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두만강을 따라(9) 두만강공원 리 함 연변에서 두만강에 붙은 도시는 도문시 하나밖에 없다. 그만큼 두만강하류 일대에 위치한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남양과 마주하고있는 아름다운 국경도시로 이름이 높다. 면적은 1142.3평방킬로메터, 인구는 13.7만명, 그중 조선족이 7.7만명으로 56.4%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도문의 옛날 이름을 회막동(오늘의 집중촌)으로 알고있지만 개척초기의 도문벌은 어우벌로 통했다. 조선의 남양을 전에 어우라고 했는데 이곳에 살던 농민들이 자기들이 건너와 개간한 벌이라해서 이렇게 불렀다. 19세기 60년대 이전에 조선 어우에는 사람이 많은데서 어우의 좁고 여윈땅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한데서 조선사람들은 그때 벌써 비법도강하여 도적농사—날농사를 지었다. 19세기 60년대 조선 함경도지방에 특대재해가 거듭되자 그곳의 조선사람들은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건너섰다. 도문일대에 남석, 시거니, 삿갓봉, 가는골, 구시통, 모두미, 봉오골, 안산, 석재, 새밭굽, 어우벌, 회막골, 박달봉 등 새마을들이 생겨난것은 19세기 70년대와 90년대 사이이다. 월청진의 이주개척은 연변치고 가장 빠른 고장의 하나인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엽에 벌써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가만히 건너 이골저골에 숨어살았다. 도문시소개에 따르면 1925년에 겨우 20여호가 정착했다고 하는데 이는 력사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1910년 좌우에 이르러 동경동(오늘의 오공촌)의 조선인농가만 해도 약 20세대에 달했다. 그외 새밭굽이 약 10세대, 구시통에 몇세대, 모두미에 몇세대, 안산에 7-8세대, 달라자에 10여세대, 봉오골에 20-30세대, 남봉오골과 신선동에 10여세대였다. 석재의 조선인농가는 더욱 많았다고 한다. 후에 도문은 회막동으로 불리였다. 1931년에는 제법 100여세대를 가진 작은 진을 이루었는데 1933년부터 도문—돈화철도가 개통되면서 회막동이 시발점으로 되였다. 이에 따라 회막동이 도문으로 개칭되였다. 광복후 1956년에 도문진이 설치되고 1965년에 연길현 관할구 도문진과 왕청현관할구 석현진이 합병되여 도문시를 이루었다. 도문시가 조국의 판도에서 변강도시로 알려진것은 1965년 5월 1일,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에서 도문시를 정식으로 비준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는데서 해마다 수많은 국내외관광객들을 끄는 개방, 관광도시로 떠올랐다. 그만치 도문은 연변각지와 장춘, 심양, 단동, 대련, 북경, 목단강, 할빈으로 통하는 렬차의 시발점이고 두만강연안에서 륙로와 철도로 조선과 무역을 하는 연변의 제일 큰 해관—도문해관을 가지고 있다. 도문시치고 유람객을 무척 끄당기는 것은 그래도 두만강공원이라 하겠다. 두만강공원은 두만강언제를 수축하면서 생겨난것으로서 그 길이는 도문해관 웃켠으로부터 두만강과 가야하가 합치는 합수목까지 1500메터에 달한다. 도문시에서는 1983년부터 두만강언제를 수건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에서는 두만강언제를 시초부터 사람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자연공원으로 만들려고 구상하고 언제의 너비를 12메터로 하고 강쪽에 란간을 설치하였다. 언제의 서쪽켠엔 41개의 가로등을 가설하고 잔디를 심고 나무를 심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가로등불빛이 두만강에 비치여 두만강공원의 밤경치가 황홀하기 그지 없다. 1989년에 도문시정부는 법적으로 두만강공원을 《도문시중점풍경명승 보호단위》로 결정했다. 두만강공원의 면모는 날따라 개선을 가져와 밤에도 대낮처럼 밝다. 한데서 이곳 시민들은 어두움이 깃들면 두만강공원을 거닐며 저녁의 한때를 즐기군 한다. 국제하천인 두만강에서의 배놀이, 뽀트놀이는 당지인은 물론 국내외유람객들에게 잊을수 없는 회억을 남겨준다. 오늘날 도문시의 두만강공원은 국내외 유람객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되였다. 1992년이후 훈춘시가 동북아의 금삼각주로 떠오르면서 도문이 갖는 의의는 보다 커지였다. 그에 따라 두만강공원은 더욱 많은 유람객들을 끌면서 번영의 일로를 달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