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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생 -영화 《베일리 어게인2》 댓글:  조회:2075  추천:0  2019-05-28
본사소식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은 대체로 기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되어있는 리별을 감내해야 하는 슬픔의 감정 역시 함께 가지고 있다.   뻔한 만큼 확실한 재미와 감동이 있고, 유치한 만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 《베일리 어게인2((一条狗的使命2)》가 5월 17일 개봉과 동시에 시즌1 못지않은 흥행세를 달리고 있다.   《베일리 어게인2》는 52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소설에 오른 《내 삶의 목적》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내 삶의 목적》은 미국에서만 100만부 이상 판매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프랑스, 터키 등 29개 국에서 번역, 발간되여 각국의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영화는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시간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면서 예정된 리별에 반려인들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지를 ‘환생’이라는 설정을 통해 따뜻한 위안을 전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베일리’는 그간 함께 해왔던 주인 이슨과 리별을 맞이하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면서 다시 환생하게 된 베일리는 주인 이슨의 당부대로 그의 손녀 ‘CJ’ 곁을 지킨다. 베일리는 자신이 왜 태여났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지금 현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충실할 줄 안다. 동물영화의 묘미는 그러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제3의 눈으로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CJ가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고, 가족에 변화가 생기는 등 주인공들에게 닥치는 사건 사고마다 베일리가 함께 하면서 자신의 ‘견생’ 경험치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인생 경험치가 어떻게 쌓여나가는 지를 목격하고 들려준다.   매일을 행복하게 사는 것, 함께 하는 것, 이 영화를 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함께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홀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않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일 때 비로소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게, 함께,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저 하는 가장 절실한 목적이 아닌가 싶다.   료녕신문 김연혜 기자     종 합료 녕사 회경 제> [료녕뉴스]심양시조선족배구협회 성립 [동포뉴스]심양시조선족배구협회 성립 [료녕뉴스]무순시심무신성조선족소학교 조선어 과문극 표현활동 가져 [교육]무순시심무신성조선족소학교 조선어 과문극 표현활동 가져 [료녕뉴스]북경대학 조선족재학생 인재양성포럼 및 제1회 중한경제발전협력 교류포럼 북경서 [료녕뉴스]하로하조선족향 ''''제2회 진달래가요회'''' 개최 조선족특색향진건설에 박차 [료녕뉴스]시와 시인의 만남 오이오시합평회 심양서 [문화]시와 시인의 만남 오이오시합평회 심양서 [료녕뉴스]항일유적지 답사 실기(2)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문화]항일유적지 답사 실기(2)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46    네모의 힘(심명주) 댓글:  조회:1674  추천:1  2019-05-07
[두만강칼럼] 요즘 좋은 공지 하나를 접했다. 서법이 공식적으로 중학교 과외 학과로 지정되였다는 것이다. 온라인과 더불어 산잡한 말과 글들이 람발하는 이 시점에 문자에 대한 정확하고 경외스러운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겨보게 되는 시점이다. 《말모이》(국어사전)라는 영화도 보았다. 언어말살정책으로 창궐하던 일제강점시기 우리말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사전으로 편찬한 4인의 력사실화를 모티프로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그러면 평화시대의 지금, 우리는 어떻게 우리글을 전승해가고 있는가? 한마디로 잘 지키지 못한다. 요즘 같으면 우리말의 네모가 다슬어버린 느낌이다. 그런 표현에 적절한 곳이 온라인이다. 우선 위챗대화에서 표준어와 띄여쓰기 같은 개념을 무시해버린 경향이다. 게다가 우리말에 한어, 영어, 일어가 뒤섞여 표현되는 것도 다반사이고 외래어도 사투리도 아닌 언어들도 람발한다. 종이로 된 글을 읽던 지난날에는 비록 새로운 글과 소식을 접하는 시간이 느리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인내와 끈기로 배웠고 더우기 표준언어거나 문자의 정확한 사용을 철칙처럼 고수하고 지켜나갔다. 지금은 그런 것이 삭제된 채 고증이 없는 언어들이 만연돼간다. 아무리 글로벌이라지만 우리만의 독특함이 바탕이 되여야 변형이 가능하다. 더우기 심장박동수보다 더 빠른 터치로 순식간에 세계 수많은 소식을 접하는 시대, 개인의 사생활이든 타인에 대한 뒤담화든 손가락 하나로 찰나에 퍼뜨리고, 대화글도 정제할 사이가 없이 즉석 스피드로 의사전달만 하면 그만이다. 발 빠르게 달리는 온라인으로 사고할 뇌를 잃어가는 시대이다. 위챗대화중에 요즘은 표준어를 구사하기가 난감할 정도이다. 개념 있는 누가 한소리라도 하면 당장 ‘꼰대취급’을 받는다. 언어가 정체성을 잃어가니 세대가 막돼먹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디서부터 이런 혼란을 가져왔는가. 온라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우선 이미 부모세대에서부터 자신들의 근거지를 협소한 울타리로 오식하고 자녀를 위해 뿌리와 문화터밭인 자기말 자기글의 학교 교육을 거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받은 옳바른 문화교육은 손오공의 ‘여의봉’과 같다. 압축되여 귀속에 감춘 듯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무한대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사람의 ‘대’고 한 군체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갑자기 불거진 경제붐으로 많은 부모들이 한창 부모 사랑과 부모 교육이 절실한 자녀들을 뒤로 하고 외국, 타향으로 떠났다. 우리 사회에는 이 때문에 한동안 조손가족이 성행하여 그에 유발되는 문제까지 다루던 상황이다. 그런 부모세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녀들은 이미 장성하였다. 되려 분투와 자립이 필요한 시점에 부모들은 자식에게 그동안의 보상으로 집과 차, 결혼비용까지 도맡아 해결해주었다. 이들은 자수성가하면서도 끄떡없이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던 우리 세대와 다르다. 흔들리는 뿌리는 깊은 그늘의 가지를 키우지 못하며 나무잎도 쉽게 떨어진다. 쉽게 얻고 보상심리가 다분한 이 세대가 기성세대요 ‘나무잎세대’이다. 이 와중에 온라인이 만연되였다. 위챗, 틱톡… 얼굴을 맞대고 눈길을 마주치면서 나누는 얘기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공손하고 례절스러워지지만, 온라인은 얼굴까지 가리울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근본이 약소하면 이런 곳일수록 언어구사가 란잡하다. 그것은 늘어나는 요즘의 언어장난과 ‘댓글부대’와도 직결된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된 우리 언어가 힘을 발휘할 곳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지구에 사는 2천여개의 민족중에 언어와 문자를 겸비하고 백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글은 140개 밖에 안된다는 통계이다. 중국이라는 대국에서 180만명을 웃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조선족언어는 그중의 하나이다. 틈없이 네모난 우리 문자처럼 합심되여 바르게 지켜가야 되는 때가 지금이다. 그런 의미로 십세되는 아들에게 서법을 시켰다. 검은 먹을 찍어 한획한획 힘 있게 새겨지는 문자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미약하나 강한 힘을 확인하고 더불어 희망을 바라보다가 나도 어느덧 동참하게 되였다. 더우기 요즘 부쩍 많아진 문화행사에 그래서 ‘훈민정음’이 새겨진 한복을 일부러 착복하고 나선다. 길림신문  
45    안타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댓글:  조회:1635  추천:1  2019-04-19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등장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녀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여난 안타이오스는 리비아 땅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레슬링시합했는데 힘이 워낙 장사여서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안타이오스는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와 힘 겨루기를 하게 되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최고의 영웅이며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헤라클레스조차 안타이오스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싸움 끝에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가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무궁무진한 힘을 발산함을 알게 되며 안타이오스를 높이 들어올려 허공에서 목을 졸라 죽인다. 땅의 녀신 가이아의 아들인 안타이오스의 힘의 비결은 땅에 있었다. 땅은 안타이오스의 태줄이 발원한 곳으로서 그의 힘의 원천이였다. 땅과 함께 할 때 그는 초인적 힘을 가졌지만 땅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목숨마저 잃었다.   순경(順境)과 역경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면 생각 나는 단어들이 있다. ‘집’, ‘부모님’, ‘고향’ 등 현재의 ‘나’의 뿌리, 즉 출발의 원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런 뿌리, 출발점과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족보’이다. 족보는 가문의 력사책으로 불린다. 하지만 단순히 가문의 력사를 기록하는 것만은 아니다. 족보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감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무언의 힘과 동력의 원천이 된다. “조상님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혹은 “이 정도의 난관은 언제나 있었으며 나의 조상님들도 잘 이겨나갔다”는 자신감을 갖고 다시 한번 역경에 도전하는 받침목이 되는 것이다.   족보가 한 집안의 뿌리로서 그 후손들에게 힘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안타이오스의 땅’과 같은 존재라면 한 민족에게 있어 이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 문화와 력사가 되겠다.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주로 동북삼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집거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1992년의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의 이런 거주환경과 종사업종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족들도 차츰 동북을 떠나 북경, 상해, 청도, 광주 등 연해 대도시나 한국, 일본과 같은 해외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가령 동북에 남아있어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할빈, 장춘, 심양, 연길 등 도시에 이주하여 도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주로 동북에 거주하는 농경민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게 되였다. 또한 이렇게 여러 도시들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삶의 기억으로서의 ‘력사’도 망각해가고 있다. 언어, 문화, 력사와 같은 이런 민족의 ‘뿌리’를 익혀두는 것이 급속한 변화를 거듭하는 도시에서 물질적 부의 창조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효률적일지 몰라도 드바쁜 일상이 가져다주는 고민과 방황, 그리고 내면의 공허를 치유하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출신과 신분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에서 타자 앞에 떳떳이 자신을 소개하고 생활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도 필요한 존재이다.   조선족의 삶의 공간과 방식이 농촌에서의 집거생활로부터 도시에서의 분산생활로 변화되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다. 우리의 언어, 문화, 력사를 지탱해주던 우리만의 공동체로서의 현실적 삶의 공간이 갈수록 위축되는 현실에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가상의 인터넷 공간이다.   만물을 이어놓는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연해도시나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로 삶의 공간을 넓혀나간 조선족들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이 결합되면서 수시로 원하는 사람과 교류하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정보의 교류와 전달이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또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약화된 조선족 공동체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재현하고 강화할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와 력사 그리고 삶의 희로애락을 가능한 많이 콘텐츠화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인 콘텐츠에 대한 상호 선전과 관심도 필수적이다.   직장 동료나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아, 조선족이세요. 조선족에 대해 조금만 소개해줄 수 있어요.” 라고 할 때 “미안하지만 솔직히 민족만 조선족이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은 “할아버지 성함은 무언지, 무얼하셨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대 이전에는 족보의 유무를 두고 ‘뼈대 있는 가문’과 ‘근본이 없는 집안’을 갈라보기도 했다. 잊혀져가는 민족의 ‘뼈’와 ‘근본’을 되살려 후대들에게 힘들 때 기대이고 용기를 되살리게 하며 나아가 남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안타이오스의 땅’을 만들어주는 작업이 필요한 리유이다. 이 ‘안타이오스의 땅’은 급변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있어 ‘정해신침(定海神針)’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안타이오스의 땅’을 잃었을 때 조선족도 도시라는 ‘헤라클레스’에 들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흑룡강신문
44    지방(地方)과 지방(脂肪)--예동근 댓글:  조회:1503  추천:0  2019-04-16
요즘 내가 관심하는 것은 다이어트이다. 최근의 다큐멘터리에서 소개한 “일일일식”(一日一食), 수많은 체널에서 다이어트를 소개하며, 다이어트 실패로 겪은 “요요현상”의 고통을 얘기할 때, 나도 빨리 몸의 “비게 덩어리”를 처리해야지, 단단한 근육질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지 하면서 다이어트에 집중하고 운동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지방”하면, 나의 뱃살(脂肪)이 떠오르지, 내가 먹고, 자고, 일하는 공간과 장소로서 지방(地方)은 점차 잊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먹고, 자고, 일하는 작업장과 쉼터로서 지방, 그리고 노동의 안락성과 만족도가 높은 지방(地方)이 내 뱃살을 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확 떠올랐다.   얼마 전 중국의 장수마을(長壽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이미 “100세시대”를 앞당겨 실현했는 것이다. 산 좋고, 물 맑은 호수,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조용하게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규칙적인 생활, 오염되지 않은 식수와 하늘이 내려준 유기농 건강식품은 이들의 장수할 수 있으며, 날씬한 몸매를 가진 비결인 것 같다. 조금 더 한국, 일본 등 장수지역을 보면, 풍토인정이 장수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날 지방의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베이징, 서울, 동경의 수도권보다 높거나, 비만도는 떨어지고 있다는 유의미한 통계자료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수도권의 수명이 좀 더 길게 나올 수 있으며, 날씬한 사람도 수도권이 좀 더 많을 수 있다. 즉 개인의 건강은 이미 정치경제적 공간으로 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설사 베이징에 황사와 스모거가 엄중하여 자연환경은 열악할 수 있지만, 중국의 빈곤한 농촌지역보다 훨씬 수명이 높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다이어트의 실패를 지극히 개인적 문제로 보고 있으며, 비만은 개인의 “탐욕”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조금 더 사회적으로 보는 것이 “도시병”으로 귀결시키지만, 비만자가 사적영역에서 이야기할 때, 개인의 비만을 사회적 요인으로 귀결시키면, 주변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비만자에 대하여 동정보다 멸시가 앞서며, 집단의 문제보다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사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지방(地方)의 문제도 중앙-지방의 관계에서 볼 때, “비게덩이리”인가? “탄탄한 근육질”인가의 논쟁의 지속이다. 고속산업화, 도시화, 성장시대에 지방은 말라꽹이로 변하고 수도권은 뚱보로 변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이유는 “그래도 싸움에서 덩체가 큰 놈이 이긴다”는 슬로건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동경, 서울, 베이징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동경은 벌써 다이어트의 시대를 감지하면서,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방분권화를 실시하였고, “착한 성장, 똑똑한 복지”로 전환에서 베이징, 서울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나 동경은 주택가격 폭락의 뼈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다이어트비용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베이징과 서울의 탐욕은 끝이 없다. 황사, 스모그가 가중되지만, 베이징에 인구와 주택은 오히려 과밀화되고, 농촌지방의 공동화는 더욱 심각하여 지면서, 대도시의 다이어트 실패와 그로 인한 “요요현상”이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수십년간 지방은 수도권을 위해 20대 청춘의 탄탄한 근육질을 소모하면서 헌신하였지만, 50대에 들어서 얻은 걷은 수도권이 다이어트를 위해 던진 “비게 덩어리”이다. 이것조차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대형국책사업을 기획하여 정신없이 받어 먹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중국의 지방도시들은 정신없이 번쩍번쩍 빛나는 정부청사를 짓고, 땅을 팔아 부동산을 개발하면서 수도권이 예전에 하는 방식대로 “큰 수도, 강한 수도”를 벤츠마킹하여 “크고 강한 지방”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으며, 그 간판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지방이여, 이제는 20대 청춘의 지방이 아니다. 우리 몸 전체의 고속성장은 지나갔고, 장기는 50대에서 100세까지 노후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고령화시대에 처해있다. 중앙이 던져 준 “비게 덩어리” 얻어 먹어면서 눈치 보아야 하고, 정신없이 먹어치워 뚱뚱한 몸매에 입술에 기름이 번지러 발리면, 촌스럽고 아둔하다고 비웃음을 받고 있는 것이 지방이다.   중국과 한국의 지방들은 이제는 번쩍 정신 차려야 한다. 내 몸을 수도권에 맡겨서 절대 “근육질”이 좋은 몸매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지방의식을 갖고, 지방분권화를 해서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조금이라도 오래살 수 있고, 날씬한 몸매를 가질 수 있다. 흑룡강신문
43    [대림 칼럼] ‘차별’에 대하는 자세(전은주) 댓글:  조회:1716  추천:1  2019-04-10
       한국 개그 프로에는 심심찮게 조선족 캐릭터가 등장한다. 십 년 전쯤에 강성범의 과장된 몸짓과 우스꽝스러운 ‘연변말’로 “우리 연변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연변총각’이나, 이수지의 “당황하셨어요, 고객님?”으로 시작되는 ‘보이스 피싱’ 전화나, 김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떼어먹는 개그맨의 형상 등으로 조선족을 희화화한다.   한국의 많은 시청자들은 재미있는 개그로 받아들여 인기 코너가 되었지만, 당사자인 조선족들은 그것을 조롱과 혐오로 받아들여 분노했다.   “우리를 우스개거리로 삼다니! 동포를 이 따위로 박대하다니!”   거개의 조선족들은 화면에 비치는, 깔깔거리며 웃는 그 관객조차 다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났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들의 그런 행동에 대해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 계기는 경상도 출신 어떤 교수님의 일화를 들은 뒤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경상도에서 자란 ‘촌놈’이었다. 60년대 중반에 진학을 위해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와서 그에게 말을 붙이고는, 그가 하는 경상도 사투리에 박장대소를 했다. 그가 밖에 나올 때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를 보고 멀리서 소리쳤다.   “머라카노! 와 그람니꺼! 개안슴니더!”   그 시절에는, 그가 버스를 타거나, 가게에 가서 사투리를 쓰면 사람들이 신기한 듯 구경을 했고, 또 누군가는 흉내를 내며 깔깔거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말이 웃음거리가 될까봐, 말도 잘 못하다가 급기야는 말을 더듬거리게 되었고 대인기피증도 생겼단다.   KBS2TV 개그콘서트 '황해' 의 한 장면   70,80년대까지도 한국의 TV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부나 노동자 역할들은 모두 경상도나 전라도 말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울말이 아닌 기타 말투를 쓰는 사람은 모두 ‘촌놈’으로 취급하여 조롱거리로 삼은 것이었다. 악의가 없이 사투리가 신기하고 재밌게 들려서 그랬을 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촌놈’은 이미 ‘문화적 불평등’이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 사회는 박정희를 시작으로 줄줄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까지 경상도 사람이 대통령을 지내게 되었고, 웃음거리로 삼았던 경상도 말이 판을 쳤다. 어느 대통령은,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강간(관광) 도로를 내겠슴니다, 여러분!”이라고 당당히(?) 말했을 지경이었다.   “이솦우화”에 연못가에서 재미로 돌팔매질을 하는 소년과 개구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소년들은 개구리들의 목숨이 걸린 줄 모르고 재미로 연못에다 돌멩이를 던졌다. 개그거리로 삼는 그들의 행동은 자칫 그 소년들과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조선족을 비롯한 해외동포 및 동남아 등지에서 오는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다문화적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촌놈’들이 대폭 늘어났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만’ 그들의 조롱 대상이 아니라, ‘조선족도’ 그 범주에 속했다는 의미이다.   한국인들만 그런가? 최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Green Book, 2018) 에는 미국의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가 등장한다. 백인들로 구성된 상류사회는 그를 초청해 그의 천재적인 연주를 감상하고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지만, 정작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장 화장실을 못 쓰게 하고, 공연하는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60년대 미국 남부의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까지 미국사회는 흑인이나 동양인에 대한 차별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인종차별을 가하던 사람도 해외에 나가면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실제 '그린북'표지, 그린북은 60년대 미국 남부유색인종이 숙박할 수 있는 전용호텔 안내서이다.   결국 ‘구별 짓기’와 ‘차별’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불완전성’의 속성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끼고 차별화 하고, 그 대상이 자신보다 강한 존재가 아니라 약한 존재라면 거침없이 ‘갑질’을 하는 것이 사람의 ‘원초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촌놈’들은 그냥 당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들이‘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분개할 수 있다. 그러나 배려가 부족한 것은 ‘상대의 몫’이고, 우리는 상대보다 더 나은 행동을 찾아내어 품격을 지키면 그게 ‘우리의 몫’이 될 수 있다.   한국의 개그프로에 ‘촌놈’만큼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는 대통령이나(SNL “여의도 텔레토비”), 회장님(개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또는 정치인(개콘 “민상토론”) 등이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자신의 권력으로 코너를 폐지시키는 사례도 있지만, 반면에 ‘개그’를 통해 국민들과의 소통을 도모하면서 너그러움의 증표로 삼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쉽게 분노하거나 자기혐오에 빠질까?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급박한 위기 상황에 처할 경우에 그 충격으로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 그 외상이 역사적 사건에 기인했을 경우 ‘역사적 트라우마’로 명명한다.(Dominick LaCapra, 육영수 편역,
42    창업정보의 허와 실□ 최복 댓글:  조회:1616  추천:0  2019-03-12
하루에도 수십개 지어 수백개씩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창업정보,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가. 인터넷에서 ‘창업’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실제 필요한 창업에 관한 ‘진짜’ 정보는 찾기가 쉽지 않다. ‘창업’키워드의 검색결과는 사실 검색란에 클릭하는 순간부터 프랜차이즈 가맹 본사들의 가맹모집 광고 그리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언론의 수많은 창업홍보 기사 등이 거의 광고성을 띠는 정보들로 넘쳐난다. 또 점포매물의 허위 과장광고는 앞다투어 경쟁하듯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과도하게 부풀려져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일부 광고나 정보는 심지어 ‘100% 보장’, ‘실패률 0%’라는 문구를 내걸면서 자신들의 브랜드를 선택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그 뿐만 아니다. 검증이 안된 홍보성 기사들은 예비창업자, 초보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요즘은 특히 위챗, SNS, QQ 등 다양한 앱들이 생활화 되여있어 별의별 희한한 창업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정보들이 ‘알짜배기’는 아닐 것이고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가 진짜일지 궁금하고 또 실체에 대해 알아야 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 물론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선 적절한 광고와 마케팅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많게는 전 재산을 투입하는 창업자들에게 허위와 과장 광고는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일이다. 있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하고 되지도 않는 것을 된다고 하는 것은 창업에서 첫 걸음마를 떼려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큰 배신이자 심지어 평생 그 누구한테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다. 그만큼 처음 창업을 시도하는 ‘초보 창업자’들에게 정보의 허와 실을 구분하기란 매우 힘들다. 우선 프랜차이즈 가맹점 모집 광고 또는 모 상품의 대리상모집 등은 100% 그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매출 대비 수익률에서도 가맹비, 집세, 보증금, 종합소득세, 부가가치세, 인건비 등 다양한 투자비용으로 계산한 후 실질적인 수익을 따져보아야 하는 판매구도를 이루고 있기에 ‘빚 좋은 개살구’식의 창업은 결코 오래 지속하기 힘들다. 프랜차이즈 브랜드 또는 점포 자체가 세워진지 1~2년 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검증이 안된 가맹점 또는 브랜드 홍보에 대해선 무조건 신임하면 안되며 최소한 3년 또는 그 이상 운영한 가맹점의 비중을 참고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프랜차이즈 브랜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관리나 제재의 상급 전문기관을 직접 찾아가 상세한 내용을 사전에 료해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창업과 프랜차이즈 업계는 사실 아직도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은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광고나 정보는 어디까지나 부풀려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  정말 믿을 만큼 든든하고 확실한 정보가 아닌 이상, 직접 발품을 팔아 되도록 많은 상가, 점포, 전문가, 전문기관 등을 둘러보고 관심있는 해당 아이템과 브랜드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후 꼼꼼히 분석하는 일만이 초기 창업 실패률을 줄일 수 있다고 사료된다. 정보는 내가 가질 때만이 진실이 되지 않을가. 연변일보 
41    구호로는 해결 불가한 저출산률□ 최미란 댓글:  조회:1542  추천:0  2019-03-12
애를 낳고 2개월 되였을 때쯤, 갑자기 폭발한 적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 전혀 생각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것이였다. 영문 모를 막막함과 서운함이 덧없이 밀려와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출근을 서두르던 남편은 놀라서 "미쳤냐?" 한 마디를 뱉고 나갔고, 그 뒤로 나는 한참 엉엉 울었다. 애를 가지고 낳았다는 것은 축복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된 당사자에게 출산은 축복만은 아니였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육체적, 심리적 피로감, 당황함, 혼란스러움, 무기력감의 련속이고 반복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분명 우울기 때문에 그런 것이였는데도 정작 가장 나를 리해하고 보듬어줘야 할 남편한테서마저도 외면당했다. 아직도 남성은 녀성을 잘 모른다. 아니, 잘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산 후 85%에 달하는 녀성들이 일시적으로 우울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그 정도가 심하면 산후우울증이 되는 것이다. 호르몬 변화로 인한 심리적 변화다. 솔직히 산후우울증이란 단어도 최근에 와서야 많이 알려졌고, 또 안다고 해도 자기 집사람은 그렇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육아가 힘들다고 하면 아마 요즘같이 생활의 질이 높아져서 녀성들의 가사부담이 적어진 세월에 그 무슨 엄살이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녀성들에게 참 좋고 편한 시대’라는 말 자체에 어페가 있다. 왜 가사일이 녀성 전담이란 말인가? 녀성들이 전보다 많이 편한 세상인 것은 맞다. 우리 엄마 시대에 비하면 참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출산률은 왜 그냥 저조할가? 애가 생기면서부터 녀성들은 자기 이름 석자보다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데 더 익숙해진다. 임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또한 이후 녀성들의 사회생활에 큰 취약점이 된다. 우리 스스로 원한 바가 아닌데도 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그렇게 많던 직장탁아소도 이젠 사라지고 없다. 보육시설 부족, 치솟는 물가와 사교육 부담, 정신적 스트레스 등 많은 것들이 합쳐서 출산률 하강이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출산률 저하가 “젊은 녀성들이여 아이를 많이 낳자!”고 구호를 웨친다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엄마만의, 녀성만의 의무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협동 의무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엄마들에게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강요한다. 모성애라는 낱말에 강박적으로 옭매이기도 한다. 우리 엄마들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 할 리유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틀린 것은 고치고 개선해야지 고집하면 안된다. 세상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는데 왜 녀성들에게 옛날의 것을 강요할가. 애를 낳자? 낳게 만들어 주십사. 연변일보 
40    [두만강 칼럼]안타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댓글:  조회:1541  추천:0  2019-03-05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등장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땅의 녀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여난 안타이오스는 리비아 땅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레슬링시합했는데 힘이 워낙 장사여서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안타이오스는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와 힘 겨루기를 하게 되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최고의 영웅이며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헤라클레스조차 안타이오스를 맞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싸움 끝에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가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무궁무진한 힘을 발산함을 알게 되며 안타이오스를 높이 들어올려 허공에서 목을 졸라 죽인다. 땅의 녀신 가이아의 아들인 안타이오스의 힘의 비결은 땅에 있었다. 땅은 안타이오스의 태줄이 발원한 곳으로서 그의 힘의 원천이였다. 땅과 함께 할 때 그는 초인적 힘을 가졌지만 땅을 떠나는 순간 자신의 목숨마저 잃었다. 순경(順境)과 역경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면 생각 나는 단어들이 있다. ‘집’, ‘부모님’, ‘고향’ 등 현재의 ‘나’의 뿌리, 즉 출발의 원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런 뿌리, 출발점과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족보’이다. 족보는 가문의 력사책으로 불린다. 하지만 단순히 가문의 력사를 기록하는 것만은 아니다. 족보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감을 갖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역경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무언의 힘과 동력의 원천이 된다. “조상님들에게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혹은 “이 정도의 난관은 언제나 있었으며 나의 조상님들도 잘 이겨나갔다”는 자신감을 갖고 다시 한번 역경에 도전하는 받침목이 되는 것이다. 족보가 한 집안의 뿌리로서 그 후손들에게 힘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안타이오스의 땅’과 같은 존재라면 한 민족에게 있어 이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 문화와 력사가 되겠다. 개혁개방 이전, 조선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주로 동북삼성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집거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특히는 1992년의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의 이런 거주환경과 종사업종은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족들도 차츰 동북을 떠나 북경, 상해, 청도, 광주 등 연해 대도시나 한국, 일본과 같은 해외에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가령 동북에 남아있어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할빈, 장춘, 심양, 연길 등 도시에 이주하여 도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주로 동북에 거주하는 농경민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게 되였다. 또한 이렇게 여러 도시들에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잃고 삶의 기억으로서의 ‘력사’도 망각해가고 있다. 언어, 문화, 력사와 같은 이런 민족의 ‘뿌리’를 익혀두는 것이 급속한 변화를 거듭하는 도시에서 물질적 부의 창조라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효률적일지 몰라도 드바쁜 일상이 가져다주는 고민과 방황, 그리고 내면의 공허를 치유하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출신과 신분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에서 타자 앞에 떳떳이 자신을 소개하고 생활해가는 사회적인 면에서도 필요한 존재이다. 조선족의 삶의 공간과 방식이 농촌에서의 집거생활로부터 도시에서의 분산생활로 변화되여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다. 우리의 언어, 문화, 력사를 지탱해주던 우리만의 공동체로서의 현실적 삶의 공간이 갈수록 위축되는 현실에서 그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가상의 인터넷 공간이다. 만물을 이어놓는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연해도시나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로 삶의 공간을 넓혀나간 조선족들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요즘은 스마트폰과 무선인터넷이 결합되면서 수시로 원하는 사람과 교류하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정보의 교류와 전달이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는 또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약화된 조선족 공동체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재현하고 강화할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와 력사 그리고 삶의 희로애락을 가능한 많이 콘텐츠화하여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족적인 콘텐츠에 대한 상호 선전과 관심도 필수적이다. 직장 동료나 우연히 만난 누군가가 “아, 조선족이세요. 조선족에 대해 조금만 소개해줄 수 있어요.” 라고 할 때 “미안하지만 솔직히 민족만 조선족이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는 것은 “할아버지 성함은 무언지, 무얼하셨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대 이전에는 족보의 유무를 두고 ‘뼈대 있는 가문’과 ‘근본이 없는 집안’을 갈라보기도 했다. 잊혀져가는 민족의 ‘뼈’와 ‘근본’을 되살려 후대들에게 힘들 때 기대이고 용기를 되살리게 하며 나아가 남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안타이오스의 땅’을 만들어주는 작업이 필요한 리유이다. 이 ‘안타이오스의 땅’은 급변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있어 ‘정해신침(定海神針)’의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안타이오스의 땅’을 잃었을 때 조선족도 도시라는 ‘헤라클레스’에 들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길림신문/ 최학송(중앙민족대학 부교수)
39    대중문화제품 창출에서의 성공적인 돌파(홍길남) 댓글:  조회:1641  추천:0  2019-02-15
  [길신론평] 연변라지오TV방송국 2019년 음력설문예야회 부분적 프로를 살펴본다     〈향촌련가〉 대중문화는 주류문화, 명인문화, 전통문화와 함께 조화로운 문화생태를 이루는 한개 중요한 기본요소로서 영상매체가 각별히 신경 써 활성화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다. 그런데 보통백성생활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문화제품은 영상매체에서 가물에 콩 나듯 찾아보기 극히 힘들다. 심층차적이 아닌 평면화적인 개관(改观)오락인 대중문화제품은 기타 문화제품보다 시청자들의 선호도가 높다. 국내의 허다한 영상매체들의 문예프로 시청률이 하강선을 긋고 있는 주되는 원인의 하나가 바로 건전하고 활성화된 대중문화제품이 결여하기 때문이다. 연변라지오TV방송국에서 내놓은 2019년 음력설문예야회 〈새시대 아리랑>을 두루 훑어보면 대중문화제품 창출에서 노린 시도와 그에 따르는 성공적인 돌파를 읽을 수 있다. 1. 특정장면을 통해 대중문화특색을 살렸다 연길서역의 대합실을 무대로, 려객들을 관중으로 삼고 펼쳐진 〈서곡-새시대 아리랑>은 렬차도착시간과 검표시간을 알리는 서역 아나운서의 방송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새납소리가 울려퍼지고 노래 〈쾌지나 칭칭 나네>가 흘러나오고 사물놀이가 뒤따르면서 여러 민족 남녀로소가 한데 엉켜 흥겨운 춤판을 벌리는 대형 대중문화잔치로 만들어진다. 프로는 현장감과 친근감이 드러나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노래 〈고향의 봄>은 고향집과 고향집마당 그리고 애를 업고 어린 딸애와 함께 키질로 낟알을 다듬는 엄마의 특정장면으로 시골 백성생활의 한토막을 펼쳐보이면서 아름다운 고향산천을 구가하고 고향에 대한 사람들의 절절한 그리움을 표달하였다. 2. 연극의 수법으로 프로의 대중문화특색을 살렸다 〈향촌련가>는 동식물들과 인간들 사이의 대화, 아버지와 딸 그리고 사위감의 만남을 연극의 형식으로 펼쳐보이면서 저마다 구성진 목소리로 정든 고향을 노래하고 청춘남녀의 참된 사랑을 노래하고 날따라 꽃펴나는 고향의 아름다운 변천을 노래하고 있다. 가수들의 노래에 배합하여 춤을 추는 동식물들의 동화적인 공연 또한 흥미로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실감 있게 보여준다. 노래 〈귀향>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아들과 아들을 맞이하는 엄마 사이의 대창을 연극의 형식으로 소화시키면서 “고향은 내가 지켜야 할 사랑입니다”, “진달래동산은 너를 부른다”, “어머니의 아들로 태여나 행복합니다” 등 가사를 통해 귀향창업자들의 희열과 행복 그리고 귀향창업자들에 대한 엄마와 고향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3. 소품의 형식으로 대중문화특색을 살렸다 소품 〈사랑 배달>은 인터넷구매 때문에 불화가 생긴 한 부부의 다툼말내용을 ‘배달’하던 배달원이 부모의 리혼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꿈도 실현 못한 자기의 눈물 나는 과거를 들려주어 그 부부더러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찬 가정을 되찾게 한 사연을 쓰고 있다. 소품은 다툼말 ‘배달’과정을 해학적으로 보여주어 시청자들의 폭소를 자아냄과 동시에 가정의 파탄은 금물이며 행복한 가정을 지키는 것만이 조화사회 건설에 유리하다는 도리를 알려주고 있다. 소품 〈동네딸>은 병환으로 앓고 있는 마을 로인들을 친부모처럼 극진히 보살펴드리는 동네 한 중년아줌마의 아름다운 소행을 통해 서로 나누며 사는 마을의 인정세태를 보여주면서 우리 민족 효도문화의 신성함을 구가하고 있다. 음악소품〈서시장>의 프로특색도 새롭다. 가수들이 개혁개방의 산물이며 조선족 개화의 상징지인 새롭게 확장건설된 서시장을 돌아보면서 부른 6수의 노래는 너무나도 흥겹고 감명적이다. 가사 그대로 서시장은‘궁궐'이며‘만물상'이며‘민족의 기상'이며‘민족의 맛과 멋'이기도 하다.“순대 사세요!” 라고 웨치는 순대장사군아줌마들의 정다운 사구려소리는 가수들의 구성진 노래소리와 함께 한데 어울리면서 서시장을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풍경선으로 떠올린다. 총적으로 올해의 연변라지오TV방송국 음력설야회는 대중문화특색이 짙은 몇개의 골간 프로가 있었기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문예야회에는 흐트러진 가치요구와 저급적 취미의 문화적 성향이 자취를 감추었기에 프로 또한 생신하고 건전했다. 보통백성생활을 반영한 대중문화제품의 추구와 창출은 어디까지나 영상매체의 영원한 주제이며 미래방향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대중문화제품 창출에 게을리한다면 프로자체가 깡깡 마른 나무가지 신세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연변라지오TV방송국에서 금후에도 시청자들이 즐기는 보다 훌륭한 대중문화제품을 더욱 많이 창출하여 우리의 문화생태화원을 조화롭게 아름답게 꽃피우길 바라는 바이다.
38    학생전문용 스마트폰 만들면 어떨가?(박경화) 댓글:  조회:1445  추천:0  2019-02-12
시대가 발전하면서 개발한 제품들은 우리의 생활에 편리와 유익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도 있다. 그러나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글가고 부작용이 두려워 발전을 멈춰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부작용을 극복해나가기 위한 방향이나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오늘날 미성년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 바로 ‘부작용’이라는 위기에 처해있다. 게임중독, 시력저하… ‘팝콘 브레인’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스마트폰은 단순한 통신수단 이상으로 우리 아이들의 성장에 극도의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한결같이 스마트폰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 인터넷은 대중을 향한 창구로서 미성년자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헌데 이 창구는 사람을 식별하지 않기 때문에 미성년자들이 어느 순간에 어떤 형식으로 불량정보의 피해를 받게 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수단의 필요와 스마트폰을 열광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을 아이들에게 사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되여버렸다. 이 시점에서 해당 전문가들과 교육관리부문에서 스마트폰이 미성년들에게 주는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한 개발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회가 미성년자들에 대한 무책임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는 강요보다도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이 더 자유롭게 더 옳바르게 사회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해주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대중을 향한 창구가 아닌 학생들만을 위한 창구인 학생전문용 스마트폰을 상상해보게 된다. 학생의 신분으로만 살 수 있는 학생전문용 스마트폰, 구별된 게시물만 검색이 된다. 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는 뉴스들을 ‘메인화’함으로써 아이들이 뉴스를 통하여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며 더욱 큰 동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학생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공간의 스마트폰 말이다. 게임도 재미 있게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람으로 만든다. 례를 들면 때리고 죽이고 무기를 휘두르며 상대를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도와주고 격려해줄 때 점수를 따는 게임, 인성교육과 함께 하며 또한 실제적으로 언어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레벨을 올릴 수 없는 언어 실력에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취침시간에는 자동으로 오락 화면이 꺼지도록 해 아이들이 충분한 수면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용 스마트폰은 훌륭한 통신도구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삶을 열애하며 안전, 건강, 례절 등 사회생활을 배워가는 데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미성년자들의 필요에 반응하여 부작용들을 극소화하며 교육, 성장에 도움이 되는 학생용 스마트폰을 연구, 개발해야 한다. 어른이 아닌데 어른들을 상대로 하는 검색 창 앞에 우리 아이들을 세워놓는 것은 너무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대 사회를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이들에게 위험한 칼 같은 무기를 경솔하게 주면서 그 도전을 즐겨 지켜보는 것과 같다. 한겹으로 된 줄은 인츰 끊어지지만 세겹으로 된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드넓은 현실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을 옳바른 교육으로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교육분야와 가정, 사회가 세겹의 줄처럼 되여 아이들의 교육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우리가 심은 쓴 열매를 우리 스스로가 주어먹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건강하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주어야 아이들도 성장하여 우리에게 더 넓고 밝으며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오늘도 아이들을 스마트폰에서 구해줄 ‘구세주’같은 개발자의 출현을 기대한다. 길림신문                                                                               
37    새해 첫 기사(궁금이) 댓글:  조회:1607  추천:0  2019-01-07
새해의 첫 수요일 첫 기사는 무엇을 쓸가 지난해 말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러다가 제일 소박한게 제일 진실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그래서 저렇게 제목도 멋대가리 없이 달았다. 올해는 60년만에 한번 돌아오는 황금돼지해란다. 사람들은 해마다 다른 동물이 등장하건만 그때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상서로운 한해를 열어간다. 전에 사람들은 음식을 많이 먹어도, 살이 쪄도, 욕심이 과해도, 심술이 많아도, 게을러도...다 돼지에다 갖다 붙였다. 그렇게 돼지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붙어다녔던 대명사들이 올 황금돼지해에는, 적어도 일년동안만은 그 루명에서 벗어날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허점을 동물에 의인화해서 밀어버리려는 묘한 심리를 갖고있다. 그래서 그런지 믿든 말든 늑대도 원래부터 늑대가 아니라 사람과 같이 살면서부터 늑대가 돼버렸단다. 이제 황금돼지를 계기로 만물의 령장이라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겸손한 2019년, 상생의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 하물며 당뇨치료제인 인슐린도 돼지의 췌장에서 채취한단다. 돼지도 인류의 소중한 길동무다. 적어도 올 한해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자. 시골에서는 새해에 새옷을 입을수 있다는게 큰 기대거리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나이 한살 먹는 날로 또는 그냥 어느 한주의 수요일로 되여버렸다고 생각하니 그때가 더 그리워진다. 시골에서는 설이면 외지의 친척들도 모여들어 사람이 많아지는 반면 이곳 도시는 길거리에 차도 훨씬 줄고 한산하기만 하다. 전에 이날은 폭죽을 터칠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처럼 무기급의 폭죽은 아니였어도 설분위기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설이면 마을 집집마다의 마당에서는 따당 따당 하고 새해를 알리는 폭죽소리가 청아하게 울려퍼졌다. 엄마가 해주는 새옷을 입었으니 괜히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자랑도 해야 한다. 새옷을 입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못 알아봐 줘도 무지 섭섭한 일이다. 그런 심리를 알기라도 하듯 어른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반응하면서 “새옷을 입었구나”며 머리도 쓰다듬어 준다. 지금은 나이 먹는게 싫지만 그때는 이제 또 한살이 올라가게 되였다고 좋아했다. 빨리 어른이 되는게 소망이였던 시절이다. 어른이 되면 무슨 일이나 허가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할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어른도 큰 어른이 되고 보니 그때 부모님들이 쉽지 않았다는 생각을 갈수록 절감하게 된다. 물질이 충족하지 못했던 시절에 내 배가 곯더라도 자식 뒤바라지는 전혀 게을리 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의 희생정신에 머리가 숙여지게 된다.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를 시킨다는 말이 괜히 생겨난게 아니라는 생각도 그냥 격언으로서가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 이날이면 아침상부터 떡은 필수고 집에 있는 마른 고사리며 여름에 비축해두었던 온갖 식자재들이 전부 동원되여 밥상을 가득 메운다. 아침상을 물릴 때쯤 되면 동네 애주가 어른들이 한명 두명 술동냥에 나선다. 친구가 그러는데 그 마을에서는 아침부터 애주가들이 어느 집에서 먼저 연기가 나오나 살폈다가 정확하게 목표물을 포착하여 “습격”한단다. 새해 인사를 한다고 문을 떼고 들어서면 시골 인심에서 그냥 인사만 받고 보낼 집은 없다. 저마다 어서 올라오라며 구들로 이끈다. 그래서 시작되는 술상은 정오를 넘겨 오후까지 이어진다. 시골의 설이란게 별거 없다. 그냥 한자리에 많이 모여 오래 마시고 이야기꽃을 피워가면 그게 최고의 설이다. 크면서 설은 년하장을 주고받는게 또 빼놓을수 없는 식순이였다. 어떻게 하나 설을 맞추어 받게 하거나 혹은 설전에 받아보도록 하기 위해 전해 년말부터 바쁘다. 글자를 못쓰기로 둘째 가라면 섭섭할 나도 년하장에만은 전혀 망설임이 없이 펜을 날렸다. 누구한테 년하장이 더 많이 오는가도 은근히 경쟁이였다. 그래서 축복도 축복이겠지만 보내야 받을수 있기 때문에 받기 위한 보냄도 있었다. 그게 뭐라고 허영심이 발동했던지 모르겠다. 결국에는 쌓아뒀다가는 다 버려야 한다. 그 뒤로는 통신이 편리해지면서 전화 문안으로 바뀌여 갔다. 아침에 깨면 가까운 친척과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는게 업이였다. 그만큼 집전화기는 끈끈한 정을 이어가는 매개체로서의 대체할수 없는 역할로 한시대를 풍미했다. 조카 결혼식 참석차로 사촌형님 집에 다녀왔는데 지금도 음식 주문을 휴대폰이 아닌 집전화로 시키는걸 보게 되였다. 그게 그 세대가 집전화기에 배인 생활습관이고 애착이다. 료금제를 하는 시대에 휴대전화를 실컷 해도 료금이 넘어날리는 없다. 비용문제가 아닌 습관문제고 애정이 담긴 통신수단으로서의 내사랑 집전화기인거다. 어제는 계약 기한이 차서 인터넷 사용료를 내러 통신사에 갔더니 료금제로 2년을 계약하면 집전화는 그냥 무료로 사용한단다. 추억의 집전화는 휴대폰에 밀려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있어봤자 그냥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는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휴대전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설인사는 음성 통화보다 문자 메세지가 더 많아졌다. 전에 없었던 기능인 단체문자 발송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굳이 일일이 전화를 돌릴 필요가 없이 통용하는 축복문자를 몇줄 써서 보내고 싶은 이름을 한꺼번에 체크해 무더기로 보내버리면 인사가 완성된다. 많은 문자는 내가 굳이 고안해서 쓸 필요조차 없다. 다른데서 복사해 오는 지름길도 사통오달하다. 그러다보니 내가 보냈던 사람한테 한번 더 중복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고 자기가 먼저 보내놓고는 답장하는 사람이 먼저 보내왔는가 해서 또 한번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휴대폰 문자메시지 시절에는 건당 10전이라는 성의라도 보일수 있었는데 어느날 위챗시대가 도래했다. 위챗은 원래의 모든 문자 기능을 이어받음은 물론 이모티콘에다 무료 음성메시지, 무료 화상통화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해외 어느 곳에서도 무료 소통이 가능해졌다. 직접 전화를 할 일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거다. “위챗에 얽매여 사는 시대에 이 위챗을 막 그저 확 어쨌으면 좋을지. 바로 옆 사무실에 있건만, 내선 전화가 코앞에 있건만 문자로 통보식 청가메세지 하나 딸랑 남기고 대답이 있든 없든 제 갈 길은 무조건 달려가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지난해 12월 27일자 위챗 “위챗문자의 성의”에 달린 대글이다. 통보식으로 문자만 날리고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가버리는건 바람직한 직장생활 자세가 아닌건 분명하다. 그리고 선배로서 더우기 상사로서는 이런 경우를 만나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닌 것도 당연지사다. 그리고 통신수단이 어떻게 발달하든 직접 찾아서 할 일, 전화로 할 일, 문자로 할 일이 따로 있다. 대학교 교수로 있는 친구가 그러는데 요즘 학생들은 기숙사 1층 침대에서 2층 침대에다 대고 문자를 보낸단다. 무슨 첩보영화도 아니고 그냥 말하면 되는데 그 방식이 더 편한가 보다. 그런데 역지사지로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대 이 환경에서 그렇게 자란 세대라 무작정 나무랄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와는 다를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리해하려 하고 서로의 교감 방식을 개선하여 거리를 좁혀가다 보면 접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 싶다. 그냥 그렇게 하면 좋지 않을가 라는 생각이지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자신은 없다. 통신 수단은 갈수록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소통은 그에 걸맞는 속도로 원활하지 못한 시대에 살고있다. 올해 3월경에는 5G 휴대폰도 등장한다는데 과연 소통의 속도도 가속화시킬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새해 첫 기사에서 일방통행식 소통얘기를 했는데 올해에는 와이파이 신호가 아닌 옛날 시골에서 굴뚝의 연기를 찾아서 마실을 다녔던, 내집 너집 따로 없는 그런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의 교류가 많았으면 좋겠다. 또 기계나 현대기술에 의한 무음식 소통이 아닌 얼굴과 얼굴을 맞댄 근거리의 친밀한 전통 “입말식” 소통을 더 해 갔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손을 놀리는 교신보다는 입을 여는 소통의 한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새해 첫 수요일에 가져본다. 2019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중국조선어방송넷/작성자: 궁금이  
36    너 자신을 알라? -내가 만난 소크라테스(김성일) 댓글:  조회:1646  추천:0  2018-11-29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철학을 배웠든지 배우지 않았든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철학의 시조", "너 자신을 알라", "반성해 보지 않은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추남이었고 부인은 악처였다. 이런 정도로 알려져 있다.   철학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도 정작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으면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비교적 정교하고 완벽한 사상의 체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상을 누군가에게 가르친 적도 문자로 기록한 적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로 기록된 사상은 지혜를 속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보면 아테네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를 고소한 죄명중의 하나가 아테네의 청년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오도했다는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묻는다. "내가 청년들에게 어떤 주장을 가르쳤는지 지적하세요. 나는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했지 누군가에게 답을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했지 철학의 내용을 가르치지 않았다. 추론적으로 보편적인 진리를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가르치지 않고 "무엇은 무엇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만 했을 뿐이다. 그것이 이른바 "산파술"이다. 생각의 주체인 각자 자신이 사색하고 반성하고 추론하게 도와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시조이다. 서양의 사상은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러나 시스템화 된 가르침은 없다. 무가 유로 된 것이다. 가르침이 없지만 모든 사상의 출현이 가능케 했다. 인간의 지혜의 출현과 발전이 가능케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쓰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일본인들이 서양문화를 접하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어원적으로 찾아보면, 철학은 philosophy, 헬라어로 Φιλοσοφία다. Φιλο와 σοφία의 합성어이다. Φιλο(필로)는 사랑이고 σοφία(소피아)는 지혜이다.   철학이란 곧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지혜가 있는 자가 아니고 자신의 무지를 알고 지혜를 갈망하는 자이다. 그것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주장하면서 자기가 아는 것은 딱 하나인데 그것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출처가 다른 곳에 있다.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문구이다. 델포이의 신전은 당시 신탁으로 가장 유명했던 곳이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을 내렸던 신전이기도 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 7현인의 한 사람인 탈레스가 쓴 것이라고 하였지만, 같은 7현인의 한 사람인 스파르타의 킬론이 한 말이라고도 하고, 다른 현자의 말이라고도 하여 정론이 나있지 않다.   그런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 둔갑한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의 출발점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성하지 않은 인생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무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에 대한 반성과 사색 고민을 하지 않은 이는 자아를 상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교 선종(禅宗)의 인지의 가르침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见山是山,见水是水)"이고, 둘째 단계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见山不是山,见水不是水)"이며, 셋째 단계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见山还是山,见水还是水)"이다.   첫 단계에서 둘째단계로의 발전은 기존의 표면적, 직관적인 인지에서 내면적 본질에 대한 인지로의 발전이고 둘째 단계에서 셋째 단계로의 발전은 내면적 본질에 대한 종합적인 사색을 통한 보편성에 대한 인지로의 발전이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인지도 물질적인 표면에 머물러 있지 않다. 더 발전시키면 소크라테스의 영혼과 육체, 영혼불멸의 사상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시조로 추대 받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알고 있던 기존 개념과 지식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대한 끊임 없는 회의와 질문. 기존의 것을 꼭 반대하는 것 이 목적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 사색과 반성과 질문을 거치면 사상에는 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시조가 되었고 또 이런 가르침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시대에 어떤 문화속에서 살았든지 기성세대로부터는 미움을 받았을 만한 존재이다. 왜? 기존의 관념에 질의하고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는 일을 했다. 그것도 잘못됨을 직접 지적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에 대해 부정하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자신의 기존 관념을 부정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무지를 승인하는 것이니까.   청년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기성세대에게는 진리보다 자신의 체면, 이익 이런 것들이 옳고 그름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분노하고 감사 대신 악의를 품게 된다. 그것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의 추앙을 받았고 기성세대 특히 기득권자들로부터는 기시와 질투, 그리고 미움을 받게 되었다.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결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미움 때문이다. 그릇됨을 드러나게 해서 죽일만큼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怀疑)와 질문이다.  흑룡강신문
35    (신화시평) 전쟁에는 전쟁으로 맞설 수 밖에 없다 댓글:  조회:1590  추천:0  2018-06-19
[신화망 베이징 6월 19일] (류제(劉劼), 위자신(于佳欣) 기자) 미국 정부가 50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추가 관세 목록을 발표한 지 6시간 만에 중국 정부는 즉각 효력 발생 시간이 미국과 같은 동등한 규모와 강도의 반격 조치를 발표했다. 중미 협상으로 조성된 평화 분위기가 아직 채 가시기도 전에 미국은 어렵사리 이룬 합의를 공공연히 저버리며 변화무쌍한 ‘쓰촨극 변검’ 놀이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똑 같은 방법으로 응수해야 한다. 5월에 있었던 워싱턴 논의에서 양측은 무역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6월 초 협상에서 양측은 양국이 워싱턴에서 논의한 합의 이행에 대해 농업, 에너지 등 여러 분야에서 원만한 소통을 가져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논의의 성과를 지키는 관건은 양국이 무역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를 엄수해 차분하게 서로 마주보며 걸어가는 데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미 양국의 합의를 저버린 채 지난 15일 5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 목록을 발표했다. 3개월 가까이 이어온 중미 통상 마찰은 또 한 번 미국의 ‘계약 위반’에 의해 전쟁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이랬다 저랬다 하는 행보와 무역전쟁 도발, 양자의 이익을 훼손하고 세계 무역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직면해 중국은 못 본 척 할 수가 없다. 중국은 무역전쟁을 하고 싶지 않지만 미국의 타국에 손해를 끼치고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은 근시안적인 행위에 맞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강한 반격에 나서 국가의 이익과 인민의 이익을 결연히 수호해야 하고 경제 글로벌화와 다자주의 무역체제를 수호해야 한다. 미국은 만일 중국이 보복조치를 취한다면 또 추가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위협 논리에 마주해 중국은 뒷걸음치지 않을 것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은 차후 조치에 대한 준비를 이미 완전히 마친 상태다. 현시대에 무역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낙후하며 저효율적인 행위다. 거듭된 일방주의, 보호주의 행동은 무역규칙을 파괴한다. 미국의 현재 무역정책은 이미 폭넓은 반감을 일으켜 미국의 동맹국들조차도 이에 강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미국 독자행보’로 변했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미국이 과연 일방주의, 보호주의에 수반될 거대한 대가를 혼자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강경한 반격, 이전지전(以戰止戰: 전쟁으로 전쟁을 막음)은 호전국에 대처하는 최상의 선택이다. 만약 미국이 계속해서 자의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해 양국 국민의 장기적인 이익을 훼손한다면 중국은 반드시 계속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응수할 것이다. 몇 차례의 교섭을 통해 미국은 중국이 미국의 약속 불확실성에 대해, 그리고 양국 통상마찰의 장기화에 대해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문 출처:신화사
34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다(천숙) 댓글:  조회:2547  추천:3  2018-06-13
    (흑룡강신문=하얼빈)새 학기가 시작되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반장, 회장선거로 들끓는다. 마치도 지방선거처럼, 학생들은 저마다 포스터도 만들고 자신이 반장, 회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반장, 회장이 된다면 어떻게 잘하겠다고 선언을 한다. 나는 한국의 그런 교육환경을 지켜보면서 역시 교육이 발전한 나라는 뭐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어려서부터 리더십을 키워주고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하는 상식과 교양을 갖추게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반장, 회장결과가 발표된 날, 한 중1학생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중1학생의 엄마가 반장에 도전해보라고 하는 얘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중1학생은 그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친구가 돈을 건네주면서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말고 자기를 밀어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학기에 그쪽 학생이 이 학생을 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음번 회장선거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드디어 새 학기가 되었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랐다. 지난번 밀어 주던 학생이 이번에 회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자기도 돈을 조금 썼다며 대견한 듯이 웃으며 얘기한다.   중1에서 벌써 이런 수단으로 선거운동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도 있지만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는 것도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했다.   선거운동 때마다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일복장을 입고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며, 아무 것도 모르고 돈을 받고 선거운동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들, 선거를 위해 평시에 안하던 봉사 쇼를 하는 일부 정치인들 ... 이런 모습들은 아이들에게 일종 무언의 교육으로 된 것이다.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요즘 한국의 교육은 더욱 경쟁력이 심하다. 학생들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라고 한다. 자신은 왜 그 것이 꿈인지도 모르고 부모에게 떠밀려 꿈을 키워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탐욕이란 참으로 끔직스럽다. 그러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살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한국 GDP는 세계에서 1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살율 1위, 이혼율 1위, 행복지수가 꼴찌라고 한다. 왜서일까? 인문학적 교육보다는 돈이 최고인 천민자본주의를 더 많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개성 소유자’이다. 그래서 능력도 다 다르다. 똑 같은 나무이파리가 하나도 없듯이. 신은 인간을 만들 때 다른 개성을 가지고 그 나름의 몫의 일을 하고 이 세상을 살고 가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그 개성과 특성을 말살하고 ‘너는 이렇게 돼야 돼’ 하고 강압하고 강요하고 속박하기 때문에 그 교육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서 표현된다.   한국의 사교육비는 년 간 20조라고 한다.   판사되고 검사되고 변호사 되면 무엇 하랴? 기본이 안 돼 있는데. 설상 그 꿈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내면의 모습은 딴 판일 것이다.   나는 한국의 부자동네라고 불리는 강남일대에서 이런 저런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한다, 주제 넘는 생각일지라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인문학강의 프로그램이 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직장만을 얻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 하는 인생관을 심어 주어야 하며, 어른들이 아이들의 훌륭한 거울이 되어 실천에 옮기는 것이 이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행복의 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33    [두만강칼럼] 우리들의 ‘날개’(김혁) 댓글:  조회:1625  추천:0  2018-06-06
      김 혁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일전 매달의 첫주에 한복을 입는 ‘고운 날’이라는 우미한 이름의 동아리가 발족되였다. 그 귀맛 좋은 소식을 접하고 몇해전 ‘갓 마흔에 첫 버선’으로 내 생애 처음으로 한복을 맞추어입었던 때를 떠올렸다. 제9차 전국작가대표대회 대표로 선정되여 여러 민족 작가들이 운집한 성회에 참가하면서 처음 민족복장을 맞추어입은 것이다. 은은한 광택이 돋보이는 옥색 저고리 우에 감색 마고자를 받쳐입고 헌활하게 통이 트인 바지를 떨쳐입으니 마음은 싱그럽고 발길도 가벼워 건들건들 걸으니 자신감이 그윽했다. “문화적 자신감을 갖는 것은 국운의 흥망성쇠와 관련되며 문화의 안전, 민족정신의 독립성에 관련되는 큰 문제이다.” 그번 회의에서 회자된 ‘문화자신감’에 대해 환기하며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 복식에 대한 생각 한자락을 머금어보았었다. 우리 민족의 멋과 얼이 담긴 옷 한복은 음악 〈아리랑〉, 〈도라지〉나 음식 김치, 랭면 등에 이어 우리들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전통 요소이다. 단아하고 아취가 있는 한복은 여유로움과 여백의 미, 인체를 속박하지 않는 넉넉함, 착용의 편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입는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옷, 그래서 한복에 과학적이고 기능적이라는 찬사가 나온다. 남들의 눈에 이렇게 품격 높게 정평되여있는데 우리 민족 문화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한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와 동떨어져있다. 한복은 원체 우리의 선조들이 일상적으로 입던 옷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한복을 잘 입지 않는다. 아이들 돌생일이거나 결혼식 때 그리고 회갑잔치 때나 딱 한번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랜 력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은 타민족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문화가 많았고 이를 보존하며 나아가 승계시키는 노력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를 감안하면 우리 고유의 정신과 혼이 담긴 한복을 우리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동안 무심히 구석 쪽에 방치해두지 않았던지 스스로 자문해보게 된다. 며칠전 조선족복장 제작공예대상이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첫 국가 전통공예진흥목록에 입선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국적으로 복장, 도자기공예, 문방 제작, 인쇄 표구, 식품 제작 등 14가지 종류에서 383개 전통공예대상이 입선되였는데 일정한 전승토대와 지방 브랜드를 형성하는 데 유조한 대상을 선정, 또한 민족지역, 변강지역에서 지방경제발전을 이끌고 취업을 확대할 수 있는 대상중에 조선족 복장이 입선된 것이다. 이는 조선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전승 발전시키고 민족전통공예의 브랜드를 육성하고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추동역할을 놀게 될 것으로 기대감을 부풀게 한다. 말이나 음식, 의복 등은 해당 집단의 모습과 문화를 담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복은 단순한 생필품이라는 의복의 의미를 넘어 우리 민족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서린 옷이기 때문이다. 한복을 입는 것은 그저 무심코 옷 한벌을 입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 정신을 입고 그 무늬를 걸치는 것이다. 한복에는 우리의 선조가 겪어온 백년의 력사가 고스란히 누벼져있다. 그 옷을 소중히 껴입는 과정에 우리의 선조들이 겪어온 멀고 가까운 날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그 문화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한복이 무대 우 배우들의 공연처럼 몇몇 직종, 몇몇 공중인물들의 전유물에 그쳐선 안된다. 불편하고 고리타분하다는 그릇된 고정관념부터 버리고 이제 아름다운 우리 한복 입기를 민족의 정체성을 지양하는 자세로 간주해야 할 때다. 명절잔치는 물론 민족의 타이틀을 띤 주요업체의 중요 년중행사 등에서 한복을 입는 사람이 늘어나게 하는 데로부터 시작해 활성화하도록 이끄는 전략이 요구된다. 문화적 자신감을 안고 한복을 제대로 알고 입는 것만으로도 우리 민족 문화의 품격과 가치가 한층 더 올라가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화시각과 목록은 시시때때로 변화한다. 청바지와 미니스커트, 핫팬츠 등 다양한 복색모드가 공존하고 있는 마당에서도 한복문화는 전통과 일상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복식이 전국적인 대상에 입선되였다고 자랑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실생활에서 얼마만큼 전승 발전에 노력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일 때라고 본다. 우리 속담에 ‘옷이 날개’ 라는 말이 있다. 모두가 우리의 무늬가 있는 옷을 떨쳐입고 벅찬 나래짓으로 우리의 공동체를 아름다운 색조로 물들일 ‘고운 날’을 그려본다.  길림신문 /김 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32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현청화) 댓글:  조회:1573  추천:0  2018-06-01
춘추시기 정백(鄭伯)의 한 사람 가운데 정장공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정장공의 이름은 오생(寤生)으로서, 그 어머니 인강씨가 잠결에 낳았다고 지은 이름이였다.   강씨는 잠결에 아기를 낳은 것이 불길하다고 느껴져 줄곧 오생을 꺼렸다. 오생의 동생으로 태숙단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강씨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강씨는 총명한 태숙단으로 하여금 정백의 뒤를 있게 하고 싶었으나 그의 제의는 장유질서를 깊이 알고 있는 정무공에게 건납되지 않았다.   정무공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장공은 주평왕(周平王)의 좌경사(左卿士)가 되여 조정을 장악했다. 일찌기 왕명을 빌어 송(宋)나라를 정벌했고 제나라, 로나라와 련합해서 송나라, 위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확장에 주력했다.   한편, 강씨는 그런 정장공으로 하여금 태숙단에게 두번째로 큰 경성을 떼주게 했다. 정장공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자 대신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태숙은 주공의 동생이십니다. 주공이 위를 이으면 태숙은 멀리 떨어진 작은 도읍을 떼여주어 살아가게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태숙에게 나라에서 경성을 떼준다는 것은 화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어머님이 그리 분부하셨는데 어떻게 어긴단 말이요.”   정장공은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경성을 받은 태숙단은 비밀리에 강씨의 명을 받들어 사냥을 핑게로 군사훈련에 열중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이웃마을들을 무력으로 쳐서 빼앗아 땅을 넓혔다. 땅을 빼앗긴 관장들이 이를 고하자 정장공은 잠잠히 아무 말도 없었다.   공자여가 정장공을 찾아가자 정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이미 대책을 세웠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지금 군사를 일으킨즉 모친이 반대하려니와 모든 사람들의 입에도 오를 것이다. 차라리 단의 잘못을 길러 그가 반역하기를 기다려 그 죄를 묻는다면 모친의 입도 막고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알 것이다.”   결국 태숙단은 시기를 엿보아 강씨와 내응하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미리 준비가 있은 정장공의 방비로 크게 실패하고 낡은 공성으로 쫓겨갔다가 정장공이 공성을 함락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제손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파생된 전고(典故)는 여러가지가 있다.   바로 ‘불의를 저질러 화를 자처하다’,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는다.’ 등이다.   정장공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린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정장공은 정치적으로는 큰 업적을 이루었으나 태숙단의 내란을 키워 진압하는 과정에 국력소비가 엄청나서 패권을 잡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제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 강씨에게 한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는 대신 영고숙의 지혜를 채택하여 후세 사람들의 질책과 비난을 다소나마 줄이긴 했지만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자기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서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성에까지 허위와 가식의 수단을 아끼지 않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고금중외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 것은 과연 정장공 한 사람 뿐이였을가.   돈을 빌리기 좋아하는 지인이 있었다. 그 지인은 처음엔 소액으로 돈을 빌리다가 후에는 점점 그 액수가 커졌다. 소액으로 돈을 빌릴 때는 친구 사이 그 정도 돈도 안 빌려주겠냐 싶어서 거절을 하지 못했다. 후에 금액이 커졌을 때에는 줄곧 빌려주다가 갑자기 끊어낼 수 없어서 역시 거절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 지인은 마지막 한번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빌려간 후 련락을 두절했다. 일년 후 다시 어렵사리 련락이 되였지만 그는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련락이 두절된 일에 대해서는 다만 개인사정으로 외부와의 련락을 단절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련락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혹은 돈을 빌려가는 차수가 잦아졌을 때 따끔하게 충고를 주었더라면 친구를 잃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가. 물론 그 친구와는 다른 일로 버성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친구의 잘못을 키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비슷한 례로 번역을 가끔 부탁하는 학교 선배가 있었다. 처음엔 간단한 단어를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후에는 문구, 단락, 지어는 꽤 긴 문장에 이르렀다. 나중에 몇페지나 되는 문서파일을 보내오면서 언제까지 번역해서 넘겨달라는 부탁까지 곁들였을 때에는 이미 그 빈번함이 도를 넘어서 내 생활에 퍼그나 영향을 주는 정도였다.   나는 몇번이나 거절하려고 했으나 딱히 거절의 리유를 찾지 못하여 한번, 또 한번 선배를 대신해 번역을 해야 했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부탁해온 사람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그 재간이 없다라는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은 경험이였다. 후에 나는 기한을 미루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의 태도를 표했으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득달같이 재촉을 당하고 끝내는 짜증을 내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선배가 나와 련락을 중단했다.   나는 두번의 경험에서 거절에 약한 내 성격이 쉽게 타인에게 뭔가를 권하거나 부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길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권유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걸로 오해받을가 념려했지만 결국 나중엔 감당하지 못할 청을 무리하게 들어주어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그에 관한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명료한 립장을 취해주는편이 더 나은 거라고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지 않고 잘못이 커지기 전에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방법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있을가.   첫번째는 거절을 자주 련습해야 한다. 거절은 나쁜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우선은 사소한 부탁이라도 사양하고 금지시키는 방법을 쓰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로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자잘한 부탁을 자주 하는 사람중에는 리기적이고 배려심이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인간관계는 내 삶의 긍정적 에너지와 시간적 여유를 갉아먹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기 때문에 과감히 버릴 수도 있으며 그 관계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정작 마음을 넓게 포용해야 하는 때에 이르러 감정적인 기질을 발휘하는 모순적인 성격을 버려야 한다. 상대방이 부탁을 해올 때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제때에 불편한 감수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련민이 지나쳐 도와줌으로써 상대방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착각을 주면서 속으로 그 상대방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면 애초에 돕지 않는편이 낫다. 평소에는 심성이 너그러운 척 습관적으로 수용하다가 한계에 이르러 갑자기 화를 내면 상대방의 립장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돌발상황이라 분명 억울한 느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상대방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하고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소중히 생각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첫 이야기에서 정장공은 태숙단에 대해 진정 혈육의 정으로 대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돈을 빌려간 지인, 번역을 부탁한 선배와의 관계를 진정한 우정으로 대했던 걸가. 그리고 그 우정에 걸맞게 최선을 다한 충고를 건넨 적이 있던가.   춘추의 오패에서 유감으로 사라진 정장공의 진심이 무엇이였든간에, 그가 남긴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는’방법이 후세에 이렇게 화자되여 인간관계의 시금석으로 쓰일 줄은 아마 정장공 본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의 존재가 불안해지자 제거할 명분을 얻기 위해 계략을 써서 천하를 속이고 후세에 골육상잔의 례를 남긴 정장공의 졸렬함이 결국 그를 춘추 오패의 자리에서 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졸렬하게도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고 쓴소리를 하는 친구를 멀리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친구의 잘못에 대해 함구하다가 그 잘못이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하면 우정마저 버리지 않았던가.   ‘잘못을 길러 그 죄를 묻다’, 진정한 우정은 어떤 방식으로 영위해가야 하는지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솔함, 성실함 뿐만 아니라 옳바른 처세술도 한몫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살면서 나는 누구의 잘못을 길러준 사람이였을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잘못이 길러져있는 사람일가… 많은 사색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연변일보 2018.6.1
31    코치형 리더(박유찬) 댓글:  조회:1328  추천:0  2018-05-28
조직을 능률적으로 이끄는데 전에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때가 있었으나 최근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관리보다는 리더십이다. 리더와 관리자는 위치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가는 점에서는 류사하지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관리자는 대체로 안정과 능률, 절차와 통제 등을 중시하는 데 비해 리더는 변화와 도전, 비전과 창의 등을 중시한다. 관리자는 시스템과 구조에 초점을 맞추지만, 리더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주어진 일이 구성원에게 의미하는 바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동의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한다. 조직에 부여된 목표 달성을 효과적으로 제고하기 위해서는 관리능력보다는 리더로서의 능력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관리자보다 리더의 역할이 더욱 요구된다면 이제 다음에는 과연 어떤 형태의 리더십이 보다 효과적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전통적인 리더 스타일은 지시하고 통제하는 형이였다. 지시의 매력은 신속하고 편리하며 리더에게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조직원들은 지시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불만이 쌓이고, 이러다보니 업무에 대한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지시형에서 조금 발전된 것이 설득형이다. 이 리더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조직원들에게 설득한다. 이 방법은 지시형보다는 조금 더 민주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결국 일의 추진 방향은 리더가 원하는 대로 실행하게 된다. 이에 반해 코치형 리더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리더와 조직원과의 코칭적 경청과 질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먼저 조직원은 질문을 받음으로써 업무에 대해 생각하는 힘을 키우게 된다. 자신이 맡은 일에 요구되는 다양한 측면을 파악하고, 자신의 책임하에 업무 진행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리더는 부하직원으로부터 코칭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음으로써 조직원의 업무 실행 계획 뿐만 아니라 그 의도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코치형 리더는 지시를 내릴 때 보다 업무와 관련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직원에 대한 상황 통제력도 높아진다.   코치형 리더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장면을 한번 그려보는 것이 리해가 쉽게 될 것이다. 팀원에게 업무를 지시한 지 시일이 꽤 지났는데, 업무진척이 지지부진하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코치형 팀장은 다음과 같이 접근할 것이다. 먼저 현실파악을 위해‘지금까지 업무가 얼마나 진행되였는지?’에 대해 묻는다. 이에 대한 답변을 충분히 들은 다음, “무엇때문에 업무진척이 이렇게 더딘지?” 또는“장애요인은 무엇인지?”등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팀원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게 한다. 그 분석에 대해 인정되면 공감해주고, 생각이 다를 때는 서슴지 않고 의견을 말한다. 그 다음에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는“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여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한다. 이와 더불어 “그것을 진행하는데 팀장인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라면서 팀원에게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을 덤으로 표현한다면 상하간의 관계개선은 물론 팀원의 업무의욕도 크게 높아질 것이다. 끝으로“언제까지 이 일이 완성되겠는지?”질문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업무 시한을 정하게 되여 책임감을 가지고 수행하게 될 것이다. 물론 현실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여 우에서 례를 든 것처럼 정형화된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큰 틀을 마음에 가지고 코치형 리더십을 발휘해나간다면 일방적으로 업무를 지시하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책임 있는 업무수행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코치형 리더십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조직의 성과향상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경청과 질문을 통한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인해 상하간의 관계가 증진되고, 리더는 직원이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에 림함으로써 관리 감독이 줄어들어 더 중요한 일에 투자할 시간을 얻게 된다. 또 직원은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궁리해봄으로써 창의적인 자세로 업무에 림하게 된다. 코치형 리더십은 직장은 물론 직장 밖에서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행동방식이 될 수 있다. 가정과 개인 공동체 등에서 코치형 경청과 질문 방식을 활용하면 전보다 훨씬 유익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연변일보 
30    남과 북의 언어 차이(김하수) 댓글:  조회:1445  추천:1  2018-05-19
작성자: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흑룡강신문=하얼빈)남과 북의 만남이 있을 만하면 서로 언어가 달라졌을 텐데 어쩌나 하는 말들이 많아진다. 워낙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었으니 걱정을 겸해 하는 말들이다. 남측 사람들이 북측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좀 어색하거나 '티'가 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북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어느 방언 지역 출신이나 국외 동포들의 말에서 느끼는 약간의 어색함만 가지고 언어가 달라졌다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말한 사람의 특이한 말버릇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북에서 쓰는 말을 가지고는 유독 예민하게 무언가 '이질감'을 느낀다.   남측 사람들이 북측의 말에서 이질감을 강하게 느끼는 것은 일상 어휘가 아닌 사회정치적 표현들이다.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라든지, 예비군에 해당하는 '로농적위군'이라든지, 국방부와 같은 개념인 '인민무력부', 사회주의 농업 단위인 '협동농장' 등은 마치 완전히 딴 세상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려 생소하다.   반면에 일상어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옛날의 평안도 방언은 서울말과 차이가 많았지만 이미 20세기 초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중부 방언과 합류를 했기 때문에 '이질화'라는 말은 그리 적절치 않다. 그러나 종종 두메산골의 강한 사투리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1990년대 초 북의 한 인사가 남쪽의 기자에게 "집에 인간이 몇이오?"라고 물어서 "이북은 이제 유물론 사상에 젖어 가족도 인간이라 부른다"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유물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낯설어진 관계가 더 문제였을 뿐이다. 좀 더 자주 만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지난날의 '추억의 말실수'로 기억되는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한다.
29    ‘공급측’개혁, 그리고 연변은 지금(최명광) 댓글:  조회:1487  추천:0  2018-03-15
우리 나라는 2016년부터 ‘공급측’(供给侧)구조성 개혁을 실시했다.   주변의 일부 사람들은 ‘공급측’을 공급방(供给方)으로 오인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공급측’구조성 개혁은 하나의 경제 정책이다.   내용을 골자로 뽑는다면 다음과 같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과잉생산을 해소하는 것, 과감한 구조 조정을 통해 경제발전을 저애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파산, 청산 등 기업정책을 통해 ‘좀비기업’(僵尸企业)을 정지시키고 국유기업, 지방정부의 악성부채를 해소하는것, 그리고 저품질, 비능률적인 생산을 개선하고 첨단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전략이다.   공급측 경제학이란 수요를 중시하는 관점으로부터 생산성을 중시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데 우리 나라 ‘공급측’구조성 개혁의 개념을 한마디로 개괄한다면 ‘경제체질 개선, 강한 경쟁력 갖춘 새 산업 육성’이다.   2016년, 우리 나라 경제정책은 공급측 구조성 개혁을 비롯해 ‘13.5’전망계획에서 경제성장을 고속에서 중고속으로 낮추는 것을 의미하는 ‘뉴노멀(新常态)’정책과 ‘일대일로(一带一路), 아세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인터넷+, 중국제조 2025정책’을 펼쳤다. 지역 균형 발전과 첨단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혁신, 조화, 록색성장, 개방, 공유라는 새 발전 리념이다.   2017년, 우리 주가 전환승급 조치를 추진해 시장주체에 활력을 주입한 것이 ‘공급측’구조성 개혁에서 가장 돋보이는 개혁이였다.   276개에 달하는 행정직권을 취소, 하부이양 또는 증가, 조정했는데 전해에 비해 72개 항목이 줄었다. 이는 시장경제주체의 손발을 꽁꽁 묶었던 포승을 풀어 그들에게 재주를 맘껏 부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정부의 민간에 대한 간섭과 규제가 완화되면서 지난해 3분기까지 우리 주 민영기업수는 2만 3761개로 늘었고 영업수익은 2000억원을 넘기면서 지난해 동기 대비 각각 21%와 6% 넘게 늘었다. 민영경제 증가치는 348억원으로 이는 전 주 GDP의 53% 가까이에 달하는 수치이다.   ‘공급측’구조성 개혁에서 핵심키워드의 하나가 과잉생산능력 해소이다.   2017년, 우리 주는 가감승제를 병행추진하는 방침을 견지해 락후생산방법을 도태시키고 량질생산으로 공급측 효과성을 높이면서 생산이 시장수요와 변화에 더 가깝게 적응했다. 락후생산능력 도태에서 27만톤에 달하는 석탄재고를 해소하고 부동산 재고량 400여만평방메터중 93만평방메터나 해소했다.   세금인하를 통해 로동공급을 늘리는 정책을 펼쳐 령세기업, 고신기술기업, 서부대개발기업에 탕감해준 세금만 해도 근 2900만원에 달한다. 금융위험도 안전하게 해소했다. 지난해 8월까지 전 주 금융기구의 각항 저금여액은 1,618억여원에 달해 지난해 동기 대비 5% 가까이 성장했다.   공급중시 경제학자인 미국 하버드대학의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는 "공급 경제학에 따른 경제정책의 효과는 저축과 투자의 증가를 통한 실질소득의 증가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변제조’의 환골탈태는 우리 주 ‘공급측’ 구조성 개혁에서 저품질, 비능률적인 생산을 개선하고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13개 새 제품이 이미 성급 새 제품 감정에 통과되고 36개 새 제품이 길림성 100개 중대 새 제품 규모화 생산 계획에 들었다. 8개 기업의 기술쎈터가 성급 쎈터로 인정받아 우리 주 첨단산업 발전에 지적보장을 제공해주고 있다. ‘인터넷+’는 지금 전통산업과 미묘한 조합을 이루면서 광활한 발전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2018년, 우리 주는 ‘공급측’ 구조성 개혁의 초점을 ‘전역관광’에 맞췄다. 국가급 관광업 개혁창신 선행구인 우리 주에는 관광자원우세가 있다. 이런 우세를 살려 ‘관광+’행동을 가동했다. ‘관광+’슬로건을 내걸고 그 아래에 여섯개 타이틀을 맞췄다.   ‘관광+농업’으로 업종빈곤부축 새 모식을 시작, ‘관광+공업’으로 연변록색발전을 추동, ‘관광+봉사업’으로 봉사업차원 승격을 가속화, ‘관광+문화’로 문화관광 산업 토대를 다짐, ‘관광+림업’으로 생태자원을 관광자원으로 전환, ‘관광+대외개방’으로 동북아관광의 새 목적지 구축이다.   우리 주는 지금 "공급측"구조성 개혁에서 보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내달리고 있다.   웅대한 목표는 일조일석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향후 몇년,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희망을 갖고 목표를 향해 쉼없이 달린다면 연변은 동북아의 새로운 관광 목적지로 아세아 동방에서 진주로 반짝일 그날이 올 것이다. 연변일보 2018.3.14
28    보편적 호칭(김하수) 댓글:  조회:1408  추천:0  2018-03-02
    작성자: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흑룡강신문=하얼빈) 한 사회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서로 말을 거는 방식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뒤집어 말해서 서로 말을 거는 합의된 방식이 없다면 그 사회는 작동 불능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말을 걸기에 불편한 장치가 언어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편리하게 개조를 하거나 수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어를 사용할 때 몹시 불편한 것이 '호칭' 문제다. 특히 누구한테든지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보편적 호칭'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고위직이나 하위직이나, 남자나 여자나, 누구한테 붙여도 실례가 되지 않을 호칭이 우리에게는 딱히 없다. 이는 남에게 말을 걸 때마다 상당한 부담감을 느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우리가 현대에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언어 현대화'를 한 탓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호칭은 주로 가족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가족 관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관계' 혹은 '시민적 관계'에서는 적절한 호칭을 못 찾아 '저기요' 같은 말 혹은 그럴듯한 직위를 가리키는 말로 우회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가까스로 문제를 피해 간다. 만일 우리가 누구한테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호칭을 만들거나 발견해내면 어떠한 이점이 생길까?   우리에게 보편적 호칭이 생긴다면 남에게 말을 걸 때마다 나이를 포함한 서로의 사회적 위상을 비교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직위나 직종을 미리 알아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스트레스 없이 용건을 말하거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효율성 높으면서 마음 편한 사회가 될 것이다. 아마 직책이나 부서가 바뀔 때마다 굳이 새 명함을 만드는 수고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편하면서도 평등한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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