집안은 ‘나부터 잘해야지’하는데 안 되는 집안은 ‘너나 잘하라’한다. 30.되는 집안은 가슴을 맞대고 안 되는 집안은 등을 맞댄다 31.되는 집안은 보람으로 일하고 안되는 집안은 죽지 못해 일한다. 32.되는 집안은 팥으로 메주쑨대도 믿어주고 안되는 집안은 콩으로 쑨대도 안믿는다.   33.되는 집안은 절망도 희망이고 안되는 집안은 희망도 절망이다.   34.되는 집안은 좋은 방법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안 되는 집안은 말만 무성하다.   35.되는 집안은 약속이 생명이고 안되는 집안은 부도가 생명이다.   36.되는 집안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안 되는 집안은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   37.되는 집안은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고 안되는 집안은 외면하고 살아간다.   38.되는 집안은 남이 잘할때 박수치고 안되는 집안은 남이 못될때 통쾌한 웃음을 날린다.   39.되는 집안은 친절이 상표이고 안 되는 집안은 교만이 상표다.   40.되는 집안은 문제를 개선하여 향상하고 안되는 집안은 문제를 덮어둬 속으로 썩게된다.
33    고구려어 댓글:  조회:4214  추천:0  2021-03-29
  뜻 고구려어 돌궐어족 몽골어 고대 일본어 현대 일본어 백제어 신라어 중세 국어 현대 한국어 퉁구스어 여진어 만주어 예빈키어 君主 kʌi 가이/ kai개(皆) kai-sɐ가이사 개차(皆次) qaγan(可汗) kagan kaγan(可汗) ki1mi1("king, emperor, monarch") kimi("you") ka(瑕) kisi(吉支) nirimɯ(君) kan(干) kɯm(今) kahan kɯi긔(王) nim kɯm nim kɯm *** *** han *** 善射 jumong,chumo 주몽(朱蒙,鄒牟) *** jəmə("noted bow"), Jobe-Mergen tomo("shooter's tool") tomo("friend, follower") tama("excellent,important,soul") tuma("tip") tomoe(emblem of tomo) tomo- tama tsume("nail,claw") *** *** *** *** *** *** jolin-manga , julil-muəl(卓琳莽阿) *** 金 so(蘇) 소 sol 솔,소시(召尸, silver) *** *** *** *** so (所) so 素 ("gold") *** sö("metal") söh 쇳 *** *** sele("iron") šun("sun") sigūn("sun") 鉛 nəi- 내  납, miuət/namer (乃勿) 내물,나물 *** *** namari namari *** *** *namɔr nap/납 *** *** *** *** 復舊土 ta mul 타물,다물 (多勿) *** *** tabi (度:time; whenever) tabi/tambi tamlo *** *** taɕi ("again") tø- ("re-") tam *** *** tabu-(to divide,to tear) *** 北(背後) je제 (提) jwat절(絶) 椽那部,提那部,絶奴部,後部 arka("back") hoina (布里亚特语huainə) utara umara tʃe("back") se("back,height") *** *** tuih tui ("back, behind") xama *** amargi amasi("back") *** 南(前方) kuan관(灌) (灌奴部) kuzey,Ön(front) *** kaɸo("face") kan-(予:"pre-") kao("look, face") kana-(叶:to serve,to get one's wish) 久知下(kujiha) *** *** kət("surface, look") *** *** julergi *** 東(左) źwən전,sun순 (順), (順奴部)순노부 doğu,sol(left) źeü , źegün a-dʒuma/a-duma("east") azuma 得安(dɯkan) *** *** ön("left") sae("east") źun *** dergi jun jəgin("left") 西(右) yən연 (涓), 연노부(涓奴部) batı ürüne , barun yo-(善:"good") ya-(否:"no,foul") yo-/i-("good,correct,suitable,agreeable") iya/ya-(disagreeable) *** *** *** orɯn("right") parɯn("right") hanɯi(west) xangid *** wargi anŋū(right) 石 *** taš cilaɣu(n) (古蒙古语) culuu (喀尔喀蒙古) šuluu(n) (布里亚特语) isi ishi turak(珍惡) *** tōlh tōl *** *** tahan("steppingstones") *** 巖,峴,岑 pa파-・ιəi,pua-・ιəi*pàI,pa'i /pua-斤ei,*paxe 파의, 파희,바위 巴衣,波衣,波兮 *** *** iɸa / iɸaɸo (probably unrelated) iwao ("great rock, bedrock") *** *** pahoy(巖)巴衣,바회 pawi pax(石・崖) (尼夫赫语) *** wehe *** 土地 no 노  내 内/奴~弩/惱 nori 노리 奴閭 *** ńurū nu/no(野"land") no no nu¨~nu¨ri/nε (世) *** nuri na (土地) na na(土地),noro(-n) *** 國 (nua) > na / no 나라 내,나,노,뇌,內,那,奴,惱 ra라(羅) ili ulus(* kolci/ko-ts‘ii (忽次/古次/串) *** 훌츠qurc(喀尔喀蒙古)("skewer, spit" 串) kutu~kuti/kuti < *kutui kuchi *** *** koj 곶 ("skewer, spit; promontory" 串) kulrε (Jeju dialect) kul (South Jeolla dialect) *** *** *** *** 進入 ・ιi/*i (伊) *** ire- 来 ir- 进入 ir- *** *** ip(口)/ip(門戸) ir-(to arrive; to come) ip i-(入) *** ibe-("to get foward") *** 新 ʃιəu/*sü 首수 *** *** zu("new, present, developing,a gleam") suga-("fresh") suga-suga-s- *** say say (새) sɛ *** iche ice *** 牛 ʃιəu/*sü 首수,소 *** *** usi ushi *** *** ʃyo/쇼 so *** *** eje("castrated cow") *** 豬 o-sie/o-s^i¨ʌŋ 烏斯/烏生오스,오샹 *doŋuz > domuz *** usi ("ox; cattle") wi ("swine") *** *tɕo-nʲi (猪耳) *** totʰ 돝 twɛːji, toyaji(dialect), tochi(dialect) *** *** ulgiyan("pig") ulha("domestic animal") *** 鹿 kosya고스야,구스야 (古斯也) *** *** kuzika shika *** *** *** korani 고라니 ("Manchurian elk") kōrɛŋi, korɛi (Gyeongsang dialect) *** *** kandahan ("a kind of deer") *** 馬 *** *** mori~muri uma~muma uma *** *** mʌl/(馬) mal mori (Nanai) *** morin *** 斧 ・ιo-sie , nərə-si (於斯) *** *** wono2 ono *** *** *odzgɔy (烏子蓋) ("ax") nɔlh 날ㅎ ("blade") nal (칼)날 ("blade") nas ("sickle; scythe") tōkki ("ax") *** *** anjikū ("hatchet") *** 廣 nərə-si, ə-si, (於斯) *** osy/esy 阿斯(寬大:gererous, tolerant) nalai naras-u("roll,to level off") os-u("transcend, surpass") e-si("right,wide,noble,enough") naras-u("to level off") os-u("to transcend, to press, to push") *** *** 어위 (< *어쉬) nəlbɯn 넓은 nəlb nərɯn *** očo 我撮(寬) ončo(廣:wast) *** 翼 nərəgi əji(於支) *älig > el ("hand") *** tadamgi(arm) atʃi(foot,walk,rain,money) ashi *** *** nʌlgɛ narɛ, nalgɛ 날개 *** *** asχa *** 横 ・ιo-sie/*es (於斯) *** *** yo2ko2(横)/yo2k-(避) yoko/yokeru *** *** əs/엇 əs *** *** *** *** 谷 tan/tuən/t‘ən (旦,頓,呑) *** *** tani tani *** *** tʌn~tuʌn("village", 村) *** *** *** *** *** 榖 niəŋ-biuʌt 仍伐녕벌 *** *** ina-ɸo("ear of rice") mi2("fruit, seed, grain") nebar-("stickiness of rice") inaho nebar- *** *** pyə("rice plant; unhulled rice") nuy("grains of unhulled rice amongst hulled rice") *** *** *** *** 粗 kuət-・ιəi (骨衣)골희 굴희 *** *** kata-("tough,firm") katai("tough,stiff") *** ka¨cʰɔ¨l kəcʰɯl- (荒) kəchil- kud- *** *** kata-("to become hard, to become rough") *** 耕 ka-ʃιi가시 (加尸) 갈시 kerci-("to cut, to dig trenches") *** kar-("to plow") kar- *** *** karai(木[木+欠]・鍬, kal-(plow) kal(刀) kal- gerbe-("break, snap") (Nanai) *** halhan(犂先)/halhan~halgan(犂[金+華]) gerbe-("break, snap") 邊 ka-(・a) (加阿)가.아 kera *** ha("edge, blade")kari("edge") ha kari *** *** kʌs kā *** *** kaja-("to cut") huwesi-("cutter, small blade") *** 圓 toŋ-pιuəi (冬非)동비,  *** *** tubura(丸)/maro(丸:"round") tsubura *** *** tuŋgɯl-(圓) tuŋgɯl-(圓} *** *** torho-("to roll,to circle") *** 丸 anʃi, 안시anʒip,ɣwando 안십,완도(安市,安十,丸都) *** ənduhə (达斡尔语) azi("reason,value") aji(taste) *** *** *** al 알 (x)elū- *** umhan muheren elū 足 tor 돌(廻) *** *** tar-(足る:"enough,last,to reach") tarir- *** *** tʌri tari 다리 *** *** juru(numeral for something pair up) *** 毛 tʰjʌr 탈,털(鐵) *** *** *** *** *** *** tʌri tʰʌr 털 *** *** *** *** 重 biar/bιεt (別) 별 *** *** ɸe *** *** *** pʌl *** *** *** fe("ex-, past, former") *** 松 pιu-sie부세,부스 부소/pιu-so (扶蘇/扶蘇) *** *** matu matsu bu(扶,負) so(蘇) *** sol(松)/pos(樺) sol,sonamu,so *** *** bahiya("pine cone") *** 深 bιuk-sie/puk (伏斯)복세,복스,푹 폭 *** *** ɸuka-si/puka- fuka- *** *** kiph u·n kiph- puk ("deeply") *** *** *** *** 狌 yia-ʃιi (也尸) 야시 *** *** itatʃi(weasel) itachi(weasel) *** *** yezï ~ yezɣ- ("fox") yəu ("fox") 여시yəsi(dialect) *** *** *** *** 隣 ιi-bιuʌt (伊伐)이벌 *** *** iɸa("residences") iɸa-udo/iɸa-ɸito("family,genealogy") iɸawi/iɸewi("domiciles,houses") i-ba-sho("one's whereabouts" sho is a loan word) *** *** *** iut (隣) *** *** imiya-("to gather togather") *** 霜 sat 살  (薩) *** *** sai, see, zai, zae (dialectal Japanese words for "icicle" or "ice on the branches of trees or on the surface of a body of water") *** *** *** səri səri *** *** juhe *** 菁 ka-tʃιe가세 (加支)가지  *** *** kati/katʃin(brown/lush),katute(in the past) katʃte *** *** *** kəch-(蕪) kis- ("lush, overgrown with weeds, overrun with plants") *** *** *** *** 鵠 ko-・ιəi고레이,고의,고니 (古衣) qoγu *** kukuɸi1~kubi1("swan") kukui/kugui("swan") *** *** kohay kon koni *** *** gaha("bird, raven") gasha("big bird") *** 群落 ul 울,우시(于尸) uruk ("clan") ulus ("people, nation, tribe, horde") udi ("clan, family; the standing of one's family, the social status of one's family, lineage, birth; surname") uchi("me, home, family") *** *** ul("relations; relatives; kinsfolk; clan") uri ("we, us; the Korean people, Koreans") *** *** *** urse ("people") uce("entrance") *** 牙 kʌi-ʃιi가이시,개시 (皆尸) *** *** ki1 ("fang; tusk") *** *** *** *** *** *** *** *** *** 平 pii-lιεt비렬 (比烈)비례 biri *** ɸi1ra-(比良:flat,level) taira("flat") hirata- taira *** *** *** pʌl *** *** ba("field, district") pile-("to confirm, to criticize") tehere-("to flat, to be equal") *** 母親 ya chi야츠 (也次)야차,야치 Ana *** ɸaɸa("mother")/oya("parent") haha, oya *** *** 어ᅀᅵ əzi 어미əmi 아매,에마 ame,ema(north dialect) *** eniyen a ja *** 嬰兒 gιəu-sie / kus / kyus (仇斯)구스 koto(儿子,匈奴語) kız (女孩、女儿) O'gul *** ko1 (子) kodomo *** *** *** koma(童) koma-(小-) *** omo jui("kid") kuŋa ("child") 熊 komok고목 (功木) *** *** kuma kuma koma *** kom kōm *** *** *** *** 兔 u-sie-həm우세험 우스함오사함 투시커머,툿이  (烏斯含) tawïsγan *** usagi1 / wosagi1 usagi *** *** thos-gi 톳기 tho-ggi 토끼 *** *** *** *** 見面 pʌk/*pak (伯) 박 bak-("to see, to look; to find") *** mak-(設:"to obtain,to prepare,to make") ɸak-(別:"to see, to know,to understand")>*wakar- ɸakar-(諮・計:"to consult,to talk, to obtain") mōker- wakar- hakar- *** *** poizʌp- ("to humbly show oneself, to meet (an honored person)") po-("to see, to look")/ poyp-("to have an audience with, to meet (an honored person)") pak *** baka- ("to look for, to seek, to search") baha-("to get, to obtain") baka-("to find") 難 ma 마 (馬) *** *** ma- ("truely, really") ma- *** *** modir- mōjir- ("harsh; severe; cruel") *** manga(難:hard) maŋga(堅、難"hard") maŋa 心/胸 kιo-sιi겨시,겨시 (居尸)거시 göğüs kökün ko2ko2ro2("heart")/koro("oneself") kokoro *** *** *** kogäŋi (核心)/ kasʰɯm (胸、心) *** *** huhun (乳、乳房) *** 韮 mai-tʃιi마이시 (買尸)매시 *** maŋgirsun(野蒜) mi1ra(韮) nira ("garlic chives") *** *** manʌl (蒜) manɯl *** *** maca ("garlic chives") *** 根 tsʌm잠 (斬) *** *** tukene("root,knot,joint") tʃukene *** pul?(根) pulhuy(根) ppuri tʃamγ(根株) (尼夫赫语) *** da *** 文 kɯl/kιən-ʃιi 글 근시 (斤尸) *** *** kak-(to write) kuk-/*kurum-(to collect, to form,to bind) ko2to2("word, speech, language") kak- kukur-/kurum- koto *** *** kɯl kɯl *** herse hergen *** 玉 ko-ʃie고스 구스 구셰,구슬(古斯) *** gas kusiro2("bracelet") kushiro *** *** kusɯl ("jewel") kusɯl *** γun gu *** 孔 dzei〈tsei〉-ts‘ii 斉次/濟次 *** *** tʃuk-(透), tʃuki(隙) suki ("chink, gap, vulnerable point") *** *** *** t’ul-(透), tɯm(隙)*** *** *** *** *** 穴 kap,kap-pii 甲,甲比 qapca("gorge, ravine"), qapi¨γ("Gate") *** kaɸi1 ("gorge, strait, narrow valley") kubomi *** *** *** kul (穴) *** *** *** *** 三 mir, mil (密) siet/s^ïei (悉/史) bis(5) gurav mi1 mi *** mil sei/səih 셋 sʰet̚ *** ilan ilan *** 五 ütsi,uci,üc, uca,uchha (于次,弓次) üç(3) tabun itu itsu *** *** tasul (打戌) tasət 닷 tah dügün sunja sunja *** 七 nan-・ιən, nanən,nanun, nanin (難隠) Yeti *** nana nana *** *** (n)ìlgɯp(一急) (n)ìlgúp nadan nadan nadan *** 十 tək,duk (德) on toquz(9) arav to2/to2wo tō- *** *** *** 열 yəl(10) 온on(100) 즈믄chɯmun(1000) juwa juwan juwan ʒuwan 黑 *kəmər, kəmhək (今勿) Qara *** kuro1 kuro *** *** kəm-/검- 검 kʌm *** *** kara *** 白 nə γei ʃιi-lap (奈兮 / 尸臘) Aq *** sira(白) shiro *** *** hʌy-(白) hʌy- hin hayan *** *** šara-("to become white") šeyen("white") šanggiyan("white") *** 紅 s^a-bιuk s^a-pιuəi-kιən sa(i)puk, sa(i)pikon sapi 沙伏, 沙非斤 Qyzyl *hulaɣan > ulaan so2ɸo
32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댓글:  조회:2784  추천:0  2019-04-30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후렴*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모진 간장(肝腸) 불에 탄들 어느물로 꺼주려나 뒷동산(東山) 두견성(杜鵑聲)은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나의 설음을 몰라 주고 옛날 옛적 진시황(秦始皇)이 만권시서(萬卷詩書)를 불 사를제 이별(離別) 두자를 못살랐건만 천하장사(天下壯士) 초패왕(楚覇王)도 장중(帳中)에 눈물을짓고 우미인(虞美人) 이별(離別)을 당(當)했건만 부모같이 중한 분은 세상천지 또 없건마는 임을 그리워 애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주리 2.서산(西山)에 해 기울고 황혼(黃昏)이 짙었는데 안 오는 임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 떠서 짝을 불러 슬피울 제 원망스런 우리 임을 한 없이 기다리다 일경(一更) 이경(二更) 삼(三) 사(四) 오경(五更)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秋夜長) 긴 긴 밤을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들제 상사일념(相思一念) 애타는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 데 없는 이내 심사(心思)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해도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라 차마 진정(眞情) 못잊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3.진국명산만장봉(鎭國名山萬丈峰)이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은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厥)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태평연월(太平烟月) 좋은 시절(時節)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는 듯 유유(悠悠)한 한강(漢江)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인왕(仁旺)으로 넘는 해는 나의 감회(感懷) 돋우는듯 4.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랑 믿다가도 속는 사랑 오목조목 알뜰 사랑 왈칵달칵 싸움 사랑 무월삼경(無月三更) 깊은사랑 공산야월(公山夜月) 달 밝은데 이별한임 그린 사랑 이내 간장 다 녹이고 지긋지긋이 애탠 사랑 남의 정(情)만 뺏어 가고 줄줄 모르는 얄민 사랑 이사랑 저 사랑 다 버리고 아무도 몰래 호젓이 만나 소곤소곤 은근(慇懃) 사랑 얼씨구좋다 내 사랑이지 사랑 사랑 참사랑아 5.요망(妖妄)스런 저 가이야 눈치없이 짖지 마라 기다리고 바라던 임 행여나 쫓을세라 임을 그려 애태우고 꿈에라도 보고지고 구곡간장(九曲肝腸) 다 녹을 제 장장추야(長長秋夜) 긴 긴 밤을 이리하여 어이 샐꼬 잊으려고 애를쓴들 든 정이 병이 되어 사르나니 간장이라 6.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가엔 들쭉 열매 아름답고 굽이치는 압록강(鴨綠江)엔 뗏목 또한 경(景)이로다 금강산비로봉(金剛山毘盧峯)엔 기화이초(奇花異草) 피어있고 해금강(海金江) 총석정(叢石亭)엔 넘실대는 파도(波濤) 위에 백조(白鳥) 쌍쌍(雙雙) 흥(興)겨 운다 배를 타고 노(櫓)를 저어 대자연(大自然)좋은 풍경 마음대로 즐겨 볼까 7.섬섬옥수(纖纖玉手) 부여잡고 만단정회(萬端情懷) 어제런 듯 조물(造物)이 시기(猜忌)하여 이별(離別)될 줄 뉘라 알리 이리 생각 저리 궁리(窮理) 생각 끝에 한숨일세 얄밉고도 아쉬웁고 분(?)하고 그리워라 아픈 가슴 움켜잡고 나만 혼자 고민(苦憫)일세 8.추강월색(秋江月色) 달 밝은밤에 벗 없는 이내 몸이 어둠침침(沈沈) 빈 방(房) 안에 외로이도 홀로 누워 밤 적적(寂寂) 야심(夜深) 토록 침불안석(寢不安席) 잠 못 자고 몸부림에 시달리어 꼬꾜 닭은 울었구나 오날도 뜬눈으로 새벽맞이를 하였구나 9.어지러운 사바세계(娑婆世界) 의지(依支)할 곳 바이 없어 모든 미련(未練) 다 떨치고 산간벽절 찾아가니 송죽(松竹) 바람 슬슬(瑟瑟)한데 두견(杜鵑)조차 슬피우네 귀촉도불여귀(歸蜀道不如歸)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深夜三更)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새워볼까 *오호(嗚呼) 한평생(平生) 허무(虛無)하구나 인생백년(人生百年)이 꿈이로다 10.a귀(貴)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대끼어 남은 것은 한(恨)뿐이라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路柳墻花)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山中)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世上煩惱)를 잊어 볼까 b귀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딪끼어 남은 것은 한뿐이라.(추월춘풍 화개화락 몇몇성상이 지나갔나) 만고풍상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11.세파(世波)에 시달린 몸 만사(萬事)에 뜻이 없어 모든 시름 잊으려고 홀로 일어 배회(徘徊)할 제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귀뚜라미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간장(肝臟) 어이 마저 썩이느냐 가뜩이나 심란(心亂)한데 중천(中天)에 걸린 달은 강심(江心)에 잠겨 있고 짝을 잃은 외기러기 운소(雲宵)에 높이 떠서 처량(悽?)한 긴 소래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춘풍호월(春風晧月) 저문 날에 두견성(杜鵑聲)도 느끼거든 오동추야단장시(梧桐秋夜斷腸時)에 차마 어찌 들을건가 12.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落花)진다고 설워 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손으로 꺽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플 소냐 숙명적(宿命的)인 운명(運命)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 살겠네 13.세상공명(世上功名) 부운(浮雲)이라 강호어용(江湖漁翁) 되오리다 일엽편주(一葉片舟) 흘리저어 임기소지(任期所之)하올적에 만경창파(萬頃蒼波) 넓은물에 호호탕탕(浩浩蕩蕩)떠나간다 주경(舟輕)하니 산사주(山似走)요 파급(波急)하니 야여주(野如走)라 은린옥척(銀鱗玉尺) 펄펄 뛰고 백구(白鷗) 편편(翩翩) 비꼈는데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좌우산천(左右山川) 살펴보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좋을씨고 격안전촌 (隔岸前村) 양삼가(兩三家)에 저녁 연기(煙氣) 일어나고 반조입강번석벽(返照入江?石壁)에 거울 낯을 벌였는데 언덕 위에 초동(樵童)이요 석벽(石壁) 아래 어옹(漁翁)이라 창랑일곡(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嚴陵) 여울 다다랐다 천척단애(千尺斷崖) 높은 곳에 창송녹죽(蒼松綠竹) 푸르렀고 칠리청탄(七里淸灘) 고요한데 쌍쌍(雙雙) 오리 높이 떴다 고기 주고 술을 사서 취(醉)케 먹고 달을 띠고 돌아오니 대장부(大丈夫) 세상자미(世上滋味) 이에서 더할소냐 *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인생백년(人生百年)이 좋을씨고 14.때는 마침 어느때뇨 춘풍(春風)이 화창(和暢)하니 양춘가절(陽春佳節)이 아니냐 만산홍록(滿山紅綠) 요염(妖艶)하여 금수병(錦繡屛)을 둘렀는 듯 백화(百花) 만발(滿發) 난만(爛漫)한데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香氣)를 좇아 날아들고 휘늘어진 버들새로 황금(黃金) 같은 꾀꼬리는 벗을 불러 노래하고 시냇물 맑았는데 낙화(落花) 동동 떠나가니 이도 또한 경(景)이로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5.명년삼월(明年三月) 오시마더니 명년(明年)이 한(限)이 없고 삼월(三月)도 무궁(無窮)하다 양류청양류황(楊柳靑楊柳黃)은 청황변색(靑黃變色)이 몇 번(番)이며 옥창앵도(玉窓櫻桃) 붉었으니 화개화락(花開花落)이 얼마인고 한단침(邯鄲枕) 빌어다가 장주호접(莊周蝴蝶)이 잠깐 되어 몽중상봉(夢中相逢) 하쟀더니 장장춘단단야(長長春短短夜)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몽불성(夢不成)을 어이하리 16.a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風紙)가 펄렁 날 속였네 행여나 임이 왔나 창문(窓門)열고 내다보니 임은 정녕 간 곳 없고 명월(明月)조차 왜 밝았나 생각끝에 한숨이요 한숨 끝에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쟀더니 그대 화용(花容)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b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가 펄렁 날속였네. 행여나 님이 왔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님은 정녕 간곳없고 명월조차 왜 밝아서, (생각사록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자해도 그대 화용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17.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오늘 아침 오동(梧桐) 위에 까치 앉아 짖었으니 반가운 편지(片紙) 올까 그리던 임이 올까 기다리고 바랐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해는 지고 출문망(出門望)이 볓 번인가 언제나 유정(有情) 임 만나 화류동산춘풍리(花柳東山春風里)에 이별(離別) 없이 살아 볼까 18.봄이 왔네 봄이 왔네 무궁화(無窮花) 이 강산(江山) 새봄이 왔네 방실방실 웃는 꽃들 우줄우줄 능수버들 비비배배 종달새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라 앞집 수탉이 꼬끼요 울고 뒷집 삽사리 컹컹 짖네 앞논의 암소가 엄매 뒷뫼의 산꿩이 끼긱끽 물 이고 가는 큰애기 걸음 삼춘(三春)의 흥(興)에 겨워 사뿐사뿐 아기장아장 흐늘거리며 걸어가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19.하늘같이 높은 사랑 하해(河海)같이 깊은 사랑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사랑 구년지수(九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같이 반긴 사랑 당명황(唐明凰)의 양귀비(楊貴妃)요 이(李) 도령(道令)의 춘향(春香)이라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하루만 못봐도 못 살겠네 20.오늘도 화창하니 이삼요우(二三僚友) 작반(作伴)하여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부여팔경(夫餘八景) 구경 가세 부소산(扶蘇山) 저문 비에 황성(荒城)이 적막하고 낙화암(落花岩) 잠든 두견(杜鵑) 삼천궁녀(三千宮女) 죽은 원혼(?魂) 쌍쌍이 짝을 지어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느냐 고란사(皐蘭寺) 쇠북 소래 사자루(泗자樓)를 흔드는 듯 선경(仙境)이 방불(彷彿)하다 21.증경(증?=꾀꼬리)은 쌍쌍(雙雙) 녹담중(綠潭中)이요 호월(皓月)은 단단(團團) 영창롱(映窓?)인데 적막한 나유(羅惟) 안에 촛불만 도두 켜고 인(人) 적적(寂寂) 야심(夜深)한데 귀뚜람 소리가 처량하다 금로(金爐)에 향진(香盡)하고 옥루(屋漏)는 잔잔(潺潺)한데 돋은 달이 지새도록 뉘게 잡히어 못 오시나 임이야 나를 생각하는지 나는 임 생각뿐이로다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누워 전전불매(輾轉不寐) 장탄수심(長嘆愁心) 남은 간장(肝腸) 다 썩는다 22.날 찾네 나를 찾네 그 누구라 날 찾나 기산(箕山) 영수(潁水) 별건곤(別乾坤)에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날 찾나 백화심처일승귀(百花深處一僧歸)라 춘풍석교화림중(春風石橋花林中)에 성진화상(性眞和尙)이 날 찾나 청산기주(靑山?洲) 백로탄(白鷺灘)에 여동빈(呂洞賓)이가 날 찾나 도화유수무릉(桃花流水武陵) 가자 어주속객(魚舟屬客)이 날 찾나 수양산(首陽山) 백이숙제(伯夷叔齊) 고사리(採o) 캐자 날찾나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 하고 칠리동강일사풍(七里桐江日斜風)에 함께 가자 날 찾나 기경선자(騎鯨仙子) 이태백(李太白)이 풍월(風月)짓자 날 찾나 상산사호(商山四皓) 네 노인(老人)이 바둑 두자 날 찾나 기주(嗜酒)하던 유영(劉怜)이가 동배주(同盃酒)하자고 날 찾나 칠석은하(七夕銀河) 견우직녀(牽牛織女) 한포(漢浦)로 지나다가 함께 가자 날 잧나 차산중운심(此山中雲深)한데 부지처(不知處) 오신 손님 날 찾을리 없건마는 그 누구라 날찾나 23.그대 나와 사귈 적에 이별(離別)하자 사귀었나 백년(百年)살자 굳은 언약(言約) 일조허사(一朝虛事) 뉘라 알리 임을 그려 애태다가 상사(想思)로 병(病)이 되니 조물(造物)이 시기하여 날 미워서 준 병(病)인가 안타까운 이내 심정(心情) 억제(抑制)할 길 바이 없어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盃)에 몽롱(朦朧)히 취(醉)케 먹고 울적(鬱寂)한 빈 방안에 외로이 혼자 앉아 옛일을 생각하니 만사(萬事)가 꿈이로다 상사불견(想思不見) 우리 임을 어느 때나 다시 만나 그린 회포(懷抱)를 풀어 볼까 24.일년 삼백 육십 일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인데 꽃 피고 잎이 나면 화조월석(花朝月夕) 춘절(春節)이요 사월남풍(四月南風) 대맥황(大麥黃)은 녹음방초(綠陰芳草) 하절(夏節)이라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여 사벽충성(四壁蟲聲) 슬피 울면 구추단풍(九秋丹楓) 추절(秋節)이요 백설(白雪)이 분분(芬芬)하여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이요 만경(萬逕)에 인종멸(人踪滅)하면 창송녹죽(蒼松綠竹) 동절(冬節)이라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요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사시풍경(四時風景) 좋은 시절(時節)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5.a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三秋)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肝腸) 봄눈(春雪)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비가 되어 우리 임 자는 영창(映窓)밖에 불면서 뿌려나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 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뿐이로다 b일각이 삼추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 봄눈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흘러 비가 되어 (세풍세우 흩날이며), 우리 님 자는 영창 밖에 불면서 뿌려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 뿐이로다. 26.금풍(金風)은 소슬(蕭瑟)하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임 생각을 잊으려고 아픈 마음 달랠 적에 야속할손 외기러기 북천(北天)으로 날아가며 처량한 울음으로 나의 심회(心懷) 돋워 주고 지는 달 새는 밤에 귀뚜라미 슬픈 울음 사창(紗窓)에 여읜 잠을 살뜰히도 다 깨운다 무인동방(無人洞房) 홀로 누워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잠 못자고 애태우니 안타까운 이 심정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27.a.공도(公道)라니 백발(白髮)이요 면(免)치 못할 죽음이라 요순우탕(堯舜禹湯) 문무주공(文武周公) 공맹안증(孔孟顔曾) 정주자(程朱子)는 도덕(道德)이 관천(貫天)하여 만고성현(萬古聖賢) 일렀건만 미미(微微)한 인생(人生)들이 저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 황석공(黃石公)과 사마양저(司馬穰?) 손빈오기(孫?吳起)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했네 멱라수(멱羅水)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 충혼(忠魂)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 정령(精靈)이라 b.공도라니 백발이요 면치 못할 죽음이라 천황 지황 인황이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성덕이 없어서 붕 했으며, 말 잘하는 소진 장의 육국제왕을 다 달랬으되 염라왕은 못 달래어 한 번 죽엄 못 면하고, 그러한 영웅들은 사후 사적이라도 있건마는. 초로 같은 우리 인생 아차 한번 죽어 지면 움이 나느냐 싻이 나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명년삼월 봄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기 어려워라. 28.통일천하(統一天下) 진시황(秦始皇)은 아방궁(阿房宮)을 높이 짓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쌓은 후에 육국제후(六國諸侯) 조공(朝貢)받고 삼천궁녀(三千宮女) 시위(侍衛)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五百人)을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보낸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 저문 날에 여산황초(驪山荒草) 뿐이로다 아서라 쓸데 없다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9.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 가니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두견접동(杜鵑) 날아든다 구름은 뭉게뭉게 상상고봉(上上高峯) 산(山)머리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어려있고 바람은 슬슬 불어 구곡계변(九曲溪邊) 암석상(岩石上)에 꽃가지 떨뜨린다 경개무궁(景槪無窮) 절승(絶勝)하고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30.망망(茫茫)한 창해(滄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라 범피중류(泛彼中流) 떠나가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요 연파강상사인수(烟波江上使人愁)는 최호(崔顥)의 유적(遺跡)이라 봉황대(鳳凰臺) 나려가니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는 호상(湖上)에 떠있는데 동남(東南)을 바라보니 오산(吳山)은 천첩(千疊)이요 초수(楚水)는 만중(萬重)이라 반죽(斑竹)에 어린 눈물 이비한(二妃恨)을 아뢰는 듯 동정호(洞庭湖)에 비친 달은 상하천광(上下天光)이 일색(一色)이라 삼협(三峽)에 잔나비는 슬피 울어 호소(呼訴)하니 천객소인(遷客騷人)이 몇이런가 31.창외삼경세우시(窓外三庚細雨時)에 양인심사(兩人心事) 깊은 정(情)과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에 백년동락(百年同樂) 굳은 언약(言約) 이별(離別)될 줄 어이 알리 동작대(銅雀臺) 봄바람은 주랑(周郞)의 비웃음이요 장신궁(長信宮의 가을달은 한궁인(漢宮人)의 회포(懷抱)로다 지척(咫尺)이 천리(千里)되어 은하(銀河)를 사이하고 까막까치 흩어졌으니 건너갈 길 바이 없고 어안(魚雁)이 돈절(頓絶)하니 소식인들 뉘 전(傳)하리 못 보아 병(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怨讐)로다 가뜩이나 썩은 간장(肝臟) 이 밤 새우기 어려워라 32.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을 허송세월(虛送歲月) 옥중고생(獄中苦生) 망부사(望夫詞)로 울음울 제 춘풍(春風)이 눈을 녹여 가지가지 꽃이 피니 반갑고도 서러워라 꽃이 피고 잎이 나니 녹음방초(綠陰芳草) 시절(時節)이라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유상세지(柳上細枝) 늘어진 가지 구십삼춘(九十三春) 자아내고 잎이 지고 서리 치니 황국(黃菊)의 능상절(凌霜節)과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할제 송죽(松竹)의 천고절(千古節)을 그 아니 불워하리 33.인생천지백년간(人生天地百年間)에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라 차라리 다 버리고 세상풍경(世上風景) 완상차(翫賞次)로 용문(龍門)에 장도(壯途)타가 구점연(九點烟)에 산하원기(山河元氣) 동정호(洞庭湖) 운몽택(雲夢澤)을 흉중(胸中)에 삼킨후에 낙안봉(落雁峰) 다시 올라 사조(謝眺)의 경인구(驚人句)를 청천(靑天)에 낭음(朗吟)하고 장건(張騫)의 팔월사(八月?)를 은하(銀河)에 흘려 놓아 장생술(長生術)을 익혀가며 세상진미(世上珍味)를 읊어볼까 34.정월(正月)이라 상원일(上元日)에 달과 노는 소년(少年)들은 답교(踏橋)하고 노니는데 이월(二月)이라 청명일(淸明日)에 나무마다 춘기(春氣)들고 잔디잔디 속잎 나니 만물(萬物)이 화락(和樂)하는데 우리 임은 어디 가고 봄이 온 줄 모르는가 삼월(三月)이라 삼짇날에 강남(江南)서 나온 제비 왔노라 현신(見身)하고 소상강(瀟湘江)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下直)한다 이화도화(李花桃花) 만발(滿發)하고 행화방초(杏花芳草) 흩날린다 우리 임은 어디 가고 화류(花游)할 줄 모르느냐 35.청려장(靑藜杖) 둘러 짚고 북향산(北香山) 찾아가니 백두산(白頭山) 내맥(來脈)이요 청천강(淸川江) 근원根(源)이라 월림강(月林江) 건너가서 향산동구(香山洞口) 다다르니 계변(溪邊)에 우는 새는 춘흥(春興)을 노래하고 암상(岩上)에 피는 꽃은 원객(遠客)을 반기는 듯 외사(外寺)목 넘어들어 좌우(左右)를 살펴보니 창송(蒼松)은 울울(鬱鬱)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이라 심진정(尋眞亭) 높은 집은 대소행차(大小行次) 영송처(迎送處)라 어화 이 좋은 풍경(風景) 아니 취(醉)고 어이하리 36.a.휘황월야삼경(輝煌月夜三更)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겨우 한잠 들었을 제 오매불망(寤寐不忘) 우리 임 만나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리던 회포(懷抱) 반이나 이루려니 베갯머리 귀뚜라미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곁에 임 간 곳 없고 임 잡았던 나의 손길은 빈주먹만 쥐었구나 야속타 저 귀또리 네 짝 잃고 울 양이면 나의 원통(?痛) 이사정(事情)을 이다지도 모르느냐 b.휘황월야 삼경인데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태고풍편에 오신 님 만나 그린 회포를 풀랴ㅆ더니, 벼갯머리 저 귀뚜리 서상가약을 그리느냐, 불승청원 실려 탄으로 귀똘귀똘 우는 소리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잡았던 님은 간곳 없고 들리느니 귀뜨람 소리 구곡간장 구비 구비 솟아 나느니 눈물이라, 야속하다 저 귀뚜리 네 짝을 잃고 울 양이면 남의 사정을 왜 모르나. 37.압록강(鴨綠江) 내리는 물 황해(黃海)로 돌아들고 한라(漢拏)에 이는 바람 백두(白頭)에 부딪쳐서 삼천리(三千里) 이 강산(江山)에 속속들이 불어온다 봄바람 따스할 제 꽃도 같이 보던 것을 여름날 시냇물에 서로 벗고 놀던 것을 철벽(鐵壁)에 가로막혀 못 본 지 몇몇 핸고 바람 불어 십년(十年)이요 물결쳐서 십년(十年)이라 언제나 다시 만나 이내시름 풀어 볼까 38.진상전(眞常殿) 해회당(海會堂)을 좌우(左右)로 살펴보니 만세루(萬歲樓) 올라서서 원근산천(遠近山川) 바라보니 남산(南山)의 웃는꽃은 춘색(春色)을 띠어 있고 청계(淸溪)의 맑은 물은 계곡(溪谷)을 둘러 있고 취운당(翠雲堂) 백운각(白雲閣)에 오작(烏鵲)이 쌍비(雙飛)하니 요지(瑤池)는 어디런지 선경(仙境)이 여기로다 여래탑(如來塔) 십구층(十九層)과 대보탑(大寶塔) 십이층(十二層)을 전후(前後)로 구경하고 대웅전(大雄殿) 들어가니 탑상(榻床)에 앉은 불상(佛像) 거룩하기 짝이없네 39.천황지황(天皇地皇) 개벽후(開闢後)에 인황구주(人皇九州) 분장(分張)하니 천만고(千萬古) 흥망사적(興亡事蹟) 남가일몽(南柯一夢)아니런가 홍몽일월(鴻?日月) 태고초(太古初)에 소박현풍(素朴玄風) 혼동(混同)하니 구목위소(構木爲巢) 순거곡식(?居穀食) 몇몇해나 지나간고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계천극립(繼天極立)하신후에 사도지직(司徒之職) 전악관(典樂官)이 상서학교(庠序學校) 열어내어 문장귀천(文章貴賤) 분별(分別)하고 예악교화(禮樂敎化) 선포(宣布)하니 인물(人物)이 혁혁(赫赫)하고 풍속(風俗)이 희희(熙熙)로다 40.응향각(凝香閣) 들어가서 오동향로(烏銅香爐) 구경하고 심검당(尋劍堂)과 관음전(觀音殿) 동림헌(東臨軒)과 미타전(彌陀殿) 망월루(望月樓)를 차례(次例)로 구경하고 유산(遊山)길 찾아가서 안심사(安心寺) 돌아드니 무수(無數)한 부도비(浮屠碑)는 도승(道僧)의 유적(遺跡)이라 명월(明月)은 교교(皎皎)하고 청풍(淸風)은 소슬(蕭瑟)이라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곳에 상원암(上院庵)을 찾아가서 대해포(大海浦) 구경하니 정신(精神)이 쇄락(灑落)하다 이층철사(二層鐵絲) 휘어잡고 인호대(引虎臺) 올라가니 송풍(松風)은 거문고요 두견성(杜鵑聲)은 노래로다 41.증광경과(增廣慶科) 택일(擇日)하여 문장(文章) 무사(武士) 다 모두어 초시회(初試會)를 설장(設場)하고 춘당대(春塘臺) 후원(後苑) 안에 대소과(大小科)를 창방(唱榜)하니 부(賦) 장원(壯元)에 굴원(屈原)이요 시(詩) 장원(壯元)에 이백(李白)이라 의(義) 장원(壯元)에 사마천(司馬遷)과 의심(義心) 장원(壯元) 한퇴지(韓退之)라 책문(策文) 장원(壯元) 동중서(董仲舒)요 표(表) 장원(壯元)에 왕발(王勃)이라 생원(生員) 진사(進士) 이백인(二百人)과 삼십삼인(三十三人) 호명(呼名)하니 반악(潘岳) 송옥(宋玉) 가의(賈誼) 유향(劉向) 반고(班固) 매승(枚乘) 조식(曹植)이요 두자미(杜子美) 송지문(宋之問)과 유자후(柳子厚) 두목지(杜牧之)와 가도(賈島) 잠삼(岑參) 맹동야(孟東野)와 백낙천(白樂天) 원진(元?)이라 구양공(歐陽公) 왕안석(王安石)은 소년성명(少年成名) 조달(早達)하고 소자첨(蘇子瞻) 소영빈(蘇潁濱)은 형제연벽(兄弟聯壁)호기(豪氣)로다 설문청(薛文淸) 이동공(李??)과 왕양명(王陽明)과 왕감주(王감州)라 문장재사(文章才士) 다 뽑으니 천하득인(天下得人) 영광(榮光)이라 *띠리리잇 띠리리 잇 띠리리리리리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2.임이별 해본 사람들 몇몇이나 덴다드냐 임을 잃든 그날밤이 어디가 아프고 쓰리드냐 배지나간 바다위에는 파도와 물결만 남아있고 임떠나간 내 가슴에는 그 무었을 남겼느냐 장미화 꽃이 곱다고 해도 꺽고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고 해도 남되고 보면 원수로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3.a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누나 인연없어 못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안 같이 살며 왜 이다지 애가타 그려사나 차라리 몰랐드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것이 원수로구나 b 지리하구나 님 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고 인연 없어못 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 안 같이 살며 (오매불망 우리님을) 왜 이다지도 그려사나, 차라리 물랐더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 것이 원수로구나 정 많이 든 것이 대원수로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서 (참아진정) 못살겠네.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4.a.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정 안주니 그것이 모두가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손가 신롱서를 꿈에보고 불끌약을 물었더니 임으로 하여 난병이니 임이 아니면 못끈다네 서리맞어 병든 잎은 바람이 없어도 떨어지고 임그리워 애타는 가슴 병 아니 든다고 내 어이 사나 b.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 정은 안주니 그것이 모두 다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소냐 신롱씨를 꿈에 보고 불 끌 약을 물었더니 인삼 녹용도 쓸데 없고 화타 편작도 소용이없네 님으로 연하여 난병이니 님이 아니면 못 끈다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5.잊어라 꿈이 로구나 모두 다 잊어라 꿈이 로구나 옛날 옛적 과거지사를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나를 싫다고 나를 마다고 나를 박차고 가신임을 잊어야만 올을줄을 나도 번연이 알건마는 어리섞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몾잊어 걱정일세 46.나 떠난다고 네가 통곡말고 나 다녀 올동안 마음 변치 말어라 제 몸에 병이 들었나 뉘게 잡히여 못오시나 해다저서 황혼이 되면 내 아니가도 제 오니 아마도 우리임은 남에 사랑이 분명하구나 47.지척동방 천리 되어 바라 보기 묘연하고 은하작교가 흩어졌으니 건너 갈 길이 아득하다. 인정이 끊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병이로다. 못잊어 한이 되니 천추만한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48.창문을 닫쳐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게 무엇이냐 보일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듯하다 놓쳤으니 나혼자 고민 하는게 이것이 모두가 사랑이냐. 49. 바람아 광풍아 불지 마라 송풍낙엽이 다 떨어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동삼 석달 잠을 자다가 춘삼월이 다시 올제. 황금같은 꾀꼬리는 양류상으로 넘나들며 순제금을 희롱하고 탐화봉접이 춤을 출제 훈풍을 좇아서 또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는 못하리로다. 50.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에 월색도 유정하더라 님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인들 있을 소냐. 이별 마자고 지은 맹서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하여 (백년동락 굳은 언약이) 무너질줄 뉘라 알리. 무정하다 저 달 빛은 천리원정에 님 잃은 서름 너는 어이 모르냐. 51.바람 불어 누운 남기 봄 비 온다고 일어나며 님으로 연하여 얻은 병이 약을 쓴다고 낳을 소냐. 우황 웅담으로 집을 짓고 청심환으로 왕토를 치고, 인삼 녹용으로 구들을 놓고 삼신산 불로초로 약을 지어서 먹은 후에, 화타 편작이 갱생(更生)을 해도 님으로 연하여 애타는 간장 이내 병 낫기는 만무로구나. 52.인간 이별 만사중에 날같은 사람 또 있는가 천지만물 분연후에 설른 이별이 몇몇이냐. 강산에 떠 가는 저 배는 가는 곳이 그 어디메뇨, 만단수회 실은 후에 천리 약수 건너 가서 임계산 곳에 풀고지고, 장탄단우 이내 설움 구곡간장 맺힌 한을 어이하면 풀어볼까. 53. 동정호 지는 달도 그믐이 지나면 또 볼수 있고 북경 길이 멀다해도 사신행차가 왕래하고, 하늘이 높다 해도 오경전에 이슬이 오고, 무한년 정배라도 사만 있으면 풀리는데 황천길은 얼마나 멀게 한번 가며는 영절인가. 54.창해월명 두우성은 님 계신곳 바쳐 있고 회포는 심란한데 해는 어이 수이 가노, 잘새는 집을 찾아 무리무리 날아들고, 야색은 창망하여 달빛 조차 희미 한데 경경히 그리는것은 간장 썩는 눈물이라. 55.춘풍화류 번화시에 애를 끊는 저 두견아 허다공산을 다 버리고 내 창전에 와 왜 우느냐. 밤중이면 네 울음 소리 억지로든잠 다 깨운다.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날 생각 하느라고 번민이냐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 뭇살겠네. 56.뉘라서 장사라더냐 죽음 길에도 장사가 있나 누누중충 북망산을 뉘 힘으로 뽑아 내며 봉리춘풍 빠른 광음을 어느 재사라 막아 내리 명황도 눈물을 짓고 왕후장상도 울었으니 오는 백발을 어이하리 진시황 한무제도 채약구선 못 하고서 여산황릉 갚은 골에 모연주초 뿐이로다 고왕금래 영웅 호걸이 백발이 공도 되어 속절 없이 묻혔구나. 57.님과 날과 만날적에는 백년을 살자고 언약을 하고 태산을 두고 맹서를 하고 하해를 두고서 언약을 하더니, 산수지맹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건 이별이라, 이별 두자 누가 내며 사랑 두자를 그 누가 냇나 이별 두자 내인 사람 날과 한 백년 원수로다. 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리로다 깨치리라 이별 두 자를 깨치리라. 58.억만장안 남북촌에 영웅호걸 재자가인 명기명창 가객이며 가진풍류를 갖추어 싣고, 순풍에 돛을 달어 범피중류 내려 갈제, 벽파상에 나는 백구는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고기 잡는 어옹(漁翁) 들은 어기여차 노래한다. 세상공명 다 떨치고 풍월 따라 희롱하니 이도 또한 좋을시고. 59.봄이 왔네 봄이 왔네 원근산천에 봄이 왔네 먼 산의 아지랑이 아롱아롱 뒷 내에 실 버들 하늘하늘, 불탄 잔디 속 잎이 나니 봄은 분명 봄 이로구나. 강남 갔던 저 제비도 옛 집을 찾아 다시 오고 개나리 진달화 만발하니 벌 나비 잡충이 춤을 춘다. 우리 인생도 저 봄과 같이 다시 젊지를 왜 못하나. 원수로구려 원수로구려 무정세월이 원수로구려 검던 머리 곱던 양자 어언간에 백발일세. 백발이 날 찾아올 줄 알았으면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철퇴를 들고 오는 백발을 막을것을. 60.우연히 길을 갈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 새가 울랴마는 적벽화전의 비운이라 하야구구(귀귀) 진토를 보고 설리 통곡 우는 모양 사람의 심리로서야 참아 진정 못 보겠네. 포연탄우 모진광풍에 천하장사 영웅호걸이 비명횡사가 몇몇일러냐. 일후에 그 원혼들이 와석종신 못 한 이한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하느냐 61.서산에 해 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 오는 님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떠서 짝을 불러 슬피 울 제 원망스런 우리 님은 한없이 기다리다 일경이경 삼사오경 어느덧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 긴 밤을 전전불매 잠못 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데 없는 이내 심사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 해도 욕망이 난망이라 차마 진정 못 잊겠네. 62.산은 적적 월황혼에 두견접동 슬피 울고 오동 우에 비낀 달은 이내 회포를 돋우는데, 야월공산 깊은 밤에 님 그리워 설이울제. 독대등촉 벗을 삼아 전전불매 잠못 들고 상사일염 애 태우니, 옥장의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을하고 남가일몽 꿈속에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지고, 짝을 잃고 우는 저 두견아 남의 원통 이 사정을 너는 왜 이다지도 모르느냐. 63.손목을 잡고 작별을 하려고 눈물 씻고 자세히 보니 홍도와 같이 고운 얼굴에 앵도와 같이 붉은 입술 검은 눈섭을 그린듯이 깍은듯이 가는 허리가 활대와 같이 휘였구나 노란 저고리 다홍치마에 붉은 깃에 남 끝동에 물명주 삼팔 수건을 눈결과 같이 휘여잡고 들며 날며 곁눈질에 돈 없는 건달 마음 산란하다.
31    '위안부'(慰安婦)와 조선민족 남자 댓글:  조회:3102  추천:1  2019-04-29
'위안부'와 한민족(조선)남자 최근 언론에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많이 오르고 있다. 진짜 를 관심하는 것인지?! [정치인들의 눈 가림인지•••] < 위안부>는 세계 백여 개 나라, 몇 백 개 민족 속에 조선(한국)과 한민족에게만 속하는 특유의 이다. < 위안부>는 한 세 기전 일본이 조선을 멸하고 조선과조선민족사내들에게 들씌운  치욕의 오강이다.. 나는 일본 애들 말하지 않는다.한민족 여성들이 강 족에게 끌려 다닌 적이 처음이고, 일본애들 뿐이가? 예전부터 나는 한민족사내들을 말한다. ... 사내란 게 제 나라,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하여 나라가 망하고 그 많은 아녀자들이 오랑캐들에 끌려 다니며 치욕 당했는가?! 역사상 그것도 한번 아니고... ...  세계 백여개 나라 몇 백 개 민족에 이런 일이 있었던가?! 왜 세계 그많은 나라, 민족 중에 유독 조선/한국과한민족에게만 가 있고, 란 딱지가 붙는가?! 조선,한국남자들이 사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외(外)족에 쫓기고 강적을 섬기며 동족끼리 살육하는 세월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조정이 부패무능하고 관리, 양반들이 늘 기생, 여자들을 차고 강가, 숲 속을 누비며 북, 장단 속에 를 꼬부랑 외치며 아녀자들 치마속에 묻혀 삶의 을 향수하며 세월을 보낸다. 덕으로 이웃나라,  민족에게 큰 땅덩이를 다 때웠고 쪼고만 조선,한반도로 몰 리였다. 후로는 바다건너 작은 섬나라 일본 애들에게 망하는 꼴이 됐고 민족에게 [위안부]란 세계에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도 얻게 되였다. 현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라가 분열되고 혈육이 갈라져 사는 민족이다. 그 현황에서도 한시도 한 피 줄타고 난 형제를 비방하고 멸하지 못하여 이를 갈고 있다. 조선/한민족이 반성하고 사고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잍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여성들이 제 나라 남자들을 원망하고 그들로부터 사죄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선/한민족남자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제 여자를 잘 보호하였으면 그 여자들이 외(外)족들에게 끌려 다니며 굴욕을 당 하 였게는가? ! 조선/한국사내들이 제 책임을 다 하였으면 조선나라 조선/한민족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란 치욕적인 딱지가 붙어 겠 는가?!조선/한민족사내들이 똑똑하고 잘하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일본 애들이 사과할 것이 아니라 조선/한민족사내들이 우리여성들에게 심심히 허리 굽혀 사과해야 한다고 본다. 왜,조선/한민족이 이렇게 되였는가? 왜,조선/한민족에게 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치욕적인 단어가 붙게 되였는가?! 전체 조선민족이 사유해 볼 일이라고 본다. 부끄럽게 떠들썩거리지 말고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한국경기도안성에서 여때 여건이 안 되여 써놓아 던 글을 이제야 올려 본다.   출처 : 동포투데이 
이성계가 몽골족인지 여진족 인지 , 한족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 확실한건 동북면 사람 이었다. 고려의 영토는 어디까지나 강동6주 까지 였고 동북면을 개척한건 공민왕 시절 이었다. "이성계가 고려인이다" 논리 로 보자니 18세 이안사 시절 산성별감이 전주로 부임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 로 있던 이안사 에게 관기官妓를 요구하였으나 이안사가 거절하자 사병으로 이안사를 공격할려하자 이안사는 혈족과 외족 170여호를 이끌고 고려를 떠나 동북면으로 이주하여 원나라 다루가치 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원나라 시절 당시 어느정도 고려인 들이 몽골관직 받고 천호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자들은 그냥 봐도 고려인 후손 인줄 알지만 이성계는 아니였다. 그 이유는 귀화한 사람들은 성씨를 안바꿨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정말 고려인 후손 이라면 성씨는 안바꿨을 것이다.   태종 26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8월 6일(임자) 4번째기사 - 동북면 천호 등이 민호를 사사로이 사역하는 것을 없애다  동북면에 와서 사는 향화인(向化人) 가운데 천호(千戶)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의 관하인 이구대(李求大)와 최야오내(崔也吾乃)의 관하인 김양용(金良龍) 등 7인이 고하기를,   - 고려인 가운데 원나라 천호 관직 받고 귀화한 사람들 보면 성씨는 안바꿨다. 참고로 고려사 보다 보면 어느정도 등장한다.   김씨 - 김고시첩목아(金高時帖木兒) 이씨 - 이구대(李求大) 최씨 - 최야오내(崔也吾乃) 기씨 - 기샤인테무르 이씨 - 이오로첨목아 최씨 - 최첩목아(崔帖木兒) 박씨 - 박불화(朴不花)   여진족 가운데 천호 받은 사람들 보면  여진(女眞)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 천호 관직 대를 이은 투란테무르  투란테무르 는 고려로 귀화해 이두란 이 되었다 22세 이성계 는 아가바토르  21세 이자춘 은 우르스부카 [吾魯思不花] 20세 이춘 孛顔帖木兒(패안첩목아) * 추정하건대 이성계는 몽골세력의 지배를 받는 여진오랑캐와 한족의 혼혈혈통으로 고려에 귀화한 외국인임이 틀림없다.   [출처] 이성계 가 정말 고려인 인가|작성자 iece12345    
29    가짜 역경 주역을 말한다 댓글:  조회:2892  추천:0  2019-01-04
역경(易經)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인류역사에서 경(經)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 역경(易經) 말고는 없다. 역경(易經)에는 우주와 만물에 대한 모든 이치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담겨 있다. 역경은 8천 년 전에 살았던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만들어 자손들한테 전한 것이다. 그러나 역경이 긴 세월을 전해 오는 동안 내용의 거의 모든 부분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잘못 전해졌다.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3천여 년 전에 주나라 문왕(文王) 창(昌)과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르는 강상(姜尙)이 수십 년에 걸쳐 고의로 왜곡한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은 역경을 연구하여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역경의 순서와 내용을 교묘하게 뒤바꾸고 뜯어고쳐서 상(商)나라를 뒤엎고 나라를 빼앗는 도구로 삼았다. 문왕과 강태공은 가장 위대한 책을 가장 사악한 목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해 오는 역경은 문왕과 강태공이 찬역(贊易)을 한다는 핑계로 훼손하고 왜곡한 가짜 역경(易經)이다. 역경을 주역(周易)이라고 부르는데 주나라의 문왕이 만들었다고 하여 주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문왕이 교묘하게 만든 가짜 주역을 그 뒤로 3천 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진짜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그 위상을 가장 크게 높이고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다. 공자는 일생 동안 주역을 기록되어 있는 죽간(竹簡)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 닳아 없어질 만큼 주역을 연구했으나 그것이 문왕과 강태공이 만든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역경(易經)의 괘상(卦象)에 해석을 붙여 십익(十翼)을 지어 가짜 주역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십익(十翼)의 익(翼)은 날개 익(翼)이다. 새는 두 개의 날개만 갖고도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데 유학(儒學)의 시조(始祖)이며 성인(聖人)으로 칭송을 받는 공자가 열 개나 되는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이 가짜 주역이 얼마나 이 세상을 힘차게 잘 날아다닐 수 있었겠는가? ​ ​   그 뒤로 가짜 주역이 온 천하의 모든 학문을 장악했다. 교묘하게 왜곡된 가짜 주역이 천문학, 명리학, 자연과학, 수학(數學) 인문학, 생물학, 점술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공자(孔子) 뒤로 2천 5백 년 동안 주역이 가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알아차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인류는 거의 3천 년 동안 가짜 주역(周易)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암흑의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훼손되고 왜곡된 이 가짜 주역이 온 세상을 설치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유럽에서 타락한 천주교(天主敎)가 인간 정신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멀쩡한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사냥하고 면죄부를 판매하여 재물을 모으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자비한 살생을 자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마침내 밝은 낮이 오는 법이다. 올빼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썩은 고기를 찾아서 날아다니지만 낮이 되면 컴컴한 속에서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경(易經)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서 본래의 원본과 같이 복원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본래 온전한 상태로 전해 오던 역경을 가장 크게 훼손하고 조작하여 지금의 주역(周易)과 같은 가짜로 경서(經書)로 만든 자는 3천여 년 전에 살았던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강태공(姜太公)이다. 강태공은 중국을 페르시아 민족들한테 팔아넘긴 인류 역사에서 둘도 없는 최고의 매국노(賣國奴)다. 문왕은 모반을 꾀하다가 붙잡혀 유리옥이라고 하는 교화소에 있으면서 7년 동안 역학을 연구하여 복희팔괘(伏羲八卦)를 교묘하게 뜯어고쳐서 문왕팔괘(文王八卦)를 만들고 강태공을 국사(國師)로 받들어 가장 높은 벼슬을 주고 함께 역경의 대부분을 교묘하게 뜯어고치고 훼손하여 진짜처럼 위조하였다. 지금부터 3천 1백년 쯤 전에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 하는 페르시아 사람이 그 종족 간에 있었던 세력다툼에서 패하여 패잔병과 그 가족들 1,000여 가구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때 서안 지방에 있었던 강(姜)나라의 귀족 여성 강녀(姜女)가 고공단보가 서양 사람의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하여 내연관계를 맺었다. 그런 다음에 호색가(好色家)였던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삼았다. 고공단보는 강녀를 첩으로 얻은 뒤에 힘을 길러서 강나라를 집어삼키고 그 지역 일대의 모든 영토(領土)를 다스리는 제후(諸侯)가 되었다. 그로부터 3대가 지난 뒤에 고공단보의 손자인 문왕과 천하제일의 책략가 강태공이 결탁하여 온갖 위계술(僞計術)과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백성들의 민심(民心)을 조작하고 선동(煽動)하여 전쟁을 일으켜 상나라를 쳐서 뒤집어엎고 통일 왕국을 세웠다. 강태공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법서(兵法書)를 지은 전술가(戰術家)로 위계술(僞計術)과 이간(離間)질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들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준비로 상업을 크게 일으켜서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을 왕래하면서 무역을 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힘을 길렀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이 이를 알고 문왕(文王)을 서쪽에 있는 모든 제후들을 다스리는 서백(西伯)이라는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때에 문왕이 그 아버지 계력(季歷)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상나라를 뒤엎으려고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문왕의 큰아들 백읍고(伯邑考)를 포함한 일당 4-5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형리들이 문왕의 큰 아들 백읍고를 잡아서 문초(問招)를 하였더니 백읍고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문왕이 주모자(主謀者)이고 모든 것을 아버지가 시켜서 한 것이라고 사실대로 실토(實吐)를 하였다. 그래서 문왕을 주모자로 붙잡아 와서 문초를 하였더니 문왕은 태연하게 나는 그 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본래부터 그 놈은 불효막심(不孝莫甚)한 놈이므로 나를 해치기 위하여 모함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숭상하는 나라이다. 아무리 역모(逆謀)를 꾸민 죄인이라고 해도 자백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명백한 증거 없이 짐작만으로 사람을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문왕을 심문한 형리들이 그렇다면 틀림없이 대역죄(大逆罪)를 지은 네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로 국을 끓여서 너한테 줄 것이니 그것을 먹을 수겠는가 하고 물었다. 문왕은 그 놈은 국가에 반역하고 나한테도 큰 불효를 저지른 놈이므로 만 번 죽어 마땅하고 나는 그 놈의 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을 뿐만 아니라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듣고 상나라의 형리(刑吏)들은 문왕이 아들이 역적모의를 한 것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문왕을 죽이지는 않고 감옥(監獄)에 가두어 두었다. 상나라 형리들은 대역죄를 지은 백읍고를 능지처참(凌遲處斬)하여 죽였다. 능지처참(凌遲處斬)은 역적(逆賊)을 처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죄인을 십자가에 묶어놓고 산 채로 살을 회를 떠서 2-3일에 걸쳐 가장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는 것으로 천도만과(千刀萬剮)라고도 부른다. 천도만과는 천 번 살을 베어내고 만 번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이다. 실제로 살을 얇게 발라내어 수천 번을 칼질을 해서 죽인다. 형리들이 백읍고의 고기로 국을 끓여 감옥에 있는 문왕한테 갖다 주었더니 문왕은 눈도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맛있게 먹고 나서 한 그릇 더 달라고 해서 한 그릇을 더 먹었다고 한다. 반역을 꾀한 주모자라는 의심을 풀고 살아남기 위해 마음속으로는 이들 부득부득 갈면서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아들의 고기를 먹은 것이다. 형리들은 그러나 그의 행적(行蹟)에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으므로 문왕을 유리옥(羑里獄)이라는 곳에 두어 근신(謹愼)하게 하였다. 유리옥은 감옥이 아니라 교화소(敎化所)와 같은 곳이다. 이것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벌이 아니라 아들을 잘못 키운 것 곧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으로 유리옥에서 교화(敎化)를 받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서 밀서(密書)를 주고 받으면서 천하를 뒤엎을 계략을 짜 놓고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왕은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백읍고가 죽은 뒤로 문왕은 유리옥에 있으면서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과 셋째 아들인 주공(周公), 강태공과 서로 밀약(密約)을 맺고 역경(易經)을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곧 찬역(贊易)을 빙자(憑藉)하여 7년 동안에 걸쳐서 역경의 괘사(卦辭)를 모조리 뜯어고쳤다. 지금 남아 있는 가짜 주역(周易)은 본래 복희씨가 만든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고 교묘하게 뜯어 고친 부분도 있다. 중간에 있던 부분을 찢어내고 위조한 글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 제일 많다. 한문은 본디 우리나라 글이므로 우리말과 어순(語順)이 같다. 그런데 어순과 어법을 영어와 같은 방식으로 뜯어고친 것도 그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과 같았던 중국말의 어순(語順)이 영어처럼 순서가 반대로 뒤바뀐 것이다. 나중에 역경 편찬을 끝냈다고 하면서 내어 놓았을 때 그것을 살펴 본 검사관(檢査官)이 역경(易經)은 본디 어려운 것이라고 하여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가짜 주역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역경은 문왕이 90퍼센트 정도를 훼손(毁損)하고 위조(僞造)하여 그것을 온갖 반역 행위의 기본 술책(術策)을 담은 경전(經典)으로 삼았다. ​문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을 군사(軍師)로 하여 마침내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여 주나라를 세우고 첫 임금이 되어 중국 대륙 전체를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강태공은 주나라의 건국공신이며 문왕의 스승이고 무왕과 주공(周公)의 태사부(太師父)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 대륙 전체가 서양에서 망명한 페르시아 민족 곧 서융(西戎) 족한테 완전히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기(史記)를 비롯한 지금 남아 있는 모든 역사 기록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서융 족이 아니라 5천 년 전에 살았던 우리 민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35대손이며 후직(后稷)의 12대 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왕과 무왕, 강태공은 반역으로 국가를 찬탈한 것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해 조상들의 족보를 비롯하여 모든 역사 기록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조작(造作)한 것이다. 모든 역사(歷史)의 기록은 승자(勝者)가 기록한 것이다. 승자는 모든 역사를 자신의 편에 유리하게 기록하고 패자(敗者)를 불리하게 기록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가장 곧고 바른 임금이었던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역시 최고의 호걸(豪傑)이었던 하나라의 걸왕(傑王)과 함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일삼은 폭군(暴君)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왕(紂王)의 주(紂)는 곧을 주(紂) 또는 먹줄 주(紂)이고 걸왕(傑王)의 걸(傑)은 호걸 걸(傑) 또는 뛰어날 걸(傑)이다. 주왕은 먹줄처럼 곧은 임금이었고 걸왕은 가장 뛰어난 호걸과 같은 임금이었다. 문왕과 무왕 강태공, 이윤(伊尹) 같은 자들이 권력을 얻은 다음에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인물들을 가장 악한 인물로 만들어 모함하고 깎아내려서 모든 역사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걸왕과 주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첫손에 꼽을 수 있는 임금들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4대 악녀(惡女) 중에 하나로 꼽는 달기(妲己)와 말희(末喜) 또한 요부(妖婦)가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3대 귀인(貴人) 중에 하나로 꼽을 만큼 훌륭한 여인들이었다. 지금 중국에는 역경을 제대로 알고 아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중국 문화는 주나라의 영향으로 서양과 같아져 버린 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다. 중국을 동양이라고 하는데 중국은 동양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중국은 서양이다. 본래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하여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양이며 결코 동양이라고 할 수 없다. 서방(西方)은 금(金)이고 금극목(金克木)의 이치에 따라 우리나라는 목(木)이므로 금(金)과 목(木)은 절대 서로 화합할 수 없다. 금(金)은 쇠로 만든 창칼과 같은 무기이며 목(木)은 나무와 풀이다. 풀과 나무는 쇠로 만든 톱과 도끼와 낫으로 자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대충 따져 보아도 중국은 우리나라를 950번이나 침략하였다. 중국이 부강해지고 힘이 생기면 언제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패권(覇權)을 다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졌다. 앞으로도 중국은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략할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문왕과 무왕을 성인으로 여기고 존경하고 칭찬하였다. 공자는 주공(周公)을 존경하여 늙어서 기력이 쇠약하여 꿈에서라도 주공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여러 면에서 자질이 공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노나라 사관(史館)이 기록한 역사책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의(義)에 기준을 두고 가장 공정하게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 공자 자신이 가장 흉악(凶惡)한 인물인 문왕과 무왕을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로 착각하고 잘못 기록한 것이다. 문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백성들을 선동하여 성군(聖君)을 폭군(暴君)으로 조작하여 모함(謀陷)하고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서 백성들의 마음을 이탈시키고 제후(諸侯)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과 연합하여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영토를 나누기로 밀약을 맺고 계략(計略)과 힘을 합쳐서 마침내 나라를 강탈(强奪)하였다.
28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2641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27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⑤ 댓글:  조회:2222  추천:0  2018-11-25
현재의 기성 국악권력을 가진 이들의 역사는  1911년에 만들어진 이왕직 아악부로부터 비롯된다. 한일 강제병합 후 일제는 천황의 통치 아래 식민지 조선의 형식적 권력기구인 ‘이왕직’을 두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는 조선총독부가 했고  이왕직은 허수아비로서 조선왕가의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태생이 이러한 이왕직 산하의 음악기구인 아악부가  친일음악을 했을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울분에 못 이겨 그만둔 이도 있었고 먹고 사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소극적으로 활동을 한 이도 있었지만 김기수처럼 최초의 친일국악창작곡 을 작곡하여 일제에 대한 예술가적 충성심을 발휘한 사람들도 있었다. (친일문학에는 서정주, 친일국악에는 김기수) 이왕직 아악부(이하 그들이라고 부른다)가 종묘제례악을 왜곡한 것은 남상숙 선생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밝혔는데 그들이 한 짓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악은 궁중의 행사(조회, 제례, 회례)에 쓰는 음악의 통칭이다. 그러므로 아악부는 궁중음악만을 연주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들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 자신들의 음악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은 궁중음악이 아니다. 가곡, 가사, 시조도 마찬가지. 풍류음악의 일종인 와 도 그렇다. 그들은 이런 음악들을 민간음악인들을 초빙하여 배우기 시작한다. 해방이 되고 한국 전통음악계는 이왕직 아악부 출신과  민간음악가 출신으로 이루어진 으로 나누어졌다. 이왕직은 소수였고 은 절대다수였지만 이왕직들에게는 정치인들과의 연줄이 있었다.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임시 수도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결성되었을 때  이왕직들은 국립국악원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의 음악권력을 다시 찾았다. 그들은 1947년 서울대 음대가 생길 때 끼어들더니 1959년 서울대 국악과가 만들어지자 튼튼한 철옹성을 구축했다. 그들은 이왕직 시절 자신들이 익힌 음악을 정악(正樂)이라고 명명하고 나머지 전통음악을 민속악(民俗樂)이라 부르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판소리, 산조, 농악, 민요, 무속음악 등을 국악과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했고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편가르기를 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배출된 이왕직의 제자들은  국립국악원, 국악고, 타 대학의 국악과에서 활약을 하게 되었고 국악개론도 만들었다. 서울대 국악과 출신인 단국대 국악과 서한범 교수는 자신이 쓴 총 346페이지 중에서  민속악의 설명에 단 두 페이지만을 허용했다. 학문이 아니라 만행이었다. 서울대 국악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백대웅 교수는 석사논문을 세 번이나 써야 했다. 민속악인 판소리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백교수는 퇴짜 맞은 논문을 모아 라는 책을 냈고 정악과 민속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국악개론서 을 집필했다.   남상숙 선생은 환갑이 넘은 연세인데 여전히 국악계의 비주류였다. 지금까지 전임직 하나 얻지 못하고 보따리 장사로 계시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스토리의 결말은 해피앤딩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다. 이 스토리는 현재진행형이다. 결말은 아무도 모른다.  
26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④ 댓글:  조회:2586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의 종묘제례악 왜곡론은 기성 국악계에 난데없는 날벼락이었지만 그들의 카르텔은 공고했다. 이왕직 아악부 출신인 성경린은 ‘전통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말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이어오는 것으로 고악보의 것을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전통의 맥은 끊어진 것이다“ (성경린이 글로 쓴 것인데 어법도 안 맞는다)  그의 말을 서양 클래식에 비유해보자. 베토벤의 이 있는데 수백 종의 악보가 같은 표기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선율은 같은데 리듬이 전혀 다른 악보가 발견되었고 악기편성도 축소된 형태였다고 치자. 그리고 그 변형된 악보대로 을 연주한 일단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제자들이 스승에게 배운 베토벤의 을 진짜라고 한다. 왜? 전통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베토벤의 친필 악보를 복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전통이 아니다. 이런 황당한 전통론은  남선생의 기습에 당황한 기성 국악계에 빛과 소금이 되었다. 남선생은 2003년 이후로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10여 편의 논문을 썼지만 단 한 편의 반박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도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이 맥없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성 국악계의 문제가 한 둘이 아닌데  어느 하나를 인정하면 나머지도 우르르 쏟아질 테니 그들로서는 크나큰 위협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활하게 논쟁을 피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가끔씩 ‘전통론’을 방패삼아 얘기하면 되었다. 그들은 각 대학교 국악과의 권위 있는 교수였고 실기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만큼의 이론적 소양이 없었다. 그들이 이렇게 용렬하게 된 데에는  슬픈 한국음악의 역사가 있었다.    
25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③ 댓글:  조회:2333  추천:0  2018-11-25
남상숙 선생은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하여 종묘제례악이 위조라는 걸 주장했다. 그런데 국악계의 반응이 이상했다. 제대로 된 논문을 써서 반박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사적인 대화를 통해 모멸감을 주거나 학술대회에서는 말꼬리 잡기를 하며 논지를 흐리기 바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종묘제례악이 위조였다는  남선생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까지 가세하여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분위기는 종묘제례악의 왜곡을 인정하는 쪽으로 흘렀다. 국립국악원은 남선생의 논문게재를 불허하는 등 가리기에만 급급하다가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2005년 서울 국립국악원에서는 이채로운 연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회는 남선생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국립국악원이 기획한 것이었다. 바로 조선후기 고악보인 에 나오는 종묘제례악과  이왕직 아악부 악보를 계승한 현행 종묘제례악을 한 무대에 올려 청중들에게 비교,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 국립국악원의 속셈이었다. 연주되지 않은 지 100년 넘는 음악과  100년 동안 연주되어온 음악을 비교하다니 남선생의 패배가 확실한 듯 했다. 청중들은 국악학자, 국악실기인,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런데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500년 동안 유지되던 본래의 악기편성을 갖추고 규칙적인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가사단락마다 박이 오는 의 종묘제례악은  현행 종묘제례악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듣기에 편하고 아름다웠다. 고악보의 종묘제례악을 듣고 난 청중들은  왜 이렇게 좋은 음악을 이제야 연주하느냐고 했다.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복원된 종묘제례악을 찬양하는 글이 폭주했다. 꼼수를 부린 국립국악원의 완벽한 패배였다. 이 문제는 이렇게 해피앤딩으로 끝날 것 같았다.
24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② 댓글:  조회:2335  추천:0  2018-11-25
2003년 남상숙 선생은 종묘제례악이  일제강점기 위조된 가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의 단초가 된 악보가 있었으니 다. 는 종묘제례악의 변질을 기록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악보다. 조선시대 악보 중에서 이외의 어떤 악보에서도  이와 같은 종묘제례악 장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남선생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는 조선왕조의 관찬악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조작된 악보라는 것이다. 는 19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를 위조하려다보니 그보다 100년 전에 쓰여진 의 영산회상부분도 위조했음을 밝혀내었다. 남선생은 서예학자를 대동해 서체 감정을 받고 종이 연대측정법까지 동원해 이를 밝혀내었다. 그 결과 역시 일제 강점기에 일부 악보를 위조하여 합본한 것임을 밝혔다. 요약해보면 18세기 정조 때의 악보인 의 일부(영산회상)를 위조하여 18세기에 이미 음악의 장단 변화가 시작된 것처럼 꾸몄고 19세기 말에 만들어진(거짓말이었다) 에서 종묘제례악을 1자1음식으로 바꾸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6대강구조(세조때 정간보 기입시  3·2·3·3·2·3 정간으로 갈라 6대강(六大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16정간 6대강법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되었다)를 해체하여 4구로 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선율은 세종 때 그대로인데 장단만 변했다. 이렇게 되면 그 음악은 불구가 되는 것이다. 의 이러한 장단변질은  일제강점기 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제는 종묘제례악 같은 수준 높고 장엄한 음악이 그대로 전승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왕직 아악부를 통해 박과 절주가 무너진  절름발이 종묘제례악을 만들었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라는 악보를 만들어 마치 조선왕조의 장악원에서 편찬한 관찬악보인 양 꾸몄다. 조선시대 관찬악보에 편찬시기가 기록된 악보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에는 편찬시기가 다섯 번이나 기록되었다. 제발 19세기 악보라는 걸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23    종묘제례악의 변질과 전통음악의 타락 - ① 댓글:  조회:2615  추천:1  2018-11-25
이제부터 연재하는 글은 남원농악 이수자인 김정헌박사의 것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의 치욕의 역사와 그 극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련한 것이오니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종묘 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에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노래·무용의 총칭으로 '종묘악'이라고도 한다.   현행 종묘제례악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학생이었던  김기수의 악보를 모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고 김기수의 악보는 이왕직 아악부의 악보를 모본으로 만든 것이다. 김기수는 1939년 최초의 국악창작곡이자  최초의 친일국악곡인 을 작곡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립국악원 예술사, 서울대 국악과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국립국악원장,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로 현행 종묘제례악은 이 사람의 의중대로 전수된 것이다. 종묘제례악은 정대업11곡 보태평11곡으로 구성되었다. 단순한 악기 연주가 아니라 악,가,무의 종합예술이다. 세종이 종묘제례악을 당악(중국음악)으로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인 향악으로 만든 이유는 우리 나라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음악을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행 종묘제례악은 그 장단이 이상하다. 연주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규칙적인 리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무패턴 불규칙형’ 장단이라고 명명했다. ‘무패턴’이라는 건 장고의 패턴,  즉 쌍(덩),편(따),고(쿵),요(더러러러)의 타법이  일정하게 정해진 패턴이 없다는 말이며 ‘불규칙’이라는 건 박자구조가 들쭉날쭉하여 몇 박자인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슨 이런 거지같은 음악이 다 있을까? 원시인들도 이런 음악 안 할 거다. 우리가 종묘제례악을 들으면서 불편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장단이 무패턴 불규칙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원래 세종 때부터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조선전기의 악보인 , 조선후기의 악보인 등에 실린 종묘제례악은 모두 그 장단이 규칙형 장단이다.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22    서양인들이 우리민족에 대한 긍정적평가 댓글:  조회:2453  추천:0  2018-10-01
1. 마크 트롤로프는 그의 책 [The Church in Corea](1915)에서   조선인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일본사람들보다는 어깨 위로 머리 하나 만큼은 크며 건강하고 잘 생겼다고 했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 충실함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조국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는 등 용기있는 백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2. 정확하고 빠른 운동에서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강한 자립심과 자유로운 동작을 보이고 있고, 크기와 강한 점에서   중국인과 비슷하고 일본인보다는 우월하다.   국민의 좋은 특징과 질적 우월성을 비교하면 조선이 중국에 비해 단연 우위이다.  (독일인 Ernst Oppert 의 중)   3. 조선인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에 ,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 생겼다. 조선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조선인은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하다.   조선인들은 스코틀랜드식으로 말해 '말귀를 알아듣는 총명함'를 상당히 타고 났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조선인의 능숙하고 기민한 인지능력과 외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탁월한 재능, 나아가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조선인들이 훨씬 좋은 억양으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중) .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인은 잘 생긴 민족이다. 조선인의 얼굴은 타원형이고 정면에서 볼 때는 대체로 길지만,    옆 모습은 약간 오목하다. 코가 양미간에서 약간 평평하고 콧구멍이 넓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신이 본 고려사람들의 특징  "....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깎아 버리면 침골없는 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옛날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 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기품에 따라 그렇게 (납작하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고려도경] 중에서 )       5.조선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얼굴 생김새는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을 기준으로 보아 힘이나 의지의 강인함보다는 날카로운 지성을 나타낸다.   조선인들은 확실히 잘 생긴 종족이다. 체격도 좋은 편이다.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63.4센티미터이다.   여자의 평균 신장은 확인할 수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보기 흉한 옷 때문에 그 결점이 과장되는 여자들의 모습은 땅딸만하고 펑퍼짐하다. 남자들은 힘이 매우 세어서 짐꾼들에게 45킬로그램의 짐은 보통이다.   가족 생활은 대가족제이며 도덕적으로 지극히 건강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위의 책 중)       6. 조선인은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으며 예리하고 탐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단력을 갖춘 자랑할만한 민족.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 (영국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글 (1870) )   10.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는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조선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없다.    협잡을 업으로 하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그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령 만주에서의 한국인들의 에너지와 근면함 그리고 그들의 검소하고 유족하고 안락한 집의 가구들을 보고 난 후에 나는 그것이 기질의 문제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조선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관리들의 수탈이 아주 견딜 수 없게 되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입마저도 빼앗겼을 때에만 한국의 농민들은 폭력을 통한 절망적인 방법에 의지하게 된다.... ...   조선인들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들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1. 마을마다 북과 나팔, 피리, 몇 개의 솥 뚜껑이 있어서, 흔히 여름철의 고달픈 노동 시간 중에   한참 동안 일손을 멈추고 힘껏 합주하여 피로를 푼다.....   조선 사람의 커다란 미덕은 인류애 법칙을 선천적으로 존중하고 나날이 실행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나 특히 친척이 서로 보호하고 서로 원조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부조하기 위해 긴밀히 결합된 단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포 감정은 혈족 관계와 조합의 한계를 넘어 확대되어 간다.   상호부조와 모든 사람에 대한 혼현한 대접은 이 나라 국민성의 특징인데, 속직히 말하여 그런 특징은 조선 사람을 우리 현대 문명의 이기주의에 물든 여러 국민들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 프랑스 신부 달레(C.C. Dallet)의 중 )     12. 조선인은 일반적으로 모나지 않고 상냥하며 남에게 잘하는 성품을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어를 이해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과 춤에 천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고운 마음씨는 예나 다름이 없어 다른 민족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다.  (프랑스 선교사이며 지리학자인 뒤 알드(Du Halde)의 글)     13. 아시아 민족 중에서 조선인보다 더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호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 것이다. 군부의 어느 대신이 손풍금의 연주에 감동하여 평소의 엄숙한 태도를 던져버리고 박자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페르트) *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어느 민족보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전문가들은 우리 전통사회가 드물게 보는 억압적인 사회였기에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정서적으로 발산시키는 수법으로 노래가 이용됐다는 이론을 든다. 한이나 원을 스스로 풀어야 하는 성격 때문에 우리 민족은 노래 중에서도 독창이 발달했고 그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미친듯이 악을 쓸 수 있는 노래방이 폭발적 인기를 누린 것이다.     ". .... 조선은 기대 이상이었다. 조선에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은 내가 가본 나라 중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르는 나라'라는 것이다. 나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뉴질랜드 일본 태국 베트남 영국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살았고 여행도 해보았다. (현재의 북조선과 한국도 마찬가지.)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노래를 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노래를 부를 자세가 되어있다. 혼자서도 부르고 여럿이 같이 부르기도 한다. 라디오를 따라 흥얼거릴 때도 있고 텔레비젼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서 같이 부를 때도 있고,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5년 동안 근무한 일본에서도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가라오케에 가곤 했다. 몇몇 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도 있고 텔레비젼에 출연한 일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뭔가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과 같은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한국사람들은 노래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은데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다....... 정말 조선인/한국인은 어디서나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찬호 선수가 공을 던질 때도 노래를 할까? 잠실 야구장에 가서도 관중들이 응원하는 광경에 감동받았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얼마나 노래를 많이 부르는지, 도대체 이 사람들이 노래하러온 것인지 야구를 보러온 것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은 노래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일요일 명동성당 미사에 갔을 때 들은 합창이다. 미국의 성당에서 다 같이 노래하는 것은 대개 억지로 하는 일 같은 것으로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같지만한국 카톨릭 신자들이 노래하는 것은 진짜로 노래하는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곳에 있고 싶어 하고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일까. 한국인들은 행복하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이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주한 美 공보원 공보관 패트릭 리네핸. 주간조선 97.8.7일자)     14. 조선 사람들은 양반이나 서민이나 활쏘기를 좋아한다. 정부는 이 운동이 훌륭한 사수를 길러내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장려하고 있다. ..... 조선인들은 유약하다거나 비겁하지 않다. 신체의 단련이며, 활쏘기, 사냥에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고, 피로 앞에 굴복하지 않는다.  (위 달레 신부의 글 중 )   15. 남자들은 석전(石戰)을 매우 진지하게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이른 봄이 되면 서로 적수인 두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들판에 모여 어느 편이 힘이 센지를 겨루는 시합을 한다. 머리에 새.끼줄로 만든 헬멧을 쓰고 곤봉으로 무장한 선발대가 중립 지대를 가로 질러 상대편에게 덤벼들면 후방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 상대편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한다. 이들은 돌팔매질을 능숙하게 하기 때문에 돌팔매질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일반적으로 이러한 실감나는 싸움 끝에는 몇몇의 사망자와 심한 부상자들이 많이 생긴다. 내가 조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이러한 싸움이 벌어진 후, 전두골의 두개골판이 부숴져 뇌가 들여다 보이도록 심하게 다친 한 남자가 나를 찾아 왔다. (헐랭-_-;;;;;다이나믹) ( 의사, 외교관이었던 H. A. 알렌의 중) 16. 조선에서 내가 처음으로 한 절단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느 조선인의 팔을 절단하는 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행한 절단 수술이었다. 그 환자는 팔꿈치 위쪽의 팔뼈가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건강하게 회복되어 그 환자의 친구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는 호랑이와 외국인 의사로부터 살아서 돌아갔지만, 이제는 팔 없이 조상에게 가야 할 형편이었다. (알렌의 글 중 )   17. 조선에서 호환이나 금에 관한 이야기만큼 많은 화제거리가 있을까 싶다. 조선은 금생산지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며 금부스러기들을 마치 금의 사태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한다. .... 호랑이와 귀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는 거의 여행하지 않는다. 관리의 신분증을 가진 사람들이 부득이 밤에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마을에 들러 횃불가진 사람들의 호위를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행할 경우 길손들은 보통 몇몇이 서로를 끈으로 묶고 등불을 밝히고 횃불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꽹과리를 치며 길을 간다. 조선사람의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너무나 유명해서 '조선사람은 일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일년의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숍 여사의 글 중 )   18. 사람이 수백 명이나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에서 나는 벌써 여러 번이나 키가 서로 틀리지만 나무로 만든 막대기가 여러 개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과연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을 때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가! 자세히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동리의 우상신이었으며, 사원 혹은 기도소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것을 보호할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행길 가의 땅바닥에 그냥 박아 놓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무 의식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키가 대강 두 자에서 네 자 가량 되는 통나무 토막에 하느라고 하였다는 장식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 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쪽 끝에다가 가장 원시적인 기술로 기분 나쁘게 찡그린 얼굴을 새긴 것이 곧 모든 장식이다. ( 오페르트)   19. 조선은 유교로부터 윤리를, 불교를 통해 미래의 소원을,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병이나 초상 등 민감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는 무속 신앙에 의존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종교를 무리 없이 포용하는 그들의 삶은 인상적이다.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학자)   20. 조선/ 한국 사람들은 과음하는 관습이 유난스러워서 주정뱅이들이 보이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관찰한 결과로는 취해버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품위를 떨어 뜨리는 일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곡주를 마신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짐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이 술을 좋아하는 첫번째 원인은 아마 도시에서조차도 차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과 사치스러운 청량음료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듯하다. 아마도 식수로 쓰는 물이 훌륭해서 대부분 그냥 먹을 수 있는 탓일 것이다. 농부들은 식사 후에 뜨거운 숭늉을 마시며, 꿀물은 사치품으로 생각하고, 잔치 같은 경우에는 귤 껍질이나 생강에서 우려낸 액체를 마신다. 귤껍질을 말리는 것은 한국 주부들의 큰 일 중의 하나이다. 모든 초가집 지붕에는 말린 귤 껍질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비숍 여사)   고려시대 음주 문화  "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시는 것은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다." ( 宋의 사신 서긍의 [고려 도경] 중에서 )     21. 동북 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管)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 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 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煙管)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W.E. Griffis의 중)     22. 농부나 일꾼들이 사는 집이 아무리 누추하다 하더라도 항상 깔끔한 작은 침실이 딸려 있는데, 진한 갈색의 유지가 발라져 있는 구들과 시멘트로 된 방바닥은 하루에 두 번씩 밥을 하느라고 때는 불 때문에 항상 따뜻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이들은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더 편하게 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집들은 춥기로 유명하고, 유일한 난방 시스템은 손가락을 따뜻하게 하는데 사용되는 화로가 전부이며, 또 중국의 집들은 아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가지 난방 시스템은 북쪽 지방에서 사용되는 식으로 불에 달군 돌 이외에는 집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중부의 가옥들은 매우 추울 경우에도 집이 전혀 따뜻하지 않아 사람들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저 옷을 더 껴입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국인 여행가인 헨리 노먼은 조선을 여행하는 동안 놀랍고 아름다운 이 나라를 매우 칭찬하였으며, 베이징을 방문한 후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베이징과 비교하면 천국이라고 쓰곤 했다.  (알렌의 견문록 중 )   23. 조선인들이 등으로 크고 무거운 짐들을 쉽사리 운반할 수 있다는 것에는 벌써 주목을 하였지만, 이곳 공주(公州)에서는 운반하는 짐의 무게가 차원이 달라 두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짐을 운반하는 기술에는 수천년의 경험이 어려 있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최대한의 무게를 운반하는 비결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비결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지게는 아주 이상적으로 고안이 되어 있어서, 엉덩이와 등, 어깨에 무게를 고르게 전달한다. 이런 이유로 다리만 지탱할 수 있는한 엄청난 짐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인을 빼놓고는 이 방법을 착안한 민족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운반력이 강한 중국인과 폴리네시아인들의 경우, 어깨 위에 걸친 막대의 양쪽에 짐을 걸고 무게 중심을 맞추는데, 만약에 짐이 분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일 때에는 막대의 다른 한편에 무게가 같은 물건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운반하는 데 넓은 공간이 필요해서, 이렇게 운반하는 사람을 지나칠 경우, 이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 때는 운반대에 죄없이 한 대 맞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게의 경우는 훨씬 간단하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대량의 짐을 장거리 운반하는 능력과 엉망인 도로 사정은 코레아가 수백 년 동안 대부대의 행상을 갖게 된 원인이 되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중 )     26.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조선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하천에서, 궁궐 후원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 곡곡의 모든 물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조선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어떤 빨래감은 실을 뽑아 다시 꿰매야 하며, 또 어떤 빨래감은 부뚜막에서 적어도 세 번은 삶아야한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나무판에 억척스럽게 문지르거나, 판판한 돌 위에 놓고 무거운 방망이로 힘겹게 두드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이것들을 들고가 빨랫줄에 널어 말린다. 빨래가 다 마르고 난 뒤에는 다시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둥근 나무 방망이로 두꺼운 공단처럼 광택이 날 때까지 한없이 두드린다. 조선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서울의 깊은 밤, 그 괴괴한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소리가 있다면 한밤내 잠 못 자고 다닥 빨래감을 두드리고 있는 다듬이 방망이의 그 쓸쓸한 소리이다. (비숍 여사의 글 중)   27. 옷은 특히 모시 옷일 경우에는 다림질하는 대신에 비단과 같은 광택이 나도록 하기 위해 다듬이질을 한다. .... 네개의 방망이가 내는 율동적인 소리는 매우 기이하여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은둔 생활을 하는 조선의 여인들은 인내성이 강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일변하여 매우 광포해지기 때문에 생각하기조차 무시무시하다. 그때 다듬이 방망이는 무시하지 못할 믿음직한 무기가 되며, 남자들도 그 방망이를 무서워한다.. (알렌의 글 중)       참고6> 조선민족과 흰 옷  ① 고대 한국인들도 흰 옷을 즐겨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인들은 흰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소매가 큰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다. 이러한 풍습은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문헌에는 신라인들이 흰색 옷을 숭상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백제에 대해서도 의복이 청결하다는 점을 일부러 밝혀놓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는 것은 밝고 깨끗하고 우아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의복 생활에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프랑스 캐주얼 브랜드 [라코스테]의 국내 라이선스를 갖고 있는 (주)서광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옷 색깔은 하얀색이다. 국내에 내놓은 45개 색상 라코스테 셔츠 중에서 지난해 판매율이 가장 높은 것이 [흰 색]으로 28.7%를 차지했다. 2위는 빨강 7%, 이어 하늘색(6.8%), 검정(6.4%), 밝은 핑크(6%), 짙은 청색(5%), 연두색(4.6%), 베이지색(4.4%), 노랑(2.7%) 순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인은 짙은 청색(네이비 블루)를 즐겨 입는다. (조선일보 97.5.27일자    29. 모자를 쓰지않은 조선인의 모습을 생각할 수 없다. 모자의 종류도 수천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모자 왕국이다.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자를 지니고 있는 나라를 본 적이 없다. 공기와 빛이 잘 통하고 여러 용도에 따라 제작된 조선모자의 패션을 파리인들은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 프랑스인의 기록 )    1877년 영국 화보지 그래픽지 [조선의 모자]라는 특집 다룸.   30. 영국인 여행가는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원을 쓰는 대신 조선인들이 가장 호기심을 갖는 서양의 잼, 통조림, 빵 등을 소지하였으며, 위험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것들을 보이며 어려움을 돌파했다. 특히 조선인들은 성냥에 매료돼 서로 성냥을 켜보려고 몰려들기도 했다. 이 덕분으로 조선의 지방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 영국의 화보잡지 [그래픽] 1888년 12월 22일자)   31. 사당에서 정상을 올려다 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구비구비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선들, 그 위로 해발 1829미터가 넘는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음,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 ( A fair land of promise ) 인저! 진정코 !  (비 숍 여사)     32.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 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다음날 영국 정부의 작은 기선인 상하이행 헨릭호를 타고 무자비하고 엄혹한 북풍에 실려 제물포를 떠났다. 그리고 헨릭호가 강 위로 천천히 증기를 발산하며 움직일 때, 옛스러워 흥취있는 한국의 국기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회와 의문들을 자아내었다. (비 숍 여사)     33. “‘코리아’ 민족은 양반들뿐만 아니라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 들조차도 귀족의 티가 흐른다.  체격과 외모 면에서도 일본인, 중국인들과 비교해 매우 귀족적이다. 특히 여성들은 일본, 중국 여성들보다 훨씬 미모가 뛰어나다. 또한 머리 전체를 뒤로 땋아 넘 긴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은 헝가리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과 매우 비슷하여 퍽 인상적이었다.” (헝가리 민족학자 바라소시 1929년 '코리아..'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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