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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글을 썼다가 욕을 먹으면 댓글:  조회:1420  추천:0  2020-05-15
글을 썼다가 욕을 먹으면 궁금이      아침에 지하철에서 괜찮은 기사를 읽으면 반드시 댓글을 확인한다. 그리고 댓글을 읽으면서 누리꾼들의 순발력과 지혜와 유머감각 그리고 글을 다루는 실력에 탄복한다. 생각 같아서는 수백개의 댓글을 일일이 다 읽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걸려서 짧은 댓글만 골라 보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읽지 않은 댓글에도 좋은 내용들이 많을 것 같아서 아쉬움을 남긴 채 포기한다.       그런데 영양가가 가득한 댓글만 있을 수는 없다. 한편 무슨 댓글이 달리든 신매체 글은 실시간 교류가 가능하고 전파 범위가 광범위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는 데서 매력과 우세를 갖는다. 같은 글도 서로 다른 독자의 관점에 의해 상이하게 읽히고 평가되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온라인에서는 악플이 없는 글이 없다. 설사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저런 평가들이 돌아다니는 게 가상세계이다. 그래서 말인데 어떤 때에는 아는 사람한테서 욕을 한번 먹기보다는 가상세계에서 모르는 사람한테서 악플이 백개 달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상처는 받겠지만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니 지나가면 그만이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얼마전에 북경 제5순환도로에서 오토바이와 자동차 운전자 사이에 의도적인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자동차 운전자는 차로 변경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경적을 울려댔고 오토바이 운전자는 욕하는 손가락동작을 하면서 보복운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누가 먼저 어떻게 잘못됐든간에 다 도로교통법의 처벌을 받았고 위험운전은 형사구류로 넘어갔다. 사후에는 량쪽이 다 후회했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사실  누구나 도로에서 열받는 일을 당하기 마련이고 이런 상황에서 정규적인 수련을 거친 고승이 아닌 이상 충동하는 것도 정상적이다. 다만 그 충동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판단은 그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느끼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우리나라 류학생이 조국에 대한 안 좋은 글을 발표해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고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출동되는 사이버수사대가 그 녀학생의 신상털기에 나서면서 부모들에게까지 공격이 이어졌다. 그때 그 녀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사흘을 떠들다 말 거니까 그 사이만 참으면 지나가”       이 말에 누리꾼들은 더 흥분했다. 그 따위 언론을 퍼뜨려 놓고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2차 공격에 나섰다. 내가 봐도 아주 배은망덕한 말을 했고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저 녀학생의 말처럼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시간이 흐르니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조용해졌다. 그 당시에는 이번 일만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고 후속 처리를 지켜볼테니 반드시 추적보도를 해야 한다고 루차 경각성을 귀띔했지만 결과는 이왕의 여느 초점 론쟁과 다를바 없이 흐지부지 지나갔다.       이렇게 온라인상의 사람들의 분노의 유효기는 상당히 짧다.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내 리익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 이상 지속적인 주목의 여력도 없고 의지력도 제한되여 있다. 그냥 한두마디 통쾌한 욕을 던지고는 며칠후면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이제 그 녀학생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욕이 무서워서 글을 주저하는 생각은 빨리 버릴수록 좋다. 물론 욕을 먹으면서도 악의적인 글을 계속 발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독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렇게 썼더라도 뻔한 소리만 한다든가 세뇌됐다고 욕하겠지만.        글은 사유가 필요한 작업이고 자신의 정서를 정리하는 과정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과정이 루적되면 자기를 반성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공부하고 론리적인 사유를 키워가는데서 큰 도움이 되는 작업이다. 이런 소중한 수련과 거대한 성장을 앞에 두고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갑 을 병의 비방에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때 조선족을 비하한 영상을 올린 한국의 어떤 민간인에 대해 흥분한 적이 있다. 누가 봐도 무지막지한 막말 발언을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오히려 당시에는 그 사람의 인지도와 개인계정의 데이터만 기하급수적으로 높여줬다. 어쩌면 그 인간도 그런 효과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어떤 현상은 흥분하기보다는 그냥 처박아두면 제풀에 물러앉는다. 그게 훨씬 효과적이고 혹독한 처벌이다.       이렇게 남을 비방해서 욕을 먹는가 하면 아무런 공격의 성격도 없는 무난한 글일지라도 꼭 걸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에는 공식처럼 적용되는 틀이 있다. 이를테면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가한다느니 세뇌당해서 책임감 없이 어쩐다느니 대개 이런 형태이다. 한마디로 종합하면 불만이 없으면 정의감이 없는 걸로 등호를 쳐서 비틀어 생각한다. 이는 열에서 아홉이 좋아도 나머지 하나를 아홉이상으로 부풀려서 부면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만들어야 위안이 되는 잠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일상 사유가 이런 쪽으로만 집중되다 보니 대면적의 옥에서도 먼지만한 티만 확대되여 보인다. 티에 확대경을 가져다 댄다고 옥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밝게 보려 노력하면 글도 아름답게 씌여지는 법이다.        맑은 날보다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날이 흐렸다고 태양을 욕하지는 않는다. 태양은 항상 밝게 있는데 그 사이 구름과 같은 다른 형태에 가려졌을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86    생명 공포기억의 취약성 댓글:  조회:1340  추천:0  2020-05-14
생명 공포기억의 취약성 궁금이  “죽고 싶냐?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거라.” “형사경찰의 본색”이란 드라마에서 조폭 두목이 한 말이다. 조폭은 정법기관을 주관하는 부시장삼촌을 뒤에 업고 부동산 시장을 장악하면서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온갖 죄행을 다 저지른다. 그런 조폭두목이 자기 신변의 부하가 마약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자리에서 호되게 닦아세운다.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다니는 조폭 두목임에도 단순 이 한마디에서만은 감동을 느끼게 한다. 범죄와 사악을 떠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저 말 자체는 지극히 맞는 말이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 일은 하지 말라는 부하에 대한 관심까지 부여되면서 잠시 조폭이라는 신분을 잊을 정도로 공감이 가게 만들었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면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빠질 수 없다. 우리나라는 통제가 되였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나라는 방역에 비상이다. 심지어 한동안 영국 수상까지 위독한 상태에 이르는 공포의 바이러스였다. 최고의 경호에 최상의 방역조건을 갖춘 한 나라 수상도 피해가지 못한 상황이라면 그 위험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기 의사와 간호사들이 영웅으로 불리운 것도 생명의 위험 앞에서 다른 생명을 구하는 자기 희생적인 정신에서 비롯되였다.  이런 지독하고 위험한 바이러스에 직면해 종래로 마스크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대했던 서방 세계도 마스크를 적극 권장했고 심지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마스크가 없으면 스카프라도 두르라고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틱톡을 들여다보면 도로를 무단 횡단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영상이나 고속도로에서 출구를 놓쳐서 망설이다가 뒤차가 들이받는 화면을 접한다. 그럼 그렇게 무단횡단을 밥먹듯이 하고 고속도로에서 후진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상을 접하지 못해서 그러는 걸가. 그보다는 그런 일이 설마 나한테서 벌어지겠냐는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최근에 북경시가 버스전용도로를 차지하고 주행하는 사회차량 단속에 나섰더니 잠깐사이에 한개 지점에서 수십대씩 걸렸다. 더 한심한 건 경찰단속에 걸려서도 내가 급해서 전용도로를 좀 차지했는데 그게 무슨 그렇게 큰 일이냐는 태도의 기사가 한둘이 아니였다. 심지어 어떤 기사들은 앞에서 많이 가던데 왜 나만 붙잡고 난리냐고 오히려 도적이 매를 드는 상황도 연출했다. 이건 횡단보도에서 행인들이 단체로 신호를 위반하는 현상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신호 위반이 분명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지나가는데 나 혼자만 지키는 게 더 이상하고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하다.  더 위험한 생각을 례로 들면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시기에도 나타났다. 바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한때 4월 12일 부활절전에 생산을 회복하겠다고 나섰던 게 대표적이다. 물론 주변에서 루차 경고하면서 포기하기는 했지만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생산을 회복하겠다고 한 리유가 아주 황당했다. 해마다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여 자동차를 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냐는 주장이였다. 웬만해서는 나올 수 없는 기가 막힌 발상이다.     남의 얘기니까 하기 쉬운데 나도 잘나서 다른 사람의 례를 드는 건 아니다. 해마다 건강검진을 하면 여덟가지에서 십여가지의 이상 수치가 나온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민감한 혈압이라든가 혈당이라든가 간수치도 빠지지 않는다. 그럼 검진결과가 나온 한주간은 아주 조심한다. 술도 줄이고 운동은 늘리고 수치도 부지런히 확인한다. 그런데 그게 길어서 한달을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다음해에 또 검사하고 다시 겁이 덜컥 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마실 거 다 마시고 식이료법도 뒤전으로 하게 된다. 이게 일반인들이 생명에 대한 공포 심리의 유효기간이다.  사람은 출생해서부터 부모 교육, 학교 교육, 사회생활의 이런저런 규범교육을 받으면서 그 사이 수많은 명언도 접하고 천고불변의 진리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걸 다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  “생명 외의 모든 건 다 작은 일이다”,  “회사는 남의 것이고 건강은 내 것이다”...대개 이러한 철학들이다.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있을가 싶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17년전에 우리는 이미 사스의 끔찍함을 경험했었다. 특히 북경은 사스 때 다른 지역보다 심한 곳이여서 교훈은 심각하건만 사람의 위험의식이란 게 지나가고 나면 그 심각성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희석된다. 최근까지도 아빠트단지 입구에서 방역원들과 시비가 붙는 영상이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녔다. 나 한명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대중 위기의식이 결여된 극히 협소하고 리기적인 표현이다. 이와 대조되게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에서 목이 간질거려도 눈치가 보여서 기침을 참아본 사람들도 많다. 세상은 이렇게 배려의식이 훨씬 지배적이여서 아름답다. 우리말에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하루 아침에 뱀한테 물리고 10년동안 두레박줄에 놀란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지나친 소심함을 표현한 말인데 이 말을 바꾸어서 2003년 사스에 놀란 가슴 2020년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더 놀랐다로 표현하고 싶다.  최근에도 발생한 길림성 서란과 한국 이태원 클럽의 례는 아직도 방심하기에는 이르다는 경종을 다시 한번 울려준다. 개미구멍에 큰 둑이 무너진다. 중국조선어방송넷 
85    출생의 비밀 댓글:  조회:1471  추천:0  2020-05-12
출생의 비밀 궁금이 어제는 “기막힌 유산”이란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휴대전화”란 표현이 나오길래 잘못 들었나 해서 다시 돌려봤다. 분명 핸드폰도 휴대폰도 아닌 휴대전화라고 했다. 사실 영어권에서도 쓰이지 않는 핸드폰은 어디에서 왔는지 그 출생의 비밀을 알길이 없거니와 한자어 휴대와 영어 폰의 결합도 썩 합리한 조합은 아니였다. 네이버와 같은 인터넷 사전을 검색해도 많은 외래어 뜻풀이 뒤에는  “-로 순화한다”로 되여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많이 써왔고 외래어도 우리말의 일부분이라는 주장하에 과도하게 람용되고 있는 가운데 일상생활을 반영한 드라마에서 휴대전화란 단어가 나왔다는 건 아주 이례적이면서도 또한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핸드폰이든 휴대폰이든 휴대전화든 알아들으면 되지 뭘 피곤하게 자꾸 따지냐는 주장이라면 그것 또한 각자의 립장이니 누가 뭐라 하지는 못한다. 얼마전에 조선 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를 보면서 “아자”란 단어를 들었다. 한국에서도 “화이팅”을 아자로 순화하자고 주장한지 오래된 일이다. 이렇게 남북에서 다 쓰는 좋은 단어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전문 연구를 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아닌 이상 대부분 경우에는 한 단어가 어떻게 왔는지 그 어원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냥 일상 소통에서 원활하게 사용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그런 연구가 필요없는 건 아니다. 지극히 필요할 뿐만아니라 그런 연구가 존중을 받아야 되고 연구의 합리한 성과를 자각적으로 실천해 가는 게 한 민족의 언어를 지키고 발전시켜 가는 자세이다. 우리가 생소하다고 아니면 이른바 어색하다고 고유어나 순화어를 배척하면 그건 우리말을 아끼는 자세가 아니다.  부인이란 뜻으로 “와이프”는 항간에서 많이 사용되기는 하나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라고 일찍 2천년대 초반에 만났던 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 실장의 지적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쓰니 그의 영향을 받아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쓰이고 있다. 순치음이나 치간음이 없는 우리말에서 화이팅이나 팩트 같은 말은 죽었다 깨나도 영어발음을 그대로 따오지 못한다. 그러니 또 적기는 저렇게 적고 구두어에서는 영어음을 그대로 살려서 발음해 준다. 참 지혜로운 언어생활이다. 그러면 이쯤에서 또 왜 한자어는 되는데 영어는 안 되냐며 갸우뚱한다. 이건 력사, 문화와 어학적인 견지에서 론문이 작성돼야 할 문제로 우리말의 58.5%가 한자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해석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영어에 친화적인 한국이 일본어는 왜 그렇게 배척하냐면 이것 또한 답답한 질문이다. “바른말 고운말” 같은 프로에서 들어도 그냥 일본어에서 왔길래 순화한다고 해석하면 끝이다. 물론 짧은 프로에서 일제 강점기 력사까지 다 풀 수는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작심하고 따지면 끝이 없다. 어떤 때는 그냥 싫다는데 꼭 리유가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학교 때 은사님이 자주 례로 들었던 “상인”은 되는데 왜 “공인”은 안 되냐고 따지면 참 어려운 질문이다. 반도에서는 로동자라는 뜻의 공인이라는 말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따질 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한어의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곤혹스러운 문제다. 우리말의 장단음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하며 자라서 자연스럽게 지켜지지만 그런 환경이 없었던 우리에게 있어서는 억지로 기억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릴 때 대도시에서 우리 마을에 놀러온 애가 있었다. 우리말이 아주 서툴렀는데 눈섭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만 “작은 머리”라고 해버렸다. 그랬더니 애들은 웃겨 죽겠다고 배를 끌어안는다. 우리가 그럴수록 그 애는 점점 더 우리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도 내가 위챗에서 “녀자”  “리해”라고 쓰면 두음법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영 신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없지 않다. 심지어 한국에 가 있는 한족 류학생들도 내가 위챗에서 우리나라 화페단위인 “원”을 “위안”이라고 쓰지 않아서 헛갈린다고 한다. 한화가 “원”이고 인민페는 “위안”이라는 주장이다. 이건 북경이냐 베이징이냐 청도냐 칭도오우냐의 문제이니 여기서 시비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부모”가 외국에 있는 정체불명의 외래어 “자식”들이 줄줄이 나오니 그 언어환경에 있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그걸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 환경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세대간의 언어의 벽은 분명 존재한다. 외래어 뿐이 아니고 줄임말도 갈수록 넘쳐난다. 미국 드라마를 “미드”라고 하더니 국내의 개별적인 매체는 또 그걸 금방 받아물어서는 사용한다. 뉴질랜드 드라마는 “뉴드”라고 할 판이다. 간혹 모음 발음이 꼬이면 열독량은 엄청 올라가게 생겼다. 언어의 경제성인지 게으름인지 암호인지 류행인지 출생의 비밀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다 그렇게 쓰면 언어사정기관에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게 우리의 일상언어생활 현실이다. 공상행정관리국이나 세무국 같은 기관이면 과태료라도 물리겠지만 언어는 학자들이 아무리 안타깝게 호소해도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그만이다. 오히려 금방 한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어학자가 일반인에게 물어서 공부해야 할 상황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오며 각자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합의점은 별로 없었던 화제를 드라마 한편을 보다가 생각나서 또 이렇게 넉두리를 했다. 출판사에서 편집으로 근무하는 후배의 모멘트에는 이런 대글이 달렸다고 한다. “당신들은 아직도 이런 걸 캐고 그럽니까?” 딱히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워지는 물음이라 오히려 언어 사용 문제의 화두를 던진 사람이 더 곤혹스러워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질서와 규범이란 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현상은 너무 엉뚱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간혹은 궤도를 벗어났다가도 다시 돌아와서 존속해간다. 그러기까지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지성인들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이런 분들이 고맙게 여겨지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로동을 존중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고유어를 쓰자는데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편 정보통신, 의학,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교류에 따라 외래어의 류입 또한 불가피한 일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로 가느냐의 문제는 키잡이가 중요하다. 분명한 건 바람 부는 대로 돛을 달면 바람의 방향이지 배가 가야할 목적지는 아니다. 운전은 가속페달보다 제동장치가 더 중요하다. 중국조선어방송넷 
84    스파티필름의 도전 댓글:  조회:405  추천:0  2020-05-12
수필   스파티필름의 도전         (연길)연서     돌돌 말린 하얀 꽃송이가 파릇파릇한 잎사귀 사이로 솟구쳐 고개를 내민다. 청초하고 우아한 자태로 베란다의 정원을 아름답게 아우르고 있었다. 몇년 동안 푸른 잎만 무성해서 꽃을 피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겉흙이 마르면 듬뿍 물을 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은 작열하는 태양처럼 강렬했다. 급기야 따스한 해빛 세례를 받으며 수줍게 움추렸던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반듯한 자태는 견정해보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성공이다. 그동안 어두운 흙속에서 얼마나 많은 용솟음을 시도했을가. 겨울 내내 삭막하던 베란다에서 이제 막 꽃대를 올리며 아름답게 피여난 스파티필름은 함초롬히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한송의 꽃을 피우는게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시도 끝에 얻을수 있었던 보귀한 성공이다.    진한 초록색 잎과 뽀얀 하얀 꽃의 조화가 주는 싱그러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순간 도전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과연 나는 그동안 어떤 도전을 해왔던가? 그리하여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라고 할수 있나. 뒤돌아보면 자신만의 길을 찾아 헤매느라 갈팡질팡하며 살아온 듯 싶다. 명예로운 삶을 소유하고자 아등바등 애를 쓴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좋은 직장, 빠른 승급, 높은 월급을 위해 치렬하게 살아왔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숭고한 리상을 위한 도전은 뒤로하고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충만된 어깨가 무겁기만 했다.    딸애를 가슴에 품은채 엄마란 이름으로 마주한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완벽한 세상을 만날수 있는 것이 못되였다. 매순간 책임감과 강박감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강박에 몰아넣고 있고 그래도 불안감이 엄습하면 다시 자신을 다독이며 행진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위한 도전은 결코 록록치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목숨줄에 위협을 가한채 랭혹한 현실을 맴돌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진 내게 한송이 스파티필름꽃의 거침없는 도전은 희망의 꽃으로 다가왔다.    도전앞에서 식물인 꽃도 인간과 흡사하다. 한떨기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며 줄기며 쓰디쓴 인내의 고달픔을 견뎌야 했다. 모든 식물이 생명을 다해 꽃을 피우고 꽃을 통해 최고의 매력을 발산한다. 심지어 꽃이 피여있는 동안은 뿌리와 줄기와 잎도 꽃을 위해 진력을 바치며 희생한다. 나 역시, 딸애를 온전히 지키고자 나의 삶은 땅속 깊숙히 묻어두었다. 소중한 시간들을 한가한 취미생활에 할애할 여유도 없었고, 수북히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겨를조차 없이 바삐 돌아쳤다. 오로지 딸애를 보다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시도 쉴틈이 없었다. 풍요로운 성장환경이 못되여 스스로 딸애를 풍족하게 키우기에 력부족이지만, 그래도 빈틈없이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저 했다.    다행히 부족한 보살핌에도 딸애는 씩씩한 모습으로 자랐다. 틈틈히 밤을 새가며 여러가지 잡다한 일들을 해오면서 빈곤함을 메우려고 애썼다.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고 딸애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그렇게 다시 일터로 향하고 다시 퇴근하여 딸애를 집에 데리고 오면 하루가 금새 저물어갔다. 어머니 날, 부족한 사랑을 따뜻한 밥으로 대신할 요양으로 이른 새벽 일찌기 부엌에 들어섰다. 순간 식탁에 언뜻 곱게 접은 편지가 보였다. 어둠을 몰아낸 새벽빛에 보이는 것은 ‘엄마 그동안 키워줘서 고마워, 사랑해!’라고 삐뚤삐뚤 써놓은 딸애 필치였다. 그옆에는 노오란 카네이션꽃도 정히 놓여졌다.     평소 표현이 서툰 딸애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니 코마루가 찡해났다. 아마도 어제 학교를 마치고 오던 길에 미리 준비해놓았으리라. 마냥 철부지 같았던 딸애가 이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정도로 성큼 성장한 것 같아 대견했다. 딸애의 친근한 표현은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샘작업에 빠져있어도 지칠줄 모르는 활력소가 되였다. 무거웠던 시간들은 정처없이 흘러갔다.     딸애의 성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힘찼다. 처음 시작하면 끝까지 견지하는 아이인지라 성악가수가 꿈인 딸에게 진중한 선택이였으리라. 그렇게 딸애의 힘찬 도전이 시작되였다.    운동대회날,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꼬마가수로 된 모습이 제일 먼저 안겨왔다. 소소한 공연이였지만 실수 한번 없이 풍부한 음성으로 우리 민요를 열창했다. 엄마의 소홀함에 딸애는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 성장하는 법을 터득하였을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부단히 자신을 이기고자 도전하는 자세는 당당하고 용기가 넘쳤다.    딸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스파티필름가 싱싱하게 자라듯 활기로 넘쳤다. 집에서도 이번 무대를 준비하고자 녀석은 많은 시간을 무던히 련습했다. 딸애의 당찬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떠안고 빙빙 돌고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한 동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춤하여 자신을 은페시키고 있었다. 실은 차가워 보이는 현실의 벽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차마 그 벽을 정시하지 못하고 생소한 것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여있었을 뿐이였다. 스파티필름의 화려한 출현과 딸의 용감한 도전이 나의 잠재웠던 열의을 불타오르게 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수놓은 꽃송이의 자태는 싱그럽다. 흙 속에서 내내 머물렀다면 어찌 해빛찬란한 세상을 만날수 있을가. 이제 딸애에게 나의 도전을 보여 줄 차례이다.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앞날을 향해 도전의 씨를 뿌려본다. 료녕신문 
83    70년대 그 격동 시절 속 청춘 (현룡운) 댓글:  조회:531  추천:0  2020-05-11
  (1)농민의 공수(工数)     73년도 2월말부터 나와 졸업동기들인 새파란 청년남녀들은 집체호를 구성하고 정식으로 농촌인민공사 생산소대 사원(社员) 으로 되였다. 쉽게 말하면 소위 이라는 감투를 쓴 농촌농민이고 더 나가서 소궁둥이를 두두려야 할 촌민으로 된것다.   옹근 동네에는 한족이란 한집도 없어 성인들은 한어말을 전혀 몰랐고 편지봉투의 한자 주소를 쓸때마다 지식청년들이랍시고 집체호를 찾어오군하는 동네,세개 자연툰에 달랑 대대 사무실에 전화 한 대,그게 유일한 정보망이였던 동네.   혹간 영화를 이동봉사대가 상영할라치면 조선말 이라는 기가 막히게 현장 해설하는 화술가가 있어 전반영화의 모든 남녀로소 배우들의 대사를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 수 우리 조선말로 즉석 배음(配音)해야만이 영화내용을 알어보 는 조선족 마을이였다.    밭갈이 철이 오자 당시로서 시내 공인가족들 집에서는 명절 이라야 맛이나 볼가말가 하는 찰떡을 잔뜩쳐서 밭갈이 소한테 먹이는것을 처음 보았고 소한테 우철을 신기는것도 보았다.    소를 형틀에 묶어 매고 소의 네 발바닥에 철판으로 만든 우철을 박는다.부림소한테 미끄럼 방지용이자 발바닥 보호용 철판을 대는데 쓰는 쇠못을 우철꼭지라고 불렀다. 소한테 신겨주는 구두같은 평면 철신이였다.  촌의 대장간이 소수레와 소우철, 우철꼭지를 뽑는등등 일이 유일한 철공일이였다.   송아지가 어느정도 커서 부림소로 자격을 가지자면 코를 가로 구멍뚫고 꼬뚜레를 꿰야 다.    소의 코을 꿰매고 수레나 발구를 끌기 위한 전 단계 련습인 송아지의 목을 틔운다면서 발구에 석마같은 무거운 걸 싣고 련 며칠간 "전문훈련"을 받어야 부림소,일군소로 승급하여 고삐를 끌고 다니게 된다.   송아지의 부림소로 승격이나 학생이 청년농민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과 똑같은 것 같았다.  어찌보면 우리는 송아지의 부림소에로 진화과정처럼 목을 틔 우고 코를 꿰거나 손발에 철판은 안박아도 장알이 박혀야 농군 이 될 것이라고 지방 청년형님들이 충고삼어 롱담조로 "너네도 저 쇄지 (송아지)들처럼 고생해야지" 한다.   당시에는 소가 제1생산력이였기에 "애비없이는 살어도 소 없이는 못산다" 하는 시대, 그래서 생산대의 최고건물이 소사 양간 -- 우사(牛舍)였다. 전례없던시기인지라 거의 매달마다 터져나오는 정치구호와 계급투쟁만 선동하던 여러 매체들의 사설(社论)과 상급회의 정신이요, 무슨 동원 이요하는 등등 회의가 거의 매일 있던 시절이다.  생산소대의 제일 큰 건물인 우사칸에 회의실용으로 붙여지은 회의실이 집합장소이자 활동실이였다.하루의 고된 전간로동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정치활동에 빠지면 안되였다.  일에 지친 소들은 우사 량편에 서렬대로 줄지어 비스듬히 누워 서 그 퉁방울 눈을 꺼벅거리면서 한가하게 새김질을 하고 있고 농군들은 또 정치를 해야 하는 저녁이다. 소들은 정치가 필요없 고 여물만 잘 먹이면 된다. 사람은 정치가 꼭 필요했다.   하향지식청년이 시골농촌에서 단련 받으면서 로동도 잘하고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여야 그 표현에 따라 당지 “빈하중농” 사원들과 간부들의 공동평가와 추천을 받아야만이 농촌에서 할 수 있었다.   지루한 회의 후엔 또 라고 하는 로동공수평의를 하는 로동평가회의가 있었다. 산서성 석양현의 대채대대의 발명 이라 해서 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이라 고도 하였다. 얼굴도 붉힐 필요없이 대충대충 평하자는 뜻.     농촌의 생산로동이라는 것은 일년내내 거의 한가지 일로 고정 된 작업이란게 없었다. 춘하추동에 밭고랑과 씨름하고 자연과의 박투에 고정된 일이라곤 없다만 그러한 여러종류의 일에 대한 평가만은 꼭 매일해서 그 공수(工数)만은 각자 기입해야 한다.  도시공인들은 고정된 기술직종에 따른 고정작업분야가 있는데 이런면에서 보면 농민들이 로력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공인들 보다는 더 강하다고 내가 공장직장 생활한 후에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당시에는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것 같다.  그때 이란 영화에서 한 농장원에 일년에 600공 을 벌었다는 뚱뚱한 녀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도 좀 뚱뚱하고 인물이 차하지만 일을 뚝심있게 하는 녀자들을 가르켜  라고 불렀다.  땡 볕쬐이는 삼복철,사래긴 밭에서 하루동안 고된 김매기를 하 고서도 또 밭머리에 둘러 앉아서 하루로동 평공을 작업조별로 해야한다.  로동태도, 숙련정도, 적극성 등등을 가지고 서로 평비를 하는데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그 평비에 근거하여 본인이 자기공수는 자기가 기록했다가 생산대 기공원이라는 가 따로 있어 매달 기공부를 서로 맞추어서 루락이 없도록 해야 한다.  년말에가서 생산대 일년 총수입을 합계한 후, 일년 내의 전 생산대 남녀로소의 총공수를 합계하고 나누면 한 공수의 값이다.  분홍(分红)이라는 일년분배 잔치 전에 일년 왕래명세를 공개 해서 공제한다.  되놀이,개추렴에서 마셨던 술값도 싹싹 적어야 한다. 그걸 가르 켜, 혹은 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일요일라는게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야 자동 휴일이여서 힘들 때면 비가 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식청년의 선진일군 추천표준은 일도 잘해 공수도 잘 벌고 정치활동에서도 적극적이여야 했었다. 일년가서 년말에야만 “년봉”형식인 현금을 받는 시골에서 받 는 공수종류에는 일공(하루일 공수),계건제공수,탈리공수 혹은 반탈리공수,출장공수,의무로동공수,단독작업공수 등등 여러가지 명목이 있었다.(탈리-- 집체로동을 떠난다는 말) 청춘시절 6년을 그런 공수벌이를 하였었다.야들야들한 잔뼈를 굳히는 작업이였다.  년간 300공내지 400공을 벌면 갑급이요, 200~300공은 을급, 100~ 200공이라면 병급으로 된다. 3, 4년정도 농사일을 하고 나중에 겨릿소를 몰고 밭갈이 가대 기를 잡고(집탑) 이라쨔쨔 하면서 밭갈이나 후치질,엎어갈이* (*감자밭 후치질 정도의 일종) 정도는 해야 진짜농군으로 된다. 그 정도의 일을 다 할수 있는 농군은300~400공을 받을수 있는 농군이다. 300~ 40공을 버는 총각들은 장가가기 좋은 대상 들이였다. 우리 지방의 말로는 "명주바지에 답싸리"붙듯 처녀 들의 청혼이 든단다. 그땐 당뇨병이란 용어도 없었고 고혈압이니 저혈압이니 3고 니하는 용어도 없었고 심지어 근시안경이나 돋보기를 끼는 로인 도 극히 적었다. 한공수에 따른 가치를 공치라고 하였는데 공치가 높은 생산 대나 지역이 잘 사는 동네였다. 기본상 공치가 최대의 정치가 아니였던가 생각한다.  나는 힘든 일에 청년들 대장노릇 하다보니 년간 300공 아래 는 받은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식 청년이라서 약혼,청혼은 금지 구역이였다. 지금 같으면 안 그럴텐데. . .   (2)  지식청년의 고민   그때는 "계급투쟁을 기본으로,혁명을 틀어쥐고생산을 촉진한다 " 는 등등의 정치구호가 항상 귀등을 때릴 정도로 많았는데 처음 농촌에 내려가서 결심 발표도 여러번 하긴 하였는데 제일 큰 자아고민은 "본인은 한평생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하겠 나이다" 라고 지극히 극단적인 선서문을 써서 올려야만 했고 여러가지 회의에서도 이러루 한 태도표시 한 후 고민이 깊었다.  한 두해도 아니고 한 평생을 농촌에서 농민으로서 소궁둥이만 두드려야 한다는 그 정도 결심을 해야 뭔가 진보적인 지식청년 으로 락인이 찍히는데.   한 두해 지나면서 깊은 고민만 고여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덕화 공사의 당위 김서기(덕화공사의 최고령도)님이 우리 대대 에 시찰차로 왔다가 려관도 없는 동네라 그런대로 잠자리가 편 한 우리 집체호에 오셨다가 나의 침실에서 투숙하시게 되였다.  그때 당시의 우리 눈에는 공사당위서기는 "태양"같이 높은 존재였다.    매일마다 이리저리 보내면서 일을 시키는 생산대 대장, 그 위에 대대주임이나 대대 당서기님, 또 그 윗분이 아닌가, 현, 시장 아래가 공사서기인데.   잠자리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부친과 친분 이 있었기에 용기내여 벌떡 일어나서 물어본 말이있다.  "김서기님, 농촌에 영원히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구 했는데 그런 우리같은 적극분자는 정말 한뉘 농촌에서 남아 농사일만 해야 하구 군대도, 학교두, 공인으로도 못감둥?"  "오, 네가 그런게 고민인 모양이구나", 높은 간부라서 인차 내말 뜻을 낌새를 챈것 같었다. "야, 그래 농촌에 단련내려와서 발전하겠다는 늠들이 그 정도의 결심발표는 해야 조직에서도 저 늠이 결심이 괜찮다고 인정하구 밀어줄게 아니야.그게 조직의 의무야, 그렇다구 앞길이 창창한 놈들을 전부 이 농촌에 뿌리박게 하구 어데두 못가게 하는 정책 은 없어.    전쟁판에서도 결사대가 다 죽어버리라는게 아니고 그런 정신 으로 임하라는 뜻이 아니겠어, 다 죽으면 전투는 누가 하구. . . "  아하, 그런 뜻이였구나, 피끓어 번져지는 내 가슴에 와닿는 가장, 가장 깊은 훈시, 눈앞이 훤해졌고 머리에 부담이 훅 날려 갔다.  그 이튿날 아침, 식사후 어깨를 펴고 김서기님을 모시고 대대 전간에 이리저리 모시고 다녔다. 전야를 둘러보시는 김서기님이 그렇게 자상하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개인의 전도와 리상이 당시 정치풍도에 어울리지 못하고 언행 이 불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깊은 우려에 빠진 젊은이의 머리속 고민을 하루밤새 대화로 훨훨 풀러 주셨다. 꽉 막힌 장기(象棋) 의 수를 신의 한 훈수로 풀어주듯이. 그때 그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조언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정치적 고민을 풀어준 첫 은인이였다. 썩 몇 년지난 후, 내가 화룡에서 자동차정비회사 사장할 때 이미 현급간부로 계신 그 분을 우연한 장소에서 딱 한번 만나 인사드리고 한잔 올리면서“김서기님,그때 그 말씀이 정말고마 웠습니다”하니 “다, 정치가 문제야, 펀펀이 공부할 놈들을 시골 에 내쫓고, 니도 잘 성장해줘 고맙다, 이제부터 잘 해봐, 뿌리는 어디에 가도 박고 살어야 산다, 뿌리가 마르면 생물이 죽지. 옳 지?” 하시면서 내 등을 다독여주시던 하늘나라에 가신 그 분이 정말 그립다.  그리고 고마웠던 분이시다.그때 그시절 정치적 기후에 정치 적인 솔직한 멘토(mentor)가 희소한 세월에 젊은 나한테는 첫 멘토였다.   (3)   일등 이라? 1975년 마가을, 일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화룡현덕화공사,  지금의 남평鎭 운동대회는 두만강가 옆 남평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말이 公社운동대회였지 분위기는 지금의 우리로 말하면 올림 픽경기 못지 않는 체육행사였다. 11개 大隊(지금의 村)의 시골 운동 건장들이 치고, 박고, 결투를 진행하는 경기대회였다. 내가 하향내려간 룡연대대는 운동실력이 강하고 농사도 잘되 고 돈이 많은 부촌인지라 연길, 화룡등 연변을 훝어가면서 운동 특기선수를 영입하여 집체호에 끌어왔다. 마치 지금의 이적 선수를 영입하듯이……. 3일간 운동대회와 문예경연도 하는데 마지막 날 오후는 축구 결승결기가 펼쳐졌다. 결승경기날, 가을비는 내리고 해는 저물고 분위기는 살벌한 룡연대대와 남평대대간 축구결승전은 두 마리 황소 싸움같었다. 농촌 운동대회는 언제나 점잖게 끝을 본적이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전반전에 비긴 두 팀, 후반전에 패널킥 시비로 대판 싸움이 벌어졌는데 변심(邊審)이란 자가 오프사이드(offside)(旗)를 쳐들 었는데 주심(主審)은 변심이 살짝 들었다 급히 내리운 절충적인 모호한 동작을 보질 못하고 그냥 경기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 꼴로 판정이 난 판.  전반전에도 상대편 핸들링(handling)을 불지 않은지라 경기장 은 서로 주심과 으렁으렁하는데.  룡연과 남평은 운동회 력사적으로 앙숙인지라 또 싸움판에 시비소리에 거기에 각 大隊 대대장(지금의 촌장)들이 가세하게 되여 그야말로 말릴수록 더 아우성이 터지는 운동장이였다. 남평이라는 곳은 공사 소재지로서 텃세가 좀 있었다. 결국 심판이라는 중학교 체육선생이 욕설과 주먹이 오가는 야유속에 호르래기 던지고 강둑을 따라 달아나자 심판대행이 들어왔는데두 량팀은 불복으로 으르렁. (원래 심판대행은 불가)  찬가을비는 내리고,해는지고,나중에 절대권세자인 주석단(主席 團)의 주임,서기어른들의 결재(決裁)로 운동대회질서 파괴罪로 두 팀 다 2등이라는 불명예를 가지는것으로 운동회는 막을 내리고 서로 손사래를 쳐가면서 명년에 다시보쟈 하고 으르렁 거리고서는 우리 룡연팀은 무한궤도 뜨락또르를 전용 운수기처 럼 타고 흥분한 상태에서 툴툴거리면서 30리 귀촌길에 올랐다. 대대당(大隊黨)서기들도 서로 주먹 휘두르며 야단치다가 결국 거룩한 공사 당서기의 질책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때 세월은 一等이던 2等이던 3等이던 전부 똑같은 거울(鏡子50CM* 1M정도)에다 榮獲 1975년 德化公社 運動大會 축구 一, 二, 三等 이라고 뼁끼 (페인트)칠을 하고는 금박(金薄)가루를 뿌려 하사하면 끝이였다.   당시 민병련장(民兵連長)이자 인솔자인 나는 운동선수들을 다독여 뜨락또르에 태워 마을로 오는데 우리 팀의 중앙방어수로 유명한 박 아무개란 자가 이번 대회에 받은 狀章인 거울을 부둥 켜 안고 싱글벙글 하는것이였다. “너 임마, 비기구서도 무슨 좋은 일이라구 싱글벙글이야” “야, 그래두 상장을 봐, 一等 이잖어…하하하” 하느님 맙시사, 이 자식이 글쎄 둘 二 字의 가로금 하나를 저꺽 손칼로 긁어버렸다. 둘二가 하나 一 로 변한게다. 마을로 돌아가면 개선장군들처럼 대대 사무실에 번듯히 걸어 야 할 거울, 또 뒤풀이 행사때 정중히 대대 간부어른들한테 “본팀은 죽울 내기로 싸웠지만 2등의 영예만을 가져왔습니다” 하고 상납해야 하는데 글쎄 글자 획하나 가로채 빼서 일등으로 둔갑한 저 거울 상장을 어히하리요, 뼁끼도 없고 금박도 없는데 다시 더 써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래는 공동2등인데 저눔 자식이 가로금 한 획 빼먹었소이다 할 수도 없고, 운동대회서 난리소동 소문은 이미 날대루 다 난 판국인데…….   더 기막힌것은 공사지도부 모함이라는 중죄론까지 나온다는데 당시 총인솔자인 내가 그 한劃때문에 덤터기를 쓴 판국이였다. 영문 모르는 일부 대대 간부님들은 송아지까지 잡아놓구 기다 리던 차 내가 상장을 바치자 하시는 말씀 ”그래 잘했다 축구야 당연히 우리 룡연 대대가 일등이지…….   그런게 몇 일후에 그 어르신들이 공사마을 (남평촌)출장 갔다와서 나를 다잡어 부르더니 “너네 임마들아, 무슨 판이야… 남평대대(공사마을소재지)사무실에 가보니 거기두 축구 一等라고 번듯히 걸려있더라니까?? 후에 알고 보니 남평대대의 웬 불복자 하향지식청년이라는 늠들이 역시 둘二에서 한劃을 빼낸것. 제길할, 公社當書記님, 진작에 그럼 倂列 一等이라고 하시지.    1等字를 만드는 기교는 그 후날부터는 누구의 묘안인지 冠軍, 亞軍, 季軍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뺄 劃이 없었다. 壹等, 第一名 優勝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올림픽에서 나오는데 그때 그 시절엔 금, 은, 동 귀하였지. . ㅎㅎ    (4)손시계 임대 시계란? 손 시계, 사발 시계(탁상시계)벽 걸이시계, 탑 시계, 전자 시계, 회중시계 등등 여러 가지가 많다. 거기에다 날짜 나오는 시계, 라이터 시계. . . . . . . .  약속을 지키는데도 시계, 일 하는데도 시계, 밥 먹는데도 시계,잠 자는데도 시계… 하여간 시계의 공능은 지금 시대에 와서는 여러가지 기능이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70년대에는) “올 해 죽게 벌어 시계를 사야지”, “저 총각 시계를 찼다(있다)”, “그 집에 시계가 있다”, “시계 있는 집”, “결혼 부조에 벽시계가 덩그러니” …  “시계를 찬 걸루 보아서는 똑똑한 것 같다”   시계 없는 가정에서 시계 있는 집에 코흘리개를 시켜서는 "야, 아무개네 집에 가서 지금 몇 시인가를 물어보구 오너라" 하면 " 이집 시계 몇 십둥?" 하고 물어 올 때가 많았다. (자기네는 시계 도 없으면서?)    1974년 양력설(원단)이 지나서 내가 하향지식청년으로 처음 년말 소득분배총결을 맞었다. 년말 분홍이라고 용어를 썼다.  그때, 농촌 생산대 분홍(수익분배)라면 굉장히 복잡하고 재미도 있었다. 매년 일년 수익분배를 하고 현금 분배 할 때면 끝나고 돼지나 소를 잡고 집집의 인원수에 따라 육류 분배를 하는데는 저울이 아니라 기지치기*를 하였다. (*싸리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적절 하게 뼉다구랑 함께 꿰쳐 나누는 원시적 육류분배 계량 단위)  온 동네가 축제의 분위기로 들쑥 거리고 공급판매합작사 (지금 의 매점)문지방돌이는 불이 날 지경이다. 농촌에 내려간 첫 해는 국가의 식량을 타먹게 되였다. 그리고 농촌 안치비(安家落戶(安置費)라는게 국가에서 주었기에 첫 해만 120원씩 지원하여 주는 “우대 정책”이 있었다. 그러니깐 첫 해에는 생산대 측과는 왕래(거래 발생)가 거의 없어 일만 잘하 면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고장에 가야 그렇구… --지금 젊은이들을 다시 한번 한 해에 인민페120원을 꿍져 주고 농촌에 가서 농사를 시켜보면 어떤 진풍경들이 연출 될가 한다.   생산대 별로 공치(工値)를 계산하다보니 자연히 경쟁도 심하 였다. 대략 계산방법은 전체 생산대 모든 남녀로소 사원들의 일한 공수(工數)로 전부 수입을 제하고 다음 공적금으로 이듬해 쓸 생산비용을 떼내고 보조금 같은걸 떼낸후 한 工値 얼마 라는게 나오는데 1974년 우리 생산대는 한 工値가 2원90전 이나 되여 전 화룡현에서 최고였다고 할수 있었다. 당시 어떤 시골에서는 하루 工値가 한장 우표값인 8전도 안되는 고장도 있었다.   딸 부자 집들은 음주파티 참가 往來가 적어 타는 돈이 좀 많고 잔 식솔이 많은 세대주들이거나 지병으로 환자가 있는 집은 비용을 공제하고 나면 별로 탈 돈은 없었다. 참 보기가 궁색하였다. 생산대 왕래 내역서를 보면 그 내용이 다 적혀 있다. 하여간 그 해 나는 2월에 내려간 후로 열심히 시키는 일만 하고 신체가 그 고장 말대루라면 “무릎에 피가 한 동이씩 고인놈 들인지라” 좋아서 거의 만출근하다싶이 열심히 일하고 나니 전 집체호 16명중 거의 최고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년말에 400여원이란 거금을 현금으로 타게 되였다. 물론 이듬 해 먹을 자기 식량값, 감자, 배추, 무우 같은 분배하는 채소값 이랑, 기름 값은 제하고서였다. 1973년의 인민페 480원이라면 시내 일반 살림집 한, 두채 를 살수 있는 자금이였고 그때 우리 동네 중학교 교장의 월급 이 45 원였다. 순수입으로 거의 일년 교장월급을 타게 된것 이였다. 그런 거금을 나는 난생 처음으로 쥐여 보았고 그 해 양력설에 화룡에 계시는 아버지한테 한 푼도 안남기고 전부 인편에 보내 드렸다. 이 큰 아들이 번 돈이랍시고. 그런데 아버님은 평생 이 맏아들이 처음 억척스레 벌어보낸 돈인지라 고민중에 글쎄 180원이나 주고 나한테 일본제 세이꼬 (精工牌)손목시계를 덜렁 사서 보내주시는게 아니겠는가? 혹여 이 아들한테 품위를 심어 주시는라 그랬는지 몰라도 전 화룡현에 해마다 두 개정도만 년말이면 귀품으로 내려 오는 백화점 일본제 손목시계 구입표(당시는 표가 있어야 구입 가능) 를 지인통해 얻었다고 한다. 나는 시계라는것을 그때 처음 손목에 차고 다니였는데 그 일 본제 세이꼬 시계 때문에 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생산대장은 일 안배를 할 때면 한 무리 일군들에는 반드시 시계를 찬 사람을 한 명씩 특파하여 시간 알림이로 고정안배를 하였다.   보통 전간에 가서 일을 할 때면 배고파나면 점심이요,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저녁이였다. 한 여름철이면 두만강 건너편 조선 측 공로에서 茂山行으로 올라가는 上向뻐스가 보얀 먼지를 일쿠면서 올라가면 거의 점심 때인지라 배고프거나 힘들 때면 우리네 젊은놈들은 조선쪽 언덕을 눈이 빠지게 서로 목 빼들고 살피다가도 조선측의 뻐스가 올라가면 “에라, 점심먹으러 간다” 고 집체호로 줄행랑을 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가을철 잎담배 건조실 일로 빠쁜 와중에 우리 생산대에 총각인 찬길이란 당지 청년이 아침전에 집체호에 날 보자구 찾아왔다. 자기네 집에서 초두부(순두부)를 하였는데 자꾸 가자구 하기에 이상하다 하면서 따라갔다. 나 한테 소수레를 모는 것부터 배워준 소위 빈하중농 청년대표였다.   당시는 중국의 농촌은 계급사회 성분을 획분하여 지주, 부농, 중농, 하중농, 빈농, 고농으로 인간사회의 출신 성분을 분류하여 딱지처럼 붙여놓고 젊은 청년들의 전도도 그것으로 가름하여 로 뽑기도 하였다.   지금말하면 해방 전에 거지처럼 살었거나 빈 털털이나 고농 (顧農)이면 혁명에서 가장 깨끗한 출신이고 잘 사는 지주, 부농 자녀나 그 당사자들은 거의가 혁명대상딱지가 이마에 붙어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우리같은 하향지식청년은 농촌 빈,하중농(무산계급에 상당)의 재교육을 받으라는것이 모택동 주석님의 지시였다. 말이 빈하중농대표지 빈하중농 자제라 해야겠다. 우리보다 조금 년상이였으나 맨날 “야, 이 빈하중농의 재교육 잘 받어야 해” 하면서 우리를 데리구 일을 하면서 자상히 배워주던 무던한 형 이였다.  항시 헤헤하고 그 힘든 소 외양강 언 소똥 두엄끄기 작업 이던, 언 통나무장작패기 같은 일, 돌을 까고, 목도를 하는 일을 해도 항상 힘이 넘치는지 웃기도 잘하는 하루에 담배 두 세쌈 지을 태우는 왕골초 담배지골인 빈하중농 자제였다. 사람이 진국이였다.   영문도 모르고 형을 따라 따라가서 음식솜씨 좋은 그 형의 전라도 고향인 어머님이 해준 따끈하고 핫들핫들한 초두부에 입쌀에 감자와 기장이 적당히 섞인 밥한 끼 푸짐히 하고 나서야 그 형이 하는 말이 참 머쓱하였다. “야, 룡운아, 내가 사실 말이지, 이건 비밀인데 헤헤, 래일 내가 상화 (우리 아래 동네)로 말 뗄러 간다(선 보러 간다는 뜻), 너 그 손목시계를 좀 빌리렴, 군대 모자와 옷은 저 옆집 군대 갔다온 영호한테서 빌렸다, 단 이건 절대 비밀이야, 알었지?” 그때 제대군인 복장에 데트론 군대모자(的确良帽), 군용혁대를 차면 다 지금의 최고의 행차용 제복이였다. 원래 마음씨 곱고 평소에도 남과는 얼굴 한번 붉힐줄 모르는 위인이 내 한테서 일본제 세이꼬표 손목시계를 림시 임대하려고 초두부(순두부)초대 작전을 어머님과 이틀전부터 짠 것이다. 초두부 먹은 놈이 방법이 없었다. 나 한테서는 가장 귀중한 손목시계를 자의반, 타의반의 손목 에서 벗어 넘겨주면서 한 말이 지금 생각하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지경이다. “형, 이 시계 내 조만에 (웬간해서는) 누구도 빌려 안주는데 첫째,어디라도 오리우면(긁힌 자리) 나면 안돼요, 다음,세수랑 할 땐 꼭 벗어 놓고서 하고 잘 때면 손수건에 감아서 베개 밑에 잘 감추구 자야 돼요” 등등.  “알었다, 알었서…” 찬길이 형은 옆 집 군대 갔다온 친구의 색바랜 제대 군인의 군관복을 입구서 군모를 빠딱하게 쓰고는 손목시계를 차구서 벙어리 례장받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타동네 색시 맞선 행차 출동준비 완료 초두부 두 사발 얻어 먹고 세이꼬 시계를 임대하여 준 셈이다. 귀하디 귀한 내 손시계를 벋어빌려 준 그때 그 순간은 손목이 허전했었다. 저형이 술 먹고 흥분돼서 혹시 잃어 먹기나 하면? 하고 부질 없는 생각두 했고.  아침식사 후 건조실이라고 부르는 당시 농촌의 최고층 건물 에 숱한 일군들이 모여 일하는데 마을 동구를 향해 입이 함박만 해서 찬길이 형이 나오는데 마을 처녀 총각들이 앞다투어 일은 안하구 어딜 가냐 하고 시샘조로 탐문하니 그저 헤헤 할 뿐이 였다. 찬길이 형은 몸이 좀 왜소해서 빌어입은 군복이 좀 컸으나 그래도 좋다구 펄럭이면서 자기 이모를 앞세우고 어깨를 으쓱 거리면서 가는 모습, 왼손 잡이여서 오른쪽 손목에 나한테서 한 손시계를 차고 씩씩하게 다섯 발자국, 열 발자국마다 걷다가도 자꾸 오른손을 휘익 휘둘러 올렸다 다시 내려 시계만 보는 행동을 하면서 우쭐우쭐하고 새 색시사냥 간답시고 가던 그 형의 뒤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동료 처녀총각들은 모두들 의아해서 휘휘한다, ”언제 저 자식 손 시계를 샀지?”…… 갑돌이가 맞선보러 간다니 동네 갑순이,영순이들이 싱숭 생숭 하는 판이요, 여늬 갑돌이들도 둥둥 마음이 떠있는게 분명 했다. 며칠후, 그 형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화 촌의 매파역을 한 그 형의 이모(원 고향이 상화촌인 약혼 참모)가 와서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생산대 담배 건조실에 숱한 사람들이 일하는데 옛말 거리가 없어 궁금한 판에 그 집 이모가 나왔는데 “찬길이 혼사 어히 됐슈?” “말을 뗐소?” “오호, 그 사돈 될 바깥량반 우리 상화촌에서 호랑인데, 에이 그, 우리 찬길을 보더니 입이 귀에 가붙더라니까.” “사위감이 시계를 찬 걸 보니 꽤나 똑똑하겠다고 그러던데 아이고, 호호, 잔치는 금년 부농(분홍)하문 하자구 하잽둥. 새기(색시)두 시계를 이제 찰게 꾸마…. 그 집두 잘 사는데… 호 호호. ” 결국을 시간을 맞추는게, 알리는게 목적인 시계를 찬 사람이 시계때문에 성깔머리가 호랑이 같다는 장인될 사람한테서  “똑똑해, 똑똑해 허허, 우리사위 될사람,  일본제 세이꼬 시계를 찬 걸보니 똑똑해, 허허”하면서 걸직한 막걸이 대접하더란다.  게다가 동네방네 50리 이내엔 어디도 없는 일본제 세이꼬 아닌가…. 그 때 상화촌은 정치는 대단히 잘 하는 동네였는데 룡연에 비해서는 구차했다. 아마도 그런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없었을 가능성 때문에 찬길 형의 혼사도 잘 된게 아닌가 하고.   물론 그 형은 후날 마음 좋은 상화색시와 결혼해서 잘 살구 애들도 인제 다 커서 장가간지도 오라단다. 하기야 그 때문에 내 시계는 찬길 형의 결혼 잔치날, 삼일 사돈인사때까지도 사돈 들 눈치 때문에 또 임대하여 드려야 했다. 전기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골연으로 감자 캐러 갈 때도 난 그 시계 때문 차출되여 오지로 파견되였다. 그 후 학교에서 교직에 있을 때도 내 시계가 제일 명표라서 사도존엄(師徒尊嚴)정신이 무지하게 강한 교장님도 가끔 내 손목시계를 빌어 차고 피식 웃으며서 행차할 때도 있었다. 그 땐 아갸들 손목에도 잉크로 손시계를 그려 줄 때도 있었다. 지금 애기들 손목에 손시계를 그려주면 젊은 엄마들이 뭐라 할가? 하여간 흘러간 세월에 옛말도 많지만 시계, 자전거,라디오, TV, 재봉침, 전기밥솥, 전화기, 냉장고, 휴대전화기, 컴퓨터 등 가전 제품들 때문에 우리 생활의 일화들이 많은것만 사실이 였다. 이게 40여년전에 내가 내려가 땅을 뚜지던 덕화룡연 골안 에서 있었던 시계의 일화이다. 하긴 요즘 그런 시계도 없어졌다,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알수 있으니 몇 천불 주고 소장용으로 로렌스 시계 같을 걸 찬 사람이 어찌 보면 덜 똑똑 해 보일 때도 있다. 저마다 스마트 모바일(손전화)를 다 차고 다니는데 전부 똑똑 해진 세월이 아닌것 같아 고개를 개우뚱하고 가끔 생각 한다. 연변일보
82    불효자는 웃는다(궁금이) 댓글:  조회:1357  추천:0  2020-05-11
    “이제 한 10년을 살겠는지”       엄마가 소파에서 돈지갑에 항상 넣고 다니셨던 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외우시던 말씀이다. 그러나 내 지갑에는 엄마 사진이 있어본 적 없다.       오늘은 모멘트에 온갖 엄마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지금처럼 위챗이 없었을 때에도 다른 매체를 통해 오늘이 어머니의 날이라는 걸 알 정도로 등한했고 엄마는 그런 명절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엄마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절보다는 팥죽을 만드는 동지가 더 기억하고 싶은 날이였다. 당신의 손으로 자식에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 그것 하나만 남았기 때문이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을 시기에 식자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집에서 할 수 있는 몇가지 명절음식이 있었건만 이제 마음만 먹으면 밖에서 뭐나 배달이 되는 시기에 엄마가 내놓을 수 있는 음식은 동지팥죽이 유일했다.        “이게 영 맛있다.”       엄마의 기억으로는 내가 잘 먹었던 음식이라서 번마다 성의껏 만들었겠건만 그 사이 내 입맛이 변했는지 아니면 엄마의 손맛이 변했는지 나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드리는 그런 아주 쉬운 일도 바로 하지 못했다. 지금은 젊은 부부사이에서도 안해가 해놓은 음식을 남편이 깨작이며 잘 먹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그런데 엄마는 내 저가락이 한번도 가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먹겠지 하며 다음번에도 똑같이 지속적으로 기억속의 음식을 꾸준히 만드셨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였고 그 몇가지 안되는 음식의 련속이 전에 아들이 잘 먹었던 걸 해주고 싶은 엄마의 간절한 소망의 순환이였다.        그 순환도 엄마가 혼자 계실 때에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냥 쌀밥에다 랭장고 안에 있는 짠지 같은 걸로 대충 때우셨다. 간혹 사전에 전화를 하지 않고 집에 들어서면 그런 간이식사를 하시다가도 어째 전화도 하지 않고 왔냐며 화들짝 일어나서는 주방에 들어가신다. 본인은 그렇게 최소한의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면 되였어도 자식에게는 다문 한가지라도 따뜻한 료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엄마 보고 싶다.”       엄마는 종종 한숨을 쉬면서 외할머니를 외우셨다. 나는 엄마 년세에도 엄마가 보고 싶구나 싶으며 그 한숨에서 묻어나오는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느낀다고 그걸 메워드리지는 못했다. 내 빡빡한 술 일정에다 이튿날 숙취해소 단계까지 겹쳐서 엄마와 따뜻한 대화도 별로 없었다.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을수록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몰려왔던 것 같다.        “언니 보고 싶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외할머니에서 당신의 언니에 대해 외우셨다. 엄마와의 정과 자매간의 정은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 생전일 때에도 엄마는 외할머니보다는 언니를 더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언니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도 옆에 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니, 우리는 언제 죽겠는지...”       “어우~무슨 죽겠소...”       자매간에 오고간 대화다. 이렇게 언니와 같이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오래 가야 되는데 언젠가는 우리도 저 세상 사람이 될 것이라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엄마의 말에 언니는 아주 초연하게 웃으며 저렇게 대답하셨다. 자매간에는 화투를 놀아도 누가 패를 나눠주냐는 문제에서 귀찮으니 서로 하라고 밀어내는 “애 같은” 행동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 의지하는 둘도 없는 친구 같은 자매였다. 어떤 감정은 아들도 딸도 남편도 대신하지 못하는 그런 특수 구역이 있다. 그래서 엄마와 언니는 형제자매중에서도 각별하게 친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후에 엄마에게는 어쩌면 언니가 엄마 같은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요즘 드라마에서 딸이 리혼을 숨겨온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순간에 쓰러지는 장면을 봤다. 아버지는 길 옆에 있는 동전 노래방 기계에서 마이크를 들고 고성방가하며 참았던 혹은 안해나 자식들 앞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속을 푸느라 애쓴다. 자식이 애물이다.        효도는 뒤북에서 항상 더 뉘우치고 반성하고 통탄한다. 아무 쓸데없는 후회를 하면서 가끔 뒤늦은 눈물도 흘리고 이렇게 뻔뻔하게 글에서도 들먹이면서 지난날을 돌아본다. 우리는 자기가 먹어가는 나이도 잘 실감하지 못하면서 부모님의 년로해가는 진척에는 더 무딘, 세월의 무정한 흐름에 대한 맹점을 안고 산다.        옆집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분이 사신다. 할아버지는 이 아빠트에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퇴직하신 뒤로 재직 때보다 몰라보게 년로해지셨다. 원래 할머니는 검을 어깨에 메고 운동도 다니시고 아주 활약하셨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밖에 잘 나오시지 않는다. 자식들은 다 분가해서 제 살기에 바쁘고 자기 애 키우기에도 정신이 없다.        “자식은 키워봤자 그냥 그런 거네”       엘리베이터에서 아들며느리를 바래고 들어오면서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다.  한때는 회사에서 중층간부로 한자리 하셨던 할아버지신데 이제 허리도 휘고 걸음걸이도 빠르지 못하신 걸 보면서 나의 불원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식에게 바라는 건 없지만 자식 또한 생각처럼 해드리지도 못하는 게 영원히 진행중인 기다란 방정식 풀이이다.        어머니의 날에 허구픈 웃음만 나온다. 울음도 자격증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오늘이다.       불효자는 웃는다. 중국조선어방송(계정)
81    좋은 때는 빨리 간다(궁금이) 댓글:  조회:1457  추천:0  2020-05-09
원래 사흘만 쉬던 5.1절을 무려 닷새나 쉬였는데도 지나오고 나니 금방이다. 정년 퇴직을 하지 않는 한 아무리 긴 휴일도 결국에는 출근으로 마무리된다. 하물며 두달씩 되는 학교 방학도 때가 되면 개학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술을 끊어본 사람은 술자리의 지루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별것 아닌 한마디에도 크게 웃고 떠들고 금방 했던 말을 또 반복하며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마신다. 그걸 맨정신으로 지켜보는 사람은 안 웃기더라도 적당하게 반응을 해야 되고 들었던 말도 꼬박꼬박 다시 들으면서 시계만 들여다 봐야 한다. 그러나 주인공들에게 있어서는 그게 술의 매력이고 어떤 원인으로 즐거웠던 기분이 좋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의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흐르고 그 자리에 끼인 비음주자는 일각이 삼추다.  가끔 사회생활에 지칠 때면 텀벙거리며 발걸음을 겨우 떼는 애들을 내려다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었던 저 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가 주는 대로 먹고입고 매일 할 일이란 마을의 애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뿐인데 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시골에서 자랄 때는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다. 만날 흙바닥에서 뛰여다니며 놀았으니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는 건 시간과 차수의 문제다. 그래서 항상 무릎에는 피딱지가 떨어질 새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는 또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빨리도 아물었다.  지금은 다 금지옥엽이라서 애가 어쩌다 한번 살짝 엎어져도 기겁을 하며 이러저리 살피느라 정신이 없지만 당시에는 애들은 워낙 그렇게 크는 거라고 여겨서 그냥 내버려뒀다. 오히려 피딱지가 거의 떨어질 무렵에 간질간질해 나면 그걸 살살 뜯어내는 것도 일종 재미였다. 그때는 그러고 자랐다.  그런데 이런 무념무상의 행복한 시간을 넉넉히 잡아 3살부터라고 쳐도 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고작 5년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 생각도 걱정도 없는 시기는 전반 인생에서 짧디짧은 5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소학교는 다른 마을에 있어서 걸어다니기에는 좀 멀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학교는 원래 그렇게 다니나 보다고 별 생각 없이 다녔다. 오히려 하교길은 마을의 애들이 같이 몰려다녀서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시골에서는 지금처럼 소학교 때부터 악기 공부를 시키거나 기타 학원에 다녀야하는 부담도 없고 숙제는 더 쉬웠다. 후에 도시 중학교에 가면서 친척 할아버지네 집에서 공부할 때 보니 그 집 손녀는 할머니의 감독하에 바이올린을 배우느라 눈물을 똑똑 떨구며 고생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도시에서 태여났더면 악기 하나 쯤은 익히고 자랐겠건만 지금 다시 돌아가서 선택하라면 그래도 시골 소학교생활이 좋았다. 그런데 이 시기도 5년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은 중학시절인데 이팔청춘이라고 무수한 작가들 손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어찌 보면 제일 방황하는 시기이고 많은 선택과 희생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공부에 시간을 희생해야 되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방황하고 선택해야 되는 시기다.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가장 걱정하고 골치거리라고 생각하는 사춘기도 바로 이 시기에 든다. 이성에 눈은 떴는데 마음대로는 되지 않고 여러 면으로 오는 많은 제약을 받으며 모순 속에서 아프게 성장한다. 거기에 정점을 찍는 대학입시는 1년이란 시간을 거쳐 피를 말린다. 한국에서는 군대를 다시 가라면 기겁을 하던데 나는 중학교 시절이 그에 못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제일 철두철미하게 정해진 시간표에 짜놓은 궤적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게 이 시기다. 텔레비죤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게임은 더 사치다. 야간자습은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야 하고 과외 수업은 선택이라 하지만 결국은 필수다. 부모님들의 립장에서는 애들이 불쌍하고 덜 고생시키고 싶지만 다른 집 애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내 아이만 풀어놓기도 쉽지 않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뭐라도 해야 시름이 놓이는 게 자식 둔 부모의 심정이다. 설령 그 결과가 아이의 미래와 상반되더라도 그 당시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미 다 지나온 중학교 생활이라고 함부로 얘기했는데 단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또 나름대로의 보람있고 풍부한 경력들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는 앞의 두 단계보다 1년이 더 많은 기껏 6년이다. 대학입시를 마치면 책을 태워버리는 학생에 원없이 게임방에만 묻혀 있는 학생, 저들끼리 려행을 떠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치렬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어딘가 허전함을 느끼는 학생들도 있다. 물론 생각대로 되는 게 공부밖에 없다는 희한한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학입시가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인 만큼 큰 압력을 이겨내야 하는 시련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에 비하면 대학은 그야말로 락원이다. 우선 련애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어려운 사춘기도 넘기고 교정에 널린 게 선남선녀다. 잘못 고백했다가 상대방에게 차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만 극복하면 무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기가 드디여 눈앞에 펼쳐진다. 저녁 자습도 가고 싶으면 가고 싫으면 안 가도 되고 도서관에는 다른 목적으로 가 앉아 있기도 한다. 뭐니뭐니해도 선생님의 이 한마디 말씀이 아주 사람을 편하게 해줬다. “지금 자네들의 시험이야 뭐 마지막 한달을 바싹 머리를 싸매고 하면 다 넘어가지.” 선생님들의 소중한 금과옥조가 많았음에도 저 한마디가 그렇게 사람을 시름 놓이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평소에도 너무 노는 같아서 공부를 좀 해야 되지 않나 걱정이 생겨날가 하면 선생님의 저 말씀을 떠올리며 어차피 놀 바엔 쓸데없는 걱정을 다 털어버리고 신나게 놀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여러가지 신나는 일들은 이미 전의 위챗에서 많이 우려먹어서 이 자리에서 누누히 반복하지 않고 아무튼 이렇게 신나는 시간도 기껏 4년이다.  이렇게 해서 20년이 흐른다. 80세까지 산다고 했을 때 4분의1은 유년시절과 학생시절이라는 두 단계로 훌쩍 지나가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이 두 단계를 고대로 거쳐야 하는 후대를 만들어야 하고 그 애가 20세가 되면 그때는 이미 인생의 반이 지나간다. 사람마다 좋은 때가 나름이겠지만 오직 나이상 좋은 때는 이렇게 어정쩡해서 지나간다. 물론 빨리 지난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지루하지 않았다는 얘기로도 된다.  5월도 벌써 두번째 불금이다. 아침에는 비까지 잔잔하게 내려 한결 청신한 하루였다. 가정의 달 또 하루의 아름다운 밤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80    비움의 행복(허연주) 댓글:  조회:1529  추천:0  2020-05-08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다. 넘쳐나는 물건 속에 허우적대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많은 공감을 느낀 책이였다. 언제부턴가 SNS에는 은근슬쩍 자신의 값비싼 소유물을 로출하면서 과포장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는 가치관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정반대로 버릴수록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저자 역시 미니멀리스트이다. 삶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두고 살아가는 삶을 일컬어 미니멀리즘(极简主义)이라고 한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만 놔두는 미니멀리즘이 인기이며, 생활 속에서 자본주의의 소유욕보다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미니멀리스트(极简主义者)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가구와 그릇, 의류 소지품 등 물질적인 소비를 줄이고 맛집 투어, 영화, 공연 등 ‘경험소비’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쓰기도 하며 불필요한 련락처나 인맥, 물건 등을 정리해서 ‘보다 소중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지향한다. 미니멀리즘을 접한 건 5년 전 회사법인장이 《소제력》이라는 책을 추천하면서였다. 불필요한 것을 줄여서 사용공간을 넓히고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기본으로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면 진정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내용이였다. 지난해, 나 역시 120평방메터의 아빠트에서 60평방메터 남짓한 작은 아빠트로 이사를 오면서 많은 물건들을 버려야만 했다. 큰것부터 버리기로 했다. 침대를 버리고 매트리스만 들고 왔다. 그러니 안방 천장 높이가 높아지면서 훨씬 큰 공간이 확보되였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들은 정리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고 필요한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물론 그 후로 더 이상 책을 사는 일도 없었다. 필요한 책은 대여해서 읽거나 전자책을 리용해 책들을 줄였다. 주방은 70% 이상을 비워냈지만 사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나머지 30% 되는 물건중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걸 보면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참 많다고 느껴진다. 늘 언젠가는 쓰겠지 하고 놓아두는 물건들은 버리고 보면 무난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옷장의 옷들도 절반 이상을 비워냈다. 돌이켜보니 충동구매가 많았던 리유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즉흥적으로 사들였거나, 고가 브랜드를 세일기간에 사들였거나, 년말파티를 위해서 장만한 드레스와 같은 각양각색의 옷들이 옷장을 꽉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옷에 대한 애착이나 소중한 느낌은 별로 없었다. 대신 정말로 자주 입는 제일 기본적인 옷들은 몇벌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달에 세번 이상 입지 않은 옷들은 과감히 버렸다. 그랬더니 몇벌 안되는 옷중에서 전에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조금 더 아끼거나 소중해지는 옷들이 생겼다. 이런 체험을 몸소 해보니 어떤 것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였다. 그 후로 물건을 구입할 때도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번 더 함으로써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좋은 습관도 생겨났다. 이런 미니멀리즘은 물건에 한해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음식과 인간관계로도 확장되여갔다. 한꺼번에 많은 량을 하여 음식쓰레기를 남기던 데로부터 마트에서 필요한 량만 구입하여 제때에 해먹을 수 있도록 노력함으로써 음식쓰레기를 줄였고, 휴대폰에 저장되여있던 1300개에 달하는 련락처들중 필요한 300명만 남기고 지워버렸다. 위챗에 있는 대화가 없는 분들과 모멘트 공유를 안하는 분들을 모멘트에 공지를 한 후 불필요한 인연들을 삭제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도 정리되였다.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면 여유가 생긴다. 이렇듯 미니멀라이프는 더 큰집, 더 많은 물건 등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향한 소유욕과 남과의 비교 속에 정해진 눈높이에 맞춘 기준을 좇던 삶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버릴수록 공간 뿐 아니라 마음까지 쾌적한 상태를 즐길 수 있었다. 대신 체험가치를 늘여갔다. 더 많은 시간을 독서로 채우고 맛집탐방이나 야구련습, 암벽타기 등으로 마음과 정신적 체험을 더해갔다. 인터넷쇼핑몰이 생겨난 후로 그 어떤 물건이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만큼 집에는 물건들이 넘쳐나고 있다. 부분적 지역에서는 아직도 ‘소유=행복’이라는 문화가 주류이지만 미니멀리즘을 체험한 주변인들로부터 비우는 행복의 소소한 기쁨들을 많이 듣고 있는 요즘, 허세와 소유욕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절제와 배우는 삶을 통해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연변일보  (저자는 자유기고가.)
79    양꼬치의 의문의 1승(궁금이) 댓글:  조회:1552  추천:0  2020-05-08
북경시가 4월 30일 0시부터 방역 등급을 1급에서 2급으로 낮추면서 5.1절련휴기간 인원 류동이 다소 회복세를 보였다.  5월 1일,  2일,  3일 쇼핑센터를 비롯한 실체상업을 대표로 하는 북경시 인원 류동 회복률은 각기 49%,  46%,  47.3%에 달했다.  한편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방역지침을 잘 지켜가고 있다. 방역의 일상화가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경각성을 계속 확보하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그런데 필요한 생산과 생활은 이어져야 되니 2급 방역에서도 1급처럼 과잉대응을 할 필요는 없다.  1급일 때에도 자동차 바퀴를 소독하는 등 과잉 소독은 필요없다고 루차 얘기해 왔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일상 환경에서도 일정 량의 세균은 존재하며 이런 세균은 사람의 면역력으로 통제가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세균을 다 죽여버리면 우리의 면역계통이 취약해지는 페단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야생에서 사는 새한테 먹이를 갖다주는 심성은 착하지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먹이로 하여 새의 먹이활동 능력에 영향줄 때는 오히려 역작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다.  지난 3개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이미 많이 자각적이 됐다. 북경시는 소식발표회에서도 발표인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고 대중교통, 공원이나 학교 등 규정된 장소 외의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그래도 아직 밖에 나가면 마스크를 하지 않은 사람이 극히 드물다. 좋은 현상이다. 아침에도 지하철역에서 나오면서 마스크를 벗었는데 마주오던 행인이 머리를 90도로 돌려서 피해간다. 고무적인 행동이다. 한국은 어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속 거리두기로 전환했다. 그러면서 제기된 게 밥상문화의 개변이였다. 쉽게 말하면 숟가락을 섞지 말고 반찬은 개인 접시에 담아 먹자는 취지다. 국이나 찌개가 많은 우리 음식의 특성상 냄비 하나에 숟가락 여러개가 들락날락하는 게 전에는 그렇게 기피 대상이 아니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겪고 나면서 식사습관이 많이 바뀌여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꼬치는 썩 이전부터 이 지침을 잘 지켜오는 모범이였다. 누구도 양꼬치 하나를 반만 훑어먹고 나머지 반은 옆사람한테 쥐여주며 먹으라는 일은 없다. 아무리 닭살 련인 사이라도 이런 일은 하지 않는다. 숟가락과 저가락도 굳이 써야 할 필요가 없는 게 또한 양꼬치이다. 물론 다양하게 시켜놓고 먹다보면 쓸 수도 있겠지만 양꼬치집에서 한정식을 차릴 일은 없다. 그 사이에 양꼬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미식가들을 배려해 포장은 물론 꼬치를 구울 수 있는 가마까지 가정집에 들어오는 사진들을 모멘트에서 심심찮게 봐왔다. 아직까지는 무난하게 밖에서 모여 회식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닌 만큼 꼬치 애호가들은 더욱이 그제날의 양맥을 그리워했다. 양맥은 치맥을 본받아 양꼬치+맥주 이렇게 해서 내가 만들어낸 말이다. 어학자분들께는 실례되는 일이지만 본 위챗에서만 류통하는 내부용어로 대외로는 무효함을 밝혀둔다.  양꼬치의 추억은 지난세기 8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간다. 다른 데서는 언제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살았던 곳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저맘 때였다. 가격도 싸고 고기도 큼직하게 꽂았고 가마도 지금처럼 연기가 밑으로 빠지는 그런 선진 설비가 아니였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에 와서 연기에 그을은 그 맛이 더 정통맛이였던 걸로 여겨진다. 심지어 지금은 숯불도 아니고 전기로 바뀌여서 자욱한 연기 속에서 먹었던 그 시절 그 맛이 더욱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북경에서 양꼬치는 처음에 주로 신강음식점에서 많이 만났다. 신강꼬치는 전의 고향의 후더운 인심 때보다도 비교가 되지 않게 컸다. 고기토막도 컸고 꼬챙이도 굵고 길었다. 물론 가격도 그에 비례한다. 고향에서 만든 양꼬치 홍보영상에 의하면 우리의 양꼬치도 신강양꼬치에서 계발을 받고 개발되였다고 한다. 청출어람 성어람이라더니 유래는 거기에서 했지만 훨씬 거족적으로 발전시켜 종류를 수십가지로 개발했고 맛도 다양하게 승격됐다.  북경에서 우리 민족이 경영하는 양꼬치집은 초기에는 다 작은 규모였다. 특히 여름에는 길거리에서 쪽걸상에 앉아 맥주를 병채로 들고 즐기는 로천양꼬치도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인들은 양고기를 저렇게도 해먹는다고 신기하게 생각했고 불결한 음식으로 여겨져 다가가기 주저했다. 그런데 한번두번 가더니 다음부터는 자기네가 먼저 가자고 손을 잡아끄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나중에는 한주에 한두번 정도 찾지 않으면 생각날 정도로 양꼬치를 선호했다. 지금은 서울에서도 조선족이 집거해있는 곳은 물론 국회의사당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자그마한 양꼬치집을 본 적이 있다. 간판도 중국어를 음역해서 달았다. 양꼬치의 생명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였다. 짠지 장사로부터 시작해 대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의 근면성과 생존력은 충분히 인정을 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방역 등급이 조절되면서 딱 한번 후배들하고 꼬치집을 찾았는데 너무 기대하다가 갑자기 만나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집에 박혀 있는데 습관되여 그런지 모르겠으나 기대치에 부응할만한 그런 맛과 효과가 나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더니 우리가 못 먹어본 건 아니지만 그동안 너무 오래동안 양꼬치와 헤여져 있었던 것 같다.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상의 간격도 불가피하다더니 이게 양꼬치와의 인연에서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광고혐의상 양꼬치집의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체인으로 된 이 음식점은 구조가 컨테이너를 개조한 형태로 되여 있어 사회적 거리든 생활속 거리든 자연적으로 두게 되여 있는 우점을 갖추고 있다. 옆 테이블과 금방 붙어앉은 것 같은데 유리로 격리되여 마스크보다도 더 확고한 안전장치로 된다. 그리고 웃부분은 또 틔여있어서 밀페된 공간도 아니다. 물론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렇게 설계한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상황에서는 아주 유리한 구조로 되여 양꼬치의 의문의 1승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전에 어른들은 숟가락으로 떠야 할 밥을 저가락으로 헤집으면 식사례절이 없다고 교육시켰다. 저가락에 문외한인 서양인들은 한때 포크에 초점을 두고 저들의 음식문화만 선진적인양 근거없이 떠들었던 적도 있다. 지금도 양복 웃주머니에 수건을 꽂고 잘 익지도 않은 고기를 칼로 썰어야만 신분 있는 식사로 각인시키는 드라마 장면을 볼 수 있다. 한편 양꼬치는 이런저런 화두에 오를 필요가 없이 저가락, 숟가락, 포크에서 자유로운 음식으로 되였고 생활속 방역에서도 상대방의 음식에 손이 갈 일이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연기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먹던 양꼬치한테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세상사는 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78    이쁘장한 녀승무원의 두 얼굴(궁금이) 댓글:  조회:1428  추천:0  2020-05-07
선배가 모멘트에 올린 글에서 이런 사연을 읽었다.        한국 모 항공사의 봉사가 친절하다기에 일부러 그 항공사를 선택해 미국행에 올랐다. 입국 심사에서 영어가 딸려서 도움을 받고저 주변을 살피는 중에 마침 그 항공사의 승무원을 만난다. 반가운 나머지 영어 소통이 잘 되지 않아 그런데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승무원이 려권을 들여다보더니 영어로 “중국인”이란 한마디만 해버리고 그냥 가버린다. 비행기 안에서 꿀이 떨어지던 그 상냥함은 온데간데 없고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도 없고 오직 비행기 안에서만 기계적으로 친절한 로봇이였다.        그냥 거절해도 모르겠는데 “중국인”이라고 뱉은데는 어디에서 오는 우월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자기는 한차원 우에 있는 국적의 사람이라는 오만함이 배여있다.         직장생활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부장이나 사장은 부하 직원이 보내온 문자나 특히 단체방의 메시지에 금방 답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무리 간단한 메시지더라도 잠깐 뜸을 들이고 회답하는 게 상사의 령도예술이라면 예술이다. 무게감과 권위감을 주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한편 내가 당신의 상사라는 인식을 각인시켜주려는 뜻도 없지 않다. 많이 포장을 했는데 본질은 하다못해 사소한 세부에서라도 부하와 구별되고 싶은 우월감이다.         또 이런 현상도 볼 수 있다. 저녁 식사약속이 되여 있는데 그 자리에 어떤 “고급 인물”들이 나오는지 반드시 확인하는 높은 분들이 있다. 쉽게 말하면 나와 대등하거나 나보다 높은 급별의 인물이 참석하냐를 확인해야 한다. 밥 한번 먹는데 초대를 해준 사람이 고맙고 중요하지 그것보다는 그 자리에 어떤 급별이 참가하냐를 따지는 것도 변상적인 자체 우월의식이다. 그게 친구들 사이 모임이라면 더 심각한 문제다. 대접은 해줘야 받는 거지 스스로 요구해서 받는 게 아니다. 그냥 옆구리를 찔러서 절을 받았다고 한들 그 절은 억지 성분이 다분해서 영양가가 별로 없다. 그냥 “그래 그렇게 간절하다면 내가 한번 대우해준다.”는 식으로밖에 다른 의미가 없다.         “나는 이쁘면 다 착한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문제연구소” 소장이 한 말이다. 별난 연구소가 다 있는데 아무튼 연구소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저 말의 의미를 잘 새겨보면 항간에서 흔히 말하는 얼굴값을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자기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특히 이쁜 녀성들은 스스로도 이쁘다는 걸 알고 산다. 스스로 안다는 건 어디에서든 무의식간에라도 티가 난다는 얘기다. 이걸 자신감으로 인정해 이쁘게 봐주는 게 정상이지만 동시에 이쁘면 다 용서가 되는 맹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제복 차림 승무원의 예쁜 얼굴에서 그런 차가운 기운이 흐를지를 누가 알았을가. 그런데 엄연하게 벌어진 일이라면 특정 장소에서 보여지는 얼굴과 그 사람의 내면 세계는 판이하게 다른 량면의 인격체라는 얘기다. 개인의 인격은 제쳐놓고라도 제복을 입었다는 건 그 회사의 이미지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건 리해가 어려운 일이다.        미국행에 나온 일이니 그 나라 얘기를 잠깐 하면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 나라의 인권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로 2위 가라면 굉장히 섭섭한 나라다. 특히 인종차별시 문제에서는 그렇게 떳떳하고 자유로운 립장이 아님에도 말이다. 이번 신종코로나바이러스시기를 경유하면서 그 마음속 깊은 곳에 배인 차별시 의식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아시아계 사람을 만나면 무분별하게 차별시하는 현상을 다룬 뉴스를 여럿 봤다. 그 사람이 미국 국적이여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러면 또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뉴스를 우리나라 매체에서 본 게 아니고 미국의 우방국 매체에서 접했음을 혹시나 하는 로파심에 밝혀둔다.         인권, 자유, 평등을 입에 달고 사는 나라 국민의 취약한 인성은 선배의 산책길에서도 보여졌다. 더 한심한 건 자신도 아시아계 사람이면서도 선배를 차별시 대우를 했다는 대목이 코미디다. 아시아계 할머니가 10메터 밖에서부터 선배를 보고 멀찌감치 떨어지라고 손사래를 쳤단다. 그 순간에는 자신의 정체를 잠깐 망각하고 사는 걸가. 아니면 나는 피부만 황색인종이지 따지고 보면 나도 아메리칸이란 우월감일가. 진짜 어이가 없다.         요즘은 한국문화사 책을 읽는다. 일찍 640년에 신라에서 시작돼서 703년에 견당 류학생이라고 해서 당나라에 류학을 오는 사람이 늘었다.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불만 귀족층이나 몰락 귀족층 또는 6두품이 활로를 모색하려고 적극적으로 당나라에 류학을 왔다고 나와 있다. 신라 하대에 와서 837년에는 당나라 국학에서 류학중인 학생수가 2백명이 넘었는데 이들은 당나라에서 공부가 끝났는데도 돌아가려 하지 않아 나중에는 외교문제로 제기됐다. 그래서 공부 년한이 10년이 찬 백여명을 집단 귀국시키는 조치가 내려질 정도에까지 이른다.        이 례를 드는 목적은 과거든 현실이든 어디에 가서 어떻게 도금을 했든 뿌리를 잊으면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취지다. 어느 시기든 선진국이 있고 잠시 발전이 늦은 나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도는 거다. 어느 나라 어떤 곳에 살든 다 평등한 지구촌의 일원이지 누구는 달나라나 별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 우월감은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거지 스스로 매기는 점수가 아니다.        호박에 애써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        우선 바탕이 돼야 한다.   중국조선어방송넷 
미국에서는 1월 20일에 처음 확진자가 나온 이후 현재까지 약 100일간 확진자가 100만 명을 초과하고, 사망자도 6만 명이 넘었다. 확진자 수가 전 세계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감염 사태 이후로 미국 당국은 방역에 무능할 뿐 아니라 걸핏하면 ‘책임 전가’에 심지어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여러 의혹 앞에 미국 정치인들은 국제사회의 우려에 답하고 더욱이 자국민들에게는 성심껏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질문1: 감염 사태 당시 의료진들을 왜 보호하지 않고 실정을 호소하면 오히려 해고했는가? 미국 병원의 경우 의료진들에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도록 한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표준에 의거해 간호사들이 분무 치료, 호흡기 및 관도 삽입 시에만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했다. 미국의 수 백 명에 달하는 의사와 간호사 및 관련 종사자들은 방호 장비가 잘 갖쳐지지 않는 상황에서 일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부 간호사들은 마스크를 자가 구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오히려 거절 당해 스스로 일을 그만 두던지 아니면 해고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코로나19가 급증하기 시작한 첫 달에 미국 전역의 약 4만 3000명 의료진들이 해고를 당했고 시간이 지날 수록 해고당한 의료진이 오히려 늘어났다. 의료진들은 긴 시간 바이러스에 완전히 노출되는 상황에서 방호 조치도 허술한데 어떻게 이들이 방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겠는가? 질문2: 2019년 9월부터 시작된 미국 내 독감 유행으로 사망자가 2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 코로나19 환자는 도대체 몇 명인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의 최신 추산에 따르면 2019년 9월부터 유행한 독감으로 3000여 만 명이 감염되고 사망자 수가 2만 명을 넘었다. 로버트 레드필드 CDC 센터장은 최근 일부 독감 사망자 중에는 코로나19 환자도 있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2만 명 이상의 독감 사망자 중에 도대체 몇 명이 코로나19 환자인가? 미국은 독감을 핑계로 코로나19 상황을 덮은 것은 아닌지? 질문3: 2019년 7월 메릴랜드 주에 위치한 미군 최대 생물학무기 기지 포트 데트릭을 왜 갑작스레 폐쇄한 것인가? 포트 데트릭은 미국 최대 생물학무기 연구센터다. 폐쇄 직후 폐렴 혹은 유사한 폐렴 확자들이 나타났다. 거의 같은 시간 미국 독감이 대유행에 들어갔고, 2019년 10월 미국 다수 기관에서 코드명 ‘Event201’이란 글로벌 전염병 훈련을 조직했다. 12월에 우한에 처음 코로나19 확진자가 나타났고 2020년 2월에 코로나19가 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이러한 사건들이 연관성을 갖는 것은 아닌지? 질문4: 감염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거액의 주식을 매각한 의원들은 왜 문책 당하지 않는지? 미국 하원 정보위원장이자 공화당원인 리처드는 정기적으로 코로나19와 관련한 하원 측 보고를 들었다. 2월 상중순경 미국 감염 폭발과 주식시장 붕괴 전 대중들에게는 코로나19 사태를 미국이 막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대량의 주식을 매각했다. 다수 미국 하원의원들이 미국 언론을 통해 주식을 매각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중 케리 하원의원은 트럼프 정부 특별 경제 태스크포스팀원이다. 이들 의원들은 내부 거래로 주식을 매각하고 대중에게는 감염 현황을 감춘 것은 아닌지? 만약 내부 거래가 사실이라면 왜 문책 당하지 않는 것인지? 질문5: 감염 사태가 전 세계로 퍼진다는 것을 조기에 알았는데도 왜 방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가? 3월 17일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로 감염이 확산되기 전에 이미 코로나19가 대규모 전염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감염 사태 후 그는 “말라리아 약이 코로나19 치료에 사용될 수 있다”, “소독제 주입으로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바이러스는 독감과 같이 기적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등의 기가 찬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백 만 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도 6만 명이 넘으며 수 천 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미국 언론 보도를 보면, 백악관 관리들이 매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를 한 후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파장 가능성을 제시한다. 감염 사태의 심각성을 예측했다면 왜 조기 방역에 나서 지금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질문6: 감염 사태는 도대체 언제 처음 미국에서 발생했는지? 왜 전문가들에게 조사를 의뢰하지 않는지? 미국 감염 사태 초기에 있었던 의혹이 점점 늘어간다. 최근 확인된 미국의 첫 코로나19 사망자는 2월 6일로 3주나 앞당겨졌다. 이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의 여성 사망자는 여행 경력이 전혀 없어 본국에서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이상한 점은 시체 부검을 다음 날 했는데 CDC 측은 2개월이 넘게 지난 후에야 발표해 사실 누락 혹은 은닉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또 미국 대규모 감염이 그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닌지? 심지어 앞서 이미 감염 상황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왜 WHO 전문가들에게 바이러스가 미국에서 언제 처음 발생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지 않는지?도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질문7: 미국은 구소련 국가에 세운 여러 생물실험실에서 도대체 어떤 비밀 연구를 진행하는지? 미국은 구소련 국가에 여러 생물실험실을 세웠는데 그 기능, 용도, 안전 면에서 현지 주민과 주변 국가의 우려를 사고 있다. 감염 사태에서 미국은 국제사회의 우려와 현지인들의 생명, 건강, 안전에 책임감을 가지고 직시해야 한다. 미국의 해외 생물실험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질문8: 몇 천 명의 항공모함 승조원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 함장 브렛 크로지어 함장을 왜 해임했는가? 미군 ‘루스벨트호’ 항공모함 브렛 코로지어 함장의 구조 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모함 내 감염증의 급속한 확산과 해군 고위층의 안일한 반응이 폭로되면서 마침내 승조원 2700명이 하선 격리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코로지어 함장은 감염증에 대한 대처가 전문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 당했다. 몇 천 명의 승조원 목숨을 자기 직업을 걸고 지킨 영웅 함장은 왜 언론 폭로로만 위기에 대응할 수 있었을까? 질문9: 미국은 자국 방역 타임맵을 공개할 수 있는지? 감염 사태 후 미국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고, 책임을 중국에 전가하는가 하면 WHO를 위협해 자국 방역의 무능력을 덮으려고만 했다. 한국은 미국과 같은 날 첫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했지만 이후 양국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다. 연일, 의학 학술지 랜싯의 리차드 편집장 등 보건 문제 전문가들은 감염 변화 타임랩을 상세하게 정리했고 미국이 WHO에서 감염 사태 정보를 제일 처음 들었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자국 방역 타임맵을 공개해 미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지? 질문10: 미국은 약 2개월간 중국 관광 금지 외에 어떤 효과적인 방역 조치를 취했는가? 미국 언론은 일찍이 1월 하순에 미국 국가안전위원회에서 백악관에 보고서를 제출해 코로나19의 미국 내 전파 위험성을 경고하고 재택근무, 시카고 등 크고 작은 도시 봉쇄를 권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백악관 측은 3월 13일에야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 백악관 측은 감염 사태에 대한 공개토론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했고, 2월 하순 미국 질병통제 전문가들에 대한 금지령까지 내렸으며, 모든 공개 발언은 반드시 펜스 부총리실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미국 언론은 “1월 31일부터 3월 13일까지 백악관 측이 중국 여행 금지령 발표 외에 어떤 효과적인 조치를 취했는가?”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번역: 조미경) 인민망(人民網)
76    개나리 사진이 없었던 봄(궁금이) 댓글:  조회:1138  추천:0  2020-04-30
벌써 4월도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다. 북경의 오늘 최고 기온은 32도 주말은 33도로 일기예보에 나와 있다. 우리는 이렇게 어정쩡해서 봄을 보내고 바야흐로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고온에 약하다고 해서 여름이 많이 기다려졌지만 그래도 이대로 흘러가버리는 봄은 허무하기도 하다. 올해 봄은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속에서 특수한 계절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해마다 초봄이면 아침 산책길에 개나리가 언제 꽃을 피우나 유심히 살폈다. 어떤 해에는 성급한 개나리가 겨울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버젓이 피여 있는 걸 보면서 꽃의 세계에서도 성격이 무섭게 급한 이들이 있구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첫송이 개나리꽃을 찍기 시작해서 노랗게 무성할 때까지 찍고 또 찍었던 개나리를 올해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멘트에 올리는 사진에서조차도 보기 드물게 이 봄은 지나갔다.  지난 주말에는 식물원에 다녀왔다. 해마다 봄이면 이 곳에서는 튤립의 잔치가 열린다. 갈 때마다 장관이고 볼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대면적에서 갖가지 색상으로 교차시켜 설계해놓은 원예사들의 지극정성을 우리는 눈으로 호강하고 사진으로 기록만 하면 된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몰리면 안되니까 사진도 여유를 가지고 각도를 찾아가면서 찍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 약 5분의 1일 꽃들은 이미 진 상태여서 거의 막차를 타고 꽃구경을 했다. 하지만 미적인 감수는 충분히 만끽하고 온 가는 봄의 주말이였다. 어느 계절에도 마찬가지지만 여러 할머니들이 기다란 렌즈가 달린 사진기를 들고 작업하는 장면이 참 보기 좋다. 휴대전화의 카메라가 아무리 진화해도 예술의 의미나 성격에서는 전문 사진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옆에서 보기에도 휴대전화로 찍으면 왠지 성의가 덜해 보이고 묵직한 사진기로 렌즈를 돌려가면서 찍어야 뭔가 작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은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이건 마치 글씨체가 예술이면 펜으로 써도 충분히 미가 살아나지만 그래도 붓으로 완성한 서예작품보다는 어딘가 무게감이 결여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봄은 좋아”란 제목으로 꽃 위주의 사진 작품을 모멘트에 련재하는 선배가 계신다. 워낙 촬영에 조예가 깊은 선배지만 올해 봄은 더욱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누구나 다 만날 수 있는 꽃이지만 벌과 꽃의 만남은 한결 생기와 숨결을 부여해주고  담벼락우에 핀 꽃을 포착하는 관찰력은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은 생활에 대한 열애와 미에 대한 추구와 식을줄 모르는 열정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한다. 손가락으로 누르고 카메라가 찍지만 결국엔 마음의 창-눈의 발견이다. 어쩌면 꽃과 자연은 우리 옆의 커다란 빈자리를 애써 메워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모멘트에 시를 올리는 친구가 있다. 늦은 저녁에 귀가하다 만나는 가로등도 다시 쳐다보고 창가에 소박하게 핀 꽃에서도 애수를 느끼고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에서도 누군가를 떠올리는 애절함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잘 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질 거면 왜 피였냐는 꽃에 대한 감정 기탁은 그 시를 쓴 사람만이 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가끔식 만나는 친구일 뿐이다. 어떤 자리는 누구도 대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에 담은 애환은 그냥 시에서 마무리하고 간혹 전화 한통 받아도 항상 밝은 목소리인 친구가 있어서 좋다. “김현철 이 분은 오빠가 일년 쓴 글을 하루에 기가 막히게 종합했네. 두 사람 배합이 잘 되오.” 그제 위챗 “봄에 만난 가을”을 보고 사촌동생이 보내온 문자다.  “다 쉽지 않다”는 내가 썼지만 김현철님의 글을 보면서 어떤 내용은 내가 그렇게 썼던가 싶게 되새겨보게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더니 이리저리 널어놓은 위챗을 김현철님이 이렇게 잘 모아서 분석해놓으니 내가 좀 쑥스러울 정도로 원작보다 해몽이 더 좋다. 나는 전에 나온 두 책도 한장도 펼쳐보지 않았다. 내가 쓴 위챗이지만  스스로 다시 읽는다는 게 손이 오그라들 것 같아서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샅샅이 읽고 분석했다니 고맙기만 할 따름이다.     “내 하루도 수필이 될까요?” 동창이 김현철님의 글을 모멘트에 돌리면서 남긴 글이다. 뻔한 얘기지만 누구의 인생도 유일하다. 유일하다 함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기 때문이고 그 구별이 글로 옮겨지면 그게 곧 수필이다. 다만 우리는 매일 수필을 만들어가지만 그걸 기록하여 발표하지 않을 뿐이다. 혹자는 일상생활의 이야기들은 무게가 없어서 문학성이 결여된다고 하지만 문학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감하는 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책 소개글을 많은 사람들이 돌려주는 걸 보면서 다른 분들의 글도 내가 그렇게 해드렸었던지 돌아보게 된다. 전에는 댓글마다 일일이 답복을 드리다가 나중에는 소위 바쁘다는 핑게로 일절 답글을 못했는데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모든 댓글을 반드시 확인은 한다. 그리고 댓글에 따라 위챗의 소재와 방향도 찾고 더욱이는 거기에서 힘을 많이 얻는다.  개나리는 놓쳤지만 이 봄에 많은 분들의 따뜻한 모멘트가 있어서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왔다. 사실 “생활이 없는 글은 없다”로 한단계 마무리할가 생각도 했었지만 이 글에 달린 댓글은 물론 김현철님이 또 저렇게 써주셨는데 자취를 감추기도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도 작사가들의 지혜를 빌려서 조금 쉽게 하루를 넘기고 이제 5.1절련휴 환충기도 있으니 이틀만 더 견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오늘의 위챗을 완성한다. 래년의 개나리는 분명 더 아름다울 것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75    울고 넘는 박달재(궁금이) 댓글:  조회:543  추천:0  2020-04-29
난 작사가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부럽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는 불후의 명곡들은 곡도 곡이겠지만 더욱이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 가치가 더 빛난다. 한때 후배들을 따라가겠다고 한국 아이돌의 이름도 외우고 심지어 그룹의 성원이 몇명인지도 애써 기억하며 발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최고봉일 때였으니 한때 파릇했던 그들도 이제 다 30을 넘겼다.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연예인의 생명인 피부도 나이가 들면서 옛날 같지 않고 격한 댄스도 이제 소화하기 버거워지는 안타까운 나이가 온다.       아무리 시대를 따라가려 해도 노래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전에 부르던 노래만 계속 부르고 새노래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걸 어느 시점에 깨닫게 되였다. 노래는 우리 웃세대들의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움”  “칠갑산”에 이어 우리 금방 아래 세대의 “바꿔”  “반”  “머니”까지는 그런대로 아래우로 련결이 되는데 그 뒤로는 노래를 하는지 글을 읽는지 알길이 없는 힙합에 이르기까지 아예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포기 단계에 이른다.        전에 라지오를 들으며 노래가사를 받아적어서 배우던 때가 원시사회 같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노래하며 살면은 젊어진다오” 이런 노래를 수없이 불렀던 세대들도 이제 노래 가사가 무색하게 중후한 나이로 자리잡았다.  “살구나무”  “달 마중 님 마중”과 같은 노래를 열창하던 청춘도 이제 자식이 당년의 나이가 된 세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명곡 자체는 늙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불리워도 세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야말로 불후의 명곡이다. 어떤 감정은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주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가요무대로 널리 알려진 김동건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노래는 사랑 이별 눈물이 없으면 가사가 완성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래 가사만 봤을 때 작사가들은 사랑에서 고수들이다.  “그 겨울의 찻집”이란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     아 ~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생화도 아니고 다 말라버린 꽃, 그것마저 꽂혀있는 게 아니고 대충 걸려 있는 창가에 앉아서 커피나 맥주도 아닌 외로움을 마시는 그림은 울적함의 극치다. 그러니 허구픈 웃음만 나오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이게 다 “내 사랑 그대” 때문이다.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적어도 창가에 앉아 있는 주인공으로서는 실련이든 숨겨진 감정이든 일방적인 사랑이든 상대방에 대한 정이나 미련이 아직 남아 있을 때의 눈물이다. 어찌됐든 일말의 희망이나 정이라도 붙어 있는 애절한 사랑의 여운을 추억으로라도 되새길 수 있다는데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감정이다.        그런데 “배반의 계절”이라는 노래 가사는 아주 실망적인 비련의 운명을 담았다.       〖그 어느날 우연히 널 보았어 내 친구집 앞에 서 있는 널     너 나한테 했던 말 또 하겠지 영원히 너만을 사랑한다고     저 하늘에 너를 기도해 다시는 사랑할 수 없기를〗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기의 친구를 선택했을 때 전 남친도 증오스럽지만 친구로부터 몰려오는 배신감 또한 황당하고 슬프고 억울하다. 결과적으로 헤여졌다는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리별의 리유에 따라 상처가 다르다. 배반의 리유가 하필이면 내 친한 친구였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것도 모르고 그 사이 함께 어울려 놀러도 다니고 했을 건데 기가 막힌다. 그리고 그 사이 나한테 했던 온갖 사랑의 서약을 친구한테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흐른다. 오죽했으면 다시는 사랑할 수 없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까지 할 심정일가.       이렇게 배반한 련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며 복수의 서슬 푸른 칼을 품고 있는가 하면 스스로 고배를 마시며 이미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는 아쉬움이 가득찬  사랑도 있다. 리별이후로 항상 자신이 남친한테 빚지고 사는 것 같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했더면 이별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에 묻혀서 헤여나오지 못한다. “빚”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다들 그랬어 사랑은 사랑으로만 잊혀지고     녀자에겐 지금의 사랑만이 첫사랑인 거라고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하난데 아직 가슴에 남았는데     또 다른 인연이 올수록 네가 더 보고 싶어〗       한 사람을 잊는데는 또 다른 사랑이 최고의 약이라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리별후에도 장시간 깊게 남은 미련이다. 오죽하면 다른 인연이 왔는데도 갈수록 원래 사랑이 더 보고 싶을가. 이 상황에서 “녀자에게는 지금의 사랑만이 첫사랑”이라고 염장을 지르는 근거없는 론리까지 펼친다. 그러니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만 가슴에 남은 녀자에게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녀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그냥 속담으로만 받아들였다가는 어마어마한 고배를 마시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는 수도 있다. “용서 못해”라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 하니     모든 걸 주는데 왜 날 울리니     나에게 상처 준 만큼 다 돌려줄거야     악한 여자라고 하지마 용서 못해〗       죽고 못살겠다고 할 때가 있었으니 오로지 그 말만 믿고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을 했건만 돌아온 건 실망과 슬픔뿐이다. 그래서 더도덜도 말고 그 사이에 내가 받은 상처 만큼 다 돌려줄테니 악하다고 원망하지 말라는 깊은 한이 여실히 담긴 불타는 복수심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서로가 좋은데 여직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그린 노래도 있으니 “잊지 말아요”란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 쥐고 그댈 보내주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언젠가는 돌아와줘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여진다는 말 같지 않은 론리도 있다.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분명 사정이 있는 감정도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말아야 하고 눈물을 삼키며 보내줘야만 하는 사랑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한때 사무치게 사랑했던 사람이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라도 돌아와달라는 애절한 바람이다.       이쯤 되면 꿈보다 해몽이 많이 길었는데 앳된 련인들의 사랑을 그린 노래를 하나만 더 례를 들면 “잔소리”라는 노래는 쥐면 부서지고 놓으면 날아갈 것 같은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 없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시름이 놓이지 않고 열에서 스물까지 다 관여하고 싶고 스물에서 서른까지 다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지나친 사랑의 표현이다. 이름하여 잔소리라고 한다. 밤에 늦게 다니지 마라, 술자리에서 남자들을 조심해라,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상대방 이성이 착각할 행동을 하지 마라...       련인사이에서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과잉 보호를 하고 관여가 간섭으로 바뀌면서 다툼이라는 게 생긴다. 물론 칼로 물베기로 끝나면 좋겠지만 원래 “너무”라는 단어에는 부정이 맞물려서 따라오는 결론은 과유불급이다.        노래 가사에는 심오한 도리가 많이 담겨졌고 이런저런 배울 점도 많다. 노래 방에서 별 생각없이 부른 노래에서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워낙 사랑 리별 눈물이 도배를 한 게 노래 가사인지라.        노래하며 살면은 젊어진다오. (중국조선어방송넷)
74    이러한 ‘바이러스’ 유포죄는 벗기 힘들다 댓글:  조회:1456  추천:0  2020-04-28
[인민넷 사설] 현재 미국 코로나19 확산세가 맹렬한 가운데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연일 치솟아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를 걱정한다. 코로나19 사태가 미국에서 가장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생명을 앗아가는 대참사극이 벌어지는 이때,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또한 가장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사방에 동일하게 흉악한 ‘정치적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편견과 오만적인 선동으로 거짓과 트러블을 만들어 인류의 코로나19 공동 대응력을 흐뜨리고 전 세계를 대항과 충동 국면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그는 인류가 코로나19라는 공동의 적을 당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국제기구와 의학 전문가들의 과학적 논거는 무시한 채 계속해서 중국을 모욕하며 공격한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중국이 제때 감염 현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비방했는데, 중국이 “모든 샘플을 없애버렸다”는 망언에 ‘배상’ 청구를 선동해 ‘단체사기’를 꾀하는가 하면, 세계보건기구(WHO)가 중국의 감염 사태 ‘허위정보’를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또 한 언론 사설에서는 미국 정보기관을 책임졌던 국무장관이 미국 국무원을 ‘중앙정보국화’하고 있다며, 냉전 사고로 경거망동하게 도발과 대항을 일삼고, 미국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과 국민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사방에서 트러블을 만든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실은 망각한 채 끊임없는 중국 먹칠하기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책임을 떠넘기고 죄까지 남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사방에 ‘정치 바이러스’를 퍼뜨리며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것을 미국 언론조차 보고 있지 않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책임감을 가진 지도자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 폼페이오 장관은 그의 ‘애정 사업’만 쫓으며, 감염 사태 발발의 책임을 베이징으로 돌리기 위해 열심이다.” 또 “폼페이오 장관이 감염 사태에서 보여준 모습은 역대 최악의 국무장관으로 만들었다”고 꼬집었다. 폼페이오 장관의 중국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은 사실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갑작스런 코로나19 감염 사태에 중국은 즉각 WHO측에 상황을 보고했고 또 즉각 세계 각국과 코로나19 유전자 정보를 공유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와 더불어 방역 협력을 펼친 것은 확실한 사실이자 모든 이가 목격했다고 국제사회도 말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는 시종일관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우선적 위치에 두고 전국민의 평등한 생명권, 건강권 등의 기본 인권을 충분히 보장하며 지원과 치료에 집중함으로 모든 코로나19 환자들이 무료 검사와 치료를 받도록 최선을 다했다.힘겨운 노력으로 중국은 2개월 만에 방역에서 중요한 단계적 성과를 거두며 14억 중국인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이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전심을 다해 인민 봉사에 나섰기 때문이고 아울러 정부는 중국 인민의 신뢰를 받았다. 인류가 직면한 갑작스런 감염 사태에서 누가 가장 먼저 주의를 주었는가? 누가 생명구출을 가장 우선에 두어 모든 희생을 감수했는가? 누가 가장 철저한 방역 및 전국적 동원령을 내렸는가? 누가 과학연구 결과를 공개하고 투명한 정보로 국제사회와 공유했는가? 누가 취약한 방역 국가와 지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국제적 의무를 다했는가? 이들 모두가 틀림없는 사실이며 누구도 이를 없애거나 바꿀 수 없다. 인류 공공의 적인 코로나19에 대한 공동 대응이 가장 시급한 때,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감염 사태를 빌어 트러블을 만들어 중국을 적수로 하는 같은 편을 만들어 황당한 ‘정치 바이러스’를 퍼뜨려 국제사회의 방역 협력을 깨뜨리고 있다. 이러한 가치의 전도와 논리의 붕괴는 잘못과 계략을 감춘 채 설명할 수밖에 없다. 감염 사태 극복은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규칙을 무시하고 시비를 흐리며 국제협력을 깨뜨리는 것은 미국 학자의 말처럼 ‘바이러스 공범자’로 불려야 한다. 방역은 부적절하고 감출 수록 더욱 드러난다. 눈앞의 병은 고치지 않으면 더욱 심해진다. 폼페이오 장관 무리들은 계속된 반(反)중 감정의 발언을 멈추고 때와 맞지 않는 냉전적 사고는 버리며, 인민 평등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존중하고 보장할 뿐 아니라 사실을 직시한 채 입을 다물고 공론에 귀 기울여야 한다. 바이러스는 인종과 국경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각국이 함께할 때 반드시 이번 글로벌 방역전을 승리할 수 있고. 이는 시급한 당면 과제이자 유일한 선택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거짓과 트러블로 바이러스가 소멸되지 않고 먹칠하는 공격이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을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중국과 함께 마주해 양국 정상 간 중요한 공감대를 이행하고, 협력으로 방해를 제거해 전 인류의 생명안전을 지키기 위한 책임을 다하며, 중·미 관계가 올바른 궤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것이 양국 국민의 근본 이익에 부합할 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바라는 기대라는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번역: 인민망 조미경) 원문 출처: (2020년 4월 27일 03면)
73    고대 역병과 인간 윤리(전월매) 댓글:  조회:1473  추천:0  2020-04-23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전염병에 주목되어있는 요즈음이다. 그렇다면 중국고대에는 전염병에 대해 어떻게 기재되어 있을까? 고대에는 전염병을 역병(疫病), 온역(瘟疫)이라 했다. '역'은 '돌림병'이라는 의미이고 '온'은 체온이 올라가서 열이 난다는 뜻이다. 역병은 일찍이 중국 고대 사료인 나 등에 '사계절에 발생하고 백성이 시달리는 질병'으로, 에도 '모두에게 전염되고 증상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질병'으로, 청나라 에는 '의로운 병(义病)'으로 기재되어 있다. 역병은 빈부격차,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고 증상이 같다는 것이다. 역병은 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저승사자였고 심지어 한 국가를 망하게 하는 원흉이었다. 중국의 경우, 유행성 감기, 기침, 폐렴, 결핵, 말라리아(疟疾,학질), 페스트(鼠疫), 장티푸스(傷寒), 콜레라(霍乱), 천연두(天花, 홍역), 나병(麻风病,문둥병) 등의 전염병은 시대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했다. 한나라시기에는 페스트가, 남북조시기에는 천연두가, 당나라시기에는 말라리아와 나병이, 명나라시기에는 페스트가, 청나라시기에는 페스트와 콜레라가 유행했다. 삼국시기 위나라 문학가이자 조조의 넷째 아들인 조식은 에서 "건안 22년, 역병이 돌았는데 집집마다 죽는 이가 생기는 아픔을 겪고 방마다 애통의 흐느낌이 울렸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혹은 멸족하여 사망하였다."고 참상을 적고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시기에는 지지리도 추운 겨울에 발생한 페스트가 전국에 퍼져 백성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외부로는 반란군의 침입을 받아 더 회생할 여력이 없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고 기재되어 있다. 고대는 과학지식과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전염원을 귀신의 농간으로 여겼다. 중국에서 의원은 춘추전국시기이후부터 있었다 하지만 많은 백성들은 신에게 제를 지내며 치료하려 하였다. 남북조시기에 천연두가 창궐하여 집집마다 "두신상(痘神像)"을 만들어 제를 지내 빌었는데 그 두신상 얼굴은 곰보자국이었다. 고전소설 에도 왕희봉의 딸 대저가 홍역을 치르게 되면서 왕희봉이 두창여신을 모셔다가 치성을 올리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고대인들은 역병이 인간의 윤리와 관련이 있다고 인식하였다. 개개인의 도덕수양이 부족하면 질병이 몸을 덮칠 수 있고 그것은 자식에게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자라면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고 걸리더라도 자신의 도덕수양에 의하여 치료가 되고 완쾌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수양은 질병의 치유에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지괴소설 에는 서진(西晉)시기 한 동자가 말라리아에 걸린 부친의 약을 구하고자 바깥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품격이 고매한 군자가 어찌 그런 역병에 걸리느냐?"라고 비아냥거렸다는 대목이 있다. 지괴소설 에는 국주씨에게 태어날 때부터 말 못하는 질병을 가진 아들 셋이 있는데 그는 이것이 자신이 유년시절에 저지른 살생 행위에 대한 징벌과 경계라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진심으로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뉘우치면 아이들의 병이 나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고대인들의 인식 속에는 도덕윤리가 지상의 것이었고 그에 따른 인과보응의 사상이 뿌리내려 있었다. 이는 통치계급의 이데올로기, 통치수단, 고대인들의 무지 등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인성교육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자신의 인격 수양을 쌓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아에 대한 성찰과 반성,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베풀 줄 알았다. 신라시기, 한국의 주술적 성격을 띤 향가 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처용이 자신의 아내 미모를 흠모하여 사람의 형상을 꾸며 밤에 몰래 들어와 동침하는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을 다툼이나 싸움이 아닌 노래로서 감화시켜 물리친 것, 역신이 물러간 것은 처용의 군자 품격과 인간의 행위를 초월하는 도덕윤리 행위에 감화해서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전염병에 대한 선진적이고 독창적인 인식들을 볼 수 있었다. 조식은 에서 사람들은 "역병이 귀신이 농간하여 벌인 일이라 여기는데"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밝히면서 귀신과 미신을 반대하고 있다. 명나라 말기, 의술가인 오우가(吳又可)는 에서 "역병이라는 것은 바람, 추위, 열, 습도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 사이의 어떤 기운, 공기에 의해 전염된다", "한약이 온역 치료에 유효하다"는 당시로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역병의 참상을 목격하고 선인들의 논저를 기초로 역병에 관해 치밀하고 깊이 있는 관찰과 논증을 거쳐 중국에서 역병 전문 저서 을 저술하였다. 중국영화 (2013)에는 망해가는 명말(明末) 숭정황제 집권시기, 전쟁과 온역으로 인한 백성과 병사들의 참상과 떠돌이 의사인 오우가가 그 참상을 목격하고 역병을 연구하고 퇴치하기 위한 격리, 한약 복용 등의 실천 과정이 리얼하게 재현되어 있다. 에도 보면 왕희봉은 딸의 홍역 치료를 위해 두창여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외에도 남편인 가련을 다른 별채인 서재에 보내 격리시키고 의원을 청해 한약을 짓고 복용을 시킨다. 환자는 점차 부스럼이 떨어지고 고비를 넘겨 병이 나아 완쾌한다. 반면 아버지인 가련은 서재에서 격리하는 동안 취사원 마누라와 바람이 나있었다. 관례적인 고대인의 인식으로 볼 때 딸이 홍역을 치르는 기간 재계를 해야 할 부친이 그러지 아니하고 죄를 짓고 있으니 그 죄가 딸의 죽음으로 묘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격리와 한약의 치료 등의 과학적 의료 기술의 힘을 제시하는 데 여기에서 대가인 조설근의 질병에 대한 선진적인 인식을 볼 수 있다. 역병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한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생활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에게 제일로 여겨지는 인간의 윤리도덕과 끊임없는 인격 수양 쌓기는 모든 것이 물질과 이익이 우선시되는 우리 현대인들이 되찾아야 할 부분이 아닌지 심사숙고하게 한다. 2020.3. 7 전월매 약력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  現천진사범대 한국어학과 부교수  동북아신문 편집/기자  재한동포문인협회 해외이사. 출처/동북아신문
72    생명 존중, 데이터 수정의 근본 논리 댓글:  조회:1704  추천:0  2020-04-20
[인민망평론] 우한시 코로나19 방역 지휘부는 17일 를 발표하고, 4월 16일 24시까지 확진자 수가 325명, 사망자 수가 1290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왜 수정 후 데이터와 앞서 발표한 데이터 간에 차이가 있을까? “우한시가 데이터를 숨긴 것은 아닌지”란 의혹의 목소리가 불거졌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의혹 제기는 타당하고 현실적 논리도 성립한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보느냐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복잡한 이론적 논증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상식선에서 가능하다. 자연재해, 돌발사고, 공중보건사건이 발생하면 새로운 단서와 확실한 증거에 근거해 누락되고 취약한 부분을 보완하고 초기 집계 데이터를 산정하는 것이 각국에서 취하는 관례다. 우한시 코로나19 방역 지휘부는 이번에 특별 조사팀을 구성해 여러 팀에서 온라인 측면과 오프라인 측면의 누락 없는 철저한 집계를 실시했다. 이러한 수정 작업은 일반적 관례이자 적극적인 보완 작업으로, 사실과 역사에 대한 책임이자 생명에 대한 책임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 논리이면서 가장 기본적 상식이다. 상식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선 우한시가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감출 필요가 있는가? 모든 일에 최소한의 가늠을 해본다. 만약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미비하고 심지어는 스스로를 진흙탕에 빠뜨리는 일인데 과연 누가 그렇게 하려고 할까? 관련 데이터를 숨기는 일은 결국은 터질 수밖에 없는 화약고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리스크를 안은 댓가는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비난인데 이로 인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가? 수치를 조금 줄인다고 승진되고 부자가 될 수 있나? 아니면 미국 의원들처럼 감염 사태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틈을 타 대량 주식 매각으로 이익을 얻으면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자극성’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후베이성, 우한시 관련 관료들의 감염 사태 초기 대응 부실을 문책했다. 이와 관련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예로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만약 진짜 데이터 정보를 숨겼다면 데이트 ‘축소’에 책임을 면할 수 있는가? 우한시는 이번 감염 사태의 오염지역으로 검사 대상자, 확진자, 사망자 수가 엄청났다. 평화롭고 조용한 시대에 어떤 데이터라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정보가 다원적이고 광범위하게 유통하는 사회에서 대형 공중보건사건이 발생하면 현미경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데이터 일부를 축소한 책임을 묻지 않고 적어도 처벌을 가볍게 하는 논리가 성립된다고 하자 그렇다면 왜 더욱 그런 일을 자행하지 않는가, 데이터를 좀 더 ‘적절하게’ 만들면 책임을 회피하기 더욱 좋지 않겠는가? 과정에서와 최종 공개되는 데이터를 비교하면 그 오차는 합리적 범위 안에 있다. 통계학 일반 원리에 따르면 이는 통계 방식의 누락에 속하는 것이지 고의적인 숨기기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힌다. 셋째, 앞뒤 데이터의 차이는 왜 발생하나? 이는 기술적 문제로 다양한 객관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며, 해당 통보에서 이를 충분히 설명했다. 갑작스런 감염 사태 초기, 바이러스 핵산 검사력도 매우 미비했고, 중증 및 위중증 환자에 대한 치료 자원도 매우 취약한 상태다. 후베이 특히 우한의 방역 요구치와 치료력에는 큰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국가라도 사각지대, 누락 등 즉각적인 대처와 집계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지금 각국의 상황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감염 사태의 간사함과 인류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더욱 발견한다.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갑작스런 감염 사태 앞에 어떤 국가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제한적 의료자원을 중증 및 위중증 환자에게 집중하는 것은 감염 초기 가장 이성적 결정이다. 감염 사태를 겪는 국가나 사회라면 생명과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체감했을 것이고 더욱이 두 달여 전에 사태를 맞아 돌을 만진 후 강을 건넌 것은 중국과 중국인들이었다. 전국적인 지원과 각종 방역 조치로 후베이와 우한은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감염 사태라는 시련을 통해 중국인들은 국가가 ‘인민 중심’임을 확실하게 보았다. 시종일관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우선에 두는 것은 중국의 변하지 않는 기조다. ‘고의적 숨기기’와 같은 만리장성(중국)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단기적 시각은 중국 정부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중국은 투명과 공개만이 조속히 감염 확산을 막고 또 정상적인 경제사회 질서를 조속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풍파를 겪는 국가라면 이를 깊이 체감할 것이다. 실사구시는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자 원칙으로 이러한 감염 사태에서 중국은 이 원칙을 고수한다. 생명 존중이란 이름으로 진행한 데이터 수정 작업은 실사구시 원칙의 실천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공정심을 가진 이라면 확실한 사실 속에서 하나의 결론, 즉 중국은 실사구시 준칙을 고수하고, 도의를 중히 여기며 이를 위해 행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다. (번역: 조미경)
71    중국, 국제기구의 역할 발휘 적극 지지 댓글:  조회:1502  추천:0  2020-04-14
[사설]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가 리더십을 발휘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역 조치를 마련하고 총력을 다해 코로나19의 국경 간 전파를 막는 것을 지지한다.” 얼마 전에 열린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G20 특별 화상 정상회의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연설 발표를 통해 국제기구가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세계는 중국이 중요한 시기에 보여준 대국의 모습이 전 세계 코로나19와의 전쟁에 중요한 역량을 불어넣었음을 함께 목도했다. 중국은 WHO에 기반한 코로나19 정보 공유 강화 및 전면적이고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역 지침 확대를 G20에 건의했고, G20의 소통 조율 역할을 발휘해 정책 대화와 교류를 강화하자고 호소했으며, 세계 공중보건 안전 고위급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다자협력을 강조한 이런 건의는 국제 조율을 강화함으로써 현재 코로나19 도전에 대응하는 높은 자각성을 방증한다. 인류는 동고동락하는 운명공동체이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인류가 완승을 거두어야만 각국 국민의 생명 안전과 건강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다.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습격했을 때 비상대응은 국제 조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국제기구가 역할을 발휘해야 한다. WHO는 보건사무를 담당하는 유엔 전문기구로 신종 전염병의 조기 검사와 경보, 방역 전략 조율, 진료 및 치료 방법 공유 및 국제 지원 결성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으며, 위험을 분담하고 안전을 공유하는 글로벌 공중보건 비상 협의체 마련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WHO는 여러 곳의 실험실 가동, 글로벌 검사 네트워크 구축 가속화, 국제 역량 동원, 과학연구와 혁신업무 가속화, 유엔재단 및 관련 협력 파트너와 코로나19 연대대응기금(COVID-19 Solidarity Response Fund) 출범, ‘기본 보건 서비스 지침’ 발표 등 코로나19 공동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 조율에 최선을 다하면서 국제 및 지역기구와 함께 적극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 보건 거버넌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계 공중보건 사업을 위해 기여하는 것은 책임이자 의무이며, 인류 공동 이익에 부합한다. G20 정상들이 코로나19 대응 특별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공통인식은 세계의 기대를 담고 있다. 각 측은 WHO를 포함한 관련 국제기구와 함께 노력해 각자의 직책 범위 안에서 모든 필요한 행동을 취하기로 승낙했다. WHO ‘코로나19 전략적 대비 및 대응 방안’ 중의 자금 부족을 조속히 메우고, WHO 코로나19 연대대응기금과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 재원을 제공하는 등 국제 코로나19 방역 행동을 조율하는 측면에서 WHO의 직책 강화를 완전히 지지하고 승낙한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약속들이 적극적으로 이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보건 거버넌스 분야에서 중국은 시종일관 다자주의를 주창하고 실천하고 있으며, 국제기구가 역할을 발휘하는 것을 지지한다. 코로나19 발병 이후 중국은 WHO와 긴밀히 협력해 왔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중국이 전염병을 보고하고, 분리된 바이러스와 염기서열을 WHO 및 세계와 공유한 빠른 속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는 말로 형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한에 파견된 WHO 전문가들의 현지 시찰, WHO-중국 합동 전문가 시찰팀의 업무 진행 및 경험 공유, 물자 지원 등의 분야에서 중국은 WHO 업무의 확고한 지지자이다. 중국은 WHO의 코로나19 대응 국제 행동 지원을 위해 WHO에 2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는 ‘글로벌 연대 상부상조 정신을 구현’한 자선 행위로 불리고 있다. 일치단결해 전염병 마귀를 퇴치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일각에서는 음흉한 심보로 WHO를 모독하고 비방하고 있다. 인류의 생명 안전이 무너지는 것을 거들떠보지 않는 행위의 폐해는 코로나19 자체 못지않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 글로벌사무연구소 에릭 버글로프(Erik Berglof)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WHO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트집을 잡는 축에 속하며, 이는 역효과를 낼 것이라면서 “코로나19에 승리하려면 G20 정상은 국제기구와 협력해야 하는데 우선적으로 WHO와 협력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WHO는 현재 유일하게 세계의 건강을 이끌며 필요한 관여를 요구할 수 있는 신뢰 기구”라고 말했다. 국제 의료학술지 ‘랜싯(The Lancet)’ 온라인판은 사평을 통해 “WHO가 글로벌 대응 업무를 조율하는 중에 발휘하는 핵심 역할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에 만연하는 코로나19에 승리하려면 강한 힘을 모아야 한다. “유엔 창설 이래 최대의 시험대에 오른 국제사회는 더 강하고 더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치단결해 정치게임을 버리고 어려움을 인식하는 것만이 이번 위기에서 함께 승리할 수 있다.”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이 최근 또다시 국제사회에 보낸 호소는 각국이 높은 경각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유엔이 직면한 시험은 국제사회에 대한 공동 시험이다. 연대 협력해야만 승리의 힘을 얻을 수 있고, 생명 안전을 공유할 수 있다. (번역: 인민망 이인숙)  원문 출처: 인민일보
70    역병과 문명의 발전(엄정자) 댓글:  조회:1690  추천:0  2020-04-08
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역병과의 전쟁을 반복해왔는데 이런 전쟁은 인류 력사와 문명의 변화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장 오래된 감염증 류행 기록은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의 력사를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인데 거기에는 그리스 아테네의 역병에 대해서도 기록되여 있다.   이 전쟁에서 해군력이 막강한 아테네는 거의 무적의 육군을 가지고 있는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을 이기기 위해서 우세한 아테네해군으로 스파르타군을 해변에 묶어 두려 했다. 아테네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을 성벽 뒤로 후퇴시켰는데 원래 인구가 많던 도시에 주위 주민들이 몰려들면서 아테네는 질병의 온상이 돼버렸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시체를 태우는 장작불 위에 주인 없는 시체들이 던져졌다. 부모는 자식을 잃고 자식은 부모를 잃고 3년도 안 되여 성벽 내 주민 중 1/3을 잃음으로써 아테네는 전력을 잃게 되였다.    거기에다가 "전쟁 초기에 그리스 군대를 이끈 페리클레스마저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갑자기 찾아온 전염병이 아니였다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전쟁 초기에 물리쳤을 것이고, 그랬다면 세계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였을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아테네 전염병과 펠로폰네소스전쟁)   1531년,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1475-1541)의 군대가 168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잉카제국의 8만 군대를 무너뜨린 것도 천연두 때문이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쟁보다 천연두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기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열어놓은 길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병균을 전파하는 경로가 되였고 이는 원주민들의 문명을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16세기 유럽인들은 14세기에 페스트로 인한 2차 대역병을 치르면서 온갖 병원균을 지닌 병원체가 되였는데 면역력 없는 원주민들은 그런 유럽인들을 접촉만 해도 병에 걸려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같이 역병은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는 살상 무기가 되였는데 다른 한편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하면 사람들은 사무라이(侍)나 인자(忍者)를 떠올린다. 그러데 이런 사무라이의 탄생은 역병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나라(奈良) 도다이사( 東大寺)의 대불(大佛)도 역병이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한다.    대불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서기 745년. 쇼무천황(聖武天皇)이 왕위에 올랐던 8세기 전반이다. 덴표(天平) 9년(737년)에 일본에는 천연두가 류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당시 국정을 담당하고 있던 후지와라 4형제마저 천연두로 잇따라 사망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덴표시대는 연년(連年) 가뭄·기근이 지속했고, 덴표 6년(734년)에는 대지진으로 크게 피해가 생겨 사회가 불안해진 시대였다.   도다이사( 東大寺) 대불의 건립계획은 쇼무천황이 이러한 사회 불안을 해소하고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역병이 대불을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이다.천년이 지나는 동안 이 대불은 수차 손상되기도 했으나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천연두의 종식 후 저조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민의 토지 사유를 인정하는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이 시행되였는데, 이것은 역병에 의한 피해로부터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사회 부흥책으로서의 일면이 강했다. 그런데 점차 '사유화'가 종신권리로 발전하면서 자신의 토지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무사(武士)가 필요했고 그렇게 태여난 무사가 조직화되면서 귀족과 황족을 위해 일하는 사무라이(侍)가 생기게 되였다. 역병이 없었다면 사무라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류행한 흑사병이 르네상스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 유럽은 1000여 년간 신(神)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하지만 흑사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사제들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며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게 되였다.    보카치오는 1348년 페스트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듬해부터 『데카메론』(Decameron 1353)을 집필했다.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흑사병이 만연하였다. 이 역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체 높은 젊은 부인 일곱명과 귀족 청년 세명이 피에솔레 언덕의 아름다운 별장으로 피신가게 되였다. 그들은 하루에 한명씩 왕이 되여 그날의 주제를 정한 뒤 각자가 한편씩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하였는데 수난일을 제외하고 2주에 걸쳐 열흘간 100편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고난 끝에 행복을 찾는 이야기, 역경을 이겨 낸 연인의 이야기,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 기발하게 상대를 조롱하는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 아래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춤과 노래로 하루를 마무리하였는데 보름째 되는 날 그들은 각자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갔다.   성과 쾌락에 관계된 재미난 여흥 거리 이야기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데카메론』은 구체적인 사물과 체험을 구체적인 언어로 재현하는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종교의 억압적인 지배하에 숨 막혔던 사람들에게 인간의 본체적인 인성에 눈을 돌리게 하였고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인쇄술도 없었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說話) 형식의 단편 문학은 일반 민중들에게 전달되기 쉬워서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있었다. 여기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이른바 보카치오식 산문이라는 것으로서 오래도록 산문의 본이 되였다.   요즘 일본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가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정부는 오늘 「긴급사태 선언」을 내렸다. 회사는 물론이고 학교도 휴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태는 17세기의 유럽에서도 일어났었는데 그때도 흑사병 때문에 학교가 휴교했다. 그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던 아이작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였는데 휴교로 사색할 시간이 많아졌던 뉴턴은 그 와중에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미적분도 이때 만들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위기가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쩌면 그 휴교가 없었다면 인류의 발전에 혁신을 일으킨 만유인력이 발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달이 왜 지구를 둘러싸고 도는지도 몰라 인조위성도 못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 정부로부터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외출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고 학교는 휴교나 인터넷수업을 고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불가피하게 경제의 발전에 브레이크를 건다. 토요다 (豊田) 같은 대기업에서마저 일부 공장을 가동하지 않고 있으니 중소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기업의 생산 규모가 축소되자 경영자들이 인건비를 줄이려고 신입사원 인입을 취소하는 바람에 올해 졸업생 중에는 취직 내정(內定)이 취소된 학생들이 많다. 이미 아파트를 빌고 이사까지 한 그들이 갑자기 취직이 취소되니 4월부터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가 문제가 되였다. 다행이 정부가 6조엔의 원조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급한 불은 끄지 않을까 싶다.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하던 4차산업혁명의 도래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 것 같다. 4차산업혁명에서 주되는 사업인 다양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클라우드 컴퓨팅 및 빅데이터 산업, 그리고 인공지능(AI)산업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를 공제하고 억제하는데 아주 큰 작용을 하고 있다.   중국 IT 기업 "알리바바" 산하의 결제 서비스 "알리페이"는 2월 11일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으로서 "알리페이 건강 코드"를 본사가 있는 저장성 항주시 등에서 실험적으로 도입하여 1주일만에 100개 도시로 확대됐다고 한다.   알리바바 산하 앤트파이낸셜이 운영하는 결제 서비스 '알리페이 건강 코드'는 애드온 앱으로 알리페이의 사용자 건강상태를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QR코드로 표시한다.   이 QR코드는 사용자가 입력한 개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성되며 초록색이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나 노란색의 경우 1주일, 빨간색의 경우 2주간의 자택 대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노란색' '빨간색' 판정은 자진신고 해야 하며 건강상태 외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와의 접촉, 감염지역 출입 등이 기록되며, 대중교통 리용 데이터도 담겼다.   덕분에 제때 감염자를 알아낼 수 있었고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았고 사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 앱을 인입하였는데 확진자의 격리장소, 동선(動線) 같은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확진자들이 방문했던 곳을 점으로 찍고, 선으로 련결해 이동경로를 쉽게 보여주어 신속한 업데이트가 될 뿐 아니라 전체 통계도 볼 수 있어서 코로나 19를 현명하게 피하는 수단이 되였다.    또한 '코백 플러스'를 리용하여 주위 약국의 마스크의 현황을 보여주기때문에 구매 확률을 높여줬고 코로나 19와 관련된 국내 현황, 세계 현황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확진자 발생지역 역시 확인 가능하였다.   이런 앱을 리용함으로써 한국은 코로나 19를 보다 유효하게 억제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였다.   일본은 개인정보 류출이 우려되여 이때까지 이런 앱 사용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은 일본도 인터넷 앱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고 있다.    코로나 19의 확산은 세계적으로 의료붕괴를 일으키고 있다. 불어나는 환자 수에 대응할 의료진의 수가 모자라는 상황 속에서 의료용 로봇의 필요성이 제기되여 이미 의료붕괴가 일어난 이탈리아에서는 의료로봇이 사용되고 있다.    전염성이 강한 환자에 대한 치료 간호가 앞으로는 로봇을 통해서 진행된다면 의료 종사들이 감염되여 의료붕괴가 일어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19와의 전쟁은 인류력사상에서 IT산업과 AI의 신속한 발전을 필요를 하고 있으며 이는 4차산업혁명의 발전 속도를 촉진할 것이다.    지금은 상황때문에 피동적으로 인터넷으로 수업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이 미래 교육의 실험 모델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도쿄와 오사카 등 7개의 도(都) 부(府) 현(県)에 「긴급사태선언」이 내렸다.   외출 자숙령이 내렸고 "환기가 잘 안되는 '밀페공간', 다수가 모이는 '밀집장소', 가까이서 대화나 발성을 하는 '밀접장면'을 피면 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불편해지고 감염자가 더 많이 늘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겨울이 길고 추워도 봄은 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역병이 무서워도 인류는 역병과의 전쟁에서 이겨왔고 그때마다 인류의 문명은 발전하였다.   코로나 19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번 고난을 이겨낼 때 인류는 또 한걸음 크게 성장할 것이다.  프로필   이름: 엄정자(厳貞子) 경력: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사,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대표 겸 회장,  연변작가협회 회원,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상경력:  수필 「화산 우에서 사는 사람들」  제9회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필 『감나무에 담긴 정』  제1회 同胞文學 安民賞. 수필부문 우수상,   작품집: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연변인민출판사, 2014년.    
69    우리 식이냐, 한국식이냐 댓글:  조회:1728  추천:1  2020-04-07
얼마 전 한 위챗단체방에서 ‘피드백’이라는 단어를 놓고 열렬한 쟁론이 벌어졌다. 외래어사용을 반대하여 ‘건의’로 바꿔야 한다면서 화두는 던져졌다. ‘글에 대한 피드백’이라고 할 때 ‘피드백’은 글을 읽은 후의 느낌이나 개선방향, 쉽게 말해 ‘반응’을 뜻하는 어휘이므로 단순한 ‘건의’보다는 내포가 넓다. 하여 조선어에 대응되는 합당한 어휘가 없을 시에는 한국식 대로 외래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찬성립장이였다.     결론이 어찌되였든지를 막론하고 언어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에 필자는 위로를 느끼며 량측 모두에게 내심 박수를 보냈다.  4년전에 반포된 조선말새규범에 대해서는 모를지라도 적어도 조선어와 한국어의 차이에 대해서는 문자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어와 조선어의 차이에서 외래어는 구우일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말사전에 오르지 않은 외래어일지라도 한국에서 표준어로 쓰이고 내용이나 어감상 꼭 필요할 경우라면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기에  ‘피드백’은 필자 또한 자주 사용하는 어휘이다. 게다가 ‘디저트’를 ‘대지트’라든가 ‘그룹’을 ‘그루빠’처럼 조선말 사전이나 규범에 맞게 쓴다는 것이 꼭 매끄럽지만은 않을 때가 많다. 외래어를 놓고 한국식으로 쓰냐 우리 식으로 쓰냐 하는 것은 그닥 가치 있는 쟁론이 아니라고 본다. 화제가 ‘랭면/냉면, 비률/비율, 드디여/드디어’와 같이 고유어나 한자어에서의 차이에 대해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 이 글을 적는다.    조선어와 한국어는 의사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에 기초한, 문화적 뿌리가 동일한 언어이다. 그러나 1950년대초 우리가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면서 우리의 언어도 ‘중국 조선어’가 되였다. 조선과 한국이 분단된 지 70여년, 중국 조선어로 불리우기 시작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 중국 조선어와 한국어는 많은 면에서 이질성을 갖게 되였다. 하지만 도서, 텔레비죤, 인터넷 등 매체를 통해 한국어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일상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국제품을 더 선호하게 되여 한국어가 우리들의 생활에 침투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게다가 정규출판물이 아닌 각종 온라인계정에 ‘로인, 오래동안, 진렬, 도리여…’가 아닌 ‘노인, 오랫동안, 진열, 도리어…’ 등 한국식으로 쓰여진 글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성세대들의 언어생활에는 큰 영향이 없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혼란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필자의 딸애 역시 한국어사용자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말로 된 도서가 한정되여있다보니 지금까지 한국의 책들을 무더기로 사들여서 읽게 하였는데 학교에 가고 나서 얼마 안 지나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처음 한국식 표기 대로 쓴 것을 발견했을 때는 우연일 거라고,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맞게 쓸 거라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며칠전 한시험지에서 ‘내일 뭐 할까?’,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등 한국식 표기로 쓴 것을 여러개 발견했을 때 조선어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슬프기 그지없었다. 이런 애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선생님들의 애로점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몇년전 ‘중국 조선어와 한국어 표기’에 관한 론문으로 학술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때 한국의 한 대학교 교수가 “만약 자녀가 대학의 한국어과로 진학하거나 졸업하여 한국회사에 취직하게 된다면 그 때도 한국어가 아닌 조선어를 쓰게 할 것이냐?”고 질의를 해왔다. 확실히 그럴 상황에 대비하여 대도시에 진출해 사는 조선족들은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때 가서 딸애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지 지금 내가 미리 닥달할 일은 아니라면서 조선어를 고집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시험을 조선말로 치러야 한다는 당면의 리유를 제치고라도 우리가 한국사람이 아니고 조선족인 만큼 우리의 언어도 한국어가 아닌 조선어여야 마땅한 것이 아닐가. 중국땅에 일떠선 우리 민족의 첫 민족대학과 첫 민족출판사가 조선어라는 매개가 없었다면 70여 성상의 빛나는 려정이 있었을가! 그간 또 얼마나 많은 조선어 관련 학자들이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부단히 조선어규범을 수정하고 보충하면서 올곧은 길을 걸어왔는가. 10년에 한번씩 변하는 새 규범에 적응하기 어려워 툴툴댄 적도 있지만 우리 자체의 언어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늘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다. 그리고 충실한 사용자가 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조선어와 한국어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두음법칙(래일/내일)과 사이시읏(뒤문/뒷문), 그리고 ‘구뎅이/구덩이, 도리여/도리어, 피였습니다/피었습니다’처럼 기저형 설정에서의 차이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그외에도 ‘나무군/나무꾼’이나 ‘페교/폐교’, ‘톱이/톱니’와 같이 라렬하자면 수두룩하니 많으나 교육이나 출판 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용자들에게까지 요구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요즘은 우리말로 된 온라인계정이 참 많다. 지면에 발표된 글을 전재하는 형식으로 된 계정은 그나마 문자가 깔끔하게 다루어졌지만 그 외 많은 온라인계정을 보면 언어사용이 적절치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식 표기를 따르려는 시도가 많은데 그것도 어휘만 한국식으로 표기할 뿐 띄여쓰기나 문장부호를 보면 한국어문법을 제대로 섭렵한 경우가 드물다. 어영부영이라고 표현해야 할가! 각자의 선호도가 다르고 언어환경이 다르기에 한국식을 많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한국어가 아닌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연변교육출판사 계정 
68    [사설] 미국 빈곤 격차의 냉혹한 현실 댓글:  조회:1718  추천:0  2020-03-20
미국 일각에서 당당하게 다른 나라 인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할 때 미국 사회 서민들의 삶은 빈곤 격차로 인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값비싼 비용으로 사람들은 검사를 받지도 못한다”, “현실은 미국인 40%가 400달러의 갑작스런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작년에만 미국인 33%가 치료를 포기했다” 미국 하원은 최근 코로나19 감염 사태 관련 청문회에서 이어지는 질문에 미국의 빈부 격차와 취약한 의료보장 현실을 드러냈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이 발표한 가 밝힌 다량의 사례들은 부강한 미국이란 가면 뒤에 빈곤 격차 심화라는 냉혹한 현실이 존재함을 알렸다. 미국은 서방 국가 중 빈곤 격차가 가장 심각한 나라다. 미국인구조사국의 통계 데이터를 보면, 지난 50년간 미국 지니계수는 줄곧 상승해 2018년 최고치 0.485에 달했다. JP모건체이스는 미국 상류층 가정 10%가 전체 가정 순자산의 75%를 차지한다고 보고했다. 연방준비제도 측도 1989년부터 2018년까지 상류층 가정 1%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에서 32%로 증가했지만 최저층 가정 50%의 자산 증가는 제로라고 밝혔다. 미국 경제학자 폴은 사회 상류층 소득의 비약적 증가는 사회 저층에게 대부분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라고 보았다. 자본으로 인한 양극화가 ‘부가 갈수록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이미 다수 미국인이 합리성과 도덕성 면에서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인식을 초래했다. 2018년 미국은 빈곤 인구가 3970만 명을 기록했다. 미국 주택도시발전부처의 데이터에 따르면 매일 밤 적어도 50만 명은 돌아갈 집이 없다. 미국은 현재 유일하게 수백만 인구가 굶주림에 시달리는 선진국이다. 미국 아동보호재단에서도 이러한 냉혹한 현실을 꼬집었다. “전 세계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1/5이 넘는 어린이가 매일 뭘 먹을지, 어디서 자야할 지를 고민하는 현실 앞에 직면한다.”라며, 미국은 1280만 명의 아동이 빈곤 상태에 처해 있고, 5세 이하는 350만 명으로 이 중 160만 명이 극도의 빈곤 상태에 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미국 일각은 여전히 큰 소리를 치며 미국을 모범적인 ‘민주 악사’로 포장하고 있다. 미국 저층민은 냉혹한 ‘낙담 골짜기’에 빠져 있고, 미국 정부는 엄청난 민간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미국은 국민의료보험을 시행하지 않는 몇 안되는 선진국의 하나다. 미국 국가통계국이 작년 11월 밝힌 통계자료를 보면 2018년 2750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갤럽 측 조사에 따르면 미국은 1500만 명이 비싼 약값으로 처방약 구매를 미룰 수 밖에 없고, 6500만 명은 비싼 의료비 때문에 치료를 포기한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건강안전시스템이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감당할 수 없고, 따라서 감염이 점차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미국의 빈곤 격차는 안정적 장기 추세로 이는 미국 정치제도와 미국 정부가 대표하는 자본 이익으로 결정된 것이다. 유엔 최빈곤인권문제 관련 조사관은 미국의 “최빈곤 상태 존재는 위정자들의 정치적 선택이다”라고 지적했고, 영국 학자는 미국의 심각한 빈곤 격차의 근본적 원인을 미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시스템, 즉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를 핵심으로 부자의 이익을 수호하기 때문이라고 직언했다. 미국 정부가 ‘가짜 인플레이션율’로 수백만 빈곤 인구를 ‘제거’하는 방법을 시도하려 하지만 언론은 “정부가 빈곤인구 수와 이들을 도울 방법보다는 그저 숫자 게임에 치충한다”라는 말로 이를 비꼬았다. 미국이 만약 인권 문제를 정말로 문제 삼고자 한다면 장기간 미국 사회를 괴롭힌 빈곤 격차 문제는 왜 고민하지 않는가? 미국 일각에서 당당하게 다른 나라 인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할 때 미국 사회 서민들의 삶은 빈곤 격차로 인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미국엔 굶주리는 아이들, 갈 곳 없는 가난뱅이, 치료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는데 어째서 미국 일각에서 스스로를 본보기를 삼으라고 하는가? 전 세계는 당연히 이를 본보기를 삼을 수 없다! 빈곤 해소에서 한 사람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인권 수호자’ 미국은 이러한 약속을 책임질 수 있는가? 현재까지 그들 마음속에는 이러한 의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번역: 조미경) 인민일보/인민망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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