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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딸애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이유
곽미란
5년 전 나는 결연히 이삿짐을 쌌다. 20년 가까이 살았던 상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딸애는 태어나서부터 중국어 환경에 노출되었다. 아빠가 한족이었으니 말이다. 집에서의 대화는 모두 중국어로 진행되었다. 가사도우미도 한족이었으니 집에서고 밖에서고 딸애 귀에 들리는 건 중국어 뿐이었다. 자연 딸애의 제1언어는 중국어가 되고 말았다.
딸애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나는 별 고민없이 사립학교를 택했다. 글로벌 시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이중언어(중국어와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 사립학교에 보냈다. 6세부터 12세는 언어적 민감기로 이때 언어를 배우면 쉽게 습득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영어공부, 12세 이전에 끝내라” 이런 류의 영재교육에 관한 책을 나는 많이 봤다.
딸애가 우리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날 때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딸애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자 나의 부모님은 서투른 중국어로 딸애와 소통을 시작했다. 웃을 일이 아니다. 도시에 진출한 많은 조선족가정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렇게 딸애는 중국어와 영어를 구사하며 자랐다. 두 가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딸애를 보며 뿌듯했지만 가슴 한 켠에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이 소용돌이쳤다. 나의 모어인 조선어로 딸애와 교감을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은 점점 내 마음 속에서 커다란 웅덩이로 자리잡았다. 이걸 채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조선족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갈증은 늘 해소되지 않았다. 조선족인구가 밀집된 연변이 아닌 흑룡강의 시골이다 보니 우리말 도서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텔레비전 속 영화에서 어쩌다가 조선말이 한 두 마디 나오면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처음 한국에 출장 왔을 때 간판에 씌어진 우리말을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모하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고 애틋한 기분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편안함이다. 이런 감정은 연길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다른 도시와 달리 간판에 우리말로 크게 가게 이름이 씌어 있는 걸 보니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했다.
그토록 읽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자랑스러운 우리말인데 정작 상해에 살면서 우리말을 하는 경우는 한국 바이어나 부모형제, 조선족친구들을 만날 때 뿐이었다. 나는,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우리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말은 우리 세대에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언어가 사라지면 나의 정체성, 민족의 정체성은? 나는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결핍은 더 애틋한 사랑을 불러오는 법, 우리말에 대한 나의 애착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나는 우리말로 창작을 시작했다.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의 결핍은 채워지는 듯했으나 딸애와의 교감은 더욱 극명해졌다. 우리글에는 까막눈인 딸애가 내가 쓴 글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허전함을 넘어 비통한 심정이었다.
이런 고민은 나만 하는게 아니었다. 대도시에서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민족성이 잊혀질까 하는 두려움이었고 뿌리가 흔들리면 우리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불안감이었으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마음의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이런 간절함이 모여 상해에도 드디어 조선족주말학교가 설립되었다. 상해에 진출한 조선족들에겐 복음 같은 소식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딸애를 주말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단순히 주말학교의 교육에 의지하기에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내 욕심은 딸애가 우리말을 모어처럼 구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딸애가 열한 살이 될 때 한국행을 결심했다. 딸애가 소학교(5학년)를 졸업하던 해였다. 중국에서 배우던 영어는 한국에 와서도 계속 배울 수 있고 10년 배운 중국어는 그 동안에 해온 대량의 중문독서로 충분히 딸애에겐 하나의 모국어처럼 자리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위키백과에서는 ‘모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했다. 모어 또는 모국어란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습득하여 익힌 언어를 뜻한다.
또한 모어는 인간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는 그 사람의 세계관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어는 한 사람의 사고방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학자들은 미국인과 중국인의 사고관념을 이런 식으로 분석한 적 있다. 중국문자에는 과거를 나타내는 어미가 많아서 중국인은 소비보다는 저축을 좋아하는 과거집착형이고 영어에는 미래형의 단어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서양인, 특히 미국인은 과거에 집착하는 대신 미래지향적이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기에 소비형 마인드로 가끔 사직을 하고 1,2년씩 세계일주를 하기도 한다.
우리말이나 중국어, 영어 또는 기타 상용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에 대해서 나는 구태여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한 가지 언어는 어떤 기타의 언어로도 그 정서를 100%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상 그 어느 언어로 우리말의 ‘도란도란’이나 ‘졸졸’이나 ‘삐쭁 삐죠롱’하는 의성의태어를 완벽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완전히 한국어 환경에 ‘던져지자’ 딸애가 우리말을 배우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 학교에 다닌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말문이 트였다. 물론 학교에서 내준 숙제 외에도 내가 붙들고 반복적으로 낭독을 시킨 ‘강압적 교육’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뜻을 이해못하는 낱말은 뜻의 글자인 중문으로 번역을 해서 알려주었다. 우리말로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며 딸애는 정서적으로 재빨리 우리말에 녹아 들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 하나의 큰 우주가 열린다. 삶의 질이 향상되고 행복지수도 그만큼 올라간다. 하물며 그 언어가 우리말임에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감성’을 빼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우리말을 배워서 이중언어, 다중언어를 장악하는 것은 우리의 후대들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우리에겐 한국과 조선이 이웃해 있으니 우리의 후대들이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톡톡히 한몫을 기여하지 않을까. 이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가능성임을 말하고 싶다.
물론 딸애에게 우리말을 배우게 한 건 순전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욕심이다. 딸애가 우리말을 완벽하게 구사해서 우리말로 창작을 한다거나 통번역사가 되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목표는 애초에 없었다. 딸애가 나와 우리말로 막힘없이 소통할 때, 찰떡을 ‘찰떡’이라고 부르고 메주를 ‘메주’라고 부를 때, 우리말로 된 시를 읊고 타령을 부를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다양한 언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후대들, 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건 부모(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어떤 언어를 배우든 그 바탕에 우리말이 뿌리내리고 있으면 민족적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도시로 진출한 많은 조선족 지역사회에서 이미 우리말 교육을 지켜가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줄로 안다. 부디 포기하지 말기를, 이런 움직임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동북아신문
곽미란
백한 약력: (본명: 곽미란).
1976년생,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현회 소설분과 분과장.
작품집으로 에세이 “서른아홉 다시 봄”(2014)이 있음,
2018년부터 소설 다수 발표. 2019호미중국조선족문학상 등 수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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