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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또 다른 고향 댓글:  조회:1197  추천:0  2020-10-16
[대림칼럼]  또 다른 고향 최유학 교수 최유학 약력 :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부교수. 저서 《박태원의 문학과 번역》과 역서 《내 여자의 열매(我的植物妻子)》 등 출간, 국내외학술지에 논문 다수 발표. 재한동포문학연구회 이사. 1. 제1고향과 제2고향 한 사람의 고향이 1234 이렇게 여러 곳일 수 있을까? 대학교 때 한 선배가 졸업하면서 나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 곳에 3일 머물게 되면 한 달 머무는 데 문제가 없고, 한 곳에 3개월 머물게 되면 1년간 사는 데는 문제가 없고 3년만 한 곳에 꾹 머물고 산다면 한평생 사는 데도 문제가 없게 된다.” 이런 비장한 결심을 나에게 보여주고 졸업한 그 선배는 자신의 말 대로 상해에 취직한 후 그렇게 3일, 1개월, 3개월, 1년, 3년을 살아왔고 지금까지 헤아려보면 무려 25년간 상해에서 살았으니까 한평생 상해에서 사는 데는 하등 문제가 없게 된 셈이다. 그 선배의 경우, 제1고향은 나서 자란 동북의 길림성일 테고, 제2고향은 대학교를 다닌 북경일 테고 제3고향은 상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경이 상해에 밀려서 제3고향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고향들 중에서 그 선배의 마음의 고향은 어디일까? 동북에서 북경에 온 대다수 대학생들은 대학졸업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국 각지의 도시들에 취직하여 생활한다. 그들도 한결같이 고향을 여러 개 갖게 되며 항상 “또 다른 고향”의 심정을 경험하게 된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버린 사람”이 되어 “또 다른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은 어떤 향수를 달래고 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 이렇게 총 네 가지인데 이 중 첫번째 의미 외의 다른 세가지 고향은 모두 또 다른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과 관련된 우리말 속담으로는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 사람들 중 고향을 떠나지 않은 자 어디 있으며 천하지 않은 자 어디 있으리오. 2. 아버지의 고향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작은아버지(큰삼촌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의 고향은 현재의 한국 경상북도 의성군이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마늘을 좋아하셨고 나도 마늘을 좋아하는지를 뒤늦게 나마 곰곰히 분석해본다면 마늘의 고장 의성군과 어떤 연줄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의성군에서 11년 살다가 중국에 건너와서 70여년을 사신 아버지의 고향은 어디일까? 할아버지가 먼저 일제시대 때 중국에 건너와 발을 붙이고 있다가 상황을 봐서 가족 전체를 중국으로 데려간다고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소식도 끊기게 되자 할머니가 결단을 내리고 11살난 아버지와 아버지보다 어린 고모와 작은아버지를 이끌고 광복을 몇개월 앞둔 1945년 1월에 중국으로 건너와서 할아버지와 합류했다고 한다. 그것도 한군데서 쭉 살아온 것이 아니라 길림성 매하구에서도 살았었고 길림성 집안에서도 살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을 말하자면 제1고향은 한국 경상북도 의성군임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마을 뒷동산의 감나무 얘기를 하셨고 할머니가 아프실 때 할머니를 위해 홍시를 구하기 위해 이집저집 다니며 홍시를 구하던 얘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명절 때 친척들 집에 여러 군데 다니면서 이것저것 얻어먹었지만 친척집들도 가난하기는 다 마찬가지인지라 배를 채우지 못한 이야기도 해주셨다. “고향이 그립다”, “가고 싶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고 싶다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고향이 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국의 천재적인 음악가 "고 김광석의 길에서" 기념비 아래(이하 사진 포함) 3. 망각의 고향 사람은 기억을 잘하는 동물이지만 망각도 잘 하는 동물이다. 세상 사람 그 누구나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처음에는 사기충천해있다가 나중에는 여건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등 이유를 내걸면서 그 중요한 일을 차일피일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부분 결단력이 부족해서이다. 일상생활의 다른 바쁜 일로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면 그만 그 ‘중요한 일’도 한풀 꺾여 어느 모퉁이에 맥없이 조용히 숨쉬고 있다가 급기야는 망각의 늪에 빠지고 만다. 고향을 망각에 빠뜨리다니! 망각의 대가는 경우에 따라 매우 참담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늙으신 부모님과의 효와 관계될 때 더구나 그렇다. 한국에서 공부를 하면서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보낼 때는 앞으로 시간이 많을텐데 그때 가서 보자 라고 편한 생각을 하다가 그만 한국에서의 평온한 일상이 갑작스런 취직으로 깨어진 후에는 종적을 찾지 못할 정도로 감감무소식이 되고 만다. 북경에서 재취직한 후에는 장기간 한국에 가 있지 못하고 반년 미만으로 일정을 잡아 한국에 종종 가 있게 되었다. 그럴 때는 자주 오가게 되니 언젠가 덜 바쁘고 편할 때 보자며 또 미루게 되는데 그렇게 미루다 보니 그 흐른 세월이 십수년이나 되었다. 아버지 고향방문일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데는 뒤로 미루는 나쁜 습관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한국에 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깊숙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효가 그만큼 엷어서였다고 이제 와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아버님의 고향 방문을 미루어오다가 급기야 생각이 나서 다소 무리수를 써서 부모님과 함께가 아닌 나홀로 가보게 되었다. 2년전 한국에 있을 때였는데 친구가 대구 가는 길에 나도 무작정 합류해서 따라갔다. 아버지의 고향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서인지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친절하게 보이었다. 서울역 앞에서도 오랜만의 고향 간다는 마음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기차 티켓도 사진을 찍어 남겼다. 대구에 도착해서 대구에서의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마음은 들 떠 있었다. 택시기사아저씨의 경상도 말투가 어릴 때 고향사람들의 말투와 똑 같아서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고 남다른 용기로 상대팀을 누른 대구축구팀도 그렇게 대견하게 보일수가 없었고 먹자골목은 또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모른다. 대구관광이 이처럼 쭉 이어가는 유혹이 컸지만 나는 그때 용케도 오랜만에 결단력 있게 대구야 잠시 안녕!을 외친 후 하루 시간을 내어서 버스 역을 찾아 다인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는 고향 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이 젊은 승객은 나를 포함해 두 세사람이 전부였고 차는 좌석이 1/3도 차지 못한 다소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좋았다. 창밖 풍경들을 보배처럼 휴대폰카메라로 무조건 다 흡입하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마음 좋은 택시기사를 만나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아버지 마을에 계시는 어른을 찾아가서 용건을 이야기하고 그 분으로부터 마을 친척이 살았었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집을 안내 받았다. 그 친척 집 앞에 가서 사진도 남겼고 주변의 감나무들을 유심히 눈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찾아오겠다는 작별인사를 마을 어른과 택시기사에게 남긴 후 나는 버스에 올라 대구로 돌아왔다. 대구에 와서 다소간 허전했던 마음을 가수 김광석 거리와 김광석의 노래가 달래 주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내가 먼저 다녀보고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다녀보겠다는 생각은 몇 개월 후 엄청 아름다운 서울의 봄의 꽃들 속에서 무참히 시들고야 말았다. 망각의 대가는 참혹했다. 김광석의 의 노래제목과 비슷했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4. 가을에는 떠나지 말아야지 2년전 아버지의 고향을 다녀갔던 그 전해, 즉 3년전의 가을에 나는 한국에 가기 전 동북에 있는 나의 고향에 갔었다. 부모님이 계신 나의 고향은 그 언제나 푸근했고 누나가 둘이나 고향에 계셔서 나의 마음과 몸은 항상 꽉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작별하고 새벽에 택시에 오를 때 정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의 울먹임도 그렇겠지만 아버지의 눈이 예전보다 희미하게 느껴져 마음이 무척 아팠다. 북경으로 가는 열차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다보며 다음과 같은 글을 휴대폰에 적어보았다. 막내가 가을에는 떠나지 말아야지 이제 더는 더군다나 가을새벽에는 이슬도 이슬이려니와 마음의 허함을 어찌하고 그 밀려오는 아림과 쓰림을 어찌 감당하리오 이별의 세파라고는 하지만 가을에는 휘둘리지 말아야지 앞으로 더는 엄마의 눈물을 차마 뿌리치고 아부지의 희미해보이는 눈길을 뒤로하고 아, 목이 꺾여 내 어찌하리오 추억의 막내사랑들이 뒤통수를 때려들와서 이내 가슴에 한이 맺히길 없기다 나의 간절한 기도는 통하지 않았으며 나를 깊숙한 망각의 늪으로 빠뜨렸다. 동북아신문 
126    '深圳의 기적', 세계 경제발전의 '희망 모델'이 되다(권기식) 댓글:  조회:1295  추천:0  2020-10-15
권기식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였다는 뜻으로 세상이 몰라보게 바뀐 것을 말한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는 중국 심천이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도시인 심천에서 어제(14일) 특구 설립 4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습근평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기념식에서 "심천은 중국 인민이 창조한 세계 발전사의 기적이며, 중국식 사회주의의 위대함을 가장 잘 구현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습주석의 이날 심천 방문은 세 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중국식 사회주의 경제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대내외에 보여주면서 개혁개방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 "심천의 현저한 성과와 귀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면적 개혁을 심화시켜야 한다"는 습주석의 발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둘째,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세계 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중국이 중심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셋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보호무역주의 대외정책에 맞서 개방과 자유무역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중국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광동성의 한적한 어촌이었던 심천은 불과 40년만에 중국 경제의 심장이자, 세계 경제발전의 중심 도시가 되였다. 심천을 여러차례 방문한 필자는 심천의 놀라운 변화속도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도시는 늘 변화하는 모습이었고, 기업인들을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혁신을 얘기했다. '청년도시' 심천은 이미 지난 2018년 홍콩을 넘어섰고, 국가로 치면 세계 30위 규모의 경제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각종 지표로 보는 변화는 더욱 놀랍다. 심천의 국내총생산(GDP)은 2조6,900억원(한화로 약 458조원)으로 1979년(1억 9,600만원)에 비해 무려 1만3,724배나 증가했다. 1인당 GDP는 같은 기간 606원에서 20만3,489원으로 336배, 대외교역 규모는 1억1,600만원에서 2조9,800억원으로 2만5,670배가 각각 늘어났다. 전 세계 400여개 경제특구 중 가장 성공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심천의 경제는 첨단산업이 주도하는 특징이 있어 지속 가능한 발전이 기대된다. 1969년 비슷한 모습의 산업도시로 출발한 한국의 구미시가 산업구조를 바꾸지 못해 쇠락의 길을 걷는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333만7,000개의 기업이 입주한 심천에는 화웨이, 텐센트 등 IT 첨단기업들이 대거 입주해 새로운 경제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글로벌 스마트 웨어러블 시장의 80%, 드론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혁신과 변화가 일상이 된 도시 심천이 미국의 경제보복에 맞서는 중국 기술자립의 중심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심천을 만든 실행자는 습주석의 부친 습중훈(習仲勳)이다. 그는 1978년 광동성 당서기에 부임해 홍콩과 인접한 보안(寶安)현에 심천시를 세우고 개혁개방의 길을 열었다. 이제 그의 아들 습주석이 개혁개방의 첨단 미래도시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2019년 8월 심천을 '중국특색사회주의 선행 시범구'로 만들겠다고 밝힌 것은 대를 이은 개발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광동성과 홍콩, 마카오를 묶은 거대 경제권인 '광동-홍콩-마카오 경제벨트'의 중심도시인 심천이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지속성장할 것인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흑룡강신문
125    시를 쓰는 10가지 흥취 댓글:  조회:1275  추천:0  2020-10-09
리문호(시인, 중국) 리문호: 제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두 차례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역임.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 '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의 정감과 정서의 심리적 현상이다. 물론 시인의 정감과 정서는 시인이 축적한 체험, 지식, 감각에서 오는 것이 당연하다. 시인의 심리학을 연구하려면 지각과 감각, 형상 사유와 이미지, 사유와 언어, 운율과 정서, 정감과 의지, 체험과 기억, 관념과 지향 등을 떠날 수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종합적 심리활동인 것이라 본다. 이런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깊은 작업으로서 이론에 종사하는 분이나 시인들이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물론 이미 연구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된다. 나는 나의 시 창작 경험에서 체득한 를 정리함으로서 시인 심리학을 연구하는데 혹시 참고적 재료가 될까하고 제공하는 바이며 시를 쓰는 초학자들에게 조금의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시를 씀에 흥취가 없다면 시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다른 심리활동과 구별되는 심리 상태로서 사회의 직업이나 명령, 임무의 속박을 벗어난 자유형이나 자발적인 심리현상이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지는 미적 향수의 심리 현상이다. 이런 향수를 간단하게 로 귀결하여 본다. (1) 상상하는 흥취 시인은 상상하는 흥취가 있다. 몸은 비록 좁은 공간이나, 노동현장이나 술좌석이나 회의실에나 혹은 커피점에 있지만 마음은 그 장소를 벗어나 대자연의 절경에나, 누구와의 만남이나, 추억이나, 과거이나, 미래에나 혹은 동화나 신화 속으로 가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단순이 말하는 이른바 이 부족한 류의 사람에 속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현실, 역사, 미래, 추억, 혹은 동화, 환상, 공상. 잠재의식, 등 무한한 상상이나 연상 속에서 시상이 발견된다. 시인의 정감활동의 무대는 상상이다. 그 무대(시인의 시적 세계)가 얼마나 큰 가에 따라 상상의 깊이와 폭이 결정된다. 시인은 자기의 시적 세계가 있어야한다 이 시적 세계는 자기만의 독특한 사유방식, 개성, 표현 능력, 풍격, 정서 등으로 구성된다. 상상은 미의 정신활동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상상하려 하지 추한 것과 악한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시인은 상상 사유, 즉 형상 사유가 발달되었으며 형상 사유의 기본 요소는 언어와 운율이다. 어떤 시적발견이 나타날 때 그것은 시로 나타난다. 즉 한수의 시가 머릿속에 생긴 것이다. 혼자 고요히 상상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잠기는 좋은 일이다. (2) 고독의 향수를 즐기는 흥취 현대인은 고독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 탈이다. 고독하면 안절부절 한다. 심지어는 고독을 참지 못해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 많은 예술가와 연예인들은 고독에 취약해 우울증이 쉽게 나타나는데 원인의 하나는 고독과 허무이다. 무대에서 수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다가 일단 막이 내리게 되면 고독이 밀려온다. 공허하고 허무해진다. 즉 고독이다. 그들이 고독을 극복하려면 공명심과 허영심을 최소한 억제하는 심리적 자질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시인은 원초로 고독한 사람이며 고독에 습관 된 사람이다. 고독 속에 사유를 하며 고독을 합리하게 즐길 줄 안다. 시인에게 있어서 고독은 상상과 작시의 좋은 환경이다. 혼자 적막하고 외롭다고 생각될 때 책을 본다. 시를 본다. 그리고 조용히 상상의 여행이나 시정의 여행을 한다. 그러면 새로운 시가 생각난다. 이것이 바로 심리를 자아 조절하는 고독을 즐기며 향수하는 흥취이다. 다른 시인은 몰라도 나 만은 고독할 때 시를 쓴다. (3) 자작시를 감상하는 흥취 자기가 쓴 시를, 특히 오래된 시를 가끔 읽어 보게 되는데 향수를 느끼곤 한다. 그 시를 쓸 때의 감정 정서 속에 잠기는 일은 즐겁다. 또한 부족 점을 찾는 일도 즐겁다. 시란 감정저서의 기록이며 자국이다. 또한 인생행로의 자취이다. 자기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감정과 상상의 기억에 대한 새로운 감수이다. 서안의 진시황릉을 밟는 향수, 무한의 황학루에 올라 장강을 굽어보는 향수, 황산에 올라 운해의 해돋이를 감상하는 향수, 백두산에서 천지를 내려다보는 향수, 역사의 유적지에서 수천 년의 역사 속으로 여행하는 향수, 어떤 시정에 잠기는 등등 자기의 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감수를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시 창작 개성을 다시 발견하고 발양한다. (4) 시를 쓰고 다듬는 흥취 시 초고를 써놓았지만 설익은 때가 많다. 꼭지가 떨어지지 않고 풋내 나는 때가 많다. 그러면 푹 익게 나둬야 한다. 즉 상상의 사유를 익게 하는 것이다. 몇일 후, 혹은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다시 보면 그 시의 수개 가치가 나타난다. 시인의 사유 속에는 무수한 시적 소재들을 축적하고 시로 완성 시켜야한다, 그러야만 다산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생활경력이 풍부해야하며 부단히 관찰하고 모색하는 습관으로 시적 소재들을 발견해야한다. 모든 시가 다 발표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의 수개가 있어야한다. 어떤 시는 수개하다 보면 원래의 감정정서와 완전히 달라질 때가 있다. 변화됨이 초고보다 못해 졌다고 생각될 때는 다시 원초로 돌아가 다시 수개하게 된다. 어떤 시는 즉흥으로 써 놓고 만족 되여 급급히 발표하였지만 후회할 때가 많다. 이것은 과정과 시간이 부족한 탓으로 잘 다듬지 않은 결과이다. 한수의 시는 진물이 나도록 잘 익어야 한다. 반복 다듬는 과정을 거쳐 푹 익어 극치의 향기가 날 때의 향수. 이를 다듬는 재미라 하겠다. (5) 시적 발견에 흥분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창의력(創意力)은 중요하다. 창의력은 부지런한 학습과 관찰과 사고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창의력을 발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며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관찰과 사유를 통해 습관 된 사물이나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문뜩 새로운 시적 발견이 나타날 때가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하다가 문뜩, 잠을 자다가도 문뜩 영감이 떠오른다. 이럴 때는 적어 놓아야 한다. 게으르면 잊어버리게 된다. 그때의 정서를 놓치고 만다. 시적 발견은 나만의 것 이여야 한다. 다른 시인의 시와 유사하면 시적 발견이라 말할 수 없다. 시적 유사성이나 일반화, 도식화, 보편화는 작시의 실패다. 다른 시인이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발견이 나만의 시를 완성시킨다. 물론 나만의 풍격과 나만의 개성도 뒤따라야 한다. 개성이란 시인의 몸에 배어있는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장기적인 시 창작 활동을 통해 수립되며 또한 발전하고 개변한다. 시적 발견도 시인의 개성을 떠날 수 없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적발견 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시인은 이런 흥분이 있기에 시를 쓰는 모양이다. (6)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흥취 친구나, 동료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그 어떤 대상의 마음을 이끌어 잡기 위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백하거나 토로할 때 시를 쓰는 흥취가 있다. 특히 애정시가 그런 경우이다. 애정 시는 여러 가지 감정 정서로 나타나는데 실연, 열연, 초연, 미련(迷戀), 추련(追戀) 등이 있다. 심지어 거리나 상가에서 스쳐간 전혀 모르는 대상을 위해 쓰는 시도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륙유는 평생 당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쓴 애상 시로 유명하다. 그의 사랑 시는 애상으로 나타난다. 이를 귀납한다면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사랑에 입각한 시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할 수 없는 이상적 사랑에 대해 쓰는 시가 있다. 사랑은 많은 시인들이 시인으로 된 원동력의 하나이다. 만약 한수의 시가 읽는 독자와 공명을 일으킨다면 기쁜 일이다. 기실 시는 혼자서 쓰지만 혼자서 감상하는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세상에 퍼뜨리는 표현주의 문학이다. 하기에 독자를 사랑하는 것은 시인의 기본이다. 여기서 이란 독자에 대한 시인의 감정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시를 쓰는 동기는 언제까지나 시인 본인의 감정 에너지의 발로이지 독자의 구미에 맞게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구조가 복잡하고 독자층도 복잡한 만큼 어느 독자층의 공명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시를 써놓고 란 말을 들으면 불쾌한 것은 당연하다. 시는 언제나 객관 사물에 대한 주관 심리 활동인 것이다. 추상시라도 기실 객관사물이 우리의 두되에 반영된 결과이다. 이 심리 활동이 잘 되고 못 됨은, 공명을 일으키건 안 일으키건 하는 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달렸다. 한수의 시를 잘 썼다고 자기는 흥미진진해 하지만 독자의 냉대를 받을 때가있다. 하기에 우리 시는 어떠한 독자층을 공명할 수 있는가를 막론하고 숨결이 담겨있어야 하며 살아 있는 시를 써야한다. 대상을 위해 쓰는 시는 반드시 순정이여야 한며 진정이여야 한다. 슬프더라도, 기쁘더라도, 간절하더라도, 감정의 진실성이 있어야한다. 위선이나 가식이나 언어 장난의 시는 그 효과에 손색이 간다. 죽은 시는 독자가 없다. 옛날의 좋은 시가 지금도 애독되는 원인은 그들의 시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수의 시를 대상이 애독하고 사랑할 때 시인에게 즐거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시 창작 욕구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7) 사물을 감수하는 흥취 시인도 모든 보편적 심리활동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감각으로 사물을 관찰하여 감수를 얻는다. 또한 정신세계의 그 어떤 추상적 사고를 통해서도 감수를 얻는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도 객관의 활동에서 축적된 결과이다. 감수는 시적 발상의 기초이다. 인간의 사회활동속의 한 성원으로 감수를 할 줄 모르는 둔감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인은 모든 사물과 마음을 교감하게 할 수 있는 특수한 사유의 교류방식이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꽃을 대면하였을 때 향기와 모양만을 감상할 것이 아니라 음운을 감상해야하며 향, 빛, 색, 모양의 움직임 등에서 언어로 대화가 통해야한다 이것이 교감이다. 마음으로 사물과 이야기하는 것을 미적 향수를 얻는 시인에게 있는 특수한 능력이라 말해야할까. 흥미 있는 것은 어느 대학의 저명한 교수 수묵화 화가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칠 때 학생들더러 시를 많이 읽으라고 강조한다. 즉 시정이 있어야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폭의 수묵화가 시정이 없으면 죽은 그림이기 때문이다. 시의 매력은 사물과의 교감을 언어로 표현한 시정, 혹은 음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언어적 감각으로 두뇌에 전환하여 감상하는 것이요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언어적 감각을 시각으로 두뇌에 전환시켜 감상하는 것이다. 즉 언어는 인류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공구이다. 시인이 사물과 교감함에서도 언어는 감정교류의 매체이다. 언어가 풍부하면 교감도 풍부해진다. 한수의 시를 구상하거나 감상할 때 기실은 묵독의 과정이다. 즉 시각적으로 글을 보지만 두뇌에 반영되어 혀로 반사시킨다. 낭독은 없지만 언어들이 혀에 와 닫는다. 왜냐하면 목젖과 혀에 언어의 기억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각, 청각, 미각, 피부 등의 감각 기능을 자극한다. 한수의 시를 감상하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활동 과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있어서 사물을 감수한다는 것은 종합적 감각 기능의 언어적 활동이라고 생각된다. (8) 운율과 감정이 율동하는 흥취 시는 운율의 문학이다. 언어를 조직함에 있어서 감정 정서의 율동과 유기적으로 배합되어야 한다. 쉬운 말로 말해서 언어 조직은 외재율이라 한다면 감정 정서의 흐름은 내재율이다. 언어로 감정정서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시인의 수련과 리듬의 미적 관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시인은 감정 정서의 흐름을 시적 언어로 잘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의 정감이 진실해야한다 시를 쓰면서 이런 것에 유의 한다면 리듬에 감정을 실어 움직이는 미적 감수를 느낄 수 있다. (9) 마음과 언어가 통하는 흥취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형상 사유의 기본 원소이다. 언어가 결핍하면 감수도 결핍해진다. 유람하면서 어떤 절경을 본 감수를 언어가 부족하면 하고 감탄할 뿐이지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다만 시각적 기억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가 풍부하면 시로 잘 묘사할 수 있다. 언어로 이미지를 그려 낼 수 있다. 시 창작을 하면서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고민할 때가 많다. 수개란 기실 언어의 수개이며 감정 정서를 언어로 다듬는 수개이다. 알맞은 언어를 찾지 못해 사전을 찾아보아도 생각나지 않다가 문뜩 며칠이 지나 생각 날 때가 있다. 기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가 중요한 것은 언어는 감정정서의 표기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수련은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가장 간고한 것이며 경상적으로 탐구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감정정서를 언어 외에 다른 어떤 수단으로는 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0) 심리적 효과의 흥취 시를 쓰는 것은 미적 향수이다. 직업과는 관련이 없이 각 분야의 직업에서 시인들이 배출된다. 그것은 자기의 정감을 시란 쟝르로 누구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객관사물이 혼잡하게 반영된 심리를 추리고 정화하는 과정이다. 시를 쓰기를 몰입하면 다른 불미한 인상들이 담박해지거나 사라져 마음이 가벼워진다. 청정해진다. 밝아진다. 아름다움 속에 머물게 한다. 분노할 때 시를 쓰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이고 슬플 때 시를 쓰면 마음을 달랠 것이고 우울할 때 시를 쓰면 경물에 마음을 의탁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효과의 반응이다. 이상 시를 쓰는 열 가지 재미를 나의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물론 아직 이론적으로 승화하지 않은 나 자신의 경험인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이 되여 부자가 되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하더라도 고생하더라도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심리활동에는 언제나 경쾌함, 건강함, 명쾌함, 진실함, 순수함, 후련함이 뒤 따르는 것이다. 상상은 힘겨운 생활에서 평온을 찾고 희망을 구상하고 미를 그리며 시정에 머무는 정신생활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영상과 시인이 그리는 지향 펼쳐져 있다. 시인이 되는 것은 고군분투하는 일이지만 일반인이 감수할 수 없는 정신적 행복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명한 시인이 되는 목적이기 보다는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는 혹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 좋겠다.  -끝-​ 동북아신문 
124    마음으로 짓는 집□ 김준환 댓글:  조회:1302  추천:0  2020-09-29
마음으로 짓는 집 □ 김준환 요즘 인테리어에 쏟는 관심이 리지적인 수준으로 보인다. 크게 욕심내지 않고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며 비용을 줄이려는 실속의 바람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경제성’을 앞세우는 경향이 크다. 얼마전 한창 장식중에 있는  같은 직장 동료의 집을 방문하면서 두가지 장점을 발견했다. 작은 자재 하나라도 선뜻 사들이지 않고 꼼꼼히 따지거나 장식회사에 의뢰하여 시공을 하더라도 조그마한 하자가 나지 않도록 자기의 주견을 내놓아 만족감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집장식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집장식을 한다고 하면 흔히 듣는 말이 얼마를 들였느냐 였지만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얼마를 아꼈느냐는 것이다.  어떤 자재를 사서 어떻게 하여 얼마를 절약했다는 그런 답을 듣기를 원한다. 인터넷에 능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오프라인 시장이 아무래도 비싸다고 생각되여 온라인에서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며 상당 부분의 자재를 온라인에서 사들인다. 전통적으로 장식하는데 버릇된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들은 온라인에 집중하면서  비용을 절감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장식을 하는  중요한 리유 가운데 하나가 집을 멋지게 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멋지게 보이는데 욕심을 내기보다 비용을 줄이는 데 더욱 민감하다. 인테리어의 취향은  환경의  변화만큼이나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보력이 강한 젊은 세대들은 발품을 팔며 수고할 필요도 없이 안방에 누워 그때그때 물건을 주문하면 이튿날에 배달된다.  인터넷구매는 비용 절감 효과도 있지만 제품의 성능까지 미리 챙길 수 있어 미흡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인테리어에서도 시공자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주도적으로 자기의 요구를 당당하게 제기하면서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집장식에서 시공은 번잡한 공사로써 모든 게 생각대로 척척 들어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전에는 시공에서 분명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대놓고 지적하면 혹시라도 피해가 올가봐  큰 하자가 없으면 과분한 요구를 제기하는데 주저주저 하였다면 요즘에는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입주자들이 과거처럼 오로지 디자이너의 힘만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공사기간을 단축지을 수 있어 그만큼 부담을 줄인다. 디자인에서도 예쁜 것을 좋아하지만 까다로운 것을 극력 피하려 한다. 예쁘게 보여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가치를 추구하여 보여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 가족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라면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거나 선택할 때 더더욱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서 갈수록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다. 집장식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체면문화’에 대해서도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는 남들의 시선을 다분히 의식하고 있는 잘못된 문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서 요즘 들어 우리가 마냥 추구해온 화려한 장식이 간결함을 추구하는 인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연변일보 
123    인터넷에서 구매한 항공권에 꼼수가 숨어있다면? 댓글:  조회:1291  추천:0  2020-09-24
인터넷에서 구매한 항공권에 꼼수가 숨어있다면? 북경인터넷법원 법관보조 리우신 '10.1' 황금주가 다가오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대형 인터넷 티켓구매사이트의 항공권 정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면 편리하고 빠르지만 적지 않은 꼼수가 숨어있다. 소비자들이 인터넷에서 항공권을 구매한 후 함정에 빠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한씨는 모 티켓구매플랫폼을 통해 대리에서 곤명으로 가는 항공권을 구매했는데 주문서에는 편도항공권 가격이 870원(세금 불포함)이라고 명시되여있었다. 한씨가 항공회사에 조회해보니 이 항공권은 경유항공권으로서 대리에서 곤명, 곤명에서 려강까지의 두개 항로가 포함됐으며 총 가격은 840원(세금 불포함)이였다. 한씨는 예매한 항공편에 탑승하여 순리롭게 출행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항공회사가 보내온 를 받았다. 환불서에서는 구매한 항공권의 제2항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환불해야 할 금액이 320원이고 환불원인은 자원환불이라고 씌여있었다. 편도항공편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유항공권으로 변하고 환불서가 '저절로 찾아왔으나' 환불액은 받지 못한 한씨는 분통이 터져 플랫폼에 항공권 가격의 3배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법원은 심리를 거쳐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한씨는 소비자로서 자신이 구매한 항공권의 항로정보를 포함한 진실한 정황을 료해할 권리가 있다. 두번째 항로는 한씨의 수요가 아니였으며 플랫폼은 티켓예매서비스 제공측으로서 한씨에게 이 항공권에 두개 항로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실제 생활에서 경유항공권 가격이 편도 직항 항공권 가격보다 낮은 정황이 확실히 존재하는데 피고는 한씨를 위해 그의 출행요구에 부합되고 가격도 낮은 경유항공권을 예매해준 후 마땅히 한씨에게 항공권 항로의 진실한 정황을 여실하게 고지하고 한씨가 두번째 항로의 가격을 환불할지 안할지 선택하게 해야 한다. 피고가 사건 관련 항공권에 두개 항로가 있다는 진실한 정보를 숨기고 두번째 항로의 환불금을 차지하는 행위는 한씨의 알 권리와 자주선택권을 침해한 것으로서 사기를 구성한다. 때문에 법원은 피고가 한씨에게 두번째 항로 가격의 3배에 해당되는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소비자는 인터넷 티켓구매의 편리를 향유하는 동시에 마땅히 대리업체의 정보, 계약운송업자의 정보, 비행기 기종, 환불-변경규칙, 항공권 가격 구성 등 중요한 정보를 자세히 열독하여 손실을 방지해야 한다. 티켓예매플랫폼과 대리업체는 소비자의 구매결정에 충분히 영향줄 만한 중요한 정보를 여실하고 전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사기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법률은 소비자의 알 권리를 보호할 때 계약체결단계에서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리행단계에서 허위로 진술하거나 고의로 중요한 정보를 은페해 소비자의 계약체결목적 실현에 충분히 영향줘도 사기를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때문에 플랫폼과 대리업체는 소비자의 구매결정에 영향줄 중요한 정보에 대해 적당한 방식으로 중점적으로 제시해야 할 뿐더러 약속을 리행하는 과정에서 제때에 정확하게 전면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상품 혹은 서비스의 관련 정보를 고지하여 소비자의 알 권리를 만족시키고 부단히 서비스수준을 높여야 한다.  
권기식 세계무역기구(WTO)가 15일(현지시간)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관세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WTO가 미국의 패권주의적 국제법 위반행위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는 판정을 내린 것은 세계의 자유무역주의를 지키려는 국제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평가이다.   WTO에서 1심 역할을 하는 패널(토론자)은 이날 미국이 2,340억딸라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부과한 관세는 무역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판정했다. 패널은 미국이 징벌적 관세를 부과한 중국산 수입품이 중국 지적재산권 도용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대중국 압박정책에서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대는 지적재산권 도용의 증거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이 증거도 없이 경제와 외교 량 측면에서 중국에 대한 부당한 공세를 벌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WTO의 1심 판결에 대해 미국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은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번 판결이 미중 1단계 무역합의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는 WTO 판결의 의미를 축소시켜 미중 무역합의 틀이 흔들리는 것을 막고 대선 정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이번 WTO의 판결은 미국이 이미 상소 절차를 없애 최종 판결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절반의 판결로 볼 수도 있으나 최종심이 열리더라도 1심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이 적다는 점에서 사실상 중국의 승리로 평가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이후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보여준 행태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다. 미국은 지난 2017년 6월 빠리기후협약을 탈퇴한 데 이어 지난 7월 6일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공식 통보했다. 또한 세계무역기구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탈퇴압박을 가하고 있다. 환경위기와 자유무역, 코로나19 방역 국제련대 등 전 인류적인 사안에 대해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동조하는 국제기구는 지원하고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 국제기구는 탈퇴하거나 분담금을 내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하는 비신사적인 이중자대로 편향된 국제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목이다. 무역자유화를 통한 세계적인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지난 1995년 1월 출범한 WTO에는 현재 164개국이 가입돼있다. 미국이 사실상 최종심인 1심 판결에 불복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WTO 정신에 반하는 것인 동시에 나머지 163개 가입국의 립장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미국은 세계보건기구 탈퇴를 철회하고 세계무역기구 탈퇴압박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무역주의와 국제안전을 위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세계 초강대국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이다. /호국 권기식은 한국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을 거쳐 《령남매일신문》 회장과 2018평창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력임했다.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현립대 초빙교수, 중국 외교부 초청 방문학자로 활동한 한중일 전문가이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남양주시 국제협력 특별고문 등을 맡고 있다. 길림신문 
121    내가 만난 한국인(3) 댓글:  조회:1509  추천:0  2020-09-11
  글 궁금이 · 방송 강설화     우리 대표단의 한국행은 한국측에서 먼저 왔다간데 대한 답방이였다. 그들이 북경에 왔을 때는 대표단 성원이 많았다. 이들도 역시 저녁 식사가 끝나면 적막함을 이기지 못했다. 또 그 말이다.    “북경에서 제일 좋은 데로 갑시다.”   “비쌀건데요.”   “비싸면 서울만 하겠어요? 갑시다.”   조양구에 있는 장성호텔의 천상인간이란 곳에 데려갔다. 후에는 취체됐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히 고급적인 소비장소였다. 내가 미리 비싸다고 했으니 약간 불안했는지 문앞에 치포를 입고 서있는 늘씬한 키의 직원과 일인당 소비를 물어본다. 그러더니 아무말 없이 그 자리에서 돌아서 다른 데로 가자고 한다. 워낙 비싼데다가 한두명도 아니고 한개 대표단이 소비를 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나 보다.     이분들이 올 때 선물을 들고 왔으니 답방을 하는 우리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 그사이 고향의 지인들이 선물한 특산물을 들고 갔다. 포장된 인삼도 있었고 그 유명한 웅담분도 빠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약장사를 하는 분들이 많아서 만약 세관에서 짐을 풀어 검사했더라면 웅담분 같은 건 걸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영어를 잘하는 부단장이 있어서 무난하게 넘어가기는 했지만.   선물은 회장과 비서장과 중국에 왔을 때 나한테 선물을 줬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건네줬다. 그런데 당시 한달 로임이 1000원에서 오르내리는 우리가 선물을 들고 왔으면 얼마나 비싼거 가져왔겠나 싶었는지 그중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성의는 고마운데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제가 지금 매고 있는 넥타이가 얼마짜리인지 아세요? 십만원입니다. 그러니 여기 사람들이 무슨 선물을 받으면 만족하겠습니까?”   전에 이미 북경에서 만나서 아는 사이라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였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아무 의미가 없었더라도 듣는 사람의 립장은 또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도 그 말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자체가 그렇게 무난한 말은 아니였다는 걸 말해준다.    당시 만나는 모든 한국인들이 우리가 받고 있는 로임으로 생활이 가능한 게 신기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저분의 말에도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였다. 그런데 선물의 의미를 외곡한 부분은 분명 있다. 나도 지인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들고 갔지 내 돈으로 사라면 아름찬 액수다. 그런데 선물의 의미는 돈보다는 성의에 있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답례로 들고갔을 뿐이다. 내 짐도 가뜩이나 무거워 죽겠는데 내가 외국까지 쓸데 없는 물건을 들고 갈 리유가 없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가 자주 드나들 수 있는 데가 아니여서 지인한테 대신 전해달라는 선배들의 부탁으로 무거운 술까지 가방에 들어있었다. 물론 돌아올 때 가방도 빌리 없다. 그쪽의 분들도 이쪽 지인들에게 전해달라며 짐 부탁이 들어오는데 다른 건 다 빼고 당시 무스탕이라고 했던 겨울 가죽옷만 두벌이다. 나중에 집에 도착할 무렵에 상자의 고리가 끊어질 정도였으니 무게는 가히 짐작이 간다. 보따리 장사군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전달해달라고 했던 술 두병은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한테 넘어갔다. 전에 북경, 서안, 항주를 동행했던 B기자를 만나는 시간이였다. 대표단의 공식일정에서 빠지면 안되니 1차에서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B기자를 만나러 자리를 떴다. B기자가 반갑다며 호텔에 있는 바에서 양주 한병을 시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B기자는 이날 감기가 걸려서 나보다 좀 적게 마셨고 그래도 둘이서 한병은 다 비웠다. 술이 술을 마신다고 B기자가 한잔 샀으니 2차는 내가 사겠다고 나섰다. B기자는 감기에 걸린 상태지만 내 성의를 봐서 2차까지 가기로 했다.    그 랑만적이고 유명한 한국의 명소 포장마차를 찾았다. 여기서도 내가 소주 두병 마시고 B기자는 한병만 마셨다. 공식만찬 때 이미 공부가주라는 중국술을 마신 상태라 소주 두병도 적은 량은 아니였나 보다.  2만원이 좀 넘게 나왔는데 내가 그만 일본돈 만엔과 한국돈 2만원을 줘버렸다. 이튿날 보니 지갑에서 일본돈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전해달라고 해서 갖고 온 중국술 두병도 없어졌다. 어렴풋한 기억에 그 기자가 택시로 나를 호텔문앞까지 바래다줬는데 내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방에 올라와 술을 내려다 줘버렸다. 술을 마시면 사촌을 기와집 사준다더니 남의 술로 내 인사를 내버렸다. 술을 전해주라고 부탁한 선배한테는 할수없이 실토정을 했다. 이미 다른 사람을 줘버렸는데 다시 만들어낼 수도 없고 그 선배도 그냥 어쩌겠냐며 별말 없이 넘어갔다.   첫 한국행을 마치고 귀국해 수도 공항에서 헤여지면서 대표단의 부단장이 바로 그 유명한 말을 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오.”   이 부단장은 후에 북경시 모 구 당위원회 서기까지 지냈고 현재도 다른 요직에서 현직이다. 그때 말처럼 자주 전화하고 인연을 계속 가꾸어 왔더라면 사교권이 많이 넓어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간혹 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가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 면에서 나는 아주 문외한이다.   한국인과의 만남은 계속된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20    보모냐? 부모냐?□ 허경수 댓글:  조회:1421  추천:0  2020-09-10
보모냐? 부모냐? □ 허경수 올해 초봄에 필자와 안해는 외국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 휴식하던중 어느 날 조카네 집에 묵게 되였다. 우리 부부가 조카의 집에 도착한 첫날 초중 1학년생인 조카의 손자는 우리를 보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내가 음식을 먹으라고 하면 ‘우루루’하고 중국어도 아니고 우리 말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손시늉만 하는 것이였다. 일주일 동안 함께 있으며 관찰해보니 조카는 아이를  그저 어루만지며 주물러서 키우고 있었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입혀주고 침대에서 밥을 먹여주고 자가용으로 학교에 보내주고 데려오군 하였다. 하학하여 집에 돌아온 손자는 여전히 우리를 보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우리가 음식을 먹으라고 할 때마다 ‘우루루’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치군 하였다. 동네집 강아지도 아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고 꼬리를 젓는데 왜 이럴가? 조카에게 례절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하고 애심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여러번 충고를 주었으나 그는 “애가 크면 저절로 헴이 든다.”고 하면서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애솔은 어릴 때부터 잘 키워야 하고 례절, 언어 교육은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해야 한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동갑인 필자의 부모는 한뉘 서로 ‘양, 양’ 하는 언어를 써왔기에 필자도 부모님들과 ‘양, 양’ 하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성인이 된 다음에도 나쁜 언어 습관을 고치지 못하였다. 지금 우리 주위를 두루 살펴보면 필자의 조카 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품행교육은 뒤전이고 그저 공부만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그 심정을 필자는 리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입에 넣으면 녹을가, 불면 날가 하는 지나친 로파심으로 아이를 키우면 아이는 오히여 어리궂어지고 연약하여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응석둥이로 되고 마는 것이다. 아이의 첫 선생님은 부모인 것이다. 부모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식들을 교육해야 한다. 밤낮 마작판에서 세월을 보내는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잘해라.”고 말하면 아이의 생각은 어떨가? 담배를 피우는 부모가 담배를 피우는 초중생 아들더러 담배를 끊으라고 강요하면 아이의 생각은 어떠할가? 지금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의 공부성적을 제고시키기 위해 과외선생을 청하고 과외 보습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있다. 원래는 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많은 부모들은 기름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온실에서, 부모들의 손끝에서 돈다발로 자라난 애들이 장래 명문대학을 졸업한들 유용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을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엄격히 교육할 의무가 있다. 어느 한번 필자는 친구의 집에 마실을 간 적 있었는데 그 친구는 유치원에 다니는 자기의 외손녀 숙제를 자기는 보고도 모르겠으니 필자더러 도와달라고 하였다. 필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 숙제지를 받아 보았다. 숙제는 어문, 수수께끼, 산수로 된 종합문제였는데 그냥 교과서를 보지 않고서는 정확한 답을 줄 수가 없었다. 부모가 자식들의 학습성적을 제고시키자면 많은 비용을 들이여 과외선생을 청하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문화자질을 제고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자식들의 교과서를 보면서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 교육학, 인생관에 대한 책들을 사서 열심히 읽어 자신의 문화자질을 부단히 제고시켜야 한다. 지금 많은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고 좋은 선생을 청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으면 만사대길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훌륭한 학부모로 되자면 자식들에게 고기를 잡아 먹이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고기를 잡는 기술을 배워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현재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대학에 보내면 만사대필로 생각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이는 만리장정의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명문대학을 졸업한 직원이 회사 사장을 보고 아무런 반응이 없으나 일반 대학을 졸업한 직원이 례절이 바르고 직원들과 잘 어울리면 누구를 중용할가? 물론 후자가 중용될 것이다. 때문에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식들을 그저 어루만지고 편애만 하는 어리무던한 보모로 될 것이 아니라 수양이 있는 선생 맞잡이인 부모로 되여야 한다. 그러자면 독서를 열심히 하여 자신의 자질을 항상 제고시켜야 한다. 필자는 초중생 자식을 둔 부모들과 대화를 나눈 적 있었는데 그들중 대부분은 중국의 면적과 4대 발명, ‘맹모 세번 이사’에 대하여 감감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자기네와 대화하기 싫어한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였다. 자식의 수준보다 훨씬 낮은 부모가 어떻게 자기의 자식들을 옳바른 길로 인도한단 말인가? 자식에게 면박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귀한 자식 매 하나 더 때린다.’는 속담이 있다. 자기의 살붙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만 자식을 진짜 사랑한다면 어릴 적부터 고생을 달갑게 겪게 하고 고난 속에서 의지를 련마시켜야 한다. ‘초년 고생은 황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부모들은 어미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있듯이 자기 자식을 그저 어루만지는 데만 열중하지 말고 조국의 인재로 키우려는 원견성으로 자식들을 덕육, 지육, 체육 등 전면적으로 발전하는 어린이로 잘 양성하기에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연변일보 
119    내가 만난 한국인(1) 댓글:  조회:1288  추천:0  2020-09-08
글 궁금이 · 방송 강설화     인민일보사에서 한국 모 신문사 기자 세명의 중국 취재를 도와주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2남1녀였다. 남기자 두명은 나보다 선배였고 녀기자 한명은 나와 동갑이다. 편리상 년령순에 따라  A, B, C기자로 략칭한다. “저하고 동갑이네요. 친구 하면 되겠다.” 녀기자 C양이 나에게 나이를 묻더니 이렇게 나온다. “아...예...” 한국 문화상 처음 만나는 사람의 나이가 궁금한 건 알겠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물어오는 것도 생소했고 당장 친구로 하자는 제안은 더 당돌했다. 생면부지의 사이에 동성도 아니고 이성이 친구 하자면 친구가 되는 걸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때라 그냥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는구나 정도로 리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후에 알고보니 C양이 말하는 이른바 친구는 동갑이란 뜻 외에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A기자는 명함에 차장대우라고 찍혀있는데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차장이면 차장이고 과장이면 과장이지 차장대우라는 직급도 있었나. 과장은 이미 거쳐왔고 차장으로 승진하기에는 애매하고 그런데 선임이기는 하고 그래서 “대우”라는 어중간한 배려를 한 것이였다. A기자는 셋중에 나이도 제일 많고 중국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고 주량도 장난이 아니였다.  거기에 비하면 B기자는 술을 마시기는 하는데 되도록이면 자제하려 했고 C기자는 두 선배가 술을 마시는데 대해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다보니 저녁마다 술에 신난 건 A기자와 나뿐이였다. 저녁밥을 간단하게 먹고나면 B와 C기자는 바로 호텔에 들어가 기사를 쓰고 나와 A기자는 자리를 옮겨서 계속 맥을 이어갔다. 회사에는 위계질서란 게 있어서 보통 선배가 한잔 더 하자고 제안하면 거절하기 어려운데 이들은 처음에 약간 응하는 것처럼 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피했다.  A기자도 더 강요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다녀도 마실 술은 충분히 량을 채울 수 있었기에 별로 아쉬운 게 없다.  우리의 취재코스는 북경, 서안, 항주였다. 북경에서는 인민일보가 접대측이고 지방에 내려가면 해당 성의 기자협회에서 안내한다. 서안에 도착하니 나이 지긋한 남자분과 어린 녀자분이 마중을 나왔다. 녀자분은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데 키가 크고 성격도 활달해서 공항에서 시내에 들어가는 내내 웃고 떠들며 화제가 그치지 않는다. 그게 신기한지 C기자가 그런다. “여기서는 초면에도 이렇게 허물없이 대화가 잘 되네요.” “한국에서는 안 그런가요?” “그럼요.” 자기가 북경에서 처음 만났을 때 친구 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현지인의 대화가 좀 활발하다고 리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 상황은 어떻게 리해해야 할가. 북경에서 이미 피곤한 상태라 일행은 저녁을 간단히 먹고 각자 방에서 쉬기로 했다. 그런데 서안의 첫날밤을 이렇게 맹맹하게 지나쳐버릴 A기자가 아니였다.  “우리 한잔 더 해야지.” “암요, 어떻게 온 서안인데” 둘은 언제 친했다고 척하면 척이다. 그런데 북경에서 이미 많이 달린 상태에서 비행기에서 지치고 서안에 내리기 바쁘게 저녁 일정까지 소화했으니 이튿날에 무사할 리 없다. 하필이면 이튿날 취재는 또 교구에 잡혔다. 좋지 않은 도로상황에서 봉고차로 움직였는데 A기자는 제일 선배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미 코를 골고 있었고 나는 제일 뒤좌석에 아예 드러누웠다. 얼마쯤 갔을가 차를 세우더니 화장실에 갈 사람들은 다녀오라고 한다. 차에서 내리는 건 나하고 A기자밖에 없다. 가뜩이나 속이 울렁거리는데다가 제일 뒤좌석이라 차도 심하게 들춰서 힘들었는데 더 치명적인 건 재래식 화장실이다. 냄새가 확 올라오는 순간 위도 급하게 반응하더니 결국엔 화장실에 많은 보탬을 하고 나왔다. 눈물이 글썽해서 차에 오르는 우리를 바라보는 C기자의 눈길이 곱지만은 않다.  “저 친구는 왜 저렇게 술을 마신대요?” 먼저 차에 오른 A기자한테 C기자가 하는 말이다. “너 지금 날 들어라고 하는 소리냐?”  A기자가 찔리는지 되묻는다. 둘의 대화 내용은 후에 B기자가 나한테 말해줘서 알게 되였다. B기자는 저녁 일정을 우리와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A기자가 선배인데 저녁에 함께 움직이며 모시지는 못할 망정 태도라도 공손해야 한다.  드디여 사연 많은 서안행을 마치고 이제 항주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는 나이 드신 분이 한명만 나오셨다. 도심을 지나 한참 산길을 달리더니 산중턱에 덩실한 호텔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창문을 열면 눈앞이 산이고 공기는 더 이를데 없는데 유일한 약점은 산중턱이라 택시가 없다. 지금처럼 앱으로 부르는 시절도 아니고 저녁활동을 하려면 무지 불편하다. “수용소가 따로 없구만”  A기자가 호텔 입주수속을 마치고 내뱉은 첫마디다. 그렇다고 항주라는 곳에 와서 이 도시의 야경을 만나보지 않으면 그것 또한 큰 유감이다. 명색이 호텔이라 다 방법이 있었으니 드디여 택시를 대기시켜준다. 그렇게 해서 항주에서의 릴레이는 계속 이어졌고 C기자의 못마땅한 심상도 계속되였다. “저 선배는 취재를 전혀 하지 않고도 기사가 나온단 말이예요. 우린 그게 안 돼요.” 중국에 대해 잘 아니까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소설 쓰듯이 작성해도 본사에서 맡긴 임무는 충분히 완성한다는 얘기다. 결국 맨정신으로 열심히 기사를 쓴 사람이나 밤이면 밤마다 열심히 달린 사람이나 일은 일대로 원만하게 마무리됐다. 그 셋의 힘이 모여져 나중에 중국행 기사가 책으로 출판되였고 상까지 타게 되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중국조선어방송넷 
118    내가 딸애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이유 댓글:  조회:1207  추천:0  2020-09-07
내가 딸애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이유 곽미란        5년 전 나는 결연히 이삿짐을 쌌다. 20년 가까이 살았던 상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딸애는 태어나서부터 중국어 환경에 노출되었다. 아빠가 한족이었으니 말이다. 집에서의 대화는 모두 중국어로 진행되었다. 가사도우미도 한족이었으니 집에서고 밖에서고 딸애 귀에 들리는 건 중국어 뿐이었다. 자연 딸애의 제1언어는 중국어가 되고 말았다.   딸애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나는 별 고민없이 사립학교를 택했다. 글로벌 시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이중언어(중국어와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 사립학교에 보냈다. 6세부터 12세는 언어적 민감기로 이때 언어를 배우면 쉽게 습득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영어공부, 12세 이전에 끝내라” 이런 류의 영재교육에 관한 책을 나는 많이 봤다.   딸애가 우리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날 때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딸애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나의 부모님은 서투른 중국어로 딸애와 소통을 시작했다. 웃을 일이 아니다. 도시에 진출한 많은 조선족가정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딸애는 중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며 자랐다. 두 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딸애를 보며 뿌듯했지만 가슴 한 켠에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소용돌이쳤다. 나의 모어인 조선어로 딸애와 교감을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점점 내 마음 속에서 커다란 웅덩이로 자리잡았다. 이걸 채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조선족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갈증은 늘 해소되지 않았다. 조선족인구가 밀집된 연변이 아닌 흑룡강의 시골이다 보니 우리말 도서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속 영화에서 어쩌다가 조선말이 한 두 마디 나오면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처음 한국에 출장 왔을 때 간판에 씌어진 우리말을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모하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고 애틋한 기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편안함이다. 이런 감정은 연길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다른 도시와 달리 간판에 우리말로 크게 가게 이름이 씌어 있는 걸 보니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했다.   그토록 읽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자랑스러운 우리말인데 정작 상해에 살면서 우리말을 하는 경우는 한국 바이어나 부모형제, 조선족친구들을 만날 때 뿐이었다. 나는,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우리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말은 우리 세대에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언어가 사라지면 나의 정체성, 민족의 정체성은? 나는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결핍은 더 애틋한 사랑을 불러오는 법, 우리말에 대한 나의 애착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나는 우리말로 창작을 시작했다.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의 결핍은 채워지는 듯했으나 딸애와의 교감은 더욱 극명해졌다. 우리글에는 까막눈인 딸애가 내가 쓴 글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허전함을 넘어 비통한 심정이었다.   이런 고민은 나만 하는게 아니었다. 대도시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민족성이 잊혀질까 하는 두려움이었고 뿌리가 흔들리면 우리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불안감이었으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마음의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이런 간절함이 모여 상해에도 드디어 조선족주말학교가 설립되었다. 상해에 진출한 조선족들에겐 복음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딸애를 주말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단순히 주말학교의 교육에 의지하기에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내 욕심은 딸애가 우리말을 모어처럼 구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딸애가 열한 살이 될 때 한국행을 결심했다. 딸애가 소학교(5학년)를 졸업하던 해였다. 중국에서 배우던 영어는 한국에 와서도 계속 배울 수 있고 10년 배운 중국어는 그 동안에 해온 대량의 중문독서로 충분히 딸애에겐 하나의 모국어처럼 자리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위키백과에서는 ‘모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했다. 모어 또는 모국어란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습득하여 익힌 언어를 뜻한다.   또한 모어는 인간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는 그 사람의 세계관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어는 한 사람의 사고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자들은 미국인과 중국인의 사고관념을 이런 식으로 분석한 적 있다. 중국문자에는 과거를 나타내는 어미가 많아서 중국인은 소비보다는 저축을 좋아하는 과거집착형이고 영어에는 미래형의 단어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서양인, 특히 미국인은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미래지향적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기에 소비형 마인드로 가끔 사직을 하고 1,2년씩 세계일주를 하기도 한다.   우리말이나 중국어, 영어 또는 기타 상용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에 대해서 나는 구태여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한 가지 언어는 어떤 기타의 언어로도 그 정서를 100%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상 그 어느 언어로 우리말의 ‘도란도란’이나 ‘졸졸’이나 ‘삐쭁 삐죠롱’하는 의성의태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완전히 한국어 환경에 ‘던져지자’ 딸애가 우리말을 배우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 학교에 다닌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말문이 트였다. 물론 학교에서 내준 숙제 외에도 내가 붙들고 반복적으로 낭독을 시킨 ‘강압적 교육’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뜻을 이해못하는 낱말은 뜻의 글자인 중문으로 번역을 해서 알려주었다. 우리말로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며 딸애는 정서적으로 재빨리 우리말에 녹아 들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하나의 큰 우주가 열린다. 삶의 질이 향상되고 행복지수도 그만큼 올라간다. 하물며 그 언어가 우리말임에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감성’을 빼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우리말을 배워서 이중언어, 다중언어를 장악하는 것은 우리의 후대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우리에겐 한국과 조선이 이웃해 있으니 우리의 후대들이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톡톡히 한몫을 기여하지 않을까. 이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가능성임을 말하고 싶다.   물론 딸애에게 우리말을 배우게 한 건 순전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욕심이다. 딸애가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해서 우리말로 창작을 한다거나 통번역사가 되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목표는 애초에 없었다. 딸애가 나와 우리말로 막힘없이 소통할 때, 찰떡을 ‘찰떡’이라고 부르고 메주를 ‘메주’라고 부를 때, 우리말로 된 시를 읊고 타령을 부를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다양한 언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후대들, 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건 부모(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어떤 언어를 배우든 그 바탕에 우리말이 뿌리내리고 있으면 민족적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도시로 진출한 많은 조선족 지역사회에서 이미 우리말 교육을 지켜가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줄로 안다. 부디 포기하지 말기를, 이런 움직임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동북아신문    곽미란 백한 약력: (본명: 곽미란).   1976년생,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현회 소설분과 분과장.   작품집으로 에세이 “서른아홉 다시 봄”(2014)이 있음,   2018년부터 소설 다수 발표. 2019호미중국조선족문학상 등 수상 다수.  
117    교원절의 단상 댓글:  조회:1269  추천:0  2020-09-04
교원절의 단상 □ 류서연 그날은 9월 10일,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교원절이였다. 아침에 멀리 상해에서 사업하는 제자로부터 날아온 뜻밖의 선물을 받고 깜짝 놀라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선생님 아직 저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xx입니다. 할머니와 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던 저는 3년 내내 선생님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았지요. 그러면서도 명절에 선생님께 한번도 인사를 못 드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한결같이 저를 관심해주셨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의 저그마한 성의를 보내니 선생님께서 어서 빨리 건강을 찾고 옛날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기원합니다.” 편지를 읽는 내내 기어이 눈굽이 축축히 젖어오면서 마음이 먹먹해왔다. 졸업한 지 거의 20년이 되여오는데 자기 스승을 잊지 않고 문안을 전해온 제자의 정성과 따뜻한 마음에 이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고 세찬 감동이 밀려왔다. 제자에게서 날아온 편지와 위로금을 보면서 지난 내 생애를 돌아봤다. 30년을 교직에 몸 담아오면서 수많은 학생들과 어울려 기쁨과 괴로움과 슬픔과 눈물이 있는 생활을 온몸으로 경험하였다. 특히 스승의 날이 되여 학생들이 안겨주는 카네이션이나 빨간 장미를 받고 그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노래를 들을 때면 가슴 벅찬 설레임을 맛보게 된다. 한편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기도 했다. 진정 나자신이 참으로 존경받는 스승이라고 자부할 만큼 잘해왔느냐고? 학생들이 목청을 돋우어 불러주는 “별들이 조으는 깊은 밤에도/ 꺼질 줄 모르는 밝은 저 불빛…”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깊은 감동과 함께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여주마. 훌륭한 스승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고 열심히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되여주마.’ 라고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되뇌이군 하였다. 그런데 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선생은 많아도 참된  스승은 없다.”는 말에 내 마음은 몹시 무겁다. 교육계에 몸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신성한 책임감 앞에서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교원으로서 미래를 위한 성스러운 교단에 서서 사명감을 안고 열심히 지식을 가르치며 학생으로 하여금 옳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고 훌륭한 품성을 일깨워줌은 너무나 당연한 직분이고 의무이며 책임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직분과 성스러운 책임감이 야금야금 좀 먹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나도 과연 옳바른 교사였던가? 하늘을 향해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교원의 삶을 살아왔던가? 자기의 의무와 책임 만을 하려드는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는 아니였던가? 아이들에게 삶의 참된 가치관과 먼 후날의 꿈을 함께 심어주고 사랑의 얼을 심어준 스승으로 살아왔던가? 라고 반성해보면서 떨리는 가슴으로 반성과 겸허의 옷깃을 여민다. 그러노라니 새삼스레 스승의 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 나라에서 1985년 1월21일 6기 전국인대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에서 매년 9월 10일을 교사절로 정한 의미는 미래를 육성하는 모든 교원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닐가? 예로부터 교원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미덕이였다. 그래서 우리 말 속담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가? 그만큼 조국의 기둥으로 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육성하는 스승의 역할은 사뭇 크기에 교원이라면 사회의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응당하다는 것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그 스승의 날이 언제부터인가 차츰 학부모들이 선생님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날로 되여간다. 물론 아이를 가르치느라 수고하신다고 선물을 드릴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해야만 선생님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사는 형편이 달라서 한 학급에서 학부모들이 백프로로 선생님에게 선물을 드릴 수는 없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선생님에게 선물을 하지 않은 학생은 자연히 주눅이 들 것이고 티없이 순수한 우리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이다. 신성한 교사절이 선물을 주고 받는 명절로 되여간다니 현시대 교육의 현실에 은은히 가슴이 저려온다. 누구를 탓해야 하나? 자기 자식을 잘 부탁한다는 학부모의 그 절절한 마음, 아니면 선물로 학부모의 성의를 가늠하는 선생님들의 얄팍한 마음? 우리 교육의 페단에 심히 우려가 된다. 이러한 바르지 못한 현상이 언제면 사라질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아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시 한번 스승의 의미를 떠올린다. 문득 시인이며 수필가인 백진숙 선생님이 쓰신 수필 에서 본 구절이 떠오른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리치는 부모님에게서 배우나 더 큰 지혜와 깨달음은 스승과의 만남에서 이루어 진다.”고 너무 마음에 와닿는 지당한 말이다. 스승이라면 우리 학생들을 응당 일시동인해야 하고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해야 하며 부모님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값어치로 학생들을 가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스승이라면 우리 아이들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옹할 줄 알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참된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또 인생에서 좌절하고 실패했을 때 자신을 반성하고 긍정적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줄 아는 인간으로, 잘못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며 인생을 고민하고 항상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모든 일에서 쉽게 포기할 줄 모르는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으로, 또한 나누는 폭을 확대시키는 만큼 자기를 이기는 능력과 진리를 발견하는 지혜를 소유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훌륭한 교육자라면 퍼올려도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지식의 샘물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적셔주어야 하고 참된 인생의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 민족에게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스승의 날에 떠오르는 단상을 적으면서 교육자로서 스승의 참된 자세로 우리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가는 것은 사뭇 중요한 직책임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스승의 바른 자세로 자기의 직분을 참답게 리행하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교육자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삶의 옳바른 자세가 아닐가… 연변일보 
116    코로나19 팬더믹에서 돋보인 습근평 중국 국가주석의 리더십 댓글:  조회:1156  추천:0  2020-09-03
코로나19 팬더믹에서 돋보인 습근평 중국 국가주석의 리더십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력량은 위기에서 드러난다. 코로나19 팬더믹(세계적 대류행)이 계속되면서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력량에 따라 각 나라별로 경제와 방역의 성과가 달라지고 있다. 지도자가 국정 리더십을 잘 발휘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더믹 사회의 국정 성적은 경제와 방역 두 부문으로 나눠볼 수 있다. 코로나19 방역의 성과가 경제의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만큼 대체로 방역 성과와 경제 성과가 비례하고 있다.   최근 세계 주요 국가들의 2분기 경제 성적표가 공개된 결과, 중국 경제가 가장 호조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플러스 3.2%로 놀라운 회복세를 보여줬다. 이에 반해 미국은 -32.9%, 영국 -20.4%, 일본 -27.8%, 인도 -23.9% 등 대다수 국가들이 통계 발표 이래 최악을 기록했다. 비교적 선방한 한국조차도 -3.2%로 지난 2008년이후 최악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수출과 내수에서 모두 완전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지난 7월 수출은 전년 대비 10.4% 급증한 인민페 1조690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사상 최고를 기록한 지난해 12월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주요 경쟁국들이 코로나19 방역실패로 어려움을 겪는 사이 중국의 세계 시장 점유률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저비용 숙련 로동력과 효률적인 기반시설, 국가 주도의 은행 시스템 등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중미 갈등으로 일부 외국 기업들이 동남아 등 다른 국가들로 공급망을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항공편이 중단되고 물류흐름이 둔화된 상황이라 여의치 않게 된 것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19가 미국의 관세폭탄을 무력화시킨 셈이다.   내수 부문에서도 중국 경제의 회복세는 놀랍다. 요즘 무한을 포함한 중국의 모든 테마파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는 해외려행을 할 수 없게 된 중국인들이 국내 테마파크로 대거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내수경제 회복세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중국 국가통계국은 지난달 31일 8월 비제조업 구매관리지수(PMI)가 지난 7월의 54.2에서 55.2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PMI는 50이상은 확장, 이하는 위축 국면을 나타낸다.    코로나19 방역 부문에서도 중국의 성과는 괄목할 정도이다. 중국은 16일째 지역감염이 0일 정도로 코로나19 방역에 큰 성과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곧 코로나19에 대한 승리를 선언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확진자가 600만명을 돌파해 압도적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인도는 련일 7만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해 루적 확진자가 382만명으로 늘어났다. 러시아도 확진자가 100만명을 넘어섰고, 일본도 7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 모범국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한국조차도 최근 수도권 2차 대확산으로 확진자수가 2만명을 넘어섰다.   중국의 코로나19 방역 성공과 빠른 경제 회복은 세계 주요 언론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보도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과 코로나19라는 악재도 '세계의 공장' 중국의 약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일종의 전시상황이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자원을 효률적으로 동원하고, 군수와 병참부터 선무공작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판단과 결정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코로나19 방역 국제 련대를 무시하고, 체계적인 방역에 나서지 않아 대재앙을 자초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최악의 지도자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와중에 미중 갈등을 심화시켜 국제사회의 불안을 초래한 것도 그가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속한 '무한 봉쇄'를 통해 코로나19의 전국적 확산을 차단하고, 인민해방군 등 국가 자원을 총동원해 권역별 대응 체계를 구축한 습근평 주석의 판단과 결정이 올바른 선택이였음이 중국 경제의 신속한 회복과 방역 성공으로 립증된 셈이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의 말이 생각난다. "경쟁의 세계에는 두마디 말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   필자/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략력   한국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을 거쳐 영남매일신문 회장과 2018평창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력임했다.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현립대 초빙교수, 중국 외교부 초청 청화대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남양주시 국제협력 특별고문 등을 맡고 있다. 흑룡강신문 
115    아빠트가 격조 높아졌다 댓글:  조회:1267  추천:0  2020-09-01
아빠트가 격조 높아졌다 □ 김준환 아빠트가 참신해졌다.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 격조가 높아졌다. 우리 주변의 아빠트들이  유명 도시 못지 않은 아빠트 문화를 갖추어가고 있어 사뭇 눈에 띈다. 게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공원 같은 느낌마저 들어 정겨움까지 더하고 있다. 요즘 새롭게 건설되고 있는 아빠트단지들이 도심에서 좀 밀려나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싶은 아빠트는 과연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존중받는 아빠트가  속속 선보이면서 아빠트 인기도 뜨거워지고 있다. 명품 아빠트는 충분한 각종 편의 시설, 외부인의 불필요한 단지 출입을 차단하는 등 보안에서부터 관리 서비스까지 최고급 주택에 걸맞은 완벽한 생활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런 아빠트단지는 CCTV와 같은 보안 서비스 수준도 높고 철저하다.  어쩌면 이는 오늘날  우리의 아빠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생활과 품격있는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아빠트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는 촘촘히 들어선 건물 속에 묻히지 않고 잘 만들어진 공간의 반듯한 아빠트에서 살기를 원하며 도심 속의 주거와  상업시설이 혼합된 복잡한 환경이 아니라  섬세한 손길이 닿은 주거공간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 이로 하여 개발시대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보다 나은 아빠트를 만들기 위한  경쟁도 치렬해지고 있다.  지난 세기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받아들였을 때만 하여도 모두‘높게, 높게' 짓는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요즘은 높게 짓는 건 누구나 가능한 기술이 된 만큼 이제는  높이가 아니라 환경으로 개념이 바뀌여지고 있다. 그리하여 래일의 아름다운 생활을 위해 소소한 일상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하며 일에만 파묻혀 바삐 바삐 살려고 하지 않고 일에서나 휴식에서나 격이 있기를 기대하는 아빠트 실수요자들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한 문화적 정서가 있는 아빠트들이  다투어 쏟아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아빠트을 선택하는 첫째가는 기준이 가격과 크기였다면  지금은 아빠트단지 안의 록지환경이 아빠트의 품격을 좌우하는 징표로 변하였다.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쾌적함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낄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아빠트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아빠트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공을 드리고 있다.   주거 상품인  아빠트 가치를 높이기 위해 건설사들마다 새로운  주택시장 흐름과 소비자의 수요에 만족을 주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건설사들의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올해 연길시의 서부와 북부에서 분양되고 있는 아빠트를 보면 유명 건설사들이 시공을 맡아 자체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고 안깐 힘을 쏟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연길시 북부의 소주인상과 만성뜨락(万城院子)은  우리 주변 아빠트에서 보기 힘들었던 고급 주택과 별장주택을  내놓았다. 게다가 이러한 고급 단지들은 문화시설이 함께 들어서는 복합단지로 변화하고 있어 몇년 전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빠트의 격조를 높이고 있다. 아빠트건설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집을 잘 지어야 제값을 받을 수 있고 제대로 지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으며 정성을 들여 지으면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찾아 올 거라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답고 리상적인 아빠트가 우리의 삶을 얼마든지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시점이다. 연변일보 
114    코로나와 미니멀 라이프 댓글:  조회:1709  추천:0  2020-08-24
1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생활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게 되였고,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었다. 나 또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면서 라이프스타일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였다.   코로나 이전의 생활은 출근하는 날과 출근하지 않은 날로 나뉘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복 3시간의 출퇴근과 종일 바쁜 업무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일주일에 닷새를 다람쥐 채바퀴 돌듯 보내고 나면, 주말엔 꼼짝하기 싫어지고 집에서 퍼져 있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은 더더욱 없다. 이런 일상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회의가 들고 점점 불확실해지는 미래에 극도로 불안감을 안게 되였다. 사람은 대략 하루 동안 6만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 80%의 생각이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상황이 더욱더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부채질 하는 것 같았다.   재택근무를 하니 출퇴근 시간이 절약되여 살 것만 같았다. 또한 집중이 잘되여 업무처리 효률이 높아지니 개인 시간도 많아진다. 하지만 자률적인 자가마인드컨트롤도 필요로 한다. 고도의 자가컨트롤 능력이 결여되면 바로 일상이 흐트러진다. 장기간 규칙적인 출퇴근으로 만들어놓은 아침형 루틴들이 조금씩 무너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해질 무렵, 일본에 있는 절친한 친구로부터 “재택근무하고 있는데 미니멀 라이프 하지 않을래?”라는 제안을 받았다.   친구가 제안한 미니멀 라이프는 요컨대, 같은 목표를 가진 여러명이 메신저에서 그룹채팅방을 만들고 매일 3개의 물건을 버리되, 버리기 전에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것이였다. 처음에는 30일동안 첼린지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2   분명 이 세상에 올 때는 몸에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고 왔건만,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은 놀라울 만큼 많았다.   중3으로 진학하던 해, 소위 나에게 지배권이 있는 물건들을 넣은 미니 트렁크 하나와 책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던 것이 마치 엊그저께 같았는데 벌써 불혹의 나이가 되였다. 그후 대학 진학, 류학, 취업, 결혼 등 인생대소사를 거치면서 먹은 나이만큼이나 소유물들도 많아졌고, 그 많은 물건들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옮겨나르느라 진땀을 뺐다. 이사할 때마다 다시는 물건을 늘리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살다보면 살림살이 구색 맞추기에 연연했다. 한국생활 6년만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단출했던 미니 트렁크와 책가방의 수백배는 되는 듯 했다.   수십가지의 화장품에 둘러쌓여 매일매일 메이크업에만 한시간씩 시간을 쏟아붓던 시절이 있었고, 늘 입는 옷과 신발은 그 몇가지 뿐임에도 불구하고 옷장에는 옷과 신발들로 꽉 차있었다. 뿐만 아니라, 취미가 많아서 집은 자그마한 공방을 방불케 각 종 원재료들로 넘쳐났다.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평균 1만개의 물건을 소유하고 산다고 한다. 개인차가 심해서 이보다 수십배 내지 수백배의 물건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어느날,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이 대체 얼마인지 알고 싶어서 섹션을 나누어서 세여봤더니, 식기만 100여점이 넘고, 책장에 꽂힌 책은 700권이 넘었다. 숫자화해보니 어마어마한 량의 물건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을 더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실은 수납공간 속에 꽉 채워진 물건들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있노라면 물건에 압도되여 사유가 굳어져버리는 경험 또한 부지기수다. 자주 물건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거나, 가방속의 지저분한 물건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지는 경험도 여러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리유모를 압박감과 답답함이 명치를 누르는 것 같았고, 누군가의 목줄에 메여 자유를 박탈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증상들이 지속되면서 내 삶도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친구의 미니 멀라이프에 대한 권유는 처방 약과도 같았다.   하루에 3개만 버리는 규칙이였지만, 정리를 하다보니 대개 그보다 많이 버리게 된다. 시작한 첫날은 거실장의 서랍을 정리했는데, 주로 낡은 핸드폰과 충전기, 각종 케이블과 어댑터들이였다. 핸드폰을 새것으로 교체할 때면 낡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결정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갖고 있었다. 집에 쌓인 물건들은 대개 이처럼 류통기한이 지난 방치된 물건들이였다.   한바탕 비우고 텅 빈 서랍을 보고 있노라니,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3   원래는 1개월만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매일매일 정리를 하고 심플해지는 집안 환경을 보노라니 점점 정리정돈에 박차를 가하게 되였다. 비우기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초기에는 물건 버리기를 위한 버리기를 한적도 있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선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비우기를 실천한다. 바쁜 날은 건너뛰기도 하고 여유가 있는 날은 3개가 아니라 서른 개도 정리한 적이 있었다. 이렇듯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지 어언 6개월이 지났고, 우리 멤버 다섯은 여전히 서로 격려하면서 비움을 실천하고 있다.   처음 한달을 해보니 지저분했던 베란다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모든 수납장들이 점점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젠가 쓰겠거니 하고 갖고 있었던 물건들도 정작 버리고보니 후회하거나 아쉽지 않고 오히려 어떤 물건이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물건을 버릴 때는 새것도 있었고, 추억이라고 생각해서 버리지 못한 것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비싸게 주고 산 것이였기 때문에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사용하지도 않은 물건을 오랫동안 갖고 있어봤자, 에너지만 소비되고 집중력이 분산될 뿐이다. 버리고보니 훨씬 홀가분하고, 자신감도 생기고 좋은 아이디어들이 샘솟아 그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들이 많아졌다.   생각했던 것을 바로 행동에 옮겼더니 상상 이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 되고, 쓸데없는데 랑비했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에 전신이 마비되여 멍때리고 있었던 모습들도 온데간데 사라졌다.   이제 나의 하루 일과는 아침 청소와 정리로부터 시작된다.   4   현대사회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다. TV나 스마트폰, 신문이나 잡지 어디서든지 과소비를 하게끔 유도하고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부추기고 있다. 이런 노력에 부응하듯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 또한 필요하든 필요치 않든 일단 먼저 쟁여놓기부터 한다. 그렇게 쌓인 물건에 짓눌려 물건이 주인이 되고, 그들을 모시고 사느라 나는 늘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무언가 하려고 해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만석군은 만가지 걱정이 있고, 천석군은 천가지 걱정이 있노라.” 때문에 물건이라는 것은 갖고 있으면 물질적인 투자뿐만 아니라 정신적 투자도 들어가는 법이다.   쓰지도 않을 물건들을 비우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였다.   첫째는 중요한 것을 골라내는 능력이 생겼다. 분별력이 있게 되니, 비슷한 물건 중에서 나에게 보다 중요한 물건을 선별하는 능력이 생겼고, 내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되였다. 그 많은 취미들도 모두 정리하고 가장 좋아하는 것만 남겼다.   둘째는 물건과 인간관계를 동일시 하는 관념을 깨부수게 되였다.   십여년전,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그 아픔을 극복하는데 장장 10여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당시 유품을 정리하면서 병적으로 어머니의 물건에 집착했다. 심지어 빗에 남아있는 머리카락까지 비닐주머니에 담아 간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 혹은 주신 물건을 버리면 마치 어머니를 버리는 것만 같았고, 추억들이 살아질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에 집착하면서 정작 내가 망각했던 것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였다. 비움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였다. 그 깨달음 이후, 예쁜 사진 몇장만 남겨두고는 모두 버리게 되였다. 어머니에 대한 내 마음은 결코 물건을 갖고 있는다고 해서 더 깊어지거나 버린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영원히 내 마음속에 함께 살아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물을 받으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물을 준 사람이 서운해 할 것 같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나중에 점점 거추장스럽게 되자 급기야 그 물건을 선물한 사람까지 원망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제는 누가 무엇을 줘도 나한테 쓸모 없는 물건이라면 거절하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 받았다가 나눔을 하거나 버린다. 그리고 그 물건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가늠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물건은 그저 물건일 뿐, 인간관계가 물건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나마 깨달았다.   셋째는 과감하게 과거를 정리할 수 있게 되였다.   내가 물건을 버리지 못했던 리유는 바로 물건에 깃든 사연과 추억 때문이였다. 어릴 때부터 가족,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 수천장의 사진들, 어릴 때부터 썼던 일기장, 성적표, 입학통지서, 추억이 된다는 리유로 각종 증명서, 출입증카드, 멤버십 카드 등을 버리지 못하고 이사할 때마다 여기저기 갖고 다니느라 이사비용만 축냈다.   소시적 물건을 오래동안 갖고 있는다고 어릴 때 추억이 모두 령롱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특정 불쾌했던 사건과 련관이 있는 물건이라면 그 물건을 볼 때마다 불쾌함이 되살아나서 기분이 나쁘다. 적당히 잊어주는 것 또한 삶의 지혜다.   그동안 여기저기 이사하면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사진들과 편지들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면서 잠깐 훑어봤는데 이내 그만뒀다. 그다지 유쾌한 일들이 아니였다. 그리고 바로 정리에 들어갔다. 사진도 기념이 될만한 사진만 몇장 남기고 모두 버렸다.   5   인화득복(因祸得福)이라고 해야 할까 코로나로 인해 바뀐 생활패턴으로 갖게 된 자신에 대한 성찰이였다. 미니멀라이프를 통해 내 자신의 내면을 올바르게 들여다보면서 과거를 정리하고, 아팠던 상처도 치유하면서 한층 더 현재에 집중하게 되였다.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지도 않고 현실에 집중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생각들이 그저 내 자신을 통과하게끔 심플하게 생각하는 법도 배웠다.   아직은 미니멀라이프를 통해 “나 정말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했어요”하는 것은 없지만, 조금씩 실천을 통해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도 뚜렷해지는 것 같아서 매일매일 즐겁고 에너지 넘친다. 아직 비워야 할 것들이 더 많지만, 내 삶의 속도에 맞게 실천해보련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함께 동행하는 다섯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최해선 략력 :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일본 에히메대학 사회학 석사. 일본 칸세이가꾸인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수료. 현재 한국 모 IT회사 해외마케팅 팀장.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리사.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흑룡강신문
113    따뜻한 농촌□ 김준환 댓글:  조회:1508  추천:0  2020-08-20
농촌이 변하고 있다. 깨끗해지고 있고 아름다워지고 있고 희망이 담긴 이야기들이 늘어나고 있어 든든하고 따뜻한 고향으로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기대일 뿐이였던 콩크리트길이 집 문 앞까지 닦여지고 보기 좋은 울바자가 둘러지고 수세식 화장실이 집안에 들어오고 아담한 꽃밭이 꾸며져 농민들의 간절한 바람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농촌마을에서 촌민들이 함께 담소를 나누며 문화활동실에서 문구장에서 휴식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오래동안 우리 농촌이 농사일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비춰졌다면 지금의 농촌은 허리 펼 사이없이 분주하기만 한 그런 농촌이 아니다. 농촌생활이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고요한 시골마을에서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서로 친밀감을 쌓아가면서 메마른 일상의 권태를 떨쳐버리고 있다. 농촌이 단순히 농작물을 키워내는 공간을 넘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쉼의 공간으로 바뀌여지는 것을 우리 주변 농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농촌마을에서 농민들은 함께 모여서 자투리 땅에 꽃밭을 가꾸며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추 하나라도 더 따 보려던 앞마당에도 꽃이 심어지면서 농민들의 랑만적 전원 취미가 살아나고 농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우리의 농촌이 아름다운 향촌건설로 전반적인 사회의 노력과 힘이 모아지면서 농촌이 제대로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지난 몇년 동안 보아오고 있다. 사람들은 농촌마을이 살맛 나는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농촌문화가 다시 되살아나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활기가 넘치는 촌민들이 문화생활 공간에서 시골살이의 재미를 마음껏 맛보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어 마음이 흐뭇해진다. 농촌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농민들이 활약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농업, 농촌의 발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농촌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것으로 보아진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농민들이 문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기반시설이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농촌이 급속한 도시화로 인구가 감소한 데 이어 로년인구가 늘어나는 등 취약 계층이 증가하면서 어렵고 힘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농촌생활에 대하여 물어보면 아직도  농사일에 대한 두려움과  교육, 문화, 외로움 등 문제를 지적하며 꺼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농촌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행복하고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행복한 농촌을 만들어가는 데서 환경은 결정적인 역할을 놀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농촌 생활환경이 농민들이 시름없이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진정 바뀌여져야 한다. 농촌은 도시가 갖고 있지 못한 것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록색자원과 농촌만의 여유로움은 도시인들의 동경의 대상이다. 농촌은 청정한 자연과 공존하는 만큼 삶의 기반으로 더욱 잘 보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오랜 숙원사업인 빈곤해탈 공략전이 막마지에 들어서고 마을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지금 농촌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고향으로 변하고 있다. 연변일보 
112    노들강변과 로투구 그리고 내두산 댓글:  조회:2100  추천:0  2020-08-13
노들강변과 로투구 그리고 내두산 허성운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오늘날에 와서 노들강변은 한강변에만 있는 고유지명으로 세간에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과거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조선반도 전역에서 널리 불리여졌던 땅이름이다. 만주어사전에서 ‘nukte’는 소, 말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강변 목축지를 뜻하는데 노들이란 말과 일맥상통된다.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로 간이집을 짓고 목초지 사이로 강이 흐르는 방목지를 노돌 노들이라고 불러왔다. 두만강은 북방민족이 유목문화가 무르익어 흐르던 곳이며 방목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사책에서 로동(老佟), 로둔(老屯), 라둔(羅屯) 등으로 부락지명이 기록되여 있다. 연변 로투구 지명 설화에 늪등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늪등은 방목지라는 땅이름으로 기원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늪등의 소리를 바탕으로 로투구(露頭溝)로 지명을 바꾸어 표기된다. 일본어 ‘露頭’는 광맥이나 석탄층 등이 지표에 로출하고 있는 부분, 다시말하면 노다지 뜻을 지니고 있다. 로투구(露頭溝) 지명은 얼마 안가 다시 부근 산 정상에 로인 머리 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어 로투구(老頭溝)로 지명표기가 굳어진다. 늪등이라는 기존 지명은 결국 어린 뻐꾸기가 둥지 주인을 몰아내듯이 로투구라는 새로운 지명에 밀려났던 것이다. 17세기에 들어서서 무산, 회령 일대에 노토부락은 누르하치 후원을 받아가며 강한 세력으로 거듭난다. 로동(老佟), 로둔(老屯), 라둔(羅屯) 지명과 일맥상통한 땅이름 로덕(화룡 남평 대안) 지명과 내두산 지명도 이런 력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내두산(奶头山), 내도강(奶道河) 명칭은 사실 로둔(老屯)이란 지명이 은닉되여 표기된 땅이름이다. 지난날 내두산지역 농경문화의 기저(基底)에 유목과 수렵 문화가 짙게 깔려있었던 점도 이를 립증하고 있다. 로툰을 의미하는 로토의 앞 글자인 ‘老(노)’에 오랑캐를 이르는 ‘胡(호)’ 혹은 추장을 이르는 ‘酋(추)’를 더하여 ‘로호(老胡)’·‘로추(老酋)’로 기재한 경우도 여러차례 확인되였다. 두만강 강변 개산툰 노째굽이도 결국 노들굽이 음의 변이로서 아들골과 하나의 지명그물망에 놓여 있어 과거 이 지역에 드넓은 방목지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개산툰 자동의 원래 지명은 아들골이다. 만주어 ‘adun’은 목장의 가축떼를 말하는데 소재데기 굴레장대밑 등 이 지역 지명과 하나의 맥락으로 풀이된다. 연변의 허다한 지명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블랙홀 상태로 남아 내려왔다. 땅이름은 력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존 한자 틀에만 몰입하고 떠도는 민간설화를 억지로 짜맞추다 보니 고유지명을 반듯하게 옮겨오지 못하였으며 지명문화의 가치를 옳바르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너른 들판을 끼고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르던 강변목장 눈망울 선한 소들과 살 부비며 살아왔던 순박한 백성들이 모여 유목문화를 정착시키고 취락을 이루며 나루터가 생기고 서서히 나들목으로 탈바꿈하게 되였던 것이다.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국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번이라 지어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가노라 어찌 보면 노들강변은 산 설고 물 설은 땅을 떠도는 민초들의 한을 강물에 띄워 읊조린 노래일지도 모른다. 백년도 넘게 우리는 한자어 지명풀이에 말뚝을 박아놓고 매달려있다 보니 결국 외곡된 노들강변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아왔다. 진한 감동으로 다가와 마음속에 젖어드는 노래를 대를 이어 불러왔건만 노들 어원은 오늘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세월의 비바람 속에 이리저리 떠돌며 흘러다니고 있다. 연변일보 
111    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댓글:  조회:1531  추천:0  2020-08-11
체육강국 중국, 왜 축구만 약한가? □ 리병천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가? 정말로 팬들의 씁쓸한 우스개처럼 메시가 될 인물이 산골에서 밭을 갈고 있기 때문일가. 중국축구가 아직도 부진하고 있는 리유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본다.   ◆중국, ‘체육강국’으로 우뚝 서다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중국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와 세계 최강 미국을 꺾고 종합 1위를 달성하는 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올림픽 력대 종합순위를 살펴보면 각국의 국력과 세계 질서의 변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여있다. 1940년대 이전에 프랑스, 영국, 독일이 각각 한차례씩 종합 1위를 차지한 적이 있고 1948년 이후 대회부터는 미국과 쏘련이 종합 1위를 량분했으며 쏘련 붕괴 이후 1996년 이후는 미국이 종합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메달수가 국력을 직접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2008년 당시 중국은 금메달수에서 51대36으로 미국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종합 1위의 이 막강한 상징성은 중화민족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작동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차이로 종합 2위를 하면서부터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해 이미 세계의 강자가 됐음을 보여줬다. 비록 중국은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는 2, 3위를 기록, 종합 1위는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적 체육강국임은 증명됐다. 당대 스포츠에서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독주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고 있는 중국이다.   ◆왜 축구에서만 유독 두각을 드러내지 못할가? 지난 7월, 국제축구련맹이 발표한 세계축구 랭킹에서 중국은 세계 76위, 아세아 9위를 기록했다. 일본, 한국, 이란 등 전통 강호들은 물론 까타르, 이라크 등 나라들에도 밀리고 있다. 2022 까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에서 중국은 2승, 1무, 1패를 기록, 필리핀과 승점은 7점으로 같지만 꼴 득실에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유지, 수리아(4승, 승점 12점)와는 어느덧 승점 5점 차로 벌어지며 최종예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U-19팀은 26년 만에 아시아축구련맹 U-19 챔피언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근래 중국축구가 각 대회에서 보인 성적은 그야말로 암울, 그 자체이다. 올림픽 등 국제체육대회의 모든 종목에서 메달을 석권하고 있는 중국이지만 왜 유독 축구에서만 지금까지도 제자리 걸음, 아니 후퇴를 하고 있을가?   ◆‘한 자녀 정책’의 부작용 중국은 198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인구억제를 실시했다. 바로 ‘한 자녀 정책’이다. 축구가 조직력의 스포츠이기 때문에 개인 기량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탁구나 체조 등에서 중국이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11명이 하나로 묶여 움직여야 하기에 누구 한명의 기량으로 승부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또 80년대 이후 출생한 자녀들에 대해 부모들은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프로선수가 돼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축구에 대한 인식하에 부모들이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축구를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또 한 자녀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지게 됐고 축구와 같이 조직력을 요소로 하는 종목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   ◆젊은 선수들의 프로의식 부재 중국 프로축구리그는 자금적인 면으로만 볼 때 세계 5대 리그중 하나라고까지 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거액의 투입을 해오며 외국인 용병들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그 지명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토종 선수들의 실력은 리그 수준과는 왼전히 동떨어져 있다. 젊은 선수들이 외국 리그에 대한 도전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에 안주한 것 역시 높은 년봉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험한 길을 가지 않아도 엄청난 년봉이 보장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축구의 자국내 인기와 대우는 좋아졌지만 자국 선수들의 성장에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 최근 몇년간 무수한 자국 유망주들을 유럽무대로 진출시켜 급격한 기량 향상을 일궈낸 것과 달리, 중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은 무뢰(에스파뇰)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고 성공 사례도 부족하다. 과거 사우디아라비아나 까타르 같은 부유한 중동팀들이 겪었던 문제처럼 현재의 중국 프로 선수들은 높은 몸값과 스타대우를 받고 있는 자국리그에서의 성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 선수들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도 팀플레이와 높은 전술 리해도를 요구하는 현대축구의 기준과 맞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중국축구가 아시아에서조차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문제점들을 감지한 중국축구협회는 최근 거품 빼기에 나섰다. 슈퍼리그에 년봉 상한제를 도입해 국내선수 년봉 상한을 1200만원으로 규정했다.   ◆공격형 용병들 국내선수 발전 공간 점령 근래 중국 프로축구에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몰려들면서 국내 공격수들이 설자리가 없게 됐다. 이는 그대로 축구 유망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슈퍼리그, 갑급리그 각 팀들을 살펴보면 공격수들은 전부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쓰고 있다. 국가팀 역시 전방에 엘커손 등을 귀화시켰다. 때문에 젊은 유망주들도 공격수보다는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기 위해 훈련한다. 엄청난 재부를 상징하는 프로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공격수보다는 수비수가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들이 국내에서 공격수로서는 프로 무대의 경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헐크, 자하비 등 세계급 용병들보다 잘할 수 없다면 그냥 미드필더나 수비수가 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이 계속 중국으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중국축구의 공격수 부재는 앞으로도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쩜 메시와 같이 천성적 공격수 자질을 갖춘 국내 유망주가 이미 헐크와 자하비 등 세계급 공격수들 때문에 수비수가 돼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체계적으로 축구팀 만들기 위한 인내심 결핍 세계의 그 어느 프로리그든 경쟁은 치렬하다. 하지만 중국리그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하다. 국내 구단들은 감독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없다. 대기업이 축구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인내심이 극히 부족하고 성적에 따라 감독을 갈아치우는 게 전통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들이 전술실험을 할 수도 없고 새로운 선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없다. 이름값 비싼 용병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놓고 그들의 능력을 믿으면서 나머지 선수들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것 뿐이다. 때문에 국가팀에서도 자유롭게 실험하고 도전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가 공인하는 스포츠 강국이다. 인구 14억의 거대한 인적자원을 배경으로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초강세를 보여왔다. 때문에 왜 축구에서 만큼은 ‘중국산’이 전혀 통하지 않는지, 중국축구협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중국축구는 언젠가는 국력처럼 세계적 최강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너무도 많아 보인다. 연변일보 
110    일사일언ㅣ민족력사와 우리 댓글:  조회:1621  추천:0  2020-08-10
  먼저 페교된 조선족학교들의 기본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무순시와 각 현의 민족교연부, 학교, 조선족교원들에게 문의하고 조사를 하였다. 1995년 전만 해도 무순시에는 8개의 중학교, 44개의 소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3개 중학교(중학부)와 4개 소학교(소학부) 뿐이다. 소실된 40여개의 학교들은 당안(档案)도 없는 데다 많은 당사자들이 외지로 이주해 학교의 기본상황조차 알기 어려운 실정이였다. 조선족학교들에 대한 기본서류 작성이나 보관이 거의 없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부분 로교원들을 찾아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수집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록이 없으면 력사가 없고 력사가 없다면 계승과 발전을 운운할 수 없다.   레닌은 일찍 “력사를 잊는 것은 배반이다”고 하였으며 주은래는 “력사는 한개 국가, 한개 민족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기억과 같다. 사람이 기억을 상실하면 백치가 되는 것처럼 한개 민족이 력사를 잊는다면 우매한 민족으로 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력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는 민족이다”고 한탄했다.
109    관용의 기적 댓글:  조회:1475  추천:0  2020-08-06
관용의 기적 초야 실 생활속에 존재하겠는지는 의심스러우나 꼭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날 사건의 목격자는 식당에 식사하러 갔었다. 그날 식당에는 목격자 외에 로인 한분과 젊은이 이렇게 세사람밖에 없었다. 목격자는 창문가에 앉아 한가하게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우연하게 맞은켠 로인과 이웃하고 앉아있는 젊은이의 주의력이 로인에게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젊은이의 곁눈길이 시종 로인의 밥상우에 올려놓은 핸드폰에 가있었기때문이였다.    과연, 목격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로인이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담배를 피워무는 순간 젊은이가 재빨리 핸드폰을 가로챘던 것이다. 로인은 자신의 핸드폰이 보이지 않자 짚히는데가 있었으나 내색을 내지 않았다.    젊은이가 떠나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인은 젊은이게 말을 걸었다.    "젊은이, 잠간 기다리게."    놀란 젊은이가 무슨 일 있느냐고 되물었다.    "아, 어제가 내 일흔살 생일이였는데 딸내미가 핸드폰을 선물했네. 나는 핸드폰을 좋아하지 않지만 딸내미의 효심이라 받았었네. 헌데 방금 이 밥상우에 올려놓았는데 조심하지 않아 땅바닥에 떨어졌네. 나는 로안이 심하고 또 나이가 많아 허리 굽히기가 어려우니 주어주면 고맙겠네."    로인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긴장한 기색을 사라졌다. 젊은이는 허리를 굽히고 로인의 밥상밑을 한바퀴 돌고는 핸드폰을 로인에게 건네주었다. 로인은 젊은이의 손을 굳게 잡고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상기 이야기가 실화임을 믿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로인이 보여준 지혜와 관용이 극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인은 없어진 핸드폰을 되찾는데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렸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인은 그 방법은 사라진 핸드폰을 쉽게 되찾는 동시에 핸드폰보다 백배, 천배 값진 관용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속 젊은이는 행운을 만났었다. 그 행운은 아주 지혜롭고 관용을 가진 로인을 만난 것이다. 법률에 견주어 볼 때 관용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산물이다. 로인은 자신의 관용으로 젊은이로부터 오는 상처를 피면한 동시에 젊은이의 잘못을 용서하고 젊은이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날, 젊은이는 새롭게 태여났으리라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료녕신문 
108    “나무가 아닌 숲을 보자”□ 김준환 댓글:  조회:1831  추천:0  2020-08-05
“나무가 아닌 숲을 보자” □ 김준환 아빠트 견본주택이 갈수록 예뻐지고  멋져지고  있다. 하지만 아빠트 견본주택을 두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면서 견본주택의 꽃단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많아지고 있다. 최근  신규 분양 아빠트 견본주택을 찾는 주택구매자들의 발길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인기 단지 견본주택에는 평일에도 주택구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몰린다. 하지만 견본주택을 제대로 보는 법을 모르는  수요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견본주택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화려한 인테리어 같은 겉모습만 보고 아빠트를 샀다가는 랑패를 볼 수도 있다. 방문객들은  견본주택을 꼼꼼히 둘러보면서도 정작 아빠트 단지의 많은 조건들은 자세히 따지지 않고 있다.  견본주택에서 보여지는 아빠트 단지와 실제 완공되여 공급되는 아빠트 단지는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단지 주변의 교통여건 , 학교나 편의시설 같은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있는지를 확실히 따져 보면서 견본주택에서 알리는 정보가 실제와 얼마나 일치한지 하나하나 점검해 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빠트 단지의 전체 모습과 특성을 잘 파악해두려면 견본주택에 설치된 모형도와 조감도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모형도를 보면 단지 주변의 학교나 교통 현황, 동 배치와 동 사이 거리, 출입구 위치, 도로 위치 같은 전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건설사들이 견본주택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해 수요자들의 이목을 더 끌려고 하고 있고 아빠트단지가 갖고 있는 단점을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기에 입주자들은  해당 아빠트가 어떤 점이 특화된 것인지, 전체 단지 구성의 장단점은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잘된 견본주택을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많은 견본주택들은 실내를 넓게 보이게 하기 위해 거실과 방, 주방을 확장한 상태로 보여주거나 가구배치에서도 실제 가구보다 작은 규격의 가구를 배치하여 공간을 크게 보이게 하려는 편향도 있다. 견본주택이 실제 아빠트와 100% 같다고 믿으면 안된다. 견본주택은 완성도가 높은 디자인을 적용하여 화려하게 치장하는 경우가 많기에 계약자들이 살림살이와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 때문에 주택구매자라면 아빠트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요건인 안정성, 쾌적성, 편리함과 아늑함 등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를 잘 따져야 한다. 최근 들어 아빠트 공급물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건설사들이 수요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차별화된 설계와 부대시설 등을 잇달아 도입하면서 아빠트 견본주택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다.  주택단지의 인상을 바꾸어 놓을만큼 잘 꾸며진 견본주택은 아빠트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입주해 보면 록지환경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는 등 비량심적인 행태가 끊이지 않는 개탄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아빠트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복잡한 주택시장에서 내집을 장만하려는 수요자들이라면 눈여겨 보아온 단지가 자신의 생활 수준을 높여줄 수 있는 교통, 교육, 환경 등 인기 주거지의‘3박자’가 모두 잘 갖춰져있는지 꼼꼼히 따져야 한다. 보다 섬세하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제대로 챙겨봐야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수 있게 된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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