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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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천리두만강을 따라(10)ㅡ충청북도마을 정암촌 댓글:  조회:4304  추천:72  2005-06-10
천리두만강을 따라(10) 충청북도마을 정암촌 리 함 10여년전에 훈춘시 량수진이 도문시에 귀속된데서 이 진의 충청북도마을 정암촌이 도문시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게 되였다. 량수진 정암촌은 충청북도 사람들이 모여살고있는 마을인데 량수에서 북으로 9키로메터 되는곳에 자리잡고있다. 어찌하여 함경도도 아닌 남쪽 충청북도의 사람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을가, 말을 하자면 지난세기 30년대로 이어져야 할것 같다. 30년대중기로 헤아려지는 1937년도에 북간도땅 일제 만척주식회사에서 조선의 어느 회사와 합작하여 충청북도에서 이주민을 모집하였다. —북간도는 땅이 많으니 네가 부쳐 네가 먹어라 —북간도의 조이삭은 방치만 하고 감자는 물동이만큼 크다 —북간도에서는 콩대와 조이대를 지팽이까지 한다 북간도가 살기좋다는 귀맛당기는 솔깃한 말들은 충청북도 사람들의 마음을 둥둥 뜨게 하였다. 땅이 적고 인구가 많은 현실, 일제침략자들의 악착한 략탈현실은 북간도이민붐을 일구었다. 충북 옥천군, 보온군, 청주군 3개군에서 180세대 이민세대가 이민행렬에 가담하였다. 기차에서 내리니 조선 최북단의 온성땅인데 개털모자를 눌러쓴 국경수비대의 모습은 보기에도 무서워났다. 때는 1938년 정월, 한기가 뼈속까지 스며드는 한 겨울이다. 북간도의 추위는 여우도 눈물을 흘리고 박달나무도 얼어터진다더니 북간도에서 넘어오는 두만강 강바람은 벌써부터 오싹오싹해났다. 어떤 애들은 북간도는 안 간다고 떼질쓰는데 《못사는 놈이 어디간들 편안한 땅이 있겠느냐!》는 부모들의 눈물에 젖은 통탄앞에 무너져 내렸다. 무서운들 어찌하랴, 살길찾아 이민행렬에 가담한 그네들이였으니 모든것을 운명에 맡길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청주군 동평리에서 이민온 리룡안은 1927년생인데 이민시 11살이라 고추단지를 들어야 했다. 헌데 온성에서 내리니 너무도 손이시려 고추단지를 안고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는 이야기— 1992년 1월 23일에 녀류작가 리혜선씨와 함께 당시 량수진사법조리 최국철(지금 연변일보사 도문주재기자)의 안내하에 정암촌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해 65살이였던 리룡안로인이 들려준 이민이야기가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귀전에 들리는듯 싶다. 1992년 그해 68살이였던 안로인 라기순은 필자일행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라기순(충북 보온군 출신)은 하마탕이민에 속했다. 그들은 하마탕에서 하루 밤자고 소양툰에 가서 막을 칠때까지 남의 집 껴살이를 했는데 이 마을은 한족들이 많은 동네라 언어소통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 지금(1992년) 정암촌 촌서기의 아버지가 한 《츠판바(吃饭吧)》 말이 《씨팔놈아》로 들리였고 한 녀인의 《비달라!》는 말이 한족들한테는 쌍소리로 들려 싸움이 크게 붙었단다. 그러던 라기순네는 정암촌에 옮겨 앉아 필자일행에게 이민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였다. 말그대로 충북 3개군 180세대중 100세대는 왕청현 하마탕으로 떠나고 80세대가 오늘의 량수진 석두촌에 떨어졌다. 그날이 1938년 정월 13일. 첫 이민마을은 석두하 동남요 광산마을(지금의 10대)인데 첫해는 막을 짓고 살다가 이듬해 1939년에야 집을 짓고 들게되였다. 헌데 하늘도 무정하여 이해 큰 장마가 지는 통에 사람들이 몰살당할번 했다나. 집들이 한 절반나마 밀린 기막힌 현실에 학교다닐 학생이 60명쯤 되는데 월사금 댈 돈이 없어서 석두의 국민학교에 여라문밖에 다니지 못하였다고 한다. 광복전 정암촌은 서백림으로 통하였다. 광복직후 마을 북산 산우에 정자같은 바위산이 우뚝 솟았다하여 정암촌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돈벌면 고향간다!》더니 끝내는 세월속에 묻히여 물안고만 충청북도 이민들이다. 1992년에 보니 정암촌은 160세대 가량인데 충북분들은 약 40%로서 말짱 충북도 사람들인것이 아니였다. 충북도 사람들도 당년의 아이들이여서 92년도 그해 부모세대에 속하는 이민 1세는 한분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험악한 시절의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나 충북맛을 짙게 풍긴다. 연변일보사 기자 최룡관시인은 1992년 11월 24일부 흑룡강신문에 실린 련속기행수필(8) 《충청북도의 씨앗이 꽃핀 정암촌》에서 이렇게 썼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이향맛이 물씬 풍기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찧고 께끼고하는데 조선 팔도의 별명이 거지반 나왔다. 〈경상도 문둥이요〉, 〈전라도 개똥새요〉, 〈단천 되거리요〉,〈서울 깍쟁이요〉, 〈호원 참새요〉, 〈명천 짜드래기요〉하더니만 누군가 불쑥 〈우린 충청도 량반이께〉하였다. 그바람에 지붕이 날려갈듯한 폭소가 터지였다. 제 고향에다 량반이라고 붙이는 그들의 애향심이 뭉클 안겨와서 눈굽이 쩌릿해났다.》 고향애에 젖은 애향심이라 하겠다. 어언 이민 66돐이 되는 오늘도 그네들은 말씨나 풍속들에서 그제날의 남도전통을 고이 간직하고있다. 오늘의 량수진 정암촌은 서서히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1992년 그때는 초가집에 헐망한 집들이 시야에 안겨들어 마음도 무겁더니만 지금은 정암촌에 아담한 새주택들이 일어서서 위안을 받게된다. 도문시에서 지난해 년초부터 결심하고 새 주택건설을 다그치더니 정암촌에만 해도 31채의 새 주택이 건설되여 년말까지 새집들이를 끝낸 기꺼운 현실이다. 게다가 정암촌 북산에는 발해시기의 산물로 추측되는 산성과 우뚝 솟은 바위산봉우리가 있어 관광명소로의 위치를 올려가고 있다. 1992년 년초 필자일행이 두만강 이민답사에 올랐을 때 정암촌으로 안내해주었던 고마운 최국철씨는 2003년 12월 29일부 연변일보 월요특간—도문특집 7면에 이렇게 썼다. 《정암산성은 도문시 량수진에서 북쪽으로 10킬로메터쯤 떨어진 정암촌 북산에 있다. 산등성을 따라 불규칙적인 3각형으로 수축된 산성은 총길이가 2800메터이고 성벽내측에는 31개의 병영자리가 있다. 산성의 형체와 건축조형으로 고고학계는 발해시기의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도있다. 주급문화유적지로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고있지만 미래의 관광지로 각광받고있다.》 관광명소로 떠오를 정암산성소개이다. 충청북도마을 정암촌에 정암산성, 관광객들이 몰려들 그 나날을 기대해 본다.
10    천리두만강을 따라(8)ㅡ봉오동전적지 댓글:  조회:3702  추천:52  2005-06-10
천리 두만강을 따라(8) 봉오동전적지 리 함 두만강가에 자리잡은 국경도시—도문시치고 으뜸가는 관광명소는 봉오동전적지를 꼽아야 할것이다. 봉오동전적지를 알자면 당년 일제놈 100여명을 쓰러눕힌 봉오동전투 전후관계를 소개하지 않을수 없다. 도문시에서 북으로 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산너머에 후안산이란 고장이 있다. 해당자료를 보면 1920년 6월 4일의 삼툰자전투와 이어진 6월 6일밤의 후안산전투가 이곳의 5호동네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간평을 거쳐 이곳으로 갔을 때 마을로인들은 그런일이 없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목도고개너머 전안산에 김룡손이라는 로인이 가능하게 알거라고 하였다. 일제측자료에 의하면 조선측의 강양동과 중국측의 삼툰자에서 독립군에게 얻어맞은 일제놈들은 독립군부대를 일망타진하겠다고 미쳐날뛰며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부대 200여명을 편성하여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게 하였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안산뒤 목도고개를 넘어섰다가 5호동네를 발견하였다. 적들은 길안내자를 구하려고 불빛이 새는 한집을 찾았다. 적 척후병이 정주문을 여니 2명의 조선녀인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없다는 품이 수상쩍어보였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제끼니 독립군 여럿이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찰나 한 독립군전사가 제꺽 총을 들어 적척후병을 쏘아 눕혔으나 뒤이어 몰려드는 적을 당해낼수 없었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뒤문을 차고 뒤산으로 내달았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자기편 1명이 부상당하고 독립군 1명과 지방인 1명이 즉사했으며 6명을 포로했다고 하였다. 지방인 즉사란 최진삼의 안해 김씨를 가리킨다. 그날밤 김씨는 시동생인 최진포(일명 최진국)의 집에서 동서와 함께 10여명 모연대의 새벽밥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던것이다. 전안산(도문시 홍광진 안산촌)의 김룡손로인 (1990년에 78살, 당지 태생)을 찾으니 그번 전투에서 김씨녀인이 확실히 적탄에 맞아 사망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5호동네는 후안산이 아니라 전안산뒤 목도고개너머의 강건너편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또 전안산과 후안산일대는 신민단부대의 주요한 활동지라고 덧붙혔다. 그날 우리는 김로인한테서 남봉오골과 북봉오골의 토막사건을 들추어냈다. —남봉오골이란 지금의 흥진을 말하는데 일명 고려툰이라고 하였다. 이골의 신선더기(흥진3대)에서 리인진이라는 사람의 안해가 독립군의 밥을 해주다가 그번 토벌에 사망되였다. —봉오동전투때 북봉오골(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골짜기) 군중 여럿이 피란중 생죽음을 당했다. 북봉오골은 지금의 흥진치기와 고개하나를 사이두고있다. —당시 주인없는 말 한필이 안장을 지닌 채 흥진치기로 넘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7-8살에 지나지 않았던 룡손이와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그 말을 붙잡자고 야단을 부렸다. —봉오동전투가 벌어진 날 오후 1시쯤에 큰비가 내렸다. 김룡손로인이 꺼낸 토막사건 하나하나가 봉오동전투의 자료보충으로 되는 귀중한 력사사실들이였다. 알고보니 5호동네에서 사망된 녀인의 이름은 김숙정이였다. 1920년 6월 6일 밤에 김숙정녀인은 동서와 같이 밥을 짓다가 적들과 맞다띄우게 되였다. 총 싸움이 벌어진후 신민단의 13명전사들은 뒤문으로 빠지고 전안산의 최명국 등은 자리를 옮기였다. 동서인 최진포의 안해도 어느결에 김숙정의 집으로 피하고 없었다. 홀로 남게 된 김숙정은 무섭기만 하였다 하여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두집사이에서 적탄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 이는 지난 80년대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일군이였던 고 강룡권선생이 1985년과 1988년, 1989년 세차례에 걸쳐 도문시 서쪽가 오공촌의 최상준로인을 방문한 해당 자료이다. 5호동네에서 사망한 김숙정녀인은 바로 최상준로인의 어머님이였다. 1991년 11월 23일 오전에 연변력사연구소의 연구일군들은 소형뻐스를 리용해 동북방 봉오동으로 갔다. 연길에서 도문시 북쪽의 봉오동어구 수남촌까지 한시간, 거기서 다시 산길을 따라 봉오동전적지까지 반시간! 전체 로정은 약 70킬로메터였다. 도문시에서는 서북으로 약 10킬로메터 정도다. 수남촌을 지나고 토성자마을을 지나면 봉오동저수지 검사소가 나타난다. 산기슭을 따라 한참 가니 골짜기를 가로막은 봉오동저수지땜과 눈뿌리 모자라게 뻗은 저수지가 시야에 안겨들었다. 이 저수지는 1982년에 완공되였는데 도문시 음료수의 주요한 원천이였다. 저수지입구의 길가에 《봉오동반일전적지》패말이 세워져있었다. 그 패말을 보노라면 1920년 6월 7일에 있었던 봉오동전투가 신기루마냥 펼쳐진다. 1920년 6월 6일 밤 안산의 5호동네와 남봉오골 신선더기에서 참상을 빚어낸 일제 월강추격부대는 새날새벽에 봉오동밖의 고려령부근에서 독립군소대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었다. 그때 봉오동골짜기—북봉오골—에 주둔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 반일부대 300-400명은 새로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한 뒤 봉오동 여러 마을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봉오동 상촌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 고지에 진을 치고있었다. 6월 7일 아침 월강추격대놈들은 반일부대의 뒤를 밟아 봉오동하촌에 기여들었다. 중촌에서도 독립군의 그림자도 발견못한 놈들은 반일부대가 저들 기세에 눌려 북으로 패주한줄로 알고 기고만장해서 상촌에 접근하였다. 하촌과 상촌사이는 약 10킬로메터의 거리였다. 점심때였다. 적 척후병이 반일부대가 매복한 산밑의 홈채기에 들어섰다. 이어 적 주력부대가 따라들어서자 삼면고지에서 대기하고있던 반일부대는 홍범도장군의 사격령에 좇아 일제히 맹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급기야 응전했으나 피동에 빠지고말았다. 홍범도장군의 지휘부가 설치된 서산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홈채기복병의 몰사격을 면치 못했다. 적들이 방향을 홈채기복병들한테로 돌리자 동산 시루봉에 진을 쳤던 최진동부대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했다. 반일부대의 일련의 유인작전에 들었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적들은 퇴각을 시도했다가 퇴로를 차단하여 나선 남산 신민단부대의 공격을 당했다. 적진은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다. 말에서 곤두박질하는 장교놈들, 살겠다고 줄행랑을 놓는 놈들, 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놈들—세시간 남짓한 응전도 기울어진 대세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천지가 어두워지며 소낙비까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은 일시 적아를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 란사하다가 퇴각길에서 또 맹추격을 받아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여명, 부상자가 수십명에 달한다고 한다. 독립군도 사상자 여럿을 냈다. 한 독립군의 시체앞에서 고향친구가 설음에 북받쳐 지은 시가 있다. 내고향 몇천리던가 고향을 떠난후 만주벌판에 황혼에 싸여서 늦은 저녁에 사랑하는 내 동기는 사직을 한다 적탄에 쓰러진 동기앞에서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으며 상처는 일없다, 정신차려라 동기야 이 산천아 암만 불러도 말없는 시체의 식은 팔목에 시계는 여지없이 돌아가누나 남자의 리별인가 수풀속인가 가난한 앞뒤집에 태여난 이몸인 나는야 승리의 기발 높이들고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라리 너를 두고 가는것은 아득하지만 결국에 네 원쑤는 내가 갚으리 동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것은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독립군노래이다. 전적지를 답사하는가운데서 우리는 무장으로 일제를 항격한 반일투쟁이 민중의 성스런 안받침과 갈라놓을수 없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삼툰자와 5호동네, 남봉오골일대가 그러했고 봉오동의 작전지역들이 그러했다. 봉오동과 그 연도의 간도국민회소속 제1남지방 회장 마룡하와 제2북지방 회장 김정도는 산하 각 지회장앞으로 속보를 띄우며 전투전과를 알리는 한편 군사통신의 신속한 수행에 힘다했고 간호대의 파견과 군량, 군수물자의 공급을 시달하였다. 이렇게 두만강가의 삼툰자로부터 적을 끌어다가 봉오동골짜기에서 일망타진한 조선인반일부대의 장한 기상과 그 기상을 받들어나선 민중의 헌신적투쟁열이 봉오동 전쟁의 승리를 안아오게 하였다. 답사시 우리는 독립군부대가 이동했다는 북쪽골로도 들어가보았다. 1킬로메터쯤 걸으니 페헤로 된 사슴우리가 나타났다. 북쪽골은 여기서 또 두갈래로 갈라졌는데 오른쪽골—동골을 민간에서는 《도투묵은데골》이라고 불렀다. 그전의 삼개마을이 이 골안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상촌은 왼쪽골 어구에 자리잡았는데 그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다. 상촌자리에서 보니 서쪽켠이 석현방향이고 동남쪽이 후안산방향, 남쪽이 봉오동전투지점이였다. ※ ※ ※ 봉오동전적지에 대한 답사가 끝난지도 10여년이 되였다. 유감은 삼툰자와 마찬가지인가 본다. 오늘날 저수지로 향한 길가 펑퍼짐한 곳에 봉오동전적지소개비가 일어서긴 했으나 다른 그 무슨 관광시설은 찾아볼수가 없다. 도문시에서는 응당 으뜸가는 관광명소로 위치를 올리고 봉오동전적지관리소와 전문 관리일군, 강사를 두고 봉오동전투박물관을 세워야 했다. 그러면 주내는 물론 국내외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들며 한다하는 관광지로 뜨겠는데 시산한 현실이 안스럽기만 하다. 우리 조선족의 빛나는 반일투쟁력사여서 더욱 그러한가 본다.
9    천리두만강을 따라(9)ㅡ두만강공원 댓글:  조회:3008  추천:72  2005-06-10
천리두만강을 따라(9) 두만강공원 리 함 연변에서 두만강에 붙은 도시는 도문시 하나밖에 없다. 그만큼 두만강하류 일대에 위치한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남양과 마주하고있는 아름다운 국경도시로 이름이 높다. 면적은 1142.3평방킬로메터, 인구는 13.7만명, 그중 조선족이 7.7만명으로 56.4%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도문의 옛날 이름을 회막동(오늘의 집중촌)으로 알고있지만 개척초기의 도문벌은 어우벌로 통했다. 조선의 남양을 전에 어우라고 했는데 이곳에 살던 농민들이 자기들이 건너와 개간한 벌이라해서 이렇게 불렀다. 19세기 60년대 이전에 조선 어우에는 사람이 많은데서 어우의 좁고 여윈땅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한데서 조선사람들은 그때 벌써 비법도강하여 도적농사—날농사를 지었다. 19세기 60년대 조선 함경도지방에 특대재해가 거듭되자 그곳의 조선사람들은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건너섰다. 도문일대에 남석, 시거니, 삿갓봉, 가는골, 구시통, 모두미, 봉오골, 안산, 석재, 새밭굽, 어우벌, 회막골, 박달봉 등 새마을들이 생겨난것은 19세기 70년대와 90년대 사이이다. 월청진의 이주개척은 연변치고 가장 빠른 고장의 하나인데 18세기 말, 19세기 초엽에 벌써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가만히 건너 이골저골에 숨어살았다. 도문시소개에 따르면 1925년에 겨우 20여호가 정착했다고 하는데 이는 력사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1910년 좌우에 이르러 동경동(오늘의 오공촌)의 조선인농가만 해도 약 20세대에 달했다. 그외 새밭굽이 약 10세대, 구시통에 몇세대, 모두미에 몇세대, 안산에 7-8세대, 달라자에 10여세대, 봉오골에 20-30세대, 남봉오골과 신선동에 10여세대였다. 석재의 조선인농가는 더욱 많았다고 한다. 후에 도문은 회막동으로 불리였다. 1931년에는 제법 100여세대를 가진 작은 진을 이루었는데 1933년부터 도문—돈화철도가 개통되면서 회막동이 시발점으로 되였다. 이에 따라 회막동이 도문으로 개칭되였다. 광복후 1956년에 도문진이 설치되고 1965년에 연길현 관할구 도문진과 왕청현관할구 석현진이 합병되여 도문시를 이루었다. 도문시가 조국의 판도에서 변강도시로 알려진것은 1965년 5월 1일, 전국인대 상무위원회에서 도문시를 정식으로 비준하면서부터이다. 오늘날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는데서 해마다 수많은 국내외관광객들을 끄는 개방, 관광도시로 떠올랐다. 그만치 도문은 연변각지와 장춘, 심양, 단동, 대련, 북경, 목단강, 할빈으로 통하는 렬차의 시발점이고 두만강연안에서 륙로와 철도로 조선과 무역을 하는 연변의 제일 큰 해관—도문해관을 가지고 있다. 도문시치고 유람객을 무척 끄당기는 것은 그래도 두만강공원이라 하겠다. 두만강공원은 두만강언제를 수축하면서 생겨난것으로서 그 길이는 도문해관 웃켠으로부터 두만강과 가야하가 합치는 합수목까지 1500메터에 달한다. 도문시에서는 1983년부터 두만강언제를 수건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에서는 두만강언제를 시초부터 사람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길수 있는 자연공원으로 만들려고 구상하고 언제의 너비를 12메터로 하고 강쪽에 란간을 설치하였다. 언제의 서쪽켠엔 41개의 가로등을 가설하고 잔디를 심고 나무를 심었는데 밤이면 밤마다 가로등불빛이 두만강에 비치여 두만강공원의 밤경치가 황홀하기 그지 없다. 1989년에 도문시정부는 법적으로 두만강공원을 《도문시중점풍경명승 보호단위》로 결정했다. 두만강공원의 면모는 날따라 개선을 가져와 밤에도 대낮처럼 밝다. 한데서 이곳 시민들은 어두움이 깃들면 두만강공원을 거닐며 저녁의 한때를 즐기군 한다. 국제하천인 두만강에서의 배놀이, 뽀트놀이는 당지인은 물론 국내외유람객들에게 잊을수 없는 회억을 남겨준다. 오늘날 도문시의 두만강공원은 국내외 유람객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로 되였다. 1992년이후 훈춘시가 동북아의 금삼각주로 떠오르면서 도문이 갖는 의의는 보다 커지였다. 그에 따라 두만강공원은 더욱 많은 유람객들을 끌면서 번영의 일로를 달리고있다.
8    천리두만강을 따라(6)ㅡ사이섬 사이섬 댓글:  조회:4277  추천:73  2005-06-05
천리 두만강을 따라 (6) 사이섬 사이섬 리 함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두만강물은 제방뚝이란 무언지도 거의 모르고 산곡간을 누비며 출렁이다가 룡정시 개산툰진구간 천평벌에 이르러서는 중조 두 나라 제방뚝사이로 천천히 흐른다. 이곳 천평벌 하단에 개산툰진의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자리잡고있는데 나이 지긋한 당지 사람들은 지금도 이 마을을 꼬리섬으로 외운다. 꼬리섬이란 사이섬을 말한다. 사이섬이면 그제날 간도의 유래가 담긴 력사의 현장이 아니더냐? 그렇다! 여기 사이섬이 바로 100여년의 조선족이주의 눈물이 어린 그 사이섬이다. 사이섬을 알자면 아마도 청나라시기로 거슬러야 할것 같다. 1644년에 청나라 주력군이 파죽지세로 관내에 쳐들어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도읍을 정한후 청조통치자들은 장백산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 — 룡흥지지(龙兴之地)로 간주하고 강희년간(1663-1681)에 흥경(오늘의 료녕성 신빈)이동, 이통주이남, 두만강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封禁)하고 타민족이 봉금지내에서 사는것을 엄금하였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를 세운후 봉금정책은 보다 강화되였다. 한데서 이 지구에는 청나라조정이나 여러 왕부에서 파견한 장정들이 사냥하고 인삼을 캐고 진주를 채집한 외 돈화, 훈춘 두 현에 만족이 일부 거주하고있을뿐이였다. 그러던 18세기중엽부터 산동, 하북 등지의 관내 한족들이 봉금정책에 눌리지 않고 료동, 길림 지방을 거쳐 연변땅에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조선북부의 빈고농민들도 리조조선의 엄격한 국경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섰다. 날농사란 말 그대로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돌아가는 농사를 말한다. 그 시기 조선 무산으로부터 하류의 두만강가운데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섬들이 있었다. 이런 섬가운데서 제일 큰 《섬》을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이 사이섬이 바로 오늘의 선구구간 사이섬을 말한다. 조선 6진(六镇—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의 농민들은 두만강을 넘나들다가 관리나 변방순찰병들에게 발각되면 사이섬에 갔다온다고 변명하였다. 두만강을 건너 날농사에 나선 사람은 거의 집집마다 한사람씩은 있었다. 헌데 《동삼성정략》이나 《연길변무보고》에 의하면 사이섬은 워낙 섬이 아니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중국조선민족 발자취총서(1)—《개척》의 해당 글에서 이렇게 적고있다. 《지금의 룡정시 광개향(필자주: 지금은 개산툰진으로)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측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복새험〉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에 잇대여있는 륙지였다. 이 〈복새험〉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복새험〉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으로 되였다.》 박창욱교수가 말하는 이 《섬》이 바로 사이섬이다. 당시 날농사를 하는 조선사람들이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번지여 두만강북안은 북간도로, 압록강북안은 서간도로 불리였다. 두만강이북에 깊숙이 들어온 조선이주민들은 두만강연안을 《역섬》이라고 불렀다. 이에 청조의 통치자들은 1848년부터 해마다 변방순찰병들을 파견, 순회시켜 조선 도강자들의 집과 밭을 조사, 파괴하고 쫓아냈지만 늘어만나는 도강자들을 어찌할수 없었다. 1861년과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북부지구를 휩쓸었다. 1869년과 1870년엔 련속 대한재가 덮치였다. 생사의 기막힌 현실앞에서 조선북부의 많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고향땅을 등지고 눈물을 뿌리며 남부녀대하고 강을 건너섰다. 두만강이북에로의 력사적인 대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청나라의 봉금제도, 리조정부의 월강죄도 목숨을 내건 도강자들의 흐름을 막아낼수 없었다. 1883년에 조선의 서북경락사 어윤중에 의해 월강죄가 해소되고 1885년에 청정부에 의해 봉금령이 정식으로 페지 되였다. 두만강이북, 해란강이남의 길이 700리, 너비 40~50리 되는 지역이 조선이주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되자 1890년에 이르러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이북이 전부 개간되였다. 조선이주민의 거주지구는 두만강대안으로부터 해란강, 부르하통하, 가야하 류역일대로 점차 확대되였다. 눈물에 젖은 이주사의 갈피갈피라 하겠다.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하는 사이섬이 바로 이주력사의 생생한 《견증자》가 아닐수 없다. 지난 50년대까지만 해도 개산툰구간 두만강은 선구촌구간에서 두곬으로 흐르다가 합수되면서 길이가 꽤나 되는 섬을 이루었다. 선구촌의 원 이름이 사이섬이라면 그대는 믿을수 있겠는가, 어찌하든 이는 드팀없는 사실이다. 선구촌의 1~5촌민소조 구역이 머리섬이라면 천평벌 말끝의 선구촌 6촌민소조구역은 꼬리섬이였다. 두만강천리구간에서, 조선족이주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나루터를 꼽으라면 아마 이곳 선구나루터를 꼽아야 할것이다. 나루터가 한자로 번지여 선구(船口)로 되고 선구가 꼬리섬의 지명으로 되였다. 이 지명에는 이런 유래가 깃들어있다. 19세기 60년대 두만강대안의 조선 종성 하산봉에는 리영수형제가 살고있었다. 그 시절엔 날농사를 짓던 시절이라 리영수형제는 강물이 넓은 두만강을 떼목을 타고 건너와서 땅을 뚜지고 농사를 지었다. 그때만 해도 종성사람들은 사이섬농사를 지을 때이고 월강죄를 다스릴 때여서 리영수형제는 누가 물을라 치면 사이섬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얼렁뚱당 넘기군 하였다. 1883년에 서북경락사 어윤중이 북관 6진을 순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에 《월강하는 죄인을 다 죽일수 없다.(越江罪人不可尽杀)》고 지적하자 사람들은 시름을 놓고 월강농사를 했다. 리씨형제는 아주 이사하고말았다. 그 뒤를 이어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츰 배가 오가고 선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광복전에 강건너에 종성세관이 있고 북안에 선구해관이 있은 데다가 세무소, 파출소, 학교, 상점, 료리집들이 따라 흥기한데서 제법 흥성흥성한 동네였다. 그제날 나루터를 볼라치면 이 일대 섬을 이루며 흐르던 두줄기 강이 이곳 나루터에서 합수되면서 강폭이 아주 넓었다고 전해진다. 지난 50년대부터 당지에서 강을 한곬으로 몰아 넣으며 제방뚝을 쌓기 시작하자 강뚝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이섬의 옛모습을 다시는 찾을수 없게 되고 나루터는 뚝밖으로 밀려나 원 모양을 잃고말았다. 지금은 호수를 이룬 논밭머리 쑥대속에 외로이 버려진 상태. 그래도 옛날의 자그마한 콩크리트땜이 여전하여 이전 나루터임을 환기시켜주니 다행이다. 흥미로운것은 사이섬이 옛모습을 잃은 대신 제방뚝밑으로 흐르던 두만강이 앞으로 물곬을 옮기면서 새로운 사이섬이 생겨나 옛모습이 아닌 사이섬이나마 볼수 있는것인데 새 사이섬—꼬리섬속에 중조국경선이 생겨나 보다 가관이다. 지금 보면 새 사이섬이라 해도 사이섬이 우리쪽 땅과 이어진데서 조선땅이란 느낌을 가져볼수가 없다. 한데서 우리쪽 사람들은 조선땅 사이섬에 가끔 놀러가거나 휘트인 돌밭에서 탐석하기도 하는데 변경을 순라하는 두만강저쪽 조선군인들도 관계치 않는다. 사이섬은 이렇듯 피눈물의 이주력사를 담은 유서깊은 땅이기도 하고 짙은 흥미를 자아내는 신형의 땅이기도 하다. 하기에 오늘날 적지 않은 유람객들은 사이섬을 찾아보며 휴식의 한때를 즐기군 한다. 실로 연변의 이름난 관광명소로 떠오를만한 력사의 땅이다. 허나 우리쪽 사이섬이라 해도 사이섬과 그 부근에는 아무런 관광시설들이 없어 쓸쓸한 기분만 더해준다. 안내자나 소개자가 없으면 뭐가 뭔지를 가려볼수 없는 현실. 선구촌 제6촌민소조를 민속마을로 꾸미고 그제날 나루터와 사이섬가에 사이섬 이주박물관을 꾸린다면 그 품위가 확연히 달라지련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오, 사이섬아, 명실공히 한다 하는 관광명소로 떠오를 그날은 언제냐? 그날은……
7    천리두만강을 따라(7)ㅡ삼툰자를 찾아서 댓글:  조회:3654  추천:64  2005-06-05
천리 두만강을 따라 (7) 삼툰자를 찾아서 리 함 개산툰진과 도문시구간은 60리 로정이다. 개산툰을 벗어난 두만강물은 근 20리 천평벌을 흐르다가 도문시 월청진 구간을 흘러지나게 된다. 월청진소재지 마패에서 동북으로 몇리 떨어진 두만강가에 간평으로 불리운 마패 7대가 있는데 예가 바로 봉오동 전투의 서막으로 펼쳐진 그제날의 삼툰자마을이다. 조선이주민이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붙이기 시작한것은 19세기 60년대로 알려진다. 짜작등에 괭이날을 박고 부대를 일구고 삶의 터전을 닦은 개척민은 조선의 삼봉일대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김씨, 최씨, 박씨 세 일가인데 이로하여 《세마을동네》라고 부르다가 한자발음에 따라 《삼툰자(三屯子)》로 부르게 되였다. 일명 간평이라고 부르는것은 이 고장이 두만강가의 두 산, 두 바위사이에 끼운 벌판이라는데서였다. 처음에는 사이벌로 부르다가 새볼로 입에 오르고 이를 한자로 번역하니 간평으로 되였단다. 벌판이라야 동남으로 길이 약 1500메터, 너비 약 300-400메터에 불과하였다. 1990년 여름에 필자는 간평에서 이 마을의 진생봉로인을 만났다. 1990년에 73살인 로인은 광복후 향안의 삼동촌에서 고빈농퇀장, 농회장, 당지부서기 등 사업을 하다가 1952년부터 1980년까지 줄곧 마패대대 주임, 부주임으로 사업하던 분이였다. 상기 개척이야기는 진생봉로인이 필자에게 들려준것이다. 《삼툰자는 짜장 무명지촌이였는데 3.1운동이후 반일독립투사들이 자주 이 마을을 통해 조선으로 드나들면서 이름이 나게 되였다우.》 후리후리한 키꼴, 어글어글한 두눈에 정기가 도는 진생봉로인의 말씀이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분이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로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방불히 들리는상 싶다. 1920년 6월 4일 이른 아침 5시경, 약 30명으로 무어진 반일독립군의 한개 소대는 삼툰자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종성군 강양동에 둥지튼 일제헌병순찰소대를 돌연습격하여 본때스레 까눕히였다. 《강양동은 예서 멀지 않다우. 그때 우리 마을사람들은 두만강가의 방천숲에 가서 자지러진 총소리를 듣고 여간 시원해하지 않았다우.》 마을의 최송봉로인이 지팽이로 땅을 콩콩 울리며 감개무량해하는 말이였다. 6월 4일 그날, 강양동을 기습한 뒤 두만강을 건넌 반일독립군은 뒤따르는 적병들에게 불벼락을 안겨 상개집개처럼 도망치게 하고는 부리나케 산발을 타고 사라졌다. 일제측자료에 의하면 강양동에서의 참패에 대해 그닥 언급하지 않았다. 삼툰자전투의 경과는 적혀있었으나 기와를 얹은 큰집에서 휴식하던 독립군이 급습을 받고 맞불질하면서 퇴각하였는데 지방의 선민중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 나타났을뿐이라고 하였다. 사망자중 김향칠의 장남 김봉룡이 들어있었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이였다. 김봉룡(12살)은 향칠의 장남이 아니라 김씨의 후손 김경보의 둘째아들로서 봉룡은 물론 그의 아버지 김경보도 문화대혁명후에 사망했다. 진생봉과 최송봉로인은 필자일행을 인수로아래에 자리잡은 옛집터로 데리고 갔다. 《독립군이 휴식했다는 기와집이 바로 이 자리우다. 옛날에는 국경이란 이름뿐이여서 강건너 조선의 산에가서 소나무를 찍어다 대들보를 얹었수다. 김경보가 주인이였지유. 1989년에 허물었수다.》 보뚝에 올라선 필자일행은 록음이 짙은 건너산을 바라보며 추억의 나래를 펴고 그제날의 가렬처절했던 항일의 전장을 더듬어보았다. 삼툰자에서 울린 총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 일제는 200여명으로 윌강추격부대를 무어 야스가와소좌의 지휘밑에 봉오동을 침습하다가 100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악착한 일제놈들이였건만 삼툰자출격이 독립군의 유인전술이였음을 알지 못하였다. 진생봉로인은 서북방향으로 뻗은 골짜기를 가리키며 《이곳이 범진령인데 항간에는 홍범도가 일본놈 한개중대를 몰살시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수다. 그것도 산중턱 바위밑샘물가에서 물을 먹으려고 몰켜있는것을 독안에 든 쥐잡듯했다는거유.》라고 알려주는것이였다. 금시초문의 이야기였다. 아마 삼툰자에서의 교전사실이 그렇게 번져진 모양이다. 여하튼 마음을 끄당기는 범진령이였다.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한시간가량 걸으면 도문에 닿을수 있다기에 필자일행은 로인들과 작별하고 령길에 들어섰다. 갖가지 새들이 우짖는 소리를 귀맛좋게 들으며 늘찬 범진령을 톺아오르노라니 오를수록 힘에 부쳤다. 산중턱 바위밑에 이르니 샘물이 송골송골 솟아오르고있었다. 유서깊은 삼툰자의 샘물이여서 그런지 물맛 또한 별미였다. 샘물을 덮은 가랑잎을 건져내니 선경의 약수물이 예 아닌가싶었다. 범진령을 오르니 일광산 산봉우리여서 산아래 도문시내가 바라보이였다. 일비일희의 마음이다. 상기와 같이 삼툰자 —간평은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연 력사의 고장이여서 마을어구에 비석패를 세우고 마을안의 김경보옛집터인 독립군의 휴식터에도 비석패를 세운다면 봉오동에 이은 도문시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오르련만 현실의 간평마을엔 간평이란 이름패말외 아무것도 찾아볼수 없는것이다. 필자가 느끼건대 도문시의 관광자원중 두만강가의 《두만강공원》을 제외하고는 개발할 전방이 큰것은 봉오동전적지와 이곳 삼툰자라고 보아진다. 허나 도문시에서는 마땅한 중시가 따르지 못하고 있다. 1990년 여름에 필자는 삼툰자를 답사한후 수차 다녀왔다. 최근년간에는 탐석차로 해마다 몇번씩 다녀온다. 첫 답사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도 간평땅에는 아무런 조치가 보이지 않는다. 좀만 손을 대도 훌륭한 관광명소로 떠오를 고장이 농촌마을 그대로뿐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마을의 서남쪽 길가 산기슭에 한두개의 관광휴가지가 일떠선것을 대비할 때 현유조건에서 한두개의 비석패를 세워 그제날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펼친 땅임을 환기시킨다면 관광명소로서의 품위를 가일층 높여주면서 유람객들의 흥미를 무척 끌테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도문시의 일류가는 관광명소를 두고 관광명소임을 모르는 현실, 돈벌이를 두고도 외면만 하는 현실이 언제면 타개될가?!
6    천리두만강을 따라 (4)ㅡ이주의 전설이 깃든 남평땅 댓글:  조회:3587  추천:85  2005-06-05
천리 두만강을 따라(4) 이주의 전설이 깃든 남평땅 리 함 동으로 흐르던 천리두만강이 화룡시안의 숭선진을 지나 거치는 곳은 조선족이주의 전설이 하많이 깃든 남평진 구간이다. 남평진은 월래 한개 향으로서 1986년 12월에 진으로 발탁했다. 최근년간에 시안의 10여개 향진을 통털어 8개진으로 합병할 때 원 덕화진이 남평진으로 되였다. 전체 용화향이 새로 소속되고 로과향소재지부터 그 아래 동쪽구간이 진안에 들어오면서 남평진은 진내구역이 대폭 늘어났다. 조선과 마주한 변경선이 80여킬로메터 되는 남평진에 조선족이 6500여명이 살고있다. 오늘의 남평땅은 말그대로 조선족이주의 전설이 생생이 깃든 유서깊은 땅이다. 남평일대 개척은 19세기 60년대이전으로 헤아려지는데 원 로과향 로과1대의 방무송로인이 1986년(이해 65살) 12월에 구술한데 의하면 이 마을의 최기수는 1890년 경인치발에 상투를 자르고 땅을 개간한 최씨의 후손이다. 1986년에 61살인 최기수는 이주4대손인데 그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로과, 즉 늪골에 뿌리박고 살아왔었다. 시간을 따지면 1986년에 벌써 178년을 잡고있다고 하니 두만강을 건너온 시간은 1808년쯤으로 치달아오른다. 이촌의 다른 4대손 방림상(1986년에 67살)의 조상들도 이 고장의 개척자들이다. 사람들은 그의 집을 가리켜 《빈수레후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런 옛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옛날 이고장 조선사람들에게는 남자가 상처하면 동네과부를 동여오는 풍속이 있었다. 방림상의 증조부도 이 마을에 이주한후 안해를 잃고 타지방에서 한 과부를 동여서 수레에 앉히였다. 헌데 집에 와보니 과부가 없었다. 기쁨에 도취되여 수레만 몰다보니 과부가 도중에 슬그머니 내린줄을 몰랐었다. 이때부터 방림상의 증조부는 《빈술기》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였다. 원 로과향 죽림촌(竹林村)의 지명유래에도 조선사람들의 이주개척사가 담겨져있다. 청나라 봉금시기 조선 무산 등지의 일부 조선사람들이 지금의 죽림촌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내고 밭을 일구었는데 조가 어찌도 잘 되였던지 밭고랑에 앉아 볼라치면 키넘는 조이대마디들이 불뚝불뚝한것이 꼭마치 참대마디를 방불케 하였다. 죽림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겨났다. 정녕 이주사전설이 그대로 살아숨쉬는 남평, 이 고장 전설에는 피눈물의 이야기도 슴배여있다. 1987년 4월에 원 숭신향 고성리촌의 최석성로인(72살)이 구술한데 의하면 봉금해제시기 조선 무산지방에 김씨라는 사람이 살고있었다. 어느날 김씨는 동피(冬皮)를 구하려고 도강하였다가 무산관청에 붙들려 교형받게 되였다. 교형받던 날 김씨의 자식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신선을 업었다는 한 마을의 백발로인을 찾아갔다. 백발로인은 한참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오늘 자네 아버진 어떤 소에 실려 형장으로 간다던가?》 《영각하는 둥굴이 올시다.》 《어이구, 일이 틀렸구만. 자네 아버진 교형되겠네!》 《예?》 김씨의 자식들은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들이 백발로인의 집에서 뛰여나오니 아버지는 과연 둥글소를 메운 수레에 실려 저쪽으로 사라지고있었다. 절렁절렁하는 소방울소리는 마구 가슴을 허비였다. 이때 말탄 웬 사람이 나는듯이 교형장으로 달리며 뭐라고 소리쳤다. 교형리는 빨리 죽이라는가부다고 여기고 《죄인》을 교형에 처했다. 뒤미처 교형장에 이른 말탄 사람은 무릎을 탁쳤다. 《아뿔싸, 한발자국 늦었구나!》 그는 조정에서 띄운 사자(使者)였는데 봉금해제소식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조정의 훈령을 갖고왔던것이다. 이 일이 있은후 백성들은 수레에 둥글소를 메우지 말고 늙다리 암소를 메웠더면 김씨를 살릴수 있었을거라고 탄식해마지않았다. 김씨의 무덤은 지금도 조선의 무산지방에 있다고하는데 김씨는 봉금해제기에 마지막으로 교형된 사람이라고 보아진다. 청나라의 200년 봉금해제령이 1885년이니 김씨는 바로 이해에 교형되였던것이다. 로과는 늪골 또는 함박골이라고도 한다. 그제날 이곳에 산동에서 이주한 한족선비가 있었는데 고향에 편지를 띄우려고 하니 늪골을 번역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비슷한 발음을 고르다가 마침내 루궈(芦菓)라고 적어넣었다. 그뒤 지명등록을 할 때 청나라관리들은 늪골을 로과라고 올리고말았다. 세월이 흘러 20세기의 언덕을 넘어섰다. 1910년 《한일합병》전후에 이 고장에는 겨울한철 집시(集市)가 열리였다. 조선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로 천과 가죽류 등을 무역하였다. 1910년후 늪골은 100여세대의 작은 진을 이루었다. 겨울집시가 열리면 려관업, 상업, 음식업, 술집 등이 흥성해서 거리는 제법 번화했다. 집시가 있기에 세관, 경찰 등 관청이 일어섰다. 이같이 이주의 전설이 살아숨쉬는 이 고장은 지난세기 60년대 초반에 연변을 들썽한 사건이 터지였다. 바로 1963년 12월 27일, 두만강가 사정곡에 살고있는 소녀 몇몇이 하학후 두만강얼음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을과 500메터쯤 떨어진 두만강에 빠지였다. 이때 달리던 렬차우에서 조선청년 김형호와 최상현 둘이 뛰여내려 서슴없이 차디찬 강물에 뛰여내려 마지막으로 허우적거리는 한순자소녀(그뒤 한친선으로 불리웠음)를 구해냈다. 이 사건이 연변을 들썽하면서 중조친선의 물결을 일구었고 이 시기 창작된 노래—《친선의 노래》가 오늘도 변함없이 조선족인민들속에 널리 불리워지고있다. 이러던 《친선의 노래》탄생지—로과가 오늘날 두 동강이 나면서 로과 서쪽구간의 신작로다리를 계선으로 각기 남평진과 숭선진에 귀속되였는데 두만강가 마을 사정곡은 숭선진에 속하게 되였다. 어찌하든 원 로과향소재지마을을 지나고 치마대마을을 지나면 두만강가로부터 북안으로 올리뻗은 호곡령(虎谷岭)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지금은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호곡평 산중턱으로 평탄한 변방도로가 닦이여 눈뿌리 아득한 호곡평을 잠간이면 오를수 있다. 발길을 잡히는곳은 호곡평허리를 동강낸 신작로 남쪽가 낮다란 산정에 터를 잡은 《리욱시비》이다. 달리는 차에서 내리면 애나무숲속으로 올리뻗은 콩크리트계단이 눈에 맞혀온다. 콩크리트계단을 따라 산정에 오르면 대리석에 한자로 새겨진 《리욱시비》네 글자가 선참 길손을 반겨맞는다. 시비 정면에는 《칠순/ 할아버지/ 나무를 심으며/ 어린 손자를 보고/ 빙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이라는 짧은 시 한 구절이 새겨져있다. 지난 4월 중순, 화룡시 관광지답사단일행 수십명과 함께 리욱시비앞에서 잠간 발길을 멈춘 필자는 숙연한 기분속에 휘말려듬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러노라니 대학교동창이고 중년소설가인 류연산이 그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제1부 《두만강천리》에 쓴 한단락의 글이 떠올랐다. 《나는 시비앞에 옷깃을 여미고 숙연히 섰다. 조선족시간의 개척자이시였던 리욱교수님의 숙원은 무엇이였던가? 한그루 나무를 심은 그 정성, 정녕 그 나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일것이고 함께 심는 손자를 바라보며 웃는 그 빙그레 미소에는 민족의 희망을 기탁하는 선배로서 후배에 대한 어떤 만족감이였을것이다.》 그러면서 류연산소설가는 문화대혁명당시 반동학술권위자로 몰린 리욱선생님이 연변대학에서 쫓겨나 당년의 화룡현 서성진에 정배를 갔을 때를 떠올리였다. 알고보면 류연산은 당시 서성중학교 학생이였는데 시인의 집에서 책을 빌어다 보면서 리욱선생님과 깊은 인연을 맺은 모양이다. 그만큼 리욱선생님은 조선족문인들속에 위망이 높은분이였다. 리욱시비 뒤쪽에서 산아래 두만강 너머를 내려다보면 아세아에서 두번째 크다는 로청탄광—무상철광과 무산시가 시야에 안겨든다. 그 멋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변방도로를 따라 호곡령을 내리면 그 기슭에 룡암유람지가 아담하게 꾸려져있다. 수백개의 돌층계로 해서 8각형정자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건너 조선의 무산시가 이곳에서도 발아래에 펼쳐진다. 룡암관광지는 룡암동을 구축으로 부도골 등 네곳에 펼쳐졌는데 룡암동에만 해도 관광려관, 수영장, 여러 정자 등 시설이 구전하여 호곡령에 이채를 더해주고있다. 룡암유람지는 남평량식창고에서 시정부와 시량식국의 지지로 7-8년간의 노력을 들여 90년대초기이후 일떠세운 다각경리 터전인데 해마다 적지 않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있다. 력사를 거스르면 남평진 일대는 19세기 60년대전후로부터 조선이주민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지구에서 선참 개발된 부동, 즉 가마골은 19세기말 이전에 벌써 조선과의 무역으로 이름높은 무역골이였다. 가장 번창할 때 가마골은 인가가 근 200세대에 달하였다고 한다. 지금 이곳 두만강가 룡암동에 초보적으로 유람구가 형성되였으니 이 토대우에서 좀 더 품을 들여 관광명소로 꾸리는 한편 이주사 박물관을 꾸린다면 조선으로 통한 장백산유람객과 선경대유람객들이 발길을 멈추어 조선족들의 그제날 생활모습과 이국의 풍치를 굽어볼수 있는 두만강관광황금선의 새별로 떠오를수 있을것이다. 이주의 전설이 깃든 남평땅이여, 관광의 급물살 타고 길이 번영하라!
5    천리두만강을 따라(3)ㅡ천혜의 땅-숭선풍경구 댓글:  조회:3394  추천:99  2005-06-05
천리두만강을 따라 (3) 천혜의 땅—숭선풍경구 리 함 천리 두만강관광에서 가장 인기를 모으는곳은 그래도 화룡시 숭선진 구간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두만강상류에 위치한 이곳을 그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 수려함으로 하여 연변의 금강산이라고도 부른다. 일명 고성리로 불리우는 숭선진은 화룡에서 남으로 81킬로메터 되는 곳에 자리잡은 장백산아래 두만강상류의 첫 향진이다. 이 진의 경내에 들어서서 첫 발목을 잡히는곳은 옥석물이 두만강에 흘러드는 합수목구간이다. 숭선진의 첫 마을 남석촌을 지나면 덕택으로 뻗은 신작로가 내리막굽이를 돌다가 다시 두만강가로 이어지는데 길바로아래는 푸른물 사품치는 두만강이고 오른쪽은 깍아지른듯한 험준한 절벽이 병풍처럼 두만강을 에돈다. 이곳의 절벽강산은 금시 정수리를 때리며 굴러떨어질듯한 이끼돋은 암벽으로 하여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그만큼 아찔한 절벽은 조선어자모 《ㄴ》자형으로 길게 뻗었는데 절벽이 굽어드는곳에 작은 폭포수가 있어 자못 인상적이다. 절벽은 이곳에 이르러 그 밑부분이 안쪽으로 깊숙히 패워 널다란 돌막속에 들어선 기분인데 폭포수는 바로 이 돌막지붕우로부터 떨어진다. 폭포수가 복판의 홈을 따라 떨어지기에 여기를 개바위라고 부르는데 민간에서는 《개씹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개바위에서 좀 더 나아가면 옥석물이 두만강에 흘러드는 합수목에 이른다. 연변에 이름난 공중수리공사—《은하교》가 여기에 놓여 두 절벽사이를 흐르는 옥석하를 가로탔는데 머리를 들면 한마리 거룡이 하늘을 날아예는듯, 칠선녀 오르내렸다는 만고의 절경 예 아닌가싶다. 은하교(일명 구름다리)는 1960년에 건설되였는데 총길이가 127메터이고 골짜기 밑바닥에서부터의 높이는 45메터이다. 이 은하교가 준공됨으로 하여 골짜기를 따라 두만강으로 흘러들던 옥석물이 철관으로 된 물다리를 건너 산중턱을 가로 꿰며 절벽우의 남석벌을 적신다. 남석벌에 벼파도 일렁인것은 이때부터의 일이다. 은하교를 지나고 하천벌을 지나 5킬로메터쯤 가면 원근에 이름높은 군함산에 이르게 되는데 숭선진소재지 고성리는 바로 군함산 남쪽산아래에 자리잡고있다. 일찍 19세기 60년대이후 조선의 무산, 경성, 길주, 부령, 명천 등지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밀려들면서 마을이 생겼다는 이곳, 부근에 발해시대의 옛 성터가 있다하여 고성리라 불리운다는 이곳, 북쪽은 하늘을 떠인 웅위로운 군함산이고 그 군함산기슭으로 맑디맑은 두만강이 소리치며 흐르고있어 그 경치가 실로 가관이다. 군함산과 이어진 동쪽에는 한척의 전투함을 방불케 하는 작은 군함산이 또 하나 있다. 이 산중턱으로 뻗은 오솔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야만야한 절벽밑으로 두만강이 굽이치며 흐른다. 봄이면 살구꽃이 군함산을 온통 덮는데 살구꽃, 진달래가 얼굴을 어루쓰는 오솔길에 오르면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선 기분이다. 소군함산아래 두만강가에 화룡시간부료양소가 자리잡고있으니 건강회복에 리로울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숭선진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조금 더 가면 또 아찔한 절벽이 나서고 그 다음이 두만강과 합수되는 홍기하 여울목이다. 홍기하다리에 올라 사방에 눈길을 던지면 홍기하량안은 물론 어디라없이 눈이 모자라는 병풍벼랑이 하늘가에 치솟고 깍아지른듯한 천애협곡사이로 푸르른 강이 사품치며 흐르는데 대자연이 하사한 그림같은 고장은 연변서 유독 이 고장이라 하겠다. 숭선의 고성리와 홍기하 유래는 여기에서 인기된다. 두만강과 홍기하가 어울리는 바위우에 발해시기에 건설되여 명나라때에도 사용된 옛성터자리가 있다하여 고성리라 불리우고 명청(明清)시기 사금생산기지인 홍기하류역에 사금캐기인부들이 꽂은 작은 붉은기발이 숲을 이룬듯하여 홍기하로 불리웠다고 전해진다. 민간에서는 올기강으로 불리운 이 강상류에서 1940년 3월 25일에 조선족을 주체로 무어진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부대에 의해 적들을 무리로 쓰러눕힌 홍기하전투가 벌어졌다하여 홍기하로 통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아무튼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그림같은 고장이다. 숭선진에서는 이곳에 홍기하관광공원을 세웠는데 홍기하북안의 관광공원에 들어서면 현애절벽에서 내리꼰지는 폭포수가 어서 오라 반기며 시야에 안겨든다. 폭포수는 제법 실개천을 이루며 홍기하에 흘러들고 여러개의 정자가 폭포수아래 바위돌사이에 일어서서 관광객들을 몹시 끄당긴다. 여기에서 장백산으로 통한 신작로를 따라 4킬로메터쯤 올라가노라면 장백산아래 첫동네라 불리웠던 대동촌에 이르게 된다. 숭선우 약 50리 구역에 광평이 생겨나서 고스란히 하늘아래 첫동네자리를 양보했지만도 말이다. 이렇듯 숭선진은 산좋고 물맑은 아름다운 고장으로서 연변의 이름난 관광풍경구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화룡시관광국에서 숭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는 이색적인 백두산관광코스를 성사시키고 새로 개통된 신작로를 따라 두만강발원지 관광과 장백산관광의 현실로 펼쳐졌기에 숭선은 명실공히 두만강관광황금선의 천혜의 땅으로 떠올랐다. 화룡시와 숭선진에서는 숭선의 독특한 날관광우세를 보아냈다. 이제 군함산아래 고성리바닥에 조선족민속촌기지가 일어서고 군함산과 홍기하폭포수가에 종합적인 관광시설이 일떠설 때 숭선진은 두만강황금선이란 이 이름난 관광코스를 끼고 보다 흥성의 거센물살을 타게 될것이다. 그날이 어서 다가오기를 기대해본다.
4    천리두만강을 따라(5)ㅡ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 댓글:  조회:3332  추천:84  2005-06-05
천리 두만강을 따라(5) 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 리 함 변강소도시로 불리우는 남평진(원 덕화진)이 조선족이주의 전설이 깃든 유서깊은 땅이라면 국가풍경명승지ㅡ선경대를 끼고있는데서 관광명승지로도 이름이 높다. 두만강관광로선의 첫 길목에 자리잡은 선경대 국가풍경명승지는 화룡지소재지에서 남으로 30킬로메터, 자치주 수부 연길시에서 100킬로메터 떨어져있다. 동으로 두만강과의 거리도 불과 8킬로메터밖에 안된다.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우는 선경대는 2002년 5월 17일에 국무원에 의해 황산, 태산과 같은 국가중점풍경명승지로 되였는데 총면적이 32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이 풍경명승지는 괴봉, 괴암, 괴송, 은해, 해돋이 등 300여개의 아름다운 경관들로 이루어졌다. 그중 선경대의 주봉으로 불리우는 삼형제봉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기에 족하다. 해발 926메터되는 선경대주봉에는 20여메터 높이의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세 봉우리가 세 형제처럼 우뚝 솟아있어 삼형제봉으로 불리우는데 산꼭대기에는 우람진 너럭바위가 자리를 틀고앉아 있다. 특이한것은 너럭바위 우에 있는 40여개의 말발굽자국이라 하겠다. 말발굽자국 중에서도 제일 큰 자국의 직경은 30센치메터이고 깊이는 15센치메터나 되는데 아직까지 40여개의 이 말발굽자국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과학적으로 풀이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또 사철푸른 초선송(招仙松), 팔괴송(八怪松), 자매송들이 있어 유람객들의 눈길을 모으는데 진달래 피는 봄이 오면 그 풍경은 더욱 장관이다. 해발 846메터를 헤아리는 동쪽의 고려봉 또한 유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고려봉의 삼면은 100메터좌우의 낭떠러지이다. 고려봉으로 치닫는 소로길을 따라 해발 800메터 지점에 오르면 괴상하게 자란 판룡송, 궁룡송이 반겨맞는다. 판룡송은 100여년의 생장력사를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애솔 때 우에서 굴러내려온 4000여근 되는 큰 바위돌에 깔렸다지만 끈질긴 생명력은 육중한 바위돌의 지지누름을 이겨내며 굳세게 자라게 하였다. 이 판룡송은 직경이 35센치메터이고 나무의 전체 길이가 9메터인데 꿈틀꿈틀 몸을 탄 그 모습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룡을 방불케 한다. 100여년의 풍상고초를 이겨내면서 무거운 바위를 35센치메터나 자기 몸으로 들어 올렸으니 대자연의 걸작에 탄복이 가지 않을수 없다. 판룡송의 옆에는 180도의 호형을 이룬 괴송ㅡ궁룡송(弓龍松)이 있어 이채를 더해준다. 선경대는 실로 연변의 금강산으로 불리울만도 했다. 《신당서》, 《발해전》의 기재에 따르면 기원 724년에 발해국의 제3대왕 대흠무는 오늘의 돈화로부터 현주(显州)로 불리운 오늘의 화룡시 서고성에 자리를 옮겨앉았다. 그 시절에 서고성발해옛터는 중경현덕부로 통했다. 중경(中京)은 일찍 6개주와 30개현을 거느린 발해 5경중의 하나로서 5경중에서 주와 현이 가장 많은 경이다. 당년 대흠무는 제철업의 발전을 위해 철주(오늘의 무산)로 드나들다가 선경대에 발길을 멈추었는데 기기묘묘한 이곳 천태만상에 탄복한 나머지 《아, 실로 선경대로다!》하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선경대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겨나 오늘에 이른 모양이다. 선경대 해당자료에 의하면 그후 1777년에 고려봉으로 오르는 금계봉아래 펑퍼짐한 공지에 선경대절이 세워졌다. 조선식 집구조의 절 한채였다고 하는데 조선에서 들어온 하홍락, 유희춘, 황정숙 세 스님이 열심히 불도를 닦은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두고 중년소설가 류연산은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상)에서 선경대 가까이에 있는 흥진촌 류영협(1913년 생)로인방문기를 이렇게 적고있다. 《내가 4살 때 선경대로 이사와서 줄곧 지금까지 살고 있수다. 내가 알건대 제일 처음 중으로는 하홍락이고 선경대절이라고들 했었지우. 그는 1885년에 절벽아래에 륙간초가집을 짓고 나무불상을 모시고 도를 닦았다는거였수. 매년 초파일이면 마을에서는 떡을 치고 감주를 해갖고 선경대절에 가서 기도를 드렸수다. 그후 유희춘이 있었는데 절당을 북두칠성절이라고 했수다. 유희춘을 사람들은 유대사, 스님, 신의(神醫)라고도 불렀지우. 그후 녀자중 황정숙이 북조선에서 손녀 둘을 데리고 왔었다우…》 《혈연의 강들》(상)은 계속하여 비구니 황정숙의 손녀 김영숙(1938년 생)이 화룡진 서가촌에 생존해있어서 유력한 증언을 해주었다고 하면서 1940년에 황정숙은 팔간집을 짓고 칠성불묘를 하다가 1947년에 절을 떠났다고 했다. 절의 마지만 스님 황정숙은 조선 강원도 원산 독수절에서 에밀레종과 돌불상 두개를 모시고 선경대에 왔다고 하는데 지금도 북두칠성불묘 유지에는 성수(聖水)로 불리우는 감로천이 있어 선경대를 찾는 유람객들마다 맛보고 있다. 오늘의 선경대는 10여년의 건설을 거쳐 국내외관광객을 많이 끌어 관광수입을 대폭 늘일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가고있다. 게다가 선경대는 조선을 통해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으로 오르는 두만강관광로선의 길목에 놓였기에 두만강황금선이란 이 우세를 빌어 백두산유람시 하루나 이틀 묵어가는 관광지로 거듭 날수도 있다. 했으나 유감도 없지 않다. 선경대건설은 아직 정부적인 차원에서 움직이지 못하고있는 실정이고 경제투자가 따르지 못하여 그 진척이 아주 굼뜨다. 이에 선경대풍경명승구관리국 윤갑송국장은 얼마전에 필자와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인민페 2000만원이면 관광객들이 머물러갈수 있는 훌륭한 관광명승지를 건설할수 있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이제 화룡시는 조만간에 관광시로 발돋음하게 된다. 필자는 선경대 국가 풍경명승지가 이한 동풍을 타고 어서빨리 화룡시 경제번영의 희망으로 떠오를것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3    천리두만강을 따라(2)ㅡ두만강상류 제1번지-광평 댓글:  조회:4572  추천:88  2005-06-01
천리두만강을 따라 (2) 두만강상류 제1번지―광평 리 함 안도현 내두산이 백두산북쪽의 하늘아래 첫동네라면 화룡시 광평은 백두산동쪽의 하늘아래 첫동네이다. 백두고원벌이 넓고 평탄하다 하여 광평(广坪)이라 불리운 이 고장에서 백두산 산문까지의 거리는 100리 미만이여서 백설을 떠인 아아한 백두산이 어디서나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만 해도 광평은 천고의 수림과 초원으로 뒤덮힌 황막하고 습한 지대였다. 일찍 1905년경에 조선이주민들이 한 세대, 두 세대 두만강을 넘어서면서 인가가 생겨났다. 1943년 봄에 이르러서는 일제놈들의 강제이주정책이 실시되면서 워낙 100여 세대밖에 안되던 광평과 그 일대 동경벌은 일약 500~600세대로 늘어났다. 광평과 그 일대 동경벌을 몽땅 비운것은 광복후 1953년 가을이다. 그후 1958년부터 1979년사이 이땅에는 지방국영농장이 세번 건립되였지만 모두 해산당하는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세번째 농장은 1971년에 서서 1979년도까지 유지되였는데 그때의 화룡현 각지에서 새 농장건설에 뛰여든 지식청년들만 해도 근 200명이나 되였다. 화룡림업국 광평림산작업소가 세워진것은 몇해후인 1983년이다. 지금 이 림산작업소에서 다루는 림지경영면적은 2만 2 300여헥타르로서 주안의 200여개 림산작업소중 단연 첫자리를 차지한다. 오늘 광평령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노라면 넓고 기름진 광평벌, 그 벌을 둘러싼 뭇산들, 도시를 방불케 하는 아담한 림산작업소 본부와 문화주택들, 두 나라 기슭을 치는 은백색 띠모양의 두만강이 한눈에 안겨온다. 젖빛안개가 흰이불처럼 백두고원의 광평벌과 강하나를 사이둔 조선 5호종합농장벌을 포근히 감쌀 때면 실로 장관이다. 그때마다 꼭 비행기에 앉아 구름바다우로 날아예는 황홀한 기분인데 안개바다우에 머리를 빠금 내민 주변의 산봉우리들은 바다에 떠오른 섬들을 방불케 한다. 여기의 두만강은 폭이 좁고 류속이 빠른데 수풀속과 깊은 골짜기, 바위짬을 누비며 줄기차게 흘러 물이 한 여름에도 뼈가 쩡하게 차겁다. 이곳은 또 경치가 절경이여서 천리두만강에서 두번 다시 찾아볼수 없다. 강에는 찬물에만 사는 붉은점이 가담가담 박힌 산천어가 떼지어 노니는데 그 고기맛 또한 별미이다. 그래서 《산천어 굽는 냄새에 나갔던 며느리도 되돌아온다》고 하는가부다. 광평의 사람들은 이렇듯 오염 하나 없는 맑디맑은 두만강물을 음료수로 한다. 게다가 두만강가에 바위밑에서 솟아오르는 정갈한 샘물—천연약수가 있어 개발전망이 자못 크다. 이곳의 두만강은 차고 샘물이 많아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는다. 그래서 두만강 물안개가 보얗게 피여오르면서 강가의 수풀을 눈꽃으로 수놓는데 아침해에 눈뿌리를 시게 자극한다. 광평벌동쪽의 동경벌을 꽉 메운 봇나무숲은 또 어떤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철이면 청청하던 봇나무잎들이 황금빛으로 일매져 보면 볼수록 황홀해진다. 가을의 독특한 이 경치엔 선경도 무색할 지경이다. 동경벌의 독특함은 그뿐이 아니다. 광평령을 사이두고 남북에 위치한 동경벌(남쪽)과 광평(북쪽)벌은 기후차이가 대단하여 광평령북쪽가 나무들에 새움이 돋을 때면 광평령남쪽가 나무들은 푸른 단장이 한창이다. 이곳의 두만강가에는 남북으로 10리가량 뻗은 좁고 긴 분지가 있는데 두만강량안이 아찔하고 길다란 병풍벼랑이여서 풍경이 수려한 지하분지를 이룬다. 무상기가 짧아 광평과 그 일대에 오곡을 가꾸지 못할 때 이곳 분지는 오곡이 무르익어 또 하나의 경관을 이룬다. 백두고원의 특산물인 들쭉, 박달나무숲사이를 메운 황기, 세신, 구멍이 숭숭한 용암돌과 부석, 뭇별처럼 총총한 여러가지 형태의 늪들, 초원을 누비는 노루사슴과 메돼지, 곰 그리고 범이 가끔 출몰했다는 지난 이야기—광평은 실로 한번 가볼만한 하늘아래 첫 동네요, 두만강상류의 제1번지이다. 광평땅은 또한 곳곳에 우리 항일련군들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다. 두만강저쪽에 신개척, 두지바위, 대홍단벌 등 항일전적지들이 있다면 두만강량측엔 1937년 5월의 붉은바위전적지(2군 4사), 1939년 5월 조선 무산지구에 대한 전투를 마치고 우리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일명 조선인민혁명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화룡땅에 들어섰던 두만강 7호물동 등이 있어 유서깊은 혁명전적지이기도 하다. 7호물동 여기를 조선에서는 《무포숙영지》라고 하는데 우리측에서는 《김일성낚씨터》로 통한다. 두만강가의 특이한 경관이다. 이렇듯 광평과 그 일대는 산좋고 물좋고 경치좋은 두만강가 절경이다. 하기에 이 고장에 광평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이 일떠서게 된다. 이 삼림공원은 2002년 12월에 국가림업국의 비준을 거쳐 정식 국가급삼림공원으로 되였는데 동서길이 65킬로메터, 남북너비 13킬로메터로서 부지면적은 1만 2636헥타르로 헤아려진다.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경내에는 숭선의 군함산, 두만강발원지, 중조21호국계비, 옥녀늪, 김일성낚시터, 적봉, 두만강협곡, 들쭉원, 고산습지, 락엽송림, 침활엽혼합림, 봇나무림 등 많은 자연경관이 있다. 그중 두만강발원지풍경과 두만강협곡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지금 두만강원국가삼림공원은 한창 진척중에 있다. 총길이 76.3킬로메터인 숭선—쌍목봉 국가2급도로가 지난해말 이미 통차되여 숭선에서 장백산까지 곧추 달리는 꿈, 장백산 환행관광(环行旅游) 꿈이 현실로 펼쳐졌다.
2    천리두만강을 따라 (1)ㅡ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 댓글:  조회:4063  추천:88  2005-06-01
천리두만강을 따라 (1) 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 리 함 백두산 동쪽기슭에서 흘러내리는 천리두만강은 오늘도 예이제없이 중조 두 나라의 기슭을 치며 유유히 흐르고있다. 이 강 연안의 연변땅엔 지금 80만을 훨씬 넘기는 조선족이 살고있다. 두만강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그제날은 설음의 강, 수난의 강이였으나 오늘은 력사의 강, 어머니강으로 되여 우리 모두들 깊은 감회에 잠기게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강들이 원천이 있듯이 천리 두만강도 례외가 아니다.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발원지는 하늘아래 첫동네라 불리웠던 화룡시 숭선진에서 서북쪽으로 74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쪽의 적봉부근에 있다. 적봉은 원명이 홍토산(红土山)이다. 산에 붉은 흙이 많다하여 생긴 이름인데 만족들은 그들 시조이름을 본따 부쿠리산이라고 부른다. 해발 1321.2메터인 이 산은 장백산 산문(山门)과의 거리가 17킬로메터가량밖에 안된다. 그만큼 적봉은 백두산과 그 일대에 널린 수많은 화산중의 하나로서 산형태가 초모자모양을 이루었다. 화산우에 발육된 화산토양이다보니 토층이 얇아서 나무가 자라기는 해도 평지보다 못하다. 적봉의 동쪽에 중조변계를 나타내는 21호국계비가 있다. 21호국계비는 커다란 삼각형을 이루며 똑같은 국계비 세개가 서로 마주보며 서있는데 이것은 1962년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협상하여 설정한 국경선이다.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해 세워진 여러 국계비는 21호국계비에 이르러 끝이 난다. 이곳부터는 두만강이 흐르기에 두만강은 천연국경선으로 되고있다. 다시 돌아와서 21호국계비를 보면 한쪽은 중국이라 쓰고 다른 한쪽은 조선이라고 썼다지만 주위를 살펴보아도 고지개판이 아니면 관목숲뿐인 무인지경이다. 21호국계비 가까이에 두만강발원지가 있다. 남쪽발원지는 조선의 무두봉에서 흘러내리는 홍토수이고 북쪽발원지는 장백산동쪽에 있는 무수림하이다. 이곳 발원지라야 고지개판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실개천이 조선쪽에서 흐르는 홍토수와 합치면서 점차 사품치는 큰강으로 되여 동쪽과 동북쪽으로 흐르며 화룡시와 룡정시를 거치다가 도문시 량수진부근에서 동남쪽으로 흐름길을 바꾼다. 그러다가 훈춘시 경신진 방천부근에 이르러 로씨야와 조선 두 나라 사이를 누비며 일본해(조선서는 동해로 부름.)로 들어간다. 두만강발원지는 이렇듯 여러가지 함의를 가지고 인기를 모으는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발원지주위와 길 량옆은 하늘을 치솟는 원시림이여서 원시림관광도 해볼만하다. 두만강발원지에서 장백산산문으로 통한 큰길을 따라 한참 가노라면 오른쪽 원시림가에 물안개 피여오르는 거울같이 맑은 늪이 있다. 이 늪의 평균깊이는 1메터정도이고 둘레는 1킬로메터 남짓한 원지(园池)인데 호수면은 해발이 1 270메터인 원형으로서 늪의 폭은 약 180메터에 이른다. 만족들은 이 늪을 천녀욕궁지(天女浴躬池) 혹은 부러후리(만족어)라고 부르면서 백두산동쪽의 첫늪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청나라시조 아이신죠로 부쿠리 옹순이 여기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옹순은 아릿다운 선녀 푸로룬이 이 늪에서 미역을 감다가 주과를 먹고 낳은 소생이라고 한다. 그는 태여난후 인차 말할줄 알고 체격이 특이했는데 커서는 왕이 되고 만주부락을 일떠세웠다고 전한다. 하여 청조의 력대황제들은 이 늪을 줄곧 성지로 받들어왔단다. 우리 조선족들은 이 늪을 옥녀늪이라고 친절히 부른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전설이 여러가지로 전해지는데 그중의 한 줄거리는 대개 이러하다. 항쟁의 봉화가 타오르던 그 시기에 옥녀라고 하는 조선족소녀가 포수인 아버지와 함께 늪가에 초가삼간 짓고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해 장백산밀림속에 기여든 일제토벌대와의 싸움에서 우리 항일부대에 부상병이 여럿이 나타나게 되고 옥녀부녀가 그들을 살뜰히 간호하게 되였다. 그후 일제토벌대가 달려든데서 아버지는 부상병들을 빼돌리고 옥녀가 붙잡히게 되였는데 그는 한사코 모르쇠를 대며 적들을 늪 저쪽의 절벽가로 끌고갔다가 적지휘관을 떠밀면서 절벽에 몸을 날리였다. 그후 늪의 물은 옥녀의 고결하고 순박한 마음을 비껴담아서인지 하나의 큰 거울과도 같이 보다 맑고 푸르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량하고 용감한 이 조선족소녀를 기념하기 위하여 장백산밀림속이 이 늪을 옥녀늪이라고 불렀다. 허나 유감스러운것은 오늘의 늪가에 《천녀욕궁지》라는 비석은 있어도 옥녀늪이라는 유래비가 없는것이다. 한어문으로는 《원지》라고 해도 조선어로는 《옥녀늪》이라고 해야겠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울퉁불퉁한 길이 구불구불 뻗어있던 이곳에 오늘은 산뜻한 변경도로가 화룡시 숭선진에서부터 장백산산문까지 곧추 뻗었다. 지난해까지 새로 닦은 큰길은 이제 곧 포장도로로 바뀐다고 하는데 숭선에서 장백산산문까지의 거리는 불과 91킬로메터, 두만강발원지와 옥녀늪은 장백산 환행로(环行路) 관광코스에 놓이였다. 숭선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명승지 삼지연을 거쳐 백두산에 오르는 오늘 두만강발원지까지도 두어시간이면 다녀오겠으니 이 아니 좋을손가!
1    <리함역사탐색> 코너 태스트 입니다. 댓글:  조회:3437  추천:86  2005-04-28
코너 태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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